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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에서 자본-노동 관계


  • 저자  :  Antonio Negri, Carlo Vercellone
  • 원문 : “The Capital-Labour Relation in Cognitive Capitalism”(2007)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Carlo_Vercellone/publication/23530684_Il_rapporto_capitalelavoro_nel_capitalismo_cognitivo/links/55f2d64808ae1d9803921c27/Il-rapporto-capitale-lavoro-nel-capitalismo-cognitivo.pdf?origin=publication_detail )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0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가운데 자본-노동 관계는 발본적인 변형을 겪고 있다. 이 변형은 생산양식, 계급구성, 소득의 임금, 지대, 이윤으로 분배의 형태들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①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이르는 과정의 기원과 역사적 의미를 상기해보고 ② 현재의 노동을 자본-노동 관계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형론적 요소들을 분석한 다음 ③ 지대(자산소득)의 점증하는 중심적 역할이 왜 전통적인 적대, 즉 이윤과 임금 사이의 대립에 토대를 둔 적대의 조건들을 낡게 만드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대중노동자에서 인지노동의 헤게모니로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변형은 그람시가 1930년대에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서술했던 방향과는 반대로, 그러나 그에 비견할 중요성을 가지고 일어나고 있다. 역사적 전환점의 기원과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후의 시기에 포디즘적 성장이 산업자본주의의 발전 논리의 성취였음을 기억해야 하는데, 산업자본주의의 다음의 네 가지 주된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① 지식 형태들의 사회적 분극화와 지적 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② 고정자본 및 관리조직화에 함입된 노하우들의 헤게모니 ③ 테일러주의 표준에 종속된 물질 노동의 중심성 ④ 소유와 기술 발전의 주된 형태로서의 고정자본의 전략적 역할

포디즘의 위기와 함께 이 경향들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출발점은 대중노동자[포디즘 시대의 노동자 유형을 지칭하는 말이다. 어셈블리라인 앞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된다.―정리자]가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의 토대를 부수고 복지국가의 보장과 서비스들의 엄청난 확대를 이룬 것이었다. 이는 포디즘과 양립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그 결과 임금관계에 대한 화폐적 제한이 약화되고 생산의 지적 활력의 집단적 전유라는 강력한 과정이 진행되었다.

이런 적대적 동학을 통해 대중노동자는 포디즘 모델의 구조적 위기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노동의 존재론적 변형의 요소들을, 즉 공통적인 것의 요소들을 자본의 심장부에 구축했다. 노동계급은 일반지성의 집단적 노동자라는 형상을 구축하고 지식의 추동적 역할에 기반을 둔 경제의 구조들과 주체적 조건들을 구축했다. 그 결과로 노동의 인지적 차원과 확산된 지적 능력의 구축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노동 관계에서의 새로운 역사적 국면이 열렸다.

이 새로운 자본주의의 발생과 성격을 적절히 특징지으려면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①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출현의 핵심 추동자는 산 노동의 힘에 있다. 지식에 기반을 둔 경제의 형성은 인지자본주의의 발생에 선행하고 그것과 (논리적 관점에서나 역사적 관점에서나) 대립된다. 사실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이 지식의 생산의 집단적 조건들을 기생적인 방식으로 흡수하고 종속시키기 위해 재구조화를 한 결과이다. 이 과정에서 자본은 일반지성의 사회에 각인된 해방의 잠재력을 질식시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지칭하는 것지적·비물질적 노동의 생산적 가치가 우세해지고 자본의 가치화의 중심축이 지대(자산소득)’를 수단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공통적인 것을 강탈하는 데 있으며 지식이 상품으로 변형되는 축적 체제이다.

② 정보혁명의 이론가들이 설파하는 것과는 반대로, 현재의 노동의 변형을 규정하는 요소는 정보통신테크놀로지(ICT)의 주도적 역할에 기반을 둔 기술 결정론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 이론가들은 두 가지 기본적인 점을 잊고 있다. ㉠ ICT는 살아있는 앎(un sapere vivo)이 없으면 정확하게 기능할 수 없다. 정보취급과정을 제어하는 것은 인간이 획득한 ‘지식(conoscenza)’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는 노동이 없는 자본과 같다. ㉡ 따라서 ICT 혁명의 주된 창조력은 자본이 추동하는 동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적 노동의 사회적 네트워크들의 수립에 있다. 이 네트워크들은 생산의 연계 형태들로서 기업에 대한 대안과 동시에 시장에 대한 대안을 나타낸다.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의 특징들

 

1) 산 노동과 죽은 노동 사이의, 그리고 공장과 사회 사이의 관계의 전도

인간에게 구현되는 무형의 요소가 자본의 성장에서 주요한 비중을 차지. 확산된 지적 능력

이는 다시 네 개의 주된 함축을 가진다.

㉠ OECD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바와 달리, 연구개발 실험실들이 지식 기반 경제의 추동부문인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들의 인간들을 위한 집단적 생산에 상응하며, 이 생산은 전통적으로 북지국가의 공통의 제도들(건강, 교육, 공적 및 대학연구 등)에 의해서 발현된다. OECD경제학자들이 이 제도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킬 때 우리는 이 제도들이 사유화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러한 은폐는 삶정치적 통제와 복지제도들의 상업적 식민화가 인지자본에서 하는 역할과 연관이 있다. 건강, 교육, 훈련 및 문화는 생산의 점증하는 부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정도로 삶의 양태를 구성한다. 여기가 바로 공통적인 것의 신자유주의적 사유화와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전유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다.

㉡ 예전에 불변자본이 수행했던 본질적 기능들의 일부를 이제 노동이 수행한다(생산의 조직화 수준에서 그리고 경쟁력과 지식향상에서 주된 요인으로서).

㉢ 노동력의 형성과 재생산의 조건들이 이제는 직접적으로 생산적이다. 따라서 오늘날 ‘나라의 부’의 원천은 점점 더 기업의 벽들보다 더 상류에 있는 협동에 놓여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지식 생산을 엘리트 노동이나 전문가 부문의 특권으로 보는 지식이론이 모든 의미를 잃는다. 오늘날에는 사회 전체가 이 부문에 상응한다. 그래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이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시간들(tempi sociali)의 체계 전체로 확대된다.

㉣ 복지국가가 제공한 이른바 고급 서비스들은 노동의 인지·소통·정동의 차원이 우세하고 새롭고 독창적인 형태의 노동자 자주관리가 발전할 수 있는 활동들에 상응한다. 이러한 자주관리 형태들은 사용자들을 긴밀하게 관여시키는 식으로 서비스들을 공동생산하는 데 기반을 둔다.

 

2) 인지적 분업, 노동계급 그리고 임금관계의 표준적 조건들의 탈안정화

둘째 특징은 테일러주의적 분업에서 인지적 분업으로의 이행이다. 이제는 생산의 효율이 각 과제에 필요한 작업시간의 축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 형태에 의존하고 학습, 혁신, 연속적 변화의 동학에의 적응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노동력의 다가성에 의존한다.

지식생산 및 데이터처리와 연관된 활동들의 확산은 기술 집약도가 낮은 부문을 포함한 모든 경제부문들에서 일어난다. 노동에서의 자율성의 일반화된 진전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이런 경향은 전일적이지는 않다. 어떤 부문에서 몇몇 국면들은 인지원칙들에 따라 조직될 수 있고 다른 국면들은 여전히 테일러주의적 혹은 신테일러주의적 노동조직화에 기반을 둘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적·양적 수준에서 (적어도 OECD 국가들에서는) 자본의 가치창출 과정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인지노동이다. 따라서 인지노동은 필요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메커니즘들과 단절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3) 이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노동의 인지적 차원의 성장이 자본-노동 교환을 지배하는 표준적 원칙들의 이중적 탈안정화를 어떻게 가져오는지를 강조해야 한다.

㉠ 한편으로 노동생산물이 비물질적 형태를 띠는 전문지식 내에서의 활동에서는 이전의 임금계약 조건들이 문제시된다. 이전의 조건이란 노동생산물의 소유에 대한 주장을 임금을 받음과 함께 포기하는 것이다. 연구나 소프트웨어의 생산과 같은 활동에서는 노동이 노동자로부터 분리된 물질적 생산물로 결정(結晶)화되지 않는다. 노동자의 머릿속에 함입된 채로 남아있으며 따라서 노동자의 인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는 회사가 왜 지적 재산권을 변경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압력을 가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전문지식의 형태들을 전유하고 그것들의 순환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 다른 한편, 포디즘적 임금계약 규범을 구조지은 시간과 장소의 제한과 동시성이 오늘날에는 크게 변했다. 산업자본주의의 에너지 패러다임에서는 임금이 인간의 시간의 잘 정의된 일부를 회사가 획득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는 데 대해 지불한 가격이었다. 회사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로부터 최대한 가능한 양의 잉여노동을 끌어내기 위해 이 사들인 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노동자의 전문지식의 강탈과 일의 시간과 기능의 경직된 규정을 통해 노동의 과학적 조직화라는 원칙이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었다.

그러나 노동이 주어진 시간 안에 수행되는 에너지의 단순한 소비로 축소되지 않을 때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노동통제 문제는 새로운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자본은 임금노동자의 지식에 의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지식과 임금노동자의 생애를 가동하고 능동적으로 포괄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이 기업의 목표들을 내화할 할 필요, 결과를 낼 의무, 고객들로부터의 압력은 순전히 불안정성과 연관된 억압과 함께 자본이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발견한 주된 수단이다. 노동 불안정화의 여러 형태들 또한 자본이 총체적인 종속을 부과하고 그로부터 무상으로 이익을 얻어낼 도구이다. 불안정에 대해서는 인정도 하지 않고 그 시간에 상응하는 임금도 주지 않으며 고용계약에 통합되지도 않고 측정될 수도 없다. 이러한 경향은 전통적인 척도에 따라 측정되지 않으며 양화되기 어려운 노동의 성장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포디즘 시기의 생산적 노동시간 개념과 임금 개념을 전반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지식 자본주의에서 불안정성과 노동의 관계는 산업자본주의에서 단편화와 테일러주의의 관계와 같다는 발견을 설명해준다.

바로 같은 논리가 노동력의 탈숙련 과정이 왜 이제는 대대적인 지위 격하―이는 특히 여성들과 젊은 대학졸업자들에게 해당된다―에 자리를 내준 것처럼 보이는지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지위 격하란 보수와 고용의 조건들이 노동활동의 배치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숙련에 비해서 탈가치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3원 공식의 위기 : 지대(자산소득) 경제와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

생산양식에서의 변형은 잉여가치 포획 및 소득분배 형태에서의 파열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두 가지를 연구해야 한다.

1)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임금메커니즘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임금 메커니즘은 소득에의 접근이 낡은 포디즘적 체제 즉 고용의 유무에 달려있어서 생산의 점증하는 사회적 성격과 어긋난다. 이 불일치는 실질임금의 정체와 생활조건의 불안정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시에 (사회적 기여, 시민권과 연결된) 객관적 권리들에 기반을 둔 사회적 혜택의 총량과 그 수혜자의 수가 극적으로 감소했다. 그 결과는 복지국가(Welfare State) 체계에서 워크페어국가(Workfare State) 체계로의 이동이다. 후자에서는 화폐로 환산하면 매우 낮고 강한 조건들에 종속된 복지혜택에 대한 강조가 수혜자들을 비난의 대상으로 만들고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2) 지대(rent)[전통적인 번역어를 따라서 일단 ‘지대’로 옮기지만, 노동이 아니라 자산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 일반을 가리킨다―정리자]의 강력한 귀환.

지대는 잉여가치를 포획하고 공통적인 것을 탈사회화하는 주된 도구이다. 지대의 이러한 귀환의 의미와 핵심 역할은 두 수준에서 이해될 수 있다.

㉠ 생산의 사회적 조직의 수준에서 작용한다. 지대와 이윤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의 적합성이 점점 더 감소한다. 구분의 이러한 흐려짐은 금융의 힘이 기업들의 거버넌스의 기준을 주주들을 위한 가치창출에 따라서만 재형성한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마치 노동에서의 협력의 자동화가 화폐라는 추상적이고 유연하며 이동적인 형태의 자본의 자동화의 평행 운동에 의해 대응되는 듯하다. 이는 자본의 소유와 관리의 점증적 분리를 낳은 역사적 과정과 비교할 때 새로운 질적 도약이다. 인지자본주의 시기에는 베버적 기업가(기업의 소유와 관리 기능을 한 몸에 통합하고 있다)라는 목가적 유형이 확연히 쇠퇴할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갤브레이스(Galbraith)의 테크노스트럭처(technostructure)―혁신의 프로그래밍과 노동의 조직화에서 맡은 역할에서 그 정당성을 가져온다―의 불가역적 위기에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들이 금융 및 투기 기능을 발휘하는 데 그 주된 전문성이 있는 관리에 자리를 내준다. 그 동안에 생산 조직화의 실제적 기능들은 점증적으로 피고용인들에게 할당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개별 회사들의 수준(여기서 우리는 절대지대에 관해 말할 수 있다)에서나 기업과 사회의 관계의 수준에서나 공히 관찰될 수 있다. 사실 회사들의 경쟁력은 내적[회사 내적] 경제들이 아니라 외적 경제들에 점점 더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영토의 인지 자원들로부터 파생되는 생산잉여들을 포획하는 능력에 달려있다. 새로운 역사적 규모에서는 이것이 알프레드 마샬(Alfred Marshall)이 (‘사회의 일반적 전진’에서 나오는) 이 ‘무상의 선물’을 이윤의 정상적 원천으로부터 구분하고자 ‘지대’로 특징지은 것이다. 요컨대, 자본은 사회의 집단적 지식으로부터 마치 그것이 자연의 선물인 양 무상의 혜택을 얻어낸다. 잉여가치의 이 부문이 바로 비옥한 땅의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차별지대에 비견된다.

㉡ 다른 한편, 현재의 지대의 발전은 종획의 역사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생의 바탕에 놓인 순수한 형태들과 기능들에 상응한다. 이런 점에서 지대는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의 산물이다. 이 사유화가 자원의 인공적 희소성의 창출을 통해 생성되는 이윤을 수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재산의 투기로부터 오는 지대와 1980년대 이래 화폐와 공공부채의 사유화 덕분에 금융위기에서 그리고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해체시키는 데서 주된 역할을 한 금융지대를 한데 모으는 공통적 요소이다. 이와 유사한 논리가 (재생산 비용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데도 인위적으로 높은 가격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지적 재산권을 강화하고 지식과 생명체들을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주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가치법칙의 위기와 일반지성 시대 자본과 노동 사이의 적대의 또 하나의 발현을 본다.

임금, 지대, 이윤 사이의 이러한 심대한 변화는 계급구성 및 노동시장을 극히 이중적으로 분할하는 정책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첫째 분할부문은 종종은 노동력 가운데 (기업금융서비스, 특허를 노리는 연구활동,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는 전문적인 법활동 같은) 인지자본주의의 기생적인 활동에 고용되는 더 수입이 좋은 특권화된 소수이다. 이 이른바 코그니타리아트(cognitariat)(‘자본 지대의 마름들’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그 자격과 능력이 명시적으로 인정된다. 더 나아가 이들의 보수에는 금융자본의 배당금과 연금기금과 민영보험들의 체계와 연관된 보호 형태들로부터 오는 이익의 점증하는 몫이 포함된다.

둘째 부문은 그 자격과 숙련이 인정되지 않는 노동력이다. 그래서 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지 노동 범주는 지위 격하라는 무거운 과정을 겪는다. 이 부문은 새로운 인지노동의 분야에서 가장 불안정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저임금 개인 서비스들의 발전과 연관된 새롭게 표준화된 서비스들의 신테일러주의적 기능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노동시장과 소득분배의 이중화는 집단적 복지 서비스들을 해체하고 그 대신 현대 가정의 바탕에 있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상업적 서비스들을 확대한다.

요컨대 여러 가지 형태의 지대(금융 지대, 부동산 지대, 인지 지대, 임금 지대 등)는 소득의 분배와 인구의 사회적 계층분화에서 점점 더 전략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 결과는 이른바 ‘중산층’의 몰락과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로 특징지어지는 ‘모래시계형’ 사회의 창출이다. 물론 가치의 창출이 이제는 임금노동자들의 창조성, 다재다능함, 발명의 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자본이 노동에게 생산조직화에서의 점증하는 자율을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이 단기적으로는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다.) 실제로 이미 자율을 양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율을 다른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 목표들을 달성하는 방법들을 선택하는 수준에 국한시키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는 이 결정하는 힘을 어떻게 자본으로부터 떼어내느냐 하는 것, 공통적인 것의 새로운 제도들을 어떻게 독립적으로 제안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합의 동학 및 노동의 자기조직화를 바탕으로 한 복지제도의 민주적 재정복은 생산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소비의 규범들의 관점에서 보거나 대안적 발전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서 결정적 요소인 듯이 보인다. 인간에 의한, 인간을 통한, 인간의 생산(produzione dell’uomo per e attraverso l’uomo)의 우선성에 기반을 둔 모델이다. 일반지성의 생산에서 주요 고정자본이 인간이 될 때, 그때 우리는 이 개념으로 가치법칙과 3원 공식(threefold formula, 임금-지대-이윤)의 위에 있는 사회적 협력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회적 보장소득의 수립을 위한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무조건적이며 1차적인 것으로 이해된 소득이다. 즉 이는 재분배로서가 아니라 가치 및 부의 생산의 점증하는 집단적 성격의 긍정으로서 이해된 소득이다. 이것이 자본으로부터 지대가 포획하는 가치의 일부를 빼냄으로써 노동력 전체의 교섭력을 재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동시에 임금관계가 부과하는 화폐적 제한의 약화는 상업주의와 종속된 노동의 논리로부터 해방된 노동형태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이다.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




사회적 가치를 포획하는 금융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0장 가운데 4개의 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0장 금융은 사회적 가치를 포획한다  

 

금융은 추상(abstraction)과 중앙집중화의 도구들을 제공한다.

 

금융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가치를 추출한다. 땅에 묻힌 물질의 가치들과 사회에 담긴 가치들 모두를 추출한다. 그러나 이 가치들은 실제로 역사적으로 생산되며 그 추출(extraction)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킨다.

 

 

위로부터 본 금융과 아래로부터 본 금융

  

1970년대에 금융이 경제 및 사회 전체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 금융의 발생은 (지구화에 상응하기는 하지만) 사회적 저항과 봉기의 힘의 결과이자 그에 대한 대응으로 볼 때 더 잘 이해된다.”

국가 재정 위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공공 부채를 민간은행으로 넘기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공공 거버넌스 메커니즘에 대한 지배권을 금융시장이 쥐게 되었다. 부채의 구조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이동하자 경제발전과 사회 정의가 전지구적 시장과 금융에 종속되게 된다. 신자유주의적인 행정이 금융메커니즘들을 사용하여 국가를 재조직하고 공공 부채와 국가 거버넌스의 이중 위기를 관리하게 된다. 금융화로 이르는 과정은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저항과 반란 →정부 지출 → 재정 위기 →금융화

 

이러한 진행의 더 작은 버전이 미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특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1960년대 다양한 형태의 사회저항과 도시봉기들은 1967년 뉴어크(Newark)와 디트로이트의 봉기에서 그리고 마틴 루터 킹 2세의 암살 이후 널리 퍼진 봉기에서 정점에 이른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일련의 봉기들을 뒤이은 것이 도시의 극적인 재정위기였다. 도시에서 재정 위기들은 증가된 지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다음에 주로 기인했다 : 공적 자원(자금)을 대도시 중심들로부터 먼 곳으로 옮긴 것, 도시로부터 빠져나오는 부유한 백인 인구들에 의해 세금 기반이 급속하게 감소된 것, 그 결과 건강에서 주택, 안전, 물 공급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서비스들이 극적으로 감소한 것. 이 위기들은 민간 은행들, 금융펀드들의 개입으로써만 ‘해소’되었으며, 은행들과 펀드들은 ‘비상사태’를 활용하여 공적 재화의 큰 부분을 전유하고 공공 기관들의 민주적 기능을 무너뜨렸다.

1970년대의 뉴욕은 이 과정의 고전적 사례였다. 데이빗 하비 : “뉴욕 재정 위기의 관리가 신자유주의적 과정으로 가는 길을 개척했다. 이 과정은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에서 국제적으로는 1980년대에 IMF를 통해서 진행되었다.” 금융기관들에 의한 디트로이트와 플린트의 재정 위기의 ‘해소’가 오늘날 이 과정을 계속하고 있으며 비극적인 사회적 결과를 낳고 있다.

 

[금융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

① 가치의 생산과 무관하다. 기존의 가치의 소유를 이동시킬 뿐이다. 선진국들은 현재 아무 일도 안 하며 ‘진짜’ 생산은 중국에서만 이루어진다. 금융은 도박이다.(카지노 자본주의).

② 어떤 학술적 주장들은 금융을 도박이 아니라 박탈(dispossession)의 장치로 본다. (금융이 한 역할을 하는 이러한 ‘시초 축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 이런 견해들은 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이 두 유형의 견해는 부의 발생이 아니라 부의 이전에만 초점을 둔다.

 

아래로부터 보면 금융이 도박에 덧붙여 사회와 자연 세계로부터 (종종은 숨겨진) 가치들을 포획하는 장치로 기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무게중심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있다. 금융이 자본에서 헤게모니적 역할을 하는 것은 오직, 공통적인 것이 탁월한 생산력으로서 그리고 가치의 주된 형태로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추출

  

금융자본은 근본적으로 추상적 성격을 띠며 따라서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을 통제하는 사람 사람의 거리가 증가한다.

 

추상은 중앙집중화를 함축한다.

힐퍼딩, 레닌: 중앙집중화는 경쟁을 제거하고 통제를 몇 개의 은행에 집중시키는 경향을 가진다.

금융은 독점을 낳는다. 생산을 지배하는 화폐의 독점.

 

화폐의 그리고 생산에 대한 통제력의 은행에의 집중은 이윤율 균등화 경향을 낳는다. 이윤율 균등화는 ① 더 높은 이윤을 찾아다니는 회사들의 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② 그보다 더 낮은 정도이지만 일과 더 높은 임금을 찾아다니는 노동자들의 이주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이동은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들에 의해 제한된다. 맑스는 이를 “이러저러한 정도로 중요한 지역적 차이들을 산출하는 실질적 마찰들”이라고 부른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David Fernbach, Penguin, 1981, volume 3, p. 275.)) 그런데 화폐의 이동은 회사나 노동력보다 제한을 덜 받는다. 따라서 금융과 신용제도가 균등화 과정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다. 금융자본이 최대한의 수익을 찾아 여기저기 흘러다니면 울퉁불퉁한 지형을 흐르는 물처럼 평평한 표면을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은행들에 통제력이 집중되는 것 그리고 이윤의 비교와 균등화를 향한 경향이 세계 시장의 창출에 기여하는 요인들이다.

 

금융자본과 그것이 지배하는 생산은 산업자본만큼이나 리얼하다. 주된 차이는 생산과 특히 생산적 협력이 지금은 자본의 직접 관여의 외부에서 조직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 금융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부로부터 어떻게 가치를 추출하는가이다. 이것이 추상과 추출 사이의 연결고리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이 1970년대부터 나란히 우세한 지위에 이르게 된 방식을 보게 해주는 창문 하나를 파생상품들의 작동이 제공한다. 특히 파생상품들이 척도와 측정의 메커니즘들을 창출하는 방식. 파생상품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어떤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 지수(index), 증권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하는 계약이다. 파생상품은 보통 미지의 미래를 참조하며 따라서 리스크를 방지하거나 투기의 수단으로서 사용된다.

 

파생상품들은 수 세기 동안 존재해왔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쌀, 돼지, 밀 같은 상품들의 선물(先物)시장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훈육에 기반을 둔 산업질서와 재정국가가 붕괴하면서 그리고 사회적 생산과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경제에서 주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면서 파생상품 시장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기초자산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파생상품은 매우 복잡하여 여기서 그 작동에 대해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 훨씬 너머에 있다. 우리의 논의의 핵심은 파생상품들의 척도로서의 역할에 집중된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자본이 더 이상 가치를 (적어도 이전의 방식대로는) 적절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맑스와 리카도가 이론화했던 것처럼 노동시간의 양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분명히 더 이상 불가능하다. 노동이 더 이상 부의 원천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은 부의 원천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출하는 부가 이제는 (혹은 더 이상) 측정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식, 정보, 돌봄이나 신뢰의 관계, 교육이나 건강서비스의 기본적 결과—이것들의 가치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은 사회적 생산성과 가치의 측정을 여전히 필요로 한다.

 

파생상품이 측정 문제에 대한 자본의 반응의 일환이다. 파생상품은 기초자산으로부터의 추상이기 때문에 이 추상성으로 인해서 부의 광범한 형태들 사이의 전환의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할 수 있다. 여러 형태의 파생상품들은 통화의 미래 가치나 수확의 결과와 같은 미지의 휘발적인 자산을 파악하여 거래될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든다.

 

[Bryan and Rafferty]

이러한 거래의 수립 덕택에 파생상품들은 미지의 가치에 대한 시장 벤치마크를 제공한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Capitalism with Derivatives, Palgrave Macmillan, 2006, p. 37.)) 모든 파생상품은 자본의 형태 전환의 패키지이다. 이 상품들이 모두 합쳐지면 자본형태전환의 복잡한 그물망 즉 파생상품들의 체계(a system of derivatives)를 형성한다. 이 체계에서는 자본의 어떤 조그만 부분이든 다른 조그만 부분에 대비하여 지속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원주] Dick Bryan and Michael Rafferty, “Financial Derivatives and the Theory of Money,” Economy and Society, 36:1, p. 141.))

 

이렇듯 파생상품과 파생상품 시장은 계산의 계속적 과정을 작동시키고 동일 척도로 계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수립하여 이미 존재하거나 미래에 존재할 엄청난 범위의 자산들을 시장에서 서로 대비하여 측정 가능하게 만든다.

 

[Randy Martin]

파생상품들이 핵심적으로 하는 일은 미래를 현재에 묶고 상이한 위치, 부문, 특징을 가진 모든 종류의 자본들을 서로 동일한 척도로 측정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원주] Randy Martin, “After Economy? Social Logics of the Derivative,” Social Text, 31:1, Spring 2013, p. 88. 또한 Lawrence Grossberg, “Modernity and Commensuration,” Cultural Studies, 24:3, 2010, pp. 295−332 참조.))

 

그 가치들이 정확하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이는 제대로 된 물음이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실은 이 맥락에서 측정(치들)이 정밀하고 효과적이냐이다.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가치들은 미지의 것, 측정될 수 없는 것, 수량화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시장들은 그것들에 수량을 각인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의적이지만 실제로 효과를 발하는 수량이다.

 

금융은 (파생상품은 더욱더) 허구적이고 기생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사회적 부의 총체를 놓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혹은 측정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자들인 금융의 대장들과 중개의 군주들은 ‘맘대로 해봐’라고 코웃음을 친다. 이들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을 통해 방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그런 금융 메커니즘은 위기를 방지하는 것이 아니라 심화시킨다는 것을. 곧 살펴보겠지만, 금융의 휘발성이 영속적인 위기를 신자유주의적 통치의 주된 양태로 만드는 한 요소이다.

 

추출의 여러 얼굴들

  

특히 자연자원의 추출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 자본은 시계를 되돌린 듯하다. 오늘날의 토지수탈과 무자비한 자원 사냥은 뽀또시(Potosi)의 은광과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그리고 토착민으로부터의 토지절도를 상기시킨다. 실로 정복·식민주의·제국주의의 역사는 부를 추출하려는 탐욕에 의해 추동되었다. 인간 역시 노예로서 추출될 수 있었다. 토지에서 인간까지 모든 것이 식민주의자들에게는 그들의 노력의 보답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추출이 점점 더 중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되고 변형되어 사유재산으로 되므로, 오늘날의 추출을 이해하려면 추출이 의존하는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다.

추출은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

② 사회적 부

이 두 형태가 추출주의(extractivism)의 여러 얼굴들을 이해하는 데 첫 가이드가 될 수 있다.

 

① 지구와 생태계의 부로부터의 추출

지구와 그 생태계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인간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돌봄과 지속 가능한 사용의 관계를 함께 수립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추출은 불의(不義)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심지어는 파국적인 파괴를 낳을 수 있다. 자본주의적 산업과 상품화는 오랫동안 파괴적 영향을 미쳐왔다. 추출주의는 어떤 점에서 이 파괴의 과정을 돌이킬 수 없는 지점으로 몰고 가고 있다. 자본 대 지구— 둘 가운데 하나만 생존할 수 있다. 둘 다 생존하지는 못한다.

 

추출산업, 특히 에너지 산업 환경과 사회를 파괴한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고 점점 그 파괴의 크기와 빈도가 증가하고 있을 뿐이다 : Galicia, the Gulf of Mexico, Uzbekistan, Kuwait, Angola 등등. 석탄채굴과 금속 채굴도 광부의 건강과 환경을 계속적으로 파괴했다. 추출이 더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고 (페르시아만의 국가들, 러시아, 베네수엘라 등) 많은 나라들이 화석연료 회사처럼 행동하게 됨에 따라 어떤 측면에서는 스밤파(Maristella Svampa)가 경제의 ‘reprimarization’[채광, 석유, 목축과 같은 1차 부문이 다시 경제의 중심이 되는 것—정리자]이라고 부른 것이 발생했다.

 

새로운 것은 추출주의 전선의 극적 확대이다. 지구의 어느 구석도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채굴]

디지털 장비를 위한 금속 채굴.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석유 채굴을 위한 새로운 지형을 열었다(캐나다 앨버타의 타르샌드(([정리자] 타르샌드 →오일샌드(oil sands) : 신기술로 사용할 수 있게 된 석유자원 가운데 하나로서 점토나 모래 물 등에 중질 원유가 10% 이상 함유된 것을 말한다. 원유가 굳어져 반쯤 고체 상태로 땅 표면 가까이 부존하는 경우 이를 역청(瀝靑)이라 부른다. 역청이 모래진흙 등과 섞여 있는 것이 바로 석유모래다. 석유모래에서 역청을 분리한 뒤 이를 가공하면 기름샘에서 뽑아 올린 원유와 성분이 같아진다. 이렇게 생산한 원유를 보통 원유(conventional crude)와 구분해 합성원유(synthetic crude)라 부른다. 오일샌드가 가장 많이 매장된 국가는 베네수엘라이며, 그 다음이 캐나다이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 유정, 미국의 fracking수압균열법) 이 방법은 새로운 지진 지대를 발생시키고, 대기와 지하수를 오염시켜서 전통적인 방법보다 더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농업]

대규모 농업도 여러 측면에서 추출 산업이 되었다. 옥수수나 콩이 식품이나 사료로 쓰이지 않고 에탄올과 플라스틱의 생산에 직접 투입될 때, 옥수수 밭이나 콩 밭은 유정과 다르지 않데 된다. 땅으로부터 부를 에너지와 산업자원으로서 흡수한다. 삼림파괴에서 농약의 사용까지 이것이 가져오는 환경파괴는 다른 추출과정의 경우와 맞먹는다.

 

[기후변화]

추출주의의 환경파괴 효과는 기후변화의 전망에 의해 한 등급 더 높아진다. 과거에는 사고로 인해, 유정과 탄광으로 인해 생기는 오염과 파괴가 비교적 지역에 국한되고 잠재적으로는 역전 가능한 현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반적이고 불가역적인 파괴의 전망이 내재한다.

맥키븐(Bill McKibben) : 지구 기온이 평균 섭씨 2도가 넘지 않으려면 석탄 및 석유 매장량의 80%가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어야 한다. 화석연료 산업은 악당 산업이다. 공공의 적 제1호이다.

 

② 사회적 부로부터의 추출

현대의 추출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구로부터 박탈한 가치만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다른 범주인 사회적 생산 및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가치 포획도 알아야 한다.

 

㉠ 기업들은 인간 신체 자체를 부의 저장소=추출 대상으로 본다. 신체에 담긴 유전자 정보도 재산으로 추출되어 특허로 보호될 수 있다. 기업들은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등이 ‘생물약탈’(biopiracy)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전통적인 지식—이는 오래 전에 전통적인 공동체에 의해 개발되어 공동으로 유지되던 것이다—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 데이터 채굴 혹은 데이터 추출. 오늘날 디지털 골드러시가 존재한다. 데이터의 채굴과 추출이란 거대한 데이터 풀(pool)에서 패턴을 찾음으로써 그리고 그 데이터들이 저장되고 팔릴 수 있도록 구조화함으로써 가치를 포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데이터 개념은 가치가 생산되고 포획되는 방식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앞에서 우리는 구글의 PageRank 같은 알고리즘이 사용자들의 지식과 지성에 의해 산출된 가치를 포획하는 방식을 서술한 바 있다. 소셜 미디어도 사용자들 사이의 관계와 연결로부터 가치를 포획하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했다. 달리 말하자면, 데이터의 가치 뒤에는 사회적 관계사회적 지성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추출의 다음 얼굴은 사회 영토 자체이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는 건설된 환경 이상의 것으로서 공통적인 것이 생산되는 가마솥이다. 여기에는 문화적 동학, 사회적 관계의 패턴들, 혁신적 언어, 정동적 감성 등이 포함된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도시 영토 자체에 함입된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 있다. 혈암에서 석유를 끌어내는 것과 유사하다. 금융이 지배하는 부동산 시장은 도시 및 시골 영토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가치를 추출하는 방대한 장들로 이해되어야 한다.

 

㉣ 추출의 그 다음 얼굴은 협력적 사회적 생산의 여러 형태들이다. 이는 다른 여러 측면들을 조합하는 측면이다. 예를 들어 애너 칭(Anna Tsing)은 야생버섯이 오리건에서 채취되어 일본에서 팔리기까지 과정을 추적하면서 자본이 자율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를 포획하는 능력을 짚어낸다. 자본가의 통제 없이 생산되는 가치를 이용하는 것을 그녀는 ‘salvage’(상품 수집[←고물 수집: 정리자])라고 부른다.(([원주] Anna Tsing, 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 p. 63. [정리자] 애너 칭은 이 저서의 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상품 수집(salvage)의 축적을 필요로 한다. 여기에는 한 구획에서 다른 구획으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근대적 역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상품 수집’은 실로 사회적 생산과 사회적 삶의 생산에서 산출되는 가치를 자본이 포획하고 추출하는 방식을 탁월하게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추출은 공통적인 것의 자국을 좇는다. 추출은 산업과 달리 상당한 정도로 자본의 관여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부의 형태들에 의존한다. 자동차는 공장에서 생산되지만, 석유와 석탄은 땅 속에 이미 존재한다. (물론 추출 자체도 생산과정이며 추출된 재료는 정련되고 분배된다.) 이 구분은 사회적 지성, 사회적 관계, 사회적 영토와 관련하여 훨씬 더 명확해진다.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부과하는 시간표와 규율에 따라 협력하지만, 여기서는 가치가 자본에 의해 직접 조직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회적 협력을 통해 생산된다.

 

이렇듯 부활된 추출의 중심성은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 임대료, 이자)로의 역사적 이행이라는 맥락에 위치한다. 이윤이 목적인 산업자본가들과 달리 자산소득자(rentier)는 공통적인 것을 추출하며 생산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부를 축적한다. 자산소득자의 부활된 중심성은 단지 과거의 잔존이거나 역사적 순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추출주의의 여러 얼굴을 밝혀낸 것이 우리로 하여금 자본주의적 발전과 역사적 진행을 더 잘 이해하게 해준다. 이 발전과 진행은 단순히 직선형도 아니고 순환적이지도 않다. 다양한 지리적·문화적 차이들을 통해 복잡한 혼종적 시간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금융은 현대의 추출주의와 이중의 관계를 맺는다.

① 토지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엄청난 액수의 초기 지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이 추출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추출 회사들과 그 기획들이 점점 더 커지기 때문에 금융의 통제력도 점점 더 커진다. 이는 앞에서 말한 사회적 장과 및 생물학적 장을 ‘채굴’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② 금융은 또한 직접 추출한다.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로부터의 가치추출을 다양한 방식으로 관리한다.

 

[부채]

부채는 사회적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하는 메커니즘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홈 모기지, 임대사업, 폐쇄(foreclosures), 퇴거는 빈민과 중산층으로부터 부를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들이다. Matthew Desmond : 가령 페이데이론(payday loan)[월급을 기반으로 한 소액의 대출—정리자]은 빈민의 호주머니로부터 돈을 끌어내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금융 테크닉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장치들을 통해 추출된 사회적 가치는 비활성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 협력의 회로들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Veronica Gago :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의 이주민 공동체들을 연구하면서 가치의 사회적 생산과 그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다. 이는 금융이 때때로 소비를 목적으로 한 미시대출을 통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때 드러난다. “위로부터 추동되는 금융화는 민중의 자율적인 생산·재생산 실천 형태들을 독해하고 전유하고 재해석하는 방식으로서 작동한다.”(([원주] Veronica Gago, “Financialization of Popular Life and the Extractive Operations of Capital,” South Atlantic Quarterly, 114:1, January 2015, pp. 11–28, quote on p. 16. 또한 Veronica Gago and Sandro Mezzadra, “Para una critica de las operaciones estractivas del capital,” Nueva sociedad, no. 255, January−February 2015, pp. 38–52 참조.))

 

금융은 그 자체가 추출적 산업이다. 추상과 중앙집중화의 힘일 뿐 아니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가치를 직접 포획하고 추출하는 장치이다. 아래에서 보면 이 과정은 사회전역에 걸친 수많은 상호작용과 협력에 의해 구성되는 공통적인 것을 가리킨다.

 

추출을 위로부터 이해하고 싶으면 화폐를 따르라. 그러나 아래로부터 포착하고 싶으면 공통적인 것을 따르라.

 

 

사회적 생산에서 금융으로

 

아래에서 보면 사회적 생산을 앞에서 말한 이중적 의미에서 인식하게 된다. 즉 ①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과이며 ② 사회를 생산한다. 우리가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목격하는 금융의 우세가 사회적 생산의 점증하는 중심성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겼다는 것, 궁극적으로 금융은 (산업과 훈육의 체제의 기반을 파괴한) 저항과 봉기의 축적에의 대응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이는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 나타내는 자본과 노동의 새로운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포디즘 시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산업노동의 계획된 협력에서 생성되는 이윤에 의해 추동되는 훈육체제 및 축적에 의해 구조화되었다면, 포스트포디즘 시기에는 생산적 지식과 협력의 사회적 능력이 사회에 점점 더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금융이 사회적 생산을 통제하고 동시에 사회적 생산이 발생시키는 가치를 자산소득의 형태로 추출하는 데 복무한다.

 

추출의 우세함이 착취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이는 새로운 기준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맑스의 착취 개념이 가진 시간적 분석틀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일의 일부 동안 생산된 가치에 대해 임금을 받고 노동일의 나머지 시간 동안 생산된 가치는 자본가가 전유한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착취와 생산조직화 사이의 긴밀한 연관을 드러내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착취와 생산조직화의 메커니즘들은 서로 갈라지는 경향이 있다. 멀리서 가치를 추출하며 생산주체들을 추상적으로 덩어리로 보는 자본주의 기업가들은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자연이 주는 선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파생상품 시장과 중개거래(arbitrage) 전략에 눈독을 들이는 그들은 더 이상 생산을 조직하고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며 노동협력을 발생시키는 주인공들이 아니다. 반대로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협력하고 생산을 계획할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

 

그렇다면 하나의 열쇠는 사회적 생산의 일반성과 그것을 활성화하는 노동 형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현대의 노동은 종종 지식, 지성, 인지 능력의 측면에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은 디지털 세계의 정점―가령 구글의 Alphabet―에서만이 아니라 경제 전체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노동의 상이한 층이 전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러시아 인형처럼 차곡차곡 안에 넣어져 있다—건강, 교육, 가사 돌봄을 담당하는 핑크칼라 안에 공장의 블루칼라 안에 사무실 칸막이 안의 화이트칼라 안에 키보드를 두들기는 칼라 없는 노동자—는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더욱이 오늘날 산업들 사이의 시차란 없다. 산업은 1930년처럼 기능하고 농업은 1830년대처럼 기능하는 식이 아니다. 나라마다, 그리고 전지구적 시장 전체에 걸쳐서 분명히 다르게 나타나는 노동조건들과 과정들은 동시대적인 방식으로 불규칙적으로 교차하고 혼합된다. 금속노동자가 디지털 도구로 극히 전문화된 작업을 수행하고 인지노동자가 일관작업의 방식으로 데이터를 조작하며 건강 및 교육 노동자가 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함께 지식과 돌봄, 지성과 정동을 사용한다.

Carla Freeman : 바르바도스의 데이터프로세싱 시설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교차의 탁월한 사례를 제공한다. 여기서 여성 노동자들이 미국 보험회사를 위해 의료(보험)청구 양식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것과 같은 상투적인 디지털 과제를 수행한다. 이 시설은 노동이 멍하게 만들 정도로 반복되는 블루칼라 공장의 특징을 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처럼 하이힐을 신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작업은 상투화되었을지라도 칼라 없는 노동자의 경우처럼 지식과 지성을 필요로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핑크칼라로서 명시적으로 여성화되어 있다.(([원주] Carla Freeman, High Tech and High Heels in the Global Economy, Duke University Press, 2000. See also Andrew Ross, No Collar, Basic Books, 2003.))

 

오늘날 스펙트럼으로 펼쳐진 노동—델리의 법률사무소들에서 스톡홀름의 편의점들까지, 상파울로의 자동차공장들에서 오리건의 반도체 공장들까지—은 모든 노동 체제들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전체에 걸쳐서 사회적 생산이 생산활동(지식과 협력의 사용)에서나 생산물(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구성요소들)에서나 점점 더 중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열쇠는 금융으로 하여금 부를 추출하고 모으게 하는 사회적 생산의 특징들 바로 그것이 또한 저항과 봉기의 씨앗과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맑스의 논의의 도움으로 이 두 날을 가진 성격이 세 단계의 논리적 과정— ① 추상에서 ② 사회적 생산을 거쳐 ③ 주체성으로—을 거쳐 발전함을 파악할 수 있다.

 

① 추상

맑스 : 자본과 노동의 경제적 관계는 노동이 예술/기예의 모든 특징을 잃는 데 비례해서 더 순전하게 발전한다. 그 구체적 숙련이 더 추상적인 어떤 것이 되면서. 점점 더 “순전히 추상적 활동”이 되면서.(([원주] Marx, Grundrisse, p. 297.))

사회적 생산에서 추상은 여러 면에서 극적으로 증가한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지식을 내화하고 협력에서 그것을 발전시킬 때 그들의 노동과 그 노동이 생산하는 가치는 더 추상적이 된다. 그러나 맑스는 ‘예술’의 상실을 향수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특수한 예술이나 기술의 상실은 이득이기도 하다.

맑스 : “노동은 이런 노동, 저런 노동이 아니라, 순전한 노동, 추상적 노동이다. 그 특정의 규정성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지만 모든 규정성이 가능하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그렇다면 노동의 추상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으로 완전히 꽉 찬 것이다. 생산과정과 가치의 추상성이 더 높아지면 자본에 대한 저항과 자본으로부터의 자율의 이례적 잠재력이 생긴다.

 

② 사회적 생산

노동의 점점 더 일반화되는 능력은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전제한다. 특수한 개별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 정립된다. 맑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전제되며, 생산물들의 세계에의 참여, 즉 소비에의 참여는 서로 독립된 노동 혹은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개인이 활동하는 사회적 생산조건들을 통해서 매개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172.))

그렇다면 생산과정의 점증하는 추상은 사회적 관계망에 의존한다. 달리 말하면, 공통적인 것에 의존한다. 공통적인 것에는 공유되는 지식, 문화, 협력의 회로들이 포함된다.

 

③ 주체성

셋째 단계는 이 사회적 토대를 주체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이다. 자본이라는 총체성에 노동의 총체성이 맞선다.

맑스: “노동은 물론 특수한 노동으로서는 특수한 자본을 구성하는 특수한 물질에 상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본 그 자체는 모든 물질의 특수성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특수성들 모두로부터의 추상인 동시에 그 특수성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자본에 맞서는 노동도 주체적으로는 동일한 총체성과 추상성을 자체 내에 지니게 된다.”(([원주] Marx, Grundrisse, p. 296.))

노동이 추상적이고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주체화의 잠재성이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동질적이고 획일적으로 통일된 주체성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주체성들이 협력하고 갈등하는, 차이들의 열려진 장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은 사회적 생산의 이 수많은 이질적인 주체성들로부터 구성된다.

 

공통적인 것에의 자본의 접근과 공통적인 것의 아래로부터의 자율적 조직화는 서로 갈라진다. 이는 사회적 복지의 부분 즉 교육, 주택, 건강, 아이들 및 노인 돌봄, 과학적·의학적 연구에서 명백하다. 이 모든 활동들은 자본주의적 척도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적 가치들을 함축한다. 이 부문들에서 우리는 생산성에 대한 자본의 이해와 사회적 이해 사이의 점증하는 간격을 인식할 수 있다. 이 간격은 다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에서의 차이를 알려준다. 자본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로부터 최대의 이윤이 추출될 수 있는 것이고, 사회의 입장에서 공통적인 것은 인구가 사용하고 인구에 복무할 수 있도록 열려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주체적으로 적대의 선을 구성한다. 

맑스: 한편으로, 자본은 부의 창출을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노동시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하여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을 살리고 사회적 결합과 사회적 교류의 모든 힘을 살린다. 다른 한편, 자본은 그렇게 창출된 엄청난 사회적 힘들이 노동시간에 의하여 측정되기를 바라고 그 힘들을 이미 창출된 가치를 가치로서 유지하는데 필요한 한계 내에 가두기를 바란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하늘로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원주] Marx, Grundrisse, p. 706.))

 

주체성의 다수성과 이질성을 강조하게 되면, 상황은 훨씬 더 폭발의 잠재력을 갖게 된다.

 

사회적 생산의 다수적 차원이 일정한 폭발성(휘발성)을 함축한다면, 이런 형태의 노동력이 생산에서 헤게모니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 생산과정에 들어있는 추상이 공통적인 것의 여러 형태들의 출현을 함축한다면, 그리하여 자본가로서는 생산자들의 종속(subjection)이 필요하고 생산자들에게는 주체화(subjectivation)의 잠재력이 열린다면—그렇다면 자본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 만일 자본이 사회적 생산에 긴밀하게 관여한다면, 이는 완전히 생산과정을 봉쇄하는 데로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은 화폐라는 극단적이고 격렬한 형태로 ‘거리를 두고’ 멀리서 명령을 부과해야 한다. 이로써 가치의 금융적 추상이 구현된다.

 

이러한 사태전개는 전복적 주체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소 확연한 계급 분할의 진행이며 계급적대의 원천이 된다. ① 한쪽에는 금융시장에서 생성되는 이자로 먹고 살며 자신들이 축적한 사유재산에의 배타적인 접근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② 다른 쪽에는 집단적 지식과 지성 및 사회적 소통 능력, 돌봄 능력, 협력 능력을 통해 사회적 부를 생산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자유롭고 열려있는 접근을 통해 안전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전선은 이렇게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