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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꼬쎄쏠라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커머닝하기

 



베네수엘라 소재 협동조합들의 연합인 <쎄꼬쎄쏠라>(Cecosesola, Central Cooperativa de Servicios Sociales de Lara)는 내가 접해 본 가장 특이한 성취를 이룬 커먼즈 중 하나이다. 이 주목할 만한 연합은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데도 많은 기획들을 커먼즈로 솜씨 있게 운영한다.

베네수엘라 라라주에서 1967년에 설립된 <쎄꼬쎄쏠라>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사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협동조합을 만들 돈을 매달 적립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조직했을 떄 시작되었다.

거의 60년이 흐른 후 이제 <쎄꼬쎄쏠라>는 대단히 다양한 기획들을 조직한다. <쎄꼬쎄쏠라>는 일주일마다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재화를 제공하는 대도시 상품시장들에 800톤의 채소들을 제공하기 위해 농부들과 함께 일한다. <쎄꼬쎄쏠라>의 보건의료서비스는 많은 전문 분야와 외과를 포함해서 연간 25만 명의 환자를 치료한다. <쎄꼬쎄쏠라>의 저축 대부 협동조합, 장례사업체 그리고 수십 개의 다른 조직들이 기존의 시장들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으로 저소득층 가정에 편의를 제공한다.

협동조합들의 시장성과가 인상적일지라도 가장 의미 있는 성취는 내부 업무 문화와 아래로부터의 지원이다. <쎄꼬쎄쏠라>는 천오백 명의 조합원들의 신뢰와 참여를 기반으로 비위계적인 평등한 문화를 주도한다. <쎄꼬쎄쏠라>의 성공은 사회적 신뢰 구축하기, 책임감 및 개인적인 자기 개선에 충실히 전념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50년 넘게 <쎄꼬쎄쏠라>의 조합원인 구스타보 쌀라스(Gustavo Sala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멋진 사업들을 하기 위해 우리는 기존 방식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우리는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신뢰를 구축하는 교육과정에 집중합니다.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우리가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사업상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필요 없습니다.”

2022년에 <쎄꼬쎄쏠라>는 그동안 쌓은 업적들을 인정받아 <올바른 생계수단 상>를 수상했다. 사회변화를 선도하는 리더십을 예우하는 그 상은 ‘이윤 추구 경제에 대한 탄탄한 대안으로서 공정하고 협력적인 경제모델을 확립’하는 데서 모범적인 일을 한 <쎄꼬쎄쏠라>를 수상단체로 선정했다.(2022년 블로그 글을 참조하라.)

자본주의 시장 맥락 내부에서 어떻게 커머닝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해 최근에 나는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64)에서 쌀라스와 인터뷰를 했다.

작고한 동료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2019년 출판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커먼즈의 전복적 힘』(Free, Fair and Alive: The Insurgent Power of the Commons)—에서 시장 시스템 내부에서 커머닝을 하면서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쎄꼬쎄쏠라>에 대해 글을 쓴 바 있다. 우리는 협력과 윤리적 참여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강력하게 효과적인 대규모 노동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매료되었다.

<쎄꼬쎄쏠라>는 가격과 아래로부터의 지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시장에 참여하는 기존의 사업체들보다 더 뛰어난 실행력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조합원들에게 인간미 있고 공평하며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한다. 이 단체의 (스페인어로 된) 슬로건 ‘Construyendo confianza en la diversidad’은 ‘다양성을 통해 신뢰 구축하기’로 옮겨진다.

쌀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경제적 목표나 계획을 가지고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과정에 집중하며 성장합니다···. 신뢰는 창발적인 현상입니다.” <쎄꼬쎄쏠라>는 경쟁을 협력으로, 효율을 회복탄력성으로, 단기적인 생각을 지속가능성으로 그리고 이익 중심의 접근법들을 욕구 중심의 전망으로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쎄꼬쎄쏠라>에서 이루어지는 권한의 철저한 탈중심화는 사회적 결속으로 균형을 잡는다. 그 결과로 매우 창조적이고 유연한 대규모 팀이 생겼다. 조합원들은 생산 현실, 경제적 압박 및 고객들에 관한 최고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그 정보의 도움으로 협동조합들이 재빨리 그리고 전략적으로 반응한다. 조합원들은 때때로 연합 내부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여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전체 사업에 대한 더 넓은 인식을 갖춘다.

이 문화 덕분에 <쎄꼬쎄쏠라>는 지난 몇십 년에 걸쳐서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몇몇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혼란을 타개할 수 있었다.

외부 공급 업체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쎄꼬쎄쏠라>의 공급자들과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물론 화폐교환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장에서처럼 경험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거래하는 사고방식이나 경쟁적인 태도가 없다. 최우선 사항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성장, 책임 있는 판단, 윤리적 관계 및 집단에의 헌신을 장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쎄꼬쎄쏠라>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그토록 양심적으로 커머닝을 추구하는가? 두 가지 설명이 주어졌다. “우리는 재산을 폐지하지 않고 재산을 지양한다.”[주석1] 이것은 사유재산권이 다른 모든 권리를 능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업상의 우선순위를 내세우지 않는 사업체이다.”[주석2] 이것은 전인적인 욕구와 인간성에 주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쎄꼬쎄쏠라>의 경험을 접한 질케와 나는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커머닝의 중요한 패턴, 즉 ‘상업과 커머닝을 구별하기’라는 패턴을 포착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 조합원들은 농부들 및 다른 공급자들과 가격을 놓고 흥정하지 않는다. <쎄꼬쎄쏠라>는 그들에게 실제 비용과 그들이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다. 경제적 관심사와 비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장기간에 걸친 관계의 맥락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공정한지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채소들은 모든 생산물에 대해서 개별 가격이 아니라 킬로그램 당 평균 가격으로 팔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기존 대형마트의 대략 절반 가격에 채소를 구입할 수 있다.

<쎄꼬쎄쏠라>는 외부 도매업자들, 유통업자들, 중간관리자들, 마케팅 등과 같은 데 들어가는 간접적인 비용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과 업무방식에서 상당히 더 자유롭다. <쎄꼬쎄쏠라>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보다 조합원들에게 두 배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업체들보다 실질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가격을 설정할 수 있다. <쎄꼬쎄쏠라>의 조합원들은 <쎄꼬쎄쏠라>의 노동 문화를 심화하기 위해 나흘이 아닌 사흘만 일하기로 최근에 결정을 내려서 나머지 하루를 내부 회의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쎄꼬쎄쏠라>에 관하여 구스타보 쌀라스와 나눈 인터뷰 내용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쎄꼬쎄쏠라>에 관한 추가 정보는 다음의 유튜브 동영상들—구스타보 쌀라스와의 인터뷰2022년 <쎄꼬쎼솔라에> 주어진 <올바른 생계수단 상> 수상식—을 참조하라. 또한 글로서는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에서 <쎄꼬쎄쏠라> 회원들과 한 인터뷰 및 <쎄꼬쎄쏠라>의 철학과 실천들에 관하여 쓴 <쎄꼬쎄쏠라>의 2010년 에세이집단적 정신을 향하여 ? 형식적 회의에서 조우의 공간’으(“Toward a Collective Mind? Transforming Meetings into Get-Togethers”)도 흥미롭다.

주석1: [옮긴이] 이 문장은 핼프리히가 <쎄꼬쎄쏠라>의 몇몇 조합원들과 나눈 인터뷰에 나온 것이다. 이 인터뷰는 https://www.boell.de/en/2016/01/21/venezuela-we-are-one-big-conversation에서 볼 수 있다.

주석2: [옮긴이] 이 문장은 볼리어가 인용부호 안에 넣었지만,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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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설명: 볼리어의 글의 맨 마지막에 언급된 에세이 “Toward a Collective Mind? Transforming Meetings into Get-Togethers”의 한 절인 ‘From meetings to get-togethers’를 우리말로 옮겨서 부록으로 추가한다. 원래 볼리어가 링크를 단 영어 텍스트를 저본으로 해서 초벌 옮김을 했는데 군데군데 애매한 대목들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쎄꼬쎄쏠라 홈페이지에 독어본도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독어본을 참조하여 여러 애매한 대목들을 수정했다. 부록은 정백수가 옮겼다. ] [추가 설명: 이미 게시한 후에 아마도 번역본이 아니라 원본일 것으로 추정되는 스페인어본을 발견했으며 이를 참조하여 ‘함께하는 자리’를 ‘조우의 공간'(espacios de encuentro)으로 고치는 등 몇 군데 수정을 했다.]

 

‘형식적 회의’에서 ‘조우의 공간’으로

 

요약하자면, 지난 40년 동안 <쎄꼬쎄쏠라>의 회의의 목적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처음에 우리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보이는 기성의 패턴을 따라갔다. 해마다 열리는 총회가 있고 연합 소속 조합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중앙운영위원회가 있었으며 노동자의 참여는 없었다. 진행자가 회의를 이끌었으며 이미 결정된 의제를 다루었다. 의사결정이 회의의 주된 존재 이유였으며 대부분의 합의에는 이미 정해진 정족수에 따른 다수결 절차가 필요했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나 합의사항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음 회의에 참여하여 투표할 권리가 없으면 수정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회의는 내적 권력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전적으로 논리적이고 정상적인 듯 보였던 방식의 회의였다. 우리의 문화적 풍토를 구성하는 불신, 소외, 위계적 구조에 맞추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쎄꼬쎄쏠라>에의 참여를 개선하기 위한 첫 시도들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내용보다는 형태의 변화에 더 집중되었다. 우리는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연합에 참여하는 각 협동조합에 회의와 간부진을 도입하고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위계적 구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장례 사업에는 계속해서 조합장을 두었다. 간부진이 각 조직의 수뇌부를 이루었다. 총회가 언제나 최고의 힘을 가진 회의였으며 전통적인 격식 아래에서 기능했고 내부 권력투쟁의 무대 역할을 했다. 회의의 일차적 이유는 늘 다수결에 의한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참여의 공간들이 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미리 정해져 있었다.

지금 되돌이켜 보면, 버스협동조합의 경험이 우리의 과정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주석3] 이 경험은 우리 조직의 변형을 가속화했으며 우리 회의의 심대한 변화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열린 직접적 참여를 제한하는 격식들이 점차 제거되었다. 동시에 우리의 회의들은 새로운 특징과 내용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들은 처음 단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제한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처음의 회의들은 참여에 열려 있는 ‘조우하는 공간’이 되었다. 정해진 구조가 없고 미리 짜놓은 계획이 없는 공간이었다. 모두가 함께 모이는 순간 내용과 형식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회의들을 각기 다른 구체적인 측면을 내용으로 다루지만, 모든 회의 뒤에는 유대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서로 존중하려는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의사결정이 모이는 주된 이유가 더 이상 아니다. 정보교환과 공동의 성찰에 중점이 두어진다. 중요한 것은, 유대와 신뢰의 구축, 전체를 보는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그리고 개인과 조직의 변형이다.

그래서 우리의 조우는 경계가 없는 ‘우리’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회가 된다.여기서 ‘우리’란 또한 공유된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을 의미한다. 이 기준은 우리의 현실이 변하고 우리가 성찰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변형함에 따라 우리의 합의에 의해 변경되는 유연한 기준이다. 이 공동의 기준으로 인해 모두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이 쉬워진다.

이제는 결정을 내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간부회의, 조합장 혹은 감독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희의체들이 또 하나의 지도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발전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모일 때 의사결정을 하겠지만, 그때그때의 일상적으로 내려지게 마련인 결정에 대해 모든 개인이나 그룹이 공동 기준을 토대로 하여 책임을 질 것이다.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똑같이 책임을 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사항이 발생시키는 재정적 손실을 감당하는 것도 이 책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두가 참여하고, 회의에서 합의에 의해 생기는 집단적 기준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모든 개인 혹은 회의체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감당함으로써 전체를 보는 윤리적 인간이 되며, 그렇게 해서 개인과 조직을 변형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는 합의가 만장일치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지려면 어떤 그룹이나 조직의 구성원들 전부가 출석해야 한다. 만장일치란 모두가 찬성하는 표결이다.

우리의 경우, 결정은 ‘우리’가 어떤 시점에서 공유하는 기준을 따를 때 합의된 결정이 된다. 결정을 개인이 내리느냐, 비공식적 그룹이 내리느냐, 공식 회의체가 내리느냐는 상관없다. 따라서 미처 개선할 시간이 없는 경우말고는 확정된 의결이란 없다. 항상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존재한다. 만일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거나 결정이 이루어질 때 개인주의적인 기준이 우세했다는 견해를 낸다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새롭게 다루어질 수 있다.

이런 의사결정 방식은 분명 무질서와 실수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때로 중대한 경제적 손실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을 제한하는 문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발생하는 모든 유연성과 역동성에 의해서 모든 경제적 손실은 몇 배로 보상된다.

오늘날 우리는 애처롭게도 쓸데없이 내부 권력투쟁을 벌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체를 보는 윤리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은 위계적 관계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의 이른바 참여를 규정한다는 미로 같은 의회적 규칙들에 갇히지 않는다. 이 규칙들은 불신에 기반을 두며, 결국 실질적인 참여를 방해할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대의(代議)와 대표 모델은 책임 있고 직접적이며 일상적인 참여로 대체되었다. 회의는 참여하고 싶어 하는 누구에게나 제한이 없이 열려 있는 공간이 되었다. 논의의 주제들에 대한 제한도 없다. 표결로 결정하는 과정도 없다. 모든 구성원이나 회의체는 공동의 기준에 기반을 두고 내린 결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의결 정족수는 효력을 잃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미친 짓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안다. 우리가 존중과 유대에 기반을 둔 공존을 심화시킬 때,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제공하는 저 경직된 조직형태의 미로에 갇힌 에너지를 해방시킬 때 전체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우리 버스들이 압수되었던 기간 동안 우리가 충분히 경험했던 그 유대의 힘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이 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그런 힘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면하게 되는 모든 난관, 장애, 좌절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그 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주석4]

주석3: [옮긴이]  <쎄꼬쎄쏠라>는 1976년에 공동체 전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버스운행 사업을 시작하면서 조합원들의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로 열린 협동조합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쎄꼬쎄쏠라>는 버스 요금 인상을 막기 위해서 지방정부에 지원금을 요청하는 집회들을 열게 되는데, 지방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80년 3월에 <쎄꼬쎄쏠라>의 버스협동조합의 버스들을 압수한다. 조합원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등의 어려움 속에서 남은 조합원들이 이에 맞서 싸우면서 <쎄꼬쎄쏠라>는 위기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바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게 된다.

주석4:[옮긴이]  이 글의 다른 곳에서는 이 힘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가부장적인 권력 축적 논리에 가둔다면 사라지는 그러한 힘이다. 우리가 은행에 모아놓은 돈처럼 필요할 때 쓰려고 유대를 축적하려 한다면, 이는 유대의 본질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지평선이 우리가 보고 즐길 때는 존재하지만 그것을 붙잡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와 하트의 책 Assembly(2017)의 12장 「관절이 어긋난 신자유주의적 행정 」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2장의 뒤에 딸린 “Fifth Response”는 제외되어 있다. 다음에 따로 올릴 에정이다.

 

Chapter 12. Neoliberal Administration Out of Joint 207

 

화폐와 금융이 스스로의 힘으로 지배하지는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사회관계와 생산관계가 사회 전체에 퍼져있는 제도들에 의해 운영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일반적 내러티브: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일국적)의 위기에서 나왔다.

보완적 내러티브: 일국 주권과 근대 행정은 외부에서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다양한 형태의 부패를 통해 공동(空洞)화되었다. 기업들의 로비 및 기타 합법화된 부패.

요컨대, 근대 행정과 일국 주권들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이미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내러티브들은 유용하다. 그러나 이는 전개과정을 위에서만 보기 때문에 이 시각은 부분적이고 본질적 요소들을 놓치고 있다. 8장에서 이미 말했듯이. 근대 행정을 위기에 빠뜨린 살아있는 동력은 아래로부터 왔다. 즉 생산적 다중의 창조적이고 협동적인 회로들이다. 그 증가하는 능력, 지식, 정보에의 접근, 그리고 고정자본의 재전유.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제도들과 실행들을 이해하는 열쇠는 다중의 저항, 반란. 자유의 기획, 자율능력에 대한 반응으로 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근대 관료제를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만든 에너지와 능력을 봉쇄하고 수습하기 위해 고안된 무기이다.”

 

Neoliberal freedom 208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자유를 정치적 어젠다의 중심에 놓는 보수적·자유주의적 전통의 정점이다. 그 자유들 가운데 일부는 단지 신비화일 뿐이다.

 

개인의 수준이 아니라 사회적 수준에서 보면 자유는 노예상태를 의미한다. 작은 정부도 종종 재산의 보호, 안보장치들, 경계철책들, 군사프로그램들에 드는 예산의 증가를 의미하곤 한다. 즉 신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이 아니며 정부 활동이나 강압의 감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푸꼬는 “신자유주의적 통치개입은 다른 체계에서만큼이나 밀도 있고 잦으며 능동적이고 연속적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신비화된 자유 개념 아래에는 사회적 자율이 맥박치고 있다.

 

푸꼬 :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이제 교환의 파트너가 아니라 개인 기업가이다. 기업가의 일반화.

 

이 기업가 형상은 사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발명품이 아니라 점점 더 자율적이 되는 사회적 생산형태들을 굴절시켜 해석하고 전유한 것이다.

(푸꼬의 강의들 전체에 걸쳐 사회를 가로지르는 저항과 투쟁에 대한 인식이 때로는 낮은 목소리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회에서 보이는 기업가 형식의 일반화는 사실 신자유주의와는 반대방향을 가라킨다. 즉 협동적인 사회적 주체성들의 자유와 자율을 가리킨다. “달리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앞에서 그리고 그 아래에서 우리는 다중의 기업가정신을 발견한다.”

신자유주의의 자유 주장을 타당한 것으로 보자는 것이 아니다. 저항적 주체성들의 힘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개인이 기업가가 되고 자신의 삶을 관리할 자유는 실제로는 대부분 불안정성과 가난으로 옮겨간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푸꼬의 강의를 듣고 그의 비판적 목소리를 긍정으로 오인한 듯하다. 노동자들이 개인 기업가가 되는데 주된 장애는 안정된 평생보장 직업이라고 드러커는 주장한다. 노조가 깨지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야 노동자가 늘 자신의 삶에서 혁신하고 갱신할 테니까. 대학이나 정부도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안정 역시 자기혁신을 위축시키니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새처럼 자유롭다, 안정된 직업에서 자유롭고 복지 서비스에서 자유로우며 국가의 지원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자신의 불안정한 삶을 최선을 다해 자유롭게 관리할 수 있다 하니 이 얼마나 멋진 위선인가!

 

일본에서 나온 프리터(freeter)라는 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전도된 현실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가 프리터의 자유, 가난과 불안정의 자유이다.

 

신자유주의의 신비화에 분노하여 저 아래 있는 사회적 협동의 동학을 놓치면 안 된다. 다중의 기업가를 놓치면 안 된다.

 

테크놀로지 소비에는 계속적인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는 가장 낮은 수준에서 1인 관료제(a bureaucracy of one)를 창출한다. 자유와 제한을 서로 구분하기 어려운 개인적 자기관리의 구조이다.

금융과 사회적 생산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형태들은 생산과 협동의 자기관리와 자기조직화에 의존한다.

신자유주의 아래에는 자기관리와 협동의 사회적 형태들이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여기서 나오는 가치를 추출하고자 한다.

 

자기(자주)관리는 식민화된 민족들, 페미니스트들, 인종적으로 종속된 사람들, 조직된 노동자들 등의 세계 전체에 걸쳐서 투쟁의 핵심적 요구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정점에 달했다.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공동체 자기(자주)관리의 성공적인 실험 사례들 가운에 일부는 흑표범당의 해방학교 및 어린아이들을 위한 무상아침급식 프로그램; Gabriel Cohn-Bendit가 창립한, 학생과 선생이 함께 관리하는 학교인 Lycee experimental de Sainte-Nazaire; 2001년 경제위기 때 소유주에 의해 버려진 후 노동자들이 되살려 운영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Bauen Hotel; Our Bodies, Ourselves를 출판한 Boston Women’s Health Collective가 있다.

모든 나라, 모든 공동체에 그러한 다중의 기업가정신의 사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적 전유는 ① 자유와 자기관리 개념을 집단에서 개인의 규모로 축소한다. ② 다중의 지식과 능력을 포획하고 전유한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는 추출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자유는 과거의 투쟁의 왜곡된 부호―의미 없이 되풀이 하는 옛날 단어―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형태의 지식, 자율, 집단적 자주관리를 가리킨다. 푸꼬의 말을 명심하라.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 열쇠는 그 자유를 찾아서 그것을 바탕으로 그 다음 작업을 계속하는 것이다.

 

Crisis points of neoliberal administration 212

 

8장에서 말했듯이, 근대의 행정은 지식, 능력, 정보에의 접근이 인구에 일반화되고 행정통제의 경계를 넘쳐흐를 때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계산하는 사회적 요인들이 점점 더 측정 불가능하게 될 때 무너진다. 행정은 이제 엄밀하게 합리적인 사회적 요인만이 아니라 정동과 주체성의 생산에 그리고 공통적인 것의 부의 포획에 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일국 및 초국적 수준의 행정 및 법 장치들은 점점 더 단편화된다.,

Andreas Fischer-Lescano and Gunther Teubner: 법의 단편화는 전지구적 사회 자체의 단편화를 반영한다.

버넌스의 한 양태로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흘러넘치고 측정불가능하고 단편화된 특징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를 종식시키지 않는다. 정부와 달리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는 단편들 사이의 약한 양립 가능성에 의존하는 다수적이고 유연한 통제네트워크를 발생시키고 유지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열쇠는, 영속적인 위기의 상태에서 기능하고 명령을 행사하고 가치를 추출하는 능력이다. 그 아래 있는 생산적인 사회적 장을 궁극적으로 통제하거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위기점 가운데 첫째는 가치 측정을 중심으로 한다. 특히 사회적·비물질적 생산물과 관련된다. 자본주의 회사들과 근대 행정이 산업 및 농업 생산물들의 가치를 측정하는 데 어찌어찌 성공한 반면에, 사회적 생산물들은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간호사가 제공하는 돌봄의 가치나 컴퓨터 문제를 해결하는 콜센터 노동자의 지성의 가치 혹은 문화생산물, 아이디어 등의 가치를 어떻게 수량화할 것인가?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일반적으로 계산에 저항한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모든 결과는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특징을 띤다. 공유에 열려 있고 사유재산으로 폐쇄되기 힘들다. 모두가 사회적 삶형태들을 구성한다. 사회적 생산의 생산물들을 어떤 식으로든 있지만, 그것들의 가치는 할당된 양을 흘러넘친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는 본성상 측정 너머에 있다.”

 

공통적인 것의 가치의 측정 불가능성이 자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이 측정 불가능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동원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파생상품들이 미지의 가치에 대한 벤치마크를 제공하고 하나의 자본을 다른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메커니즘을 창출한다.

 

그러나 이 테크놀로지들도 전지구적 경제의 토대를 성공적으로 안정화하지는 못한다. 사실 더 휘발성 있게 만드는 쪽이다. 매일 아침 신문에는 경제의 불안정을 나타내는 사건들로 가득하다. 이 불안정은 부분적으로는 범죄적 행위 때문이지만, 체제 차원의 단층선(systemic fault lines)의 징후이기도 하다.

마라치(Christian Marazzi) : “경제적·금융적 위기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되어가고 있으며, 가치의 불안정성이 한 유발 요인이다.”

금융자본의 지배 하에서는 거버넌스와 위기가 모순적이지 않다. 자본이 위기를 거버넌스의 한 양태로 채택한다.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둘째 위기점은 정보와 소통에의 접근이다.

각 정부들의 통제 및 감시 노력.

비밀과 감시가 안보 주장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나 아무리 댐을 튼튼하게 해도 인터넷 경찰은 항상 새로운 누수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10대가 노트북으로 장애물들을 제치고 금지된 사이트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 항상 일어날 것이다.

 

이주가 셋째 위기점이다.

2014년에 6천만 명이 강제로 이동.

오늘날 2억 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태어난 나라의 바깥에서 산다.

지구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10분의 1이 이주민들이라고 추산할 수 있다.

 

국민국가들과 초국적 거버넌스 기구들이 무관심한 가운데 활동가들이 이주민들을 돕고 있다.

 

많은 다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주민들은 자유롭고 유동하는 주체들이다.

돕는 사람들도 너무나도 자주 그들을 희생자들로만 본다.

싼드로 메짜드라(Sandro Mezzadra) : “이주의 주체적 측면을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온정주의적 시각을 넘어서 이주민들을 오늘날의 전지구적 변형 과정의 주인공들로 볼 수 있다.”

 

부와 가난의 역설을 한데 묶어서 보기.

① 삶의 발판들을 박탈당한 상태.

② 탈주는 자유의 행동이며 강함의 표현이다.

 

주체성의 관점에서 이주자들은 모든 행정적·자본주의적 척도 논리를 넘어선다. 여기서도 신자유주의적 행정은 영속적인 위기관리 장치의 형태를 띤다.

 

자유와 주체성이 생산, 정보에의 접근, 이주를 특징짓는다. “주체성의 생산이 행정의 기능에 필요한 척도의 경계들과 테크놀로지들을 항상 초과한다.” 위기관리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작동양태이다.

 

이렇듯 위기가 신자유주의적 행정의 규칙(규범)이지만 이것이 행정의 매끄럽고 성공적인 기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결과로 규칙적인 위기를 낳는다. 다 효과적이지는 않다는 말이다.

① 사회적 생산의 결과들을 하나의 척도에 종속시키지 못함 ② 정보의 통제 불가능성 ③ 이주의 봉쇄 불가능성 — 이 셋이 행정의 무력(효력을 내지 못함)에 추가되어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재앙급의 결과를 낳을 수 있다.

 

Emptying the public powers 218

 

신자유주의 행정은 액체 거버넌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공적인 힘들(공적인 것)을 비워내고 행정 기능에 자본의 논리를 부과하는 프로젝트를 향해서 정렬된 분산되고 무질서한 연관들로 짜인 내구성 있는 직물과 더 닮았다. 그러나 주체성들은 결코 그 규칙에 맞추어져 기능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행정을 분석할 때 하나의 과제는 어떻게 신자유주의 너머를 지향하는 저항과 반란의 잠재력이 아래로부터 출현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행정이 공적인 것을 비워내는 양태

①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의 부의 이전

민영화

국가부채

긴축정책이 국가 재산을 팔게 함. 예) 2015년 그리스의 부채 드라마.

불법적 수단을 통한 부의 이전. 공적 기금의 횡령, 공공 자산의 부적절한 판매, 허위 토목공사 도급, 뇌물 등.

드러난 비리는 빙산의 일각이다.

“부패가 신자유주의 행정의 거버넌스 및 규범적 구조의 구성적 요소가 되었다.”

② 다양한 내적·외적 압력을 통해 국가행정장치의 핵심 기능을 변형하기

외부 압력: 예를 들어 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협박하여 일국의 결정능력을 압도하기

내부 압력 : 민영 싱크 탱크, 로비스트들의 입법 지시, 선거에의 합법적 기여

 

그런데 이 현상은 더 일반화된다. 행정력이 사유화되고, 시장의 척도가 행정수행의 벤치마크가 되며, 행정 결정에 경제적 기준들이 침투함으로써 정치적인 것 자체가 공동화(空洞化)되고 있다.

Wendy Brown: 신자유주의는 <경제적 합리성이 정치적인 것에 위로부터 부과되는 것 + 경제적 논리에 의해 구성된 새로운 주체들의 창출>로 정의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서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호모 폴리티쿠스를 정복하기”이다.

법 실행과 법 이론이 신자유주의 행정이 부리는 무기들 가운데 일부이다.

 

우리는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이전 지위를 복원시키려는 마음은 없다. 아래에서 보면, 신자유주의에 저항 행동들과 생산적 활동이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매끄럽거나 안전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항상 저항과 투쟁의 장소로 남아있다.

 

[신자유주의와의 싸움의 세 전선]

① 투명성

신자유주의 행정의 전략적 불투명성과 싸움.

② 접근

행정 및 기업 활동에 빛을 비추면 비리를 막을 뿐만 아니라 생산적 지식과 정보를 사회 일반이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사회적 생산 수단의 자유로운 사용.

③ 의사결정

의사결정에 관한 문제가 양자를 통합하여 우리를 정치적 지형에 세운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말한 바처럼 정치의 자립성을 경제적 합리성으로부터 구출하는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종속에 맞서는 주체성들의 잠재적 생산을 지향하게 한다.

 

이 모든 전투에서 주된 전선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세계이다.

디지털 감시

신자유주의적 보안 장치들과 사회적 미디어 기업에 의한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 사이에는 강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이중적 역할 : ① 사회적 생산이 포획과 신자유주의 행정을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동시에 ② 다중으로 하여금 지식, 소통, 자기행정 능력에 접근하도록 허용한다. 7장에서 말한 고정자본의 재전유가 해방기획을 위해 이러한 힘들을 이용할 한 수단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결코 만만한 대상은 아니다. 자본과 신자유주의가 가진 무기는 종종 우리를 완전히 무력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낙관주의나 절망 어디에도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다) 신자유주의의 명령과 단절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주체성과 사회적 삶의 생산을 위한 잠재력을 우리의 상황이 제공함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IV부에서 다룰 과제는 이 지형 위에서 혁명적 과정을 어떻게 구체화하고 조직할 것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