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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돌봄, 정념, 그리고 소비주의의 정치경제 』



 

자본주의가 자연, 통치, 사회적 삶 그리고 심지어는 유전자들과 물질을 가공하고 사유화하는 과정은 놀라울 정도로 야심적인 동시에 치밀하며 은밀하다. 피터 도란(Peter Doran) 박사의 저서 『돌봄, 정념, 그리고 소비주의의 정치경제 』(A Political Economy of Attention, Mindfulness and Consumerism)의 큰 성과는 이 과정이 체제를 지키려는 열정으로 인간의 의식 자체를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 데 있다.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우리의 정신과 문화는 시장에 의해―광고, 데이터 채집, 오락 미디어, 사회적 네트워킹을 통해―식민화된다. 우리 시대의 숨겨진 정치적·경제적 투쟁은 우리의 내적 삶의 형성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일상적 삶에 미치는 영향에 기반을 둔 크고 복잡한 이야기이다. 미친 업무일정, 하락하는 임금, 부의 불평등성, 긴축정치― 이 모든 것이 공공 서비스, 사회적 설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친절함이 퇴락하도록 만든다. 국가가 열심히 지원하는 소비주의와 시장의 성장은 사실상 경제학자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효용을 극대화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절망, 불안정성, 소외 그리고 사회적 역기능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소식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몽상으로부터 탈출하는 경로들을 발견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국가 및 시장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더 건설적인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키고 물건을 생산하는 자기조직화된 커머닝의 지대들을 새롭게 창출하고 있다.

이 경향은 ‘자기 돌봄’과 정념(正念)에의 점증하는 관심에서, 그리고 시민참여와 사회적 상호주의의 물결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보이는 튼실하고 확장력 있는 디지털 문화가 사회적 협동이 가진 힘들을 발견하고 있다. 사람들은 거대한 비용을 잡아먹는 ‘자유 시장’ 체제의 한계를, 그리고 커먼즈 기반의 오픈소스적 접근법들이 가진, 삶을 향상시키는 공생공락적 차원을 깨달아가고 있다.

[옮긴이] 여기서 정념(正念)은 ‘mindfulness’를 옮긴 것이다. 정념은 불교 팔정도의 하나로서 잡념을 버리고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언제나 잊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깨어있는 상태이다. 아마 ‘순수한 알아치림’으로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 도란은 다른 글에서 ‘mindfulness’에 대한 골드스타인(Joseph Goldstein)의 설명을 원용한다. “변화와 비영원성에 열어놓으면서 순간에 온전히 주목하는 능력”(the quality of paying full attention to the moment, opening to the truth of change and impermanence). 이는 ‘정념’에 대한 설명으로 딱 적합하다. 도란을 비롯한 일군의 저자들이 ‘정념’을 중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자본주의는 의식의 영역조차 식민화하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데 필요한 정신적 능력을 마비시킨다. ② 이것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소비주의이다. (소비주의의 증진을 담당하는 것은 주류 미디어이다.) ③ 소비주의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사물을 ‘객체’로서 영속화하는 사고방식이다. 주체의 능력은 이렇게 영속화된 객체 즉 상품에 대한 탐욕으로 환원된다. ④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수련(askesis)을 통한 주체의 힘의 양성이며, 그 양성 방식 가운데 하나가 ‘정념’의 실천이다. ‘정념’은 한편으로는 ‘주체’를 제거하고 (‘참나’眞我로 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객체’로부터 그 영속성을 제거한다. 이로써 주객분리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영속성이 제거된 객체에 집착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소비주의, 더 나아가서는 자본주의의 정신적·문화적 토대가 사라지게 된다. (‘정념’의 수련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로는 ‘선정’禪定에 드는 것인데, 선종의 승려들을 비롯하여 실제 ‘선’을 행하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 가운데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 삶의 넓은 이상들을 시장화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법과 거버넌스의 새로운 구조를 짓는 방법은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희망을 가지게 해 줄 하나의 징후는, 커머닝을 위한 보호된 지대들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수십 개의 일회성 ‘법적 해킹들’이다. 법적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면허제나, 사회적 서비스를 위한 다수이해관계자 협동조합들, 그리고 미래 세대의 이익을 보호하는 토지 신탁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 혁신들은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넘어가는 체제 차원의 법적 전략들이다. 개인이 더 큰 생태계 및 사회 체계 안에 통합되는 것으로 제시되는 ‘끼워 넣어진 나’(‘nested I’)를 존중하는 법과 정책이 필요하다. 도란의 말로 하자면, ‘사회적 힘의 상징적 구조’가 바뀌어서 거래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 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돌봄의 정치경제를 다시 발명해야 한다.

정념 혁명은 이 책이 매우 아름답게 설명하는 바처럼 존재와 앎의 새로운 방식들을 상상하는 데 큰 희망을 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신, 신체, 생태를 다시 통합하는 것이 가진 해방적 잠재력을 무력화하려는 주류적 현상인 ‘속화된 정념’(McMindfulness)의 위험에 대해서도 맑은 눈으로 명확하게 알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피터 도란은 세계변형의 전망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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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서평이고 이어지는 부분은 이 책으로부터의 발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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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활동가들 및 학자들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에 일련의 비판적인 대항실천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생물학적 필연성을 상업적 자본으로’ 재활용하는, 우세한 초개인주의적·소비주의적 행태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실험되고 있다.(Bauman 2010: 67). 커먼즈는 여러 중요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 커먼즈는 일정한 자기조직화 능력을 갖추고 있고 지역 자원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데 집중하며 공유된 가치와 일체감으로 함께 일하는 사회적 (때로는 법적) 체계이다.

· 보호된 자원에의 접근이 포용적이고 평등한 기반 위에서 조직된다.

· 커먼즈는 종종 특정의 자원과 동일시되며, 바로 이 자원을 지키고 사용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커먼즈가 발전한다. 사실 커먼즈는 항상 자원 이상의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 + 뚜렷하게 한정된 공동체 + 그 자원을 관리하기 위해 공동체가 고안한 프로토콜들, 가치들, 규범들이다.

· 마지막으로, 커머닝 없는, 혹은 집단적 이익을 위해 자원을 관리하는 사회적 관행들과 규범들을 구현하는 실천들이 없는 커먼즈는 없다.

 

커먼즈 법에 대한 최초의 이론가인 우고 맛테이(Ugo Mattei)의 설명에 따르면

 

커먼즈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주체-객체’의 환원주의적 대립―이것이 주체와 객체 양자의 상품화를 낳았다―을 넘어가게 한다. 우리는 사적재 및 공공재와 달리 커먼즈는 상품이 아니며 소유의 언어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우리가 공통의 재화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환원적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어느 정도로 커먼즈인가를 보아야 한다.(Mattei 2012: 5)

 

헬프리히(Helfrich 2012)는 커머닝의 실천과 커먼즈의 조직에 내적으로 긴요해 보이는 핵심 믿음들 몇 개를 짚어냈다. ① 경합적 자원은 공유를 통하면 모두에게 충분하다, ② 비경합적 자원은 풍부하게 존재한다, ③ 인간의 주된 성향은 협동하는 성향이다, ④ 지식은 P2P 네트워킹 혹은 협동을 통해 생산된다, ⑤ 사회의 존재에 대한 비전은 어떤 사람의 개인적인 발전이 다른 사람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된다는 확신을 부각시킨다.

현재의 커머닝 운동의 특징은 커먼즈를 ‘사물’로 보는, 심지어는 일련의 배치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존재방식이자 행동방식이며 세계를 보는 방식으로서의 커머닝의 활발한 증진에 대한 현상학적 강조로 전환하는 것이다(Bollier 2014). 커머닝은 ‘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재정의하려는 시도, 주체성보다 합리성을, 인간의 성취보다 물질적 부를, 인간의 욕구보다 체계의 추상적인 필연성(성장, 가본 축적)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보는 지배적인 사고방식에 도전하려는 시도로 간주된다(Weber 2013: 44).

커머닝은 이러한 이분법을 부수고 참여자들의 역할을 재편하여 우리가 단지 생산자나 소비자의 역할로 환원되지 않고 다수의 물질적·사회적·의미론적 욕구를 가지고 의미 있는 물리적 교환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간주되도록 한다. 커머너들은 가정의 욕구와 살림이 그들이 사는 특수한 장소 및 거주지와 교직되어 있고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지구와 교직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커먼즈의 복구는 기억에 기반을 두고 복원하는 집단적 행동이며(Bollier 2014) 자본주의적 권력의 옹호자들이 경제사상의 역사적 진화를 잘못된 방식으로 정지시키려는 시도가 실패한 상황에서 경제적·법적 형식들의 새로운 가능성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느릿한 실행 관행을 부활시켜서, 구체적 장소나 상황과 연관되어 있으며 인간과 비인간을 모두 포괄하고 돌봄·상호성·상호존재의 윤리가 작용하는 관계에 기반을 둔 행동양태에 다시 함입시킨다(Weber 2013).

로우는 커먼즈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숨은 경제”라고 한다. “커먼즈는 생태와 사회의 측면 모두에서 삶의 기본적인 지원체계를 제공한다”(Rowe 2001a).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른바 ‘개발’로 통하는 것의 주된 일은 커먼즈의 파괴였다.” 그것은 물과 하늘의 오염에서 공동체의 붕괴, 해로운 오락산업, 삶 자체의 유전자적 기층을 특허의 대상으로 삼기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괴롭히는 많은 문제들을 줄줄이 연결한 위협이었다.” 브레스니언(Bresnihan 2015)은 커먼즈를 ‘자원’에 국한시키기를 거부하는 관점을 요약한다. 커먼즈는 단지 땅이나 지식이 아니라 이것들이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이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을 포함하는 집단에 의해 결합되고 사용되고 돌보아지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커머닝은 공유된 실천을 통해서 커먼즈를 만들고 또 다시 만드는 연속적인 과정을 나타낸다. 브레스니언은 이 관계적이고 구체적 상황에 기반을 둔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의존의 심장부에 있는 것은 ‘빈약한 자연’의 가난한 세계도 아니고, 무한히 펴 늘일 수 있는 ‘테크노 컬처’의 세계도 아니며, 그때그때 생겨나는 한계와 가능성 사이를 항해하는, 인간에 국한되지 않은 커먼즈라고 덧붙인다.(ibid.: 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