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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바우엔스와의 대담 – 문명 이후와 P2P



 

[이름표기에 대하여]

커먼즈 운동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Michel Bauwens는 벨기에 사람이다. 벨기에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가 공용어이다. 지금까지는 이름인 ‘Michel’ 때문에 성을 프랑스어 식으로 ‘보웬스’라고 표기해왔는데, 최근에 유튜브에 있는 한 대담을 들어보니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 발음이 ‘바우엔스’이거나 ‘바우웬스’였다. 네덜란드어 식 발음이다. ‘w’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어에서는 ‘w’가 대부분 발음이 되지만 (입 뒤쪽에서 형성되는 약한 ‘ㅂ’이다) 이렇게 ‘u’ 다음에 오는 경우에는 드물게도 묵음이 된다는 것(본인들은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묵음으로 들린다는 것)도 알았다.(http://www.heardutchhere.net/silentW.html) 이러한 확인에 따라 앞으로는 ‘미셸 바우엔스’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이 블로그의 이전의 다른 글들을 미처 다 손볼 수 없으니 (언제 다 손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독자들께서는 ‘보웬스’라고 되어 있어도 양해하고 ‘바우엔스’로 읽기 바란다.

 

라자니 칸스

P2P란 간단히 말해서 뭔가요?

미셀 바우엔스

피어2피어(Peer to Peer)란 모든 개인이 다른 모든 개인과 연결되는 것을 ‘특별한 허가 없이’ 허용하는 관계 동학입니다.((바우엔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들뢰즈·가따리가 ‘뿌리줄기’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에 대해서는 『천 개의 고원󰡕 1장 참조.)) 원한다면 ‘네트워킹의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줄곧 소집단들의 특징이었지만 최근에는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큰 규모에서도 가능하게 되어 (위계를 특징으로 하는 국가와 자본주의적 시장 동학의 능력을 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과 맞먹는) 전지구적인 ‘오픈소스’ 시민네트워크들과 생성적((‘생성적’(generative)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속성인 ‘추출적’(extractive)에 대응되는 속성이다.)) 경제조건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서버가 자율적인 새로운 컴퓨터 구조에서 도출된 이 P2P 개념이 지금 두 가지 경합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제가 사용하는 의미인데요, 커머닝의 능력, 즉 자원을 한데 모으고 상호화하고((‘상호화하다’(mutualize)는 자원을 공유하여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것을 가리킨다. ‘상호화’는 다소 어색한 번역어이지만 동사와 명사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정하였다. ‘상호화’는 사실상 ‘사적 소유’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의 능력으로서의 피어2피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나키-자본주의적이고 자유의지론적-사유재산적 비전으로서 사회를 개인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입니다.((이는 원래 독일 오르도자유주의(신자유주의적 선구적 형태)의 비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푸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참조.)) 전자의 커먼즈 견해와 후자의 극단적 시장론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칸스

이와 관련된 개인사를 설명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제가 거부한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집단적 투쟁을 떠나게 된, 전형적인 향수에 찬 좌파입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저는 모든 지구상의 생태적·사회적 지표들이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쪽으로 수렴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 자신의 활동에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문제의 일부인가 해결의 일부인가?’라고요.

큰 기업에서 일하면서 여러 경우에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저는 변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수평적으로 추동되는 집단지성의 능력을, 즉 위치와 무관하게 실시간으로 (혹은 비동기화된 시간으로) 협동하는 능력을 거대하게 증가시킨 1993년의 월드와이드웹 발명은 신의 출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5세기에 있었던 인쇄의 발명처럼 이것도 변화의 추동력이 되리라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논리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회변화를 위한 새 받침점, 즉 규모 있게 수평적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네트워킹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죠.

따라서 저는 보수가 좋은 회사의 중역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태국에서 휴식하는 2년 동안 역사적 상전이(phase transitions, 이행)를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보며 지냈습니다. 이 새로운 피어2피어 구조라는 받침점이 지구상의 긴급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세상을 창출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친연성과 공유된 목표에 기반을 두며 지역을 넘고 국가를 넘어 움직여 전지구적 변형에 복무하는, 신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유형의 ‘부족들’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가? 제가 태국으로 이사한 것, 그리고 제 아내의 대가족에 편입된 것이 저로 하여금 따스한 가족생활과 친연성에 기반을 둔, 지역을 가로지르는 공동체들에서의 활동가로서의 활동을 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칸스

어떤 영감을 받아 그렇게 정리한 것인지요?

바우엔스

여러 상이한 것들의 결합입니다. 제가 이사하기 전에, 90년대 중반 이래 사회적 삶의 상이한 도메인들에 피어2피어 논리가 보급되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례들을 발견하는 대로 특별히 마련한 위키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법론은 다소 단순합니다. 늘 경험적일 것, 늘 일관될 것, 사회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치에 닿는 가장 통합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역사적 이행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전의 사라져가는 문명모델들의 위기 시에 공존한 씨앗형태들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 씨앗형태들이 새로운 사회적 논리를 담지하는지를 (이 씨앗형태들이 이전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다음 저는 오늘날 씨앗형태들의 거버넌스 메커니즘들과 소유 메커니즘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커먼즈를 가진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그 공동체들을 둘러싼 기업연합들을 보기 시작했고 나중에 도시 커먼즈와 물리적 생산을 담당하는 커먼즈의 출현으로 관심을 확대했습니다. 이것이 이 새로 출현하는 미시적 네트워크들이 어떻게 전체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에 더 면밀하게 주목하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커먼즈와 공적 영역이 서로 연관되는 제도적 과정과 커먼즈와 시장이 서로 연관되는 동학 모두에 주목함을 의미했습니다. 핵심을 말하자면, 저는 국가와 시장이 커먼즈를 포획한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을까를, 즉 커먼즈와 커머너들이 어떻게 시장과 영토 거버넌스를 커먼즈를 확대하는 쪽으로 작동하도록 변형할 수 있을까를, 그리고 지구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커머너들의 생계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왔습니다. 더 최근에 저는 재분배(redistributive) 경제—이는 인간 및 자연의 가치를 우선 추출하고 나중에 재분배하는 것입니다—에서 선분배(pre-distributive) 경제로의 이동, 생태에 끼치는 피해의 제한에서 재생성적(regenerative, 다시 살리는) 실천으로의 이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대한 실용적 이론으로서, 저는 이 이론이 커머너들과 그들의 경험에 기반을 둔 이행을 가속화하는 데 유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P2P재단이 오늘날 사회변화의 강력한 주체인 자율적인 불안정 노동자들의 집단지성이 되었으면 하고 그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의 집단학습의 속도를 증가시킨다는 의미에서 촉매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커먼즈는 변화의 중심 범주입니다. 즉 시민들이 커먼즈에의 기여자들로서 사회적 가치를 직접 생산하게 되었으며, 피어2피어는 커먼즈가 규모나 능력에서 시장과 국가를 능가하게 만들 수 있는 핵심적인 사회적 관계입니다. 인류의 본래 상태가 긴밀한 유대로 묶인 부족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공유된 가치의 공동구축에 기반을 둔, 긴밀하고도 공감적인 새로운 부족으로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칸스

‘커먼즈’ 경제란 어떤 것인지요?

바우엔스

커먼즈 경제는 공유된 자원을 중심으로 핵심적인 가치창출이 일어나며 기타 교환도 욕구에 따라 일어나는 경제입니다. 커먼즈 경제는 통째로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전까지 진행된 이행의 논리에 맞추어 재편성한 것입니다. 오늘날 가치는 시장에서만 창출되고 그 다음에 재분배된다고 생각됩니다. 커먼즈 경제에서는 커먼즈 수준에서든 사회 수준에서든 모든 기여가 인정되며 기타 교환과 분배도 공동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공동체들에 복무하도록 재설계됩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상호화된 기반시설을 사용하여 기도를 최대화하는 사업들의 성공사례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와 동등한 것으로, 그러나 삶을 부정하는 복종과 금욕은 없는,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모든 자원조달 체계들을 상호화하여 인류가 지구에 남기는 열역학적 발자국을 근본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커먼즈 경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비물질적 공통재(커먼즈)와 지역적으로 재상호화된 물리적 기반시설들이 교차하는 열린 생산공동체들입니다. 이 생산공동체들은 뚜렷한 목적과 사명을 갖추고 있고—‘중간에서 취하기’보다는 ‘중간에 주는’((우드(J. Wood)가 “COMMENT: The Socially Responsible Designer”(1990)라는 글에서 ‘기업가’를 의미하는 단어인 ‘entrepreneur’가 (원래 프랑스어이므로 프랑스어로) ‘가운데로부터 취하는’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에 대응시켜 ‘가운데에 주는’이라는 의미의 ‘entredonneur’가 만들어졌고 이를 여기서 ‘덕행가’로 옮겼다. 바우엔스의 이 대담에서는 둘 다 형용사형으로 쓰이고 있다.))—비자본주의적인 덕행가(entredonneurial) 연합들과 상호작용하며, 협력의 기반시설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이고 비영리적인 기반시설 조직들의 지원을 받습니다. 이는 거시적 수준에서 생산적 시민집단, 윤리적 경제, 파트너 국가를 구성하는 데로 작용합니다.

 

칸스

이 비전에 장애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우엔스

상호화 자체는 문명이 과도한 상황에서는 매우 불가피하며 역사적으로 여러 번 일어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상호화 자체가 내부적·외부적 추출 세력에 의해서 포획되는가 아닌가, 민주적인 커먼즈가 주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지금까지 기록상으로는 (문명을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라고 정의했을 때) 문명 이전에 상호화의 긴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수렵 및 채취에 기반을 둔 평등 사회들에서는 수만 년을 갔고 문명사회들에서는 성공이 더 제한되었습니다. 중세의 민주적 코뮌들은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3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우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챈들러(Keith Chandler)가 그의 책 『문명을 넘어서』(Beyond Civilization)에서 시사한 대로 우리가 계급 사회를 완전히 넘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최선은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선호하는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 축을 상상해봅시다. 풍요 대 희소성, 그리고 평등 대 위계. 제1시나리오는 우리가 원하는 시나리오, 즉 성공적인 상호화에 기반을 둔 풍요 속의 평등이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제2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평등입니다. 쿠바가 이런 유형의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풍요 속의 위계라는 제3시나리오를 상상해봅시다. 이는 지금 인지자본주의의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과 함께 정보와 서비스에서의 새로운 봉건주의(돈을 가진 사람만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체제)로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4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위계로서 라투르(Latour)가 지난번 책에서 ‘엘리트 생존주의’로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라투르의 2017년 책 Où atterrir ?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직 영어로도 옮겨지지 않은 책인데, 라투르의 프랑스 사이트에 보면 영어로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라고 옮겨놓았다. 이 사이트에서 이 책을 영어로 소개한 한 대목(http://www.bruno-latour.fr/node/754)은 이렇다. “이 세 현상[① 폭발적인 불평등 ② 대대적인 규제완화 ③ 지구화의 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악몽으로 전환되는 것—옮긴이]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생태위협은 실질적이며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나머지 세상과 공통의 미래를 공유하는 척 하기를 그치는 것이라는, 소수 강력한 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확신이다. 그래서 이들은 해외로 달아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다.” 지금의 라투르는 ANT(actor-network theory)의 라투르에서 달라진 듯하다.)) 인구가 대대적으로 삭감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내몰려서 생계가 막연해지며 새 엘리트가 첨단 생존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엘리트층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멸절주의 기획은 매우 위험합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인가요?

바우엔스

제가 유토피아에 반대할 마음이 없고 가능한 것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사람들에게 고취하는 데 유토피아가 필요할 듯도 하지만, 제 작업은 분명 유토피아적이지 않습니다. 저의 방법은 실제 삶의 실천들과 사례들을 보는 것이며, 약한 신호들이 충분히 잡힐 때 그것이 실질적 경향임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이 씨앗형태들의 심층 논리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그 지점에서부터 한 사회가 거시적 수준에서 그와 동일한 논리를 보여줄 때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 비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현상들이 주변부에서 출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세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장기적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유토피아주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데 대해서 두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것은 종종 매우 리얼합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사회를 꿈꾸었던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실제로 공동체들을 일구었고 실험을 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 탓으로 돌리는 끔찍한 일들—가령 종교재판이나 스딸린주의— 은 권력이 자신의 공고화를 위해서 유토피아적 비전을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선전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들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적 현실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해온 30년 동안의 반(反)유토피아 이후에 유토피아적 사고가 적어도 조금은 부활하는 것이 실제로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칸스

사회주의 같은 고전적인 대안경제들과는 어떻게 비교되나요?

바우엔스

피어2피어와 커먼즈 접근법은 19세기의 시민사회의 전통에 매우 가까우며, 시민사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시장과 국가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교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주류 사회주의 전통은 스탈린주의적·전체주의적 형태에서든 사회민주주의적 형태에서든 국가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시민사회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민들(이는 주어진 시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이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즉 사회를 위한 가치를 생산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집단적 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리적 영토 수준에서든 ‘버추얼’ 수준에서든 공동선을 중심으로 삼는 기관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커먼즈 공동체들조차도 우선은 자신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생태계 전체에 대해 먼저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개인들 사이에서든 공동체들 사이에서든 상호계약의 표현일 뿐인 사회에 대해서는 (좌파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믿지 않습니다. 메타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특히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럴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 없이도 우리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설군대의 용병들에게 더 자유를 주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커먼즈의 기능적 거버넌스가 그 복잡성이 높아져서 국가를 노후하게 만들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서 여러 사회와 경제의 상호연계 능력이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일을 돕는 메커니즘들과 기반시설 조직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저는 ‘파트너 국가’라고 부릅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그 의사결정이 단지 사적인 이익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관심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칸스

당신의 비전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이 있나요?

바우엔스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성에 대한 일면적 비전을 장려하며 사회적·생태적 외부성을 무시합니다. 이는 위험한 수준의 불평등을 낳고, 따라서 사회적 불안을 낳으며,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항상적인 파괴를, 지금은 극적이고 삶을 위협하는 데 이른 파괴를 낳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해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입니다. 총체적 불안과 모두의 모두에 대한 투쟁을 낳기 때문입니다. 400년 동안의 실험은 이제 거의 끝났지만 자본주의는 좀비 체계처럼 존속하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쁠 수 있는 어떤 것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중의 투쟁들이 모든 종류의 대항적 경향들을 창출하였음을, 민중이 계속해서 비자본주의적 형태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복잡한 사회를 창출해놓았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접근법은 ‘교육, 건강, 주택, 이동성을 계속 진전시키자, 그러나 이것들을 상호화하여 그 기능이 지구의 존속과 양립될 수 있도록 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탈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합니다.((‘반자본주의적’이기보다는 ‘탈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저항, 즉 ‘맞서는’ 투쟁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모델들의 창출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칸스

어떻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당신의 이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바우엔스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전략은 기획들과 사람들을 가열차게 상호교직하고 이해와 상호조직화의 수준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주류가 단계적으로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들이 사회적·정치적 힘을 강화하고 강력한 끌개가 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커머너(commoner)를 새로운 주체로 봅니다. 커머너란 공통적인 사회적 목표들에 기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사회 제도들의 변형을 위해 싸워서 커먼즈에 복무하는 사람이죠.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본에 의존하는 노동자로 보기를 멈추고 자신의 생계를 구축하는 커머너로 보게 된다면 많은 수의 커머너들이 존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용하고 싸워야 할 곳에서는 맞서 싸우고요.

지금 국민국가는 더 이상 변화의 핵심적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지성의 초국적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즉 정신권(noosphere)에 부합하는 정신정치(noopolitik)를 해야지요.((‘정신권’과 ‘정신정치’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49 참조.)) 우리는 또한 초국적 덕행가 연합 즉 커먼즈를 중심으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생계조직들과 선분배적이며 생태적으로 재생성적인 코스모-지역적인 생산단위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발표를 위한 청사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직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의 접근법을 충분히 잘 설명하리라고 봅니다.

 

칸스

현재 당신의 비전을 뒷받침하는 운동으로 뭐가 있나요?

바우엔스

제 생각에는 여러 상이한 운동들과 기획들로 구성된 세 강력한 ‘흐름’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과 사물을 공유하려는 운동입니다. 즉 오픈소스 운동들과 진정한 ‘공유’ 운동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둘째는 환경과 지구를 돌보려 하고 이를 위해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공정함, 평등, 유대, 협동주의를 위한 운동들입니다.

모두 뭉치는 것이 과제입니다. 평등과 생태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회가 더 불평등할수록 지배자들이 경쟁자들과 경합하면서 지구의 한계를 더 강력하게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이 더 부드러운 하강을 보장할 것이고 앞으로 수십 년이면 닥칠 불가피한 재난 이후에 지구의 더 빠른 치유를 보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슈를 지식과 자원의 강력한 상호화 없이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해결책이 사유화되어 이윤에 종속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업은 가능한 통합적 내러티브를 제공하여 더 많은 상호연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이 내러티브가 산업사회의 ‘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란 자본 대 노동의 변증법적 관계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변증법의 항상적인 결말은 자본의 영원한 지배이다. 이미 레닌의 라이벌인 보그다노프가 노동의 관점에서 진정한 대립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대립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인간의 자연 정복을 말하기보다는 맑스가 『1844년 경제철학수고』에서 말한 ‘자연의 인간화’이자 ‘인간의 자연화’인 과정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몸’으로 즉 ‘몸 외부의 몸’으로 보는 사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큰 몸으로 보는 사고가 들어있다. 이런 사고가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의 탐욕에 가려진 결과 지구의 삶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야 할 일이 모두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작은 규모로 너무 느리게 그리고 노력이 심하게 파편화되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공통의 이야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의 DNA 자체를 바꾸려는 구조적 노력에 합류하면 할수록, 서로 연계를 더 잘할 수 있고 전지구적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규모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칸스

세계의 현재의 위기를, 그 원인 등을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시사한 세 가지 사회적 폐해의 합류입니다. 1) 현 체제는 자연자원과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풍성하게 존재하며 단기적인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현 체제는 본성상 풍요롭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인 인간 문화나 지식이 인공적으로 희소하게 만들어져야 하며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범죄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자본주의는 희소성을 할당하는 체제가 아니라 희소성을 조작해내는 체제죠. 3) 이 모든 것이 증가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생계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불안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의 문제들이 정말로 체제 차원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장 최근의 계급사회로서 그 폐해를 보인 자본주의만 거부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계급 사회 자체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 균형과 집단지성을 위한 대대적인 상호학습에 기반을 둔 더 상위의, 더 복잡하고 더 평등한 사회형태를 재창출해야 합니다.

 

칸스

관심이 있을 사람들을 위해 주 저서들을 말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지금까지 세 언어로 책을 냈습니다. 네덜란드어 책 De Wereld Redden과 프랑스어 책 Sauvez le Monde를 냈는데((두 책 모두 그 제목이 ‘세상을 구하라’라는 의미이다.)) 이 두 책 모두 ‘P2P 및 커먼즈와 함께 탈자본주의 사회로’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이 책들은 사회변화에 관한 역사적·철학적·경제적·정치적인, 심지어는 정신적인 이념들과 제안들을 설명하는, 읽기 쉬운 대화들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책은 학술적인 성격의 것이며 경제적 측면에 집중합니다. 커머너들 및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작동할 수 있게 변형된 시장형태와 커먼즈의 상호작용을 다룹니다. 이는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추출적인 지배적 모델들과는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 책은 열린 협동조합들과 플랫폼 협동조합들과 같은 대안적 행태들을 설명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세요.

내년 봄에는 웨스트민스터프레스에서 우리 생각을 더 자세히 제시하는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우리는 P2P랩과의 집단연구에 기반을 두어 소규모 책자들을 냈습니다. 우리 서재를 보세요. ‘가치 주권’, ‘열린 기여기반 회계,’ 커먼즈와 공적 영역의 협동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아시려면 이 서재에 가보시면 됩니다. P2P랩은 우리의 가설들을 실제 공동체들과 함께 하는 실제 삶에서의 행동탐구를 통해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동료평가되는 학술논문들도 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보세요.

 

칸스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있나요?

바우엔스

네. 주된 참조 사이트는 우리의 위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블로그로 연결됩니다. 커먼즈 이행에 관한 더 읽기 쉬운 글을 보시려면 우리가 특별히 개발한 사이트로 가시면 됩니다.

 

칸스

관심 있는 사람이 당신의 기획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나요?

바우엔스

우리를 돕기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이는 우리가 네트워크이거나 아니면 조직이거나 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조직된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능력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식 커먼즈의 공동구축을 통해 기여하는 데 동의하고 우리의 자원 베이스에 기꺼이 기여하고 싶으시면 먼저 연결 방법을 찾아야 하실 것이고 그 다음에 이 열정적인 일을 중심으로 생계를 창출하는 방법을 찾으셔야 할 것입니다.

 

칸스

지금까지 P2P의 성취는 무엇인가요?

바우엔스

우리는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직접 하기보다는 지식공유의 촉진자로서 뒤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취를 돕습니다. 우리는 잘 사용되는 점증하는 지식 베이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찾은 사람이 연인원 6천만 명에 달하고 하루에 적어도 2만 명이 이용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국가지식커먼즈 구축과 관련하여 에콰도르 정부에게 컨설팅을 해주었고 ‘커먼즈 이행 계획’과 관련하여 헨트 시에 컨설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바티칸, 중국 같은 몇몇 영향력 있는 곳들 및 여러 정치운동들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바르셀로나의 공동작업 공간들에 대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거론되었습니다. 우리는 협동조합들, 커먼즈들 등 많은 합류하는 사회운동들에서 작업했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았습니다. 멜버른에 있는 <커먼즈이행연합>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다양한 ‘커먼즈 의회들’ 같은 구체적인 지역 기획들이 우리의 생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합니다. 에콰도르에서의 작업이 그 사례인데요, 여기서는 정부가 우리가 추천하는 바를 문서화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더 추출적인 정책으로 나아갔습니다. 트로이카((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EU)으로 구성된 삼두체제.))에게 고개를 숙인 시리자도 실패 사례입니다.

지금 저는 협동조합주의적/상호주의적 운동인 SMart와의 연합에 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자율적인 노동자들(프리랜서들)을 위한 유대를 조직하는 데 집중합니다. 또한 토착민 운동들과의 연합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이 운동의 스터디그룹들이 우리 생각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연합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에서는 생산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영향력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조그만 점에 불과하지만, 사회주의 이후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사회변화운동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목소리입니다.

 

칸스

가장 가까운 미래에 세상이 가장 잘 될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추측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몇 개의 시나리오를 개괄했을 때 이 점을 논의했습니다. 바라건대 최선의 것은 우리의 문명이 큰 재난들에 대비하는 짧은 막간(幕間) 시기에 P2P 및 커먼즈와 함께하는 사회세력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복원력 있는 경제와 대안적인 사회형태들에 활발하게 관심을 가질 사람들을 끌어모을 씨앗형태들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태는 많이 악화된 다음에야 좋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먼즈의 ‘잠재적 성충세포들’((‘잠재적 성충세포’(imaginal cell)는 유충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나중에 새로운 형태와 구조를 창출하게 되는 세포를 가리킨다.))이 이행기에 피해의 양을 감소시킬 두드러진 요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에서 인종, 계급, 젠더 그리고 문화는 어떻게 배치되나요?

바우엔스

오늘날 서로 다른 종류의 커먼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인 커먼즈는 수는 많지만 자본주의의 맹공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편 선진국의 디지털 커먼즈와 도시 커먼즈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찾는 것이 지구상의 후진지역에서의 노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서구 나라들에서는 피케티(Thomas Piketty)가 ‘브라만 좌파’(Brahmin left, 지식좌파)라고 부른 층((‘브라만 좌파’는 인도 브라만 계층 가운데 맑스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모양인데, 지금 바우엔스가 쓰는 말은 이와는 무관하다. 여기서 ‘브라만 좌파’는 피케티의 용어로서 이에 대립되는 말은 ‘상인 우파'(Merchanr rifht’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http://piketty.pse.ens.fr/files/Piketty2018PoliticalConflict.pdf 참조.)) —높은 교육자본을 가지고 있지만 금융자본이 별로 없는 시민들로서 많은 도시 커먼즈들을 개척하고 있습니다—과 민족적·종교적 공동체들에 국한된 훨씬 더 수가 많은 이주민 커먼즈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사이에도 강력한 연결이 창출되어야 합니다.

문화가 결정적입니다. 현재의 커먼즈들이 정의상 열려있고 자치적이지만, 친연성에 기반을 둔 결집(커먼즈판 필터 버블((‘필터버블’(filter bubble)은 구글의 경우처럼 개인에게 맞춘 검색의 결과로 지적으로 협소해지고 고립된 상태를 가리킨다. 일반화하자면, 서로 다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인 셈입니다)이 항상 공동체를 통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먼즈의 강점은 공유되도록 의도된 목표들을 중심으로 공동의 노력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현저하게 극복하게 해줍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커먼즈가 지역의 가치흐름을 대대적으로 재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의미있는 활동을 창출하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트럼프의 광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대답은 보호주의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 수준에서는 초민족(국가)적이고 초지역적인 협동에, 그리고 바이오지역적(bioregional) 수준에서는 재지역화된 생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원자화 이후에 협동을 재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화적 진화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우리는 강한 정신적·생태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인간 이상의 커먼즈’(웹진 『애로우』의 잭 월시Zack Walsh의 생각입니다((https://arrow-journal.org/contemplating-the-more-than-human-commons/ 참조.)))를 위한 협동의 문화를 다듬어내서 계몽주의가 도입한 주객 분리를 (인간의 평등을 위한 열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능장애를 일으킨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훨씬 더 나쁜 계급착취로 대체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커먼즈 이행을 지역 정서로 되돌아가는 과정의 일환인, 전지구적 친연성 부족들의 창출과정으로 봅니다. 즉 고도의 솜씨를 첨단기술에 의해 가능해지는 ‘공생공락적인’ 집단지성과 결합하는 ‘고풍 혁명’(archaic revolution)— 맥케너(Terence McKenna)가 말한 바의 것((이런 생각이 담긴 맥케너의 책 제목은 The Archaic Revival: Speculations on Psychedelic Mushrooms, the Amazon, Virtual Reality, UFOs, Evolution, Shamanism, the Rebirth of the Goddess, and the End of History이다. 흥미롭게도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농촌공동체와 공존하는 사회체제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오래된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며 혁명적 성향이 있다는 의심을 결코 받을 수 없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한층 더 상위의 차원]는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된’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입니다. P2P는 상실된 황금시대나 이전에 존재했던 계급착취의 형태들을 지향하는 반동적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문명 이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주기에 부합하는, 브라만[지식]과 노동자의 종합입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유럽중심적인가요?

바우엔스

우리 기획은 세계중심적이며, 여러 문화적·영토적·초지역적 맥락에서 채택되는 가능한 공통체들의 다수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에서 발전되었으며 다른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발전된 유사한 전통과 연결될 수 있는 해방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저는 때로 ‘신전통적’(neotraditional)이라고 부릅니다.

챈들러가 『문명을 넘어서』에서 시사한 대로, 이는 모두 계급 문명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심대한 경향의 표시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보존하려면 이 문명의 주기가 끝나야 합니다. 인종화·젠더착취를 극복하고자 하고 인간을 균등한 잠재성을 가지고 기여하는 동료들로 보고자 하는 현재의 경향들은 환경 및 모든 생명체들과 균형을 맞추는 따스한 사랑의 공동체를, 모두가 공동선에의 기여를 인정받는 그런 공동체를 갖고자 하는 인간의 심층적 열망에 상응합니다. 이는 현재의 불평등한 문화에서도 인간의 깊은 곳에 살아있는 열망입니다. 저는 제 생각에 대한 가장 열렬한 반응을 에콰도르의 토착민 공동체들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