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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강좌 안내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여기저기서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양한 ‘전환의 실천 사례’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환의 철학, 비전, 전략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리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해야 할 때입니다. 대전환의 길을 내고 있는 생태주의운동, 커먼즈운동, 탈성장운동 등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적 함의를 찾는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함께 전환의 길을 내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11월 11일 : 세계관의 전환 – 유기쁨(서울대학교 강사)

11월 18일 :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운동 – 정남영(독립연구자)

11월 25일 :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 운동 –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12월 2일 : 삶의 지향으로서의 탈성장 – 남미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12월 9일 : 돌봄과 살림의 정치 경제 –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12월 16일 : 전환의 기지로서의 마을 – 박복선(전환교육연구소)

 

일시

11월 11일 ~ 12월 16일 매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

 

참여 방법

줌(신청자에게 참여 주소를 보내드립니다) 

 

참가비

50,000원

국민 543001-01-341365(교육공동체 벗)으로 입금

 

문의

010-6231-3681 전환교육연구소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발표문
  • 설명 : 아래는 2018년 5월 2일 경의선공유지에서 열렸던 <2018 커먼즈네트워크 워크숍>의 기조발제문에 조금 더 손을 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출처 표시가 잘못된 주석 하나를 바로잡았고 본문과 주석에 몇 대목을 추가적으로 삽입했다. 추가된 부분은 전체 글의 흐름과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종의 방주로 간주되면 된다.

    말이 기조발제지 사실은 그 자리에 손님으로 가면서 맡은 것이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들이 초청한 것이라서 커먼즈 운동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항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작성했으나 상당히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커먼즈 운동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청중이 당연히 있었고 이 분들은 기조발제를 듣고 ‘뭔 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을 전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해서 많은 내용을 주석으로 내려서 나중에 텍스트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본문도 다 소화 못할까봐 읽을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미리 생각해서 갔는데 그나마 그렇게 준비한 부분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더 늘리더라도 여기에 올리면 누구라도 이 발제문을 찬찬히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먼즈 운동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선 이 블로그에 최근에 올려진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의 가장 최근의 대담을 참조하고 이에 덧붙여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49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안근대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커먼즈 운동을 포함한 여러 운동들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인데—이란 ‘역근세수’와 ‘환골탈태’의 과정이 몸과 정신에서 공히 일어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의 몸과 정신의 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온갖 근대적 물신들(굳어진 사고·감정·행동의 습관들)을 씻어내야 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록 조그만 것일지라도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유형의 습관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쉬운 말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근대적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신들을 싹 씻어낸 후에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11장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되기’의 소박함으로, 혹은 “풀과 순수한 물 조금”의 단순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파일에서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 안의 주석 두 개가 누락되었다. 한글파일을 그대로 전환한 pdf 파일을 아래 첨부한다.

    Download (커먼즈-운동과-삶정치-발제문수정확대판.pdf, PDF)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커먼즈 운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커먼즈 운동을 조금 소개해왔을 뿐 이 운동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저로서는 커먼즈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을 듯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미’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의 이론에 비추어 보는 것일 듯합니다. 제가 삶정치론을 나름대로 공부하며 다듬다가 커먼즈 운동을 알게 되었고((네그리·하트의 저작에서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게 되었으며, 둘째 번역서인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번역하면서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데이빗 볼리어(David Bolier)를, 그리고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던 공부와의 연관성 때문에 커먼즈 운동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커먼즈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커먼즈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삶정치론은 탈근대(여기서는 시기를 가리키며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68년 혁명 이후, 혹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난 이후를 말합니다)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즉 한편으로는 소외의 극단적 심화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일반화 가능성을 낳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둡니다. 소외의 극단적 심화란 삶권력(biopower)의 등장—가령 자본이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저항의 일반화란 이렇게 대립구도가 ‘권력 대 권력’의 구도((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구도로서 홉스 이후 거의 모든 정치학은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공식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가 아니라 ‘삶 대 삶권력’이 된 상황에서는 삶이 있는 모든 곳에 저항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소외의 문제를 가장 먼저 명시적으로 제기한 것은 맑스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근대주의자들(국가자본주의자들)로 전환되면서((‘소외’를 제시할 때의 맑스를 초기의 맑스, 즉 아직 미숙한 맑스로 보는 태도가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미숙하지 않다고 평가받을 여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한 일 가운데에는 자본의 논리와 관점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도 속합니다. 가령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레닌과 스위지(Paul Sweez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자본가들 사이의 내적 동학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노동자들의 불가피한 봉기로서 예측하는 것은 그저 이 동학의 설명되지 않은 부산물로서만 나타난다.”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p.191. 이 저작에는 이런 취지의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묻혀 버립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근대화 경쟁을 하는 구도(‘냉전’)는 바로 이러한 전환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성숙기의 맑스가 소외의 문제를 잊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소외’라는 제목이 딸린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내용상으로는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생산의 원래적 조건들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성들 사이의 자연적 과정을 통한 인간의 수의 점증하는 수의 재생산은― 이 재생산은 일면으로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전유로 나타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형성으로서, 객체들의 주체적 목적에의 종속으로 나타난다. 주체적 활동의 결과들과 저장고들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래 그 자체가 생산물이 될 수는 없다. 즉 생산의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있는 활동적인 인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 사이의 통일이 아니라, 따라서 자연의 전유가 아니라, 이 인간실존의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적 실존 사이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489. 이 외에 『자본론』 3권의 이곳저곳에서도 소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소외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성숙기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이는 곧 소외의 정점입니다—에서 자본주의를 즉 소외를 넘어서는 조건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자본의 한계를 말하는 여러 대목이 있는데 한 대목만 들어봅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Grundrisse, p. 749.))

맑스의 진의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소외’의 문제를 파묻어버린 것과는 달리, 20세기 중반부터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온 일련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푸꼬의 삶권력/삶정치론((푸꼬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실제 혹은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 달리 말하자면 권력을 사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파훼했습니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27.)), 들뢰즈·가따리의 삶의 철학((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의 철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생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발제의 편의상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들뢰즈·가따리가 ‘삶’(vie, life)라는 말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일단 쓰는 경우에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재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은 ‘삶의 평면’(a plane of life)과 동의어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대목은 그들의 가장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에도 몇 군데 나오지만짧지만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몇 페이지로 압축한 글 「내재성 : 하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이 계보가 푸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앞에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가 있습니다. ‘삶권력’, ‘삶정치’라는 말은 푸꼬가 만든 말인데, 푸꼬는 양자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네그리·하트에게서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립되는 ‘삶의 정치’라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발제문에서 ‘삶정치’는 기본적으로 네그리·하트의 사용에 따릅니다.)) 이 계보는 자본주의를 ‘삶권력’—삶을 장악한 권력—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소외의 문제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삶의 힘(삶의 활력)을 저항의 힘으로서 새로이 부각시킵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경우 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비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권력(자본가가 권력)에 권력(노동자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추구되었는데, 이제 삶정치에서는 ‘삶 대 권력’이 기본적인 적대관계를 구성합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권력이 삶을 목표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때 권력에의 저항은 이미 삶의 편에 서며 삶을 권력에 대립시킨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통제하는 데 몰두하는 체제에 대립시켜지게 된다. / (···) 외부로부터 오는 힘은 푸꼬의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활력주의(vitalism)가 아니던가? 삶은 권력에 대항하는 이 능력이 아니던가? ��병원의 탄생��부터 줄곧 푸꼬는, 삶을 죽음에 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활력주의를 창안한 비샤(Bichat)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에게만이 아니라 푸꼬에게도 인간의 죽음에 대항하는 힘들과 기능들의 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일단 인간적 훈육으로부터 해방되면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푸꼬는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Gilles Deleuze, Foucault, p.92. (인용자의 강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삶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놓겠습니다.((영어로든 대부분의 유럽어로든 양자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양자를 ‘bios’(삶)와 ‘zoe’(생명)라는 희랍어로 구분합니다.)) 삶은 존재론적 원리이자 힘(활력)입니다.((이기묘합(理氣妙合)입니다.)) 생명은 에고로서의 개체가 활력을 받아서 자신의 생물학적 실존을 유지하는 힘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개체들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주체성을 구성하고 그로써 하나의 온전하고 뚜렷한 삶의 형태를 개화시키는 힘입니다. 개체의 관점에서는 생명은 출발점이고 삶은 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령 D. H. 로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의의가 아니다.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이것이 최고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운명이다. 즉 미지의 것의 가장자리로 가서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이.((Lawrence. D. H.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441. 들뢰즈·가따리는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체화인 ‘개별 주체로의 개체화’와 ‘삶의 개체화’를 맞세운 바 있습니다. “··· 삶의 개체화는 주체(이는 삶의 개체화를 이끌거나 지탱해준다)의 개체화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평면’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공재의 평면 혹은 각개성(haecceities)들이 모여서 이루는 평면이다. 이는 오직 속도와 정동만을 안다. 후자의 경우는 형식들, 질료들, 주체들로 구성되는 전혀 다른 평면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261.))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의 차원에서의 일이며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은 삶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삶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영원’의 차원에 속합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여 더 설명하자면, 생명은 ‘코나투스’(conatus)에 해당하며, 삶은 ‘코나투스’에서 출발하여 ‘욕구’(appetitus), ‘욕망’(cupiditas)을 거쳐 ‘사랑’(amore,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코나투스(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고, ‘욕구’(appetitus)는 코나투스를 정신과 몸 양자와 연관시킨 것이며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구’입니다. ‘사랑’(amore)은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는지를 알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사유능력(행동능력)의 증가가 가져오는 정동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슬픔’입니다.))))으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 해당합니다. ‘코나투스’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듯이, 생명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삶은 아닙니다.((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이 출발점의 확보(생계수단의 획득)를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 동안 노동력을 팔아도 출발점에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곳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삶은 개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삶형태의 개화—가 목적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① 기존의 삶형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② 새로운 삶형태를 만개((저는 ‘만개’의 한자어 ‘滿開’에 ‘萬開’를 중첩시키고 싶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형태로 만개하다’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시켜야 합니다. 삶정치론은 이 두 가지를 해내는 힘, 이 삶의 힘을 ‘활력’이라고 부르며 권력에 대립시킵니다. 영어를 제외하고 활력과 권력을 따로 부르는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있습니다.

 

권력

활력

라틴어

potestas

potentia

불어

pouvoir

puissance

독일어

Macht

Vermögen

스페인어

poder

potencia

이탈리아어

potere

potenza

영어

power

power

활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이해는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힘은 존재론적으로 본원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그 다음에 옵니다. 권력은 이 달라지는 힘이 발휘되지 않도록, 즉 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 힘입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라는 푸꼬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Vol. 8, NO. 4 (Summer, 1982), P.790.)) 그런데 어떻게 막는 것일까요? 죽임으로써? 죽이는 권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합니다.((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의 경우에는 혹시 모르기에 “일반적으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철학』이라는 책에서 생명을 잃는 ‘외적 죽음’과는 다른 ‘내적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권력에 의해 노예화된 삶을 가리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이것이 바로 ‘내적 죽음’입니다. 현대의 삶권력은 바로 이 ‘내적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양산합니다.)) 그러나 ‘죽임’은 삶권력의 발휘 양태가 아닙니다.((죽이는 것은 개체(에고)의 생명을 취함으로써 그 개체가 하나의 삶형태를 만개할 가능성을 아예 자르는 것인데, 해당 개체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원적인 삶의 활력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활력이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활력이 현실화(육화)되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을 각각 ‘삶의 장’과 ‘현실화의 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삶의 장은 오직 변화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은 활력이 형태를 부여받아 육화되는 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에서 ‘지층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납니다. 지층화한 위계(수직적), 인과(수평적), 틀(3차원적)을 이루는 관계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정적으로 존속하면서 활력이 새로운 형태를 띠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형태로 반복되게 하는 것입니다.((A Thousand Plateaus, p.335.)) 이 지층화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삶권력입니다.

삶권력으로서의 자본은 삶의 활력이 산출하는 차이소(Δ, ‘삶의 잉여가치’ 혹은 ‘초과’((‘삶의 잉여가치’는 들뢰즈·가따리의 용어이고 ‘초과’는 네그리의 용어입니다.)))를 수량화하여 ‘가격’(교환가치)의 형태로 ‘경제’ 체계로 끌어들입니다. 수량화는 척도에의 종속을 전제하며 척도에의 종속은 지층화의 한 양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의 수량화가 필연적으로 (사용가치)의 동질화를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동질화를 동반하는 수량화는 활력의 늘 달라지는 힘을 덮고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달라지는 힘은 현실성의 층에서는 질적인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획이 계속되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공고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성)이 번성하게 됩니다(([추가]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욕망과 사고방식이 자본이 지향하는 방향에 부합하는 주체성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생산·재생산합니다.(증식/축적)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규칙—예컨대 가게에 들어가면 특정 액수의 돈을 물건과 바꾸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몸에 배고 정신에 뱁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동반하는 가치의 수량화(가격화)와 함께 개인들을 사적 소유자이자 교환자(노동자+소비자)로 정착시킵니다. 이는 개인들에 잠재하는 특이한 활력들을 (하이데거의 용어를 끌어다 쓰자면)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된 개인들은 협동과 공감의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경쟁과 배제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의외로 악영향이 큽니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인 많은 좌파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론과 방향이 더 옳다면서) 경쟁해온 것을 보세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서는 이렇듯 ‘배제적 이접’(들뢰즈·가따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활력들을 가둔 울타리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으니까요.[/추가])). 이로써 삶권력으로서 자본이 삶을 포섭하는 작업이 일정하게 완료되는 것입니다.((『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유명한 마쑤미(Brian Massumi)도 최근에 나온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에서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하는 일이 이 Δ를 측정 가능한 이윤/가격의 형태로 포획하는 것으로 봅니다.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

삶정치론의 목표는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단 ‘삶권력으로부터’라는 점에서 삶정치론은 커먼즈 운동과 명시적으로 상통합니다. 커먼즈 운동 또한 (오스트롬의 전통적인 공유지 연구에서부터) ‘국가와 시장(자본) 외부 혹은 너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통적인 공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 삶의 해방의 차원에서도 양자가 상통하는지는 삶정치론이 어떤 구체적 기획을 가지는지를 더 알아보고 커먼즈 운동의 구체적 기획과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삶의 해방’이란 말이 아직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정치론은 이론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하지는 못하며 반대로 커먼즈 운동은 실천적 운동이기에 그 운동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삶정치론의 기획에서 삶이 만개에 이르는 과정은 둘로 나뉩니다. ① 우선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삶권력이 워낙 삶 깊숙이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탈근대에 일어난 자본의 변형은 생산하는 다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삶권력의 포획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일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② 삶권력이 장악했던 그 자리(현실화의 장)에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두 단계 혹은 측면에 상응하여 네그리는 활력을 ‘가난’의 힘과 ‘사랑’의 힘으로 나눕니다. 가난은 권력을 텅 비운 상태(제로 지층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활력의

씨알이 잠재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이 씨알이 활력으로 전개되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삶정치론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형태로 더 구체화한 것이 ‘특이성들의 다중’, ‘공통적인 것’(the common) 그리고 ‘민주주의’ 3자의 관계입니다.

삶정치론의 주체는 ‘다중’입니다.((사실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성 혹은 주체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푸꼬에서 네그리에 이르는 삶정치론자들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양자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는 자본의 생산방식에 일어난 변형(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혹은 삶정치적 생산)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네그리는 그 이전에는 ‘전문 노동자’, ‘대중노동자’, ‘사회적 노동자’의 순서로 이러한 주체 형상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중 이전의 대표적 변혁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위치의 동일함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면, 다중은 자본에 고용되든 아니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서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루어집니다. 다중은 경계가 확정된 어떤 고정된 집단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다중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와 무관합니다.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다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만들고 나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다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다중 만들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다중의 형성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촛불’다중은 한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정된 형태로 남는 식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성들의 다중’ 즉 특이성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이 바로 자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개인’도 근대의 산물—커먼즈를 파괴한 그 근대의 산물—입니다. 커먼즈를 상실한 개별 인간들이 바로 ‘개인’들입니다.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민중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산산이 흩어져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발전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개인’은 “권력의 최초의 효과들 중 하나”입니다.((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5-1976, Translated by David Macey (New York: Picador, 2003) pp.29-30. 이 앞에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29.)) 이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쳐진(종획된) 정신과 몸의 구현물이며((이런 의미에서 소외의 한 양태입니다.)) 사적 소유의 주체입니다. 이제 ‘개인’은 ‘일자’가 되며 ‘정체성’에 정착합니다.((이렇게 개인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관입니다.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도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인간/자연으로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나누면 반드시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남/녀, 어른/아이, 중심/주변 등등의 나눔 짝들을 보세요.))

삶정치론은 여러 특이한 힘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공재하며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리로서의 개인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특이한 힘이란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이 그때그때 다른 것을 각개성(haecceity)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활력의 크기는 이 공재하는 힘들이 얼마나 협동적이냐에 따릅니다. 각 힘들의 Δ들은 사실 서로 상쇄될 수도 있는데 협동의 방식으로 네트워킹되는 경우에는 활력의 상호증가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공재하는 특이한 힘들은 각각 외부의 다른 힘들과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형태의 다중 만들기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어떤 커머너가 여러 커먼즈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핵심은 개인보다는 특이한 힘들 그것들의 협동적 관계입니다. 즉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힘이 그를 거쳐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다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다중’을 말하면 근대적 개인관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중을 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고정된 집단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다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이성, 특이한 활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시선의 일부가 늘 예의 ‘삶의 장’에 두어져 있고 거기서 활력을 받아오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다른 운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커먼즈 운동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필요상 한 커먼즈 내의 커머너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특이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장’에 접속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것이 무엇이든)에 그치는 운동이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커먼즈 운동과 연관된 이론가나 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궁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데이빗 볼리어의 Think Like a Commoner(한국어판 배수현 옮김『공유인으로 사고하라』갈무리 2015)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에 소개되는 베버(Andreas Weber)의 연구 —이는 ‘Enlivenment’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커머너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삶의 장’에 접속하는 훈련을 하는 것, 즉 사물을 포함한 주위세계와의 동지의식을 양성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 특이성(singularity)은 스피노자에게서 와서 푸꼬((푸꼬의 경우에는 가령 ‘다양체론’(‘모든 사물은 다양체이다’)이 특이성에 대한 인식에 속합니다. 믈론 더 파고 들어가면 이뿐만이 아니지만요.)), 들뢰즈·가따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네그리·하트에게 이어집니다.((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으로서의 특이성도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singularitas’, ‘singularity’, ‘singularité’, ‘특이성’ 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특이성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발제문에 거론한 철학자들 이전에 영문학 전통에서 ‘특이성’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들뢰즈 사유의 한 원천인 (소설가) 로렌스가 말하는 ‘individuality’는 그 내용은 특이성에 해당합니다.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identity’와 ‘selfhood’— 저는 각각 ‘열린 자아’, ‘닫힌 자아’라고 옮깁니다—가운데 전자는 특이성들에 열린 자아이고 후자는 하나로 단일하게 종획되어 닫힌 자아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문화전통에도 특이성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존재할 것입니다.)) 특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이며 이는 인간의 경우 ‘인격’으로 구현됩니다. 개체를 특이성들의 ‘공재’인 다양체로 보지 않고 단일하게 통일된 상태로 보는 것이 ‘정체성’, ‘인격’입니다.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관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양체이니까요.((‘인격’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을 보려면 http://minamjah.tistory.com/181?category=572143를 참조하세요. 『99개의 테제』에서 마쑤미는 ‘인격화’(personalization)을 개인의 활력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양상의 하나로 봅니다.)) [/추가]

그런데 특이성들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이루어 모여 있더라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조건으로 해서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것이 다시 갱신된 다중의 새로운 활동 조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통적인 것이 갱신되고 이와 함께 다중도 갱신됩니다.((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때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는 정동이나 제스처처럼 대부분 공통적이며, 만일 사적이거나 공적인 것이 된다면—즉 단어·어구·품사의 많은 부분이 사적 소유나 공적 권위에 종속된다면—표현·창조·소통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공통체』(사월의책 2014) 17-18면.))

공통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삶정치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네그리·하트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귀족제입니다. 선출된 소수의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처럼 통치의 한 방식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이 통치라면 ‘자기통치’입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일반의지’(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다중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의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절대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과연 다중을 구성하는 모두가 자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네그리와 하트는 “러시아 민중은 작업장에서 종속과 감독 그리고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도록 훈련받았으며, 직장에 상사가 있기에 정치에서도 상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견해((『공통체』 256면.))를 소개한 후에 ① 자본주의의 기술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생산의 방식— 삶정치적 생산—이 다중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② 혹시 아직 훈련이 덜 되었더라도 민주주의의 훈련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는 곳이며 민주주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커먼즈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삶정치론의 민주주의론은 그 복잡한 디테일을 덜고 나면 커먼즈의 민주주의와 바로 통하는 것입니다.((물론 사회 전체에는 아직 ‘지도층’이 건재합니다. 따라서 삶정치론이 비록 지도자의 부재를 지향할지라도 실제 현실에 지도자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를 향한 경향을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집회』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향을 ‘전략과 전술의 전도’에서 읽어냅니다. 과거에는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지난 촛불에서 일정한 만큼 목격했던 바입니다. 전체적인 방향 즉 전략을 결정한 것은 촛불다중이지 지도부들이 아닙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강한 친화성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커먼즈(commons)의 어휘상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표면상의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옮긴이] 이는 커먼즈 역사가인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말이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 p.5.))

여기서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란 삶정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이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부단히 공통적인 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통하고, “프로토콜”은 참여자 모두에 의한 거버넌스의 규칙이라는 점에서 다중의 민주주의와 통하며, “자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먼즈나 공통적인 것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공통재(common goods)를 포함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고 주체적 활동의 측면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커머너’(commoner)는 다중에 속한 한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네그리·하트도 『선언』(Declaration, 2012)에서 ‘커머너’와 ‘커머닝’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정치론에 들어와있는 용어처럼 설명합니다. 커머너의 커머닝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으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New York: Argo Navis Author Services, 2012). Declaration, p. 105. 이 대목은 조금 길지만 읽을 가치가 있기에 뒤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에 바라는 바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는 초기의 태도에서 진전된 것입니다. 2004년에 네그리·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용어를 피하고 ‘공통적인 것’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커먼즈라고 부르기를 꺼리는데, 커먼즈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적인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더 어색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그 철학적 내용을 더 부각시키며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한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2004) p.xv.))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9년이고 P2P재단은 2005년에 창립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블로그는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2004년의 네그리·하트로서는 커먼즈를 전자본주의적인 공유지 이외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커먼즈가 전통적인 공유지의 협소함—이것을 이유로 오스트롬의 커먼즈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에서 시원하게 벗어난 것은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입니다. 이로써 커먼즈 운동에 전지구적 차원이 부여되고, 이는 DG-ML(Design globally, manufacture locally)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P2P 생산양식의 더 구체화인 형태)을 다듬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점도 삶정치론과 묘하게 통합니다. 네그리·하트가 다듬어낸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나중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의 기술적 변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변형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커먼즈 운동이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는 다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개념으로서 다듬어지는 계기와 동일합니다.

흥미롭게도 네그리·하트는 가장 최근의 책 『집회』(Assembly, 2017)에서 ‘공유지의 비극’론과 함께 그것을 반박하는 오스트롬을 명확하게 거론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 96. 이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부의 사용과 부에의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통적인 것의 현대적 적합성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저작을 쓴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바르게도 거버넌스와 제도의 필요에 초점을 둔다. 오스트롬은 모든 부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황폐해지지 않게 보존되려면 공적 재산이 되거나 사유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공유지의 비극’류의 주장들 모두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녀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s)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이 관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는 반대한다. 집단적인 형태의 자주관리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규칙이 고안되고 수정되며, 또한 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시행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의 재산 배치.’”))

둘째 문장의 경우 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이후 커먼즈 운동이 규모의 한계를 부수고 발전하고 있는 지금 그 초석을 놓았을 뿐인 오스트롬(과 그녀의 연구의 대상인 전통적인 형태의 커먼즈)을 놓고 저렇게 비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커먼즈는 다중처럼 언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볼리어가 말했듯이 “커먼즈는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접근, 이용, 장기적 돌봄을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2014), p. 128.)) 그리고 그 규모는 지역 너머, 일국 너머, 대륙 너머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바우엔스 등의 커먼즈 활동가들 또한 네그리·하트처럼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의 포부가 네그리·하트의 포부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집회』에서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대목((Assembly, 15장 2절))과 「커먼즈 이행과 P2P 입문」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나중에 더 확장되어 http://commonstransition.org/commons-transition-p2p-primer/에 올려져 있습니다.)), 2017년 3월)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커먼즈의 (정치적) 확대를 말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움직임을 말한 것이므로 일단 정치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표에는 여기에 경제 영역의 유사성도 추가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삶정치

커먼즈 운동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작은 규모로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운동단체들, 엑서더스

커먼즈의 생산공동체 자체

국가와의 관계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가령, 민중의 ‘하인’이 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파트너 국가론 : 생산공동체를 국가의 법의 틀에서 합법화하는 비영리 지원단체들의 확장1)주석누락

(참고) 자본과의 관계

다중의 기업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헤게모니 전략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2)주석누락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경제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의회’(Assembly of the Commons)가 구상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국 사회의 범위 너머로 확대될 수 있다.

이 표를 보면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친화성이 그 차이를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저 표에서 ‘예시적 정치’라는 항목과 관련해서일 것입니다. 표에서 보듯이 네그리·하트는 운동단체들이 자체 내에서 수립하는 민주주의에 ‘예시적 정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한국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운동단체들의 경우에는 자체 내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촛불 다중의 수평성은 다중 자체가 이룬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다중이 막 형성되던 초기에 특정 운동단체가 지도하려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해외의 경우 1999년 씨애틀 이후에는 특히 소문자 ‘a’의 아나키스트들(anarchists)이 절차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newleftreview.org/II/13/david-graeber-the-new-anarchists 참조.))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 정치’는 필요하지만 예의 ‘세 얼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의 정치를 ‘예시적’이라고 부를 때 이는 단지 필요한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미래의 예시적 현존, 따라서 확대되어야 할 씨알로 보는 것입니다.

커먼즈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제의 예시적 형태들이 이미 존재한다. 커머너들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며 이미 커머닝을 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커먼즈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Michel Bauwens, Vasilis Kostakis, Stacco Troncoso, Ann Marie Utratel, “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p.47.))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고정된 조직화 형태를 모델로서 말하지 않고 미지의 상태로 두는 삶정치론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의 발명에 더 강조점을 둔다면, 커먼즈 운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조직 혹은 공동체 형태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고 말입니다.

[추가]

커먼즈 운동은 원리상으로 자본 너머를 지향하지만, 현재 자본에 ‘연루’된 현실을 무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쑤미가 「99개의 테제」에서 ‘창조적 이중성’(creative duplicity)이라고 부른 것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자본 너머’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깨우친다고 해서 바로 자본 너머로 나가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자본주의에 몸을 둔 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굳이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창조적 이중성’입니다.((마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루를 한탄하지 말고 즐기라. 교리상의 용감함으로 남을 비판하며 지배하지 말라. 창조적으로 유희의 장에 내려가 몸을 더럽히라.”(테제60, 주석c))) (깨우침과 그 이후의 실천을 합해서 ‘돈오점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점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돈오’의 비타협성을 고수하다가 활력을 탕진하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깨우침이고 뭐고 없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을 넘어설 만큼의 활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이고 협동하여 오랫동안 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점수’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슬기롭게 운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커먼즈 운동에서는 이러한 ‘점수’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성적 자본’ 혹은 ‘친구로서의 자본’은 시장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돈을 벌지만, 그 돈을 커먼즈의 축적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트너국가’론은 국가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가능하다면 커먼즈 운동을 돕는 곳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선보인 도시자치주의는 정당정치와의 창조적 관계를 실행합니다. 정당정치를 정당을 넘어선 연합의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점수’의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계속 창출될 것입니다.((스페인의 도시 커먼즈 운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대담으로 http://minamjah.tistory.com/233 참조.))

[/추가]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대안근대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형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커먼즈 운동가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맑스가 이미 한 말이 있습니다. 맑스는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 557.))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 혹은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출처 수정함]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이것이 맑스가 보는 커먼즈입니다. 사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그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을 넘어서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들 것이라고 추론해냄으로써 네그리에게 큰 영감을 준 바 있습니다.((네그리는 한때 감옥에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는데,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이 맑스와 스피노자의 저작들입니다. 네그리는 양자 모두 근대 속의 탈근대(나중에는 ‘대안근대’)로 꼽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맑스가—그에게 두 측면이 공존함으로 인해서—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네그리·하트가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에 상응하여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다듬어낸 것과 연관되며, 다른 한 측면은 커먼즈 운동의 새로운 부활과 연관됩니다.)

지금은 맑스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매우 안타까운데요, 사실 (삶권력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지만) 맑스가 가장 먼저 자본과 국가를 삶권력으로서 포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맑스를 잘 읽으면, 자본주의는 (아무리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사명((맑스는 자본의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인정합니다. [추가]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은 ··· 사물이 스스로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종식된 단계에 이르게 되자마자 완수”됩니다. Grundrisse, p.325.[/추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맑스의 자본 연구는 바로 이 ‘극복’을 위한 준비에 다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은 만개라는 자기목적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유로운 조건이라면 각 개인이나 집단이 이 출발조건에서 만개를 향해 나아가는 만큼이 그 성취입니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라도 모두가 만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억압적인 조건에서도 삶을 만개시키는 데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소수나 특출한 소수의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조건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 구성의 원칙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 조건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협소함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출발조건을 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 언론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인 양 위장했습니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출발조건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워킹머신과 같습니다. 열심히 걷고 뛰어야 그 위에 간신히 서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뒤로 쳐지고 맙니다. 출발조건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의 행태도 출발조건에 갇혀 있습니다. 만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내일의 출발조건, 내년의 출발조건, 후손의 출발조건을 확보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의 출발조건을 미리 확보하려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어리석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조건이 삶의 감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유리합니다. 한편으로는 희소성의 원칙에 갇히지 않는 부를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만)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환경의 실제적 경고도 존재합니다. 커먼즈 운동은 자급운동(출발점의 확보)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만개를 향한 운동, 진정한 삶의 가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정치론은 좋은 동지요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록1]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커머너’와 ‘커머닝’

중세 잉글랜드에서 커머너(commoner)는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세 신분―싸우는 계층(귀족), 기도하는 계층(성직자), 일하는 계층(커머너)―의 하나였다. 영국 등지에서 근대 영어의 용법에 보존된 ‘커머너’라는 용어의 의미[우리말로 ‘평민’]는 작위(爵位) 등의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 즉 보통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택하는 ‘커머너’라는 용어는 중세 잉글랜드로 소급되는 생산적 성격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커머너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기 때문에 ‘커먼’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공통적인 것에 입각하여 일하기 때문에 ‘커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빵 굽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방아 돌리는 사람 같이 직업을 가리키는 말을 이해하듯이 ‘커머너’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듯이, 커머너는 커머닝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을 만든다.

따라서 커머너는 비범한 과제―사유 재산을 모든 이의 접근과 향유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일,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되는 공적 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경우마다 공통의 부를 민주적 참여를 통하여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지속시키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하는 일―를 성취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렇다면 커머너의 과제는 빈자들이 자급할 수 있도록 들판과 강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음악,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수단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이 과제를 성취할 선결 조건들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사회적 유대를 창출할 능력, 특이성들이 차이를 통해 소통할 능력, 공포가 없는 상태가 가져다는 주는 진정한 안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커머너는 구성적 참여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개방적 공유에 기반을 둔 민주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고 필요한 주체성이다.

‘커머닝’의 행동은 공유된 부에의 접근과 자기관리만을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을 향하기도 해야 한다. 커머너는 투쟁하는 광범하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학생들, 노동자들,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 빈민, 젠더 및 인종과 관련된 종속과 싸우는 사람들 등―사이의 ‘연합’(alliances)를 창출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열거를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적 현실화의 실천으로서 형성되는 ‘연대’(coalition)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연대’는 다양한 집단들이 전략·전술상 함께하면서도 그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지어 분리된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의 ‘연합’은 전적으로 이와 다르다. 물론 커머닝은 정체성들((여기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라고 읽으면 됩니다.))이 부정되어 모두가 자신들이 밑바탕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쟁과정에서는 상이한 사회적 집단들이 특이성들로서 상호작용하며 상호교류에 의하여 계몽되고 고취되고 변형된다. 그들은 투쟁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저주파로 서로 말한다.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pp. 105-107 (밑줄은 인용자의 것)

[부록2]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물질대사의 단절’(맑스)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복지국가

선(先)분배(pre-distribution)—커먼즈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계몽주의적 이성/기능적 합리성

삶정치적 이성/공통적 감각

노동시간

삶의 시간

측정/척도

탈측정/척도 너머

이윤으로서의 잉여가치(경제적 잉여가치)

삻의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주체성

자유로운 주체성: 커머너, 다중

삶의 시간은 생계수단을 버는 시간

삶의 시간은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시간

인격, 합리적 개인

특이성

추출 대상으로서의 자연

동지로서의 자연

* 알림 : 몇 사람이 모여서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론에 대한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하는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minamjah.tistory.com/)의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 섹션의 글들을 가져오고 그 뒤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현재 제 블로그에도 저 말고도 다른 역자들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아직 구축 중입니다. 시간을 많이 못 내서(아니면 게을러서?) 아직 글들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URL은 http://commonstrans.net/입니다.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 운동


  • 저자  :  정남영
  • 설명 : 2017년 5월 20일에 있었던 한국비평이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입니다. 이 발표 원고는 완결된 글이 아니라, 시간 절약을 위해 그대로 죽 읽으려고 작성된 스크립트 같은 글입니다. (물론 즉흥적인 생략·변경·보완은 가능하겠지요.) 각주에 넣은 긴 인용들은 발제 시간에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읽는 이가 참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삶형태를 위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 새로운 삶형태를 ‘대안근대’라는 이름과 연관시킨다면 (다른 여러 이름들이 가능합니다) ‘근대’가 어떤 형태의 삶형태를 나타내는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는 가장 간결하게는 자본(시장)과 국가의 이두체제가 지배하는 삶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안근대로의 이행이란 자본과 국가가 부과하는 삶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현하기에는 매우 힘든 엄청난 과제입니다. 근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극히 작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자본과 국가가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의 과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물론 옛 토대 위에서의 발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토대 자체의 발전 또한 있었다. 이 토대 자체의 최고의 발전(그 자기변형의 정점에서 피는 꽃, 그러나 항상 이 토대, 이 식물의 꽃이며, 따라서 꽃이 핀 후에는 그 결과로 시든다)은 그 토대 자체가 생산력의 최고의 발전과, 따라서 개인들의 가장 풍부한 발전과 결합될 수 있는 형태로 완결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더 이상의 발전은 쇠퇴로서 나타나며 새 토대에서 새 발전이 시작되는 것이다.((Marx, Karl,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540-41. 앞으로 이 책의 제목은 GR로 줄입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역사적으로 여러 단계의 변형을 거친 것이 사실이지만,((맑스도 이 저작의 여러 곳에서 장벽을 계속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의 능력을 지적합니다.)) 이 이름을 더는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존재하며 이 변형의 조건을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가 만들어놓는다는 것이 맑스의 요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이런 취지의 대목은 이 저작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맑스는 “새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GR, p. 706. 이 저작에서 ‘사회적 개인’이 등장하는 다른 대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들을 지배하는 자립적인 권력이 된 개인들의 사회적 상호관계는 자연력이나 우연으로,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이해되든 그 출발점이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의 필연적 결과이다.”(197) “일단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면 생산과 부의 초석이 되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지출되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에 의한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회적 존재인 덕분에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능력 즉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GR, 706) “일단 그렇게 되면, 그리하여 처분 가능한 시간이 대립적 실존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한편으로  필요노동 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를 척도로 삼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매우 급속히 이루어져서 (비록 이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적으로 마련되지만) 모두의 처분 가능한 시간이 증가할 것이다. 실질적 부는 모든 개인들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GR,708)))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형상의 변화를 줄곧 추적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입니다.(나중에는 하트와 함께) 네그리는 러시아 혁명기의 ‘전문적 노동자’에서 뉴딜 시기의 ‘대중적 노동자’―이 당시를 그는 ‘계획자 국가’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를 거쳐 ‘사회적 노동자’(자본이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된 시기) 형상을 포착해 냈으며, 정보혁명 이후 이른바 탈근대에서는 (개별적으로는 새로이 발생한 ‘인지 노동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가 생산의 네트워크들에서 생산을 하고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생산’과 그 생산자들인 다중(아직은 잠재적인 다중)의 형상을 포착합니다. 이 생산자로서의 다중은 맑스가 말한 ‘사회적 개인’에 매우 근접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맑스의 추론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게도((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분석한 책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현존과 함께 대안근대로 나아갈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 상응하는 거버넌스의 수립을 통한 대안근대로의 이행을 사유합니다. 네그리·하트는 새 책 Assembly에서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를 “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릅니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pp. 274-280.)))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오늘 소개할 것은 네그리와 하트의 대안근대 이행론이 아닙니다. 이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언급한 것은 이제부터 소개할 커먼즈 운동(commons movement)이 말하는 ‘커먼즈 이행’(commons transition)을 설명할 틀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새 책에서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을 언급했다면, 그들이 이 가운데 어디에 이 운동을 배치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새 책에서는 ‘커머닝’(commoning)에 대한 언급은 몇 군데 있어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물론 ‘커머너’(commoner)에 대한 언급은 Declaration(20)의 마지막 장 “Next : Event of the Commoner”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커먼즈의 창출 혹은 보존이라는 것만 놓고 보자면 ①에 위치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즉 기존의 제도들―의 외부에 구축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네그리·하트가 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사회운동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축소판으로 수립하는 것(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창출하는 소규모의 공동체)이긴 하지만요.((커먼즈 활동가인 볼리어도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애매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커먼즈 운동이 사회운동과 다르다고 합니다. David Bollier,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 http://minamjah.tistory.com/122))

그런데 사실 현재의 커먼즈 운동은 커머닝이나 커먼즈의 구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를 보면 위의 ‘세 경로’에 담긴 네그리·하트의 것에 못지않은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포부와 계획을 커먼즈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2P 재단의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의 결실로 작성된 이 책자(혹은 팸플릿?)는 커먼즈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견해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유력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소개하는 것이 이 발표의 주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주된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커먼즈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커먼즈와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정의 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의보다 역사가 먼저 오는 것이 커먼즈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커먼즈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으며 이후 그 우세함은 잃었지만 전(前)자본주의 시대까지 중요한 기능을 잃지 않았던 커먼즈는 산업자본주의에 들어와서 실질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P2P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다시 태어났고 전지구적 수준으로 그 규모가 확대될 수 있게 됩니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 p.12 참조. 이 책자는 이후 ’Primer’로 줄임.))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2009년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입니다.((분야가 다르지만 비교적 초기의 기여자 한 사람을 더 들자면 ‘커먼즈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naugh)일 것입니다.)) 오스트롬은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전통적 커먼즈는 규모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커먼즈 패러다임이 일반화되기는 힘들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커먼즈의 재탄생)이 이 비판을 시원하게 날려버립니다. 이후로 커먼즈 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과 결합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 Principles for the Transition to Postcapitalism, Zed Books Kindle Edition, 2017, Kindle Locations 334-336.)))

이로써 커먼즈 개념은 예전의 공유지와 같은 것이 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운동이 발전하면서 개념도 따라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단일한 커먼즈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채택되는 정의는 커먼즈를 ① 공유된 자원 ② 공동체 ③ 자원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운영하기(커머닝) 위한 일단의 규칙들을 모두 합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커먼즈는 물론 모든 종류의 물리적·무형적 자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커먼즈는 더 정확하게는 뚜렷한 공동체를, 자원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는 일단의 사회적 관행들·가치들·규범들과 결합시키는 패러다임으로서 정의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커먼즈는 ‘자원 + 공동체 + 일단의 사회적 프로토콜들’이다. 이 셋은 통합된, 상호 연관된 전체를 이룬다.” (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p. 15. [한국어본] 배수현 옮김,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갈무리, 2015.)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Kindle Location 351.))) (발표자도 이 유력한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공유지’라든가 ‘공유재/공통재/공통의 부’라고 옮기지 않고 ‘커먼즈’로 음역합니다.) 커먼즈의 생산양식을 따로 부각시켜 ‘P2P 생산’(혹은  ‘피어peer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커먼즈’를 추가하여 더 길게 쓰면 ‘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가 됩니다.((CBPP는 요하이 벤클러(Yohai Benkler)의 용어입니다.))

커먼즈는 노동조합처럼 어디서나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자원에 따라, 관리 규칙에 따라, 위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뉠 수 있으며 그 결과 극히 다양한 커먼즈가 가능합니다. 볼리어는 “커먼즈들의 은하계”(“a galaxy of commons”)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다시 커먼즈 이행이 제시하는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로 돌아갑시다.

 

① 엑서더스

커먼즈와 P2P의 세계는 자본 및 국가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자본 및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으로, 탈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먼즈 활동가들은 커먼즈를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출발점에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전이(phase transition)[대안근대로의 이행을 말합니다―인용자]의 전선에서 역사적 주체의 근간을 형성할 점증하는 수의 커머너들이 예시적인((예시적인(prefigurative): 미래를 미리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존함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데이터가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한 출발이다.”((Primer, P. 47)) 다시 발견된 혹은 더욱 강력하게 복원된 출발점입니다.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변화되었을 뿐 사라졌던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안근대의 출발점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 본 맑스의 견해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맑스는 현재와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상하지 못했으면서도 커먼즈의 현재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the old Germanic system”)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557.)) 커먼즈를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가장 새로운 것으로 본 것이죠. 또 있습니다.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고대적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혁명적 경향이 있다는 의혹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는 ‘고대적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는 ‘고대적’(archaisch)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엑서더스의 참된 의미는 출발점에 새로 서기일지도 모릅니다.

 

② 개혁

P2P 생산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커먼즈가 주변이 아니라 진정한 중심의 새로운 출발점이더라도 현재와 같이 아직은 자본(시장) 및 국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 둘과 관계를 끊고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커먼즈 활동가들이 구상하고 실천하는, 자본 및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개혁적’입니다. 커먼즈는 사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를 주변에서 돕는 제도들과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제도들이 국가와 자본의 해로운 측면은 걸러내고 유용한 측면은 남깁니다. 국가로부터 관료제를 제거하고 한때 복지국가가 담지했던 민중과의 ‘유대’(solidarity)를 보존합니다. 그래서 이 ‘유대’의 역할을 하는 ‘for benefit association’(지원 단체)을 커먼즈 주변에 제도화합니다. (주로 재단의 형태를 띱니다.)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커먼즈 이행 운동은 기존의 국가―“시장 국가”―를 커먼즈와 유대를 맺은 ‘파트너 국가’로 바꾸려 합니다.((실제 사례가 이미 존재합니다. 파트너 국가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는 ‘어번 커먼즈의 돌봄과 재활성화를 위한 볼로냐 조례’(Bologna Regulation for the Care and Regeneration of the Urban Commons)입니다. 그 핵심은 시민이 기안을 해서 제안하면, 시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례로 스코틀랜드 정부가 최근에 공유지들을 되사서 커머너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장점을 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 이행은 복지국가의 ‘재분배’를 모델로 삼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선분배(pre-distribution)를 통한 능력양성(empowerment)을 중심 원리로 합니다.((이 ‘능력양성’의 측면이 복지국가의 틀로서는 풀 수 없는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희한하게도 맑스가 대안근대의 분배방식에 대해서 말한 것과 통합니다.

“둘째 경우[자본주의 다음의 생산방식을 말합니다―인용자]에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 즉 공동체적 생산―생산의 토대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서 정립된다. 그래서 그가 창조하거나 그 창조작업을 돕는 생산물의 특수한 물질적 형상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의 노동으로 산 것은 특정의 특수한 생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에의 특정의 참여이다. 따라서 그는 교환해야 할 특수한 생산물이 없다. 자신의 생산물은 교환가치가 아니다. 생산물은 각자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특수한 형태[즉 화폐―인용자]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없다. 교환가치의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되는 분업 대신에 각자가 공동체적 소비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의 조직화가 발생한다.”((GR, 172.))

이렇게 선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가 점점 약화되는” 그러한 국가일 것이라는 말((Primer, p.35))에서도  국가에 대한 커먼즈 활동가들의 인식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는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세세히 분석하고 비판했던 근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데,((“The real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civil classes took place under the absolute monarchy. The bureaucracy asserted the idea of unity over against the various states within the state. Nevertheless, even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the social difference of the classes remained a political difference, political within and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Only the French Revolution completed the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social classes, in other words, made the class distinctions of civil society into merely social distinctions, pertaining to private life but meaningless in political life. With that, the separation of political life and civil society was completed.” (Karl Marx,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ch05.htm) 이러한 분리를 잇는 기능을 하는 것이 대의(代議)정치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머리를 몸에 잇는다고 시신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온전한 몸이 탄생해야 합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 분리의 극복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본에 대한 태도를 알아봅시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생산성과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유한한 자원―석유, 물, 광물, 땅 속의 영양소 등―을 마치 그것이 무한한 양 추출해서 시장 가치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무한한 자원―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비물질적 재화―에는 인공적으로 희소성((희소성(scarcity)은 자본의 가치화의 바탕이 되는 전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무형적인 디지털 재화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자본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을 전제하여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혁신에 법적·기술적 족쇄를 채우고 있습니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본의 착취 방식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extraction)이라는 방식입니다.((네그리·하트도 새 책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주된 방식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대하여 두 절 정도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문의 관련 대목입니다. 옮기지 않고 그대로 소개합니다. “Capitalist accumulation today functions increasingly through the extraction of the common, through enormous oil and gas operations, huge mining enterprises, and monocultural agriculture but also by extracting the value produced in social forms of the common, such as the generation of knowledges, social cooperation, cultural products, and the like. Finance stands at the head of these processes of extraction, which are equally destructive of the earth and the social ecosystems that they capture.” p.xv.)) 커먼즈 이행 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그 추출적 성격을 제거하고 커먼즈의 삶에 복무하는 ‘친구로서의 자본’(capital as a friend)으로 변형시키려 합니다.((‘친구로서의 자본’ 혹은 ‘생성적  형태의 자본’(generative forms of capital)과 비슷한 취지로 네그리·하트는 Assembly에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말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화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투여되는 화폐입니다. “In chapter 15 we will argue that this critique should lead us not to oppose money as such but instead to invent an alternative to capitalist money, that is, an alternative social technology for institutionalizing new social relations—a money of the common.” p.224)) 이런 경제를 ‘생성적’(generative)이라고 부릅니다.((생성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열린 협동조합주의’(open cooperativism)입니다. 이 경제를 양성하는 여섯 개의 전략이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① 풍요(↔희소성)에 기반을 둔 지식의 공유. ② 기여의 다양성 인정(↔ 분업, 전문화). ‘open value accounting’ 사용. ③ 공정하고 호혜적인 분배 : Copyleft licensing →CopyFair licensing으로. ④ 지속 가능성을 위한 오픈 디자인. 자동차의 사례: https://www.osvehicle.com/editselfdrivingcar/ ⑤ 폐기물의 감소. 자본의 요구가 아니라 실질적 욕구에 맞추어진 네트워크화된 생산. ⑥ 물리적 기반시설을 상호화하기(공동이용).)) 커먼즈 주변에 이런 기능을 하도록 설치된 것이 ‘commons-oriented entrepreneurial coalition’(커먼즈에 복무하는 기업가들의 연합)입니다. 이 기업가들은 커먼즈에서 생산된 가치들을 가지고 상업적 활동을 하지만 ‘커먼즈의 축적’에 우선적으로 복무해야 합니다. 시장에 물건을 팔 때에도 사람과 환경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커먼즈와 그 주변에 이렇게 설치된 제도들을 합해서 ‘커먼즈 생태계’(commons eco-system)라고 부릅니다.((Primer, pp. 19-22에서 이 생태계의 사례들인 Enspiral, Sensorica, Farm Hack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볼 수 있습니다.))

 

③ 헤게모니

커먼즈 생태계가 핵심적 요소이지만,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것의 구축에만 시야나 활동을 국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현실적으로 가하는 제한과 맞서기 위해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 운동은 정치적 장에 관여해야 합니다. 복지국가 모델의 최선의 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창조와 공동체에 의해 조직된 실천들을 촉진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정치’란 대의정치만이 아니라((스페인의 ‘도시자치연합’(municipal coalitions)의 경우 당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기존의 정당들을 포용하지만 그것들을 수직적인 당 구조보다는 다중이해관계자적(multi-stakeholder) 구조들로 전환시킵니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해서 담론을 여성화한 것도 특징적입니다. Primer, pp.28-29 참조.))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 즉 시민들이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권리들도 가리킵니다.) 이는 대안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분쇄합니다. 균형 잡힌 정치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시적 행동노선과 제도적 행동노선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절에서 보겠지만, 다행히도 이러한 정치적 접근법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Primer, p.24))

정치 관여에의 궁극적 목표는 ‘체제의 변화’(systemic change)입니다. “정책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 및 사람들의 욕구를 시장이나 관료제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체제로 이행하는 것입니다.((Primer, p.45)) 이를 위해 모든 수준―도시, 일국, 지역, 지구 전체―에서 대안적인 거버넌스를,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구축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Assembly of the Commons’가 그 계획에 속합니다. (실제로 2016년 11월에 첫 ‘European Assembly of the Commons’가 열린 바 있습니다.)((커먼즈들로 이루어진 정치체제를 ‘federation of the commons’라고 부른 사례도 있습니다. “A more fundamental question, however, is normative: what are our values, and how does this influence what futures we consider desirable? From the author’s vantage point, with respect to the value of the fullest expression of human empowerment, scenario four is clearly the most desirable. In this fourth scenario, a federation of the commons, citizens and communities are actively engaged in shaping the fabric of their lives and societies through a process of ‘deep democracy’ (Ramos, 2012). But others may find greater affinity with a different scenario. Paraphrasing Ashis Nandy (1992), one person’s utopia may be another’s tyranny.” Jose M. Ramos, The Futures of Power in the Network Era, http://eprints.qut.edu.au/62967/1/A05.pdf))

이렇듯 커먼즈 이행론은 디오니소스의 세 얼굴을 나름대로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것은 주로 Primer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주석에서 소개한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견해는 이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있다는 판단이나 커먼즈 고유의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대안근대로의 변형에서 커먼즈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생각 등은 오늘 소개한 이행론과 근본적으로 통합니다. 자기 나름의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제시하는 (발표자도 접하지 못한) 이론가들이 더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함께 커먼즈 운동은 그 실천과 이론이 더욱 더 풍성하게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이행만이 대안근대로 가는 유일한 경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커먼즈 중심이든 아니든) 자본과 국가의 이두체제를 벗어나서 자유로움, 공정함, 지속 가능성이 실현되는 삶, 정치·경제·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삶, 인간과 만물이 서로 동지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노력은 근대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영속화하려는 세력과 권력이나 재산을 놓고 투쟁하지 않습니다. 권력과 재산은 근대적 삶형태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아무리 잘 나누어도 근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안근대로 나아가는 노력은 근대적 삶형태에 다른 삶형태를 맞세우는 운동입니다. 이 두 삶형태의 대립은 전체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지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두 개의 상이한 전체―근대적 삶형태와 대안근대적 삶형태―의 대립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안근대로의 이행 혹은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인류세’(anthropocene)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이런 상태를 만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기에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경제학자도 있습니다.((데 안젤리스가 Omnia Sunt Communia,에서 원용한 것으로서 Moore, J. W. (2014). The Capitalocene, Part I: On the Nature and Origins of Our Ecological Crisis. Fernand Braudel Center, Binghamton University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주도해온 ‘원흉’이 미국과 영국이므로 인류세는 사실 ‘영미세’(anglocene)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역사가도 있습니다.((Peter Linebaugh, “Omnia Sunt Communia: May Day 2017”, http://www.counterpunch.org/2017/04/28/omnia-sunt-communia-may-day-2017/ 참조.))

이제 현재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넘어 이 ‘-세’(-cene)를 새롭게 바꿀 때입니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을 (잘 하든 못 하든) 하듯이, 이 일에 착수해야 이 일을 (잘 하든 못하든)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한 노력들이 바로 이러한 착수에의 자극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보다는 ‘무슨 일’에서 성공/실패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일은 생존하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일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일입니다. ♣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

선(先)분배(pre-distribution)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