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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권, 전지구적 커먼즈, 그리고 커먼즈 운동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베르나츠키(Vladimir Ivanovich Vernadsky ), 그리고 르 로이(Édouard Le Roy)가 선구적으로 기여하여 형성된 정신권(精神圈, noosphere)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신권은 지질권(geosphere), 생물권(biosphere) 다음으로 출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정신이 지구 규모로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현상과 연관된다. (인터넷이 그 확연한 물적 증거이다.) 정신권 개념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론펠드(David Ronfeldt)와 아퀼라(John Arquilla)가 있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이 정신권에 상응하는 정치로서 ‘정신정치’(noopolitik)를 제시한다. 정신정치는 국가 단위로 작동하는 ‘현실정치’(realpolitik)와 달리 국가와 비국가 주체들 사이의 긴밀한 협동에 의존한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이 정신정치에 중요한 개념으로 ‘전지구적 커먼즈’를 꼽는다. ‘전지구적 커먼즈’는 지구에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부분들을 가리킨다. 즉 ① 대양 ② 대기 ③ 우주공간을 가리키며 나중에는 여기에 ④ 사이버 공간이 추가된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전지구적 커먼즈에 주목하는 세 집단—① 과학자 집단 ② 커먼즈 활동가 및 이론가들 ③ (특히 미국의) 군부—을 거론한다. 이 셋의 정치적 입장은 각각 다르다. 론펠드와 아퀼라에 따르면 과학자 집단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경향이고 커먼즈 활동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좌파”이다.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및 커머닝에 기반을 두어 사회 전체를 변형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군부의 전지구적 커먼즈에 대한 주목은 미국의 패권주의와 연관된 것이므로 여기서 그 입장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그들이 집필 진행 중인 논문에서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는 부분을 웹에 올려놓았는데 (여기 클릭!) 여기에 전지구적 커먼즈에 대한 커먼즈 운동의 관점을 정리한 부분이 있다. 이 정리에서 우리는 커먼즈 운동이 현재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가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정리 부분을 아래에 우리말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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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활동가 집단

군부에게는 바다가 글로벌 커먼즈의 첫째 항목이다. 이에 반해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커먼즈’ 개념은 수 세기 전에 영국에서 발생했으며 ‘공동으로’(in common) 소유·운영되는 땅을 지칭했다. 그런데 커먼즈 지향적 시민사회 이론가들 및 활동가들에 따르면 지금은 이 개념이 자연의 물리적 공통재(commons)—‘자연의 선물’로서의 땅, 공기, 물— 만이 아니라 디지털 공통재(온라인 영역과 지식)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부 활동가들은 사회적 공통재—가령 창조적 작업이 공유된 자산에 해당하는 협동조합들—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문화도 때로는 공통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민사회에서 커먼즈 주창자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자원이 공동체(사용자들과 이해관계자들)에 의해 그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원, 공동체, 규칙이라는 세 구성요소들(달리 말하자면 ‘무엇을 누가 어떻게’)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 셋이 합쳐서 의미하는 것은, ‘커먼즈’가 자원이나 땅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커머닝’(commoning, 공동으로 하기)이라고 불리는 삶의 방식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커머너들’의 궁극적 목적은 기존의 공적인 부문과 사적인 부문과 병행하여 그 부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커먼즈 부문’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한다면/발전함에 따라, 혁명적인 사회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실로 일부 커먼즈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의 목표는 “모든 수준에서의 지속적인 연결작업 통해서 ‘대항헤게모니적’ 힘을 구축”하여 “전지구적 자본의 파괴적인 힘과 자본에 의한 지구 및 지구민 약탈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50년 전에 커먼즈 개념은 선진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하딘(Garrett Hardin)이 저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 1968)을 쓴 이후 특히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커먼즈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이 세계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 운동은 정신권의 선구자 격인 인터넷과 웹을 일종의 커먼즈로서 경험하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고무되었다. 그런 다음에 오스트롬의 책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1990)와 노벨경제학상 수상(2009)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유재가 (하딘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실로 생산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했다. 지금 커먼즈 운동은 북미, 서유럽, 스캔디나비아 전역에서 많은 새로운 시민사회 NGO들—대표적으로 미셸 바우엔스의 P2P재단—과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나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 같은 개별 이론가들로부터 영감과 이론적 도움을 얻으면서 느릿하고도 조용하게 확대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녹색 정당들로부터 추가적인 추진력이 오기도 한다. 거대한 환경과학 집단에 비하면 커먼즈 운동은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은 (아직) 아니지만, 전지구적 커먼즈와 정신권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는 것을 돕는 사회운동을 생성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의 많은 부분이 좌파에서 일어나고 있다. 독일의 커먼즈 옹호자 헬프리히(Silke Helfrich)는 “커먼즈는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최고의 것만을 가져온다”고 말한 바 있고 이는 정확한 말이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들로부터는 책임이라는 가치를, 자유주의자들(liberals)로부터는 사회적 평등과 정의라는 가치를, 자유의지론자들(libertarians)로부터는 개인의 이니셔티브라는 가치를, 좌파로부터는 자본주의의 힘을 제한하기라는 가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직은 아무래도 좌파로 기울어진 운동이다. 지금까지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커먼즈 부문의 출현이 가져올 잠재적 혜택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실로 우파에는—‘미국 제일주의’[트럼프—옮긴이], 브렉시트,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or Germany) 등등—커먼즈로부터의 분리가 중심 주제이다.

처음에는, 예컨대 2~30년 전에는 커먼즈 활동가들이 주로 지역과 일국의 문제들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데 비전이 더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활동가들이 관심의 초점을 지역적이고 일국적인 커먼즈를 넘어서 광대한 ‘글로벌 커먼즈’로 돌리게 되었다. 이 전환은 한참 진행 중이다. 가령 독일 경제학자 셰어호른(Gerhard Scherhorn)은 전지구적 커먼즈에 자연자원만이 아니라 “고용기회, 공공보건 체계들, 교육기회, 사회적 통합, 소득과 부의 분배, 그리고 인터넷 같은 소통체계들”도 넣고자 한다. 더 명확한 사례는 국제개발 전문가이자 커먼즈 옹호자인 제임스 퀼리건(James Quilligan)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다.

시장과 국가가 일국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세계의 문제들을 관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개인들, 공동체들 그리고 시민사회조직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특수한 목표들—음식, 물, 깨끗한 공기, 환경보호, 에너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인권, 토착민의 권리, 기타 여러 사회적 관심들—이 본질적으로 전지구적 커먼즈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많은 좌파 커먼즈 주창자들은 과학계나 군부의 것을 닮은 조직변화를 추구했다. 예를 들어, 퀼리건은 “우리는 이 문제에 대응함에 있어서 전지구적 커먼즈 조직들로서 함께 결합함으로써 상당히 더 많은 권위와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2008) 그의 견해로는 “모든 지역들과 부문들로부터 국제적으로 대표자들을 모아서 전지구적 커먼즈 이슈를—진화의 이 세 흐름[지질권, 생물권, 정신권]을 통합하는—협상의 형태로 토론하는 것이 과제이다.”(2010) 다른 이들처럼 그도, 커먼즈 재산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 헌장들’과 ‘커먼즈 트러스트들’에 동의할 것을 사용자들과 생산자들로 구성된 지역 공동체들에게 권유한 바 있다. 만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커먼즈 관리가 지역적, 일국적, 다국적, 지역적, 전지구적 이해관계자 토론을 통해 숙의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커먼즈에 유리한 “전지구적 입헌 거버넌스” 체계를 낳으리라는 것이다.(2013) 그러나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 Coalition for the Global Commons)을 창출하려는 초기 2008-2009 ··· [원문에 일부 단어들이 빠져있다— 옮긴이] 명백하게 실패했고 아직 새로운 대형 계획은 출현하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창하는 거대한 과학계와는 달리 커먼즈 활동가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정부, 은행, 재계와 협동하는 것을 기꺼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네트워크 형태의 전지구적 거버넌스—네트워크 기반의 거버넌스 체계—로의 이동을 원한다.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불확실성은 글로벌 커먼즈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