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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肺)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 : Interview with Federico Tomasello”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Il polmone comune della metropoli. Intervista ad Antonio Negri in guisa di appendice a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3장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둘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의 대화를 계속하자. 로시(Ugo Rossi)는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비판한다. 첫째로, 인지노동 및 고급 3차 부문(the advanced tertiary sector)[IT, 마케팅, 연구개발, 법·기술·금융 콘설팅–정리자]에 대한 당신의 강조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생산형태의 다양한 성격을 놓치거나 과소평가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자본주의적 메트로폴리스에 공존하는, 혹은 추출적 자본에 의한 포획에 노출된 삶의 양태들(dei modi di vita)과 관련된 사회적 다양성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도 다양하고 다채롭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경향적으로 발전하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현재의 경향을 나타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방법은 항상 경향의 분석을 그 특징으로 했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바로 고급 3차 부문을 경향의 요소로 추상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차원들이 이것과 관계를 맺고 종국에는 이것에 의해 포획된다. 가령 시장들이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내에 공존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것들도 새로운 형태의 계산에, 가령 물류(logistics)의 새로운 체계와 연관된 새로운 은행업 및 시장 조건들에 더 단단히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나는 로시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메트로폴리스 수준에서의 차이들은 반드시 ‘혼돈스러운’ 것들은 아니고 경향적으로 더 상위의 서비스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그렇다면 자본의 가치화 메커니즘에서 착취의 많은 양태들에 공통적인 경향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두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 ① 하나는 현상학적이고 서술적인 관점으로서, 이는 관찰하고 기록한다. ② 다른 하나는 경향적 관점으로서 이는 귀납적·미래투사적이며, ‘지식에의 의지’를 주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핵심 요소로서 긍정한다. 나는 언제나 이 두 관점, 즉 서술적 관점과 재구성적·실천적·정치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 어떤 현상에 직면했을 때, 나는 ‘사태가 어떻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지’도 묻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을 열고 부수고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러면 경향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실천적 ‘장치’와 병행하는가?

그렇다. 이것이 푸꼬의 철학에서 ‘장치’라고 불리는 것이며, 칸트의 용어로는 ‘후험적 종합’이고, 맑스의 언어로는 ‘결정하는 추상’(astrazione determinata, determinate abstraction)이다.

 

가치추출방식으로서의 추출주의(estrattivismo)에 대해 좀더 말해 달라.

사회적 삶의 공간 전체로부터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하비, 발리바르를 통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의 이동적인 공간성에 대한 논의와 닐슨(Neilson)과 마짜드라(Mezzadra)의 시장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맑스에게서의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의 엄밀한 정의와 관련하여 초과로서의 협동의 생산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게 되는 만큼 이 이론적 요소들이 내게 중요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금융현상의 연구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치를 참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생산적 사회의 특권적 형태가 메트로폴리스라면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치포획과 잉여가치축적은 추출적일 수밖에 없다. 가치포획은 장소(공장이 나타내는 것)보다는 공간(다중의 공간)에 준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물의 추출’과 같은 추출활동(l’estrattività)을, 즉 새로운 원료의 추출을, 더 정확하게는 공통재의 추출과 착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로시가 제기한 비판의 둘째 논점은 당신이 부동산 부문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부동산은 당연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시 경기순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거나 작동해왔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 투자가 자본이 경기순환의 지난 주기에서 사용한 은행 파생상품들 및 기타 광적으로 투기적인 도구들을 통과할 때 그렇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브라질이나 이스탄불 같은 곳에서는 부동산투자가 일종의 자본주의적 골드러시였던 것이 맞지만, 또한 극적인 한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나 리우에서는 시민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정도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 높다. 그리고 이스탄불은 도시에서 유럽에 속하는 부분이 수송의 관점에서 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점점 더 많은 다리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동산 부문은 풀 팩터(pull factor)[사람들을 어느 지역에 살도록 끌어당기는 이유나 상황―정리자]인 것이 맞지만, 지금 그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매우 높은 ‘밀도’를 유발해서 도시를 때로는 여행하거나 거주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이다. 따라서 나의 가설은, 도시 서비스들의 비용이 부동산의 가격을 곧 끌어내리리라는 것이다. 투쟁과 도시의 갈등이 무력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존중’하도록 만들거나 부동산의 가치와 독립적으로 도시의 자유롭고 즐거운 향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부동산의 비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의 비용, 메트로폴리스 자체의 서비스들의 비용이다··· 더 나아가 부동산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재생산 비용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말인가?

바로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 또한 부동산의 가치를 낮추고 파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비용’의 증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비용이 바로 사적인 것에 맞서서 표현된 공통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의 거주민들이 공공교통요금의 인하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은 명백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자본주의적 비용’을 증가시키고자 싸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극히 열려진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항상 투쟁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향이란 항상 투쟁이 자본의 관계를 확대다고 심화시키는 경향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장치’(dispositifs)의 질서가 현상학적 질서에 맞세워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나는 리얼리즘이 실재적인 것의 반영(rispecchiamento)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 브라질 상황에 대해 말했던 것에 더 덧붙일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 브라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빈자의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스며드는 투쟁들의 ‘견인력’, 즉 빈자들의 투쟁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발휘하는 견인력이다. 버스운전사들, 교사들의 투쟁이 폭발하는 데 기폭제가 된 것도 빈자의 투쟁이었다. 모든 옛 조합 범주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소수자가 되고 이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하고 있다. 이는 핵심적이고 질적인 요소이다. 공장노동자층을 추동요소로 보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적 전제가 여기서 붕괴된다. BRIC(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나라들에서는 공장노동자들이 투쟁을 추동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경우 종종 중산층 요구들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력이다. 가장 배제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메트로폴리스의 현실에 가장 깊이 포함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이다.

 

이 ‘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달라.

가령 보장소득이 메트로폴리스 생산성의 일반적이고 열려진 척도와 전제조건을 구성한다고 말할 때 이는 여성들의 권리, LGBTQ, 혹은 써발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시에 사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것은 소수자로서 도시 안에 있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소수자들이 소수자로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다중의 생산물이며, 다중 자체는 소수자들의 배치(assemblaggio)이다.

 

로시가 제기하는 가장 흥미있는 비판점은, 공통적인 것과 도시에의 권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그는 우리가 도시를 ‘재구성’보다는 통일체로 환원되지 않는 투쟁들과 차이들의 ‘배치’로 보는 것을 제안한다.

답:

매우 흥미로운 논점이지만, 이 논점은 다중 개념이 일원적인 일자(unum)라는 전제 위에서 제시된 것이다. 다중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다중은 그 자체로 차이들의 기계이다. 나는 다중을 도시에서의 조우들과 협동의 순간들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총체(un insieme di singolarità)라고 부른다. 이 협동의 순간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인지자본이 확고한 현실이 된 사회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조건은 공통적인 것의 더 상위의 결합형태로의 단계적 이행을 전제한다. 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사회적 협동의 공고화와 증가를 통해 전진한다.

‘도시에의 권리’는 훨씬 더 이전 단계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협동의 밀도에 상응한다. 메리필드(Merrifield)와 브레너(Brenner)가 도시화와 차이들 사이의 조우가 메트로폴리스에서 진정으로 생산적인 요소이며 ‘공통의 폐(肺)’를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적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몇몇 오해를 풀 논점을 제시해야 할 듯하다.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공장과 메트로폴리스에 관한 한은 유사성(둘 다 생산이 추출되는 무질서한 집합이다)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중에 관한 한은 은유이다.[이는 12장에서 말한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누어 말한 것이다―정리자] 만일 다중의 경우에도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중이 과거 노동계급처럼 무언가 잠재적으로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은 특이성들의 ‘장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발전된 개념이다. 특이성들은 주체성들의 실존-저항-조우-협동-생산의 순서로 작동한다. 우리가 모든 생산부문에서 가능한 보장된 최저임금이나 보장소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차이들의 조우·협동·생산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장될 수 있는 토대가 될 출발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처럼 메트로폴리스도 ‘도시학’(urbanistica)의 개념으로 이해되기보다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도시 배치’(assetto urbano)의 기술은 상이한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의 기술 개입이 수많은 관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라고 말했을 때 속속들이 삶정치적인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여기에는 공간, 시간, 전통, 역사적 차원, 문화적 구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 파리에서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나는 역사, 투쟁, 획득된 권리, 시민적 공고화의 겹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구가 메트로폴리스 지역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적 삶양태는 이제 완전히 독보적이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듯이 메트로폴리스의 외부도 없다. 생산에서 연결 역할을 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는 중심적인 경제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콜하스(Rem Koolhaas)가 제안한 메트로폴리스 구조―‘폐기물’의 축적을 수반하는 거대한 생산적 장치―를 읽는 데 애착을 가진다. (폐기물은 다시 도시 생산을 창출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우리가 경향의 방법을 따른다면 폐기물과 잔해의 무게를, 메트로폴리스의 연결 조직에서의 표류와 실패라는 점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생산적 기계들로, 역설적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기계적 차이들로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외부가 없다는 사실이 자본 내에 항상 저항이 있음을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학자들이 거의 반세기 동안 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본 개념 자체가 (특히 메트로폴리스적 자본이) 계급투쟁의 개념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적인 사례가 브라질 파벨라의 높은 생산적 강렬도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투쟁의 충격을 창출했다. 모든 메트로폴리스 투쟁들을 집단적 실존, 특이성들의 삶양태들, 저항, 조우, 협동,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 맞선 주체성의 생산에서의 차이들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 내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이라는 열려진 개념을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로시가 공통적인 것이 차이들의 기계라고 말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공통적인 것은 다중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Intervista ad Antonio Negri sulla metropoli”)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2장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세 번의 이어지는 대담들 가운데 첫째이다. 나머지 두 대담(13장, 14장)도 올릴 예정이다.

문 (또마셀로)

당신은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게는 노동자와 공장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를 읽는 구도를 시험하고 업데이트할 필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네그리)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와 관련하여 완전히 열린 상황에 있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장-메트로폴리스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다만 직렬적인(lineare) 관계로 해석될 것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지만, 공장처럼 탁월한 생산의 장소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러면 메트로폴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공장의 노동자들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넓혀지고 불필요한 범주들을 솎아내어 단순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가 오늘날 다중에게 과거에 노동계급에게 공장이었던 것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그런 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간성의 물신을 내세우면서 도시를 전적으로 차이와 분리의 관점에서 읽는 사회학들에 경각심을 가진다. 실상 이 다양성 뒤에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이 있다. 추출적 메커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계급에서 다중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면 비유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상황, 다만 착취의 새로운 범주들을 통해 해석해야 하는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추출적 착취, 더 정확하게는 추출적 지배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출주의(estrattivismo, extractivism)라는 테마를 강조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학적 짜임새는 공장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① 분업이 직접적으로 기능적이지 않고 휸육적이지 않으며 통제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② 우리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발전에서 전과는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까를로 베르첼로네( Carlo Vercellone)가 인지자본과 인지노동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미, 탈산업적이지 않고 결정적으로 정보적(informatica)이라고 부른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이제 평형을 찾기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 착취 관계는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정자본과 산 노동 사이에 혼융과 혼종화(confusione ed ibridazione)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정자본이 주체들에 의해 재전유되고, 자율의 장치(un dispositivo di autonomia)로 보이는 사회적 협동의 형태가 출현한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일원적(unitaria)이다. 물론 자율의 요소와 추출적 착취의 요소가 각자의 일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지만, 그 상호관계의 중심성(la centralità della loro relazione reciproca)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는 과거 노동계급과 공장의 관계와 같다는 테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은 이중적 개념이어서 착취자가 있으면 피착취자도 있으며 명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들의 내포적 정의를 이러한 관계의 차원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주체들 자신을 번갈아서 계속적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된다. 나는 너를 정의하고, 너는 나를 정의하며 ···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이러한 상호작용 안에서 주체들의 질이 결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학적 발전이 도출된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유동적이지만 극히 강한 파도 혹은 조수(潮水)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거대한 두 덩어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거시적 수준에서 미시적 수준으로 이동하여 분석하는 것은 분명 복잡한 과제이다. 이러한 이동은 사회학(맑스주의 사회학, 즉 객체의 물신성을 전제하지 않고 주체를 역동적으로 보는 사회학이다)에서 열정들의 작동적 물리학(fisica operativa delle passioni)으로서의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참여하는 연구가 핵심이 아니라 연구를 정의하고 그 연구가 집단적 열정들의 구축에서 작동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는 우리가 마끼아벨리, 스피노자, 역사가로서의 맑스, 그리고 오늘날 푸꼬에게서 보는, 혹은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따리가 시도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비록 후자에는 현실로부터의 과도한 추상이라는 한계와 계급현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인간학적 차원을 암시하는 새로운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각도에서 이것이 고찰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인간학적 차원도 이중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탈산업적 인간학의 두뇌적 형태’(forma mentale dell’antropologia post-industriale)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는 인간이 고정자본을 재획득하는 것, 자본으로부터 기계 부분에 대한 전적인 명령권을 낚아채서 재전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찰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지금은 자본주의적 명령이 더 이상 단순히 기술적 요소들의 인간 신체에의 주입으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재전유의 자율적 능력과 기계 요소들이 인간의 구조물로 변형되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열정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수동적 소비와 연결된 열정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능동적 소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후자가 먼저이다. 이러한 논의는 도덕주의나 순전한 인간 어쩌고 하는 인간학적 어리석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결코 발가벗은 상태가 아니다. 이런 인간 형상은 항상 옷을 입고 있고 무언가 묻어 있다. 인간의 유일한 실재는 옷을 입고 일을 하는 방식에 의해 부여된다. 이는 욕구와 가난의 지평을 정의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가난은 1세기 전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소통의 도구들이나 협동 수준에서의 사회적 통합의 능력의 유무를 언급한다. 분명 우리는 가난을 음식이나 주택의 관점에서만 정의하지 않는다.

메트로폴리스에는 풍요로운 인간학적 직물이 주체들의 자율이 한껏 발전하는 수준에서, 공통적인 경향이나 행위와 연결된 수준에서 존재한다. 이 공통성의 요소는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메트로폴리스에서 근본적인 소여이며 연구가 예비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을 이룬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수천 개의 차이들, 특이성들의 수천 개의 수준, 극히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내적 계획이나 프로그래밍만이 아니라 동일한 위상학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근본적인 인간학적 일관성이 불연속성들을 통해 재구축되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의 불연속성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발견법적 가치를 가진 방법(참여적 연구의 방법)에서의 불연속성과 파열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인간학적 접근법은 산업노동자들을 저항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일반화된 형태로 발현할 줄 아는 주체로 보았던 바로 그 방법을 이어가야 한다.

 

당신은 소비와 가난을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가령 매우 높은 청년 실업율로 특징지어지는 서구 도시 공간에 대해서 말할 때, 작동 중심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한 생산·축적·착취 과정과의 관계에서의 주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가난의 형태로서의 잉여(superfluità)이라는 상태의 출현을 지적한다. 이 관점이 현대 도시에 대한 효과적인 서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오늘날 자본은 생산적 수준에 위치한 주체들을 일의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통치하는 데는, 사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총체적 주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벌거벗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거대한 중심지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발전’이 도약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발전애서도 모든 점에서 주변적인 지역들이 존재하겠지만, 이는 더 이상 직렬로 연속되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서 단계로 나아가는 형태로 일어난다. (가령 오늘날 모바일폰의 확산 정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프리카에 있다.)

요컨대, 총체적 포함의 영토 같은 것이 없듯이 총체적 주변화 같은 것도 없다. 소비를 통한 포함의 신화화만이 아니라 주변화의 신화화와도 싸워야 한다. 총체적 배제의 신화화는 특권화된 정치적 항목을 구성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집단적 행동의 부재증명들―동정, 연민, 종교적 미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부수어야 한다. 우리가 가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즉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추출적 메커니즘에 종속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착취받는 사람들은 결코 총체적으로 가난하지 않다. 무언가를 추출하려면 생산하는 인간적 현실이 있어야 한다. 노예제 속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배제되어 있지 않다.

 

하비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에서 메트로폴리스라는 테마를 다룬다. 한편으로는 지대와 축적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을 다룬다. 그의 제안은 기본적으로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하는 ‘도시에의 권리’를 재개하고 재발명하고 현실화할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것을 사회적 실천의 커머닝에 접목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전략이 적절하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게 이야기하겠다. ‘도시에의 권리’는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는 예를 들면 꾸르뇌브(Courneuve)의 싸구려 아파트(barre)에 살면서 파리 중심지나 비양꾸르(Billancourt)[불로뉴 비양꾸르Boulogne-Billancourt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정리자]로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가지는 권리이다. 못사는 방리유에서 와서 번잡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권리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남쪽에서 와서 외곽 지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토리노(Torino)를 차지할 노동자들의 권리이다. 요컨대 도시에의 권리는 포디즘 시기의 도시 재건설과 연결된 개념이다. 이것이 르페브르의 도시였다. 이는 오늘날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아직 담고 있지 않았다. 하비 식의 테제는 메트로폴리스의 프롤레타리아 구획부분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연합, 내적 재조직화 그리고 반란의 능력에 대하여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도시에서 보여주기 시작한 능력이다. 하비의 생각은 아직 자율적 운동들과 가령 인지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에 반영된 새로운 정치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비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위기들이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발전이 행한 결정적 역할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분명 2008년의 붕괴는 이러했다. 당신은 이런 방향의 사고가 미래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에서도 결정적일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도시 지대(rent)의 문제가 계속 중심적인 것으로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실질적 후퇴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도시 지대는 계속 일정한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수준만큼은 아니다. 나는 발전이 독일 도시 모델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소유 범주들의 혼합이 매우 광범위하다. 물론 베네치아, 피렌체와 같은 관광도시들은 항상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주요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들에 가까운 장소들도 그렇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볼 때 메트로폴리스는 하이브리드 도시가 되어야 한다. 이는 메트로폴리스 자체를 유지하는 비용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피하다. 점점 더 중요해지는 요소는 공통적인 것의 비용(il costo del comune)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시를 재생산하는 비용은 도시 지대의 생산 능력을 초과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대는 세금, 서비스 비용에 의해 직접 공격을 받는다. 이 비용들은 종국에는 부동산 소득보다 커지게 된다.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기보다는 도시 소비의 정상화이다. 이제 축적은 도시라는 기계의 생산적 사용을 통과한다. 이 기계는 포괄적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디어·언어·잠재력·삶양태·네트워크들·지식을 생산하고 무엇보다 협동을 생산한다. 이것은 거대한 ‘결합’이며, 자본에 큰 비용이 들게 하고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는 지대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조와 관계되어 있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미래의 도시는 부동산 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들의 통합 위에 지어질 것이다. 이것이 도시를 규정하는 ‘장치’(dispositifs)이다. 도시를 공장으로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다중의 공장이다. 이 어구는 다중이 생산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늘 확대되고 있는 서비스들의 양과 관련되기도 한다. 만일 도시에 무료 광대역 인터넷망을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돈다면 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며 요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를 더 낫게 기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며 그것을 전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 전역으로 확대되는 협동의 한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

 

이제 주체성과 불복종의 생산지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주제로 가보자. 당신은 최근에 터키와 브라질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메트로폴리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일었다. 이 경험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운동들과 예를 들어 오큐파이나 인디그나도스 같은 운동들 사이의 연관과 불연속점은 무엇인가?

브라질에서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전형적인 문제, 즉 교통요금 문제를 놓고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하지만, 그 다음에는 곧장 도시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고 거대한 건설프로젝트들과 연결된 개발정책들에 반대하는 봉기가 된다. 특히 리오에서 이 정책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거대한 행사에 대한 투자를 도시로부터의 배제와 파벨라(favelas, 빈민촌) 재개발 같은 관행과 연결시킨다. 파벨라는 비참이나 가난이 ‘총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살아있는 비판에 해당한다. 빈민촌들은 가난한 가운데에도 경제의, 생산적 행위의, 그리고 새로운 인간학적 형상들과 새로운 언어, 독특한 문화의 주된 구성부분을 이룬다. (토착 문화만이 아니라 높은 가치를 가진 메트로폴리스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거기에는 메트로폴리스 사회학자들이 (위기가 폭발할 때 말고는) 너무 조금 다루는 마약시장 같은 일탈적인 요소도 있는데, 이는 특히 윤리적-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동체들을 실질적으로 파괴한다.

브라질에서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나 그 다음에 도시의 재구조화라는 문제를 위험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도시가 노예제로부터 해방될 때 형성된, 백인의 메트로폴리스 의식의 상징들과 요새들도 위험에 빠뜨렸다. 파벨라는 메트로폴리스 내부에 있는 ‘다른 도시’이다. ‘다른’ 도시이지만 항상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체계 안에 있다. 도시 개발을 주도하는 정치가들은 이 점을 잊고 파벨라를 공격하는데, 그래봐야 벽에 머리부딪치기이다. 사회주의 정부의 계획자인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은 개발을 산업생산과 잘못 동일시했다. 이러한 ‘낡은 산업주의’(archeo-industrialismo)의 어리석음은 풍성하고도 활발한 저항의 출현에 의해 곧장 드러났다. 저항은 매우 거셌으며 생태론적일 뿐만 아니라 메트로폴리스 내에서 살아있는 공동체적 공간을 유지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 인간학적 변이가 놓여있다. 산업노동자들은 도시를 공장과 동일시하고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로 되돌아가는데, 거기서 사회적 생산의 꼬뮌(una Comune della produzione sociale)을 발견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특징은 생태론적인 데 있지 않고 생산적인 데 있다. 이런 바탕에서 게지 파크(Gezi Park)와 리우(Rio) 및 상파울로(San Paolo)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 투쟁들은 당신이 보기에 개발 내에서 개발에 반대하는 투쟁인가?

이 투쟁들은 생산이 개발에 맞서는 투쟁이다. 생산을 개발과 근본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논평을 한 적이 있는 「가속주의 정치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이 이에 대한 훌륭한 문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개념에 맞서 생산 개념을 다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생산적 공동체를 인정하라는 요구인데, 이 공동체는 인지노동자들, 자본의 가치 추출의 원천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 애매하고 양가적이지만 매우 실재적인 지형에서 근본적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오큐파이(Occupy)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같은 경험들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분명, 서구에서 일어난 위기(추출적 자본의 욕구에 맞추기 위해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재조직화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위기)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 과정은 메트로폴리스와 분업을 재조직화하는 과정이며, 복지제도의 파괴와 새로운 위계의 구축을 노리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예를 들면 10월 19일의 시위의 경우) 복지를 둘러싼 투쟁은 모두 메트로폴리스의 지형에서는 일종의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sindacalismo sociale metropolitano, metropolitan social unionism)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면 오큐파이, 인디그나도스를 좀 이야기해보자. 이 운동들은 위기에서 태어나 위기에 대항하는 운동인데, 다른 한편 놀랍게도 이 운동들은 그들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관심사들보다는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이 요구를 그들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파열적인 표징으로 만들었다.

동의한다. 그런데 이 운동들을 이런 식으로 언급하면서 특수하게 메트로폴리스적인 측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투쟁들이 나타내는 정치적 이행의 어떤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고 어떤 부분들이 비판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면적 수평성은 구성의 시기에서나 미래의 상상된 정치체제에서나 완전히 추상적인 정치구조 모델이다. 이는 격동의 시기에는 잘 작동할지 모르지만, 정치체제의 변형과정을 실제로 구축·관리하려고 시도할 때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나는 대안권력(contropotere, counterpower),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확산된 대안권력들이라는 모델을 더 선호한다. 이는 더 열린 개념으로서 구성적 과정의 양태들과 난점들을 더 효율적으로 매개할 수 있다. 전면적 수평성은 영토적·공간적 다양성―이는 그 어떤 정치운동일지라도 취하여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을 무시하기 때문에 무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인디그나도스는 지역 공동체들에 다시 위치를 잡았을 때 실질적인 도약을 산출했다. 게지 파크의 반란은 실제 동네마을들에 뿌리를 내릴 때, 즉 모든 동네마을이 효율적인 대안권력을 조직할 때, 그리고 이 대안권력들이 명령 구조를 수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될 때 중요해진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구성 자체가 지속적인 기획 구축에서의 전면적 수평성 모델의 적합성을 사실상 부정한다.

 

미국의 경험도 마찬가지인가?

부분적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오큐파이는 복잡한 운동이다.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문제에서 발생했으니, 부채 문제로 출발한 셈이다. 부채 담론을 통해 월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 수준에서는 투쟁의 큰 상징성 말고는 산출한 것이 거의 없다. 미국에서 발생한 것인 한, 전 세계가 보게 되는 것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측정하면, 이 운동은 최근의 것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약한 경험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이 운동은 권력에 의해 가차 없이 해체되었다. 한편으로는 ‘쌍둥이 극단주의’―오큐파이 대 티파티(Tea Party)―를 비난하는 미디어 선전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급진적 정책 변화로 인해 오큐파이 운동이 선거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남는다. 이 운동이 부동산 지대에 대항하여 출현했다는 점, 즉 메트로폴리스 연합주의의 그 어떤 어젠다에도 핵심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중요한 도시 운동들과 투쟁에 대해 말해보았다. 이제 또 하나의 전형적으로 메트로폴리스적 현상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다소 ‘허위적’으로 보이는 ‘봉기’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1992년 LA에서 2011년 런던, 2005년 프랑스 방리유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회적 행동들이 도시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이것들은 거의 객관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당신은 『공통체』(Commonwealth)에서 자크리에서 현대 동시 봉기에 이르는 긴 역사에 걸친 ‘반란의 계보’를 제시한 바 있다. “자크리, 재전유 투쟁, 메트로폴리스 봉기가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가장 주된 적이” 되는 한에서 봉기들은 불충분하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때로 근대 정치학이 우리에게 제공했고 우리가 사회 현실을 읽는 데 흔히 적용하는 전통적 관념들을 통해서는 파악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런 사건들은 권력이 저지른 부당한 살해에 맞서 일어난다. 근본적인 권리인 삶에의 권리(un diritto fondamentale, quello di vivere)에 가해진 모독에 반대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크리는 세금에 대한 공격이라는 확연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세금에 대해 말할 때는 정치이지만, 빈자가 세금에 대해서 말하면 비정치적이라고 한다.

물론 대의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봉기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결국 문제는 ‘정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맑스주의자에게라면 정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면 도시 불복종 현상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힘들다. 이는 사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지형에서 진정한 연합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투쟁들이다. 노동시장의 인종적 조직화나 노동력의 가변자본으로서의 훈육(inquadramento, disciplining)을 통해 일어나는 배제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자발성도 중요한 정치적 특징이다. 그러나 자발성은 출발점일 뿐이다. 나중에 발산, 표현, 반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조직화가 관여된다. 나중에 안정된 구조로 발전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우리 대화의 범위를 넘어선다.

 

결국 당신은 공장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생각이 이러한 사회현상과 집단적 행동을 읽을 수 있는 틀이라고 보는가?

그렇다. 생산적인 포스트포디즘적 메트로폴리스가 이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틀이다.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자본의 삶권력과 주체들의 삶정치가 서로 혼합되고 맞선다. 이 상황이 이렇게 명백하게 주어지는 다른 곳은 없다. 반란은 기본권(살 권리)의 침해에서 일어나서 확대되는데, 보통 가장 강한 억압요소들에 집중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이는 종종 인종주의적 차원 및 그로부터 결과하는 배제와 연관된다. 소비로부터의 배제가 그 요소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재화를 전유하는 봉기의 형태를 띠며 인종적 배제에 맞서는 투쟁은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인종과 계급이 소비를 위한 전유의 충동에서 서로 엮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고통, 즉 가난, 착취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당신은 메트로폴리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주된 열쇠들 가운데 하나로 출현한 ‘인종’ 문제를 언급했다. 이는 매우 많은 관점들로부터 사용되어온 다면적이고 다의적인 열쇠이다. 반동적이고 안보론적인 담론에서 인종문제를 탈식민적 봉기 문제로 보는 담론들까지, 그리고 여러 이유로 ‘인정’ 범주를 참조해온 모든 해석들까지···

··물론, 인정은 중요한 범주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인정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명민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다인종, 다문화 대중들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요소, 즉 항의의 봉쇄 그리고/혹은 흡수(내화)라는 요소와 연관된 애매성을 항상 일정 정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논의를 인정이 아니라 강하게 인종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주체성과 연관시켜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최근의 런던까지 그리고 오늘날 브라질에서처럼 말이다. 브라질에서는 인지노동자들과 파벨라의 아이들(이 아이들은 수 세기에 걸친 인종적 지배 이후에 자기표현의 권리를 얻고 있다)이 투쟁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함축을 가진 자본주의적 지배의 경직성의 이러한 분쇄는 이례적인 사건이다. 요컨대, 도시 봉기들의 원인과 특징은 다양하지만, 그 변별적 특징은 누구에 맞서 봉기하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 봉기한다. 그래서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중요한 것은 이 과정들 안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순전히 인정(종종 정체성에 기반을 두거나, 고립된 자기재생산의 메커니즘들을 산출한다)의 관점에서만 주어질 때에는 종국에는 그 과정들을 부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다양성이나 착취 명령의 통일성이나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과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예외’의 공간인가?

예외상태는 자주 반복되지만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이 상수는 아님을 말해준다. 정치체제에서 발휘되는 독재라는 형태의 예외와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해 시행되는 예외적 규범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제노아 2001년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예외성이 정치체제에서의 예외보다 가능성이 더 높다. 둘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외라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순간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갈등의 강렬도에 좌우된다. 아감벤 등이 형이상학적으로 세련되게 혹은 순진하게 아나키즘적으로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이들은 다른 모든 것이, 아니면 적어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잘 되고 있는 때에 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예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지칭해야 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예외상태가 하나의 정책에서 독재상태로 언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전쟁관계로서의 계급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로마 역사가들, 키케로 같은 정치가들의 정치과학은 이 국면에서 매우 조심스럽다. 타키투스는 예외상태가 다른 수단으로는 풀 수 없는 갈등의 순간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애써 보여준다. 예외상태는 전쟁상태가 존재할 때 발생한다. 체계가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음성적이고 훨씬 더 효과적인 폭력과는 다른 예외상태의 폭력은 권력이 그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볼 때 폭발적으로 행사된다.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는 ‘갈등 없는 폭력’에 대해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위기란 극단화된 갈등이 아니고 무엇인가? 1973년 최초의 탈근대 위기부터 갈등이 심화되어왔다. 40년 동안의 위기는 새로운 축적형태의 근본적인 조직화와 함께 아마도 자본에게 유리하게 끝나가고 있지만, 이러한 ‘축적의 자본주의’(임금 및 가변자본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시초적 축적)의 장기적 재구성 국면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발전되고 해결 불가능한 위기라기보다는 굽힘 없고 사회적으로 확산된 저항이다. 인지노동자들의 생산적 ‘초과’(l’“eccedenza” produttiva)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갈등은 영속적인 조건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볼 때 ‘갈등 없는 폭력’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이는 폭력의 이름으로 갈등을 제거하는 저 표준적인 정식화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국가규범의 전적인 예외성이라는 생각처럼 들린다. 폭력이 없어도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다음에 폭력이 온다. 왜냐고? ‘극단주의적’ 폭력을 보면, 그것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행사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힘이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정치체제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공포의 원인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충분하도록 항의의 ‘초과’(eccedenza[네그리에게서 ‘초과’는 기존의 척도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질의 생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정리자])를 행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공장투쟁, 사회적 투쟁에서 엄청난 비등의 상황이 정치체제에서 들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회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강화하지 않고 군사주의로 달아난 것이었으며 그런 다음에 군사주의적으로 진압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갈등은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 하고 ‘예외상태’를 봉쇄할 수 있는 ‘초과’를 펼쳐내야 한다.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폭력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제안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폭력-공포의 순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라.

폭력 그 자체를 위로부터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① 경찰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종류의 범죄(폭력)이든 주권에 거스르는 범죄로 간주되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모든 폭력행동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주권의 메커니즘에서는 모든 것이 대패질되고 사회적 갈등이 위로부터 규정된다. ② 폭력은 항상 존재한다. 이는 억압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조직되어야 할 요소이다. 폭력은 자연적인 소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구조와 연결된 요소로서 존재한다. 체제가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유형으로든 전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정당성이란 명령의 행사와 명령 행사의 목적에의 동의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에 의해서만 지시될 때 정당성의 발휘가 작동하지 않거나 유실되거나 왜곡될 큰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부과되는 정당성은 사실 폭력에 해당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의 대응은 폭력적이고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러운 폭력―자본의 권력을 지키는 법적 질서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한 것인 만큼 그렇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대항폭력이며 대항권력이다. 정당성의 대항적 표현이다. 부당한 질서에의 저항을 담은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 그런데 주어진 질서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한편으로는 각 주체의 양심이 결정한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변화되어온 주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령의 행위가 결정한다. 정당성의 결정은 이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폭력이 권력을 규정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것인 주체들의 삶정치적 활력을 규정하기도 한다.

정당성은 항상 관계일 뿐이고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보장하는 객관적인 방식은 없다. 그래서 벤야민 같은 작가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나치 정권의 폭력에 당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몰라서 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보았으며, 종종은 1920년대 공산주의 정책들에 대한 자기비판을 회피했다.(이 회피는 벤야민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폭력의 비합리성이라는 생각이 부르주아 문화에 근본적인 것은 이 문화가 자본주의적 지배의 형테를 취하지 않은 민주적 명령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권이 형식적으로 인정(이는 시장의 지배를 의미한다)되지 않고 물질적으로 인정(이는 공통의 제도를 의미한다)된다면 민주주의는 지배의 반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폭력은 동의될 때에만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합의의 고양이 있을 수 있다. 대의메커니즘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참여를 통한 동의이다. 우리가 폭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모델은 폭력의 최소화가 가능한 모델이다. 모두의 실질적 동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든 사람이 착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과정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는 실질적 대항권력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포는 체제의 폭력을 창출하는 데 핵심 요소이다. 주권의 우월함은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공포는 항상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이며, 이것을 토대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라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 주권이 구축된다. 이 모든 것이 거의 설득력이 없다는 것, 즉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시민 질서에 대해서만 필수적 도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홉스의 틀에서 공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힘을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을 조직하는 건설적 요소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 다음에 질서가 온다. 그런데 지금은 공포가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성을 조직하고 공포를 재생산한다. 공포는 우리 삶의 모든 장치들의 거대한 대륙이다. 욕망은 공포에서 안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서 공포로, 불안정성에서 불안정성으로 움직인다. 공포는 주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확대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겁낸다. 사람들은 밤에 나갈 수 없고 여성들은 모든 거리의 구석에 있는 강간범들을 조심해야 하며 텔레비전에서는 범죄물만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공포는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들의 재조직화와 유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이며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지점들을 이룬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평온함이 쉽게 혁명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다.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발표문
  • 설명 : 아래는 2018년 5월 2일 경의선공유지에서 열렸던 <2018 커먼즈네트워크 워크숍>의 기조발제문에 조금 더 손을 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출처 표시가 잘못된 주석 하나를 바로잡았고 본문과 주석에 몇 대목을 추가적으로 삽입했다. 추가된 부분은 전체 글의 흐름과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종의 방주로 간주되면 된다.

    말이 기조발제지 사실은 그 자리에 손님으로 가면서 맡은 것이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들이 초청한 것이라서 커먼즈 운동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항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작성했으나 상당히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커먼즈 운동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청중이 당연히 있었고 이 분들은 기조발제를 듣고 ‘뭔 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을 전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해서 많은 내용을 주석으로 내려서 나중에 텍스트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본문도 다 소화 못할까봐 읽을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미리 생각해서 갔는데 그나마 그렇게 준비한 부분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더 늘리더라도 여기에 올리면 누구라도 이 발제문을 찬찬히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먼즈 운동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선 이 블로그에 최근에 올려진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의 가장 최근의 대담을 참조하고 이에 덧붙여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49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안근대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커먼즈 운동을 포함한 여러 운동들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인데—이란 ‘역근세수’와 ‘환골탈태’의 과정이 몸과 정신에서 공히 일어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의 몸과 정신의 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온갖 근대적 물신들(굳어진 사고·감정·행동의 습관들)을 씻어내야 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록 조그만 것일지라도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유형의 습관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쉬운 말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근대적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신들을 싹 씻어낸 후에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11장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되기’의 소박함으로, 혹은 “풀과 순수한 물 조금”의 단순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파일에서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 안의 주석 두 개가 누락되었다. 한글파일을 그대로 전환한 pdf 파일을 아래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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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커먼즈 운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커먼즈 운동을 조금 소개해왔을 뿐 이 운동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저로서는 커먼즈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을 듯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미’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의 이론에 비추어 보는 것일 듯합니다. 제가 삶정치론을 나름대로 공부하며 다듬다가 커먼즈 운동을 알게 되었고((네그리·하트의 저작에서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게 되었으며, 둘째 번역서인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번역하면서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데이빗 볼리어(David Bolier)를, 그리고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던 공부와의 연관성 때문에 커먼즈 운동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커먼즈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커먼즈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삶정치론은 탈근대(여기서는 시기를 가리키며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68년 혁명 이후, 혹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난 이후를 말합니다)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즉 한편으로는 소외의 극단적 심화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일반화 가능성을 낳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둡니다. 소외의 극단적 심화란 삶권력(biopower)의 등장—가령 자본이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저항의 일반화란 이렇게 대립구도가 ‘권력 대 권력’의 구도((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구도로서 홉스 이후 거의 모든 정치학은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공식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가 아니라 ‘삶 대 삶권력’이 된 상황에서는 삶이 있는 모든 곳에 저항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소외의 문제를 가장 먼저 명시적으로 제기한 것은 맑스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근대주의자들(국가자본주의자들)로 전환되면서((‘소외’를 제시할 때의 맑스를 초기의 맑스, 즉 아직 미숙한 맑스로 보는 태도가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미숙하지 않다고 평가받을 여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한 일 가운데에는 자본의 논리와 관점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도 속합니다. 가령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레닌과 스위지(Paul Sweez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자본가들 사이의 내적 동학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노동자들의 불가피한 봉기로서 예측하는 것은 그저 이 동학의 설명되지 않은 부산물로서만 나타난다.”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p.191. 이 저작에는 이런 취지의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묻혀 버립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근대화 경쟁을 하는 구도(‘냉전’)는 바로 이러한 전환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성숙기의 맑스가 소외의 문제를 잊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소외’라는 제목이 딸린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내용상으로는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생산의 원래적 조건들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성들 사이의 자연적 과정을 통한 인간의 수의 점증하는 수의 재생산은― 이 재생산은 일면으로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전유로 나타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형성으로서, 객체들의 주체적 목적에의 종속으로 나타난다. 주체적 활동의 결과들과 저장고들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래 그 자체가 생산물이 될 수는 없다. 즉 생산의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있는 활동적인 인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 사이의 통일이 아니라, 따라서 자연의 전유가 아니라, 이 인간실존의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적 실존 사이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489. 이 외에 『자본론』 3권의 이곳저곳에서도 소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소외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성숙기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이는 곧 소외의 정점입니다—에서 자본주의를 즉 소외를 넘어서는 조건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자본의 한계를 말하는 여러 대목이 있는데 한 대목만 들어봅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Grundrisse, p. 749.))

맑스의 진의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소외’의 문제를 파묻어버린 것과는 달리, 20세기 중반부터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온 일련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푸꼬의 삶권력/삶정치론((푸꼬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실제 혹은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 달리 말하자면 권력을 사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파훼했습니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27.)), 들뢰즈·가따리의 삶의 철학((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의 철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생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발제의 편의상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들뢰즈·가따리가 ‘삶’(vie, life)라는 말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일단 쓰는 경우에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재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은 ‘삶의 평면’(a plane of life)과 동의어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대목은 그들의 가장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에도 몇 군데 나오지만짧지만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몇 페이지로 압축한 글 「내재성 : 하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이 계보가 푸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앞에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가 있습니다. ‘삶권력’, ‘삶정치’라는 말은 푸꼬가 만든 말인데, 푸꼬는 양자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네그리·하트에게서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립되는 ‘삶의 정치’라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발제문에서 ‘삶정치’는 기본적으로 네그리·하트의 사용에 따릅니다.)) 이 계보는 자본주의를 ‘삶권력’—삶을 장악한 권력—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소외의 문제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삶의 힘(삶의 활력)을 저항의 힘으로서 새로이 부각시킵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경우 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비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권력(자본가가 권력)에 권력(노동자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추구되었는데, 이제 삶정치에서는 ‘삶 대 권력’이 기본적인 적대관계를 구성합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권력이 삶을 목표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때 권력에의 저항은 이미 삶의 편에 서며 삶을 권력에 대립시킨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통제하는 데 몰두하는 체제에 대립시켜지게 된다. / (···) 외부로부터 오는 힘은 푸꼬의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활력주의(vitalism)가 아니던가? 삶은 권력에 대항하는 이 능력이 아니던가? ��병원의 탄생��부터 줄곧 푸꼬는, 삶을 죽음에 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활력주의를 창안한 비샤(Bichat)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에게만이 아니라 푸꼬에게도 인간의 죽음에 대항하는 힘들과 기능들의 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일단 인간적 훈육으로부터 해방되면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푸꼬는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Gilles Deleuze, Foucault, p.92. (인용자의 강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삶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놓겠습니다.((영어로든 대부분의 유럽어로든 양자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양자를 ‘bios’(삶)와 ‘zoe’(생명)라는 희랍어로 구분합니다.)) 삶은 존재론적 원리이자 힘(활력)입니다.((이기묘합(理氣妙合)입니다.)) 생명은 에고로서의 개체가 활력을 받아서 자신의 생물학적 실존을 유지하는 힘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개체들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주체성을 구성하고 그로써 하나의 온전하고 뚜렷한 삶의 형태를 개화시키는 힘입니다. 개체의 관점에서는 생명은 출발점이고 삶은 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령 D. H. 로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의의가 아니다.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이것이 최고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운명이다. 즉 미지의 것의 가장자리로 가서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이.((Lawrence. D. H.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441. 들뢰즈·가따리는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체화인 ‘개별 주체로의 개체화’와 ‘삶의 개체화’를 맞세운 바 있습니다. “··· 삶의 개체화는 주체(이는 삶의 개체화를 이끌거나 지탱해준다)의 개체화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평면’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공재의 평면 혹은 각개성(haecceities)들이 모여서 이루는 평면이다. 이는 오직 속도와 정동만을 안다. 후자의 경우는 형식들, 질료들, 주체들로 구성되는 전혀 다른 평면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261.))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의 차원에서의 일이며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은 삶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삶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영원’의 차원에 속합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여 더 설명하자면, 생명은 ‘코나투스’(conatus)에 해당하며, 삶은 ‘코나투스’에서 출발하여 ‘욕구’(appetitus), ‘욕망’(cupiditas)을 거쳐 ‘사랑’(amore,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코나투스(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고, ‘욕구’(appetitus)는 코나투스를 정신과 몸 양자와 연관시킨 것이며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구’입니다. ‘사랑’(amore)은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는지를 알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사유능력(행동능력)의 증가가 가져오는 정동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슬픔’입니다.))))으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 해당합니다. ‘코나투스’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듯이, 생명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삶은 아닙니다.((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이 출발점의 확보(생계수단의 획득)를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 동안 노동력을 팔아도 출발점에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곳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삶은 개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삶형태의 개화—가 목적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① 기존의 삶형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② 새로운 삶형태를 만개((저는 ‘만개’의 한자어 ‘滿開’에 ‘萬開’를 중첩시키고 싶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형태로 만개하다’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시켜야 합니다. 삶정치론은 이 두 가지를 해내는 힘, 이 삶의 힘을 ‘활력’이라고 부르며 권력에 대립시킵니다. 영어를 제외하고 활력과 권력을 따로 부르는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있습니다.

 

권력

활력

라틴어

potestas

potentia

불어

pouvoir

puissance

독일어

Macht

Vermögen

스페인어

poder

potencia

이탈리아어

potere

potenza

영어

power

power

활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이해는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힘은 존재론적으로 본원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그 다음에 옵니다. 권력은 이 달라지는 힘이 발휘되지 않도록, 즉 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 힘입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라는 푸꼬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Vol. 8, NO. 4 (Summer, 1982), P.790.)) 그런데 어떻게 막는 것일까요? 죽임으로써? 죽이는 권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합니다.((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의 경우에는 혹시 모르기에 “일반적으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철학』이라는 책에서 생명을 잃는 ‘외적 죽음’과는 다른 ‘내적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권력에 의해 노예화된 삶을 가리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이것이 바로 ‘내적 죽음’입니다. 현대의 삶권력은 바로 이 ‘내적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양산합니다.)) 그러나 ‘죽임’은 삶권력의 발휘 양태가 아닙니다.((죽이는 것은 개체(에고)의 생명을 취함으로써 그 개체가 하나의 삶형태를 만개할 가능성을 아예 자르는 것인데, 해당 개체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원적인 삶의 활력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활력이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활력이 현실화(육화)되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을 각각 ‘삶의 장’과 ‘현실화의 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삶의 장은 오직 변화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은 활력이 형태를 부여받아 육화되는 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에서 ‘지층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납니다. 지층화한 위계(수직적), 인과(수평적), 틀(3차원적)을 이루는 관계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정적으로 존속하면서 활력이 새로운 형태를 띠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형태로 반복되게 하는 것입니다.((A Thousand Plateaus, p.335.)) 이 지층화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삶권력입니다.

삶권력으로서의 자본은 삶의 활력이 산출하는 차이소(Δ, ‘삶의 잉여가치’ 혹은 ‘초과’((‘삶의 잉여가치’는 들뢰즈·가따리의 용어이고 ‘초과’는 네그리의 용어입니다.)))를 수량화하여 ‘가격’(교환가치)의 형태로 ‘경제’ 체계로 끌어들입니다. 수량화는 척도에의 종속을 전제하며 척도에의 종속은 지층화의 한 양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의 수량화가 필연적으로 (사용가치)의 동질화를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동질화를 동반하는 수량화는 활력의 늘 달라지는 힘을 덮고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달라지는 힘은 현실성의 층에서는 질적인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획이 계속되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공고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성)이 번성하게 됩니다(([추가]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욕망과 사고방식이 자본이 지향하는 방향에 부합하는 주체성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생산·재생산합니다.(증식/축적)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규칙—예컨대 가게에 들어가면 특정 액수의 돈을 물건과 바꾸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몸에 배고 정신에 뱁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동반하는 가치의 수량화(가격화)와 함께 개인들을 사적 소유자이자 교환자(노동자+소비자)로 정착시킵니다. 이는 개인들에 잠재하는 특이한 활력들을 (하이데거의 용어를 끌어다 쓰자면)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된 개인들은 협동과 공감의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경쟁과 배제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의외로 악영향이 큽니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인 많은 좌파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론과 방향이 더 옳다면서) 경쟁해온 것을 보세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서는 이렇듯 ‘배제적 이접’(들뢰즈·가따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활력들을 가둔 울타리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으니까요.[/추가])). 이로써 삶권력으로서 자본이 삶을 포섭하는 작업이 일정하게 완료되는 것입니다.((『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유명한 마쑤미(Brian Massumi)도 최근에 나온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에서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하는 일이 이 Δ를 측정 가능한 이윤/가격의 형태로 포획하는 것으로 봅니다.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

삶정치론의 목표는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단 ‘삶권력으로부터’라는 점에서 삶정치론은 커먼즈 운동과 명시적으로 상통합니다. 커먼즈 운동 또한 (오스트롬의 전통적인 공유지 연구에서부터) ‘국가와 시장(자본) 외부 혹은 너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통적인 공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 삶의 해방의 차원에서도 양자가 상통하는지는 삶정치론이 어떤 구체적 기획을 가지는지를 더 알아보고 커먼즈 운동의 구체적 기획과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삶의 해방’이란 말이 아직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정치론은 이론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하지는 못하며 반대로 커먼즈 운동은 실천적 운동이기에 그 운동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삶정치론의 기획에서 삶이 만개에 이르는 과정은 둘로 나뉩니다. ① 우선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삶권력이 워낙 삶 깊숙이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탈근대에 일어난 자본의 변형은 생산하는 다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삶권력의 포획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일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② 삶권력이 장악했던 그 자리(현실화의 장)에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두 단계 혹은 측면에 상응하여 네그리는 활력을 ‘가난’의 힘과 ‘사랑’의 힘으로 나눕니다. 가난은 권력을 텅 비운 상태(제로 지층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활력의

씨알이 잠재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이 씨알이 활력으로 전개되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삶정치론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형태로 더 구체화한 것이 ‘특이성들의 다중’, ‘공통적인 것’(the common) 그리고 ‘민주주의’ 3자의 관계입니다.

삶정치론의 주체는 ‘다중’입니다.((사실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성 혹은 주체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푸꼬에서 네그리에 이르는 삶정치론자들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양자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는 자본의 생산방식에 일어난 변형(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혹은 삶정치적 생산)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네그리는 그 이전에는 ‘전문 노동자’, ‘대중노동자’, ‘사회적 노동자’의 순서로 이러한 주체 형상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중 이전의 대표적 변혁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위치의 동일함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면, 다중은 자본에 고용되든 아니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서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루어집니다. 다중은 경계가 확정된 어떤 고정된 집단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다중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와 무관합니다.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다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만들고 나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다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다중 만들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다중의 형성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촛불’다중은 한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정된 형태로 남는 식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성들의 다중’ 즉 특이성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이 바로 자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개인’도 근대의 산물—커먼즈를 파괴한 그 근대의 산물—입니다. 커먼즈를 상실한 개별 인간들이 바로 ‘개인’들입니다.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민중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산산이 흩어져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발전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개인’은 “권력의 최초의 효과들 중 하나”입니다.((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5-1976, Translated by David Macey (New York: Picador, 2003) pp.29-30. 이 앞에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29.)) 이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쳐진(종획된) 정신과 몸의 구현물이며((이런 의미에서 소외의 한 양태입니다.)) 사적 소유의 주체입니다. 이제 ‘개인’은 ‘일자’가 되며 ‘정체성’에 정착합니다.((이렇게 개인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관입니다.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도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인간/자연으로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나누면 반드시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남/녀, 어른/아이, 중심/주변 등등의 나눔 짝들을 보세요.))

삶정치론은 여러 특이한 힘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공재하며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리로서의 개인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특이한 힘이란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이 그때그때 다른 것을 각개성(haecceity)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활력의 크기는 이 공재하는 힘들이 얼마나 협동적이냐에 따릅니다. 각 힘들의 Δ들은 사실 서로 상쇄될 수도 있는데 협동의 방식으로 네트워킹되는 경우에는 활력의 상호증가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공재하는 특이한 힘들은 각각 외부의 다른 힘들과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형태의 다중 만들기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어떤 커머너가 여러 커먼즈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핵심은 개인보다는 특이한 힘들 그것들의 협동적 관계입니다. 즉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힘이 그를 거쳐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다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다중’을 말하면 근대적 개인관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중을 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고정된 집단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다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이성, 특이한 활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시선의 일부가 늘 예의 ‘삶의 장’에 두어져 있고 거기서 활력을 받아오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다른 운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커먼즈 운동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필요상 한 커먼즈 내의 커머너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특이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장’에 접속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것이 무엇이든)에 그치는 운동이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커먼즈 운동과 연관된 이론가나 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궁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데이빗 볼리어의 Think Like a Commoner(한국어판 배수현 옮김『공유인으로 사고하라』갈무리 2015)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에 소개되는 베버(Andreas Weber)의 연구 —이는 ‘Enlivenment’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커머너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삶의 장’에 접속하는 훈련을 하는 것, 즉 사물을 포함한 주위세계와의 동지의식을 양성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 특이성(singularity)은 스피노자에게서 와서 푸꼬((푸꼬의 경우에는 가령 ‘다양체론’(‘모든 사물은 다양체이다’)이 특이성에 대한 인식에 속합니다. 믈론 더 파고 들어가면 이뿐만이 아니지만요.)), 들뢰즈·가따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네그리·하트에게 이어집니다.((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으로서의 특이성도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singularitas’, ‘singularity’, ‘singularité’, ‘특이성’ 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특이성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발제문에 거론한 철학자들 이전에 영문학 전통에서 ‘특이성’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들뢰즈 사유의 한 원천인 (소설가) 로렌스가 말하는 ‘individuality’는 그 내용은 특이성에 해당합니다.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identity’와 ‘selfhood’— 저는 각각 ‘열린 자아’, ‘닫힌 자아’라고 옮깁니다—가운데 전자는 특이성들에 열린 자아이고 후자는 하나로 단일하게 종획되어 닫힌 자아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문화전통에도 특이성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존재할 것입니다.)) 특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이며 이는 인간의 경우 ‘인격’으로 구현됩니다. 개체를 특이성들의 ‘공재’인 다양체로 보지 않고 단일하게 통일된 상태로 보는 것이 ‘정체성’, ‘인격’입니다.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관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양체이니까요.((‘인격’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을 보려면 http://minamjah.tistory.com/181?category=572143를 참조하세요. 『99개의 테제』에서 마쑤미는 ‘인격화’(personalization)을 개인의 활력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양상의 하나로 봅니다.)) [/추가]

그런데 특이성들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이루어 모여 있더라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조건으로 해서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것이 다시 갱신된 다중의 새로운 활동 조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통적인 것이 갱신되고 이와 함께 다중도 갱신됩니다.((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때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는 정동이나 제스처처럼 대부분 공통적이며, 만일 사적이거나 공적인 것이 된다면—즉 단어·어구·품사의 많은 부분이 사적 소유나 공적 권위에 종속된다면—표현·창조·소통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공통체』(사월의책 2014) 17-18면.))

공통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삶정치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네그리·하트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귀족제입니다. 선출된 소수의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처럼 통치의 한 방식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이 통치라면 ‘자기통치’입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일반의지’(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다중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의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절대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과연 다중을 구성하는 모두가 자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네그리와 하트는 “러시아 민중은 작업장에서 종속과 감독 그리고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도록 훈련받았으며, 직장에 상사가 있기에 정치에서도 상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견해((『공통체』 256면.))를 소개한 후에 ① 자본주의의 기술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생산의 방식— 삶정치적 생산—이 다중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② 혹시 아직 훈련이 덜 되었더라도 민주주의의 훈련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는 곳이며 민주주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커먼즈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삶정치론의 민주주의론은 그 복잡한 디테일을 덜고 나면 커먼즈의 민주주의와 바로 통하는 것입니다.((물론 사회 전체에는 아직 ‘지도층’이 건재합니다. 따라서 삶정치론이 비록 지도자의 부재를 지향할지라도 실제 현실에 지도자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를 향한 경향을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집회』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향을 ‘전략과 전술의 전도’에서 읽어냅니다. 과거에는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지난 촛불에서 일정한 만큼 목격했던 바입니다. 전체적인 방향 즉 전략을 결정한 것은 촛불다중이지 지도부들이 아닙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강한 친화성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커먼즈(commons)의 어휘상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표면상의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옮긴이] 이는 커먼즈 역사가인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말이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 p.5.))

여기서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란 삶정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이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부단히 공통적인 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통하고, “프로토콜”은 참여자 모두에 의한 거버넌스의 규칙이라는 점에서 다중의 민주주의와 통하며, “자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먼즈나 공통적인 것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공통재(common goods)를 포함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고 주체적 활동의 측면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커머너’(commoner)는 다중에 속한 한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네그리·하트도 『선언』(Declaration, 2012)에서 ‘커머너’와 ‘커머닝’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정치론에 들어와있는 용어처럼 설명합니다. 커머너의 커머닝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으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New York: Argo Navis Author Services, 2012). Declaration, p. 105. 이 대목은 조금 길지만 읽을 가치가 있기에 뒤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에 바라는 바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는 초기의 태도에서 진전된 것입니다. 2004년에 네그리·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용어를 피하고 ‘공통적인 것’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커먼즈라고 부르기를 꺼리는데, 커먼즈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적인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더 어색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그 철학적 내용을 더 부각시키며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한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2004) p.xv.))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9년이고 P2P재단은 2005년에 창립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블로그는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2004년의 네그리·하트로서는 커먼즈를 전자본주의적인 공유지 이외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커먼즈가 전통적인 공유지의 협소함—이것을 이유로 오스트롬의 커먼즈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에서 시원하게 벗어난 것은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입니다. 이로써 커먼즈 운동에 전지구적 차원이 부여되고, 이는 DG-ML(Design globally, manufacture locally)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P2P 생산양식의 더 구체화인 형태)을 다듬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점도 삶정치론과 묘하게 통합니다. 네그리·하트가 다듬어낸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나중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의 기술적 변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변형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커먼즈 운동이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는 다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개념으로서 다듬어지는 계기와 동일합니다.

흥미롭게도 네그리·하트는 가장 최근의 책 『집회』(Assembly, 2017)에서 ‘공유지의 비극’론과 함께 그것을 반박하는 오스트롬을 명확하게 거론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 96. 이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부의 사용과 부에의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통적인 것의 현대적 적합성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저작을 쓴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바르게도 거버넌스와 제도의 필요에 초점을 둔다. 오스트롬은 모든 부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황폐해지지 않게 보존되려면 공적 재산이 되거나 사유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공유지의 비극’류의 주장들 모두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녀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s)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이 관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는 반대한다. 집단적인 형태의 자주관리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규칙이 고안되고 수정되며, 또한 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시행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의 재산 배치.’”))

둘째 문장의 경우 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이후 커먼즈 운동이 규모의 한계를 부수고 발전하고 있는 지금 그 초석을 놓았을 뿐인 오스트롬(과 그녀의 연구의 대상인 전통적인 형태의 커먼즈)을 놓고 저렇게 비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커먼즈는 다중처럼 언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볼리어가 말했듯이 “커먼즈는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접근, 이용, 장기적 돌봄을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2014), p. 128.)) 그리고 그 규모는 지역 너머, 일국 너머, 대륙 너머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바우엔스 등의 커먼즈 활동가들 또한 네그리·하트처럼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의 포부가 네그리·하트의 포부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집회』에서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대목((Assembly, 15장 2절))과 「커먼즈 이행과 P2P 입문」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나중에 더 확장되어 http://commonstransition.org/commons-transition-p2p-primer/에 올려져 있습니다.)), 2017년 3월)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커먼즈의 (정치적) 확대를 말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움직임을 말한 것이므로 일단 정치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표에는 여기에 경제 영역의 유사성도 추가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삶정치

커먼즈 운동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작은 규모로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운동단체들, 엑서더스

커먼즈의 생산공동체 자체

국가와의 관계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가령, 민중의 ‘하인’이 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파트너 국가론 : 생산공동체를 국가의 법의 틀에서 합법화하는 비영리 지원단체들의 확장1)주석누락

(참고) 자본과의 관계

다중의 기업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헤게모니 전략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2)주석누락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경제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의회’(Assembly of the Commons)가 구상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국 사회의 범위 너머로 확대될 수 있다.

이 표를 보면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친화성이 그 차이를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저 표에서 ‘예시적 정치’라는 항목과 관련해서일 것입니다. 표에서 보듯이 네그리·하트는 운동단체들이 자체 내에서 수립하는 민주주의에 ‘예시적 정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한국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운동단체들의 경우에는 자체 내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촛불 다중의 수평성은 다중 자체가 이룬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다중이 막 형성되던 초기에 특정 운동단체가 지도하려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해외의 경우 1999년 씨애틀 이후에는 특히 소문자 ‘a’의 아나키스트들(anarchists)이 절차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newleftreview.org/II/13/david-graeber-the-new-anarchists 참조.))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 정치’는 필요하지만 예의 ‘세 얼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의 정치를 ‘예시적’이라고 부를 때 이는 단지 필요한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미래의 예시적 현존, 따라서 확대되어야 할 씨알로 보는 것입니다.

커먼즈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제의 예시적 형태들이 이미 존재한다. 커머너들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며 이미 커머닝을 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커먼즈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Michel Bauwens, Vasilis Kostakis, Stacco Troncoso, Ann Marie Utratel, “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p.47.))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고정된 조직화 형태를 모델로서 말하지 않고 미지의 상태로 두는 삶정치론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의 발명에 더 강조점을 둔다면, 커먼즈 운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조직 혹은 공동체 형태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고 말입니다.

[추가]

커먼즈 운동은 원리상으로 자본 너머를 지향하지만, 현재 자본에 ‘연루’된 현실을 무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쑤미가 「99개의 테제」에서 ‘창조적 이중성’(creative duplicity)이라고 부른 것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자본 너머’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깨우친다고 해서 바로 자본 너머로 나가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자본주의에 몸을 둔 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굳이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창조적 이중성’입니다.((마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루를 한탄하지 말고 즐기라. 교리상의 용감함으로 남을 비판하며 지배하지 말라. 창조적으로 유희의 장에 내려가 몸을 더럽히라.”(테제60, 주석c))) (깨우침과 그 이후의 실천을 합해서 ‘돈오점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점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돈오’의 비타협성을 고수하다가 활력을 탕진하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깨우침이고 뭐고 없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을 넘어설 만큼의 활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이고 협동하여 오랫동안 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점수’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슬기롭게 운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커먼즈 운동에서는 이러한 ‘점수’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성적 자본’ 혹은 ‘친구로서의 자본’은 시장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돈을 벌지만, 그 돈을 커먼즈의 축적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트너국가’론은 국가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가능하다면 커먼즈 운동을 돕는 곳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선보인 도시자치주의는 정당정치와의 창조적 관계를 실행합니다. 정당정치를 정당을 넘어선 연합의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점수’의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계속 창출될 것입니다.((스페인의 도시 커먼즈 운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대담으로 http://minamjah.tistory.com/233 참조.))

[/추가]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대안근대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형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커먼즈 운동가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맑스가 이미 한 말이 있습니다. 맑스는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 557.))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 혹은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출처 수정함]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이것이 맑스가 보는 커먼즈입니다. 사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그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을 넘어서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들 것이라고 추론해냄으로써 네그리에게 큰 영감을 준 바 있습니다.((네그리는 한때 감옥에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는데,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이 맑스와 스피노자의 저작들입니다. 네그리는 양자 모두 근대 속의 탈근대(나중에는 ‘대안근대’)로 꼽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맑스가—그에게 두 측면이 공존함으로 인해서—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네그리·하트가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에 상응하여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다듬어낸 것과 연관되며, 다른 한 측면은 커먼즈 운동의 새로운 부활과 연관됩니다.)

지금은 맑스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매우 안타까운데요, 사실 (삶권력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지만) 맑스가 가장 먼저 자본과 국가를 삶권력으로서 포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맑스를 잘 읽으면, 자본주의는 (아무리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사명((맑스는 자본의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인정합니다. [추가]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은 ··· 사물이 스스로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종식된 단계에 이르게 되자마자 완수”됩니다. Grundrisse, p.325.[/추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맑스의 자본 연구는 바로 이 ‘극복’을 위한 준비에 다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은 만개라는 자기목적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유로운 조건이라면 각 개인이나 집단이 이 출발조건에서 만개를 향해 나아가는 만큼이 그 성취입니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라도 모두가 만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억압적인 조건에서도 삶을 만개시키는 데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소수나 특출한 소수의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조건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 구성의 원칙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 조건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협소함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출발조건을 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 언론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인 양 위장했습니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출발조건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워킹머신과 같습니다. 열심히 걷고 뛰어야 그 위에 간신히 서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뒤로 쳐지고 맙니다. 출발조건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의 행태도 출발조건에 갇혀 있습니다. 만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내일의 출발조건, 내년의 출발조건, 후손의 출발조건을 확보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의 출발조건을 미리 확보하려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어리석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조건이 삶의 감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유리합니다. 한편으로는 희소성의 원칙에 갇히지 않는 부를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만)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환경의 실제적 경고도 존재합니다. 커먼즈 운동은 자급운동(출발점의 확보)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만개를 향한 운동, 진정한 삶의 가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정치론은 좋은 동지요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록1]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커머너’와 ‘커머닝’

중세 잉글랜드에서 커머너(commoner)는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세 신분―싸우는 계층(귀족), 기도하는 계층(성직자), 일하는 계층(커머너)―의 하나였다. 영국 등지에서 근대 영어의 용법에 보존된 ‘커머너’라는 용어의 의미[우리말로 ‘평민’]는 작위(爵位) 등의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 즉 보통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택하는 ‘커머너’라는 용어는 중세 잉글랜드로 소급되는 생산적 성격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커머너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기 때문에 ‘커먼’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공통적인 것에 입각하여 일하기 때문에 ‘커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빵 굽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방아 돌리는 사람 같이 직업을 가리키는 말을 이해하듯이 ‘커머너’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듯이, 커머너는 커머닝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을 만든다.

따라서 커머너는 비범한 과제―사유 재산을 모든 이의 접근과 향유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일,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되는 공적 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경우마다 공통의 부를 민주적 참여를 통하여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지속시키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하는 일―를 성취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렇다면 커머너의 과제는 빈자들이 자급할 수 있도록 들판과 강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음악,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수단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이 과제를 성취할 선결 조건들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사회적 유대를 창출할 능력, 특이성들이 차이를 통해 소통할 능력, 공포가 없는 상태가 가져다는 주는 진정한 안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커머너는 구성적 참여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개방적 공유에 기반을 둔 민주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고 필요한 주체성이다.

‘커머닝’의 행동은 공유된 부에의 접근과 자기관리만을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을 향하기도 해야 한다. 커머너는 투쟁하는 광범하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학생들, 노동자들,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 빈민, 젠더 및 인종과 관련된 종속과 싸우는 사람들 등―사이의 ‘연합’(alliances)를 창출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열거를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적 현실화의 실천으로서 형성되는 ‘연대’(coalition)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연대’는 다양한 집단들이 전략·전술상 함께하면서도 그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지어 분리된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의 ‘연합’은 전적으로 이와 다르다. 물론 커머닝은 정체성들((여기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라고 읽으면 됩니다.))이 부정되어 모두가 자신들이 밑바탕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쟁과정에서는 상이한 사회적 집단들이 특이성들로서 상호작용하며 상호교류에 의하여 계몽되고 고취되고 변형된다. 그들은 투쟁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저주파로 서로 말한다.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pp. 105-107 (밑줄은 인용자의 것)

[부록2]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물질대사의 단절’(맑스)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복지국가

선(先)분배(pre-distribution)—커먼즈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계몽주의적 이성/기능적 합리성

삶정치적 이성/공통적 감각

노동시간

삶의 시간

측정/척도

탈측정/척도 너머

이윤으로서의 잉여가치(경제적 잉여가치)

삻의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주체성

자유로운 주체성: 커머너, 다중

삶의 시간은 생계수단을 버는 시간

삶의 시간은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시간

인격, 합리적 개인

특이성

추출 대상으로서의 자연

동지로서의 자연

* 알림 : 몇 사람이 모여서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론에 대한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하는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minamjah.tistory.com/)의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 섹션의 글들을 가져오고 그 뒤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현재 제 블로그에도 저 말고도 다른 역자들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아직 구축 중입니다. 시간을 많이 못 내서(아니면 게을러서?) 아직 글들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URL은 http://commonstrans.net/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