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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이제 시체다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America Is Now a Corpse (2020년 11월 5일)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20/11/05/america-now-corps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Common Dreams에 실은 2020년 11월 5일자 글 “America Is Now a Corps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어조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첫 단락만 번역이다.) 여기서도 헤지스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주류 혹은 준주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미국 제국 몰락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제도화된 체제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Chris Hedges: Revolutions Only Happen Through Movements 참조) 다만 미국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점―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파고든 정도가 미국에서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 현실(제도화된 기성 체제)의 비판에 치중하게 만든 듯하다. 긍정적인 움직임이 왕성한 곳에서라면 부정적인 측면의 비판에 과도하게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을 기고 기어서 비로소 수많은 촛불들이 삶을 밝히는 곳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헤지스가 대변하는, 미국 민중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되고 또 그렇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를 짚어보느라고 바쁠 일반 미디어들로서는 도저히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않는 저 아래의 영역에서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미국 민중의 주체성 형성의 새로운 큰 흐름이, 그 큰 흐름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보는 것이 중요하며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시체다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가 끝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록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빈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이지만, 적어도 점진적이고 점증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는 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체가 되었다. 상징과 수사(修辭)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수의 과두세력이 자금을 지원하는 공들인, 그러나 공허한 ‘리얼리티 쇼’이다. (바이든은 선거운동에 15억1천만 달러를 들였고 트럼프는 15억7천만 달러를 들였다.) 그 목적은 미국인들에게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트럼프와 언어 능력에 손상을 입은 바이든 사이의 공허한 대결은 진실을 가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과두세력이 항상 이긴다. 민중은 항상 진다. 백악관에 누가 앉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는 실패한 국가이다.”

미국의 ‘열린사회’를 살해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선거과정, 법원, 미디어를 사들인 기업과두집단(corporate oligarchs). 이들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입법을 하여 미국 민중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얻고 있다.
② 쓸모없는 부단한 전쟁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군사주의자들과 전쟁산업체들. 이들은 약 7조 달러를 탕진했으며 미국인들을 국제적 천민으로 만들었다.
③ 상여금과 보상 패키지를 수억 달러씩 받으며 일자리들을 해외로 보내고 우리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소득과 희망이 없는)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빠뜨려 놓은 CEO들.
④ 과학과 전쟁을 벌이며 인류가 멸종하든 말든 이윤을 추구하는 화석연료 산업체들.
⑤ 뉴스를 생각 없는 오락과 우리 당 응원하기로 바꾼 언론.
⑥ 대학으로 물러나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의 도덕적 절대성을 설교하지만, 다른 한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제전쟁과 시민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는 등을 돌린 지식인들.
⑦ 아무 것도 안 하고 말, 말, 말만 해대는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계층(liberal class).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수호한다는 가치를 그것이 불편해지는 순간 저버린다. 또한 자유주의 계층은 유럽에서라면 극우로 간주될 후보자와 정당의 치어리더들이며 검열자 기능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든에 의해서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에 의해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바이든과 민주당을 비판한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소외시키느라고 바빴다. 『인터셉트』(The Intercept)든 『뉴욕타임즈』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을 해칠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그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민주당과 그 자유주의적 지지자들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법치의 복원, 보편적 건강보장, 프랙킹 금지, 그린뉴딜, 시민의 자유의 보호, 노조의 구축,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의 보존 및 확장, 철거와 가압류의 금지, 학자금대출금의 탕감, 엄격한 환경통제, 정부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및 기본소득, 금융규제, 부단한 전쟁과 군사적 모험주의에의 반대―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망각되었다. 이런 이슈들을 옹호했다면 민주당은 산사태를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키우고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키며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민주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바이든은 아이디어들과 정책 이슈들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마치 그와 민주당이 아메리카의 영혼을 구한다는 약속으로 선거를 휩쓸 수 있다는 듯이. 적어도 신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적 확신들을 표현하는 용기라도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계층은 점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과잉을 개선함으로써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공격견 역할도 한다. 자유주의 계층은 ‘파워 엘리트’의 강력한 구성요소이다. 변화의 희망과 가능성을 아니면 적어도 변화의 환상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독재에의 투항이 권력 공백을 창출했고 그 공백을 투기자들,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내는 자들, 갱스터들, 킬러들이 채웠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운동을 위한 문이 열렸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계층과 그들의 가치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면서 부각되었다. 파시스트들이 약속하는 바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이지만, 자유주의 계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진실에 근거를 둔다. 자유주의 계층이 일단 기능하기를 그치면 억제하기 어려운 악들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트럼프주의의 질병은 트럼프가 있든 없든 정치체 안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트럼프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조롱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진 소외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획책한 것인데 이들은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주의는 또한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실제로 감소하였다.

19세기 말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쓸모없는 자유주의 계층의 행위가 피와 테러의 시기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지한 이상들을 지키지 못하자 불가피하게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대가 왔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자유주의 이념들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는 열정과 도덕적 목적을 피한다. 그는 합리적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의 이름으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권력구조를 수용한다. 지하생활자의 위선이 러시아로 하여금 파멸을 맞게 했다면, 이제 그 위선이 미국을 멸망케 한다. 신념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 분리가 핵심이다.

자유주의 계층은 기업이 권력을 시민들의 손에서 탈취했음을, 헌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법의 명령에 의해 철회되었음을, 선거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연출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함을, 미국 민중이 계급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에 더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대중은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발휘하는 한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풍부한 사례로써 보여준 것은, 일단 권력자들이 잉여적이 되고 무능력한데도 권력의 치장물들과 특권들을 틀어쥐고 있다면 무자비하게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그랬다. 내[헤지스]가 『뉴욕타임스』에서 취재한,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에서도 그랬다.

독일 역사가 슈테른(Fritz Stern)은 그의 책 『문화적 절망의 정치』(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에서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상승은 자유주의의 붕괴의 결과라고 썼다.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폭력, 문화적 증오, 개인적 원한에 중심을 둔 정치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많은 부분은 정당하게도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근대 사회―부르주아적 삶, 맨체스터주의[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적·경제적 운동=자유방임주의], 물질주의, 의회, 당.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의 주요 전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그들의 모든 내적 고통의 원천을 본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들을 상상적인 과거로부터,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뿌리뽑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증오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건강관리제도는 국가적 보건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건강관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종합병원들을 합병하고 폐쇄했으며 지역 공동체들에서 건강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일선 노동자들의 거의 반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약 4천3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고용주 제공 건강보험을 잃었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확립할 의도가 전혀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없이는 팬데믹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12월까지 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며 1월까지는 4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팬데믹이 소진되거나 백신이 확보될 때쯤이면 어쩌면 수백만 명이 사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팬데믹의 경제적 낙진인, 만성적 불완전고용과 실업—현재 직업을 구하기를 멈춘 사람, 일시해고되었으나 재고용될 전망이 없는 사람, 시간제로 일하지만 빈곤선 아래인 사람이 공식적 통계에 포함되면 20%에 가깝다—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낳을 것이다. 기아자의 수는 지난 해 이후 이미 세 배로 증가했다.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는 지난해보다 14배 늘었다. 푸드뱅크들의 식사 제공 능력은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으며 압류와 철거의 일시적 정지가 취소되어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다.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한 사회적 소요로 인해 국가는 그 주된 사회적 통제도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① 대대적 감시 ② 감옥 ③ 군대화된 경찰이 그 도구들이며 이것을 법체계가 지탱하고 있다. 법체계는 비판세력을 잔인하게 짓밟기 위해 인신보호영장과 적정 절차를 취소하기 일쑤다. 유색인들, 이주자들, 무슬림들은 토박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민주당에 대항하여 기업국가(corporate state)와 제국의 범죄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민주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계층의 무기력함은 널리 퍼진 배반감―바로 이 배반감으로 인해 투표자들의 거의 반수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저속하고 인종주의적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다ㅡ 에 땔감을 공급할 것이다. 기독교화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치장하고 있는 미국식 전제정치가 한 시기의 획을 긋는 미국 제국의 쇠퇴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 후기]

‘시체’의 이미지는 이미 로런스(D. H. Lawrence)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에서 사용한 바 있다. 로런스는 『모비 딕』(Moby Dick, 1851)의 피쿼드호가 침몰한 이후의 미국을 가설적으로 ‘사후효과’(post-mortem effect)로 본다. 피쿼드는 미국의 영혼의 배이므로 피쿼드호의 침몰은 영혼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로런스에게서 사후효과란 사람들이 영혼이 없이도 에고(ego)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로런스는 ‘에고’를 ‘자아’(self)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획당한 자아, 즉 담이 둘러쳐진 자아라고 이해하면 된다. ‘종획된 자아’의 이미지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본국인 미국에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로런스는 미국의 부정적 측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령 휘트먼에게서 ‘열린 길’(open road)이 제시되고 있음을 짚어낸다. ‘열린 길’은 미지(未知)로 향해있다. 영혼들이 미지로 향하는 이 ‘열린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성취될 목적이 따로 없고 여정(旅程)만이 있다. ‘열린 길’에서는 남녀관계든 동료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오직 영혼의 인정에 기반을 둔다. 영혼들이 유일한 부(富)이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제도만을 보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도란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는 한 사후효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의 바깥을 보고 제도의 아래를 봐야 한다. ‘열린 길’이라는 형태의 커먼즈가 어렴풋게나마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