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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안(koan, 公案)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4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보기]
11장 Roaming [보기]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40장 The Fifth Dimension
41장 Towards Upward
42장 Offer a New Path . . .
43장 . . . before Opposing the Current Path
44장 Money Flows
45장 The Cascade of Change

 


19장 공안(公案)

크래플은 디날리에서의 셋째 시즌을 맞이하기 전에 큰 캠프파이어 프로그램을 담당하게 된다. 이제 자신의 일차적 목표―맥킨리산(Mt. McKinley)의 ‘seasonal naturalist’가 되는 것[맥킨리산은 디날리국립공원에 있는 산으로서 디날리산이라고도 불린다―정리자]―는 달성하였기에 ‘다음 목표’가 관심사가 된다. 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에게 도움을 준 책은 비교신화학자인 캠벨(Joseph Campbell)의 『천의 얼굴의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이다. 이 책에서 캠벨은 ‘살아있음의 모험’(the adventure of being alive)을 개인이 어떻게 맞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수천 년 동안 축적되어온 인간 지혜를 신화들이 전해준다고 말한다.

캠벨에 따르면 영웅 신화들은 결코 영웅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안내서이다. 영웅이 된다는 것은 만화책·영화·동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경우와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삶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것을 넘어서, 신화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크래플은 자신에게 어떤 신화적인 조우와도 같은 것이―아마도 갈색양진이(the rosy finch)의 경우처럼 자연과 관계된 것이― 일어나기를 바라는데, 그의 생각은 열역학 제2법칙이라는 블랙홀을 중심으로 계속 맴돌았다.

상승이 더 큰 하강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다른 생명체를 먹음으로서만 살 수 있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는 세계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나의 삶이 그러한 것 이상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 우주에서 그것이 가능한가?

사실 크래플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 고학년생에게 태양은 결국 죽을 것이며 그러면 지구의 모든 생명체들도 끝장난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줄곧 이 문제로 고민해왔다. 모든 것이 끝장난다면 도대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는 이러한 무의미성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단어조차 찾지 못하고 그저 혼자 끙끙대왔던 것이다.

크래플은 고등학교 때부터 ‘엔트로피’니 ‘열역학 제2법칙’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 시작한다. ‘커먼즈의 비극’을 말한 것으로 유명한 하딘(Garrett Hardin, a prominent ecologist)이 열역학 법칙들을 요약한 말도 접했다. “이길 수도 없고 심지어 비길 수도 없다. 게임을 안 할 수도 없다.” [나중에 크래플은 하딘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변형시킨다.] 그러면 인간도 근본적으로 시체를 뜯어먹는 구더기와 같은 것인가? 생명의 순환은 이런 식으로 서로 뜯어먹으며 돌아가는 것인가?

크래플은 이 관점에서 문명의 역사를 개관한다. 종교는 이 황량한 문제들로부터 안심 되는 보호처를 제공했으나 과학의 등장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으로 종교를 대체하여 종교가 제공한 보호처는 퇴출되었다. 과학혁명으로부터 동력을 받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물들을 내놓는 기계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단순한 부품들을 결합하여 더 큰 것으로 만들어진 이 기계들이 우리의 세계와 우리 자신들의 은유가 되었다.

크래플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삶이 다른 것들을 희생하고 사는 것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자연을 공부해보니 과학이 관찰한 바가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적 영혼에서의 분열”을 어떻게든 치유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바로 이것이 크래플 개인의 공안(koan, 公案)이 되었다.

‘공안’이란 말을 아는 것으로 보아서 크래플이 선불교에 대한 책을 읽었거나 한 것이 분명하지만, 측정의 책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크래플이 이해하는 ‘공안’은 “선불교 전통의 일부”로서 “그 해답들이 학생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수준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거의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질문들”을 의미한다. 크래플은 ‘공안’의 한 사례로 ‘한 손으로 손뼉을 칠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가?’를 예로 제시한다. 어떻든 젊을 때 크래플은 이런 비교적(秘敎的)인 질문들에 끌리고 열역학 제2법칙을 자신의 ‘공안’으로 삼는다. [사실 여기서는 ‘공안’이라기보다 ‘화두(話頭)’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우리가 크래플에게 ‘공안’과 ‘화두’의 차이를 포함하는 더 세밀한 이해를 요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공안에 대해 다소의 실망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집의 커피 마시는 탁자에 공안 하나를 그 답과 함께 적어놓은 그림책이 있었는데 공안은 대략 ‘당신은 창문이나 문이 없는 피할 수 없는 작은 방에 갇혀 있다. 뚫린 곳이 없으며 따라서 출구가 없다. 당신은 어떻게 나가겠는가?’이다. 책에 나온 답은 ‘자, 나왔다!’(There, I’m out!)이다. 이 답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크래플에게 공안은 그 신비한 동양적 매력을 다소 잃게 된다. [그러나 곧 보게 되지만, 나중에 크래플은 그렇지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결국 답이 다시 공안이 된 셈이다. 사실 답이 뻔한 공안이라면 진정한 공안이 되기는 힘들 것이다. 공안의 핵심이 뭐냐에 대해서―선불교의 관점이 아니라 정리자의 관점에서― 여기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핵심이 미리 정해진 ‘정답’에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여름 씨즌에 크래플은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최종 목표인 위커섐 벽(Wickersham Wall)―디날리 산의 북쪽 사면―등반도 달성한다. 이럭저럭 세 번째 여름 씨즌이 끝나고 나서 크래플은 그냥 공원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빙하가 흐르는 계곡 셋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넓은 공터에 앉아서 땋은 머리 모양의 물줄기들(braided streams)과 북향의 빙하벽을 올려다보던 크래플은 의식이 물질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의식이 뉴런들이 아니라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에 토대를 둔다면?” 사람들은 1과 0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코드로 된 컴퓨터 프로그램 내에서 의식의 발전 가능성을 탐구할 때에는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사실 “사물들 사이의 신호들의 복제할 수 있는 패턴들”이 자연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모든 현상들은 자연 법칙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 세상은 꺼져있음과 켜져 있음이라는 두 상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상태들로 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어쩌면 의식의 방대한 네트워크 안에서 출현했는지도 모르며, 그 이후에 그 의식의 기본적 패턴들을 자기의식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만큼 소형화하여 담는 두뇌들을 진화시켜오고 그런 다음에 우리의 복잡한 뉴런 연결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의식이 오직 뉴런들과 함께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크래플에게는 자신이 앉아있는 세 빙하 계곡 사이의 이 공간도 의식을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근사해 보인다. 그런데 이는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사유로서 발현된 것이다. 피상적이지도 않고 풍요롭고 상세하지만 영혼(spirit)을 결여한 [우리 식으로라면 ‘신명’이 없는] 사유이다. 세상은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볼 때처럼 너무나도 작은 것으로 느껴진다.

9월에 집으로 돌아온 크래플은 책 한 권―재노프(Arthur Janov)의 The Primal Scream―을 읽고 ((재노프는 정신요법 의사로서 어린 시절의 어떤 원초적인 경험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우리는 우리의 그 경험들과의 감정적 연결을 끊으며 우리 자신을 천천히 우리의 세계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본다. 그의 치료의 목표는 환자들이 그 원초적 경험을 이번에는 어른의 관점의 도움을 받아 다시 겪어서 그 고통을 다시 경험하고 여태까지 닫혔던 길들을 다시 열도록 돕는 것이다. )) 거기서 실존주의적이랄 수 있는 지혜를 접한다. 비록 삶이 내적 의미가 없을지라도 열심히 살면서 어떤 존엄을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크래플을 냉소적으로 만든다. 크래플은 점점 더 나머지 삶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역할을 하기 위해 써야 할 가면처럼 느껴진다. 크래플은 가면을 쓴 자신은 행동을 하고 진짜 자기는 왼쪽 어깨 위에 앉아서 그 행동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상상한다.

크래플은 삶이 어차피 무의미한다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공원에서 계절 관리원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여기저기 지원서도 보내고, 집에서 식구들을 보는 것이 힘들어서 (집에서는 가면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와 오래된 외딴 농가를 집주인 대신 봐주는 일(to house-sit an old isolated farmhouse)을 하며 지낸다. 근처 겨울산의 아름다움도 냉소적인 상태에 빠진 그에게는 별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던 중 휘트먼 컬리지(Whitman College)가 1월 계절학기로 제공하는 강의들 중에 시애틀에서 온 무희단이 가르치는 ‘Contact improvisation(즉흥접촉)’이라는 댄스워크숍을 수강하게 된다. (강의들 중 다수가 마을 사람들도 수강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강의에서 가르치는 춤은 접촉 지점이 늘 변한다는 점에서, 늘 변하는 눈과 땅의 상호작용이 곧 경로인 크래플의 표행과 좀 유사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춤은 근육을 풀어주고 습관적인 자세를 교정하여 몸이 더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반응하게 했다. 강사들은 그룹으로 춤을 추게 하였는데, 이럴 경우 집단의 에너지가 서로긴밀하게 연관된 느낌을 남기며 끝났다.

둘째와 셋째 워크숍 사이의 저녁에 강사들이 대중 앞에서 춤공연을 했다. 한 여강사가 바닥을 굴러 가로지르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그녀는 구르지 않았다. 그녀는 “‘굴러지는’ 듯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선(禪)적 자질(n ineffable Zen quality of ‘being rolled’)”을 보였다. 갑자기 ‘가능해’는 말이 크래플의 마음속에 계속해서 울렸다. 그는 자신의 추구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공안에 대한 답이 재노프의 설명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의 목소리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이후에 강사들과 긴 대화를 가지면서 크래플은 세상이 가능성들로 가득 찬 것을 보게 된다. 이제 왼쪽 어깨 위에 않았던 냉소적인 자아는 사라졌다. 의기소침함도 사라졌다. 갑자기 예전의 공안의 답이 생각나고 ‘자, 나왔다!’(There, I’m out!)라는 그 답을 이해하게 된다. 사실 그는 왼쪽 어깨 위의 냉소적 자아가 지키는 논리의 독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쨌든 이제 그는 나왔다. 일단 나오니 반박할 수 없던 것 같던 그 논리의 힘이 무너져버렸다.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두는 논리를 외부에서 보는 것뿐이었다. 크래플이 갇혀 있었던 그 방, 그의 마음 안의 그 조그만 방은 그의 여생 전부와 우주 전체를 가둬 담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빠져나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그 가두는 힘은 무너졌다. 그것은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벽이란 그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크래플은 그날 노래 가사가 나오는 대로 흥얼거리며 집으로 걸어 돌아왔다. 놀랍게도 가사가 음보와 운이 딱 맞으며 명쾌하게 흘러나왔다. 인도에 눈이 쌓여있었고 크래플은 균형잡힌 ‘발끝으로 돌기’를 했다. 미끄러질 것이라는 두려움 없이, 시도하는 무엇이나 가능하다고 확신하면서.
<19 끝>

 




표행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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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표행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3

 

크래플에게 ‘roaming’이란 실제적인 것인 동시에 비유이다. ‘roaming’은 사전적으로는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것을 말한다. 크래플이 실제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할 때 ‘roaming’은 등산로를 벗어나(‘off the trail’) 산을 타는 것을 말한다. 주로 물줄기를 찾아 따라 올라갔다가 그 길을 그대로 되밟아서 내려온다. 앞으로 ‘roaming’은 ‘표행(飄行)’으로 옮기기로 한다.

디날리국립공원에서 “a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으로 일하면서 크래플은 5일 일하고 3일 표행을 했다. (평일의 마지막 날 일을 일찍 끝내고 표행을 시작한다.) “공원에는 등산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표행이 적절한 단어다.”

크래플의 표행의 가장 중요한 기술은 ‘온 길을 되밟아 가기’이며, 둘째 기술은 ‘staying found’[언제나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이다. 만일 온 길을 되밟아 돌아갈 수 있다면, 거의 어디든 탐구할 수 있다.

항상 당신의 발을 안전한 위치에 놓을 수 있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스킬이다. 그렇게 할 수 있으면 당신 앞에 세상이 열리고 당신을 표행으로 초대한다. 당신은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같은 길로 돌아와야 할 수도 있으며, 이는 아마 여러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고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돌아올 가능성도 자신의 길을 찾는 표행의 일부이다. 그 시간은 낭비된 것이 아니다.

등산로를 따르는 산행과 표행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등산로는 당신을 예정된 장소로 데려다주지만 표행은 당신을 예측하지 못한 연결관계들의 네트워크로 끌어들인다.

표행은 땅과 함께 춤을 춘다. 땅을 가로지르는 것이 아니라 땅 안에서 움직이다. 등산로를 벗어나면 여러 개의 가능한 선들을,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본다. 나는 이것들을 ‘선들’(lines)이라고 부른다. ‘경로들(paths)’이나 ‘루트들(routes)’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발에 의해서 표시가 된 길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표행을 할 때에는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보는 것이 변하며 그에 따라 다음 내딛을 곳이 변하고 또 이에 따라 그 다음에 보는 것이 변한다. 이렇듯 걷기가 “계속적인 피드백 나선에 의해 형성된다.”

매순간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더 잘 반응할수록 이 나선은 더 살아있는 것이 되고 나의 표행도 더 살아있는 것이 된다. 내가 가는 경로는 예측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그 경로를 가로질러 강한 선이 지나가고 있다. 비탈들을 오르고, 작은 상류 유역을 유람하듯 둘러가며 구불구불한 하상(河床)을 따라가는 선이다. 매력, 아름다움, 즐거움에 의해 형성되는 선이다. “아름다움은 지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구하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어느 날 크래플은 사면 유역(a side drainage)을 따라 낮고 완만한 고개를,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생각을 미리 가지고 넘어가다가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유역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렇듯,

표행을 할 때 땅은 더 커진다. 내 머릿속 지도는 내가 작다고 생각한 곳들에서 계속 부풀어 커진다. 그 지역은 내가 등산로를 따라갈 때보다 그 안에 표행을 할 때 더 많은 차원을 가지게 된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땅의 모습에 잘 맞추어져 있고 능선, 물줄기, 표행자 그리고 다른 동물들을 꼬불꼬불한 선들로 엮는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을 잘 만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① 목적이 다르다. 인간의 길은 빠른 이동을 위해 만들어졌고, 동물들의 길은 그 지역에 사는 것을 돕도록 만들어졌다.

② 동물들이 다니는 길은 매우 좁다. 1피트가 넘지 않는다. 길이 오래 되어서 땅이 그 주위에 잘 적응되어 있다. 그 길을 다녀도 주위에 티가 잘 나지 않는다. 동물들의 길에 들어서면, 길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길 안에서 걷는다는 느낌이 든다. 걸음걸음이 편리하게 경사지어진 땅을 딛게 된다.

땅은 선들로 가득 차있다.

① 등고선(contour lines)

② 경사선(fall line) : 공을 굴리면 굴러가는 공이 따르는 선. 등고선과 수직임.

③ 유역선(drainage lines) : 어떤 지역에서 짧은 경사선들이 합류하는 가장 긴 경사선. 경사선들 가운데 경사가 가장 완만하다.

④ 능선 : 유역선이 음이라면 능선은 양이다.

⑤ 동물들이 다니는 길의 선 : 에너지가 가장 덜 드는 경로이다.

⑥ 살아있음의 선 : “이 다섯 선들의 상호작용에서 내가 걷는 선이 나온다. 살아있음의 아름다운 선(a beautiful line of aliveness)이다. 이 선은 모든 다른 선들에 반응한다. 그러면서도 이 선은 그것이 어디로 이끌지도 모르면서, 그리고 어떤 선에 의해 내가 마침내 출발점으로 돌아올지를 모르면서 내가 실제로 따르는 선이다. 종종 그 공간의 아름다움과 그 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그 안에 숨을 쉰다. 내 주위에 온통 아름다움 빛이 빛난다. 여기에, 이 공간에 있다는 데서 오는 풍요로운 만족감.”

마지막으로 크래플은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표행’을 삶 전체를 비유하는 차원으로 확대한다.

삶은 표행이다. 만일 나를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경로로 데려다줄 가능성이 매순간 열린다고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 가능성들에 더 맞추어 있게 되는 셈이다. 그 가능성들은 내가 내 앞의 선을 스캔할 때 나의 검색 이미지의 일부이다. 나는 새 관찰자를 만나서 그것을 계기로 알래스카에 가게 되었다. 한 삼림관리원이 죽은 사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기를 제안하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말해줄 내 생각이 변했다. 앞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무언가 예측 못할 일이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데려다주고, 이 모험이 다시 다른 예측 못할 조우로 나를 이끌기 때문에 당신은 이 이야기가 어디서 끝날지 잘 모를 것이다.

<11장 끝>




죽은 사슴 ―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 저자  : Paul Krafel
  • 원문 :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크래플의 웹북 Roaming Upward : The Quest of a Naturalist의 내용 소개를 시작해놓고 이런저런 일로 이어가지 못했다. 이제 이 작업을 해보려고 한다. 좀더 자세하게 소개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장을 골라서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선 8장부터 시작한다. 이번 것을 포함하여 앞으로 내용을 정리할 장들은 다음과 같다.

 

0. 개괄적 소개 [보기]
8장 The Dead Deer
11장 Roaming
19장 Koans
22장 Reflecting
25장 Gaia
29장 The Upward Spiral
30장 The Invisible Power
31장 Time Lags
32장 Roaming Together
36장 Barbarians at the Gate
37장 Encouraging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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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The Cascade of Change

 


8장 죽은 사슴

크래플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2

 

크래플이 디날리국립공원에서 일하던 어느 날 크렌쇼(Hugh Crenshaw)라는 구역담당 삼림관리원이 크래플과 같은 젊은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에게 방문객들에게 공원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공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해보라며, 예를 들어 죽은 사슴이 분해되는 과정을 지켜보라고 권유한다. 차에 받혀 죽은 사슴이 생기자 크렌쇼는 크래플에게 통지해주며, 이에 크래플은 죽은 사슴이 구더기 떼에 먹혀 껍데기만 남아가는 과정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다음 시즌에 방문객들에게 제공할 ‘사막에서의 죽음’(Death in the Desert)이라는 슬라이드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다음 시즌에는 숙소에서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퓨마(mountain lion)가 사슴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먼저 검정파리들이 와서 새끼를 까고 그 수백만 마리의 유충들이 사슴을 파먹으며 눈에 보이는 구더기들로 성장한다. 그 다음으로 청딱지개미반날개(rove beetles)들이 와서 구더기들을 먹어댄다. 크래플이 그곳에 가볼 때마다 새로운 포식자들과 썩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온다. 사슴 몸체가 구더기 몸체들로 전환되자 일정 시점에서 검정파리들이 떠난다. 전체적으로 구더기들이 먹히면서 몰려드는 동물의 절대수는 감소하지만, 덤벼드는 종의 수는 잠시 늘어난다. 말벌 한 마리가 사체 주위에 날아다니는 포식자 곤충 하나를 잡아 그 안에 알을 낳는다. 저 말벌의 유충들은 구더기들이 사슴 몸체를 다 먹어치우며 성장하듯이 그 곤충의 몸을 다 먹어치우리라.

일정 시점이 되자, 구더기들이 사체에서 떨어져 나와 기어가기 시작한다. (책에 따르면 땅 속으로 들어가서 번데기를 거쳐 성인 파리가 되기 위해서이다.) 음식 역할을 한 구더기들이 흩어지기 시작하자 몰려든 종의 수가 감소하기 시작한다. 간혹 새로운 종이 등장하지만 전체적으로 더 적은 수의 종의 더 적은 수의 개체들이 남아서 가죽과 골수에 남아있는 에너지만 수확한다.

크래플은 이 과정을 오덤(Odum)의 생태학 교과서를 통해 성찰한다. [본인은 자연에서 진실을 얻는다고 했지만, 이는 앎의 근본적 연원을 말한 것일 뿐이고, 사실 그는 책을 통한 지식과 연결짓기를 그치지 않는다.―정리자]

얼마나 다양한 곤충들이 각각 사체의 상이한 부분들을 전문적으로 먹어치우는가. 사슴 안의 분자들은 어떻게 재배열되어 수천의 새로운 곤충의 몸들이 되는가. 사슴의 몸에 집중되어 있던 에너지가 이제 어떻게 수천의 다른 생명체들을 관통해서 흐르고 있는가. 무언가 심오한 것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오덤의 책 안에서 흘러다니는 수백 개의 화살표에 담긴 큰 진실이 바로 나의 눈과 코 앞에서 육화되고 있었다. 사슴이 죽은 지 몇 분 내에 일시적인 ‘생태계’가 사체에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 생태계는 여러 날에 걸쳐 점점 더 복잡한 것이 되었다. 죽은 고기와 퓨마로 구성된 단순한 체계가 들끓는 구더기들, 구더기 포식자들, 포식자들의 포식자들로 구성된 체계로 다양화된 것이다. 사체가 먹히고 사슴의 분자와 에너지가 줄어들었을 때 구더기들은 성인이 될 준비를 하기 위해 꿈틀대며 빠져나갔다. 생태계는 해산되어 어딘가에 있을 또 하나의 사체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흩어졌다. 이것이 죽은 뒤에 몸이 가는 곳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부끄럼 없이 보여준다. 뼈, 가죽, 털 말고는 놀랍도록 빠르게 다른 생명체의 몸이 되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그의 망원경으로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관찰하듯이, 나는 매료된 채 앉아서 한 개체의 죽음과 다른 개체들의 탄생 사이의 매우 중요한 이행을 나의 육안으로 관찰했다.

이 지점에서 크래플은 열역학 제2법칙을 떠올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피력한다.

태양에너지는 태양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일부가 지구에 도달하여 지구를 비춘다. 또 그 일부가 광합성의 동력이 되고 먹이사슬을 통해 흘러내린다. 그러는 동안 물질대사를 위한 열이 우리의 대기로, 따라서 우주 공간으로 새어나오는데, 우주 공간에서 에너지는 흩어진다. 임의적인 분자운동의 형태로 공간 전체에 퍼지는 것이다. 변하거나 어떤 일을 할 잠재력이 없이.

사슴의 사체가 이 법칙을 예증한다고 본다. 사슴 안의 원자들은 일주일 후에 어린 곤충들로 이동하는 등 어디선가 돌고 있으며 결코 소진되지 않지만, 사슴 안의 사용 가능한 에너지(usable energy)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수천 마리의 구더기들을 키우는데, 그리고 구더기 포식자들을 키우는 데 도움을 줬지만 결국에는 소진되고 만 것이다.

전문적 정확성 에너지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가진, 무언가에 실질적으로 힘을 줄 수 있는 능력은 유한하다. 더 나아가 모든 사용가능한 에너지는 덜 사용 가능한 형태의 에너지를 향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가서 결국 임의적인 진동만이 남는 경향이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생물체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튀어가던 공이 결국 멈추는 것, 차에 휘발유가 다 떨어지는 것, 소리가 사라지는 것,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생긴 파문이 확대되다가 감지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지는 것, 장난감의 태엽이 다 풀리는 것 등등도 이 법칙의 표현이다. 크래플은 이 책에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사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자세히 설명하겠다고 한다.

보통 에너지의 자연발생적 흐름은 ‘엔트로피’의 증가를 향한다고 말한다. (엔트로피란 어떤 체계―‘계’―에서 사용될 수 없는 에너지의양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이것을 우리는 시간을 x축(오른쪽이 미래, 왼쪽이 과거)으로 하고 엔트로피를 y축(항상 0보다 크다)으로 하는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사슴 사체의 경우를 그리면 다음과 같다.

축에 숫자가 없는 이유는 어떤 시간 단위로 재든 엔트로피의 증가는 엄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법칙은 어떤 비율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폭탄의 폭발은 엔트로피를 폭발적으로 변화시킨다. 사막에 있는 뼈의 분해는 매우 느린 변화과정이다.

이론적으로는 증가율이 제로일 수 있다(실제로는 아니지만). 다만 자연발생적으로 흘러간다면 그 방향이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쪽일 수는 없다. 이 그래프는 이 책에서 나중에 다시 사용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갈수록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무언가(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떨어져간다는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y축을 ‘엔트로피’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된다.

이제 이 그래프는 무언가 줄어들어 가고 있다는 우리의 감각에 부합한다.

사실 엔트로피의 증가, 즉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감소가 무엇을 함축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크래플은 처음에는 제2법칙은 ‘모든 것은 줄어들게 되어있다’는 의미라고 들었다. 나중에 그는 ‘닫힌 체계는 에너지가 줄어들게 되어있다’가 더 정밀한 의미임을 알게 된다. 이 닫힌 체계에서 생물체들은 죽어서 분해되고 박테리아들이 유기체 분자를 감소시키고 그 다음에는 박테리아도 죽는다. 수역(水域)은 파도 없이 잔잔해지고 평평해질 것이다. 그런데 빛이 사라지므로 이것을 볼 수도 없다. 별빛조차도 없다. 별이 보인다면 닫힌 체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젊은 크래플은 ‘체계가 닫히지 않는다면 제2법칙은 적용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은 생각이다. ‘닫힌 체계’는 제2법칙이 함축하는 바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도구이지 제2법칙의 진정한 핵심이 아니다. 이 핵심은 에너지는 자연적인 상태에서는 더 높은 엔트로피를, 더 낮은 사용 가능성을 향하여 흘러간다는 것이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엔트로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사용 가능한 에너지’라는 말을 사용할 것이다.

제2법칙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의 증가가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것은 가능하지만 사용가능한 에너지의 훨씬 더 큰 감소가 해당 체계를 둘러싼 더 큰 체계의 어디선가 일어나야 한다. 검정파리들의 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슴이 죽어야 한다. 아이가 성장하려면 엄마가 다른 생명체들을 먹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들은 이 아래로 흐르는 열역학적 흐름 내에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즉 살아있기 위해서 계속 상류 쪽으로 헤엄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식물들은 햇빛을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의 저에너지 분자들로부터 고에너지의 당 분자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이 일을 한다. 우리 포유류는 어떻게 내부 열을 유지하는가? 옷을 입고, 더 많은 음식을 먹고, 벽을 둘러치고 불을 피우는 것이 그 일련의 일시적인 해법들이다. 이 해법들이 동이 나면 우리는 몸이 식어 죽는다.

생명[이런 경우에는 전체로서의 생명을 말함]은 상류 쪽으로의 헤엄치기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는가? 생물학 교과서들은 늘 같은 대답을 한다. 생명체들은 주위의 에너지원의 수확을 통해 생존한다고. 식물은 햇빛을 수확하고, 초식동물은 식물을 수확하며 포식자들은 먹잇감을 수확하며 사첼ㄹ 분해하는 생물체는 모든 사체들을 수확한다. 이렇듯 다른 체계들의 희생이 있어야 우리 체계가 상류 쪽으로 나아가거나 적어도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크래플은 사슴 옆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열역학 제2법칙의 근본적인 귀결, 즉 우리는 다른 것들을 수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유지한다는 사실과 대면하게 된다. 제2법칙은 우리가 우리 주위에 경계를 긋고 그 경계 너머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수확하기를, 우리가 폐기물로 바꾼 것을 다시 그 경계 너머로 배출하기를 요구한다. 동시에 호랑이든 진드기든 식민화하는 국가든 외부에서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경계를 보호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 우리의 경제적 활동 대부분은, 사라지는 시체를 서둘러 수확하는 구더기들과 똑같다. ‘청딱지개미반날개들이 잡아먹기 전에 주위 세계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될 수 있는 한 많이 취하라.’

크래플이 ‘사막에서의 죽음’이라는 슬라이드쇼를 디날리국립공원 방문객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방문객들은 이전에 지질학 강연을 할 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수동적 수용의 태도로 등을 뒤로 젖히고 앉아있기보다는 기대하는 태도로 고개를 앞으로 빼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고 않아있게 사로잡는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명강연가가 되기보다는, 아직 진행 중이고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하는 탐험을 서술했다.

이전에는 강연이 끝나면 박수가 나왔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직접적이고 활발한 관심을 보였다. 칭찬보다는 질문들이 크래플을 둘러쌌다. 지질학 강연 접근법이 에고의 영광을 증가시키는 데 더 이익이 되었지만, 크래플은 사람들이 어떤 복잡한 사안에 열렬히 참여하는 모습을 더 좋아했다. 이것이 그의 “교사로서의 길에서 평생 의미를 가지게 될 갈림길이었다.”

<8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