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 : 아래는 2021년 11월 10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커머너 질케 헬프리히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녀의 동료 데이비드 볼리어가 작성한 글이다.
질케 헬프리히와의 우정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협력 작업이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힘들다. 질케와의 우정 및 협력 작업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oell Foundation)의 멕시코와 카리브해 지부의 책임자로서 20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한 최초의 커먼즈 활동가 대회에서 시작했다. 질케는 나를 연사로 초대했다. 우리가 매우 다른 세계에서 살았음에도 둘 다 커먼즈가 자본주의적 인클로저에 맞서 소프트웨어에서 시작하여 종자와 토지 그리고 그 이상의 것에 이르는 우리의 공유된 부를 방어하기 위한 효과적 체계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느슨한 파트너십은 2년 후인 2008년까지는 실제로는 구체화되지 못했는데 2008년에 우리 둘은 활동가 커머너들의 드물었던 또 다른 초기 회합인 엘리베이트(Elevate) 축제에 참석했다. 이 인디음악과 정치문화를 위한 축제는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서 4일간 열렸다. 높이 170미터인 슐로스베르크언덕(Schlossberg Hill)의 단단한 바위를 실제로 깎아 만든 행사장에서 나는 막 피어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프로젝트(Creative Commons Project)에 대한, 과학 커먼즈와 역사 커먼즈 기획들(the Science Commons and History Commons initiatives)에 대한 열정적 발표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근대성의 스펙터클’(The Spectacle of Modernity)에 대한 해석인, 리믹스(remix) 예술가 D.J.스푸키(D.J.Spooky)의 혼을 일깨우는 공연을 접했다.
이 싹트고 있는 커머너들의 국제적 하위문화가 덜 탐구된 약속의 옥지(玉地)임이, 탐색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미스터리임이 내게는 분명해졌다. 나는 실제로 탐색했다. 다음날 채식식당 긴코(Ginko)에서 점심을 하면서 질케와 나는 다음 하려는 일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그 후 13년 간 놀랍게도 우리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하게 됐다. 공식적 직업이나 제도적 관여가 없는 상황으로 우리는 때로는 불안정했지만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우리는 커먼즈에 관련된 모든 것에 참여하는 사람이자 인류학자이며 활동가이자 전략가이며 협력자이자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람이고 또 그것을 대중화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질케와 나는 커먼즈를 전통적인 학적 방식으로, 즉 그저 경제적 자원이나 재산으로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커먼즈를 자본주의적 시장/국가 체계를 변형할 수 있는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치·문화·법·윤리의 성격을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커머닝이 얼마나 재구성할 수 있는가였다. 수십 년간 주류정치로부터 효과 없는 미적지근한 성과를 경험한 다음 우리가 생각한 것은 질러버려!였다.
그래서 열린 의제와 원초적인 호기심―진정한 창의성에는 낙관주의적 순진함이 필수적이다―으로 우리는 커먼즈를 재발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괴테의 유명한 발언이 우리의 세찬 작업 신념을 보여준다.
모든 주도적 행위(및 창조)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리가 하나 있다. 우리가 확고하게 헌신하는 순간에 섭리 또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한 무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발상과 멋진 계획들이 죽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온갖 종류의 일이 일어나 우리를 돕는다. 그 결정으로부터 사건들이 콸콸 흘러나와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치리라고 꿈꿀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예기치 않은 일들, 만남들, 물질적 도움들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일어나게 된다.
괴테는 기억하기 좋은 말로 조언했다. “할 수 있는 일이나 꿀 수 있는 꿈이라면 무엇이든 시작해라. 대담함에는 천재성과 힘, 마력이 있다. 지금 시작해라.”
당시 우리는 위 인용문을 몰랐지만 우리는 실로 저 인용문대로 했다. 우리의 작업은 해방적이었고 새로운 활동 영역을 열어젖혔다. 나의 작업 파트너이자 조력자, 공동 조사자, 검증자인 질케를 못 만났다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정말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창조했다. 혹은 적어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독일민주공화국(구 동독)의 농장에서 자랐고 라이프치히에서 사회과학과 로망스어 교육을 받은 질케는 1960년대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으로 양육된 나와 관점이 꽤 달랐다. 그녀는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의 통일 그리고 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끔찍한 확대를 체험했다.
반면 나는 소비자 옹호자 랠프 네이더(Ralph Nader), 할리우드의 제작자이자 활동가 노먼 리어(Norman Lear)와 함께 일하며 일류 정치 교육을 받았다. 워싱턴의 정치와 공익 운동에 몰두하면서 말이다. 문화적·지적·정치적으로 너무도 상이한 세계에서 왔지만 우리는 커먼즈에 대한 강고한 열정과 그 잠재력에 대한 기묘한 감각을 공유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차이가 내가 폭발적 창의성으로서 경험했던 것에 기여했다.
참으로 충격적이게도 우리의 길고도 기묘한 여행은 질케의 연인인 자크가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한 지난주 충격적 종말을 고했다. 질케는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 중 11월 10일 아침 알프스에서의 일일 하이킹을 위해 떠났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에 수색팀은 그녀가 ‘통행불가지역’에서 치명적 사고를 당했다고 고지했다.
그 소식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말도 할 수 없었고 멍해졌다. 너무도 지적이고 유능한 활동가이자 끝없는 에너지를 가진 생기 있고 관대한 여성인 이 소중한 친구를 내가 더 이상 줌(Zoom)으로 부를 수 없다니. 펼쳐지고 있는 ‘커먼즈 세상’을 그녀의 기민한 판단과 경험 없이 내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질케의 돌연한 떠남이 아주 분명히 보여준 것은 그녀가 오늘날의 커머닝의 세계에서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믿을 만하게 그려보는 탐색작업에 나서는 데 있어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친애하는 동료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그녀의 특별한 인격, 혼융된 재능에 관해 숙고하고 싶다. 15년 동안의 우정과 조언, 지지가 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죽음으로 상심이 클 클라라(Clara), 폴(Paul), 자크(Jacques), 지나(Gina), 닉(Nick), 카이(Kai)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싶다.
* * *
가장 믿지 못할 일은 질케와 내가 4,000마일 떨어져 살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독일 예나에서 (더 최근에는 노이데나우Neudenau 마을에서) 살았고 나는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Amherst)의 시골 대학 마을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몇 년 간 우리 둘 다 평범한 직장이나 안정적인 제도적 지원이 없었다. (2017년부터 나는 슈마허신경제센터Schumacher Center for New Economics에서 일하고 있다. 질게는 뵐 재단을 떠난 후 소속된 곳이 없는 ‘자기 고용’(self-employed) 상태를 유지했다.)
2008년 그라츠(Graz)에서의 모험 이후 우리는 커먼즈를 조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슈테판 메레츠(Stefan Meretz)와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는 3일간의 휴양을 위해 커먼즈 연구자와 활동가로 이루어진 드림팀을 소집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 미셸 바우웬스(Michel Bauwens), 볼프강 작스(Wolfgang Sachs) 등 많은 이들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일단 저지르니 섭리가 웃으면서 우리 방향대로 사태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독일 백작인 지속가능산림감독관 헤르만 하츠펠트(Hermann Hatzfeldt)를 찾았는데, 하츠펠트는 1550년에 지어진 그의 교외 거주지 크로토프성(Crottorf Castle)을 다종다양한 국제 커머너의 회합에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커머너들이 다른 종류의 미래를 숙고하기 위해서 성의 대형홀에 모인다는 기발한 생각이 좋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즉흥적 액티비즘과 문화변화에 대한 우리의 실험이 시작됐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말했듯 우리는 행복을 쫓을 때 구현되는 ‘보이지 않는 도움’에 의존했다. 동시에 독립적 활동가로서 우리는 다루기 힘든 이데올로기적·제도적 뒤얽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P2P재단(Peer to Peer Foundation)의 설립자이자 태국 치앙마이에 기반을 둔 벨기에 활동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가 질케 및 나와 함께 커먼스전략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 CSG) 결성에 참여했다. (미셸은 2018년 CSG를 떠났다.) CSG는 실제 조직이라기보다는 이름이자 대담한 열망의 표현에 가까웠는데 그것은 사실 CSG가 단지 세 개인의 느슨한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한 재정 지원이나 법적 지위가 없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커먼즈 패러다임 및 담론의 잠재력을 날카롭게 알아보았다. 통찰·직관·저술을 교환하며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커먼즈 프로젝트의 진전을 추적했다. 우리는 파리·베를린·암스테르담에서 혹은 우리의 발표 일정이 겹치는 곳이면 어디서든 만나 소식을 교환하고 전개되고 있는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우리의 특이한 협력을 묘사하는 것은 이 협력이 질케의 주목할 만한 강건함 즉, 탐색하고 종합하는 그녀의 지적 능력, 친구를 사귀는 그녀의 재능, 실천적 활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부각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발표 초청, 자문 초청을 받았고 컨퍼런스, 워크숍, 공개 담화를 다니며 수개월을 보냈다. 커머너 친구들과 지인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질케는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커먼즈 세상’에서의 선구적 사태전개에 대해 직접 체험으로 배웠고 이 겉보기에는 주변적인, 기묘한 세계에 대한 그녀의 그리고 우리의 웅대한 이해를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파리, 몬트리올, 아프리카의 불어를 사용하는 커머너들,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연계된 커머너들,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활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집중된 지점들을 대체로 잘 알았다. 그녀는 유럽의 주요 커머너들을 알았고 아프리카·동남아시아·세계사회포럼의 활동가들·학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이후의 많은 활동은 우리가 조직한, 향후 중대한 영향을 미친 두 국제 커먼즈 컨퍼런스를 통해 가능해졌다. 2010년과 2013년에 각각 열린 컨퍼런스는 모두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과의 협력과 재단의 국제정치부 수장 하이케 뢰슈만(Heike Loeschmann) 및 이사장 바바라 운뮈시흐(Barbara Unmüßig)의 지원 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두 컨퍼런스는 스스로를 커머너라고 생각하거나 커머너이고자 하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사람들을 결집시켜서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사람들은 커먼즈에 대한 자신들의 직관을 입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가 확산되었다. 커먼즈가 담론으로 성장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편 CSG는 2012년과 2021년 사이에 12번 이상의 소규모 ‘딥다이브’ 모임들을 별도로 주최했다. 이 모임들은 미리 마련된 답이 없는 난해한 전략적 물음들을 적절한 시기에 검토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커머닝이 어떻게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건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2016년), 디지털 플랫폼이 협동주의를 촉진하는 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2014년),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어떻게 연계되고 합류될 수 있는지(2014년), 존재론적 믿음이 현대 정치의 숨겨진 동인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2019년) 등을 다룰 수 있는 주요 전문가를 초청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함께 우리는 대안적 가치이론이 가치와 가격을 동일시하는 표준적 경제이론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2016년 딥다이브 모임을 주선했다. 불과 몇 달 전인 2021년 9월 우리는 주류 정책이 어떻게 커머닝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유럽의 커머너 정치인과 정치권의 온라인 모임을 주선했다.
두 선집은 동시대 커먼즈의 풍부한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우리는 커먼즈가 중세적 삶의 유물이나 이상하리만치 글로벌 싸우스에 잔존하는 후진적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커먼즈가 시장/국가 체계에 대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견고한 일단의 대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서도 질케의 예리한 판단력과 훌륭한 가르침 그리고 개인적 우정이 엮어낸 전지구적 그물망이 우리가 실타래를 함께 푸는 데 기여했다.
2016년 질케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대중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커머닝을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두공편 선집의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세 번째 책을 함께 쓰려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목격했던 커먼즈의 실증적 다양성을 더 정확히 기술하기 위한 웅장한 이론적 종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표준적 경제학마냥 커먼즈를 단순히 소유되지 않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사회적 형태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공유지의 비극’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와 그의 패턴 언어(pattern language) 방법론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는 커먼즈를, 근대적인 시장 개인주의, 시장 경제학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사회적 형태로 설명하려했다. 커먼즈는 ‘존재변화’(OntoShift)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커머닝의 농밀한 관계성을 인지하고 개인적/집단적, 합리적/비합리적, 이기적/이타적이라는,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원적 관계들을 배제하는 존재변화를 통해서만 말이다.
이는 우리가 커먼즈를 사유하는 데서 중요한 돌파구였다. 여기서도 질케는 미지의 영역으로 우리를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은 유쾌하면서도 진을 뺀, 미친 3년간의 전력 질주의 결과였다.
일전에 우리는 베를린 교외의 친구 집에 모여 한 주를 보내면서 매일 같이 열다섯 시간을 얘기하고 논쟁하며 글을 썼다. 반복되는 “커머닝의 패턴”은 무엇일까? 그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가 본 것과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쓴 것이 어떻게 아귀가 맞을 수 있을까? 종내 ‘삼중적 커머닝'(Triad of Commoning)이라 불리게 된 것이 바로 우리 숙고의 결과였다.
다른 사례로 나는 네덜란드 아른헴(Arnhem)에서 열린 컨퍼런스 이후 며칠을 쥐어짜 다수의 커먼즈의 특징으로 본, ‘관계성 자산’(relationalized property)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따져볼 수 있었다. 우리가 깨달았던 것은 커머닝의 현실이 재산권 인식론을 통해서는 혹은 시장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전제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경제학 용어가 허용하는 논리·기풍과는 다른 논리·기풍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질케의 단호한 투지와 결단, 창조적인 즉흥적 활동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지적·실천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휴양지에서 딥다이브 모임을 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빈 방에서 잤고 함께 요리했고 설거지했다.
한번은 한동안 서로 만나지 않은 미셸과 나, 그녀가 커먼즈전략그룹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그녀가 『오야』지(Oya magazine) 친구들을 설득해 북해의 외딴 독일 마을로 우리를 초대했다. 또 다른 경우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친구를 설득해 토스카나 교외의 한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엇갈린 여정 이후 만나 서로의 논의를 뒤따라갈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는 커머너들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피렌체 중심부의 니디아치 정원(the Nidiaci Garden)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렇게 우리의 모험은 계속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전개와 새로운 친구들이 무슨 일인지 언제나 나타나 우리의 일을 진척시켰다.
질케와 나는 우리의 책을 쓰느라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일전에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영화 제작진이 깊이 토론하는 우리를 촬영했는데, 이는 나중에 우리 책의 짧은 홍보 영상이 되었다. 이를 통해 질케와 내가 “함께 생각한” 방식을 알 수 있다.
혹은 베를린 커먼즈 컨퍼런스 직후 촬영된, 리믹스더커먼즈(Remix the Commons)가 제작한2010년의 이 짧은 비디오를 보면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질케의 설명을 확인할 수 있따.
커먼즈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일단 그리 되면 그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성장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이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 운동을 하는 사람이 프리 하드웨어 운동을 하는 사람과 자리에 앉아 함께 얘기를 나누면, 그리고 커먼즈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진정 친밀한 어떤 것임을 깨달으면, 그 생각이 씨앗처럼 심어지며 사람들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직접 맡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종 공동작업을 하면서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조종하는 우리 자신의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그녀의 말도 안되는 여행 일정과 색다른 만남을 뒤따라가고자 고군분투하면서 나는 여행이나 독서를 하는 중에 그녀에게 보고하고는 했다. 나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은행가들을 막 만났다거나, 커먼즈 커리큘럼 개발에 관심이 있는 대학원과 협의하고 있다거나, 가장 재미있는 박사과정생을 만났다거나,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을 번역하기 위해 커머너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번역가 팀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받고는 했다.
이것이 또 하나 주목할 점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언어에 유창해서 그녀는 전 세계의 매우 광범위하고 다방면의 커머너 그룹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열정·재능·신념·활력을 가진 질케가 만성적으로 과로하고 빈번히 지쳐했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쓰는 데 너무도 관대했고 유망한 프로젝트를 몹시도 돕고 싶어했다. 그녀는 꽉 찬 스케줄에 초조해 하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조치를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었다. 독일이 자정일 때 (미국 동부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내게 전화하면서 그녀는 종종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나는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것이 근대 커먼즈를 탐험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임을 안다. 하지만 질케가 ‘통행불가지역’을 탐색하는 문제로 당황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겠다. 그녀는 항상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문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거나 밑으로 파고들거나 변형시키고자 했다. 그녀의 헌신의 깊이는 놀라웠다. 그녀의 대담하고 생기 있는 마음은 너무나도 전율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솔직한 우정은 선물이었다. 나는 그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
설명 : 이 글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인류학 교수인 안나 칭(Anna Lowenhaupt Tsing)의 책에 대한 서평이다. (이 글은 P2P 재단의 블로그에도 실려있다.)
세상 끝에 있는 버섯
더 공들일 필요가 없는, 무너져 내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생존과 협동의 동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인간관계의 모든 측면과 자연세계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 데 혈안이 된 세상에서 삶은 어떻게 존속하고 번성할 수 있는가?
인류학자 안나 칭에게 이에 대한 대답은 북미에서 주로 자라지만 일본에서 진미로 높이 평가되는 겸손한 송이버섯의 신기한 삶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버섯들이 수확·분류·수송되어 팔리는 사회적·상업적 시스템―이는 그 과정에서 선물(膳物) 경제와 전지구적 상품망을 혼합하고 있다―은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교수인 칭이 『세상 끝에 있는 버섯 ― 자본주의의 폐허에서의 삶의 가능성에 대해서』(The Mushroom at the End of the World: On the Possibility of Life in Capitalist Ruins,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5)에서 바로 이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자본주의적 파괴와 다종(多種) 풍경 내에서의 협동적 생존―지구에서 삶을 지속하는 데 필수적인 것―사이의 관계에 관한 독창적인 연구”라고 소개된다. 평범한 버섯의 이례적인 생태적 삶과 상업적 여정을 말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심층적인 동학을 탐구하는 것—이는 훌륭한 구상이다.
이 책은 매우 놀라운 민족지학(誌學)이다. 송이버섯은 이 버섯 종이 어떻게 스스로를 위한 생존전략을 짜는가―이 경우에는 나무들 및 기타 식물들·미생물들과의 공생관계로 진입하는 것이 전략이다―만을 보여주는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이 버섯은 다양한 맥락에서 그것을 취하고 훔치고 선물로 주거나 판매하는 사람들과 일종의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왜 양식으로는 키울 수 없는 야생 버섯인 송이버섯에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일까? 칭 교수는 이 버섯을 거의 폐허가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인간이 맞이하는 운명의 대리물로 보기 때문이다. 이 강인하고 꾀바른 버섯은 파열된 생태계나 폐허가 된 풍경들에서 자라는 경향을 가진다. 마치 세계 전역의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현재 세계 전체를 장악하고 있고 약탈적이기 일쑤인 자본주의 체제 및 황폐화된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북방의 풍경들에서 자라는 숨은 버섯인 송이버섯은 황폐한 장소들에서 나무들이 자라는 것을 돕는 소중한 역할을 한다. 버섯들은 불안정성을 다루는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매우 희한하게도 버섯을 채취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미국 북서부의 태평양 연안 지방에서 버섯을 따는 사람들은 주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 온 피난민들, 미국 퇴역 군인들, 떠돌이 빈민들이다. 이들은 정규 직업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자연의 열린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유’를 더 좋아해서 정규 직업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버섯 따는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일한다”라고 칭은 쓰고 있다. “이들은 회사에 고용되어 있지 않다. 임금도 없고 혜택도 없다. 버섯 따는 사람들은 단지 발견한 버섯들을 판매할 뿐이다. 버섯이 나오지 않는 해에는 이들이 헛되이 비용을 들일 뿐이다. 판매용 야생버섯 채취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불안정한 생계의 표본적 사례이다.” 가령 오리건에서 수확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 이 버섯들은 도매상들에게 팔리고 이들이 재빨리 버섯들을 분류업자들에게 수송하면 분류업자들이 그것들을 분류하여 일본으로 수출한다.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일본의 거대한 시장에서 고급 고객들이 열심히 이 버섯들을 사는데, 보통 선물로 주기 위해서이다.
칭은 미래를 이해하는 데 주된 축이 되는 경향이 있는, ‘진보’에 대한 통상적인 서사들을 자본주의적인 것이든 맑스주의적인 것이든 모두 거부한다. 그녀는 우리 시대를 적절히 분석하는 가운데 “많은 종들이 때로는 조화도 정복도 없이 함께 사는, 교란에 기반을 둔 생태”의 자본주의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버섯무역을 연구하는 것은 계몽적이다. 투자자들이 오늘날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간과 자연을 “마치 삶의 얽힘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취급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외를 통해 인간과 사물들은 유동자산이 된다. 인간과 사물은 그 삶의 세계로부터 빼내어져 거리(距離)를 무시하는 수송을 통해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삶의 세계에 속하는 다른 자산과 교환될 수 있다.” 칭의 주된 메시지는, ‘진보 내러티브’ 전체가 불안정한 생존이 이루어지는 패치들(patchs)(([옮긴이] 패치(patch)는 원래 하나의 생태계 내의 이질적인 장소들을 가리킨다. 칭은 이 말을 그 생산물이 하나의 통합된 물류로 끌려 들어오게 되는 분산된 지역들을 가리키는 말로 전환해서 사용하고 있다.))의 어지러운 집합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송이버섯이 이용하는 삶전략이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전지구적 공급망은 진보에 대한 기대를 종식시켰다. 선도적 기업들로 하여금 노동을 통제하는 일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노동을 표준화하는 것은 교육과 정규직 일자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이윤과 진보가 연결되었다. 이와 달리 공급망에서는 여러 경로로 모아들인 재화가 선도적 회사를 위한 이윤을 낳을 수 있다. 직장에의 헌신, 교육, 복지는 더 이상 수사적으로라도 필요하지 않다. 공급망은 특정 종류의 수집재화축적(salvage accumulation)을 필요로 한다.(([옮긴이] ‘salvage’는 해난·화재 등에서 재화를 건져내기 혹은 그렇게 건져낸 재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폐품의 회수나 회수되는 폐품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과거에 고물상들이나 넝마주이가 하던 일은 후자에 해당한다. 그런데 여기서 ‘salvage’가 의미하는 것은 난파선의 재화나 폐품 같은 협소한 것이 아니다. 자본의 내·외부에 존재하는 재화를 여러 ‘패치들’을 가로질러 수집하는 것, 혹은 그러한 재화들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한 패치에서 다른 패치로 넘어오는 과정이 포함된다. 미국-일본 관계의 현대사는 이러한 관행을 세계 전역으로 퍼뜨리는 요청과 응답의 대위법이다.
칭은 자본주의에 대한 포괄적이고 단일한 비판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세계는 온통 패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즉 얽힌 삶의 방식들의 개방된 배치들의 모자이크”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점은 자본주의 성장 패러다임에 의해 가려진다고 한다. 따라서 칭은 (버섯에게도 인간에게도) 그 모든 개별성과 덧없음의 조건에서 불안정성(precarity)을 띠는 현실을 제시한다. 살아있는 것들은 기계의 대체 가능한 부품들이 아니다. 살아있는 것들은 특이하며 즉흥적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비판들이 인정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도 분명 이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역적이고 독특한 것을 계속되는 자본축적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투입물로 “옮겨놓는” 것이다.
칭은 “공급망이 대륙들만이 아니라 각종 표준들을 가로질러 뱀처럼 앞뒤로 꿈틀거리는” 오늘날의 경제는 그 어떤 단일한 합리성에 의해서도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공급망은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종종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적 형식들에 의존한다. 마치 페이스북이 사회적 공유에 의존하고 에어비앤비와 우버가 집과 차를 시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사람들의 사생활을 식민화했듯이 말이다. 칭에게 “자본주의적 형식들과 비자본주의적 형식들은 주변자본주의적(pericapitalist) 공간들(([옮긴이] pericapitalist spaces : 칭이 만든 용어로써 자본주의의 안과 바깥에 동시에 속해있는 공간들을 가리킨다.))에서 상호작용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의 혼탁한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더 나아간 투자를 위해 자산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라고 칭은 묻는다. 짧은 대답은, 자본축적이 “수집재화축적”의 과정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문명과 진보는 폭력을 통해 획득되는 가치에의 접근을 은폐하고 돌려말하기 위한 메커니즘들임이 드러났다. 고전적인 재화수집이다. 오늘날의 전지구적 공급망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강제된 노동, 위험한 작업장, 유독한 대체 재료, 그리고 무책임한 환경절단과 환경덤핑(environmental gouging and dumping)이다.
『세상 끝에 있는 버섯』은 메마른 사회과학 논문이 아니다. 그 시적인 표현과 사회현실의 섬세한 묘사로 인해 이 책은 종종 소설처럼 읽힌다. 깔끔한 결론도 없으며 그저 일련의 삽화들, 분석들, 관찰들이다. 궁극적인 요점은 새로운 거대 서사를 열어젖히는 것이다. 일단 우리가 ‘인간’과 ‘자연’을 대립물로서 경직되게 분할하는 사고방식을 넘어간다면,
모든 피조물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고, 인간들은 협소하게 상상된 합리성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밤의 속삭임에 속하지 않을 그런 이야기들은 진실한 동시에 우화적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만든 이런 엉망진창의 상태에서도 무언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말고 어떻게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세상 끝에 있는 버섯』이 자본주의 하에서의 불안정한 버섯채취자들의 생존기술을 서술한다면—이는 창의력, 헌신, 당당한 자율의 이야기이다—그 다음 단계는 더 나아가 ‘어떻게 불안정한 커머너들이 커먼즈를 통해서 스스로를 해방시키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것이다. 칭이 맞다. 일단 시장/진보 서사가 표지 이야기(은폐하는 덮개)임이 폭로되고 나면 일련의 다른 서사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유럽인들이 다양한 경제적·정치적인 위기에 대처하느라 버둥거리는―그리고 이에 덧붙여 미국의 지원을 신뢰할 수 없는―이때가 통상적인 ‘좌우’ 구도를 뛰어넘고 새로운 대화의 문을 여는 몇몇 중요한 생각들을 고려해볼 시간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에 위치한 <커먼즈 네트워크>(Commons Network)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 「커먼즈 지원하기: 유럽연합 정책동향에 들어있는 기회들」(“Supporting the Commons: Opportunities in the EU Policy Landscape”)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보고서는 유럽의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와 사회적 소외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으로 커먼즈 패러다임을 받아들여 줄 것을 유럽연합 정치가들과 정책입안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핵심 요약은 이곳에서)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적·사회적 정책들은 정부지출, 사회적 보호와 사회적 서비스를 줄여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장을 확대하고 규제를 풀고 민영화하는 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퇴행적 방식으로 부각한다. 이 접근법은,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비참하게 실패하고 있고 인기가 크게 떨어져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유럽을 가둔 이 상자를 피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마찬가지로 좌파 개혁가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곳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정치가들을 매개로 해서) 국제자본이 그들을 제압한다. 국가 주권조차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새로운 정치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커먼즈 네트워크> 보고서는 과제의 핵심이 단순한 정책 변경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고, 전체를 보는 체계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훌륭한 환경 과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스(Donella Meadows)가 쓴 글을 맞춤하게 인용하며 시작한다.
무언가를 수량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모델들을 낳는다.… 인간은 계산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질을 평가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누구도 정의, 민주주의, 안전, 자유, 진리나 사랑을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어떤 가치를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것들에 대해 옹호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런 것들을 생산할 체계들이 설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관해 말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의 존재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들은 오래지 않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무수히 많은 모든 힘들을 누가 옹호할 것인가? 현 체제는 예산 스프레트시트에서 표로 작성할 수 없거나 국내총생산(GDP)에 합산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고려하기 시작할 수 있는가?
저자들인 데이비드 해머스타인(David Hammerstein)과 소피 블로멘(Sophie Bloeme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럽연합이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는 새롭고 통일적이며 건설적인 서사를 요구한다. 커먼즈는 유럽에서 부상하고 있는 패러다임—상호성, 파수, 사회적•생태학적 지속가능성을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 커먼즈는 또한 진보적인 정치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회적•생태학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유럽에 기여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들은 “커먼즈의 관점은 현재 유럽에서 우세한 정책 우선사항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덧붙이며 그 사항들로서 “개인주의, 사적 소유 및 열광적인 자유 시장 사고방식”을 들고 추가적으로 “그런 지배적인 세계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주요한 단층선(fault lines)”을 거론한다.
지금 거의 모든 유럽연합 경제 정책은 순전히 상업적인 행위의 촉진과 사람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거나 소유하거나 구입하는 오로지 개인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일차원적인 견해에 집중되어 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는 경제적인 노력의 성공을 판단하는 데 사회적•생태학적인 안녕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지표를 적용하는 방식의 평가가 드물다.
정치가들이 커먼즈라는 구도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것 혹은 정치를 다시 생각하는 것을 원할 것인지의 여부는 지켜봐야 안다. 우파는 이주자들과 엘리트들을 상대로 반동적이고, 화난 자세를 취하는 게 일반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보게 되었다. 반면에 좌파는 일반적으로 구식의 관료체계와 정부 자금을 더 많이 사용해서 신자유주의의 아젠다를 인간화하려고 시도하는 것 말고는 거의 대안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디엠25>(DiEM25) 프로젝트와 유럽 커먼즈 의회(European Commons Assembly)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한 범유럽 차원의 접근법을 발전시키려는 몇 가지 매력적인 새로운 시도들이 있다. <커먼즈 네트워크>의 보고서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참여 민주주의, 도시 환경 및 지식 같은 몇몇 유망한 정책영역에 초점을 맞춰서, 새로운 정치의 논리, 윤리 및 사회적 실천들을 개괄하려는 시도이다.
해머스타인과 블로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커먼즈는…파수, 상호성 및 사회적∙생태학적 지속가능성에 유리한 세계관과 윤리적인 관점을 구현한다. 이 관점은 국민총생산이나 기업들의 성공처럼 협소한 경제적인 기준에 따라 행복과 사회적 부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 관점은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합의와 참여, 공평, 복원력, 사회적 결속과 사회 정의를 포함하는, 쉽게 측정되지 않는 더 풍요롭고 더 질적인 기준들을 고려한다.
커먼즈 담론은 사회를 단지 주로 소비자나 기업가로서 살아가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회적 관계, 공동체와 지역 생태계에 깊이 함입된 행위자로 생각한다. 인간의 동기는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 협력과 상호성도 우리의 행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적어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 전체를 보는 체계론적 관점은 또한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 간에 지배적인 주체-객체 이원론을 극복하고 인간 활동을 광범위한 생물물리학적 세계(biophysical world)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요한 사회적∙환경적 딜레마에 대한 상향식의 분산되고 참여적인 이 접근법들은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영역을 인정하면서 유럽대륙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기능적인 해결 방안을 제공한다.
(…)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실천들은 시장과 국가 외부에서 공동체들이 추출적이 되지 않고 생성적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시민권과 참여에 대한 관습적인 관념과 단절하고 있는 새로운 시민윤리 및 문화윤리를 창조하고 있다. 커머너들의 재생성 활동들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방식의 일상생활의 문화적 발현들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농업(CSA, 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비싸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낮은 집세를 보장하는 협동주택 기획들, 지역 에너지 협동조합들, 자체 제작 기획들, 분산된 인터넷 기반시설들, 과학적 커먼즈, 공동체에 기반을 둔 예술∙음악 및 연극 기획들과 그 밖에 수많은 다른 활동들이 모두 현장에서 실질적인 문화적 변화를 끌어낸다.
대부분 전통적인 선거정치의 장에서 벗어나 있는 삶의 각 현장에서 문화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새롭고 생소한 토론에 말려드는 것에는 부정적이므로—오, 위험해!—문화적인 불평의 소리들이 오큐파이(Occupy), 인디그나도스(Indignados)나 아랍의 봄(Arab Spring)의 방식으로, 즉 갑작스러운 뜻밖의 사건으로 먼저 터져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문화적 격동이 일어야 정치 지도자들이 크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역겨운 것은, 이런 심층적인 전환을 다른 사람도 아닌 트럼프가 실제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널리 퍼져 있는 원한과 좌절을 선동적이고 이기적인 온갖 방식으로 이용한 것뿐이었다. 언제쯤 좌파와 중도파에 속한 실용적인 현실주의자들이 다가오는 패러다임 전환을 받아들이는 미덕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사회 건설을 주창하게 될 것인가? ♣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추출(extractive) 경제에서 생성(generative) 경제로 나아갈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정치경제학에서 답변되지 않은 커다란 질문들 가운데 하나는 “무엇이 가치를 구성하는가?”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은 가치란 시장 교환에서 발생하며 가격으로 표현된다고 간주한다. 이는 가치에 관한 매우 단순한, 그리고 조야한 정의이다.
가치가 이런 것이라면, 본질상 무형적이며 사회적이거나 생태적인 그리고 가격이 없는 많은 종류의 가치, 예컨대 육아와 노인부양, 생태계 지킴이 활동, 온라인에서의 피어생산(peer production) 그리고 커머닝(commoning)과 같은 활동의 가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형태의 가치를 우리의 정치경제학과 문화에서 뚜렷하게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에 착수해야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복잡하지만 긴요한 주제에 뛰어든 두 개의 새로운 보고서가 있다. 첫 번째는 아래에서 논의될 것으로, 「커먼즈 경제에서의 가치: 공개적이며 사회기여분에 기초한 회계의 발전상황」(Value in the Commons Economy: Developments in Open and Contributory Value Accounting)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와 바실리스 니아로스(Vasilis Niaros)에 의해 작성된 이 49쪽짜리 보고서는 디지털 네트워크에서 사회적으로 창조되는 가치에 초점을 맞춘다. 이 보고서는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oell Foundation)과 <P2P 재단>(P2P Foundation)에 의해 어제 공동 발행되었다.
가치를 어떻게 새로이 개념화할 것인가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보고서 ̄이 주제에 관해 3일간 이루어진 <커먼즈전략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 워크숍의 결산물 ̄는 며칠 내에 배포되어 이 블로그에 소개될 것이다.
<P2P 재단>의 보고서는, “사회는 (노동과 자본에 의해) 시장 체제에서 생산되는 가치에 기반한 시스템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의해 생성되는 사회적이며 창조적인 가치와 같은 “한층 더 넒은 가치 흐름들을 인정하는 시스템으로 변동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새로운 종류의 가치의 부상, 즉 전형적인 시장 구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커머너들에 의해 생성되는 사용가치의 부상은 우리로 하여금 ‘가격=가치’라는 단순한 등식 너머로 향하도록 강제한다.
미셸 보웬스와 사회학자 아담 아르비드쏜(Adam Arvidsson)은 이것을 우리 시대의 “가치 위기(value crisis)”라고 부른다. 오픈 플랫폼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에 기초한 피어생산은 사람들이 새로운 형태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도록 한다. 예컨대 오프소스 소프트웨어, 위키(wiki)들, SNS를 통한 공유, 그리고 창조적 협업 등등을 보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가치를 포획하고 그것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 오직 소수뿐이다.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와 같은 기업들은 그들의 사유화된 플랫폼을 사용하여 공유의 조건을 엄격히 통제하고, 개인에 관한 대량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판매하며, 이러한 가치를 원천적으로 생산한 커머너들에게는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추출적이며 (재)생성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오픈 플랫폼을 커먼즈를 지원하고 재생성적인 사회적 힘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변형할 수 있을까?
<P2P 재단>의 이 보고서는, “공유 경제”와 같은 기만적인 용어와 디지털 협업의 구조적 현실에 관한 각종 신비화에 의해 종종 불명료하게 되는 주제에 떨어진 반가운 한 방울의 맑은 물과 같다.
보웬스와 니아로스의 보고서는 우리가 겪고 있는 “가치 위기”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하는 장으로 시작하여, <엔스파이럴 네트워크>(Enspiral network), <센소리카>(Sensorica), <백피드>(Backfeed)에 의해 개척된 대안적인 가치체제에 관한 세 개의 강력한 사례연구로 나아간다. 보고서의 결론은 경제·정치적 기반구조의 변화를 위한 일련의 정책 제안으로 끝난다.
가치 위기
보웬스와 니아로스에 따르면 “가치 위기”의 진짜 뿌리는 “현대 자본주의의 가치화 활동(value-practices)이 더 이상 가치가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주지하듯이 주식 시장에서의 가치평가를 통해서는 어떤 기업이 얼마큼의 신뢰할만한 (금융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 너무나 많은 가치가 사회적인 무형자산, 예컨대 소비자의 호감도, 브랜드 평판, 사람들 사이의 공유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증권 애널리스트들은 공장건물, 설비 및 사무실 집기 등의 전매 가치를 합산하려고 할 수 있겠지만, 기업을 가치 있게 만드는 모든 사회적 믿음들과 활동들에 각각의 가치를 할당할 수 있는 믿을만하고 합의된 방법은 없다.
기분좋은 아이러니가 아닌가! 현대 자본주의는 소프트웨어 코드, 개인에 관한 데이터, 사용자가 생성한 정보, 비디오 등등 인류가 이제껏 본 적 없는 공유 가능한 문화적 풍요를 자유롭게 전유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은 이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고 상품화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풍부한 사회적 가치를 인위적으로 희소하게 그리고 따라서 판매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커머너들이 자신이 창조한 사용가치를 지키고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사용가치를 기업들이 추출적인 시장의 생산 및 소비의 회로로 끌어들이고자 공격적으로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로를 “추출적”이라 하는 것은 회사들이 이 가치를 공짜로 쓰길 원하며 사회 공동체에 보상하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대한 추출의 힘(많은 자본, 지적재산권법, 서비스 제공 계약 등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기업들은 안정적인 이윤의 흐름을 창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가치 주권(Value Sovereignty)을 향하여
<P2P 재단> 보고서의 초점은 어떻게 추출적인 디지털 경제에서 재생성적인(regenerative) 디지털 경제로 이동할 것인가에 있다. 따라서 초점은 세 개의 디지털 커뮤니티가 어떻게 자본주의 시장의 압력을 넘어서 그들의 “가치화 활동”을 지키고 “가치 주권”을 만들어내려 노력하고 있는지에 놓인다. 이 커뮤니티들은 낡은 경제에서 새로운 경제로의 가치 흐름을 생성해냄으로써 그리고 사회적 기여분을 올바르게 존중하는 새로운 회계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을 통해 “역 포섭(reverse co-optation)”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프로젝트는 <엔스파이럴>으로서 이는 대부분 뉴질랜드에 기반을 둔 기업가들 및 다른 독립체들로 구성된 고도로 참여적이고 사회적 사명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체이다. 보웬스와 니아로스에 따르면 “<엔스파이럴>은 자신이 커먼즈의 생산과 공통선(common good)에의 지향 둘 모두에 헌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열린 협동조합’으로 부른다”. 그것이 사용하는 혁신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수익 상한선 제한제(capped returns)”인데 이는 <엔스파이럴> 기반시설의 투자자가 수익으로 받을 수 있는 양에 한계를 두는 것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회사가 주식을 발행하면 거기에는 그에 동반되는, 미리 협의된 가격에 그 주식을 재매수할 것을 요구하는 콜옵션이 걸린다. 일단 그 회사가 이 주식들 모두를 재매수하고 나면, 모든 미래의 이윤을 자신의 사회적 사명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외부적이고 어쩌면 추출적이될 수도 있었을 자본은 ‘포섭되고(subsumed)’ 훈육되어 ‘협력적 자본’이 된다.”
<센소리카>는 커먼즈와 시장형태를 결합하는 새로운 방식을 실험하는 열린 협동 네트워크이다. 그것은 구성원들이 시장기반 프로젝트에 기여한 정도를 추적하기 위한 정교한 “회계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이 시스템은 수입을 각각의 구성원이 한 역할에 비례하여 할당하는 데 사용된다. <센소리카>는 새로운 종류의 (시장에 의해 추동되는) 포섭(co-optation)의 사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타입의 (사회적 사명에 기초한) 커먼즈의 사례가 될 것인가? 아마도 양자가 혼합된 형태일 것이다.
세 번째 사례 연구는 탈중심적인 생산의 기반구조로 블록체인 원장(ledger)에 의지하는 <백피드>를 향한다. <백피드>는 커먼즈보다는, 함께 일해 시장에 판매하는 개인들의 집단에 가깝다. 그러나 그 협력적인 조직구조는 그것을 “가치 주권”을 가진 커뮤니티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줄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다른 많은 조직들 또한 블록체인을 통해, 시장에서 팔기 위해서건 내부의 사용가치를 위해서건, 커뮤니티의 자원을 협력적으로 통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정책 제안
이 <P2P재단>의 보고서의 결론은 이러한 사례 연구에서 묘사된 종류의 가치 체제(value regimes)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될 일련의 정책을 제안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생계 수단을 창조하기 위한 열린 협동조합(open cooperatives)을 제안하고 자본주의 기업의 가치 포획(value capture)에 맞서며 생성적 연합체들 사이에 연대를 키워내기 위한 “호혜에 기반한 면허제(reciprocity-based licensing)”의 사용을 제안한다. 이 보고서는 또한 오픈 소스 “순환 경제”의 촉진에 도움이 될, 열린 공급망과 공통적 네트워크 자원에 관한 계획수립을 요청한다. (“디자인은 전지구적으로, 생산은 지역적으로”)
보웬스와 니아로스는 낡은 경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과 자율적 협력생산 공동체에 대한 지지를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정치적 협력을 그린다.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초국적 협력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적 수준의 “커먼즈 회의소”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 또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좌파가 케인즈 경제학 모델과 신자유주의 위기의 관리라는 틀을 넘어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보웬스와 니아로스는 교전 수칙을 변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커먼즈에 기반한 피어생산의 새로운 모델을 가리키고 있다. ♣
적어도 좀 분명해진 것은 있다. 신비화와 합리화가 증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의 당선은,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가 정면으로 직시해야 할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들 다수를 밝혀준다.
대부분의 대선 이후 논평이 트럼프와 워싱턴의 정계개편에 집중되었지만, 나는 더 큰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와 대의민주주의 자체로부터의 구조적 전환이라고 생각한다. 양자 모두 거버넌스와 삶의 개선을 위한 도구로서 신뢰를 잃고 있다. 그러나 아직 새로운 질서―주류 정치에는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회 혁신의 튼실한 영역―의 윤곽은 초점이 선명하게 잡혀있지 않다.
정치에 경험이 없으며 나라의 문제를 푸는 방법에 대해 아무런 진지한 생각이 없는, 자기중심적이고 권위주의적이며 편협한 자의 당선은 미국 헌정제도 및 그 두 주요 정당의 역기능을 드러내준다. 까불어대고 욕설을 퍼붓는 선거운동이 엄청난 TV시청률에 기여를 했지만, 이는 민주적 협의와 거버넌스의 관점에서는 소극이었다.
어떻게 이와 다를 수 있었겠는가? 18세기 후반에 분가루 바른 가발을 쓴 엘리트들이 고안한 이 훌륭한 제도는 21세기의 현실에 의해 빛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는 이제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스펙터클과 소셜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자기지시적 거품이다. 정치는 오락계의 한 분야로서 합리적인 토의와 의미 있는 인간적 대화에 복무하기보다는 정서적 자극이나 편견에 복무하는 극도로 조작된 가상공간이다.
정당들은 이 기괴하고 모더니즘적인 도깨비 집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현실적 장소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실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진정한 민주적 참여를 양성하는 일은 향수 어린 환상인 것이다. 이제 뒤돌아 볼 때, 터무니없는 이전의 리얼리티 쇼 스타가 이 무대에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논리적인 일이다. 이는 헐리웃에서의 오랜 경험이 로널드 레이건의 정치가로서의 성공에 필수적이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이것이 ‘민주주의’인 체 하지는 말자. 이는 로마의 서커스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자신의 한계 이외에도 버락 오바마의 뒤를 이으려고 한 것이 불운이었다. 오바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약속하며 대통령직에 올랐는데, 일단 당선되자 그의 전임자인 부시의 낡은 신자유주의 교리로 재빨리 개종했다. 부시의 추악한 군사 및 반(反)테러 정책들도 이어받았다.
물론 오바마는 인종주의적인 공화당원들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대통령직 자체를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려고 했고 그의 지도력을 제한했다. 그렇더라도 오바마가 소득불평등, 기후변화, 금융업계의 부패, 사회 및 환경에 해로운 무역협정들과 싸우는 데서 그다지 지도력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가 일단 신자유주의 경제 패러다임을 받아들이자 케이크는 거의 다 구워져 있는 상태이고 그가 제공할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해결책이란 거의 없었다.
8년 후 힐러리는 사실상 동일한 것의 연장인 점진적/점증적 개혁(incremental reforms)을 약속했다. 그녀는 버니 샌더스의 반란을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나이브한 것으로 보고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힐러리와 긴밀하게 협조하는 민주당전국위원회는 버니의 놀라운 선거운동을 무대 뒤에서의 온갖 종류의 개입을 통해 은밀히 방해했다. 힐러리는 샌더스의 선거운동을 무로부터 솟아오르게 한, 체제변화에 대한 욕구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샌더스가 사라지자, 트럼프는 대통령 선거운동에서의 포퓰리즘적 진공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미국을 다시 한 번 위대하게 만들기” 위한 세부사항들을 결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화당원들이 워싱턴 정치를 지배하게 되겠지만, 양 정당은 이제 박살난 상태이다. 트럼프는 일인 정당으로서 일관된 정치철학도 없고 자기 이외에는 신뢰할 만한 충성을 보이는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공화당은 그 분파들(재계, 복음주의자들, 노동계급) 사이에 여전히 많은 깊고 해결되지 못한 분열을 안고 있다. 민주당은 더 진보적이거나 포퓰리즘적인 이념들을 포용하기를 거부하는 보수적 사고방식에 여전히 얽매여있다.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이후의 정치와 탈성장의 가능성들을 탐구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힐러리의 패배는 딸린 짐이 너무 많은 역전(歷戰)의 정치인의 패배 이상의 것이다. 이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긴 계보(카터, 듀카키스, 고어, 케리, 클린턴)가 팔아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신자유주의적 비전의 거부이다.
트럼프가 해고된 노동자들의 문제, 산업이 버린 중서부 도시들의 문제를 개선할 진지한 아이디어들을 제공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단순화된 헛소리들조차도 오바마와 힐러리가 한 겉만 번드르르한 공허한 약속들―번영을 다시 찾을 방식들로서의 경제성장, 무역협정, 첨단 테크놀로지, 교육 및 직업 재훈련―보다 더 진심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런 방식들로는 번영을 다시 찾을 수도 없고 다시 찾은 적도 없다. 자본의 구조적 요구가 사람들에게 어엿하고 안정된 삶을 가져다주는 경제적·사회적 정책의 능력을 줄곧 압도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낙수효과에 의존하는 경제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런데도 이것이 민주당의 경제 비전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신물 나는 상투적인 약속들이 도대체 어떻게 신뢰할 만할 것일 수 있겠는가? 트럼프와 샌더스 (그리고 그 외곽에서는 엘리자벳 워런) 모두가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점을 외침으로써 인기가 높아졌다. 오바마는 월가를 기소하는 데 실패하여 그 거대한 범죄를 용인함으로써 체제가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금융부문의 온건한 입법개혁만을 간신히 해냈으며 소비자 금융감시에 대한 요구에 저항했다. 매회 25만 달러를 받고 월가의 회사들에게 수십 번의 연설을 한 힐러리는 변화의 신뢰할 만한 옹호자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미지의 영토에 들어서는 셈이다. 미국의 두 정당들은 파열되어 혼란 상태에 처했다. 선거과정은 불평등한 인종문제에서 기후변화 및 환경에 이르는 긴급한 요구들에 진지하게 응할 수 없다. 거버넌스 과정은 이데올로기적 교착, 불신, 그리고 적에게 유리한 것은 다 없애버리는 식의 당파심에 의해 포위되어 있다. 뉴스매체는 진지한 저널리즘이나 민주적 제도의 방어보다 시청률을 높여주는 스펙터클을 더 좋아한다.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인간의 삶을 개선하는 합의된 틀로서 신뢰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유럽과 그 이외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새로운 사회경제적 틀과 우리 스스로를 다스리는 새로운 정치제도에 대한 더 큰 논의로 가는 문턱에 우리가 서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새로운 양태의 민주적 거버넌스와 자기조직화를 제공하는―진정한 참여와 권한과 책임을 허용하는 이러저러한 규모의― 커먼즈가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커먼즈와 국가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 적어도 처음에는 가장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특히 도시 수준에서는 풍요로운 결실을 낳는 혁신노선이다.
이러한 논의는 불가피하다. ① 세계 전역에서 온갖 종류의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이 시장(市場)이나 정부보다 더 효과적으로 많은 욕구들을 충족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 규모와 정교함의 측면에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며 ② 기존의 정치구조―거대 정당들, 국민국가와 관료제, 많은 틀에 박힌 시장들, 국가와 손을 잡고 있는 금융산업―는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과제를 달성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제도는 일을 처리하는 낡고 역기능적인 방식에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투여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인해 기존의 제도들 외부에서 스스로를 자기조직할 수 있는 힘을 사람들이 가지게 되면서 낡은 것과 새 것 사이의 긴장은 더 심화될 것이다. 망가진 경제/정치 제도를 지원하는 쪽으로 납세자들의 돈과 법적 특권을 맹목적으로 퍼붓는 정부가 커먼즈와 파트너가 되어 커먼즈를 지원하기 시작할 날은 언제일까? 우리는 자원추출적·약탈적·생태파괴적이며 이익의 할당에서 불공정하도록 애초에 구조화된 정치경제를 넘어가는 방법을 논의해야 한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에서 사용된 말들로 보아서 우리는 앞으로 4년 동안 괴물 같고 분열적인 사회적 격동을 견뎌야 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우리는 소중한 민주적 제도와 전통에 대한 유례없는 공격으로 고통을 받을 수 있다. 이미 당선 후 둘째 날에 백인우월주의적이고 반(反)이주민적이며 반(反)유태인적인 위협행동들이 트럼프를 외치며 일고 있다. 추방을 두려워하는 이주민들과 소수민족들은 항의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나는 곧 다가 올 격동의 시대가 커머너들로 하여금 많은 기획들을 가속하도록 자극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하나씩하나씩, 이 지역에서 다음 지역으로, 그리고 그물 같이 연결된 동맹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그토록 절실하게 원하는 구조 변혁을 펼쳐나갈 용기, 지혜, 결단, 상호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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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우애로운 세계 질서의 건설―이는 무엇보다 ‘새로운 경제’, ‘대(大) 이행’, ‘대(大) 전환’ 등의 용어들로 알려져 있는 과제이다―에 초점을 둔, 새롭게 싹이 트는 장르의 책들 가운데 존 새커러(John Thackara)의 새 책이 두드러진다. 그의 『다음 경제에서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내일의 세계를 오늘 설계하기』(How to Thrive in the Next Economy: Designing Tomorrow’s World Today)는 견고한 연구에 바탕을 두었고 실용성에 초점을 두며 양식 있는 차분한 음조의 책이다. 친절한 개인적 어조로 쓰인 이 책은 설득력 있고 영감을 준다. ‘찾아서 읽으시오!’라는 말 이외에 다른 추천사가 필요 없다.
탈자본주의 세계를 상상하는 그토록 많은 대담한 책들이 화려한 이론화와 도덕적 충고에 빠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병적인 근대의 형이상학적·역사적 뿌리를 찾아내려는 (이는 이해할만하다) 분야의 직업상의 위험이다. 비판은 비판이고, 새로운 세계의 창조적 건설은 이와는 별개의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에게 새커러의 책은 매운 신선하게 다가온다. 영국의 디자인 전문가이며 프랑스 남서부에 사는 이 사람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의 설계(디자인)와 작동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를 밀착해서 보고 싶어 한다. 그는 또한 “일을 다르게 하려면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라는 자신의 모토에 따라서 심층적인 관점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사색적이기도 하다.
『다음 경제에서 어떻게 번영할 것인가』는 ‘부단한 성장의 이름으로 자연을 먹어치우는 경제로부터의 탈출구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다. 짧은 대답은 ‘있다!’이다. 탈출구는 존재한다. 새커러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더 책임감 있고 공정하며 활기를 북돋는 방식으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법을 입증하는 수십 개의 빛나는 실험적 사례들이 세계 전역에 존재한다.
그는 우리의 손을 잡고 진행 중인 매우 다양한 모범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토양을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취급함으로써 치유하는 법을 발견하고 있는 과학자들과 농업가들을 소개받는다. 도시 수문학(水文學)을 다시 사고하면서 저수지나 하수도 같은 고(高)엔트로피 해결책들에서 더 작은 규모의 지역화된 해결책들로 옮겨가고 있는 도시계획가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도로의 포장을 벗기고 퍼머컬처, 정원들, ‘꽃가루 나르미 길’(pollinator pathways), 그리고 비공식적인 식품체계를 도시에 도입하려고 시도하는 생물지역주의자들(bioregionalists)도 있다. (([옮긴이]
▷ 수문학(水文學, hydrology)이란 지구상의 물의 순환을 대상으로 하는 지구과학의 한 분야로 주로 육지에 있는 물의 순환 과정보다 지역적인 물의 방향·분포·이동·물균형 등에 주목적을 두고 연구하는 과학이다.― 한글 위키피디아 참조
▷ 생물지역주의(Bioregionalism)는 생태지역(ecoregion)과 유사한 ‘생물지역’(bioregion)이라고 불리는 지역에 기반을 둔 일단의 정치적·문화적·생태적 견해들을 가리킨다. 생물지역은 물리적·환경적 특징들을 통해 정의되는데, 이 특징들에는 분수령 경계들, 토양, 지형이 포함된다. ― 영어 위키피디아
▷ ‘꽃가루 나르미 길’(pollinator pathways)은 미국 시애틀에서 새러 버그먼(Sarah Bergmann)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꽃가루를 나르는 곤충이나 새가 좋아할 3미터60센티 넓이의 정원을 주택 앞의 길을 따라 1마일 길이로 만든 것이다. 이런 곳이 60개나 기획되었다. 이는 ‘인류세’라고 불리는 시대에 생태계 및 도시와 우리의 관계를 다시 상상하고 다시 디자인하는 기획이다. http://www.pollinatorpathway.com/
‘나르미’는 우리말 사전에 없는 단어를 옮김의 편리를 위해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사회적 농업’의 멋진 실험들에 대해 알게 된다. 이 실험들은 지혜로운 새로운 사회적 체계들, 생산 가치사슬(production value-chains) 그리고 조직 디자인을 통해 식품을 커먼즈(공통재)로 취급하려는 시도들이다. (([옮긴이] 가치 사슬(value chain)은 특수한 산업에 종사하는 한 회사가 시장에 가치 있는 생산물이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일련의 활동들을 가리킨다.))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의 푸드커먼즈(Food Commons)는 한 지역에서 농장을 식품점 및 음식점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다시 상상하려는 대담한 시도이다. 식량을 경제적 상품 이상의 것으로 보는, 체계 전체를 고려하는 접근법(whole-system approach)을 고안하겠다는 것이 그 아이디어이다. 그럴려면 농업 공동체들, 지역 주민들, 토지, 분수령, 생물다양성의 이익을 하나의 상호연관된 네트워크 안에 정렬하는 통합된 사회체계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경우에 관건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쓰일 토지, 물리적 기반시설 및 기타 공동으로 소유하는 자산의 소유자이자 지킴이 역할을 할 <푸드 커먼즈 트러스트>(Food Commons Trust)의 설립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수익은, 이윤이 추동하는 회사의 주주들에 의해 모든 잉여가치가 전유되는 경우와는 달리,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데 사용될 수 있다.(더 나은 노동조건, 더 적은 농약 사용, 낮은 소득의 사람들에게는 더 값싼 식품을 공급하기)
심지어는 커머닝에 관한 장(章)도 있는데, 여기서는 사회적 화폐, 라틴아메리카의 부엔비비르(buen vivir) 윤리, 그리고 ‘야생의 법’(wild law)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옮긴이]
▷ ‘잘 살기’(good living)라는 의미의 ‘buen vivir’는 전통적 의미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대안 개념으로서 자연을 포함하는 공동체 내에서만 이룰 수 있는 넓은 의미의 ‘잘 사는 삶’에 초점을 둔다.
▷ ‘wild law’는 코막 컬리넌( Cormac Cullinan)이 처음 만들어낸 말로서, 인간이 인간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법이지만 인간을 비롯한 그 어떤 종에게도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 지구 공동체 전체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법이다.))
새커러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이야기들에서 ‘그린 스레드’(green thread)는 “재배지, 재배자들, 재배조건들 등 다양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식품과 재연결되려는 노력이다. 이 실천적이고도 지역적이며 인체 규모의(human-scaled) 활동들이 산업화된 식품 체계에 대한 대안의 묘목들이다. 산업화된 식품 체계는 (자원)추출 산업으로서 동물들이나 땅이나 사람들에게 모두 잔인하다.”(([옮긴이]
▷ 영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green thread’는 운영체제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 런타임 라이브러리나 가상머신에 의해 관리되는 스레드이다. 스레드는 어떠한 프로그램 내에서, 특히 프로세스 내에서 실행되는 흐름의 단위를 말한다고 한다. 옮긴이는 이 설명이 무슨 말인지를 잘 모르겠고, 그냥 중앙에 속하지 않고 지역에 속한 움직임이나 활동을 ‘그린 스레드’라고 부르는 모양이구나라고 추측한다.
▷ ‘인체 규모’(human-scale)는 인간의 신체, 운동, 감각, 정신, 사회적 제도에 부합하는 규모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지역 규모’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새커러의 어조는 내내 친절한 집주인의 어조이다. “자, 우리의 경제와 사회를 다시 만들, 영감을 주는 기획을 또 하나 보여주겠다.” 그는 자신이 보여주는 사례들을 과대평가하지 않으며 문제점들과 복잡한 점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그는 가벼운 터치로 기획들 사이의 친화성을 시사하면서 테마상의 유사성을 짚어준다.
나는 새커러가 자신이 소개하는 사례들을 얼마나 지적이고 깊이 있게 보는지를 알아보았다. 예를 들어 그는 고속철도(high-speed trains, HST)의 진정한 문제는 시간을 실제로는 절약해주지 않으면서 많은 다른 문제들을 낳는 데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문제는 이전의 주간고속도로(州間高速道路) 시스템이 그랬듯이 고속철도도 우리가 사는 방식 전체를 지탱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패턴의 토지사용, 운송강도(transport intensity), 기능들의 시공간상의 분리를 영속화한다는 것이다.” 고속철도는 도시 스프롤 현상을 낳고 전체 차원에서는 소외를 유발하고 값비싼 ‘시공간 지리’(space-time geography)를 낳는다. (([옮긴이] ‘시간지리학’(time geography) 혹은 ‘시공간 지리학’은 사회적 상호작용, 생태적 상호작용, 사회 및 환경 변화, 개인들의 일대기와 같은 공간적·시간적 과정들과 사건들을 다루는, 여러 학문분야를 가로지르는 관점이다.[영어 위키피디아 참조] 위에서는 학문분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관점에서 본 지리를 의미하므로 그냥 ‘시공간 지리’라고 옮겼다.))
나는 새커러가, 새로이 출현하는 새로운 모델들을 어떻게 널리 알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으면 한다. 소규모의 지역 실험들을 거대한 전지구적 운동으로 번성시키는 것을 가속화할 필요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우리는, 경제적·정치적 변화에 대한 우리의 탐색이 어떻게 늘 전개되고 있는 내적 자기변형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활력 있게 살아있음’을 양성할 것인가―이것이 정말로 핵심이다. 모든 것이 이윤의 추출을 위한 허가된 사냥감일 때에는 삶을 자립적으로 갱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유기체들을 발전시킬 필요가 절실하다. 삶은 상품교환의 이차적 혜택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변형이 어떻게 올 것인지를 새커러가 이해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렇게 쓴다. “변화는 사람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생물권과 다시 연결되어 내가 이 책에서 쓴 종류의 풍요로운 현실 세계 맥락들을 이룰 때에 올 가능성이 더 크다. 이는 일부 독자들에게는 나이브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들릴 것이다. [새커러가 더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들은 정부와 정책이 변화를 추동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볼리어] 그러나 (신념 체계를 포함한) 복잡한 체계들이 변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가 아는 바를 놓고 볼 때, 작은 것이 큰 것을 형성하는 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전혀 흐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
최근에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의 물결이 일었다. 새로운 책들이 출판되고 공개행사들과 현장 활동들이 있었다. 각각의 노력은 다소 상이하지만, 모두가 도시 거버넌스의 우선권과 논리를 커머닝의 원리를 향하는 방향으로 다시 정의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통한다.
나는 특히 『예일 법과 정책 평론』(Yale Law and Policy Review)에 실린 새 학술논문 「커먼즈로서의 도시」(“The City as a Commons”)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드햄 로스쿨(Fordham Law School) 교수 포스터(Sheila R. Foster)와 이탈리아의 법학자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가 공동으로 쓴 이 논문은 탐구와 행동주의라는 새로 출현하는 분야에서 획기적인 종합을 이룬 글이다. 68쪽에 해당하는 이 논문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개념화하는 데서 맞닥뜨리는 주된 철학적·정치적 과제들을 배열하고 271개의 각주에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커먼즈가 더 포괄적이고 공정한 형태의 ‘도시 만들기’의 가능성을 여는 프레임이자 일단의 도구들로서의 역할을 할 잠재성”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도시들이 시민들이 공통재로서 요구할 수 있는 자원을 사유화하거나 독점적 공적 규제로써 통제하지 않으면서 그 자원을 다스리거나 관리하는 문제를 부각시킬 잠재력을 커먼즈는 가지고 있다.”
저자들은 도시에 있는 커먼즈 자원의 역사와 현재 상태를, 그리고 공원보존위원회(park conservancies)(([옮긴이] 공원의 보존을 담당하는 공적 기구이다.)), 공동체 토지 신탁(community land trusts), 지분제한형 조합주택(limited equity cooperative housing)과 같은 거버넌스의 대안적 양태들의 부상을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포스터와 이아이오네는 “도시 커먼즈의 비극”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는 커먼즈를 자원으로만 보는 데서 발생하는 유한한 자원의 과도한 착취에 대해서) 쓰면서도, 도시 환경에서의 “커먼즈의 산출”에 대해 말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장을 연다. 이들은 핵심 문제가 단지 재산의 소유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적극적 협동과 관계를 양성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생산되는 자원의 가치는 인간의 활동의 결과이며 사람들이 자원에 접근하고 그 자원을 사용하는 능력에 달려있다”고 이들은 쓴다. “많을수록 즐겁다”는 원리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이해된 커먼즈는 도시를 위한 가치의 풍요로운 발생처로 간주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이 사실을 인식하기고 적절한 정책과 지원책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말이다.
최근에 출판된 또 하나의 중요한 저작은 라모스(Jose Ramos)가 편집한 선집 『커먼즈로서의 도시: 정책모음집』(The City as Commons: A Policy Reader)이다. pdf 파일로 무상으로 다운받을 수 있는 이 책은 도시를 커먼즈로서 창출하기 위한 정책 옵션들과 전략들에 초점을 맞춘 34개의 기고문들을 담고 있다. 다루는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 도시계획, 공공도서관, 공동체 통화, 시간은행, 플랫폼 협동조합, “코즈모-로컬리즘”(cosmo-localism)(([옮긴이]전지구적으로 분산된 지식 및 디자인 커먼즈들과 지역화된 가치생산의 결합이 가진 잠재력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http://actionforesight.net/cosmo-localism-and-the-futures-of-material-production 참조)), “시민조합토지”(civic union land), 오픈 데이터, 도시 커먼즈 보호 갱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 커머닝, ‘조세체납 사유재산'(([옮긴이] 재산을 소유한 시민이 세금을 내지 못한 경우 그 부채를 이윤을 노리는 민간투기업자에게 조세선취특권(tax lien)의 형태로 팔지 않고 시의 관리 아래 두어 공공재로서 사용하는 등 도시 커먼즈를 보호하는 것과 연관되는 주제이다)) 등이다.
바로 지난주에 커먼즈에 대한 책이 또 한 권 나왔다. 브리턴(Tessy Britton)이 쓰고 앤더슨(Amber Anderson)이 삽화를 넣은 『그림이 있는 참여도시 가이드』(The Illustrated Guide to Participatory City)이다. 접근하기 쉽고 재미있는 이 책은 ‘참여 문화’가 어떻게 도시를 되살리고 더 탄력 있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책은 소규모 참여 기획들의 가치를 부각시키며, 이 기획들이 다 합쳐지면 많은 더 크고 서로 얽힌 사회 문제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을 낸 영국의 프로젝트인 <참여 도시>(Participatory City)는, 실질적인 참여의 규모를 (연구가 가리키는 대로) 변형에 유익함을 가져오는 데 필요한 수준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현재 큰 “시범 지구”(demonstration neighborhood)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설명한다. <참여 도시>는 현재 5년 동안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20만 내지 30만의 시민들로 이루어진 도시를 찾고 있다.
최근에는 나 자신도 커먼즈로서의 도시 전선에서 활동해왔다. 9월 1일에는 암스테르담의 문화시민센터인 빠크회스 데 즈베이헤르(Pakhuis de Zwijger)에서 이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 이후에 이 분야의 전문가들 네 명―랩겁(LabGov)의 이아이오네(Chris Iaione), 커먼즈 네트워크의 해머스틴(David Hammerstein), 바흐 쏘사이어티(Waag Society)의 스티커(Marleen Stikker), HvA의 마요어(Stan Majoor) ―으로 이루어진 토론단이 활발한 토론을 했다. 2시간 15분짜리 비디오를 여기서 볼 수 있다.
도시를 다르게 보는 방법론적 도구들을 제공하는 <도시 르네상스 연습>이라고 불리는 프로젝트는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다음과 같이 멋지게 정의한다.
도시는 공통체(commonwealth)(([옮긴이] ‘commonwealth’는 ‘common’과 ‘wealth’가 조합된 단어로서, 말 그대로 직역하면 ‘같이 잘 살고 있음’의 의미인데, 실제로는 ‘공공복지’(public welfar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국가’(state)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며 ‘공동체’(community)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이 이외에도 여러 의미가 있으나 현재의 맥락에서는 논외로 해도 무방하다.) 옥스퍼드영어사전의 다음 예문에서 로크는 자신이 ‘commonwealth’를 ‘공동체 일반’이라는 의미로 사용함을 말하고 있다.
1690 J. Locke Two Treat. Govt. ii. x. §133 By Commonwealth, I..mean, not a Democracy, or any Form of Government, but any independent Community which the Latins signified by the word Civitas.
다음 예문에서는 더 구체화된 의미의 공동체, 즉 민주적 원리에 의해 구성된 공동체라는 의미가 제시된다.
1583 Sir T. Smith’s De Republica Anglorum i. x. 10 A common wealth is called a society..of a multitude of free men collected together and vnited by common accord & couenauntes among themselues. (* ‘u’와 ‘v’를 바꾸어 읽으면 된다.)
네그리와 하트의 저서 Commonwealth 에서 ‘commonwealth’는 그저 일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확연하게 기반을 둔 공동체로서 ‘커먼즈’(commons)와 거의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통적인 것’은 ‘사적인 것’(the private)과는 당연히 다르고 ‘공적인 것’(the public)과도 다르다. 그래서 이 Commonwealth의 한국어 역자들은 이 점을 감안하여 ‘공통체’라는 번역어를 사용했다. 여기서도 이 번역어를 사용했다.)) 이며 공유된 자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지식과 집단적 실천에 기반을 둔 협동적 환경이다. ‘커머닝’은 도시 조직화의 구성적 과정으로서, 공동체들을 수립하고 재생산하며 경계들·프로토콜들·분배원칙들을 확정한다. 도시 커먼즈는 소진되고 노후화되고 강탈될 수 있는 물질자원과 관계자원(relational resources)을 공히 관리하는 잡종제도(hybrid institutions)이다. 커먼즈는 언제나 보호되고 되찾아지고 갱생되어야 한다.
나는 이 주제가 다음번에는 어떻게 달라질지 정말로 보고 싶다. 나는 11월 17일에 내가 기조연설을 하는 바르셀로나의 ‘스마트 시티 엑스포’(Smart City Expo)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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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주석]
커머닝이 자급과 거버넌스의 합법적 형태로서 번성하려면 국가권력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가? 커먼즈의 성공이 거버넌스의 한 형태로서의 국가의 미래에 대해 함축하는 바는 무엇인가?
나는 지난해에 <커먼즈전략그룹>에서 동료들과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궁구하면서 이 문제들을 조명하는 것을 도울 진지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인리히 뵐 재단>의 지원으로 우리는 2016년 2월 28일에서 3월 2일까지 「국가권력과 커머닝―문제적 관계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심층잠수’ 워크숍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대화를 종합하고 압축한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의 핵심 요약이 아래 실려 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다.) 50쪽의 전체 보고서는 여기서 pdf 파일로 다운받을 수 있다.
워크숍 참가자들이 다룬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신자유주의가 ‘자유 시장’ 도그마의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다시 천명하려고 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그 실행 가능하고 생태친화적인 대안인 커머닝은 종종 상징적인 심지어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보고서가 이 문제들에 대한 더 광범한 토론이 시작되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보웬스(Michel Bauwens)의 도움을 받아 이 행사를 조직하는 것을 도운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뢰쉬만(Heike Loeschmann)에게 큰 감사를 해야 할 것이다. 내가 보고서를 썼으며, 트론코소(Stacco Troncoso)와 우트라텔(Ann Marie Utratel)이 멋진 출판 및 웹페이지 제작을 담당했다. 명민한 통찰들을 공유하게 해준 워크숍 참가자에게 또한 감사한다.
핵심요약
국가권력과 커머닝
커머닝은 종종, 억압적이고 자원을 추출·고갈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질서에 대한 도전의 한 방식―욕구를 충족시키는 더 인간적이고 생태친화적인 방식을 발전시킴으로써 행하는 도전―으로 간주된다. 커머닝은 우리 시대의 문제들―경제성장, 불평등, 불안정노동, 이주, 기후변화, 대의민주주의의 실패―에 대한 많은 유망하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양한 커먼즈들이 성장하고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됨에 따라 국가와의 관계에서의 애매한 위치가 점점 더 심각한 이슈가 되고 있다. 직절적으로 말하자면, 민족국가라는 생각 자체가 커먼즈라는 개념과 상충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은 종종 범죄화되고 주변화된다. 권력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일국 주권과 서양의 법적 규범들이라는 지배적 조건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커먼즈전략그룹>은 <하인리히 뵐 재단>과 함께 커먼즈 지향적 활동가들, 학자들, 정책전문가들, 프로젝트 선도자들로 다양하게 구성된 인원을 2016년 2월 28일부터 3월 1일까지((앞에서는 ‘3월 2일까지’라고 했는데, 2016년 2월은 29일까지 있으므로 3월 1일이 맞는 것 같다.)) 독일의 레닌(Lehnin)―베를린 외곽에 있다―에 3일 동안 초대했다. 목표는 커먼즈를 중심에 놓고 국가를 다시 상상하는 것에 대한 개방적이고 탐구적인 토론을 하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비전을 발전시킬 창조적 행동기획들을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참여자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다루었다. 커먼즈와 국가는 생산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이 ‘국가’를 커먼즈의 관점에서 다시 상상하여 그 권력이 커머닝을 지원하고 탈자본주의적·탈성장적 자급 및 거버넌스 수단을 지원하는 데 긍정적으로 사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 정치학자 스캇(James C. Scott)이 한 유명한 말을 빌자면, ‘국가처럼 보기’가 ‘커머너처럼 보기’와 결합될 수 있는가? 커머너들의 앎의 방식, 삶의 방식, 존재방식과 결합될 수 있는가? 그러한 혼종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1.국가권력을 이해하기
헬프리히가 국가에 대한 적절한 이론들 일부를 종합하는 발제문을 준비했다. 그녀의 발제문에는 우리가 ‘국가’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제기되는 핵심 이슈들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 첫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국가에 대한 이론적으로 타당한 일반적 정의”는 실제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국가는 사회 속에 있는 권력관계들을 공고히 하고 그 관계들을 변화시킬 능력을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복잡한 제도 체계로서 나타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따라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국가’ 그 자체가 아니다. 각 경우마다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권력의 위치들을 가진 특수한 집단들이 행동한다.” 물론 이 집단들과 이해관계들은 경우마다 엄청나게 다를 것이다.
‘국가’의 이러한 가변성에도 불구하고, 각 경우마다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성(statehood)의 기본적 측면들이 넷 있다. ① 영토에 대한 정치적 통제 ② 규칙들을 세우고 시행하는 데서 기능하는 힘 ③ 관료제와 조직된 권력이 가진 제도적 능력들 ④ 국민을 국가권위에 종속시키는 사회적 통제력. 국가와 ‘국가성’의 이러한 기준들은 제솝(Bob Jessop) 교수가 그의 2013년 책 『국가 ―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The State: Past, Present and Future )에서 정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 헬프리히가 주목하는 것은, 국가가 “규칙들과 규범들에 기반들 둘 뿐만이 아니라 절차들, 관행들, 관습화된 사고방식들―이것들의 사회적으로 구축된 기능들은 국민들에 의해서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에 의해 사회에 대하여 행사되는 영토화된 정치권력”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은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형성하는, 뚜렷한 질서 원칙들을 도입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한다. 근대 국가들에서 인간 사회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으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국가는 후자에 대한 통제력을 주장한다. 국가권력은 또한 생산의 세계와 재생산의 세계를 분리하며 이원론적 젠더 구분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남성은 생산/노동에 관여하며 여성은 재생산/가족에 관여한다). 마지막으로, 국가권력은 공적 삶을 ‘경제’와 ‘정치’로 분리하며 ‘자유 시장’을 자연적이고 규범적인 것으로 제시하고 정치를 의견의 불일치와 (추정컨대 불법적인) 사회적 개입을 위한 영역으로 제시한다.
영원하거나 선험적인 국가 규칙들과 제도들이란 없다. 규칙들과 제도들은 항상 사회적 투쟁과 논쟁의 결과이다. 그래서 하나의 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주체 혹은 존재물이라기보다는 정치권력(국가권력)의 항상적인 표현인데, 무엇을 표현하느냐 하면 변화하는 사회적 관계들의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그물망을 표현한다고 헬프리히는 썼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정말이지 사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와 국가성은 항상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워크숍 참여자이자 영국 랑카스터 대학의 사회학 공로교수(Distinguished Professor of Sociology)인 제솝 교수는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국가권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고 ‘커먼즈’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커머닝에 대해 말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제안했다. 어휘 사용에서의 이러한 이동은 ‘국가’가 역동적인 사회적 권력관계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며 ‘국가’와 ‘커먼즈’를 고정된 실제적인 존재물로 사물화하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국가권력을 사회적 관계들로 보는 이러한 관점과 강력하게 연관된 것이 푸꼬의 권력 연구이다. 푸꼬는 본질로서의 국가(국가 그 자체)와 전통적으로 연관된 ‘권력’(Power)에 집중하던 기존의 연구에 힘들의 관계(relation of forces)로서의 권력 연구를 맞세웠다. 이에 대해서는 꼴레즈 드 프랑스에서의 푸꼬의 강의를 책으로 낸 것들 가운데 『사회는 방어되어야 한다』, 『안전, 영토, 인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참조하라.))
왜 국가이론이 커머너들에게 중요한가
국가이론에 관한 첫 발제에서 제솝 교수는 그의 전략적-관계적 접근법을 개관했는데, 이는 단일하고 고정된 국가라는 생각을 거부하며 주어진 국가의 엘리트들 사이의 사회적 권력관계에 초점을 둔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국가는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목표를 추구할 동등한 기회를 가지고, 그리고 자신들의 목표를 (그게 무엇이든) 실현할 동등한 기회를((원문에는 “changes”라고 되어있는데 맥락으로 보아 ‘chances’의 오식일 듯하다.)) 가지고 싸우는 중립적 지형이 아니다. 국가 장치들의 조직, 국가의 역량 및 자원은 [···] 특정 세력에게, 특정의 이익에, 특정의 정체성들에게, 행동의 특정의 시공간적 지평에, 특정의 기획들에게 유리하다.”
제솝은 계급, 인종, 젠더와 같은 고전적인 ‘타자들’까지 가기도 전에 국가의 사법적 언어 자체가 구조적 적대를 낳는 구분들을 창출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커먼즈를 예로 들어보자. “커먼즈는 국가 내에서 정의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 자체를 넘어서는가?”라고 제솝은 묻는다.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극히 복잡한 일이다. “국가와 커먼즈에 관한 일반 이론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양자 사이에는 대체로 공식적인 사법적 관계가 거의 혹은 전혀 없다. “국가권력과 커머닝”은 이렇게 복잡한 관계를 갖기 때문에 제솝은 이 관계를 파악하는 데서 단지 하나의 분석 방법에 의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는 상이한 목적을 가진 다수의 진입점을 권유한다. 하나의 진입점을 택한다면 다른 진입점들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다수의 관점들이 대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해준다.”
국가가 사회적 권력관계의 도구라는 점, 그리고 국가권력이란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이기적인 힘이라는 점을 분명하다. 국가는 특정의 분파들에게는, 특히 자본(재계)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촉진시켜줄 수 있는 메커니즘이다. 커머닝으로 더 나은 세계―생태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나 젠더와 관련하여 더 정의로우며 개인들이 더 안전한 세계―를 일구어내려는 커머너들에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과 자유를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국가권력의 다양한 양태들
국가권력의 반복되는 패턴들은 세계 전역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현실화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의 경우 국가권력은 라틴아메리카, 유럽 혹은 미국에서의 국가권력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는 대체로 나라들 사이의 기본적인 지리적 및 자원과 관련된 차이에서 나오지만, 국가권력과 시장들을 혼합하는 다양한 정책들, 문화들, 사회적 규범들에서 나오기도 한다. 국가권력의 가장 두드러진 양태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① 라틴아메리카의 권위주의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국가권력, ② 아프리카의 농업 국가들, ② 긴축재정·종획·위기로 특징지어지는 유럽연합, ④ 신자유주의 국가를 공격적으로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는 미국.
2.국가권력에 대항하는 힘으로서의 커머닝
‘심층잠수’에서 계속 나오는 주제는 ‘어떻게 커머닝이 국가권력을 견제하고 가능하다면 재편할 수 있는 대항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가’였다. “국가와 관련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 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볼리비아 다민족국’(Plurinational State of Bolivia)은 볼리비아의 공식 명칭이다.))의 전(前) 유엔 대사인 쏠론(Pablo Solón)은 물었다. 분명히 국가권력을 바꾸는 데서 먼저 달성할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커머닝 행동들을 탈범죄화하고 합법화하는 것이리라. 이는 적어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들을 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들을 열어줄 것이다. 더 장기적 목표는 국가권력을 활용해서 커머닝과 커머닝이 창출하는 가치(들)을 창조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는, 좌파가 볼리비아를 장악한 일이 보여주듯이, 그 전체가 불안정하고 방심할 수 없는 지형이다. 권력은 그것을 휘두르기 시작한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국가들은 자신들의 국민들보다 다른 민족국가들에게 더 많이 응답하는 경향이 있다. 종국에는 국가와 기존의 법이 커머닝을 과연 도울 수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가 존재한다. 사무적으로 관리되는 민족국가의 거대한 체계들이 커먼즈 기반의 거버넌스와 인간적 규모의 커머닝을 실제로 양성할 수 있는가? 기존의 관료체제들을 바꾸어서 커머닝을 인정하고 지원하도록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
크로아티아의 정치생태연구소(Institute for Political Ecology)의 토마세비치(Tomislav Tomašsević)는 “국가는 다양한 유형의 행위자들이 움직이는 장”이며 커머너들이 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커먼즈운동과 그 참여자들로서는 국가를 재전유하고 재정의하여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한다. 그 다음 이 과제는 초국적 무대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국가를 재정의하는 일을 해내면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커먼즈 기반 사회의 규모를 다른 나라들로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어떻게 지역 차원에 머물지 않고 전지구적 차원으로 나아갈 것인가? 국가를 통해 커먼즈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보편성 개념들을 무엇인가?” 우리가 국가와 국가성을 다시 상상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위기’는 계속해서 존속하리라는 그 점 하나 때문일지라도 “커먼즈 운동은 이런 과제들을 무시할 수 없다.”
워크숍 참가자들은 국가권력을 변형시키는 데서 다루어야 할, 국가권력과 커머닝에 관한 세 기본 물음들을 가려냈다. ① 일국의 맥락에서 무엇이 커머닝을 막고 있는가? ② 커머닝이 존재할 수 있고 확대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가 변화시키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③ 오늘날 국가들과 정부들은 어떻게 커머닝을 방해하고 있는가?
커머너들은 구조적 분석, 전략 및 전술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할 설득력 있는 비전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물음들을 우리의 진입점으로 삼아야 한다. 커머너들은 또한 정치적 좌파와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자신들의 시민개념을 분명히 하며, 그리하여 커머너들이 어떻게 국가와 관계를 맺을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커머닝을 탈범죄화하고 지원하기 위해서 법을 재발명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통(通)개인적(transpersonal) 합리성과 연계―개인들의 다른 개인들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범주―의 중요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라는 생각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커먼즈전략그룹>의 헬프리히는 말했다.
3.국가권력을 커머닝을 지원하도록 다시 개념화하기
국가권력의 성격, 그 유형들, 그리고 커먼즈와 커머닝의 성격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우리를 ‘심층잠수’의 중심 문제에 이르게 한다. 어떻게 국가권력을 다시 상상할 수 있고 커머닝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가? 국가의 ‘공통화’(commonification)((원문에 명사를 썼기 때문에 “국가의 ‘공통화”라고 옮겼으나 ‘국가를 공통적인 것으로 만들기’라고 풀어 쓸 수 있을 것이다.))를 위한 전략들은 무엇인가? 커먼즈 기반의 국가는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
헬프리히가 이 문제에 답하는 데서 출발점을 제공했다. “커머닝 없는 커먼즈는 없다‘는 것이 맞을지 모르지만, 커머닝 없이 커먼즈에 기여하기는 가능하다. 여기가 국가가 관련되는 지점이다. 국가는 커머닝에 반드시 참여할 필요 없이 커먼즈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국가는 커머너들의 권리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으며 커머너들 사이의 건설적 관계들을 지원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과 커머너가 국가가 돕는 커먼즈를 상상하는 방식은 즉각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헬프리히는 말했다. 커머너는 커머닝을 병원에서 수도 시스템, 사회적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방식으로 본다. 원칙적으로 커머닝은 사람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새로운 창출 능력에 접속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한다. 이와 달리 자유주의자는 커머닝을 진보적 가치들과 복지국가에 가해지는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다. 커머닝은 국가를 그 책임과 지출을 회피하도록 장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이론가 제솝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커머닝에 관심이 있다면, 문제는―마치 국가가 우리의 활동들의 외부에 있는 양―어떻게 국가장치가 커먼즈를 돕도록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전략이 국가 시스템 내외의 힘들의 균형을 바꿈으로써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있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권력과 커머닝을 다시 살펴보기―전략적 행동을 위한 상호 학습’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쏠론(Pablo Solón)은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권력과 대항권력(counterpower)이다. 어떻게 커머닝이 대항권력을 구축할 것인가? 우리는 다른 식으로는 국가권력을 변형시킬 수 없다.”
대의민주주의가 정치변화를 추구하기 위해 여전히 가동될 수 있는 틀인지 아닌지, 혹은 정치권력의 집성이 ‘체제’의 외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열린 문제라고 P2P재단의 전략담당자이자 <게릴라 번역>의 공동창립자인 트론코소는 말했다. 시리자의 전(前) 당원인 카리치스(Andreas Karitzis)는 최근에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한 바 있다. “민중의 힘은 다양한 민주적 제도들에 일단 각인되면 소진된다. 우리는 긴요한 결정들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을 엘리트들이 받아들이고 관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던 것을 더 한다고 해서 일이 풀리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전투가 일어나는 터가 변해서 우리의 전략을 무력하게 한다면, 이런 불안정한 전쟁터에서 더 능력을 갖추어봐야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투의 지형을 다시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사항들을 대의정치에서 경제적·사회적 힘을 생산하는 자율적인 네트워크의 수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해결공간을 확대해야 한다.”
공공 서비스와 커먼즈
풀지 못한 문제는 어떻게 커먼즈가 공공 서비스, 공공재(public goods), 공적 도메인(public domain) 개념들과 관계를 맺을 것인가이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코리아(Benjamin Coriat)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이런 기능들을 감독한다. 국가는 접근권을 결정하거나 민영 회사들에 소유권을 넘길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공통 자산(common asset) 개념은 국가가 자원이나 서비스를 사유화(私有化)할 수 없다는 생각을 도입한다. 오늘날 국가가 사유화 기계가 되었기 때문에, 커머너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보호장치들을 도입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공공 서비스들이나 공공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공통화’할 수 있는가이다. 그는 공통재(common goods) 개념은 단지 자산과 서비스의 ‘재(再)시유화(市有化)’(re-municipalization)가 그 관건이 아니라 ‘공공재를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이 그 관건임을 강조한다. ‘공통재’는 새로운 개념적 범주이다. 이는 커머너들을 보호할 새로운 권리들을 창출한다.
거버넌스와 법에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하기
커머닝과의 관계에서의 국가권력의 패러다임 전환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런 패러다임 전환은 권력의 다른 새로운 회로들을, 새로운 유형의 거버넌스를 필요로 할 것이며, 더 넓은 의미에서는 제솝이 언급했던 국가 이념―Staatsidee((Staatsidee : ‘국가 이념’을 의미하는 독일어이다.))―에 대한 대위(代位)로서 기능할 수 있는, 널리 인정되는 커먼즈 이념을 필요로 할 것이다. 상이한 권력회로들을 발전시키려면 커먼즈의 내부 거버넌스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고 국가와 커먼즈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지어질 수 있는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커먼즈는 거버넌스의 형태로서 효율적이고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포용적인 윤리와 공유되는 목표들을 개발함.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심지어 추방하는 특정의 권리들은 계속 유지한다.)
책임을 지는 제도를 갖춤.
커머너들이 규칙 작성을 발기(發起)하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음.
집단의 이익이 상호적으로 만족스럽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발생함.
모든 구성원들이 현행의 규칙들과 관행들의 전제들에 도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짐.
결론
신자유주의 정책의 옹호자들이 저항을 누르려고 함에 따라, 그리고 커머닝 자체가 더 널리 퍼지고 강해짐에 따라 국가권력과 커머너들과의 복잡한 관계들은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 분명하다. 이 주제에 관한 진전이 있으려면 반드시 커머너들 사이에 토론이 더 진행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는 여러 나라들이 자국의 국경 안에 나름의 합법적으로 승인된 커먼즈들을 가지려고 시도하는 모습을 알게 되는 것이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의 ‘플랜 C’이든, 부엔비비르(buen vivir)를 증진하려는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 정책들이든, 자연자원 커먼즈를 보호하는 인도에서의 법정 판결이든, 국가와 병행하는 탈자본주의 경제인 커먼즈가 어디에서나 확대되는 것이든 말이다.
앞으로 이루어질 그런 전개들을 평가하려면 지역의 고유성을 고려한 ‘더 심층으로의 잠수’가 필요할 것이며 전통적인 좌파 및 노동계와 새로운 대화를 하여 생계, 기본소득, 공공 서비스, 경제정책의 문제들에 대해 일종의 임시 연대(working rapprochement)를 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커먼즈가 전통적인 자유주의 및 국가 권위와 정치적이고 합법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조처를 취해야 할지를 알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지형학에 심대한 변화가 생기지 않고서는 우리 시대의 위기가 해결될 수 없음은 분명한 듯하다. ♣
우리는 우리 시대의 여러 심대한 위기들에 대처하면서 해결이 쉽지 않은 난제에 직면한다. 변혁에 공격적으로 저항하는 현 체제가 부과하는 제한 내에서 살면서 어떻게 이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체제를 상상하고 구축할 것인가? 우리의 과제는 매력적인 대안들을 다듬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실현할 믿을만한 전략들을 포착하는 것도 포함한다.
나는 패러다임이자 담론이고 윤리이며 일단의 사회적 실천들인 커먼즈(the commons)가 이 난제를 극복하는 일에서 매우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커먼즈는 정치철학이나 정책 과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살아있는 과정이다. 그것은 명사라기보다 동사이다. 커머닝(commoning)―공유된 자원을 관리하는 체제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상호지원, 갈등, 협상, 소통 그리고 실험의 행동들―이라는 사회적 실천을 주된 핵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는 생산(자급), 거버넌스, 문화 그리고 개인들의 관심이 혼합되어 통합된 하나의 체제로 된다.
나사회변형 패러다임으로서의 커머닝는 이 글에서 커먼즈와 커머닝에 대한,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구축에 기여하는 데서 커먼즈와 커머닝이 가지는 거대한 잠재력에 대한 생생한 개관을 제공하려 한다. 나는 많은 커머너들(commoners)에게 활력을 부여하는 변화이론을 설명할 것이다. 특히 커머너들이 자본주의 시장들을 순화하고 자연의 파수꾼들이 되며 공유된 자원이 주는 혜택을 상호화하려고((‘상호화하다’는 ‘mutualize’의 번역어이다. 사실 좀 어색하다. 이 동사는 맥락에 따라 맞추어 옮기면 어색함이 사라진다. 현재의 맥락에서라면 ‘골고루 나누다’로 옮기면 무난하다. 다른 경우에는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아래아 한글의 사전에는 ‘상호적으로 하다’라는, 마찬가지로 어색한 번역어가 등록되어 있다. OED사전을 보면 ‘서로 주고받다/ 교환하다,’ ‘똑같이 나누다,’ ‘평등하게 하다,’ ‘상호적 원칙에 따라 조직하다,’ ‘(회사를) 상호적 원칙에 따라 재편하다’의 의미들이 등록되어 있다. 실제로는 정밀하게 보면 사전에 등록된 것보다 더 많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단어는 거의 하나의 개념의 위치에 오른 것이라서 명사로 사용되는 경우 번역하기가 난감하다. 명사는 그 개념만을 추출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맥락은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맥락이 없는데 어느 맥락에 맞추어 옮길 것인가?····· 따라서 명사를 ‘상호화’로, 동사를 ‘상호화하다’로 일관되게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색함이 있지만, 이 어색함을 극복하면 우리말 ‘상호화(하다)’가 이전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가진 말이 된다. ‘상호화하다’에 위에서 거론한 모든 의미가 포괄되기 때문이다. 사실 언어의 의미는 이런 식으로 확대된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비극적이게도 대한민국은 한국어의 의미의 확대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왔다. 의미가 확대되지 않는 언어는 죽은 언어이다.)) 시도하는 측면에 초점을 둘 것이다. 그 다음에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어 신자유주의 경제와 정치체를 비판할 것이며, 커먼즈가 어떻게 생태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인간적인 사회를 가져올 수 있는지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며, 커머너들이 추구하는 주된 경제적·정치적 변화들을 서술하고 그러한 변화들을 추구할 주된 수단을 서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현 ‘체제’를 구성하는 시장/국가 동맹체에 관하여 함축하는 바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커먼즈를 통한 자급과 거버넌스의 세계는 정치구조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러한 커먼즈의 세계는 무자비한 경제성장, 집중된 기업권력, 소비주의, 지속 불가능한 부채, 폭포수 쏟아지듯이 일어나는 생태파괴의 상호연관된 병리현상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가?
커먼즈 운동의 목표들
커먼즈를 체계적으로 소개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이 성취하려고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진술해놓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물질적 의미에서나 정치적 의미에서나 그들의 ‘commonwealth’(공통의 부/공통체)를 되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옮긴이] ‘commonwealth’는 ‘공통의 부’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커머너들의 민주적인 공유자원관리 공동체―이것을 ‘공통체’로 옮긴 바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네그리·하트 지음 『공통체』를 참조하라―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국가가 자본과 함께 근대를 장악한 이후에 ‘commonwealth’는 ‘state’(국가)와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공통체’로서의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 정치적인 의미에서 ‘commonwealth’를 되찾는 것이다.)) 커머너들을 그들의 공유 자원―토지와 물에서 지식과 도시 공간들까지―을 사유화하고 시장화하는 만연된 행태들을 철회시키고 그 자원 및 공동체의 삶을 다스리는 데 더 많이 직접 참여할 것을 다시 주장하고자 한다. 커머너들은 어떤 자원들은 양도 불가능하게―시장에서 판매되지 못하게 하여 미래의 세대를 위해 보존되게― 만들기를 바란다. 시장 종획을 역전시키고 커먼즈를 재발명하는 이 기획은 국가규제가 일반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것을, 즉 자원을 남용하고 지속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장 행위에 대한 효과적인 사회적 통제를 성취하고자 한다.
참여의 조건은 각자 다르지만, 세계 전역의 수많은 활동가 공동체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에 저항하고 커먼즈 기반의 대안들을 창출하는 드라마를 펼치고 있다.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 갈등이 여러 수준에서(지방적, 지역적, 일국적, 초국적 수준에서), 그리고 다양한 자원 도메인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자신들이 하는 일을 커먼즈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술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된다. 커머너들이 보기에 이 신념체계는 자원을 소진하는 시장경제의 엔진, 즉 생태계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며 공동체들을 약화시키고 개인들(특히 빈자와 약자들)을 수탈하는 체계의 엔진이다.
그러나 커머너들은,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 종래의 정치와 규제를 자기방어 혹은 전진적 변화의 도구로 더 이상 활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선거정치와 정책에 의해 추동되는 해결책들은 이 방면에 부패가 엄연히 존재하는 때에는 내적 한계를 가진다는 점을 커머너들이 인식했다는 것이다. 최선의 상황에서도 종래의 정치제도들은 법에 얽매어 있고 비용이 많이 들며 전문가들에 의해 추동되고 관료주의로 인해 유연하지 못하며 정치적으로 부패될 수 있는데, 이런 점들로 인해 이 제도들은 ‘아래로부터의’ 진지한 변화에 적대적인 도구가 된다.
커머너들은 정책에는 정치적으로 필요하거나 실행 가능한 만큼만 관여하고 자신들의 기획을 위해 보호받는 별도의 공간들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어왔다. 일반적으로 커머너들은 국가 당국에 자신들의 이익을 보증하거나 관리해달라고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에게 중요한 삶의 영역들―도시들, 마을공동체들, 음식, 물, 땅, 정보, 기반시설, 신용과 화폐, 사회적 서비스 기타 등등―에 대한 직접적인 주권과 통제권을 추구하기를 더 원했다. 독립적인 커머닝의 과정 자체에 여러 혜택들이 들어있다. 커머닝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의 우월성을 보여줌으로써―예를 들어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개발, 지역식량자급, 협동조합들, 대안적 통화들―자본이 추동하는 시장에 대한 준독립적이고 사회적으로 만족스러운 대안들을 창출한다.
커먼즈의 더 심대한 영향력은 문화적인 것일 수 있다. 커머닝은 사람들의 상호 연관 및 ‘자연’과의 연관을 다시 살린다. 커머닝은 새로운 열망들과 정체성들의 구축을 돕는다. 커먼즈는 사람들에게 소비자·시민·유권자의 역할을 훌쩍 뛰어넘는 개인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함으로써, 사람들이 건전한 문화적 가치들을 구현하고 책임과 권리를 모두 동반하는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접하게 해준다. 시장 문화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침투하는 때에는 커머닝이 새로운 문화적 공간들을 가꾸고 내적·주체적 경험들을 양성한다. 시장 문화의 조작적인 브랜드 만들기 그리고 활력을 앗아가는 스펙터클들과 관계가 있기보다는 인간의 조건 및 사회적 변화와 훨씬 더 관계가 있는 공간들이요 경험들이다. 결국 커머닝의 실질적 의의는, 고정된 철학적 비전이나 정치적 과제가 핵심이 아니라 성공적인 커먼즈를 구축한데 참여하는 행동이 핵심이라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커머너들은 “행동이 말보다 더 많은 문제를 낳는다”라는 개념예술가 제니 홀저(Jenny Holzer)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커먼즈’가 의미하는 것
커먼즈라는 것이 많은 현대인들에게 혼란스럽게 다가가는 것은 ‘커먼즈’라는 용어가 매우 많은 의미들을 가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용어의 정당한 용법에서 파생된 만큼이나 역사적 오점―‘커먼즈(공유지)의 비극’―에서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논의를 더 진전시키기 전에 커먼즈 언어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그저 기술(記述)적인 것이 아니라 환기적이고 수행적이다. 즉 그 단어들은 정체성, 정서를 표현하는 방식의 표식들이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구성하는 도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커먼즈의 전복적이고 전략적인 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커먼즈’라는 단어의 뒤얽힌 현대적 용법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십여 년 동안 교육받은 대중의 대다수는 커먼즈를 정부의 강제와 연관하여 실패한 관리체제로 간주해왔다. 이런 생각은 생물학자 하딘(Garrett Hardin)이 1968년에 쓴 유명한 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으로 소급될 수 있다. 학술지 『과학』(Science)에 실린 짧은 이 글에서 하딘은 자신의 가축의 방목을 제한하는 ‘합리적’ 인센티브를 가진 목부(牧夫)가 단 한 명도 없는 공유된 방목지의 우화를 제시했다.((Garrett Hardin, “The Tragedy of the Commons,” Science 162, no. 3859 (December 1968): 1243.)) 그 불가피한 결과로 각 목부가 이기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공통의 자원을 사용할 것이고, 이것이 불가피하게 과다사용과 파멸로 이를 것이라고, 이른바 ‘공유지의 비극’을 낳을 것이라고 하딘은 말한다. 그가 주장는 최선의 해결책은 해당 자원에 사적 소유권을 할당하는 것이다.
사실 하딘은 커먼즈(공유지)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픈액세스 체제 혹은 모든 것이 공짜인 무료입장의 체제를 서술하고 있다. 커먼즈에는 자원과 그 사용을 다스리는 뚜렷한 공동체가 존재한다. 커먼즈의 커머너들은 나름의 접근 및 사용 규칙들을 협상하고 책임과 권리를 할당하며 불로소득자들을 찾아서 벌을 주는 감시체제를 세우는 등 커먼즈를 유지하는 행동을 한다. 커먼즈 학자 하이드(Lewis Hyde)는 하딘의 “비극” 테제를 “소통하지 않는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접근하는, 관리되지 않은 자유방임적 공유재의 비극”이라고 재치 있게 규정했다.((Lewis Hyde, Common as Air: Revolution, Art and Ownership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0), 44.))
인디애나 대학의 정치학자인 오스트롬 교수(Elinor Ostrom)는 주류경제학이 망각 상태에 처박아놓았던 커먼즈를 다시 구해내는 데 기여했다. 1970년대에서 2012년 사망하기까지에 걸친 그녀의 활동 기간 동안 오스트롬은 주로 빈민국의 시골에 자리 잡은 수백 개의 공동체들이 사실상 자연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여러 방식들을 기록했다. 경험적 관점에서 보아 커먼즈는 작동할 수 있었으며, 그것도 보통이 아니라 잘 작동할 수 있었다. 오스트롬이 다루려고 한 중심적 논제는 “독립적인 상황에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불로소득, 회피 혹은 기회주의적 행동의 유혹에 직면해서도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려서 지속적인 공동의 혜택을 획득할 수 있는가”였다.((Elinor Ostrom, 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42.))
오스트롬의 획기적인 1990년 책 『공유지의 비극을 넘어서』(Governing the Commons)는 성공적인 커먼즈의 8개 핵심 “설계원칙들”을 포착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의 다른 책들은 무엇보다도 아래로부터의 기획과 의사결정에 힘을 주기 위해서 거버넌스(다스림)를 다양화하고 중첩화하는 방식들(즉 그녀가 “다원정치”polyarchy라고 부른 것)을 탐구했다.((Elinor Ostrom, Understanding Institutional Diversity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5); Joanna Burber, Elinor Ostrom et al., Protecting the Commons: A Framework for Resource Management in the Americas (Washington, DC: Island Press, 2001))) 이 작업으로 오스트롬은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200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2008년 금융위기 직후에 구성된 노벨상 위원회는 현행의 사회적 관계들이 사물화된 시장 거래들만큼이나 경제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오스트롬의 연구는 경제적 분석과 거기서 커먼즈가 하는 역할의 재개념화를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이는 그 다음 단계인 정치적 참여를 취하지 않고 이루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커먼즈에 관한 두 대비되는 수준의 담론, 즉 관리되지 않는 자원으로서의 커먼즈(하딘)와 사회적 제도로서의 커먼즈(오스트롬)를 살펴보았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주류 정치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커먼즈를 하딘의 의미로, 즉 소유되지 않은 비활성 자원으로서 이해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 설정은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진화하는 사회적 활동임을, 즉 커머닝임을 인정하는 데 실패한다. 실제로 커먼즈는 자원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규칙들, 전통들, 가치들을 고안함으로써 자원을 관리하는 공동체로도 구성된다. 셋 모두가 필요하다.
요컨대, 커먼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셋째 수준의 담론은 인습적인 학계를 심란하게 하는데, 이는 이 담론이 논의 전체를 ‘경제인’(homo economicus)에 기반을 둔 익숙한 경제주의적 틀 바깥으로 몰고 가서 그들이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지리학 및 기타 ‘부드러운’ 인문과학들의 기발한 발상들로 간주하는 것으로 가는 문을 열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학자들과 정책입안자들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단정한 양적, 기계론적 모델들을 구축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든다. 그토록 많은 특이한 지역적·역사적·문화적·간주체적(intersubjective)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면 커먼즈에 대한 표준적·보편적 유형론을 주장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커먼즈 담론은 인간 실존과 사회적 조직의 엉망진창인 현실을 표준적인 경제학, 관료체제, 그리고 근대 자체의 가짜 도리(道理)와 세계관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 어떤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정한 접근·사용 및 장기적 지속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집단적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한다는 점에 현실의 복잡성이 있다. 이는 수많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예를 들어 공동체 극장, 오픈소스 현미경 사용법, 인도주의적 구조를 돕기 위한 오픈소스 맵핑, 그리고 이주민들에게 호의 베풀기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커먼즈들을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다. 이러한 ‘세계를 만드는’ 공동체들 각각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들, 전통들, 역사, 간주체성에 의해 활성화된다. ‘안에서 보면’ 커먼즈는 그 하나하나가 다 사회적으로 고유하다.
일단 우리가 공통적인 문제의 존재론적 전제들을 인정하고 그 전제들이 크게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우리는 사회적 현상의 새로운 우주론으로 진입하게 된다. 커먼즈와 환경 사이의 경계가 (사회생태론적 체계에서 예측할 수 있듯이) 흐려진다. 사회과학자들은 어떤 요인들이 일정한 커먼즈를 정의하고 어떤 요인들이 우연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서 골치 아픈 방법론적 난점들에 직면하고 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커먼즈를 총합적인 살아있는 체계로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의 ‘패턴 언어’라는 발상과 같은 새로운 발견법들과 템플릿들이다.((David Bollier and Silke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Amherst, MA: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커먼즈의 존재론적 가변성은 경제학자들과 근대주의 세계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불가해한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 대부분은 커먼즈를 단지 자원으로서만 간주하기를 고집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은 모든 것이 표준적이고 보편적인 범주들―신자유주의적 시장 문화의 필수적 조건―로 산뜻하게 분류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는 듯하다.
그런데 커먼즈의 세계에서는 지역적이고 변별적이며 역사적인 것이 중요성을 가지는 인간적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다. 고유한 경험들, 토속적 전통들, 문화적 가치들, 지리가 인정되어야 하고 특권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몸으로 겪은 경험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더 나아가 그러한 특수성의 발생적이고 본래적인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언어인 동시에 사회·정치·경제적 기획이다. 토착민 커먼즈는 도시 커먼즈와는 매우 다를 것이며, 이 둘 모두 가령 위키하우스 디자인 공동체와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커먼즈들이다. 에스코바(Arturo Escobar)의 말을 빌자면, 커먼즈는 우리에게 “다원적 우주’(pluriverse)가 무엇인지 알려준다.((Arturo Escobar, “Commons in the Pluriverse,” in 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348–360.)) 새로운 세대의 진화 과학자들이 발견하고 있듯이, 많은 극히 다양한 국지적 사례로 발현하는 공유된 DNA, 이것이 인간 종의 기저 현실이다. 신자유주의에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지만, 왜 우리의 경제적·정치적 제도들은 이 사실을 반영할 수 없는가?
커먼즈 패러다임은 중요한 존재론적 문턱을 넘을 것을 우리에게 청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양의 산업사회들에 사는 주류 정치와 경제의 행위자들은 문턱을 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우리는 이것을 ‘자연의 권리’, ‘바이오문화적 프로토콜’, 지역 공동체들의 자결(무역협정들이 시장 투자에 대한 민주적 제약을 약화시키려고 하므로, 여기에 민족자결도 포함될 수 있다) 같은 생각에 대한 서양의 경멸에서 본다. 커먼즈는 시장가격과 사유재산화 너머에 있는 일련의 사회적 가치들에 이름을 붙인다. 커먼즈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정신을 이루는 경제학의 합리적 행동자 이론이나 신다윈주의적 적자생존 내러티브가 파악할 수 없는,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이며 경험적이고 간(間)세대적(intergenerational)이며 생태적이고 심지어는 우주적인 실재들을 존중한다.
이런 의미에서 커머너들은 생태계와 인간을 이러저러한 정도로 대체 가능하고 상품화될 수 있는 자원으로 보는 자유주의적인 관료제 국가와 재래식 과학의 세계관에 도전한다. 이 세계관에서는 우리의 노동이 구매·관리되는 ‘인간 자원’으로 취급되며, 꿀벌에 의한 가루받이는 가격이 매겨질 수 있는 ‘자연의 서비스’로 간주되고, 심지어 생명체들도 특허를 낼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는 대상이다. 살아있는 체계들의 양도 불가능성과 그 본래적 (교역될 수 없고 공유되는)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커먼즈는 체제 차원의 변화, 그저 정치적이고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이고 존재론적인 변화를 발본적으로 요구한다.
왜 커먼즈 담론이 중요한가
이렇게 커먼즈 담론의 현대사를 살펴본 것은 그것이 커먼즈 운동이 현실화하고자 하는 ‘변화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커먼즈의 언어는 우선 사람들의 인식과 이해의 방향을 다시 잡아주기 위한 도구이다. 그것은 시장 종획의 현실과 커머닝의 가치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조명하는 것을 돕는다. 커먼즈 언어가 없다면, 이 두 사회적 현실은 문화적으로 비가시적인 것으로, 적어도 주변화된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따라서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커먼즈 담론은 종래의 정책담론이 무시하거나 숨기고 싶어 하는 도덕적·정치적 주장을 하는 길을 제공한다. 커먼즈의 개념들과 논리를 사용하면 자신들의 친화성과 공유된 과제목록을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무리의 커머너들을 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들은 그들 자신의 지고의 가치들과 우선적 관심사들을 체계의 상이함의 관점에서 더 쉽게 천명할 수 있다. 커먼즈의 일관된 철학적 내러티브는 지적 섬세함 이상의 것으로서, 자본이 자연 대 노동, 노동자들 대 소비자들, 소비자들 대 공동체와 같은 식으로 이익들을 서로 상충시키는 것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 커머닝의 언어와 경험들을 통해 사람들은 ‘피고용인’과 ‘소비자’라는 제한적인 사회적 역할을 넘어가서 전인적 인간들로서 더 통합된 삶을 살기 시작할 수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변화에 대한 욕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자본이 구사하는 ‘분할하여 정복하기’ 전술에 굴복하지 않고, 시장 오용의 다양한 희생자들이 그들의 공통된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내러티브를 개발하며 새로운 유대관계를 가꾸고 (바라건대) 자본의 논리와는 다른 논리에 의해 추동되는 효율적 대안들을 밤하늘의 별처럼 많이 건설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 통합적 비전을 제공한다.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서 커먼즈 담론이 가진 잠재력은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비용편익 분석 담론이 음침하게 빛나는 반대사례인데, 1980년대에 미국 산업은 이 분석 담론을 환경, 건강, 안전 규제를 위한 기본 방법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첫 수는 일단의 사회적·윤리적·환경적 정책들에 시장경제와 수량화의 언어를 이식함으로써 그 정책들을 무력화시켰다. 이 담론은 제정법의 많은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흐렸으며 규제에 대한 전반적 인식을 변화시켰다. 나는 커먼즈 담론을 이에 버금가는 종류의 인식론적 개입으로 본다. 우리의 공유된 부를 관리하기 위한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가치들을 되찾는 체제 차원의 방법인 것이다.
경제학과 커먼즈
앞에서의 논의가 함축하듯이, 커먼즈 운동은 ‘경제’에 대한 우리의 생각 자체를 변화시키려 한다. 커머너들은 ‘시장’을 지구의 자연 체계 및 우리의 사회적 욕구와 어떻게든 동떨어져 있는 자립적인 ‘자연적’ 사회영역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생태적인 것, 경제적인 것을 통합하고자 한다. 폴라니(Karl Polanyi)는 그의 획기적인 책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시장 문화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친족관계, 관습, 종교, 도덕, 그리고 공동체를 밀어내고 사회의 주된 질서구축 원칙이 되었는지를 설명했다.((Karl Polyani,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Boston, MA: Beacon Press, (1944) 2014).)) 이러한 변형은 이제 역전되어야 한다. 그 동안 족쇄가 풀려있었던 자본과 시장은 사회 속에 다시 함입되어야 하며, 사회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자본 투자, 금융, 생산, 기업권력, 국제무역 등이 사회적 욕구에 종속되어야 한다.
커먼즈 운동은 연대하는 운동들과 함께 탈자본주의적이고 탈성장적인 질서를 위한 제도들과 규범들을 발전시키고자 한다. 이는 시장 기반의 선택들로 이루어진 단색의 주류 문화(monoculture)에, 인간의 가능성들에 대한 (생산자/소비자 쌍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고 활력이 넘치는 감각으로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같이 편집한 책 『커머닝의 패턴들』에서 우리는 상이한 인간 능력들과 사회적 형태들에 기반을 두는 수십 개의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커먼즈들의 윤곽을 그렸다. 공동체 숲들, 지역 통화들, 팹랩들(Fab Labs), 자치체 수자원 위원회들, 국지적 가족경작을 지원하기 위한 경작지 트러스트들, 생물다양성을 파수(把守)하기 위한 토착민 ‘바이오문화 유산’ 지역들, 퍼머컬처 경작, 커먼즈 기반 기획들에 행정적·법적 지원을 해주는 ‘범(汎)커먼즈’(omni-commons) 조직들 등등이 속한다.((Bollier and Helfrich, Patterns of Commoning.))
그러한 상호화된 자급체계들이 개발되고 확대되어야 한다. 이 체계들은 만족을 모르는 시장의 요구에 복무하는,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경제에 대한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유리한 대안들이 된다. (짧은 방주 : 법적·조직적 형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의 파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많은 협동조합들이 사이비 조합주의와 관리주의(managerialism)로 타락한 사례들을 보기만 하면 안다. 그렇더라도 그런 형태들은 더 나은 소비 형태들로 이동해갈 잠재력을 제공할 수는 있다. 비록 소비주의를 넘어선 사회적 문화에는 못 미치더라도 말이다.) 또한 퀘벡, 이탈리아, 일본에서 사회적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제공하는 다중이해관계자 협동조합 모델에도 희망이 있다. 협동조합 형태들이 사유재산화된 디지털 플랫폼들을 대체할 필요도 있다. 이 플랫폼들은 현재 페이스북, 우버, 리프트(Lyft), 에어비앤비, 태스크 래빗(Task Rabbit), 미캐니컬 터크(Mechanical Turk) 및 기타 ‘공유경제’ 벤처기업들(즉 미시대여와 즉석노동 시장들spot-labor markets)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데, 이들은 사회적 협동의 과실을 사유화·화폐화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들을 위해 협동조합 모델들을 발명하려는 대대적인 새로운 노력이 2015년 11월 9일 뉴욕시에서 열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 컨퍼런스에서 개시되었다.((Platform Cooperativism conference website, http://platformcoop.net.))
세계 전역의 커머너들은 착취적인 사유재산화된 마켓 플랫폼들과 기업 구조들을 대체하려는 여러 중요한 제도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 이 혁신들에는 다음의 것들이 포함된다.
◉ 쎈소리카(Sensorica)나 엔스피랄(Enspiral)과 같은 오픈밸류 네트워크들(open value networks). 이들은 기업가들과 사회적 성향을 가진 커머너들의 협동적 디지털 ‘길드’로서 기능한다.
◉ 상호혜택을 위한 구매클럽과 재편된 생산/공급망. 이탈리아에서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에 의해 개발된 의류생산체계와 커먼즈 기반의 트러스트를 통한 지역 식량공급망을 재발명하고 있는 [캘리포니아의] 프레즈노 커먼즈(he Fresno Commons).
◉ 국가가 소유한 자원에서 발생하는 수입을 상호화하는, 국가의 면허를 받은 이해관계자 트러스트들. (알래스카 영구 펀드Alaska Permanent Fund 및 피터 반즈Peter Barnes가 제안하는 새로운 모델들.)
◉ 코드를 자유롭게 공유하고 때로는 공동체의 존경 받는 원로들이 이끄는 제휴 재단들에 의해 운영되는 오픈소스 프로그래밍 공동체들.
◉ 모듈 방식의 저예산 자동차, 농기구, 가구 및 기타 유형의 생산물들을 만들어내는 글로벌 자율생산(peer production) 디자인 및 지역 제조 공동체들.
미래에는 ‘블록체인 원장’―이는 비트코인을 가능하게 만든 소프트웨어 혁신의 산물이다―덕분에 열린 네트워크에서 움직이는 분산된 자율적인 조직들이 가능하게 되리라고 많은 첨단기술 종사자들이 예측하고 있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는 개개의 디지털 파일(비트코인, 문서, 디지털 신분)의 진정성을 은행이나 정부 기관 같은 제3의 보증인 없이 확인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조직된 집단들이 디지털 신분을 확증하는 능력이 민주화됨으로써 (그러면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커머너들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그 구성원들에게 특정의 권리를 할당하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새로운 종류의 분산된 자치 조직이 생기게 된다. 블록체인은 네트워크 기반의 ‘스마트 계약’(smart contracts)을 위한 초보적인 (궁극적으로는 세련된) 틀을 제공할 수 있는데, ‘스마트 계약’은 집단 거버넌스의 다능한 형태들을 가능하게 하며, 또한 디지털 커먼즈의 참여자들 사이에 가치를 공유하기 위한 회계 기반시설(an accounting infrastructure)로서 쓰일 수도 있다.((비트코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면 http://p2pfoundation.net/Bitcoin; http://bollier.org/blog/blockchain-promising-and http://www.nytimes.com/2015/03/02/ business/dealbook/data-security-is-becoming-the-sparkle-in-bitcoin.html?_r=1 참조.))
그러나 이 커먼즈 기반 제도들의 다수가 풀지 못한 중요한 문제는 신용과 소득에의 접근이다. 재래의 은행들과 금융기관들은, 심지어는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조차도, 이윤을 추구하는 상업적 기업이 아닌 커먼즈에 대출을 해주는 것을 난감해 한다. 예를 들어, 오픈소스 디자인 및 제조 생태계(open source design and manufacturing ecosystem)는 은행에 담보물로 내놓을 지적 재산이 없다. 그래서 이곳의 생산물들―연비가 좋은 오픈소스 차량들, 값싸고 지역에서 부품을 구할 수 있는 농기구들―은 확대를 위한 자본을 구할 수 없다. 다행히도 거의 잊혀진 협동적 금융의 역사적 모델들이 많이 재발견되어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커먼즈를 지원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로운 DIY 신용제도들, 대안 통화들, 스페인의 고테오(Goteo)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들이 포함된다. 스웨덴의 JAK은행에 의해 개발된 것과 같은 이자 없는 신용이 지역 이행경제들에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준비되고 있는 한편, 다른 이들은 커먼즈를 위한 새로운 유형의 크라우드에쿼티(crowdequity scheme) 제도를 탐구하고 있다.((David Bollier and Pat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Strategies for Transforming Neoliberal Finance Through Commons-based Alternatives” (Berlin, Germany: The Commons Strategies Group, 2015).))
기본적인 요점은, 금융 및 화폐와 관련된 탈자본주의적 비전이 일정치 않게나마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회계와 교환체계들(통화, 신용 포함)을 창출할 태세이다. 이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재래의 부채에 의해 추동되는 대출과 시장 기반의 생산이 낳는 병리현상들의 다수를 피해가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병행하여 많은 기존의 금융기관들이 이 부상하는 부문을 보완하고 지원하도록 확대될 수 있다. 노스다코타 주가 설립한 것과 같은 공공은행들은 매우 다양한 사회적·생태적 욕구에 낮은 비용의 신용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체개발 금융기관들과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있는 방카 포풀라레 에티가(Banca Populare Etica)와 같은 사회적 및 윤리적 은행들 또한 커먼즈 경제에 필요한 금융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마구 섞여있는 기획들을 한데 엮어서 커먼즈 지향적 금융의 더 통합적이고 발전된 기반시설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할 일이 남아있다. 그러나 재래의 은행과 금융제도가 자본주의의 모순의 무게 아래에서 내파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들과 커먼즈 기반의 공동체들이 새로운 협동적 선택들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세대의 상호적 금융이 큰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Bollier and Conaty, “Capital for the Commons.”)) 별도로 진행되지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커머너들은 화폐를 창출하는 능력에 대한 (정부의) 공적 통제력을 다시 회복하여 화폐가 상업적 대출업자들의 협소한 이윤창출 목표에 복무하지 않고 공적이고 민주적으로 결정된 욕구에 복무하도록 사용될 수 있게 만들 필요를 느끼고 있다.((Mary Mellor, Debt or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15); Mary Mellor, The Future of Money: From Financial Crisis to Public Resource (London: Pluto Press, 2010); Frances Hutchinson, Mary Mellor and Wendy Olsen, The Politics of Money: Towards Sustainability and Economic Democracy (London: Pluto Press, 2003).))
시장과는 다른 간접적 호혜성에 기반을 둔, 커먼즈 기반 생산이라는 크고 다양한 영역이 하는 역할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시간은행들, 오픈소스 네트워크들, 함께 학습하는 공동체들, 예술가 커먼즈(이렇게 몇 개만 들겠다)에의 참여는 일반적으로 일대일 교환에 기반을 두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대한 개인적 헌신에 기반을 둔다. ‘같이 내고 공유하기’(pool and share) 접근법이다. 종종 ‘자발적 부문’ 혹은 ‘선행’으로 치부되는 이 (이반 일리치가 말한 의미의) 공생 공동체들은 사실 부지런히 일하면서 생산하는 곳이다.((Ivan Illich, Tools for Conviviality (New York: Harper & Row, 1973).)) 이 공동체들은 인간적이고 저비용의 방식으로 돌봄과 연관된 많은 서비스들을 수행한다. 이는 정부의 프로그램들이나 시장은 누가 보아도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커머너들이 구축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제’는 경제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그리고 자치가 혼합된 혼종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체계는 수십 개의 사례들에서 보듯이 더욱 투명하고 공동체에 의해 통제 가능하며 더욱 유연하고 지역의 특수한 욕구에 잘 부응하며 신뢰할 만하고 사회적으로 책임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커먼즈들은 또한 시장이 늘 창출하는 부정적 외부성들(the negative externalities)을 창출할 가능성이 낮다.
커머너들의 큰 과제는 그 모델들을 연합시켜 더 크고 협동적인 사회적 생태계들로 만드는 것이다. 또한 커머너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를 파트너로 삼아서 커머닝을 위한 법적 틀들, 기술적 지원, 더 나아가 간접적 보조금을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기존의 일국 정부들은 (기업 엘리트들과의 역사적 동맹관계로 인해서) 이 길에 감히 나서기를 꺼려할 수 있기 때문에 도시들이 커먼즈 기반의 혁신들을 배양하는 데 핵심적 발동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최근에 열린 국제 컨퍼런스인 「커먼즈로서의 도시」에 참여한 도시 커머너들의 튼실한 다양성에 의해 충분히 확인된 점이다.((David Bollier Website, “The City as Commons: The Conference,” http://www.bollier.org/blog/city-commons-conference.))
여기서 절차와 관련된, 전략적 함축을 가진 단상을 끼워 넣겠다.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은 국가의 법과 공공정책(하향식 체계들)이 ‘체제 차원의 변화’를 성취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이 도구들은 종종 필요하지만, 오늘날 네트워크화된 세상에서는 그 효율성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 현재 당파심에 기인한 정체(停滯)현상과 높은 법률 장벽에 의해 마비되어 있는 재래의 정치제도들을 통해서 변혁을 성취하기란 극히 어렵다.
이 현실을 넘어서, 정부들의 도구성 자체가 종종 비효율적이며 느리고 부당하다. 2014년 책 『규칙들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에서 인류학자이자 활동가인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네트워크화된 시대에 중앙집중화된 명령 및 통제를 행하는 관료체제들이 가지는 구조적 한계들을 열거하고 있다.((David Graeber, The Utopia of Rules (Brooklyn, NY: Melville House, 2015).)) 좌파의 독특한 실패는 인간에게 가능한 규모의 실제로 기능하는 대안들―시민 주도성, 참여, 혁신능력을 긍정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대안들―을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일상적으로도 의미와 영향을 가지는 ‘강한 민주주의’를 제안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매우 날카로운 통찰이다.(([옮긴이] 이것이 누구의 통찰이라는 것인지 원문에 나와 있지 않다. “strong democracy”는 Benjamin R. Barber의 저서 Strong Democracy: Participatory Politics for a New Age(2003)의 핵심 개념이다.))
전진하는 길 하나 : ‘다음 체제’는 관료제가 잘 수행할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분산된 네트워크들에서의 수평적 협동을 수용해야 한다. 이는 ‘정부를 재발명하기’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 거버넌스, 상향식 참여를 통합하여 새로운 종류의 커먼즈 제도들을 만드는 문제이다. 경제적·기술적 트렌드들은 명백히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이는 벤클러(Yochai Benkler)가 『네트워크의 부『(The Wealth of Networks)에서, 리프킨(Jeremy Rifkin)이 그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Zero Marginal Cost Society)에서, 그리고 보웬스(Michel Bauwens)가 P2P재단의 위키와 블로그에 올린 많은 글들에서 기록하고 있는 현실이다.((Yochai Benkler, The Wealth of Networks: how Social Production Transforms Markets and Freedom (New Haven, CT: Yale University Press, 2005), http://public.eblib.com/choice/publicfullrecord. aspx?p=3419996; Jeremy Rifkin, The Zero Marginal Cost Society: The Internet of Things, the Collaborative Commons, and the Eclipse of Capitalism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4); See P2P Foundation, “Michael Bauwens,” http://p2pfoundation.net/Michel_Bauwens/Full_Bio.)) 네트워크 기반의, 혹은 네트워크로부터 도움을 받는 커먼즈는 참여를 통한 통제 및 이익의 상호화를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구축하는 데 매우 필요한 기반시설을 제공할 수 있다. 관료제를 네트워크 기반의 커먼즈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지는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많은 ‘정부 2.0’ 실험들이 이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여기 서술된 많은 커먼즈 기반 혁신들이 가진 큰 미덕은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정부나 정책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이 혁신들은 재래의 정치적 장소들을 우회할 수 있다. 물론 법, 정책, 정부조달이 커먼즈 부문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시장 기득권자들을 특권화하고 커머닝을 범죄화하는 몇몇 기존의 정부 정책들은 말할 것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커먼즈에 대한 재정 지원은 중요하고도 아직 충족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있다. 그렇더라도 커먼즈 기반의 자급 및 서비스 체제들은 혁신적인 방식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거대한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소규모의 복제 및 연합(smaller-scale replication-and-federation)을 통해서 성장한다.
사회, 환경, 정치체에의 파급효과
위에서 스케치된 경제/자급의 비전은 명백히 불평등, 생태계, 젠더 및 인종 관계, 그리고 정치체에 미칠 광범한 영향을 함축한다.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 필자는 커먼즈 중심 사회가 이 문제들을 어떻게 다룰지를 제안할 것이다.
부와 소득 불평등. 사람들의 기본적 욕구가 부채와 이윤추구에 의해 추동되는 시스템에 의해 충족되지 않고 시장의 외부에서 움직이는 커먼즈를 통해 충족될 수 있을 때, 신자유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기괴한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 커머닝의 요점은 결국 욕구를 위한 물자조달을 탈상품화하거나 상호화하여 모두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대안화폐 전문가인 고 마그릿 케네디(Margrit Kennedy)는, 시장에서 팔리는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 가운데 무려 50%가 부채에 해당한다고 추산한 바 있다. 만일 어떤 가족이 재래의 시장과 신용에의 의존성을 줄일 수 있다면 그 생활비용이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으며 약탈적 기업에 의해 피해를 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극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일상생활의 탈상품화와 상호화가 다음과 같은 많은 커먼즈 기반의 제도들을 통해 일어날 수 있다. ① 토지를 시장에서 빼내서 주택비용을 줄이는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 ② 고이율과 부채에의 노출을 감소시키는 협동적 금융 대안들, ③ 비용을 줄이고 질을 높이기 위해 협동적으로 생산되는 재화와 서비스, ④ 공유된 기반 시설(에너지, 수송, 인터넷 접근, 소셜 미디어 플랫폼들), ④ 소프트웨어 코드, 데이터, 정보, 과학연구, 창작물들을 위한 커먼즈 기반의 개방된 제도들.
사회적 정의와 인종 및 젠더 평등. 커먼즈 패러다임은 다양한 인종, 민족, 혹은 젠더 문제들을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그 틀이 거버넌스, 자급, 사회적 협력에 더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먼즈 패러다임은 포용성과 사회적 유대에 예리하게 집중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제공하는 (그러나 반드시 실현시켜 주지는 않는) 형식적인 법적 권리들을 넘어설 수 있다. 시장은 인간의 욕구에 진정하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시장에게 중요한 것은 소비 수요이다. 돈이 없는 누군가가 소비 수요를 표현하면, 그것은 주변적이거나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커먼즈는 민중의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우선적으로 충족시키는 데 바쳐져 있으며, 사회적으로 참여적이고 포용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공동체들이 협동조합을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존엄과 존중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듯이,((Jessica Gordon Nembhard, Collective Courage: A History of African American Cooperative Economic Thought and Practice (State College, PA: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2014).)) 커먼즈도 사회적 제도로서 사회적 욕구, 공정, 존중에 핵심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커먼즈 역사가(歷史家)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가 주목한 바에 따르면, 여성들, 아이들, 가족들의 경우 “탄생, 양육, 이웃 그리고 사랑이 사회적 삶의 시작이다. 과거의 커먼즈는 전적으로 남성들만의 장소가 아니었다. 사실 커먼즈는 매우 종종 여성들과 아이들의 욕구가 우선시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산업 ‘슬럼가들’에서부터 이러쿼이 연맹(the Iroquois confederation), 그리고 아프리카의 마을에 이르기까지 ‘욕구’만이 아니라 의사결정과 책임성도 여성들에게 속했다.”((Peter Linebaugh, “Stop, Thief!” Onthecommons.org, April 14, 2014, http://www.onthecommons.org/magazine/stop-thief.))
커먼즈에서 ‘돌봄 노동’―이를 지리학자 니러 씽(Neera Singh)은 ‘정동 노동’(affective labor)이라고 불렀다―이 주된 위치를 차지한다. 이와 달리 자본주의 시장과 경제는 보통 ‘돌봄 경제’―안정되고 건전하며 보람이 있는 삶에 필수적인 가족의 삶과 사회적 공생의 세계―를 무시한다. 시장경제는 이를 시장 영역의 외부에서 어떻게든 스스로 채워지는 본질적으로 무상의 자원으로 간주한다. 아무런 지위가 없으며 따라서 무시되거나 마음대로 착취될 수 있는 ‘전(前)경제적인’ 혹은 ‘비(非)경제적인’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 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이 희생되는 것은 커머너들, 식민화된 사람들 그리고 자연이 겪는 희생과 주목할 만하게 유사하다. 이들 모두가 자본가들이 의존하는 중요한 비(非)시장 가치를 창출한다. 그런데 시장은 일반적으로 이 가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1980년 유엔 보고서는 상황을 강렬한 간결함으로 이렇게 진술했다. “여성은 세계 성인 인구의 50%를, 공식적 노동력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모든 노동시간의 거의 3분의 2를 담당하지만 세계 소득의 10분의 1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 미만을 소유하고 있다.”
독일 작가인 프라에토리우스(Ina Praetorius)는 최근에 그녀의 글 「돌봄 중심 경제―당연시 되던 것을 새롭게 재발견하기」(“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에서 ‘돌봄 노동’이라는 페미니즘적 테마를 훨씬 더 큰 철학적 화판에 투사하여 새롭게 다루고 있다.((Ina Praetorius, “The Care-Centered Economy: Rediscovering What Has Been Taken for Granted,” Heinrich-Boll-Stiftung 7 (April 2015), https://www.boell.de/en/2015/04/07/carecentered-economy.)) 프라에토리우스는, 새로운 구조적 우선사항들을 상상하여 경제제도들과 행위들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데 ‘돌봄’의 중요성이 사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커먼즈는 시장 외부에 있는 돌봄을 가치창출의 필수적 범주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명백하게 기여할 수 있다.
생태계 파수. 개별 자연자원 커먼즈의 단점들이 무엇이든, 그 참여자들은 그 단점들을 거스르지 말고 그것들을 안고 일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시장과 달리 커머너들은 ‘환경’을 대상이나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고 그들의 삶의 틀을 이루는, 살아있는 역동적인 체계로 본다. 커머너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자연 체계들을 과도하게 착취하게 하는 인센티브를 일반적으로 기업들보다 훨씬 덜 가지고 있으며, 집단적 이익을 위해서 자연의 파수꾼으로 행동할 인센티브를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있다.
숲, 어장, 방목지, 지하수, 야생동물을 중심으로 하는 소규모 자연자원 커먼즈들은 주변적 위치에 있는 나라들의 시골지역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다.((예를 들어 <커먼즈 디지털 도서관>(the Digital Library of the Commons, http://dlc.dlib.indiana.edu/dlc)의 자료들 참조.)) 이 커먼즈들은 또한 ‘선진’ 세계에서 실행되는 에너지 집약적인 산업화된 농업보다 훨씬 더 생태적으로 친화적이다. 그런데 세계 전역에서 20억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커먼즈에 의존하여 일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데도, 주도적인 경제학 교과서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있다. 시장 활동이나 자본축적이 일어나지 않고 단지 가족 용도의 생산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Paul A. Samuelson and William D. Nordhaus, Economics, 17th edition (New York: McGraw-Hill, 2001); Joseph E. Stiglitz and Carl. E. Walsh, Economics, 3rd edition (New York: W. W. Norton, 2002); “Securing the Commons: Securing Property, Securing Livelihoods,” International Land Alliance website, http://www.landcoalition.org/global-initiatives/securing-commons.))
이 커먼즈들에서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화폐 형태의 보상이 아니라 ‘정동 노동’이다. 인도의 지리학자 니러 씽은 이 용어로 커먼즈 기반의 숲 관리를 지칭했다. 여기서 자기와 주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생물리학적(biophysical) 환경과 서로 엮여있다. 사람들은 그들과 그들의 공동체에 중요한 자원의 파수꾼이 되는 것에 긍지와 즐거움을 느낀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에서 정동 노동은 중요하다. 정동 노동은 우리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며 환경과의 연관을 변화시킨다. 씽의 말로 하자면, “정동 노동은 지역 주체성들을 변형시킨다.”((Neera Singh, “The Affective Labor of Growing Forests and the Becoming of Environmental Subjects: Rethinking Environmentality in Odisha, India,” Geoforum 47 (2013): 189–198.)) 이것이 새로운, 생태를 더 배려하는 유형의 경제를 구축하는 기반이다.
정치체와 거버넌스. 어떤 유형의 정치체가 커먼즈들의 드넓은 우주를 관장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이 물음에는 국가의 성격과 역할의 발본적인 변화가 함축되어 있다.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 국가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 극명해지고 그것이 공중의 불신을 낳은 까닭에, 국가는 더 상향적인 커먼즈 기반의 기획들이 번영하도록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힘을 이전할 필요가 있다. 나의 동료인 보웬스(Michel Bauwens)는 커먼즈의 형성과 발전을 도울 ‘파트너 국가’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한 바 있다.((David Bollier Website, “Michael Bauwens: Here’s What a Commons-Based Economy Looks Like,” http://bollier.org/blog/michel-bauwens-heres-what-commons-based-economy-looks)) 커먼즈 친화적인 정치체는 ‘메타경제적인 네트워크들’을 개발하여 여러 행동분야들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테크놀로지, 디자인, 소프트웨어, 제조업 분야의) 열린 지식 네트워크들은 농업 및 생태 지속 가능성을 다루는 사람들과 건설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국가가 열린 네트워크들에 관하여 계몽된 의식을 가지는 문제가 아니다. 국가들은 점점 더 네트워크화된 지성과 정치적 정당성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디지털 네트워크들을 통해 움직이는 커머너들은 자신들의 기여를 존중하고 지원해줄 것을 국가에 요구하게 될 것이다.
대규모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는 단지 추측될 뿐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오픈 네트워크 플랫폼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상향식의 자기조직된 거버넌스가 중요하고 복잡한 대상을 실시간으로 관리하는 많은 사례들을 보았다. 2011년의 아랍의 봄 투쟁과 오큐파이 및 M15운동과 같은 몇몇 사례들은 매우 일시적이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 위키피디아(8만 명 이상의 편집자들) 그리고 라 비아 캄페씨나(La Via Campesina)―농민들을 국제적으로 조직하였다―와 같은 거버넌스 기획들은 더 지속적이다. 종종 새로운 종류의 ‘미시적 행위자들’이 필요한 ‘거시적 제도들’을 탄생시켜서 새로운 종류의 거버넌스를 발전시키는 데 추동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개되는 모습들은 진화 과학에서 이루어진 몇몇 심오한 발견들과 지난 세대에 일어난 복잡계 과학의 부상에 상응한다. 양자 모두 상향식 사회조직 형태들 및 거버넌스 형태들의 실재가 정당함을 확인해준다. 분산되고 자기조직되어 있으며 협동적인 거버넌스 형태가 가장 안정되고 탄력적인 거버넌스 형태들 가운데 속함을 광범한 경험적 연구들이 확인해준다. 이 주제는 웨스턴(Burns H. Weston)과 같이 쓴 나의 책 『녹색 거버넌스』(Green Governance, pp. 112–130)에서 더 상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강조해야 할 기본적인 요점은, 인간의 공동체들이 중앙의 최고 권위나 관료층의 직접적 통제 없이도 상위의 더 복합적인 형태의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거버넌스의 상향식 이론으로서의 ‘창발’(emergence)인 것이다.((Weston Burns and David Bollier, Green Governance: Ecological Survival, Human Rights and the Law of the Commons (Cambridge,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창발은 만일 충분히 정의되고 유리한 일단의 매개변수들과 조건들이 주어진다면 국지적 상황들에 기반을 둔 안정된 형태의 자기조직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반을 둔다. 이는 생물학적·화학적 체계들이 줄곧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촉매적 특징들이 “무상의 질서”(order for free)를 발생시키는 것이다.(([옮긴이] ‘order for free’는 카우프만(Stuart Kaufmann)이 자신의 책 At Home in the Universe: The Search for Laws of Self-Organization and Complexity (Oxford University Press 1995)에서 제시한 아이디어이다. 한국어 번역본에는 ‘저절로 생기는 질서’라고 옮겨져 있다. 한국어본 : 국형태 옮김, 『혼돈의 가장자리』(사이언스북스, 2002).)) 복잡계 과학이 낳은 이러한 통찰은 수많은 자기조직된 커먼즈들에 관한 오스트롬의 발견과 부합한다. 효과적인 거버넌스는 형식적인 국가법에 구현되고 입법자들, 규제자들, 법원들을 통해 관리되는 획일적인 일반 규칙들의 포괄적 그리드를 통해 부과될 필요가 없다. 제대로 된 ‘적응 조건’(fitness conditions)이 존재한다면 거버넌스는 적절한 규모의 능동적 참여 및 동의와 함께 자연적으로 저절로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보충(subsidiarity)의 원칙(([옮긴이] ‘보충의 원칙’(the principle of subsidiarity)은 가톨릭교회에서 발생한 사회조직 원칙이다. OED에 따르면 이 원칙은 “중앙 권위는 보조적 기능만을 해야 하며 더 직접적인 혹은 국지적인 수준에서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는 과제들만을 수행한다”(a central authority should have a subsidiary function, performing only those tasks which cannot be performed effectively at a more immediate or local level). 대한민국 헌법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비록 요즘 목격하다시피 현실에서 지켜지기보다는 헌법 조문에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과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옮긴이] ‘규모를 연결시키는 체계들’(scale-linking systems)이란 모든 것들이 규모의 차이에 관계없이 다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과 연관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 Sim Van der Ryn, Stuart Cowan, Ecological Design, Tenth Anniversary Edition의 한 대목을 옮겨본다. “자연의 과정들은 본래적으로 규모 연결적(scale linking)이다. 에너지와 물질이 규모를 가로질러 흐르는 데 밀접하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청록조류(blue-green algae)에서 배설된 산소는 흰긴수염고래에 의해 흡수되며 다시 이 고래에 의해 배설된 이산화탄소를 참나무가 먹는다. 전체적 사이클들이 유기체들을 극히 효율적인 재생 체계로 연결시키는데, 이 체계는 1억분의 1 미터(광합성의 규모)에서 1만 킬로미터(지구 자체의 규모)까지, 규모가 10배 커지는 도약을 17번을 행한다.”(p. 51)))이 중요하다.
물론 네트워크 기반의 거버넌스 체제와 정치체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의 민족국가 거버넌스의 역기능을 넘어가려면 정치체라는 생각 자체가 진화할 필요가 있다. 비록 기업들이 표면상으로 공익에 복무할 허가장을 국가에게 받아왔지만, 앞으로 커머너들의 테크놀로지 플랫폼들이 국가의 권위를 보완하거나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커먼즈가 더 우세해지고 성숙해져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의 지원과 협조를 필요로 하게 되면 새로운 거버넌스 형태들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구축될 새로운 정치체는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구질서의 관점에서는 불가피하게도 이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론
커먼즈 운동은 커머너들의 살아있는 박동치는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명확한 청사진을 펼치거나 그 미래를 예측하기란 어렵다. 미래의 패러다임은 전진적인 공동창조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미 커먼즈 이념의 확장력과 자기복제력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극히 다양한 집단들에 의해서 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8개의 나라에 있는 프랑스어를 말하는 커머너들이 2015년 10월에 300개 이상의 행사로 구성된 2주 동안의 커먼즈 축제를 주최했다. ‘커먼즈로서의 도시’를 재개념화하고 있는 도시 활동가들도 있다. 공적 공간들과 해안 토지들의 종획에 맞서 싸우는 크로아티아인들도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커먼즈의 ‘지중해 상상계’(Mediterranean imaginary)를 발전시키는 그리스인들도 있고, 민족식물학적이고 바이오문화적 전통들을 방어하는 토착민들도 있으며, ‘플랫폼 협동조합주의’의 새로운 형태들을 고안하기 위해 움직이는 디지털 활동가들도 있다. 커먼즈 언어와 틀이 뜻밖의 새로운 협력작용과 연대 형태들의 발전을 돕고 있는 것이다.
커먼즈는 핵심 원칙들을 가지고 있지만 투과성 경계를 가진 메타담론으로서 정치의 세계, 거버넌스의 세계, 경제의 세계, 문화의 세계에 동시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중요하게도 커먼즈는 또한 근대와 연결된 소외에 대해, 그리고 인간적 관계와 의미에 대한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는 국가도 시장도 현재의 상태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커먼즈 패러다임은 점점 더 합류하고 있는 수백 개의 현재 기능하는 사례들로써 신자유주의 경제학에 대한 깊은 철학적 비판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패러다임은 체제 변화에 대한 행동지향적 접근법인 만큼, 모든 것은 현실적 및 잠재적 커머너들이 지속적인 에너지와 상상으로 전지구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체계를 발전시키는 데 달려있게 될 것이다.
프랑스에 있는 익명의 <비가시 위원회>(Invisible Committee)는 “반란은 역병이나 산불처럼 불씨가 처음 타오른 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선형으로 번지는 과정이 아니다. 반란은 음악의 형태를 띤다. 그 초점들은 시간과 공간상으로 분산되어 있지만 자신의 고유한 떨림의 리듬을 부과하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것이 그 리듬이 많은 공명을 산출하고 있는 커먼즈 운동이 움직이는 거대한 여정을 묘사해준다.
2015년 11월((http://thenextsystem.org/에 발표된 것은 2016년 4월 28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