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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괜찮다. 죽지 않는다.

 

페이스북을 버릴 수 있다. 괜찮다. 죽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잘 해나갈 뿐만 아니라 삶도 더 나아질 것이다.

페이스북이 수백만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돈을 받고 팔았거나 유출했거나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번 달에 나온 폭로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억 명의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과연 떠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으리라.

내가 여기서 말하건대, ‘할 수 있다.’

나는 CNN에서 “우리는 고객이 아닙니다, 우리는 상품입니다”라고 선언하고 나서 2013년에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그리고 이제 이것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다. 페이스북은 캠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에게 방어벽이 뚫린 것도 아니고 해킹당한 것도 아니다. 페이스북 플랫폼은 프로그램되어있는 바로 그 작업을, 즉 우리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우리의 심리적 트리거(방아쇠)를 포착한 다음 우리의 행동을 조작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용자들이 마침내 깨닫고 있듯이 페이스북도 페이스북으로부터 데이터를 구입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전문가들도 당신의 비밀이나 성생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당신의 심리적 취약성을 추론할 수 있는 기초데이터(raw data)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우리에게 특정 상품을 구입하게 하거나 이런 저런 후보자에게 투표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기술은 우리의 고등한 뇌기능들을 의도적으로 우회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성(논리)과 공감을 거치지 않고 파충류의 생존본능으로 직행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비유적인 묘사와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의 신경증(노이로제)은 맹점(盲點)과도 같다. 일단 소셜 미디어 심리학자들에게 포착되기만 하면 그 맹점들은 우리 뇌의 한층 충동적인 부분으로 접근하는 판이 된다.

페이스북은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공포라는 방아쇠를 당겨서 우리의 움직임을 촉발할 수 있다. 네트워크의 기술들은 우리의 이성이나 공감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가장 심층에 자리 잡은 두려움에 호소한다. 그 전술들—싸우거나 도망가라. 죽이거나 죽어라—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뇌간들—파충류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뇌 부분—을 겨냥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술이 우리의 사회적•정치적 담론에 끼친 영향을 목격했다. 우리를 화나게 하는 실질적인 일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이 소셜 미디어로 전달된 유일한 자극일 경우 우리는 결국 영구적인 편집증과 분노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만 해도 재미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또한 민주주의에 엄청난 유해물질이며 위협이다. 민주주의는 정보와 사고력을 가진 민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보다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고 싶어서든 단순히 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든 당신이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든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당신이 당신에게 진 의무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건대, 당신은 할 수 있다. 괜찮을 것이다.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사실 페이스북을 탈퇴하는 것이 더 낫다.

우선, 당신이 잊으려고 애쓰면서 지난 40년을 보냈던 2학년 때 친구들이 당신에게 연락을 하지 못할 것이다. 슬픈가? 그럴지도 모른다. 주소 및 이메일이 있는, 도덕적으로 덜 부패한 온라인 디렉토리로 이동할 때까지 당신이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찾아내느라 더 힘든 시간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당신이 당신 삶 속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쓸 수밖에 없을 것임을 의미한다. 현실 세계의 상호작용은 온라인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와 연대를 이룩할 수 있게 한다. 수십만 년에 걸친 인간의 진화는 얼굴을 맞대는 소통을 지향해왔다. 이것이 소셜 미디어 사용으로 방출되는 코르티솔 같은 스트레스 호르몬 대신에 옥시토신 같은 친사회적 호르몬이 혈류 속으로 방출되는 유일한 방식이다.

만일 십대들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연락할 수 없다면 그들은 결국 소셜 미디어를 덜 사용할 것이다. 십대들이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적게 하면 할수록 그들이 침울해하거나 자살을 저지를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페이스북을 탈퇴할 시 수반되는 또 하나의 커다란 부수적인 이점이다.

페이스북의 유용한 기능은 쌍방향의 전화번호부처럼 우리가 사람들을 찾고 그들과 소통하게 해주는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자신을 심리조작에 그토록 취약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동일한 유용성을 얻을 방법은 많다.

당신이 친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유일한 방법이 페이스북이라면 그것은 이미 문제이다. 당신이 맺고 있는 관계에 이런 제약을 용인하는 것은 접촉보다 신호가 오고가는 데 가치를 두는 시스템을 묵인하는 것이다. 당신은 이메일•스카이프•페이스타임을 여전히 할 수 있고 웹페이지, 아이클라우드, 포토 스트림을 통해 사진을 공유할 수 있으며 구글 그룹과 라이브 행아웃을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 훨씬 더 중요하고 보람 있는 것은, 현실 생활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실제로 만나는 것에 대한 대체물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벗어난 모든 시간은, 심리적으로 건강한 관계들을 무너뜨리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기업에 복종하지 않고 그러한 관계를 구축하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보내기로 할 수 있는 시간이다.

무엇보다도 당신은 당신의 사회적 관계를 무너뜨릴 의도가 있는 기업들과 민주주의와 인간본성에 대한 당신의 신념을 무너뜨릴 의도가 있는 정부들이 가하는 지속적인 심리적 학대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된다. 당신은 어두운 곳을 나와서 햇빛 속으로 걸어들어 가게 된다.

이런 식으로 페이스북을 압박하는 것은 또한 당신보다 특권을 덜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페이스북과 같은 사회 연결망을 통해 그들이 은밀히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데이터에 의해 영향을 받을 주택 담보대출이 있는 사람들, 가석방 심리 중인 사람들 및 이민자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최근에 중국은 어떻게 중국 국민들의 소셜 미디어 접속과 ‘좋아요’가 직업과 비자 발급 자격을 결정하는데 사용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여기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고 혹자는 말하겠지만, 그 일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자유 국가에 살고 있다면 우리는 미련 없이 페이스북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어야 한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