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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상상력이 미치는 영향력

 


  • 저자  : 존 러스킨(John Ruskin)
  • 원문 :  “Influence of Imagination on Architecture”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남영
  • 설명 : 아래는 존 러스킨의 『두 개의 길』(Two Paths, 1859)의 4강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앞서 그 일부가 올라간 「『건축의 일곱 등불』해설」에서 상상력을 다룬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상상력이 건축에 미치는 영향력’은 러스킨이 1857년 1월 23일 라이언즈인 홀(Lyon’s Inn Hall)[주석1]에서 건축협회 회원들에게 한 연설이다. (번역이 아니라 정리이므로 강조와 주석은 모두 정리자의 것이다.)

만일 누가 ‘위대한 예술가들이 군소 예술가들과 어떤 자질에서 다르냐’고 물어보면서 간단히 답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첫째 감수성과 다감함, 둘째 상상력, 셋째 근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근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게으른 똑똑이들이나 근면한 우둔이들을 봤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게으른 똑똑이들을 본 적은 있어도 게으른 위대한 사람은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고결한 작품들을 만들어낸 예술가들은 모두 위대한 일꾼들이다. 그들이 성취한 일의 양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젊은이가 전도가 유망하다는 말을 들으면 그에 관한 첫 물음이 ‘일에 열심인가?’이다.

그러나 근면함이나 감수성이 예술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지만 그들이 하는 일은 별로 가치가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강렬하고 고결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술가의 변별적 재능은 공감과 상상력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상력을 새로운 것들을 우리의 사유 속에 상상하거나 그리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이 힘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존중심을 보이고, 기계조작·계산·관찰 등의 다른 능력보다 더 큰 힘으로 인정한다. 어떤 할머니가 난로가에서 물레를 능숙하게 잣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 기계조작 능력을 존경할 수 있고, 그 할머니가 그 일로 일 년에 얼마 벌지를 재빠르게 계산하는 것을 보고 그 계산능력을 존경할 수 있으며, 그러는 동안 손주들 가운데 난로불에 닿는 아이가 없도록 지켜보는 것을 보고는 그 관찰력을 존경할 수 있지만, 그 할머니는 여전히 평범한 할머니이다. 그러나 만일 그 할머니가 스스로 꾸며낸 동화를 내내 손주들에게 이야기해주는 모습을 본다면 우리는 그 상상력을 칭찬하면서 그 할머니가 상당히 남다른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건축가가 시공도((施工圖)를 잘 그리면 우리는 그의 능숙함을 칭찬하고 계약한도를 잘 지키면 그의 정직한 산수능력을 칭찬하며 들보 놓는 일을 잘 지켜보아서 아무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그의 관찰력을 칭찬하지만, 그가 상상력으로 칭찬을 받고 남다른 건축가라고 평가를 받으려면 이 모든 것 이외에 그 자신의 머리로 창작한 동화를 우리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동화가 건축에 의해 창작되고 건축에서 들리는지를, 즉 건축이라는 엄밀한 예술에서 건축가 여러분의 손만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같이 생각해보자.

‘머리’로 작업을 하는 문제로서 젊은 건축가에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아마도 넓게는 근대 문명, 좁게는 영국에 값하는 ‘새로운 양식’을 발명할 책임이리라.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이런 책임에 깊은 인상을 받았을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모든 발명력 있는 건축가들이 각자 새로운 양식을 발명하도록 군(郡) 하나를 할당하고 실제 작업을 위해 주(州) 하나를 할당하는 것이 여러분의 계획인가? 모든 건축가가 새로운 양식의 작은 한 조각을 발명하고 마지막에 모든 조각들을 모아야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양식은 언제 발명하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런 상상의 엘도라도가 허용되었다고 치면, 한 명 이상의 콜럼부스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욕망하는 양식이 발명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단지 그 양식 아래에서 짓는 것 아닌가? 나는 지금 다른 경우에는 내가 인정하지 않는,[주석2] 새 양식의 발명이 가능하다고 치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새 양식을 발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치자. 주두를 기둥의 아래쪽에 놓는다고 치자. 버트레스를 피너클의 아래가 아니라 꼭대기에 놓는다고 치자. 개구부를 아치도 아니고 수평도 아닌 모양으로 씌운다고 치자. 곡선도 아니고 직선도 아닌 선들로 장식을 구성한다고 치자. 용광로와 대장간을 마음대로 사용하여 유리판을 뽑아내고 쇠막대를 뽑아내어 우리 주위를 온통 검은 골격과 눈부신 사각형의 광대한 풍경으로 둘러쌌다고 치자. 거리를 연성(延性)의 잎장식으로 장식하고 지붕을 다채로운 수정으로 씌운다고 치자. 런던 전체에 얼룩덜룩한 돔을 씌운다고 치자. 그 다음에는? 여러분의 상상력은 쇠 잎장식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혹은 놀라운 돔의 다양한 빛 안에서 잠자고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러분의 영혼과 상상과 야망은 전적으로 무한하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여러분은 여전히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싶을 것이다. 여러분은 팔라디오(Palladio)[주석3]나 팩스턴(Paxton)[주석4]에 만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녹인 모든 금속과 유리를 다 합해도 우리 인간 정신의 야망의 날개를 방해할 만큼의 무게가 되지 못한다.

어떤 양식의 본질은 그것이 오랜 세월 동안 실행되며 모든 목적에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어떤 양식이 실행 중인 한에서는 개인의 상상력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그 양식의 범위 내에 있지 새로운 양식의 발명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솔즈베리 대성당을 지은 사람은 고딕 양식을 발명하지 않았어도 명성을 누렸으며 티치아노는 유화를 발명하지 않았어도 베네치아에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면 일정한 양식 안에서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가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첫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건축가의 발명력이 발휘되는 주요 분야가 선들, 몰딩들, 덩어리들을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비율로 배치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정의 양식을 선택했을 때, 이와 다른 식으로 발명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이것을 제대로 하는 데에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우아하게 비율이 잡힌 디자인의 재능은 규칙이나 연구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물 정면의 한 층일이지라도 타고난 직관에 의해서만 아름답게 배치될 수 있다. 싼미켈리(Michele Sanmicheli)[주석5], 이니고 존스(Inigo Jones)[주석6], 혹은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주석7]의 설계에서 보이는, 부분들의 가장 단순한 배치와 맞먹는 설계를 자신의 설계에서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자랑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발명력과 재능을 전제로 하고 묻는 것인데) 특정 건물의 선들을 아름답게 배치했을 때 무엇이 성취된 것인가?

우선, 여러분은 그 성취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거나 감상적인 종류라는 점을 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음악은 여러분을 때로 울게 만들고 때로 웃게 만들 것이다. 음악은 병사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언어를 줄 수 있으며 애도자에게 위안을 줄 수 있고 즐거운 사람에게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며 독실한 사람에게 더 많은 겸허함을 줄 수 있다. 일군의 선들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건축물에서 보는 비율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거나 영감을 주거나 위안을 주지 못하더라도 즐겁게는 해주는가? 음악에서 음표들 사이의 비율은 여러분을 즐겁게 하는 데 필수적이다. 머리에 꽃을 꽂거나 옷에 리본을 두르는 것도 여러분을 감탄시키며 여러분의 행복에 필수적이다. 케익에 박힌 건포도들의 비율이나 과자에 박힌 설탕의 비율에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젊은이들이 있는데, 문의 아키트레이브[주두 위에 놓이는 상인방이나 들보]에 즐거움을 느끼는 젊은이를 본 적이 있는가? 혹은 몇 명을 수용할 수 있느냐와는 다른 각도에서 방의 비율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은 본 적이 있는가? 만일 런던에서 최고의 비율을 가진 건축물이 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하룻저녁에 집중시킬 수 있고 여러분이 이 즐거운 엔터테인먼트 행사에 참가할 티켓을 무료로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이 행사에 참가할 것인가 아니면 드루리 레인[주석8] 팬터마임을 보러 갈 것인가?

여러분은 재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예술에 매진하더라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과학도 즐거움을 주거나 위안을 주거나 용기를 북돋거나 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은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 고결한 사실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고 땅과 공기의 비밀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건축물에서의 비율은 이런 일을 못 한다. 그저 2 더하기 2는 4이고, 1:2=3:6이라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그렇다면 건축가인 여러분은 위안을 주지도 못하고 즐겁게 해주지도 못하고 가르쳐주지도 못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누구에게든 쓸모가 있는가?’라고 물으면 여러분은 ‘항상 비가 내리는 이런 기후에서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 이 쓸모는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서의 쓸모이지 선들의 비율과는 무관하다.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으로서의 건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재능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작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묻는다. 여러분이 설계한 정면에서의 선들의 비율이 병자를 낫게 하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가? 여러분의 노년에 건축가로서의 성취라는 것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을까? 건축가로서의 여러분에게 누가 고마워할 것인가? 어쩌면 (걱정되는 일이지만) 건축물의 선들의 유령들이 노년의 여러분의 침대 옆에 아무 말 없이 흐릿하게 앉아있을 것이며, 여러분은 자신의 높은 재능의 모든 발현들을 목마른 사람에 준 찬물 한 잔에 대한 기억이 주는 즐거움보다 덜한 즐거움으로 되돌아볼지도 모른다.

여러분 위대한 작품들과 거기에 투입된 건축노동자들에게 준 큰 보상의 경우에는 즐거움을 갖고 뒤돌아보리라고 대답하지도 말고 대답하려고 생각하지도 말라. 나는 여러분이 건축자로서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나는 여러분의 건물 짓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여러분의 발명력과 상상력이 가진 이점(利點)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짓기를 통해 행하는 좋은 일은 여러분이 고용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여러분은 그 혜택주기에 동참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행해야 할 좋은 일은 여러분의 설계 작업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나는 여러분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좋은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작곡에 의해서 좋은 일을 하는 음악가들에 비견한다. 바이올린 연주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사실은 음악가들이 아니라 대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건축가들은 우리의 재능으로 어떤 좋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이 하나의 물음을 명확하게 고수하면서 그리고 우리의 비율 시스템에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가를 말해주시겠는가?

법률가, 의사, 성직자, 과학자, 예술가, 일용노동자, 소상공인―무슨 분야든 그 유용함과 별개로 그와 연관된 어떤 강렬한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건축설계에는 그런 즐거움의 여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여러분은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즐겁게 하거나, 누군가에게/여러분 자신에게 정보를 주거나 누군가를/여러분 자신을 돕거나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1:2=3:6이라는 것 말고는 보여주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상태로 빠진다. 그런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를 뭐라 부를 것인가? 인간들? 내 생각에는 아니다. 우리를 부르는 올바른 이름은 분자와 분모이다. 속된 분수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건축의 영혼이 일정한 비율을 이루는 선들에 있다고 보는 이 이론보다 더 나은 것이 있는가?

정신도 건강하려면 모든 면에서 계발되어야 한다는 원칙에서 출발하자. 호기심, 공감력, 감탄하는 능력, 기지(機智) 등 정신에도 많은 능력들이 있다. 작업방식을 선택할 때에는 가능한 한 이 모든 능력들을 한껏 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발현하는 방식이란 각 능력의 대상에 주의깊게 관여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공감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감탄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들 사이에 있으면서 그것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뻔한 것처럼 들린다. 나는 적어도 그러기를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원칙에 기반을 두어 행동하기를 거부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살아있는 존재들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어떻게 계속 생각할지를 숙고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미앵 대성당 포치의 사진들을 청중에게 보여준다.] 이 단 하나의 입구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공감과 발휘되어 있는가? 주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성 오노레(St. Honoré)가 한 구석에 샐쭉하게 앉아 있다. 그는 책을 손으로 꽉 껴안고 있으며 주교장을 잡으러 일어나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미앵의 시 장로들이 성오노레를 독려하고 읍의 모든 수도사들이 성오노레가 주교직에 앉지 않으면 어쩔지 난감해한다. 반대쪽에 있는 수도사들 가운데 하나는 성오노레 없이도 잘 될 것라고 태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성오노레는 주교가 되는 데 동의하고, 주교좌에 앉는다. 그의 무릎에 있던 책은 이제 당당하게 탁자 위에 있으며 그의 마을 부목사 가운데 하나에게 숲에서 유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준다.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가 숲이고 여기가 마을 부목사이며, 여기가 성 빅토리쿠스와 성 겐티아누스의 유해가 있는 무덤들이다.

[주교가 된 이후 성오노레의 일생, 생략]

이 하나의 얕은돋을새김에 담긴 인간에 대한 공감과 관찰의 양을 생각해보라. 이 다양한 형상들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건축가에게 많은 지적 힘과 자연의 관찰이 필요했다.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조각이지 건축이 아니라고. 그럼 조각과 건축의 구분 지점이 어디인지 말해주기 바란다.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순수한 건축 작품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것을 보여주겠다. 여러분이 아마도 순수하지 않다고 할, 노트르담 대성당의 팀파눔들 중 하나의 사진 뒤에 그려져 있다. 이 사진을 보라. 웃지 마시라. 이것은 고전적 건축이므로 이를 보고 웃으면 무례한 것이다. 이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의 한 항목에서 가져온 것이다.

‘순수’하지만 별로 좋게 느껴지지 않으므로 여기에 몰딩 몇 개를 넣어보는 게 어떨까? 모두 찬성인 듯하다. 몰딩의 단면도를 설계할 것인가 베낄 것인가? 설계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몰딩의 단면도를 그리는 것보다 그것을 깎아서 만드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 그런데 ‘건축은 쉬운 것을 하고 조각은 어려운 것을 한다’는 점이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의 정의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깎아 만든 몰딩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으며, 깎아 만든 드레이퍼리는 무언가를 재현한다. 그러나 이것도 또한 건축과 조각 사이의 차이에 대한 설명으로서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각은 의미를 가지는 예술이지만 건축은 의미를 갖지 않는 예술이다‘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양자의 차이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면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은 아마 우리가 직접 지시하고 정확하게 주문한 대로 깎아내게 하는 모든 장식을 ‘건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세공인의 의지나 어떤 다른 설계자의 감독에 맡길 수밖에 없는 장식들은―특히 건물의 필수적 부분이 아니고 다소 외적이거나 외장형인 경우―‘조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정의를 받아들이면서, 이것은 사실 맨 처음 나온 정의―쉬운 것은 모두 건축이고 어려운 것은 모두 조각이다―의 증폭일 뿐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조각이 놓일 자리의 배치는 설계에서 조각 자체만큼이나 어렵거나 큰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사 대성당 세례당에 있는 니콜로 피사노의 설교단의 사례를 보자. 대리석 기둥몸체에 의해 받쳐진, 패널 몰딩으로 둘러싼 일곱 개의 풍성한 돋을새김. 니콜로의 높은 평판은 패널 몰딩 때문인가 돋을새김 때문인가? 패널 몰딩은 니콜로가 직접 제작한 것이다. 그는 이것조차 보통의 세공인에게 맡기기를 싫어했을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려운 일이라거나 그 안에 어떤 명예가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일단 조각을 했으니 그것을 감싸는 윤곽선들은 그에게는 아이들 장난과 같았을 것이다. 기둥몸체의 지름과 주두의 높이의 결정은 몇 분이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일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Crucifixion)와 <세례>(Baptism)을 조각하는 것이었다.

피렌체의 오르싼미켈레 성당에 있는 오르카냐의 감실(龕室). 풍성하고 다채로운 얕은돋을새김이 패널 몰딩에 감싸여있고 모자이크된 기둥몸체들이 그것을 받치고 있으며 잎장식이 있는 아치들이 캐노피를 받치고 있다. 오르카냐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가 그의 명성을 잎장식에 맡긴다고 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의 자부심을 패널링에 둔다고 했을까? 아니다, 그는 죽어가는 성모의 침상 주위에 고개를 숙이고 둘러서 있는 형상들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마지막 사례] 아미앵 대성당의 입구에 설계된 행렬은 대가의 손에 의한 것이다. 여기가 대가의 사유의 중심이다. 이 중심에 맞추어 아치가 굴곡을 이루고 피너클이 솟아오른다. 이 일을 했고 돌에 인간의 표정과 행동을 부여할 수 있으면 나머지 모두―늑재, 벽감, 잎장식, 기둥―는 단지 그의 손 장난감들이요 그의 구상의 액세서리들일 뿐이리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는 재능을 일단 얻게 되 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발명력이 가능하게 하는 한) 여름 비가 내린 이후 시냇물들에서 구름이 솟아오르듯 영국 전역에 성당들을 흩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조각가들은 현재 성당을 설계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다고 여러분은 아마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우리가 건축을 너무나도 지루하게 만들어서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수가 없고 따라서 우리가 조각가들의 높은 지식에 건물 짓기의 초라하고 평범한 지식을 추가하려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은 조각을 건물 짓기로부터 분리했고 양자의 힘을 박탈한 셈이다. 조각가가 연속적인 작업을 펼칠 공간이 없으면, 건축가인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기계적 작업의 연속으로 환원함으로써 잃게 되는 만큼 많은 것을 잃기 때문이다. 건축가와 조각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집단에 속하고 또 그렇게 속해야 한다. 화가의 경우에 보이는, 때로는 작은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궁전 회랑의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작업상의 차이와 같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상상력을 비롯한 영혼의 능력들을 온전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여러분은 과거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했던 것처럼 해야 한다. 즉 여러분 자신이 조각가가 되어야 한다. 페이디아스, 미켈란젤로, 오르카냐, 피사노, 조토—이 가운데 누가 정을 사용할 수 없는 사람이던가? 여러분은 ‘어려운 일이다,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여러분은 조각 없이 건물 짓기를 연구하는 한 위대한 것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위대한 것을 만나도록 해주고 싶고, 여러분이 그 만나는 길을 찾았으면 한다. 완전한 조각의 세련된 예술이 항상 여러분에게 요구된다는 마음으로, 행해야 할 과제에서 움츠러들지 말라. 건축과 조각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건축적 방식의 조각이 따로 있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쉬운 것이다. 적어도 돌을 다루는 데서 현재 우리가 저지르고 있는 큰 잘못은, 모든 작품이 과도하게 세련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모든 삽화를 라파엘로의 삽화처럼 세련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존 리치(John Leech)[주석9]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 드로잉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로 직선을 긋거나 콤파스로 원을 그리는 일만 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각을 디자인하는 여러분의 힘과 관련해서도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페이디아스처럼 조각할 수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래서 조각은 아예 하지 않고 몰딩만 도안할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특히 가치 있는 모든 중급의 힘이, 수천 명이 획득할 수 있고 수만 명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저 대중적인 표현의 힘이 돌과 관련해서는 사라진 상태이다. 비록 잉크와 펜으로 글을 쓰는 데서는 중급의 힘이 가장 중요한 엔진들이 되었고 현대 문명의 가장 바람직한 호사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말이다.

건축적 방식의 조각은 한편으로 완벽한 조각과 구별되고 다른 한편으로 단순한 기하학적 장식과 구분된다.

멀리서 보는 세공품은 매우 정밀하게 조각할 수 있어도 저 위에 놓이는 순간 소용이 없게 된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멀리 물러남으로써 사라지는 반면에 흠들도 사라진다. 거리(距離)의 자연적 귀결인 이 신비와 혼란은 최고의 솜씨를 헛되게 만들기도 하지만 종종은 최악의 오류를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기도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깊은 절개나 거친 모서리가 어떤 곳들에서는 결코 바라지 못했던 놀랍고도 진실한 표현 효과를 낳을 것이다. 작품에 무언가가 없는데도 거리만으로 이렇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만일 그 안에 생명력(life)이 있다면, 거리가 처리과정의 결함들을 완화시킴으로써 그 생명력을 더 지각 가능하고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특이한 이점을 얻게 된다. 즉 상상이 마음껏 발휘되게 할 수 있고 원하는 표현을 위해―혹시 잘못 두드리더라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라는 알기에―세게 두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대기만 하면 자연이 도울 것이며, 그림자와 햇빛이 변할 때마다 여러분의 상상의 새로운 국면들이 드러날 것이다.

런데 건축적 방식의 조각에 속하는 것은 이러한 불완전함의 특권만이 아니다. 상상력이라는 진정한 특권이 있다. 이는 더 완성된 작품―이것을 나는 구분을 위해서 ‘가구 조각’(furniture sculpture)이라고 부르겠다―에 부여되는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한다. (가구 조각이란 방들을 장식하기 위해서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는 조각을 말한다.)

가구 조각은 보는 이가 보통 조용하거나 평범한 상태에서 접하게 된다. 그는 그것을 고결한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보기보다 사치스러운 것과 연관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의 호기심보다는 안락함에 호소하는 상황에서 본다. 식탁 주변에서 하인들이 들락날락 하는 가운데 보았을 때 애처로운 느낌을 주게 되는 조각상은 그 안에 강한 파토스를 가졌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응접실의 대화 가운데 경외스러운 느낌을 주어야 할 조각상은 전적으로 그 안에 경외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그러나 건축물의 조각을 보는 이는 이미 흥분되고 상상력에 찬 상태에서 작품을 접하게 된다. 그는 포치의 조각을 보기 전에 낮은 거리를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벽에 큰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신비에 대한 그의 사랑이 클로이스터의 고요함과 음영에 의해 발동된 상황에서 볼팅(vaulting, 아치형 천장) 위의 양각들을 판독하게 된다. 그래서 그가 여러분이 한 것들을 일단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는 여러분이 그의 이 상상력에 찬 기분에 맞추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즉 여러분이 (주변 장면의 신비와 장엄함이 유발한) 공포감을 더 촉진하거나 희한한 것들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친절한 것을 여러분에게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이 형태들을 덜 선명한 채로 남겨두거나 기이한 공상을 그로테스크한 형태나 음영으로 구현하거나 한 것이 대체로 관찰자의 기분에 상응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여러분의 결함들을 발견하는 데 자신의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기꺼이 여러분이 의미한 바를 돕는 데 자신의 상상을 사용할 것이다.

상상력과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기이한 것들을 동반할 뿐만 아니라 고요한 시간에 그야말로 미지의 즐거움을 갖고 미세한 것들도 들여다보게 할 것이다. 감정이 강하게 촉발되면 가시적인 대상들의 모든 세부들이 여러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기묘한 강렬함과 집요함을 가지고 제시될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정신을 재촉하고 눈을 압박할 것이다. 상상력이 강하게 자극될 때마다 감각이 이 상태에 어느정도 들어선다. 다른 때에는 사소한 것들이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위엄 혹은 의미심장성을 띠는 것이다. 열띤 자극에 의해 활성화된 주의력은 세부의 가장 미세한 상황들과 작품에 구현된 의도의 가장 희미한 흔적들에 집중된다. 그래서 다른 경우라면 조각 작품에서 다소 저급하고 외적인 것으로 느껴질 것, 그리고 완벽한 취향이나 비판적 판단에는 틀림없이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 이 각성된 상상력의 탐구성, 주의력과 만나게 되면 기분 좋은 것이 되고 심지어 고결해진다. 이는 모두 여러분에게 유리한 것이다. 여러분의 조각 작업의 시초에는 단순한 형태들의 해부학적 구조나 고결한 덩어리들의 흐름을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 의상이나 성격의 세밀한 상황들을 모방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세 가지 점, 즉 ① 여러분이 완벽하게 할 수 없는 미점(美點), 여러분이 획득할 수 없는 단순성은 혹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더라도 열정적인 상상의 성급한 호기심에 호소하는 데에서는 대체로 소용이 없다는 점, 그러나 ② 여러분의 앎에는 주어지지 않을 공감이 여러분의 순진함에는 부여되리라는 점, 그리고 ③ 일반적인 관찰자의 정신은 해부학적 구조의 정확함이나 제스처의 올바름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머리카락을 조각하고 의상의 패턴을 조각할 때 즐겁게 공명하여 여러분을 좇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격려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보자. 큰 규모의 건축물의 특성들이 연합하여 상상의 힘을 촉발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장식이 종속되어야 할 건축적 법칙들이 그 장식의 창의력을 자극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조각 작품을 그 꼭대기에 새길 모든 크로켓, 장식해넣을 모든 잎장식들이 보는 이의 상상에 예쁜 사물들로서만이 아니라 문제적 사물로서도 제시된다. 거기에는 여러분이 보여주고 싶은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충족해야 했던 필요도 담겨 있음을 여러분은 즉각적으로 안다. 이러저러한 공간을 어떤 가능한 방식으로 유기적 형태로 채울 것인가, 아니면 이러저러한 돋을새김이나 이랑진 부분을 어떻게 생명력(활력)의 이해 가능한 이미지로 전환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즉시 즐거움의 문제인 동시에 감탄의 문제가 된다. 추한 난쟁이와 못생긴 도깨비가 구석에 모이기만 하면 되거나 웅크려 가치발을 지탱하기만 하면 된다면 형태•제스처•특성에서의 완벽함이라는 통상적인 조건들은 기꺼이 생략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종류의 작업에서라면 부분들의 완성에 필요할 기술이 건축 조각에서는 결핍되더라도 즉시 용서받을 것이다. 여러분이 거칠게 구현한 것을 창의력 있게 배열해서 손의 투박함을 기지의 명민함으로 보완했다면 말이다.

지금까지는 상상력이 펼쳐지기에 유리한 건축의 상황만을 고찰했다. 더 중요한 점은 상상의 모든 대상들이 차지하는 위치인 듯하다.

상상력은 그것이 다루는 재료의 양에 비례하여 왕성할 것이 틀림없으므로 우리가 보는 것의 범위를 넓히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풍부함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한다. 그렇다면, 건축이 허용하는 소재에서 여러분의 상상에 열릴 장이 어떨지 생각해보라. 거의 모든 다른 예술은 그 소재가 엄하게 한정되어 있다. 가령 풍경화가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고, 역사화가는 야생의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도움을 이보다 덜 얻으며, 순수 조각가는 일상적인 삶으로부터의 도움을 이보다 훨씬 덜 얻는다. 눈으로 보는 것이든 구상하는 것이든 건축에 유용하지 않을 것 혹은 그에 대한 관심이 건축에 이점이 되도록 자극되지 않을 것이 있는가? 천사들에 대한 비전에서부터 중요성이 가장 덜한 노는 아이의 제스처에 이르기까지, 신성(神性)의 어떤 측면이든 인간성의 어떤 측면이든 건축가에 의해 과감하게 채택될 수 있다. 너무 방대하거나 미세해서 다루지 못하거나 이용하지 못할 동물은 동물계 어디에도 없다. 사자와 악어가 기둥몸체에서 웅크리고 있을 수 있고, 나방과 꿀벌이 꽃들 위에서 햇볕을 쬘 수 있으며 새끼사슴이 뛰고 달팽이가 기어가며 비둘기가 가슴털을 고르고 솔개가 남쪽을 향해 날개를 펼 것이다. 식물계도 건축가를 위해 개화하고 덩굴손을 뻗어간다. 잎들이 몸을 떨어 여러분은 대리석의 눈[雪] 아래에서 조용히 있기를 잎들에게 명하며, 땅이 악처럼 내보내는 가시와 엉겅퀴도 여러분에게는 가장 친절한 하인들이다. 죽어가는 꽃잎이나 시들어가는 덩굴손 가운데 너무나도 나약해서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은 없다. 개화의 오만도 왕의 지위를 내려놓고 여러분의 손에서 희미한 불멸성을 받아들인다. 보통의 삶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저열한 것이 있는가? 보통의 사물에서 여러분의 손길에 의해 고결해지지 못할 정도로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있는가? 생명이 있는 것 가운데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이 없듯이, 생명이 없는 것 가운데에도 여러분에게 가르침 혹은 선물을 주지 않는 것은 없다. 깃털의 힘이나 잎의 연함을 지켜보는 데 싫증이 나면 거친 강변이나 거리의 가장 붐비는 시장들로 걸어가 볼 수도 있다. 잘린 끈조각이라도 꼬아서 완벽한 몰딩으로 만들지 못할 것은 없으며, 내다 버린 돗자리 조각이나 부서진 바구니 가운데 줄무늬나 주두로 만들지 못할 것도 없다. 그렇다. 모래를 모으고 밟고 있는 돌을 깬다면 그 조각들 가운데 거의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도 여러분의 볼팅의 별모양 트레이서리들에서 어엿하게 한 자리 차지할 형태들을 발견할 것이다. 산 정상에 요새를 세우고 도시에 탑을 지을 수 있는 여러분은 이렇듯 타고 남은 재에도 아름다움을 부여할 수 있고 먼지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여러분의 예술이 이 모든 재료를 여러분에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여러분은 이미 즐거워할 것이 많다. 그러나 즐거워할 것이 더 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에게 제공되기는 하지만 해부되거나 분석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공감의 대상으로서, 따라서 상상력의 도덕적 부분을 발현하기 위해서 제공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線)에만 국한한다면 우리는 자연 연구자를 부러워할 이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사실들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의 사실들로부터 생기는 감정들에 능통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부러워할 것이 거의 없게 된다. 가령 대리석 덩어리를 보고 자연 연구자는 그 덩어리의 자주색이 어느 정도로 철분으로 인한 것이고 그 흰색이 어느 정도로 산화 마그네슘으로 인한 것인지 즉각적으로 숙고하는 데 돌입해야 한다. 그는 대리석 조각을 부수며 하루가 저물 때에는 그의 도가니에 돌가루 조금과 원소들에 대한 이론에 추가된 일정한 데이터 말고는 남는 것이 없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은 공감하기 위해서 대리석에 접근하며 그 아름다움에 즐거워한다. 절개를 좀 하지만 그 맥을 더 완전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하루의 일이 끝날 때 여러분은 기쁨과 만족감을 갖고 대리석 기둥을 대리석으로서 완벽한 상태에 둔다. 돌 대신에 동물들을 지켜볼 때에도 여러분은 마찬가지 방식으로 자연 연구자와 다르다. 그는 아마도 (만일 그가 상냥한 사람이라면) 그의 주위에 살아있는 동물들이 많은 것에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의 주된 부분은 깃털을 세고 조직을 분리하고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의 작업은 항상 살아있는 존재와 관련된다. 그 존재의 삶에서 여러분이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의 생명력과 행동방식들이다. 그것의 뼈에 세포가 몇 개 있는지, 그것의 깃털에 가는 끈들이 몇 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그것의 도덕적 성격과 그것이 행동하는 방식이다. 이는 여러분의 상상력이 건강하면 맨 먼저 포착하게 될 바로 그것이며 여러분의 정(chisel)이 강건하다면 맨 먼저 깎아 만들 바로 그것이다. 여러분은 폭풍의 기세를 독수리들에 담아 넣고 영주의 위엄을 사자들에게 담아넣으며 경계하는 두려움을 새끼사슴들에게 담아 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새끼사슴들과 계속적으로 공감해야 하고 사자와 손과 장갑의 관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솔개들과 손과 발톱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하등동물들과 공감한다고 해서 여러분을 낮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등동물들과 공감하지 못하면 고등한 존재들과도 제대로 공감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여왕들, 왕들, 순교자들, 천사들 등 고등한 존재들과도 공감해야 한다. 그렇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박한 인류의 모든 욕구 및 방식들과 공감해야 한다. 거리에서 여러분을 서둘러 지나치는 얼굴 가운데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 인상의 깊이를 측량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모든 역사가 여러분에게 열려있고, 인간의 과거의 운명들이 시사하는 모든 높은 사상들과 꿈들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모든 요정의 땅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숲에 출몰했거나 언덕 위에 힐긋 나타났던 비전 가운데 어떻게 그것이 인간들의 마음에 들어왔고 여전히 그 마음을 건들 수 있는지를 이해하도록 권하지 않는 비전은 없다. 그리고 모든 낙원이 여러분에게 열려 있다. 그리고 낙원의 작업도 여러분에게 열려있다. 이 모든 것을 영속적이고 매력적인 진실의 형태로 여러분의 동포들의 눈앞에 가져올 때 여러분은 천사들의 무리를 상상할 뿐만이 아니라 천사들의 일에 합류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측면에서 여러분의 작업에 얼마나 독특한 중요성과 책임이 주어져 있는지를 명심하라. 그 영속성과 그것이 향해져 있는 다중을 생각해볼 때 말이다. 우리는 종종 현명한 사람들 덕분에, 소수가 듣고 듣자마자 잊힐 단어들에 때로 부여될 수 있는 책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의 단어들[건축물들]은 여러분이 잘 짓는다면 그 어떤 것도 소수가 듣지 않을 것이며, 500-600년 동안은 잊히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말할 것이며, 저 모든 조그만 공감들, 기발한 공상, 돌로 하는 농담들, 변덕 속에서의 문제 해결은 여러분이 사라진 후에도 수많은 다중의 정신을 차례차례로 사로잡을 것이다. 여러분은 책의 저자들처럼 듣기를 청할 필요가 없으며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충분히 크게 짓고, 충분히 대담하게 깎으라. 그러면 모든 세상이 여러분의 말을 들을 것이다. 그들은 볼 수밖에 없다.

내 의도는 이런 생각으로 여러분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에게 아주 많은 목격자들과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결코 익살을 부리지 않을 것이고 어떤 것을 즐겁게 하지 않거나 경쾌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처음부터 여러분의 이러한 예술을, 특히 그것이 여러분의 성격의 전체를 담을 여지가 있기 때문에, 청했다. 만일 익살이 여러분 속에 있다면 익살을 부리라. 수학적 재능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문제를 설정하고 원하는 만큼 진지하게 해를 찾으라.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작품이 쉽고 행복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여러분의 충동들에 몸을 맡길 때 하나의 고결한 충동이 중심이 되어 그 충동들을 이끌도록 하라. 3중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① 여러분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하라. ② 여러분의 창작활동을 사랑하라. ③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사랑하라.

첫째로 자신이 행하는 예술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 말고 다른 동기가 여러분의 머리에서 주된 것이 되면 그 순간 여러분의 예술은 끝난 것이다. 돈. 명성, 지위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은 이 셋을 욕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 셋을 사랑할 수 있고, 열정적으로 탐할 수 있다. 그러나 맨 앞에 내세워서 탐하고 사랑해서는 안 된다. 강한 열정과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좋아하면 많이 좋아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첫째냐, 둘째냐이다. 예술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이득이 여러분을 이끄는가? 여러분은 돈 버는 것을 극히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로 500 파운드를 덜 벌 것이냐 아니면 여러분의 건물 짓기를 망칠 것이냐라는 물음에 이르게 되고, 건물 짓기를 망치는 쪽을 택하게 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은 귀뚜라미가 크림을 갈망하듯이 명성을 갈망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을 즐겁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대로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르고 둘 다 할 수는 없어서 대중을 즐겁게 하는 쪽을 택하면 여러분은 끝난 것이다. 여러분에게 희망은 없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는 사람의 일별을 받을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 시금석은 절대적이고 불가피하다. 예술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인가?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여러분은 돈을 번 후에 구두쇠가 될 수도 있고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도 있다. 명성을 얻은 후에 시기심을 갖게 되고 오만함을 갖게 되고 저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런 여러분이 여러분의 작업을 망치려하지 않는 한 여러분은 예술가이다. 반면에 돈이나 명성이 여러분에게 첫째가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돈으로 관대하게 베풀고 돈을 근사하게 쓰며 자신의 평판을 매우 우아하게 누리는 사람일지라도, 또한 여러분의 아랫사람들에게 매우 공손하며 여러분의 윗사람들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은 예술가가 아니다. 여러분은 기계공이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이다.

둘째로 자신의 창작활동을 사랑해야 한다. 여러분이 선택한 주제에 여러분이 투여하는 감정의 강렬함에 그 주제의 성격에 대한 여러분의 인식의 깊이와 정당함이 전적으로 비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이 깊이는 여러분이 그 감정을 이러저러한 것에 관련시킬 때 즉각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르게 느끼려고 노력하는 전반적 습관의 결과이다. 이것을 하도록 돕는 수천 개의 다양한 수단 가운데 내가 특별하게 여러분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사소하게 신경 쓰이는 것들을 멀리 하라’이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 안달하지 말고 머리를 사소한 분함들과 욕망들로 채우지 말라. 나는 막, 여러분이 위대한 예술가이면서도 구두쇠이고 시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많은 일들에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골치 아픈 것들이 하루 종일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이 돈을 모으는 습관이 생겼을 수도 있고 경쟁자에 대해서 부당하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할 수도 있다. 이런 것으로도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을 감소시키고 여러분의 시야를 흐릴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의식적 습관들이나 일시적인 실추보다 훨씬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소한 감정들의 항상성이다.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과연 좋아할 것인지 걱정하는 것, 조수에게 시킨 일을 조수가 잘 할지에 대한 걱정 등. 그 자체로 잘못된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의 상상력의 온전한 발휘에 부적절하고 그것과 전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이나 걱정이 문제이다.

따라서 눈을 뜨고 마음의 평정을 가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무개가 여러분의 작품을 좋아할까가 아니다. 저기 저 새가 둥지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저 방랑아 아이가 거리의 구석에서 어떻게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러분의 관심사에서 새들과 아이들의 관심사로 이동하려면 새들과 아이들을 사랑하고 지켜보는 습관을 오래 전부터 들였어야 한다. 그래서 마침내 여러분 자신을 잊고 여러분 자신을 벗어나서 세상의 평온 속에서, 혹은 세상의 떠들석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어떤 고결한 감정을 가져다줄 수 있는 영향력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찍 일어나서 항상 일출을 보고 여명에 구름들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라. 구름의 움직임과 아침이 입는 자줏빛 옷에 대한 기억이 여러분에게 남아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의 조각상의 드레이퍼리들을 보통 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구현할 것이다. 항상 나라의 봄철에 살라. 잎눈들이 트고 어린잎들이 햇빛에 낮게 숨쉬고 첫 비에 경이로워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잎 형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러분은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간 형태에 들어있는 제스처의 모든 고결함과 특징을 찾는 습관을 들이라. 그리고 기억하라. 최고의 고결함은 보통 나이든 이들,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에게 있다는 점을. 여러분은 마침내, 여러분에게 최고의 연구 대상은 군인의 강한 팔이 아니요 젊은 미인의 웃음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을 보라. 그들을 경건하게 보라. 그러나 감내가 힘보다 고결하며, 인내가 아름다움보다 고결함을 확신하라. 교회 입구에서 천사들의 날개 사이에 있기에 가장 알맞은 얼굴들을 여러분은 화려한 옷들이 있는 고교회(the high church) 신도석들이 아니라 과부의 상복이 있는 교회의 자유석들에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러분이 자신의 작업을 바치는 존재들을, 여러분의 동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일들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될 뿐만이 아니라. 인간을 바라볼 때마다 표정이 아니라 외관에만 주의를 기울이기 쉬울 것이다. 우느라고 움푹 들어간 검은 눈과 세상의 역경이 에워싼 저 굳은 얼굴들의 창백함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그 얼굴들이 인내 속에서 황혼 속에 죽어가는 횃불처럼 빛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줄 것은 오직 친절함과 다정함이다. 그러나 친절하기도 해야 할 필요가 있게 만드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여러분의 예술의 본성 바로 그것에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이유가 들어있다. 크게 짓고, 고결한 조각(sculpture)을 추가하고자 하면 협동적 작업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은 혼자서 성당 전체를 지을 수 없다. 그 몇 안 되는 단순한 부분들만을 조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럴 경우 여러분 자신의 작업이 주변의 열등한 작업과 한데 엮여 창피를 당하지 않으려면 동료 설계자들의 힘을 서로 상응할 정도로 높여야 한다. 여러분에게 재능이 있다면 여러분 자신이 설계한 건물 짓기에서 앞장서는 위치에 설 것이다. 여러분은 그 포치의 장식들을 조각하고 그 배치를 이끌 것이다. 그러나 그 세부의 차후의 모든 진행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의 실행력과 발명력에 맡겨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꾼들이 가진 모든 능력들을 억눌러서 여러분에게 종속시킬 수도 있고, 여러분과 경합할 수 있는 힘들을 발견하는 것을 즐거워하며 한 사람, 두 사람 여러분의 상상과의 동료관계로 그리고 여러분의 명성과의 연합관계로 이끄는 것을 즐거워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냐는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여러분이 전자를 행한다면, 여러분은 망한다. 자신의 예술과 창작 작업을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자신의 번영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솜씨만을 생각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불길하게도 그리고 분명히 거기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질투심이 전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질투심이 전혀 없는 것은 인간에게는 드문 일이다. 여러분이 어느 날 아직 경험도 없고 입증도 안 된 어떤 젊은이가 여러분으로서는 몇 년 동안 훈련을 해도 도달하지 못한 손놀림을 그의 작품에 가하는 것을 보고 안 좋은 마음으로 귀가하더라도 여러분은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질투심이 여러분을 정복해서는 안 된다. 건물 짓기에 대한 사랑이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의 도움을 받아서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높거나 어려운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러분이 단지 이타적인 관용의 마음에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친절함의 도움을 받아서 건물 짓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탁월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보다 건물을 더 잘 장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라도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첫째로 그의 정 아래에서 건물이 더 아름답게 올라가는 것을 보는 데서 느끼는 기쁨에서, 둘째로 친절하고 정당하게 행동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여러분이 친절함과 정당함을 첫째 동기로 삼을 만큼 충분히 도덕적으로 강하다면 더 좋을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그것을 아예 친절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엄격한 정당함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그런 도움이 서로에게 빚이며 아랫사람에게서 우월성이나 능력을 알아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은 친절을 베풀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해를 입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동기가 무엇이든 그 일을 하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분의 예술이 ① 다른 예술들보다 더 넓은 영역을 포함하고 ② 다른 예술보다 더 방대한 다중에게로 향한다는 생각, 그리하여 모든 다른 것들과 더 심오하고 거룩한 동지관계를 맺는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취하라. 예술가는 자신의 학생이 완벽할 때 자신의 곁을 떠나서 그의 고유한 (아마도 자신과 맞서는) 솜씨를 천명하도록 해야 한다. 과학자들은 발견의 우선성을 두고 서로 씨름하며 질투 어린 조급함의 고통에서 자신의 고독한 연구를 수행한다. 여러분만이 친절함, 필요, 동등함에 의해서 노고의 우애관계로 초청받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고대의 도시들의 주택 지붕들 위로 솟은 저 아득하고 거대한 대건축물들에는 우리가 상상을 통해 그토록 흔하게 부여해왔던 것보다 더 심오하고 진실한 의미가 들어있었다(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피너클들이 하늘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물론 돋아나는 모든 나무도 그렇고. 노래하며 솟아오르는 모든 새도 그렇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일이 경배하기에 좋다고 말한다. 물론 산 속의 모든 골짜기도 그렇고 거친 해변도 그렇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점이 뚜렷하게 다르고 논박 불가능한 영광으로서 사람들에게 존재한다. 그들의 강력한 벽들은 약한 가운데 서로 사랑하고 돕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지어졌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볼팅을 이루는 돌처럼 서로 엮이는 그들의 힘은 인간의 협력이라는 더 강한 아치들 위에 세워져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낮은 혹은 높은 피너클들처럼 서로 다른 그들의 품위는 인간 영혼의 더 달콤한 대칭관계에 그 리듬과 완벽함을 빚지고 있다는 점이다.

[주석]

  1. 라이언즈인(Lyon’s Inn)은 영국의 4대 법조원(Inns of Court) 가운데 하나인 이너 템플(Inner Temple)에 딸린 기관인 ‘Inns of Chancery’ 가운데 하나로서, 1863년에 해체되고 그 건물이 철거되었다. ‘Inns of Chancery’는 원래 법조원들에 딸린 건물들과 기관들로서 형평법원(chancery)의 서기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성격이 변하여 사무변호사들(solicitors)의 사무실과 편의시설인 동시에 소송변호사들(barristers)을 양성하는 연수원이 되었다. 이 소송변호사 연수 업무는 1642년 사라졌으며 사무변호사들을 위한 협회와 사무실들로 전용(專用)되었다.
  2. 러스킨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양식의 발명을 추천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3. 팔라디오(Andrea Palladio, 1508–1580)는 이탈리아 르네쌍스 시대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 활동한 건축가이다.
  4. 존 팩스턴(Sir Joseph Paxton, 1803–1865)는 영국의 원예가, 건축가, 엔지니어이자 의회 의원으로서 수정궁(the Crystal Palace)을 설계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수정궁은 1851년 만국박람회가 열린 곳이다.
  5. 싼미켈리(1484-1559)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로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시민이었다.
  6. 이니고 존스(1573–1652)는 영국의 건축가로서 비르투비우스[고대 로마의 건축가]의 비율 및 대칭 규칙들을 처음으로 자신의 건물들에 도입했다.
  7. 크리스토퍼 렌(1632-1723)은 영국의 건축가, 천문학자, 수학자이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은 세인트 폴 대성당이다.
  8. 런던의 드루리 레인(Drury lane)에는 유명한 극장들이 있다.
  9. 존 리치(1817–1864)는 영국의 희화화가이자 삽화가이다.

 




커머닝을 통해 예술을 큐레이팅하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최빛나

 


  • 저자  : David Boiler
  • 원문 :  Binna Choi of the Casco Art Institute: Curating Art through Commoning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3년 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여러 해 전에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한 예술기관을 알게 되었는데, 이 기관은 “커먼즈를 지향하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해서 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웠다. 위트레흐트 소재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Casco Art Institute)가 바로 이렇게 선언한 기관이다.  ‘커먼즈를 지향한다’는 그들의 슬로건은 예술과 커머닝이 정확히 어떻게 관련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예술기관이 어떻게 커머닝의 세계에 진입할 것인지에 관한 물음들을 즉각 제기한다.

나는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의 디렉터인 최빛나씨를 팟캐스트 시리즈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의 35회 대담에 초대해서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2008년부터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를 이끌어 온 한국인 최빛나는 비중 있는 전시회를 위해 예술작품을 큐레이팅하고 있으며 더치 아트 인스티튜트(Dutch Art Institute)의 교수를 역임했다. 그녀는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 2016년 광주 비엔날레의 큐레이터(예술감독)였으며 다가오는 2025년 하와이 트리엔날레의 예술감독으로 선정되었다.

최빛나는 예술창작과 작품 전시회에 커머닝의 윤리와 실천들을 도입했다. 그녀와 동료들은 커머닝을 다양한 예술가들로 구성된 팀이 예술을 함께 창작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도록 조직하는 원리로서 받아들였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측은 다음과 같이 자신들의 커먼즈 철학을 설명한다.

예술은 상상력에 기반을 둔 행동하기와 존재하기의 양태로서, 사람들을 이어주고 치유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사람들을 새로운 사회비전으로 이동시킨다. 커먼즈는 공동체 문화가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공유된 자원들이기에 예술은 사실상 커먼즈에 내재해 있으며, 커먼즈는 예술을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예술과 커먼즈 때문에 우리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 너머에 있는 세계관을 그릴 수 있으며 ‘우리가’ 욕망하는 대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패러다임―탈식민적, 포스트자본주의적, 모권중심적, 혹은 연대 경제 등 뭐라 불리던―을 함께 형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기에 이름을 부여한다.

실제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눈길을 끄는 전시회들과 마케팅을 통해서 그 평판을 높이는 데 열중하는 브랜드화된 기관이기보다는 예술가 중심의 기관임을 의미한다. 최빛나와 카스코 인스티튜트 소속 예술가들은 참여적이고 비위계적이며 평등주의적인 팀으로서 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작업실 공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다음 프로젝트나 전시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카스코 인스티튜트가 지역 공동체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어떻게 그 예술적 상상력을 사용할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한 한 가지 프로젝트는 <잊혀진 기술을 간직한 농장 박물관 여행하기>(Traveling Farm Museum of Forgotten Skills)라는 전시회로 위트레흐트 근처 현대적인 교외지역 개발지에 둘러싸인 오래된 농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저지대 교외의 스프롤 현상이 이전에 그곳에 있었던 많은 농지를 잡아먹었고, 한 농부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낡아빠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허름한 농가만 남게 되었다.

최빛나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예술가들은 공동체가 가령 다음과 같이 묻는 방식으로 그 공간의 역사를 탐색하게끔 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개발하기로 했다. 농장이 왜 비어있는가? 농장은 어디로 옮겨갔는가? 거의 모든 농업농장과 목축농장이 이 지역에서 사라진 상황에서 레이드슈 라인(Leidsche Rijn) 지역주민들의 식량은 실제로 어디서 오는가?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는 한때 그 지역을 위해 식량을 생산한 옛날 식 농사 관행을 소개하기 위한 전시회를 열기 위해 (위트레흐트 공무원들이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그 농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카스코 예술가들은 열 달 동안 농가에서 함께 살았고 경작하고 식량을 모으면서 그 역사와 현재 상황을 통해서 땅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이 프로젝트는 지역 주민들에게 농장의 잊혀진 과거를 숙고하고 앞으로 땅을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했다.

안타깝게도 이 프로젝트는 소유주가 집과 땅을 팔기로 결정하면서 너무 일찍 폐기되었다. 현재 그 장소는 팬케익 식당과 쇼핑센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전시회가 공동체에 중요한 주제들—공동체의 역사, 식량자원 및 땅의 미래—에 예술적인 자극을 주었다.

곧 시작될 1년에 걸친 프로그램 <배운 것을 버리기 센터>(Unlearning Center)는 사람들이 예술과 문화에 관한 낡은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다음과 같이 묻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문화적 기관들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예술과 문화는 우리가 커먼즈를 상상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가? 곧 열릴 또 하나의 전시회인 <커먼즈 예술>(Commons Art)은 커먼즈 문화에 기여하는 사회참여적인 예술 프로젝트들의 돌봄과 유지과정을 지원하는 디지털 플랫폼을 제공할 것이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프로젝트에 의해 생산된 예술을 종래의 예술기관들이 나타내고 싶어하는 ‘고급예술’보다 다소 못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간혹 예술관과 예술계에 있는지를 최빛나에게 물었다. 여기서 ‘고급예술’이란 비평가들과 문화적 규범에 의해 알려진 회화와 조각이나 황량한 하얀 전시회장에서의 공식적인 전시들 혹은 예술과 일상을 분리하는 시나리오들 등을 의미한다.

최빛나는 주안점을 두는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의 구축이라고 대답했다.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우리와 예술가들의 관계는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우리는 이 관계의 망 안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이 관계를 더 잘 돌보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좋은 생산물 만들기’보다는 관계의 실천을 토대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세상은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대화를 통해 어떻게 커머닝이 다양한 형태의 예술제작, 예술작품 전시회들 및 기관의 파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멋진 경험을 했다. 내가 최빛나와 나눈 이야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옮긴이] 카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카스코’(casco)는 네덜란드어로 변화를 위한 기본 구조, 집단적 예술프로젝트 및 조직적 실험으로 공동으로 탐구하고 연구하기 위한 기본 구조가 존재하는 장소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