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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앞서 올린 글(([옮긴이] 현재는 원문의 링크가 깨져있다.))에서 나는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도와 라발의 입장을 요약했다. 이제 나는 공통적인 것―그들의 사유가 그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인도한다―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9개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글을 압축하고 다수의 주요 참고문헌을 생략해야했으나 그들 제안의 골수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명제 1 :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19세기 사회주의적 연합주의, 20세기 노동자평의회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단순히 장인(匠人)의 맥락이나 산업현장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어떤 포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어떤 집단적 이탈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토지와 자본 및 지적 재산권과 연관된 소유권을 재고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 사회변형을 위한 법적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자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사회의 공통적 생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자치제도의 역할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상이한 사회경제적 영역들, 공적 또는 사적인 영역들, 혹은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구분이 철폐될 것이라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공적 숙의가 어떤 하나의 사회적·전문적 범주에 속하는 이해집단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으려면, 생산 교환의 영역이 커먼즈의 자치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직돼야 한다. 또한 각각의 커먼즈는 그 활동의 모든 ‘외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커먼즈의 거버넌스가 그 활동과 관련을 가지는 사용자들, 시민들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영역은 공통의 의사결정 능력을 단련하는 학교가 된다.

명제 2 : 소유권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권을 가동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절합은 로마법에서 연원하는 도미니움(배타적인 사적 소유)과 임페리움(주권의 포괄적 권력)의 이중원리로 구성되어왔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이러한 이중적 절대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전통적 재산권은 재산에 대한 완전히 자유로운 사용을 소유자들에게 허락하며 그리하여 소유자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용자는 공통적 사용을 관장하는 규칙을 공동생산하는 식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물질적 사물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 소유모델에서 벗어나 점점 더―재화의 판매가 아닌―써비스의 제공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써비스 사용자들은 점점 더 자산 대신 접근권을 구매하는데, 접근권은 새로운 공동사용 모델을, 권리유형의 다각화(사용권, 임대수익권, 상이한 권리들에 대한 구매권과 판매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로 향해가고 있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계속 사용하는 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를 계속해서 소유하며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사용권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는 상위기관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허한 권리이다. 진정으로 공통적이려면 사용에 대한 결정이 집단적 심의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래서 가령 한 뙈기의 땅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단순히 공유된 사물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공동활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함하기 위하여 재산권을 확장한 형태의 소유권을 개발하는 대신, 소유권에 반하여 가동될 수 있는 사용권이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리는 국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공동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위임될 수 있다.

명제 3 : 공통적인 것이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일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 언제나 일을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때로는 미학적 차원을 가지는, 공유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은 공동체나 동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가 노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단순히 소외나 자발적 굴종, 경제적 제약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일이 개인들이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사회화하는, 타인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활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모아놓음으로써 진정으로 협력적인 현장의 자연발생적 출현을 어떤 식으로든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강제된 협력을 실행한다. 노동자를 단순직공으로 축소시키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적극적 동원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등한시된 현장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우리 활동의 핵심에 다시 놓여야한다. 노동자의 과업의 질을 ‘고양하거나’ 현장의 조건에 대해 이따금씩 ‘조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칙과 결정을 다듬어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협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기업은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민주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

명제 4: 공통의 기업을 수립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노동의 해방은 기업이 경영독재, 주주독재가 지배하는 섬이기를 그치고 민주적 사회의 기관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마크 샹니예(Marc Sagnier)의 유명한 말처럼, “기업에 군주제가 존재하는 한 사회에 공화국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현장민주주의도 자본주의가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로 보는 것을 통제하는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통제가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국가통제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고꾸라뜨린 장애물이다. 소위 사회적 혹은 집단적 소유는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비효율적인 경영형태 말고는 실행할 수 없는 국가소유로 환원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경영자를 선택하고 회사가 취할 방향을 투표에 부치며―회사의 자본이 그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회사의 자본을 그들의 결정에 종속시키는 흥미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대안적 모델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음에도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영기업 사이에 줄곧 갇혀있던 사소한 대안이었다. 어떻든 현장에 공통적인 것을 자율의 섬으로서 제도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적인 것 안에 경제를 재통합하고 민주적인 현장거버넌스 내에 관점의 복수성(노동자, 소비자)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개별적 소비자의 결정의 자유를―특히 지역 수준에서의―집단적 결정의 틀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이로써 오늘날처럼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명제 5 : 경제영역 내의 연대가 공통적인 것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제3부문 또는 비수익경제가 때로 대안 경제로 혹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3부문은 그것을 정의하는 용어와 실제 모두 나라마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는 제도를 보통 포함한다. 제3부문은 특정 직업이나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지원을 제공하는 조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선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다양한 집합체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특히 이 집합체의 활동이 자본주의기업과 국가기관 양자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조합부문은 대안경제를 촉진하기는커녕,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저비용 하도급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고용주는 이 수가 정체 혹은 감소되어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총익의 정의를 국가가 독점하고 가치의 정의를 시장이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촌락·마을·이웃 수준에서의 새로운 연대를 포함하는,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설교한, 일종의 지역에 기반을 둔 공생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그 자체만으로 창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명제6 : 공통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옮긴이] 사회민주주의 :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그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를 수립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정치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재건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이제 국가가 다른 무엇보다 더 복지의 범위를 줄이고 복지를 경쟁력이라는 제약 아래 두려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사회(복지)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인 공통적인 것을 부정한다. 기업 안에서의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노동조직 형태의 가장 가혹한 규범에 복종하는 대가로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재분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호혜와 연대의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다.

명제 7 : 공공써비스가 공통적인 것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19세기 조합사회주의와 20세기 노동자평의회는 사회주의가 취해야하는 제도형태가 국가관료에 의한 경제경영과는 달라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공공써비스의 미래 규모를 예측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공공써비스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배에 복무하는 ‘국가장치’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에 완전히 복무하는 제도로 보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공공써비스를 공통적 사용권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더 이상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행정체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집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써비스 행정은 국가의, 노동자의 그리고 시민사용자의 대표가 포함된 기관에 위임돼야 한다. 써비스는 지역적으로 시행되어야 하지만 국가는 헌법이나 기타 기본법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결책은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도 지역주의·지방주의의 반동적 활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명제 8 : 전지구적 커먼즈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다양한 형태·크기를 가지는 ‘커먼즈’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보존한다는 조건하에서 공통적인 것을 지역 커먼즈부터 전지구적 커먼즈로 이어지는 전체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각의 커먼즈가 없으면 의미 있는 공통의무가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으로 공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커먼즈의 자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커먼즈들의 연계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유형의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몇몇 해결책은 ‘반인도적 범죄’나 ‘세계유산’이 ‘인류’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보고, 인권을 새로운 세계의 법적 질서의 기초로 긍정하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가 무력을 계속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체계의 발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협력의 원리나 사회정의의 원리가 아닌 경쟁, 약탈적 전략, 호전적 논리의 규범에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관행이 어떻게 세법·상법·고용법 영역에서 ‘법률쇼핑’(가장 유리한 조건을 위한 쇼핑)을 낳았는지를 주목한다. 이 관행은 법 자체를 자본주의적 경쟁의 영역이자 상업의 대상으로 만든다. 건강에 관한, 문화에 관한, 물에의 접근에 관한, 오염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강요된 논리는 자유교환의 논리이며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논리이다. 자본에 의하여 그리고 자본을 위하여 만들어진, 지구화되었으며 지구화를 행하고 있는 전체 법률장치가 ‘지구자본’(cosmocapital) 제도를 생산하고자 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국제법의 본격적인 사유화이다.

또 다른 담론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촉진하고자 고전경제학적 수단을 사용하려한다. 1990년대 초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마부브 울 하크(Mahbub ul Haq),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같은 인물에 영향받은 UN은 기대수명, 문해력 같은 기준이 포함되도록 발전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장했다. ‘좋은 전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od governance)’라는 생각이 등장하여 ‘전지구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의 생산과 연결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UN개발프로그램(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 경제학자들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분류했다. 전지구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과다사용된) 재화(오존증·기후), 인간이 만든 (과소사용된) 전지구적 공공재(과학지식·인터넷), 통합된 전지구적 정책이 낳은 재화(평화·건강·안정성). 이러한 재화의 정의가 가지는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의가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재화의 생산을 보장하는가이다. 전지구적 국가가 보장하는 것일까?

UNDP가 제시하는 한 가지 대답은 전지구적 CO2 배출거래 사례처럼 필요할 경우 시장메커니즘, 소유권 강화를 통해 사적 행위자들이 저 재화에 책임지도록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결과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모든 실질적 도전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자본주의는 사실 정부·자선단체·NGO가 자본주의에 처분을 맡기는 모든 ‘외부성’에서 이윤을 끌어내야 한다.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 정치적 안정, 도시기반시설, ‘잘 기능하는’ 대학체계, 심지어 저임금노동자를 위한 자선지원, 범죄자를 위한 감옥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지구적 공공재를 방어하라는 요구가 반드시 물화된 공통재 경제영역으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공통재에 대한 장악을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진보적 정치투쟁은 공통재를 기본권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재화만이 아닌 써비스와 제도에 대한 접근을 공통재에 포함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탈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해온 상황에서 지구화 반대론자 같은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시민에 기반을 둔 복지권이었던 것을 보편적 인권으로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옛 복지국가의 보편주의적 폭넓음을 전지구적 커먼즈의 문제틀에 접목하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허나 심히 인위적이라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움직임은 낡은 서구사회 모델을 발본적으로 변화한 맥락에 이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하는 현존국가들이 전지구적 커먼즈에 힘을 보탠다거나 공통재를 배분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 시민권은 쟁취할 가치가 있다. 시민권은 근대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핵심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만 들먹이는 사회적 시민, 써비스 소비자여서는 안 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시민으로서나 능동적인 시민, 공통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공동생산하게 해주는 제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시민이어야 한다.

어떤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가 질서 잡힌 다원주의의 그것일 것 같지는 않다. 미래는 알랭 수피오(Alain Supiot)가 거론한 일종의 재봉건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줄어들고 억압적 기능이 커지며 국민국가가 지역국가로 분열될지 모르는, 다면적 분열의 논리를 따라 지역권력과 초국가권력이 증식하는 재봉건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낡은 베스트팔렌 국민국가 체계가 어디서나 성장할 위험이 있는 광범위한 반동적·민족주의적·외국인혐오적 운동에 삼켜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중앙집권적인 국가조직 방식과 이와 연관된 종속화의 형태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일 것이다. 그 다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조직이 전지구적 커먼즈의 공동 생산에 제도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명제 9 : 커먼즈들의 연합(a federation of commons)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일한 정치적 원리는 연합원리이다. 연합은 하나의 꼬뮌이나 몇몇 꼬뮌 혹은 꼬뮌집단이 하나의 목적이나 몇몇 목적을 위해 상호 책임지는 관계를 맺는 계약이나 협약 혹은 협정이다. 그 본질적 특징은 국가가 행사하는 종류의 주권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어떤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일체의 종속을 배제하는 상호 책임이다. 

여러 상이한 연합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떤 특정 모델이 사회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유되는 사용 관행에 적합한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맑스주의 전통보다는 프루동 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제공한다. 맑스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프루동은 이중적인 연합모델―한편으로는 생산단위의 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꼬뮌 단위의 연합―을 설파했다.(([옮긴이] 생산단위는 헌재로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속하는 것이고 꼬뮌은 지역공동체 혹은 커먼즈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델은 꼬뮌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장의 산업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루동이 보기에 이 두 유형의 공통적인 것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유된 원리는 계약조항들에 간직된 상호성과 상호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상호성의 이러한 확장은 법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프루동의 기획과 조화를 이루더라도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정치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함축했다. 더 적합한 통합원리는 사회경제적 영역과 공적·정치적 영역의 거버넌스에 공히 적합한 정치원리인 공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여러 커먼즈들의 연계와 관련해서는, 심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피라미드적 위계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나 초국가기관도 그저 다른 기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특권이나 우선권이 없을 것이다. 

더 낮은 수준은 공유된 활동에 기초를 두고서 수평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높은 수준을 통해 작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커먼즈(생산·소비·종자은행 등)는 어떤 영토논리와도 무관하게 구성될 것이며, 그 구성목적에 해당하는 활동을 책임져야할 필요에 따라서만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컨대 강 커먼즈(a river common)는 몇몇 지역경계나 심지어는 국가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치적 커먼즈는 전지구적 수준까지 규모가 확장되는 영토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승논리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에 대한 이러한 제안에 조응할 수 있는 시민권의 유형은 무엇일까? 국민국가 모델을 따라 사고된 어떤 ‘전지구적 시민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복수적(複數的)이고 탈중심화된 시민권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시민권이 영토적 범위가 더 확대될수록 그 정치적 밀도를 더 소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일종의 공허한 세계시민주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일치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 ‘상업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시민권을 개발해야 한다. 비국가적·초국가적 시민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모든 소속관계로부터, 소속에 들러붙은 권리로부터 분리된 시민권은 형식적 권리의 승인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하여, 공유된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로 현장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단의 유사한 제안은 여기(([옮긴이] 현재는 원문 링크의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를 참조하라.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다도와 라발의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하라.




인간의 연대와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

 



코비드19 팬데믹은 인간의 조건의 가장 근본적 특징을 상기시킨다. 국경을 가로질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를 말이다. 맹한 민족주의와 경쟁논리가 서둘러 막으려 하는 이 상기는 진정한 전지구적 정치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커먼즈”라 부를 정치기구를 말이다.

팬데믹의 교훈은 일어나리라 예견되는 지구 온난화와 일련의 재앙을 비롯한 인류가 대면할 다른 주요 문제들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전지구적 바이러스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우리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결코 우리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대면하도록 무장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을 정치적으로 재고하는 일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다.

바이러스로 입증된 인간적 연대

바이러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연대의 증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설명을 제공한다. 경제적 교류,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도시화, 국경을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함께 사회들의 점증하는 상호침투가 전염병의 확산을 상당히 가속시켰다. 전염병의 확산은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재정이 부족한 보건 기구들만을 앞질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앞질렀다.

전염현상은 19세기 말 사회학자와 철학자가 ‘연대’라 부른 것을 가시화한다. 뒤르켐은 1893년 학위논문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개인들의 상호엮임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자, 사회들을 특징짓는 연대유형에 따라 사회들을 구분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학이었다고 말해지는 ‘연대주의’론이 연대를 정부의 사회정책을 고무해야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연대주의 사조의 주요 창시자인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1851~1955)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서 민중은 마치 모든 존재, 모든 물체가 전(全)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놓여 있듯,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서로 놓여 있다. 연대의 법칙(the law of solidarity)은 보편적이다.” 이처럼 연대는 삶·건강·일·사유·느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다윈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맞서 프랑스 연대주의자들은 인류의 협동에 대한 다윈의 저술에 특히 의존하여 연대의 법칙을 응집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공중보건론자들은 연대 개념을 차용하여 그것을 공중보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내무부의 공공지원·위생국장 앙리 모노(Henri Monod, 1843-1911)는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부유한 도시와 가난한 도시 사이의 재정적 연대를 장려하는 연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중보건은 우리의 상호의존, 인간의 연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일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각자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인간 존재들의 건강·삶에 예기치 않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존재들 혹은 사라진 지 오래된 존재들이 우리 건강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에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본질적 조건들에 매 순간 영향을 미칩니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시민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보건연대는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공중보건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모노의 명쾌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언젠가 유럽에서 희생자들을 낳을, 위생에 반하는 어떤 잘못이 이 글을 쓸 때 갠지스 강둑이나 인도의 항구 중 하나에서 저질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때 또 다른 활동이, 이번에는 현재의 재앙으로부터 수천, 수백만을 구할, 과학으로 분류될 행동이 어떤 멀리 떨어진 해외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 인류가 위생의 정복으로 이익을 볼 수 있듯이 위생 관련 범죄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보건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보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전염이 입증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바로 전염병 전문가 찰스 니콜(Charles Nicolle, 1866~1936)에게서 본다. 니콜은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염병에 관한 지식은 인간들이 연대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똑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인 것이며, 감염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동료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해 말하면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이 같이 하는 노력을 통해 단결한다면 얼마나 생산적 결과가 생길까요!”

과학계에서 이러한 인식이 커지는 것과 함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제회의가 페스트·콜레라―콜레라는 1830년에서 1847년 사이 대혼란을 낳았다―와의 싸움 중 1851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19세기 말부터 쭉 모노는 이러한 ‘고전적’ 전염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다루는 국제기구를 옹호했다. 바로 그러한 국제기구로서 <국제공공위생사무소>(the Office International d’ Hygiène Publique)가 1907년 로마에 설립됐다.

공중보건의 국제화는 1921년 <국제연맹보건위원회>(the Health Committee of 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운영이 시작된 1948년 이전인) 1946년 결성이 결정된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다.

국민국가의 봉쇄

연대 개념의 발전 및 공중보건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대응은 여러 면에서 재앙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긴축과 수익성이 인도한 수십 년간의 보건정책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무장해제됐는지가 드러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보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국민국가 논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국가는 전지구적 보건위기가 제기한 문제에 각각이 마치 섬나라인 양 대응했다. 각 국가가 다른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자기 식대로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금세 목격한 것은 국경 봉쇄, 준수해야 하는 엄격히 국가적으로 정의된 각각의 전략들, (때로는 타국에 해가 되는) 자원동원과 자원징발,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취해진 조치들에 대한 이따금씩 일어나는 폄하나 비난이었다.

보건전선에서 ‘다자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보여준 이 일반적인 정치적 불협화음과 함께 우리는 국가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최대의 과학적·행정적 혼란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각 국의 의약담당 부처들(the national drug agencies)은 방법론의 조정 없이 각 나라, 각 연구실, 각 산업이 다른 나라, 다른 연구실, 다른 산업을 앞서려 하면서 각자 그들만의 게임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연대운동의 위대한 교훈이 어떻게 그리 빨리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오래 완전히 부인할 정도로 우리 정부들이 빠져있던 경련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 중 두 가지 즉 국가적 수준의 요인 하나와 전지구적 수준의 요인 하나에 집중하기로 하자.

시민적 책임, 자기이익 그리고 국가강제

전염병 학자들에 따르면, 코비드19 같은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모든 인간 간 전염사슬을 끊는 것, 즉 각 개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들이 그저 자신들만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호적 관계에서 각 개인들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상호적 보호를 의미한다.

‘공중보건’(public health)을 말할 때 우리가 너무도 자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표현에서 ‘공’(public)이 ‘국가’(the state)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의 전(全) 시민들이 구성하는 전체적 집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부들은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대항하는 싸움에서의 주요자산이 시민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대체로 포착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공리주의적 독단, 신자유주의적 규범, 개인주의적 요구로 심히 오도돼온 정부담론 사회적 연대가 전염병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느낌과 인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 정부들에게는 가장 부적실한 단어들만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명백한 자기이익에 대해 말하는, 혹은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 각자가 지는 개별적 책임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 말이다. 정부들은 사회가 고립된 원자들의 뒤섞임인듯, 각인들이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것인듯 행동했다. 거리를 둬야하고,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씻어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정부들이 집단적 운명에서의 우리 각자의 공동책임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장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정부들이 경쟁·대결·이해대립 말고는 개인들 사이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국가들은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 접근법으로 대응했고 세계보건기구는 국가들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력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네바에 있는 <국제개발대학원>의 <글로벌보건센터>(the Global Health Centre at the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and Development Studies) 공동센터장인 전염병 전문가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국가주의적 주권의 원리가 세계적 문제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험을 완벽하게 예견하지 못했다고 세계보건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와 연계되어 있고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 특히 더 책임을 지는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the Global Preparedness Monitoring Board)는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몇 달 전 세계에 경고했다. “만약 ‘지나간 것이 서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5천만에서 8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경제의 거의 5%를 일소할, 빠르게 움직이며 대단히 치명적인 호흡기 병원균 팬데믹이라는 너무도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이런 규모의 전지구적 팬데믹은 광범위한 대혼란과 불안정, 불안전을 초래할 재앙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2019년 9월 배포했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를 위하여

이 위기의 결과가 ‘국민국가의 귀환’, ‘국가주권의 부활’이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오해들 중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건을 전지구적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통적인 것은 집단적 결정이 “공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만들기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승인에 입각하여, 공동체가 자원이나 써비스 혹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백신은, 건강에 대한 전 인류의 기본권과 백신 사이의 정치적으로 수립된 연관에 입각해 있는 ‘공통재’다.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 커먼즈를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 백신이 공통재라는 결정이 채택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창출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이외에 전지구적 보건을 위한 다른 유형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는 국가기금과 민간 기금에 이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는 협력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심의와 결정이 구속력 있는 세계적 기준을 구성할 세계보건기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간’ 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cal) 기관은 모든 국가·지방·지역의 비영리보건기관을 연합하고 모든 나라의 연구원을 동원할 것이다. 이 기관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에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정보·통지·협력의 임무를 맡지만, 세계보건기구와 달리 보건에 대한 인구의 기본권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을 일국의 수준에서 그리고 국지적 수준에서 동원할 권위를 가질 것이다.

지구화의 이러한 결과가 제기하는 물음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겨 놓을 위험과 대면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새로운 제도를 미래 인류가 수립할 수 있을까이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가 그 일환이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

 



만약 이 글이 소나타라면 그것의 단조(短調)가 보여주는 것은, 모티프의 분리와 고립은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모티프의 분리 연결은 아름다운 한편의 음악을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내내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모든 얘기가 이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용어가 애매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 사회적 친밀 둘 다이다. 거리 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친밀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즉 우리를 지탱하는 많은 관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중요한 활동과정도 이를 떠맡아야 하는 사람도 못 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분리·고립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놓쳐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 세계의 사회적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 때문에, 관계를 통해, 특히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나와 당신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당신 없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가 실상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 펼쳐나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는 서로 함께,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로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어떤 무엇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주변의 생물계·무생물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발달의 측면에서도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시장/국가 구도

구별은 중요하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시장과 국가를 서로 대립시키는 만연한 사유 패러다임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가 서로 다투고 기껏해야 서로 ‘균형’을 찾으려는 분리된 두 개의 실체라고 우리는 가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씨스템에 따라, 경제모델에 따라 혹은 당면 상황에 따라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국가’는 하강하거나 그 반대거나 하는 식으로 둘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지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갑자기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이 됐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이자 전 <유엔무역개발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수석 경제학자 하이너 플래스벡(Heiner Flassbeck)이 말했듯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회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Heiner Flassbeck, Vollbremsung: die Wirtschaft in den Zeiten des Coronavirus, 2020년 3월 15일.))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정치경제적 조치 이후에는 실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조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력, 정당성을 갖춘 기관이 시장과 국가 두 개뿐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2020년 봄 독일정부는 어떤 면에서는 시소의 높은 쪽 끝에 ‘시장’을 남겨둔 셈인데 높은 쪽 끝에서는 낮은 쪽 끝에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이렇게 높이 치솟은 취약함에 곧장 조바심내게 된다. 이는 단명했음에도 국가의 지지·보호가 없는 경제를 신뢰하는 데 관한, 광범위한 걱정을 낳았다. 봉쇄 이후 채 일주도 안 된 2020년 3월 24일 연방 경제장관 페테르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는 독일경제를 살리기 위한 15억 유로 상당의 전례 없는 구호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가 설명하길 이 일이 이토록 빨리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내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 시간이 본질적이”기 때문이었다.((Tagesschau, 2020년 3월 24일.)) 내 고향에 있는 한 상점주는 책임을 지는 모든 회사는 수중에 적어도 두 달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재정 문제는 위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초한 것일 수 있다는 이견을 제기했다.

알트마이어가 서두른 한 가지 이유는 시장과 국가의 친밀한 관계와 분명 관련돼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있든 없든 이 점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우리의 정치씨스템·국가권력은 시장경제의 운명에 깊이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지배하에 있다. 정치적·경제적 토론이 시장 혹은 국가 중 한편을 선호하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을 ―어떤 이들은 더 큰 시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국가를 추구하듯― 짜더라도 진실은 우리가 시장국가 구도와 상대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에 의존할 뿐 아니라 시장도 국가의 법률씨스템, 시장규제, 보조금 그리고 그 밖의 지원 없이 기능할 수 없었다.((지면 관계상 이 추상적 개념을 추가적 설명 없이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팬데믹은 정치적·경제적 씨스템 양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과 국가의 영역 바깥을 생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를 한데 뭉뚱그리면 안 된다. 양자가 똑같지는 않으며 동일한 논리를 언제나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제도가 기업들 사이의 경쟁, 이윤 극대화의 원리를 무시할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듯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국가와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양자가 정말로 분리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국가와 시장의 실존적 상호의존이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독일이 2020년 4월 중순 최초의 조심스러운 규제 완화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외 ―자동차 영업소 개점― 를 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산업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자동차 산업 로비스트들의 정치적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계산된 조치였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국가의 틀 안에 갇혀서 탈자본주적 질서를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성장을 추동하지 않는 비시장적 해결책을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광범위한 개념적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해결책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시장-국가는 이 상호의존을 잠식할 팬데믹과 그 경제적 충격에 대한 비시장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국민국가적 조치의 기본 유형은 시장 이데올로기와 시장 기반 정책에 장악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자발적 상호원조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에도 불구하고 시장-국가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일자리와 성장에 의존하는 시장-국가 씨스템의 수호자인 정치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삽시간에 보여줬다. 정치인들은 직업 창출, 성장 재점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실은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적 셧다운은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를 제기한다. 팬데믹은 자연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의존해 있음에도 총액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은 없으나― 돈이 덜 필요하며 가스를 덜 사용하고 비행기를 덜 타며 덜 쇼핑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고 극복돼야 하는 재앙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점, 비행기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점, 평소처럼 많이 쇼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는) 현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구입하는 인센티브조차 다시 한 번 더 고려되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를 그리하여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기획되고 있다. 셧다운 상황에서는 “내게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물음은 경제가 우리의 필요를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실제적 필요에 관한 그러한 성찰은 그야말로 “씨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독일 녹색당조차 모든 이를 위한 250유로 쇼핑 쿠폰을 요구했다. 주간지 『차이트』(Zeit)의 3인의 작가로 구성된 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증가한 가치에 의존하는 모든 것 즉 임금·재정수입·사회보장혜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Elisabeth Raether, Mark Schieritz and Bernd Ulrich, Konsum: Brauch ich das?, in Zeit online, 2020년 5월 1일.)) 5월 중순 독일대중이 처음 접한 예측은 2020년에 거의 1,000억 유로의 재정수입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잠시라도 돌봉노동자가 멈춰서 쉴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돌봄은 모든 경제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점에서만 “씨스템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돌봄노동은 어떤 형태의 시장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이는 최근의 결함은 아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올 것이 확실하고 이산화탄소 배출감소가 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설계결함은 보다 더 분명해졌고 불길해졌다. 끊임없는 소비와 성장이라는 이러한 설계결함은 이러한 틀 밖에서,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넘어서, 그리고 제국적 삶의 방식을 넘어서 사고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Cf. Brand, Ulrich und Markus Wissen (2017) Imperiale Lebensweise. Zur Ausbeutung von Mensch und Natur in Zeiten des globalen Kapitalismus. Munich: Oekom.))

바로 여기가 커먼즈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인류사의 많은 부분이 확인시켜주듯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업적 이익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방식, 스스로 조직한 방식, 필요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서로 함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커먼즈는 많은 목적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우리는 이를 확인할 것이다― 세수(稅收)의 유망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것이 커먼즈가 시장-국가 씨스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다.

팬데믹 시대 커머닝

커먼즈를 순수한 이타주의, 이웃의 산발적 도움, 무조건적 베풂으로 환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뒤섞는 이들은 이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변형하는 힘을 간과한다. 커먼즈를 주로 혹은 전적으로 역사적 유물이나 법적 주체 또는 ‘자원관리’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커먼즈 개념이 우리의 현재 위기를 그리고 시장-국가 사고의 설계결함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 것으로 흔히 인용된다. 그의 논점은 커먼즈는 명사 ―사물 또는 자원― 이기보다는 동사 ―커머닝의 활동―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시장-국가에서 함께함을, 즉 보통 만연한 것들과는 다른 행동패턴을 창출하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 전역에서 그러한 실천들은 (특히 위기의 시기에) 삶과 생존의 중요한 부분이다. 커먼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개념보다 분명 더 오래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은 언론보도로 다뤄지지 않으며 다뤄질 때에는 자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정신의 표현 혹은 가십거리로 다뤄진다. 매우 다양한 상호부조가 시장국가의 뿌리 깊은 한계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의 씨앗 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조직화의 힘과 창조성을 무시한 채 커먼즈와 그 주역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일종의 정신적 구속 안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이 동학은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 없는, 인구밀도가 높은 700만 명의 물리적 공간인 홍콩에서 팬데믹 초기에 분명히 작용했다. 정부의 무조치를 염려한 이들이 감염 통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홍콩에서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동안 새로운 감염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2020년 6월 8일 확인된 사례는 (상당수가 유학을 마침 다음 홍콩으로 되돌아가야했던) 총 1107명 중 회복 1048명, 사망 4명, 입원 55명이었다.)) 조건이 좋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플랫폼이 캐리 램(Carrie Lam) 정부에 대한 항의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2019년에 구축되어 있었고 2002-2003년의 사스 발생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감염 자체가 확산될 조건도 좋았다. 높은 인구밀도, 우한으로 운행하는 고속열차와 매일 수차례 운항하는 직항편, 2020년 1월에만 중국 본토에서 250만 명 이상이 홍콩으로 입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던 것이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시장-국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브라질에서도 타당한 접근법임이 입증되었다. 우익 극단주의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정부는 다가오는 건강위기를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최소화했으며 이를 “그저 미미한 독감”이라고 칭했다. 보호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의사가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favelas)(([옮긴이] 파벨라(favela)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무시해왔던 브라질의 저임금 거주지다.)) 중 하나에 있는 파드레 미구엘(Padre Miguel) 삼바학교에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학교 재봉틀은 카니발 의상 대신 보호복을 만들면서 돌아갔다.

학교 폐쇄에 직면한 미국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홈스쿨링과 보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에 대한 그들의 전문지식을 모으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https://schoolclosures.org, 2020년 5월 15일 접속.)) 또한 과학공동체 <크라우드파이트코비드10>(CrowdfightCovid10)의 전지구적 기획이 코비드19와의 싸움에 사용할 지식·도구를 곧 공유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일까? 필요하고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시장 기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은 나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정상적인 일로 보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실천은 모든 문화·시대에 걸쳐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탈리아에 설립된 협동조합 <바리카마>(Barikama)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동안 로마 사람들에게 꾸준히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는 선구적 작업을 인정받았다.((https://elpais.com/elpais/2020/05/03/planeta_futuro/1588493778_756377.html, 2020년 5월 17일 접속.)) 바리카마라는 단어는 밤바라어(([옮긴이] 밤바라어(Bambara language)는 약 1,500만 명이 제1언어(약 500만) 혹은 제2언어(약 1,000만)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말리 인구의 대략 80%가 사용하고 있다.))에서 유래하며 ‘힘’ 또는 ‘저항’을 의미한다. 이 협동조합은 이주 일용직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과일야채농업의 악화된 조건에서 해방시켰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에 따라서 야채와 요구르트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마스크스포올>(Masks4All)의 접근법은 시장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이라는 거짓된 지혜를 따랐었다. 2020년 3월 다수가 체코 출신이었던 과학자·연구원·기업가들((https://masks4all.org/founders, 2020년 5월 17일 접속.))이 마스크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근본적이라는 점을 대중과 정치세계에 납득시키려는 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더 높은 가격은 더 적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시장 기반 논리가 마스크의 불안정한 공급을 낳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실제 생산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지리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지고 있었다. 보호의류에 대한 의료부문과 일반대중의 요구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일부 마스크 생산자들은 즉각적 이익을 봤다.((Report by Lena Kampf, Markus Grill, Arnd Henze, Georg Wellmann, Florian Flade and Christian Baars, Tagesschau, 2020329.)) 메트만복음주의병원(the Mettman Evangelical Hospital)은 독일에 있는 병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 몇 주 만에 수술용 마스크 가격은 1667%, FFP2 마스크는 2500%, FFP3는 3043%, 보호복은 638% 급등했다.

대중에게 일상용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부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스크포올>은 재봉틀이 있든 없든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온라인에 게시했다.((https://masks4all.co/how-to-make-a-homemade-mask/, 2020년 6월 7일 접속.))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한 논점을 제시한 메릴랜드 주 공화당 주지사 래리 호건(Larry Hogan)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이는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병을 퍼뜨리는 것은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마스크포올>의 모토 즉 ‘내 마스크는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한다’가 훨씬 더 적절하다. 아마도 이것이 위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측면 즉 마스크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상호의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달려 있다. 당신이 얼마나 조심하느냐에 나의 안전이 달려 있다. 개인의 건강이 모두의 건강과 주의에 달려 있다.

비슷한 교훈이 삶 일반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관계로부터, 관계를 통해서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는 경제의 기본 이념일 뿐만 아니라 커머닝의 기본 가정이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존재한다” ―이것 없이 커머닝은 이해될 수 없다― 라는 이 기본적 생각은 근래 공통적으로 공유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스크는 착용하는 사람을 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가 감염되었지만 무증상일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립된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적 시각을 잃은 것이다. 문화비평가 게오르크 제에즐렌(Georg Seesslen)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런 경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에 매우 가깝다”((Georg Seeßlen, Freiheit in Zeiten von Covid_19))고 말한다.

지식은 강력하며 자유로운 지식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례들은 몇 가지 모티프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상품화된 지식보다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아낌없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한 최선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커머너들은 의자나 자전거를 다루듯 지식을 다룬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물론 의자나 자전거도 공유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교대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의자를 ‘공유’한다면 개인이 그것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 차이는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데 이는 공유를 통해 배가될 수 있는 것과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반복되는 커먼즈의 동기 중 하나는 공통재로서의 지식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의 공유, 사용권의 고안이다. 무료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위키피디아에 적용되어 잘 알려진 이 접근법은 이러한 공유지식체계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고 확장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도 시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the University of Sussex)이 조직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제 연구팀에 따르면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세계 전역 의료씨스템의 코비드19 팬데믹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줄 수 있다.((Leveraging open hardware to alleviate the burden of COVID-19 on global health systems)) 다른 장비들 중에서도 현미경과 인공호흡기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3D 프린터와 결합하면 세계 전역의 의료써비스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신 협업생산이 오늘날의 대세라고 연구팀의 일원인 신경학교수 톰 바덴(Tom Baden)은 말한다.((https://www.pressetext.com/news/20200429007?, 2020년 5월 22일 접속.))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외에도 대량생산보다 “경비가 훨씬 낮고” “지역자원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데서 오는” 혜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보호장비를 위한 오픈소스 청사진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해결책 중 어떤 것이 공식적 기능성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오픈소스 하드웨어 디자인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때문에 바덴은 정부가 시험·승인 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이 꽤나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약과 백신의 생산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방식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이와 관련하여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보통 다소 심한 제약 하에 운영되는 많은 과학 출판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연구결과를 무료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미래의 백신을 누가 소유할지에 대한 논의도 급속히 이뤄졌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은 아이디어·지식·연구결과가 상품화되는 대신 공공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코비드19 백신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5년 조나스 솔크(Jonas Salk)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기자들은 그에게 누가 특허를 소유하는지 물었다. 솔크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말로 답했다. “글쎄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 있나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 솔크 박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윤 극대화를 염두에 둔 채 생명을 구하는 백신이 생산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50년대 말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책임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위임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간, 이와는 상이한 생각이 우세했다. 국민국가는 제약회사들에게 특허의 범위와 기간을 넓혀주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 제약회사들 각각의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복제약(([옮긴이] 복제약(generic drug)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약과 동일한 화학 성분을 가진 약으로서 특허 만료 이후 판매가 허가된다. 복제약은 특정 제약회사와 연관성을 가지지만 보통 약이 배포되는 국가의 정부에 의해 관리된다.)) 생산에서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코비드19에 대응하여 이제 다른 곡조가 연주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글로벌 대응 재원 약정 회의>(the Coronavirus Global Response Pledging Conference)((https://ec.europa.eu/international-partnerships/events/coronavirus-global-reponse-pledging-conference_en, 2020년 5월 5일 접속.))에서 EU의회 의장 우슐라 폰 데어 레옌(Ursula von der Leyen)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상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전 세계를 위해 전 세계가” 생산해야 하는 “유일한 전 지구적 공공재”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eu-initiative-fuer-impfstoff-nur-die-globale-antwort-wirkt-gegen-das-virus-16750330.html, 2020년 5월 5일 접속.)) 제약업계는 이 접근법을 즉시 거부하면서 “기업은 자신의 개발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Pharmaindustrie will Corona-Impfstoff nicht als öffentliches Gut freigeben)) 이들의 입장은 수십 년 간 들어와서 익숙해진 모든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분명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반면 협력과 연대에 기반한 약물 연구개발 과정과 혁신적 소유권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공적 의식에 기반한 혁신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하에서 논의될 <방치된 질병을 위한 의약품 이니셔티브>(the Drugs for Neglected Diseases Initiative, DNDI)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이는 두 번째 모티프와 연관된다.

국가에 기대기보다 자기조직화를 장려하기

회의론자들은 누가 “공통재 혹은 공공재”((이 두 용어의 차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Silke Helfrich, Gemeingüter sind nicht, sie werden gemacht.))로 백신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그 가용성을 보장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국민국가가 공적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하며 유일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응당 국가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공적인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용어는 국가적 의무의 범위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국가권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시돼야하는 통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에서 “공적인 것과 국가”의 직접적 연관은 시장과 국가가 실로 상이하나 별개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잔혹한 국가주의가 미국 의료분야((Geberkonferenz für Impfstoff, Zeichen gegen ‘brutalen Nationalismus’))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EU 정치인이 표현한 우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데 덜 잔혹한 국가주권 개념이 이미 난점이기 때문이다.((커먼즈 연구자 삐에르 다도(Pierre Dardot)와 끄리스띠앙 라발(Christian Laval)은 이를 다음에서 탐구한다. The pandemic as political trial: the case for a global commons.)) 시장경제 원리와 결합된 이러한 국민국가 주권 이념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전지구적 연대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만간 단념하게 만들 것이다.((코로나바이러스 위기상황인 2020년 3월 31일 독일 TV에 방영된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의 기억에 남을 모습은 이 진단이 국민국가 연합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의 체계적 연계는 국민국가 시장의 이익을 위하는 국가에서 백신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1.5도 기후 목표도 훼손하도록 추동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후위기·대량이주·팬데믹 시기에 분명해진 독립된 세계의 도전에 응대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의 필요를 고려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조직·생산·소유의 방법이다. 예외가 아닌 기획에 의한 커먼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국가주권 하에서 기능하는 시장-국가와 달리((여기에 묘사된 긴장은 예컨대 위기 시 정부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예외상황에도 반영된다. 예컨대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 위기 때 포르투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 지위에 관계없이 건강 및 사회 보장 씨스템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장관 에두아르도 카브리타(Eduardo Cabrita)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위기의 시기에,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의무’다. Cf. Portugal regulariza imigrantes para dar acesso ao sistema de saude, https://oglobo.globo.com/mundo/portugal-regulariza-imigrantes-para-dar-acesso-ao-sistema-de-saude-durante-pandemia-de-coronavirus-24335450, 2020년 5월 20일 접속.)) 이러한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우리의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알아볼 것이다. 고립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자 장기 전략의 문제로서 말이다.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자기조직화와 연대를 장려하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더 쉽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위해 뉴스를 뒤지는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꽤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쿠자누스대학(Cusanus Hochschule) 학생들과 함께 필자는 팬데믹의 경제적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공적 토론에 초점을 맞추어 2020년 3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의 타케스샤우(Tagesschau) 오후 8시 뉴스를 분석했다. 이 토론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는 주로 ‘채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자기조직화라는 용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독일 정부는 #WirVsVirus(우리 대 바이러스) 해커톤(hackathon)((https://wirvsvirushackathon.org/, 2020년 5월 17일 접속.))으로 올바른 방향의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스탄불 시 정부는 모르는 사람들의 음식 값을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터키식당의 사회적 관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위기에 직면하여 시 정부는 친구나 낯선 이들이 여유 없는 사람들의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내줄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었다. 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 가스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더 이상 납부할 수 없는 재정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4월 이를 실행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족들의 청구서들이 웹싸이트에 게시될 수 있었고 낯선 이들이 익명으로 이를 지불해줄 수 있었다. 이스탄불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약 1000만 리라(약 250만 유로)에 달하는 10만 건의 청구서가 결제됐고 또 다른 12만 건의 청구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https://ansteckendsolidarisch.de/de/blog/rechnungen과 시 정부 웹싸이트 https://askidafatura.ibb.gov.tr/, 2020년 5월 17일 접속.)) 순수한 자선 행위 대신 이 경우에는 수입이 갑작스레 감소함에도 공공요금을 대규모로 충당하기 위한 더 나은 자기조직화의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민관협력(a public-private partnership)을 회고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국가와 커먼즈의 협력(a public-commons partnership)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다.

이것이 어떻게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백신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공공재일 수도 있고 비국가적 커머너들이 창안하고 모두와 관대하게 공유하는 공통재일 수도 있다.((정치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것처럼 쓰인다.)) 조나스 솔크가 제안한 경로는 큰 호소력을 가진다. WHO 혹은 공공협력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지구적 협력조직이 백신에 대한 수탁책임을 질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혁신적 연구·금융 모델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식의 동기에 충실하게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특허가 위기의 시기에는 유예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이상한 이념적 주장이 아니다. DNDI가 수십 년 간 입증해온 성공적 관행이 바로 이것이다. DNDI는 특히 기업에 ‘가치 없는’, 그리하여 높은 사망률과 수백만의 감염자에도 불구하고 연구되지 않는 질병에 사용될 약물을 ―국가와 다국적 파트너, 민간 파트너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며 시험하고 공유한다. 신약으로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장논리를 따를 경우 연구투자도 기대할 수 없다.((DNDI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lfrich/Bollier 2019: S. 312–314. DNDI는 단일 자금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단일 국민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 단체는 현재 <WHO 코비드19 기술 연합>(WHO COVID-19 Technology Pool)에 속해있다 https://www.dndi.org/2020/media-centre/events/online-webinar-who-covid-19-technology-pool/, 2020년 5월 21일 접속.)) 확실히 커먼즈의 핵심 덕목은 아무것도 투자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윤의 폭락과 그로 인한 혼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셧다운할 생산도 없고 갑작스런 실업의 위협도 없다.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무엇이 실제로 필요하든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와의 차이점이다. 커먼즈는 사람들의 필요를 작업의 중심에 놓고 생산·분배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배분한다. 이 접근법은 광고, 마케팅, 경쟁적 소송, 특허 비용, 인재 채용 등의 시장 기반 비용을 제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팬데믹에 직면하여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다량의 간접비로부터 벤처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집단적 생산과 사용

재화를 판매용 상품으로 전환해야 하는 강제가 없다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같이 계속될 수 있다. 예컨대 위기 내내 활동해온 대략 280개의 CSA 농장((https://www.solidarische-landwirtschaft.org/solawis-finden/auflistung/solawis/ [옮긴이] 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기반 농업)는 농장의 수확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된 농업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작물의 재배·수확·유통의 위기를 공유하는 대안적 농업이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처럼 농작물이 재배·수확·유통된다. 물론 적절한 위생 예방조치를 준수하면서 말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CSA를 계속 지원하고 있는, 고객들이 아닌 회원들에게 매주 배달된다. 이는 2018년 매우 건조한 여름에도 그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한 2020년 봄에도 다르지 않다. 이런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농업에서는 위기가 많은 회원들 사이에 분산되기 때문에 경제적 ‘셧다운’은 CSA에게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씨스템은 계절노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돈은 자발적 기여와 수익 재분배에 기초하여 처리된다.

시장경제가 붕괴될 때 역으로 반사회적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굶주릴 때조차도 우유 생산자들이 하수구에 우유를 쏟아 붓고((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oronavirus-dairy-milk-farmer…)) 꽃 재배업자들이 꽃들을 모두가 즐기도록 공공장소에 두는 대신 처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먼즈는 필요를 더 일관되게 충족시키고 낭비를 피하면서 변동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라흐(Villach)에 있는 <페어안트보어퉁 에어데>(Verantwortung Erde,지구에 대한 책임)((https://www.verantwortung-erde.org/, 2020년 5월 20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물질·능력은 [위기 시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할 뿐이다.”

이스탄불 시 정부가 플랫폼을 만들어 낯선 이들의 공과금을 사람들이 더 쉽게 내줄 수 있게 한 것과 유사하게, 말마따나 너무도 필요한 재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 농업단체도 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인 토지를 시장으로부터, 그리하여 투기로부터 빼내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반시설 비용도 절감시켰다. 팬데믹 시기 커먼즈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2020년 4월 4일 이루어진 온라인 대담)) 토지를 적극적으로 탈상품화하는 독일 협동조합 <쿨투어란트>(Kulturland, 경작지)((https://www.kulturland.de/, 2020년 5월 23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견했고 이제 미래를 미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들 기다리고 있는 토지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로서의 커먼즈?

나는 지금이 커먼즈의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커먼즈는 지배적 경제모델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충돌 없는 ‘셧다운’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필요치 않기에 사물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계는 아직 커먼즈를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19세기의 낡고 질긴 사고방식, 구시대적 경제정치사상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가 우리가 커머너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 경제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정당화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 전제는 “더 적은 생산 그리고 (동네공방, 재사용·보수·재활용 센터와 같은) 더 지역적이고 시너지적인 생산방식이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며 팬데믹 대처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Hans Widmer, Die Coronakrise hat viele Fehlfunktionen unseres Systems offen gelegt. 2020년 3월 28일, telepolis.)) “씨스템과 관련된” 직업과 “삶과 관련된” 활동을 구분해야하는 이유와 후자의 활동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경제모델의 우선적·현실적 기초로 인식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씨스템과 관련된’(Systemrelevant)은 코로나 위기 동안 ‘평상시’에는 별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의사·간호사·간병인·출납원 등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독일어 용어다.) 커머닝의 배후에 있는 모티프가 ‘작은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의존하는 자기조직된 협업의 창조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법적 소유권, 통제의 문제에 대한 새롭고 더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상호의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화했다. 기억하는가?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고 내 마스크는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커먼즈의 확장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는 <네쯔베어크 외코노미셔 반델>(Netzwerk Ökonomischer Wandel, 경제변화를 위한 네트워크)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수렴 전략에 상응한다. (NOW) https://www.netzwerk-oekonomischer-wandel.org/, 2020년 5월 13일 접속. [옮긴이] 이 구절의 독일어 원본은 다음과 같다. Die Konsequenz kann nur sein: Commons ausweiten. NOW! 마지막 단어 NOW는 독일어 원본에서 대문자로 쓰였다. NOW는 ‘Netzwerk Ökonomischer Wandel’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진 말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는 대안적 변화의 길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커먼즈를 확장하기‘(Commons ausweiten)이다. 나머지 둘은 ’시장을 공통재로 인도하기’(Markte am Gemeinwohl orientieren)과 ‘국가를 완전히 민주화하기’(Den Staat umfassend demokratisieren)이다.)) 




아마추어 계급 혹은 웹의 예비군


  • 저자  :  바실리스 코스타키스 (Vasilis Kostakis)
  • 원문 :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 (2009)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Rethinking Marxism에 실린 코스타키스(Vasilis Kostakis)의 논문 “The Amateur Class, or, The Reserve Army of the Web”(2009)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한 것이다. (초록抄錄은 그대로 우리말로 옮겼다.) 정리이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참고문헌을 표시하지 않았다. 참고문헌을 보려면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초록

이 글은 웹의 새로운 버전에 의해 개시된 컴퓨터 산업의 변형을 다룬다. Tim O’Reilly (2006)에 따르면 사회적 웹 혹은 웹 2.0의 출현은 아마추어들이 웹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 되면서 아마추어 계급의 형성과 새로운 착취 방식을 낳는다. 자본주의적 생산 내에서 웹 2.0의 기능은 아마추어들의 자발적 기여를 착취하고 가치화하는 것이다. 이 논문의 바탕에 되는 주장은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보여주며 아마추어들의 역할이 어느 한 쪽의 우위가 결정되는 데 작용한다는 것이다.

Key Words: Web 2.0, Amateur Class, Exploitation, Netarchists, Commons

 

웹 2.0과 집단 지성 및 창조성의 착취는 서로 엮여 있는 개념들이다. 웹 1.0의 내부에서 출현한 웹 2.0은 사회적 창조성, 협동 그리고 사용자들 사이의 정보공유를 촉진한다. 그 참여구조는 사용자들이 응용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가치를 추가할 수 있게 한다. 웹 2.0의 출현은 eBay, Facebook, Flickr, MySpace, del.icio.us와 YouTube 같은 막대한 이윤을 발생시키는 기업을 낳았다. 이 기업들은 집단지성을 착취하기 위해서 웹 2.0에 들어있는 일단의 참여활동과 도구들에 돈을 댄다.

그레엄(Paul Graham)에 따르면 웹의 세계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 역할이 있다. 전문가(professional), 아마추어. 최종 사용자이다.((D. Kleiner and B. Wyrick. 2007. InfoEnclosure 2.0. Mute. http://www.metamute. org/en/InfoEnclosure-2.0 (accessed 21 December 2007).)) 여기에 ‘해커’를 추가할 수 있다. 해커는 전문가의 특징(깊고 전문화된 지식)과 아마추어의 특징(낭만주의)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해킹을 제한을 받지 않는 순수한 실험적 활동으로 보는 워크(McKenzie Wark)에 따르면 해커는 사적 소유의 형태 너머에서 새로운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적 아마추어”이다.((M. Wark, A hacker manifesto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아마추어와 해커의 핵심적 차이는, 전자는 플랫폼의 소유자들에 의해 착취되고 전문가들(해커일 수도 있고 전문가일 수도 있다)의 도움이 없으면 자유의 잉여―즉 진정한 커먼즈―를 산출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추어가 플랫폼 소유자에게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소유자도 아마추어 계급에게 의존한다. 사업에 가치를 추가해 주기 때문이다. 물론 해커나 전문가가 플랫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아마추어 계급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아마추어 계급의 계급으로서의 형성이 웹 2.0과 함께 이루어졌다는 데 있다. 웹 1.0에서는 전문가, 해커, 최종 사용자의 역할이 정해진 반면 아마추어가 들어설 구체적인 공간이 없었다. 웹 1.0의 탁하고 복잡한 성격으로 인해 아마추어가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웹 1.0의 미로 속에서도 생산에 참여하고 싶은 잉여 인구가 있었는데, 이 웹 1.0의 예비군은 아직 아마추어 계급을 형성하지 못한 느슨한 아마추어들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아직 능력이 비물질적 생산에 참여할 정도로 진전되지 못한 아마추어들은 웹 2.0에도 존재하며 웹 2.0 노동인구의 잠재적 부분을 이룬다. 이 잠재적 부분은 아직 온전하게 자본주의적 생산에 통합되지 않고 있다. 아마추어들은 직장―플랫폼들―에 위계의 형태가 아니라 네트워크의 형태로 배치된다. 다른 한편 플랫폼들은 잉여 인구를 착취하기 위해 손쉬운 형태로 변형된다. 앞으로 새 버전의 웹은 해커나 전문가들처럼 능력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작은 돈을 받더라도 웹 생산에 참여할 큰 열성을 가진 아마추어들을 더 착취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마추어는 금전상의 이득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고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여가 시간에 창조를 하지만 (그리스어로 ‘아마추어’를 의미하는 ‘ερασιτέχνης’는 ‘애호가, lover’를 의미하는 ‘εραστής’와 ‘기예, art’를 의미하는 ‘τέχνη’가 합해진 것이다) 그 지식은 해커나 전문가처럼 전문화되어 있지 않다. 맑스는 인간의 자유에 채워진 족쇄는 종교나 철학이 아니라 화폐라고 주장한다. 아마추어는 통상적인 인식과 단절하며 이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이 일어난다. 아마추어는 인간 노동의 소외된 본질인 화폐를 그 자체 목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아마추어 계급의 생산은 화폐의 논리에 기반을 두는 것이 아니라 공유·존중·사회화·인정 같은 가치들에 기반을 둔다. 워크가 말하는 해커처럼 아마추어도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창조한다. 둘 다 집단적 노동, 혁신, 자유의 옹호자들이다. 아비드슨은 아마추어가 참여하는 경제 유형을 ‘윤리적 경제’―인간들이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주체들이 서로 연결되는 질서를 창출하는 경제―라고 부른다.((http://www.p2pfoundation.net/Introduction_to_the_Ethical_Economy)) 이와 달리 근대 기업 자본주의는 윤리적으로 건전한 사회질서와 양립될 수 없다고 한다.

웹 2.0은 아마추어들의 예비군을 착취하는 조건을 창출했다. Flickr, MySpace, Facebook, del.icio.us와 YouTube가 그 대표적인 웹 플랫폼들이다. 이들은 아마추어들의 능력과 창조성에 대한 욕망을 활성화하여 포획한다. 아마추어의 자발적 참여가 플랫폼 관리자들에게서 (잉여) 가치로 변형된다. 아마추어들에게 생산수단이 이용가능해지지만 플랫폼들은 기업이 계속적으로 소유한다. 이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새로운 표현이다. 산업 생산에서는 노동자들(전문가들)이 보수를 받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판매한다. 창조·자부심·충족감은 느끼지 못한다. 회사는 부유해진다. 더욱이 생산과정이 경쟁에 기반을 두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소외된다. 경쟁에 기반을 두지 않는 웹 2,0의 지적 생산에서는 아마추어들이 (때로 소액의 보수를 받고) 창조·소통·사회화·자부심의 즐거움을 향유하며, 기업들은 이로부터 (주로 광고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2007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페이스북의 1.6% 지분에 해당하는 주식을 2억4천6백만 달러에 샀으며, 1년 후에 구글은 유튜브를 16억5천만 달러에 인수했다. 보수가 거의 지불되지 않는 아마추어들의 웹 생산에서도 자본은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 사회에서 자본 축적은 항상 자본의 자기확장에 충분한 수 이상의 노동 인구, 즉 과잉 인구를 발생시킨다고 맑스는 『자본론』에서 말했다. 그런데 아마추어 생산에서는 임금 의존성이 없으며 따라서 추가적으로 아마추어를 착취할 때 한계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그래서 넷지배자들(netarchists 혹은 netocrats)―플랫폼들을 소유한 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려고 한다. 예비군의 수를 최소화하는 것은 충분히 성취될 수 있는 목표이다. 넷지배자들은 그 투기적 성격 때문에 커먼즈 영역의 강화를 위한 여러 계획들을 위임받기에는 위험하다. 플랫폼을 소유하는 자본가들의 착취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커먼즈 영역의 창출과 강화의 이름으로 폐지하는 것이 아마추어들과 해커들의 손에 달려있다.

들뢰즈와 가따리는 “우리에게 소통이 결핍된 것이 아니다. 사실 소통이 너무 많다.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창조이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을 결여하고 있다”라고 썼다.((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What is philosophy?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4), 108.)) 아마추어들은 창조하고 저항하지만, 그 이상으로 성취될 것이 있다.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이 필연코 투쟁의 전술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웹의 생산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사회 계약이 출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는 ‘사회 계약 2.0’이라고 불린다. 여기에는 생산과 소유의 새로운 의미들 및 방식들(피어 생산peer production과 피어 소유peer property)이 포괄되며, 이것들이 실질적 커먼즈 영역의 창출에 기여한다. 피어 생산에서 의사결정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참여와 협력에서 이루어진다. 이 생산양식은 등가교환에 기반을 둔 시장 생산이나 위계적 구조에 기반을 둔 계획경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피어 소유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나 GPL과 같은 법적 형태 아래에서 자원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운영하는 공동체적 공유의 형태를 띤다. 피어 소유는 사적 소유나 국가소유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통적인 소유형태들이 배제적인(‘나의 것이면 당신의 것이 아니다’) 반면에 피어 소유는 포함적이다(‘나의 것일지라도 당신의 것도 될 수 있다’). 국가는 민중(국민)을 대신해서 공적 재산을 소유하고 관리하는 반면에, 피어 소유에서는 민중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관리한다. 즉 커먼즈이다. 따라서 피어 3요소(피어 생산, 피어 소유, 피어 거버넌스)에 기반을 둔 진정한 커먼즈가 넷지배 플랫폼들에 대한 대안이 될 것이다. 이 커먼즈에서는 집단적 지성과 사회적 창조성의 관리가 ‘넷지배적 이데올로기’―이는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라고 불린 바 있다((Barbrook, R., and A. Cameron. 1995. The Californian ideology. Alamut, August. http://www.alamut.com/subj/ideologies/pessimism/califIdeo_I.html (accessed 31 arch 2008).))―에 의해 추동되는 사적인 영리 기업들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며, 넷지배자들은 참여를 포용하는 듯하지만, 자본주의를 인류 미래의 유일한 지평으로 본다.

이 논문에서 행한 넓은 범주화와 일반화가 특수한 사례들에서 해석의 오류를 낳을지도 모른다. 나[코스타키스]는 웹 2.0이 해방적 측면과 착취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아마추어들이 어느 쪽이 우세한지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일정하게나마 조명했기를 바란다. 아마추어들이 창조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 일정한 권리들을 플랫폼의 소유자들에게 양도해준 듯 보일 수도 있다. 넷지배자들은 가능한 한 많은 아마추어들을 착취하여 거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비물질적 가치의 생산이 임금 의존성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회질서를, 더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목적으로 생산하는 아마추어들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홍수 속에서 커먼즈의 강화를 향하는 플랫폼의 독립과 자율성은 성취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 이상의 것이다. “사회 변화의 핵심적 동인으로서 공유 및 커먼즈 공동체들의 지속적인 강화”를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Michel Bauwens, “The social Web and its social contracts: Some notes on social antagonism in netarchical capitalism”, Re-public. http://www.re-public.gr/en/ p261 (accessed 25 July 2008).))♣

 

 




커먼즈 이행과 P2P (3)



 

P2P와 커먼즈 경제를 가속화하는 10개의 방법

 

그러면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이 현재의 경제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아래의 10개의 아이디어는 새로운 생산 공동체들에서 이루어지는, 그리고 공유된 자원을 바탕으로 살림을 창출할 수 있는 윤리적 기업가 연합에서 이루어지는, 새로 출현하는 실천들에 대한 우리의 연구의 결과이다. 이 아이디어들은 새로운 윤리적 경제의 복원력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실천들을 강조한다. 이 10개의 아이디어는 이미 일정 형태로 실행되고 있지만 더 광범하게 사용되고 통합될 필요가 있다. 아래의 표는 세 부문을 담고 있다. ① 자유로움―개방되고 공유 가능하며 모두가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음 ② 공정함―모든 인간들과 사회적으로 유대를 맺음 ③ 지속 가능함― 우리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며 자연을 파수하고 복원하는 일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을 받아들임.

1. 공유된 지식에 기반을 둔 개방된 사업모델을 실천하기.자유로움공유될 수 있는 것을 공유하기. (희소한 자원으로부터만 시장가치를 창출하기.) 이 공유된 커먼즈를 바탕으로 혹은 그와 병행하여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2. 열린 협동조합주의를 실천하기.공정함 협동조합들은 커먼즈 친화적인 시장 조직들이 취할 수 있는 잠재적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핵심은 기여하는 커머너들을 위한 살림을 생성할 수 있는 탈기업적 형태를 선택하는 것이다.
3. 기여에 기초한 공개 회계를 실천하기.공정함 기여에 기초한 회계 및 이와 유사한 해결책들은 훨씬 더 광범한 공동체에 의해 공동창출된 가치를 기여자들 가운데 소수―시장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만이 포획하는 상황을 피한다. 공개 회계는 또한 가치의 (재)분배가 모든 기여자들에게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장한다.
4. 카피페어 라이선스를 통해 공정한 분배와 이익공유를 보장하기.공정함 지식 공유를 허용하면서 상업화의 권리에 대해서는 호혜(상호성)의 응답을 요구하는 카피페어 라이선스의 사용이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내화하고 있는 윤리적 경제 조직들을 위한 동등한 활동의 장을 창출할 것이다.
5. ‘커먼페어’(commonfare)((‘복지’를 의미하는 ‘welfare’의 앞 세 글자 부분을 ‘common’으로 대체한 것이다. 한 웹사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커먼페어‘는 ‘공통적인 것의 복지’(welfare of the common)로 풀어 쓸 수 있으며 “사람들 사이의 협동에 기반을 둔 참여적 형태의 복지 공급”이다. (http://pieproject.eu/))를 통해 유대를 실천하고 삶과 노동의 위험을 완화시킨다.공정함한때 복지국가(welfare state)에 함입되어 있던 중요한 유대 메커니즘들이 붕괴되고 있다. 분산된 유대 메커니즘들 즉 ‘커먼페어’의 관행을 재건하는 것이 긴급하다.
6. 오픈소스 순환경제를 위해서 개방적이고 지속 가능한 디자인들을 사용하기.지속 가능함계획된 노후화는 오류가 아니라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기업들의 특징이다. 지속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개방되고 지속 가능한 디자인들을 사용하는 것이 윤리적 기업가 조직들에게 크게 권장된다.
7. 열린 공급망과 개방된 회계를 통해 생산의 상호조정을 향해 움직이기.지속 가능함네트워크의 실질적 생산현실이 열린 공급망을 통해 공통의 지식이 될 때에는 과잉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
8. 코스모-지역화(cosmo-localization)를 실천하기.지속 가능함“가벼운 것은 전지구적이고 무거운 것은 지역적이다”가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원리이다. 지식은 전지구적으로 공유되고 생산은 요구에 의해, 실질적 욕구에 기반을 두고, 분산된 공동작업 공간들과 미시공장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9. 물리적 기반시설을 공동으로 사용하기.지속 가능함기계들을 포함한 우리의 생산수단이 공동으로 사용되고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자립적으로 소유될 수 있다. 플랫폼 협동조합들, 데이터 협동조합들, 그리고 분산된 소유권의 ‘페어셰어’(fairshares) 형태들이 생산의 기반시설들을 공동으로 전유하는 것을 돕는 도구들이 될 수 있다.
10. 생성적 자본을 공동으로 사용하기.지속 가능함생성적 형태의 자본은 추출적 은행들에 지불되는 복리 이자에 기반을 둔 추출적 화폐공급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세계, 인류 그리고 환경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유롭고 공정하며 지속 가능한 실천들에 의해서 추동되는 경제체계이다.




커먼즈 이행과 P2P (2)



 

2.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P2P 경제를 형성하는가?

‘economy’(경제)라는 말의 그리스 어원은 가내 자원의 관리를 가리킨다. 건강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돌봄 지향적 상호작용을 어떻게 더 큰 규모로 확대하여 네트워크화된 공동체들이 우리 모두의 집인 지구의 자원을 파수하는 경제로 만들 수 있을까?

 

생산양식으로서의 P2P의 역사

 

관계에 기반을 둔 P2P의 동학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해왔으며 원래 유목적인 수렵채취 사회에서 우세한 관계형태였다. 그 후 부족들의 연대로 구성된, 씨족에 기반을 둔 사회형태에서는 상호성이 P2P를 제치고 우세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나중에는 전자본주의 국가들과 제국들을 특징짓는 위계에 기반을 둔 자원배분이 우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개과정 내내 커먼즈와 P2P 논리는 유럽 봉건제나 아시아 제국들의 경우에서처럼 매우 중요한 기능들을 보유했다.

 

일단 산업자본주의 단계에 도달하자 (그리고 나중에는 국가사회주의 제체들에서) P2P와 커먼즈 동학은 실질적으로 주변화되었다. 그러나 거기서 이야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풍성한 P2P 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커먼즈와 P2P는 그 동학이 결합되면 전지구적 수준으로까지 규모가 커질 수 있는 부활을 맞고 있다. 이러한 비전에 따르면 커먼즈와 P2P는 국가와 시장 기반 모델들의 가능성을 넘어서는 복잡한 사회적 인공물들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P2P에 의해 가능하게 되는 관계들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의 출현을 낳았다. 이는 법학자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가 만들어낸 용어로서 가치를 창조하고 분배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리킨다. P2P 기반시설은 개인들로 하여금 소통하고 스스로 조직하고 궁극적으로는 비(非)경합적 사용가치를 지식·소프트웨어·디자인의 디지털 커먼즈라는 형태로 공동으로 창조할 수 있게 해준다.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오픈소스 기획들, 아파치 HTTP 서버, 모질라 파이어폭스(Mozilla Firefox)나 워드프레스, 그리고 위키하우스, 렙랩(RepRap), 팜핵(Farm Hack)과 같은 오픈디자인 공동체들을 생각해보라.

 

핵심 개념 :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에서는 기여자들이 열린 기여 시스템들을 통해서 공유된 가치를 창조하며, 참여 실천들을 통해서 공동의 작업을 하고, 재사용이 가능한 공유 자원들을 창조한다. 열린 투입, 참여적 과정, 커먼즈 기반 산출로 구성되는 이 일련의 과정은 자본의 축적이 아니라 커먼즈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주기이다.

 

가치창조의 새로운 생태계로서의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은 우리에게 가치창조의 새로운 생태계의 출현을 보여준다. 이 생태계는 세 단체로 구성된다. ① 생산 공동체 ②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③ 비영리 지원단체.

이 급속히 발전하는 생산양식을 남김없이 서술하기는 불가능한데, 아래의 표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생태계들의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잘 알려진 사례들 가운데 다섯을 설명해준다.

 

생산 공동체리눅스모질라GNU위키피디아워드프레스
기업가 연합Linux
Professional Institute,
Canonical 등
Mozilla corporation 등Red Hat, Endless SUSE 등Wikia Company 등Automatic Company 등
비영리 지원 단체리눅스 재단모질라 재단프리 소프트웨어 재단위키미디어 재단워드프레스 재단

이제 이 단체들 각각과 그 특성들을 서술해보자.

 

 

1. 생산 공동체

 

생산 공동체는 어떤 기획에의 기여자들 전부로 구성되며 그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조정하는 방식을 포함한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보수를 받을 수도 있고 생산되는 사용가치에 대한 특수한 관심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기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유될 수 있는 자원을 생산한다.

 

 

2. 기업가 연합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은 공통의 자원에 기반을 두고 시장을 위한 부가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이윤이나 생계의 확보를 시도한다. 기여자들은 참여하는 기업들에 의해 보수를 받을 수 있다. 디지털 커먼즈 자체는 시장의 외부에 있는 경우가 매우 많다. 희소하지 않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기업가들, 공동체, 그리고 (이것들이 의존하는) 커먼즈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관계가 생성적(generative)이냐 아니면 추출적(extractive)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극을 가리키지만 현실에서 모든 조직들은 두 극을 일정 정도로 포함하게 된다. 생성적 관계와 추출적 관계 사이의 차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사례는 산업형 농업과 퍼머컬처의 차이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토양이 더 메말라지고 덜 건강해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토양이 더 비옥해지고 건강해진다.

추출적 소유생성적 소유
1. 금융적 목적: 단기간에 이윤을 극대화하기1. 삶의 목적 : 장기적으로 삶의 조건들을 창출하기
2. 부재 구성원 : 소유가 기업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2. 토착 구성원 : 소유가 당사자들의 손에 쥐어져 있다.
3. 시장에 의한 거버넌스 : 자본시장에 의한 자동조종 통제3. 사명에 의해 통제되는 거버넌스 : 사회적 사명에 헌신하는 사람들에 의한 통제
4. 카지노 금융 : 주인으로서의 자본4. 이해관계자 금융 : 친구로서의 자본
5. 상품 네트워크 : 가격과 이윤에만 초점을 두는 교역5. 윤리적 네트워크 : 생태적·사회적 규범들을 집단적으로 유지

추출적 기업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며 보통 생산 공동체의 유지에 충분한 재투자를 하지 않는다. 그 한 사례가 페이스북이다. 페이스북은 같이 창조하는 공동체들―페이스북은 그 가치창조와 실현에서 이 공동체들에 의존한다―과 이윤을 나누지 않는다. 우버나 에어비앤비는 교환에서 수익을 징수하지만 수송이나 숙박 기반시설의 창출에 직접 기여하지 않는다. 이 조직들은 사용되지 않는 자원들을 이용하는 서비스들을 개발하지만, 추출적 방식으로 작동한다. 더 나쁜 것은 이들이 경쟁적 사고방식을 창출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시스템에의 참여자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으로 임대를 하기 위해 새 건물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에 덧붙여, 추출적 기업들은 매우 많은 사회적 혹은 공적인 기반시설들(가령 우버의 경우에는 도로들)을 무임승차 식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와 달리 생성적 기업가들은 그들이 같이 생산하고 같이 의존하는 공동체들과 커먼즈를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최선의 경우는 기업가들의 공동체가 생산 공동체와 실제로 동일한 집단인 경우이다. 기여자들이 생계를 버는 수단들을 직접 구축하는 한편, 커먼즈를 산출하고 잉여를 자신들의 복지와 (그들이 공동으로 산출하는) 전반적인 커먼즈 체계에 재투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강하고 생성적인 공동체들이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meta-economic networks))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다.

핵심 개념 :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

공동체 지향적 사업에서부터 그 사업에 의해 향상되는 공동체들에 걸쳐 있는 메타경제적 네트워크들은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커먼즈를 생성하는 협력적인 유대(紐帶) 구조들과 결합시키는, 친화성에 기반을 둔 네트워크들이다. 상호신용체계, 아이들 돌봄 협동조합, 공동체 은행, 새 생산물 배급센터들, 교육, 그리고 법 상담소 등이 결합된 연합체계를 상상해보라. 사람들이 사회 지향적 기획들에서 함께 작업하는 두드러진 사례들로는 까딸로니아 통합 협동조합(the Catalonian Integral Cooperative, CIC, 스페인 까딸로니아), 상호부조 네트워크(the Mutual Aid Network,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현재 국가의 경계를 넘어 확대 중이다) 그리고 엔스파이럴(Enspiral, 뉴질랜드, 현재 모든 곳에서 복제되고 있다)이 있다. 엔스파이럴에 대해서는 아래 사례연구를 참조하라.


3.
비영리 지원단체

 

셋째 단체는 비영리 지원단체이다. 많은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생태계들이 생산 공동체들과 기업가 연합들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협동의 기반시설을 뒷받침하고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을 위한 능력을 강화할 독립적인 거버넌스 단체 또한 포함한다.

 

이 단체들은 보통 비영리인데, 커먼즈 기반 피어 생산의 과정 자체를 지도적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의 지원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은 위키피디아 생산자들의 생산을 강제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는 기획들의 기반시설과 네트워크들을 종종 관리하는 프리&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재단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NGO나 비영리 조직들은 희소성을 원리로서 ‘인정하는’ 세계에서 움직인다. 이들은 문제를 포착하고 자원을 찾으며 이 자원을 지도의 방식으로 문제 해결에 할당한다. 커먼즈와 연관된 지원단체들은 풍요의 관점에서 움직인다. 이들은 문제들을 인지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돕고자 하는 기여자들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이 단체들은 기여 공동체들과 기업가 연합으로 하여금 (당면한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하는)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과정에 관여할 수 있게 해주는 협동 기반시설을 유지한다. 지원단체들은 라이선스제도를 통해 커먼즈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과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갈등을 관리하는 것을 돕고 기금을 모으며 커먼즈에 필요한 일반적 능력구축을 (가령 교육이나 자격증명을 통해) 촉진한다.

 

 




커먼즈 이행과 P2P (1)



 

1.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구상이자 실천으로서의 커먼즈가 새로운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동학으로서 출현했다. 시장 및 국가가 사회 조직화의 두 방식이라면, 커먼즈는 그와 병행하는 사회 조직화의 셋째 방식이다. 커먼즈와 P2P(Peer 2 Peer)가 함께, 시민사회의 욕구와 실천 그리고 시민사회가 거하는 환경에 기반을 둔 체계를 형성한다. 이 체계는 중앙집중적으로 계획된 낡은 체계들이나 경쟁을 명령하는 시장경제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커먼즈란 무엇이고 P2P란 무엇이며 양자는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이제부터 이 개념들을 탐구할 것이다.

커먼즈란 무엇인가?

데이빗 볼리어가 서술한 바로 커먼즈는 사용자들의 공동체가 그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다스리는 공유된 자원을 가리킨다. 커먼즈에는 물과 땅 같은 자연의 선물들만이 아니라 문화적 산물이나 지식 같은 공유된 자산들 혹은 창조적 작품들도 포함된다.

커먼즈의 영역은 두 사람이 동시에 가질 수 없는 경합적 재화와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고 사용해도 고갈되지 않는 비경합적 재화나 자원을 포함할 수도 있다. 재화나 자원의 두 유형은 물려받거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다.

커먼즈 학자이자 활동가인 헬프리히(Silke Helfrich)에 따르면 커먼즈는 적어도 다음 네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 집단적으로 관리되는 자원. 여기에는 물질적 자원과 비물질적 자원 모두가 속하며 보호가 필요하고 많은 지식과 노하우가 요구된다.
2. 번영관계들을 조성하고 심화시키는 사회적 과정. 이 과정들은 지속적으로 파수(把守)되고 재생산되며 보호되고 커머닝을 통해 확대되어야 할 복잡한 사회생태학적 체계들의 일부를 구성한다.
3. 새로운 생산적 논리와 과정에 초점을 둔 새로운 생산양식.
4. 커먼즈와 커머닝을 세계관으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

한 사례가 위키피디아이다. 자원(보편적 지식), 공동체(저자들과 편집자들), 공동체가 마련한 일단의 규칙들과 프로토콜들(위키피디아의 내용과 편집 지침들)이 있다. 위키피디아 커먼즈는 이 셋 모두로부터 출현한다.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에 속하는 다른 사례는 미국 오리건 주의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 )이다. 여기서도 자원(숲), 공동체(벌목꾼들, 생태학 과학자들, 삼림 감시원들, ‘분수령 위원회’) 그리고 일단의 규칙들과 준칙들(숲을 지속 가능하게 공동 관리하기 위한 헌장)이 발견된다.

한 공동체가 어떤 자원을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커먼즈가 발생하므로, 커먼즈 전체를 총괄하는 목록이란 없다. 커먼즈 전체는 전 세계에 존재하는 개별 커먼즈들―어장에서 어번 커먼즈에 이르는, 공유된 부의 많은 형태들을 포함한다―의 방대한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여 번영한다.

P2P란 무엇인가?

커먼즈가 ‘무엇을’이라면, P2P는 ‘어떻게’로 간주될 수 있다.

P2P―—“peer to peer”, “people to people”, or “person to person”—는 지위가 동등한 사람들(peers)이 서로 자유롭게 협동하여 공유된 자원의 형태를 띤, 그리고 커먼즈의 형태로 유통되는 가치를 창조하는 관계의 동학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컴퓨팅 용어로서 P2P는 ‘동등한 지위를 가진 네트워크 참여자들’(peers) 사이의 합의를 통한 연관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컴퓨팅체계를 가리킨다. 이는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는 컴퓨터들이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맥락에서 오디오·비디오 파일 공유가 P2P 파일공유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와 유사하게, 인터넷의 심층적 기반시설의 일부―예를 들어 데이터 송신 기반시설―가 P2P라고 불려왔다.

이 컴퓨터들 뒤에 인간 사용자들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용자들은 일정한 테크놀로지적 도구를 사용하여 서로 더 쉽게 그리고 전지구적 규모로 일대일로 상호작용하고 관여할 수 있다.

P2P 용어들 및 정의들에 대한 언어적 혼란이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서로 통신하는 컴퓨터들)과 관계 동학(소통하는 사람들)의 상호의존성으로부터 종종 발생한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기반시설이 P2P 인간관계를 촉진하기 위해서 완전히 P2P적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나 비트코인을 위키피디아나 프리 혹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기획들과 비교해보라. 이들 모두가 P2P 동학을 이용하지만, 그 방식과 정치적 지향은 서로 다르다.

P2P 협동은 종종 허가 없이 이루어진다. 즉 기여하기 위해서 다른 참여자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 P2P 체계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기여자들과 기여에 열려있지만, 작업의 질과 포괄성은 보통 위키피디아의 경우처럼 일군의 유지자들과 편집자들에 의해서 ‘사후에’ 결정된다.

또한 P2P는 개인들 사이의 특별한 상호성은 없고 개인들과 집단적 자원 사이의 상호성만을 포함하는 자원할당 방식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널리 사용되는 GNU GPL 라이선스 아래 배포되는 기존의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두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 있지만, 당신의 최종적 생산물이 동일한 종류의 라이선스 아래 사용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이것이 가능하다.

협동하는 인간이 사용하는 상호연결된 컴퓨터들의 P2P 네트워크들은 활발한 공유된 기능들을 커먼즈에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P2P는 디지털 영역과 첨단테크놀로지하고만 연관된 것이 아니다. 그 핵심은 비(非)강제적이고 비(非)위계적인 관계들이며 그 자질들은 인간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잠재력을 가진다.

* 아래는 원 문서의 이 위치에 삽입된 그림입니다.


 

P2P와 커먼즈, 이 둘은 어떻게 서로 연관되는가?

P2P와 커먼즈의 관계는 전자가 커먼즈에 기여하는 행동들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으로서 작동하는 관계이다. P2P는 공동으로 관리되는 공유된 자원(커먼즈)의 창출과 유지에 기여하는 능력을 구축함으로써 ‘커머닝’ 행동을 촉진한다.

요컨대 P2P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두드러진 패턴을 표현하며, 커먼즈는 이 관계 동학으로 작동하는 구체적인 ‘무엇’(자원), ‘누가’(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그리고 ‘어떻게’(미래 세대를 위해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자원을 파수하는 데 사용되는 프로토콜)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시민사회의 기반을 P2P 동학과 커먼즈 실천에 두면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안정된 환경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다. 이것이 커먼즈 이행의 목적이다.

1장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