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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肺)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 : Interview with Federico Tomasello”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Il polmone comune della metropoli. Intervista ad Antonio Negri in guisa di appendice a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3장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둘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의 대화를 계속하자. 로시(Ugo Rossi)는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비판한다. 첫째로, 인지노동 및 고급 3차 부문(the advanced tertiary sector)[IT, 마케팅, 연구개발, 법·기술·금융 콘설팅–정리자]에 대한 당신의 강조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생산형태의 다양한 성격을 놓치거나 과소평가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자본주의적 메트로폴리스에 공존하는, 혹은 추출적 자본에 의한 포획에 노출된 삶의 양태들(dei modi di vita)과 관련된 사회적 다양성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도 다양하고 다채롭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경향적으로 발전하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현재의 경향을 나타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방법은 항상 경향의 분석을 그 특징으로 했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바로 고급 3차 부문을 경향의 요소로 추상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차원들이 이것과 관계를 맺고 종국에는 이것에 의해 포획된다. 가령 시장들이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내에 공존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것들도 새로운 형태의 계산에, 가령 물류(logistics)의 새로운 체계와 연관된 새로운 은행업 및 시장 조건들에 더 단단히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나는 로시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메트로폴리스 수준에서의 차이들은 반드시 ‘혼돈스러운’ 것들은 아니고 경향적으로 더 상위의 서비스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그렇다면 자본의 가치화 메커니즘에서 착취의 많은 양태들에 공통적인 경향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두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 ① 하나는 현상학적이고 서술적인 관점으로서, 이는 관찰하고 기록한다. ② 다른 하나는 경향적 관점으로서 이는 귀납적·미래투사적이며, ‘지식에의 의지’를 주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핵심 요소로서 긍정한다. 나는 언제나 이 두 관점, 즉 서술적 관점과 재구성적·실천적·정치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 어떤 현상에 직면했을 때, 나는 ‘사태가 어떻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지’도 묻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을 열고 부수고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러면 경향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실천적 ‘장치’와 병행하는가?

그렇다. 이것이 푸꼬의 철학에서 ‘장치’라고 불리는 것이며, 칸트의 용어로는 ‘후험적 종합’이고, 맑스의 언어로는 ‘결정하는 추상’(astrazione determinata, determinate abstraction)이다.

 

가치추출방식으로서의 추출주의(estrattivismo)에 대해 좀더 말해 달라.

사회적 삶의 공간 전체로부터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하비, 발리바르를 통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의 이동적인 공간성에 대한 논의와 닐슨(Neilson)과 마짜드라(Mezzadra)의 시장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맑스에게서의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의 엄밀한 정의와 관련하여 초과로서의 협동의 생산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게 되는 만큼 이 이론적 요소들이 내게 중요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금융현상의 연구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치를 참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생산적 사회의 특권적 형태가 메트로폴리스라면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치포획과 잉여가치축적은 추출적일 수밖에 없다. 가치포획은 장소(공장이 나타내는 것)보다는 공간(다중의 공간)에 준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물의 추출’과 같은 추출활동(l’estrattività)을, 즉 새로운 원료의 추출을, 더 정확하게는 공통재의 추출과 착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로시가 제기한 비판의 둘째 논점은 당신이 부동산 부문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부동산은 당연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시 경기순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거나 작동해왔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 투자가 자본이 경기순환의 지난 주기에서 사용한 은행 파생상품들 및 기타 광적으로 투기적인 도구들을 통과할 때 그렇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브라질이나 이스탄불 같은 곳에서는 부동산투자가 일종의 자본주의적 골드러시였던 것이 맞지만, 또한 극적인 한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나 리우에서는 시민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정도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 높다. 그리고 이스탄불은 도시에서 유럽에 속하는 부분이 수송의 관점에서 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점점 더 많은 다리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동산 부문은 풀 팩터(pull factor)[사람들을 어느 지역에 살도록 끌어당기는 이유나 상황―정리자]인 것이 맞지만, 지금 그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매우 높은 ‘밀도’를 유발해서 도시를 때로는 여행하거나 거주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이다. 따라서 나의 가설은, 도시 서비스들의 비용이 부동산의 가격을 곧 끌어내리리라는 것이다. 투쟁과 도시의 갈등이 무력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존중’하도록 만들거나 부동산의 가치와 독립적으로 도시의 자유롭고 즐거운 향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부동산의 비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의 비용, 메트로폴리스 자체의 서비스들의 비용이다··· 더 나아가 부동산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재생산 비용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말인가?

바로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 또한 부동산의 가치를 낮추고 파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비용’의 증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비용이 바로 사적인 것에 맞서서 표현된 공통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의 거주민들이 공공교통요금의 인하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은 명백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자본주의적 비용’을 증가시키고자 싸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극히 열려진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항상 투쟁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향이란 항상 투쟁이 자본의 관계를 확대다고 심화시키는 경향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장치’(dispositifs)의 질서가 현상학적 질서에 맞세워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나는 리얼리즘이 실재적인 것의 반영(rispecchiamento)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 브라질 상황에 대해 말했던 것에 더 덧붙일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 브라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빈자의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스며드는 투쟁들의 ‘견인력’, 즉 빈자들의 투쟁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발휘하는 견인력이다. 버스운전사들, 교사들의 투쟁이 폭발하는 데 기폭제가 된 것도 빈자의 투쟁이었다. 모든 옛 조합 범주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소수자가 되고 이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하고 있다. 이는 핵심적이고 질적인 요소이다. 공장노동자층을 추동요소로 보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적 전제가 여기서 붕괴된다. BRIC(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나라들에서는 공장노동자들이 투쟁을 추동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경우 종종 중산층 요구들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력이다. 가장 배제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메트로폴리스의 현실에 가장 깊이 포함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이다.

 

이 ‘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달라.

가령 보장소득이 메트로폴리스 생산성의 일반적이고 열려진 척도와 전제조건을 구성한다고 말할 때 이는 여성들의 권리, LGBTQ, 혹은 써발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시에 사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것은 소수자로서 도시 안에 있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소수자들이 소수자로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다중의 생산물이며, 다중 자체는 소수자들의 배치(assemblaggio)이다.

 

로시가 제기하는 가장 흥미있는 비판점은, 공통적인 것과 도시에의 권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그는 우리가 도시를 ‘재구성’보다는 통일체로 환원되지 않는 투쟁들과 차이들의 ‘배치’로 보는 것을 제안한다.

답:

매우 흥미로운 논점이지만, 이 논점은 다중 개념이 일원적인 일자(unum)라는 전제 위에서 제시된 것이다. 다중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다중은 그 자체로 차이들의 기계이다. 나는 다중을 도시에서의 조우들과 협동의 순간들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총체(un insieme di singolarità)라고 부른다. 이 협동의 순간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인지자본이 확고한 현실이 된 사회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조건은 공통적인 것의 더 상위의 결합형태로의 단계적 이행을 전제한다. 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사회적 협동의 공고화와 증가를 통해 전진한다.

‘도시에의 권리’는 훨씬 더 이전 단계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협동의 밀도에 상응한다. 메리필드(Merrifield)와 브레너(Brenner)가 도시화와 차이들 사이의 조우가 메트로폴리스에서 진정으로 생산적인 요소이며 ‘공통의 폐(肺)’를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적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몇몇 오해를 풀 논점을 제시해야 할 듯하다.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공장과 메트로폴리스에 관한 한은 유사성(둘 다 생산이 추출되는 무질서한 집합이다)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중에 관한 한은 은유이다.[이는 12장에서 말한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누어 말한 것이다―정리자] 만일 다중의 경우에도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중이 과거 노동계급처럼 무언가 잠재적으로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은 특이성들의 ‘장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발전된 개념이다. 특이성들은 주체성들의 실존-저항-조우-협동-생산의 순서로 작동한다. 우리가 모든 생산부문에서 가능한 보장된 최저임금이나 보장소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차이들의 조우·협동·생산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장될 수 있는 토대가 될 출발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처럼 메트로폴리스도 ‘도시학’(urbanistica)의 개념으로 이해되기보다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도시 배치’(assetto urbano)의 기술은 상이한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의 기술 개입이 수많은 관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라고 말했을 때 속속들이 삶정치적인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여기에는 공간, 시간, 전통, 역사적 차원, 문화적 구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 파리에서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나는 역사, 투쟁, 획득된 권리, 시민적 공고화의 겹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구가 메트로폴리스 지역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적 삶양태는 이제 완전히 독보적이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듯이 메트로폴리스의 외부도 없다. 생산에서 연결 역할을 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는 중심적인 경제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콜하스(Rem Koolhaas)가 제안한 메트로폴리스 구조―‘폐기물’의 축적을 수반하는 거대한 생산적 장치―를 읽는 데 애착을 가진다. (폐기물은 다시 도시 생산을 창출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우리가 경향의 방법을 따른다면 폐기물과 잔해의 무게를, 메트로폴리스의 연결 조직에서의 표류와 실패라는 점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생산적 기계들로, 역설적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기계적 차이들로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외부가 없다는 사실이 자본 내에 항상 저항이 있음을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학자들이 거의 반세기 동안 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본 개념 자체가 (특히 메트로폴리스적 자본이) 계급투쟁의 개념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적인 사례가 브라질 파벨라의 높은 생산적 강렬도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투쟁의 충격을 창출했다. 모든 메트로폴리스 투쟁들을 집단적 실존, 특이성들의 삶양태들, 저항, 조우, 협동,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 맞선 주체성의 생산에서의 차이들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 내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이라는 열려진 개념을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로시가 공통적인 것이 차이들의 기계라고 말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공통적인 것은 다중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