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채취인들은 어떻게 평등주의 문화를 유지했는가
- 저자 : Peter Gray PhD ((Peter Gray, Ph.D. : 보스턴 컬리지의 연구교수이며 『자유롭게 배우기』(Freed to Learn, Basic Books, 2013)와 『심리학』(Psychology, Worth Publishers)의 저자이다.))
- 원문 : How Hunter-Gatherers Maintained Their Egalitarian Ways (2011. 5. 19)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그레이 박사는 이 글에서 수렵채취인들이 평등주의적 문화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세 가지 이론을 소개한다. 그는 이 셋 모두가 모두 옳다고 한다.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이 아니라 보완적인 이론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전자가 핵심이 아니고 문화가 핵심이라고 한다.
[수렵채취사회의 특징들]
그레이 박사는 세 이론을 소개하기 전에 ‘수렵채취인들이 평화적인 평등주의자들이었는가?’하고 묻고는 ‘그렇다’라고 간결하게 답하고 그 근거를 설명한다.
20세기에 인류학자들이 근대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은,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수렵채취사회들을 연구했는데, 이 사회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혹은 다른 어디든, 정글에서든 사막에서든 여러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20~50명(아이들 포함)의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 사냥감과 식용 식물을 쫓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동했다. 이웃 무리들에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었고 무리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들 사회의 대부분은 전쟁을 몰랐으며, 전쟁이 있는 경우 이는 수렵채취인들이 아닌 다른 호전적인 집단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이들의 사회의 주된 문화는, 개인의 자율, 비지시적(non-directive) 육아법, 비폭력, 공유, 협동,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문화였다. 그 핵심 가치는 개인들의 평등이었다.
근대인들의 평등관은 수렵채취인들의 평등관에 미치지 못한다. 수렵채취인들에게 평등은 각 개인이 식량을 발견하거나 포획하는 능력과 무관하게 식량에 대한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식량이 공유되었다. 모든 물질적 재화가 공유되었기에 개인들이 가진 부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무얼 할지를 말할 권리가 없었고 각자 자신의 결정을 했다. 이에 따라 부모도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비지시적으로 아이를 키운다. 집단의 결정도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상사, 윗사람, 우두머리가 없었다.
이러한 특징은 정치적 색깔이 서로 다른 많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보고된 것이다. 물론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모든 문화가 똑같이 평화적이고 똑같이 평등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들은 같다. 만일 당신이 ‘호전적인 원시부족들’에 대해서 읽거나 노예를 둔 토착민들에 대해서 읽거나 남녀 사이의 조악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족 문화에 대해서 읽게 된다면, 이는 수렵채취인들의 무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원시농경 사회와 수렵채취 사회를 혼동하여 수렵채취인들이 폭력적이고 호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샤농(Napoleon Chagnon)이 『사나운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가진 자신의 책에서 농경사회 이전의 선조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제시하려고 해서 유명해지는 바람에 이런 잘못된 식으로 자주 거론되는 남아메리카의 야노마미(Yanomami) 족은 당시 수렵채취인들이 아니었고 또 그 이전 수 세기 동안 아니었다. (그레이 박사는 샤농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야노마미 족은 수렵과 채취를 좀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심고 경작하고 수확하는 바나나와 플랜턴(plantain, 열대의 파초 속 식물)에서 칼로리를 섭취한다. 더욱이 이들은 근대 문명과 접촉이 없기는커녕 정말로 사악한 스페인들, 네덜란드인들,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침략당하고 학살당해서((Salamone, F. A. (1997). The Yanomami and their interpreters: Fierce people or fierce interpreters? 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좀 ‘사나워’ 진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수렵채취인들의 삶의 방식은 그 뒤를 이은 농경사회의 삶의 방식과 달리 강렬한 협동과 공유에 의존했으며 강한 평등주의적 정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따라서 수렵채취인들은 어디서나 강한 평등주의적 정신을 유지했다.
그럼 수렵채취인들은 어떻게 이런 삶의 방식을 유지했을까?
[첫째 이론]
이론 1: 수렵채취인들은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는 ‘거꾸로 된 지배’(reverse dominance) 제도를 실행했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인들이 수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인 아니라 능동적으로 평등주의적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Richard Lee)에 따르면 그들은 맹렬하게 평등주의적이었다.((Lee, R. B. (1988). “Reflections on primitive communism”. In T. Ingold, D. Riches, & J. Woodburn (Eds), Hunters and gatherers 1, 252-268 Oxford: Berg. )) 그들은 누가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 하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참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첫 방어선은 조롱이었다. 누가 (특히 젊은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하려고 시도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적절한 겸손을 보이지 못하면,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특히 어른들)이 그 사람을 적절한 겸손을 보일 때까지 조롱했다.
리가 연구한, 수렵채취인 집단의 규칙적인 관행은 ‘사냥한 고기 모욕하기’이다. 사냥꾼은 자신이 잡아온 고기를 공유하면서, 살도 없고 변변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적절한 겸손을 표현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그렇게 말한 다음 사냥한 사람을 조롱한다. 리가 집단의 연장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가 사냥감을 많이 잡으면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랑을 하는 사람을 거부합니다. 언젠가 그의 오만이 그로 하여금 누군가를 죽이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의 고기가 변변치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심장을 식히고 그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크리스토퍼 보엄(Christopher Boehm)은 이런 관찰에 기반을 두고 수렵채취인들이 그가 ‘거꾸로 된 지배’라고 부른 관행을 통해 평등을 유지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유인원의 모든 친척들에게서 보이는 표준적인 지배 위계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지만, ‘거꾸로 된 지배’에서는 다수가 힘을 합하여 그들을 지배하려는 자의 에고를 수축시킨다.
보엄에 따르면 수렵채취인들은 평등주의적 정신을 어기는 행위들을 부단히 경계한다. 자랑을 하거나 공유하지 않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은 공격적 행동을 멈출 때까지 성가심을 당하며, 성가심이 효과가 없으면 그 다음 단계로 따돌림을 당한다. 무리는 마치 평등 정신을 어긴 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는 대부분 효과가 있다.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 정신을 어긴 자는 정상 상태로 돌아오거나 다른 무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새로 찾은 무리에서 정신을 차릴 수도 있고, 같은 일을 반복할 수도 있다. 보엄은 자신의 1999년 책 『숲 위계질서』(Hierarchy in the Forest)에서 이 ‘거꾸로 된 지배’ 이론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한다.
[둘째 이론]
이론 2: 수렵채취인들은 인간 본성에서 놀이를 좋아하는 측면을 양성함으로써 평등을 유지했으며, 놀이가 평등을 증진한다.
이는 이 글의 저자인 그레이 박사의 이론이다. 2년 전에 그가 American Journal of Play에 게재한 논문(( Gray, P. (2009). “Play as a foundation for hunter-gatherer social existence”. American Journal of Play, 1, 476-522.))에서 이 이론을 처음 소개했다고 한다.
사회적 놀이(두 명 이상이 참여하는 놀이)는 반드시 평등주의적이다. 공격과 지배의 정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보다 더 잘 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이 인식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상대방 위에 군림하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두 원숭이가 장난으로 싸움을 하는 경우에 강한 쪽이 일부러 접어주고 싸우며 상대를 다치게 할 공격을 피한다. 진짜 싸움과는다르다. 만일 강한 쪽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약한 쪽은 도망갈 것이고 놀이는 끝난다. 따라서 놀이의 충동은 지배하려는 충동의 억제를 필요로 한다.
수렵채취인들은 그 사회적 활동의 모두에서 놀이의 태도를 일부러 양성함으로써 지배하려는 경향을 억제하고 평등주의적 공유와 협동을 촉진했다. 포유류 조상으로부터 인간이 물려받은 놀이 능력이 역시 포유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배하는 능력을 가장 잘 상쇄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레이 박사의 놀이 이론은 대체로 인류학 문헌들의 분석에서 거둔, 놀이가 수렵채취인들의 사회적 삶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대체로 기반을 둔다. 그들의 사냥과 채취는 놀이로서의 성격을 띠었으며 종교적 믿음과 관행들도 그랬고 무리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고기를 나누고 재화를 공유하는 관행도 그랬다. 심지어는 집단 내에서 규칙을 어긴 자들을 해학과 조롱을 통해 처벌하는 가장 공통적인 방법에서도 그랬다.
[셋째 이론]
이론 3: 수렵채취인들은 새로운 세대에 신뢰와 수용의 감정을 생성하는 육아 관행을 통해 평등 정신을 유지했다.
수렵채취인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육아 스타일을 택했다. 그들은 유아들/아동들의 본능을 신뢰했으며 그래서 언제 돌봐줘야 하는지를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고 스스로 놀고 탐구하면서 학습하도록 허용했다.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지 않았으며 꾸짖는 경우도 드물었다. 수렵채취인들의 도덕적 성격이 이 육아법에서 온다고 제안한 연구자는 엘리자베스 마샬 토머스(Elizabeth Marshall Thomas)이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육아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친절하게 다루어진 아이들은 응석받이가 된다는 말을 때때로 듣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런 방법이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 좌절이나 염려로부터 자유롭고, 즐겁고 협동적인 아이들은 모든 부모들의 꿈이다. 그 어떤 문화도 이보다 더 나은, 더 똑똑하고 더 호감이 가며 더 자신 있는 아이들을 키운 적이 없다.”((Thomas, E. M. (2006). The old way. New York: Farrar, Straus & Giroux. p 198-199))
이 육아 이론을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이론은 직관적으로 말이 된다. 처음부터 부모들이 신뢰하고 잘 대해준 유아들과 아동들이 자라서 남을 신뢰하고 잘 대해줄 것이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필요가 하나도 혹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다.
육아 이론은 나의 놀이 이론과 겹친다. 수렵채취인들은 아이들이 하루 종일 놀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삶이 놀이라고 믿게 되고 어른으로서 맡게 되는 과제들 모두를 놀이의 분위기에서 수행하게 된다. 이 분위기가 지배하려는 충동을 상쇄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그레이 박사의 주장의 핵심은 유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있다. 인류는 분명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평등주의적이 될 유전자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호전적이고 전제적이 될 유전자적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혹은 그 사이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만일 위 세 이론이 옳다면 그리고 우리가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세 이론이 제시하는 바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레이 박사의 생각이다. 즉 ① 에고의 바람을 빼는 방법을 찾을 것. ② 삶의 방식을 놀이에 더 가깝게 만들 것. ③ 아이들을 신뢰하는 방식으로 키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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