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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연대와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

 



코비드19 팬데믹은 인간의 조건의 가장 근본적 특징을 상기시킨다. 국경을 가로질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를 말이다. 맹한 민족주의와 경쟁논리가 서둘러 막으려 하는 이 상기는 진정한 전지구적 정치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커먼즈”라 부를 정치기구를 말이다.

팬데믹의 교훈은 일어나리라 예견되는 지구 온난화와 일련의 재앙을 비롯한 인류가 대면할 다른 주요 문제들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전지구적 바이러스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우리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결코 우리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대면하도록 무장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을 정치적으로 재고하는 일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다.

바이러스로 입증된 인간적 연대

바이러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연대의 증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설명을 제공한다. 경제적 교류,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도시화, 국경을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함께 사회들의 점증하는 상호침투가 전염병의 확산을 상당히 가속시켰다. 전염병의 확산은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재정이 부족한 보건 기구들만을 앞질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앞질렀다.

전염현상은 19세기 말 사회학자와 철학자가 ‘연대’라 부른 것을 가시화한다. 뒤르켐은 1893년 학위논문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개인들의 상호엮임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자, 사회들을 특징짓는 연대유형에 따라 사회들을 구분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학이었다고 말해지는 ‘연대주의’론이 연대를 정부의 사회정책을 고무해야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연대주의 사조의 주요 창시자인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1851~1955)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서 민중은 마치 모든 존재, 모든 물체가 전(全)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놓여 있듯,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서로 놓여 있다. 연대의 법칙(the law of solidarity)은 보편적이다.” 이처럼 연대는 삶·건강·일·사유·느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다윈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맞서 프랑스 연대주의자들은 인류의 협동에 대한 다윈의 저술에 특히 의존하여 연대의 법칙을 응집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공중보건론자들은 연대 개념을 차용하여 그것을 공중보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내무부의 공공지원·위생국장 앙리 모노(Henri Monod, 1843-1911)는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부유한 도시와 가난한 도시 사이의 재정적 연대를 장려하는 연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중보건은 우리의 상호의존, 인간의 연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일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각자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인간 존재들의 건강·삶에 예기치 않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존재들 혹은 사라진 지 오래된 존재들이 우리 건강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에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본질적 조건들에 매 순간 영향을 미칩니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시민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보건연대는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공중보건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모노의 명쾌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언젠가 유럽에서 희생자들을 낳을, 위생에 반하는 어떤 잘못이 이 글을 쓸 때 갠지스 강둑이나 인도의 항구 중 하나에서 저질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때 또 다른 활동이, 이번에는 현재의 재앙으로부터 수천, 수백만을 구할, 과학으로 분류될 행동이 어떤 멀리 떨어진 해외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 인류가 위생의 정복으로 이익을 볼 수 있듯이 위생 관련 범죄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보건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보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전염이 입증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바로 전염병 전문가 찰스 니콜(Charles Nicolle, 1866~1936)에게서 본다. 니콜은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염병에 관한 지식은 인간들이 연대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똑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인 것이며, 감염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동료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해 말하면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이 같이 하는 노력을 통해 단결한다면 얼마나 생산적 결과가 생길까요!”

과학계에서 이러한 인식이 커지는 것과 함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제회의가 페스트·콜레라―콜레라는 1830년에서 1847년 사이 대혼란을 낳았다―와의 싸움 중 1851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19세기 말부터 쭉 모노는 이러한 ‘고전적’ 전염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다루는 국제기구를 옹호했다. 바로 그러한 국제기구로서 <국제공공위생사무소>(the Office International d’ Hygiène Publique)가 1907년 로마에 설립됐다.

공중보건의 국제화는 1921년 <국제연맹보건위원회>(the Health Committee of 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운영이 시작된 1948년 이전인) 1946년 결성이 결정된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다.

국민국가의 봉쇄

연대 개념의 발전 및 공중보건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대응은 여러 면에서 재앙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긴축과 수익성이 인도한 수십 년간의 보건정책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무장해제됐는지가 드러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보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국민국가 논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국가는 전지구적 보건위기가 제기한 문제에 각각이 마치 섬나라인 양 대응했다. 각 국가가 다른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자기 식대로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금세 목격한 것은 국경 봉쇄, 준수해야 하는 엄격히 국가적으로 정의된 각각의 전략들, (때로는 타국에 해가 되는) 자원동원과 자원징발,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취해진 조치들에 대한 이따금씩 일어나는 폄하나 비난이었다.

보건전선에서 ‘다자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보여준 이 일반적인 정치적 불협화음과 함께 우리는 국가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최대의 과학적·행정적 혼란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각 국의 의약담당 부처들(the national drug agencies)은 방법론의 조정 없이 각 나라, 각 연구실, 각 산업이 다른 나라, 다른 연구실, 다른 산업을 앞서려 하면서 각자 그들만의 게임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연대운동의 위대한 교훈이 어떻게 그리 빨리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오래 완전히 부인할 정도로 우리 정부들이 빠져있던 경련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 중 두 가지 즉 국가적 수준의 요인 하나와 전지구적 수준의 요인 하나에 집중하기로 하자.

시민적 책임, 자기이익 그리고 국가강제

전염병 학자들에 따르면, 코비드19 같은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모든 인간 간 전염사슬을 끊는 것, 즉 각 개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들이 그저 자신들만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호적 관계에서 각 개인들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상호적 보호를 의미한다.

‘공중보건’(public health)을 말할 때 우리가 너무도 자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표현에서 ‘공’(public)이 ‘국가’(the state)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의 전(全) 시민들이 구성하는 전체적 집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부들은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대항하는 싸움에서의 주요자산이 시민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대체로 포착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공리주의적 독단, 신자유주의적 규범, 개인주의적 요구로 심히 오도돼온 정부담론 사회적 연대가 전염병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느낌과 인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 정부들에게는 가장 부적실한 단어들만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명백한 자기이익에 대해 말하는, 혹은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 각자가 지는 개별적 책임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 말이다. 정부들은 사회가 고립된 원자들의 뒤섞임인듯, 각인들이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것인듯 행동했다. 거리를 둬야하고,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씻어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정부들이 집단적 운명에서의 우리 각자의 공동책임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장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정부들이 경쟁·대결·이해대립 말고는 개인들 사이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국가들은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 접근법으로 대응했고 세계보건기구는 국가들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력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네바에 있는 <국제개발대학원>의 <글로벌보건센터>(the Global Health Centre at the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and Development Studies) 공동센터장인 전염병 전문가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국가주의적 주권의 원리가 세계적 문제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험을 완벽하게 예견하지 못했다고 세계보건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와 연계되어 있고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 특히 더 책임을 지는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the Global Preparedness Monitoring Board)는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몇 달 전 세계에 경고했다. “만약 ‘지나간 것이 서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5천만에서 8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경제의 거의 5%를 일소할, 빠르게 움직이며 대단히 치명적인 호흡기 병원균 팬데믹이라는 너무도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이런 규모의 전지구적 팬데믹은 광범위한 대혼란과 불안정, 불안전을 초래할 재앙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2019년 9월 배포했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를 위하여

이 위기의 결과가 ‘국민국가의 귀환’, ‘국가주권의 부활’이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오해들 중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건을 전지구적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통적인 것은 집단적 결정이 “공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만들기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승인에 입각하여, 공동체가 자원이나 써비스 혹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백신은, 건강에 대한 전 인류의 기본권과 백신 사이의 정치적으로 수립된 연관에 입각해 있는 ‘공통재’다.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 커먼즈를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 백신이 공통재라는 결정이 채택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창출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이외에 전지구적 보건을 위한 다른 유형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는 국가기금과 민간 기금에 이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는 협력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심의와 결정이 구속력 있는 세계적 기준을 구성할 세계보건기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간’ 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cal) 기관은 모든 국가·지방·지역의 비영리보건기관을 연합하고 모든 나라의 연구원을 동원할 것이다. 이 기관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에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정보·통지·협력의 임무를 맡지만, 세계보건기구와 달리 보건에 대한 인구의 기본권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을 일국의 수준에서 그리고 국지적 수준에서 동원할 권위를 가질 것이다.

지구화의 이러한 결과가 제기하는 물음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겨 놓을 위험과 대면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새로운 제도를 미래 인류가 수립할 수 있을까이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가 그 일환이다.

 

 




정치적 시험으로서의 팬데믹: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장하며

 



코비드19 팬데믹은 전례 없는 전지구적 건강·사회·경제의 위기이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에는 거의 없다. 이 비극은 모든 인류를 위한 시험/시련(épreuve)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어 ‘épreuve’의 두 의미 ―시련, 즉 거대하고 고통스런 일이자 시험·평가·판단이라는 두 의미― 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의 이중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은 이제 개인적 상호의존의 수준에 놓여 있는, 즉 바로 사회적 삶의 토대에 놓여 있는 전지구적 문제에 대처할 우리 정치경제씨스템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듯한 현재 상황은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전지구적 경제정치구조가 기후변화위기에 대처하고자 급속히 발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말이다.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국가주의적 대응?

첫 번째 관측. 세계 전역에서 이 전지구적 전염병에 다소 보완적인 두 방법으로 대응하고자 국민국가의 주권적 힘에 모두 기꺼이 의존하려한다.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에서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포했든 아니든) 대체로 ‘비상사태’를 내세움으로써 개인적 접촉을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실행하는 데 의존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바이러스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시민들을 보호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규율과 국가보호주의가 펜데믹과의 싸움에 사용되는 두 주요 무기이다. 여기서 국가주권의 두 얼굴 즉 내적 지배와 외적 독립을 보게 된다.

두 번째 관측. 모든 규모의 기업들이 이 시험/시련에 견디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는데, 이는 파산을 면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가능한 많이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재정지원과 보장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국가는 경제를 살리고자 한없이 지출하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과 몇 주 전에 공공부채 제한에 대한 그리고 예산제약에 대한 강박적 우려로 인해 병원직원, 병원침대 혹은 응급써비스를 늘리라는 모든 요청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이후 국가는 적어도 민간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씨스템을 강화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개입의 미덕을 재발견했다.

지금까지의 가장 야심찬 부양책 중 하나가 독일에 의해 시행됐다. 그 부양책은 독일연방공화국 시작 이래 규범이었던 질서자유주의(([옮긴이]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는 자유시장이 이론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한 국가개입을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독일식 버전이다.)) 도그마와 갑작스레 단절했다.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혼동하면 안 되는 이 갑작스런 전환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국가주권의 특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연대의 끈에 영향을 미친 팬데믹에 대한 내적·외적으로 모두 효과적인 대응일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경종을 울릴만한 일이다. 국가형태에 내장되어 있는 외국인 혐오는 바이러스가 모든 인류에 가할 치명적 위험에 대한 인식이 커져감에 따라서 특히 분명해지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확산에 서로 전혀 연계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특히 중앙유럽국가들이 ‘해외바이러스’로부터 인구를 지키고자 국가영토의 행정장벽을 매우 신속히 쳤으며, 유럽에서 국경을 봉쇄한 최초의 나라들은 가장 외국인 혐오적이기도 했다. 빅토르 오르반(([옮긴이]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그리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헝가리 총리로 재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이 불을 지폈다. “우리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 전선은 이주이고 다른 한 전선은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양자 모두 이동을 통해 퍼진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과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분위기 즉 ―유럽 및 그 밖의 다른 곳의 극우가 기뻐할 법하게도― 모든 국가가 그들 자신의 것을 돌봐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들과의 연대의 결여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방치한 것 ―이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 의료장비와 보호마스크를 보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기심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은 국가들 간의 전면적 경쟁에 토대를 둔 유럽에 조종을 울렸다.

국가주의 주권과 전략적 선택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bhanom Ghebreyesus)는 우리가 팬데믹을 상대하고 있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와 국가들 상호관계에서의 놀라운 수준의 무대책에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 무대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팬데믹 전문가인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 세계보건센터 공동소장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세계적 문제에 있어 국가주권 원리가 지속함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이는 놀랍지 않습니다. 국제협력은 항상 취약했지만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지구화에서 빠지기를 열망하는 정치치도자의 선출로 지난 5년 여 동안은 더욱 취약했습니다. … 세계보건기구가 제공하는 포괄적 관점이 부재한 채 우리는 재앙의 위험을 무릅써야합니다. ··· 따라서 전 세계 정치·보건 지도자들에게 권고하는 점은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접근과 연대가 시민들의 책임 있는 행동을 북돋는 본질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수에리 문의 언급이 적절하긴 해도 그녀는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수십 년간 재정적으로 약화되어왔고 현재는 민간 기부자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금의 80%가 민간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약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는 1월 초부터 수집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발본적 조기 통제 권고가 궁극적으로 옳았다는 점 때문에도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전지구적 협력을 위한 최초의 틀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에서 효과적이었던 체계적 검사, 접촉 추적을 포기하는 선택은 바이러스가 잠재적으로 모든 국가에 퍼지는 데 기여한 중대한 실수였다.

검사·추적의 이 걱정되는 지연은 궁극적으로는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이 이전에 그랬듯이 이탈리아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절대적 봉쇄 전략을 재빨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집단면역’이라는 숙명주의적이자 은밀한 다윈주의적 전략으로 대응이 너무 지체됐다.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의 영국은 초기 접근에서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두말할 필요가 없는 미국 이외에도 프랑스, 독일 같은 다른 나라들은 제한 조치를 얼버무렸고 지체했다. 이 나라들은 ‘완화’ 전략, 즉 ‘감염곡선 완만화’에 의한 전염병 지연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우한과 후베이성에서 행해진 대로 인구에 대한 체계적 검진과 일반적 격리를 사용하여 바이러스를 초기부터 통제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사실상 포기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예측에 따르면 집단면역 전략은 전 인구의 50-80%의 감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가장 취약하다”고 추정되는 수십만의 심지어 수백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는 매우 명확했다. 국가들은 바이러스 양성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 검사와 접촉 추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전염병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

왜 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를 그렇게 신뢰하지 못했으며, 왜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연계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세계보건기구에 부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전염병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나라를 실제로 마비시켰다. 경제적 생산과 무역의 동결이 그런 규모로 이뤄진 적은 없었으며 그 결과는 중국에서의 매우 심각한 경제·금융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독일·프랑스·미국이 그들의 경제를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상황이 ‘날마다’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경제와 공중보건의 긴급사항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저했다. 더 심각한 장기예측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말이다. 3월 12일에서 15일에 정부를 뒤흔들고 정부로 하여금 결국 총체적 격리전략을 택하도록 강제한 것은 그 이상의 주저가 수백만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임페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이후 너무도 명백해진 것은 행동경제학과 이른바 ‘넛지 이론’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파괴적 영향인데, 넛지 이론은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데 강제나 구속보다는 인센티브와 자극에 의존한다.(([옮긴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심리적·인지적·정서적·문화적·사회적 요인 등이 개인과 조직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이다. 넛지(Nudge)는 간접적 제안과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개인 또는 그룹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경제학의 개념이다.))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은 영국 정부에 조언하는 ‘넛지 유닛’ 혹은 ‘행동통찰팀’이 다음과 같이 국가에 그들의 이론을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는 점이다. 즉 너무 빨리 엄한 조치에 의해 제약을 받은 개인들이 전염병이 최고도일 때 즉 규율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때 규율에 지쳐 해이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2010년 이후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경제이론 ―『넛지』(Nudge, 2009)에 간추려져있다― 은 ‘효율적 국가 거버넌스’를 창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접근법은 강제 대신 ‘넛지’를 사용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고무하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에게 온화하고 간접적인, 편안하고 선택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말이다.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이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의 적용은 이중적이었다. (1) 강압적 조치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 (2) ‘전염예방행동―거리두기, 손 씻기, 옷소매에 기침하기, 열이 나면 자가 격리하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기―에 대한 선호가 그것이다.‘

말랑한 자발적 조치에 의존하는 이 도박은 위험한 것이었다. 전염병 상황에서 이 접근법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혹은 경험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이제 이 접근법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프랑스 관료들이 3월 14일까지 바로 이 접근법을 채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제한조치는 시간이 지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3월 6일 밝혔듯 마크롱은 엄격한 봉쇄조치의 채택을 처음에 거부했다. 그는 바로 그날 그의 아내와 함께 갔던 극장을 나서며 “삶은 계속된다. 취약인구를 제외하면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바꿀 이유는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전적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저 말 아래 숨어 있는 전술을 우리는 분명 감지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에 기반하여 경제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으로 알았던 엄격한 조치를 정부가 미루는 전술을 말이다. 

국가주권 혹은 공공써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의 궁극적 실패가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진로를 발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이러한 변화를 처음 엿볼 수 있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국민통합, 우리의 신성한 연합, 그리고 프랑스 국민의 ‘인격적 강인함’에 호소했다. 마크롱의 그 다음 3월 16일 연설은 호전적 포즈와 미사여구에 있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작금이 총동원의, ‘애국적 자기절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권국가의 형상이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 형태로 현시된다. “저기 있는, 안 보이는, 찾기 힘든, 그리고 전진하는” 적을 찌르는 칼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훨씬 더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마크롱은 복지국가와 공중보건의 확고한 옹호자로 갑작스레 거의 기적과도 같이 변모했다. 심지어 마크롱은 모든 것이 시장논리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을 단언했다! 몇몇은 좌파였던 많은 해설자들과 정치인들은 우리 공공써비스의 대체불가능한 중요성을 마크롱이 인정한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목격한 것은 마크롱이 2월 27일 삐띠살프뜨리레병원(the Piti Salp tri re Hospital)을 방문했을 때 한 의사와 벌인 공공연한 대립에 대한 뒤늦은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신경학 교수인 그 의사는 마크롱이 공립병원에 ‘투자충격’(([옮긴이] 여기서 투자충격(investment shock)은 긍정적 투자충격 즉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투자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한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크롱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의사의 요구에 동의했다. 물론 마크롱의 뒤따른 선언들은 완전히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 즉각 인지됐으며 마크롱 정부가 수년 간 체계적으로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코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마크롱은 “우리의 음식을, 보호를, 또는 생활환경을 돌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타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는 통제를 회복해야 합니다”고 선언했다.

국가주권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다수에게 특히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네오파시스트들에게 환영받았다. 따라서 공공써비스의 방어는 주권국가의 특권과 완벽히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건을 시장논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과거 프랑스가 유럽연합에 했던 많은 양보를 이제 되돌리는 과정에 있는 주권행위이다. 그러나 공공써비스 개념이 국가주권 개념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게 명백할까? 전자가 후자에 의존하는 것일까? 공공써비스가 국가주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국가주권 지지자들이 전개한 핵심 논의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신중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국가주권의 본성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어원적으로 주권은 (라틴어 superanus에서 유래한)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하는데, 무엇에 대한 우월성일까? 간단히 말해 국가권력을 제한한다고 위협하는 모든 법들이나 의무들에 대한 우월성, 다른 국가들과 자국 시민들 모두에 대한 우월성이다. 주권국가는 모든 책무나 의무보다 우위에 있으며 책무·의무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축소 혹은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형상인 국가는 특수한 통치기능의 일상적 행사 위에서 국가의 연속성을 체현한다고 상정되는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국가의 우월성은 대표자에 가해지는 법률이나 의무에 대한 대표자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주권주의자들에 의해 원칙의 지위로 고양된 우월성 개념이다. 허나 이 원칙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적용된다. 본질적인 것은 국가주권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신념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국가의 대표자들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국가의 대표자들이 유럽연합에 잇따라 인정한 모든 양보는 주권행위였다. 바로 유럽연합의 수립이 애초부터 국가주권 원리의 실행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사하게,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국가가 인권수호에 관한 국제적 의무를 지속적으로 회피해왔다는 사실 또한 주권논리의 일부이다. 인권수호자선언(the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 1998년)은 서명국에 인권수호자를 위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야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서명국의 법률과 관행 특히, 이탈리아와 공유하는, 국경에 관한 프랑스의 법률과 관행은 그 국제적 의무를 침해한다.

기후 변화의 책무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이 책무를 국가들은 언제나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준하여 기꺼이 무시한다. 그리고 국내 공법(公法)에 관해서도 국가주권은 가장 강력하다. 프랑스 사례를 계속 들어보면, 가이아나 원주민의 권리가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공화국’ ―이는 국가주권의 신성불가침 원리를 다시금 말해주는 표현이다― 의 원리라는 이름하에 일상적으로 거부된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으로 시민들에 의한 국가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국가의 대표자들이 면하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논점은 소위 ‘공공’써비스의 공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에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여기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공적’이라는 개념이 ‘국가’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이 인식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publicum’(푸블리쿰)이라는 용어는 그저 국가행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전체 공동체를 가리킨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원하는 대로 써비스를 나눠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국가써비스가 아닐뿐더러 국가의 확장인 것만도 아니다. 공공써비스는 “공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공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써비스는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 공공써비스는 국가와 그 통치자가 피통치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피통치자에 대해서 관대하게 확장한 호의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수년간의 자유주의적 논쟁이 ‘복지국가’라는 문구에 부과한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써비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인 레온 뒤기트(Léon Duguit)는 20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제기했다. ‘공공써비스’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피통치자와의 관계에 있어 권력자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뒤기트에게 공공써비스는 국가권력의 현현이 아니라 통치권력의 제한이다. 공공써비스는 통치자가 피통치자의 하인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부과되는 이러한 의무가 뒤기트가 ‘공적 책무’라 부르는 것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이 공공써비스가 주권의 원리가 아닌 사회적 연대의 원리, 모두에게 부과되는 원리인 이유다. 주권의 원리가 공적 책무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는 한에서 말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가주권이라는 허구에 의해 주로 억압되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써비스를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여전히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이 강하게 연결돼 있다고 시민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시민의 권리는 공공써비스를 제공해야하는 국가의 대표자들의 의무 혹은 책무의 분명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위기에 영향 받는 여러 유럽 국가 시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일상적 싸움에서 공공써비스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수많은 도시의 시민들은 중앙집권적 통합국가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태도와 무관하게 그들의 발코니에서 보건노동자들에게 갈채를 보내왔다.

따라서 여기서 두 관계를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 공공써비스와 특히 의료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권위나 공적 권력에 대한 집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본질적 기능을 하는 써비스에 대한 애착을 시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국가와의 근본적 동일시를 드러내는 것과는 무관한 이 애착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감각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우리의 ‘팬데믹 동료시민’이 견디는 시험/시련에 민감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이탈리아인이든 스페인인이든 유럽 국경 너머에 살든 말이다.

전지구적 커먼즈의 긴급성

우리는 위기 이후 ‘우리의 발전모델’을 문제 삼는 최초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마크롱의 약속에 극히 회의적이며, 또한 현재 시행 중인 과감한 경제조치들이 2008년 경제위기 때 시행된 조치들과 결국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볼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치된 노력을 볼 것이다. 즉, 점점 더 커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팬데믹이 없었더라면 중단 되지 않았을 지구의 파괴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말이다. 그리고 “경제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경기부양책이 최저임금 근로자와 납세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부담이 될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역전되기 더 어려운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국가주권은 안보 민감증, 외국인 혐오증과 함께 그것의 파산을 입증했다. 국가주권은 전지구적 자본을 제한하기는커녕 전지구적 경쟁을 가중시킴으로써 자본흐름을 관리한다.

두 개의 결론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다. 첫째, 공공써비스가 필수적인 인간적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공통적 제도로서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 인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전지구적 커먼즈의 제도화이다. 인류의 주된 위험이 이제 분명 전지구적 성격을 띠며 상호원조와 연대도 전지구적이어야하고 기반시설과 지식은 공유되어야하며 협동이 절대적 규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건강·기후·경제·교육·문화는 더 이상 사유재산 혹은 국가재산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전지구적 커먼즈로 개념화되어야하며 정치적으로 그렇게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 가지는 이제 무엇보다 더 확실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의 반란, 봉기, 그리고 초국가적 연합만이 국가와 자본에 공통적인 것을 부과할 수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

 



만약 이 글이 소나타라면 그것의 단조(短調)가 보여주는 것은, 모티프의 분리와 고립은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모티프의 분리 연결은 아름다운 한편의 음악을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내내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모든 얘기가 이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용어가 애매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 사회적 친밀 둘 다이다. 거리 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친밀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즉 우리를 지탱하는 많은 관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중요한 활동과정도 이를 떠맡아야 하는 사람도 못 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분리·고립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놓쳐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 세계의 사회적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 때문에, 관계를 통해, 특히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나와 당신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당신 없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가 실상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 펼쳐나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는 서로 함께,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로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어떤 무엇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주변의 생물계·무생물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발달의 측면에서도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시장/국가 구도

구별은 중요하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시장과 국가를 서로 대립시키는 만연한 사유 패러다임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가 서로 다투고 기껏해야 서로 ‘균형’을 찾으려는 분리된 두 개의 실체라고 우리는 가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씨스템에 따라, 경제모델에 따라 혹은 당면 상황에 따라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국가’는 하강하거나 그 반대거나 하는 식으로 둘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지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갑자기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이 됐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이자 전 <유엔무역개발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수석 경제학자 하이너 플래스벡(Heiner Flassbeck)이 말했듯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회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Heiner Flassbeck, Vollbremsung: die Wirtschaft in den Zeiten des Coronavirus, 2020년 3월 15일.))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정치경제적 조치 이후에는 실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조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력, 정당성을 갖춘 기관이 시장과 국가 두 개뿐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2020년 봄 독일정부는 어떤 면에서는 시소의 높은 쪽 끝에 ‘시장’을 남겨둔 셈인데 높은 쪽 끝에서는 낮은 쪽 끝에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이렇게 높이 치솟은 취약함에 곧장 조바심내게 된다. 이는 단명했음에도 국가의 지지·보호가 없는 경제를 신뢰하는 데 관한, 광범위한 걱정을 낳았다. 봉쇄 이후 채 일주도 안 된 2020년 3월 24일 연방 경제장관 페테르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는 독일경제를 살리기 위한 15억 유로 상당의 전례 없는 구호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가 설명하길 이 일이 이토록 빨리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내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 시간이 본질적이”기 때문이었다.((Tagesschau, 2020년 3월 24일.)) 내 고향에 있는 한 상점주는 책임을 지는 모든 회사는 수중에 적어도 두 달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재정 문제는 위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초한 것일 수 있다는 이견을 제기했다.

알트마이어가 서두른 한 가지 이유는 시장과 국가의 친밀한 관계와 분명 관련돼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있든 없든 이 점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우리의 정치씨스템·국가권력은 시장경제의 운명에 깊이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지배하에 있다. 정치적·경제적 토론이 시장 혹은 국가 중 한편을 선호하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을 ―어떤 이들은 더 큰 시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국가를 추구하듯― 짜더라도 진실은 우리가 시장국가 구도와 상대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에 의존할 뿐 아니라 시장도 국가의 법률씨스템, 시장규제, 보조금 그리고 그 밖의 지원 없이 기능할 수 없었다.((지면 관계상 이 추상적 개념을 추가적 설명 없이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팬데믹은 정치적·경제적 씨스템 양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과 국가의 영역 바깥을 생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를 한데 뭉뚱그리면 안 된다. 양자가 똑같지는 않으며 동일한 논리를 언제나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제도가 기업들 사이의 경쟁, 이윤 극대화의 원리를 무시할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듯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국가와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양자가 정말로 분리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국가와 시장의 실존적 상호의존이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독일이 2020년 4월 중순 최초의 조심스러운 규제 완화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외 ―자동차 영업소 개점― 를 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산업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자동차 산업 로비스트들의 정치적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계산된 조치였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국가의 틀 안에 갇혀서 탈자본주적 질서를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성장을 추동하지 않는 비시장적 해결책을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광범위한 개념적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해결책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시장-국가는 이 상호의존을 잠식할 팬데믹과 그 경제적 충격에 대한 비시장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국민국가적 조치의 기본 유형은 시장 이데올로기와 시장 기반 정책에 장악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자발적 상호원조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에도 불구하고 시장-국가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일자리와 성장에 의존하는 시장-국가 씨스템의 수호자인 정치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삽시간에 보여줬다. 정치인들은 직업 창출, 성장 재점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실은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적 셧다운은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를 제기한다. 팬데믹은 자연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의존해 있음에도 총액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은 없으나― 돈이 덜 필요하며 가스를 덜 사용하고 비행기를 덜 타며 덜 쇼핑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고 극복돼야 하는 재앙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점, 비행기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점, 평소처럼 많이 쇼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는) 현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구입하는 인센티브조차 다시 한 번 더 고려되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를 그리하여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기획되고 있다. 셧다운 상황에서는 “내게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물음은 경제가 우리의 필요를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실제적 필요에 관한 그러한 성찰은 그야말로 “씨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독일 녹색당조차 모든 이를 위한 250유로 쇼핑 쿠폰을 요구했다. 주간지 『차이트』(Zeit)의 3인의 작가로 구성된 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증가한 가치에 의존하는 모든 것 즉 임금·재정수입·사회보장혜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Elisabeth Raether, Mark Schieritz and Bernd Ulrich, Konsum: Brauch ich das?, in Zeit online, 2020년 5월 1일.)) 5월 중순 독일대중이 처음 접한 예측은 2020년에 거의 1,000억 유로의 재정수입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잠시라도 돌봉노동자가 멈춰서 쉴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돌봄은 모든 경제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점에서만 “씨스템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돌봄노동은 어떤 형태의 시장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이는 최근의 결함은 아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올 것이 확실하고 이산화탄소 배출감소가 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설계결함은 보다 더 분명해졌고 불길해졌다. 끊임없는 소비와 성장이라는 이러한 설계결함은 이러한 틀 밖에서,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넘어서, 그리고 제국적 삶의 방식을 넘어서 사고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Cf. Brand, Ulrich und Markus Wissen (2017) Imperiale Lebensweise. Zur Ausbeutung von Mensch und Natur in Zeiten des globalen Kapitalismus. Munich: Oekom.))

바로 여기가 커먼즈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인류사의 많은 부분이 확인시켜주듯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업적 이익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방식, 스스로 조직한 방식, 필요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서로 함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커먼즈는 많은 목적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우리는 이를 확인할 것이다― 세수(稅收)의 유망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것이 커먼즈가 시장-국가 씨스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다.

팬데믹 시대 커머닝

커먼즈를 순수한 이타주의, 이웃의 산발적 도움, 무조건적 베풂으로 환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뒤섞는 이들은 이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변형하는 힘을 간과한다. 커먼즈를 주로 혹은 전적으로 역사적 유물이나 법적 주체 또는 ‘자원관리’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커먼즈 개념이 우리의 현재 위기를 그리고 시장-국가 사고의 설계결함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 것으로 흔히 인용된다. 그의 논점은 커먼즈는 명사 ―사물 또는 자원― 이기보다는 동사 ―커머닝의 활동―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시장-국가에서 함께함을, 즉 보통 만연한 것들과는 다른 행동패턴을 창출하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 전역에서 그러한 실천들은 (특히 위기의 시기에) 삶과 생존의 중요한 부분이다. 커먼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개념보다 분명 더 오래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은 언론보도로 다뤄지지 않으며 다뤄질 때에는 자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정신의 표현 혹은 가십거리로 다뤄진다. 매우 다양한 상호부조가 시장국가의 뿌리 깊은 한계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의 씨앗 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조직화의 힘과 창조성을 무시한 채 커먼즈와 그 주역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일종의 정신적 구속 안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이 동학은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 없는, 인구밀도가 높은 700만 명의 물리적 공간인 홍콩에서 팬데믹 초기에 분명히 작용했다. 정부의 무조치를 염려한 이들이 감염 통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홍콩에서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동안 새로운 감염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2020년 6월 8일 확인된 사례는 (상당수가 유학을 마침 다음 홍콩으로 되돌아가야했던) 총 1107명 중 회복 1048명, 사망 4명, 입원 55명이었다.)) 조건이 좋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플랫폼이 캐리 램(Carrie Lam) 정부에 대한 항의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2019년에 구축되어 있었고 2002-2003년의 사스 발생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감염 자체가 확산될 조건도 좋았다. 높은 인구밀도, 우한으로 운행하는 고속열차와 매일 수차례 운항하는 직항편, 2020년 1월에만 중국 본토에서 250만 명 이상이 홍콩으로 입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던 것이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시장-국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브라질에서도 타당한 접근법임이 입증되었다. 우익 극단주의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정부는 다가오는 건강위기를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최소화했으며 이를 “그저 미미한 독감”이라고 칭했다. 보호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의사가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favelas)(([옮긴이] 파벨라(favela)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무시해왔던 브라질의 저임금 거주지다.)) 중 하나에 있는 파드레 미구엘(Padre Miguel) 삼바학교에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학교 재봉틀은 카니발 의상 대신 보호복을 만들면서 돌아갔다.

학교 폐쇄에 직면한 미국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홈스쿨링과 보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에 대한 그들의 전문지식을 모으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https://schoolclosures.org, 2020년 5월 15일 접속.)) 또한 과학공동체 <크라우드파이트코비드10>(CrowdfightCovid10)의 전지구적 기획이 코비드19와의 싸움에 사용할 지식·도구를 곧 공유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일까? 필요하고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시장 기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은 나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정상적인 일로 보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실천은 모든 문화·시대에 걸쳐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탈리아에 설립된 협동조합 <바리카마>(Barikama)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동안 로마 사람들에게 꾸준히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는 선구적 작업을 인정받았다.((https://elpais.com/elpais/2020/05/03/planeta_futuro/1588493778_756377.html, 2020년 5월 17일 접속.)) 바리카마라는 단어는 밤바라어(([옮긴이] 밤바라어(Bambara language)는 약 1,500만 명이 제1언어(약 500만) 혹은 제2언어(약 1,000만)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말리 인구의 대략 80%가 사용하고 있다.))에서 유래하며 ‘힘’ 또는 ‘저항’을 의미한다. 이 협동조합은 이주 일용직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과일야채농업의 악화된 조건에서 해방시켰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에 따라서 야채와 요구르트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마스크스포올>(Masks4All)의 접근법은 시장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이라는 거짓된 지혜를 따랐었다. 2020년 3월 다수가 체코 출신이었던 과학자·연구원·기업가들((https://masks4all.org/founders, 2020년 5월 17일 접속.))이 마스크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근본적이라는 점을 대중과 정치세계에 납득시키려는 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더 높은 가격은 더 적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시장 기반 논리가 마스크의 불안정한 공급을 낳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실제 생산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지리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지고 있었다. 보호의류에 대한 의료부문과 일반대중의 요구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일부 마스크 생산자들은 즉각적 이익을 봤다.((Report by Lena Kampf, Markus Grill, Arnd Henze, Georg Wellmann, Florian Flade and Christian Baars, Tagesschau, 2020329.)) 메트만복음주의병원(the Mettman Evangelical Hospital)은 독일에 있는 병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 몇 주 만에 수술용 마스크 가격은 1667%, FFP2 마스크는 2500%, FFP3는 3043%, 보호복은 638% 급등했다.

대중에게 일상용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부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스크포올>은 재봉틀이 있든 없든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온라인에 게시했다.((https://masks4all.co/how-to-make-a-homemade-mask/, 2020년 6월 7일 접속.))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한 논점을 제시한 메릴랜드 주 공화당 주지사 래리 호건(Larry Hogan)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이는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병을 퍼뜨리는 것은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마스크포올>의 모토 즉 ‘내 마스크는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한다’가 훨씬 더 적절하다. 아마도 이것이 위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측면 즉 마스크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상호의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달려 있다. 당신이 얼마나 조심하느냐에 나의 안전이 달려 있다. 개인의 건강이 모두의 건강과 주의에 달려 있다.

비슷한 교훈이 삶 일반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관계로부터, 관계를 통해서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는 경제의 기본 이념일 뿐만 아니라 커머닝의 기본 가정이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존재한다” ―이것 없이 커머닝은 이해될 수 없다― 라는 이 기본적 생각은 근래 공통적으로 공유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스크는 착용하는 사람을 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가 감염되었지만 무증상일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립된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적 시각을 잃은 것이다. 문화비평가 게오르크 제에즐렌(Georg Seesslen)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런 경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에 매우 가깝다”((Georg Seeßlen, Freiheit in Zeiten von Covid_19))고 말한다.

지식은 강력하며 자유로운 지식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례들은 몇 가지 모티프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상품화된 지식보다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아낌없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한 최선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커머너들은 의자나 자전거를 다루듯 지식을 다룬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물론 의자나 자전거도 공유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교대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의자를 ‘공유’한다면 개인이 그것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 차이는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데 이는 공유를 통해 배가될 수 있는 것과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반복되는 커먼즈의 동기 중 하나는 공통재로서의 지식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의 공유, 사용권의 고안이다. 무료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위키피디아에 적용되어 잘 알려진 이 접근법은 이러한 공유지식체계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고 확장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도 시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the University of Sussex)이 조직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제 연구팀에 따르면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세계 전역 의료씨스템의 코비드19 팬데믹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줄 수 있다.((Leveraging open hardware to alleviate the burden of COVID-19 on global health systems)) 다른 장비들 중에서도 현미경과 인공호흡기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3D 프린터와 결합하면 세계 전역의 의료써비스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신 협업생산이 오늘날의 대세라고 연구팀의 일원인 신경학교수 톰 바덴(Tom Baden)은 말한다.((https://www.pressetext.com/news/20200429007?, 2020년 5월 22일 접속.))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외에도 대량생산보다 “경비가 훨씬 낮고” “지역자원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데서 오는” 혜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보호장비를 위한 오픈소스 청사진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해결책 중 어떤 것이 공식적 기능성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오픈소스 하드웨어 디자인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때문에 바덴은 정부가 시험·승인 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이 꽤나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약과 백신의 생산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방식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이와 관련하여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보통 다소 심한 제약 하에 운영되는 많은 과학 출판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연구결과를 무료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미래의 백신을 누가 소유할지에 대한 논의도 급속히 이뤄졌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은 아이디어·지식·연구결과가 상품화되는 대신 공공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코비드19 백신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5년 조나스 솔크(Jonas Salk)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기자들은 그에게 누가 특허를 소유하는지 물었다. 솔크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말로 답했다. “글쎄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 있나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 솔크 박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윤 극대화를 염두에 둔 채 생명을 구하는 백신이 생산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50년대 말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책임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위임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간, 이와는 상이한 생각이 우세했다. 국민국가는 제약회사들에게 특허의 범위와 기간을 넓혀주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 제약회사들 각각의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복제약(([옮긴이] 복제약(generic drug)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약과 동일한 화학 성분을 가진 약으로서 특허 만료 이후 판매가 허가된다. 복제약은 특정 제약회사와 연관성을 가지지만 보통 약이 배포되는 국가의 정부에 의해 관리된다.)) 생산에서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코비드19에 대응하여 이제 다른 곡조가 연주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글로벌 대응 재원 약정 회의>(the Coronavirus Global Response Pledging Conference)((https://ec.europa.eu/international-partnerships/events/coronavirus-global-reponse-pledging-conference_en, 2020년 5월 5일 접속.))에서 EU의회 의장 우슐라 폰 데어 레옌(Ursula von der Leyen)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상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전 세계를 위해 전 세계가” 생산해야 하는 “유일한 전 지구적 공공재”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eu-initiative-fuer-impfstoff-nur-die-globale-antwort-wirkt-gegen-das-virus-16750330.html, 2020년 5월 5일 접속.)) 제약업계는 이 접근법을 즉시 거부하면서 “기업은 자신의 개발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Pharmaindustrie will Corona-Impfstoff nicht als öffentliches Gut freigeben)) 이들의 입장은 수십 년 간 들어와서 익숙해진 모든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분명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반면 협력과 연대에 기반한 약물 연구개발 과정과 혁신적 소유권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공적 의식에 기반한 혁신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하에서 논의될 <방치된 질병을 위한 의약품 이니셔티브>(the Drugs for Neglected Diseases Initiative, DNDI)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이는 두 번째 모티프와 연관된다.

국가에 기대기보다 자기조직화를 장려하기

회의론자들은 누가 “공통재 혹은 공공재”((이 두 용어의 차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Silke Helfrich, Gemeingüter sind nicht, sie werden gemacht.))로 백신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그 가용성을 보장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국민국가가 공적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하며 유일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응당 국가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공적인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용어는 국가적 의무의 범위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국가권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시돼야하는 통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에서 “공적인 것과 국가”의 직접적 연관은 시장과 국가가 실로 상이하나 별개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잔혹한 국가주의가 미국 의료분야((Geberkonferenz für Impfstoff, Zeichen gegen ‘brutalen Nationalismus’))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EU 정치인이 표현한 우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데 덜 잔혹한 국가주권 개념이 이미 난점이기 때문이다.((커먼즈 연구자 삐에르 다도(Pierre Dardot)와 끄리스띠앙 라발(Christian Laval)은 이를 다음에서 탐구한다. The pandemic as political trial: the case for a global commons.)) 시장경제 원리와 결합된 이러한 국민국가 주권 이념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전지구적 연대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만간 단념하게 만들 것이다.((코로나바이러스 위기상황인 2020년 3월 31일 독일 TV에 방영된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의 기억에 남을 모습은 이 진단이 국민국가 연합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의 체계적 연계는 국민국가 시장의 이익을 위하는 국가에서 백신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1.5도 기후 목표도 훼손하도록 추동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후위기·대량이주·팬데믹 시기에 분명해진 독립된 세계의 도전에 응대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의 필요를 고려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조직·생산·소유의 방법이다. 예외가 아닌 기획에 의한 커먼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국가주권 하에서 기능하는 시장-국가와 달리((여기에 묘사된 긴장은 예컨대 위기 시 정부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예외상황에도 반영된다. 예컨대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 위기 때 포르투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 지위에 관계없이 건강 및 사회 보장 씨스템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장관 에두아르도 카브리타(Eduardo Cabrita)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위기의 시기에,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의무’다. Cf. Portugal regulariza imigrantes para dar acesso ao sistema de saude, https://oglobo.globo.com/mundo/portugal-regulariza-imigrantes-para-dar-acesso-ao-sistema-de-saude-durante-pandemia-de-coronavirus-24335450, 2020년 5월 20일 접속.)) 이러한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우리의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알아볼 것이다. 고립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자 장기 전략의 문제로서 말이다.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자기조직화와 연대를 장려하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더 쉽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위해 뉴스를 뒤지는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꽤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쿠자누스대학(Cusanus Hochschule) 학생들과 함께 필자는 팬데믹의 경제적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공적 토론에 초점을 맞추어 2020년 3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의 타케스샤우(Tagesschau) 오후 8시 뉴스를 분석했다. 이 토론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는 주로 ‘채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자기조직화라는 용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독일 정부는 #WirVsVirus(우리 대 바이러스) 해커톤(hackathon)((https://wirvsvirushackathon.org/, 2020년 5월 17일 접속.))으로 올바른 방향의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스탄불 시 정부는 모르는 사람들의 음식 값을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터키식당의 사회적 관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위기에 직면하여 시 정부는 친구나 낯선 이들이 여유 없는 사람들의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내줄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었다. 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 가스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더 이상 납부할 수 없는 재정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4월 이를 실행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족들의 청구서들이 웹싸이트에 게시될 수 있었고 낯선 이들이 익명으로 이를 지불해줄 수 있었다. 이스탄불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약 1000만 리라(약 250만 유로)에 달하는 10만 건의 청구서가 결제됐고 또 다른 12만 건의 청구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https://ansteckendsolidarisch.de/de/blog/rechnungen과 시 정부 웹싸이트 https://askidafatura.ibb.gov.tr/, 2020년 5월 17일 접속.)) 순수한 자선 행위 대신 이 경우에는 수입이 갑작스레 감소함에도 공공요금을 대규모로 충당하기 위한 더 나은 자기조직화의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민관협력(a public-private partnership)을 회고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국가와 커먼즈의 협력(a public-commons partnership)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다.

이것이 어떻게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백신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공공재일 수도 있고 비국가적 커머너들이 창안하고 모두와 관대하게 공유하는 공통재일 수도 있다.((정치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것처럼 쓰인다.)) 조나스 솔크가 제안한 경로는 큰 호소력을 가진다. WHO 혹은 공공협력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지구적 협력조직이 백신에 대한 수탁책임을 질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혁신적 연구·금융 모델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식의 동기에 충실하게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특허가 위기의 시기에는 유예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이상한 이념적 주장이 아니다. DNDI가 수십 년 간 입증해온 성공적 관행이 바로 이것이다. DNDI는 특히 기업에 ‘가치 없는’, 그리하여 높은 사망률과 수백만의 감염자에도 불구하고 연구되지 않는 질병에 사용될 약물을 ―국가와 다국적 파트너, 민간 파트너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며 시험하고 공유한다. 신약으로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장논리를 따를 경우 연구투자도 기대할 수 없다.((DNDI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lfrich/Bollier 2019: S. 312–314. DNDI는 단일 자금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단일 국민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 단체는 현재 <WHO 코비드19 기술 연합>(WHO COVID-19 Technology Pool)에 속해있다 https://www.dndi.org/2020/media-centre/events/online-webinar-who-covid-19-technology-pool/, 2020년 5월 21일 접속.)) 확실히 커먼즈의 핵심 덕목은 아무것도 투자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윤의 폭락과 그로 인한 혼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셧다운할 생산도 없고 갑작스런 실업의 위협도 없다.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무엇이 실제로 필요하든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와의 차이점이다. 커먼즈는 사람들의 필요를 작업의 중심에 놓고 생산·분배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배분한다. 이 접근법은 광고, 마케팅, 경쟁적 소송, 특허 비용, 인재 채용 등의 시장 기반 비용을 제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팬데믹에 직면하여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다량의 간접비로부터 벤처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집단적 생산과 사용

재화를 판매용 상품으로 전환해야 하는 강제가 없다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같이 계속될 수 있다. 예컨대 위기 내내 활동해온 대략 280개의 CSA 농장((https://www.solidarische-landwirtschaft.org/solawis-finden/auflistung/solawis/ [옮긴이] 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기반 농업)는 농장의 수확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된 농업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작물의 재배·수확·유통의 위기를 공유하는 대안적 농업이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처럼 농작물이 재배·수확·유통된다. 물론 적절한 위생 예방조치를 준수하면서 말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CSA를 계속 지원하고 있는, 고객들이 아닌 회원들에게 매주 배달된다. 이는 2018년 매우 건조한 여름에도 그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한 2020년 봄에도 다르지 않다. 이런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농업에서는 위기가 많은 회원들 사이에 분산되기 때문에 경제적 ‘셧다운’은 CSA에게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씨스템은 계절노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돈은 자발적 기여와 수익 재분배에 기초하여 처리된다.

시장경제가 붕괴될 때 역으로 반사회적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굶주릴 때조차도 우유 생산자들이 하수구에 우유를 쏟아 붓고((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oronavirus-dairy-milk-farmer…)) 꽃 재배업자들이 꽃들을 모두가 즐기도록 공공장소에 두는 대신 처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먼즈는 필요를 더 일관되게 충족시키고 낭비를 피하면서 변동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라흐(Villach)에 있는 <페어안트보어퉁 에어데>(Verantwortung Erde,지구에 대한 책임)((https://www.verantwortung-erde.org/, 2020년 5월 20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물질·능력은 [위기 시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할 뿐이다.”

이스탄불 시 정부가 플랫폼을 만들어 낯선 이들의 공과금을 사람들이 더 쉽게 내줄 수 있게 한 것과 유사하게, 말마따나 너무도 필요한 재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 농업단체도 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인 토지를 시장으로부터, 그리하여 투기로부터 빼내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반시설 비용도 절감시켰다. 팬데믹 시기 커먼즈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2020년 4월 4일 이루어진 온라인 대담)) 토지를 적극적으로 탈상품화하는 독일 협동조합 <쿨투어란트>(Kulturland, 경작지)((https://www.kulturland.de/, 2020년 5월 23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견했고 이제 미래를 미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들 기다리고 있는 토지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로서의 커먼즈?

나는 지금이 커먼즈의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커먼즈는 지배적 경제모델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충돌 없는 ‘셧다운’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필요치 않기에 사물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계는 아직 커먼즈를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19세기의 낡고 질긴 사고방식, 구시대적 경제정치사상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가 우리가 커머너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 경제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정당화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 전제는 “더 적은 생산 그리고 (동네공방, 재사용·보수·재활용 센터와 같은) 더 지역적이고 시너지적인 생산방식이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며 팬데믹 대처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Hans Widmer, Die Coronakrise hat viele Fehlfunktionen unseres Systems offen gelegt. 2020년 3월 28일, telepolis.)) “씨스템과 관련된” 직업과 “삶과 관련된” 활동을 구분해야하는 이유와 후자의 활동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경제모델의 우선적·현실적 기초로 인식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씨스템과 관련된’(Systemrelevant)은 코로나 위기 동안 ‘평상시’에는 별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의사·간호사·간병인·출납원 등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독일어 용어다.) 커머닝의 배후에 있는 모티프가 ‘작은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의존하는 자기조직된 협업의 창조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법적 소유권, 통제의 문제에 대한 새롭고 더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상호의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화했다. 기억하는가?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고 내 마스크는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커먼즈의 확장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는 <네쯔베어크 외코노미셔 반델>(Netzwerk Ökonomischer Wandel, 경제변화를 위한 네트워크)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수렴 전략에 상응한다. (NOW) https://www.netzwerk-oekonomischer-wandel.org/, 2020년 5월 13일 접속. [옮긴이] 이 구절의 독일어 원본은 다음과 같다. Die Konsequenz kann nur sein: Commons ausweiten. NOW! 마지막 단어 NOW는 독일어 원본에서 대문자로 쓰였다. NOW는 ‘Netzwerk Ökonomischer Wandel’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진 말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는 대안적 변화의 길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커먼즈를 확장하기‘(Commons ausweiten)이다. 나머지 둘은 ’시장을 공통재로 인도하기’(Markte am Gemeinwohl orientieren)과 ‘국가를 완전히 민주화하기’(Den Staat umfassend demokratisieren)이다.)) 




팬데믹의 교훈: 주목할 만한 세 편의 글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Lessons from the Pandemic: Three Notable Essays” (2020. 8. 30) / http://www.bollier.org/blog/lessons-pandemic-three-notable-essay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