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지성의 거처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2015)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bitazione del general intellect. Dialogo con Antonio Negri sull’abitare nella metropoli contemporane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4장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A Dialogue between Antonio Negri and Federico Tomasello on Living in the Contemporary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이다.
문[또마셀로]
1년 전에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 시작했고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로 계속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보자.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분석해보자. 이 테마를 고정자본과 ‘노동의 장소’에 일어난 변형을 고려하여 논의해보자. 오늘날 일반지성을 발휘하는 노동의 일부가 재택노동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공장-메트로폴리스의 유비(가치창조 메커니즘이 전체 메트로폴리스로 확대되는 것)를 집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삶과 거주의 기술에서 출발하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네그리]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항상 대략적인 근사치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문제에 접근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살아가기와 노동하기(vivere e lavorare)가 가치의 새로운 형태가 되는 곳이다. 사회의 디지털화와 도시의 컴퓨터화의 출현과 함께 건축술적 요소들과 소통네트워크들이 주택의 짜임새에 삽입되면 집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도시가 노동의 패턴과 관련된 수천 가닥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노동력의 불안정성과 이동성 때문만이 아니라 통신이 거주지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특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지성이 집을 발견하여 어디선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초라하다. 1973년의 위기 이래 도시의 리듬은 더 이상 포디즘의 리듬―8시간 노동, 여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협동의 도시 규모로의 일반화와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노동의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 공장이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일의 장소가 공장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현대적 삶형태를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생산이 이제 삶형태와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말이다. 노동형태와 삶형태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는데 특히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추상적 협동의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는 공장에서 우세했던 물리적 근접성과 크게 다르다. 상사는 물리적 근접성에 규율(훈육)을 행사할 수 있지만, 추상적 협동에는 기껏해야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세하게 지시를 받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자유의 환경에서, 삶과 노동의 체제(una costituenza di vita e di lavoro)에서, 자율적 기획의 장치(un dispositivo di progettualità autonoma)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집에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을 보호처(un riparo, a shelter)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문
들뢰즈가 말한 ‘훈육에서 통제로’라는 이행 패러다임은 우리가 논의한 공장-메트로폴리스와 집이 노동의 장소가 되는 현상을 서술하고 정의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가?
답
훈육과 통제를 병치하는 것은 줄곧 사태를 보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삶정치적 영역을 침범한 착취형태를 놓고 볼 때에는 좀 낡은 것이 되었다. 이른바 통제의 기능은 노동의 삶정치적 형상을 앞질러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bios)을 강조하는, 즉 순전한 통제의 규정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강조하는 ‘삶정치’적 통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확연한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적(macchinici, machinic) 도구들과 복지구조들 및 화폐와 관련된 조건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을 산업적 훈육과 삶정치적 통제의 구분으로 매개 없이 환원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경향이 가사활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편, 포스트포디즘적 가치창조가 삶정치적 차원과 결합되는 곳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불안정 노동형태에 종속되는 동시에 매우 낮은 임금의 조건에 종속되는 위기의 국면들에서, 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통제의 가장 명시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집은 노동의 장소이자 도구에서 부채라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금융적 착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정치적 영역은 욕망의 확장 공간이자 생산의 새로운 관행의 공간에서 감옥이 되고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한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모였던 페미니즘 투사들과 이론가들이 삶정치적인 영역의 이러한 모호성을 그리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훌쩍 앞서 나갔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삶정치적 영역이 사회적 노동의 핵심적 열쇠가 되기 한참 전에 이 여성들은 노동계급 임금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의 노예상태에서 삶정치적 영역이 행사하는 통제의 복잡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분배가 사회 전 영역을 가로질러 재조직화되어 여성들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것을 투쟁을 통해서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이 이윤에 맞추어진 사회에서 생존만이 아니라 해방 또한 보장하도록 의도된 임금이며 권리였다. 그 성공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나는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시기에 착취와 삶정치적 통제의 조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적대가 그 아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려고 이 사례를 활용할 뿐이다.
문
①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성(양가성)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개별화·착취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화·자율일 수도 있는 ‘장치’(dispositif)를 인지노동이 집에서의 노동이 되는 과정에서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② 메트로폴리스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는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답
노동자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기술적 수단이 집에 있어야 하고 이 수단은 공장의 외부로 이동된 것이기에 일부든 전부든 노동자에 의해 전유된 것이어야 한다. 이는 건축물 구조가 기계가 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거처)의 기계적 구조(una struttura macchinica dell’abitazione)의 문제이다. 여기에 일련의 귀결들이 따른다. ① 특수한 가사노동. ② 집의 기계화. 50년 전만 해도 집에 기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 집에서 애정이라는 외관 아래 여성들이 힘들고 반복적인 일상노동을 강제로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오늘날 완전히 변했다. 기계화의 확산을 통한 변형으로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그 긍정적, 진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이행이 공간과 가족관계의 실질적 변경을 낳았다. 이렇듯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 요소와의 관련에서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담론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해방의 일정한 물질적 가능성이 이 과정에서 주어지고 집에서의 고정자본의 (여성에 의한) 재전유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해방적 공간을 여는 한편 그 공간을 소비에 종속시킨 자본관계의 모호성을 숨기거나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호성은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가는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모호성이며 임금구조에 본질적인 것이고 노동과정에서의 집의 특수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탈본질화되었고(de-essenzializzato) 더 이상 단순히 젠더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남편의 임금에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은 않는 관계의 잠재성(virtualità)에 열려 있다. 이는 자유의 영역은 아니며 단지 해방의 가능성일 뿐이다.
문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부채 메커니즘이 더 확연한 성격을 띠고 그 지형에서의 투쟁이 더 의미심장해지는 장소이다. 아다 꼴라우(Ada Colau)를 바로셀로나의 시장으로 만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la Plataforma d’Afectats per la Hipoteca) 같은 경험이 그 사례이다. 이런 투쟁에 대해서 논평을 해 달라.
답
이제 문제의 핵심에 이르렀다. 집이 노동장소가 되는 경우 (착취장소이지만 동시에 가능한 해방의 장소가 되는 경우) 그 집이 직접 관여되는 주체화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강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이 가사노동을 착취에 종속시켰을 때의 그 이중성과 부합되는 이중성,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일반적인 이중성이다. 두 가지 방향의 착취가 있다. 하나는 이 기계화된 집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착취이다. 다른 하나는 집을 주요 활동장소로 삼는 노동자들이 종종 부채상태에 빠질 때 이루어지는 가치추출 메커니즘이다. 첫째 경우에는 노동자가,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가 소진(소비)된다. 둘째 경우에는 자본이 협동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를 금융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출한다. 그런데 자본의 상대로서 기능하는 노동의 자율성은 항상 증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해방을 위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중적이다. (이전에도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럴 수 있다.) ① 한편으로는 노동장소에서 착취에 맞서는 특수한 투쟁이 있으며 ②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추출주의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이 있다. 착취와 추출의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문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복잡해진다. 이 형상은 생산하는 공통적 생산 활동을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재화의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것, 집단적 가치와 생산적 특이성들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오늘날 추출적 착취란 공통적인 것의 착취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협동 네트워크들의 착취이다. 현재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투쟁은 이 새로운 지형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현재 투쟁하는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는 이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특히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접세와 간접세에 맞서는 싸움들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고 일반화된 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 특히 가사노동의 인정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 부채에 대항하는 싸움(특히 그것이 주택구매와 연관되는 경우)이 있다. 모기지 시스템에 맞서서, 달리 말하자면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 부과되는 불이익에 맞서서 아다 꼴라우가 이끈 투쟁 같은 것들이다. 이는 직접 행동을 통해 수행된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적 감성이다. 이는 더 이상 단지 철거에 맞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적 착취자들을 폭로하는, 철거 작전에 동원된 판사, 집행리(執行吏), 경찰, 은행가들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즉 특수한 재화의 방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많고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의 도전이 가늠된다.
문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공간 산출’의 특수한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최근에 널리 퍼진 도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식민화과정에 대한 논의와 교차한다.
답
내 생각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위에 이론을 세움으로써 문제들이 보통 잘못 제시된다. 문제가 개별적이면 이론도 개별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리고 건축가들 대다수의 머릿속에서는) 도시가 투기와 부동산 수입에 내맡겨진 대규모 서비스로서 제시된다. 메트로폴리스, 혹은 도시 일반은 식민화 혹은 공간성 산출의 지형이 된다. 공간은 계급적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고 세분된다.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여러 측면들에서 발현된다. 이는 도시 공간의/에서의 장소들(topoi)의 탈영토화 및 위계화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확산되는 시초 축적 같은 것이 추출적 폭력의 결정적 행사를 통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금융의 투기적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둘째로 이 새로운 도시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자의 관점에서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 생각에는 르페브르가 1970년대에 노동자들의 도시 진출을 정확하게 감지한 듯하다. ‘도시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 포디즘 시기의 주장이기에 아마 오늘날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도시의 거시적 계획과 거주되는 공간의 미시사회학 사이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도시의 향유로부터 집의 향유, 주택의 향유,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점을 가졌다. 그 관계를 전도시켜서 ‘삶의 향유’를 도시 전체를 (메트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목표로서 긍정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는 도시 공간 전체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화하였다)의 이론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자주 망각되는 개념을 르페브르는 극히 중요하게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단성으로서의 도시, 조우·지식·즐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개념이다. 물론 항상 변하는 곳이며 또한 불완전한 곳이지만, 도시의 인간적 복잡성에 대한 이 인식은 집 난롯가의 기쁨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투사되었다. 특히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유일하지는 않지만 특히 이주자들)의 거대한 층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근대적 스타일로 기계화되었고 어엿하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을 누린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로스(Kristin Ross)의 훌륭한 책 『꼬뮌의 상상계』(L’imaginaire de la Commune)를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빠리 꼬뮌의 72일을 다음 세기에 새로운 지식과 예술·교육·문학의 창조를 낳는 데 봉사한 사건으로서 기록하는 데 덧붙여서, 그 행위자들의 삶형태에 혁명적 행동이 반영되고 계속해서 번성하는 이레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상상과 행복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시에르)를 낳는다. 이는 도시에서의 그리고 도시의 ‘혁명적 풍요화’라고 할 수 있다. 종속된 민중의, 노동하는 민중 일반의 관점에서 도시공간의 산출을 생각할 때에는 ‘다중의 프로그램’(una programmazione moltitudinaria)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중의 욕구와 특이성의 기쁨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들의 종합에 봉사하도록 도시를 조직하는 능력(una capacità di tenere insieme bisogni della moltitudine e gioie della singolarità, ed organizzare la città al servizio di una loro sintesi)을 가리킨다. 나는 또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들은 도시의 문제에 행복한 집단적인 해결을 보고자 하는 민중의 압박 혹은 욕망에 밀려서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나 억압적 프로그램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노동이 겹쳐질 때, 도시-메트로폴리스의 문제는 생태와 생산의 겹침의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 도시 공간성의 중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문
이로써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는 개념에 이른다. ‘스마트 시티’ 개념은 유한계급의 도시 이미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우리의 도시를 방대한 자본주의적 건설현장으로서 재형성하는 거대한 투자라는 물질적 벡터이기도 하다.
답
처음 ‘스마트 시티’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처음에는 사이버네틱 시스템들, 그 다음에는 디지털 시스템들이 완전히 가로지르며 재조직화하는 도시를 의미했다. 이 ‘스마트한’, 지적인, 영리한 도시 공간이라는 정의 뒤에는 두 개의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내러티브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낡은 실증주의적 전제들, 19세기의 기계론적인 지배자들의 실증주의인데, 이는 ① 도시가 위로부터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다는 생각과 ② 모든 도시적 관계들이 합리적이고 정보학-사이버네틱의 수단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내러티브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 이는 투기적이 아닐 때에는 상업적이다. 이는 좀 속임수이다. 생산물을 값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는 지성은 실은 통제일 뿐이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노동에 대한 통제, 사회적 착취에 필요한 통제, 질서가 부여된 과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통한 통제이다.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사회’는 내 생각에는 순전한 신비화이지만, 이것들은 소통의 흐름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에서 노동에 부여하는 새로운 중심성과 결부된 실재적 과정 속에 적대의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 소통의 구조적 연관의 증가는 자본에 의해 직접 추출되는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동시에 저항을, 따라서 자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것이 높은 정도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 저항은 의식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부정적 측면들과 연관된 일상적 파열 요소들의 연속(continuità di elementi di rottura quotidiani)으로, 분자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엿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20세기 초기의 1만 명 인구의 작은 시들의 고요함으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삶을 흔들어야 한다. 정신적 인도의 기능에서 교구 목사를 대신하는 텔레비전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고요함이다. 그래서 ‘스마트 시티’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해커들’을 필요로 한다. ‘해커들’이 없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저항과 조우의 가능성은 결코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문
‘스마트 시티’의 반대쪽에 도시 주변부, 파벨라, 슬럼, 방리유들이 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공통의 노동 및 저항의 장소들이 가진 생산적 성격과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덧붙일 말은?
답
이러한 주변부들에 대해 말할 때 가령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작가들이 발전시킨 분석·연구·견해들을 인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구들은 주로 도시에서 빈자들의 소외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위험성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통제에 맞서는 도발로 간주하고 소외된 장소에서의 해방을 위한 ‘장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가난한 장소들은 소외가 아니라 도시 삶과 메트로폴리스 노동의 공통적 질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삭제하기가 힘든 어떤 것이다.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추방자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현상학들이 있으며 이것들 모두 방리유를 총체적 배제의 장소들로 본다. 방리유 연구자로서의 나의 경험은 항상 총체화를 피하도록 나를 이끌었으며 노동 능력의 풍요로움과 공존 및 협동의 능력(둘 다 창조적이다)이 항상 나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 방리유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흡수되거나 정기적으로 거부된다. 기업들은 노동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재화(특히 문화적 재화, 음악, 삶형태 등) 둘 모두의 관점에서 이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과 추방이, 흡수와 배제가 계속적으로 교대되며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축적된 비참과 반란의 결단 사이에서 방리유가 띠는 적대적 중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정치적 리듬은 갈등에 차 있으며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다. 삶이란 그 내부에서도 갈등으로 차 있으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문
당신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놓은 추출주의는 맑스가 ‘시초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부단함과 연관이 있다. 이 시초축적을 맑스는 잔인한 유혈의 수탈 과정으로 묘사한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와 유사한 폭력이 가치 추출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대 메트로폴리스가 행사하는 고유한 폭력은 무엇인가?
답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포스트포디즘 메트로폴리스의 일부 이미지들을 왜곡했다. 특히 종종 반복되는 시초축적과의 유비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논의한 집의 특이화는 전적으로 추출 메커니즘들 내부에서의 일이며 금융자본의 순환에 메트로폴리스가 포섭된 상황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추출주의에 강하게 대립하는 다양한 반응들, 다양한 인식론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체제에서 ‘실질적 포섭’이라고 불렸던 것―가치화 과정의 전일적이고 밀도 높은 부과―이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명백한 공간적 불연속성들과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로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새로운 ‘시초축적’에 대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형식적 포섭’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구조의/구조 내에서의 최근의 이행이 부과하는 조건들 내에서의 일이다. 즉 원래적 의미의 시초축적 단계, 단순협업 단계, 그리고 대공업 단계 이후의 일이다. 만일 ‘시초축적’과 ‘형식적 포섭’을 상기시키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맑스가 150년 전에 서술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경된 새로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폭력이 행사되기는 하지만, 이 폭력은 지역 현실에 의해서, 생산적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고 상대화되고 조건지어진다. 이 생산적 협력은 영토 위에 분산된 노동력으로부터 도구들을 끌어온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일반지성과 대면할 때, 일반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 조직화와 대면할 때 가공할 한계를 만난다. 생산도구들 및 금융도구들과 아울러 치안도구들과 문화적 도구들을 통합적으로 이용하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통제가 재조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포의 산출이다. 띨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띠며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는 이 공포가 필시 현대 메트로폴리스에 행사되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 전염병에 대한 공포, 오염에 대한 공포 등등. 추출주의는 가장 최근의 폭력 형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고도의 폭력형태이며, 이전 단계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폭력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에는 불균형적인 결과를 낳는 폭력이다. 요컨대, 이 폭력은 예전의 내러티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다중의 힘 또한 자본이 명령을 발휘하기에 점점 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특히 그렇다.
문
젊은 맑스는 『자본론』24장을 쓰기 전에 이미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공유지였던 땅에서 농민들이 나무를 훔쳐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쓰면서 맑스는 사용의 문제, 민중의 관습적 권리를 언급했다. 이 사용의 문제가 그것이 공통적인 것과 가지는 관계라는 시점에서 추출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어떤 시의성을 가질 수 있는가?
답
사회형성체는 생산과정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산물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에 동반된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를 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통적인 것이 추출에 선행한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통적인 것 없이는 착취란 없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 노동을 공통화하는(comunalizzare il lavoro)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노동은 삶정치적 노동이다. 즉 얼마나 공통적이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협동적인지에 비례하여 가치를 획득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우리는 맑스가 시초 축적 및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 관련하여 분석한 것과는 정반대의 과정 속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순은 사적 부문의 명령을 받는 공적 부문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할 긴급한 필요 아래에서 조직된다는 데 있다. 공적 부문은 더 이상 사유화를 막아내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아니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를 위한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것(대법원)이 사적인 것(해당 다국적기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것(공간, 활동)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때 공적 부문은 보완적이었고 사적 부문의 보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적 부문이 손을 뻗지 않은 곳―건물 인프라, 철도, 공항, 학교, 병원 등―에서는 공적 부문이 앞서 나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서비스 구조들―자연 공통재를 통합한 공통적인 것―은 공적 부문에서 제거되어 다시 사유화되게 된다. 공통적인 것이 더 강한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사유화를 지향하는 명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의 지형이다.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투쟁의 지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문
이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이 세 번의 대화의 결론짓는 물음이다. ‘메트로폴리스적 정치’의 특수성을, 이 ‘공통의’ 총체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의 특수한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
오늘날 건축가들이 점점 더 ‘현장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노동자주의적 선택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그들의 작업 속으로 옮겨넣으려고 하는 동지들이 건축 분야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우렐리(Aureli)와 그의 그룹이다. 이들은 해방의 필요(다중의 욕구와 정치적 투쟁이 욕구)와 관련하여 보조적인 혹은 힘을 부여하는 위치에 스스로 자리하도록 건축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지금까지 건축의 보조적 성격은 항상 거대 부동산 자본주의의 특권으로서였다. 이제는 그것이 전문적 수준에서조차도 공통적인 것의 규범에 따라 지을 (순진하지도 않고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필요를 의미한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협동과 자유, 평등과 유대를 장려할 가능성, 자본이 도시에 부과하려는 강제된 동질화로부터 도시를, 그 특이성들의 다수성을 구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간과 이러한 매개변수 내에서 예를 들어 생태적 싸움은 자연의 방어로부터 ‘삼림헌장’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구축으로 돌아간다.[삼림헌장에 대해서는 이 블로글의 세 글 참조―정리자] 자본주의적 계획에 대안을 제안하는 방법은 여기서 적대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바로 이 지향 위에서 다중은 자신을 물리적이고 도시적인 캐릭터로서 조직한다. 훌륭한 옛 노동자주의의 관점을 따라서 나는 투쟁이 항상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가 중심적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급투쟁의, 그리고 또한 사회적 투쟁의 특권적 지형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실질적으로 공장인데, 다만 여기서 공장은 일반지성의 공장이다. 일반지성의 노동력은 노동계급의 노동력이 줄곧 그랬듯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유연하고 힘차다. 필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자. 나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미시와 거시가 기능적 관계에서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거칠게 맞서고 있음을 부각하면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나는 자본이 메트로폴리스에 부과하는 지배관계가 어떻게 저항을 받고 차단되고 대체적인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또한 고정자본에의 종속이 어떻게 전도되고 소외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슬픈 감정보다 우위에 서는지를 여러 수준에서 보려고 했다.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 나는 도시-메트로폴리스에서 추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가능한 공간 또한 보게 되었다. 기술적 변형에 의해 강화된 생산적 협동은 착취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강화되면 적대적 조직화와 근본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의 분석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2 이상이 극히 밀집된 메트로폴리스 지역에서 산다. 마키아벨리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서 서술했던 인류의 변형―‘짐승’에서 ‘시민’으로―이 이 지역에서 실현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현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의 생산자는 바로 자신들임을 발견하는 것, 도시에서 해석하고 건설하고 행동하는 데 대한 열쇠를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취받는 생산자의 상태에서 창조하는 생산자의 상태로의 유턴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쫓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길은 공통적이 되기(essere-comune)의, 공통적으로 살기(vivere in comune)의 근본적 변형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 자체가 혁명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삶형태(forme di vita mutualistiche), 사회적 연합들, 조우와 행동의 실험실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메트로폴리스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도시자치주의(자치도시들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는 프로그램)가 ‘어디서’를 가리켜준다. 이는 일반적이지만 종종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공장 투쟁과 옛 스타일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을 추출적 자본을 공격하는 양태로 옮겨놓기―이것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내일의 꼬뮌주의로 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맑스적 통찰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노동의 척도가 되기를 그치고, 노동이 부의 척도가 되기를 그칠 때, 그때 부는 더 이상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각자에게 진정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공통의 부에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꼬뮌주의 아래에서만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공통의 호화로움만이 진정한 호화로움일 것이다. [영역자 주석: Kristin Ross, Communal Luxury: 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Verso, London, 2015, p. 142.]
2015년 6월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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