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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주의와 커먼즈



커먼즈가 국제적 협치(governance)와 원조의 ‘다자주의 시스템’에 어떻게 적절한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유엔―특히 국제의원연맹―에 몇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2월 22일(금요일)에 있었던 「대중의 눈으로 본 다자주의 시스템: 매스컴의 영향」이라는 컨퍼런스 소모임에 참여해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컨퍼런스 자체의 제목은 「다자주의가 새로이 직면한 문제들―의회의 대응」이다.)

 

이 소모임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 특히 인터넷이 유엔 같은 다자 기구들의 효율성, 신뢰도, 그리고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컨퍼런스에서 거둔 분명한 수확은 유엔에 있는 특정 활동주체들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다자 기구들의 능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타당한 우려이다. 수많은 문제들이 세계 질서―기후변화, 불평등, 사이버전쟁, 데이터감시 등등―를 흔들어 댐에 따라 유엔이 문제를 논의할 포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권한도 제한되어 있고 협치의 내적 구조와 과정이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누구도 과감하고 시기적절한 행동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여 기반 온라인 미디어의 부상은 유엔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엔은 그 우려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커머닝을 매력적인 옵션으로 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어떻든 조금이라도 존재함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아쉽게도, 유엔 토론자들은 커먼즈를 매우 깊게 혹은 진지하게 탐구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이는 썩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유엔에서 이루어지는 심의들에 참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그들 국가정부의 대표자들이고 국가권력과 종래의 정치의 거품에 푹 잠겨있다. 정책, 입법 및 기타 하향식 조치들이 문제를 다루는 가장 의미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른 중요한 접근법들이 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및 다자 구조들 그 자체가 많은 경우 문제의 일부이다. 그 구조들은 권력을 너무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정치적 술수, 미디어광학, 부패를 조장하여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결과를 희생시킨다. 그 구조들은 자본친화적인 ‘시장 해법’에 특권을 부여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상향식의 창조적인 혁신을 손상시킨다. 국가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종종, 스스로의 이익과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지역 기반의 안정적인 커먼즈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느낀다. 기타 등등.

 

아래는 그 모임을 위해 준비한 발표내용이다. 이 발표는 동영상에서 제시된 바로는 각 발표자에게 허용된 5분 제한에 맞추기 위해 축약되었다.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나의 발표는 11:50에서 16:40까지이다.

 

 

다자주의와 커먼즈

 

얼마 전만 해도 시민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뉴스·정보·문화의 유형들을 국민국가가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요. 어떤 독재 정권들은―인터넷의 존재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자국 내의 커뮤니케이션을 엄밀히 통제하고 있지만, 머클루언(Marshall McLuhan)이 1960년대에 예견한 상호연결된 지구촌이 실현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쉽고 값싼 초국적 커뮤니케이션이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습니다. 다른 문화나 나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 늘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이 승인되지 않은 새로운 외국의 정보를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 나름으로 뉴스, 비디오, 팟캐스트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할 수 있고 나름의 위키들을 개발할 수 있으며 별로 많지 않은 자원으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전과는 달리 이제 사람들이 전지구적인 청중을 상대로 말할 도덕적·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전통적 국가와 미디어 당국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분산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각각의 국가들의 정치적·문화적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전지구적 문화를 종종 심오하게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국민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이러한 사태전개가 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하기에 충분한 강제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적법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당성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후자가 좀더 열려 있는 문제이지요. 국가정부들이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민들만이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현재 원격통신·경제·정치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체로 새로운 미디어와 종래의 국가 기구들 사이의 긴장을 활용하는 데 기반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의 특징은 다음 둘 사이의 심대한 구조적 갈등입니다. 즉 ① 이전 시기의, 전문가가 주도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기구들과 ② 개방된 네트워크들과 다양한 앱들이 가능하게 하는, 참여에 기반을 둔 자기조직적인 상향식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양한 새로운 대중집단과 하위문화를 쉽게 나름대로 창출할 수 있을 때에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라는 생각, 그리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공유한 정체성이라는 생각도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가 입증된 위험들―가짜뉴스, 페이스북 알고리즘, 권위적 포퓰리즘과 혐오의 장소들―을 많이 가지기는 하지만 개방된 네트워크들이 (특히 커먼즈로서 조직되었을 때에는) 매우 중요한 힘 즉 창조적·생산적·민주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에게 문제는 국가권력과 다자 기구들이 과연 커먼즈의 이러한 건설적 힘을 인지하고 지원할 수 있느냐입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책전략가로서 지난 20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커먼즈와 함께 연구하고 일해 왔습니다. 저는 하딘(Garrett Hardin)의 1968년 에세이에서 유명하게 되고 오래 회자되어온 ‘커먼즈(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어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딘의 주장과 반대로, 커먼즈는 주인이 없는 자원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취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공짜인 것이 아닙니다.

 

커먼즈는 공유된 부를 장기적으로 파수(把守)하기 위한 자기조직화된 사회시스템입니다. 커먼즈에서는 시장이나 국가에서와는 뚜렷하게 다른 형태의 운영과 자급이 이루어집니다. 커머너들은 그들의 특수한 맥락과 문화에 적합한 나름대로의 규칙, 사회적 관행, 전통 그리고 의식(儀式)을 고안해냅니다. 그들은 무임승차자들을 자율적으로 감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처벌합니다.

 

커먼즈는 2009년에 자신의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연구한 작은 규모의 자연자원들(농지·어장·삼림·관개용수 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는 또한 고등교육, 도시, 다양한 사회적 환경들, 그리고 디지털 공간들에 존재하는 시스템들의 공유된 관리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즉 ① 프리소프트웨어, 오픈소스소프트웨어, 그리고 위키피디아 ② 과학과 학술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오픈액세스 학술지들 ③ 교과서와 커리큘럼이 학생들에게 더 쉽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오픈교육자원 ④ 지적재산권 산업이 부과하는 독점렌트(monopoly rent, 독점에 기반을 둔 초과이익)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아래 공유하기에서 특히 튼실한 형태의 커먼즈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언급할 다른 많은 커먼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본 요점은 커먼즈가 ‘비극’이 아니라 생성적이고 가치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다자 기구가 커머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커먼즈는 이들에게 엄청난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적 의미에서나 경제적 의미에서나 더 큰 포용과 참여 그리고 더 큰 자유가 실현되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렌트(Hannah Arendt)의 힘 개념을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인간 조건󰡕에서 힘이 “사람들이 같이 행동할 때 그 사이에서 생겨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힘은 우리의 기구들 자체에 내재하지 않습니다. 힘은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창조되고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많은 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힘과 인식된 정당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긴급한 요구에 대해 믿을 만한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기관들이 다양한 커먼즈와 파트너십을 이루어 아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커먼즈가 제공할 수 있는 생성적·창조적 힘을 높이기.

2)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책임감 있는 자치에 힘을 실어주어 온전한 참여를 양성하고 간접적으로는 국가의 정당성을 높이기.

3) 이해관계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적으로 적절하고 안정적이고 자활적인 해결책들을 지원하기.

4) 생태적 문제들에 대해 경계를 가로지르는 협력을 가능하게 하기.

 

달리 말해, 국가와 다자 기구들은 더 큰 맥락에서 소셜 미디어의 도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능란한 메시지 교환과 더 좋은 트윗만이 핵심이 아닙니다. 커먼즈의 인식되지 않은 큰 힘으로 더 심층적인 삶의 양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 개발청이, 아프리카와 프랑스어권 국가들에서 커먼즈가 그들의 개발 전략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면서 최근 해온 일들입니다.

 

따라서 확장된 사례로서 ‘소외 질병을 위한 이니셔티브’(DNDi)를 상상해봅시다. DNDi는 의약품 연구개발과 유통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커먼즈, 국가 기구 및 민간 회사가 협동하여 만든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의학적으로 중요한 약품을 로열티 없이, 비(非)독점적인 라이선스로 개방합니다. 그래서 이 의약품을 어디서나 값싸게 구할 수 있게 합니다.

 

또는 ‘인도주의 오픈스트릿맵 팀’(Humanitarian OpenStreetMap Team, HOT)이 아이티에서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이후 다양한 국가들을 어떻게 돕고 있는지 그려보십시오. HOT는 응급의료요원과 피해자들이 병원, 물 및 여타 필수품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웹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원봉사 해커들을 한데 모읍니다. 이 주목할 만한 해결책은 커먼즈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지 관료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곡증대시스템’(SRI)은 전세계적인 오픈소스 커뮤니티로서, 쌀을 재배하는 농경학에 관한 조언과 지식을 교환합니다. 오로지 기존의 다자 채널 밖에서만 활동하는 SRI는 쌀 수확량을 2~3 배로 증가시키기 위해 스리랑카·쿠바·인도·인도네시아에 있는 농민들을 한데 결집시켜왔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CLT)이 어떻게 토지를 탈상품화해서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렴한, 라이선스가 없는 보철물을 생산하는 ‘오픈 보철 프로젝트’(Open Prosthetics Project)에 대해, 그리고 지식과 디자인은 오픈소스 방식으로 전세계적으로 공유하고 물리적인 것들(농장 설비, 가구, 주택)은 지역적으로 생산하는 ‘세계-지역적 생산’(cosmo-local production)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네덜란드의 ‘초원의 왕 프로젝트’(King of the Meadows project)는 문화적 유산과 연결된 생물다양성을 파수하기 위해 시민들을 결집해온 커먼즈입니다. ‘벵갈-페사’(Bangla-Pesa)는 케냐의 지역 통화인데 이것은 법정통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가치를 교환하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제 내 생각을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산된 앱과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세상에 다자 기구들이 적응하려면, 긴급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커먼즈의 위대한 약속을 탐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고, 관료적 국가시스템과 시장의 본래적 한계를 보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