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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얼굴의 디오니소스와 공통적인 것의 화폐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mebly의 15장 2절, 3절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A three-faced Dionysus to govern the common

 

군주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삶의 조직화에 대한 결정을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새로운 군주는 왕좌 위에 앉아있는 존재일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지배의 구조를 변형하고 완전히 뿌리를 뽑은 후 새로운 사회조직 형태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다중은 새로운 군주를 민주적 구조로서 구성해야 한다.

 

각자 가능성과 함정을 지닌, 세 개의 경로가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한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한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를 놓고 논쟁할 것이 아니라 이 경로들을 교직하는 방식을 발견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것을 ‘세 얼굴을 가진 디오니소스’(“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른다.

 

[① 엑서더스]

이 전략은 유토피아 공동체 전략의 계승자이다. 기존의 사회관계의 외부에 새로운 행동방식, 새로운 삶형태, 새로운 주체성을 창출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공동체들과 푸리에에서 과학소설 작가들에 이르는 이론적 탐구들의 풍요로운 역사가 대안적 외부를 창출하는 힘을 입증한다.

 

오늘날 가장 영감을 주는 엑서더스 실천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의 형태를 띤다. 비민주적 조직형태를 통해서 민주적 사회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위선적이고 자기패배적이라는 논리. 활동가들 자체가 변해야 한다는 생각. 사회운동 내부에 창출된 축소된 사회는 미래의 더 나은 사회를 미리 구현하는 것으로 의도되었을 뿐 아니라 그 현실적 가능성과 바람직함의 입증으로서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예시적 정치가 특히 번성한 곳은 신좌파 여러 부문들, 특히 페미니즘과 학생운동에서이다. 여기서 참여민주주의는 운동 자체의 내적 조직화의 으뜸가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970년대부터 유럽 전역에서,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전된 점령된 사회센터들에서는 자율적 거버넌스 구조와 지배적 사회 내부에서 그 사회에 반하는 공동체를 창출하는 실험이 행해졌다. 예시정치는 최근에 들어와서 확장되었다. 2011-2013년에 타흐리르 광장, 뿌에르타 델 쏠 광장에서 주코티 공원 및 게지 공원에 이르는 다양한 점령 캠프들은 무상 도서관, 음식, 의료서비스의 체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대규모로 민주적 의사결정의 실험을 한 감격적인 사례들이다. 예시적 정치의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관한 광범한 사회적 논쟁을 개시하는 능력이었다.

 

 

예시적 정치의 단점은 그 내적 동학과 사회적 효과에서 명백하다. 지배적인 사회의 일부이면서 예시적 공동체에서 사는 것은 힘들다. 자본주의에 포위된 사회주의 사회와 같다. 공동체에서 남과 다르게 살라는 것은 대체로 도덕의 수준에서 작동하며 지배적인 사회에서 주체성을 생산하는 것을 거스르기도 한다. 그 결과 도덕주의와 내적 치안이 그런 활동가적 공동체에서의 삶의 경험을 망치는 경우가 잦다.

 

더 중요한 것은 예시적 경험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힘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망을 생성하고 그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는 것은 큰 성취이이지만, 예시적 경험은 그 자체로는 지배적 제도들에 관여할 수단을 결여하고 있으며 지배적 질서를 전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대안을 생성하는 것에 크게 못 미침은 말할 것도 없다.

 

[② 적대적 개혁주의]

기존의 제도들에 관여하여 안으로부터 개혁하기. 적대적 개혁주의는 단지 현 체제의 병폐를 보정하고 그 피해를 개선하는 데 복무하는 협조적 개혁주의와는 다르다. 적대적 개혁주의는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조준한다.

 

두치케(Rudi Dutschke)의 어구 “제도들을 거쳐 가는 대장정” (Der lange 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은 마오의 항일 유격전 이미지를 지배 질서에 대한 내부 투쟁으로 전환시킨다. 기존의 제도 내부에서의 유격전이다. 또한 두치케의 어구는 그람시의 진지전의 핵심— 문화, 사상의 영역 그리고 현재의 권력구조의 영역에서의 정치투쟁 수행—을 표현한다. 두치케에게 목표는 운동의 자율을, 그 전략적 힘을 긍정하고 운동이 대항권력의 구축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똘리아띠(Palmiro Togliatti)도 그람시를 해석하여 “long march through the institutions”를 제안하지만 반대경로를 생각한다. 운동을 당의 명령에 종속시킨다.

 

적대적 개혁주의와 사민주의적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강한 개혁주의와 약한 개혁주의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자율성의 정도를 가늠해야 한다. 두치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최고이고 똘리아띠의 경우에는 최소이다.

 

선거과정이 적대적 개혁주의의 장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뽑아준 사람이 권력구조를 실질적으로, 심지어는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이다. 최근에 오바마, 꼴라우(Ada Colau) 등 여러 진보적 정치가들이 실질적 변화를 약속하며 선출되었고 이들의 성공의 대차대조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공직의 타성이 변화를 위한 정치적 기획보다 더 강력했던 경우도 있고 반면에 실질적인 변화들이 성취된 경우도 있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또 다른 장은, 소유의 틀 내에서 자본주의적 위계의 힘을 상쇄시키고 가난과 배제를 완화시키는 법 기획들이다. 빈자를 위한 주택 기획, 노동자의 권리 등.

 

이 이외에도 적대적 개혁주의가 발휘될 수 있는 다른 법적·제도적 장들이 있다 — 환경 문제, 성폭력 방지, 노동자권리 긍정, 이주민 돕기 등등. 적대적 개혁주의를 가늠하는 기준은 실행되는 개혁이 기존의 체제를 뒷받침하는가 아니면 권력구조의 실질적 변형을 가동시키는가이다.

 

적대적 개혁주의의 일부 기획들이 중요한 기여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단기적으로는 실패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길게 보면 의미심장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대장정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한계도 명백하다. 대장정은 종종 기존의 제도들 속에서 길을 잃으며 바라는 사회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제도를 바꾸겠다고 제도 속에 들어가지만, 제도가 당신을 바꾸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대적 개혁주의의 기획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 한계를 부각할 뿐이다.

 

[③ 헤게모니 잡기]

예시적 전략과 달리 이 전략은 지배적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분리된 소규모 공동체들의 구축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목표는 사회 전체를 직접 변형하는 것이다. 이제 기존의 제도들은 행동의 장이 아니라 ‘해체적’(destituent) 사업의 대상이다. 기존의 제도를 전복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는 것이 주된 과제이다.

 

이 세 경로들 각각은 상이한 시간성을 함축한다.

①은 사회변형을 미래—소규모가 대규모로 달성되는 날— 로 미룬다.

②는 점진적 변화라는 느린 시간성을 산다. “한 번에 벽돌 하나씩”

③은 ‘사건의 시간성’(the temporality of event)에서 살며 사회적 수준에서의 신속한 변형을 가져온다.

 

③에도 분명 많은 함정들이 있다.

1) 새 체제는 낡은 체제의 주된 특징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③이 현재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③은 권력을 변형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맑스의 말을 빌자면, “국가를 분쇄하는 것”(smashing the state)이 필요하다. 우리는 비국가적인 공적 힘을 창출해야 한다.

2) ③은 (가령 일국 수준에서는) 환경에 의해 극히 제한된다. 전지구적 자본의 압박, 주도적 국민국가들의 반응, 다양한 비국가적 외부세력들이 가하는 제한 등. 그리스 시리자 정부의 경험, 지난 20년 동안 라틴아메리카의 진보적 정부들의 경험이 이 제한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해도 결국 이루는 것은 거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1) 첫 응답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이 세 전략들을 (잠재적으로) 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관점만 달리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변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거를 통해서든 다른 수단을 통해서든 권력을 잡는 것은 자율적이고 예시적인 실천들이 더 큰 규모로 이루어질 공간을 여는 데 복무하고, 장기적으로 계속될 제도들의 변형을 천천히 양성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 엑서더스의 실천들도 다른 두 기획들을 보완하고 촉진하는 방식들을 발견해야 한다.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연계를 통해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기존의 지배체제 내에서 그 체제에 거슬러 권력의 이원주의(a dualism of power, 두 정치적 힘의 공존)를 실질적으로 창조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리얼리즘(현실주의)이다.

 

2) 둘째 응답 (더 심층적이다)

시야를 정치에서 사회적 지형으로 확대한다. 우리[네그리·하트]는 이 책에서 줄곧 정치를 자율적인 지형으로 보는 것은 재난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민주적 거버넌스의 퍼즐은 사회적 관계의 변형을 통해서만 풀릴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고 사회적 삶에의 평등한 참여를 방지하는 주된 메커니즘은 바로 사적 소유의 지배이다. 공통적인 것의 수립은 사적 소유의 장벽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창출·제도화한다. 사회적 지형으로 초점을 확대하면 사회적 협력을 조직하는 광범하게 퍼진 능력을 포착하게 된다. 다중의 기업가 정신/활동이 이 확대된 능력의 한 얼굴이다. 생산하는 삶을 조직하고 협동의 미래 형태들을 계획하고 실현하는 민중의 능력이 바로 필요한 정치적 능력이다. 그리고 삶정치적 맥락에서 사회적 조직화는 항상 흘러넘쳐서 정치적 조직화로 확대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여기서 우리가 서술하는 경로와 같은 것을 규정한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순전한 정치적 범주(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번역)도 아니고 순전한 사회학적 범주(헤겔의 ‘시민 사회’)도 아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는 당 측면(더 정확하게는 주체성의 생산과 그것에 살을 부여하는 구성적 힘)과 사회를 변형하는 사회 투쟁의 측면을 다 포함한다. 그람시가 그의 글 「미국주의와 포디즘」(“Americanism and Fordism”)에서 합리화가 새로운 유형의 노동과 새로운 생산과정에 상응하여 새로운 인간 유형을 창출할 필요를 낳았다고 썼을 때, 우리는 이로부터 이 새로운 유형 즉 포디즘 노동자는 경제적 위기와 기술의 변형에서 그가 배운 것을 되돌려 위기에 배치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저항과 투쟁의 존재론적 축적은 그것이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상에 접근하여 ‘일반지성’의 패러다임을 해석하게 될수록 혁명적 실천에 더 본질적인 것이 된다.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 중첩, 적대적 개혁과 헤게모니 잡기의 이 중첩에서 우리는 어떻게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다중적 민주주의의 구축이 이해될 수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상을 얻는다.

 

여기서 우리는 (2장에서 옹호한) 전략과 전술의 전도—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은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운동의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가능성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다중의 전략능력의 수립이다. 전략능력이란 억압의 구조들을 샅샅이 해석하고 효과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며, 신중하게 미래를 위해 계획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조직화하는 능력이다. 다중은 정치적 기업가가 될 능력을 획득하고 있다. 지도부의 행동의 유용성과 필요성은 특히 긴급한 상황에서는 분명하다. 수립되어야 할 것은 지도부가 자신들이 환영받는 시간 이상을 남아있지 않게 할 방비책이다. 다중의 전략적 힘이 유일한 보증자이다.

 

 

A Hermes to forge the coin of the common

 

금융의 지배 하에서 화폐가 발휘하는 힘과 폭력의 비판자들 다수는 화폐의 힘을 제한하는 것을 주된 과제라고 주장한다. 선거에서 돈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하고 부유층의 금융권력을 제한하고 은행의 권력을 감소시키고 심지어는 화폐를 더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 모든 것은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첫 걸음일 뿐이다.

 

화폐를 폐지하자는 더 발본적인 주장은 자본주의적 화폐를 화폐 자체와 혼동하고 있다. 화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11장에서 말했듯이, 화폐는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한다. 화폐는 강력한 사회적 테크놀로지이다. 다른 테크놀로지의 경우처럼 문제는 화폐가 아니라 그것이 지탱하는 사회적 관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에서의 평등과 자유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고 제도화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가 창출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분명 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우리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관계만큼이나 일반적이고 강력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원한다. 어떻게 우리는 소유관계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화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화폐는 재산에 대한 익명화된 권리증서(자본주의적 화폐)가 되지 않고, 공통적인 것에서의 다원적이고 특이한 사회적 유대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폐의 창출은 사유재산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화폐정책 및 사회정책의 구체적 전환을 통해 공통적인 것의 화폐(a money of the common)를 상상하기 시작할 수 있다.

 

1) 온건한 제안은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for the people”)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889 참조)) 전통적으로 양적 완화란 중앙은행이 여러 수단을 써서 화폐공급을 증가시켜서 소비와 생산을 자극하고자 하는 화폐정책이다. 프리드먼이 ‘헬리콥터가 뿌리는 돈’이라고 부른 이 돈은 소비의 욕구에 따라 분배되지만 결국 재계로 돌아간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나 바루파키스(Yanis Varoufakis) 같은 몇몇 급진적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목적으로 화폐를 공급하는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것이 민중을 위한 양적 완화이다. 화폐를 찍어내되 민중에게 공급하자는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경우에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자율적 기획들과 실험들(규모가 작든 크든)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이 제안은 진정한 대항권력의 구축을 정치적으로 훈련하고 운영하는 유용한 플랫폼을 창출하지만, 작은 걸음일 뿐이다.

 

2) 보장된 기본소득에 대한 제안이 우리를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더 가까이 데려간다. 베르첼로네(Carlo Vercellone)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소득의 일차적 원천으로 만든다면 소득을 임금노동으로부터 분리하고 공유된 부를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협력적 회로들과 연결시킴으로써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주조하는 데 초석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베르첼로네는 자본주의적 명령으로부터의 (일정한) 자율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이것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라고 부른다. 기본소득이 사회적 삶을 생산·재생산할 수 있는 자유와 시간을 주는 것이다. 노동과 소득의 연결을 약화시키면 부와 사유재산의 관계가 무너지고 공유된 부를 위한 공간이 열린다. 더 나아가 기본소득은 임금체제 외부에 사회적 협동의 새로운 형태들을 열며 자본을 넘어선 사회적 삶을 상상하기를 촉진한다.

위크스(Kathi Weeks)는 기본소득의 반(反)금욕적 효과를 강조한다. 검소, 저축, 양보, 희생의 윤리를 설교하기보다 욕구와 욕망의 확장을 촉진하고 노동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은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본소득도 그 자체로는 자본주의적 화폐를 변형하고 사유재산을 제거하며 공통적인 것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그 방향을 향한 강한 몸짓이다.

 

이런 정책 제안들을 공통적인 것의 화폐 쪽으로 끌고 가려면 11장에서 이루어진 화폐의 성격에 대한 연구를 더 업데이트해야 한다. 이는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관계들을 역동적으로 포착하고, 그것을 관통하는 욕구를 해석하고(스피노자라면 이를 윤리학이라고 부를 것이다) 자본주의적 발전의 경향에 대한 분석을 그것을 가로지르고 변조시키는 힘들에 대한 인식과 결합시키는 화폐의 정치를 구축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포착해 낼 것은 ① 금융 자본과 사회적 생산의 체제에서 일어나는,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 사이의 관계의 화폐적 형태 ② 이 생산양식의 발전에 상응하는 (상응해야 하는) 소득의 다양한 형태들 ③ 각 화폐적 형태에 상응하는 “미덕의 체제”이다. 우리의 문제틀은 산업자본의 명령에서 금융자본의 명령으로의 이행을 포착하면서 사유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것이다.

 

현재 자본주의적 생산과 그 추출 양태들은 사회적 협동에 의존한다. 잉여 가치는 사회적 가치의 추출을 조직하는 금융 테크놀로지를 통해 전유된다. 어떤 면에서는 “총자본”(collective capital) 자신이 역설적이게도 사유재산의 해체와 공통적인 것의 인정을 현재의 생산양식의 토대로 인식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투쟁의 직접적 목표는 불평등을 줄이고 긴축의 체제와 단절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는 특히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자본의 권력에 저항하는 다중에게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해체중인 정치적 구성과 새로이 출현하는 기술적 구성―이 일종의 공위상태를 이루며 공존하기 때문이다. 노조 운동과 사회운동의 전통들을 결합하는 사회 파업(Social strike)이 이 지형에서 투쟁의 특권적 형태이다. 궁극적으로 긴축과 불평등의 거부는 협동의 화폐(a money of cooperation)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하며 따라서 사회적 협동의 생산성에 상응하는 소득―임금의 요소와 복지의 요소를 모두 가진 소득―의 형태들에 대한 요구를 표현해야 한다. 협동의 화폐는 보장된 기본소득을 넘어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새로운 연합이 ‘정치적 소득’―자본주의적 발전 및 계급관계들과 양립 불가능하게 되는 소득―을 부과할 수 있는 지형을 창출해야 한다. 여기서 긍정되는 미덕은 사회적 생산자들 및 재생산자들의 투쟁의 관점에서는 평등이다. ‘모두에게는 그 욕구에 따라서’(맑스의 슬로건)는 모두가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에 관여하고 배치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공통의 생산은 또한 다중적이기 때문에 즉 일단의 특이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력의 재생산은 대중화(massification)의 형태로는 성취될 수 없다. 사회적 차이들과 그 혁신의 힘이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에 필수적이 되었다. 따라서 협동의 화폐에 특이화의 화폐(a money of singularization) 및 특이화의 소득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는 차이에 대한 권리를 지원하며 아래로부터의 다원적 표현을 뒷받침한다. ‘모두로부터는 그 능력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abilities)는 따라서 특이성의 덕을 긍정하는 ‘모두로부터는 그 차이에 따라’(from all according to their differences)로 옮길 수 있다. 특이화의 소득은 사회적 생산자들과 재생산자들의 자기자치화를 증진해야 할 것이다.

 

신케인즈적 거버넌스 구조와 ‘위로부터의’ 유효수요 창출을 다시 제안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열을 향하는 사회적 힘들을 주체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지형에서 우리는 스트라(Pascal Nicolas-Le Strat)가 ‘공통적인 것의 노동’(le travaille du commun)이라고 부르는 것의 전선(front)을 창출할 수 있다. 이는 생산과 서비스의 협동적·민주적 플랫폼들을 가리킨다. 또한 지역 공동체들을 위한 실험적 통화들을 창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출현하는 다중이 가진, 사회적 관계를 자율적으로 창조하는 능력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적 능력이다. 자기가치화는 정치적 자율과 자치의 능력을 함축한다.

 

근대 부르주아 체제는 사적 소유의 관계에 토대를 두고 그 관계를 보장하는 반면에 자율적인 사회적 생산의 체제는 공통적인 것에 토대를 두며 공통적인 것을 보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6장에서 말한 심연 너머로의 도약, 사적 소유의 지배 너머로의 도약이다.

 

화폐의 첫 두 형상(협동의 화폐와 특이화의 화폐)은 사회적 생산과 일반 지성의 시대에 (새로 출현하는) 기업가적 다중이 가진 자질과 능력을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또한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a money of social and planetary investment)를 필요로 한다. 점증하는 자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한편으로는 교육·연구·수송·건강·통신을 통해 사회의 확대를 보장할 화폐와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와 모든 생명체들 및 생태계들에 대한 돌봄의 관계들을 통해 삶을 보존할 화폐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문제는 소득이 아니라 사회 자원을 미래를 위한 민주적 계획에 바치는 것이다. 자본은 지구에서의 사회적 삶의 번영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계획을 짤 능력이 없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국가도 더 나은 점이 없다.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은 실패했다. 사려의 미덕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것이 지속 가능한 미래로 가는 유일한 경로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화폐가 제도화하는 사회적 관계의 특징들 가운데 일부를 세 개의 국면―① 시초 축적 ②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③ 사회적 생산―으로 나누어 스케치했다.((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81의 맨 뒤에 달린 부록 참조)) 공통적인 것의 화폐가 산출할 잠재적 사회적 관계에 살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의 표에 넷째 단을 추가하여 공통적인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시간성, 가치형태들, 거버넌스 구조 등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서술하는 것이 논리적일 듯하다.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비자본주의적 화폐이기 때문에, 또한 그 사회적 관계가 비소유적 관계이기 때문에, 그 표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는 이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에 실질적 역사적 파열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며 따라서 그것을 이해하려면 새로운 분석틀이 필요할 것이다.

 

평등, 차이, 사려를 증진하는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제안하는 것이 유토피아적인가? 협동, 특이화, 사회 및 지구에의 투자의 화폐를?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리얼리즘은 현대 사회의 운동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성향을 인식하는 데, 그 안에 담겨있는 욕망을 조명하는 데, 그런 다음에는 미래를 현재로 가지고 오는 데 있다. 결국 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관계―공통적인 것의 화폐는 이 관계를 수립하는 데 복무한다―가 실제로 온전하게 구현될 때에만 대세가 될 것이다.




암호화폐의 안정성에 관하여


  • 저자  :  브라이언(Dick Bryan), 비르타넨(Akseli Virtanen)
  • 원문 : Whose stability? (2018.05.15)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웹진 <미디엄>에 2018년 5월 15일 자로 실린 글 Whose stability?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이 블로그에 정리해서 올린 글 What is a crypto economy?의 후속편이다. 이 글에는 “Reframing stability in the crypto economy”(‘크립토경제에서 안정성의 틀을 다시 만들기’)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저자는 브라이언(Dick Bryan)과 비르타넨(Akseli Virtanen)이다. 이 두 저자는 네그리와 하트가 Assembly에서 자본주의적 화폐에 대한 대안적 화폐인 ‘공통적인 것의 화폐’(a money of the common)라고 정치철학적 차원에서 말한 것을 실제로 금융현실 속에서 탐구하는 경제학자들이다. 브라이언이 래퍼티(Michael Rafferty)와 같이 쓴 책 Capitalism with Derivatives (Palgrave Macmillan, 2006)와 논문 “Financial Derivatives and the Theory of Money,” Economy and Society, 36:1 (2007), “Fundamental value: a category in transformation”, Economy and Society, 42:1 (2013)도 자본주의의 고전적 전제의 변형을 탐구한다는 맥락에서 주목에 값한다. 블록체인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 그것을 ‘통째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반응들이 학자들에게서든 일반인들에게서든 종종 보인다.((이런 반응을 양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주류 언론이다. 양비론 혹은 양시론으로 나름대로 세련되게 무장한 듯하지만, 사실 이는 ‘통째로’ 반응, 들뢰즈·가따리의 말을 빌자면 그램분자적 반응의 무력한 변형태일 뿐이다.))  음식의 경우 재료를 손질도 안 하고 통째로 먹는 법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말고는) 없고 먹은 음식이 통째로 우리의 몸에 (구성성분이나 에너지로) 흡수되는 법은 결코 없는데, 이는 음식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분자적 차원으로의 분해 혹은 들뢰즈·가따리의 말을 빌자면 ‘분자적으로 되기’의 지혜를 발명하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며 암호화폐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체의 활력이 가진, 세상을 바꾸는 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온전한 ‘객체’가 나타나서 우리를 구원해주기를 바란다.

 

암호통화들의 불안정한 가치에 대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맞추어 코인 가치들을 안정화하는 메커니즘들이 매력을 더해간다.

 

안정성이라는 목표

안정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알아야 신뢰와 평판이 생긴다. 미국의 달러가 안정성의 벤치마크로 간주되고 암호통화들은 군소 통화로 머물러 있는 한 암호통화의 휘발성이 주된 문제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암호통화들이 벤치마크로 간주되고 미국 달러가 그에 비교해서 휘발성을 가진 것으로 서술되는 세계를 상상할 수도 있다. 아직은 저 멀리 놓여있는 세계이지만.

그런데 이런 형태의 안정성이 진정으로 우리의 목표인가?

근본적인 문제는 암호통화들이 단지 화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암호통화들은 부분적으로는 화폐이고 부분적으로는 자산이며 부분적으로는 정치적 조직화이다. 우리가 ‘안정성’을 고찰할 때에는 이런 차원들이 주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제안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안정성’을 화폐의 세 기본적 기능—① 교환수단 ② 가치의 저장 ③ 회계의 단위— 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교환수단

가치가 오래 유지되는 가치단위가 교환수단으로 바람직하다. 그런데 통화의 단위가 여럿일 경우 상이한 화폐들을 같은 척도로 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통일적 작동의 유지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준다. 자본주의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짧은 시기인 1944-1977년 동안에만 일국 통화들의 가치의 상대적 안정이라는 목표가 추구되었던 것이다.(고정환율)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준비통화인 미국의 달러와 연방준비제도(the Federal Reserve)가 지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환율이 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화폐는 기술적(技術的메커니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다. 각 통화가 적용되는 영토의 사회경제적 상황이 그 통화에 반영된다. 각 나라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다 다르며 같은 척도로 잴 수가 없다. 시장가격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틈(divisions)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각 통화들의 교환비율은 변동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 경제학자들은 국제수지의 적자와 지불해야 할 잉여(과거)를 이 틈으로 보았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이자율(미래)이 그 틈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런데 실제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너무나도 복잡해서 이 틈과 균열을 고려하기 위해 급속한 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팔씨름이 일어나고 이는 투기적인 ‘노이즈’ 거래에 의해 추동되는 휘발성으로서 발현된다.

 

가치의 저장

스테이블코인의 옹호자들은 암호통화들이 그 휘발성으로 인해서 가치저장소로서 작동하지 못한다고 말하겠지만, 이는 좀 낡은 생각이다. 전통적으로 현금이 가장 안전한 가치저장소이다. 가장 유동적인 자산이며 국가가 책임지기 때문이다. 국가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미리 막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적 안정성을 확보하지는 못하지만 그 시도에 대량의 재원을 지출할 수는 있다. 국가채권은 같은 이유로 장기적인 가치저장소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는데, 암호화폐의 관점에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현금과 국가채권은 음의 수익률(negative returns)(디플레이션, 음의 이자율)로 인해서 그 안전성에 도전을 받고 있다.

금융시장은 안정성을 점점 더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1. 개별 자산의 독립적 가치의 안정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이 없으며 개별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은 자산들의 포트폴리오(총체)의 안정성을 본다. 후자의 경우 상이한 자산들의 휘발성은 각기 상이한 패턴을 따르며 서로 상쇄한다.

2. 자산 총체의 전반적 휘발성에 방비하게 위해서 파생상품 포지션을 취한다.

이 틀에서는 모두 합해서 특정 수준의 가치 안정성을 나타내는 여러 자산군들의 스펙트럼(a spectrum of asset classes)에서 암호통화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안정성을 이렇게 보는 관점에서는 암호자산들의 역할이 완료된 것이 아니라 진화 중이며 이 진화는 다음에 의존한다.

ㄱ) 암호자산이 증권시장, 부동산, 자산유동화증권(asset-backed securities)의 가치와는 상이하게 순환하는 휘발성을 가진다.

ㄴ) 암호자산이 투자은행, 헤지펀드, 펜션펀드(연금기금)의 포트폴리오들에 통합된다.

이렇게 되려면 암호자산 시장이 더 성숙되어야 한다. 아직은 이 단계에 도달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도달하게 될 것이다.

 

회계 단위

이제 우리는 실질적 요점에 도달했다. 회계단위로서 암호통화는 미국 달러화와의 관계에서 안정적으로 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그 역할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 달러화(그리고 법정불환지폐 일반)는 가치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생각들을 반영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안정적이다. 화폐는 기존의 소유체계를따라서 분배체계를 코드화한다. 이것이 화폐가 단지 기술적인 메커니즘이 아니라 사회적 메커니즘인 가장 심층적인 이유이다. 회계단위로서의 법정불환지폐가 교환에서의 등가를 측정하고 그 과정에 (재화와 서비스를 실제로 창출하고 시장에 가져온) 사회적 관계의 미덕을 함입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윤과 손실, 소득과 지출을 참조하여 경제를 틀짓는 문화를 함입하며 이 벤치마크들을 정부들, 회사들, 가구들, 심지어는 개인들에게 적용한다. 우리가 이러한 관행들을 사회적으로 (손실을 낳는 활동을 지원하고, 인권이나 환경과 관련하여 이윤을 할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한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 통용되는 법정불환지폐에 내장된 개인주의, 사적 소유 그리고 이윤추구의 우선성을 어쩔 수는 없다.

이러한 사회적 생각들이 도전을 크게 받으면 법정불환지폐는 불안정해진다. 만일 우리가 부자와 빈자 사이의 대대적인 소득 재분배를 요구한다든가, 이윤과 임금 사이의 비율 전환을 요구한다든가, 비임금 활동에 대한 ‘합리적인’ 보수를 요구한다든가, 생산결정을 추동할 중요한 환경적· 사회적 기준을 요구한다든가 하면 국가는 ‘감당할 수 없다’, ‘재정적자를 낳을 것이다’, ‘투자와 노동의 인센티브를 망칠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는 정부가 기반을 둔 전제 위에서는 대충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핵심은 얼마나 재정을 지출하게 되느냐가 아니라 사회적 지각 변동이다. 2007-2008 전지구적 금융위기의 맥락에서 금융기관들을 위한 구제금융은 감당할 수 없다거나 인플레이션을 낳을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구질서를 회복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암호통화들을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이 통화들을 사용하여 전과는 다른 사회적·경제적 과제들을 표현할 수 있고 사물을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점전과는 다른 인센티브들을 실행하고 그 효과를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제는 설계 문제가 된다. 이것이 전과는 다른 사회·경제적 과제들을 구축하기 위한, 그리고 ‘이윤’이나 ‘효율성’ 같은 개념들에 구현된, 사회적 기여를 사적이고 개인적으로 측정하는 규칙들을 자연스럽지 못한 것으로 되돌리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암호통화의 ‘안정성’은 미국 달러화와는 무관하다. 여기서 안정성은 암호통화가 ㄱ) 통화의 존재근거가 되는 활동과 결과가 제대로 수행되고 이루어지는 신뢰할만한 가치의 척도로서 그리고 ㄴ) 그 활동과 결과를 사회적으로 타당화하는 것(이는 사람들이 통화를 가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증된다)으로서 작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암호통화가 이런 식으로 틀이 지어지면 법정불환지폐와의 그 어떤 상관관계도 우연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암호통화에 대한 가치평가가 단지 이 두 기준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동기가 무엇이든 ‘투기적’ 거래가 암호통화 가격이 움직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위의 논의가 함축하는 바

암호통화의 ‘안정성’은 3개의 상이한 목적과 연관된 3개의 상이한 의미를 가지는 듯하다.

화폐 기능

암호화폐 안정성의 기준

법정불환지폐와의 차이는?

교환수단

재화와 서비스의 가치

없음

가치의 저장

자산 포트폴리오 내에서의 리스크/수익(return) 계산.

안정성의 관건은 이 계산의 확증 가능성이다.

유사하지만 다름. 포트폴리오 내에서 (상이한 리스크/수익 특성을 가진) 상이한 자산군.

회계의 단위

포스트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치

다르면서 대립적임

 

이 차이에 비추어본 스테이블코인

스테이블코인의 옹호자들은 암호화폐를 법정불환화폐와의 직접적 유사성으로 틀짓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교환수단 기능에 특권을 부여하고 가치 저장에서의 안정성을 교환에서의 안정성의 직접적 귀결로 본다.

따라서 그들의 목표가 중앙은행의 역할(화폐 가격을 안정화하기 위해서 준비금을 사고파는 것)에 의존하는, 혹은 이윤에 대한 대가로 기본적으로 리스크를 짊어지는 민간 인수회사들[증권회사들]에 의존하는 안정성 메커니즘들을 (재)발명하는 것이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틀짓기를 개념적으로 비판했는데,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교훈을 얻은 바 있다. 1990년대의 아시아 금융위기에서 헤지펀드들이 미국 달러화에 연동된 환율을 감독하는 일국 중앙은행들과 맞서는 일이 있었다. 중앙은행들은 그 엄청난 준비금에도 불구하고 방어할 수 없는 환율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졌다. 중앙은행들은 특정의 환율을 방어함으로써 보장된 재정거래기회(arbitrage opportunities)를 헤지펀드들에게 제공했다.(([정리자] 재정거래(arbitrage)란 어떤 시장에서 증권을 구매과 동시에 가격이 더 높은 다른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이다.)) 헤지펀드들은 중앙은행이 가진 주권적 힘이 없으면서도 신용 라인들과 파생시장에서의 단기 포지션들을 사용하여 중앙은행들로 하여금 변동시세제를 택하도록 강요할 수단을 획득했다.

이는 미래에도 적용될 교훈이다. 암호화폐가 미국 달러화와 동등한 지위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암호 스테이블코인 투매가 시작되면, 스테이블코인 회사의 준비금이 아시아의 일국 중앙은행들이 가진 준비금보다 더 뛰어난 수행능력을 가지리라고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시장에서 고정된 환율이 지속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매도의 표적이 되면 붕괴하게 되어있다.

문제를 더 단순하게 볼 수도 있다. 만일 목적이 법정불환통화와의 관계에서 안정적인 암호화폐를 가지는 것이라면 국가의 중앙은행들이 블록체인의 능력을 통합하여 자신들의 고유한 암호화폐를 발행할 때까지 조금 기다리는 게 어떤가.

만일 이와 달리 국가로부터 분리된 암호화폐를 활용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핵심은 ‘분리의 목적이 무엇인가?’이다. 만일 단지 교환을 촉진하는 데 목적이 있다면 민간 암호화폐들은 항상 국가 암호화폐들보다 덜 안정적이리라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더 나은 이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 생각에는 있다.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제를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크립토경제를 구축하는 이유는 분명, 금융이 이른바 실물 경제의 독립적인 척도로서의 화폐라는 범주를 넘어선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있다. 금융혁신에서는 많은 자산들이 화폐의 유동성을 획득하며 화폐와 다른 자산 사이의 구분이 붕괴된다.(이에 대해서는 크립토경제란 무엇인가? 참조」) 그 결과 객관적인 측정단위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가려졌던 화폐의 사회성이 드러나기 시작한다.(([정리자] 네그리와 하트는 화폐의 ‘사회성’을 화폐가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능력에서 본다.)) 암호화폐의 핵심은 그 사회성을 탐구하고 재가동하는 것이다지금과는 다른 경제가 어떨지에 대한 안들을경제를 다르게 하는 방법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틀짓기가 ‘안정성’을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핵심은 우리가 넘어서고자 하는 체제에 준거하여 안정성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파악된 크립토경제의 수행에 준거하여 정의하는 데 있다. ♣

 

[부록]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Assembly 11장 1절에 나온 표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표의 제목은 “The Social Relations of Capitalist Money”(‘자본주의적 화폐의 사회적 관계’)이다. 

 

1. 시초 축적

2. 매뉴팩처 및 대규모 산업

3. 사회적 생산

a. 생산의 시간성

과제에 따른 노동시간과 자연의 리듬

시계의 시간과 노동일의 분할

논스톱 전지구적 체계의 24/7 시간

b. 가치 형태

절대적 잉여가치

상대적 잉여가치

삶정치적 잉여가치

c. 추출 방식

정복과 강탈

산업적 착취와 식민지 추출

공통적인 것의 전유로서의 추출

d. 재산의 형태

부동 재산

유동 재산

재생산 가능한 재산

e. 노동력의 구성

장인노동과 일반 노동의 조련(dressage)

매뉴팩처링과 산업노동의 조직화

사회적·인지적 노동

f. 실현의 시간성

동시간적 가치실현

포디즘적 신용체제의 시간성

미래로 투사된 금융적 실현

g. 계급투쟁의 형태

민중투쟁 혹은 자크리

노동계급의 투쟁과 파업

삶정치적 사회투쟁 및 사회 파업

h. 적대적 정치조직화의 형태

길드와 상호부조단체

노동조합과 당

사회적 연대

i. 화폐 창출의 원리

국립은행의 화폐 창출

국립은행과 기업의 화폐 창출

금융적 화폐 창출

j. 거버넌스 형태

식민주의 왕정과 주권

제국주의적 과두체제와 훈육

제국과 삶정치적 통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