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 운동
- 저자 : 정남영
- 설명 : 2017년 5월 20일에 있었던 한국비평이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입니다. 이 발표 원고는 완결된 글이 아니라, 시간 절약을 위해 그대로 죽 읽으려고 작성된 스크립트 같은 글입니다. (물론 즉흥적인 생략·변경·보완은 가능하겠지요.) 각주에 넣은 긴 인용들은 발제 시간에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읽는 이가 참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삶형태를 위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 새로운 삶형태를 ‘대안근대’라는 이름과 연관시킨다면 (다른 여러 이름들이 가능합니다) ‘근대’가 어떤 형태의 삶형태를 나타내는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는 가장 간결하게는 자본(시장)과 국가의 이두체제가 지배하는 삶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안근대로의 이행이란 자본과 국가가 부과하는 삶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현하기에는 매우 힘든 엄청난 과제입니다. 근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극히 작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자본과 국가가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의 과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물론 옛 토대 위에서의 발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토대 자체의 발전 또한 있었다. 이 토대 자체의 최고의 발전(그 자기변형의 정점에서 피는 꽃, 그러나 항상 이 토대, 이 식물의 꽃이며, 따라서 꽃이 핀 후에는 그 결과로 시든다)은 그 토대 자체가 생산력의 최고의 발전과, 따라서 개인들의 가장 풍부한 발전과 결합될 수 있는 형태로 완결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더 이상의 발전은 쇠퇴로서 나타나며 새 토대에서 새 발전이 시작되는 것이다.((Marx, Karl,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540-41. 앞으로 이 책의 제목은 GR로 줄입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역사적으로 여러 단계의 변형을 거친 것이 사실이지만,((맑스도 이 저작의 여러 곳에서 장벽을 계속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의 능력을 지적합니다.)) 이 이름을 더는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존재하며 이 변형의 조건을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가 만들어놓는다는 것이 맑스의 요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이런 취지의 대목은 이 저작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맑스는 “새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GR, p. 706. 이 저작에서 ‘사회적 개인’이 등장하는 다른 대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들을 지배하는 자립적인 권력이 된 개인들의 사회적 상호관계는 자연력이나 우연으로,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이해되든 그 출발점이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의 필연적 결과이다.”(197) “일단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면 생산과 부의 초석이 되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지출되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에 의한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회적 존재인 덕분에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능력 즉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GR, 706) “일단 그렇게 되면, 그리하여 처분 가능한 시간이 대립적 실존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한편으로 필요노동 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를 척도로 삼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매우 급속히 이루어져서 (비록 이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적으로 마련되지만) 모두의 처분 가능한 시간이 증가할 것이다. 실질적 부는 모든 개인들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GR,708)))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형상의 변화를 줄곧 추적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입니다.(나중에는 하트와 함께) 네그리는 러시아 혁명기의 ‘전문적 노동자’에서 뉴딜 시기의 ‘대중적 노동자’―이 당시를 그는 ‘계획자 국가’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를 거쳐 ‘사회적 노동자’(자본이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된 시기) 형상을 포착해 냈으며, 정보혁명 이후 이른바 탈근대에서는 (개별적으로는 새로이 발생한 ‘인지 노동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가 생산의 네트워크들에서 생산을 하고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생산’과 그 생산자들인 다중(아직은 잠재적인 다중)의 형상을 포착합니다. 이 생산자로서의 다중은 맑스가 말한 ‘사회적 개인’에 매우 근접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맑스의 추론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게도((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분석한 책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현존과 함께 대안근대로 나아갈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 상응하는 거버넌스의 수립을 통한 대안근대로의 이행을 사유합니다. 네그리·하트는 새 책 Assembly에서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를 “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릅니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pp. 274-280.)))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오늘 소개할 것은 네그리와 하트의 대안근대 이행론이 아닙니다. 이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언급한 것은 이제부터 소개할 커먼즈 운동(commons movement)이 말하는 ‘커먼즈 이행’(commons transition)을 설명할 틀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새 책에서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을 언급했다면, 그들이 이 가운데 어디에 이 운동을 배치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새 책에서는 ‘커머닝’(commoning)에 대한 언급은 몇 군데 있어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물론 ‘커머너’(commoner)에 대한 언급은 Declaration(20)의 마지막 장 “Next : Event of the Commoner”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커먼즈의 창출 혹은 보존이라는 것만 놓고 보자면 ①에 위치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즉 기존의 제도들―의 외부에 구축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네그리·하트가 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사회운동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축소판으로 수립하는 것(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창출하는 소규모의 공동체)이긴 하지만요.((커먼즈 활동가인 볼리어도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애매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커먼즈 운동이 사회운동과 다르다고 합니다. David Bollier,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 http://minamjah.tistory.com/122))
그런데 사실 현재의 커먼즈 운동은 커머닝이나 커먼즈의 구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를 보면 위의 ‘세 경로’에 담긴 네그리·하트의 것에 못지않은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포부와 계획을 커먼즈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2P 재단의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의 결실로 작성된 이 책자(혹은 팸플릿?)는 커먼즈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견해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유력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소개하는 것이 이 발표의 주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주된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커먼즈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커먼즈와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정의 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의보다 역사가 먼저 오는 것이 커먼즈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커먼즈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으며 이후 그 우세함은 잃었지만 전(前)자본주의 시대까지 중요한 기능을 잃지 않았던 커먼즈는 산업자본주의에 들어와서 실질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P2P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다시 태어났고 전지구적 수준으로 그 규모가 확대될 수 있게 됩니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 p.12 참조. 이 책자는 이후 ’Primer’로 줄임.))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2009년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입니다.((분야가 다르지만 비교적 초기의 기여자 한 사람을 더 들자면 ‘커먼즈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naugh)일 것입니다.)) 오스트롬은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전통적 커먼즈는 규모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커먼즈 패러다임이 일반화되기는 힘들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커먼즈의 재탄생)이 이 비판을 시원하게 날려버립니다. 이후로 커먼즈 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과 결합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 Principles for the Transition to Postcapitalism, Zed Books Kindle Edition, 2017, Kindle Locations 334-336.)))
이로써 커먼즈 개념은 예전의 공유지와 같은 것이 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운동이 발전하면서 개념도 따라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단일한 커먼즈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채택되는 정의는 커먼즈를 ① 공유된 자원 ② 공동체 ③ 자원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운영하기(커머닝) 위한 일단의 규칙들을 모두 합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커먼즈는 물론 모든 종류의 물리적·무형적 자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커먼즈는 더 정확하게는 뚜렷한 공동체를, 자원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는 일단의 사회적 관행들·가치들·규범들과 결합시키는 패러다임으로서 정의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커먼즈는 ‘자원 + 공동체 + 일단의 사회적 프로토콜들’이다. 이 셋은 통합된, 상호 연관된 전체를 이룬다.” (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p. 15. [한국어본] 배수현 옮김,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갈무리, 2015.)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Kindle Location 351.))) (발표자도 이 유력한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공유지’라든가 ‘공유재/공통재/공통의 부’라고 옮기지 않고 ‘커먼즈’로 음역합니다.) 커먼즈의 생산양식을 따로 부각시켜 ‘P2P 생산’(혹은 ‘피어peer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커먼즈’를 추가하여 더 길게 쓰면 ‘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가 됩니다.((CBPP는 요하이 벤클러(Yohai Benkler)의 용어입니다.))
커먼즈는 노동조합처럼 어디서나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자원에 따라, 관리 규칙에 따라, 위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뉠 수 있으며 그 결과 극히 다양한 커먼즈가 가능합니다. 볼리어는 “커먼즈들의 은하계”(“a galaxy of commons”)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다시 커먼즈 이행이 제시하는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로 돌아갑시다.
① 엑서더스
커먼즈와 P2P의 세계는 자본 및 국가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자본 및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으로, 탈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먼즈 활동가들은 커먼즈를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출발점에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전이(phase transition)[대안근대로의 이행을 말합니다―인용자]의 전선에서 역사적 주체의 근간을 형성할 점증하는 수의 커머너들이 예시적인((예시적인(prefigurative): 미래를 미리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존함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데이터가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한 출발이다.”((Primer, P. 47)) 다시 발견된 혹은 더욱 강력하게 복원된 출발점입니다.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변화되었을 뿐 사라졌던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안근대의 출발점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 본 맑스의 견해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맑스는 현재와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상하지 못했으면서도 커먼즈의 현재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the old Germanic system”)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557.)) 커먼즈를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가장 새로운 것으로 본 것이죠. 또 있습니다.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고대적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혁명적 경향이 있다는 의혹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는 ‘고대적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는 ‘고대적’(archaisch)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엑서더스의 참된 의미는 출발점에 새로 서기일지도 모릅니다.
② 개혁
P2P 생산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커먼즈가 주변이 아니라 진정한 중심의 새로운 출발점이더라도 현재와 같이 아직은 자본(시장) 및 국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 둘과 관계를 끊고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커먼즈 활동가들이 구상하고 실천하는, 자본 및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개혁적’입니다. 커먼즈는 사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를 주변에서 돕는 제도들과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제도들이 국가와 자본의 해로운 측면은 걸러내고 유용한 측면은 남깁니다. 국가로부터 관료제를 제거하고 한때 복지국가가 담지했던 민중과의 ‘유대’(solidarity)를 보존합니다. 그래서 이 ‘유대’의 역할을 하는 ‘for benefit association’(지원 단체)을 커먼즈 주변에 제도화합니다. (주로 재단의 형태를 띱니다.)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커먼즈 이행 운동은 기존의 국가―“시장 국가”―를 커먼즈와 유대를 맺은 ‘파트너 국가’로 바꾸려 합니다.((실제 사례가 이미 존재합니다. 파트너 국가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는 ‘어번 커먼즈의 돌봄과 재활성화를 위한 볼로냐 조례’(Bologna Regulation for the Care and Regeneration of the Urban Commons)입니다. 그 핵심은 시민이 기안을 해서 제안하면, 시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례로 스코틀랜드 정부가 최근에 공유지들을 되사서 커머너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장점을 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 이행은 복지국가의 ‘재분배’를 모델로 삼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선분배(pre-distribution)를 통한 능력양성(empowerment)을 중심 원리로 합니다.((이 ‘능력양성’의 측면이 복지국가의 틀로서는 풀 수 없는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희한하게도 맑스가 대안근대의 분배방식에 대해서 말한 것과 통합니다.
“둘째 경우[자본주의 다음의 생산방식을 말합니다―인용자]에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 즉 공동체적 생산―생산의 토대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서 정립된다. 그래서 그가 창조하거나 그 창조작업을 돕는 생산물의 특수한 물질적 형상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의 노동으로 산 것은 특정의 특수한 생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에의 특정의 참여이다. 따라서 그는 교환해야 할 특수한 생산물이 없다. 자신의 생산물은 교환가치가 아니다. 생산물은 각자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특수한 형태[즉 화폐―인용자]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없다. 교환가치의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되는 분업 대신에 각자가 공동체적 소비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의 조직화가 발생한다.”((GR, 172.))
이렇게 선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가 점점 약화되는” 그러한 국가일 것이라는 말((Primer, p.35))에서도 국가에 대한 커먼즈 활동가들의 인식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는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세세히 분석하고 비판했던 근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데,((“The real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civil classes took place under the absolute monarchy. The bureaucracy asserted the idea of unity over against the various states within the state. Nevertheless, even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the social difference of the classes remained a political difference, political within and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Only the French Revolution completed the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social classes, in other words, made the class distinctions of civil society into merely social distinctions, pertaining to private life but meaningless in political life. With that, the separation of political life and civil society was completed.” (Karl Marx,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ch05.htm) 이러한 분리를 잇는 기능을 하는 것이 대의(代議)정치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머리를 몸에 잇는다고 시신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온전한 몸이 탄생해야 합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 분리의 극복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본에 대한 태도를 알아봅시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생산성과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유한한 자원―석유, 물, 광물, 땅 속의 영양소 등―을 마치 그것이 무한한 양 추출해서 시장 가치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무한한 자원―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비물질적 재화―에는 인공적으로 희소성((희소성(scarcity)은 자본의 가치화의 바탕이 되는 전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무형적인 디지털 재화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자본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을 전제하여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혁신에 법적·기술적 족쇄를 채우고 있습니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본의 착취 방식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extraction)이라는 방식입니다.((네그리·하트도 새 책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주된 방식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대하여 두 절 정도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문의 관련 대목입니다. 옮기지 않고 그대로 소개합니다. “Capitalist accumulation today functions increasingly through the extraction of the common, through enormous oil and gas operations, huge mining enterprises, and monocultural agriculture but also by extracting the value produced in social forms of the common, such as the generation of knowledges, social cooperation, cultural products, and the like. Finance stands at the head of these processes of extraction, which are equally destructive of the earth and the social ecosystems that they capture.” p.xv.)) 커먼즈 이행 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그 추출적 성격을 제거하고 커먼즈의 삶에 복무하는 ‘친구로서의 자본’(capital as a friend)으로 변형시키려 합니다.((‘친구로서의 자본’ 혹은 ‘생성적 형태의 자본’(generative forms of capital)과 비슷한 취지로 네그리·하트는 Assembly에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말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화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투여되는 화폐입니다. “In chapter 15 we will argue that this critique should lead us not to oppose money as such but instead to invent an alternative to capitalist money, that is, an alternative social technology for institutionalizing new social relations—a money of the common.” p.224)) 이런 경제를 ‘생성적’(generative)이라고 부릅니다.((생성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열린 협동조합주의’(open cooperativism)입니다. 이 경제를 양성하는 여섯 개의 전략이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① 풍요(↔희소성)에 기반을 둔 지식의 공유. ② 기여의 다양성 인정(↔ 분업, 전문화). ‘open value accounting’ 사용. ③ 공정하고 호혜적인 분배 : Copyleft licensing →CopyFair licensing으로. ④ 지속 가능성을 위한 오픈 디자인. 자동차의 사례: https://www.osvehicle.com/editselfdrivingcar/ ⑤ 폐기물의 감소. 자본의 요구가 아니라 실질적 욕구에 맞추어진 네트워크화된 생산. ⑥ 물리적 기반시설을 상호화하기(공동이용).)) 커먼즈 주변에 이런 기능을 하도록 설치된 것이 ‘commons-oriented entrepreneurial coalition’(커먼즈에 복무하는 기업가들의 연합)입니다. 이 기업가들은 커먼즈에서 생산된 가치들을 가지고 상업적 활동을 하지만 ‘커먼즈의 축적’에 우선적으로 복무해야 합니다. 시장에 물건을 팔 때에도 사람과 환경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커먼즈와 그 주변에 이렇게 설치된 제도들을 합해서 ‘커먼즈 생태계’(commons eco-system)라고 부릅니다.((Primer, pp. 19-22에서 이 생태계의 사례들인 Enspiral, Sensorica, Farm Hack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볼 수 있습니다.))
③ 헤게모니
커먼즈 생태계가 핵심적 요소이지만,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것의 구축에만 시야나 활동을 국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현실적으로 가하는 제한과 맞서기 위해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 운동은 정치적 장에 관여해야 합니다. 복지국가 모델의 최선의 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창조와 공동체에 의해 조직된 실천들을 촉진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정치’란 대의정치만이 아니라((스페인의 ‘도시자치연합’(municipal coalitions)의 경우 당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기존의 정당들을 포용하지만 그것들을 수직적인 당 구조보다는 다중이해관계자적(multi-stakeholder) 구조들로 전환시킵니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해서 담론을 여성화한 것도 특징적입니다. Primer, pp.28-29 참조.))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 즉 시민들이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권리들도 가리킵니다.) 이는 대안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분쇄합니다. 균형 잡힌 정치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시적 행동노선과 제도적 행동노선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절에서 보겠지만, 다행히도 이러한 정치적 접근법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Primer, p.24))
정치 관여에의 궁극적 목표는 ‘체제의 변화’(systemic change)입니다. “정책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 및 사람들의 욕구를 시장이나 관료제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체제로 이행하는 것입니다.((Primer, p.45)) 이를 위해 모든 수준―도시, 일국, 지역, 지구 전체―에서 대안적인 거버넌스를,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구축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Assembly of the Commons’가 그 계획에 속합니다. (실제로 2016년 11월에 첫 ‘European Assembly of the Commons’가 열린 바 있습니다.)((커먼즈들로 이루어진 정치체제를 ‘federation of the commons’라고 부른 사례도 있습니다. “A more fundamental question, however, is normative: what are our values, and how does this influence what futures we consider desirable? From the author’s vantage point, with respect to the value of the fullest expression of human empowerment, scenario four is clearly the most desirable. In this fourth scenario, a federation of the commons, citizens and communities are actively engaged in shaping the fabric of their lives and societies through a process of ‘deep democracy’ (Ramos, 2012). But others may find greater affinity with a different scenario. Paraphrasing Ashis Nandy (1992), one person’s utopia may be another’s tyranny.” Jose M. Ramos, The Futures of Power in the Network Era, http://eprints.qut.edu.au/62967/1/A05.pdf))
이렇듯 커먼즈 이행론은 디오니소스의 세 얼굴을 나름대로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것은 주로 Primer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주석에서 소개한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견해는 이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있다는 판단이나 커먼즈 고유의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대안근대로의 변형에서 커먼즈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생각 등은 오늘 소개한 이행론과 근본적으로 통합니다. 자기 나름의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제시하는 (발표자도 접하지 못한) 이론가들이 더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함께 커먼즈 운동은 그 실천과 이론이 더욱 더 풍성하게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이행만이 대안근대로 가는 유일한 경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커먼즈 중심이든 아니든) 자본과 국가의 이두체제를 벗어나서 자유로움, 공정함, 지속 가능성이 실현되는 삶, 정치·경제·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삶, 인간과 만물이 서로 동지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노력은 근대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영속화하려는 세력과 권력이나 재산을 놓고 투쟁하지 않습니다. 권력과 재산은 근대적 삶형태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아무리 잘 나누어도 근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안근대로 나아가는 노력은 근대적 삶형태에 다른 삶형태를 맞세우는 운동입니다. 이 두 삶형태의 대립은 전체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지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두 개의 상이한 전체―근대적 삶형태와 대안근대적 삶형태―의 대립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안근대로의 이행 혹은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인류세’(anthropocene)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이런 상태를 만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기에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경제학자도 있습니다.((데 안젤리스가 Omnia Sunt Communia,에서 원용한 것으로서 Moore, J. W. (2014). The Capitalocene, Part I: On the Nature and Origins of Our Ecological Crisis. Fernand Braudel Center, Binghamton University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주도해온 ‘원흉’이 미국과 영국이므로 인류세는 사실 ‘영미세’(anglocene)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역사가도 있습니다.((Peter Linebaugh, “Omnia Sunt Communia: May Day 2017”, http://www.counterpunch.org/2017/04/28/omnia-sunt-communia-may-day-2017/ 참조.))
이제 현재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넘어 이 ‘-세’(-cene)를 새롭게 바꿀 때입니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을 (잘 하든 못 하든) 하듯이, 이 일에 착수해야 이 일을 (잘 하든 못하든)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한 노력들이 바로 이러한 착수에의 자극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보다는 ‘무슨 일’에서 성공/실패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일은 생존하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일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일입니다. ♣
근대 |
대안근대 |
경쟁, 분업 |
협동, 커머닝 |
추출적(extractive) |
생성적(generative) |
대의(代議) |
참여 |
선형(linear) |
순환형(circular) |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
주인으로서의 자본 |
친구로서의 자본 |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
파트너로서의 국가 |
중앙집중적 |
탈중심적, 분산적 |
종획(사유화) |
공통화(commonification) |
재분배(redistribution) |
선(先)분배(pre-distribution) |
닫음 |
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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