쎄꼬쎄쏠라와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커머닝하기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Cecosesola and the Art of Commoning within Capitalist Market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s://www.bollier.org)의 2025년 7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베네수엘라 소재 협동조합들의 연합인 <쎄꼬쎄쏠라>(Cecosesola, Central Cooperativa de Servicios Sociales de Lara)는 내가 접해 본 가장 특이한 성취를 이룬 커먼즈 중 하나이다. 이 주목할 만한 연합은 자본주의 시장 시스템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데도 많은 기획들을 커먼즈로 솜씨 있게 운영한다.
베네수엘라 라라주에서 1967년에 설립된 <쎄꼬쎄쏠라>는 가장 가난한 지역에 사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협동조합을 만들 돈을 매달 적립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를 조직했을 떄 시작되었다.
거의 60년이 흐른 후 이제 <쎄꼬쎄쏠라>는 대단히 다양한 기획들을 조직한다. <쎄꼬쎄쏠라>는 일주일마다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재화를 제공하는 대도시 상품시장들에 800톤의 채소들을 제공하기 위해 농부들과 함께 일한다. <쎄꼬쎄쏠라>의 보건의료서비스는 많은 전문 분야와 외과를 포함해서 연간 25만 명의 환자를 치료한다. <쎄꼬쎄쏠라>의 저축 대부 협동조합, 장례사업체 그리고 수십 개의 다른 조직들이 기존의 시장들보다 훨씬 더 낮은 가격으로 저소득층 가정에 편의를 제공한다.
협동조합들의 시장성과가 인상적일지라도 가장 의미 있는 성취는 내부 업무 문화와 아래로부터의 지원이다. <쎄꼬쎄쏠라>는 천오백 명의 조합원들의 신뢰와 참여를 기반으로 비위계적인 평등한 문화를 주도한다. <쎄꼬쎄쏠라>의 성공은 사회적 신뢰 구축하기, 책임감 및 개인적인 자기 개선에 충실히 전념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50년 넘게 <쎄꼬쎄쏠라>의 조합원인 구스타보 쌀라스(Gustavo Salas)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멋진 사업들을 하기 위해 우리는 기존 방식과 반대되는 방식으로 일을 합니다. 우리는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신뢰를 구축하는 교육과정에 집중합니다. 신뢰 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면 우리가 노동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사업상 하는 일의 많은 부분이 필요 없습니다.”
2022년에 <쎄꼬쎄쏠라>는 그동안 쌓은 업적들을 인정받아 <올바른 생계수단 상>를 수상했다. 사회변화를 선도하는 리더십을 예우하는 그 상은 ‘이윤 추구 경제에 대한 탄탄한 대안으로서 공정하고 협력적인 경제모델을 확립’하는 데서 모범적인 일을 한 <쎄꼬쎄쏠라>를 수상단체로 선정했다.(2022년 블로그 글을 참조하라.)
자본주의 시장 맥락 내부에서 어떻게 커머닝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 더 배우기 위해 최근에 나는 <커머닝의 프론티어>(에피소드 64)에서 쌀라스와 인터뷰를 했다.
작고한 동료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나는 2019년 출판된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커먼즈의 전복적 힘』(Free, Fair and Alive: The Insurgent Power of the Commons)—에서 시장 시스템 내부에서 커머닝을 하면서 ‘시장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에 초점을 맞추어 <쎄꼬쎄쏠라>에 대해 글을 쓴 바 있다. 우리는 협력과 윤리적 참여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시스템이 어떻게 강력하게 효과적인 대규모 노동 문화를 구축할 수 있는지에 매료되었다.
<쎄꼬쎄쏠라>는 가격과 아래로부터의 지원이라는 측면에서는 시장에 참여하는 기존의 사업체들보다 더 뛰어난 실행력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조합원들에게 인간미 있고 공평하며 안정적인 노동환경을 제공한다. 이 단체의 (스페인어로 된) 슬로건 ‘Construyendo confianza en la diversidad’은 ‘다양성을 통해 신뢰 구축하기’로 옮겨진다.
쌀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경제적 목표나 계획을 가지고 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육과정에 집중하며 성장합니다···. 신뢰는 창발적인 현상입니다.” <쎄꼬쎄쏠라>는 경쟁을 협력으로, 효율을 회복탄력성으로, 단기적인 생각을 지속가능성으로 그리고 이익 중심의 접근법들을 욕구 중심의 전망으로 바꾸려고 애쓰고 있다.
<쎄꼬쎄쏠라>에서 이루어지는 권한의 철저한 탈중심화는 사회적 결속으로 균형을 잡는다. 그 결과로 매우 창조적이고 유연한 대규모 팀이 생겼다. 조합원들은 생산 현실, 경제적 압박 및 고객들에 관한 최고의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그 정보의 도움으로 협동조합들이 재빨리 그리고 전략적으로 반응한다. 조합원들은 때때로 연합 내부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여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전체 사업에 대한 더 넓은 인식을 갖춘다.
이 문화 덕분에 <쎄꼬쎄쏠라>는 지난 몇십 년에 걸쳐서 베네수엘라에서 발생한 몇몇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제적 혼란을 타개할 수 있었다.
외부 공급 업체들 사이에서만 아니라 <쎄꼬쎄쏠라>의 공급자들과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물론 화폐교환이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을 시장에서처럼 경험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거래하는 사고방식이나 경쟁적인 태도가 없다. 최우선 사항은 모든 사람의 개인적 성장, 책임 있는 판단, 윤리적 관계 및 집단에의 헌신을 장려하는 것이다.
어떻게 <쎄꼬쎄쏠라>는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에서 그토록 양심적으로 커머닝을 추구하는가? 두 가지 설명이 주어졌다. “우리는 재산을 폐지하지 않고 재산을 지양한다.”[주석1] 이것은 사유재산권이 다른 모든 권리를 능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업상의 우선순위를 내세우지 않는 사업체이다.”[주석2] 이것은 전인적인 욕구와 인간성에 주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쎄꼬쎄쏠라>의 경험을 접한 질케와 나는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커머닝의 중요한 패턴, 즉 ‘상업과 커머닝을 구별하기’라는 패턴을 포착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 조합원들은 농부들 및 다른 공급자들과 가격을 놓고 흥정하지 않는다. <쎄꼬쎄쏠라>는 그들에게 실제 비용과 그들이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가 필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요구한다. 경제적 관심사와 비용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핵심은 장기간에 걸친 관계의 맥락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공정한지에 관해 논의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채소들은 모든 생산물에 대해서 개별 가격이 아니라 킬로그램 당 평균 가격으로 팔린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기존 대형마트의 대략 절반 가격에 채소를 구입할 수 있다.
<쎄꼬쎄쏠라>는 외부 도매업자들, 유통업자들, 중간관리자들, 마케팅 등과 같은 데 들어가는 간접적인 비용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재정과 업무방식에서 상당히 더 자유롭다. <쎄꼬쎄쏠라>는 비슷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들보다 조합원들에게 두 배의 보수를 지급할 수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사업체들보다 실질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가격을 설정할 수 있다. <쎄꼬쎄쏠라>의 조합원들은 <쎄꼬쎄쏠라>의 노동 문화를 심화하기 위해 나흘이 아닌 사흘만 일하기로 최근에 결정을 내려서 나머지 하루를 내부 회의에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쎄꼬쎄쏠라>에 관하여 구스타보 쌀라스와 나눈 인터뷰 내용은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쎄꼬쎄쏠라>에 관한 추가 정보는 다음의 유튜브 동영상들—구스타보 쌀라스와의 인터뷰 및 2022년 <쎄꼬쎼솔라에> 주어진 <올바른 생계수단 상> 수상식—을 참조하라. 또한 글로서는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에서 <쎄꼬쎄쏠라> 회원들과 한 인터뷰 및 <쎄꼬쎄쏠라>의 철학과 실천들에 관하여 쓴 <쎄꼬쎄쏠라>의 2010년 에세이「집단적 정신을 향하여 ? ─ 형식적 회의에서 ‘함께하는 자리’로」(“Toward a Collective Mind? Transforming Meetings into Get-Togethers”)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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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1: [옮긴이] 이 문장은 핼프리히가 <쎄꼬쎄쏠라>의 몇몇 조합원들과 나눈 인터뷰에 나온 것이다. 이 인터뷰는 https://www.boell.de/en/2016/01/21/venezuela-we-are-one-big-conversation에서 볼 수 있다.
주석2: [옮긴이] 이 문장은 볼리어가 인용부호 안에 넣었지만, 어디서 인용한 것인지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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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설명: 볼리어의 글의 맨 마지막에 언급된 에세이 “Toward a Collective Mind? Transforming Meetings into Get-Togethers”의 한 절인 ‘From meetings to get-togethers’를 우리말로 옮겨서 부록으로 추가한다. 원래 볼리어가 링크를 단 영어 텍스트를 저본으로 해서 초벌 옮김을 했는데 군데군데 애매한 대목들이 있어서 고민하다가, 쎄꼬쎄쏠라 홈페이지에 독어본도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독어본을 참조하여 여러 애매한 대목들을 수정했다. 부록은 정백수가 옮겼다.]
‘형식적 회의’에서 ‘함께하는 자리’로
요약하자면, 지난 40년 동안 <쎄꼬쎄쏠라>의 회의의 목적과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처음에 우리는 대부분의 조직에서 보이는 기성의 패턴을 따라갔다. 해마다 열리는 총회가 있고 연합 소속 조합들의 대표자들로 구성된 중앙운영위원회가 있었으며 노동자의 참여는 없었다. 진행자가 회의를 이끌었으며 이미 결정된 의제를 다루었다. 의사결정이 회의의 주된 존재 이유였으며 대부분의 합의에는 이미 정해진 정족수에 따른 다수결 절차가 필요했다. 참석하지 못한 사람이나 합의사항에 반대하는 사람은 다음 회의에 참여하여 투표할 권리가 없으면 수정을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의 회의는 내적 권력투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전적으로 논리적이고 정상적인 듯 보였던 방식의 회의였다. 우리의 문화적 풍토를 구성하는 불신, 소외, 위계적 구조에 맞추어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쎄꼬쎄쏠라>에의 참여를 개선하기 위한 첫 시도들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내용보다는 형태의 변화에 더 집중되었다. 우리는 참여를 확대하기 위해 연합에 참여하는 각 협동조합에 회의와 간부진을 도입하고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를 허용했다. 그러나 기본적인 위계적 구조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장례 사업에는 계속해서 조합장을 두었다. 간부진이 각 조직의 수뇌부를 이루었다. 총회가 언제나 최고의 힘을 가진 회의였으며 전통적인 격식 아래에서 기능했고 내부 권력투쟁의 무대 역할을 했다. 회의의 일차적 이유는 늘 다수결에 의한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참여의 공간들이 전적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미리 정해져 있었다.
지금 되돌이켜 보면, 버스협동조합의 경험이 우리의 과정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주석3] 이 경험은 우리 조직의 변형을 가속화했으며 우리 회의의 근본적 변화의 출발점을 이루었다.
열린 직접적 참여를 제한하는 격식들이 점차 제거되었다. 동시에 우리의 회의들은 새로운 특징과 내용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들은 처음 단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제한으로 가득했던 우리의 처음의 회의들은 만나서 ‘함께하는 자리’가 되었다. 정해진 구조가 없고 미리 짜놓은 계획이 없는 자리였다. 모두가 함께 모이는 순간 내용과 형식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회의들을 각기 다른 구체적인 측면을 내용으로 다루지만, 모든 회의 뒤에는 유대 속에서 조화를 이루고 서로 존중하려는 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의사결정이 모이는 주된 이유가 더 이상 아니다. 정보교환과 공동의 성찰에 중점이 두어진다. 중요한 것은, 유대와 신뢰의 구축, 전체를 보는 비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그리고 개인과 조직의 변형이다.
그래서 우리의 회의는 경계가 없는 ‘우리’를 체험할 수 있는 자리가 된다. 여기서 ‘우리’란 또한 공유된 기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을 의미한다. 이 기준은 우리의 현실이 변하고 우리가 성찰을 통해 우리 자신을 변형함에 따라 우리의 합의에 의해 변경되는 유연한 기준이다. 이 공동의 기준으로 인해 모두가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것이 쉬워진다.
노동자들이 의지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위임하게 되는 간부회의, 조합장 혹은 감독은 더 이상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희의체들이 또 하나의 지도부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발전이 감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우리가 모일 때 의사결정을 하겠지만, 그때그때의 일상적으로 내려지게 마련인 결정에 대해 모든 개인이나 그룹이 공동 기준을 토대로 하여 책임을 질 것이다.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똑같이 책임을 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결정사항이 발생시키는 재정적 손실을 감당하는 것도 이 책임에 포함된다.
우리는 모두가 참여하고, 회의에서 합의에 의해 생기는 집단적 기준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래서 필요한 정보가 주어진다면 모든 개인 혹은 회의체는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를 감당함으로써 전체를 보는 윤리적 인간이 되며, 그렇게 해서 개인과 조직을 변형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게는 합의가 만장일치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만장일치가 이루어지려면 어떤 그룹이나 조직의 구성원들 전부가 출석해야 한다. 만장일치란 모두가 찬성하는 표결이다.
우리의 경우, 결정은 ‘우리’가 어떤 시점에서 공유하는 기준을 따를 때 합의된 결정이 된다. 결정을 개인이 내리느냐, 비공식적 그룹이 내리느냐, 공식 회의체가 내리느냐는 상관없다. 따라서 미처 개선할 시간이 없는 경우말고는 확정된 의결이란 없다. 항상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존재한다. 만일 누군가가 동의하지 않거나 결정이 이루어질 때 개인주의적인 기준이 우세했다는 견해를 낸다면, 모든 것이 언제라도 새롭게 다루어질 수 있다.
이런 의사결정 방식은 분명 무질서와 실수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때로 중대한 경제적 손실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창조적 잠재력의 발전을 제한하는 문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발생하는 모든 유연성과 역동성에 의해서 모든 경제적 손실은 몇 배로 보상된다.
오늘날 우리는 애처롭게도 쓸데없이 내부 권력투쟁을 벌이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체를 보는 윤리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은 위계적 관계에 갇히지 않고, 사람들의 이른바 참여를 규정한다는 미로 같은 의회적 규칙들에 갇히지 않는다. 이 규칙들은 불신에 기반을 두며, 결국 실질적인 참여를 방해할 뿐이다.
시간이 가면서 대의(代議)와 대표 모델은 책임 있고 직접적이며 일상적인 참여로 대체되었다. 회의는 참여하고 싶어 하는 누구에게나 제한이 없이 열려 있는 공간이 되었다. 논의의 주제들에 대한 제한도 없다. 표결로 결정하는 과정도 없다. 모든 구성원이나 회의체는 공동의 기준에 기반을 두고 내린 결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의결 정족수는 효력을 잃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미친 짓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안다. 우리가 존중과 유대에 기반을 둔 공존을 심화시킬 때,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제공하는 저 경직된 조직형태의 미로에 갇힌 에너지를 해방시킬 때 전체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유대의 힘이 발생하고, 바로 이것을 우리는 우리의 버스들이 압류되었을 때 다른 때보다 강렬하게 체험했던 것이다. 이 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그런 힘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대면하게 되는 모든 난관, 장애, 좌절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으로 그 힘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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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3: [옮긴이] <쎄꼬쎄쏠라>는 1976년에 공동체 전체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버스 사업을 시작하는데, 그러면서 조합원들의 이익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로 열린 협동조합으로 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쎄꼬쎄쏠라>는 버스 요금 인상을 막기 위해서 지방정부에 지원금을 요청하는 집회들을 열게 되는데, 지방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80년 3월에 <쎄꼬쎄쏠라>의 버스협동조합의 버스들을 압류한다. 조합원들이 대거 빠져나가는 등의 어려움 속에서 남은 조합원들이 이에 맞서 싸우면서 <쎄꼬쎄쏠라>는 위기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바의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