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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서 커먼즈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인터넷 문화에는 희망에 찬 실험과 정치적 해방의 꿈이 넘쳤다. 통찰력 있는 디지털 활동가인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가 다음과 같이 웅대한 문장을 특징으로 한 유명한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Cyberspace)을 발표했다.

산업계의 정부들, 살과 강철의 지루한 거인들이여, 나는 정신의 새로운 집인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왔노라. 나는 미래를 대표해서 과거에 속한 당신들에게 우리를 내버려두라고 요구하노라. 당신들은 우리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는 당신들에게 주권이 없다.

인터넷에 접속한 새내기들—그 당시에 우리 대부분이 새내기였다—에게 이 문장들은 인터넷을 통한 해방을 감동적으로 일별하게 해주었다. 그 당시의 파열적인 사회-기술적 혁신의 아찔한 속도를 생각한다면 이 문장들은 꽤 신뢰할 만하다. 여러분이 30세 미만이라면 프리 소프트웨어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급증을 둘러싼 흥분, 특히 레니게이드 운영체제[주석1]로서 리눅스 그리고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와 위키(들)의 등장을 어쩌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비트토렌트(BitTorrent) 및 P2P 파일 공유의 가능성이 따분하고 착취적인 음악 산업을 뛰어넘어 도약하자 어디에서나 정치적 반란자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를 통한 저작권법의 재창조로 일반 사람들이 컨텐츠를 공유할 권한을 합법적으로 인가할 수 있었고 동시에 무수한 여타 기술 혁신들이 협력 및 공유의 새로운 형태들을 촉진했다.
[옮긴이 주석: ‘레니게이드 운영체제’(renegade operating system)는 기존의 규범 혹은 표준에서 벗어난 운영체제(OS)를 가리킨다. 영어 명사 ‘renegade’는 ‘배반자’ 혹은 ‘배교자’를 의미한다.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는 커뮤니티나 소셜 네트워크 역할을 하는 모든 블로그들의 집합이다.]

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이 인터넷을 상업적인 시장으로서 철저히 길들였고 식민화했으므로 발로우의 선언문은 끔찍할 정도로 순진한 것이 된다. (그의 동시대 동료들―크립토 세계―이 비슷한 비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를 내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자본가/국가 동맹은 인터넷에서의 사용자 주권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길들였다는 사실을 직시하자. 우리의 온라인 삶의 지리적 위치 감시를, 온라인 피드 및 여론에 대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듬 조작을, 대안우파•러시아 및 여타 불량 집단들이 행하는 허위정보 공작과 해킹하기라는 조직적 활동을, 그리고 한때 단일했던 웹을 소규모 웹으로 분할하고 있는 기업의 페이월 및 국가의 방화벽을 생각해보라.

따라서 미국 웨스트조지아 대학의 지리학 교수인 하네스 게르하르트(Hannes Gerhardt)의 신간인 『자본에서 커먼즈까지: 자본 너머의 세상에 대한 전망을 탐색하기』(From Capital to Commons: Exploring the Promise of a World Beyond Capitalism)를 접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이었다. 빅테크의 독점, 순응적인 입법부, 그리고 정보기관들이 인터넷과 해커문화에 널리 퍼진 증가 일로에 있는 아이디어들을 분쇄했을지라도 게르하르트는 커머닝과 테크놀로지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이행을 실제로 실현하는 길들이 있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어젠다를 ‘동료주의’라고 부른다. 이 동료주의는 이데올로기도 전략적 구상도 아니며 오히려 탈자본주의적 가능성들을 현실화하기 위한, 커먼즈로부터 영감을 받은 전망이다. 그는 책 첫 줄에서 자신의 임무를 요약한다. “커먼즈 중심의 협력적 생산형식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한가?”

나는 디지털 공간들에서 그리고 생물물리학계에서 커먼즈를 추진하려는 게르하르트의 전략에 관하여 더 많기 알기 위해 팟캐스트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47)에서 그와 인터뷰를 했다.

게르하르트는 지난 50년간 인터넷 문화에 관한 광범위한 문헌—비평들, 역사들, 기술적 논쟁들—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의 책을 인터넷에 관한 많은 다른 책들과 구별 짓는 것은 과제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그의 정치적 날카로움이다. 그는 “전지구적으로 디자인하고 지역에서 제조하는” 생산을 지원하는 방법에 관한 장들, 그리고 배전망 및 인터넷 자체와 같은 “기반시설을 민주화하기”에 관한 장들을 제시한다. 많은 기술 전문가들과 다르게 게르하르트는 자연세계의 경계선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재생자원으로서의 지역적 특성, 도시 폐기물 그리고 농업에 공간을 할애한다.

게르하르트는 “화폐와 가치”에 관한 두 개의 장에서 국가가 화폐 창출을 독점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데 시간을 또한 할애한다. 근대적 화폐 창출이 대출을 통해 무(無)에서 돈을 창출하는 개인은행에 아웃소싱되었으므로, 게르하르트는 기본소득 요소를 좀 가지고 있는 탈중심화된 지역 크립토 통화(예를 들어 써클즈Circles, 매너베이스Mannabase, 및 스위프트디맨드SwiftDemand)에 주목하고 한편으로는 비트코인 같은 자본주의적인 모험적 투기를 피한다.
[옮긴이 주석: 써클즈(Circles)는 공동체가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대안 통화이다. 써클즈와 화폐에 대해서 http://commonstrans.net/?p=2306 참조. 매너베이스(Mannabase)는 전 세계 최초 기본소득 암호화폐용 온라인 플랫폼이다. 스위프트디메드(SwiftDemand)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편적인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데 집중하는 새로운 디지털 통화이다.]

디지털 삶을 ‘공통화’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들은 게르하르트가 논의할 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있다. 저작권과 특허권의 독점적인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 반트러스트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주제와 관련하여 레베카 기블린(Rebecca Giblin)과 코리 닥터로우(Cory Doctorow)의 『관문 자본주의』(Chokepoint Capitalism)를 참조하라—그리고 홀로체인 같은, 커먼즈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프로토콜과 플랫폼들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것이 이 기회들에 포함된다. 어떻든 디지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진지한 전략적 기획들을 숙고하는 것은 활기를 북돋우는 일이다.

하네스 게르하르트와 함께 한 팟캐스트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인터뷰의 녹취록은 여기서 PDF 형태로 다운받을 수 있다.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돌봄과 번성: 커머닝으로 생겨나는 사회보장

 


  • 저자  : Silke Helfrich, David Bollier, Thomas de Groot
  • 원문 :  Caring and Thriving: The Social Security Engendered by Commoning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0년 10월 16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흔히 네덜란드인명의 성에 붙는 ‘de’―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를 ‘데’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더’에 더 가깝기 때문에 ‘Thomas de Groot’를 ‘토마스 더흐로트’라고 표기했다.)

     


암스테르담 소재 <커먼즈 네트워크>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더흐로트(Thomas de Groot)는 최근에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와 어떻게 커먼즈가 대안적인 이행경로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이 인터뷰의 본래 게시글은 <커먼즈 네트워크> 웹싸이트에 올라 있다.

* * *

더흐로트
우리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프리히
좋습니다. 커먼즈 사유에 사회보장이라는 쟁점을 연결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우리는 시장기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부담을 떠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Covid-19 팬데믹 국면에서 보고 있는 것도 이것입니다. 국가는 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기업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국가도 자본 유입과 세수에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경제위기와 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기반의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보다 독립적이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의 미래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저는 ‘재분배에서 선분배로’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에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를 재분배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 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지분소유권(equity ownership)과 같지 않습니다. 투자금에 대한 이윤이나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자산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밖에서 자급활동과 서비스들을 창출하기 위한 공유된 부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관련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에 딱 좋은 말씀이군요. 사회보장의 원천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는 사회보장이 단지 화폐가치의 안전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사회보장을 화폐가치의 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부의 모든 재분배가 설계상 시장변동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접근법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재분배의 불공평한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지시할 때는 말이죠.)

그것은 또한, 사회보장을 구상하고 제공하기 전에 우선 메가머신(megamachine)이 계속해서 굴러가게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설계 결함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자본주의 경제의 (따라서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소유관계(시장을 통해 화폐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유권 모델들을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재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선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실질적인 선분배는 모든 사람이 어엿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공유된 부의 기본 요소들(토지, 주택 등)에 법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용 토지, 주택과 아파트가 지어지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사회보장을 보다 커먼즈 친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최대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1%의 축적된 부의 일부를 되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지금 수십억을 써야 하는 일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탈상품화된 주택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사회보장제도의 일부가 되어야합니다. 그 권리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의 일부분인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이 생겨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유(재산)를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우리 사회에서 소유권 모델은 항상 개인 소유와 기업 소유 그리고 국가 소유로 구성됩니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사이의 단순화된 논쟁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커먼즈에 기반한 생각들은 결코 고려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은 항상 주변화되고 간과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헬프리히
그것은 국가 기관들이 시장경제 및 추출적인 기업모델들을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접근법은 정말로 나쁜 설계상의 선택사항임이 드러납니다. 위기가 닥쳐도 재분배할 충분한 돈이 없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볼리어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추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그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명성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의 일은 그 경제가 낳는 추출과 성장을 촉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일에는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을 상상할 동기가 정말로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만 기꺼이 나서지 않거나 직업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프리히
그래서 우리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현 시스템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제대로 된 출발점은 국민국가들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시장국가들인데, 모든 재분배 행위를 완전히 시장에 즉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회보장을 위한 모든 중대한 시나리오는 이 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볼리어
사람들은 시장이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항상 회피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시스템으로 구축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이 분명해진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들을 찾을 때 사람들은 시장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의를 가진,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그들이 탈성장이나 탈자본주의적 선택사항들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처럼 유럽에도 존재하는 (아마도 진보적인) 노동조합의 전통이 떠오르는군요. 조직화된 연대에 관한 사유의 전통이죠. 하지만 그 전통조차도 우리가 결정하고자 하는 것에는 부적절합니다. 이는 그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국가에 의해 구상되는 모든 사회정책의 선결조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강하게 이것을 제시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보장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재분배를 하기 위한 수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원이나 동어반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장 참여자들(기업들,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게 할 것이며 이것이 다시 경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게끔 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완전히 화폐화되었다는 결론만 내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소재 <쎄꼬쎄쏠라>(Cecosesola)라 불리는 협동조합들의 연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사회보장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베네수엘라 경제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장에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충분한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고 자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로부터 지급받는 물자들로 말이죠.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쎄꼬쎄쏠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느낌, 즉 안도감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유대)의 안정감에서,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관리(파수)하는 시장, 자기조직화, 절대화된 평균가격에 기반을 둔 거래,(([옮긴이] 쎄꼬쎼솔라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채소들의 경우에는 더 쉽습니다. 우리는 채소들의 가격을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시간과 노력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우리는 킬로그램당 평균 가격을 사용합니다.” (http://patternsofcommoning.org/we-are-one-big-conversation-commoning-in-venezuela/))) 의식(儀式)화된 활동과 상호지원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들을 통제합니다. 모두가 지위가 동등한 동료(peer)로서 조직한 그들의 사회보장 제도는—그들은 심지어 원장도 없이 모든 장비를 갖춘 병원을 운영합니다—큰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주변부에서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창출해줍니다. 그런데 소속감을 가진다는 이 기본적인 요소가 이곳 유럽에서는 사회보장에 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볼리어
<쎄꼬쎄쏠라> 같은 것이 미국에서 작동할 수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두서없이 말해서 정치문화에 그것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헬프리히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시스템에 있는 다음 결함으로 넘어가는군요. 우리의 사회보장 및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통찰과 실험을 소개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회보장 및 경제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의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볼리어
그 범위의 많은 부분이 국가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인 관료체제와 관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 적용되는 표준적인 모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관료체제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정책을 능력중시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관료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시스템은 지역의 독특함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 어떻게 가치를, 즉 오픈소스 스타일을 발생시키는지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분명하게 이 요소를 참작합니다. 커먼즈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열려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커머닝과 로컬리즘을 더 지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국가의 관료체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또한 우리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가지 사례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옮긴이] http://www.comune.bologna.it/media/files/bolognaregulation.pdf))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포스터(Sheila Foster)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도시들> 운동(“Co-Cities” movement)이 해당이 됩니다. 이 접근법은 도시 관료체제와 (동네그룹들, 시민연합들 등등으로서 활동하는) 커머너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의 실험은 선거정치, 정치정당, 입법대표자들의 권력놀음에 취약하죠. 게다가 국가권력과 커머닝 사이에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질케와 저는 이 과제, 즉 우리가 어떻게 커먼즈와 국가의 파트너십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어떻게 관료체제(국가)와 선거정치가 체질개선을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서 커머닝의 다원세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과제와 씨름을 해왔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헬프리히
맞습니다.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국가주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시스템이 오늘날 그렇듯이 위계적으로 수립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상황과 욕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국가권력은 화폐 안전(monetary security)을 명백하게 선호하는 행정상의 단일문화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부터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 비화폐적인 안전욕구가 있습니다.

 

더흐로트
우리가 하는 연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행 진로를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핵심이 케어소득과 대안통화입니다. 케어소득은 우리가 탈성장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장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네통화(neighbourhood currency, 지역통화)로 이 케어소득 방식을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헬프리히
우리는 항상 경제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즉 사람들이 자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스템은 경제에서 돈이 유통되는 부분만 볼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적하듯이 그 시스템은 많은 일들을 배제합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우리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무조건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화폐화의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케어소득을 대안통화에 연결시키려는 충동을 이해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연대경제의 일부를 수용하고 시장경제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커머닝과 상업활동은 따로따로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금 뒤로 돌아가 보죠. 모든 국민국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관료체제에 의존합니다. 그것을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만병통치약인 ‘추상적인 평등’이라고 부릅시다. 국가는 항상 위에서부터 통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들 정부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편적인 기본소득, 케어소득이나 또는 그러한 어떤 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즉 ‘누가 그것을 운영(주관)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기본소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시나리오에서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 얻고 무슨 이유로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감•책임감•사명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달랑 서류와 법조항들만 줄줄이 붙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국가화폐기금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사회적 구조 없이, 소속감 없이 사회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볼리어
그것에 덧붙여서 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자금조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중입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돈과 공동체가 양도 불가능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즉 돈과 공동체가 어떻게 시장의 힘에 의해 상품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그리고 가치)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을,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신식민주의적인 추출 장소들(프랙킹, 식수, 광물들, 데이터 마이닝 등등을 생각보세요)로 취급되지 않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통화가 해결책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안통화는 당연히 장소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가령 동네통화는 전지구적 금융의 회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커먼즈 내부에서 발생된 가치가 더 큰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단순한 거래와 투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막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대안통화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안통화를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역 공동체들 스스로가 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헬프리히
핵심은 우리가 사회보장을 탈상품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토지를 탈상품화하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교환의 수단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무수한 대안통화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심지어는 돈 자체를 탈상품화하면서 시작해봅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행의 작은 지대들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 지대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지대들을 죄다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욕구에 토대를 두는, ‘동료’가 관리하는 사회보장을 개념화하기 위한 조건들이 그렇게 마련됩니다. 사람들의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주거지를 일례로 들어보죠.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주거지 소유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Community Land Trusts)(([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924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재산 모델들을 마련하는 것이며 공동체들이 주택 뿐 아니라 주택이 서 있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부터의 구조적인 독립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현재 위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조직화한,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획들이 재난이 닥치면 더 복원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기획들은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인 흐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볼리어
시민권 운동 출신의 유명한 선거투표권 활동가인 헤이머(Fannie Lou Hamer)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유명합니다. 지역경제를 지배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흑인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구축하기 위한 <자유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 Co-operative)을 시작했습니다.

식량독립을 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즉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이자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도와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새로이 시작하기에 훌륭한 장소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이행도시 윤리’(Transition Towns Ethic)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치적으로 추동되고 국가에 관련된 쟁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데올로기들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음식•거주지•공적인 삶—이 핵심입니다.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것을 ‘소속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상호간의 지원과 실질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는, 양육되는 정체성이죠.

 

더흐로트
사회보장의 미래가 탈중심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이 사회보장을 지역별 계획들로 조직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헬프리히
어떻게 중앙집중주의자들이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든이 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제도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입니다.” 글쎄요, 아닙니다. 미국의 제도는 강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두 정당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제시해보자면, 우리의 도시들, 지방들, 나라들이 50.1%에 기반을 두고 있는 권한을 가진 정치 정당들의 경쟁논리에 따라서 통치되는 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볼리어
맞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중심화가 한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도시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동일합니다. 실질적인 대안권력구조가 생겨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 정당들을 없애거나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장소에 기반을 두는 정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프리히
사회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사유하는 것은 토지와 주거지의 선분배를 시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면 대안적인 정치문화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볼리어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참여•소속•기여•커머닝의 긍정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와 공통적인 것의 화폐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mebly의 15장 2절, 3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A three-faced Dionysus to govern the common

 

군주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삶의 조직화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군주는 왕좌 위에 앉아있는 존재일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지배의 구조를 변형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은 후 새로운 사회조직 형태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중은 새로운 군주를 민주적 구조로서 구성해야 한다.

 

각자 가능성과 함정을 지닌, 세 개의 경로가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한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한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이 경로들을 교직하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세 얼굴을 가진 디오니소스’(“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른다.

 

[① 엑서더스]

이 전략은 유토피아 공동체 전략의 계승자이다. 기존의 사회관계의 외부에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삶형태,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들과 푸리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에 이르는 이론적 탐구들의 풍요로운 역사가 대안적 외부를 창출하는 힘을 입증한다.

 

오늘날 가장 영감을 주는 엑서더스 실천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의 형태를 띤다. 비민주적 조직형태를 통해서 민주적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자기패배적이라는 논리. 활동가들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운동 내부에 창출된 축소된 사회는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미리 구현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실적 가능성과 바람직함의 입증으로서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예시적 정치가 특히 번성한 곳은 신좌파 여러 부문들, 특히 페미니즘과 학생운동에서이다. 여기서 참여민주주의는 운동 자체의 내적 조직화의 으뜸가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970년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점령된 사회센터들에서는 자율적 거버넌스 구조와 지배적 사회 내부에서 그 사회에 반하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실험이 행해졌다. 예시정치는 최근에 들어와서 확장되었다. 2011-2013년에 타흐리르 광장, 뿌에르타 델 쏠 광장에서 주코티 공원 및 게지 공원에 이르는 다양한 점령 캠프들은 무상 도서관, 음식, 의료서비스의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대규모로 민주적 의사결정의 실험을 한 감격적인 사례들이다. 예시적 정치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관한 광범한 사회적 논쟁을 개시하는 능력이었다.

 

 

예시적 정치의 단점은 그 내적 동학과 사회적 효과에서 명백하다. 지배적인 사회의 일부이면서 예시적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힘들다.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회주의 사회와 같다. 공동체에서 남과 다르게 살라는 것은 대체로 도덕의 수준에서 작동하며 지배적인 사회에서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을 거스르기도 한다. 그 결과 도덕주의와 내적 치안이 그런 활동가적 공동체에서의 삶의 경험을 망치는 경우가 잦다.

 

더 중요한 것은 예시적 경험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생성하고 그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큰 성취이이지만, 예시적 경험은 그 자체로는 지배적 제도들에 관여할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지배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생성하는 것에 크게 못 미침은 말할 것도 없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기존의 제도들에 관여하여 안으로부터 개혁하기. 적대적 개혁주의는 단지 현 체제의 병폐를 보정하고 그 피해를 개선하는 데 복무하는 협조적 개혁주의와는 다르다. 적대적 개혁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조준한다.

 

두치케(Rudi Dutschke)의 어구 “제도들을 거쳐 가는 대장정” (Der lange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은 마오의 항일 유격전 이미지를 지배 질서에 대한 내부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기존의 제도 내부에서의 유격전이다. 또한 두치케의 어구는 그람시의 진지전의 핵심— 문화, 사상의 영역 그리고 현재의 권력구조의 영역에서의 정치투쟁 수행—을 표현한다. 두치케에게 목표는 운동의 자율을, 그 전략적 힘을 긍정하고 운동이 대항권력의 구축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도 그람시를 해석하여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를 제안하지만 반대경로를 생각한다. 운동을 당의 명령에 종속시킨다.

 

적대적 개혁주의와 사민주의적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강한 개혁주의와 약한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두치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최고이고 똘리아띠의 경우에는 최소이다.

 

선거과정이 적대적 개혁주의의 장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뽑아준 사람이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최근에 오바마, 꼴라우(Ada Colau) 등 여러 진보적 정치가들이 실질적 변화를 약속하며 선출되었고 이들의 성공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의 타성이 변화를 위한 정치적 기획보다 더 강력했던 경우도 있고 반면에 실질적인 변화들이 성취된 경우도 있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또 다른 장은, 소유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적 위계의 힘을 상쇄시키고 가난과 배제를 완화시키는 법 기획들이다. 빈자를 위한 주택 기획, 노동자의 권리 등.

 

이 이외에도 적대적 개혁주의가 발휘될 수 있는 다른 법적·제도적 장들이 있다 — 환경 문제, 성폭력 방지, 노동자권리 긍정, 이주민 돕기 등등. 적대적 개혁주의를 가늠하는 기준은 실행되는 개혁이 기존의 체제를 뒷받침하는가 아니면 권력구조의 실질적 변형을 가동시키는가이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일부 기획들이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길게 보면 의미심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대장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백하다. 대장정은 종종 기존의 제도들 속에서 길을 잃으며 바라는 사회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도를 바꾸겠다고 제도 속에 들어가지만, 제도가 당신을 바꾸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 개혁주의의 기획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를 부각할 뿐이다.

 

[③ 헤게모니 잡기]

예시적 전략과 달리 이 전략은 지배적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분리된 소규모 공동체들의 구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사회 전체를 직접 변형하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제도들은 행동의 장이 아니라 ‘해체적’(destituent) 사업의 대상이다. 기존의 제도를 전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이 세 경로들 각각은 상이한 시간성을 함축한다.

①은 사회변형을 미래—소규모가 대규모로 달성되는 날— 로 미룬다.

②는 점진적 변화라는 느린 시간성을 산다. “한 번에 벽돌 하나씩”

③은 ‘사건의 시간성’(the temporality of event)에서 살며 사회적 수준에서의 신속한 변형을 가져온다.

 

③에도 분명 많은 함정들이 있다.

1) 새 체제는 낡은 체제의 주된 특징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③이 현재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③은 권력을 변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분쇄하는 것”(smashing the state)이 필요하다. 우리는 비국가적인 공적 힘을 창출해야 한다.

2) ③은 (가령 일국 수준에서는) 환경에 의해 극히 제한된다. 전지구적 자본의 압박, 주도적 국민국가들의 반응, 다양한 비국가적 외부세력들이 가하는 제한 등.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경험, 지난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이 이 제한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해도 결국 이루는 것은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1) 첫 응답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이 세 전략들을 (잠재적으로) 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점만 달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변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해서든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권력을 잡는 것은 자율적이고 예시적인 실천들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공간을 여는 데 복무하고, 장기적으로 계속될 제도들의 변형을 천천히 양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엑서더스의 실천들도 다른 두 기획들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방식들을 발견해야 한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연계를 통해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기존의 지배체제 내에서 그 체제에 거슬러 권력의 이원주의(a dualism of power, 두 정치적 힘의 공존)를 실질적으로 창조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리얼리즘(현실주의)이다.

 

2) 둘째 응답 (더 심층적이다)

시야를 정치에서 사회적 지형으로 확대한다. 우리[네그리·하트]는 이 책에서 줄곧 정치를 자율적인 지형으로 보는 것은 재난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퍼즐은 사회적 관계의 변형을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사회적 삶에의 평등한 참여를 방지하는 주된 메커니즘은 바로 사적 소유의 지배이다. 공통적인 것의 수립은 사적 소유의 장벽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창출·제도화한다. 사회적 지형으로 초점을 확대하면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는 광범하게 퍼진 능력을 포착하게 된다. 다중의 기업가 정신/활동이 이 확대된 능력의 한 얼굴이다. 생산하는 삶을 조직하고 협동의 미래 형태들을 계획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능력이 바로 필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그리고 삶정치적 맥락에서 사회적 조직화는 항상 흘러넘쳐서 정치적 조직화로 확대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여기서 우리가 서술하는 경로와 같은 것을 규정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순전한 정치적 범주(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번역)도 아니고 순전한 사회학적 범주(헤겔의 ‘시민 사회’)도 아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당 측면(더 정확하게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에 살을 부여하는 구성적 힘)과 사회를 변형하는 사회 투쟁의 측면을 다 포함한다. 그람시가 그의 글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합리화가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과정에 상응하여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출할 필요를 낳았다고 썼을 때, 우리는 이로부터 이 새로운 유형 즉 포디즘 노동자는 경제적 위기와 기술의 변형에서 그가 배운 것을 되돌려 위기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저항과 투쟁의 존재론적 축적은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상에 접근하여 ‘일반지성’의 패러다임을 해석하게 될수록 혁명적 실천에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 중첩, 적대적 개혁과 헤게모니 잡기의 이 중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다중적 민주주의의 구축이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상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2장에서 옹호한) 전략과 전술의 전도—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운동의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가능성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다중의 전략능력의 수립이다. 전략능력이란 억압의 구조들을 샅샅이 해석하고 효과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신중하게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직화하는 능력이다. 다중은 정치적 기업가가 될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지도부의 행동의 유용성과 필요성은 특히 긴급한 상황에서는 분명하다. 수립되어야 할 것은 지도부가 자신들이 환영받는 시간 이상을 남아있지 않게 할 방비책이다. 다중의 전략적 힘이 유일한 보증자이다.

 

 

A Hermes to forge the coin of the common

 

금융의 지배 하에서 화폐가 발휘하는 힘과 폭력의 비판자들 다수는 화폐의 힘을 제한하는 것을 주된 과제라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부유층의 금융권력을 제한하고 은행의 권력을 감소시키고 심지어는 화폐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모든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첫 걸음일 뿐이다.

 

화폐를 폐지하자는 더 발본적인 주장은 자본주의적 화폐를 화폐 자체와 혼동하고 있다. 화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11장에서 말했듯이, 화폐는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한다. 화폐는 강력한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다른 테크놀로지의 경우처럼 문제는 화폐가 아니라 그것이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에서의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가 창출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분명 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만큼이나 일반적이고 강력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한다. 어떻게 우리는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화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화폐는 재산에 대한 익명화된 권리증서(자본주의적 화폐)가 되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서의 다원적이고 특이한 사회적 유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폐의 창출은 사유재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화폐정책 및 사회정책의 구체적 전환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화폐(a money of the common)를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1) 온건한 제안은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for the people”)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889 참조)) 전통적으로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여러 수단을 써서 화폐공급을 증가시켜서 소비와 생산을 자극하고자 하는 화폐정책이다. 프리드먼이 ‘헬리콥터가 뿌리는 돈’이라고 부른 이 돈은 소비의 욕구에 따라 분배되지만 결국 재계로 돌아간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나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같은 몇몇 급진적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목적으로 화폐를 공급하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이다. 화폐를 찍어내되 민중에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경우에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자율적 기획들과 실험들(규모가 작든 크든)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은 진정한 대항권력의 구축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운영하는 유용한 플랫폼을 창출하지만, 작은 걸음일 뿐이다.

 

2)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우리를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소득의 일차적 원천으로 만든다면 소득을 임금노동으로부터 분리하고 공유된 부를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협력적 회로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주조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베르첼로네는 자본주의적 명령으로부터의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것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라고 부른다. 기본소득이 사회적 삶을 생산·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약화시키면 부와 사유재산의 관계가 무너지고 공유된 부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임금체제 외부에 사회적 협동의 새로운 형태들을 열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적 삶을 상상하기를 촉진한다.

위크스(Kathi Weeks)는 기본소득의 반(反)금욕적 효과를 강조한다. 검소, 저축, 양보, 희생의 윤리를 설교하기보다 욕구와 욕망의 확장을 촉진하고 노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은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도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적 화폐를 변형하고 사유재산을 제거하며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그 방향을 향한 강한 몸짓이다.

 

이런 정책 제안들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 쪽으로 끌고 가려면 11장에서 이루어진 화폐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 이는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관계들을 역동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욕구를 해석하고(스피노자라면 이를 윤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향에 대한 분석을 그것을 가로지르고 변조시키는 힘들에 대한 인식과 결합시키는 화폐의 정치를 구축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포착해 낼 것은 ① 금융 자본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의 화폐적 형태 ② 이 생산양식의 발전에 상응하는 (상응해야 하는) 소득의 다양한 형태들 ③ 각 화폐적 형태에 상응하는 “미덕의 체제”이다. 우리의 문제틀은 산업자본의 명령에서 금융자본의 명령으로의 이행을 포착하면서 사유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추출 양태들은 사회적 협동에 의존한다. 잉여 가치는 사회적 가치의 추출을 조직하는 금융 테크놀로지를 통해 전유된다. 어떤 면에서는 “총자본”(collective capital) 자신이 역설적이게도 사유재산의 해체와 공통적인 것의 인정을 현재의 생산양식의 토대로 인식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투쟁의 직접적 목표는 불평등을 줄이고 긴축의 체제와 단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는 특히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본의 권력에 저항하는 다중에게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해체중인 정치적 구성과 새로이 출현하는 기술적 구성―이 일종의 공위상태를 이루며 공존하기 때문이다. 노조 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통들을 결합하는 사회 파업(Social strike)이 이 지형에서 투쟁의 특권적 형태이다. 궁극적으로 긴축과 불평등의 거부는 협동의 화폐(a money of cooperation)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적 협동의 생산성에 상응하는 소득―임금의 요소와 복지의 요소를 모두 가진 소득―의 형태들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한다. 협동의 화폐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넘어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연합이 ‘정치적 소득’―자본주의적 발전 및 계급관계들과 양립 불가능하게 되는 소득―을 부과할 수 있는 지형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긍정되는 미덕은 사회적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의 투쟁의 관점에서는 평등이다. ‘모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서’(맑스의 슬로건)는 모두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하고 배치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공통의 생산은 또한 다중적이기 때문에 즉 일단의 특이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력의 재생산은 대중화(massification)의 형태로는 성취될 수 없다. 사회적 차이들과 그 혁신의 힘이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에 필수적이 되었다. 따라서 협동의 화폐에 특이화의 화폐(a money of singularization) 및 특이화의 소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권리를 지원하며 아래로부터의 다원적 표현을 뒷받침한다. ‘모두로부터는 그 능력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abilities)는 따라서 특이성의 덕을 긍정하는 ‘모두로부터는 그 차이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로 옮길 수 있다. 특이화의 소득은 사회적 생산자들과 재생산자들의 자기자치화를 증진해야 할 것이다.

 

신케인즈적 거버넌스 구조와 ‘위로부터의’ 유효수요 창출을 다시 제안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열을 향하는 사회적 힘들을 주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지형에서 우리는 스트라(Pascal Nicolas-Le Strat)가 ‘공통적인 것의 노동’(le travaille du commun)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선(front)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서비스의 협동적·민주적 플랫폼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역 공동체들을 위한 실험적 통화들을 창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출현하는 다중이 가진, 사회적 관계를 자율적으로 창조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적 능력이다. 자기가치화는 정치적 자율과 자치의 능력을 함축한다.

 

근대 부르주아 체제는 사적 소유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그 관계를 보장하는 반면에 자율적인 사회적 생산의 체제는 공통적인 것에 토대를 두며 공통적인 것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6장에서 말한 심연 너머로의 도약, 사적 소유의 지배 너머로의 도약이다.

 

화폐의 첫 두 형상(협동의 화폐와 특이화의 화폐)은 사회적 생산과 일반 지성의 시대에 (새로 출현하는) 기업가적 다중이 가진 자질과 능력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a money of social and planetary investment)를 필요로 한다. 점증하는 자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육·연구·수송·건강·통신을 통해 사회의 확대를 보장할 화폐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들 및 생태계들에 대한 돌봄의 관계들을 통해 삶을 보존할 화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문제는 소득이 아니라 사회 자원을 미래를 위한 민주적 계획에 바치는 것이다. 자본은 지구에서의 사회적 삶의 번영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계획을 짤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국가도 더 나은 점이 없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실패했다. 사려의 미덕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유일한 경로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화폐가 제도화하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세 개의 국면―① 시초 축적 ②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③ 사회적 생산―으로 나누어 스케치했다.((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81의 맨 뒤에 달린 부록 참조)) 공통적인 것의 화폐가 산출할 잠재적 사회적 관계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의 표에 넷째 단을 추가하여 공통적인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시간성, 가치형태들, 거버넌스 구조 등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일 듯하다.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비자본주의적 화폐이기 때문에, 또한 그 사회적 관계가 비소유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실질적 역사적 파열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평등, 차이, 사려를 증진하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제안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인가? 협동, 특이화,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대 사회의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향을 인식하는 데, 그 안에 담겨있는 욕망을 조명하는 데, 그런 다음에는 미래를 현재로 가지고 오는 데 있다. 결국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관계―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이 관계를 수립하는 데 복무한다―가 실제로 온전하게 구현될 때에만 대세가 될 것이다.




가이 스탠딩의 『자본주의의 부패』



나는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이전 저작을 읽은 바도 있고 또 그는 노동조직가이자 경제 분야에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역할에 대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므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실망스럽지 않았다.

서두에서 스탠딩은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을 천명하며 경제정책들이 자유시장을 확장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껏 창출된 가장 자유가 없는 시장체계를 갖고 있다. (···)

경쟁을 차단하는 특허권이 20년간 독점수입을 보장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TV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자유시장 체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작권 규정에 따라 저작자 사후 70년 동안 저작자에게 보장된 소득을 지급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들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보조금을 받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고 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커먼즈를 특전을 누리는 개인이나 회사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상황에서, 그리고 우버•태스크래빗 같은 기업들이 규제받지 않는 노동 브로커들로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서 이윤을 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정부들은 자유 시장을 부정하는 이런 것들을 막고자 노력하기는커녕 그것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규정들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지대(rent)는 현대 사회에서 중세 지주제도의 소멸과 함께 감소하기보다 오히려 이전보다 금권주의적 소득에서 더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주택과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천연과 인공의 자산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산소득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자산소득자들’이 전대미문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자산소득자들은 실제로 희소하거나 인위적으로 희소해진 자산의 소유, 점유나 통제로부터 소득을 끌어낸다. 토지, 부동산, 광물 채굴이나 금융 투자로부터 발생하는 자산소득이 가장 흔하지만 다른 원천들 또한 증가했다. ① 대출자(기관)들이 부채 이자에서 얻는 소득, ② ‘지적 재산’(예를 들어, 특허권, 저작권, 브랜드와 상표)의 소유권에서 발생하는 소득, ③ 투자에 대한 자본 이득, ④ ‘평균 이상의’ 회사 수익 (회사가 높은 가격을 부과하거나 조건을 좌우할 수 있는 우세한 시장지위를 지닐 경우), ⑤ 정부 보조금으로 나오는 소득 그리고 ⑥제3자 거래에서 파생하는 금융 및 다른 중개기관들의 소득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책통(通)들이 ‘자유무역’이라고 높이 평가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경제는 ‘자유시장’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엘리트들이 그들의 자산소득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 및 규제의 전지구적 틀”이다. 오늘날 서구 기업 이윤의 31%는, 90년대에 확립된 신자유주의 협정체제하에서 시행되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같은 인위적인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자산소득이 이윤이 되는 산업들에서 추출된 것인데, 이 비율이 1999년에는 17%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애플사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덕택에) 아이폰과 관련된 총수익이 40%에 달한다. 신약 연구의 2/3가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데도 특허권은 미국의 연간 약품 가격을 1400억 달러 증가시킨다.

그리고 스탠딩은 이른바 ‘지적 재산’을 정당화하는 선전 신화를 간단하게 처리한다. 특허권의 실제 주된 목적은 혁신에 대한 보상보다 다른 사람들이 혁신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허권에 영향을 받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제품들 대부분이 세금에서 나온 거액의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개발되고 나서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종획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특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이디어의 인위적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자산소득과 함께 국가는 토지와 자연자원 커먼즈의 종획을 통하여 유산계급에게 막대한 지대(자산소득)를 제공한다. 이러한 커먼즈 종획은 초기 근대 유럽에서의 소작농 토지의 종획,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이주민 사회에서의 (주인이 없거나 토착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의 독점, 라틴아메리카의 대농장 시스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권력에 의한 소작농 토지권의 무효화 그리고 석유와 광물 자원의 약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형태의 약탈당한 토지와 자원들에 대한 재산권이 신자유주의하에서는 줄곧 서구 자본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의 한 가지 주요한 기능은 정당한 소유자들이 반환요구를 시도할 경우 그에 맞서서—‘사유재산권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그러한 재산권을 집행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희소성을 통한 자산소득의 원천들 이외에 세금에서 나온 보조금도 자산소득자 계층에게 또 다른 소득 원천이다. 스탠딩은 통상적인 것들, 이를 테면 구제금융, 특정 산업에 대한 기업지원정책 및 복지국가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사회화함으로써 축소된 임금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국가가 자본 전체의 주요 운영비를 사회화하는 방식을 간과한다. (제임스 오코너는 이 방식을 『국가의 재정 위기』The Fiscal Crisis of the State에서 논의한 바 있다.)

1980년대 이래 기업 이윤이 실질 달러로 세 배 증가했고 임금은 정체되었으며 탈산업화로 인해 노동인구에서 프레카리아트의 비율이 급상승했다. 프레카리아트화 추세는 긱(gig) 경제의 부상과 함께 지난 단 몇 년 사이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대략 1980년대부터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연동관계가 사라졌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붕괴의 원인이며 높은 공공 부채가 성장을 저해한다고 허위로 주장을 하며 2008년 이후로 긴축재정이라는 선전노선을 밀어붙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이 내러티브를 공격할 때 그의 의견은 꽤 정확하다. 사실 신자유주의 자체가 붕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게 살았”던 것은, 자신들의 자산이 80년대부터 정체되었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비자 부채나 주택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에 점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학력 인플레이션과 등록금 비용의—대체로 행정직에 들어가는 임금에 의해 유발되는—폭발적 증가가 병행됨으로써 엄청난 학자금 부채가 발생한다.

자산소득자 엘리트들의 소득이 급등하는 데 반해 노동계급의 구매력이 부진하다는 사실은, 과잉 축적과 과도한 투자라는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위기가 수익성이 있는 배출구 없이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유산계급이 파이어 경제(FIRE economy)(([옮긴이] 금융(Finance), 보험(Insurance), 부동산(Real Estate) 부문에 주로 기반을 둔 경제를 말한다.))에서 버블에 점점 더 의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29년에 붕괴를 유발했던 바로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공공 부채는 실제로 경제를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과잉 자본과 과소 소비로부터 생겨날 붕괴를 지연시킨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임금이 정체된 대중의 지출 부족분의 일부를 정부의 재정으로 메꾼 데서 온다. 그리고 정부 부채는 수익률을 보장하는 정부채권 형태로 몇 조 달러의 투자 자본을 흡수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달러는 과잉 공급된 자본의 일부가 되어 민간경제에서 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낮출 것이다. 정부 부채는 농산물 가격 지원 제도(a farm price support system)(([옮긴이] 1933년 대공황으로 농부들이 손해를 보자 미국정부는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보상을 결정한 AAA(Agricultural Adjustment Act 농사조정법)를 제정했다.))를 자본에 적용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긴축재정 선전기계는 금융 엘리트들이 투기했다가 날려버린 자산의 액면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더 낮은 임금과 대폭 줄인 사회적인 안전망을 활용하는 것이 붕괴를 다루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대중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스탠딩은 뉴딜이나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다른 책들에서 보여준 비판, 즉 사회민주주의에 수반되는 ‘노동자주의’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한다. 노동자주의는 룸펜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켜서 전일제 임금을 받는 산업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을 주고, 사회적 경제를 훼손시키면서 산업을 치켜세운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옮긴이]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 폴라니는 시장이 교환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즉 경제를 사회의 일부분으로 본다. 데이빗 볼리어는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에서 이 책의 내용을 짧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search/폴라니 참조))을 뒷받침했던 모델은 모든 형태의 일(work)이 아니라 ‘노동’(labour)을 중추적으로 만들었다. 사회주의자들∙코뮤니스트들∙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두 ‘노동자주의’를 지지했다. 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질 임금이 상승했고, 일련의 ‘분담식’ 비임금 혜택들이 증가했으며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사회보장을 받을 자격을 획득했다. 이 모델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버려졌다. 후자가 소수이면서 자산 조사에 기초한 사회안전망 서비스의 지원을 받는 한, 시스템은 그런대로 작동했다. 그 소수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속담 속의 지렁이가 꿈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주의의 핵심은 노동권—더 정확하게는 자격(entitlements)—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대개는 남자들)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이전에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진보적인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이었으며, 노동시장 외부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다른 형태의 노동(예를 들어 육아노동과 공동체에서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정규 유급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많이 할수록 특권을 많이 가지고 노동을 적게 할수록 특권을 적게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확산시켰다···. 노동자주의는 또한 복지국가의 역기능적 측면을 초래했다. 정규직에게 노동에 기반을 둔 보장을 해주기 위하여 임금에서 비임금 혜택(회사연금•유급휴가•출산휴가•질병수당 등)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것이 안정적인 정규직에 고용된 사람들과 안정성이 없는 임시적인 직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거나 유급노동보다 무보수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의 형태를 강화했다.

스탠딩은 이른바 ‘공유 경제’는 이런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버 및 그와 유사한 플랫폼들은 운전자들이 소유한 물리적 자본에 대한 임대료를 징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디맨드(on-demand) 경제는 자본의 진언(眞言, mantra)을 역전시킨다. 자본가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대신에 작업자들(tasker) 즉 프레카리아트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플랫폼들은 특허권 및 기타 형태의 지적 재산권의 보호를 받는 기술적인 장치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서 그리고 태스킹(tasking)과 무보수 노동을 통한 노동 착취로 이윤을 최대화한다.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소유한 ‘독립 계약자들’을 소개하는 테크놀로지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라는 노동 브로커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은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자산소득자들이다.

예상대로 ‘프레카리아트’의 최초 이론가인 스탠딩은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적 주체’라고 부른 바로 그 계층으로 프레카리아트를 제시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전통적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스탠딩이 이전 책들에서 주장한 것처럼 급진적인 정치에 대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들만이 그 규모, 성장과 구조화된 불리한 조건의 측면에서 자산소득자 자본주의와 그 부패에 대한 진보적인 대응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최하층 계급인 룸펜-프레카리아트는 (2011년에 그랬듯이 그 일부가 항의운동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행동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구걸하는 존재로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란은 프레카리아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승산이 있으려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져야 한다. ①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중심으로 한 일체감, ② 기존의 사회구조의 결점•불평등•지속불가능성에 대한 지속가능한 이해, ③ 실행할 수 있는 목표에 대한 합리적으로 분명한 비전이 그것이다.

자산소득자 경제의 부정적인 분배효과를 제한하기 위해서 임금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 전체가 지대와 이윤에 누적되는 소득의 일부를 받는 새로운 분배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임금 자체만으로는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에는 임금협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투쟁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임금이 계속해서 정체되어 있을 동안에 자산소득을 제한하고 공유하며 이윤을 공유할 혁신적인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은 추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낳으면서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스탠딩은 한 가지 중요한 저항 수단으로서 오큐파이와 M15 운동을 모델로 한 ‘사회적 파업’—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장기간 동안 거리에 나서는 것—을 제의한다.

그는 해야 할 과제들의 상세한 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일일이 열거한다.

· 공적 지출로 개발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특허 시스템 폐지, 그리고 다른 특허권의 경우 의무적인 라이선싱과 아울러 시행되는 기간을 철저하게 축소하기

· 모든 기업 보조금의 폐지

· 정치 자금 없애기

· 의무적인 고용주 보험으로 긱 경제 규제

· 공공안전이 논거가 되는 직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문 직종의 경우 법적 라이선싱 체제를 집단의 자율적 거버넌스로 교체하기

· 합리적인 온콜페이(on-call pay)(([옮긴이] 온콜페이(on-call pay)는 정규 근무 시간 이후에 호출이 있을 경우 고용인이 언제든 바로 호출에 응할 수 있도록 대기하면서 보낸 시간에 대해 받는 보수를 말한다.))

· 사회적 배당금이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국부펀드를 창출하기 위하여 자산소득과 천연 자원 추출에 세금을 부과해서 발생하는 세입을 활용하기

그의 방침들 가운데 긱 경제를 규제하자는 제안은 내가 볼 때 가장 완고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에 나는 국가의 주요한 개입에서 비롯되는 특권 남용에 규제가 이차적인 제약을 가한다면 (예를 들면 망중립성(([옮긴이] 망중립성이란 인터넷망 사업자와 정부가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칭한다. 즉 망중립성이 성립하려면 비차별, 상호접속, 접근성이라는 3가지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규제를 자유를 위한 순이익으로 보는 개방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우버나 에어앤비 같은 가짜 ‘공유 경제’ 플랫폼을 가능케 하는—즉 사유(私有)에 기반을 둔, 월드가든형 앱들(walled garden apps)(([옮긴이] walled garden은 공개적인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 사적으로 통제된 환경에서 존재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말한다. walled garden에 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17 참조))을 규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중단하는—주된 국가 개입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긱 경제 노동자로 이루어진 급진적인 노동조합의 설립을 유도하고 해당 앱들을 탈옥하여 기존의 자본주의적 긱 경제를 진정으로 협력적인/P2P 방식의 대안 생태계들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다른 중요한 혁신은 프리랜서와 긱 경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부활된 길드 시스템을 통해서 조직되는 협력적인/P2P 방식의 사회 안전망들이다.

나는 과도기적인 방안들로서 지대나 부정적인 외부효과들(탄소세)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사회적 신용/시민배당금/기본소득 제안에 일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독점과 인위적인 희소성을 강제하고 세금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한 인위적인 희소성에서 파생된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착취의 순전한 감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생존소득(subsistence income)으로써 (프랜시스 피번Frances Piven과 리차드 클로워드Richard Cloward의 말대로) 노동을 규제하는(“regulating the poor”, “regulating the labor”) 실제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복지 국가로 전환하는 것 또한 적절한 방향으로의 조치이다.

기본소득이 실현되려면—적어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소득에 매기는 세금으로 재원을 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자산소득자 계급의 재산과 관련하여 사회적 형평성을 창출해야 한다.

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유유형의 한 사례로서 (스탠딩의 나머지 저작과 더불어) 이 책을 추천한다. 좌파가 새로운 경제에 적합하게 되려면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공룡이 된 구좌파 조직과 정책 모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유형의 사유이다.

 




공통적인 것, 민주주의 그리고 기본소득

* 다음은 7월 8일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완결된 글은 아니고 단상 형태로 되어있습니다. 실제 발표는 (시간이 15분 정도밖에 없어서) 앞의 그림 한 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서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그 당시 들으러 오신 분들은 이 발표문을 통해 누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한글본을 먼저 작성하고 나중에 영어본을 작성했는데, 영어본은 정확히 일대일 대응되는 번역이 아니라 내용상으로 조금 더 다듬어진 번역입니다. 그래서 영어본을 앞에 놓습니다. 한글본은 손을 더 보는 게 좋은데, 이미 잔치가 끝나니 손이 안 가네요;;;; 한글본은 주석 위치가 미주로 되어있는데,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주석을 반드시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완결된 논문이라면 본문에서 상세히 다루었을 대목들을 주석에 자료처럼 배치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대회-정남영-발표문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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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지구대회-정남영-발표문한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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