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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머닝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

 


  • 저자  :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 원문 :  Introduction to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
  • 분류 : 일부 내용 번역
  • 번역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커머닝’에 관한 여러 저자들의 글 모음집인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2017)의 “Introduction”(책 편집자인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집필) 가운데 한 절(‘Five autonomist principles for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작자표시비영리 4.0 국제(CC BY-NC 4.0)이 적용된다.

    키워드 : 커머닝(commoning), 커먼즈(commons), 커머니즘(commonism), 공통적인 것(the common), 자율주의(autonomism), 관점주의(perspectivism), 다중(multitude),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대중지성(mass intellectuality)


우리는, 이 책에 모아 놓은 글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행간에서 제기하는 공동의 관심사들로서 다섯 개의 이슈 혹은 테마들을 뽑아볼 수 있다. 이 다섯은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커먼즈(commons)에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다섯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목록은 커머닝(commoning)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를 짚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거시적 사회경제의 광범한 맥락을 부각시킨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인지자본주의와 비물질노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구체적으로 상응하는 이론들과 실천들에 주목한다(Boutang, 2002; Hardt & Negri, 2004: 109; Gorz, 2010). 각 저자들은 비록 상이한 이론적·실제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제들에 상이하게 접근하지만 모두 자본의 작동을 나름으로 일정하게 비판하며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거부한다. 저자들은 현 시대의 종획 현상들이 보이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태와 그에 수반되는 일반화된 상품화를 넘어서는 생각들과 기획들을 짚어내고 설명한다.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은 모두 내재적 접근법을 따르는데 이 접근법에서는 커머닝의 이론과 실천이 내부로부터 그리고 현 시기의 투쟁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탐구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저자들은 공유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피한다. 저자들은 오히려 커먼즈를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의 창출로 인식한다. 커먼즈를 살기·일하기·사유하기·느끼기·상상하기의 새로운 집단적 실천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실천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하게 종획하는) 형태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를 사적 혹은 공적 통치체제에 의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물(재화)로 간주하지 않으려 한다. 실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현재의 고전적인 대립이 가지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참조되지도 않는다. 커먼즈는 오히려 사회변형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변형의 지렛대로서, 인지자본주의의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생산형태들 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회들로서 인식 된다. 이것들은 다시 실제적 사회적 관계들의 파열을 (균열을)(Holloway, 2010) 통해 드러나거나 가능하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 및 소비의 관행들에 대한 대안들의 발전을 통해 실현된다.

셋째, 커머닝의 실천을 통한 사회변형을 이렇게 탐색하는 것은 커머닝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가 객관주의적 접근법이 아니라 관점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정식화되는 비전과 제시 방식을 함축한다. 관점주의적 접근법이란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인 것이 구축되는 사회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들과 기획들의 탐색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접근법이다. 실제적인 것을 넘어서 가능한 것을 찾기에 집중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관점주의적 지식의 탐색자들로 하여금 실제적 효력을 가진 진실들을 추구하도록 이끈다(Negri, 1991; Virno, 2004). 말하자면 가능한 사회변형을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들에 대한 통찰을 발전시키도록 이끈다. 따라서 경험적 서술은 추상적으로 분리된 것(객관적 추상으로 관념화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 의해 결정되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특히 다중의 주체적 관점에서 사회변형의 실천과 커머닝의 투쟁 및 실천을 본다. 다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행동능력을 발휘하는 개인들(특이성들)의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다중은 특히, 확장하는 인지자본주의가 행하는 종획과 강탈에 맞서며 실질적인 대안들을 구축할 기회를 추구하는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이 다중 개념이 자율주의적 관점주의의 준거로서 사용된다. 이 관점주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 발전된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 책에 제시된 여러 생각들이 우리의 일상적 생활 조건에서 커머니즘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로의 이행을 실현할 가능성들을 성찰하고 일궈내는 일을 촉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 커머니즘적인 미래를 위해 사회를 변형하는 다중의 힘을 이렇게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넷째 테마는 삶정치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대안적인 삶의 상황과 일하기의 상황을 창출하고 자율과 저항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려는, 저자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노력이다. 그러한 변형을 실현하는 다중의 구성적 힘에 관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을 짚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중간에 해당하는 많은 입장들이 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표명했고 이 책에 글을 실은 다양한 기고자들이 참조하는 더 낙관적인 첫째 비전에 따르면, 지식 생산의 증가된 공통성과 자율적 노동의 내재성으로 인하여 비물질노동과 다중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들이 출현한다. 우리가 자동화·정보·소통(이는 삶정치적 생산의 토대로서 점점 더 네트워크들 안에서 네트워크들을 통하여 협동적으로 발전하고 비물질노동에 의하여 형성되고 관리되며, 그 내에서 노동자 자신들이 생산수단의 담지자가 되었다)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시기에 진입함에 따라 이 네트워크들 및 그에 따른 생산 수단들은 더 이상 자본에 의해 제공되지 않고 노동 내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 비전에서는 이제 바로 산 노동과 그 속성들이 가장 중요한 발전의 힘이 된다. 이 힘은  일반지성이 아니라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자들의 대중지성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적으로 지식·아이디어·소통의 생산이 노동의 내부에 있고 자본의 외부에 있는 협동 형태들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종획을 조직화하고 노동이 생산한 부를 전유하려는 시도들을 내적으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커머니즘적 미래가 노동의 자율성과 협동성의 내재성을 통해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자본의 통제기술과 전략에 귀속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다중의 해방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비전은, 인지노동이 점점 더 자율적이 되어 더 이상 자본의 지배를 돕지도 않고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지도 않게 되는 해방의 궤적이 임박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생산이 점점 더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자율성이 점점 증가한다는 이런 생각 대신에 이 둘째 비전은 반대되는 궤적에 주목한다. 즉 특히 인지노동의 정신과 욕망을 통제하는, 그 영혼을 통제하는 새로운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 덕분에 자본측이 인지노동 시대의 삶, 일, 사회적 심리를 통제하는 힘이 증가한다고 보는 것이다(Berardi, 2009). 따라서 자본이 인지노동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은 포디즘적 생산에서처럼 특정의 착취 영역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으며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채우고 이끌고 식민화한다. 기술-사회적 지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인간자본으로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인간 전체라는 것이다. 포획된 것은 바로 이것, 즉 사회적 리비도 그 자체와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방식(지성·상상·사회성 등)이다. 이 비전에서 자본이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는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지노동에 발휘하는 힘은 불가역적으로 보이며, 제국의 권력망을 돌파하는 다중에 기반을 둔 낙관적 비전의 실현을 막는다(지금은 간헐적인 승리만이 가능하며 이 승리들은 안전밸브 메커니즘처럼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명백하게도 훨씬 더 황량하지만 이 둘째 비전이 모든 행동을 부정하거나 인간활동의 자율성과 창조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둘째 비전은 오히려, 욕망의 맥락을 더 잘 짚어내고 그럼으로써 정동·아이디어·상상의 영역들과 같은 다양한 심리 영역들을 지배하는 타율적인 기술 권역들(정보·소통·바이오테크놀로지의 영역들)이라는 실제적 맥락 속에서 이 자율성이 형성되는 방식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깊이를 가진 반응을 끌어내고자 하는, 힘이 좀 많이 들어간 호소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의 저항 및 자율성과 이에 대한 분석을 재혁신할 수 있는 의식을 최소한 가지자는 호소이다. 따라서 이 둘째 비전은 새로운 대중지성이 다시 발전하여 (현금의 지식 경제의 하이테크 영역들의 일반지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재창출 할 수 있는 길들을 찾아보자는 호소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전들과 해석들 그리고 적극적인 결과들을 낳을 잠재력을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몇몇 기본적인 문제들을 함축한다. 다중은 새로운 공통성들이 수립될 사회적 공간들을 생성할 수 있는가? 인지자본은 그러한 기획들을 어느 정도로 흡수할 수 있고 대중지성을 자신의 구조들 안에 어느 정도로 봉쇄해 놓을 수 있는가? 이 책에 실린 글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것은 비결정론적 테제일 것이다. (인지노동의 힘의 내재적인 강화와 함께, 그러나 또한 자본에 의한 그리고 자본을 위한 전복 및 조작과 함께) 자본에 기반을 두지 않은 대안적인 발전의 기회들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이 기회들을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자율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하는 것에 발맞추어 선택과 가능성 즉 미래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시기에 인지노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보는 두 입장인 유토피아론과 디스토피아론은 이렇듯 현재의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참조점들의 두 극단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커머닝을 위한 가능성들을 탐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섯째 테마로 이어진다. 자본(인지자본의 모순)과 (이후에는 변이될) 국가 내에서 혹은 상품의 세계 외부(커먼즈 내에 실현될 것)에서 혹은 양쪽 모두 다(안과 밖)에서 전개되는, 다중에 의한 다양한 커머닝 실천과 사회적 공간의 창출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다중의 커머닝 실천의 관점에서 이 세 위치들을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고찰할 때 그 전체적 효과는 공통적인 것의 결합된 비전의 출현(또한 개방된 다원성의 출현)이며 여기서 그 축적된 효과는 그저 전적인 파열이나 탈출이 아니라 파열을 포괄하면서 자유로운 공간들을 확대하는 지속적인 전개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는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면서도 혁명적 계기를 요구하는, 특정의 단기적 성공을 가치화하면서도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는 그러한 과정이다. 이는 과정으로서의 진보이며, 자본에 적대적이고 자본과 양립 불가능하지만 또한 자본 안에서 발전하고 그래서 자본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여기서 커머닝은, 특수한 맥락에서 설계되고 사람들이 커먼즈를 드나들고 자본주의/국가주의의 맥락들(환경, 회로)을 드나들면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실천이 이 책의 글들이 고찰하는 커머닝 활동과 분석들의 범위를 나타낸다.

 

References [위에 번역된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 발췌함—정리자]

Berardi, F. (Bifo) (2009). The Soul at Work: from Aleination to Autonomy. Los Angeles, CA: Semiotext(e).
Boutang, Y. M. (2002). L’eta del Capitalism Cognitive. Innovazione, proprieta e Cooperazione delle Moltitudine. Verona: Ombre Corte.
Gorz, A. (2010). The Immaterial. Knowledge, Value and Capital. Calcutta: Seagull Books.
Hardt, M. and Negri, A. (2004).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Holloway, J. (2010). Crack Capitalism. London: Pluto Press.
Negri, A. (1991).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e. Brooklyn, NY: Autonomedia/Pluto.
Virno, P. (2004). A Grammar of the Multitude. Los Angeles/New York: Semiotext(e).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Guido Ruivenkamp and Andy Hilton

1 The Prefigurative Power of the Common(s)
  Mathijs van de Sande
2 Realising the Common: The Assembly as an Organising Structure
  Elise Thorburn
3 Instituting the Common: The Perspective of the Multitude
  Sonja Lavaert
4 Insolvency/Autonomy: What is the Meaning of Autonomy in the Semiocapitalist Age?
  Franco Bifo Berardi
5 The Conditions of the Common: A Stieglerian Critique of Hardt and Negri’s Thesis on Cognitive Capitalism as a Prefiguration of Communism
  Pieter Lemmens
6 Grounding Social Revolution: Elements for a Systems Theory of Commoning
  Massimo De Angelis
7 Commodification and the Social Commons: Smallholder Autonomy and ‘Rurban’ Relations in Turkey
  Murat Ozturk, Joost Jongerden, Andy Hilton
8 The Square as the Place of the Commons
  Ruud Kaulingfreks and Femke Kaulingfreks
9 Transition towards a Food Commons Regime: Re-commoning Food to Crowd-feed the World
  Jose Luis Vivero-Pol
10 Seeds: From Commodities towards Commons
  Guido Ruivenkamp
11 Peer-commonist Produced Livelihoods
  Stefan Meretz




제국, 20년 후

 



20년 전 『제국』이 나왔을 때에 지구화가 중앙무대를 차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한 번 지구화가 중심적 이슈이지만, 지금은 여러 입장에 걸쳐있는 제도권 논평가들이 그 검시(檢屍)를 수행하고 있다. 우세해진 새로운 반동세력은 자국주권의 귀환을 요구하면서 무역조약을 깨고 무역전쟁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초국적 기관들과 전지구적 엘리트들(소수 지배세력)을 규탄하는 한편 인종주의의 불을, 이주자들에 대한 폭력의 불을 지핀다. 좌파에서도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 및 전지구적 엘리트들의 강탈행위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자국주권의 부활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는 죽었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덜 명료할 뿐이다. 전지구적 질서가 어디서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오늘날의 여러 위기들이 전지구적 구조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막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자본처럼 위기를 통해 기능한다. 말하자면, 위기를 먹고 산다. 이 질서는 여러 면에서 고장남으로써( by breaking down) 작동한다.[원주1: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자본주의적 기계의 분열적 성격의 일부는 그것이 ‘고장남으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Anti-Oedipus,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apolis 1983, p. 31 참조] 오늘날 전지구적 구조들이 덜 가시적이기에 지난 20년 동안의 트렌드들을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라는 면과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전지구적 구조들이라는 면에서 연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배와 착취의 주된 구조들을 전지구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반란과 해방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촉진하는 데서 핵심적이다. 제국이 아래로부터의 다중의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되었듯이, 다중이 자신들의 힘을 효율적인 대안적 힘으로 구성하고 대안적 사회의 조직을 향한 경로를 그릴 수 있는 한에서 제국은 다중 앞에서 몰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운동들은 여러 면에서 이미 이러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 서로 어긋나 있는 권역들

제국의 지속적인 위기가 하나가 다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권역들(spheres)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지구 규모의 네트워크들이 그 첫째 권역이며,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 그 둘째 권역이다. 이 두 권역은 점점 더 서로 어긋나고 있다. 첫째 권역은 ①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연결성이 높아지는 상호연결된 소통 네트워크들, ② 물질적·비물질적 기반시설들, ③ 육·해·공 수송로들, ④ 대양을 횡단하는 케이블들 및 위성 시스템들, ⑤사회적·금융적 네트워크들, ⑥ 생태계들, 인간들 및 기타 종들 사이의 다양하게 중첩되는 상호작용들로 구성된다. 지역화된 경제적 생산이 이 영역 내에 존속하지만 이는 점점 더 이 대륙을 가로지는 회로들에 흡수되어 역동적으로 되며 또한 많은 경우 이 회로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노동도 시장, 기반시설, 법, 국경체제[국민국가의 경계들로 지리적 구획이 지어진 체제]의 전지구적 웹에 흡수되고 제한을 받는다. 가치화 및 착취 과정들도 다양하지만 통합된 전지구적 어셈블리라인에 의해 지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기관들과 생태 신진대사의 회로들은 여전히 지역적일 수 있지만, 이들 역시 큰 역동적 시스템들에 점점 더 의존하고 종종 그것들에게 위협을 받는다.

이 지구 규모의 시스템들은 상이한 공간들과 시간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다양한 활동들을 실질적인 동시에 형식적으로 포섭한다. 이 권역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 있는 총체이다. 단일하고 밀도 있는 지구 규모의 집합체이다. 이 상호연결성은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가장 분명해진다. 가령 핵에 의한 파멸이나 기후위기에 직면하면 살아있는 생물들과 테크놀로지들의 웹 전체가 위협을 받으며 그 가운데 무사할 것은 없다.

첫째 권역을 둘러싸고 있는 둘째 권역은 상이한 여러 수준들에서 상호교직된 정치적·법적 체계들―일국 정부들, 국제적인 법적 협약들, 초국적 기관들, 기업 네트워크들, 경제특구들 등―로 구성된다. 이는 전지구적 국가(a global state)는 아니다. 일국 주권의 주장이 퇴색하면서 출현한 것은 이행적 거버넌스 체제들이다. 이 중첩되는 구조들이 혼합된 정치구성(a mixed constitution)을 이룬다. 이 권역의 표면을 가로질러 지배의 고비를 쥐고 있는 자들은 아래 세계의 소유자들―기업의 장들, 금융 거물들, 정치적 엘리트들, 미디어 거물들―이다.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이 진전되면서 이 두 권역들은 점점 더 어긋하게 되었다. 이 두 권역들은 별도의 분리된 축 위에서 돌면서 때로 서로 충돌한다. 20세기의 개혁 기획이 두 권역들 간의 관계를 안정화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하며 전지구적 체제의 모든 수준들에서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embedded liberalism'[‘내장된 자유주의, ‘묻어들어 있는 자유주의’ 등 여러 번역어가 있다]를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은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영역과 안정된 구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거버넌스 권역을 창출했다.

신자유주의의 제국적 거버넌스는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안쪽 권역으로부터 가치를 포획하고자 한다. 안쪽 권역의 생산 및 재생산 회로들이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영역이 그 명령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화폐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생산된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금융 및 부채의 도구들을 통해서 자산소득(rent, 지대)의 형태로 가능한 많은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위기들이 번성하지만, 이 위기들은 임박한 붕괴의 표시들이 아니라 지배의 메커니즘들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운수(運數)

두 권역들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각 영역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들이 어떻게 변했나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한다. 다중의 저항과 도전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오늘날 어떻게 열렸는지에 시선을 두면서 말이다.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동터옴을 선언했다. 그 당시 비판자들이든 지지자들이든 모두, 미국이 유일한 초강국으로서 당연히 그 유례없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행사할 것이며, 전지구적 사태에 대한 일방적 통제만큼이나 책임도 점점 더 많이 지게 되리라고 보았다. 10년 후 미국 군대가 바그다드로 진군할 때에는 아버지 부시가 고지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아들 부시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중동을 다시 만들 듯이 보였으며, 그곳에 순수한 신자유주의적 경제들을 창출할 듯이 보였다. 네오콘들이 슬슬 몸을 풀 때 비판자들은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를 규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일방주의적 힘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으며 워싱턴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헛된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다른 게 아니라 단지 그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의 불충분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미국은 탈레반(Taliban)과 바티스트(Baathist) 정권들을 전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요구되는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수십 년 동안의 실패 이후인 지금, 미국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체제가 혜택을 가져오리라고 믿거나 안정적 질서를 창출할 힘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잔존 여부에 대해 마음을 졸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만, 사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지배는 트럼프가 무대에 돌연히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지난 일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전지구적 질서를 일방적으로 조직하고 통제할 수 없다. 아리기처럼 중국과 같은 다른 국가가 미국이 했던 헤게모니적 역할을 계승하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쇠퇴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제도권 논평가들에게는 여전히 미국이 전지구적 패권국에 유일하게 걸맞은 국가이다. 이런 주장들에도 일리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나 중국의 역할이 일극적 패권국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mixed constitution)에서 벌어지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격렬한 경합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국가도 헤게모니적 위치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은 카오스와 무질서가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주권의 출현을 나타낸다.

 

  1.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

헤로도토스나 플라톤 같은 예전의 사상가들은 세 개의 기본적 통치 형태―군주제(1자의 지배), 귀족제(소수의 지배), 민주제(다수의 지배)―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각 정치구성의 상대적 장점을 분석했으며, 정치사를 하나의 정치구성에서 다른 하나의 정치구성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폴리비오스(Polybius)에 따르면 로마의 새로움은 그 혼합된 정치구성에 있었다. 통치형태들이 서로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했다.

20년 전 우리는 오늘날 출현하는 질서를 (이 전지구적 통치의 혼합된 정치구성을 가리키기 위해서) ‘제국’이라고 명명했다. 제국은 전지구적 국가도 아니고 통일되고 중앙집중화된 지배구조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지구화는 단순한 동질화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질화인 동시에 마찬가지 정도로 이질화인 과정이다. 모든 지리적 규모에서 경계들 및 위계들이 번성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난 20년 간 제국적 정치구성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이행들의 일부를 개략적으로만 살펴보겠다. ① 군주제의 수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태전개는 중심의 공동(空洞)화였다. 1990년대에 미국은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 도메인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폭탄(워싱턴), 달러(월가), 네트워크(헐리우드/실리콘밸리)는 군주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 도메인들에서 ‘일자의 지배’와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영역에서 미국의 우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지만, 그 토대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그 범위는 더 좁아진다.

㉠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다른 나라들보다 두드러지게 우월하다. 그러나 월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패배는 미국의 군주로서의 능력이 오늘날 미약해졌음을 분명히 한다. ㉡ 20년 전에는 견고하게 보였던 미국의 금융적·화폐적 헤게모니도 점점 더 약화되었다. 금융 헤게모니는 이미 불안했는데, 이는 1971년에 있었던, 달러화의 금표준으로부터의 분리로 소급한다.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에 따르면 1990년대에 미국의 금융 및 화폐체제는 ‘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토대는 2008년의 금융위기에 의해 확인되었고 이는 다시 미국이 군주 역할을 하는 능력을 문제시 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는 문화산업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도 축소되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 기업들은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 발휘를 위한 소프트파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점점 더 지구 규모로 작동하며 모호하게만 미국의 전지구적 이미지에 기여한다. 이렇듯 세 도메인 모두에서 미국의 군주적 힘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다른 후보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적 진공이 군주제의 수준에서 커지고 있다.

② 제국의 귀족제 수준에서는 흥하고 쇠하는 열강들의 열띤 경합이 일어나고 있다.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소수의 지배’는 주요 기업들, 선진국들, 초국적 기관들을 가로질러 행사되고 있다. 기업 대 국민국가, 국민국가 대 초국적 기관 등의 격렬한 경쟁이 그 특징이다.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위계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상승한 반면, BRICS의 다른 국가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애플과 알리바바가 제너럴모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갈등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은 실제로는 같은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은유를 바꾸자면,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기사도(騎士道)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질서에 복무하는 기사들과 같다.

귀족제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일반적 윤곽이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많이들 말하는 국민국가의 귀환은 전지구적 체제의 균열이 아니라 귀족 열강들 사이의 경합에서 구사되는 전술적 작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America first!, Prima l’Italia! Brexit!는 전지구적 체제에서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국가들의 애처로운 외침들이다. 사라진 나뽈레옹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해 동원되는 것으로 맑스가 그린 바 있는 프랑스의 보수적 농민들처럼, 오늘날의 반동적 민족주의자들도 전지구적 질서로부터의 분리를 노리기보다는 전지구적 위계에서의 재상승을 노린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 사이의 갈등―가령 2018년 유엔총회에서의 트럼프의 ‘글로벌리즘’ 비판―도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책이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을 주도하는 엘리트층 모두가 자본주의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바쳐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지시에 의해 추동된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명료한 혼합된 정치구성(‘다수의 지배’)은 방대한 세력들로 구성된다. 국민국가들 및 자본주의적 기업들, 방송과 미디어, 국가와 기업들을 지원하고 종종 이들이 손상시킨 바를 수리하는 NGO들, 종교단체들, 국가에 맞서거나 스스로 국가를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병(私兵)들. 이들은 가장 저급한 의미에서만 ‘민주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반체제적 운동이나 세력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세력은 군주제적·귀족제적 힘들에 저항하고 도전할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제국적 정치구성 전체를 지탱하는 데 복무한다. 푸꼬가 겉으로 보기에는 저항적인 형상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는 지배적 힘을 강화하는지를 인식하는 데 탁월했다. 물론 모든 저항 노력이 헛된 것이며 불가피하게 제국에 의해 포섭되어 대안을 위한 희망이란 것은 없다는 말은 아니다(푸꼬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곧 이 점을 다룰 것이다.

 

  1. 새로운 국제주의들

지구화를 위로부터 보면 왜곡을 낳는다. 지구화는 그 핵심에 있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세력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국제주의가 근대 전체에 걸쳐서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형태들과 과정들의 주된 추동자였다. 모든 근대 혁명은 깊은 의미에서 국제주의적이다. 아리기와 제임슨 같은 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읽기 덕분에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전개가 실제로는 1960년대의 반란, 해방투쟁, 혁명운동의 합류나 축적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권력 구조들을 ‘대응’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분석적 기능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가진다. 제국의 지배를 넘어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필연적으로 더 나아간 국제주의의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런 만큼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출현하는 새로운 국제주의들을 포착하고 양성하려는 노력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를 인식하는 한 방법은 투쟁의 국제적 순환의 전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각 투쟁이 지역에 집중될지라도, 투쟁의 불꽃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면 운동이 전지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2010년 11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러한 순환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나라들에서 일어나서 다음에는 스페인, 그리스, 미국으로, 그 다음에는 터키, 브라질, 홍콩으로 옮겨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폭력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미니즘 투쟁인 NiUnaMenos[영어로는 ‘Not one (woman) less’라고 옮겨지며 여성이 한 명이라도(una, one) 더 희생되지(menos, less) 말아야 한다(nie, not)는 의미이다]는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폴란드의 투쟁과 공명하여 혁신적인 방식으로 남북 아메리카 전역으로 옮겨갔으며 대서양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파업의 새로운 형태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이 형성되고 있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이지만 훨씬 덜 명료한 것으로, 이주(migration)가 국제주의의 주된 힘을 구성한다. 이주는 국민국가들의 국경체제들과 전지구적 체제의 공간적 위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반란이 된다. 2015년 여름, 걸어서 혹은 모든 가능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유럽을 향하고 또 유럽을 가로질렀으며 이제는 지중해를 건너기에 이른 대대적인 행렬이 유럽의 국경체제들을 위협했다. 이와 유사하게 2018년 가을 멕시코를 지나 미국 국경을 향해 움직인 중앙아메리카의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행렬은 미국의 국경체제의 지속적인 위기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디어가 매우 자주 다룬 이 사건들은 남에서 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나이지리아에서 남아프리카로,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중국의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다양하게 펼쳐지는 전지구적 이주의 정점들일 뿐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으로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이례적인 종류의 국제주의적 반란이다. 이주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자신들의 탈주의 정치적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국제주의적 투쟁의 일부로서 이해하지는 더욱 못한다. 실로 그들의 여정은 극히 개인화된 것이다. 마차행렬과 같은 명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도 드물다. 중앙위원회도 없고 강령도 없으며 원칙의 진술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주자들의 탈주선들은 국제주의적 힘을 구성한다.

이주자들은 전쟁이나 박해로부터 도망치는 경우든 단순히 모험을 추구하는 경우든 이동성의 자유를 긍정한다. 이것이 모든 다른 자유들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전지구적 이주가 지속적인 반란으로서 가진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걸음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이주자들의 반란의 힘은 이주자들의 통제에 발휘되는 잔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역반란 전략에 의해 확인된다. 리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미국 국경의 야만적 경찰들까지. 이주자들의 반란은 전지구적 체계를 분절하는 장벽들을 그저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 장벽들에 균열을 내고 그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1. 전지구적 자본과 공통적인 것

앞에서 말한 두 권역은 서로 어긋나 있긴 하지만 서로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일국의 자본이 그 이익을 위해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듯이, 전지구적 자본도 복잡한 전지구적 거버넌스 구조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권역을 구성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개별 자본가 기업들, 종종 서로 갈등하는 국가 자본들, 다양한 형태의 임금∙비임금∙불안정 노동, 항상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였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이다. 이러한 이질성에 가려 전반적 구도를 인식하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출현한 학술적·전투적 비판들 일부를 따라가봄으로써 자본의 발전에서 보이는 일부 핵심 방향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정치경제 비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회로들에서 저항과 자유의 씨앗들을 찾는 것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훈육체제에 맞서는 운동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으로서 기능해온 방식에 먼저 초점을 맞추겠다. 이는 (자본에 의한) 포섭과 포획의 이야기인 동시에 반란의 활력의 지표이다. 자본을 전진시킬 힘이 있는 곳에 자본을 전복할 잠재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자본이 자본에 맞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들을 창출하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원주 21 내용의 일부: 맑스는 반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은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혁명은 과거의 사회적 형태들로의 회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기의 성과―즉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토대로 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맑스는 썼다. Capital, Volume I, trans. Ben Fowkes, London 1976, p. 929.] [이때 수립되는 소유를 맑스는 ‘개인적 소유’(das individuelle Eigentum, individual property)라고 불렀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여러 모습―자연자원, 문화생산물, 생체측정 데이터, 사회적 협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한다.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중심적이 되지만(자본이 축적하는 가치가 점점 더 공통적인 것 안에 있게 되지만), 또한 공통적인 것은 자본으로부터의 사회적 자율의 잠재력, 반란의 잠재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 핵심 지형들―① 추출의 측면 ② 삶정치적 측면 ③ 생태계―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종류의 분석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대한 최근의 광범한 분석들은 넓은 의미의 추출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가치가 땅으로부터 직접 끌어내어지는 전통적인 추출주의적 관행의 확대만이 아니라 공적 부와 기반시설의 사유화에 의해 획득되는 축적방식들 및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전유되고 축적되는 새로운 형태의 추출이 이루어진다.

데이터 마이닝의 비유가 전통적인 추출작업들이 사회적 도메인으로 옮겨온 방식을 보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가령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을 수단으로 한 축적은 사용자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프로세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지식 및 사회적 관계들을 자본화하는 알고리즘적 수단을 창출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들은 ‘공유’를 (공동의 사용을 위해 재화를 제공하는 데서) 가치를 추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켰다. 금융 또한 그 추출방식을 통해 기능한다. 물론 금융도구들의 일부는 투기의 수단이며 ‘허구적’ 가치들만을 창출한다. 그러나 금융과 채무관계는 그 주된 측면에서는 금융자본의 직접적 관리 외부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들을 추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 구도에서의 이러한 사태전개를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한다. 산업자본이 대체로 생산과정을 관리하고 협력의 형태들을 운영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반면에 금융은 자신의 관리 외부에 있는 생산적 협력의 형태들을 통해 생산된 부에서 자산소득을 추출한다.

추출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하비가 말한 ‘강탈에 의한 축적’에 크게 상응한다. 그 과정은 주로 커먼즈의 새로운 종획을 통해, 그리고 땅과 공적 기반시설에 들어있는 부의 추출을 통해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추출형태는 그 직접적 관리영역 외부에서 생산되는 가치들을 끌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출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공통적인 것―생태적, 사회적, 삶정치적 형태―을 포식한다. 이러한 포식과정은 공통적인 것 안에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둘째 종류의 분석은 삶정치적 관계들―인지적 생산형태들, 정동과 돌봄의 생성―에서 공통적인 것이 하는 역할을 부각시킨다. ㉠ 인지자본주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지식, 지성, 과학의 역할을 분석하며 축적된 지식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게 된 것을 강조한다. ㉡ 다른 분석들은 사용자들의 주목이 생성하는 가치에 의존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들과 플랫폼들을 통한 가치생산에 초점을 둔다. ㉢ 지성 및 주목과 아울러 자본주의에서 정동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동의 생산과 관련된 직업들―간호사들, 방문돌봄 서비스 노동자들, 관리-지원 직원들, 임금을 받는 가사노동자들, 교사들, 음식서빙 노동자들―은 보수가 낮고 극히 불안정하며 따라서 압도적으로 여성들로 채워진다. 정동의 생산은 또한 젠더 분업으로 정의되고 있는 가사노동을 포함하는 비보수 영역에서 중심적이다.

이 분석들에서 우리는 삶정치적 통제의 새로운 형태들과 인간 실존의 더 많은 영역들의 식민화 및 상품화와 함께, 착취와 지배의 새로운 심화된 형태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력들이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 종획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해 노동하거나 종속되어 있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상태에 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는 여전히 착취·축적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성격을 인식한다. 지성, 지식, 주목, 정동과 돌봄은 모두, 집단적 행동과 상호의존에 의해 규정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능력들이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거대한 삶정치적 저장고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

셋째 종류의 분석은 자본의 발전이 지구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들과 관련된다. 특히 기후변화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화석연료의 추출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저자들이 인간이 기후변화를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에 진입했다고 말하는데, 이 인류세 담론은 인간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해당하는 자본가들이 기후변화의 책임자들임을 가린다. 지구의 장기적 건강을 보존하는 모든 기획에 필요한 선결조건은 자본주의의 지배의 우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빈자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받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기후변화에 굴복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잃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구축할 대안들에도 핵심적이다. 토착민들의 투쟁은 인간이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 모든 분석들에서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의 힘이 드러난다. 자본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을 포식하는 포획장치가 되지만, 공통적인 것의 영역들이 기동되어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는다면 자율의 잠재력 즉 자본주의의의 지배 너머의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1. 계급다중계급

다양체(성)(multiplicity)이 점점 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전적인 지평이 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운동들―코차밤바에서 스탠딩락(Standing Rock)까지, 퍼거슨(Ferguson)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까지, 카이로에서 마드리드까지―은 다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투쟁들에 특히 미디어가 종종 지도자부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운동들이 전통적인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하는 것은 맞지만, 지도자부재라고 하기보다는 다중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러한 이해가 투쟁들의 미덕과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을 공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운동들은 중요한 성과를 얻었고 종종 더 나은 대안적 세상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단명했고 때로 쟁취한 것이 잔혹하게 역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 더 필요했고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사고가 요구되었다. 우리는 그 다양체성을 버리고 (선거로 뽑는 정당이든 ‘국민’이든) 통일된 정치적 주체를 구축할 필요를 설파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전통적인 조직형태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지속적이거나 효율적인 운동을 낳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일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면서 실질적인 사회변형을 낳을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의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탐색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역사적·이론적 이행 즉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과 다중에서 계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얼핏 보기에는 왕복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정치적 진전을 표시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출발점의 계급과 도착점의 계급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중을 통과하는 과정이 계급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제시하는 조직화의 일반적 공식은 <계급―다중―계급′>(C―M―C′, class―multitude―class prime)이다. 맑스의 공식[『자본론』1권 4장에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M-C-M′)을 말한다. 물론 자본의 공식에서는 M이 Money(화폐)이고 C는 Commodity(상품)이다]에서처럼 과정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형이 중요하다. 계급은 다중적 계급, 교차적 계급이어야 한다.

계급에서 다중으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이 이제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일반적 인정을 나타낸다. 이 이행은 전통적인 당들과 노동조합적 기관들이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가진 힘이 소진된 것에 상응한다. 노동계급이 경험적 형성체로서 없었던 적은 없지만, 이제 그 내적 구성이 변했기에 계급구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힘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인구들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획일화된 대의를 거부한다. 노동의 여러 부문들 사이―가령 임금을 받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은 노동 사이, 안정 노동과 불안정 노동 사이, 합법적 노동과 비합법적 노동 사이―의 차이와 젠더, 인종, 민족 등의 차이들이 모두 표현을 요구한다. 이런 시점에서의 계급구성 연구는 교차적 분석(intersectional analysis) 안에 함입되어야 한다. 이는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의 계급이 아니라 다중,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이다.

이와 함께,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의 투쟁 및 반자본주의 투쟁 일반이 다른 지배의 축에 대한 투쟁들―페미니즘 투쟁, 반인종주의 투쟁, 탈식민 투쟁, 퀴어 투쟁 등―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 개념은 (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에서 출현한) 교차적 분석 및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다양체성을 정치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인종, 계급, 성, 젠더, 국민 위계들이 서로 맞물려있는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적인 단일축 분석틀들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첫째로 의미하는 것은, 지배의 그 어떤 구조도 다른 것보다 우선적이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구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성들도 다양체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정체성의 거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성을 다양체성으로 조바꿈을 하여 (즉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할 필요를 말한다.[원주32: 정치적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교차성이 핵심 개념이 되면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탕을 마련한 글들로 Kimberle Crenshaw, “Mapping the Margins”, Stanford Law Review, vol. 43, no. 6, 1991, and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no. 140, 1989 참조.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 대해서는 Jennifer Nash의 통찰력 있는 책인 Black Feminism Reimagined: After Intersectionality, Durham nc 2019 참조.] 교차적 다중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이 포함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反)복종 기획’(‘an antisubordination project’)이다. 즉 여러 전선들에서 동시에 전투 및 혁명을 전개하는 전략이다.

이 지점에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을 불안정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 고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 의미는 임금 및 노동관계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런 의미의 불안정성은 포디즘 경제의 규제적 이상(regulative ideal)이었던 안정된 고용계약―이는 제한된 수의 선진국 산업노동자들(주로 남성)에게만 현실로서 존재했던 규제적 이상이다―과 대조된다. 보장된 노동계약과 법은 점점 부식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적 단기노동계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노동배치는 물론 항상 인종화, 젠더화되어 있지만, 노동력의 모든 부문들이 이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의 노동 불안정화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이다.

둘째 의미의 불안정성은 첫째에 대한 유용한 보완을 제공하며 훨씬 더 광범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과 도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주디스 버틀러: 불안정성은 인구의 일정 부분이 사회적·경제적 지원네트워크들의 부실로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을 받으며 피해, 폭력, 죽음에 더 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정치적으로 야기된 상태를 가리킨다. 노동 불안정성은 분명 전체의 일부이지만, 불안정한 삶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법·경제·통치상의 변화들이 이미 종속된 인구들의 광범한 부분―여성들, 트랜스젠더들, 동성애자들, 유색인들, 이주자들, 장애자들 등―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목표로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언어를 말하는 불안정성이 있고 교차적 비전을 증진하는 또 하나의 불안정성이 있다. 이것을 합치면 다중을 이론화하는 좋은 토대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계급에서 다중, 혹은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이동을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미 지난 20년 동안 달성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쇠퇴와 상실로 간주한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획득된 것 또한 인식해야 한다. 상호구성하는 지배구조들의 다양체는 사회현실을 파악하는 데 더 나은 렌즈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에 대한 연구를 인종, 젠더, 성 위계의 제도적 구조들에 대한 동등한 분석으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실천의 수준에서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계급정치 기획이라면 반드시 페미니즘적·반인종적·퀴어적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을 다시 사고하기

다양체를 이론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하려면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 제기한 물음―다양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답하는 데 조직이 필요하다는 대답만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중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더 온전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바의 계급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서 계급으로 나아간다면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노동계급하고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양체인 계급, 다중의 성과를 이어나가는 정치적 형성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선 계급개념을 노동계급과의 관련을 넘어 인종, 젠더를 포괄하여 사용하는 이론가들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음벰베(Achille Mbembe) 같은 이는 유럽으로 이주하는 아프리카인들에 가해지는 현재의 통제방식들을 ‘인종적 계급’(racial clas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그 국경들을 군사화하기로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멀리 가져다 놓았다. 오늘날 유럽의 국경들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개별 아프리카인들, 인종적 계급으로서의 모든 아프리카인들이다. 이는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의 신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인간 신체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그리는, 학대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계적 신체(border-body)이다.

새로운 이동성의 체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낙인찍힌 인종적 계급’으로 변형된다고 음벰베는 주장한다. 그에게 계급개념은 사회경제적 범주가 아니거나 그런 범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에만 기반을 두지 않는 집단적 인종적 차이를 사고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이 인종적 계급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구조들과 제도들에서 탄생한다.

음벰베와 유사한 것이 델피(Christine Delphy) 같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성 계급’(sex class)이다. ‘성 계급’이라는 어구의 사용에 문제를 제기한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델피는, 계급개념이 사회적 주체들이 지배관계들에 의해 창출되는 방식을 다른 어느 것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런 관점에서 델피는 이렇게 쓴다. “집단들은 ··· 관계 속에 넣어지기 전에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가 바로 그들을 그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델피에게는 지배관계가 사회적 주체들 이전에 존재하며 이 주체들을 구성한다. 또한 델피의 어법에서 계급은 전적으로 경제적 위치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그 어떤 지배의 축에도 배치될 수 있는 분석의 절차와 관련된다.

음벰베와 델피를 거론한 것은 ① 첫째, 계급개념이 자본만이 아니라 모든 지배관계에 의해 창출된 종속의 효과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② 둘째 계급개념은 서술적으로만이 아니라 종속된 사람들을 계급으로서 투쟁으로 불러내는 정치적 요청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점인데), 병렬적으로 지배받고 투쟁하는 다수의 계급들을 인식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다중적 계급’(multitudinous class)’ 혹은 ‘교차적 계급’(intersectional class)은 더 나아간 단계를 필요로 한다. 즉 그 다양한 차이나는 주체성들의 투쟁에서의 내적 마디결합(internal articulation)이 필요하다. 교차적 분석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마디결합을 연합과 연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는 종종 추가의 논리에 기반을 둔 전략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교차적 분석이 정체성과 관련된 추가적 사고방식[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령 동일한 계급의식을 가진 집단으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할 때조차도 여전히 추가의 논리가 활동가들의 상상계를 지배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접근법의 한 약점은 유대의 관계가 외적이라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내적 유대이다.

내적 유대의 세 이론적 사례들.

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905년 봉기의 실패 후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동지들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표현했을 때 로자는 그 유대가 단지 외적인 관계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독일 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러시아의 사건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건이며 자신들의 투쟁에 내적인 사건들이라는 점,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② 아이리스 영(Iris Young)
로자처럼 영도 페미니즘 투쟁과 연대하지만 그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과는 분리된 것으로 보는 남성동지들을 비판했으며 그런 유대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남성사회주의자들에게 가부장제에 맞선 페미니즘 투쟁을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으로서 인식하기를 권고한다. 자본을 물리치는 것은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③ 키앙가-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
그녀는 계급지배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미국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들에게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녀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백인의 과제로 간주되고 반인종주의적 투쟁은 유색인들의 과제로 간주되는 분리현상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 노동계급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따라서 인종, 계급, 젠더 이슈들을 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사실 미국의 노동계급은 여성이고 이주자이며 흑인이고 백인이며 라틴계이고 기타 등등이다. 이주자 이슈, 젠더 이슈 그리고 반인종주의는 곧 노동계급 이슈들이다.” 이는 우군의 참여를 받아들이거나 연대를 표하는 문제가 아니다. 백인우월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의제기가 이 시점에서 가능하다: 모두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같이 투쟁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맞지만, 불안정성 및 지배의 양태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의 투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체라는 생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는 젠더나 인종 지배와 같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다른 것 아래 포섭되지 않는다. 동일성으로의 환원 대신에 투쟁하는 주체성들 사이의 마디결합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연합보다는 계급―다중적 계급(a multitudinous class)―이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다양체로 구성되고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에 기반을 둘 뿐만 아니라 투쟁들 사이의 내적 유대와 교차에 의해 마디결합되고 각자가 다른 것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그러한 계급 개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형된 개념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과정 전체는 <계급―다중―계급>이 아니라 <계급―다중―계급′, C―M―C’>이다. 이것이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어도 초기 단계의 이론적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자본,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및 기타 지배에 동등하게 맞선 투쟁을 지향하는 내적으로 마디결합된 다양체로서의 계급′이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응답이긴 하지만, 예의 정치적 기획을 사고하고 추구하기 위한 틀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대안지구화를 찬양하며

1994년 멕시코의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반란, 1999년 11월의 시애틀에서의 WTO회의 봉쇄투쟁,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2001년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2001년 제노아에서의 G8 정상회담 반대투쟁. 이렇게 이어져 온 대안지구화 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은 여러 패배를 겪었다. 그 유목적 성격과 정상회담을 쫓아다니는 실천은 여러 경우 지역에서의 지속적 조직화에의 참여를 희석시켰다. 이 투쟁들은 종종 비판을 받았는데, 운동 내의 활동가들 자신들에 의해서 가장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교차적 특징들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직적 취약성 때문에 투쟁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또한 9∙11 때문에 설치된 혹독한 보안체제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그 초점을 대안지구화에서 반전운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투쟁들의 이례적 미덕은 그 이론적 실천이다. 이 투쟁들은 전지구적인 비판적 비전을 구축했으며 전지구적 경제기구들이라는 상대적으로 불명료한 영역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명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투쟁들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출현하는 전지구적 질서의 성격에 대한 방대한 집단적 공동연구로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활동가들은 현재의 지배 구조들이 바로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각 투쟁은 새로이 출현하는 전지구적 권력구조 네트워크의 마디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했다. WTO, World Bank, IMF, G8, 무역협정들 등등. 이렇듯 대안지구화 운동의 순환은 대대적인 교육프로젝트였다.

국민국가 주권의 이데올로그들이 나팔을 불어댐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세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덜 명료하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배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를 연구할 지성을 가진 투쟁의 국제적 순환을 필요로 한다. 때로 사회운동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작업이 도서관에서 쓴 이론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의 비가시성을 역전시키는 것이 제국의 구조들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데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Assembly(2017)의 맨 마지막 절


  • 저자  :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맨 마지막 절 “Exhortatio”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 정리해서 올리고 싶은 부분들이 남아있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맨 마지막 절의 정리를 먼저 올리기로 한다. 

 

오늘날 집회의 자유(모일 자유)는 거의 모든 국가들의 헌법에 나와 있고 세계인권선언에도 나와 있는 권리보다 더 실질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오늘날 집회는 새로운 민주적 방식의 참여와 의사결정에 대한 점증하는 정치적 욕망의 징후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정치적 권리의 전통적인 틀을 흘러넘친다. 오늘날 사회운동들은 모일 권리를 선언하고 이 권리를 새로운 사회적 내용으로 채운다. 이 운동들은 결사의 자유를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작업장에서의 파업이라는 전통으로부터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에 기반을 둔 사회파업 형태들이 출현하고 있다. 더 민주적인 모일 권리는 정치적으로만 이해되면 주권적 권력 앞에서 약하게 보일 수 있지만, 모임이 사회적 지형 위에 놓일 때에는 힘의 관계가 바뀐다. 여기서 집회의 자유는 사회적 협동에의 권리, 새로운 결합과 새로운 생산적 배치를 형성할 권리를 의미한다. 협동의 회로들이 점점 더 사회적 생산의 주된 발동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 전체의 주된 발동기가 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회로들에 기반을 둔 집회의 권리는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널리 보급된 일부 구체적 요구들이 확대된 집회의 권리를 이미 가리키고 있다. 가령 무조건적 기본소득에 대한 요구는 더 이상 급진 좌파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세계 전역의 여러 나라들에서 주류 논의의 주제이다. 기본소득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더 정당하게 분배하는 것을 제도화할 뿐만 아니라 극단적인 형태의 가난과 혹사하는 노동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이다. 정치적으로 참여하고 사회적으로 창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부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어떤 모일 권리도 불가피하게 공허한 것으로 남는다. 또한 기본소득은 우리가 앞에서 말한 공통적인 것의 화폐와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더 실질적인 제도화를 이미 암시하고 있다.

오픈액세스와 공통적인 것의 민주적 관리에 대한 요구 또한 널리 퍼져 있다. 오늘날 사적 소유는 지구와 그 생태계를 보호하기는커녕 그 파괴를 촉진하고 있다. 사적 소유는 지식,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우리가 공유하는 사회적 형태의 부를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촉진하지도 못한다. 신자유주의적인 추출 경제는 소수를 위해서는 이윤을 성공적으로 창출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회발전에는 족쇄가 되었다. 모이고 협동하고 사회적 삶을 같이 산출할 자유에는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을 지속 가능하게 돌보고 사용할 수 있는 관계들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은 사회적 생산에 필수조건이며 그 미래는 민주적 의사결정 구조에 의해서만 보장된다. 일단 우리가 생산을 삶형태의 창출로 이해한다면 공통적인 것에의 권리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수단을 재전유할 권리와 중첩된다. 모일 자유가 없이는 사회적으로 생산할 수가 없는 상황이 점점 더 되어가고 있다.

집회의 자유는 또한 주체성을 생산하는 대안적 방식을 나타낸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측면과 국가정책의 측면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주체의 생산, 즉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의 생산도 포함한다. 이 주체성이 경제와 국가정책을 뒷받침한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사회도 그 사회를 담당할 대안적인 주체성이 창출되기 전에는 출현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주체성은 점점 더 배치(([정리자] 여기서 ‘배치’(프랑스어로는 ‘agencement’)는 들뢰즈·가따리의 개념이다.))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재산이 아니라 연결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협동이 사회적 생산에서 지배적으로 되었다는 사실은 생산적 주체성들이 관계들의 확대된 망으로 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망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배치의 논리는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만이 아니라 자연 및 다른 비인간적 존재들을 모두 협동적 주체성들 안에 통합한다. 풍요로워진 집회의 자유(모일 자유)가 협동적 네트워크들과 사회적 생산으로 구성된 새로운 세계를 활성화하는 주체성 배치를 생성한다.

따라서 집회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의 옹호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학정에 대한 보호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는 국가권력에 대한 균형추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고의 주권자(왕)나 대표자들이 양도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체제의 구성자들 스스로가 성취하는 것이다. 집회는 구성적 권리가 되어가고 있다. 즉 사회적 대안을 구성하는, 정치적 힘을 잡되 사회적 생산에서의 협동을 통해 잡는 메커니즘이 되고 있다. 모이라는 요청은 마키아벨리라면 ‘덕에의 요청’이라고 부를 그러한 요청이다. 이 덕은 규범적 명령이 아니라 능동적 윤리이다. 우리의 사회적 부에 기반을 두고 지속적인 제도들과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구성적 과정이다. 다중이 모이면 무엇이 가능할지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