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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자본을 되찾으라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Assmebly의 7장에 삽입된 “Fourth call: take back fixed capital” (“This fixed capital being man himself”)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맑스가 “인간 자신”이 고정자본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원주 20을 조금 확대·변형] “노동시간의 절약은 동시에 자유시간 즉 개인의 충만한 발전을 위한 시간의 증대인데, 이 발전은 그 자체가 다시 최고의 생산력으로서 노동의 생산력에 되먹여져 작용한다. 직접적 생산과정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고정자본의 생산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다만 인간 자신이 이 고정자본이다.” Marx, Grundrisse, p. 712 (독일어 원문에도 “being man himself” 부분은 영어로 되어있다).)) 그는 우리 시대의 자본의 발전을 예측해냈다. ① 고정자본은 노동의 생산물이고, 타인의 노동이 자본에 의해 전유된 것에 다름 아니지만 ② 또한 과학적 활동의 축적과 맑스가 사회적 두뇌라고 부르는 것의 생산성이 자본의 통제 아래 기계에 통합되지만 ③ 그리고 자본이 이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전유하지만, 자본주의 발전의 일정 지점에서 산 노동은 이러한 관계를 뒤집을 힘을 갖기 시작한다. 산 노동은 자신이 자본보다 우선적임을, 자본주의적 관리보다 우선적임을 입증하기 시작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산 노동은 (더 일반적으로는 삶의 활동은) 점점 더 사회적인 힘이 되면서 자본이 부과하는 규율의 외부에서 점점 더 독립적으로 활동한다. 한편으로 과거의 인간 활동과 지성이 고정자본으로서 축적되고 결정(結晶)화되지만다른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되는 흐름으로서 살아있는 인간들이 고정자본을 자신의 내부와 사회적 삶으로 재흡수한다. 고정자본은 이 두 의미 모두에서 ‘인간 자신’이다.

노동력이 고정자본을 재전유하는 과정은 의기양양한 행진이 아니라 유혈 과정이다. 그것은 물리적. 정신적 고통이며 인류가 명령 아래 노동을 하는 오랜 경험은 계속된다. 노동이 점점 더 협동적·비물질적·정동적이 됨에 따라. 그리고 노동자들이 점점 더 생산과정을 책임지게 되고 심지어는 협동하는 서로를 책임지게 됨에 따라, 고통이 증식되어 정치적 고통 같은 것이 된다. 자신의 노동의 존엄에 대한 의식, 자신의 전문적 능력이 가진 힘, 일할 때 지는 책임에 대한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 인정의 결핍과 탈진감이다. 더욱이 노동에서의 고통은 디지털 노동과 정동노동이 생산조직화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더 증가했다. 노동과 연관된 병리현상들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깡길렘(Georges Canguilhem)의 작업을 이어받는 Christophe Dejours : 이런 상황에서 건강은 더 이상 정상적인 조건이거나 안정된 상태가 아니라 어쩌다 추구할 수 있는 목적이 된다. 고통은 “질병을 건강과 구분하는 장”이다. 인간은 고정자본을 전유할수록 더 강력하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고통에 차 있으며, 이는 반란해야 할 큰 이유이다.

그런데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누가 명령자(the boss)이고 누가 노동자인가? 3부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명령의 새로운 형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노동의 새로운 사회적 생산성에 대한 대응으로 자본이 진행한 추상과 추출이라는 이중 작전을 분석할 것인데, 여기서 명령자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지형으로부터 점점 더 추상되고 이에 따라 자본가는 (종종 금융 메커니즘들을 통해) 가치를 추출함으로써 자본가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자본가의 가치추출을 지원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및 행정 구조가 발전하는데, 이는 사회적 생산성의 자율적 에너지를 가두는 수단을 제공할 뿐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 체제에 참여하고 그것에 공동책임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여기서는 노동의 새로운 형상, 특히 노동자 자신들에 의해 구축되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 창조하는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노동자들의 생산능력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동관계 덕분에 극적으로 증가했다. 협동관계로 이루어지는 노동은 자본으로부터 점점 더 추상된다. 즉 특히 기계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물론 자본에 의한 가치추출 메커니즘에 여전히 종속된 채이다. 이 자율성은 우리가 자본주의적 생산의 초기 국면과 관련하여 말하는 노동자 자율성의 형식들과 같은 것인가? 분명히 아니다. 지금은 생산과정과 관련된 자율성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자율성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은 자본주의적 명령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에서도 존재론적 일관성(an ontological consistency)을 획득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손에 쥐어진 생산과정과 자본주의적 가치화 및 명령 메커니즘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분리되는 상황이다. 노동은 자신에게 부과되는 가치화 형식을 거부하고 자신의 자율성을 발전시킬 잠재력을 가질 정도의 존엄과 힘을 가지게 되었다.

노동의 증가된 힘

① 협동의 확대와 자율성의 증가

② 노동의 사회적, 인지적 힘

전자는 주로 ‘대중지성’의 형성에 기인한다. ‘대중지성’은 언어적·문화적 능력, 정동, 디지털 설비에 의해 활성화된다. 여기서 후자가 나온다.

비르노는 사회적 노동의 수행적 성격을 강조한다. 즉 연주처럼 물질적 결과가 없는 생산형식들을. 이를 (장인성)‘virtuosity’라고 부른다. 노동의 예술적 성격을 강조.((원주24 Paolo Virno, “Virtuosity and Revolution,” in Virno and Michael Hardt, eds., Radical Thought in Ital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4, pp. 13–37.)) Luc Boltanski 와 Eve Chiapello도 이와 유사하게 노동의 예술적 성격을 부각시킨다.((원주25 Luc Boltanski and Eve Chiapello, The New Spirit of Capitalism, Verso, 2006.))

편의점, 콜센터,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힘든 일을 생각하면 이는 과장처럼 들릴 수 있다. 이런 진술들은 경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의 역사에서 지식의 역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생각해보라. 매뉴팩처의 국면에서도 장인의 지식이 생산에 흡수되었지만, 이는 위계적이고 비인간적인 구조에 종속된 고립된 힘으로서 그렇게 되었다. 이와 달리 대규모 산업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에 필요한 지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지식은 관리자들에게 집중되었다. 현대의 일반지성 국면에서는 지식이 생산과정에서 다중적 형태(a multitudinous form)를 띤다. 비록 명령자에게는 매뉴팩처의 장인의 경우처럼 분리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말이다. 자본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조직화하는 노동의 형상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알고리즘]

오늘날 노동의 한 강력한 형상이 알고리즘의 기능에 가려져 있다. 우리는, 자본의 명령의 필연성을 긍정하는 선전 및 자본의 힘의 효율성에 관한 설교들과 함께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종종 듣는다. 그러나 알고리즘이란 일반지성의 생산물인 고정자본이다. 비록 생산활동의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되지만, 그 바탕에 있는 것은 산 노동이다. 산 노동 없이 알고리즘 없다.

알고리즘이 몇몇 새로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① 산업적 기계가 과거의 지성을 비교적 고정된 정태적 형태로 결정화하는 반면 알고리즘은 계속적으로 과거의 결과에 사회적 지성을 더하여 개방되고 확대되는 동학을 창출한다. 알고리즘 기계 자체가 지적인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지성에 의한 계속적인 변경이 필요하다.

② 노동과 삶의 경계를 흐린다. 구글 사용자들은 재미로 사용하지만,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지성, 관심(주목), 사회적 관계가 포획될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한다.

③ 협동이 명령자에 의해 부과되지 않고 사용자-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생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그리고 인공지능 기계들을 자율적 사회적 통제 아래에서 노동자들의 삶으로 통합하는 것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 통합과정은 협동적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자기가치화로 향하는 알고리즘을 구축하는 과정이다.

디지털 도구들이 자본주의적 가치화를 위해 복무할 때조차도 고정자본은 노동자들의 신체와 정신에 통합되어 그들의 제2의 자연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산업문명이 탄생한 이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나 관리자들보다 기계(체계)에 훨씬 더 친숙해졌고 그 내적인 지식을 훨씬 더 많이 가졌다. 오늘날 노동자가 지식을 전유하는 이 과정은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이는 생산과정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 협동을 통해 심화되고 구체화되어 삶의 과정 전체에 퍼질 수 있다. 노동자들은 노동과정에서 고정자본을 전유하여 그것을 다른 노동자들과의 사회적·협동적·삶정치적 관계에서 발전시킬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생산적 자연을, 즉 새로운 생산양식의 토대가 되는 새로운 삶형태를 결정한다.

만일 상황이 그렇다면 자본은 자신을 노동과정과 사회의 생산적 지형으로부터 추상함으로써만 통제력을 유지할 수 있다. 자본은 산업적 착취를 통해서만, 그리고 노동조직화의 시간관리를 통해서만 가치를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회적 협동의 추출을 통해서 가치를 포획하며, 후자가 점점 더 우세해진다. (3부에서 이를 다룰 것이다.)

이런 유형의 노동조직화 및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이 행하는 역할이 점점 더 커지고 복잡해진다. 주체성의 생산이란 ① 한편으로는 주체화(subjectivation) 즉 사회적 협동의 자율적 회로들을 통해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이고 ② 다른 한편으로는 종속(subjectification) 즉 표현적이고 협동하는 특이성들을 명령을 받는 대상으로 환원시키려는 자본가측의 계속적인 시도이다. 맑스가 주장하듯이, 이 관계는 직접적인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생산조건의 소유자들이 직접적 생산자들과 맺는 직접적인 관계— 항상 해당 노동 유형의 특정 수준의 발전에 자연적으로 상응하고 따라서 그 사회적 생산력에 상응하는 형식을 띠는 그러한 관계— 안에서 우리는 사회라는 구조물 전체의 가장 내적인 비밀, 숨겨진 바탕을 발견한다.”((Marx, Capital, volume 3, p. 927))[기술의 변형에 따라 그 구체적인 형식이 변하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직접적 관계가 관건이라는 말] 오늘날 주체성 생산의 두 과정의 다양한 혼합형태들이 산 노동의 다양한 형상들을 드러낼 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거하는 지형이 어떻게 중심적인 전장(戰場)이 되는지를 드러내준다. 고정자본의 재전유—다시 말해서 애초에 우리가 창출한 물리적 기계, 인공지능 기계, 사회적 기계 및 과학적 지식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는 것—는 그 전장에서 우리가 착수할 수 있는 대담하고 강력한 사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