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The New Animism and Commoning (2020년 1월 28일)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년 11월 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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