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토경제와 가치를 되찾기


  • 저자  :  Uriah Marc Todorof, Erin Manning, Brian Massumi
  • 원문 : “Interview with Erin Manning and Brian Massumi” (2018.3)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마쑤미(Brian Massumi)의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일부를 이 블로그에서 소개한 바 있는데(과 이곳으로 가면 된다), 아직 중요한 부분의 소개가 안 된 상태이다. 그 사이에 토도로프(Uriah Marc Todorof)가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의 내용을 놓고 마쑤미 및 그의 동료 매닝(Erin Manning)과 한 인터뷰를 접하게 되었다. 이 인터뷰의 내용을 보면 ‘99개 테제’ 기획의 대략적인 취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에 여기 그 인터뷰의 일부를 소개한다. 이 인터뷰의 일부는 https://thenewinquiry.com/a-cryptoeconomy-of-affect/ 에도 실려 있다. 마쑤미는 들뢰즈·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의 영역본(A Thousand Plateaus, 1987)의 역자이며 매닝은 정치철학자로서 최근에는 The Minor Gesture(2016)라는 책을 냈다. 이들은 집단적 교육을 실험하는 연구실험실인 쎈스랩(SenseLab)(몬트리올)에서 같이 작업한다. <세 생태학 연구소>가 여기서 나온 기획 가운데 하나이다.

 

토도로프

— 암호통화의 바탕에 있는 가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적 가치 개념과 어떻게 다른가?

 

마쑤미

— 암호화폐 설계자들은 전통적 정의(교환수단, 가치저장, 회계단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화폐에 대한 전통적 시장 정의는 실제로 화폐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상응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는 잉여가치의 생산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자본의 정의 자체가 ‘현재 투자한 일정한 액수의 화폐로부터 미래에 더 많은 액수를 생성할 잠재력’이다. 비트코인의 설계의 배후에 있는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시장근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인 자본 자체를 간과했다. 자본이 비트코인을 따라잡았고 투기적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사용함으로써 그 전통적인 화폐 기능이 거의 총체적으로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비트코인에 설계해 넣은 경제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초기의 자유시장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는 특히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오늘날 자본이 작동하는 방식에 상응하지 않는다. 블록체인이 혹은 블록체인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온 기술이 진보적인 사회 혁신을 낳으려면 경제에 대한 훨씬 더 복잡한 비전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금융자본과의 씨름이 필요하다.

 

매닝

— 우리의 크립토 경제 작업인 <3E 과정 씨앗은행>(the 3E Process Seed Bank)에서는 가치에 대한 낡은 정의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치의 문제에 대해 더 넓은 물음을 던진다. 가치란 무엇인가? 가치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가치는 어떻게 힘의 관계에 진입하는가? 가치는 힘의 관계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가? 금융적 가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이렇게 광범한 것은 교환수단으로서의 화폐 너머에 있는 화폐 형태들―파생상품, 옵션, 선물(先物) 같은 형태들―과 씨름하지 않는다면 잠재력 있는 대안경제 전략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을, 혹은 이런 경제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활동가로서의 우리의 작업이 침식되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리자] 쎈스랩의 한 웹페이지에 나와있는 ‘3E Process Seed Bank’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세 생태학 연구소>의 대안대학 기획을 위한 ‘창조적 과정 발동기’로서 기능할 것이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오픈소스가 될 것이다. 다른 협동체들에 제공되어 그들의 욕구에 맞추어 쓰는 템플릿이 되도록 할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경제공간연구소(Economic Space Agency , ECSA)(http://ecsa.io) 및 홀로체인(https://holochain.org) 같은 혁신적 단체들과의 협동을 열심히 모색하고 있다.”

 

마쑤미

— 우리는 화폐 가치의 경우처럼 가치를 양적으로만 전제하지 않고 기본적으로 질적인 것으로 사고하고 싶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치의 질적 토대가 가시화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럴 경우 이 질적 토대는 ‘외부성’(externalities)이라 불린다. 즉 가격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자체로는 수량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 고전적 사례는 (녹지 혹은 좋은 학교 혹은 지역의 문화 등의 이유로) 삶의 질의 인식이 동네마다 부동산 가격에 서로 다르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 삶의 질 요인은 가격에 반영되지만 그 자체로는 수량화될 수 없기 때문에 도심지의 미친 듯이 높은 가격과 젠트리피케이션 공세에서 볼 수 있듯이 시장의 왜곡을 낳게 마련이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은 바로 이것이다. 즉 무언가 다른 것을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다. ‘무언가 다른 것’은 질적인 것이기에 항상 포획의 손아귀를 빠져나간다. 이것이 시장을 왜곡하거나 시장에 의해 왜곡된다. 그래서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가치에 대한 질적 관념을 다시 경제의 중심으로 되돌리는 방법이 있는가?’이다.

 

마쑤미

— 여기서 우리는 가장 큰 문제에 직면했고 이 문제는 우리를 상상의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경제가 작동하려면 상호작용의 질들을 어떻든 기록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생각으로 우리가 ‘정동측정기’(affect-o-meter)라고 부르는 것을 발명하려고 시도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경제에 열쇠가 된다. 우리는 말 그대로 정동 경제를 발명하고 싶다. 관계의 내연성(intensities)을 바탕으로 돌아가며 개별 생산물보다는 그 내연성을, 그 과정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경제이다. ‘정동측정기’는 디지털 방식으로 협동적 상호작용의 질적 분석을 수행한다. 우리는 창조적 활동의 기록을 사용하여 우리의 플랫폼을 화폐화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

[정리자] ‘intensities’에 대해서는 이곳의 2번 각주 참조.

 

매닝

— 더 세부사항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활동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지 말해야 할 듯하다.

 

마쑤미

—쎈스랩(SenseLab)은 집단의 질적으로 상이한 경험들을 양성하는 창조적 협동의 형태들을 실험하는 실험실이다. 이 경험은 우리가 ‘삶의 잉여가치’(surplus values of life)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잉여가치의 생산은 집단적이어서 개별 부분들이나 투입물들로 분해되면 그 경험의 내연성의 의미를 잃는다. 우리는 이것을 창발적 집단성(emergent collectivity)이라고 부른다. 이 창발적 집단성이라는 과정이 우리의 생산물이며, 창조적 활동의 전파가 우리의 목적이다. 우리는 <3E 과정 씨앗은행>을 씨앗 집단의 창조적 실천을 돕도록 고안된 창조적 과정 발동기로 간주한다.

대부분의 집단적 행동은 단지 그 개별 부분들의 총합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것이 개별적 투입 그리고 궁극적으로 개별적 이익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아는 것 이상을 욕망한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개별 이익을 넘어서 미지의 내연성으로 가는 것이 우리의 기획의 에토스이다.

이것은 다른 것을 알기가 아니라 다르게 알기, 지식의 새로운 양태를 발명하기이다. 이는 집단 에너지를 그 어떤 개인이나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이 미리 그릴 수 없는 창발로 상승시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여기에는 항상적인 조율과 돌봄이 필요하다. 이것이 프로그래밍에, 그리고 우리가 오프라인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는 데 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확신이다.

 

토도로프

— 쎈스랩에서 개발하고 있는 모델이 다른 조직 형태로 옮겨놓아질 수 있는가?

 

매닝

— 우리는 모르지만 이런 종류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즉 같이 일하는 방식들을 창조하고, 새로운 형태의 협동을 발명하며, 복잡한 생태학적 조우 모델에 관여하는 사람들,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발명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존재한다. 우리의 물음은 스타트업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어떻게 규모를 키울 것인가?’가 아니라, ‘기록되지 않는 것을 기록하는 기술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이다.

<3E 과정 씨앗은행>은 <세 생태학 연구소>(the Three Ecologies Institute)의 자매 기획에서 나온 것으로서, 학습과 삶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것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우리는 이 연구소에서 펠릭스 가따리(Félix Guattari)의 세 생태학 정의―개념적인(심리적인, 정신적인) 것, 환경적인 것, 사회적인 것―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세 생태학을 가로질러 가치를 횡단적으로 사유하는 데에는 금융적 차원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겨우 2년 전이다.

우리는 <세 생태학 연구소>를 나이, 배경, 학습스타일과 무관하게 우리가 계속 함께 학습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발명하는 데 바쳐진 사유와 삶의 양태들을 강화하는 곳으로 본다. 우리는 이 연구소가 대학에 반대되는 곳으로 보지 않는다. 대학에 기생하는 곳(“a parasite”)으로 본다. 여기서 ‘곳’(site)에 강조를 둘 수도 있다. 대학 제도와의 관계를 유지하지만 다른 논리로 작동하는 부차적 장소(para-site), 부차적 기관(para-institution)이다.

[정리자] ‘기생충/기생물’이라는 의미의 단어 ‘parasite’의 뒷부분 ‘site’를 영어 철자 그대로 단어로 보아서 ‘장소’라는 의미로 활용했지만, 사실 ‘parasite’의 ‘site’는 어원상 ‘음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σῖτος’(sitos)이다.

자본주의를 그냥 걸어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우리는 순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자연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전략적 이중성(strategic duplicity)이라고 부르는 태도로 움직인다. 우리는 무턱대고 반대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과 함께 움직이되, 매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이질적인 논리를 양성하면서 그렇게 한다. 대학이 잘 하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참으로 흥미있는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점이다. 대학은 삶을 바꾸는 모임들을 촉진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로서는 실패하고 있다. 이 체계적 실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세 생태학 연구소>가 <3E 과정 씨앗은행>의 도움을 받아서 대학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서도 (혹은 대학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대학이 잘 하는 것들의 일부와 중첩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마쑤미

— 가치의 문제로 되돌아가서, 우리는 통상적인 경제적인 원칙들을 하나도 따르지 않는 플랫폼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를 창조하고 싶다. 개별적 소유나 몫도 없을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회계단위도 통화나 토큰도 없을 것이다. 거래가 활동모델이 되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이익이 인센티브로서 사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경험의 내연성을 함께 창조하여 단독으로 혹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면서 창조했던 것을 창발적으로 초과하는 복잡한 관계공간만이 존재할 것이다. 자기조직적이 될 것이며 분리된 행정구조나 위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는 형식적인 의사결정 규칙들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나키즘적이다. 그러나 조직의 결여보다는 조직 잠재력의 잉여를 가동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또한 그 어떤 개인적 가치도 유효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코뮤니즘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커먼즈이다.

 

매닝

— 언더커먼즈이다.

 

마쑤미

— 그렇다. 언더커먼즈(undercommons)는 프레드 모튼(Fred Moten)과 스테파노 하니(Stefano Harney)가 창발적 집단성을 가리킨 단어로서 우리에게 온 영감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창발과 과정을 양성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들을 찾고 싶다. 이는 전략적 이중성(duplicity)이 현재 우리가 아는 바의 경제로 확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에 완전히 생소한 논리에 따라 움직이면서도 자본주의 경제에 기생해야 한다.

[정리자] “··· 언더커먼즈는 우리가 거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비판을 하는 영역이 아니다. 언더커먼즈는 우리가 ‘환난의 바다에 맞서서 무기 들고 대적해서 끝장내는’ 장소가 아니다. 언더커먼즈는 항상 여기 있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우리의 목표는―여기서는 항상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 제대로 된 방식이다― 환난을 끝장내는 것이 아니라 저 특수한 환난을 대적해야 할 것으로서 만들어내는 세계를 끝장내는 것이다···”(Jack Halberstam, from “The Wild Beyond: With and for the Undercommons” (Introduction to The Undercommons: Fugitive Planning & Black Study by Stefano Harney and Fred Moten).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협동적 과정이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원리들에 따라 플랫폼 기능을 거치게 만들고 삶의 잉여가치의 집단적 생산에 중심을 두며 그러한 생산을 막(膜)으로써 지배적인 경제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막은 분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통과하는 운동을 허용한다. 막에는 구멍들이 나있다. 우리는 창조적 과정이 문턱을 넘어갈 때,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왔다 갔다 할 때 일어나는 질적인 이동을 기록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한다. 기록되는 것은 삶의 잉여가치의 생산의, 그 썰물과 밀물의, 정동적 내연성이다. 막이 하는 일은 그 질적 흐름들을 숫자적 표현으로 옮겨놓는 것인데, 이것이 암호화폐에 새겨질 것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협동적 창조의 에너지로 크립토를 채굴할 것이다. 창발적 집단성을 화폐화할 것이다. 암호통화는 창조적 과정을 진행시키고 다른 기획들로 분기시키는 우리의 능력으로 우리가 구축할 수 있는 믿음에 의해서 ‘뒷받침될’ 것이다. 대안교육의 실험인 <세 생태학 연구소>의 활동이 그 증거이다.

막이 두 면 가운데 화폐경제와 접하고 있는 면에서는 인정받을 수 있고 수량화될 수 있는 가치 운동의 산출이 이루어질 것이다. 플랫폼 내부에서 진행되는 창조과정이 화폐 경제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는 것을 막이 막아줄 것이다. 우리는 두 세계의 가장 좋은 것을 취하려고 한다. 통화가 단지 투기수단이 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다. 우리의 경제 공간은 다른 경제 공간들의 생태계에 거하면서 블록체인/포스트블록체인 자율적 조직을 협동적 노력들에 맞추는 실험을 할 것이다. 여기서도 열쇠가 되는 것은 어떻게 질적인 분석을 사용하여 창조적 내연성의 운동을 기록할 것인가의 문제―어떻게 숫자를 살살 달래서 경험의 질과 연대를 맺게 하는가의 문제―에 실행 가능한 해법을 찾는 것이다. 노라 베잇슨(Nora Bateson)이 개발한 ‘웜 데이터’(warm data)란 새로운 개념이 있다. 이는 우리의 목표와 유사한 목표를 가진 데이터이다.

 

토도로프

— 당신들은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하는 막을 가진 체계를 창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한 자본주의 외부로 걸어 나갈 만큼 순진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당신들의 웹사이트 어딘가에서 ‘추상을 점령하기’라는 어구를 본 적이 있다. 그럼 당신들이 개발해내는 이 경제는 추상적인 것을 ‘점령하는’ 것인가?

 

매닝

— 만일 우리가 추상적인 것을 점령하고 있다면 우리는 영토와 무관한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유 실험이다. 우리가 그 씨앗을 심지만 다른 이들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어찌어찌해서 과정 씨앗을 산출했는데 그것이 우리를 떠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넘어서게 된다면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브라이언은 뭐라고 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 우리가 무언가를 점령하고 있다면, 점령 대상은 상상이다. 탈자본주의적 상상.

 

마쑤미

— 종종 임시적 자율지대(a temporary autonomous zone, TAZ)라고 불렀던 것을 창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자본과 공모자라는 것을 알면서, 그리고 그저 걸어서 자본주의를 유유히 빠져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한다. 만일 자본을 유유히 빠져나온다면 그것은 검토되지 않은 전제를 지니고 나오는 것이 될 것이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전략적 이중성을 구사하면서 자본과의 공모관계로부터 출발하고 그 공모관계와 함께 움직이고 싶다. 기만적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동시에 두 영역에서 움직인다는 말이다.

우리는 아나코-코뮌주의적 논리를 따라 임시적 자율지대를 창출하는 동시에 그것을 기존의 신자유주의 경제에 접목시킬 수 있으면 한다. 좋든 싫든 신자유주의가 오늘날 우리의 삶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의 촉수는 사방팔방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뻗쳐서 그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는 힘들게 노력해야 하고 좋은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에 사는 방법들을 찾아야 하는 한편, 장차 올 탈자본주의적 세계를 미리 보여주는 미래성의 불꽃들을 발산해야 한다. 따라서 함께 살기라는 의미의 점령이다. 임시적 자율지대는 따로 떨어진 세계가 아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세계 속에 있는 구멍이며, 거기서 무언가가 자랄 수 있다. 이 지대는 기존의 세계를 떠난다는 기만적인 생각이 없이 들어설 수 있는 관계적 공간이다. 즉각적인 대체를 목적으로 삼기보다는 보완함으로써 시작한다. 이 보완이 자라서 우리의 ‘함께 살기’를 더 많이 끌어들여 마침내 지배적인 경제와 맞설 수 있었으면 한다.

우리의 ‘추상을 점령하기’는 ‘월가를 점령하라’가 하려는 일을 다른 식으로 하려는 것이다. 즉 화폐를, 금융을 점령하고 가치를 되찾으려는 것이다. 월가와 금융 세계는 현재의 지배적 경제 부분이다. 이들과 씨름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에 맞설 수 없다. 파생상품이나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같은 지배적인 금융도구들은 고도로 추상적이다. 이 도구들은 모두 자본주의적 형태의 잉여가치생산을 바탕으로 돌아간다. ‘더 많이’를 향한 투기적 에너지를 바탕으로 돌아간다. 만일 우리가 금융을 점령하기를 바란다면, 함께 사는 새로운 삶의 양태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 투기적 에너지를 되찾아 와야 한다. 우리는 상상을 점령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상상이어야 한다.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 (2)


  • 저자  :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
  • 원문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의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99개의 테제 가운데 테제21부터 테제40까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

테제21

탈자본주의적 과정을 추동할 수 있는 대안 가치는 창조성이다.

 

주석

창조성이라는 용어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해 전유된 것이 사실이다. ‘혁신’과 ‘창조적 자본’이라는 말이 그 사례이다. 그런데 자본의 창조성의 질은 이와 연관된 ‘창조적 파괴’라는 어구에서 가장 잘 전달된다. 이는 생성 중인 삶을 ‘경제화’하는 데서 행사되는 본래적 폭력을 표현한다. 그러나 경제화와 무관하게 내재적 외부에서 작용하는 삶의 생성 그 자체를, 삶의 창조적 진전을 살펴볼 수 있다. 삶의 과정 또한 자기추동적이며 자신을 축으로 전환하면서 스스로 반복한다. 초과를 중심으로 앞으로 움직인다.

 

테제22

자본주의의 수량화에 연료를 제공하는, 질적인 삶의 잉여가치가 존재한다(Massumi 2017b)

 

보조정리a.

경제화란 삶의 잉여가치를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보조정리b

질적인 삶의 잉여가치는 경제 체계에 주어질 수 있는 만큼이나 빼내어질 수도 있다. 또한 삶의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로 전환되는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극복되기 전에라도 발을 두 방향의 흐름 모두에 담그고 자본주의 너머를 미리 그려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너머에서는 삶의 잉여가치가 축적에 복무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량화가 삶의 잉여가치에 종속되어 있을 것이다.

 

 

테제23

암호화폐 같은 기존의 대안경제 모델들은 시장의 맥락에서 정의되는 화폐를 모형(母型)으로 한다. 그러나 실제로 암호화폐들은 그 정의를 넘어서 잉여가치 창조의 동학을 향한다.

 

주석a

암호통화의 설계자들은 종종 화폐의 3중적 정의에 명시적으로 호소한다. 그 배경으로 부각되는 것은 암호화폐의 투기적 동학이다. 암호화폐들 자체가 상품이 되고 투기를 하기에 무르익은 금융도구들이 된다. 요컨대 자본이 된다. 이는 비트코인의 역사를 보면 명확하다. 비트코인의 뒤를 이어서 2015년 무렵에 시작된 새로운 암호통화들의 폭발적 발행과 함께 초기 코인 공개(“initial coin offering”, ICO)가 점점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IPO(initial public offering, 기업공개)를 모델로 한 ICO는 암호화폐를 증권과 유사한 것으로 취급한다. 달리 말하자면 자기자본(equity)의 한 형태로 취급한다. (자기자본이란 잉여가치와 이윤이 파생되는 기초자산을 가리킨다.) 양적인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과정 어느 경우에나 이 투기적 동학이 착취의 연료를 공급한다(Sassen 2017). 비트코인의 경우 생산수단(코인을 채굴하는 데 필요한 컴퓨팅 파워)을 소유한 사람들이 이긴다. 암호통화의 초자본주의적인(hypercapitalist) 투기적 차원과 그 착취의 바탕이며 그에 동반되는, 자유방임주의적(libertarian) 수사(화폐는 모두에게 동등하다) 사이에 괴리가 존재한다. 자유방임주의적 담론은 자본의 개념 전체를 가린다. 공정한 교환과 개방성으로 정의되는 시장을 방어하는 듯이 행동하지만, 사실은 자본의 개념을 철저하게 실천에 옮긴다.

 

주석b

착취를 제거하려는 의도로 기획된, 암호 기반 대안경제 기획 두 개

① Faircoin (https://fair.coop/faircoin/)

② EnergyCoin (개발중; https://medium.com/@RafeFurst/energycoin-d08ddcab4a0c),

태양열 에너지를 생산함으로써 채굴되며, 코인의 증가된 가치는 코인 소지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마이크로 보장소득(micro–guaranteed income)처럼 균등하게 분배된다.

암호화폐를 집단화하고 그 자유방임주의적 표징을 희석시키는 여러 방식들이 있지만, 대부분 시장의 논리와의 타협을 받아들인다. 최대로 비타협적인 포스트블록체인 대안경제는 이 텍스트의 말미에 제시된다(T93–T98).

 

테제24

지역화폐는 자본의 투기적 측면을 무력하게 하고 단순한 화폐모델로 복귀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지역통화들(공동체 기반 토큰 체계, 또는 LET[지역교환거래체계])은 화폐에게 있는 측정단위와 교환수단으로서의 측면을 활용한다. ‘보유비용’(demurrage)[통화를 일정 기간 이상으로 보유하면 발생하는 비용을 가리킨다―정리자])나 마이너스 이자를 사용하여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측면을 의도적으로 빼내어 축적을 못 하도록 막는다. 그래도 일정한 불평등 혹은 계급격차가 다시 들어설 수 있다. 중산층이 소유한 희소한 도구나 지식은 시간을 거의 들이지 않고 크레딧을 벌지만 하층계급은 시간을 많이 들이는 서비스를 제공한다(Ingham 2004, 185). 일반적으로는 공동체적인 풍토 내에서이지만 평등한 교환이 그 모순과 함께 신화로서 유지된다.

 

테제25

공유경제 역시 경제적 투기를 무력화하려고 노력하며 나름대로 평등한 교환의 논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

 

주석

공유경제에서는 공정한 교환이라는 관념이 지역통화의 경우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시간 요소에 다시 부착된다. 공식적 측정단위나 교환수단은 없으며, 가치저장도 없다. 그러나 비공식적 등가 계산은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교환되는 서비스에 혹은 필요한 숙련을 개발하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들어갔는지를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공식적 통화가 부재하면 시간 자체가 비공식적 통화가 된다. 이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노동 등식(시간= 화폐)을 유지한다(T94, Strat. d). 이는 이윤이라는 요소를 퇴장시키려는 실제적 시도이지만, 경제적 교환이 삶의 시간의 포획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가시화하고 그런 식으로 자본주의의 기본적 메커니즘들 가운데 하나를 정당화한다.

 

테제26

암호화폐, 지역화폐, 공유경제(우버나 비앤비는 여기서 말하는 공유경제와 관계가 없다)는 대안경제적 노력의 일부로서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구축하는 데 모두 한몫을 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어느 것도 가치를 재가치화한다고 할 수 없다. 모두 나름대로 자본의 등식을 되풀이한다.

 

테제27

잉여가치의 투기 엔진이 가치의 재가치화에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주석

가치를 재가치화하는 열쇠는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발전된 부문인 금융시장의 동학을 리버스 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하는 데 있을 수 있다. 바로 그 심장부로 향하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테제28

질적 삶가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 자체로 가치인 어떤 것이며, 교환될 수 없는 경험으로서 유통된다.

 

주석

삶가치는 다른 경험과 교환될 수 없는 만큼 가치를 가진다. 경험의 특이한 색이 그 경험을 삶가치로 만든다. 삶가치는 고유한 발생이라는 질적 성격을 가진 가치이다.

 

보조정리

‘발생’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삶가치가 사건적(evental)이기 때문이다. 삶가치를 되찾는 것은 자본의 비(非)순차적 시간[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만 축적되는 시간― 정리자]을 다시 삶의 질적 생성의 사건성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테제29

삶가치는 삶의 잉여가치이다.

 

테제30

자본주의적 잉여가치는 다른 모든 잉여가치가 그렇듯이 결과의 초과를 생성하는 것에 의해 정의된다. 관건은 ‘지레로 올리기’(leveraging, 레버리징)이다[금융에서는 차입금을 들여와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을 레버리징이라고 하는데, 이는 여기서 말하는 레버리징의 한 사례일 뿐이다 ―정리자].

 

주석

레버리징에서 산출은 투입과 직렬 관계에 놓이지 않는다. 결과는 원인과 같이 놓고 측정할 수 없다. 결과가 창발적(emergent)이기 때문이다. 지레 효과는 ‘더 많이’를 구현한다. ‘더 많이’의 발생은 어떤 개별적인 심층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요인들의 합작품이다. 부분들의 합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하는 것은 부분들의 관계가 낳는 효과(relational effect)이다.

 

테제31

잉여가치의 레버리징은 과정의 심화이다.

 

주석a

레버리징의 고전적 사례는 임금관계를 통한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생성이다. 노동과정으로부터 가치의 초과분을 걷어내는 것은 투입되는 노동시간과 그 결과로 나오는 생산물의 시장가격 사이의 단순한 등식 이상의 것이다. 이는 노동과정의 심화로부터, ‘생산성’의 증가로부터 나와서 경쟁력 획득을 향한다. 상대적 잉여가치를 낳는 것은 주어진 기업과 그 경쟁기업들 사이의 생산성의 격차이다.

 

주석b

노동과정의 심화란, 삶의 이질적인 형성체들과 수준들에 속하는 외부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삶의 구석구석까지 촉수가 뻗어있는 방대한 요인들이 합쳐져서 더 많은 양을 산출하는 통합적 방식을 단 하나의 수로 총합한 것이 이윤이다.

 

보조정리

어떤 과정의 심화도는 그 과정에 통합되는 질적 변화치(differential)들이 퍼지는 정도에 따른다.[앞으로 ‘differential’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Δ’로 옮긴다―정리자] 그 촉수를 삶의 장의 틈들로 얼마나 멀리 그리고 어떤 식으로 보내는지에 따른다.

 

테제32

이윤은 경제적 가치이기 이전에 삶의 잉여가치이다.

 

주석

이윤은 삶의 질이 영속적으로 증가하는 경제적 수량으로 전환된 것이다. 회계장부들은 이 전환의 지표들이다. 회계장부들은 삶의 잉여가치를 경제화하여 포획하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삶의 잉여가치는 회계장부에 도달할 때 사유재산으로 전환된다.

 

테제33

임금관계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 생성의 한 사례일 뿐이다. 급속하게 자동화하는 경제에서는 임금관계의 우선성이 점증적으로 위협을 받는다. 인터넷과 금융시장에서는 잉여가치가 관계적 운동효과로서 직접 생성된다. 흐름의 잉여가치(surplus-value of flow)라는 개념이 제안된다.

 

주석a

인터넷에서 관계적 운동효과는 이질적인 경향들이 복잡하게 서로 작용하면서 화폐화될 수 있는 경향들을 만들어내고 이것이 ‘데이터 마이닝(채굴)’을 통해 포획됨으로써 생성된다. 생성되는 이윤은 삶의 장 전체에서 일어나는 정동, 주목, 욕구의 흐름들 사이의 교차접촉의 양적 표현이다. 포획되는 삶의 잉여가치는 흐름의 잉여가치이다. 이윤의 양은 시간·노동·투자의 공식적 투입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소비자들이 비공식적 생산자들이 된다. (이들은 데이터를 채굴할 수 있는 장치들의 형태로 고정자본을 제공하기도 한다.) 투입과 산출 사이의 이러한 점증하는 불비례 때문에 노동가치론은 재고되어야 한다.

 

주석b

흐름의 잉여가치 개념은 “이미 잉여가치를 잉태한” 화폐인 이자 낳는 자본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외삽한 것이다. 생성되는 이윤은 구매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이 행위가 “자본의 전반적 운동과 연관되는 방식”의 결과이다(Marx 1991, 463). 잉여가치의 잉태는 자본주의적 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움직임을 포괄한다. 잉여가치의 잉태는 관계적 창발 효과를 생산할 잠재력의 잉태이다. 신자유주의에서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중요성은 유동성(liquidity)에 대한 투자자들의 집착으로 나타난다. 과정의 전체 운동과의 연관을 잉태한 잉여가치의 일반화된 개념을 기계적 잉여가치(machinic surplus-value) (Deleuze and Guattari 1983, 232–35)라고 부를 수 있다.[‘machinic’을 ‘기계적’으로, ‘mechanical’을 이와 구분하여 ‘기계론적’이라고 옮긴다―정리자] 이는 흐름의 잉여가치와 동의어로서, 컴퓨터화 및 자동화와의 중첩을 강조한 것이다.

 

주석c

노동가치론을 넘어서는 것이 맑스 자신의 저작에 맹아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계적 잉여가치( = ‘흐름의 잉여가치’)는 「기계에 관한 단상」에 나타난 그의 분석을 더 밀어붙인 것이다. 맑스는 자동화를 ‘일반지성’의 대상화로서 분석한다. 여기서는 “사회적 지식”이 “직접적인 생산력”이 된다. 더 나아가 “사회적 생산력이 단순히 앎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의 직접적 기관들로서, 실질적 삶의 과정의 직접적 기관들로서 산출되는 정도를 보여준다.”(Marx, 706) “직접적 기관들”이란 자동화된 기계들이다. “알아서 움직이는 노새들”이라고 맑스는 불렀다. 맑스는 몰랐던 디지털 미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질적 삶의 과정”의 전반적인 운동이 (실리콘밸리에 의해 세상에 풀려서 전지구적으로 데이터 마이닝을 하는 자동코드 노새들 덕분에) 잉여가치의 생산을 자율적으로 추동하는 “직접적 힘”(direct force)이 될 때, 잉여가치와 ‘필요노동시간’의 상응관계는 무너질 정도로 약화된다. 맑스도 이런 취지로 이렇게 말했다 : “노동시간을 부의 유일한 척도요 원천으로 설정하면서도 노동시간을 최소로 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본은 그 자체가 움직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자본은 노동시간을 잉여의 형태로 증가시키기 위해서 필요의 형태로는 감소시킨다.”(Marx, 706) 오늘날 자동화된 데이터마이닝에서 (‘실질적 노동’과 ‘실질적 부’로부터 벗어난) “과잉” 형태의 증가가 가장 극적이 된다. 여기서 필요노동시간의 감소는 무한소의 한계치에 도달한다. 인간의 투입은 클릭 한번으로 줄어든다. 우리는 우리의 실제적 삶의 과정과 그 (소셜미디어를 통해) 심화되는 관계망에 푹 빠져서, 쉴 때조차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생산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보조정리a

디지털 세계에서는 흐름의 잉여가치가 정보의 잉여가치와 동의어이다.

 

보조정리b

금융시장은 흐름의 잉여가치 위에서 작동하는 표본적 사례이다.

 

주석d

파생상품들은 흐름의 잉여가치의 순전한 작동자들이다. 노동의 생산물이 아니라 유통의 생산물이다.

 

테제34

Δ들의 레버리징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모든 수준에서의 특징이다.

 

보조정리a

자본주의적 과정의 Δ생성적 작동방식의 분석은 여러 핵심 이슈들(자본주의적 주체성, 계급, 실물경제의 지위,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관계의 성격 등)에 광범한 영향을 미친다.

 

주석a

금융시장의 경우 Δ들은 경제 부문들, 일국 통화들, 금융 도구들, 특히 시간 간격들(이것의 함수로서 모든 다른 Δ들이 변동한다) 사이에 퍼져있는 형태를 띤다. Δ들은 전반적인 운동에서 시간에 따라 서로 상관적으로 움직인다.(테제18) 금융시장들은 Δ들(특히 시간 Δ들)을 흐름의 잉여가치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

 

주석b

자본은 여러 형태를 띤다. 임금도 자본의 한 형태(‘가변자본’)이다. 장비도 자본(‘불변자본’)이다.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지적 재산도 자본이다. 위신가치(prestige value)도 사회적 자본의 한 형태이이다. 평판도 그렇다. 신자유주의적 계산에 따르면 개인도 자본의 한 형태이다. 금융시장은 이 모든 자본의 형태들(+x) 사이에서 Δ들을 조작한다.

 

보조정리b

신자유주의에서 개인은 인간 자본(human capital)으로 나타난다.

 

주석C

개인은 자본의 전반적 운동을 국지적으로 구현하는 만큼 인간 자본이다. 개인은 자신의 인신을 전반적 운동의 축소판으로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흐름에 몸을 담근다. 개인의 삶의 활동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퀀텀(quantum)이 된다. 개인이 하는 일은 자본의 운동에 맞추어 파도타기를 하는 것이다. 급속하게 변하는 일자리시장의 연속적인 파도들을 타고 넘는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파도타기가 개인을 흐름의 잉여가치의 인격화로서 형성한다. 개인의 직무기술서(job description)가 삶기술서(life description)가 되어 삶의 장을 구성하는 질적 Δ들을 전략적으로 조작하게 된다. 근본적인 과제는 정보의 잉여가치를 획득하여 레버리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성의 잉여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인식의 잉여가치의 생산도 포함된다.

이러한 삶의 잉여가치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적 과정이 포획한다. 인간 자본의 한 단위는 (자본의 고유한 역동적 자기추동의 한 기능으로서 자본의 전반적 운동에 포섭되는) 삶의 잉여가치의 퀀텀이다. 인간 자본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를 낡은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로 노동자 형상을 대체하기 위해서 신자유주의에 의해 발명되었다. 자본에 의한 포획을 자발적 행동으로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에 있는가. 인간은 “개인 기업가”(entrepreneur of oneself)라는 단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된다(Foucault 2008, 224–26). 자본에의 연루가 개인의 삶의 근본적인 실존방식이 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가 노동자-자본가 적대를 대신한다. 이것이 체제의 외적 한계(전통적인 말로는 ‘모순’)를 표시하는 적대를 내부의 경제적 작동자로 내화한다. 채권자-채무자 관계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생산이 이루어진다.

 

보조정리c

금융자본은 메타-자본(meta-capital)이 된다(Bryan and Rafferty 2006, 13).

 

주석d

금융자본은 자본의 정수로서, 잉여가치의 추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신자유주의 경제에서 금융 부문은 실물경제로부터 분리된다. 흐름의 잉여가치를 메타 수준에서 풀어놓는다. 생산적 경제의 ‘기초자산’(underlying assets)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다. 이러한 자립화는 파생상품(옵션들, 헤징hedging,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등)의 형태를 띤다. 옵션과 헤징에서 이윤은 기초자산의 상하운동에 투기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휘발성 자체를 기반으로 자본화하는 것이다. 신용파산스왑에서는 기존의 자산들을 나누고 재결합함으로써(‘트랜칭’tranching) 이차적 금융도구들이 구축된다. 전략적 혼합이 더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이다(이것이 증권발행을 통한 자산유동화securitization이다). 그런데 번들로 묶인 자산이 거래됨으로써, 새로운 층위의 자산이 전적으로 파생적으로 창출된다. 파생상품의 가치는 기초자산의 소유와도 무관하고 그 개별적 평가와도 무관하게 변동할 수 있다. 자산유동화는 바로 투기로 이어진다. 사실 기초자산이 일반적인 의미의 자산일 필요는 없다. 신용파산스왑의 경우에는 부채(주택저당대출mortgages, 자동차할부대출car loans, and 학자금대출student loans이 가장 주된 사례들이다)가 기초자산이 된다. 이차적인 부채시장이 부채를 (정상적인 이자 낳는 자본보다 더 강력한) 신용도구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마법을 부린다. 자본의 이러한 메타수준에서는 자산과 부채 사이의 구분이 삭제된다. 이와 함께 생산적 경제활동과 비생산적 경제활동 사이의 구분의 중요성도 삭제된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특징은 금융자본이 생산적 경제로부터 점점 더 벗어나는 경향이다. 그래서 이제는 생산적 경제가 금융자본에 비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를 정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경제의 이 두 영역은 여전히 상대를 중심으로 돌지만, 역관계는 뒤집어졌다. 이런 상황은 휘발성을 증가시킨다. 이는 흐름의 잉여가치를 조작할 능력을 증가시킨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마치 고양이인 양 계속해서 공중에 던진다. 땅에 제대로 발을 딛고 착지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신자유주의 경제에서는 민스키(Herman Minsky)의 말처럼 높은 위험도의 휘발성 파도타기가 경제에 통합되어서 이제 “안정성이 불안정성을 낳는다”(“stability is destabilizing”)(Minsky 1982, 26). 이렇게 보면 ‘유동자산화/증권화’(securitization)는 형편없는 자본주의적 농담이다.[‘증권’을 의미하는 ‘security’에는 ‘안전’이라는 의미가 있다―정리자]

 

보조정리d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화가 아니라 금융을 모형으로 하여 출발하는 대안경제가 ‘파생물’(‘파생상품’이라는 경제적 의미보다 넓은 의미로 취한 것)의 논리를 기반으로 탈자본화할 수 있을 것이며, 생산주의(productivism)와 노동 패러다임을 넘어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정치경제와 전통적인 맑스주의 정치경제 사이에 적-동지 간 유대를 이룬다.) 대안경제 기획은 창조적 놀이(creative play)의 패러다임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주석e

금융거래의 디지털 자동화는 데이터 분석을 가속화함으로써, 금융거래의 회전속도를 높임으로써, 흐름의 잉여가치의 역할을 강화한다. 이것이 자본주의를 광속으로 격상시킨다. 잉여가치 생산이 비등한다. 기계적 잉여가치 생산이 인간의 의식적 통제로부터 벗어나 점점 더 큰 자율성을 얻는다. 이 현상에는 다른 형태의 잉여가치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개입이 바람직하거나 필요한 의사결정 지점들이나 압박 지점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 복잡성이나 속도가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것이라면, 인간이 전통적으로 그 예외성을 정의하는 데 사용한 수단(숙고를 통한 추론, 정연한 합리주의)을 채택해서는 인간의 개입이 이루어질 수 없다. 당일매매 거래자들(day traders)이나 장내거래자들(floor traders)은 ‘감’(gut feeling)이나 직관을 말한다.(Lee and Martin 2016, 79, 90, 134, 245, 271; Knorr Cetina and Preda 2007, 132). 이는 지각(perception)의 잉여가치들이다. 즉 지각의 정상적 상태의 초과분을 자본화한다. ‘감’으로 지각의 잉여가치들을 생성하는 것이 인간이 기계와 비등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방식이다. 인간이 개입한다는 것은 ‘인간의 (직관을 통한) 기계적으로 되기’를 실행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기계적 과정에 병합된다. 이는 인간의 삶과 능력이 자본에 실질적으로 포섭되는 모범적 사례이다. 인간 자본 개념은 기계적으로 되기(becoming machinic)에 대해서 명확하다. 인간 개인은 기계적 잉여가치 생산의 벡터가 된다. 두 개의 다리를 가진, 알아서 움직이는 노새가 된다.

 

주석f

신자유주의에서 인간 삶의 자본에 의한 포섭은 트레이딩플로어(trading floor, 증권이 실제로 거래되는 곳)에서 정점에 이른다. 인간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주인이 아님이 확실해진다. 인간은 자기형성에서조차도 포로들이다. 인간이 자본주의를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인간을 관통해서 달린다. 인간 자본은 권력형성체로서의 자본주의의 자기성취이다.

 

보조정리e

인간과 기계 사이의 Δ가 자본주의적 동학의 중추이다. 인간 본성은 이 Δ의 전개와 완전히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테제35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있는 인간 이상의 것이다.

 

테제36

이러한 상황을 비탄할 필요는 없다. 탈자본주의적 미래로 가는 경로는 좋은 ‘실물’경제를 ‘허구적’ 자본의 나쁜 경제로부터 구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주석

실물경제나 금융이나 모두 삶을 포획하고 절단하는 권력의 체제들이다.

 

보조정리

인간에게 있는 인간 이상의 것을 껴안아, 돌려, 그 생성의 방향을 바꾸라.

 

테제37

시간 Δ의 우선성이 선물(先物, futures)을 표본적 금융도구로 만든다. 궁극적으로 자본이 포획하는 대상은 미래이다. 미래의 포획은 잠재력, 변화, 생성의 포획이다. 이것이 금융의 힘이다.

 

주석

앞에서 논의한 금융자본의 형태들은 확대된 의미의 선물들이다.

 

테제38

투기적 금융이 레버리징하는 Δ들은 삶의 질적 Δ들과 연동되어 있다.

 

주석

가령 일국 통화의 변동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사이의 삶의 질과 정치권력에서의 Δ들을 반영한다. 이런 종류의 Δ들은 집단적이어서 인구와 관련된다. 또한 관계적이어서 그 인구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모여서 복잡하고 늘 요동하는 삶의 장을 이루는 방식과 관련된다. Δ들은 개인의 차원에 갇히는 법이 없다. 트레이딩플로어에서 가격이 설정될 때 장 요동(field-fluctuation)의 간격이 단일한 수량화된 데이터 지점에서 정점을 이룬다. 집단의 변화하는 합리성이 단일한 분리된 양으로 집중되며 회계장부에서 최종적으로 고정되어 포획된다. 이 포획을 조건짓는 n차원의 삶 요인들이 경제적으로 등록 가능한 이윤점이라는 일차원으로 환원된다. 삶의 장의 초개인성이 하나의 점으로 즉 개인이 소유하는 축적의 사건으로 집중된다. 모두의 것이며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공통적인’) n차원의 생태가 포장되어 소유물이 되며, 이와 함께 광활하게 열린 삶의 관계가 사적인 전유로 종획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영속적으로 되풀이되는 ‘커먼즈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자본주의의 한 역사적 국면이 아니라 그 영원한 작동방식이며 ‘축적’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보조정리

모든 잉여가치의 생산은, 거기에 전환(turnover)이 관여되며 전환은 질적 Δ들에 의해서 조건지어지고 에너지를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초개인적이다. 금융시장은 하나의 특권적인 사례일 뿐이다.

 

테제39

자본주의는 경제화에 다름 아니다. 삶의 질적 장이 경제적으로 전유되고 영속적인 양적 성장의 원칙에 포섭되는 과정이다.

 

테제40

경제 체계를 이해하는 것과 포획장치로서의 삶의 경제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계속>

Bibliography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 (1)


  • 저자  :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
  • 원문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브라이언 마쑤미(Brian Massumi)의 , 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 A Postcapitalist Manifesto의 99개의 테제 가운데 테제1부터 테제20까지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

테제1

가치를 되찾을 때이다. 많은 이들에게 가치는 오랫동안 완전히 변질된 개념으로, 규범적 제한에 젖고 자본주의적 권력에의 연루(complicity)에 물들어 구원받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이는 규범의 제공자들과 경제적 억압의 변호론자들에게 가치를 내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었다. 가치는 그들의 손에 두기에는 너무나 소중하다.

 

테제2

강력한 대안적 가치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규범적 몸짓들이 슬쩍 침투하기가 쉽다. 살아가면서 판단은 하게 마련이고 판단의 기준들은 보통 암묵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에 규범성이 숨어드는 것이다. 이것도 억압적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

 

테제3

가치를 되찾는 것은 규범을 제공하는 판단기준을 다시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테제4

가치를 되찾는 것은 가치를 규범과 표준적 판단 너머에서 재가치화하는 것이다.

 

테제5

가치의 재가치화의 첫 과제는 가치를 수량화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가치는 근본적으로 질적이다.

 

테제6

가치의 재가치화는 초월적이지 않고 속세적/이승적이다. 초월적 가치들은 규범성의 제한을 절대화할 뿐이다.

보조정리a

가치의 재가치화는 도덕적이지 않고 윤리적이다.

주석

윤리에서는 선/악 혹은 정상적/병리적이라는 짝이 “실존의 양태들의 질적 차이”(들뢰즈)에 의해 대체된다. 윤리는 한 과정이 질적으로 할 수 있는 바, 그리고 이것이 취하는 방향과 관련된다. 가치의 재가치화라는 기획은 과정적 윤리의 경로를 취한다. 과정적 윤리는 철저하게 관계적이다. 이는 넓은 의미의 생태학이다.

보조정리b

가치의 재가치화는 협소한 경제적 도메인을 흘러넘쳐서 힘들의 생태학이 된다.

 

테제7

그래서 가치를 수량화로부터 분리함은 시장의 경제적 논리와 정면으로 씨름함을 의미한다. 가치는 자본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테제8

우리 시대에 가치에 대한 주된 관념은 경제적 관념이다. 경제적 가치의 도메인이 시장이다. 시장 기반의 사유는 화폐에 대한 합의된 정의를 활용한다. 이 정의는 3중적이다. ① 회계의 단위 ② 교환의 매체 ③ 가치의 저장.

주석

이 정의는 가치의 문제를 우회한다. ‘가치의 저장’이란 회계단위들의 축적이 보존되어 교환에 들어설 준비가 된 것이므로, 이 정의는 순환적이다. 순환성이 가치에 대한 양적 이해를 세 역할을 가로질러 퍼뜨린다. 그리하여 가치를 화폐와 동일시한다. 그 결과 가치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실질적 기능에 대해서도 흐리게 하고 재가치화된 탈자본주의적 미래에 가치가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흐리게 한다.

 

테제9

예의 3중 정의는, 가치는 본성상 수량화 가능하다는 전제를 수립하며 화폐를 가치의 척도로서 정립한다. 가치의 재가치화는 바로 이것을 문제 삼아야 한다.

 

테제10

고전적 시장 개념의 또 하나의 전제는 평등한 교환이라는 신화이다. 화폐와 교환하여 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이 신화가 자본주의 시장을 움직이는 발동기이다.

주석a

이는 가치척도로서의 화폐라는 관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화폐는 일반적 등가물로서 사용되기 때문에 가치척도로 취급된다. 이 잣대를 대면,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 없던 것들도 하나의 척도로 측정할 수 있게 된다. 공정한 가치는 사용가치가 상품의 가격과 동일한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고 판단될 때 성립된다. 가격은 질적으로 상이한 상품들이 서로 비교될 수 있게 하는 제3항이다. 이는 이론상으로 ‘합리적’ 소비자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화폐의 현재의 특정 액수의 가치가 미래의 어떤 액수와 비교될 수 있다. 이는 ‘합리적’ 삶의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공정한 교환의 신화는 그와 병행하는 ‘많이’ 얻음이라는 시장 논리에 의해 무너진다. 소비자 행동에서, 지불한 화폐에 대해 많은 가치를 얻음이라는 유혹이 실제로 등가교환보다 더 강한 발동기이다. 만일 시장 이념의 빛나는 표면에 흠을 내면 부등가교환의 유령이 즉시 등장한다. 그러면 가치에 대한 질적 이해가 귀환하여 가치에 대한 양적 이해의 토대를 흔들게 된다. 예의 ‘더 많은 가치’는 주체적 요인들에 의해 굴절된다. 사용가치는 상대적이다.(T91 Schol. b) 위신가치(prestige-value) 같은 주관적인 가치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주관적인 요인들은 소비자들마다 다르므로 하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다. 각 경우마다 특이하게 질적으로 계산된다. 소비(혹은 구매)는 가치의 가소성에 대한 실물교육이 된다.

주석b.

현재의 돈의 액수와 미래의 돈의 액수도 하나의 척도로 측정될 수 있다는 신화 또한 무너지는데, 이번에는 시장 자체가 가치의 가소성의 모범적 사례가 되는 경향에 의해 무너진다. 이것이 휘발성(volatility)이라고 불린다. 휘발성은 두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경기순환 같은 시장 내적인 요인들에서 발생하고 다른 한편으로 외부성(전쟁, 자연재해, 날씨, 더 근본적으로는 기후변화 등)에서 발생한다. 외부성은 시장 외부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질적 변화가 시장에서의 가격 변화에 반영된 것이다.(Hardt and Negri 2009, 155) 또한 정확하게 시장 외부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화폐로 계산되지 않는 가치평가와 연결된 가격운동이 포함된다. 고전적인 사례는 부동산 가격에 반영되는, 위치의 부가가치이다. 위치가 삶의 질의 지표가 되는 것이다. 삶의 질은 그 자체로는 측정 불가능하다. 바람직한 동네에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은 측정 불가능한 것에 숫자를 매기는 한 방식이다. 측정 불가능한 것을 가격이 표현한다. 이는 가치와 삶의 활력(vitality)—가격에는 반영되지만 그 자체가 직접적으로 질적이기에 양적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삶의 활력—사이의 연관을 암시한다.

보조정리a

실질적 시장 동학은 부등가교환을 전제한다. 시장이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측정가능하게 만들기보다 초과(excess)에 더 의존한다.((‘초과’(excess)는 네그리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리라고 추측된다. 네그리에게서 초과([이탈리아어] eccedenza)는 탈측정([이탈리아어] dismisura, 측정불가능한 것)과 연관된다. 네그리의 이 개념에 대해서는 Antonio Negri, The Porcelain Workshop : For a New Grammar of Politics, trans. Noura Wedell (Los Angeles : Semiotexte(e), 2008 참조.)) ‘~보다 더 많이’가 ‘~과 동등한’보다 더 평등하다 (More-than is more equal than equal-to).

보조정리b

‘더 많이’라는 불균형 교환은 질적 요인들로 인해 일어난다. 질적 요인들은 가격에 반영되기는 하지만 시장에 대해 외부성으로서 남아있다. 이 외부성들은 비(非)숫자적 초과를 낳는다. 이들은 주관적이며 활력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경험의 질에 해당하며, 삶의 질에 속한다.

보조정리c

가치의 재가치화는 가치와 활력 사이의 이러한 연관을 발전시켜야 한다. 가치의 재가치화는 (등가교환, 시장의 공정성이라는 신화 그리고 측정의 수사를 넘어서) 질적 초과를 탈자본주의적 덕으로 만들어야 한다.

 

테제11

내생적 요인들과 외부성 사이의 구분은 궁극적으로는 유지 될 수 없다. 이를 이해하려면 ‘내부’ 혹은 ‘외부’가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체계와 과정을 구분해야 한다.

주석a

시장의 변동은 근본적으로 비경제적인 요인인 정동(affect)에 따라 일어난다. 시장들은 공포와 희망, 확신과 불안정 위에서 돌아간다. 정동은 언제나 외부성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의미인가? 정동이 말 그대로 경제의 범위 외부에 있는 요인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시장의 동학에서 정동의 구성적 힘을 과소평가하고 정동이 처음부터 경제학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부인하는 게 된다. 케인즈는 자신의 동료 경제학자들에게 “순전한 의심, 불안정성. 희망과 공포라는 숨은 요인들에 대한 과소평가”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Keynes 1973, 122) 그렇게 숨겨져 있지는 않지만 공식적으로 부인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정동은 말 그대로 시장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시장 체계 내에 있다고 인정되는 공식적인 시장 메커니즘도 아니다. 정동은 경제적 작동자 자체가 아니다. 정동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질적이다. 정동은 질적으로 경제를 요동시키면서 또한 경제를 흘러넘쳐 많은 비경제적 영역으로 확대된다. 정동은 경제적 계산을 하도록 스스로를 강요하지만 그 자체는 계산이 아니다. 시장 기능들은 정동의 힘을 느낀다. 정동은 본성이 경제와는 다른 것, 경제를 초과하는 것으로 남아있으면서 경제에 표시를 남긴다. 우리는 외부성이라 불리는 주체적, 활력적 요인들을 ‘정동’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정동은 시장 동학을 흘러넘치면서도 시장에 표시를 남기는 요인들을, 경제에 속하지 않으면서 경제적 논리를 조절하는 요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정동을 외부성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시장의 내재적 외부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겠다. 이 용어는 자본주의적 장에 속하지만 그 체계에는 속하지 않는 요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Massumi 2017a, ch. 1). 가치의 재가치화가 탈자본주의적 미래로 성장할 질적 과정들의 맹아적 형태를 포착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외부이다. 정동의 문제는 내연성(intensity)((‘intensity’가 스스로 뻗어가는 혹은 달라지는/갈라지는 힘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내연성’ 혹은 ‘내연력’으로 옮기기로 한다. 들뢰즈(『차이와 반복』)에 따르면 내연력은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① 내연적 양은 그 자체에 불균등한 것을 포함한다. ② 내연력은 차이를 긍정한다. ③ 내연력은 함축되고 감싸인, 혹은 ‘태아(胎兒)화된’ 양이다. 마쑤미가 이 들뢰즈·가따리의 ‘내연성(력)’ 개념을 빌려서 쓰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내연력은 ‘(성)질’(quality)이 발생하기 이전의 차원―‘spatium’―에 속하는 힘이지만, 이 텍스트에서 마쑤미가 말하는 내연성은 (성)질과 연관된다. 또한 들뢰즈가 말하는 내연력의 양은 가격과 같은 ‘연장’(extensity) 차원의 수량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개념과 긴밀하게 연관된다(T31, T42, T43). 내연성은 경제적 관점에서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열쇠이다.

보조정리a

경제적 체계와 더 넓은 과정(이는 내재적 외부를 구성하는 질적 요인들에 속한다) 사이의 대조가 가치를 재가치화하는 기획에 필요한 도구이다.

주석b

이는 내부/외부의 논리를 확대하고 복잡하게 만든다. 한 체계는 다른 체계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하고 그러면서 그 내부를 외부와 가른다. 예를 들어 경제는 서로 맞물리는 작동들에 의해 체계로서 정의된다. 이 작동들은 기술 체계에서 서로 맞물리는 작동들과 구분된다. 그런데 이 내/외 구분 말고 나름의 고유한 범주인 내재적 외부가 있다. 증기기관의 경제와 테크놀로지 체계들은 서로 외적이다. 그러나 내재적 외부는 이와는 다른 어떤 것이다. 증기기관은 19세기에 경제를 추동했다. 그리고 경제가 증기기관의 발명과 번성을 추동했다. 각자가 상대방을 역동적으로 껴안고 생성했다. 둘은 그 체계로서의 차이를 가로질러 두 얼굴을 가진 하나의 생성운동에 포함되었다. 이 이중적 생성운동은 두 체계들 사이의 과정적 결합(a processual coupling)이다. 과정적 결합은 그 어느 쪽 체계에도 본격적으로 속하지 않지만 양자의 생성에 형성력으로서 진입한다. 과정적 결합이 그 체계들의 내재적 외부를 구성한다. 과정은 체계들의 사이(in-between)로 이루어지는 내재적 외부이다. 과정은 그 어떤 주어진 체계(들)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기 때문에 저 내재적 외부는 체계성(systematicity) 그 자체를 흘러넘친다. 그 자체로 보면 이 사이는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장’(a wide-open)이다. 그것은 체계들의 생성이 현재의 장소와 현재의 상태를 넘어갈 수 있는 확대된 장이다. 과정은 본성상 체계들을 초과한다. 과정은 모든 체계를 열린 체계로 만든다. 내적/외적 체계(환경)과 내재적 외부(과정적 생태) 사이의 이 구분은 자본주의에의 연루와 저항을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해진다.(T34 Schol. c, T60, T76 Schol. b).

보조정리b.

탈자본주의적 미래를 위해 되찾아 재가치화해야 할 초과는 과정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주석c

자본주의의 체계적 작동에 긴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소비자 시장, 노동 시장, 투자, 금융 시장) 그러나 체계 분석으로 충분하지 않다. 분석은 과정의 확대된 장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장이라는 말은 체계와 과정의 구분을 고수하는 간편한 방법이다. 자본주의의 내재적 외부가 범위에 포함될 때에는 ‘자본주의적 장’이라는 말이 사용될 수 있다. ‘체계’라는 말은, 전통적 경제학이 정식화한 바의 제한된 의미에서의 경제의 작동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보조정리c

자본주의적 과정은 자본주의적 체계가 자신의 내재적 외부에 몸을 담그어 그 생성을 위해 혹은 계속적인 자기구성을 위해 새로운 잠재력을 끌어내는 과정이다.

보조정리d

초과의 문제는 이차적으로만 파괴와 연관된 ‘지출’의 문제이다.(Bataille 1988) 더 근본적으로 초과의 문제는 잠재력에 속한다. 이는 적극적으로 생성을 촉진하는 정도로만 파괴와 관련된다.

 

테제12

등가교환(equal exchange)의 신화는 특히 노동시장과 관련하여 터무니없다.

주석

봉급이 삶의 시간과 육체 활동의 양을 화폐의 양과 공정하게 교환한 것이라는 생각은 맑스에 의해 자본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신화로서 포착되었다. 만일 이것이 등가교환이라면 ‘이윤’은 무엇인가? 이윤은 봉급에 들어간 화폐가치 이상으로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분이다.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여전히 양적 관점에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만) 자본가들의 등가교환 주장이 허위임을 드러내준다. 자본가들은 노동비용을 줄이자고 말한다. 이는 교환의 불평등을 보존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테제13

초과는 바로 자본의 정의 안에 각인되어 있으며, 즉 자본이 측정 단위, 교환매체, 가치저장수단으로서의 화폐와 다르다는 데에 각인되어 있으며, 투자화폐로서의 역할과 관련된다.

주석

자본은 화폐의 현재의 양으로부터 미래에 더 많은 양을 도출할 잠재력으로서 정의된다. 자본은 이윤이 아니다. 이윤은 도출된 더 많은 양의 화폐이다. 자본은 그 양을 도출할 잠재력이다. 그 잠재력이 경제 체계의 효율적인 발동기이다. 그것은 체계에 내재하는 과정적 외부에서 창발적으로 움직인다.

 

테제14

자본주의 경제는 그 계산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실제적 양보다는 잠재력에 더 근본적으로 관여한다.

주석a

잠재력은 변형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질적 개념이다. 잠재력의 운동으로서의 자본은 변형력, 즉 체계의 생성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화폐의 성질이다. 변형은 통계에 기록될 때에만 경제적으로 중요하다. 숫자들은 질적 변화(생산성의 변화, 증가하는 생산성과 관련된 노동과 관리 관행의 변화, 노동과 관리 관행에서의 변화와 연관된 삶의 변화, 부의 증가하는 축적, 또한 사회적 불평등의 증가, 파열, 그리고 혁신의 기회들, 그에 수반되는 문화적 변형들, 이 변형들에 수반되는 새로운 욕망들의 등장, 이 욕망들을 구체화한 새로운 성향들, 개인적 특이성들의 우발성 등)의 양적 기호들이다. 경제적 지표들이 가리키는 것은 삶의 변화들이다. 이 지표들은 삶의 위장된 기호들이다. 맑스는 ‘사회적 물질대사’와 ‘변신’의 관점에서 자본에 대해 말한다. 삶의 기호들이 가리키는 변화들은 엄밀한 의미의 경제 영역을 흘러넘친다. 경제의 잠재력은 궁극적으로 삶의 잠재력이다. 가치의 문제는 삶의 문제이다. 자본은 삶의 맥박에 보이지 않는 손을 얹고 있다.

주석b.

이단적인 경제이론가들(고전적·신고전적·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의 시장 근본주의와 합리적 계산이라는 종교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종종 우리에게 화폐는 투명한 도구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화폐는 삶의 관계의 작동자이다. 경제의 내재적 외부와 연결된 과정을 통해서 잠재력을 수확하고 분배한다. 숫자는 부단히 수확과 분배를 세고 또 세지만, 관계와 삶의 잠재력을 암시하는 일은 등한히 한다.

 

테제15

초과(excess)의 문제는 잠재력과 연관된 자본의 정의와 관련하여 잉여가치의 문제에서 다시 돌아온다.

주석

잉여가치는 화폐의 성질로서의 자본에 붙여진 또 하나의 이름이다. ‘잉여’가치는 현재의 양을 초과하는 것을 미래에 도출할 항상적인 잠재력으로서의 자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등한 교환이니 화폐의 공정한 가치니 하는 것이 경제의 발동기가 아니라 잉여가치가 바로 경제의 발동기이다.

 

테제16

잉여가치가 화폐에 대한 시장적 정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한 양의 관점에서 이해된 바의 가치와의 관계에서 우선적이다.

주석a

잉여가치는 전환(turnover)의 효과이다. 그것은 경제적 과정을 추동하는 잠재력의 여분이다. 이윤은 잉여가치가 경제를 추동하는 과정에서 정기적으로 도출한 숫자화된 수확이다. 이윤이 다시 투자되면 잉여가치에 의한 경제의 추동으로 되돌려진다. 잉여가치와 이윤은 이렇게 서로 전환되며, 항상 여분을 남긴다. 잉여가치 가운데 흡수되지 않은 초과분이 미래 세대에게 더 큰 이윤의 낳는 것이다. 잉여가치는 ‘항상 더 많은 이윤’이다.

보조정리a

잉여가치는 측정불가능하다

주석b

잉여가치는 그 자체로는 측정될 수 없다.(Negri 1996, 151–154; Bryan and Rafferty 2013, 137, 145, 147). 본성상 그 어떤 양의 이윤보다 항상 더 많기 때문이다. 잉여가치는 초숫자적(supernumerary)인데, 숫자에 있어서 능가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숫자를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런 불확정성은 화폐의 공급 자체의 수량화 불가능성에 반영되어 있다. 화폐를 구성하는 부채가 부단히 창출·소멸되고 있기 때문에 화폐량은 항상 변동한다.(Schmitt 1980, 64–78; Ingham 2004, 142).

주석c.

여기서 말하는 잉여가치의 전환은 단순히 상품이나 화폐의 형태변화를 넘어선다. 그것은 경제의 불확정적 총체가 스스로를 중심으로 전환하는 것, 자신의 체계성을 흘러넘쳐 과정적 외부에 몸을 담근 후 거기서 발견되는 잠재력을 활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통의 규칙적인 주기적 패턴들과 관계가 있다기보다는 예측 불가능한 “변이적 흐름들”(mutant flows, Schmitt 1980, 234–35)과 관계가 있다. 변이적 흐름들은 항상 존재하는 초과인 잉여가치의 여지를 체계 내에 만들기 위한 화폐의 연속적 창출과 연관된다. 변이적 흐름들은 알려진 것에서 알려진 것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변신(metamorphosis)에서 변신으로 움직인다. 파생금융상품들이 자본주의적인 변이적 흐름의 전형적 사례이다. (T33 Schol. d, T34 Schol. d, T46 Schol. b–c, T49 Schol. b, T50–T52).

주석d.

성장과 축적이 자본주의의 과정적 욕망이요 자본을 구성하는 경향이다. (니체라면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잉여가치라는 발동기가 자본주의 체제의 심장에 놓여있다. 이윤이 심장의 수축이라면 잉여가치는 심장의 확장이다. 잉여가치가 자본주의 체제에 과정적 성질을 부여하고 수량화에 그 역동적 성질을 부여한다. 잉여가치는 자본주의 체제의 과정적 주체성이다. 자본주의는 심장확장의 과정에서 내재적 외부의 확장된 장에 뛰어들며, 수축의 과정에서는 거기서 발견한 잠재력의 운동을 이윤을 창출하는 체계의 흐름 안으로 끌어들인다.

보조정리b.

자본주의의 추동력은 이윤과 잉여가치 사이의 격차이다. 그 체계적/과정적, 수축/확장의 비대칭적 관계이다.

주석e

여기서 말하는 과정적 잉여가치는 맑스가 말한 상대적 잉여가치(생산성 증가를 통해 획득)나 절대적 잉여가치(노동일 증가를 통해 획득)로 환원되지 않는다. 과정적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두 형태와 달리 순전히 질적이며 잠재력의 내연성과 관련된다. 그것은 삶의 잉여가치(surplus-value of life)이다(T22–T23, T28–T32).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와 과정적 잉여가치는 물론 연관되어 있다. 전자가 후자를 포획한다. 이들의 차이가 체계에 의해 내화되어 추동력으로 작동한다. ‘삶의 잉여가치’론은 노동가치론의 재고와 자본주의적 잉여가치의 형태들의 증식을 필요로 한다(T33, T34).

 

테제17

‘더 많이’를 지향하는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투기적이다.

 

테제18

자본은 투기적이기에 그 나름으로 권력형성체가 된다.

주석a.

자본은 시간함수이다. 이 시간적 요소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시간과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며, 현재 속에 있는 미래에 다름 아닌 잠재력 주위를 선회한다. 자본은 이차적으로만 시간의 측정에 관심을 가진다. 일차적인 관심은 잠재력의 현실화에 마중물 역할을 하는 질적 간격으로서의 시간에 있다. 투기는 자본주의 경제의 왜곡이 아니라 그 본질에 속한다. 투기가 자본의 권력 기능이다. 자본은 활력의 미래를, 삶의 잠재력을 포획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은 곧바로 권력 메커니즘으로서 작동한다. 그 경제적 기능은 권력 기능과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삶을 지배하는 권력이다’라는 말은 더 구체화되어야 할 말이다. 자본주의는 삶의 형성과정을, 바로 그 생성을 포획한다.(자본주의는 “존재권력”ontopower이다 T55). 자본은 삶의 활동을 경제화한다. 그 과정에서 권력형성체를 구성한다. 삶의 활동은 이윤의 생성에 유리한 양태들을 향하게 된다.

보조정리

권력형성체들이 포획의 장치이다.

주석b

화폐가 투명한 교환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구성한다는 이단적 경제사상가들의 주장은 나름대로 정확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화폐는 사회적 관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화폐는, 사회를 구성하는, 더 나아가 삶을 구성하는 요인인 권력관계의 작동자이다. 자본은 삶의 힘을 사취한다(Cooper 2008).

 

테제19

자본주의의 발동기가 초과(잉여가치)라는 사실은 가격이 희소성을 반영한다는 통상적인 관념을 반박한다.

주석

화폐가 잉여가치 면에서 가장 강렬하게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곳이 금융시장이다. 자명하게도 금융시장에서 잉여는 희소성이 아니라 과정적 풍요를 전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 앞으로 부단하게 번성하고 증식하는 능력을 전제한다. 현실적으로 작동하는 생각은, ‘덜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할까’가 아니라 덜한 것으로부터 ‘항상 더 많은 것’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이다. 잉여가치 충동은 금융시장의 투기적 메커니즘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거기서는 잉여가치의 흐름의 연속적인 파도타기가 이윤의 노다지보다 더 높게 평가된다. 이윤은 영속적인 투기의 파도에 휩쓸린다.

 

테제20

통화로서의 화폐보다 금융시장이 탈자본주의적 대안경제 사유를 위해 더 나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주석

이미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은 고전적인 등가교환의 관점에서 정의된 화폐기능만 참조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경제의 과정적 발동기가 그 진정한 과정적 성질을 보이는 곳은 금융시장의 투기적 영역이다. 탈자본주의적이고자 하는 대안들은 화폐와 시장교환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를 넘어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애초부터 자본에 당할 위험이 있다. 이 대안들은 3중적으로 정의되는 화폐보다는 잉여가치와 더 유사한 개념들을 생성해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대안들은 자본주의적 과정이 실제로 돌아가는 방식에 시장이데올로기보다 더 충실해야 한다. 다만, 이번에는 인간이 좀비가 되는 식이 아니라 좀비가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는 식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스스로 추동되는 과정에 대한 대안적 가치평가가 필요하다. 역동적 성격에 대한 긍정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질적인 것을 수량화하는 그러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보조정리

잉여가치를 점령하라.

<계속>

Bibli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