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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경쟁과 자본


  • 저자  :  Karl Marx
  • 원문 :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자본론』(Das Kapital)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10년 쯤 전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경쟁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으로 8회에 걸쳐서 이루어진 일련의  강의(각각 다른 강사들이 담당했다)  가운데  3강 ‘맑스의 경쟁 비판’의 강의안을 조금 고쳐서 올린 것이다. 


  1. 오늘의 강의는 맑스의 다음의 저작들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실제로 거론이 안 될 수도 있다.)

『1844년 경제철학수고』(『수고』로 줄임)

『임금노동과 자본』(1849)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1857)(『요강』으로 줄임)

『가치, 가격, 이윤』(1865)

『자본론』1, 2, 3권 (1867, 1885, 1894)

 

  1. 경쟁과 시장

맑스가 비판대상으로 하는 경쟁은 시장에서 사적 이익의 추구를 위해 일어나는 행위, 즉 상품의 구매와 판매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이다. 경쟁의 토대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이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고유한 특징은 인간의 생산능력 즉 노동력이 사유재산으로 된 것이다. 사유재산이 상품의 형태로 시장에서 매매될 때 경쟁 행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노동력이 소유자인 노동자들 역시 판매자로서 노동시장에 진입하게 되며, 따라서 경쟁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경쟁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판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낮추는 효과를 가진다. ②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이는 격화되면 물건의 가격을 높이는 효과를 가진다. ③ 판매자들과 구매자들 사이의 경쟁―여기서는 수요와 공급의 양적 차이에 따라 가격이 변동한다.

 

  1. 경쟁과 자본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라는 말에 이러한 환상이 담겨 있다. 맑스는 이러한 환상을 논파한다. 개별 자본가들이나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경쟁이 자본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맑스는 경쟁이 자본과 내적인 연관을 맺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에서 맑스는 “개념적으로 경쟁은 자본의 내적 본성, 그 본질적 성격이 다수의 개별 자본들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고 실현된 것에 다름 아니다. 내적 경향이 외적 필연성으로서 나타나고 실현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같은 저작의 다른 곳에서는 이럴게 경쟁과 자본의 관계를 설명한다.

 자유로운 경쟁은 자본이 다른 자본 속에 있는 자신과 맺는 관계이다. 즉 자본이 진정으로 자본으로서 하는 행동이다. 이 시점에서만 자본의 내적 법칙들―이는 자본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초기에 해당하는 단계에서는 경향들로서 나타난다―은 처음 법칙으로서 정립된다.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은 자유로운 경쟁이 발전하는 한에서 그만큼 그것에 적절한 형태로 스스로를 정립한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자본에 기반을 둔 생산방식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즉 그 조건의 자유로운 발전이며, 이 조건을 항상 재생산하는 과정의 자유로운 발전이기 때문이다. 자유경쟁에 의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개인들이 아니라 자본이다. (…) 경쟁은 자본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실재로서 표현하고 외적 필연성으로서 정립한다. 경쟁은 다수의 개별 자본들이 자본의 내적 규정요인들을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강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

 

『자본론』1권에서는 같은 취지로 (그러나 표현을 조금 바꾸어서) “자유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내적 법칙들을 모든 자본가에게 힘을 미치는 외적인 강제적 법칙의 형태로 드러낸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적 법칙은 무엇이고 강제적 법칙은 무엇인가?

 

  1. 가격의 변동과 경쟁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경쟁의 효과는 가격을 계속적으로 변동시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시장에서 그때그때 변동하는 가격이 시장가격이다.) 그런데 이 변동은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가격을 구심점으로 변동한다. 바로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 지점에서의 가격이다. 이 가격이 전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을 생산가격이라고 한다. 생산가격이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인 비용의 가격(비용가격)에 평균 이윤을 더한 가격이다. 따라서 생산가격의 형성은 곧 평균 이윤의 형성을 의미한다. 평균 이윤을 산정하는 이윤율을 맑스는 일반 이윤율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경쟁이 하는 일은 바로 이 일반 이윤율의 형성이다. “이 상이한 이윤율들이 경쟁에 의하여 단일한 일반 이윤율로 평준화된는데, 이는 이 모든 상이한 이윤율들의 평균이다.”(『자본론』1권)

 

  1. 경쟁이 만들어내는 환상

그렇다면 경쟁이 이 일반 이윤율을 창조하는 것인가? ‘속류 부르주아 경제학자’ 혹은 시장의 조절 기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경쟁이 상이한 직종에서 이윤율의 차이를 평준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경쟁이 그 수준 자체를 혹은 일반 이윤율을 결정하지는 못한다.”(󰡔가치, 가격, 이윤󰡕) 󰡔자본론󰡕 3권에서도 이와 거의 유사하게 설명하는 대목들이 있다. “경쟁은 기껏해야 일반적 이윤율을 특정의 수준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 수준 자체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를 담고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더 큰 이윤은 (···) 경쟁에 의해 평균으로 낮추어진다. 그리고 다른 부문에서의 잉여가치의 부족은 그곳으로부터 자본이 빠져나옴으로써 (···) 평균 수준으로 회복된다. 경쟁은 이 수준 자체를 낮추지 못한다. 단지 그러한 수준을 창출하는 경향을 가질 뿐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주아 경제의 본질적인 추동력인 경쟁은 그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실행자이다. 무한경쟁은 따라서 경제적 법칙들의 진실을 위한 전제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며, 그 필연성이 실현되는 외관이다. 리카도처럼 경제학자들이 무한경쟁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생산관계가 그 특수하고 독특한 성격 속에 충만하게 실재하고 실현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은 이 법칙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가시화할 뿐 생산하지는 못한다.”

『자본론』3권에는 경쟁이 하지 못하는 일과 하는 일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대목이 있다.(12장) 여기서 맑스는 경쟁은 생산가격의 바탕에 있으면서 가격들을 최종 심급에서 결정하는 가치들을 보여주지는 않고, 다음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한다.

1) 평균이윤

2) 임금수준의 변화가 야기하는 생산가격들의 상승과 하락(이는 처음 얼핏 보면 상품들의 가치관계에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3) 시장가격들의 변동

이 모든 현상은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결정과 부불잉여노동으로 구성되는 잉여가치의 성격에 어긋나는 듯하다고 한다. 이렇듯 경쟁에서는 모든 것이 전도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환상(전도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한다.

이 환상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개별 자본들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상품들의 실제적 운동에서는 상품들의 가치가 그 분할의 전제조건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분할된 결과의 구성부분들이 상품의 가치의 전제조건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자본론』 3권)

이것이 우리를 가치와 가격의 관계의 문제로 데려간다.

 

  1. 가격과 가치

맑스가 노동가치론을 창안한 것은 아니지만, 가치분석이야말로 맑스의 돋보이는 독창적 기여라고 할 수 있다. 그 스스로 “상품에 구현된 노동의 이중적 성격[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인용자]을 지적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라고 하고 있다.(『자본론』 1권) 실제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가치를 모르거나 불충분하게 알고 가격의 관점에서만 사태를 이해하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환상이나 전도된 인식이 나온다. (이는 가령 만유인력의 법칙이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외관상으로 상반되는 현상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맑스는 가치가 바로 가격의 변동에 구심력을 제공하여 변동이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가치를 구성하는 실체는 어떤 물건의 재생산에 필요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다. 가치는 비물질적이고 잠재적인 실재이다. 따라서 양적인 속성(노동시간의 양)을 가지지만 그 자체로 가시화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격으로서만 가시화된다. 가격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양이다.

가치와 가격은 일치하지도 않고 양적으로 비례하지도 않는다.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단계의 경제발달에서이다. “따라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는 것은, 상품들이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것 ―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필요하다 ― 보다는 훨씬 낮은 단계의 발전에 대응하고 있다.”(『자본론』3권)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는 (생산)가격의 진동의 중심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가격이 가치와 일치하는 경우는 맑스의 말대로 우연하다. 우리는 이것을 가격(생산가격)의 가치로부터의 괴리라는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상품들이 가치대로 또는 거의 가치대로 교환”되었던 단계의 경제에서와는 달리 그 이후의 단계에서 생성된 생산가격(비용가격 + 평균이윤율)은 가치로부터의 괴리를 품고 있는 것이다.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경쟁은 이윤율을 평준화함으로써 가치를 가격으로 전환시킨다. 사실상 경쟁이란 산출된 잉여가치의 총량을 개별 자본들이 나눠먹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눠먹을 대상은 이미 잉여가치의 형태로 정해져 있는 것이지 나눠먹는 과정인 경쟁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상품의 가치는 다음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이 대목에 대해서는 『자본론』3권 50장 참조]

① 불변자본을 대체하는 가치

② 가변자본으로 가는 가치(임금)

③ 잉여가치(이윤과 지대)

수입의 세 형태인 ②와 ③은 새로 추가된 가치라는 점에서 ①과 다르다. 그런데 임금, 이윤, 지대는 새로 추가된 가치―이는 투여된 노동시간으로 구성되므로 생산과정에서 이미 결정된다―를 분할하는 것이지 이것들로 그 가치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임금, 이윤, 지대가 모여서 상품의 가치를 구성하는 듯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바로 경쟁이다.

 

  1. 사회적 필요와 생산―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변별적 특성

가치의 존재는 단순한 경험적인(가시적인) 차원에서는 파악될 수 없다. 상품의 가치로서의 객관성(대상성)에는 물질의 원자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객관성은 상품이 물리적 대상으로서 갖는 조야하게 감각적인 객관성의 정반대이다.(『자본론󰡕 1권 1장) 경험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의 실제적 과정은 바로 가치의 존재를 가린다. 그래서 “경쟁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은 자본의 내적 성격을 파악하고 난 후에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마치 천체의 눈에 보이는 움직임은 그 실질적인 움직임―이는 감각에 직접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을 파악하고서야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과 같다.”(『자본론』1권)

사실상 가치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특정 시점의 특정 생산력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특정 재화의 양(즉 어떤 사회에서 1년에 필요로 하는 쌀의 양)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한다. 만일 시간을 더 들이면 생산량이 높아져 공급 과다가 되고 시간을 덜 들이면 생산량이 낮아져 공급부족이 된다.

그런데 “자본의 목적은 어떤 필요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을 산출하는 것이므로, 그리고 생산의 덩어리를 생산의 규모에 맞추는 방법에 의해 이 목적을 달성하지 그 반대가 아니므로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소비의 한정된 크기와 이 내적 장벽을 초과하려는 경향을 언제나 가진 생산 사이에 간극이 계속적으로 발생하게 마련이다.”(『자본론』3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이 장벽을 돌파하고 그 목적을 계속적으로 달성하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본의 축적 즉 자본의 크기의 증가이다.

 

  1. 자본의 축적과 집중

이렇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가치의 측면에서는 축적의 확대 즉 그 크기의 증가이다. 그러나 이는 다른 요인들을 동반하며 이는 경쟁에 의해서 가속화된다. 첫째는 자본의 집중이다.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소수 개별 자본의 손에 자본을 몰아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나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자본의 축적량을 증가시키는데, 자본의 축적이란 소수의 손에 자본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이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치는 한 불가피한 결과이다. 자본의 본성이 가는 길은 경쟁에 의해 트인다.”(『1844년 경제철학 수고』) 맑스가 자본 집중의 지레로서 경쟁과 함께 거론하는 것은 신용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에 비례하여 집중의 가장 강력한 지레들인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부정적 효과

다른 하나는 새로운 방법의 채택 즉 기계화이다. 기계화는 생산력의 증가를 낳으며 기계에 의한 인간노동의 대체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심화시킨다. 그리고 이는 임금의 하락을 낳는다. 경쟁에서 탈락한 자본가들의 합류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더욱 증가하고 경쟁은 더욱 심화된다. 단속적 혹은 지속적인 실업으로 인하여 노동자계급의 일부는 빈민화된다.

시장론자들은 경쟁(즉 시장)이 생산을 위한 매우 효율적인 메커니즘이라고 선전하지만, 맑스가 보기에는 반대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한편으로는 각 개별 사업에 절약을 강요하지만 다른 한편 그 무질서한 경쟁 체제에 의해 노동력과 사회적 생산수단의 가장 극악무도한 낭비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유통의 과정 및 경쟁의 과도함과 분리시켜 놓고 보면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에 구현된 노동에 대해서는 매우 검약(儉約)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다른 어떤 생산방식보다도 인간의 삶 혹은 산 노동을 낭비한다. 피와 살만이 아니라 신경과 뇌도 낭비한다. 사회의 의식적 재조직화 직전의 역사 시기에 인류의 발전은 오로지 개인적 발전의 가장 터무니없는 낭비에 의해서만 확보되고 유지된다.”(『자본론』3권)

 

  1. 경쟁의 심화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

맑스는 자본주의적 발전(=경쟁의 심화)에서 부정적인 측면만 보지 않는다. 그 아래 숨어있는 긍정적 측면을 보는 것이 맑스의 자본주의 분석의 특이한 장점이다. 부정적인 측면을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임금노동과 자본』을 끝맺을 때에도 맑스는,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훨씬 더 급속히 증가하지만, 즉 일과 임금은 그에 비례하여 훨씬 더 급속히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은 임금노동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라고 평한다. 이 측면은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자본론』에 더 상세히 개진되어 있다.

물론 맑스가 경쟁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산력의 증가, 사회적 부의 확대 등으로 귀결하는 자본주의적 발전은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토대를 자본주의 안에 마련한다는 것이 맑스의 통찰의 핵심이다.

 

  1. 계급투쟁

경쟁이 자본의 본성이 발휘되는 방식이자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창조적 힘의 가장 극악한 형태의 낭비이므로 자본과의 싸움의 핵심은 곧 경쟁과는 다른 원리에 입각하는 데 있다. 바로 협동 혹은 협력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견해와 반대로 맑스의 입장에서 협동(협력)이 바로 자유의 원천이다.

따라서 다른 한편으로 자유경쟁을 인간의 자유의 궁극적인 발전으로 보고 자유경쟁의 부정을 개인의 자유의 부정 그리고 그러한 자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의 부정에 상당하는 것으로 보는 일의 불합리성이 나온다. 그것은 단지 자본의 지배라는 한정된 기반 위에서 가능한 종류의 발전일 뿐이다. 따라서 동시에 이러한 유형의 개인의 자유는 모든 개인적 자유의 가장 철저한 폐지에 해당하며, 객체적인 힘의 형태를 띠는 , 아니 실로 위압적인 사물들―서로 연관된 개인들로부터 독립된 사물들―의 형태를 띠는 사회적 조건들에 개인들을 가장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지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분석한 고전적 자본주의와는 분명 다르다. 따라서 맑스의 분석들 중 현대 자본주의에는 곧바로 적용되지 않는 것들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행태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경쟁의 원리가 아니라 협동의 원리가 자본주의의 극복에서 핵심적임은 변함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네트워크 모델이 주된 패러다임이 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경쟁과의 싸움의 가능성은 어떠한가? 무한경쟁을 전면화하는 듯한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고민해볼 문제들이다.

 

  1. 정리 : 세 차원의 구분

① 내적 법칙 : 잠재적, 비가시적

② 외적 현상(경쟁) : 가시적, 강제적 (* 법칙의 실행)

③ 결과 : 축적의 확대, 기계화에 따른 생산력의 증가, 자본가의 수의 감소(경쟁약화), 노동자들의 수가 증가(경쟁강화), 노동계급의 일부의 빈민화, 계급투쟁.

[맑스의 경쟁 비판 끝]

 

[부록]

1. “만일 임금노동자 계급 전체가 기계에 의해 말살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임금노동 없이 자본은 자본이기를 그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임금노동과 자본』)

2. “그렇다면 경쟁은 모든 종류의 노동에서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다 노동하도록, 즉 잉여노동시간을 노동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3. “자본들 사이의 경쟁은 총 이윤을 나누는 관계만을 바꿀 수 있다.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는 바꾸지 못한다. 이윤의 일반적 수준은 총 이윤과 총 임금의 관계이며, 이는 경쟁을 통해 변하지 않는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4. “로마 황제들의 전제가 로마의 자유로운 ‘사법(私法)’의 전제이듯이, 자본의 지배가 자유경쟁의 전제이다. 자본이 약할 때는 이전 생산방식들 혹은 자본의 등장으로 사라질 생산방식들의 버팀목들에 의존한다. 자본이 자신이 강하다고 느끼면 이 버팀목들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법칙들에 상응하여 움직인다. 자신이 발전에 장벽이라고 느끼고 자신을 그렇게 의식하기 시작하자마자 자본은, 자유경쟁을 제한함으로써 자본의 지배를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형식들에서 도피처를 찾으며 동시에 자신의 해체와 자본에 의존하는 생산방식의 해체를 알리는 전령이 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5. “경쟁은 자본의 내적 법칙들을 실행하고 개별 자본에 대한 강제적 법칙으로 만들지만 법칙들을 창안하는 것은 아니다. 실현할 뿐이다. 그 법칙들을 단지 경쟁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6. “노동시간에 의한 가치규정의 법칙, 개별 자본가로 하여금 사회적 가치 아래로 자신의 재화를 팔도록 강제함으로써 새로운 생산방법을 적용하는 개별 자본가들을 지배하는 법칙, 바로 이 법칙이 강제적 경쟁의 법칙으로 작동하여 경쟁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방법을 채택하게 만든다.”(『자본론』1권)

7. “노동의 도구는 기계의 형태를 띠면 즉각적으로 노동자 자신의 경쟁자가 된다. 기계에 의한 자본의 자기확대는 그때부터 그 생계수단을 기계에 의해 파괴당한 노동자들의 수에 정비례한다.”(『자본론』 1권)

8. “따라서 성과급은 개별 임금들은 평균 이상으로 올리지만 이 평균 자체는 낮추는 경향을 가진다.”(『자본론』 1권)

9. “고용된 노동자들의 과잉노동이 산업예비군의 숫자를 불리며, 반대로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고용된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더 큰 압박으로 인해 고용된 노동자들은 과잉노동에 굴복하고 자본의 명령에 종속되게 된다.”(『자본론』 1권)

10. “경쟁이 옛 노동도구들을 그 자연적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로 갱신하도록 강제한다. 특히 결정적 위기가 일어날 때 그렇다.”(『자본론』 2권)

11. “개별적인 것들은 여기서 사회적 힘의 부분으로서만, 덩어리의 원자로서만 중요하다. 경쟁이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태로이다.”(『자본론』 3권)

<부록 끝>




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 저자  :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 원문 : “Left Should Stop Equating Labour With Work” (2018.3.1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Social Europe(socialeurope.eu)에 실린 원문의 내용을 정리하고 여기저기에 정리자의 논평을 삽입한 글이다.

 

좌파는 노동을 일과 동일시하기를 멈추어야 한다

 

‘노동’은 인간의 활동이 자본의 일부(가변자본)로 변형된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신성화는 곧 자본의 신성화이고, 자본이 권력이라면 노동도 그 권력의 일부이다. 이러한 자본 중심적 도식에 따르면 ‘일자리’는 자본(불변자본)에 대해서는 ‘을’의 자리이면서 일자리 바깥의 인간 활동에 대해서는 ‘갑’의 자리가 된다. ‘너희는 을 속에서 갑을 추구하라’—이것이 바로 자본이 내리는 명령이다. 스탠딩은 이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social democrats)이 이러한 자본의 명령을 사회에 널리 퍼뜨리고 전도사로서 기여해 왔음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출발점의 필요를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서 ‘work’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임금을 버는 활동인 노동(labour)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만이 진정한 ‘일’로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20세기 내내 해온 일이 “일(work)의 의미를 노동(labour) 혹은 소득을 버는 활동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한다. (정리자는 앞으로 이것을 ‘일을 노동에 종속시킨 것’ 혹은 ‘노동의 규범화’로 바꾸어 표현할 것이다.)

그는 노동이 아닌 일과 노동인 일의 차별과 그 불합리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 지긋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6시간을 쓰면,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어휘에서는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임금을 받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이 지극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3시간을 쓴다면 이는 일로 계산되며, 당신은 ‘취업자’로서의 어엿한 위치로 격상된다. 그리고 노동 및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불합리하다.

스탠딩은 일의 노동에의 종속 혹은 노동의 규범화는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용안정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원래 19세기에 고용주들이 옹호했던 것이지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옹호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취업 중’(in employment)이란 말도 수십 년 동안 낮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부르주아지나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미혼 여성에게 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고 한다.

노동의 규범화와 관련하여 스탠딩의 비판의 주요 표적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지만 노동의 규범화는 사실 매우 광범하게 일어났다. 소련 헌법에서는 ‘노동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아야 한다’라는 레닌의 문구로 노동이 병리적 필연성이 되었다고 하며 모든 형태의 사회민주주의에서 반(反)해방적인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예의 레닌의 문구는 한때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노동의 당당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무노동 무임금’이라는 말로 바뀌어 주로 노조활동을 탄압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노동의 규범화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것은 배제의 논리이다. “고용주를 위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스스로를 낮추는 방식으로 보이는 사람들, 혹은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과 결혼한, 이차적인 위치의 사람들, 혹은 그런 서비스를 오래 수행해온 사람들”에게만 사회적 안전의 어엿한 권리가 부여된다.

스탠딩은 노동의 규범화를 논리적 결론으로 다듬은 “사회민주주의의 영웅들” 가운데 웹(Beatrice Webb)과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를 거론한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어머니인 웹은 ‘징역소’(labor camp)를 (필요하면 강제력의 사용도 포함) 공개적으로 옹호하여 블레어 같은 수상들이 수 세대 이후 워크페어를 옹호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었다. (한심한 한국의 주류 언론은 워크페어를 “일을 통한 적극적 복지”라고 추켜세우지만 스탠딩이 보기에는 ‘강제노동’의 메커니즘이다.) 자유주의자 베버리지는—현재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그를 기념하여 축제를 벌이고 있다(([정리자] 그런데 흥미롭게도 2018년 2월 20일의 강연의 제목은 “Beveridge Rebooted: a basic income for every citizen”이다.))—‘기아의 채찍’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노동하도록 강제하리라고 믿었다. 스탠딩은 이런 관점은 기껏해야 온정주의적(paternalistic)이고 최악이면 반(反)해방적이라고 본다.

스탠딩이 노동의 규범화에 기여한 것으로 또 지적한 것은 ILO—이를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 모델의 화신”이라고 부른다—의 1952년 조약이다. 이 조약은 “‘돈을 버는 남성 가장들’(breadwinners), 그에 딸린 아내들 그리고 보호의 권리를 버는 노동 ‘서비스’에 대해 말”함으로써 노동의 규범화를 낳은 “편견들”을 정식화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1930년대로의 후퇴”인데 어처구니없게 2001년에 와서도 유럽의 노동조합들과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은 이 조약이 현대적인 국제조약 가운데 하나로 보존되기를 요구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한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의 흔한 뻔뻔스러움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존엄’, ‘지위’ 그리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부여한다는 주장이라고 하면서 개인적 차원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 “뻔뻔스러움”에 응대한다.

그런데 나는 일자리를 가지기를 중단한 이후에 비로소 더 존엄이 생겼고, 사회에 더 통합되었다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이를 개인 너머로 확대하여, 하수구에 내려가 파이프를 고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하면 존엄을 얻고 사회에의 소속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면 돌아오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 대답일 것이며, 아침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환자용 변기를 청소하러 가는 여성에게 당신은 사회에 통합되고 있으며 일자리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말하면 잔소리를 한 바가지는 들을 것이라고 한다.

요컨대 직업(노동)을 다른 형태의 일보다 더 높일 정당한 이유는 없는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바로 이 ‘높이는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적 입장이 아니라고 그는 확언한다. 노동을 ‘소외된 활동’이라고 부른 맑스가 옳았다는 것이다.

스탠딩이 이렇게 ‘소외된 활동’이라는 원론적 측면에만 기반을 두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동주의(노동을 규범으로 보는 사고방식)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노동주의를 낳았던 현실을 구성하는 두 이분법 — ① 작업장(일터)과 기타 장소의 구분 ②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의 구분—이 이제 사라지고 없는데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이분법들이 여전히 규범으로서 적용되는 것처럼 계속 주장함으로써 사태를 왜곡하고 있다고 본다. 오히려 점증하는 프레카리아트는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프레카리아트는 구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포퓰리즘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새로운 진보적 운동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규범화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현실에서는 규범화된 노동만을 통계로 잡는 관행이 왜곡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사회정책을 관찰된 노동에 의거하는 것도 옹호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시적인 노동만이 보호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의 길을 가장 멀리 간 것은 (스탠딩이 보기에는) 책임 없는 권리는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 가난한 사람은 직장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입증하라고 주장한,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이다.

스탠딩은 워크페어를 노동주의 모델의 끝판으로 본다. 이는 자산조사나 노동시장유연성을 받아들인다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스탠딩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렌지(Matteo Renzi)가 가장 최근에 이 길을 간 사람이며 그의 사회민주당이 가장 최근에 내파의 대가를 치르고 좀비가 된 당이다. 제3의 길을 만들어낸 빔 코크(Wim Kok)은 네덜란드 노동당이 나락에 빠지는 길을 마련했으며, 하르츠 IV 개혁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긴 쇠퇴의 길로 내몰았다. 자산조사와 워크페어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가진 신노동당(New Labour)은 영국 프레카리아트를 잃고, 보편적 신용(Universal Credit)이라는 유령이 출현하도록 허용했다(2013년 도입).

스탠딩은 노동주의에 헌신하는 한 사회민주주의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수명은 끝날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 그 이유가 노동주의를 뒷받침하는 이분법들이 이제는 사라졌다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가오는 생태적 위기의 대처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좌파 일반, 그 가운데 특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생태학과 관하여 나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일자리 창출과 환경 사이의 갈등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일자리에, 이른바 ‘노동계급’ 일자리에 우선권을 주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 전략을 옹호하기보다는 ‘외부성’과 오염통제를 다루는 군소 정책에 관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탠딩은 좌파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 새로운 좌파는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노동주의적 접근법은 인간의 활동의 다른 형태들은 무시하고 노동만을 가시화하기에 자원고갈을 낳는 활동들에 큰 강조를 두게 될 것이다. 그러나 비노동주의적 접근법을 택한다면 노동이 아닌 일의 가치(보통 사용가치라고 불리는 것)가 적어도 노동의 가치와 동등한 무게를 부여받게 될 것이다.

스탠딩은 이 접근법이 새로운 좌파—‘녹색 좌파’(Green-Left) —에게 놀라운 호소력을 가질 것으로 본다. 스탠딩은 ‘탈성장’의 정치는 가급적 피하고자 한다. 그것은 세련된 녹색주의자에게는 덕 있고 기율 있는 것으로 느껴지겠지만, 일반적인 투표자에게 먹힐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탈성장은 평균적인 생활수준을 낮추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원을 보존하고 우리 자신들·공동체들·커먼즈를 재생산하도록 설계된 활동들이 자원을 고갈시키는 활동들인 노동과 동등한 가치를 부여받는다면, 후자의 활동에서 전자의 활동으로 이동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탈성장’으로 다가오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만일 통계에서, 진보적 담론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이 쓴 글과 책에서, 노동이 아닌 일에 동등한 (바람직하기로는 더 많은) 무게와 관심이 주어진다면 모든 사람이 ‘성장’을 더 생태적으로 분별력 있는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이 그저 더 빠른 자원 고갈, 지구온난화, 노동의 선호에 따른 일의 상실을 의미할 뿐이라면 좌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은 준케인즈주의자들과 좌파에 속한 다른 이들이 더 많은 성장을 요구하는 것에 불편해할 것이 틀림없다.

사회민주주의 덫에 갇히면 탈출할 수 없다.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는, 만일 당신이 매일 사무실에 가는 따분한 일을 하다가 동일한 시간을 나이 지긋한 친척들이나 지역공동체를 돌보는 데 쓰게 된다면, 그것은 경제성장을 낮추는 ‘나쁜’ 일로 간주된다. 그런데 만일 돌보는 일이 사무실에서의 일보다 가치가 더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면 돌보는 일로 이동하더라도 성장은 낮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보다 더 급진적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이것이 큰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