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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대한 맑스주의적 경험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http://www.euronomade.info/?p=4146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성철
  • 설명 : 이 글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2014년 12월 18일-19일, 프랑스 낭테르(Nanterre)에서 개최된 콜로키움 Colloque Marx-Foucault에서 발표한 글이다. 원래의 발표문은 이탈리어로 쓰여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었고 위의 원문 링크에서 세 가지 버전의 글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글의 다른 영어 버전은 맑스와 푸꼬에 관한 네그리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 Marx and Foucualt (Polity Press, 2017)에 실려있다.(Ch.16 ‘Marx after Foucault: The Subject Refound’)

1.

여기서 네그리는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con e dopo Foucault)에 맑스를 읽은 경험을 제시한다. 이는 물론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에 맑스를 읽는 것은 푸꼬 이전에 맑스를 읽는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역사적 주체화’의 과정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읽음으로써 새롭게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읽었나? [* 이 대목은 네그리의 것이 아니고 추정·보완해 넣은 것] 노동자계급을 고정적인 것(객관적인 것, 가변자본)으로 보고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자본(불변자본/고정자본)과 객관적인 자본의 논리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경우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일정한 한도(임금투쟁)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움직인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존재의 창출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삶형태의 변형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익의 분배를 놓고 다투는 문제가 된다.)

  A) 역사적 주체화

푸꼬의 직관과 결론의 토대 위에서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의 고도로 역사화된 어조와 문체가 유물론적 접근법과 깔끔하게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맑스의 역사적 저작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읽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의 개념들을 현재에 열어놓음으로써 그 개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계보학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푸꼬의 접근법은 계급투쟁의 주체화가 역사적 과정의 동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강조하게 해주었다. 이 주체화의 분석은 항상 갱신되고 역사적 과정에서 개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형의 규정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이나 목적론에서 벗어나서 푸꼬가 제안하는 틀을 택하면, 역사적 주체화는 인과론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지만 규정력을 가진 장치로 간주된다. 마끼아벨리의 경우처럼 우리를 위한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맑스 내부에도 이런 고정성을 허물고 계급의 주체화를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다.

①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

『자본』에서 맑스는 절대적 잉여 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을 노동일 축소를 향한 노동계급 투쟁과 관련짓는다. 이처럼 맑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적 차원, 계급의 특수한 주체화는, 노동자의 주체성의 변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생산 구조의 존재론적 변형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요컨대, 투쟁이 존재론적 변형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②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

맑스가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에 대해 분석할 때 이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가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 이행의 서술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가능한 다양한 형태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역사적 변형 속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그는 착취의 범주들의 항상적인 재편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틀에서 우리는 가령 노동계급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뉴팩처’에서 ‘대규모 산업’으로 이행하고 이제 산업 자본주의와 다소 사회화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노동계급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공고화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중’ 개념이 ‘산 노동’의 현재의 규정을 ‘인지적’ 의미에서, 즉 특이하고 다수적이며 협동적인 것으로서 적실하게 서술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계급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계급투쟁

푸꼬의 관점에서 읽으면 맑스의 자본 개념은 푸꼬가 ‘힘들의 관계’(un rapporto di forza, a relation of forces)의 산물(prodotto)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작용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정의한 ‘potere’(power) 개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 주체화의 새로운 특징들―생산적이고 특이화된 인지적 힘들로서 저항적이며/이거나 능동적임―이 계급투쟁을 다시 자본주의적 발전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의 중심에 놓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종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목적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자. 오직 이 비유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으로서 계급투쟁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C)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

‘자기의 테크놀로지’(tecnologie di sé)라는 푸꼬의 관점에서 보면, 산 노동은 고정자본(capitale fisso)의 일정 몫을 전유할 때 그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단지 종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자본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며 그리하여 산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을 구성하면서 대응한다. 이 형상들은 고정자본의 일부를 전유하여 더 우월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인지노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초과’(eccedenza, excess)가 이 수준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따리의 신체성과 주체성의 기계적(macchinica, machinic) 변형이라는 통찰이 중요하다. 때로 들뢰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주체화의 적대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는 푸꼬의 직관적 통찰들을 강조함으로서 회복될 수 있다. 이 점점 더 핵심적이 되는 기계적 요소는 적대하는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에 속한다. 맑스적 담론의 이러한 발전은 푸꼬 이후에 가능하다. 푸꼬 이후에는 존재론적 차원이 계급관계의 배경이 아니라 생산적 기계이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적 헤게모니는 노동이 인지기계로 전환된 데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변형에서, 새로운 기술적 활력에서 나온다. 푸꼬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비록 고전 고대 시기와 연관되어 있지만, 새로운 인간학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주의나 정체성의 흔적이 없고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간(l’uomo dopo la “morte dell’uomo)을 그려보는 인간학이다. 푸꼬의 작업은 자본의 시초 축적과 함께 시작된 ‘인간들의 축적’(accumulazione degli uomini)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 노동의 기술적 구성에서는 생산적 신체들과 삶의 양태들(modi di vita)의 변형에 대해 생각하고 이 양태들이 생산수단이 된다는 점을 확연히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D) 코뮤니즘

푸꼬의 주체화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민주적 주체화를 합치시키는 과정(il processo che compone la produzione del comune e la soggettivazione democratica)에 다름 아니다. 즉 다중의 특이화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적 존재론은 공통적인 것의 개념을 회복한다.

 

2.

한 걸음 물러나 덜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으로 되돌아가보자. 우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자. 이 차이는 나중에 공통의 관점 속에 재배치될 것이다.

① 맑스의 경우 명령의 통일성이 주권적 권력의 형상에 담겨 있고, 통치(il goverbo)는 자본의 의지 안에 통일되어 있다. 반면에 푸꼬에게 권력의 통일성은 희석되어 있다. ‘통치성’(governamentalità)은 서로 다르고 분산된 권력들(potere)의 생산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이다.

② 맑스에게 사회적인 것의 (국가화는 아닐지라도) 자본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푸꼬에게 삶권력(il biopotere)은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그 확산이 다양한 발아에 의해 일어나고 권력의 구체적 형태들은 특이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사회화’이다.

③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조직된다. 이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 푸꼬에게서는 해방의 정치적 체제가 주체화에서 조직되고 자유로서 특이화된다. 그리고 생산에서 공통의 행복을 구축할 제한 없는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이 차이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① 맑스에게서 보이는 국가와 명령에 대한 유기적 관점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사회계급들의 역사적 분석에 의해 희석된다. 특히 정치경제 비판의 수준에서 이 유기적 관점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에서 상품의 사회적 유통의 분석으로 나아가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여기서 맑스는 (재)생산과정을 가치창출과정으로 재연결시킨 후 다시 임금의 분석으로 내려가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계급들과 그 삶의 양태들의 서술로 내려간다. 그에 따라 권력 메커니즘의 다양화와 확산이 광범한 공간을 설계하며 (이때 사회는 공장이 된다) 권력의 과정들이 증식하고 다양한 차이로 갈라지며 이 차이들 위에서 그 과정들은 말 그대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② 맑스는 시초 축적(accumulazione originaria)을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통치화’ 혹은 ‘국가의 사회화’로서도 제시한다.[↔ 자본화, 사회의 국가화] 로베르토 니그로(Roberto Nigro)는 포섭에 관해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혹은 삐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는 이러한 사회의 변형[즉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변형]에 대한 분석 속에서 항상 ‘생산된 주체’의 ‘생산하는 주체’로의 변형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이 변화는 푸코에게서 주체화라는 문제틀의 핵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③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푸꼬의 주체화이론에서의 존재론적 전복 사이의 차이와 관련해서는 『그룬트리세』의 코뮤니즘, 일반지성 및 사회적 개인에 대한 대목들을 가지고 양자의 유사성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유사성은 1978년 이후의 푸꼬의 강의들에서 더 분명해지며 필시 주위 사람들과의 토론의 결과요 E. P. 톰슨 같은 역사가들을 인정한 덕분일 것이다.

이 유사성들은 두 저자를 근대의 몇몇 주된 문제들(국가, 사회, 주체)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지만, 또한 둘을 새로운 존재론의 발전이라는 노선보다는 근대의 황혼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저자의 차이와 유사성을 강조할 때 1977-78년과 1978-79년 강의의 삶정치적(biopolitical) 전회에 도달하기까지의 푸꼬의 작업이 준거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캡처한 그림참조] 여기서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은 혼란스러운 채로 남아있고 개념들은 모호하게 취급된다. 맑스에게는 첫째와 둘째 사례에서 모든 담론적 강조가 특이화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추상’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반면 푸꼬는 그 반대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1977-78년 이후의 그의 강의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1984년 이후에 가능해졌듯이 그의 저작들과 강의들을 철학자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투사의 것으로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통치성, 삶정치, 주체에 대한 맑스와 푸꼬의 사상 사이의 피상적 합류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는 둘 모두 현재의 존재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푸꼬는 정치학과 윤리학의 절합에 있어서 진전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이 작업은 개인화 및 데까르트식 주체로의 회귀에 반대하며 주체의 집단적 구성 및 이것의 역사적 과정에의 함입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Noi, We)의 발굴(scavo, excavation)―나/우리 관계의 발굴―로서 제시되는, 생성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성(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제시되는, 주체의 ‘폐위’(destituzione, dethroning)로서 드러난다. ‘우리’는 다중이며 ‘나’(Io)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돌봄’(la cura di sé, ‘care of the self’)은 개인적인 실천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주디트 레벨의 말을 빌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형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권력에 대한 개인적 반응은 더더욱 아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의 ‘자기’(self)는 데까르트의 ‘나’가 아니다. 그렇기에 푸꼬가 그 탄생을 1978년에[『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서술한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에 의해 창출된 개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정의한 특이성이다.

윤리학은 존재와 함(fare, doing)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주체화 과정 내에서의 탈중심화는 이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견유주의가 승리하고 파레시아가 단순히 (진실을 말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지형(terreno di verita)으로서 상세히 개진된다. 그러나 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권력-저항이라는 짝(양자 사이는 비대칭적이다)만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의 존재론적 성격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한다. 이는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intransitività della libertà, the intransitivity of freedom)에 의해 드러난다. 이 요소는 권력관계에 종속될 때조차도 무조건적이다. 산 노동이 자본과의 관계 내에서 자동사적인 활력이듯이 말이다.((정리자주—‘자동사적 성격’이라고 번역한 ‘intransitività(이)/intransitivity(영)’에 대해 사실 푸꼬 자신이 사용한 표현은 영어로 intransigence 즉 ‘비타협적 성격’이다. 이는 그가 영어로 쓴 글인 ‘The Subject and Power’에 등장한다. 여기서 푸꼬는 권력(관계)과 지배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관계로서의 권력이란 타인의 행위에, 그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고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영향을 가하려는 행위인 한에서 권력의 행사는 원리상 자유로운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권력의 행사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 하는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력의 행사의 전제 조건인바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권력에 앞선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의 핵심에는 […] 의지의 반항(the recalcitrance of the will)과 자유의 비타협성(the intransigence of freedom)이 있다.” 한편 이 글이 후에 그의 글 모음집인 Dits et Ecrits 에 불어로 번역되어 실리면서 intransigence가 intransitivité로 옮겨졌고 종종 푸코의 자유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게 된 듯하다.))

진리는 새로운 존재를 산출하는 시적/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성된다. 가령 해방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 실천을 펼쳐낸다. 진리를 창조하는 자유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진리에의 욕망이라는 물음이 던져지자 푸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힘을 장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의 전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의 발전은 권력의 문법(그리고 실천)의 계속적인 재정식화를 낳는다. 고고학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계보학이 내일과 현재 사이의 가능한 차이를 실험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현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un’ontologia critica di noi stessi)―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의 범주들을 위기에 부칠 가능성을, 더 정확히는 그 필요성을 갖게 된다.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산 노동’의 새로운 질과 그 생산적 능력의 새로운 차원들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원들의 소진과 <나>와 <우리>의 관계, 즉 <우리>의 노동/활동 속에서의 <나>의 산출에 의해 결정되는 바의 ‘공통적인’ 지형의 출현이다.

역사, 윤리 그리고 정치적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열린 존재론의 장치(dispositif), 존재를 생산하는 장치이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마지막 결과들이 혁명적 좌파 내에서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 푸꼬가 발전시킨 입장을 [지금] 상기하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하다. 싸르트르와 대조적으로 푸꼬에게는 주체의 자유와 사실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존재론적 맥락의 필연적 결정과 그 열림, 즉 윤리적인 존재 및 함의 자유(freedom of ethical being and doing)가 존재한다.

 

4.

하이데거 이후로, 즉 탈근대에 존재론은 더 이상 주체의 토대(fondamento)를 이루는 장소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실천적·협동적 배치(agencement), 프락시스의 직물이다. 요컨대, 칸트 이래 확립된 초월적(transcendentale) 철학의 연속성을 가로막은 현재적 존재의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은 말 그대로 근대의 존재론과 그 데까르트적 뿌리(주체의 중심성)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삶의 양태’라는 새로운 물질성 위에 자리를 잡는다. 현실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던 인식론적 막(schermo, screen)은 여기서 분쇄된다. 하이데거의 작업은 이러한 지형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또한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적 노동이 그것의 생산물[즉 삶의 양태 혹은 인간]과 충돌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지형에서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인간에의 위협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기계들 및 테크놀로지 장치들에서 비로소 오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위협은 이미 인간을 그 본질에서 갉아먹고 있다. 몰아세움/닦달(Gestell)의 지배는 인간이 어떤 더 근원적인 탈은폐에로 귀의하여 더 원초적 진리의 부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위협해오고 있다.”[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생산적이지 않으며 테크놀로지는 생산을 비인간적 운명 속에 익사시키고 새로운 존재론의 발생에 왜곡의 징표를 남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황무지를 되돌려준다. 바로 여기서 주체의 유령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그 유령들이 다시 등장한다. 니체와 푸꼬는 이와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취하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발굴한다. 과거의 파편들, 현재의 밀도, 장차 올 것의 모험을 그 물질적 실재와 열린 시간성 속에서 다룬다. 그들은 존재론을 역사로 채우고 언어적 관계들과 수행적 장치, 계보적 재구축과 진실에의 의지들을 수립한다. 이것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 향하게 한다. 초월적 인식론은 옆으로 제쳐놓는다. 이 인식론은 더 이상 현재의 존재론을 위한 지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경우와는 달리 이 새로운 존재론에서는 삶의 공통적 맥동에 열려있는 결정적 분기가 발생한다. 존재의 산출은 심오함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현실성 속에서, 삶의 돌봄(cura della vita) 속에서 조직된다. 나는 ‘맥동’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생기론은 들어있지 않다. 우리는 생물학화된 혹은 자연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삶을 산다.

푸꼬에게 이러한 ‘현재의 존재론에 몰입되어 존재하기’(essere immersi in una nuova ontologia del presente)가 가장 높은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존재하기’(un essere comune)로서 특이성들의 상호적이고 다변적인 의존이 우리가 앎의 문제를 제기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형을 구성한다. 마슈레가 상기시켜주듯이, 푸꼬의 저작 출간의 맥락은 “전쟁 직후 시기의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의 완전한 갱신을 나타낸 거대한 논쟁의 계절이 시작된 때”이며 “이때 문학의 리얼리즘, 주체철학, 변증법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연속적인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이 동시에 문제 삼아졌다.” 이 문화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주권적 주체, 의식개념, 그리고 역사적 목적론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존재론을 집단적 실천의 직물이자 산물로서 파악함을 의미했다. 1970년대 중반, 푸꼬가 그 시점까지 쓴 것을 읽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의 느낌을 받았으며, 이것이 (객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열광과 주체에 대한 정신주의적 매료를 넘어서) 주체화를 향한 충동, 장차 올 것의 존재론적 구축(costruzione ontologica de l’a-venire)을 향한 충동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했다. 이러한 극복은 1970년대가 끝난 이후부터 일어나게 된다.

맑스에게서 우리는 동일한 형태의 존재론적 뿌리내리기와 대면한다. 역사적 현재에의/현재의 뿌리내리기(un radicamento nella/della presenza storica)이며 그 항상적인 재구성이다. 주체의 형이상학 같은 것은 없다. 그 존재론적 직물은 내가 지금까지 ‘새로운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러한 존재론적 직접성을 전제하는 것은 역사적 시기들의 차이를, 따라서 ‘삶형태들’(forme di vita)의 차이―예를 들어 맑스와 푸꼬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역사적 차이들, 여러 삶형태들의 차이]을 동질적 토대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건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된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①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본적 역사화 ②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인식 ③ 노동력, 즉 산 노동의 투쟁에서의 주체화 그리고 생산하는 신체들의 생산관계들의 변이와의 연동 ④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는 주체화를 정의하는 것.

 

5.

프랑스 맥락에서는 종종,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 방향에서, 존재론적 담론의 탈주체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이 지형에서 전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알뛰세르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매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 노선을 제안했다. 이제 알뛰세르가 이 지형에서 그의 비판을 심화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은 <주체>(Sujet)의 명령에 자유롭게 따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의 몸짓들과 행동들을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호명된다. 자신들의 종속에 의한 그리고 그 종속을 위한 주체 말고는 주체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체성을 그토록 해체시킴으로써, 그 어떤 가능한 정신주의의 나무도 베어넘김으로써, 알뛰세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에 이르렀다.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알뛰세르를 교정한다. “‘주체의 구성’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주체 없는 과정에서뿐이다.” 주체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은 반(反)휴머니즘의 무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형상으로 옮겨놓아질 수 없다. 이 비판이 표현하는 역사성, 활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즉 주체의 해체] 이후에 요구된 [새로운] 휴머니즘이 소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 현재의 존재론 안에서일 것이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그리고 다시 공장으로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 in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마지막 장인 17장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and Back Agai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는 글들 가운데 이미 블로그에 올린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와의 세 번의 대담을 포함한 이 모음집의 다른 글들은 1996년부터 2015년까지 여기저기 실렸던 것들을 영어로 옮긴 것이지만, 이 17장만은 네그리가 이 모음집을 위해 새로 쓴 글을 영어로 옮긴 것이다. 대담을 정리한 글들을 올릴 때에는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있어서 (영어본의 애매한 부분을 이탈리아어본으로 확인하는 작업과 아울러) 어떤 용어의 원문을 병기할 때 이탈리아어를 병기했으나(이탈리아어와 영어 둘 다 병기하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어 먼저), 이 글은 이탈리아어 원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원문을 병기할 때에는 영어를 병기한다. 이로써 이 책의 일부 내용을 정리하는 일단의 작업이 완료된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도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올리겠지만, 미리 장담할 수는 없을 듯하다.

공장에서의 잉여가치 추출에서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잉여가치 추출로의 이행은 앞의 글들에서 이미 다룬 주제이다. 이 글에서는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시 공장으로 돌아가는 이행을 다룬다. 이 이행이 의미하는 바와 관련하여 여러 물음이 가능하다. 생산주체 즉 산 노동의 담지자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노동자는 어떤 존재가 된 것인가? 착취받는 메트로폴리스 노동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이 노동자는 어떤 점에서 공장노동자와 구분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the metropolitan common)은 새로운 형태의 착취와 새로운 유형의 프롤레타리아(인지노동자)의 함입을 허용하는가? 마지막 질문에서 시작해보자.

도시를 구축하고 정의하는 데 공통적인 것이 항상 존재했다는 점은 명백하다. 도시를 부르주아지의 탄생지이자 근대가 개념화되는 중심지로 보는 막스 베버의 도시 정의에서도 그 개념은 특이성들의 협동에, 즉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었다. 도시는 탄생될 때부터 ‘연합한 생산하는 다중’의 표현이었다. 사적 소유나 공적 소유가 차지하지 못한 공간들에서만이 아니라 공존의 장소들을 가로지르고 도시의 정치상황에 따라 그 장소들을 채우거나 비우면서 그러했다. 그렇다면 공통적인 것이 도시의 제도적 체계에서 정치적인 것의 다른 얼굴로서 제시된다는 점이 분명하다. 정치적인 것이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를 이동할 때 공통적인 것은 이 이동의 존재론적 토대를 구성한다. 여기서 ‘존재론적’이란 말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변화하며 움직이는 현실을 의미한다. 공통적인 것의 고고학은 도시의 역사를 통과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보학은 도시의 공통적인 것, 더 정확하게는 공통적인 것의 메트로폴리스(the metropolis of the common)의 투사(projection)에서만 획득될 수 있다.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거대한 변혁에서 나에게 명확하게 보이는 첫째 점은 메트로폴리스의 삶의 양태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시간이 복수화(複數化)되었고 이전의 모든 관습과 규칙성이 파열되었으며 삶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모든 파열의 순간에도 대체·부과·보완을 통해 도시의 움직임의 총체에 새로운 결합이 일어난다. 유동적이고 통제·조형 가능하며 총체화하는 결합이다. 예를 들어 노동일은 더 이상 8시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이 24시간을 구성하는 모든 구간들은 증가할 수도 있고 감소할 수도 있다. 시간의 이러한 새로운 밀도는 비동기화(desynchronisation)를 통해 산출되며 여기서 발명하는 힘(능력)이 바로 메트로폴리스의 생산 주기를 재구성한다. 변한 것은 공장 안의 시간표만이 아니라 모든 노동형태들의 시간표이며, 이는 전적으로 새로운 귀결을 낳는다. 가령 가사노동자들은 완전히 불연속적인 일정을 가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이 불연속성은 사회에 실질적으로 필요한 요소로서 등장한 이후에 재구성되며 사회적 대화의 필요와 삶정치적 비용의 계산이 고려되게 된다. 

공장이 된 순간부터 메트로폴리스는 ‘기계적 구조’(‘machinic structure’)에 의해 조직되게 되었다. 이 구조가 메트로폴리스의 몸체를, ‘도시적 총체’(urban whole)를 구성한다. 이 ‘총체’에 대한 인식을 둘러싸고 많은 환상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때로는 기계적·포괄적·동심원적 총체로 정의되었고, 다른 경우에는 지적이고 확산된 신체적 총체로서 정의되었다. 이 정의들은 과학적이기는커녕, 도시의 통치를 위한 도구들로서 탄생했다. 이것들은 도시의 기술관료적 관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메트로폴리스를 사이버 도시로서 그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재주를 부리는 것일 뿐이다. 비판적 능력이 출중한 저자들(특히 애덤 그린필드Adam Greenfield)은 이런 식으로 도시를 보는 것이 일종의 완고한 논리적 실증주의임을 보여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산술적 (그리고 알고리즘적) 분석학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도구로 사용되게 되고 도시의 복수적이고 다양한 현실에 위로부터 부과되게 된다. 이것은 적절한 도구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가 다양한 행동과 행위의 집합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적인 행동과 공적인 개입을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것’(이는 보이지 않지만 강력하다)이 그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불변적 동반자이다. 그것은 체제 속에서 신비화되어 있고 사적으로 전유되며 공적인 것에 의해 소유되고 ‘일반 이익’으로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상 공통적인 것은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인 수도 있는 힘의 집단적 경험으로서 제시된다. 도시의 차원에서 공통적인 것의 욕망은 ‘좋은 삶’(good life)에 기여할 수 있는 공간들의 추구로서 탄생한다.

숨 막힐 정도의 복잡성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집단적 행동을 통해서 말고는 즉 ‘공통적인 것의 반란’을 통해서 말고는 공동의 착취 상태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 우리는 단지 자립을 추구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쁜 것이지만) 단지 소비를 제한하기 위해서 복잡성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는 없다. 복잡성을 재조직화하여 ‘공통적인 것’으로 되돌려야 한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기계적 체계는 특이성들을 가두는 억압적인 울타리치기의 한 양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갈등의 공간이고 투쟁 속의 향유의 공간이며 또한 착취받고 억압되고 패배하는 가운데 고통받는 공간이다. 바로 거기가 우리가 존재하는 곳이다. 권력이나 자본의 경우처럼 메트로폴리스의 기계적 체계 혹은 알고리즘도 이중적이다. 생산과 명령 사이에 밀접한 알고리즘적 연관이 있다. 노동자들 혹은 시민들이 의미있는 생산적인 관계들을 구축하고 거기서 나오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추출된다. 그런데 가치화(가치추출)의 과정이 깨질 때 저항이 발생하여 산 노동의 자립과 일관성을 회복한다. 산 노동이 저항을 통해 알고리즘을 깨고 새로운 의미의 네트워크들을 구축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 없이는 알고리즘도 없기 때문이다. 저항 없이는 자본주의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사회적 향상도 없고 삶의 향유도 불가능하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저항만이 시민들의 궁핍이나 명령에의 종속과 단절하면서 특이성들의 미래를 드러낸다. 우리는 기계적 몸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사용하여 그것을 향유하는 데로 접근할 수는 있다. 여기서 ‘사용’이라는 범주가 핵심적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에서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가려 그 의미가 축소된다는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사용가치를 삶형태로서 회복한다는 것은 억압적 고리와 그에 달라붙어 있는 폭력을 부순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투쟁(사회적 파업)은 이 지형에서 효과적인 무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현재의 도시 유토피아, 즉 건축 분야의 투사들이 그리는 유토피아에서 ‘닫힌 요새’―20세기 초에 노동자들이 비엔나에서 동네 지역에서 창출하려고 했던 것―와 같은 모델들을 선택하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또한 콜하스(Rem Koolhaas)가 다중이 살 수 있고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모델로서 발전시킨 ‘거대함’(Bigness)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 피렌체의 아키줌Archizoom[‘Archizoom Associati’는 1966년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세워진 디자인 스튜디오이다.―정리자]의 노동자주의 건축가들이 이런 생각을 이어받아 작업을 하고 이어지는 논쟁의 중심에 줄곧 있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 대응되는 주체적 차원이 존재한다. ‘테크놀로지를 도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싸센(Saskia Sassen)은 말한다. 이는 지성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메트로폴리스에서 공통적인 것의 차원을 실질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의 차원이란 주체성의 생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여러 형상의 노동들이 ‘일반지성’ 아래 집결되는 동학도 도시 행정의 전통적인 부문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복합적인 유형의 서비스로 전환되는 것, 혹은 (더 낫게는)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시민들의 협동을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실 혁신의 움직임들이 영속적으로 도시를 가로지른다. 도시가 생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가 더 이상 아니라 그런 움직임들을 의식하고 체계를 다스리는 기능을 시민들 혹은 노동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맡기는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하비(David Harvey)는 ‘추출적 착취’라는 개념을 다듬어내는 자신의 작업의 초기부터 르페브르(Henri Lefebvre)의 통찰을 이어받으면서 도시가 산 노동력의 생산물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전반적 생산물이 자본에 의해 강탈되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도시로 돌아가서 도시를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활동을 통해,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공통적인 것을 통해, 요컨대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적 관계 전체를 투과하게 함으로써 다시 고찰할 때이다. 르페브르는 포디즘의 마지막 국면을 살았다. 이때는 도시가 산업이라는 외부 권력에 확연히 종속되어 노동일이 가차 없는 경직된 선형의(linear) 조직화가 이루어지기 직전이었다. 맑스가 연구했고 모든 19세기 후반의 위대한 소설가들이 말해준 노동일은 메트로폴리스에 기계적 명령을 부과한 후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파괴된 것은 아니었다. 메트로폴리스를 둘러싸면서 그 인접 생산기계를 구성한 노동계급의 도시들은 지위가 격하되어 쓰레기통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재정 위기’는 그 중심지들로부터 그 시대의 ‘창조적 계급’을, 즉 잘 사는 부르주아지를 밀어냈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이 위기를 프롤레타리아의 저항이라는 시험을 거치게 하는 데, 그리하여 메트로폴리스의 중심성을 재발견할 뿐 아니라 가까운 미래에 그 생산적 활력의 회복을 예견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났다. 도시가 (공장노동을 하도록 저주받은 궁핍화된 주변부들의 행정적 기능만이 아니라) 생산적 기능을 회복했을 때, 그리고 주체성의 생산의 중심지점이 되었을 때, 르페브르는 도시를 창조적 비등의 새로운 순간으로 간주했고 급진적인 민주적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으로 간주했다. 계급투쟁은 도시에 다시 함입되었고 우리의 자유로운 시민적 삶의 운명에 새로운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이제 부르주아지의 도시가 아니라 인지노동의 메트로폴리스, 젊은 불안정 프롤레타리아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활력이 메트로폴리스로 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르페브르의 예언의 성취를 목격하고 있는 것인가? 스쿼트(squat) 운동에서 2011년의 거리시위까지, 오큐파이(Occupy)에서 자치행정과 협동 그리고 ‘해방지대’(liberated zones)의 구축의 경험들까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곧 반신자유주의적이고 생태론적인 공동체적 실천임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제 변형이 일어날 때 그리고 위기가 목전에 있을 때 상호부조와 협동이 항상 일어난다. 부동산 지대에 대한 투쟁이 시민들의 정치적 자기실현에서 중심적이 된다. 공통적인 것을 바탕으로 삼는 저항이 추출적 기업활동을 맞받아친다. 공통적인 것의 사용권이다. 소득, 복지, 시민권이 싸움터가 되며 이 싸움터에서 주택과 거주는 참호 역할을 한다. 종종 부채와 가난이 공존하지만, 이것들이 축출될 곳도 여기이다. 상호화(mutualisation)[자원의 공동이용―정리자] 기획들과 시민소득에의 요구가 반자본주의의 새로운 전선이다. 이는 ‘시민으로 존재하기’(‘being a citizen’)의 욕구에 맞추어진 요구들이다. ‘소유하기’가 아니라 ‘존재하기’이다. 소유가 아니라 일이요 활동이며, 사적 전유나 공적 사용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다.

몇 가지 기본적 논점들을 요약해보면, ① 긴 이행의 시기가 지난 후 생산에서의 중심성이 다시 부활했다. ② 시민(혹은 노동자)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민은 종종 빈자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의 분석은 과거가 특권을 가지지 않는 지형에서 펼쳐져야 한다. 탈근대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테일러주의화된 노예에서 인지노동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지형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다중은 지적 형태가 된 생산수단을 자신이 재전유했기 때문에 공통의 부를 직접 창출하면서 가난에 맞서 싸운다. 도시는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장소이다.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난이란 길게 보면 자본의 ‘시초 축적’의 복잡한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과거와는 다른 형태로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토지로부터 분리되고 모든 자립적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후에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되었다. ① 봉건적 농노제에 종속되어 있지 않아서 자유롭고 ② 재산이나 땅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프롤레타리아가 빈자 다중으로 창출된 것이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 일어나는 산업노동에서 인지노동으로의 이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빈자 다중은 이제 인지노동자들의 다중이다. 그런데 맑스는 노동수단과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노동능력은 절대적 가난이 된다고 한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참조―정리자] 그리고 그 단순한 인격화로서의 노동자는 맑스의 개념에 따르면 빈자이다. 그가 말하는 빈자는 단지 가난 속에서 생존의 경계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산 노동이 객체화된 노동(이는 자본축적을 위하도록 운명지어여 있다)으로부터 분리된 모든 노동자들이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도 해당된다.

여기서 맑스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의 가난을 그 활력과 연결시킨다. 산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적 부의 일반적 가능성이라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연결은 사적 소유의 심장부에 놓여있는 치명적 위협이다. 탈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명령으로부터의 분리(즉 자율적으로 되기)가 대대적으로 증가하며, 생산적 노동(지적, 인지적 노동)의 소외의 정도도 극히 높아져서 노동자들의 프롤레타리아화와 그들의 삶의 불안정성으로 구현되고 있다. 가난과 활력의 혼합은 점점 더 폭발적이 되고 있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하게 확대된다.

이 사회의 공통적 생산 외부에, 메트로폴리스에서 축적되는 가치의 추출 외부에 존재하는 가난이란 더 이상 없다. 예를 들어 빈자와 고용된 노동자들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다. 반대로 모든 다중에 점점 더 공통되어지고 생존과 창조적 활동에 모두에 적용되는 조건이 존재한다. 빈자의, 고용된 노동자의, 비정규직의, 이주자들의 창조성과 발명 능력은 사회적 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이다. 오늘날 생산이 공장의 벽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외부에서도 일어나는 만큼, 생산은 임금관계의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생산적 노동자들과 이른바 비생산적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적 장벽은 없다. 모두 메트로폴리스에서 이루어지는 생산과정에 참여한다. 이런 이유로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의 구분―이 낡고 애매한 맑스주의적 구분―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한다. 가령 ‘산업예비군’이 나타내는 위계가 여기 해당되는데. 이 위계는 일반적으로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중요한 정치적 역할에서 배제하는 데 사용되어왔다. 혁명적 기획을 포함한 주요한 역할은 대공장의 ‘손에 굳은살이 박인 노동자들’―탁월한 생산자들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 고용되지 않은 노동자들, 그리고 빈자들을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에서 어떻게 배제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이라는 조건에 맞서는 빈자들의 투쟁은 투쟁형태일 뿐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정치적 힘의 긍정적 양태들이기도 하다. 이 힘은 애처로운 ‘소유하기’(having)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공동으로 존재하기(common ‘being’)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20세기에 세계의 유력한 지역들에서 빈자의 운동은 가난이 동반하는 단편화·낙담·포기·공황상태를 극복하는 힘을 보여주었으며, 부의 재분배를 요구하고 메트로폴리스들로 이주함으로써 해당 국가의 정부들에 도전했다. 메트로폴리스들은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 투쟁들에 영토를 제공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동의 생산과 그 생산물들을 한데 엮는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계급투쟁이 돌아왔다. 이는 가난에 맞서는 투쟁이며 공통적인 것의 구축을 위한 투쟁으로서 메트로폴리스에서 펼쳐진다. 노동자가 메트로폴리스로 돌아와 공통적인 것을 명령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12장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2장의 뒤에 딸린 “Fifth Response”는 제외되어 있다. 다음에 따로 올릴 에정이다.

 

Chapter 12. Neoliberal Administration Out of Joint 207

 

화폐와 금융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계와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제도들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일반적 내러티브: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일국적)의 위기에서 나왔다.

보완적 내러티브: 일국 주권과 근대 행정은 외부에서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부패를 통해 공동(空洞)화되었다. 기업들의 로비 및 기타 합법화된 부패.

요컨대, 근대 행정과 일국 주권들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이미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내러티브들은 유용하다. 그러나 이는 전개과정을 위에서만 보기 때문에 이 시각은 부분적이고 본질적 요소들을 놓치고 있다. 8장에서 이미 말했듯이. 근대 행정을 위기에 빠뜨린 살아있는 동력은 아래로부터 왔다. 즉 생산적 다중의 창조적이고 협동적인 회로들이다. 그 증가하는 능력, 지식, 정보에의 접근, 그리고 고정자본의 재전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제도들과 실행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다중의 저항, 반란. 자유의 기획, 자율능력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만든 에너지와 능력을 봉쇄하고 수습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Neoliberal freedom 208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적 어젠다의 중심에 놓는 보수적·자유주의적 전통의 정점이다. 그 자유들 가운데 일부는 단지 신비화일 뿐이다.

 

개인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보면 자유는 노예상태를 의미한다. 작은 정부도 종종 재산의 보호, 안보장치들, 경계철책들, 군사프로그램들에 드는 예산의 증가를 의미하곤 한다. 즉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아니며 정부 활동이나 강압의 감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푸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개입은 다른 체계에서만큼이나 밀도 있고 잦으며 능동적이고 연속적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신비화된 자유 개념 아래에는 사회적 자율이 맥박치고 있다.

 

푸꼬 :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제 교환의 파트너가 아니라 개인 기업가이다. 기업가의 일반화.

 

이 기업가 형상은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점점 더 자율적이 되는 사회적 생산형태들을 굴절시켜 해석하고 전유한 것이다.

(푸꼬의 강의들 전체에 걸쳐 사회를 가로지르는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인식이 때로는 낮은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회에서 보이는 기업가 형식의 일반화는 사실 신자유주의와는 반대방향을 가라킨다. 즉 협동적인 사회적 주체성들의 자유와 자율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앞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발견한다.”

신자유주의의 자유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저항적 주체성들의 힘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기업가가 되고 자신의 삶을 관리할 자유는 실제로는 대부분 불안정성과 가난으로 옮겨간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푸꼬의 강의를 듣고 그의 비판적 목소리를 긍정으로 오인한 듯하다. 노동자들이 개인 기업가가 되는데 주된 장애는 안정된 평생보장 직업이라고 드러커는 주장한다. 노조가 깨지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야 노동자가 늘 자신의 삶에서 혁신하고 갱신할 테니까. 대학이나 정부도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안정 역시 자기혁신을 위축시키니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새처럼 자유롭다, 안정된 직업에서 자유롭고 복지 서비스에서 자유로우며 국가의 지원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자신의 불안정한 삶을 최선을 다해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다 하니 이 얼마나 멋진 위선인가!

 

일본에서 나온 프리터(freeter)라는 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전도된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프리터의 자유, 가난과 불안정의 자유이다.

 

신자유주의의 신비화에 분노하여 저 아래 있는 사회적 협동의 동학을 놓치면 안 된다. 다중의 기업가를 놓치면 안 된다.

 

테크놀로지 소비에는 계속적인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1인 관료제(a bureaucracy of one)를 창출한다. 자유와 제한을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개인적 자기관리의 구조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형태들은 생산과 협동의 자기관리와 자기조직화에 의존한다.

신자유주의 아래에는 자기관리와 협동의 사회적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여기서 나오는 가치를 추출하고자 한다.

 

자기(자주)관리는 식민화된 민족들, 페미니스트들, 인종적으로 종속된 사람들, 조직된 노동자들 등의 세계 전체에 걸쳐서 투쟁의 핵심적 요구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점에 달했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공동체 자기(자주)관리의 성공적인 실험 사례들 가운에 일부는 흑표범당의 해방학교 및 어린아이들을 위한 무상아침급식 프로그램; Gabriel Cohn-Bendit가 창립한, 학생과 선생이 함께 관리하는 학교인 Lycee experimental de Sainte-Nazaire; 2001년 경제위기 때 소유주에 의해 버려진 후 노동자들이 되살려 운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Bauen Hotel; Our Bodies, Ourselves를 출판한 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가 있다.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에 그러한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전유는 ① 자유와 자기관리 개념을 집단에서 개인의 규모로 축소한다. ② 다중의 지식과 능력을 포획하고 전유한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는 추출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유는 과거의 투쟁의 왜곡된 부호―의미 없이 되풀이 하는 옛날 단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의 지식, 자율, 집단적 자주관리를 가리킨다. 푸꼬의 말을 명심하라.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 열쇠는 그 자유를 찾아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 다음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Crisis points of neoliberal administration 212

 

8장에서 말했듯이, 근대의 행정은 지식, 능력, 정보에의 접근이 인구에 일반화되고 행정통제의 경계를 넘쳐흐를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계산하는 사회적 요인들이 점점 더 측정 불가능하게 될 때 무너진다. 행정은 이제 엄밀하게 합리적인 사회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동과 주체성의 생산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의 부의 포획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일국 및 초국적 수준의 행정 및 법 장치들은 점점 더 단편화된다.,

Andreas Fischer-Lescano and Gunther Teubner: 법의 단편화는 전지구적 사회 자체의 단편화를 반영한다.

버넌스의 한 양태로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흘러넘치고 측정불가능하고 단편화된 특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를 종식시키지 않는다. 정부와 달리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는 단편들 사이의 약한 양립 가능성에 의존하는 다수적이고 유연한 통제네트워크를 발생시키고 유지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열쇠는, 영속적인 위기의 상태에서 기능하고 명령을 행사하고 가치를 추출하는 능력이다. 그 아래 있는 생산적인 사회적 장을 궁극적으로 통제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위기점 가운데 첫째는 가치 측정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사회적·비물질적 생산물과 관련된다. 자본주의 회사들과 근대 행정이 산업 및 농업 생산물들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 어찌어찌 성공한 반면에, 사회적 생산물들은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간호사가 제공하는 돌봄의 가치나 컴퓨터 문제를 해결하는 콜센터 노동자의 지성의 가치 혹은 문화생산물, 아이디어 등의 가치를 어떻게 수량화할 것인가?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모든 결과는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특징을 띤다. 공유에 열려 있고 사유재산으로 폐쇄되기 힘들다. 모두가 사회적 삶형태들을 구성한다. 사회적 생산의 생산물들을 어떤 식으로든 있지만, 그것들의 가치는 할당된 양을 흘러넘친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본성상 측정 너머에 있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의 측정 불가능성이 자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측정 불가능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동원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파생상품들이 미지의 가치에 대한 벤치마크를 제공하고 하나의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 테크놀로지들도 전지구적 경제의 토대를 성공적으로 안정화하지는 못한다. 사실 더 휘발성 있게 만드는 쪽이다. 매일 아침 신문에는 경제의 불안정을 나타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이 불안정은 부분적으로는 범죄적 행위 때문이지만, 체제 차원의 단층선(systemic fault lines)의 징후이기도 하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 : “경제적·금융적 위기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가치의 불안정성이 한 유발 요인이다.”

금융자본의 지배 하에서는 거버넌스와 위기가 모순적이지 않다. 자본이 위기를 거버넌스의 한 양태로 채택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둘째 위기점은 정보와 소통에의 접근이다.

각 정부들의 통제 및 감시 노력.

비밀과 감시가 안보 주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아무리 댐을 튼튼하게 해도 인터넷 경찰은 항상 새로운 누수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10대가 노트북으로 장애물들을 제치고 금지된 사이트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 항상 일어날 것이다.

 

이주가 셋째 위기점이다.

2014년에 6천만 명이 강제로 이동.

오늘날 2억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태어난 나라의 바깥에서 산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10분의 1이 이주민들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국민국가들과 초국적 거버넌스 기구들이 무관심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많은 다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주민들은 자유롭고 유동하는 주체들이다.

돕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자주 그들을 희생자들로만 본다.

싼드로 메짜드라(Sandro Mezzadra) : “이주의 주체적 측면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온정주의적 시각을 넘어서 이주민들을 오늘날의 전지구적 변형 과정의 주인공들로 볼 수 있다.”

 

부와 가난의 역설을 한데 묶어서 보기.

① 삶의 발판들을 박탈당한 상태.

② 탈주는 자유의 행동이며 강함의 표현이다.

 

주체성의 관점에서 이주자들은 모든 행정적·자본주의적 척도 논리를 넘어선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영속적인 위기관리 장치의 형태를 띤다.

 

자유와 주체성이 생산, 정보에의 접근, 이주를 특징짓는다. “주체성의 생산이 행정의 기능에 필요한 척도의 경계들과 테크놀로지들을 항상 초과한다.” 위기관리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작동양태이다.

 

이렇듯 위기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규칙(규범)이지만 이것이 행정의 매끄럽고 성공적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결과로 규칙적인 위기를 낳는다. 다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①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하나의 척도에 종속시키지 못함 ② 정보의 통제 불가능성 ③ 이주의 봉쇄 불가능성 — 이 셋이 행정의 무력(효력을 내지 못함)에 추가되어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재앙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mptying the public powers 218

 

신자유주의 행정은 액체 거버넌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공적인 힘들(공적인 것)을 비워내고 행정 기능에 자본의 논리를 부과하는 프로젝트를 향해서 정렬된 분산되고 무질서한 연관들로 짜인 내구성 있는 직물과 더 닮았다. 그러나 주체성들은 결코 그 규칙에 맞추어져 기능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행정을 분석할 때 하나의 과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너머를 지향하는 저항과 반란의 잠재력이 아래로부터 출현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행정이 공적인 것을 비워내는 양태

①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의 부의 이전

민영화

국가부채

긴축정책이 국가 재산을 팔게 함. 예) 2015년 그리스의 부채 드라마.

불법적 수단을 통한 부의 이전. 공적 기금의 횡령, 공공 자산의 부적절한 판매, 허위 토목공사 도급, 뇌물 등.

드러난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부패가 신자유주의 행정의 거버넌스 및 규범적 구조의 구성적 요소가 되었다.”

② 다양한 내적·외적 압력을 통해 국가행정장치의 핵심 기능을 변형하기

외부 압력: 예를 들어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협박하여 일국의 결정능력을 압도하기

내부 압력 : 민영 싱크 탱크, 로비스트들의 입법 지시, 선거에의 합법적 기여

 

그런데 이 현상은 더 일반화된다. 행정력이 사유화되고, 시장의 척도가 행정수행의 벤치마크가 되며, 행정 결정에 경제적 기준들이 침투함으로써 정치적인 것 자체가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

Wendy Brown: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합리성이 정치적인 것에 위로부터 부과되는 것 + 경제적 논리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주체들의 창출>로 정의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호모 폴리티쿠스를 정복하기”이다.

법 실행과 법 이론이 신자유주의 행정이 부리는 무기들 가운데 일부이다.

 

우리는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전 지위를 복원시키려는 마음은 없다. 아래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 저항 행동들과 생산적 활동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매끄럽거나 안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항상 저항과 투쟁의 장소로 남아있다.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의 세 전선]

① 투명성

신자유주의 행정의 전략적 불투명성과 싸움.

② 접근

행정 및 기업 활동에 빛을 비추면 비리를 막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 지식과 정보를 사회 일반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생산 수단의 자유로운 사용.

③ 의사결정

의사결정에 관한 문제가 양자를 통합하여 우리를 정치적 지형에 세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바처럼 정치의 자립성을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구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종속에 맞서는 주체성들의 잠재적 생산을 지향하게 한다.

 

이 모든 전투에서 주된 전선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세계이다.

디지털 감시

신자유주의적 보안 장치들과 사회적 미디어 기업에 의한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 사이에는 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이중적 역할 : ① 사회적 생산이 포획과 신자유주의 행정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동시에 ② 다중으로 하여금 지식, 소통, 자기행정 능력에 접근하도록 허용한다. 7장에서 말한 고정자본의 재전유가 해방기획을 위해 이러한 힘들을 이용할 한 수단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다. 자본과 신자유주의가 가진 무기는 종종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낙관주의나 절망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명령과 단절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주체성과 사회적 삶의 생산을 위한 잠재력을 우리의 상황이 제공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IV부에서 다룰 과제는 이 지형 위에서 혁명적 과정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조직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