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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P2P 경제가 가능하다면, 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컴퓨터에 사용되는 지식·소프트웨어·코드가 자기조직적인 개인들의 공동체에 의해 피어생산(peer produce)되는 것처럼 영적 경험과 통찰이 공동생산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영성(spirituality)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관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영적 관점과 영적 실천은 새로운 사회문화적 복잡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의식의 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함의는 심대하다.

영성과 종교는 항상 그것들이 태어나고 뿌리내린 사회구조의 특징을 담지한다. 새로 출현하는 종교들이 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종종 사회구조의 부분적 변형을 재현하더라도, 주류 사회논리에 뿌리내리고 그 논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헤게모니적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가톨릭과 불교교단의 조직구조와 이념에 강한 봉건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개신교가 출현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그리고/혹은 민주주의적 형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종종 “뉴에이지 영성”(New Age Spirituality)이라 불렸던 것이 상품화된 영적 경험이 판매될 수 있는 시장에 맞춰 고안된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가톨릭과 불교교단이 각각 로마의 정치질서와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가치창조와 가치분배의 새 모델로 나타난 피어생산 역시 영적 조직과 영적 경험의 새로운 형태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피어생산 혹은 ‘P2P’는 개방적 투입과 참여적 절차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과정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는 산출물을 누구나 커먼즈(공통재)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정의는 P2P 영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다수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 영적 공동체는 그 기본적 규칙과 지침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 둘째 중앙의 기획과 신념을 부과할 수 있는 미리 수립된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영적 지식은 저작권이 부여되거나 사유화될 수 없다.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다른 모든 낡은 형태들과 구분되는 P2P 영성의 핵심적인 긍정적 윤리적 가치는 “잠재력 균등성”(equipotentiality)이라 불려온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잠재력 균등성은 모든 인간 존재가 가진 자신의 자질을 개발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 자질들은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데 모두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잠재력 균등성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영적 형태를 오염시킨 순위매기기 방법론에 대한 필수적 해독제이다. 스페인의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자인 호르헤 페레르(Jorge Ferrer)에 따르면 “비교하는 마음”은 언제나 서로 간에 더 높거나 더 낮게 순위를 매기게 되는 위계의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통합적인 체화된 영성은 쉽사리 경쟁·대립·시기·질투·대결·증오를 낳는, 비교에 기반한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순수한 활력으로 조화롭게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상호증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레 출현할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욕구와 결핍을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비교하는 마음을 중지하는 것이 영적 집단들에 역설적으로 그토록 퍼져 있는 광범위한 위계적 상호작용 양식을 해체할 것인데, 이 집단들에서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다른 이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몇몇 특권적 측면들에서 우등하거나 열등하다고 본다.”

이와 달리 모든 각각의 개인들은 다양한 속성·강함·약함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 각각에서 다른 이들보다 못할 수도 있고 나을 수 있다. 핵심은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최고의 기술과 자질이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어생산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와 같은 것이 P2P 영적 프로젝트에도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성취를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하는, 한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초월적 자질인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음악가나 예술가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영적 성취를 존중받을 만한 특별한 기술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사조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의 일을 맡는 솜씨 좋은 선생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선생들은 기술적 조력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재능있는 동료들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영적 탐구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존 헤런(John Heron)이 발전시킨 “협동적인 영적 탐구 집단들”이 이러한 방법론의 실제적인 좋은 사례이다. 이 집단들에서 영적 탐색은 영적 경험이 쉽게 출현하도록 하는 특정한 실험들과 명령들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에 미리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험 많은 선(禪) 선생을 초청하여 명상 수행을 이끌도록 할 수는 있지만,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은 그들의 상호 이해와 배움을 키우고자 집단 내 다른 이들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위계적 집단의 영적 실천과 달리 특정 경험의 선험적 타당성이란 없으며 다른 경험들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험이 존중되며 집단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경험의 일부가 된다.

과거에는 영적 탐구자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이에서 즉 수평적·공통적 측면이 대체로 위계 속에 통합되어 있던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들과 종종 꽤나 자기도취적이었던 더 개인주의적인 뉴에이지 버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됐는데, 후자의 버전들은 (종종 돈과 교환되는) 영적 경험의 획득에 기초하지 수평적 관계에는 미약하게만 근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P2P 영성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공동생산을 존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내가 ‘기여적’(contributory)이라 부르는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각 영적 전통을 가부장제, 배타적 진리론 같은 특정 시대와 연관된 가치들에 영향받는 특정한 사회틀 내의 일단의 명령들로 이해한다. 동시에 각 전통은 우리와 우주의 관계에 관한 특정 진리를 표현하는 심적·영적 실천의 중요 부분 또한 포함한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최소한 이러한 실천들에 부분적으로나마 노출되는 것을, 아울러 다른 이들로부터의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피드백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는 홀로 착수할 수 없는 탐색이며,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이들과의 공유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전통이 거부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비판적으로 경험되고 평가된다. 기여적인 영적 실천가는 스스로를 특수한 전통에 빚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가 그 전통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전통들에 다가가며 그것들을 개별적·집단적으로 경험하고 다른 이들과 경험을 교환하는 영적 탐구 집단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집단들을 통해서 영적 경험의 새로운 집단적 신체가 탐구하는 영적 공동체 및 개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공동으로 창조될 수 있다. 영성의 공동생산에 P2P 거버넌스와 P2P 소유관계를 더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시적 실천들을 발명할 수도 있다. 새로이 출현하던 기독교 문명의 뿌리가 된, 새로운 기독교 주체성을 발명했던 가톨릭 수도승처럼 P2P 영적 실천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P2P에 기반하고 커먼즈로 향해있는 사회를 공동으로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귀결은 공동으로 만들어낸 실재일 것이다. 이 실재는 예측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지식의 커먼즈에로 이끄는,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접근일 것이라는 점이다.




Equipotentiality


  • 다음은 미셸 바우엔스의 ‘Equipotentiality'(잠재적 균등성) 개념에 관한 정백수의 설명이다.

 

Equipotentiality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는 P2P 관계가 ‘등가의 법칙’(law of equivalence’)을 극복하는 원리로서 미셸 바우엔스가 제시하는 개념이다. 아래 두 사이트에 이에 대한 설명이 들어있다.

https://blog.p2pfoundation.net/harry-walker-on-a-anthropology-of-the-common/2015/07/10

https://wiki.p2pfoundation.net/Equipotentiality

‘등가의 법칙’이란 맑스라면 ‘일반화된 교환의 법칙’이라고 불렀을 것으로서, 자본주의에서 시장가격이 형성되는 데 작용하는 법칙이다. 가따리는 ‘일반적인 등가물로서의 자본’ 혹은 ‘일반적인 등가관계’라는 말로서 자본의 핵심을 표현하곤 했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 디킨즈는 상업적 교환을 삶의 핵심으로 보는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 팽크스(Pancks)를 등장시켜서 그 인물의 다른 잠재된 요소(이는 ‘보시바라밀’에 버금가는 것이다)가 발현되어 (물론 상황의 악화도 한몫한다) 이 사고방식을 파훼하는 방식으로 이 법칙을 비판했다.

상품들 사이의 교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상품들의 질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양에서의 차이만 확정하여 교환비율을 정해야 한다. 이 교환비율의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교환가치이며 교환가치의 내적 실체를 이루는 것이 (고전적인 자본주의에서는) 가치(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다. 교환가치가 현실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 바로 가격이다. 상품들은 바로 이 가격에 따라 서로 교환된다. 이러한 등가관계는 상품교환이 일반화되면서 인간의 사회적 삶 전체에 퍼지고 심지어는 사회적 삶에 영향을 받게 마련인 인간의 정신에도 새겨지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상품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것들이 일정한 비율로 서로 교환될 수 있다는 환상적 생각 속에서 살게 된다. 이 환상은 근대를 구성하는 독특한 물신의 하나로서 대안 근대로 넘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 가운데 하나가 된다. 따라서 대안 근대를 향하는 운동은 이 등가의 법칙의 극복이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직장이 있고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는 자신의 성실한 노동의 대가로 상당한 양의 임금과 교환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이것이 굳어져 물신(物神)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중에는 가령 무조건 모두에게 일정 양의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소득 같은 기획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림이 있을 수 있다. 인류의 긴 역사에서 상품화된 노동과 교환된 임금으로 생활수단을 획득하는 관계가 존재한 시기는 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노동자는 생각조차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을 배경으로 바우엔스의 생각을 이해하면 도움이 된다.

 

[위에 제시된 첫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바우엔스는 P2P 관계가 ‘equipotentiality’(잠재력 균등성)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equipotentiality’가 바로 이 등가의 법칙을 극복하는 원리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모든 사람이 어떤 기획에 협력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그 어떤 권위도 협력의 능력을 미리 판정할 수 없으며 기여를 통한 협력의 질은 나중에 수평적인 위치에 있는 동료들(peers)의 공동체에 의해 판정됨을, 즉 ‘공동체의 비준’을 받음을 의미한다. 잠재력 균등적 기획에서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기여할 수 있다고 느끼는 모듈[기획을 구성하는 부분들―옮긴이]을 자율적으로 선택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능력들의 다양한 집합으로 간주되는데, 이 능력들 가운데 일부에서는 특정 개인이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겠지만 전체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한 순위가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바우엔스는 인류학자 해리 워커(Harry Walker)가 「공통적인 것의 인류학」(“Anthropology of the Common”)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등가의 법칙’을 “매우 잘” 설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이 강연의 내용은 볼리어의 블로그에서도 소개되었으며 여기에 옮겨져 있다.

 

[위에 제시된 둘째 싸이트에서의 바우엔스의 설명]

여기서 바우엔스는 찰스 리드비터(Charles Leadbeater)가 요하이 벤클러의 설명을 요약한 것을 인용한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이 서로 연계하는 방식에 대한 벤클러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협동의 원료는 창조적 재능이다. 그런데 창조적 재능은 극히 가변적이다. 사람들이 잘 하는 것이 각기 다르며 또 각기 다른 식으로 잘한다. 외적으로는, 가령 시간이나 움직임 연구에 의해서는 누가 더 효율적인 창조적 노동자인지를 식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에 대해서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가 언제 창조될 필요가 있는지를 자세히 밝히는 상세한 직무기술서와 계약서를 쓰기가 매우 어렵다. 창조성은 ‘때 맞춰’ 배달될 수 없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은 창조성과 질을 평가하는 어려움을 의사결정을 개인들과 소집단으로 탈중심화(분산)함으로써 해결한다. 이들은 무슨 일에 집중해야 할지를 무엇이 행해질 필요가 있고 그들의 숙련된 기술은 무엇인가에 따라 결정한다. 이미 직원이 잘 배치되어 있거나 당신의 기여가 별로 표가 나지 않는 기획에 집중하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 동료들의 눈을 속이기는 매우 어렵다. 당신이 하는 기여가 일정 기준에 실제로 못 미치면 그들이 곧 발견할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집중한다. 훌륭한 중추적 디자인 규칙들이 전체가 합쳐지도록 해준다. 오픈소스 공동체들에서의 일은 창조적인 사람들이 상이한 과제에 스스로를 분산시킬 때 이루어지며, 이들은 자신들의 작업을 동료들에 의한 열린 평가에 맡겨서 질을 유지하고 생산물은 모듈로서 디자인되어서 개인들의 기여가 쉽게 서로 맞춰지도록 한다.

중간에 실제 사례를 소개하는 부분은 생략하고 마지막으로 바우엔스가 인용하는 조지 페러(George Ferrer)의 대목을 우리말로 옮긴다.

통합적이고 육화된 정신성(spirituality, 영성)이 비교에 기반을 둔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릴 것이다.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은 경쟁, 겨룸, 시기, 질투, 갈등 그리고 증오를 쉽게 낳는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진정한 강력한 잠재력과 조화를 이루며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서로 풍요롭게 하기를 특징으로 하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출현할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의 욕구와 결핍을 서로에게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현재 우세한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는 역설적이게도 영성을 중심으로 하는 단체들에도 매우 확대되어 있다―에서는 사람들이 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전체적으로든 특정의 특권적 측면에서든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으로 보는데, 만일 비교하는 정신을 [전원 내리듯이―옮긴이] 끈다면 이런 위계적 방식의 사회적 상호작용이 해체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오만이나 정신적 나르시시즘은 말할 것도 없고 참되지 못하고 보람 없는 관계들을 낳는) 이 위계적 모델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다양한 숙련과 노력의 영역에서 (지적, 정서적, 예술적, 기계적, 인간관계적 등) 자신들보다 우월한 동시에 열등하며 이 숙련들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것들보다 절대적으로 더 높거나 더 낫지 않다는 의미에서 동등한 존재로 경험하는 ‘나-너’ 방식의 조우에 자연스럽게 길을 내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의 조우를 단순하게 동등하기만 한 것으로 평범하게 만드는 것을 피하려면 인간의 평등을 이러한 관점에서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또한 의미와 자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우리의 상호작용에 가져올 것이다. 모두가 우리로부터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진정으로 열려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인의 통합적 발전은 “사랑의 수평화”를 낳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나 겨루는 상대로 보기보다 내재적 차원에서나 초월적 차원에서나 ‘신비’(Mystery)의 특유한 육화로 볼 것이다. 우리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줄 수 있고, 우리 또한 그에게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존재로 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