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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할 수 있는가?



 

클린에너지가 우리를 구하지는 못한다

―새로운 경체체제만이 할 수 있다

 

올해 초 세계의 미디어들은 2월에 지구 전체의 기온 기록이 충격적일 정도의 차이로 깨졌다고 보도했다. 3월 또한 모든 기록을 깼다. 6월에 텔레비전 스크린들은 파리의 홍수, 센 강이 둑을 넘어 도로로 범람하는 모습으로 뒤덮였다. 런던에서 난 홍수로 인해 물이 지하수로 시스템을 통해 코번트 가든(([정리자]코번트 가든(Covent Garden)은 영국 런던 시티오브웨스트민스터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쇼핑 및 관광 명소이다. ))의 심장부까지 흘러들었다. 런던 남동부의 도로들은 2미터 깊이의 강이 되었다.

이런 극심한 사건들이 다반사가 되면서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게 되었다. 마침내, 화석 연료가 우리들을 죽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둘러싸고 합의가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클린에너지로의 신속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석 연료의 위험에 대한 이러한 점증하는 깨달음은 우리의 의식에 결정전인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요점을 놓치고 있다는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클린에너지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이 기후변화를 막아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과학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화석 연료에서 벗어나서 100% 클린에너지를 사용한다고 가정해보자. 이것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힘찬 발걸음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선의 경우를 가정하는 이 시나리오조차도 기후 재난을 피해가는 데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고? 화석 연료를 태우는 것은 모든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실 가스 방출의 약 70%에 해당할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30%는 여러 원인에서 온다. 삼림파괴가 큰 원인이다. 산업화된 농업도 역시 큰 원인인데, 이는 이산화탄소를 용해시킬 정도로 토양의 질을 퇴화시킨다. 그 다음으로 가축사육이 큰 원인이다. 이는 매해 9천만 톤의 메탄가스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산화질소의 세계 총량의 대부분을 배출한다. 이 가스들 둘 다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이 이산화탄소보다 훨씬 더 크다. 세계의 모든 자동차, 열차, 비행기, 배를 합친 것보다 가축사육 하나가 지구온난화에 더 큰 영향을 준다. 시멘트, 강철, 플라스틱의 생산이 온실 가스의 또 다른 주된 원인이며, 그 다음으로는 쓰레기 매립이다. 쓰레기 매립은 세계 총량의 16%라는 엄청난 양의 메탄을 대기 중에 뿜어낸다.

기후변화에 관한 한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무슨 종류냐가 아니라 우리가 그 에너지로 무엇을 하느냐이다. 100% 클린에너지로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우리가 화석 연료로 하던 그 일일 것이다. 더 많은 숲을 제거하고, 더 많은 가축사육을 하고 농업 산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시멘트를 생산하고 더 많은 매립지를 쓰레기로 채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양의 온실 가스를 대기 중으로 펌프질해 올릴 것이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 체제가 부단한 성장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우리는 이것을 문제삼을 생각은 해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비(非)화석 연료에서 오는 30%의 온실 가스는 고정적이지 않다. 매해 대기 중에 더 많은 온실 가스를 추가하고 있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우리의 열대 삼림이 2050년이면 완전히 파괴되어 2000억 톤의 탄소 폭탄을 대기 중에 방출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세계의 상층토(topsoil)는 60년 이내에 영양분이 고갈되어 더 많은 온실 가스를 방출할 것이다. 시멘트 산업이 방출하는 양은 매해 9% 이상 늘고 있다. 쓰레기 매립은 눈이 아릴 정도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2100년 쯤이면 하루에 1100만 톤의 쓰레기를 만들어낼 것인데, 이는 현재의 3배이다. 클린에너지의 사용은 이런 일을 늦추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

기후운동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주의력을 화석연료에 집중했던 것이다. 더 심층에 있는 것, 즉 우리의 경제적 체계가 작동하는 기본 논리를 지적했어야 하는 데 말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GDP 성장이라는 광범한 과제에 연료를 대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 문제는 우리의 경제 체계가 추출, 생산, 소비의 수준이 점점 더 증가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가들은 지구 경제가 매해 3% 이상 성장하도록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말한다. 큰 회사들이 총이익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최소치이다. [개별 회사들의 이익은 이 총이익을 능력대로 나눈 몫이 될 것이다.―정리자] 이는 20년 마다 세계 경제의 크기를 두 배로 늘려야 함을 의미한다. 차들도 두 배, 어업도 두 배, 탄광업도 두 배, 아이패드도 두 배. 그 다음 20년에는 이미 도달한 두 배에서 또 다시 두 배로 늘려야 하고.

우리의 낙관적인 전문가들은 기술 혁신이 경제 성장을 물질적 스루풋(material throughput)(([정리자]기업 경영에서 스루풋(throughput)은 ‘투입’(input)에서 ‘산출’(output)까지의 과정을 가리킨다. 현대 경제는 생산지와 소비지(판매지점 근처)가 다르므로 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상품을 구성하는 물질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물질적 스루풋’이 된다. 현대 경제에서는 이동하는 거리가 지구적 규모이다.))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거는 없다. 지구상의 물질 추출과 소비는 1980년 이해 94% 증가했으며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추산으로는, 2040년이 되면 세계의 선박·비행기·트럭을 사용한 수송거리가―그리고 수송되는 물질이―거의 정확하게 GDP의 성장률에 보조를 맞추어 지금의 두 배 이상이 된다고 한다.

클린에너지는 중요하지만 우리를 이 악몽에서 구해주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 시스템을 바꾸면 가능하다. 사람들은 GDP 성장이 더 나은 세상을 창출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해주지 않고 빈곤을 줄이지 않으며 그 ‘외부성’(externalities)(([정리자]‘외부성’(externalities)은 상품생산이 시장의 외부에서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긍정적 외부성과 부정적 외부성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는 맥락상 외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에 국한되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학교 근처에 있는 화상경마장은 학교의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폐해―부채, 과다노동, 불평등, 기후변화―를 낳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GDP 성장을 진보의 주된 척도로 삼지 말아야 하며, 이는 올해 말에 모로코에서 비준될 기후변화협약의 일환으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제 우리의 창조적 능력을 새로운 지구 경제를 상상하는 데 쏟을 때이다. 생태 발자국을 적극적으로 축소하면서 인간의 복지를 최대화하는 경제를. 이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이 매우 낮은 소비 수준을 가진 높은 수준의 인간 발전을 이루는 데 이미 성공했다. 사실 리즈 대학 경제학자인 대니얼 오닐(Daniel O’Neill)이 물질적 탈성장(degrowth)이 높은 수준의 인간 복지의 발전과 양립 불가능하지 않음을 입증한 바 있다.

우리는 화석 연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클린에너지로 전환하는 한에서는 현재의 상태대로 지속할 수 있다고 안심하게 되었으나, 이는 위험하게 단순화된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다가오는 위기를 물리치려면 심층에 있는 원인과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 저자 제이슨 히켈은 <더 룰즈>(The Rules)에 속해 있다 <더 룰즈>는 활동가들, 예술가들, 농업가들, 농민들, 학생들, 노동자들, 디자이너들, 해커들, 몽상가들 등의 세계적 네트워크로서 지구의 내러티브를 새로운 방향으로 몰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