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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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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푸코에 대한 맑스주의적 경험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http://www.euronomade.info/?p=4146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성철
  • 설명 : 이 글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2014년 12월 18일-19일, 프랑스 낭테르(Nanterre)에서 개최된 콜로키움 Colloque Marx-Foucault에서 발표한 글이다. 원래의 발표문은 이탈리어로 쓰여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었고 위의 원문 링크에서 세 가지 버전의 글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글의 다른 영어 버전은 맑스와 푸꼬에 관한 네그리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 Marx and Foucualt (Polity Press, 2017)에 실려있다.(Ch.16 ‘Marx after Foucault: The Subject Refound’)

1.

여기서 네그리는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con e dopo Foucault)에 맑스를 읽은 경험을 제시한다. 이는 물론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에 맑스를 읽는 것은 푸꼬 이전에 맑스를 읽는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역사적 주체화’의 과정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읽음으로써 새롭게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읽었나? [* 이 대목은 네그리의 것이 아니고 추정·보완해 넣은 것] 노동자계급을 고정적인 것(객관적인 것, 가변자본)으로 보고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자본(불변자본/고정자본)과 객관적인 자본의 논리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경우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일정한 한도(임금투쟁)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움직인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존재의 창출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삶형태의 변형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익의 분배를 놓고 다투는 문제가 된다.)

  A) 역사적 주체화

푸꼬의 직관과 결론의 토대 위에서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의 고도로 역사화된 어조와 문체가 유물론적 접근법과 깔끔하게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맑스의 역사적 저작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읽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의 개념들을 현재에 열어놓음으로써 그 개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계보학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푸꼬의 접근법은 계급투쟁의 주체화가 역사적 과정의 동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강조하게 해주었다. 이 주체화의 분석은 항상 갱신되고 역사적 과정에서 개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형의 규정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이나 목적론에서 벗어나서 푸꼬가 제안하는 틀을 택하면, 역사적 주체화는 인과론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지만 규정력을 가진 장치로 간주된다. 마끼아벨리의 경우처럼 우리를 위한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맑스 내부에도 이런 고정성을 허물고 계급의 주체화를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다.

①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

『자본』에서 맑스는 절대적 잉여 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을 노동일 축소를 향한 노동계급 투쟁과 관련짓는다. 이처럼 맑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적 차원, 계급의 특수한 주체화는, 노동자의 주체성의 변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생산 구조의 존재론적 변형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요컨대, 투쟁이 존재론적 변형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②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

맑스가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에 대해 분석할 때 이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가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 이행의 서술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가능한 다양한 형태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역사적 변형 속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그는 착취의 범주들의 항상적인 재편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틀에서 우리는 가령 노동계급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뉴팩처’에서 ‘대규모 산업’으로 이행하고 이제 산업 자본주의와 다소 사회화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노동계급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공고화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중’ 개념이 ‘산 노동’의 현재의 규정을 ‘인지적’ 의미에서, 즉 특이하고 다수적이며 협동적인 것으로서 적실하게 서술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계급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계급투쟁

푸꼬의 관점에서 읽으면 맑스의 자본 개념은 푸꼬가 ‘힘들의 관계’(un rapporto di forza, a relation of forces)의 산물(prodotto)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작용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정의한 ‘potere’(power) 개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 주체화의 새로운 특징들―생산적이고 특이화된 인지적 힘들로서 저항적이며/이거나 능동적임―이 계급투쟁을 다시 자본주의적 발전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의 중심에 놓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종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목적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자. 오직 이 비유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으로서 계급투쟁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C)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

‘자기의 테크놀로지’(tecnologie di sé)라는 푸꼬의 관점에서 보면, 산 노동은 고정자본(capitale fisso)의 일정 몫을 전유할 때 그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단지 종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자본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며 그리하여 산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을 구성하면서 대응한다. 이 형상들은 고정자본의 일부를 전유하여 더 우월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인지노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초과’(eccedenza, excess)가 이 수준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따리의 신체성과 주체성의 기계적(macchinica, machinic) 변형이라는 통찰이 중요하다. 때로 들뢰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주체화의 적대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는 푸꼬의 직관적 통찰들을 강조함으로서 회복될 수 있다. 이 점점 더 핵심적이 되는 기계적 요소는 적대하는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에 속한다. 맑스적 담론의 이러한 발전은 푸꼬 이후에 가능하다. 푸꼬 이후에는 존재론적 차원이 계급관계의 배경이 아니라 생산적 기계이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적 헤게모니는 노동이 인지기계로 전환된 데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변형에서, 새로운 기술적 활력에서 나온다. 푸꼬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비록 고전 고대 시기와 연관되어 있지만, 새로운 인간학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주의나 정체성의 흔적이 없고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간(l’uomo dopo la “morte dell’uomo)을 그려보는 인간학이다. 푸꼬의 작업은 자본의 시초 축적과 함께 시작된 ‘인간들의 축적’(accumulazione degli uomini)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 노동의 기술적 구성에서는 생산적 신체들과 삶의 양태들(modi di vita)의 변형에 대해 생각하고 이 양태들이 생산수단이 된다는 점을 확연히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D) 코뮤니즘

푸꼬의 주체화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민주적 주체화를 합치시키는 과정(il processo che compone la produzione del comune e la soggettivazione democratica)에 다름 아니다. 즉 다중의 특이화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적 존재론은 공통적인 것의 개념을 회복한다.

 

2.

한 걸음 물러나 덜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으로 되돌아가보자. 우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자. 이 차이는 나중에 공통의 관점 속에 재배치될 것이다.

① 맑스의 경우 명령의 통일성이 주권적 권력의 형상에 담겨 있고, 통치(il goverbo)는 자본의 의지 안에 통일되어 있다. 반면에 푸꼬에게 권력의 통일성은 희석되어 있다. ‘통치성’(governamentalità)은 서로 다르고 분산된 권력들(potere)의 생산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이다.

② 맑스에게 사회적인 것의 (국가화는 아닐지라도) 자본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푸꼬에게 삶권력(il biopotere)은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그 확산이 다양한 발아에 의해 일어나고 권력의 구체적 형태들은 특이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사회화’이다.

③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조직된다. 이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 푸꼬에게서는 해방의 정치적 체제가 주체화에서 조직되고 자유로서 특이화된다. 그리고 생산에서 공통의 행복을 구축할 제한 없는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이 차이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① 맑스에게서 보이는 국가와 명령에 대한 유기적 관점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사회계급들의 역사적 분석에 의해 희석된다. 특히 정치경제 비판의 수준에서 이 유기적 관점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에서 상품의 사회적 유통의 분석으로 나아가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여기서 맑스는 (재)생산과정을 가치창출과정으로 재연결시킨 후 다시 임금의 분석으로 내려가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계급들과 그 삶의 양태들의 서술로 내려간다. 그에 따라 권력 메커니즘의 다양화와 확산이 광범한 공간을 설계하며 (이때 사회는 공장이 된다) 권력의 과정들이 증식하고 다양한 차이로 갈라지며 이 차이들 위에서 그 과정들은 말 그대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② 맑스는 시초 축적(accumulazione originaria)을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통치화’ 혹은 ‘국가의 사회화’로서도 제시한다.[↔ 자본화, 사회의 국가화] 로베르토 니그로(Roberto Nigro)는 포섭에 관해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혹은 삐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는 이러한 사회의 변형[즉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변형]에 대한 분석 속에서 항상 ‘생산된 주체’의 ‘생산하는 주체’로의 변형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이 변화는 푸코에게서 주체화라는 문제틀의 핵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③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푸꼬의 주체화이론에서의 존재론적 전복 사이의 차이와 관련해서는 『그룬트리세』의 코뮤니즘, 일반지성 및 사회적 개인에 대한 대목들을 가지고 양자의 유사성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유사성은 1978년 이후의 푸꼬의 강의들에서 더 분명해지며 필시 주위 사람들과의 토론의 결과요 E. P. 톰슨 같은 역사가들을 인정한 덕분일 것이다.

이 유사성들은 두 저자를 근대의 몇몇 주된 문제들(국가, 사회, 주체)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지만, 또한 둘을 새로운 존재론의 발전이라는 노선보다는 근대의 황혼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저자의 차이와 유사성을 강조할 때 1977-78년과 1978-79년 강의의 삶정치적(biopolitical) 전회에 도달하기까지의 푸꼬의 작업이 준거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캡처한 그림참조] 여기서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은 혼란스러운 채로 남아있고 개념들은 모호하게 취급된다. 맑스에게는 첫째와 둘째 사례에서 모든 담론적 강조가 특이화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추상’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반면 푸꼬는 그 반대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1977-78년 이후의 그의 강의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1984년 이후에 가능해졌듯이 그의 저작들과 강의들을 철학자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투사의 것으로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통치성, 삶정치, 주체에 대한 맑스와 푸꼬의 사상 사이의 피상적 합류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는 둘 모두 현재의 존재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푸꼬는 정치학과 윤리학의 절합에 있어서 진전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이 작업은 개인화 및 데까르트식 주체로의 회귀에 반대하며 주체의 집단적 구성 및 이것의 역사적 과정에의 함입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Noi, We)의 발굴(scavo, excavation)―나/우리 관계의 발굴―로서 제시되는, 생성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성(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제시되는, 주체의 ‘폐위’(destituzione, dethroning)로서 드러난다. ‘우리’는 다중이며 ‘나’(Io)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돌봄’(la cura di sé, ‘care of the self’)은 개인적인 실천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주디트 레벨의 말을 빌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형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권력에 대한 개인적 반응은 더더욱 아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의 ‘자기’(self)는 데까르트의 ‘나’가 아니다. 그렇기에 푸꼬가 그 탄생을 1978년에[『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서술한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에 의해 창출된 개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정의한 특이성이다.

윤리학은 존재와 함(fare, doing)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주체화 과정 내에서의 탈중심화는 이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견유주의가 승리하고 파레시아가 단순히 (진실을 말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지형(terreno di verita)으로서 상세히 개진된다. 그러나 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권력-저항이라는 짝(양자 사이는 비대칭적이다)만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의 존재론적 성격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한다. 이는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intransitività della libertà, the intransitivity of freedom)에 의해 드러난다. 이 요소는 권력관계에 종속될 때조차도 무조건적이다. 산 노동이 자본과의 관계 내에서 자동사적인 활력이듯이 말이다.((정리자주—‘자동사적 성격’이라고 번역한 ‘intransitività(이)/intransitivity(영)’에 대해 사실 푸꼬 자신이 사용한 표현은 영어로 intransigence 즉 ‘비타협적 성격’이다. 이는 그가 영어로 쓴 글인 ‘The Subject and Power’에 등장한다. 여기서 푸꼬는 권력(관계)과 지배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관계로서의 권력이란 타인의 행위에, 그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고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영향을 가하려는 행위인 한에서 권력의 행사는 원리상 자유로운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권력의 행사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 하는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력의 행사의 전제 조건인바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권력에 앞선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의 핵심에는 […] 의지의 반항(the recalcitrance of the will)과 자유의 비타협성(the intransigence of freedom)이 있다.” 한편 이 글이 후에 그의 글 모음집인 Dits et Ecrits 에 불어로 번역되어 실리면서 intransigence가 intransitivité로 옮겨졌고 종종 푸코의 자유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게 된 듯하다.))

진리는 새로운 존재를 산출하는 시적/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성된다. 가령 해방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 실천을 펼쳐낸다. 진리를 창조하는 자유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진리에의 욕망이라는 물음이 던져지자 푸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힘을 장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의 전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의 발전은 권력의 문법(그리고 실천)의 계속적인 재정식화를 낳는다. 고고학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계보학이 내일과 현재 사이의 가능한 차이를 실험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현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un’ontologia critica di noi stessi)―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의 범주들을 위기에 부칠 가능성을, 더 정확히는 그 필요성을 갖게 된다.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산 노동’의 새로운 질과 그 생산적 능력의 새로운 차원들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원들의 소진과 <나>와 <우리>의 관계, 즉 <우리>의 노동/활동 속에서의 <나>의 산출에 의해 결정되는 바의 ‘공통적인’ 지형의 출현이다.

역사, 윤리 그리고 정치적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열린 존재론의 장치(dispositif), 존재를 생산하는 장치이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마지막 결과들이 혁명적 좌파 내에서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 푸꼬가 발전시킨 입장을 [지금] 상기하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하다. 싸르트르와 대조적으로 푸꼬에게는 주체의 자유와 사실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존재론적 맥락의 필연적 결정과 그 열림, 즉 윤리적인 존재 및 함의 자유(freedom of ethical being and doing)가 존재한다.

 

4.

하이데거 이후로, 즉 탈근대에 존재론은 더 이상 주체의 토대(fondamento)를 이루는 장소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실천적·협동적 배치(agencement), 프락시스의 직물이다. 요컨대, 칸트 이래 확립된 초월적(transcendentale) 철학의 연속성을 가로막은 현재적 존재의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은 말 그대로 근대의 존재론과 그 데까르트적 뿌리(주체의 중심성)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삶의 양태’라는 새로운 물질성 위에 자리를 잡는다. 현실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던 인식론적 막(schermo, screen)은 여기서 분쇄된다. 하이데거의 작업은 이러한 지형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또한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적 노동이 그것의 생산물[즉 삶의 양태 혹은 인간]과 충돌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지형에서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인간에의 위협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기계들 및 테크놀로지 장치들에서 비로소 오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위협은 이미 인간을 그 본질에서 갉아먹고 있다. 몰아세움/닦달(Gestell)의 지배는 인간이 어떤 더 근원적인 탈은폐에로 귀의하여 더 원초적 진리의 부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위협해오고 있다.”[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생산적이지 않으며 테크놀로지는 생산을 비인간적 운명 속에 익사시키고 새로운 존재론의 발생에 왜곡의 징표를 남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황무지를 되돌려준다. 바로 여기서 주체의 유령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그 유령들이 다시 등장한다. 니체와 푸꼬는 이와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취하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발굴한다. 과거의 파편들, 현재의 밀도, 장차 올 것의 모험을 그 물질적 실재와 열린 시간성 속에서 다룬다. 그들은 존재론을 역사로 채우고 언어적 관계들과 수행적 장치, 계보적 재구축과 진실에의 의지들을 수립한다. 이것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 향하게 한다. 초월적 인식론은 옆으로 제쳐놓는다. 이 인식론은 더 이상 현재의 존재론을 위한 지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경우와는 달리 이 새로운 존재론에서는 삶의 공통적 맥동에 열려있는 결정적 분기가 발생한다. 존재의 산출은 심오함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현실성 속에서, 삶의 돌봄(cura della vita) 속에서 조직된다. 나는 ‘맥동’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생기론은 들어있지 않다. 우리는 생물학화된 혹은 자연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삶을 산다.

푸꼬에게 이러한 ‘현재의 존재론에 몰입되어 존재하기’(essere immersi in una nuova ontologia del presente)가 가장 높은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존재하기’(un essere comune)로서 특이성들의 상호적이고 다변적인 의존이 우리가 앎의 문제를 제기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형을 구성한다. 마슈레가 상기시켜주듯이, 푸꼬의 저작 출간의 맥락은 “전쟁 직후 시기의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의 완전한 갱신을 나타낸 거대한 논쟁의 계절이 시작된 때”이며 “이때 문학의 리얼리즘, 주체철학, 변증법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연속적인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이 동시에 문제 삼아졌다.” 이 문화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주권적 주체, 의식개념, 그리고 역사적 목적론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존재론을 집단적 실천의 직물이자 산물로서 파악함을 의미했다. 1970년대 중반, 푸꼬가 그 시점까지 쓴 것을 읽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의 느낌을 받았으며, 이것이 (객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열광과 주체에 대한 정신주의적 매료를 넘어서) 주체화를 향한 충동, 장차 올 것의 존재론적 구축(costruzione ontologica de l’a-venire)을 향한 충동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했다. 이러한 극복은 1970년대가 끝난 이후부터 일어나게 된다.

맑스에게서 우리는 동일한 형태의 존재론적 뿌리내리기와 대면한다. 역사적 현재에의/현재의 뿌리내리기(un radicamento nella/della presenza storica)이며 그 항상적인 재구성이다. 주체의 형이상학 같은 것은 없다. 그 존재론적 직물은 내가 지금까지 ‘새로운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러한 존재론적 직접성을 전제하는 것은 역사적 시기들의 차이를, 따라서 ‘삶형태들’(forme di vita)의 차이―예를 들어 맑스와 푸꼬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역사적 차이들, 여러 삶형태들의 차이]을 동질적 토대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건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된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①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본적 역사화 ②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인식 ③ 노동력, 즉 산 노동의 투쟁에서의 주체화 그리고 생산하는 신체들의 생산관계들의 변이와의 연동 ④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는 주체화를 정의하는 것.

 

5.

프랑스 맥락에서는 종종,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 방향에서, 존재론적 담론의 탈주체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이 지형에서 전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알뛰세르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매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 노선을 제안했다. 이제 알뛰세르가 이 지형에서 그의 비판을 심화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은 <주체>(Sujet)의 명령에 자유롭게 따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의 몸짓들과 행동들을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호명된다. 자신들의 종속에 의한 그리고 그 종속을 위한 주체 말고는 주체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체성을 그토록 해체시킴으로써, 그 어떤 가능한 정신주의의 나무도 베어넘김으로써, 알뛰세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에 이르렀다.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알뛰세르를 교정한다. “‘주체의 구성’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주체 없는 과정에서뿐이다.” 주체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은 반(反)휴머니즘의 무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형상으로 옮겨놓아질 수 없다. 이 비판이 표현하는 역사성, 활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즉 주체의 해체] 이후에 요구된 [새로운] 휴머니즘이 소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 현재의 존재론 안에서일 것이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일반지성의 거처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2015)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bitazione del general intellect. Dialogo con Antonio Negri sull’abitare nella metropoli contemporane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4장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A Dialogue between Antonio Negri and Federico Tomasello on Living in the Contemporary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이다.

문[또마셀로]

1년 전에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 시작했고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로 계속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보자.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분석해보자. 이 테마를 고정자본과 ‘노동의 장소’에 일어난 변형을 고려하여 논의해보자. 오늘날 일반지성을 발휘하는 노동의 일부가 재택노동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공장-메트로폴리스의 유비(가치창조 메커니즘이 전체 메트로폴리스로 확대되는 것)를 집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삶과 거주의 기술에서 출발하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네그리]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항상 대략적인 근사치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문제에 접근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살아가기와 노동하기(vivere e lavorare)가 가치의 새로운 형태가 되는 곳이다.  사회의 디지털화와 도시의 컴퓨터화의 출현과 함께 건축술적 요소들과 소통네트워크들이 주택의 짜임새에 삽입되면 집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도시가 노동의 패턴과 관련된 수천 가닥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노동력의 불안정성과 이동성 때문만이 아니라 통신이 거주지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특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지성이 집을 발견하여 어디선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초라하다. 1973년의 위기 이래 도시의 리듬은 더 이상 포디즘의 리듬―8시간 노동, 여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협동의 도시 규모로의 일반화와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노동의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 공장이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일의 장소가 공장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현대적 삶형태를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생산이 이제 삶형태와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말이다. 노동형태와 삶형태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는데 특히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추상적 협동의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는 공장에서 우세했던 물리적 근접성과 크게 다르다. 상사는 물리적 근접성에 규율(훈육)을 행사할 수 있지만, 추상적 협동에는 기껏해야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세하게 지시를 받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자유의 환경에서, 삶과 노동의 체제(una costituenza di vita e di lavoro)에서, 자율적 기획의 장치(un dispositivo di progettualità autonoma)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집에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을 보호처(un riparo, a shelter)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들뢰즈가 말한 ‘훈육에서 통제로’라는 이행 패러다임은 우리가 논의한 공장-메트로폴리스와 집이 노동의 장소가 되는 현상을 서술하고 정의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가?

훈육과 통제를 병치하는 것은 줄곧 사태를 보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삶정치적 영역을 침범한 착취형태를 놓고 볼 때에는 좀 낡은 것이 되었다. 이른바 통제의 기능은 노동의 삶정치적 형상을 앞질러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bios)을 강조하는, 즉 순전한 통제의 규정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강조하는 삶정치적 통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확연한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적(macchinici, machinic) 도구들과 복지구조들 및 화폐와 관련된 조건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을 산업적 훈육과 삶정치적 통제의 구분으로 매개 없이 환원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경향이 가사활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편, 포스트포디즘적 가치창조가 삶정치적 차원과 결합되는 곳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불안정 노동형태에 종속되는 동시에 매우 낮은 임금의 조건에 종속되는 위기의 국면들에서, 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통제의 가장 명시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집은 노동의 장소이자 도구에서 부채라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금융적 착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정치적 영역은 욕망의 확장 공간이자 생산의 새로운 관행의 공간에서 감옥이 되고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한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모였던 페미니즘 투사들과 이론가들이 삶정치적인 영역의 이러한 모호성을 그리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훌쩍 앞서 나갔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삶정치적 영역이 사회적 노동의 핵심적 열쇠가 되기 한참 전에 이 여성들은 노동계급 임금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의 노예상태에서 삶정치적 영역이 행사하는 통제의 복잡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분배가 사회 전 영역을 가로질러 재조직화되어 여성들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것을 투쟁을 통해서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이 이윤에 맞추어진 사회에서 생존만이 아니라 해방 또한 보장하도록 의도된 임금이며 권리였다. 그 성공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나는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시기에 착취와 삶정치적 통제의 조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적대가 그 아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려고 이 사례를 활용할 뿐이다.

 

①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성(양가성)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개별화·착취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화·자율일 수도 있는 ‘장치’(dispositif)를 인지노동이 집에서의 노동이 되는 과정에서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② 메트로폴리스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는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기술적 수단이 집에 있어야 하고 이 수단은 공장의 외부로 이동된 것이기에 일부든 전부든 노동자에 의해 전유된 것이어야 한다. 이는 건축물 구조가 기계가 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거처)의 기계적 구조(una struttura macchinica dell’abitazione)의 문제이다. 여기에 일련의 귀결들이 따른다. ① 특수한 가사노동. ② 집의 기계화. 50년 전만 해도 집에 기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 집에서 애정이라는 외관 아래 여성들이 힘들고 반복적인 일상노동을 강제로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오늘날 완전히 변했다. 기계화의 확산을 통한 변형으로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그 긍정적, 진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이행이 공간과 가족관계의 실질적 변경을 낳았다. 이렇듯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 요소와의 관련에서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담론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해방의 일정한 물질적 가능성이 이 과정에서 주어지고 집에서의 고정자본의 (여성에 의한) 재전유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해방적 공간을 여는 한편 그 공간을 소비에 종속시킨 자본관계의 모호성을 숨기거나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호성은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가는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모호성이며 임금구조에 본질적인 것이고 노동과정에서의 집의 특수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탈본질화되었고(de-essenzializzato) 더 이상 단순히 젠더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남편의 임금에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은 않는 관계의 잠재성(virtualità)에 열려 있다. 이는 자유의 영역은 아니며 단지 해방의 가능성일 뿐이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부채 메커니즘이 더 확연한 성격을 띠고 그 지형에서의 투쟁이 더 의미심장해지는 장소이다. 아다 꼴라우(Ada Colau)를 바로셀로나의 시장으로 만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la Plataforma d’Afectats per la Hipoteca) 같은 경험이 그 사례이다. 이런 투쟁에 대해서 논평을 해 달라.

이제 문제의 핵심에 이르렀다. 집이 노동장소가 되는 경우 (착취장소이지만 동시에 가능한 해방의 장소가 되는 경우) 그 집이 직접 관여되는 주체화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강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이 가사노동을 착취에 종속시켰을 때의 그 이중성과 부합되는 이중성,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일반적인 이중성이다. 두 가지 방향의 착취가 있다. 하나는 이 기계화된 집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착취이다. 다른 하나는 집을 주요 활동장소로 삼는 노동자들이 종종 부채상태에 빠질 때 이루어지는 가치추출 메커니즘이다. 첫째 경우에는 노동자가,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가 소진(소비)된다. 둘째 경우에는 자본이 협동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를 금융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출한다. 그런데 자본의 상대로서 기능하는 노동의 자율성은 항상 증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해방을 위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중적이다. (이전에도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럴 수 있다.) ① 한편으로는 노동장소에서 착취에 맞서는 특수한 투쟁이 있으며 ②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추출주의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이 있다. 착취와 추출의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문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복잡해진다. 이 형상은 생산하는 공통적 생산 활동을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재화의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것, 집단적 가치와 생산적 특이성들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오늘날 추출적 착취란 공통적인 것의 착취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협동 네트워크들의 착취이다. 현재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투쟁은 이 새로운 지형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현재 투쟁하는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는 이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특히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접세와 간접세에 맞서는 싸움들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고 일반화된 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 특히 가사노동의 인정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 부채에 대항하는 싸움(특히 그것이 주택구매와 연관되는 경우)이 있다. 모기지 시스템에 맞서서, 달리 말하자면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 부과되는 불이익에 맞서서 아다 꼴라우가 이끈 투쟁 같은 것들이다. 이는 직접 행동을 통해 수행된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적 감성이다. 이는 더 이상 단지 철거에 맞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적 착취자들을 폭로하는, 철거 작전에 동원된 판사, 집행리(執行吏), 경찰, 은행가들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즉 특수한 재화의 방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많고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의 도전이 가늠된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공간 산출’의 특수한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최근에 널리 퍼진 도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식민화과정에 대한 논의와 교차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위에 이론을 세움으로써 문제들이 보통 잘못 제시된다. 문제가 개별적이면 이론도 개별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리고 건축가들 대다수의 머릿속에서는) 도시가 투기와 부동산 수입에 내맡겨진 대규모 서비스로서 제시된다. 메트로폴리스, 혹은 도시 일반은 식민화 혹은 공간성 산출의 지형이 된다. 공간은 계급적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고 세분된다.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여러 측면들에서 발현된다. 이는 도시 공간의/에서의 장소들(topoi)의 탈영토화 및 위계화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확산되는 시초 축적 같은 것이 추출적 폭력의 결정적 행사를 통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금융의 투기적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둘째로 이 새로운 도시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자의 관점에서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 생각에는 르페브르가 1970년대에 노동자들의 도시 진출을 정확하게 감지한 듯하다. ‘도시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 포디즘 시기의 주장이기에 아마 오늘날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도시의 거시적 계획과 거주되는 공간의 미시사회학 사이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도시의 향유로부터 집의 향유, 주택의 향유,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점을 가졌다. 그 관계를 전도시켜서 ‘삶의 향유’를 도시 전체를 (메트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목표로서 긍정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는 도시 공간 전체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화하였다)의 이론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자주 망각되는 개념을 르페브르는 극히 중요하게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단성으로서의 도시, 조우·지식·즐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개념이다. 물론 항상 변하는 곳이며 또한 불완전한 곳이지만, 도시의 인간적 복잡성에 대한 이 인식은 집 난롯가의 기쁨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투사되었다. 특히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유일하지는 않지만 특히 이주자들)의 거대한 층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근대적 스타일로 기계화되었고 어엿하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을 누린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로스(Kristin Ross)의 훌륭한 책 『꼬뮌의 상상계』(L’imaginaire de la Commune)를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빠리 꼬뮌의 72일을 다음 세기에 새로운 지식과 예술·교육·문학의 창조를 낳는 데 봉사한 사건으로서 기록하는 데 덧붙여서, 그 행위자들의 삶형태에 혁명적 행동이 반영되고 계속해서 번성하는 이레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상상과 행복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시에르)를 낳는다. 이는 도시에서의 그리고 도시의 ‘혁명적 풍요화’라고 할 수 있다. 종속된 민중의, 노동하는 민중 일반의 관점에서 도시공간의 산출을 생각할 때에는 ‘다중의 프로그램’(una programmazione moltitudinaria)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중의 욕구와 특이성의 기쁨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들의 종합에 봉사하도록 도시를 조직하는 능력(una capacità di tenere insieme bisogni della moltitudine e gioie della singolarità, ed organizzare la città al servizio di una loro sintesi)을 가리킨다. 나는 또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들은 도시의 문제에 행복한 집단적인 해결을 보고자 하는 민중의 압박 혹은 욕망에 밀려서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나 억압적 프로그램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노동이 겹쳐질 때, 도시-메트로폴리스의 문제는 생태와 생산의 겹침의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 도시 공간성의 중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로써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는 개념에 이른다. ‘스마트 시티’ 개념은 유한계급의 도시 이미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우리의 도시를 방대한 자본주의적 건설현장으로서 재형성하는 거대한 투자라는 물질적 벡터이기도 하다.

처음 ‘스마트 시티’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처음에는 사이버네틱 시스템들, 그 다음에는 디지털 시스템들이 완전히 가로지르며 재조직화하는 도시를 의미했다. 이 ‘스마트한’, 지적인, 영리한 도시 공간이라는 정의 뒤에는 두 개의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내러티브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낡은 실증주의적 전제들, 19세기의 기계론적인 지배자들의 실증주의인데, 이는 ① 도시가 위로부터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다는 생각과 ② 모든 도시적 관계들이 합리적이고 정보학-사이버네틱의 수단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내러티브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 이는 투기적이 아닐 때에는 상업적이다. 이는 좀 속임수이다. 생산물을 값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는 지성은 실은 통제일 뿐이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노동에 대한 통제, 사회적 착취에 필요한 통제, 질서가 부여된 과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통한 통제이다.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사회’는 내 생각에는 순전한 신비화이지만, 이것들은 소통의 흐름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에서 노동에 부여하는 새로운 중심성과 결부된 실재적 과정 속에 적대의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 소통의 구조적 연관의 증가는 자본에 의해 직접 추출되는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동시에 저항을, 따라서 자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것이 높은 정도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 저항은 의식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부정적 측면들과 연관된 일상적 파열 요소들의 연속(continuità di elementi di rottura quotidiani)으로, 분자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엿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20세기 초기의 1만 명 인구의 작은 시들의 고요함으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삶을 흔들어야 한다. 정신적 인도의 기능에서 교구 목사를 대신하는 텔레비전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고요함이다. 그래서 ‘스마트 시티’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해커들’을 필요로 한다. ‘해커들’이 없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저항과 조우의 가능성은 결코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 시티’의 반대쪽에 도시 주변부, 파벨라, 슬럼, 방리유들이 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공통의 노동 및 저항의 장소들이 가진 생산적 성격과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덧붙일 말은?

이러한 주변부들에 대해 말할 때 가령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작가들이 발전시킨 분석·연구·견해들을 인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구들은 주로 도시에서 빈자들의 소외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위험성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통제에 맞서는 도발로 간주하고 소외된 장소에서의 해방을 위한 ‘장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가난한 장소들은 소외가 아니라 도시 삶과 메트로폴리스 노동의 공통적 질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삭제하기가 힘든 어떤 것이다.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추방자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현상학들이 있으며 이것들 모두 방리유를 총체적 배제의 장소들로 본다. 방리유 연구자로서의 나의 경험은 항상 총체화를 피하도록 나를 이끌었으며 노동 능력의 풍요로움과 공존 및 협동의 능력(둘 다 창조적이다)이 항상 나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 방리유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흡수되거나 정기적으로 거부된다. 기업들은 노동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재화(특히 문화적 재화, 음악, 삶형태 등) 둘 모두의 관점에서 이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과 추방이, 흡수와 배제가 계속적으로 교대되며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축적된 비참과 반란의 결단 사이에서 방리유가 띠는 적대적 중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정치적 리듬은 갈등에 차 있으며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다. 삶이란 그 내부에서도 갈등으로 차 있으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당신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놓은 추출주의는 맑스가 ‘시초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부단함과 연관이 있다. 이 시초축적을 맑스는 잔인한 유혈의 수탈 과정으로 묘사한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와 유사한 폭력이 가치 추출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대 메트로폴리스가 행사하는 고유한 폭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포스트포디즘 메트로폴리스의 일부 이미지들을 왜곡했다. 특히 종종 반복되는 시초축적과의 유비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논의한 집의 특이화는 전적으로 추출 메커니즘들 내부에서의 일이며 금융자본의 순환에 메트로폴리스가 포섭된 상황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추출주의에 강하게 대립하는 다양한 반응들, 다양한 인식론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체제에서 ‘실질적 포섭’이라고 불렸던 것―가치화 과정의 전일적이고 밀도 높은 부과―이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명백한 공간적 불연속성들과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로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새로운 ‘시초축적’에 대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형식적 포섭’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구조의/구조 내에서의 최근의 이행이 부과하는 조건들 내에서의 일이다. 즉 원래적 의미의 시초축적 단계, 단순협업 단계, 그리고 대공업 단계 이후의 일이다. 만일 ‘시초축적’과 ‘형식적 포섭’을 상기시키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맑스가 150년 전에 서술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경된 새로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폭력이 행사되기는 하지만, 이 폭력은 지역 현실에 의해서, 생산적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고 상대화되고 조건지어진다. 이 생산적 협력은 영토 위에 분산된 노동력으로부터 도구들을 끌어온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일반지성과 대면할 때, 일반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 조직화와 대면할 때 가공할 한계를 만난다. 생산도구들 및 금융도구들과 아울러 치안도구들과 문화적 도구들을 통합적으로 이용하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통제가 재조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포의 산출이다. 띨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띠며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는 이 공포가 필시 현대 메트로폴리스에 행사되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 전염병에 대한 공포, 오염에 대한 공포 등등. 추출주의는 가장 최근의 폭력 형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고도의 폭력형태이며, 이전 단계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폭력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에는 불균형적인 결과를 낳는 폭력이다. 요컨대, 이 폭력은 예전의 내러티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다중의 힘 또한 자본이 명령을 발휘하기에 점점 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특히 그렇다.

 

젊은 맑스는 『자본론』24장을 쓰기 전에 이미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공유지였던 땅에서 농민들이 나무를 훔쳐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쓰면서 맑스는 사용의 문제, 민중의 관습적 권리를 언급했다. 이 사용의 문제가 그것이 공통적인 것과 가지는 관계라는 시점에서 추출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어떤 시의성을 가질 수 있는가?

사회형성체는 생산과정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산물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에 동반된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를 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통적인 것이 추출에 선행한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통적인 것 없이는 착취란 없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 노동을 공통화하는(comunalizzare il lavoro)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노동은 삶정치적 노동이다. 즉 얼마나 공통적이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협동적인지에 비례하여 가치를 획득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우리는 맑스가 시초 축적 및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 관련하여 분석한 것과는 정반대의 과정 속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순은 사적 부문의 명령을 받는 공적 부문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할 긴급한 필요 아래에서 조직된다는 데 있다. 공적 부문은 더 이상 사유화를 막아내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아니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를 위한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것(대법원)이 사적인 것(해당 다국적기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것(공간, 활동)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때 공적 부문은 보완적이었고 사적 부문의 보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적 부문이 손을 뻗지 않은 곳―건물 인프라, 철도, 공항, 학교, 병원 등―에서는 공적 부문이 앞서 나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서비스 구조들―자연 공통재를 통합한 공통적인 것―은 공적 부문에서 제거되어 다시 사유화되게 된다. 공통적인 것이 더 강한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사유화를 지향하는 명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의 지형이다.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투쟁의 지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이 세 번의 대화의 결론짓는 물음이다. ‘메트로폴리스적 정치’의 특수성을, 이 ‘공통의’ 총체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의 특수한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날 건축가들이 점점 더 ‘현장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노동자주의적 선택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그들의 작업 속으로 옮겨넣으려고 하는 동지들이 건축 분야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우렐리(Aureli)와 그의 그룹이다. 이들은 해방의 필요(다중의 욕구와 정치적 투쟁이 욕구)와 관련하여 보조적인 혹은 힘을 부여하는 위치에 스스로 자리하도록 건축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지금까지 건축의 보조적 성격은 항상 거대 부동산 자본주의의 특권으로서였다. 이제는 그것이 전문적 수준에서조차도 공통적인 것의 규범에 따라 지을 (순진하지도 않고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필요를 의미한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협동과 자유, 평등과 유대를 장려할 가능성, 자본이 도시에 부과하려는 강제된 동질화로부터 도시를, 그 특이성들의 다수성을 구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간과 이러한 매개변수 내에서 예를 들어 생태적 싸움은 자연의 방어로부터 ‘삼림헌장’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구축으로 돌아간다.[삼림헌장에 대해서는 이 블로글의 세 글 참조―정리자] 자본주의적 계획에 대안을 제안하는 방법은 여기서 적대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바로 이 지향 위에서 다중은 자신을 물리적이고 도시적인 캐릭터로서 조직한다. 훌륭한 옛 노동자주의의 관점을 따라서 나는 투쟁이 항상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가 중심적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급투쟁의, 그리고 또한 사회적 투쟁의 특권적 지형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실질적으로 공장인데, 다만 여기서 공장은 일반지성의 공장이다. 일반지성의 노동력은 노동계급의 노동력이 줄곧 그랬듯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유연하고 힘차다. 필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자. 나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미시와 거시가 기능적 관계에서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거칠게 맞서고 있음을 부각하면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나는 자본이 메트로폴리스에 부과하는 지배관계가 어떻게 저항을 받고 차단되고 대체적인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또한 고정자본에의 종속이 어떻게 전도되고 소외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슬픈 감정보다 우위에 서는지를 여러 수준에서 보려고 했다.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 나는 도시-메트로폴리스에서 추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가능한 공간 또한 보게 되었다. 기술적 변형에 의해 강화된 생산적 협동은 착취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강화되면 적대적 조직화와 근본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의 분석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2 이상이 극히 밀집된 메트로폴리스 지역에서 산다. 마키아벨리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서 서술했던 인류의 변형―‘짐승’에서 ‘시민’으로―이 이 지역에서 실현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현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의 생산자는 바로 자신들임을 발견하는 것, 도시에서 해석하고 건설하고 행동하는 데 대한 열쇠를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취받는 생산자의 상태에서 창조하는 생산자의 상태로의 유턴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쫓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길은 공통적이 되기(essere-comune)의, 공통적으로 살기(vivere in comune)의 근본적 변형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 자체가 혁명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삶형태(forme di vita mutualistiche), 사회적 연합들, 조우와 행동의 실험실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메트로폴리스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도시자치주의(자치도시들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는 프로그램)가 ‘어디서’를 가리켜준다. 이는 일반적이지만 종종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공장 투쟁과 옛 스타일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을 추출적 자본을 공격하는 양태로 옮겨놓기―이것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내일의 꼬뮌주의로 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맑스적 통찰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노동의 척도가 되기를 그치고, 노동이 부의 척도가 되기를 그칠 때, 그때 부는 더 이상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각자에게 진정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공통의 부에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꼬뮌주의 아래에서만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공통의 호화로움만이 진정한 호화로움일 것이다. [영역자 주석: Kristin Ross, Communal Luxury: 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Verso, London, 2015, p. 142.]

 

2015년 6월 파리

 

 




[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




[맑스] 신용과 자본의 한계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자본과 그 한계 :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읽기’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한 일련의 강의 가운데 7강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이전 강의(6강)까지 논의된 자본의 장벽들

[생산]

  1. 잉여가치는 전체 노동일에서 필요노동을 뺀 부분이므로 필요노동이 그 장벽이다.
  2. 잉여가치가 증가하는 비율은 생산력이 높아질수록 낮아진다.

[유통(교환)]

  1. [사용가치의 측면] 생산물에 대한 욕구가 장벽이다. →유통영역의 확대, 시장의 개척.
  2. [교환가치의 측면] 교환되어야 할 잉여등가물이 필요하다. →생산부문의 확대가 필요.

[노동자]

  1. 이윤의 실현을 위해서는 임금으로부터 오는 소비능력 이상의 소비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없다.
  2. 생산력의 발전 등에 의한 필요노동의 감소는 노동자들의 교환능력(소비능력)을 떨어뜨린다.

[유통시간]

  1. 유통시간은 자본의 가치창출에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 시간에 의한 공간의 말살, 신용
  2. 유통시간을 없애려는 자본의 노력은 자본 자신의 기반인 교환을 제거하려는 노력이므로, 스스로를 지양하려는 노력이다.

신용과 자본의 한계

I.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신용에 관한 논의 (펭귄 영어본 659-660, 670-671, 한국어본 2권 후반부)

 

맑스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조금씩 신용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 지점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논의한다.

 

  1. 신용과 유통시간

“따라서 유통 시간 없는 유통은 자본의 필연적 경향이다.” 지난번 강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유통시간(생산한 상품을 판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워질수록 잉여가치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본의 경향이 신용을 발생시킨다. “이 경향이 신용 및 신용의 장치들을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1. 신용과 자본의 양적 한계 혹은 개별성의 극복

이와 동시에 맑스가 지적하는 것은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개별 자본들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맑스는 같은 말을 조금 바꾸어서 개별 자본이 신용의 형식으로 “자신을 그 양적 장벽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정립하려고” 한다고도 한다. (여기서 ‘자본’이란 ‘자본 일반’과 같은 말이다. 맑스는 자본 일반과 개별 자본을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라는 말은 전자에 해당하는 말이다.)

 

  1. 가공架空자본(의제擬製자본)과 자본의 집중

이어서 맑스는 이러한 경향의 최고의 결과로서

① 가공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영어로 그냥 ‘fictitious capital’라고 썼으나 자본론에서는 ‘Das fiktive Kapital’라고 되어 있다.]

② 자본의 집중, 즉 중앙집중화하는 개별 자본들에서 자본의 개별적 다수성이 부정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1.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

이어서 맑스는 ‘유통시간 없는 유통’의 두 형태를 설명한다.

① 신용은 화폐를 단순한 형식적 계기로 정립하려고 시도하며 그리하여 자본 즉 가치가 되지 않으면서 자본의 변태(형태변환)를 매개한다. 이렇듯 화폐 자체가 유통의 산물이듯이, 신용도 유통의 새로운 산물이다. [신용은 동시에 쌍방향으로 오고가는 교환이 아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미리 당겨’ 쓰는 것이란 오고 감이 시간적으로 분리된 것을 말한다. 교환의 경우에는 화폐가 구매의 수단 즉 유통수단이지만 신용의 경우에 화폐는 지불수단으로서 기능한다.]

② 다른 한편, 자본은 유통시간 자체에 생산시간의 가치를 부여하려고 시도한다. 즉 유통(시간)을 매개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생기게 된다. 이 모두가 화폐로서, 자본으로서 정립된다. [이는 상인자본(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의 자립화를 낳게 된다. 그러나 상인자본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하며, 다만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분할에는 참여한다. 이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분석되지 않고, 자본론 3권에서 논의되고 있다.]

 

  1. [정리] 생산시간과 유통시간

① 유통시간은 자본이 자본으로서 특수한 운동을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유통시간 동안 자본은 형태의 변화(변태)를 거친다.

② 생산시간은 자본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시간이다. 과정 중의 자본이며, “노동으로부터 그 산 영혼을 흡수하는 창조적 자본”이다.

 

  1. 자본의 분할운용

실제로 생산시간이 유통시간에 의하여 중단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이는 자본이 분할되어 운용되기 때문이다. 한 부분이 생산국면에 있을 때, 다른 부분은 유통국면에 있게 된다. 결국 활동 중인 자본은 전체가 아니라 1/x이다. 혹은 특정의 자본이 예를 들어 신용에 의하여 두 배로 늘어나는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이 경우 (아마도 상품을 담보로) 돈을 빌린 원래의 자본에게는 유통시간이 마치 없는 듯이 보이지만, 대신 들어선 자본은 유통시간을 거쳐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누가 소유주이냐를 별도로 한다면, 하나의 자본이 둘로 나뉜 것과 같다. a와 b가 각각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a가 b를 흡수하고 나서 a와 b로 나뉜 것과 같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망상들은 신용을 신비화하는 자들―이들이 채권자들인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채무자들이다―사이에 잦다.”

 

  1. 화폐, 유통시간 그리고 신용

우리가 자본과 그 유통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화폐의 도입이 발견이 아니라 전제인 사회적 발전단계에 있는 것이다. 화폐가 단순히 가치의 상징이 아니라 그 직접적인 형태 자체로 가치를 가지는 만큼, 그런 만큼 화폐는 자본의 유통을 가속화하기보다 지연한다. 화폐는 유통수단의 측면에서나 그리고 자본의 실현된 가치라는 측면에서나 공히 유통비용에 속하는데, 이는 한편으로는 유통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사용된 노동시간인 한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순환의 질적인 계기―자본의 자기자신으로의 복귀, 즉 독립적인 가치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한에서 그렇다. 어떤 측면에서도 화폐는 가치를 증가시키지 않는다.

① 한 측면에서 화폐는 가치를 나타내는 귀금속 형태이다. 이는 노동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잉여가치의 공제를 나타낸다.

② 화폐는 유통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계가 노동을 들여야 되는 것 즉 노동의 산물인 한에서 화폐는 자본에 대하여 생산공비로 나타난다.

★ 여기서 맑스가 매우 정밀하게, 그러나 이해하기는 조금 어렵게 말하는 바의 골자는, 가치를 포함한 모든 물질의 흐름은 그것이 화폐와의 교환을 매개로 하는 한에서는 지연된다는 말이다. 신용은 바로 이 지연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신용과는 다른 맥락이지만, 가령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는 화폐와의 교환이라는 매개의 상당 부분을 제거한 것이다.

이렇듯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는 유통의 경비이기 때문에 자본의 노력은 화폐를 자신의 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전환시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노동시간이 들지 않고, 그 자체로 가치가 없는 유통의 계기를 나타내는 것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과거로부터 이월된 직접적 실재로서의 화폐를 지양하고 그것을 단지 자본에 의하여 정립된 것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양된 것으로, 순전히 잠재적인(rein Ideelles) 것으로 전환시키는 데로 향한다.” 직접적인 형태의 화폐가 자본의 유통에 장벽이었는데, 자본은 이를 신용을 통하여 지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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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본론』에서의 신용에 관한 논의

[『자본론』 3권 27장, 30, 31, 32장 등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직접 인용의 경우에는 김수행 번역본을 참고하되, 독어본을 기준으로 조금씩 고쳐서 옮겼다.]

 

1. 신용의 필연성  

이윤율균등화(운동)를 매개한다.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은 자본들 사이의 경쟁을 일반화하고 따라서 이윤율의 균등화를 낳는 데 기여한다. 󰡔자본론󰡕 3권 10장 참조.

 

2. 유통비용 절감

1) 화폐는 그 자체가 가치인 한 유통비용의 하나가 된다. 화폐는 신용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3가지 방식으로 절약된다.

① 거래의 큰 부분에서 화폐가 전혀 사용되지 않음으로써.

②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가속화

ㄱ. 더 소량의 화폐 혹은 화폐상징이 동일한 역할을 하는 것(은행업의 기술)

ㄴ. 신용이 상품변태속도를 가속화하여 이에 따라 화폐유통속도가 가속화된다.

③ 지폐에 의한 금화의 대체

2) 신용은 유통(상품변태)의 개개의 국면을 가속시키며 그와 함께 자본변태 및 재생산과정 일반을 가속화시킨다. (다른 한편으로 신용은 구매행위와 판매행위를 오랫동안 서로 분리시킬 수 있으며 이리하여 투기의 바탕이 된다.)

 

3. 주식회사의 형성

이로써 다음과 같이 된다.

1) 생산규모와 기업의 거대한 팽창

2) 자본 → “개인자본에 대립하는 사회자본(직접적으로 결합한 개인들의 자본)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취”한다. 개인기업에 대립하는 사회기업으로서 등장.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자체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부터 자본을 지양하는 것이다.”

3) 기능자본가의 단순한 관리인으로의 전환. 그리고 자본소유자의 단순한 소유자―화폐자본가―로의 전환. 배당이 이자와 기업가이득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이 총이윤은 오직 이자의 형태로서만, 즉 자본소유에 대한 단순한 보상으로서만 취득된다.” 자본소유는 이제 현실적인 재생산과정에서의 기능 및 관리기능으로부터 분리된다.

이리하여 이윤(···)은 오로지 타인의 잉여노동의 단순한 전유로서 나타나는데, 이는 생산수단의 자본으로의 전환으로부터 즉 생산수단이 현실적인 생산자들로부터 분리되는 것(소외)으로부터, 생산수단이 타인의 소유물로서 현실적으로 생산과정에서 활동하는 (관리인으로부터 최하의 일용노동자에까지 이르는) 개인에 대립하는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주식회사에서는 기능이 자본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그리하여 노동도 생산수단 및 잉여노동의 소유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최고의 발전이 낳는 이러한 결과는 자본을 생산자들의 소유그러나 이제는 개별 생산자들의 사적 소유로서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 또는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 재전환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더욱이 이러한 결과는 재생산과정에서 아직도 자본소유와 결부되어 있는 모든 기능들을 결합된 생산자들의 단순한 기능으로,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통과점이다.

 

주식회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철폐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지양하는 모순인데 주식회사는 첫 눈에 명백하게도 새로운 생산형태로의 단순한 통과점으로서 나타난다. 주식회사는 현상에서도 그러한 모순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주식회사는 한편에서는 일정한 분야에서 독점을 낳고 이리하여 국가의 간섭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한편에서 주식회사는 새로운 금융귀족을 재생산하고 발기인이나 창립자나 명목만의 임원의 형태로 새로운 종류의 기생층을 재생산하며 회사창립이나 주식발행이나 주식거래와 관련된 투기와 사기의 제도 전체를 재생산한다. 결국 주식회사는 사적 소유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사적 생산이다.

 

4. 주식회사 제도

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바탕 위에서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을 철폐하는 것이며, 이것이 확산되어 새로운 생산분야를 장악함에 따라 그만큼 더 사적 산업을 파괴하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신용은 개별자본가에게 일정한 한계 안에서 타인의 자본과 소유, 그리하여 타인의 노동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니라 사회자본에 대한 지배력은 자본가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지배력을 준다.

어떤 사람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자본―또는 세상 사람들이 그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본―은 신용이라는 상부구조를 위한 토대로 될 뿐이다. (···) 모든 척도들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안에서 다소간 인정되고 있었던 모든 해명근거들이 지금은 사라져 버린다. 투기상인이 도박에 걸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사회적 소유이다. 자본의 기원이 저축이라는 이야기도 역시 불합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투기꾼은 바로 타인들이 자기를 위하여 저축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하나 절제라는 문구도 자본가의 사치―이것이 이제는 신용을 얻는 수단으로 되고 있다―에 의하여 완전히 반박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한 상태에서는 아직도 일정한 의미를 지녔던 관념들이 이제는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된다. 성공이나 실패 모두가 자본의 집중을 야기하며 이리하여 최대의 규모에서의 수탈(Die Expropriation)을 야기한다. 수탈이 이제는 직접적 생산자들로부터 중소자본가들 자신에게까지도 미치고 있다.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출발점이며,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목표는 수탈을 완성단계까지 진행시켜 결국에는 모든 개인들로부터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것이다. 즉, 생산수단은 사회적 생산의 발달에 따라 사적 생산의 수단이나 생산물이기를 멈추며 결합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생산물임과 동시에 그들의 수중에 있는 생산수단, 이리하여 그들의 사회적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이러한 수탈이 대립적인 형상으로, 즉 소수가 사회적 재산을 전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신용은 이 소수에게 순전한 사기꾼의 성격을 점점 더 부여하고 있다. 소유권은 이제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소유권의 동향과 이전은 증권거래소의 투기의 결과일 따름인데, 증권거래소에서는 작은 고기들은 상어의 밥이 되고 양은 거래소 이리들의 밥이 된다. 주식회사제도에서는 낡은 형태즉 사회적 생산수단들이 개인적 소유로서 나타나는 낡은 형태와의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이라는 형태로의 전환은 아직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환은 사회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과 사적 부로서의 부의 성격 사이의 대립을 극복하기는커녕 이 대립을 새로운 형태로 전개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5. 협동조합공장(Die Kooperativfabriken, co-operative factories)

[이는 오늘날의 자주관리에 해당한다.]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운영되는 협동조합공장은 ··· 기존제도의 모든 결함을 재생산하며 또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지만, 낡은 형태 내부에서 새로운 형태가 출현하는 최초의 실례”

“협동조합공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공장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신용제도 없이는 발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신용제도는 자본주의적 개인기업을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로 전환시키기 위한 주요한 바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협동조합을 다소간 국민적 규모로 점차로 확장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적 주식회사는 협동조합공장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연합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인데, 다만 전자에서는 그 대립이 소극적으로/음성적으로(negativ) 철폐되고 후자에서는 적극적으로(positiv) 철폐되고 있을 뿐이다.”

“신용의 발달―그리고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자본소유의 잠재적 지양”

 

6. 자본의 역사적 과제와 신용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명백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의 대립적 성격에 바탕을 둔 자본의 가치화는 생산의 현실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오직 일정한 정도까지만 허용하며 따라서 사실상 생산에 대한 내재적인 질곡과 장벽을 구성하고 있는데, 이 질곡과 장벽이 신용제도에 의하여 끊임없이 돌파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하는데,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산형태의 물질적 기초로서 일정한 수준에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역사적 과제이다. 동시에 신용은 이 모순의 격렬한 폭발즉 공황을 촉진하고 이리하여 낡은 생산양식을 해체하는 요소들을 강화한다.

 

7.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이중적 성격

①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기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까지 발전시키고 사회적 부를 수탈하는 소수의 수를 점점 더 제한한다.

②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한다.

이를 맑스는 “사기꾼과 예언자를 잘 혼합시킨 성격”이라고 한다.

 

8. 생산과정의 발달, 신용, 투기

더욱이 최초의 거래가 상품가격의 등락을 노리는 투기에 의해 촉발되면 될수록 환류는 그만큼 더 불확실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생산성과 대규모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1) 시장은 확대되고 생산지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며, (2) 따라서 신용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으며, (3) 그 결과로 투기적 요소가 거래를 점점 더 지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멀리 떨어진 시장을 위한 대규모 생산은 생산물 전체를 상업의 수중에 맡긴다. 그러나 국민의 자본이 두 배가 되어 상업이 자기 자신의 자본으로 국민의 총생산물을 구매하여 그것을 다시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용은 필수적이며, 신용의 규모는 생산의 가치량의 증대에 따라 증대하고, 신용의 기간은 판매시장이 멀어짐에 따라 연장된다. 여기에서 상호작용이 생긴다. 즉 생산과정의 발달은 신용을 확대하고, 신용은 또한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을 확대시키게 된다.

 

9. 공황의 궁극적 원인

실제로는 생산에 투하된 자본의 보충은 비생산적 계급의 소비능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소비능력은 부분적으로는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들에 의해 제한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들은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윤을 낳는 한에서만 고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제한되고 있다. 언제나 모든 현실적 공황의 궁극적인 원인은, 생산력을 발달시키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충동(마치 사회의 절대적 소비능력만이 생산력 발달의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생산력을 발달시키려고 한다)에 대비한 대중의 궁핍과 제한된 소비에 있다.

 

10. 산업순환과 투기

불황국면에서 생산은 이전이 순환에서 도달하였던, 그리고 지금 그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는 수준 이하로 감소한다. 번영국면―중간단계―에서 생산은 그 기술적 토대 위에서 더욱 발전한다. 과잉생산과 투기의 국면에서 생산은 생산력을 그 최대한도로 긴장시키며 생산과정의 자본주의적 장벽을 넘어서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11. 모든 공황의 바탕

그리하여 첫눈에는 모든 공황은 단순히 신용․화폐공황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사실상 이 공황은 어음을 화폐로 전환시키는 문제일 따름이다. 그런데 이 어음들의 대부분은 현실의 매매를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 매매가 사회적 필요를 훨씬 능가하여 팽창하는 것이 결국 모든 공황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12. 진정한 축적과는 구별되는 화폐자본의 축적

그러나 화폐자본가는 모든 이윤(그가 얻어 자본으로 재전환시키는 모든 이윤)을 먼저 대부가능한 화폐자본으로 전환시킨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미 화폐자본의 축적―진정한 축적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지만 그것과는 구별되는 축적―을 보게 되며, 그것은 특수한 부류의 자본가들(화폐자본가․은행업자 등등)의 축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재생산과정의 진정한 확대에 수반하는) 신용제도의 확장에 따라 증대할 수밖에 없다.

 

13. 화폐자본의 축적이 언제나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자본축적보다 클 수밖에 없는 이유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화폐에 의해 매개된다는 이유로, 화폐자본의 축적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개인적 소비의 증대는 진정한 축적을 위한 화폐형태(새로운 자본투자를 개시하는 화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정리]

자본의 분리, 분할, 특수화의 관점에서 본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

① 시초 축적 : 생산수단의 생산자로부터의 분리(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의 분리)

② 생산적 자본(혹은 산업자본)의 내적 분할 :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③ 상품거래자본 혹은 상업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상품의 화폐와의 교환(C-M)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④ 화폐거래자본(상인자본의 한 형태)의 분리 : 유통과정 중 화폐의 지불과 수납, 차액의 결제, 당좌계정의 유지(부기), 화폐의 보관을 담당하는 기능이 특수화되어 산업자본으로부터 독립. 상품거래자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⑤ 화폐자본(이자 낳는 자본)의 분리 : 재생산과정(생산 +유통)으로부터의 분리.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으나 이자의 형태로 잉여가치의 분할에 참여. 은행.

⑥ 지대소득자 계층(rentiers) :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토지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지대’의 형태로 가져감. [현대에는 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산(부동산, 주식, 증권 등)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더 광범한 자산소득자(불로소득자) 층이 형성됨.]

⑦ 소유와 기능의 분리(주식회사) : 자본의 재생산과정에 기여함이 없이 자본의 소유 자체를 근거로 일종의 이자 같은 형태(배당금)로 잉여가치를 가져감.

→ 사회적 소유의 형성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한도 내에서 사적 소유를 철폐함.

⑧ 신용과 그 이중성 : 자본주의를 도박과 사기의 제도로 발전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의 이행형태를 구성함.




맑스,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


  • 저자  :  맑스
  • 원문 :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어떤 일이 계기가 되어 맑스의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1844)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새로 발견했다. 이 글은 사적 소유가 어떻게 소외를 낳고 화폐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지를,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경제가 왜 인간적인 경제일 수 없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말미의 소외되지 않은 경제에 대한 상상적 서술은 매우 짧지만 커머닝, 공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대안경제를 사고하는 데 기초가 되는 생각이 들어있다. 『자본론』 독서가 간혹 자본의 논리에의 함몰을 의도치 않게 유발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이 글은 그럴 염려가 없는 매우 건강한(!) 양식(마음의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백수의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내용정리를 다시 다듬어서 여기에 올린다. 맑스의 글을 읽을 때는 서술대상을 여러 측면으로 나누어 그 측면들의 관계를 치밀하게 서술하는 과정을 잘 따라가는 힘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일을 공동체적인 것(이 당시 맑스의 어휘로는 ‘유적 존재’)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국가와 자본에 의해 장악당한 근대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우리’ 근대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이 여기서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기 때문이다.  

 

맑스, 제임스 밀에 대한 논평(1844년)

Karl Marx, Comments on James Mill, Éléments D’économie Politique

 

[법칙과 현실]

밀은 (리카도 학파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추상적 법칙을 이 법칙의 변화 혹은 지속적인 지양 없이 진술하는 잘못을 범한다. 법칙은 변화 혹은 지속적인 지양을 통해서만 현실화되는데도 말이다. 예컨대 생산비용이 궁극적으로― 더 정확하게는 (가끔씩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수요와 공급이 평형을 이룰 때―가격(가치)을 결정한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면, 수요와 공급이 평형을 이루지 못하고 따라서 가치와 생산비용이 결코 필연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 또한 불변의 법칙이다. 최근의 정치경제학은 현실적 운동(법칙은 이것의 추상적이고 우연하며 일면적인 요인일 뿐이다)을 우연하고 비본질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 그들에 따르면 정치경제학에서 법칙은 그 반대인 법칙의 부재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이다.

[화폐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밀은 화폐를 교환매체라고 특징지음으로써 사태의 본질을 잘 표현한다. 재산이 화폐 안에 소외(외화)되어 있다는 것이 화폐의 우선적 본질이 아니라 매개하는 활동,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어서 화폐의 속성, 즉 인간 외부의 물질적 사물이 되었다는 것이 화폐의 본질이다. 인간은 이 매개활동 자체를 소외당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으로서만 활동하며 비인간화된다. 사물들 사이의 관계 자체, (그리고) 사물들을 가지고 인간이 행하는 바는 인간의 외부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어떤 것의 작동이 된다. 이 이질적인 매개자(인간이 인간에 대한 매개자가 되지 못한 상황)로 인해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 자신의 활동,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인간으로부터 독립한 힘으로 본다. 따라서 그의 노예상태는 절정에 이른다. 이 매개자가 이제 실질적 신이 됨은 분명하다. 이 매개자는 그것이 나에게 매개해주는 것을 통제하는 실질적 권력이기 때문이다. 이제 매개자를 숭배하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이 매개자로부터 분리된 대상들은 그 가치를 잃었다. 대상들은 매개자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원래는 매개자가 대상들을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 같았는데 말이다. 원래의 관계의 이러한 역전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이 매개자는 사유재산의 상실된, 외화된 본질이며, 외화된, 자신의 외부에 있게 된 사유재산이다. 이는 그것이 인간의 소외된 유적 활동, 인간의 생산과 인간의 생산 사이의 외화된 매개인 것과 같다. 따라서 이러한 활동에서 생기는 모든 성질들은 이 매개자에게 귀속된다. 따라서 인간은 이 매개자가 더 부유해질수록 인간으로서는, 즉 이 매개자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는 더 가난해진다.

그리스도는 원래 1) 신에게 인간들을 2) 인간들에게 신을 3) 인간에게 인간들을 재현한다. 이와 유사하게 화폐는 원래 1) 사유재산에게 사유재산을 2) 사유재산에게 사회를 3) 사회에 사유재산을 재현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외화된 신이며 외화된 인간이다. 신은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지고 인간도 그리스도를 재현하는 한에서만 가치를 가진다. 화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사유재산의 화폐 체계로의 발전의 필연성]

왜 사유재산은 화폐 체계로 발전하기 마련인가?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계속 교환을 하기 때문이고 교환은 (사유재산이 전제되면) 가치를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매개과정은 사회적 혹은 인간적 과정이 아니다. 인간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유재산이 사유재산과 맺는 추상적 관계이다. 이 추상적 관계의 표현이 가치이며 가치의 가치로서의 실질적 존재가 화폐를 구성한다. 교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람으로서 관계를 맺기 않기 때문에, 사물들은 인간적, 사적(personal) 재산의 의미를 잃는다. 사유재산의 사유재산에 대한 사회적 관계는 이미 사유재산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관계이다. 이 관계의 대자적 존재형태인 화폐는 따라서 사유재산의 소외, 사유재산의 특수하고 사적인(personal) 본성으로부터의 추상이다.

[일반인의 미신과 경제학자의 세련된 미신]

일반인의 미신(정확하게는 the crude economic superstition of the people and governments) : 귀금속 화폐가 부의 유일한 실재이다.

경제학자의 세련된 미신 : 경제학자는 추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모든 상품들에 존재함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전자와 다르지만, 결국 같다. 교환가치 = 화폐 = 귀금속.

양자는 뿌리가 같기 때문에 후자의 미신은 전자의 미신을 대체하지 못한다.

[화폐의 본질로서의 추상성]

화폐의 화폐로서의 개체적 존재는 더 추상적일수록, 다른 상품들과 자연적 관계를 덜 가질수록 화폐의 본질에 더 상응한다. 따라서 종이화폐와 종이로 된 화폐 재현물들이 화폐로서의 화폐의 더 완벽한 존재양태이며 화폐 체계의 발전에서 필연적 요인이다.

[신용과 인간 소외]

은행에서 완벽하게 표현되는 신용 체계에서는 낯선 물리력의 힘이 깨지고 자기소외의 관계가 폐지되며 인간과 인간의 인간적 관계가 다시 들어서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쌩시몽주의자들은 이 외관에 속아서 지폐, 신용, 은행의 발전을 분리(인간의 사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 사유재산의 화폐로부터의 분리, 화폐의 인간으로부터의 분리)의 점진적 폐지로 보았다. 따라서 조직된 은행 체계가 그들의 이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외 폐지는 겉모습일 뿐이다. 자기소외는 그 원소가 더 이상 상품, 금속, 종이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실존, 인간의 사회적 실존, 그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외관 아래 드높은 불신과 완전한 소외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더 파렴치하고 극단적으로 된다. 무엇이 신용의 본질을 구성하는가? 여기서 신용의 내용, 즉 화폐는 제쳐놓기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이 일정한 양의 가치를 선대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이러한 신뢰 메커니즘의 내용은 제쳐놓기로 한다.

 

[신용의 두 가지 관계와 두 가지 상이한 조건]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정치경제학의 낭만적감상적 부분. 일탈, 과도, 예외. 규칙이 아님. 그렇더라도 이러한 경우 가난한 사람의 삶, 재능, 활동은 빌려준 부자에게 상환의 보장으로서 복무한다. 그 가난한 사람의 사회적 덕과 그의 활발한 활동의 내용, 그의 실존 자체가 부자에게는 그의 원금을 관습적 이자와 함께 상환하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의 죽음이 채권자에게 가장 안 좋은 일이다. 원금과 이자의 죽음이다. 우리는 신용관계에서 일어나듯이 인간의 가치를 화폐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신용이 제공되었을 때

신용은 단지 교환을 촉진하는 매개물이다. 즉 완전히 관념적형태로 끌어올려진 화폐이다. 신용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경제적 판단이다. 신용에서는 금속이나 종이가 아니라 인간 자신이 교환의 매개자가 된다다만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원금과 이자의 존재양태로서이다. 따라서 교환매체는 그 물질적 형태를 벗어나 돌아와서 다시 인간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이는 인간 자신이 자신의 외부에 놓여서 그 자신이 물질적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신용관계 내에서는 화폐가 지양되어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인간 자신이 화폐로 된다. 혹은 화폐가 인간에 통합된다. 인간의 개인성, 인간의 도덕성 자체가 사업의 대상이 되고, 화폐의 질료가 된다. 화폐의 정신의 물질적, 신체적 형태를 구성하는 것은 이제 나의 개인적 실존, 나의 피와 살, 나의 사회적 덕과 중요성이다. 신용은 더 이상 화폐의 가치를 화폐로 용해(현실화)하지 않고 인간의 살과 인간의 심장으로 용해(현실화)한다. 바로 이런 정도로 거짓된 체제 내의 모든 진보와 모든 비일관성들은 극단적 퇴보와 사악함의 극단적 귀결이 된다.

 

[소외된 신용의 본성의 이중적 작동 방식]

신용 체계에서, 인간의 극단적으로 경제적인 평가라는 외관을 띤,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신용의 본성은 이중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1) 자본가와 노동자, 대자본가와 소자본가 사이의 틈이 더 벌어진다. 신용은 새로운 축적의 기회를 이미 가지고 있거나 부자인 사람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혹은 부자의 임의적 재량과 부자의 빈자에 대한 판단이 빈자의 실존 전체를 확인 혹은 부인하고 그의 실존은 전적으로 이러한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2) 상호기만, 위선, 거짓 경건이 극단화되어서, 신용이 없는 사람에게 가난하다는 단순한 판결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 신뢰가 없다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따라서 사회적 천민이요 악인이라는 폄하적인 도덕적 판단이 내려진다. 빈자는 자신의 궁핍에 덧붙여서 이러한 굴욕을, 부자에게 신용을 구걸해야만 하는 굴욕을 겪는다.
3) 위조는 인간이 자신의 인신을 위조화폐로 만듦으로써 일어난다. 이러한 신용관계가 상업의 대상, 상호기만과 오용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도 극명한 것은 불신이 경제적 신뢰의 기초라는 점이다. 신용을 주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불신하는 계산. 신용을 구하는 사람의 사적 삶의 비밀을 파고들기. 경쟁자의 신용을 갑자기 파괴함으로써 그 상대를 전복시키기 위해 일시적 궁핍을 폭로하기 등등. 파산, 유령 기업 등의 체계 전체. 정부 대부의 경우에는 국가가 사람이 차지했던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4) 신용 체계는 은행 체계에서 완성된다. 은행가들의 창출, 은행의 정치적 지배, 은행에의 부의 집중, 이 국가의 경제적 아레이오스파고스(Areios Pagos)[옛 그리스에서 형사 및 민사 항소재판소가 있던 곳 — 정리자]가 화폐 체계의 훌륭한 완성이다.

신용 체계에서는 인간의 도덕적 인정이 신용의 형태를 띠기 때문에, 도덕적 인정의 거짓에 담긴 비밀, 이 도덕성의 비도덕적 사악함이 분명해지고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의 본성과 공동체, 그리고 교환]

교환은―생산 내에서의 인간 활동의 교환과 인간적 산물 사이의 교환 모두―유적 활동 및 유적 정신에 해당한다. 유적 활동 및 유적 정신의 현실적, 의식적 존재양태가 사회적 활동과 사회적 향유이다. 인간 본성이 인간의 진정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본성을 발현함으로써 개별적 개인과 대립하는 추상적인 보편적 힘이 아니라 모든 개인의 본질적 본성인그 자신의 활동이요 삶이요 정신이며 부()인 인간 공동체를사회체를 창출·생산한다. 따라서 이 진정한 공동체는 성찰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개인들의 욕구와 이기주의로 인하여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삶의 활동 자체에 의해서 직접 생산된다. 이 공동체가 존재하느냐 아니냐는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한, 따라서 세계를 인간의 방식으로 조직하지 않는 한, 이 공동체는 소외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 주체인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 추상이 아니라 살아있는 특수한 실제 개인들이 바로 공동체 자체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이들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소외된 인간의 사회는 그의 진정한 공동체의 희화라고, 그의 진정한 유적 삶의 희화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따라서
그의 활동은 그에게 고문으로서 나타나고
그 자신이 창조한 것은 이질적인 힘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부는 가난으로서 나타나고
그를 다른 사람들과 연결시키는 본질적 유대는 비본질적 유대로서 나타나며
다른 한편 그의 동료들로부터의 분리가 그의 진정한 실존양태로서 나타나고
그의 삶은 그의 삶의 희생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본성의 실현은 그의 삶을 비현실적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나타나고
그의 생산은 그의 무의미함의 생산으로서 나타나고
대상에 대한 그의 힘은 대상의 그에 대한 힘으로서 나타나며
그의 창조물의 주인인 그 자신은 이 창조물의 하인으로서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인간의 공동체, 혹은 인간의 본성의 발현,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인 유적 삶을 낳는 인간들의 상호보완 ―이러한 인간의 공동체를 정치경제학은 교환과 무역의 형태로 파악한다. 드 트라시(Destutt de Tracy) : 사회는 일련의 상호교환으로 이루어진다. 아담 스미스 : 사회는 상업 사회이다. 구성원 모두가 상인이다.

정치경제학은 실제 과정이 그렇듯이 재산소유자와 재산소유자의 관계로서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만일 인간이 재산소유자로서 전제되면, 사유재산의 상실 혹은 양도는 인간 자체의 소외이다. 내가 나의 사유재산을 나와의 관계에서만 포기하면 나는 나의 사유재산을 포기하면서 자연에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사유재산이 되기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사유재산이 될 때, 나의 사유재산은 소외된(alienated) 사유재산이 된다. 폭력의 경우를 제외하면 나의 사유재산을 남에게 양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경제학은 ‘필요, 욕구’라고 정확하게 대답한다. 나에게 없으면 안 되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두 재산소유자를 서로 묶어주는 유대는 그들의 사유재산의 질료를 이루는 특수한 종류의 대상(객체)이다. 이 두 대상에 대한 욕망, 즉 욕구는 ① 사적 소유 말고 다른 본질적 관계가 있음을 ② 자신이 개별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생산물(다른 사람의 노동 포함)에 대해 내적 소유(inner ownership)의 관계에 있는 총체적 존재(a total being)라는 것을 각 재산소유자들에게 보여주고 의식하게 해준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욕구야말로 그 사물이 나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그것이 나를 위해 존재함을, 그 속성(property)은 나의 본질의 속성(독특성)이라는 것을 가장 명백하고 반박 불가능하게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산소유자들은 자신의 사유재산을 내놓도록 추동되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사적 소유를 확정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 즉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서 사유재산을 포기한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의 사유재산의 일부를 다른 이에게 양도한다(alienates).

따라서 두 재산소유자의 사회적 관계는 소외 속에서의 상호성이다. 양쪽에 소외의 관계를 정립하거나, 두 재산소유자들의 관계로서의 소외를 정립한다. 이와 달리 단순한 사적 소유에서는 소외(양도)가 자신과 관련해서만, 일면적으로만 일어난다.

따라서 교환 혹은 물물교환은 사적 소유권 내에서의 사회적 행동, 유적 행동, 공동체, 사회적 교섭 및 통합이며 따라서 외적인, 소외된 유적 행동이다. 바로 이 때문에 물물교환으로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바로 이 때문에 사회적 관계의 반대이다.

사유재산의 상호양도로 인하여 사유재산 자체가 소외된 사유재산의 범주로 떨어진다. 1) 이제 그 소유자의 노동의, 그의 뚜렷한 개인성의 생산물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생산자에게서 분리되어서 생산자가 아닌 다른 사람 개인에게 특수한 중요성을 띠기 시작했다. 2) 다른 사유재산과 동등한 위치에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상이한 종류의 사유재산들이 서로 자리를 교환한다. 서로가 서로를 재현하고 대체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실존방식은 대체물등가물의 방식이 되었다. 자신과의 직접적 통일성 대신에 그것은 이제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등가물로서의 존재방식은 더 이상 사유재산의 특수한 존재방식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사유재산은 가치가 되었고 곧 교환가치가 되었다. 가치로서의 그것의 존재방식은 자신의 직접적 존재와는 다른 자신, 그 특수한 본성의 외부에 있는 자신을 소외된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단지 상대적인 존재방식이다.

이 가치가 어떻게 정확하게 결정되는가, 그것이 어떻게 가격이 되는가는 다른 곳에서 서술될 것이다.

[소외된 노동]

교환관계가 전제되면, 노동은 직접적으로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된다. 소외된 노동의 이러한 관계는
1)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과 노동자의 생산물이 그의 욕구나 노동자로서의 기능과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고, 양 측면이 노동자에게 이질적인 사회적 결합에 의해서 결정될 때에만
2) 생산물을 사는 사람은 그 자신 생산자가 아니고 다른 어떤 사람이 생산한 것으로써 교환할 때에만
그 정점에 도달한다.

조야한 형태의 사적 소유(물물교환)의 경우에는 생산자들이 잉여 생산물만 서로 교환했다. 노동이 그의 직접적인 생존의 원천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의 개인적 실존의 표현이었다. 교환을 통해 그의 노동은 부분적으로 소득의 원천이 된다. 이제 노동의 목적이 노동의 존재방식과 다르다. 생산물은 가치, 교환가치, 등가물로서 생산되며 생산자와의 직접적, 개인적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생산이 더 다양해지고 따라서 욕구가 더 다양해지고, 다른 한편으로 생산자의 활동이 더 일면적이 될수록, 그의 노동은 더욱더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의 범주로 떨어진다. 그러다 마침내 생계를 벌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만이 남는다. 생산자와 생산물의 관계가 직접적 향유와 개인적 욕구의 관계이냐 아니냐, 또한 그의 노동활동이 그의 개인성의 향유와 그의 자연적 능력과 정신적 목적의 실현이냐 아니냐는 매우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 된다.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함축하는 것은
1) 노동과 노동주체의 괴리와 우연한 연관
2) 노동과 노동대상 사이의 괴리와 우연한 연관
3) 노동자의 역할은 노동자에게 이질적인 사회적 욕구들과 노동자가 이기적 필요로 인해서 승복하는 강제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적 욕구는 노동자의 긴급한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일 뿐이며 노동자는 그 욕구의 노예로서만 존재한다.
4) 노동자에게는 그의 개인적 실존의 유지가 활동의 목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오로지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는 생존수단(means of subsistence)을 벌기 위해서 자신의 삶의 활동(life’s activity)을 수행한다.

따라서 사회적 힘이 사적 소유의 관계에서 더 크고 발전된 것으로 나타날수록 인간은 더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되게 된다.

생산물의 상호교환이 교역으로 나타나듯이, 활동 자체의 상호보완과 교환은 분업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간을 가능한 한 추상적 존재로, 기계도구와 같은 것으로 변형시킨다. 정신적·물리적 괴물(a spiritual and physical monster)로 변형시킨다.

사람들이 분업이라고만 생각하는 바의 것은 다름 아닌 인간 노동의 통일성이다. 분업으로만 간주되는 것은, 사회적 본성이 그 반대의 것으로서, 소외의 형태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분업은 문명이 발달할수록 증가한다.

분업이 전제되면, 생산물(사유재산의 물질적 존재)은 개인에게 점점 더 등가물로서의 의미를 띤다. 이제는 더 이상 잉여만을 교환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생산 대상은 그에게 무관한 문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즉각 필요로 하는 어떤 것과 바꾸지도 않는다. 등가물은 화폐의 형태로 등가물로서 등장한다. 이제는 생계 및 교환매체를 얻는 것이 노동의 즉각적인 결과이다.

소외된 사물이 인간을 완전하게 지배하는 것은 화폐에서 명백해진다. 화폐는 질료의 본성과 소유자의 인격에 완전히 무차별적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였던 것이 이제 사물의 인간에 대한생산물의 생산자에 대한 일반적 지배가 되었다. 등가물(가치) 개념이 이미 사유재산의 소외를 함축했듯이, 화폐는 이러한 소외의 감각적, 대상적 현존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정치경제학은 이러한 전개 전체를 사실로서만, 우연한 필연성의 결과로서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노동의 자기로부터의 분리, 노동자의 자본가로부터의 분리, 노동과 자본의 분리―그 본래적 형태는 토지 재산과 동산의 분리로 구성된다. 사유재산의 본래적 결정요인은 독점이다. 따라서 그것이 창출하는 정치체제는 독점의 정치체제이다. 완전한 독점은 경쟁이다.

경제학자에게 생산, 소비,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교환 혹은 분배는 분리된 활동이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 행동과 정신의 분리는 (개인들 사이에서든 한 개인에게서든) 노동의 그 목적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무언가 정신적인 것으로서의 자신으로부터의 분리이다. 사적 소유는 분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노동, 자본, 토지재산의 상호분리는
노동의 노동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자본으로부터의 분리, 토지재산의 토지재산으로부터의 분리처럼
노동의 임금으로부터의 분리, 자본의 이윤으로부터의 분리, 이윤의 이자로부터의 분리처럼
토지재산의 지대로부터의 분리처럼
자기소외를 자기소외의 형태로, 그리고 동시에 상호소외의 형태로 보여준다.

(밀로부터의 발췌 부분 생략)

여기서 밀은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교환을 분석한다.

가지기 위해서 생산하는 것이 사적 소유의 기본적 전제이다. 인간이 생산하는 대상은 그의 직접적인 이기적 욕구의 대상화이다. 따라서 미개와 야만 상태에서는 인간의 생산의 양이 그의 직접적 욕구의 범위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 내용은 생산된 객체(대상) 그 자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욕구의 한계가 생산의 한계를 이룬다. 수요와 공급이 정확히 일치하고, 생산은 욕구에 의해 측정된다. 교환은 일어나지 않거나, 자신의 노동을 그 노동의 산물과 교환하는 것으로 축소된다. 이런 교환은 실질적 교환의 잠재태, 맹아이다.

교환이 발생하자마자 직접적 소유의 한계 너머 잉여가 생산되지만, 이 잉여생산은 이기적 욕구를 넘어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생산을 통해 간접적으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식이다. 생산은 생계를 버는 수단,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이 되었다. 앞의 경우에는 욕구가 생산의 척도인데, 지금의 경우에는 생산 혹은 생산물의 소유권이 욕구가 얼마나 충족되는가의 척도이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생산하고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생산의 결과물은 당신과 거의 관계가 없다. 우리의 생산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산물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향유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각자의 생산물에 관한 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교환 또한 나의 생산물이 (당신의 본성의 대상화이기에) 당신을 위한 것이 되도록 매개해주는 과정이 될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우리가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생산물들 사이를 연결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교환은 우리가 서로의 생산물에 대해서, 따라서 상대방의 생산물에 대해서 가지는 관계의 성격을 가동시킬 뿐, 확인할 뿐이다. 우리 각자는 자신의 생산물에서 자신의 고유한 이기적인 욕구의 대상화를 볼 뿐이며, 따라서 상대방의 생산물에서 또 하나의 상이한 이기적 욕구의 대상화를 볼 뿐이다.

물론 당신은 나의 생산물과 인간적 관계를 맺는다. 나의 생산물은 당신의 욕망과 의지의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의 욕구, 욕망, 의지는 나의 생산물에 관하여 무력하다. 당신의 인간적 본성이 이 생산물을 장악하는 힘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생산물에서 당신이 인정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의 욕구, 욕망은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끈이 된다. 나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위치에 놓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직접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대상을 생산한다면, 나의 잉여 생산은 교묘하게도 당신의 욕구에 맞추어 계산된 것이다. 이 대상의 잉여를 내가 생산한다는 것은 외관상으로만 그렇다. 실제로 나는 그것과는 다른 대상, 당신의 생산의 대상을 생산한다.((맑스는 여기서 (그의 나중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사용가치(“외관”)와 함께 교환가치(“다른 대상”)를 생산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상품에 담긴 노동의 이중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입증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Diese zwieschlächtige Natur der in der Ware enthaltenen Arbeit ist zuerst von mir kritisch nachgewiesen worden.))) 이것을 나는 이 잉여물과 맞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이 교환을 나는 마음속에서 미리 완성한다. 따라서 내가 당신과 맺는 사회적 관계, 당신의 욕구에 맞추어진 나의 노동이란 단지 가상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보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한갓 가상이다. 이 가상의 토대는 상호약탈이다. 약탈의, 기만의 의도가 필연적으로 배경에 존재한다. 우리의 교환은 당신 쪽에서나 내 쪽에서나 이기적인 것이기에, 그리고 각자의 이기심이 서로 상대를 누르려고 하기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서로를 기만하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나의 대상에게 귀속시키는, 당신에 대해 가지는 힘은 그것이 실제적 힘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대상들 각각이 가지는 힘에 대한 상호인정은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승자는 열정, 힘, 통찰, 명민함을 더 가진 자이다. 만일 내가 충분한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당신을 직접 약탈할 것이다. 만일 물리력이 사용될 수 없다면 우리는 허풍으로 상대를 속이려 한다. 더 명민한 쪽이 상대를 속인다. 관계의 총체를 놓고 말하자면, 누가 누구를 속이는가는 우연의 문제이다. 모두가 속이려는 생각, 의도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판단으로는 상대를 속인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서 교환은 필연적으로 양측이 생산하고 소유한 대상에 의해 매개된다. 물론 우리가 각자 생산한 대상에 대한 관념적 관계는 우리 서로의 욕구이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관계는 각 생산물에 대한 상호배제적인 소유((상호배제적인 소유와 반대되는 것이 공유(sharing)이다. 지금은 공유 자체가 자본의 착취(사유 재산으로의 전유)를 위한 조건을 이루기도 한다.))일 뿐이다. 나의 물건에 대한 당신의 욕구에 나의 주목을 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나의 대상의 등가인 당신의 대상뿐이다. 따라서 우리 각자의 생산물은 우리 서로의 욕구의 수단, 매개자, 도구, 인정된 힘이다. 따라서 당신의 요구(수요)와 당신이 소유한 등가물이 나에게는 동일한 중요성과 타당성을 가진 조건들이며, 당신의 요구는 나와의 관계에서 의미와 효과를 가질 때에만 그 효과로 인해서 의미를 획득한다. 이 도구가 없이 맨 손의 인간으로서 당신이 요구를 한다면, 그 야망은 충족되지 못하는 야망이며 그 생각은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생각이다. 따라서 나 자신이 나의 대상과 인간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신도 나의 대상과 인간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수단이 바로 대상을 지배하는 진정한 힘이며, 따라서 우리는 서로 각자의 생산물들을 상대를 지배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힘으로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생산물이 우리에게 봉기를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소유물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것의 소유물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한 소유(property)에서 배제된다. 우리의 소유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유일하게 알 수 있는 언어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대상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인간의 언어는 효력을 잃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한 측에 의해서는 그것이 청원, 탄원으로, 따라서 굴욕으로 인식되고 느껴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수치, 격하의 느낌으로 말해질 것이다. 다른 측에서 의해서는 그것이 뻔뻔스러움, 혹은 광기로 간주될 것이며 따라서 그러한 것으로서 거부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본질적 본성으로부터 매우 소외되어서, 이 본질적 본성의 직접적 언어는 우리에게 인간의 존엄성의 위반인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물질적 가치의 소외된 언어는 자신만만하고 스스로를 의식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잘 정당화된 주장인 것처럼 보일 정도가 된다.

당신의 눈에는 당신의 생산물이 나의 생산물을 취해서 당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도구, 수단이지만, 나의 눈에 그것은 우리의 교환의 목적이다. 나에게 당신은 나의 목적인 이 대상을 생산할 수단이고 도구이다. 당신이 나의 대상에 대하여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1) 우리 각자는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을 취급하는 대로 행동한다. 당신은 나의 대상을 손에 넣기 위해서 실제로 자신을 수단으로, 도구로, 당신 자신의 대상의 생산자로 만든 것이다. 2) 당신 자신의 대상은 당신에게는 나의 대상의 감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덮개, 숨겨진 형상일 뿐이다. 그것의 생산이 나의 대상의 획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당신은 당신의 대상의 수단, 도구가 된 셈이다. 당신의 욕망은 당신의 대상의 하인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대상에 대한 우리 모두의 종속은 이제 실제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적 관계의 거칠고 정직한 표현이다.

우리의 상호적 가치는 우리의 대상의 상호적 가치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인간 자신은 상호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소외되지 않은 경제에서라면]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산을 수행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들 각각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 자신과 타인을 긍정한 것이 된다. 1) 나의 생산에서 나는 나의 개성(individuality)을, 그 고유성을 대상화한 것이 되며 따라서 활동을 하는 동안 나의 삶이 독특하게 표현된 것을 향유하게 될 뿐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볼 때에는 나의 개인성이 대상화되어 감각에 감지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개인성이 의심의 여지없이 하나의 힘임을 아는 독특한 즐거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2) 나의 생산물을 당신이 향유하거나 사용할 때 나는 나의 일로써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것을, 즉 인간의 본질적 본성을 대상화했다는 것을 아는 직접적 즐거움을 누리고 그와 동시에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의 본질적 본성에 따른 욕구에 상응하는 대상을 창출했다는 것을 아는 직접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3) 나는 당신에게 당신과 유[인류] 사이의 매개자가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당신 자신에 의해서 당신 자신의 본질적 본성을 보완해주는 존재로서, 그리고 당신 자신의 필요한 부분으로서 인정받고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 자신이 당신의 사고에서나 당신의 사랑에서나 긍정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4) 내가 개인적으로 나의 삶을 표현하는 가운데 나는 직접적으로 당신의 삶이 당신 방식으로 표현되도록 만든 것이 될 것이며, 따라서 나의 개인적인 활동에서 나는 나의 진정한 본성을, 나의 인간적 본성을, 나의 공동체적 본질을 직접 확인하고 실현한 것이 될 것이다. (* 이 단락은 전체 번역)

우리 생산물들은 우리의 본질적 본성을 비추는 거울들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관계는 상호적이 될 것이다. 내 쪽에서 일어나는 것이 당신 쪽에서도 일어난다.

나의 노동은 삶의 자유로운 표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삶의 향유가 될 것이다.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노동은 삶의 소외이다. 살기 위해서, 나의 몫의 삶의 수단을 획득하기 위해서 노동하기 때문이다. 나의 노동은 나의 삶이 아니다.

둘째, 나의 개성의 고유성이 나의 노동에서 긍정될 것이다. 노동이 나의 개인적 삶의 긍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은 진정한, 활동적 속성(property)이 될 것이다. 사적 소유를 전제하면, 나의 개성이 소외되어 이 활동은 나에게 증오스러운 것이 되고 고문이 된다. 활동의 가상이다. 따라서 강제된 활동, 내적이고 본질적인 욕구를 통하지 않고 외적인 우연한 욕구를 통해서 나에게 부과된 활동일 뿐이다.

 

소외되지 않은 상태

소외된 상태

생산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위한 생산(이라는 의미에서의 사회적 생산), 사용가치의 생산

교환을 위한 생산, 교환가치의 생산

생산물

생산자의 본성의 발현. 생산자의 존재가 생산물에서 확증된다.

욕구의 대상. 생산자는 생산물에 의존한다.

생산자들의

상호관계

공동생산, 공동향유.

교환. 사유재산의 소유자들로서의 관계, 상인 대 상인의 관계

매개

(사회화)

인간에 의한 매개

화폐에 의한 매개 → 인간의 노예화

공동체

(사회)

인간의 본성의 발현

교환과 무역이 이루어지는 곳

삶의 활동

삶의 자유로운 표현

생계를 벌기 위한 노동, 교환가치를 벌기 위한 노동

사유재산

생산의 자연적 조건, 생산자의 ‘비유기적인 몸’

등가물, 가치

소유

공유

상호배제적인 사적 소유

욕구

내적이고 본질적인 욕구

외적인 우연한 욕구

 

‘바쁜 생활을 하나 보죠?’
‘그래요. 나는 항상 사람들 중 누군가를 찾아보아야 하고, 무언가를 돌보아야 해요. 그러나 나는 일을 좋아해요.’ 조금 더 빨리 가면서 팽크스가 말했다. ‘사람이 일 말고 무얼 하러 생겨났겠어요?’
‘일만을 위해 생겨난 걸까요?’ 클레남이 말했다.
팽크스는 되물었다. ‘다른 뭐요?’
(찰스 디킨즈, 『리틀 도릿』)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발표문
  • 설명 : 아래는 2018년 5월 2일 경의선공유지에서 열렸던 <2018 커먼즈네트워크 워크숍>의 기조발제문에 조금 더 손을 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출처 표시가 잘못된 주석 하나를 바로잡았고 본문과 주석에 몇 대목을 추가적으로 삽입했다. 추가된 부분은 전체 글의 흐름과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종의 방주로 간주되면 된다.

    말이 기조발제지 사실은 그 자리에 손님으로 가면서 맡은 것이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들이 초청한 것이라서 커먼즈 운동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항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작성했으나 상당히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커먼즈 운동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청중이 당연히 있었고 이 분들은 기조발제를 듣고 ‘뭔 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을 전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해서 많은 내용을 주석으로 내려서 나중에 텍스트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본문도 다 소화 못할까봐 읽을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미리 생각해서 갔는데 그나마 그렇게 준비한 부분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더 늘리더라도 여기에 올리면 누구라도 이 발제문을 찬찬히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먼즈 운동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선 이 블로그에 최근에 올려진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의 가장 최근의 대담을 참조하고 이에 덧붙여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49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안근대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커먼즈 운동을 포함한 여러 운동들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인데—이란 ‘역근세수’와 ‘환골탈태’의 과정이 몸과 정신에서 공히 일어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의 몸과 정신의 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온갖 근대적 물신들(굳어진 사고·감정·행동의 습관들)을 씻어내야 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록 조그만 것일지라도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유형의 습관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쉬운 말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근대적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신들을 싹 씻어낸 후에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11장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되기’의 소박함으로, 혹은 “풀과 순수한 물 조금”의 단순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파일에서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 안의 주석 두 개가 누락되었다. 한글파일을 그대로 전환한 pdf 파일을 아래 첨부한다.

    Download (커먼즈-운동과-삶정치-발제문수정확대판.pdf, PDF)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커먼즈 운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커먼즈 운동을 조금 소개해왔을 뿐 이 운동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저로서는 커먼즈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을 듯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미’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의 이론에 비추어 보는 것일 듯합니다. 제가 삶정치론을 나름대로 공부하며 다듬다가 커먼즈 운동을 알게 되었고((네그리·하트의 저작에서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게 되었으며, 둘째 번역서인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번역하면서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데이빗 볼리어(David Bolier)를, 그리고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던 공부와의 연관성 때문에 커먼즈 운동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커먼즈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커먼즈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삶정치론은 탈근대(여기서는 시기를 가리키며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68년 혁명 이후, 혹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난 이후를 말합니다)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즉 한편으로는 소외의 극단적 심화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일반화 가능성을 낳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둡니다. 소외의 극단적 심화란 삶권력(biopower)의 등장—가령 자본이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저항의 일반화란 이렇게 대립구도가 ‘권력 대 권력’의 구도((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구도로서 홉스 이후 거의 모든 정치학은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공식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가 아니라 ‘삶 대 삶권력’이 된 상황에서는 삶이 있는 모든 곳에 저항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소외의 문제를 가장 먼저 명시적으로 제기한 것은 맑스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근대주의자들(국가자본주의자들)로 전환되면서((‘소외’를 제시할 때의 맑스를 초기의 맑스, 즉 아직 미숙한 맑스로 보는 태도가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미숙하지 않다고 평가받을 여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한 일 가운데에는 자본의 논리와 관점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도 속합니다. 가령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레닌과 스위지(Paul Sweez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자본가들 사이의 내적 동학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노동자들의 불가피한 봉기로서 예측하는 것은 그저 이 동학의 설명되지 않은 부산물로서만 나타난다.”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p.191. 이 저작에는 이런 취지의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묻혀 버립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근대화 경쟁을 하는 구도(‘냉전’)는 바로 이러한 전환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성숙기의 맑스가 소외의 문제를 잊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소외’라는 제목이 딸린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내용상으로는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생산의 원래적 조건들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성들 사이의 자연적 과정을 통한 인간의 수의 점증하는 수의 재생산은― 이 재생산은 일면으로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전유로 나타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형성으로서, 객체들의 주체적 목적에의 종속으로 나타난다. 주체적 활동의 결과들과 저장고들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래 그 자체가 생산물이 될 수는 없다. 즉 생산의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있는 활동적인 인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 사이의 통일이 아니라, 따라서 자연의 전유가 아니라, 이 인간실존의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적 실존 사이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489. 이 외에 『자본론』 3권의 이곳저곳에서도 소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소외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성숙기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이는 곧 소외의 정점입니다—에서 자본주의를 즉 소외를 넘어서는 조건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자본의 한계를 말하는 여러 대목이 있는데 한 대목만 들어봅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Grundrisse, p. 749.))

맑스의 진의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소외’의 문제를 파묻어버린 것과는 달리, 20세기 중반부터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온 일련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푸꼬의 삶권력/삶정치론((푸꼬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실제 혹은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 달리 말하자면 권력을 사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파훼했습니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27.)), 들뢰즈·가따리의 삶의 철학((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의 철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생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발제의 편의상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들뢰즈·가따리가 ‘삶’(vie, life)라는 말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일단 쓰는 경우에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재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은 ‘삶의 평면’(a plane of life)과 동의어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대목은 그들의 가장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에도 몇 군데 나오지만짧지만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몇 페이지로 압축한 글 「내재성 : 하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이 계보가 푸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앞에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가 있습니다. ‘삶권력’, ‘삶정치’라는 말은 푸꼬가 만든 말인데, 푸꼬는 양자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네그리·하트에게서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립되는 ‘삶의 정치’라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발제문에서 ‘삶정치’는 기본적으로 네그리·하트의 사용에 따릅니다.)) 이 계보는 자본주의를 ‘삶권력’—삶을 장악한 권력—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소외의 문제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삶의 힘(삶의 활력)을 저항의 힘으로서 새로이 부각시킵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경우 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비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권력(자본가가 권력)에 권력(노동자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추구되었는데, 이제 삶정치에서는 ‘삶 대 권력’이 기본적인 적대관계를 구성합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권력이 삶을 목표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때 권력에의 저항은 이미 삶의 편에 서며 삶을 권력에 대립시킨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통제하는 데 몰두하는 체제에 대립시켜지게 된다. / (···) 외부로부터 오는 힘은 푸꼬의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활력주의(vitalism)가 아니던가? 삶은 권력에 대항하는 이 능력이 아니던가? ��병원의 탄생��부터 줄곧 푸꼬는, 삶을 죽음에 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활력주의를 창안한 비샤(Bichat)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에게만이 아니라 푸꼬에게도 인간의 죽음에 대항하는 힘들과 기능들의 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일단 인간적 훈육으로부터 해방되면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푸꼬는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Gilles Deleuze, Foucault, p.92. (인용자의 강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삶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놓겠습니다.((영어로든 대부분의 유럽어로든 양자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양자를 ‘bios’(삶)와 ‘zoe’(생명)라는 희랍어로 구분합니다.)) 삶은 존재론적 원리이자 힘(활력)입니다.((이기묘합(理氣妙合)입니다.)) 생명은 에고로서의 개체가 활력을 받아서 자신의 생물학적 실존을 유지하는 힘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개체들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주체성을 구성하고 그로써 하나의 온전하고 뚜렷한 삶의 형태를 개화시키는 힘입니다. 개체의 관점에서는 생명은 출발점이고 삶은 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령 D. H. 로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의의가 아니다.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이것이 최고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운명이다. 즉 미지의 것의 가장자리로 가서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이.((Lawrence. D. H.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441. 들뢰즈·가따리는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체화인 ‘개별 주체로의 개체화’와 ‘삶의 개체화’를 맞세운 바 있습니다. “··· 삶의 개체화는 주체(이는 삶의 개체화를 이끌거나 지탱해준다)의 개체화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평면’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공재의 평면 혹은 각개성(haecceities)들이 모여서 이루는 평면이다. 이는 오직 속도와 정동만을 안다. 후자의 경우는 형식들, 질료들, 주체들로 구성되는 전혀 다른 평면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261.))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의 차원에서의 일이며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은 삶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삶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영원’의 차원에 속합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여 더 설명하자면, 생명은 ‘코나투스’(conatus)에 해당하며, 삶은 ‘코나투스’에서 출발하여 ‘욕구’(appetitus), ‘욕망’(cupiditas)을 거쳐 ‘사랑’(amore,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코나투스(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고, ‘욕구’(appetitus)는 코나투스를 정신과 몸 양자와 연관시킨 것이며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구’입니다. ‘사랑’(amore)은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는지를 알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사유능력(행동능력)의 증가가 가져오는 정동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슬픔’입니다.))))으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 해당합니다. ‘코나투스’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듯이, 생명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삶은 아닙니다.((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이 출발점의 확보(생계수단의 획득)를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 동안 노동력을 팔아도 출발점에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곳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삶은 개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삶형태의 개화—가 목적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① 기존의 삶형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② 새로운 삶형태를 만개((저는 ‘만개’의 한자어 ‘滿開’에 ‘萬開’를 중첩시키고 싶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형태로 만개하다’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시켜야 합니다. 삶정치론은 이 두 가지를 해내는 힘, 이 삶의 힘을 ‘활력’이라고 부르며 권력에 대립시킵니다. 영어를 제외하고 활력과 권력을 따로 부르는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있습니다.

 

권력

활력

라틴어

potestas

potentia

불어

pouvoir

puissance

독일어

Macht

Vermögen

스페인어

poder

potencia

이탈리아어

potere

potenza

영어

power

power

활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이해는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힘은 존재론적으로 본원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그 다음에 옵니다. 권력은 이 달라지는 힘이 발휘되지 않도록, 즉 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 힘입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라는 푸꼬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Vol. 8, NO. 4 (Summer, 1982), P.790.)) 그런데 어떻게 막는 것일까요? 죽임으로써? 죽이는 권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합니다.((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의 경우에는 혹시 모르기에 “일반적으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철학』이라는 책에서 생명을 잃는 ‘외적 죽음’과는 다른 ‘내적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권력에 의해 노예화된 삶을 가리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이것이 바로 ‘내적 죽음’입니다. 현대의 삶권력은 바로 이 ‘내적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양산합니다.)) 그러나 ‘죽임’은 삶권력의 발휘 양태가 아닙니다.((죽이는 것은 개체(에고)의 생명을 취함으로써 그 개체가 하나의 삶형태를 만개할 가능성을 아예 자르는 것인데, 해당 개체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원적인 삶의 활력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활력이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활력이 현실화(육화)되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을 각각 ‘삶의 장’과 ‘현실화의 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삶의 장은 오직 변화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은 활력이 형태를 부여받아 육화되는 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에서 ‘지층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납니다. 지층화한 위계(수직적), 인과(수평적), 틀(3차원적)을 이루는 관계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정적으로 존속하면서 활력이 새로운 형태를 띠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형태로 반복되게 하는 것입니다.((A Thousand Plateaus, p.335.)) 이 지층화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삶권력입니다.

삶권력으로서의 자본은 삶의 활력이 산출하는 차이소(Δ, ‘삶의 잉여가치’ 혹은 ‘초과’((‘삶의 잉여가치’는 들뢰즈·가따리의 용어이고 ‘초과’는 네그리의 용어입니다.)))를 수량화하여 ‘가격’(교환가치)의 형태로 ‘경제’ 체계로 끌어들입니다. 수량화는 척도에의 종속을 전제하며 척도에의 종속은 지층화의 한 양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의 수량화가 필연적으로 (사용가치)의 동질화를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동질화를 동반하는 수량화는 활력의 늘 달라지는 힘을 덮고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달라지는 힘은 현실성의 층에서는 질적인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획이 계속되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공고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성)이 번성하게 됩니다(([추가]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욕망과 사고방식이 자본이 지향하는 방향에 부합하는 주체성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생산·재생산합니다.(증식/축적)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규칙—예컨대 가게에 들어가면 특정 액수의 돈을 물건과 바꾸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몸에 배고 정신에 뱁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동반하는 가치의 수량화(가격화)와 함께 개인들을 사적 소유자이자 교환자(노동자+소비자)로 정착시킵니다. 이는 개인들에 잠재하는 특이한 활력들을 (하이데거의 용어를 끌어다 쓰자면)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된 개인들은 협동과 공감의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경쟁과 배제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의외로 악영향이 큽니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인 많은 좌파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론과 방향이 더 옳다면서) 경쟁해온 것을 보세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서는 이렇듯 ‘배제적 이접’(들뢰즈·가따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활력들을 가둔 울타리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으니까요.[/추가])). 이로써 삶권력으로서 자본이 삶을 포섭하는 작업이 일정하게 완료되는 것입니다.((『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유명한 마쑤미(Brian Massumi)도 최근에 나온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에서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하는 일이 이 Δ를 측정 가능한 이윤/가격의 형태로 포획하는 것으로 봅니다.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

삶정치론의 목표는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단 ‘삶권력으로부터’라는 점에서 삶정치론은 커먼즈 운동과 명시적으로 상통합니다. 커먼즈 운동 또한 (오스트롬의 전통적인 공유지 연구에서부터) ‘국가와 시장(자본) 외부 혹은 너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통적인 공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 삶의 해방의 차원에서도 양자가 상통하는지는 삶정치론이 어떤 구체적 기획을 가지는지를 더 알아보고 커먼즈 운동의 구체적 기획과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삶의 해방’이란 말이 아직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정치론은 이론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하지는 못하며 반대로 커먼즈 운동은 실천적 운동이기에 그 운동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삶정치론의 기획에서 삶이 만개에 이르는 과정은 둘로 나뉩니다. ① 우선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삶권력이 워낙 삶 깊숙이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탈근대에 일어난 자본의 변형은 생산하는 다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삶권력의 포획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일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② 삶권력이 장악했던 그 자리(현실화의 장)에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두 단계 혹은 측면에 상응하여 네그리는 활력을 ‘가난’의 힘과 ‘사랑’의 힘으로 나눕니다. 가난은 권력을 텅 비운 상태(제로 지층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활력의

씨알이 잠재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이 씨알이 활력으로 전개되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삶정치론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형태로 더 구체화한 것이 ‘특이성들의 다중’, ‘공통적인 것’(the common) 그리고 ‘민주주의’ 3자의 관계입니다.

삶정치론의 주체는 ‘다중’입니다.((사실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성 혹은 주체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푸꼬에서 네그리에 이르는 삶정치론자들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양자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는 자본의 생산방식에 일어난 변형(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혹은 삶정치적 생산)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네그리는 그 이전에는 ‘전문 노동자’, ‘대중노동자’, ‘사회적 노동자’의 순서로 이러한 주체 형상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중 이전의 대표적 변혁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위치의 동일함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면, 다중은 자본에 고용되든 아니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서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루어집니다. 다중은 경계가 확정된 어떤 고정된 집단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다중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와 무관합니다.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다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만들고 나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다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다중 만들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다중의 형성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촛불’다중은 한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정된 형태로 남는 식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성들의 다중’ 즉 특이성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이 바로 자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개인’도 근대의 산물—커먼즈를 파괴한 그 근대의 산물—입니다. 커먼즈를 상실한 개별 인간들이 바로 ‘개인’들입니다.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민중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산산이 흩어져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발전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개인’은 “권력의 최초의 효과들 중 하나”입니다.((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5-1976, Translated by David Macey (New York: Picador, 2003) pp.29-30. 이 앞에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29.)) 이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쳐진(종획된) 정신과 몸의 구현물이며((이런 의미에서 소외의 한 양태입니다.)) 사적 소유의 주체입니다. 이제 ‘개인’은 ‘일자’가 되며 ‘정체성’에 정착합니다.((이렇게 개인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관입니다.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도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인간/자연으로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나누면 반드시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남/녀, 어른/아이, 중심/주변 등등의 나눔 짝들을 보세요.))

삶정치론은 여러 특이한 힘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공재하며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리로서의 개인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특이한 힘이란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이 그때그때 다른 것을 각개성(haecceity)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활력의 크기는 이 공재하는 힘들이 얼마나 협동적이냐에 따릅니다. 각 힘들의 Δ들은 사실 서로 상쇄될 수도 있는데 협동의 방식으로 네트워킹되는 경우에는 활력의 상호증가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공재하는 특이한 힘들은 각각 외부의 다른 힘들과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형태의 다중 만들기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어떤 커머너가 여러 커먼즈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핵심은 개인보다는 특이한 힘들 그것들의 협동적 관계입니다. 즉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힘이 그를 거쳐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다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다중’을 말하면 근대적 개인관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중을 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고정된 집단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다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이성, 특이한 활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시선의 일부가 늘 예의 ‘삶의 장’에 두어져 있고 거기서 활력을 받아오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다른 운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커먼즈 운동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필요상 한 커먼즈 내의 커머너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특이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장’에 접속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것이 무엇이든)에 그치는 운동이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커먼즈 운동과 연관된 이론가나 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궁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데이빗 볼리어의 Think Like a Commoner(한국어판 배수현 옮김『공유인으로 사고하라』갈무리 2015)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에 소개되는 베버(Andreas Weber)의 연구 —이는 ‘Enlivenment’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커머너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삶의 장’에 접속하는 훈련을 하는 것, 즉 사물을 포함한 주위세계와의 동지의식을 양성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 특이성(singularity)은 스피노자에게서 와서 푸꼬((푸꼬의 경우에는 가령 ‘다양체론’(‘모든 사물은 다양체이다’)이 특이성에 대한 인식에 속합니다. 믈론 더 파고 들어가면 이뿐만이 아니지만요.)), 들뢰즈·가따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네그리·하트에게 이어집니다.((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으로서의 특이성도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singularitas’, ‘singularity’, ‘singularité’, ‘특이성’ 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특이성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발제문에 거론한 철학자들 이전에 영문학 전통에서 ‘특이성’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들뢰즈 사유의 한 원천인 (소설가) 로렌스가 말하는 ‘individuality’는 그 내용은 특이성에 해당합니다.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identity’와 ‘selfhood’— 저는 각각 ‘열린 자아’, ‘닫힌 자아’라고 옮깁니다—가운데 전자는 특이성들에 열린 자아이고 후자는 하나로 단일하게 종획되어 닫힌 자아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문화전통에도 특이성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존재할 것입니다.)) 특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이며 이는 인간의 경우 ‘인격’으로 구현됩니다. 개체를 특이성들의 ‘공재’인 다양체로 보지 않고 단일하게 통일된 상태로 보는 것이 ‘정체성’, ‘인격’입니다.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관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양체이니까요.((‘인격’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을 보려면 http://minamjah.tistory.com/181?category=572143를 참조하세요. 『99개의 테제』에서 마쑤미는 ‘인격화’(personalization)을 개인의 활력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양상의 하나로 봅니다.)) [/추가]

그런데 특이성들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이루어 모여 있더라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조건으로 해서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것이 다시 갱신된 다중의 새로운 활동 조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통적인 것이 갱신되고 이와 함께 다중도 갱신됩니다.((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때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는 정동이나 제스처처럼 대부분 공통적이며, 만일 사적이거나 공적인 것이 된다면—즉 단어·어구·품사의 많은 부분이 사적 소유나 공적 권위에 종속된다면—표현·창조·소통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공통체』(사월의책 2014) 17-18면.))

공통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삶정치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네그리·하트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귀족제입니다. 선출된 소수의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처럼 통치의 한 방식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이 통치라면 ‘자기통치’입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일반의지’(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다중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의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절대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과연 다중을 구성하는 모두가 자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네그리와 하트는 “러시아 민중은 작업장에서 종속과 감독 그리고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도록 훈련받았으며, 직장에 상사가 있기에 정치에서도 상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견해((『공통체』 256면.))를 소개한 후에 ① 자본주의의 기술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생산의 방식— 삶정치적 생산—이 다중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② 혹시 아직 훈련이 덜 되었더라도 민주주의의 훈련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는 곳이며 민주주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커먼즈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삶정치론의 민주주의론은 그 복잡한 디테일을 덜고 나면 커먼즈의 민주주의와 바로 통하는 것입니다.((물론 사회 전체에는 아직 ‘지도층’이 건재합니다. 따라서 삶정치론이 비록 지도자의 부재를 지향할지라도 실제 현실에 지도자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를 향한 경향을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집회』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향을 ‘전략과 전술의 전도’에서 읽어냅니다. 과거에는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지난 촛불에서 일정한 만큼 목격했던 바입니다. 전체적인 방향 즉 전략을 결정한 것은 촛불다중이지 지도부들이 아닙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강한 친화성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커먼즈(commons)의 어휘상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표면상의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옮긴이] 이는 커먼즈 역사가인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말이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 p.5.))

여기서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란 삶정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이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부단히 공통적인 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통하고, “프로토콜”은 참여자 모두에 의한 거버넌스의 규칙이라는 점에서 다중의 민주주의와 통하며, “자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먼즈나 공통적인 것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공통재(common goods)를 포함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고 주체적 활동의 측면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커머너’(commoner)는 다중에 속한 한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네그리·하트도 『선언』(Declaration, 2012)에서 ‘커머너’와 ‘커머닝’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정치론에 들어와있는 용어처럼 설명합니다. 커머너의 커머닝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으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New York: Argo Navis Author Services, 2012). Declaration, p. 105. 이 대목은 조금 길지만 읽을 가치가 있기에 뒤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에 바라는 바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는 초기의 태도에서 진전된 것입니다. 2004년에 네그리·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용어를 피하고 ‘공통적인 것’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커먼즈라고 부르기를 꺼리는데, 커먼즈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적인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더 어색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그 철학적 내용을 더 부각시키며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한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2004) p.xv.))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9년이고 P2P재단은 2005년에 창립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블로그는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2004년의 네그리·하트로서는 커먼즈를 전자본주의적인 공유지 이외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커먼즈가 전통적인 공유지의 협소함—이것을 이유로 오스트롬의 커먼즈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에서 시원하게 벗어난 것은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입니다. 이로써 커먼즈 운동에 전지구적 차원이 부여되고, 이는 DG-ML(Design globally, manufacture locally)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P2P 생산양식의 더 구체화인 형태)을 다듬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점도 삶정치론과 묘하게 통합니다. 네그리·하트가 다듬어낸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나중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의 기술적 변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변형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커먼즈 운동이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는 다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개념으로서 다듬어지는 계기와 동일합니다.

흥미롭게도 네그리·하트는 가장 최근의 책 『집회』(Assembly, 2017)에서 ‘공유지의 비극’론과 함께 그것을 반박하는 오스트롬을 명확하게 거론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 96. 이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부의 사용과 부에의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통적인 것의 현대적 적합성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저작을 쓴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바르게도 거버넌스와 제도의 필요에 초점을 둔다. 오스트롬은 모든 부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황폐해지지 않게 보존되려면 공적 재산이 되거나 사유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공유지의 비극’류의 주장들 모두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녀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s)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이 관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는 반대한다. 집단적인 형태의 자주관리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규칙이 고안되고 수정되며, 또한 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시행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의 재산 배치.’”))

둘째 문장의 경우 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이후 커먼즈 운동이 규모의 한계를 부수고 발전하고 있는 지금 그 초석을 놓았을 뿐인 오스트롬(과 그녀의 연구의 대상인 전통적인 형태의 커먼즈)을 놓고 저렇게 비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커먼즈는 다중처럼 언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볼리어가 말했듯이 “커먼즈는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접근, 이용, 장기적 돌봄을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2014), p. 128.)) 그리고 그 규모는 지역 너머, 일국 너머, 대륙 너머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바우엔스 등의 커먼즈 활동가들 또한 네그리·하트처럼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의 포부가 네그리·하트의 포부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집회』에서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대목((Assembly, 15장 2절))과 「커먼즈 이행과 P2P 입문」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나중에 더 확장되어 http://commonstransition.org/commons-transition-p2p-primer/에 올려져 있습니다.)), 2017년 3월)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커먼즈의 (정치적) 확대를 말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움직임을 말한 것이므로 일단 정치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표에는 여기에 경제 영역의 유사성도 추가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삶정치

커먼즈 운동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작은 규모로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운동단체들, 엑서더스

커먼즈의 생산공동체 자체

국가와의 관계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가령, 민중의 ‘하인’이 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파트너 국가론 : 생산공동체를 국가의 법의 틀에서 합법화하는 비영리 지원단체들의 확장1)주석누락

(참고) 자본과의 관계

다중의 기업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헤게모니 전략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2)주석누락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경제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의회’(Assembly of the Commons)가 구상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국 사회의 범위 너머로 확대될 수 있다.

이 표를 보면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친화성이 그 차이를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저 표에서 ‘예시적 정치’라는 항목과 관련해서일 것입니다. 표에서 보듯이 네그리·하트는 운동단체들이 자체 내에서 수립하는 민주주의에 ‘예시적 정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한국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운동단체들의 경우에는 자체 내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촛불 다중의 수평성은 다중 자체가 이룬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다중이 막 형성되던 초기에 특정 운동단체가 지도하려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해외의 경우 1999년 씨애틀 이후에는 특히 소문자 ‘a’의 아나키스트들(anarchists)이 절차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newleftreview.org/II/13/david-graeber-the-new-anarchists 참조.))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 정치’는 필요하지만 예의 ‘세 얼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의 정치를 ‘예시적’이라고 부를 때 이는 단지 필요한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미래의 예시적 현존, 따라서 확대되어야 할 씨알로 보는 것입니다.

커먼즈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제의 예시적 형태들이 이미 존재한다. 커머너들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며 이미 커머닝을 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커먼즈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Michel Bauwens, Vasilis Kostakis, Stacco Troncoso, Ann Marie Utratel, “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p.47.))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고정된 조직화 형태를 모델로서 말하지 않고 미지의 상태로 두는 삶정치론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의 발명에 더 강조점을 둔다면, 커먼즈 운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조직 혹은 공동체 형태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고 말입니다.

[추가]

커먼즈 운동은 원리상으로 자본 너머를 지향하지만, 현재 자본에 ‘연루’된 현실을 무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쑤미가 「99개의 테제」에서 ‘창조적 이중성’(creative duplicity)이라고 부른 것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자본 너머’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깨우친다고 해서 바로 자본 너머로 나가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자본주의에 몸을 둔 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굳이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창조적 이중성’입니다.((마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루를 한탄하지 말고 즐기라. 교리상의 용감함으로 남을 비판하며 지배하지 말라. 창조적으로 유희의 장에 내려가 몸을 더럽히라.”(테제60, 주석c))) (깨우침과 그 이후의 실천을 합해서 ‘돈오점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점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돈오’의 비타협성을 고수하다가 활력을 탕진하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깨우침이고 뭐고 없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을 넘어설 만큼의 활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이고 협동하여 오랫동안 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점수’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슬기롭게 운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커먼즈 운동에서는 이러한 ‘점수’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성적 자본’ 혹은 ‘친구로서의 자본’은 시장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돈을 벌지만, 그 돈을 커먼즈의 축적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트너국가’론은 국가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가능하다면 커먼즈 운동을 돕는 곳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선보인 도시자치주의는 정당정치와의 창조적 관계를 실행합니다. 정당정치를 정당을 넘어선 연합의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점수’의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계속 창출될 것입니다.((스페인의 도시 커먼즈 운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대담으로 http://minamjah.tistory.com/233 참조.))

[/추가]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대안근대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형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커먼즈 운동가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맑스가 이미 한 말이 있습니다. 맑스는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 557.))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 혹은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출처 수정함]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이것이 맑스가 보는 커먼즈입니다. 사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그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을 넘어서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들 것이라고 추론해냄으로써 네그리에게 큰 영감을 준 바 있습니다.((네그리는 한때 감옥에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는데,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이 맑스와 스피노자의 저작들입니다. 네그리는 양자 모두 근대 속의 탈근대(나중에는 ‘대안근대’)로 꼽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맑스가—그에게 두 측면이 공존함으로 인해서—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네그리·하트가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에 상응하여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다듬어낸 것과 연관되며, 다른 한 측면은 커먼즈 운동의 새로운 부활과 연관됩니다.)

지금은 맑스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매우 안타까운데요, 사실 (삶권력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지만) 맑스가 가장 먼저 자본과 국가를 삶권력으로서 포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맑스를 잘 읽으면, 자본주의는 (아무리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사명((맑스는 자본의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인정합니다. [추가]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은 ··· 사물이 스스로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종식된 단계에 이르게 되자마자 완수”됩니다. Grundrisse, p.325.[/추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맑스의 자본 연구는 바로 이 ‘극복’을 위한 준비에 다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은 만개라는 자기목적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유로운 조건이라면 각 개인이나 집단이 이 출발조건에서 만개를 향해 나아가는 만큼이 그 성취입니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라도 모두가 만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억압적인 조건에서도 삶을 만개시키는 데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소수나 특출한 소수의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조건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 구성의 원칙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 조건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협소함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출발조건을 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 언론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인 양 위장했습니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출발조건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워킹머신과 같습니다. 열심히 걷고 뛰어야 그 위에 간신히 서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뒤로 쳐지고 맙니다. 출발조건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의 행태도 출발조건에 갇혀 있습니다. 만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내일의 출발조건, 내년의 출발조건, 후손의 출발조건을 확보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의 출발조건을 미리 확보하려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어리석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조건이 삶의 감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유리합니다. 한편으로는 희소성의 원칙에 갇히지 않는 부를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만)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환경의 실제적 경고도 존재합니다. 커먼즈 운동은 자급운동(출발점의 확보)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만개를 향한 운동, 진정한 삶의 가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정치론은 좋은 동지요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록1]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커머너’와 ‘커머닝’

중세 잉글랜드에서 커머너(commoner)는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세 신분―싸우는 계층(귀족), 기도하는 계층(성직자), 일하는 계층(커머너)―의 하나였다. 영국 등지에서 근대 영어의 용법에 보존된 ‘커머너’라는 용어의 의미[우리말로 ‘평민’]는 작위(爵位) 등의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 즉 보통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택하는 ‘커머너’라는 용어는 중세 잉글랜드로 소급되는 생산적 성격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커머너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기 때문에 ‘커먼’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공통적인 것에 입각하여 일하기 때문에 ‘커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빵 굽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방아 돌리는 사람 같이 직업을 가리키는 말을 이해하듯이 ‘커머너’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듯이, 커머너는 커머닝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을 만든다.

따라서 커머너는 비범한 과제―사유 재산을 모든 이의 접근과 향유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일,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되는 공적 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경우마다 공통의 부를 민주적 참여를 통하여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지속시키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하는 일―를 성취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렇다면 커머너의 과제는 빈자들이 자급할 수 있도록 들판과 강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음악,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수단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이 과제를 성취할 선결 조건들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사회적 유대를 창출할 능력, 특이성들이 차이를 통해 소통할 능력, 공포가 없는 상태가 가져다는 주는 진정한 안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커머너는 구성적 참여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개방적 공유에 기반을 둔 민주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고 필요한 주체성이다.

‘커머닝’의 행동은 공유된 부에의 접근과 자기관리만을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을 향하기도 해야 한다. 커머너는 투쟁하는 광범하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학생들, 노동자들,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 빈민, 젠더 및 인종과 관련된 종속과 싸우는 사람들 등―사이의 ‘연합’(alliances)를 창출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열거를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적 현실화의 실천으로서 형성되는 ‘연대’(coalition)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연대’는 다양한 집단들이 전략·전술상 함께하면서도 그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지어 분리된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의 ‘연합’은 전적으로 이와 다르다. 물론 커머닝은 정체성들((여기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라고 읽으면 됩니다.))이 부정되어 모두가 자신들이 밑바탕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쟁과정에서는 상이한 사회적 집단들이 특이성들로서 상호작용하며 상호교류에 의하여 계몽되고 고취되고 변형된다. 그들은 투쟁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저주파로 서로 말한다.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pp. 105-107 (밑줄은 인용자의 것)

[부록2]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물질대사의 단절’(맑스)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복지국가

선(先)분배(pre-distribution)—커먼즈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계몽주의적 이성/기능적 합리성

삶정치적 이성/공통적 감각

노동시간

삶의 시간

측정/척도

탈측정/척도 너머

이윤으로서의 잉여가치(경제적 잉여가치)

삻의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주체성

자유로운 주체성: 커머너, 다중

삶의 시간은 생계수단을 버는 시간

삶의 시간은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시간

인격, 합리적 개인

특이성

추출 대상으로서의 자연

동지로서의 자연

* 알림 : 몇 사람이 모여서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론에 대한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하는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minamjah.tistory.com/)의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 섹션의 글들을 가져오고 그 뒤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현재 제 블로그에도 저 말고도 다른 역자들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아직 구축 중입니다. 시간을 많이 못 내서(아니면 게을러서?) 아직 글들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URL은 http://commonstrans.net/입니다.

 




‘아래로부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77-83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래로부터 볼 때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from below)는 실로 광범한 해방 기획들의 입각점이며 우리의 분석에서 발전시킬 관점이다.

베버 : 권력(Macht, power)은 지배(Herrschaft, domination)와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 그래서 전자는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반면 후자는 명령이 복종되어야 한다. 여기서 정당화의 문제 혹은 어떻게 명령이 동의에 의해 구속되어야 하는가의 문제, 명령이 복종자들의 이해를 대변할 필요가 나온다. 이것이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이라는 생각과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역행하는) ‘현실주의적’ 버전의 마키아벨리주의를 형성한다.

결국 베버는 관계로서의 권력이라는 정의를 무너뜨린다. 명령이 복종의 예시(豫示, prefiguration)로 찬양되면 저항은 시야에서 사라진다.

아렌트 또한 유기적 권력관을 반박하려고 시도한다. 열려있는 정당성. 이 열려있음이 민주주의를 특징짓는다. 폭정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마키아벨리는 혁명, 항상적 변이, 구성적 힘을 말한 사람이다. 이에 반해 국가이성은 폐쇄된 권위의 기능이자 그것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아렌트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긍정적 언급을 반복적으로 하며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은 사라지는 듯이 보인다. 권력은 주체들의 손에 쥐어지며 아렌트에게 ‘진정한’ 실천은 공적, 정치적 행동이다. 능동적 삶은 시민적 삶에 완전히 관여하며 그 관계에서 무력해지지 않고 “inter-esse”(상호 존재하기/관심)를, 인간의 상호작용을 향한다.

근대적 권력정의로부터 나오는 데에는 베버와 아렌트로 충분하지 않다. 궁극적으로 일자와 초월이 승리한다. 아렌트가 제시하는 것은 군주에의 조언자로서의 마키아벨리라기보다는 ‘섭리의 꽁피당’(레이몽 아롱)이다. 베버가 제시하는 것은 권력의 정당화 메커니즘들이며 대안적 가능성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관료적 기능의 기계적·객관적 성격이 나름의 주체성 생산 형태를 띠지만, 베버는 정동, 열정, 혁신조차도 추방한다.

마키아벨리의 본질적 요점은 권력을 관계로서 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탄생하는 것으로 보는 데 있다. 이는 인식론적 입장일 뿐만 아니라 아래로부터 위를 행하여 구축하는 정치적 궤적이다. 이것이 다중의 경로이다. 이 경로는 스피노자가 『정치론』에서 말했듯이 민주주의를 자유의 도구로서 해석하는 동시에 자유를 민주주의의 산물로서 제시한다.

푸꼬가 근대의 지배적 권력관에 대한 도전을 현대적 세계의 조건으로 옮겨놓을 수 있게 해준다.

1979년 강의(『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의 방법론 설명: 주권자, 주권, 민중(민), 신민, 국가, 시민사회(the sovereign, sovereignty, the people, subjects, the state, and civil society)와 같은 관념들을 우선적이고 본래적인, 그리고 이미 주어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매우 철저한 아래로부터의 경로를 정의한다. 진실은 새로운 존재를 생산하는 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축된다. 예를 들어 해방 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인 실천, 진실을 창조하는 장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행동이 정의에 기반을 둔다는 촘스키의 발언에 대한 푸꼬의 대답 : “저는 스피노자 식으로 당신에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그 전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가 지배계급과 전쟁을 벌이는 것은 역사상 최초로 정치적 힘을 갖기(take power)(([옮긴이] ‘take power’는 일반적으로 ‘권력을 잡다’라고 옮기는데, 내용에서 보다시피 푸꼬가 지향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부각시키기 위해 ‘정체적 힘’이라고 옮겼다.))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을 전복할 것이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는 그런 전쟁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이 푸꼬의 아래로부터의 힘(권력)이라는 인식론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푸꼬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것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권력관―여기서는 주체가 저항을 허용받지 않는다―을 제안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푸꼬의 1960년대와 70년대 저작과 관련해서도 사실이 아니다. 푸꼬는 이 시기에 강한 구조주의적 틀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구조주의적 제한들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첫째, 그는 모든 개체화하는 작업, 데카르트적 주체성을 되풀이하는 모든 작업에 맞서 논쟁을 수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다음에는 주체(subject)의 ‘해체’(destitution, 탈구성)를 통해 이를 성취했다. 이는 ‘우리’—나와 우리의 관계—를 생성(becoming)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체(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탐구하는 것으로서 제시된다. 푸꼬가 70년대에 미시권력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 권력 개념을 일반화하는 새로운 차원을 연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그것에 전체주의적인 형상을 부여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 형상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관계에 기반을 둔 권력관이라는 점이다.

푸꼬의 작업은 1970년대의 주된 정치적 긴장이라는 상황에 위치시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작업은 공장에서 광범한 사회적 지형으로의 사회적 적대의 확대를 쫓았으며 투쟁의 주체화의 새로운 형태들을 분석했다. 푸꼬는 완전히 이 작업에 몰입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맑스를 넘어갔다. 물론 (일부 활동가들이 채택하는 바대로) 맑스주의의 경제주의적 버전들을 넘어가고 맑스주의를 사회적인 것 안에서 변용시켜 회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바로 이것이 ‘삶정치’ 개념이 궁극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경제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양태들에서, 주체적인 것에서, 주체화에서 다시 채택하는 것이다. 1970년대의 운동에서 발전했던 것은 푸꼬의 강의들에서, 혹은 그것과 병행하여 반영되었다. 이 강의는 권력을 바라보는 구조주의적이고 경제주의적인 틀과의 단절을 명시적으로 나타냈다.

그러면 ‘아래로부터’의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위”에 있는 자들과의 투쟁을 통해서 그 지식이 변형되는 종속민의 입장에서 권력을 정의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있는 사람이 사회 전체에 대해서 더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공통적인 것을 구축하는 다중의 사업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아래로부터’는 또한 정치적 궤적을 지칭한다. 즉 명령을 전복할 힘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할 능력을 가진 제도적 기획을 지칭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97-105쪽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Third response: the common is not property 

 

공통적인 것은 생산에 열쇠가 되고 사유재산은 생산 능력에 족쇄가 된다.

공통적인 것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재산(소유)과 반대된다. 새로운 재산 형태가 아니라 비재산(nonproperty)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은 공유를 위한 사회적 구조이며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사적 소유는 인간 본성에 내재적인 것이거나 문명사회에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근대에 들어와서 생겼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가부장적 위계적 분할 및 통제 방식을 가지고 있는 전자본주의적 공유 공동체 형태를 되돌아볼 필요는 없다.

공통적인 것의 이해는 사회적 부를 향한 것이지 개인이 가진 것들을 향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칫솔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또한 당신이 만든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 남들에게 권리를 줄 필요도 없다.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

① 지구와 생태계들

② 비물질적 부의 형태들―생각, 코드, 이미지, 문화산물들

③ 점증적으로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물질적 상품들로서 공통의 사용에 열려야 하는 것. 그 계획이 가능한 한 민주적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것들.

④ 메트로폴리스와 시골의 사회적 영토들. 환경 + 문화.

⑤ 건강, 교육, 주택, 복지가 목표인 사회 제도들 및 서비스들.

공통적인 것의 이해에 결정적인 것은 그 사용과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을 진심으로 승인한다.” 그러나 우리[네그리와 하트]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안팎을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표: 공통권과 사회권의 차이

사회권, 사회법

공통권(rights of the common)

정태적

생산적, ‘함께 있음’의 새로운 제도 구축

총체적 동원

아래로부터 관리되는 민주적 협동관계의 사회

개인들의 덩어리가 그 대상

특이성들의 협력

사회법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인간자본 관리로 변형

공통적인 것은 법의 매개 없이 전진하며 다중으로서 출현한다.

 

Fable of the bees; or, passions of the common 

오늘날 소유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안전]

재산은 당신을 구해주지 못한다.

사회주의 전통은 재산이 아니라 국가가 안보를 제공한다고 주장해왔다.

진정한 안보는 (스피노자에 따르면) 두려움을 물리치는 희망이다.

오늘날 안보는 특이성들이 공통적인 것에서 누리는 자유와 협동에서 나온다.

레베카 솔닛: 재난이 사회적 욕망과 가능성을 보게 해준다.

[번영]

사적 소유가 경제적 혜택을 가져다준다는 말은 이데올로기로서나 사용된다.

사적 소유는 욕구의 빈곤을 낳는다. 맑스가 말하듯 향유 능력 자체가 생산력이다. 생산성의 척도이다.

현대 사회에서 삶은 일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국면에서 불안정하게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불안정한 삶 또한 부의 결정적인 자원(resource)을 드러낸다.

주디스 버틀러: 취약성(vulnerability)은 강함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자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둘 다 억압적이다. 사적인 것은 자유를 파괴하고 공적인 것은 사회적 유대를 멸절시킨다.

특이성들은 자유와 협동이 내적으로 연결될 때에만 탄생한다. “한편으로 자유의 확장만이 협력을 구축하고 공통적인 것을 조직하며 사회적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다른 한편, 협력의 규칙들과 민주주의의 규범들만이 자유롭고 능동적인 주체성들을 구축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이라는 낡고 파괴적인 짝을 넘어서 자유로운 인간의 공생공락(conviviality)을 구축한다.”

근대 주체론은 소유 개인주의(possessive individualism)에서 나왔다. C. B. MacPherson: 개인은 그가 가진 것에 의해 정의된다.

소유 논리는 사랑에 대한 생각에도 주입된다.

주체성은 공재에서 발생한다. “주체성은 가짐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같이-존재하기, 같이-행동하기, 같이-창조하기에 의해 정의된다. 사회적 협력에서 주체성이란 것 자체가 발생한다.”(Subjectivity is defined not by having but being or, better, being-with, acting-with, creating-with. Subjectivity itself arises from social cooperation.)

“그렇다면 이 모든 측면에서우리는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열정이 가진 덕을 알아보아야 한다. 비록 재산의 지배가 사회복지와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는 것으로 점점 더 명확하게 인식되고 공통적인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등장하는 역사적 시점에 도달했지만 사유재산은 (토머스 그레이Thomas Grey가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스스로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고 마테이Ugo Mattei가 올바로 말했듯이 공통적인 것은 ‘자신의 공간을 되찾기 위해 길고 진한 전투를 치를 준비가 된 대중운동의 물리적 존재로써만 방어되고 다스려질 수 있다.’ 인류가 절벽을 뛰어넘어 공통적인 것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미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