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3)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당신은 어셈블리에서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말하기와 번역이 의미하는 바의 변화를 언급하고, 말들의 전유(appropriation)를 중요한 정치적 행위로 제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다중의 기업가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정립합니다. 하지만 200년 넘게 자본주의와 결부되어 왔던 기업가성(entrepreneurship)’과 같은 용어를 그렇게 전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러한 전유 행위를 통해 비판이 약화되고 구분들이 흐려질 위험은 없을까요?

답 :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책이 출간되자마자 특히 이 이슈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마이클과 나는 우리의 작업에서 늘 말들을 되찾고 재사용하며 그 의미를 전도시켜왔습니다. 가령, 아마도 ‘제국’은 정치학의 역사에서 가장 학술적이고 전통적인 용어들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의 전통과 윤리의 일부인 말들을 전유해서 그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할당하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습니다. 잘못되기는커녕, 사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형식의 언어 실천과 관련된 문제는 전도(顚倒)의 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위한 언어를 획득하는 것, 말들을 되찾는 것을 과제로 삼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업가성을 말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 혹은 ‘다중의 기업가성’을 말합니다. 공통적인 것의 기업가성을 말하는 것은, 노동의 거부를 말하는 것과 같은 잠재성과 힘을 갖습니다. 그것은 결국 공통적인 것의 재전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언어 사용의 힘은 이와 같은 재전유의 행위에 있으며, 이때 전도(顚倒)는 결정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혁명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변화시킨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장악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권력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신은 다중에게 군주론끝부분에서 제시된 마키아벨리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으라고,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다중으로부터 나타나는 새로운 리더에 대한 요구이지요. 이때 본질적인 것은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to take power differently)’는 말입니다. 이 말로 당신은, 스피노자와 더불어, ‘공통적인 것혹은 자유, 평등, 민주주의, 가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르게는 평등 없는 자유인 권리개념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좌파가 제안하는 자유 없는 평등의 위선을 반복하는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다르게 잡는다라는 정식화는 스피노자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인바, 스피노자에게 공통적인 것이란 평등 없이 자유 없고 자유 없이 평등 없다로 요약될 수 있는 기본적인 이념이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내적으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다중에 관한 존재론적이고 논리적인 범주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순히 그것을 코뮤니즘(communism)’이라고 부르는 대신 공통주의(commonism)’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연대는 어디에 위치합니까?

답 : 왜 그것을 ‘코뮤니즘’이라고 부르지 않냐고요? 아마도 그 말이 최근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남용되어왔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공통적인 것의 정치 기획을 다시 ‘코뮤니즘’으로 부를 것임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와 마이클이 아니라 다중에게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담론에서 연대가 어디에 위치하냐고요?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에 연대가 있습니다. 연대는 우리 담론의 원리적 수준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자면, 연대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중 세 가지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1) 고독, 홀로 됨의 거부에 있어서 질료인으로, 2) 생산하는 협력에 있어서 작용인으로, 3) 사랑에 있어서 목적인으로 말이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제안하는 모든 것, 우리의 이론적 구성 전체의 질료인, 작용인, 목적인이 다름 아닌 연대에 있습니다. ‘공통주의(commontismo, commontism)’는 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누구도 홀로 살아갈 수 없고, 홀로 생산할 수 없으며, 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제안들은 연대의 제안, 혹은 홀로 됨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의 제안이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대를 정의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황량한 사막에서 홀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는 한 생산할 수 있는 수단도, 시간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홀로 됨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홀로 있으면, 다른 누군가가 있지 않으면 사랑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공통적인 것을 향한 발본적 이행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이행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연대를 향한, 홀로 됨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경향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위기와 끔찍한 공허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지금은 거대한 열망이 존재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끝장난 것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 사이의 진공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면, 이 끔찍한 고독을, 그러나 또한 이 거대한 열망을 알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막은 모든 면에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우리의 다음 질문이 그것에 관한 것입니다. 전작(前作)들에서처럼,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오큐파이 운동들이 다중의 반란을 증명한다는 낙관적인 생각, ‘가능한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공통적인 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아마도 처음으로, 오큐파이 운동들이 시도한 혁명이 실패한 이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는 당신의 작업에서 일종의 방향 전환, 즉 초기의 낙관주의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합니까? 그리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혁명의 이념과 관련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답 : 우리의 작업에 낙관주의에서 비관주의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시도한 것은, 문제를 현실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가능한 해결방안들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난 10년 간 오큐파이를 비롯한 여러 운동들이 부딪혔던 한계입니다. 가장 중요한 한계는, 이 운동들이 스스로를 제도로 번역하기를 꺼리거나 그럴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고자 시도하거나 실제로 제도를 형성했던 곳에서도 모두 운동을 배반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분노한 사람들’(Indignados)로부터 탄생했지만 결국 자신들이 출발한 상황을 배반하고 만 포데모스(Podemos)가 그러한 사례입니다. 모든 논쟁들을 자세히 따라가본 후 포데모스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부정적입니다. 그들은 전략과 전술 사이의 관계의 역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오직 전술만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얼마나 많이 혹은 조금 낙관적이냐가 아니라, 현실적인 맥락에서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들을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셈블리』에서 하려 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커먼즈 운동의 한계들을 살피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결론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러한 권력 장악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 권력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인용했듯이, 이것은 온전히 ‘권력을 다르게 잡기’에 관한 것, 그리고 이 발본적인 이행/역전을 유지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또한 포퓰리즘을 다룹니다. ‘피플(people, 국민)’이라는 개념은 폐기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 그렇습니다. ‘피플’ 개념은 홉스의 논리, 주권과 재현(대의)에 관한 부르주아적 노선의 논리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피플은 다중을 훼손하는 하나의 허구이며, 오직 그 목적만을 가집니다. 피플의 논리에 따르면, 다중은 주권적 권력을 형성하면서 사라지는 단일한 피플로 스스로를 변형해야 합니다. 홉스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원본 표지는 이 점을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스피노자는 홉스에 맞서, 단호하게 다중(multitudo) 개념을 사용했으며, 정치적 질서가 형성될 때에도 다중의 자연적 권능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내가 『야만적 별종』(L’anomalia selvaggia)에서 증명하려고 했듯이, 그리고 『어셈블리』에서 부분적으로 다시 언급했듯이, 스피노자는 ‘다중’과 ‘공통적’(comunis)이라는 개념을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와 민주주의의 전체 이슈를 압축합니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상상력, 사랑 그리고 주체성이야말로 특이성에서 공통적인 것으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이라는 것입니다.공통적으로 되는 특이성과 주체성, 스스로를 새로이 창안되는 제도로 번역하는 특이성과 주체성은, 공통주의를 요약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 현재의 디지털·커뮤니케이션 자본주의 관련하여, 당신은 또한 비판에 대해, 당신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기술비관주의(techno-pessimism)라 부르는 것에 대해 숙고합니다. 당신은 근대 테크놀로지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비판을 역사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입장은 오직 대공장 산업에 의해 통제되는 자본주의 발전국면과만 유효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들의 비판은 심각한 한계를 갖게 됩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한 그들 비판의 한계는, 낭만주의 시기에 혁명적 이념과 해방의 반대자들이 만들어낸 계몽과 근대적 사유의 뒤집어진 상(), 계몽의 변증법역시 사로잡혀 버리고만 그 역상(逆像)과 관계된 것일까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의 한계는 해방적인 근대 사유와 자본주의를 충분히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인한 것일까요?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의 대안적 근대성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를 주요 용의자들로 간주했는데요 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비추어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 : 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을 배경으로 성장했고, 이탈리아 노동자주의(operaismo)가 그들의 비판적 작업에 빚지고 있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자주의의 발전과정 전체는 『계몽의 변증법』(1944)의 결론들에 맞서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작업은 극단들, 극단주의에 이릅니다. 그것은 당신은 한계로 데려가고 당신은 거기서 조금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의 작업은 밀폐된 우주를 개념화한 것입니다. 노동자주의는 이 밀폐된 우주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그것을 부수어 열 수 있는지를 자문(自問)했습니다. 노동자주의 시절에 우리는, 그들이 멈춘 곳에서 멈추지 않고, 밀폐된 우주, 자본주의의 우주, 도구적 합리성이 넘쳐나는 우주, 통제와 억압의 논리가 지배하는 우주를 출발점으로 삼되, 이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우리는 상품의 세계이며 파국을 향해 가고 있던 이 밀폐된 우주를 강제로 열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했습니다. 주체성을 도입하는 것은 이 일에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밀폐된 우주를 부수어 열기 위한 쇠지렛대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의 자식이지만, 또한 그것에 맞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주의에서(그리고 『어셈블리』에서도 역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변증법에 맞서 재발견했던 것은 존재론, 계급투쟁, 주체화의 가능성입니다. 1968년 이전의 마르쿠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스-위르겐 크랄(Hans-Jürgen Krahl)의 작업입니다. 그는 아도르노의 학생이었는데 197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급투쟁의 형성에 관한 매우 중요한 작업인 『구성과 계급투쟁』(Konstitution und Klassenkampf)(사후 1971년에 출간)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이탈리아에서 하려 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그의 담론은 정치적 행동, 해방, 총체적 착취와의 단절을 향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비물질적·지적 노동에 대한 발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카치 역시 이러한 발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는 메를로 퐁티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기원한 기본틀을 현상학과 맑스주의의 교차 속에서 발견합니다.

 

: 당신이 지식인, 사상가, 연구자, 비판적 이론가로서 미래 세대에게 과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요?

답 :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내 인생에서 근본적인 것, 내 삶에서 매우 특별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 모든 것을 연결하고 긍정적인 어떤 것, 그것은 내가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다는 사실입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철학자로서도, 사회학자로서도, 때로는 심지어 직업 정치인으로서도, 말하자면 내가 수행한 어떠한 사회적 역할에서도 전적으로 나의 코뮤니즘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 일은 그 어떤 것도 맡지 않았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언제나 코뮤니스트 투사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미래에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코뮤니즘이 다시 사람들의 삶에서 중심적인 요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공통주의 투사야말로 지상의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

 

 




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연결된 다중까지


  • 저자  :  Amador Fernández-Savater, Guiomar Rovira
  • 원문 : “No Future: From Punk to Zapatismo and Connected Multitudes (2018.08.07)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스페인어 원문 : https://www.eldiario.es/interferencias/punk-zapatismo-multitudes_conectadas-red-accion_colectiva_6_748285172.html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이 텍스트는 기오마르 로비라(Guiomar Rovira)의 책 『네트워크화된 행동주의와 연결된 다중들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 행동』(Activismo en red y multitudes conectadas: Comunicación y acción en la era de Internet)(([정리자] 영어로 ‘Networked Activism and Connected Multitudes’라고 옮겨져 있지만, 영어본은 아직 없는 듯하다.))의 출판기념회에서 있었던, 아마도르 페르난데스-싸바떼르(Amador Fernández-Savater)와 로비라의 인터뷰(2017년 9월 19일 UAM-Xochimilco에서 행해짐)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원래 스페인어로 된 인터뷰를 후아레스(Gerardo Juárez)가 영어로 옮겼고 페르난데스-싸바떼르가 편집했다. 영어본을 옮기다보니 의미가 잘 안 통하는 부분들이 있어서 스페인어 원본을 보고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미의 손실이 다소 생긴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본만으로 옮기자니 능력도 시간도 부족해서 결국 영어본을 우선으로 하고 스페인어본으로 확인하는 방식을 취하다보니 분류상 ‘번역’보다는 ‘정리’의 형태로 귀착되게 되었다. 물론 정리로서는 매우 상세한 것에 해당한다.

 

[스페인어 편집자의 설명]

90년대 일어난 소련의 몰락 이후 ‘단일한 사유’(([영역자주1] ‘단일한 사유’(Pensée unique)는 프랑스 저널리스트 칸(Jean-François Kahn)이 만들어낸 말로서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에의 순응을 가리킨다.))에 대한 말이 많이 돌았다. 이는 시장 민주주의를 공통적 삶의 상상 가능하고 식별 가능한 유일한 틀로 제시하는 담론이다. 촘스키(Noam Chomsky)가 말했듯이, 이 내러티브가 침투하는 유일한 방식은 정보와 미디어의 집중, 즉 발언권과 가능한 것의 상상의 집중이었다. 이는 바로 신자유주의의 번성기였다.

로비라는 『네트워크화된 행동주의와 연결된 다중들 ―인터넷 시대의 소통과 행동』에서 어떻게 이 신자유주의라는 독백에 물음을 던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힐지에 대해서 말한다. 책은 인터넷의 개방적이고 탈중심화된 구조를 활용한 활동가 네트워크들의 출현에서 시작한다. 이 네트워크들은 공식적 내러티브와 구분되는 이미지·단어·감정을 보급할 새로운 테크놀로지 도구들을 창출했다. 이는 사빠띠스모와 반지구화운동의 시기였다. 나중에 웹2.0과 함께 네트워크들의 정치화된 활용이 사회화되어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는 연결된 다중의 시대이며 여기에는 15-M을 비롯한 운동들이 포함된다.

기오마르의 서술은 일반적인 학술적 글들과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이 책은 비판적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이다. 일단 사람들이 전유했을 경우의 테크놀로지가 가진 정치적 활력이 긍정된다. 저자는 권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우리의 활력부재에 대해서 말하지도 않고 우리가 지배당하고 조작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며 우리가 희생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행해진 것, 행해지고 있는 것, 행해질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녀는 세상을 활력의 관점에서 본다.

둘째, 이 책에는 몸으로 겪은 체험이 담겨 있다. 저자의 개인적 경험 ―펑크, 사빠띠스모(Zapatismo) 혹은 멕시코의 ‘나는 132번째다’(#Yosoy132) 운동을 거쳐간다― 이 성찰의 바탕을 이룬다. 로비라는 까딸루냐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서 1994년 이래 멕시코에 와서 살고 있다. 그녀는 여러 글들의 저자이며 멕시코시티의 우암-호치밀꼬 대학(UAM-Xochimilco University)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아마도르

당신의 책에서 말하는 최초의 역사적 시기는 ‘활동가 네트워크들’의 시기입니다. 그 근본적인 구성요소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이 80년대에 바르셀로나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경험한 펑크(punk)입니다. 펑크는 어떻게 이 네트워크들의 창출에 영향을 미쳤나요?

 

기오마르

거기서 출발하시니 좋군요. 펑크가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는 ‘미래는 없다’입니다. ‘미래는 없다’에 집중하는 것은 새로운 정치를, 훨씬 더 예시적인 정치를 열어젖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꿈꾸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그것을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시작하기 위해서 지시나 승인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음악과 공간을 전유했습니다. 펑크에서는 누구나 기타 등을 들고 노래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든 가까이 놓인 것을 가지고 하는 DIY 정신을 발견합니다. 문화적인 것이 정치적이 됩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약속을 위해 늘 지체시키고 희생시키는 체제의 정해진 경계를 떠나는 하나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팬진(fanzine)(([정리자] ‘팬진’(fanzine = fan a+ magazine/-zine)은 특정의 문화현상(문학 장르나 음악 장르)의 열광자들이 관심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비전문적이고 비공식적으로 발행하는 잡지이다. 이 용어는 1940년 10월에 쇼브네(Russ Chauvenet)가 발행한 과학소설 팬진에서 처음 사용되어 과학소설 열광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다른 공동체들이 이를 채택했다. (영어위키피디아)))에서 건물점거(squatting)까지 펑크는 매우 풍요롭습니다. 미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살아야 합니다. 집이 없기 때문에 건물을 점거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운동은 초국적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이거나 국민적인 것이 아니라 도시의 공간들에, 네트워크들의 창출에 각인되었습니다. 확장된 의미의 공동체인 것이죠. 지역을 전유하는 전지구적 운동이며, 누구나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는 정치이고, 문화 및 소통형태를 허가를 구할 것도 없이 구축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펑크는 해커 정신을 미리 구현합니다. 그 당시 저는 레트라 아(Lletra A)라고 불리는 잡지에서 활동했는데, 우리는 전부 손으로 자르고 붙여서 이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또 바르셀로나에 점거활동을 위한 매우 중요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수한 자기조직된 사회센터 엘 안티(el Anti)를 열었는데, ‘미래가 없으니 우리의 삶을 지금 구축하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우리의 활동은 대항정보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변부에 생태계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사빠띠스모와 ‘희망 인터내셔널’(the Hope International)

 

아마도르

활동가 네트워크들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둘째 계기가 있는데요, 바로 사빠띠스모(Zapatismo)입니다. 사빠띠스모는 펑크와 달리 ‘어두운’ 운동이 아닐 것입니다. 사빠띠스모는 메트로폴리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희망의 지평을 엽니다. 사빠띠스모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소통의 관계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해주실 수 있나요?

 

기오마르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우리는 ‘역사의 종언’을 특징으로 하는 일극 세계에서 살았음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가장 놀랍고 뜻밖의 장소에서 반란이, 희망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운동이 일었고 저는 이 운동에 완전히 빨려들었습니다.

사빠띠스모의 의의는 전지구적인 공통의 틀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당시는 투쟁 전체에 의기소침의 분위기가 팽배할 때입니다. 전지구적으로 좌파가 기가 꺾이고 남미의 게릴라들이 침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고립된 저항의 과정들로부터 우리를 구하는, 물음을 던지는 틀이 탄생한 것입니다. 많은 상이한 투쟁들로 하여금 공유된 하나됨의 감각과 공동의 적을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능동적 기동의 틀입니다. ‘인류 대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 틀이라고 사빠띠스따는 말했습니다. 누가 이 틀을 제안했나요? 토착민 공동체나 저항이 혹은 투쟁의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하는 세상의 저 구석 치아파스에 있는 가장 망각되어 있고 가장 규모가 작은 토착민들입니다.

이 일은 전지구적으로 미디어의 관심을 받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매스미디어(신문, 라디오, 텔레비전)들이 보도를 했지요. (월드와이드웹은 태어난 지 갓 1년 되어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신문과 라디오는 이 기사를 더 이상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반란을 세상을 위한 희망의 장소로 지지하면서 치아파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함께하고 그것에 개입하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마도르

이때 인터넷의 활용이 일어났지요? 당시 인터넷은 새로운 소통 수단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기오마르

인터넷의 활용은 거의 자연스럽고 자연발생적인 일이죠. 전통적인 미디어로부터의 정보가 없기 때문에 대안 미디어가 그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주류 미디어에, 주도적인 신문들에 참여하면서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대안적 라디오 방송국들, 대안 미디어, 팬진들에도 많은 정보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 미국인들이 (미국인들도 때로는 좋은 일을 합니다!) 우리에게 ‘인터넷을 사용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들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돌아다니면서 컴퓨터에 모뎀과 이상한 장치들을 설치하는 최초의 해커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매니아들이 뭐 때문에 야단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안 되어서 우리 모두 인터넷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두’라고 말했을 때 이는 저널리스트들, NGO들, 활동가들을 지칭합니다.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혁명을 다루는 최초의 웹사이트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몇몇 미국 학생들은 상황을 좇으면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성명서들을 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성명서들은 팩스에 의해서 보내졌으며 그 다음에 ‘Ya Basta’라고 불리는 웹사이트에 공표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성명서들을 영어로, 프랑스어로 그리고 또 다른 언어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정보가 공유되기 시작하고 정보의 비계가 치아파스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축되었습니다. 이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멕시코 정부는 국제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밀어붙이는 데 열중했는데 이제 상황이 달라진 거죠. 그런데 정보만이 유통되는 유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치아파스로 갔고 공동체들을 방문했으며 더 많은 정보를 생성했습니다. 주고받기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보를 받은 사람들이 토착민 반란을 지지했고 토착민 반란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이는 세계의 많은 곳에서 반향을 찾고 차이들을 넘어 공통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호소였습니다.

 

발터 벤야민 : 무엇보다도 활력

 

아마도르

활동가 네트워크에서 연결된 다중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전적인 저자 벤야민에게서 당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서 잠깐 질문을 하고 싶군요. 벤야민의 어떤 점이 그를 일종의 우군으로 보게 만들었나요?

 

기오마르

제가 벤야민에게서 발견한 것은 매우 은유적이고 시적이며 정치적 영감입니다. 그는 암흑과도 같은 자신의 시대에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게 빛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벤야민은 저로 하여금 매 순간, 매 장소에서 활력을 발견하고자 하는 저의 욕구를 이해하게 해주었습니다.

기술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기술은 자연과 우리의 관계가 적대적이지 않은, 더 충만한 세계에서 살 가능성을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생사를 가르는 폭력에 처하도록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기술의 활력을 왜곡하는 것은, 인위적으로 창출된 고통과 희소성에 기반을 둔 약탈적 자본주의입니다. 삶을 축출하고 강탈을 통해 축적을 한다는 비난은 인터넷에 가해질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류에 복무하지 않고 희소성을 약탈적으로 산출하는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전지구적 체제에 가해져야 합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다른 가능한 근대를 구상하라고 우리에게 권유합니다.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벤야민은, 우리 모두가 기술을 전유해서 능동적 주체가 되어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더 충만한 삶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민주화 가능성이 생성되는 것을 봅니다. 「역사철학에 관한 테제」에 나오는 ‘지금 시간’(jetztzeit)―모든 것이 열리는 일종의 현현이 ‘지금 이곳’에 성좌처럼 빛나는 순간―이라는 생각도 주목할 만합니다. 성좌라는 생각은 제 책에서 계속 나옵니다. 우리보다 앞서간 사람들은 정의가 이루어지도록 하라고 우리에게 청합니다. 그런데 운동에 단일한 하나의 계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운동이 제각각 고유한 역사를 구축하고 그 빛나는 순간들을 창출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구체화합니다. 이는 정치적인 것의 바탕에는 과거에의 열림도 존재한다는 점을 매우 창조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벤야민은 영감의 원천입니다. 그는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인 뽀르보우(Portbou)에서 죽었습니다. 올해 여름 나는 그의 무덤을 보러갔습니다. 그는 끔찍한 삶을 살았고 그가 응당 받아야 하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당대의 가장 낙관적인, 가장 창조적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고통을 겪는 사람이 열림을, 가능성을, 활력을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연결된 다중 :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진 테크놀로지

 

아마도르

처음에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가 있었고요 활동가들이 테크놀로지를 전유했습니다(펑크, 사빠띠스모, 반지구화 운동). 그 다음 운동은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근본적으로 변형시킨 것으로서 ‘연결된 다중들’(connected multitudes)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행에 대해서 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오마르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의 소통 환경은 주로 전투적 활동가들, 즉 정치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채워져 있습니다. 연결된 다중들로의 이동은 주된 목소리가 더 이상 활동가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크게 특징지어집니다. 사회적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정치화를 거치거나 어떤 특정한 활동가 공간에 속하지 않고 발언권을 가집니다. 이는 이윤을 추출하는 네트워크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처럼 ‘정치적 올바름’에서 벗어난 공간들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멕시코의 ‘나는 132번째다’(#Yosoy132) 운동을 예로 들어봅시다. 시위를 시작했던 모든 이베로아메리카 대학의 학생들이 이전에 이미 정치화되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느꼈고 뻬냐 니에또(Peña Nieto) 대통령의 대학 방문에 대한 말이 나온 후에 불만을 표현해서 미디어에서 들리게 할 도구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유튜브에 업로드한 비디오가 인상적인 영향을 미쳐서 사람들의 분노를 고조시켰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공감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운동이 UNAM(([영역자주2] 멕시코 자율대학(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 or National Autonomous University of Mexico)은 연구개발에서 세계 최고의 대학 가운데 하나이다. 더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 참조.))에서 혹은 오랫동안 부당한 상황을 비판하며 이를 갈던 사람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전혀 뜻밖의 예측할 수 없던 집단에서 나올 수 있었는지, 모든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그 투쟁에서 마누엘 까스뗄스(Manuel Castells)가 ‘대량자주소통’(Mass Self Communication)이라고 부른 현상이 산출됩니다. 누구나가 정보 생산자, 리믹스하는 사람, 리트윗하는 사람이 되고, 누구나가 대화에 참여하고 가령 그래픽 아트 같은 자신의 능력으로 운동을 강화합니다. 내보내는 과정과 받아들이는 과정의 구분이 흐려지며, 기원, 권위, 원(原)저자 같은 오래된 관념들의 견고성이 감쇠됩니다.

 

아마도르

당신의 책은 대안적 소통의 단계들에서 일어난 이 이행의 긍정적 성격을 부각시킵니다. 이는 민주화 과정입니다. 만일 이전에 네트워크들이 활동가들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면, 이제 테크놀로지의 정치적 사용은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는 그 사이에 해커 정신에서 결정적인 요소들인 테크놀로지 기반시설과 테크놀로지 주권의 중요성을 시야에서 놓치고, 시스템을 우리가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네트워크들 덕분에 얻게 되는 내용의 보급에서의 ‘편의’만을 보는 것은 아닐까요?

 

기오마르

당신이 언급한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치는 것에 대해 당신이 말한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군요. 내 생각에 스노우든과 위키리크스의 폭로 덕분에 우리는 네트워크를 별 의식없이 자동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더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데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우리는 사회적 네트워크에서의 감시, 통제 및 데이터 전유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운동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높은 의식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며 우리가 이에 도달한 것은 일부 해커들의 활동 덕분입니다. 나는 스노우든, 첼시 매닝, 줄리언 어산지를 해커들로 봅니다. 그들은 왜 우리가 조심해야 하고 토르(Thor)를 사용하고 프리소프트웨어를 사용해야 하는지를, 왜 우리가 안전한 비밀번호를 가질 필요가 있는지를, 그리고 웹을 책임감 있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결과가 어떨지 보기로 하죠.

 

함께 하기

 

아마도르

지식인들이 손가락을 올리면서 우리에게 ‘잘못 되고 있으니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테크놀로지의 더 많은 사회적 전유, 더 많은 학습, 더 많은 테크놀로지 리터러시(technology literacy), 더 많은 핵랩들(hacklabs)입니다. 내 생각에 이는 당신의 책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당신은 인터넷 외부에서는 해결책이 발견되지 않으리라고 주장하면서도 인터넷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기오마르

테크놀로지에 대한 담론 차원의 비판은 결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 합니다. 우리는 공간들을 전유하고 협동형태들을 구축하며 우리가 아는 것을 공유함으로써,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우리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고 전과는 다른 방식들을 생성함으로써 네트워크에서의 사회성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내 책에서 ‘해커 되기’라고 불렀습니다. 해킹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에게 해킹은 테크놀로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해커는 무언가를 해체하고 그 다음에 새로운 것을 구축합니다. 블랙박스처럼 주어진 것을 해체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이죠. 이는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대학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시야를 넓히고 새로운 잠재력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해커페미니즘 전문가인 브리오네스(Fernanda Briones)는 ‘함께 해요’라고 말합니다.(([영역자주3] 원어로는 “Hagámoslo juntas”이다. 스페인어 어휘에는 성(젠더)에 따른 변화가 있다. “juntas”는 “함께”(together)의 여성형[복수]이다. 15M운동 이후에 기본형인 남성형(‘juntos’)보다 여성형이 더 자주 사용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젠더의 사람이든 젠더가 혼합된 집단을 서술하는 경우에는 여성형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아마도르

테크놀로지와 신체들의 관계, 즉 바이트의 세계와 원자의 세계의 관계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기오마르

온라인 세계와 오프라인 세계의 구분을 넘어서 모든 것이 온-라이프(on-life)로, 즉 삶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조우라는 신체적 경험이 열쇠입니다. 나가서 서로 바라보고 신체와 신체의 연결을 경험하는 것, 신체적 조우, 나타남의 공간들을 열고 신체의 민감함을 실험하는 것―이것이 내가 보기에 열쇠입니다. 이렇게 네트워크를 이루게 되면 수탈적인 자본주의와 접하고 있는 조건에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신체들의 조우가 탁월한 정치적 계기인 거죠.

내 생각에 신체의 민감성과 연관된 이 차원이 주의주의적 행동주의를 무언가 더 살아있고 덜 계획된 것으로 변형시켰습니다. 신체는 가시화되고 상호작용하며, 공락·정동·돌봄의 공간들을 창출하는 동시에 사적인 것을 정치화합니다. 현재 내 생각으로는 연결된 다중의 페미니즘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불가피해지는 페미니즘의 자유로운 전유와도 같은 것이죠. 그 어떤 해방운동도 여성들의, 페미니스트들의 오랜 투쟁에서 나오는 폭넓게 다양한 제안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신체를 통해 일어납니다.

나는 거리에서 조우하는 신체들과 네트워크를 통한 소통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종의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테크놀로지로 된 우리 자신의 연장부분을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정치와 연관해서 말하자면, 테크놀로지는 집단적 행동의 일부가 됩니다. 부가적이거나 상이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사이버공간 및 네트워크 행동은 항상 거리에서의 집회라는 맥락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동하기는 소통하기이며 소통하기는 행동하기입니다. 모든 것이 라이프 차원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두뇌들이 궁극적인 플랫폼입니다. 신체적인 것의 외부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트워크들이 신체적인 것의 외부에 있다는 생각이 매우 강한데요, 나는 이와 반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