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2/4)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1989. 2. 26) 4-6절.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4,5절), 민서(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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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지난번에 이어서 4-6절의 내용정리를 올린다. 이번에도 정리자가 논평·보완·추가하는 내용을 대괄호 안에 넣기로 한다.
Lizard Talk;
Or,
Ten Plagues and Another
An Historical Reprise
in
Celebration of the Anniversary of
Boston ACT UP
February 26, 1989
1. Lizard Talk in Ancient Egypt 보기
2. “What they had formerly done in a corner…” Ancient Greece 보기
3. Christianity and the Whore of Babylon 보기
4.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5. The Columbian Exchange
6. “The Death Carts Did More…”
7. Yellow Fever & Racism of the Founding Fathers
8. Gothic Disguises of Industrialization
9. “I had a little bird…” Bolshevism and the ‘Flu
10. Mein Kampf & Tuskegee
-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기의 100개의 사랑 이야기 (One Hundred Tales of Love in the Transition from Feudalism to Capitalism)
보카치오는 『데카메론』(The Decameron)을 1347-1349년의 흑사병(the Black Death) 얼마 후에 썼는데,[1353년에 완료되었다] 이 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사망했다. 보카치오는 피렌체 은행가의 아들이었는데, 경영 공부에도 손을 대보고 교회법에도 손을 대보았으나 잘 안 되어서 외교관이 되어 역병에서 살아남았다.
100개의 이야기에는 교회와 부르주아지에 대한 많은 풍자적 비판들이 담겨있다. 보카치오는 죽어가는 농민들로부터 이야기들을 훔쳐왔다. [영어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데카메론』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빌려온 것들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라틴 이야기들이 주로 참고되었지만, 어떤 것들은 인도, 중동, 스페인 등에 기원을 둔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그 지역에서 구전되던 것들이리라고 추정한다. 상세한 설명이 없어서 확정하기 어렵지만 라인보는 이 후자의 것에 강조를 두는 듯하다.] 보카치오와 농민들의 관계는 해리스(Joel Chandler Harris)와 흑인들의 관계에 비견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해리스는 흑인의 구비전통에서 수집한 이야기들을 Uncle Remus: His Songs and His Sayings(1880)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이 둘 모두 원래의 이야기들의 농도를 완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 목적은 상류층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들이 간간이 쾌활하게 풍자되곤 하지만 말이다.
농민들은 “도와줄 의사도 하인들도 없었으며 길가에, 들판에, 집에 밤낮 없이 하루 종일 쓰러져서 인간이라기보다 동물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보카치오는 이 재미있는 책을 위안과 연민에 대한 짧은 논변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는 아픈 사람을 간호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기라는 주제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가 의미하는 위안이란 도시를 버리고 “끝없이 쏟아지는 눈물과 흐느낌”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뜻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생판 남인 양 자신의 자식들을 돌보고 돕기를 거부했다.”
『데카메론』의 일곱 숙녀들과 세 신사들이 도시를 피한 것은 “대부분의 집들이 공동재산이 되었”기 때문이고 “신과 인간의 법에 대한 모든 존중이 우리의 도시에서 실질적으로 무너졌고 소멸되었”기 때문이며 가족을 잃는 것이 “웃어대고 재담을 하는 등 모두 즐거워하게” 하는 신호가 되었기 때문이다. 숙녀들은 예배에서 만나서 이야기하며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범죄자들이 추방되지 않고 “법에 노골적으로 도전하면서” 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상황이며, 숙녀들은 “우리의 피 냄새를 맡고 자신들을 교회의 머슴이라 부르며 온갖 곳을 시끄럽게 활보하며 음탕한 노래를 불러 우리의 상처에 모욕을 추가하는 도시의 불량배들 앞에서 속수무책인” 상황이라는 것이다.
숙녀들은 도시를 피하고 동양의 향료를 친 연회음식들의 소화를 돕기 위해 여러 재담과 이야기들을 한다. 그런데 이 향료들은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pasteurella pestis)’를 가져온 바로 그 배에 실렸던 것이었다.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가 바로, 벼룩이 매개체이며 ‘검은 쥐’(ship rat, 곰쥐=black rat)가 숙주인 미시기생체의 이름이다. [최초로 페스트균을 분리해낸 예르신Yersin 이 처음에 그 균의 학명을 파스퇴르 연구소를 기념하여 이렇게 지었다. 이는 나중에 ‘이에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학명으로 바뀐다.] 이 쥐는 두 거시기생체들의 합작으로 유럽에 왔다. ① ‘약탈자 칭기즈 칸’(Ghengis Khanis plunderitis)이 낳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생명체들의 급속한 순환 ② 유럽 상품교역의 중심동맥인 ‘탐욕스런 베네치아’(Venetia avaricious)라는 바이러스. [라인보는 칭기즈칸과 베네치아를 라틴어 두 단어로 된 페스트균의 학명처럼 표기하고 있다.] 이 거시기생체들은 자기면역의 기술들을 아직 발전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다시 말해서 유럽 도시지역에서 질병의 만연을 다루는 ‘행정 루틴들’(환자선별분류, 격리)이 없었다.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는 잔치를 벌일 만큼 풍부한 인간집단을 발견했다. 숙주의 방어력이 영양실조와 전쟁으로 심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농민들은 이 재앙에 맞서는 나름의 방어패턴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교회, 주(Lord), 군주라는 기생체들에 맞서는 천년왕국운동과 농민반란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사례들 가운데 영국의 롤라드운동(The Lollard movement)과 이탈리아의 소형제회운동(Fraticelli movement)이 있다. [롤라드운동은 14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개신교 이전의 기독교 종교운동이며, 소형제회는(이탈리아어로 ‘Fraticelli’, 영어로는 ‘Little Brethren’) 성자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의 회칙, 그 중에서도 특히 청빈에 관한 회칙을 극단적으로 옹호한 프란치스코회 내부 급진소수파다.] 지배계급의 관점을 가진 논평자들이 흑사병을 환영한 것은 이 병이 모든 다른 형태의 일탈만이 아니라 이 두 운동에도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이다. 질병에 대한 지배계급의 이론은, 병이 천체들에서의 변화(점성술)에 영향을 받은 것이거나 아니면 간악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신이 내린 천벌이라는 것이었다. 영국의 연대기편자 나이턴(Henry Knighton)은 흑사병이 가령 여자가 남장을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막고 처벌하는 데 있어서 ‘놀라운 치료제’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 흑사병이 진행되는 동안 악랄한 유대인학살이 행해졌다.
한편 교회는 돈을 받고 구원을 제공했다. 교황은 기독교인들을 로마로 초청했다. 120만 명이 부름에 따랐으며 순례를 마치면서 헌금을 바쳤다. 그리고 10%만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나머지 90%는 그들의 시신 또한 바쳤다. 교황은 교인들을 피해 더 풍토가 좋은 곳인 아비뇽으로 몰래 도망갔으며 거기서 주사위공장들을 묵주제조공장으로 전환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독일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듯하다. 바로 중앙유럽에서 채찍질운동(Flagellant movement) 혹은 십자가의 형제들(the Brothers of the Cross) 운동이 흑사병에 대한 대응으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자들이 (여자들도 몇 명 끼어서) 황폐해진 시골지역을 200-300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이들은 도시(town)에 도착하면 큰 원 모양으로 모여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며 광적인 상태가 되어 울고 노래하고 소리쳤다. 처음에 당국은 이들을 미심쩍어 하면서도 그냥 놔두었다. 그러나 채찍질운동이 교회에 이익을 줄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이 운동이 위계를 조롱하고 수도원이 부정한 수단으로 얻은 것들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경건한 가학피학증은 혁명적 천년왕국운동으로 전환되었다.
흑사병이 낳은 대규모의 대량학살은 거시기생체들에 보복을 가했다. ‘파스테우렐라 페스티스’는 봉기의 원천을 멸절하지도 않았고 노동계급을 훈육하여 고역을 감당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남자가 여장을 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유럽에서 임금은 두 배로 올랐으며 삶은 실제로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더 나아가 로저스(Thorold Rogers)의 말을 빌자면, “흑사병은 토지의 점유에서 완전한 혁명을 일으켰다.” 이는 영국에서 정점에 달했는데, 이곳에서 1381년에 일어난 농민봉기는 봉건제의 역사적 위기를 낳았다. 농민들과 도시의 장인(匠人)들이 수도원들을 공격하고 감옥을 해방시키며 토지를 차지하고 법률가들·성직자들을 공격하면서,
아담이 땅을 파고 이브가 실을 자을 때
그때 누가 신사였는가?
라는 강한 슬로건 아래 뭉쳤다.
의미는 이중적이다. ‘파다(delve)’와 ‘잣다(spin)’ 같은 단어들은 농업의 비옥함을 가리킬 수도 있고(쟁기질과 추수) 인간의 생식을 가리킬 수도 있기(성교와 출산) 때문이다.
- 콜럼버스의 교환 (The Columbian Exchange)
1492년에 봉건제가 끝나고 자본주의가 시작되었다. 상인들, 은행가들, 초기 자본가들이 유럽의 군주들과 손을 잡고 ‘민족’과 ‘국가’를 형성하여 농장주들, 농민들, 도시 장인들에 맞섰으며, 농장주들, 농민들, 도시 장인들은 넓은 세상의 공통적인 것(the wide world’s common)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들은 바로 유럽 제국들의 육군과 해군에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로서의 대대적인 임금노동 경험을 했다. 미시기생체들의 대륙 간 전송의 관점에서 볼 때 콜럼버스의 교환은 간단하게 천연두와 매독의 교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매독을 최초의 ‘역사적’ 질병이라 부르는 이유는 전염병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질병이 생물학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사건이 되었다는 데 있다.
유럽인들은 효율적인 보균자들이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은[라인보는 그냥 ‘아메리카인들’(the Americans)이라고 부르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방어능력이 없었다. 1520년과 1600년 사이에 14개의 전염병이 멕시코를 유린했으며 17개의 전염병이 페루를 강타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천연두였다. 멕시코는 정복당한 지 10년 이내에 인구가 2500만 명에서 168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1620년쯤에는 180만 명으로 떨어졌다. 이와 유사한 학살이 페루에서도 일어났다. 질병에의 저항력이 노예상태에서의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서 크게 약해져 있었다.
유럽인들은 세균학적 지식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1616-1617년 뉴잉글랜드의 유행병이 “저 해로운 자들을” 숲에서 몰아냈다고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쓰고 있는데, 매더는 매사추세츠를 “새로 발견한 골고다”로 보았다.[‘해골’을 의미하는 ‘Golgotha’는 ‘Calvary’라고도 불리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처형장이다.] 필그림스(Pilgrims)[1620년 미국으로 건너가 플리머스 식민지에 초기에 정착한 영국의 분리주의자들]가 ‘언덕 위의 도시’라고 부른 곳은 이렇듯 로마의 처형장에 비견되었다. [마태오의 복음 5장 14절에 나오는 “city on the hill”은 한국어본 성경들에서는 ‘산 위에 있는 마을’, 또는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옮겨져 있다.] 역사가 드레이크(Francis Samuel Drake)는 버지니아 주(州) 로어노크(Roanoke)의 “미개한 족속”에 대해 쓴 바 있는데, 드레이크를 돕는 한 원주민에 따르면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을 그토록 빨리 죽게 만든 것은 영국의 신”이라는 말이 돌았다.
다른 한편, 콜럼버스의 배가 돌아가고 나서 가장 ‘역사적인’ 질병이라는 매독이 유럽에서 악성 전염병의 형태로 등장했다. 그 이후 “문명과 매독 감염은 함께 전진했다.”
매독은 즉시 자본주의의 고전적인 질병이 되었다. 첫째, 눈 깜빡할 새(1500년 경)에 매독은 유럽 제국들에 의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 전 세계로 퍼졌다. 둘째, 이는 쾌락을 규제하는 핑계가 되어 공중목욕탕이 폐쇄되었고 키스는 수상한 행동이 되었으며 술잔을 여러 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풍습이 사라졌다. 셋째, 매독은 민족주의의 질병이었다. 영국인들은 프랑스병이라고 불렀고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병이라고 불렀으며 독일인들은 폴란드병, 폴란드인들은 러시아병, 중국인들은 유럽병, 일본인들은 중국병이라고 불렀다.
이런 민족주의적인 낄낄댐 아래에는 인종주의적 도살의 히스테리적인 웃음이 깔려있다. 1530년쯤 이 병은 이탈리아의 시인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가 지은 「씨필리스」(“Syphilis”)라는 시에 의해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 시는 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벌로 이 병을 얻은 아이티의 한 양치기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점으로 보아 이 이름 자체가 그 기원에 잠재한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암시했다.
넷째, 매독은 완전히 부르주아 여성혐오증의 질병이었다. 이는 여러 방면으로 작용했다. 매독의 두려움은 유럽에서 르네쌍스 여성들의 대량학살―이는 ‘마녀광기(witch craze)’[=마녀사냥witch-hunt]라고 불렸다―에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 매독은 악마의 표식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1826년에 교황은 콘돔의 사용을 금지했다. 죄를 저지른 인체의 부위에 벌을 내리는 것이 신의 섭리인데, 콘돔은 이 섭리를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교황 바오로 2세가 1987년 9월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캐스트로(the Castro)[샌프란시스코 유레카밸리 근교에 있는 동성애자들의 마을]의 사람들은 ‘교황은 동성애자가 되라(Popo Go Homo)’고 요구했다. [당시 2000명의 시위대가 운집했는데, 동성애자활동가들, 페미니스트들, 유대인들이 들고 있던 피켓의 여러 문구 가운데 하나가 다른 문구들 가운데 하나인 ‘Pope Go home’을 변형한 ‘Popo go homo’였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같은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적 지도자들은 대량학살의 의도를 거침없이 표현했다. “내가 만일 판사라면 나는 저런 유독한 매독에 걸린 탕녀들을 거열(車裂)형에 처하고 살가죽을 벗겨 죽일 것이다. 저런 더러운 탕녀들이 젊은이들에게 끼칠 해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18세기에 오면 부르주아지는 매독을 귀족층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으며 (귀족들에게는 매독이 용감성의 표식이었다!) 성애에 대한 자신들의 사정없는 억압을 보상해주는 것으로 보았다.
- “시체들을 실은 마차가 더 많이 기여했다···” (“The Death Carts Did More···”)
“역병을 아는 데에는 역병이 필요하다”는 말은 예방접종의 원칙에 대해서도 할 수 있고 전염병에 대한 역사적 서술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이 말은 대니얼 디포의 책 『역병 일지』(The Journal of the Plaugue Year, 1722)[한국어본이 『전염병 연대기』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에는 확실하게 적용된다. 이 책은 겉으로는 1665년의 런던 대역병(Great Plague of London)과 관련이 있지만 실제로는 선페스트(bubonic plague)와 천연두가 유럽과 대서양 서쪽 지역에 재등장한 1721년의 역병을 다루는 데 공헌했다.
1721년에 선페스트가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발생했고, 사람들은 이를 종교적인 경건함과 억압적인 검역(격리)으로 맞이했다. 네덜란드 항구에서는 뱃짐들이 불태워졌고 선원들은 옷을 다 벗고 해변으로 헤엄쳐 가도록 강요받았다. 런던에서는 남해버블(South Sea Bubble)이라는 금융스캔들 때문에 수익이 떨어져 휘청거리는 상인들이 이와 유사한 격리조치에 동의하기를 꺼렸다. 위험은 ① 최근 수탈된 몇몇 왕의 삼림들에서 일어난 게릴라 형태의 운동 ② 런던의 산업화된 직공(織工)들에 의한 심각한 파업 ③ 도시 범죄의 급증 그리고 ④ 왕조에 저항해서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들이라는 네 가지 흐름이 교차하는 종합국면에서 발생했다.
이 불안정한 현상들은 노동계급의 무절제한 행동과 구빈원 설립의 필요성에 관한 광범위한 논쟁 한가운데서 발생했다. 그래서 정부는 런던 주교에게 상황의 엄중함을 강조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교는 디포를 고용해서 전염병의 관리를 특징짓는 정신적 공황 형성에 기여하는 글을 쓰게 했다.
한편, 같은 해에 대서양 건너편 마블헤드(Marblehead)와 보스턴에서 예방접종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면역학의 역사에서 질병통제를 통한 계급전쟁의 고전적인 사례를 제공한다. 이야기는 유명한 여류 문학자 메리 워틀리 몬태규(Lady Mary Wortley Montagu)에서 시작한다. 그녀는 남편이 대사로 재직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파도바의 가장 앞서가는 의과대학교에서 예방접종이 천연두에 대한 면역력을 낳는 효과를 공부했던 두 명의 그리스 의사에게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왔다. 그 의사들은 테살리아에 사는 그리스 여성농민들에서 접종법을 배웠다. 이렇듯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 또는 약초를 사용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민간요법이 ‘서양 의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것이다.
‘서양 의학’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뉴잉글랜드의 예방접종 논쟁에서 포착할 수 있다. 천연두는 상인들과 청교도들이 아메리카원주민들과 싸우는 전쟁에서 유용한 우군이었다. 세균전은 수탈과 집단학살의 선제조건이었다. 1763년 제프리 앰허스트(Lord Jeffery Amherst)는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를 적의 부족들 사이에 배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1720년대에 이 질병은 실질적인 위험으로서 지배층 엘리트에게 더 절실하게 다가올 우려가 있었다.
영국에서 예방접종을 재빨리 수용한 것은 천연두가 귀족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왕조의 위기를 초래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 앤 여왕의 아들이 천연두로 죽어서 하노버 왕가로 왕위가 넘어갔으며 합스부르크가 사람 하나가 천연두로 사망함으로써 스페인왕위계승 전쟁이 벌어졌다. 그래서 보일스톤 박사(Dr. Zabdiel Boylston)가 보스턴에 예방접종을 소개하자 코튼 매더가 선뜻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는데, (우리가 보았듯이) 이때에는 지배계급이 ‘과학을 위한 희생’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더는 오랜 사용으로 효과가 입증된 모세의 게임(Mosaic game)을 하며 “질병은 사실 인간의 죄에 신이 내리는 채찍질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채찍질’이 막상 그의 등을 위협했을 때 그 또한 ‘멘투’에게 의지했는데 그는 보수도 주지 않고 고용한 오네시모스(Onesimus)라는 이름의 아프리카인으로부터 접종을 알게 되었다. [‘Onesimus’는 기독교의 신약성서인 빌레몬서에 나오는 빌레몬의 노예이며 바울을 만난 후 개종한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접종은 두 가지 근거로 격렬하게 반대에 부딪혔다. 하나는 그것이 비싸고 따라서 부자만이 접종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면역력을 생성할지라도 감염을 예방하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자 코튼 매더의 집 창문으로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마블헤드에서는 어부들, 해상 노동자들 및 접종에 반대하는 주민들 사이에서 폭동(“이교도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이들은 접종을 장려하는 자들의 집을 무너뜨렸다.
이렇듯 1721년은 자본주의적인 전염병학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지배계급은 ‘우연한’ 죽음을 맞이할 위험이 있었고, 노동계급의 지식이 강탈되었으며, 전염병의 파괴성의 관리에 계급성이 부여되었고, 공황(panic)이 조성되었다. 그리하여 의미심장하게도 미시기생체의 역사가 거시기생(macroparasitism)이라는 계급 프로젝트에 가담하게 되었다. 지배계급은 병원과 의약품 교역의 제도적 기반시설과 함께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 내과 의사들 및 외과 의사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역병 일지』에서 사용된 방법은 투키디데스의 정치가 같은 분석도 아니었고, 모세의 마법을 부리는 귀신도 아니었으며, 보카치오의 태평한 즐거움도 아니었고, 집단학살을 촉구하는 청교도 지도자들의 열변도 아니었다. 디포는 ‘상식’에 호소하는, 상점 주인들이 갖고 있는 형태의 지식을 제시한다. 즉 ‘구술 역사’의 맥락에서 이야기된 사례들을 경험적으로 결합시켜 놓은 것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머리 가로젓기, 악어의 눈물, 동네 수다,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비난하는 말들이 많이 들어있다. 이런 방식은 믿을 수 있고 그럴듯한 논픽션, ‘인쇄하기 적합한 소식’인 양 가장한다. 왜일까?
전체 기획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했고 핵심에서는 반혁명적이었다. 거시기생체는 그 숙주들을 들들 갈아서 가난, 영양실조에 빠뜨리고 골수를 파괴함으로써 공격한다. 면역체계는 과도한 노동, 점점 더 많은 잉여가치의 추출로 인해 무너진다. 영국의 거시기생체는 한편으로 전통적인 겉모습을 하고 있었고(의회가 있는 입헌 군주제, 지주와 상인으로 구성된 지배계급), 다른 한편으로 이 관습적인 모습에 새로운 요소 두 가지를 더함으로써 1660년대에 어떤 강력한 변이를 이루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국제적인 움직임이다. 아일랜드, 아프리카, 벵골, 카리브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 먹이로 삼을 숙주들을 찾았다. 그 DNA는 귀족적이어서 뉴턴과 로크가 했던 것처럼 다양한 숙주들에 맞추어 특수하게 패턴화된 공격을 발전시켰다. 이 거시기생체는 파라오의 마법사들에 비유될 수 있으며, 아테네의 투키디데스와 피렌체의 보카치오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1665년 역병이 도는 동안 뉴턴은 거시기생체들에게 매개체들, 순환, 유동에 관하여 정보를 주는 미분법을 개발했다.
추가된 두 번째 요소는 나폴레옹이 ‘상회 주인’(shopkeeper)이라 불렀던 층, 역사가들이 ‘중간 부류’라 부르는 층, 맬서스(Thomas Malthus)가 ‘근면한’ 자들이나 ‘훌륭한’ 자들이라 불렀던 층, 수가 많고 점잖다는 층이었다. 이들은 숙주인 영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힘을 빨아먹었다. 이들은 막대기와 돈주머니로 묘사되어야 하는데, 그 활동이란 것이 세는 것과 강압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궁전이 아니라 집에서 살았다. 융통성이 없고 입술이 얇은 이들은 1640-1660년의 영국혁명에 의해 심하게 위협을 당했었다. 디포는 바로 이들을 위해 글을 썼다.
중세시대에 가난은 축복이었고 노동은 저주였다. 1660년 이후 거시기생체들은 이것을 역전시키고자 했다. 1665년의 역병 이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노동을 신성하게 보는 사고방식이 훌쩍 대세가 되었다.
디포는 거지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놀이, 게임, 발라드 부르기를 금지하며 축제모임을 금지하는 도시 당국의 명령을 기록하고, 오후 9시에 선술집·맥주집·커피하우스를 닫으라는 법령을 기록한다. 일하며 살기, 재미있게 보내기, 음식을 아주 많이 즐기기 또는 늦게 술마시기는 이렇듯 단성생식 신드롬(parthenogenetic syndrome)[모임의 금지로 인해서 개인들이 서로 격리되어 원자화된 현상]의 일부가 되었다.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질병의 매개체로 간주되었다. 교구의 조사관들, 야경꾼들 그리고 수색관들로 이루어진 경찰의 감시체제가 수립되었다. 장례식은 폐지되었고 죽은 자를 위한 어떤 모임도, 심지어는 예배시간의 위령기도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매장은 밤에만 허용되었다.
디포는 가난한 자들이 “모험적 행동”을 함으로써 역병을 자초한다고 믿었다. 그들이 “언제나처럼 앞날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분별없고 무절제하게”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공장에서의 근면한 노동습관(시간엄수, 규칙성, 절약 그리고 복종)이 면역력을 준다는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아픈 자들을 돌보며 감염된 사람들을 격리시설로 옮기고 죽은 자들을 매장할 때 보이는 그들의 ‘무자비한 용기’는 가난한 자들이 왜 천연두에 걸리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특히 “어마어마한 수가 간병 일로 분주했”던 여성들이 “가장 무모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필사적”이었다.
디포는 감염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위안을 주는 공동체들을 공격한다. 더 나아가—이것이 섬뜩한 부분인데—그는 계급 규율 유지에 역병이 유용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전에 말했듯이 시장과 재판관들의 훌륭한 관리가 분노와 절망에 찬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폭도가 되어 날뛰지 못하게, 즉 빈자들이 부자들을 약탈하지 못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분명히 말하는데, 시체들을 실은 마차가 더 많이 기여했다.” 이것이 유행병이 사회적 사건만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물이 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첫 번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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