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앙을 부르는 한국의 성장제일주의?



한국은 기술 및 상업 성장에 초점을 맞춘 경제전략을 밀어붙일 것인가 아니면 늘어나는 경제적 격차와 닥쳐오는 기후위기에 지구보존을 목표로 하는 포용적 정책들로 맞설 것인가?

이것이 <2019년 한국포럼>에서 한국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많은 외교전문가들, 정당지도자들, 학계인사들, 정부 고위 관리들 및 (노벨상 수상자 한 명을 포함한) 다른 참석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핵심 질문이었다. [노벨상 수상자는 뉴욕대 교수 토마스 사전트(Thomas Sargent)로 201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옮긴이]

4월 25일에 열린 행사는《코리아타임즈》(The Korea Times)와 그 자매신문이며 한국 최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한국일보》(Hankook Ilbo)가 공동주최하는 연례행사 중 가장 최근 것이었으며 이 신문사의 65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이 행사는 또한 한국경제의 현황, 그 과제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이 나라를 위해 가지고 있는 포부들에 관한 매우 계몽적인 특강이기도 했다.

둔화되고 있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어떻게 증가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주제였다. 일부 강연자들은 성장의 성과들을 보다 잘 공유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해서 한국이 사회적ㆍ환경적 지표에서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것을 문제로 다루는 것은 의제로 상정되지 않았다. 기후변화도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이런 성장 수사(修辭)는 선진국들 사이에서 자주 보이지만 한국전쟁동안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을 때 이미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에서 이 수사가 줄기차게 주목을 받고 있는 근원을 재검토 해보는 것도 가치는 있다. 한국은 잿더미에서 빠르게 일어서서 ‘아시아의 호랑이’(Asian Tiger)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선진경제국들 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는 종종 한강의 기적(한강은 서울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으로 불린다. 이것이 경제성장을 고무적인 국가신화와 결부시킨다.

한국의 미래 비전을 놓고 씨름하기

환영사에서 한국일보 회장 승명호(Seung Myung-ho)는 한국이 경제성장이 둔화된 10년 동안 경쟁력을 잃고 있는 점에 관하여 우려를 표명함으로써 이 분위기를 조성했다. 30년간 연속적으로 일구어 낸, 한국의 믿기 힘든 경제성장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둔화되기 시작했다. 승명호는 성장을 촉진하고, 유례없는 파열을 약속하는 인공지능·자율주행자동차·양자컴퓨팅(quantum computing)을 포함한 강력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물결인 4차산업혁명(4IR)에 적응하기 위한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국회의장인 문희상(Moon Hee-sang)은 반론 같은 것을 제시했으나 성장 내러티브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며 성장경제의 성과를 더 잘 공유할 대통합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성장주의가 포럼에서 내러티브를 장악하긴 했지만, 일부 연사들은 성장이 치를 비용이 다뤄져야 한다고 미온적으로나마 주장했다.

예를 들어 한국은 OECD 행복지수(OECD’s Better Life Index, BLI)와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의 달성에서 거의 하위를 차지한다.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인 윤종원(Yun Jong-won)은 사회적•환경적 비용이 늘어나면서 실질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떨어진다고 언급했고 성장이 공유되고 삶의 질이 향상되는 새로운 가능한 패러다임을 간략하게 제시했다.

게이오 대학교 교수인 이사오 야나기마치(Isao Yanagimachi)는 둘로 나뉜 한국의 노동시장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즉 한편으로 점차 쇠퇴하는 중심부에서는 한국의 대규모 다국적기업들(재벌들이라 불린다)에 소속된 노조가입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옹호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 커지고 있는 주변부에서는 전례 없는 프리랜서들, 소규모 자영업자들, 그리고 플랫폼노동자들이 빈약한 임금, 열악한 노동조건, 형편없는 사회보장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익숙하게 들리는가?). 한국 노동시장의 한 가지 특이사항은 노동조합이 산업별이 아니라 기업별로 조직된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서로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동종의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격차가 생긴다.

마지막 3부를 시작하는 두 개의 발제중 하나를 내가 했는데 그 발제에서 나는 한국인들 모두가 격변의 시대를 뚫고 나갈 준비가 되도록, 보다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나라를 구축할 비전과 능력을 갖도록,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생계를 더 잘 창출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투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이 차량공유(ridesharing)를 허용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어서 나는 또한 한 가지 충고로서 미국에서의 차량공유의 부정적인 영향―주행거리의 증가, 정체의 심화, 더 많은 교통사고 등등―을 이야기했다.

차량공유는 국가 미래를 알아보는 리트머스시험지일 수 있다

차량공유를 둘러싼 갈등은 한국에서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택시기사들이 내가 전 세계에서 본 가장 격렬한 반대를 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비극적이게도 최소 세 명의 기사가 항의의 표시로 분신하는 일도 일어났다. 나는 또한 몇 가지 가능성 있는 방향들을 제시했는데 이를테면 노동을 지원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플랫폼 협동조합을, 4차 산업혁명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운영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디지털 권리를 위한 도시 연합을 그리고 보다 지속가능한 공동체들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공유이웃들과 공유도시들을 각각 제시했다. 나는 한국이 한국전쟁으로 폐허된 상태를 극복하는 데 쏟은 바로 그 집중력을 기후변화 같은 세계적으로 가장 큰 문제들과 씨름하는데 쏟을 것을 제안하며 발제를 마무리했다.

카풀•택시 태스크포스 위원장인 전현희(Jeon Hyun-hee)는 나중에 택시회사와 차량공유 세력의 사이의 첨예한 갈등에 대해 내부자로서 설명을 했다. 택시운전사들이 그녀의 발언을 방해했고 물을 뿌렸다고 한다. 그녀는 택시운전사들이 자신들의 입장이 약화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녀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거부했다고 말했다.

나 다음의 발제자는 서울대학교 교수인 이재열(Lee Jae-yeol)이었으며 그의 발제는 내 발제와 대조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열정적인 테크놀로지 전도사인 그는 테크놀로지가 사회전반에 걸쳐서 과도하게 포화된 상태를 특징으로 하는 피할 수 없는 미래상을 그렸으며 한국이 이 움직임을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9한국포럼>에서 프로그램을 확인해 보니 3부의 두 번째 발제자는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인 최재붕이었고 이재열은 3부의 사회를 맡았다.―옮긴이] 

이어지는 패널토론에서 이 주제가 강화되었다. 내가 그런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이 한국사회에서 권위적인 요소들을 강화할 수 있음을 경고하자 서로 치고 받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대표인 토론자 최성진(Choi Sung-jin)은 테크놀로지스타트업 문화는 자유행위자들에 의한 문제해결이 핵심이라고 능숙하게 반박했다.

컨퍼런스가 끝날 때 가지게 된 느낌은, 한국의 경제적 과제들이 대체로 다른 선진국들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유사성은 한국의 성공의 표시이기는커녕 아주 위험하다는 인상을 내게 안겨주었다. 우리시대 특유의 과제들을 인정하지 않는 경제성장 가도에 한 나라가 강하게 집중하는 것은 기후변화의 심각성과 전 세계적으로 닥쳐오는 생태계 붕괴를 고려할 때 자멸을 초래할 것처럼 보인다.




다자주의와 커먼즈



커먼즈가 국제적 협치(governance)와 원조의 ‘다자주의 시스템’에 어떻게 적절한 연관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유엔―특히 국제의원연맹―에 몇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2월 22일(금요일)에 있었던 「대중의 눈으로 본 다자주의 시스템: 매스컴의 영향」이라는 컨퍼런스 소모임에 참여해 도움을 줄 수 있어서 기뻤다. (컨퍼런스 자체의 제목은 「다자주의가 새로이 직면한 문제들―의회의 대응」이다.)

 

이 소모임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체, 특히 인터넷이 유엔 같은 다자 기구들의 효율성, 신뢰도, 그리고 평판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내가 컨퍼런스에서 거둔 분명한 수확은 유엔에 있는 특정 활동주체들이 우리 시대의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다자 기구들의 능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우려를 표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타당한 우려이다. 수많은 문제들이 세계 질서―기후변화, 불평등, 사이버전쟁, 데이터감시 등등―를 흔들어 댐에 따라 유엔이 문제를 논의할 포럼이 되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할 권한도 제한되어 있고 협치의 내적 구조와 과정이 다루기 힘들기 때문에, 누구도 과감하고 시기적절한 행동이 가능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참여 기반 온라인 미디어의 부상은 유엔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유엔은 그 우려를 공개적으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커머닝을 매력적인 옵션으로 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어떻든 조금이라도 존재함을 알게 되어서 기뻤다. 아쉽게도, 유엔 토론자들은 커먼즈를 매우 깊게 혹은 진지하게 탐구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이는 썩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유엔에서 이루어지는 심의들에 참가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그들 국가정부의 대표자들이고 국가권력과 종래의 정치의 거품에 푹 잠겨있다. 정책, 입법 및 기타 하향식 조치들이 문제를 다루는 가장 의미 있고 효과적인 방식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다른 중요한 접근법들이 있다. 중앙집권적인 국가 및 다자 구조들 그 자체가 많은 경우 문제의 일부이다. 그 구조들은 권력을 너무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정치적 술수, 미디어광학, 부패를 조장하여 현장에서의 실질적인 결과를 희생시킨다. 그 구조들은 자본친화적인 ‘시장 해법’에 특권을 부여하고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상향식의 창조적인 혁신을 손상시킨다. 국가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종종, 스스로의 이익과 자급자족을 주장하는 지역 기반의 안정적인 커먼즈가 자신들을 위협한다고 느낀다. 기타 등등.

 

아래는 그 모임을 위해 준비한 발표내용이다. 이 발표는 동영상에서 제시된 바로는 각 발표자에게 허용된 5분 제한에 맞추기 위해 축약되었다. 동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나의 발표는 11:50에서 16:40까지이다.

 

 

다자주의와 커먼즈

 

얼마 전만 해도 시민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뉴스·정보·문화의 유형들을 국민국가가 엄격히 통제했습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요. 어떤 독재 정권들은―인터넷의 존재에도 불구하고―여전히 자국 내의 커뮤니케이션을 엄밀히 통제하고 있지만, 머클루언(Marshall McLuhan)이 1960년대에 예견한 상호연결된 지구촌이 실현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쉽고 값싼 초국적 커뮤니케이션이 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습니다. 다른 문화나 나라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의 매일의 삶에 늘 영향을 미칩니다.

 

사람들이 승인되지 않은 새로운 외국의 정보를 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들 나름으로 뉴스, 비디오, 팟캐스트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의 소프트웨어 코드를 작성할 수 있고 나름의 위키들을 개발할 수 있으며 별로 많지 않은 자원으로 새로운 운동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전과는 달리 이제 사람들이 전지구적인 청중을 상대로 말할 도덕적·정치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을 전통적 국가와 미디어 당국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분산된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각각의 국가들의 정치적·문화적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으며 전지구적 문화를 종종 심오하게 변화시켰습니다.

 

물론 국민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이러한 사태전개가 혼란을 초래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자신들의 의지를 부과하기에 충분한 강제력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우는 적법성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당성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후자가 좀더 열려 있는 문제이지요. 국가정부들이 이 문제에 영향을 미치려 시도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시민들만이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것은 현재 원격통신·경제·정치의 구조 자체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사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체로 새로운 미디어와 종래의 국가 기구들 사이의 긴장을 활용하는 데 기반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의 특징은 다음 둘 사이의 심대한 구조적 갈등입니다. 즉 ① 이전 시기의, 전문가가 주도하는 위계적이고 중앙집중화된 기구들과 ② 개방된 네트워크들과 다양한 앱들이 가능하게 하는, 참여에 기반을 둔 자기조직적인 상향식 공동체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양한 새로운 대중집단과 하위문화를 쉽게 나름대로 창출할 수 있을 때에는,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라는 생각, 그리고 하나의 국민으로서 공유한 정체성이라는 생각도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소셜 미디어가 입증된 위험들―가짜뉴스, 페이스북 알고리즘, 권위적 포퓰리즘과 혐오의 장소들―을 많이 가지기는 하지만 개방된 네트워크들이 (특히 커먼즈로서 조직되었을 때에는) 매우 중요한 힘 즉 창조적·생산적·민주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나에게 문제는 국가권력과 다자 기구들이 과연 커먼즈의 이러한 건설적 힘을 인지하고 지원할 수 있느냐입니다.

 

저는 활동가이자 정책전략가로서 지난 20년 동안 세계 전역에서 커먼즈와 함께 연구하고 일해 왔습니다. 저는 하딘(Garrett Hardin)의 1968년 에세이에서 유명하게 되고 오래 회자되어온 ‘커먼즈(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어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딘의 주장과 반대로, 커먼즈는 주인이 없는 자원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당신이 원하는 만큼 취할 수 있는, 누구에게나 공짜인 것이 아닙니다.

 

커먼즈는 공유된 부를 장기적으로 파수(把守)하기 위한 자기조직화된 사회시스템입니다. 커먼즈에서는 시장이나 국가에서와는 뚜렷하게 다른 형태의 운영과 자급이 이루어집니다. 커머너들은 그들의 특수한 맥락과 문화에 적합한 나름대로의 규칙, 사회적 관행, 전통 그리고 의식(儀式)을 고안해냅니다. 그들은 무임승차자들을 자율적으로 감시하고 규칙을 어기는 사람들을 처벌합니다.

 

커먼즈는 2009년에 자신의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고(故)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연구한 작은 규모의 자연자원들(농지·어장·삼림·관개용수 등)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는 또한 고등교육, 도시, 다양한 사회적 환경들, 그리고 디지털 공간들에 존재하는 시스템들의 공유된 관리로 구성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례들에서 즉 ① 프리소프트웨어, 오픈소스소프트웨어, 그리고 위키피디아 ② 과학과 학술을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만드는 오픈액세스 학술지들 ③ 교과서와 커리큘럼이 학생들에게 더 쉽게 제공될 수 있게 하는 오픈교육자원 ④ 지적재산권 산업이 부과하는 독점렌트(monopoly rent, 독점에 기반을 둔 초과이익)를 무시하고 모든 것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아래 공유하기에서 특히 튼실한 형태의 커먼즈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언급할 다른 많은 커먼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본 요점은 커먼즈가 ‘비극’이 아니라 생성적이고 가치창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가와 다자 기구가 커머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커먼즈는 이들에게 엄청난 파트너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정치적 의미에서나 경제적 의미에서나 더 큰 포용과 참여 그리고 더 큰 자유가 실현되는 세계를 원한다면, 우리는 커먼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렌트(Hannah Arendt)의 힘 개념을 기억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녀는 󰡔인간 조건󰡕에서 힘이 “사람들이 같이 행동할 때 그 사이에서 생겨나고 사람들이 흩어질 때 사라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달리 말해, 힘은 우리의 기구들 자체에 내재하지 않습니다. 힘은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창조되고 재창조되어야 합니다. 많은 국가들과 다자 기구들은 힘과 인식된 정당성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으나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긴급한 요구에 대해 믿을 만한 효과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가기관들이 다양한 커먼즈와 파트너십을 이루어 아래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 커먼즈가 제공할 수 있는 생성적·창조적 힘을 높이기.

2)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책임감 있는 자치에 힘을 실어주어 온전한 참여를 양성하고 간접적으로는 국가의 정당성을 높이기.

3) 이해관계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지역적으로 적절하고 안정적이고 자활적인 해결책들을 지원하기.

4) 생태적 문제들에 대해 경계를 가로지르는 협력을 가능하게 하기.

 

달리 말해, 국가와 다자 기구들은 더 큰 맥락에서 소셜 미디어의 도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능란한 메시지 교환과 더 좋은 트윗만이 핵심이 아닙니다. 커먼즈의 인식되지 않은 큰 힘으로 더 심층적인 삶의 양태를 발전시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실 이것은 프랑스 개발청이, 아프리카와 프랑스어권 국가들에서 커먼즈가 그들의 개발 전략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면서 최근 해온 일들입니다.

 

따라서 확장된 사례로서 ‘소외 질병을 위한 이니셔티브’(DNDi)를 상상해봅시다. DNDi는 의약품 연구개발과 유통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커먼즈, 국가 기구 및 민간 회사가 협동하여 만든 조직입니다. 이 조직은 의학적으로 중요한 약품을 로열티 없이, 비(非)독점적인 라이선스로 개방합니다. 그래서 이 의약품을 어디서나 값싸게 구할 수 있게 합니다.

 

또는 ‘인도주의 오픈스트릿맵 팀’(Humanitarian OpenStreetMap Team, HOT)이 아이티에서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이후 다양한 국가들을 어떻게 돕고 있는지 그려보십시오. HOT는 응급의료요원과 피해자들이 병원, 물 및 여타 필수품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웹지도를 만들기 위해 자원봉사 해커들을 한데 모읍니다. 이 주목할 만한 해결책은 커먼즈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지 관료주의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 아닙니다.

 

‘미곡증대시스템’(SRI)은 전세계적인 오픈소스 커뮤니티로서, 쌀을 재배하는 농경학에 관한 조언과 지식을 교환합니다. 오로지 기존의 다자 채널 밖에서만 활동하는 SRI는 쌀 수확량을 2~3 배로 증가시키기 위해 스리랑카·쿠바·인도·인도네시아에 있는 농민들을 한데 결집시켜왔습니다.

 

우리는 ‘공동체 토지신탁’(Community Land Trust, CLT)이 어떻게 토지를 탈상품화해서 보통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합니다. 저렴한, 라이선스가 없는 보철물을 생산하는 ‘오픈 보철 프로젝트’(Open Prosthetics Project)에 대해, 그리고 지식과 디자인은 오픈소스 방식으로 전세계적으로 공유하고 물리적인 것들(농장 설비, 가구, 주택)은 지역적으로 생산하는 ‘세계-지역적 생산’(cosmo-local production)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네덜란드의 ‘초원의 왕 프로젝트’(King of the Meadows project)는 문화적 유산과 연결된 생물다양성을 파수하기 위해 시민들을 결집해온 커먼즈입니다. ‘벵갈-페사’(Bangla-Pesa)는 케냐의 지역 통화인데 이것은 법정통화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가치를 교환하고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제 내 생각을 아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산된 앱과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가능해진 새로운 세상에 다자 기구들이 적응하려면, 긴급한 욕구를 충족시키는 커먼즈의 위대한 약속을 탐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고, 관료적 국가시스템과 시장의 본래적 한계를 보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




상황은 삐께띠가 서술한 것보다 더 나쁘다

 



삐께띠의 통계의 문제는 그것이 세상이 얼마나 불평등한가를 매우 낮추어 말하고 있다는 데 있다. 소득에만 시야를 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부자들은 소득을 벌지 않는다. 그들은 자본 이득(capital gains)을 거두어들이며, 자본 이득은 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보고는 되는데, IRA가 10년 정도마다 자본 이득에 대한 연구를 할 뿐이다. 영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나라들은 아예 자본 이득에 대해 세금을 매기지 않으며 그래서 통계에 나타나지 않는다. 삐께띠의 작업의 중요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이는 그의 책을 잘 읽는다면 알 수 있다―부의 격차가 소득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며 이는 부자들의 조세회피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는 기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제일 큰 기업들이 구글과 애플인데, 애플의 소득 전체가 미국이 아니라 아일랜드에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바로 이런 점이 삐께띠에게는 빠져있다. 소득 통계에서 빠져 있는 또 하나는 재산이 실제로 범죄와 사기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이다. 삐께띠에게 좋은 점은 그가 프랑스 소설가들이나 영국 소설가들이 경제학보다 부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이나 발자끄의 19세기 소설들이 재산을 버는 방법은 결혼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발자끄는 모든 큰 재산의 뒤에는 큰 절도가 있다는 말도 했다. 『포브스』(Forbes)에 그 목록이 나온 러시아, 중국, 우크라이나의 최고 부자들은 장담컨대 소득을 저축해서 이런 부를 만들지 않았다. 더 높은 소득을 번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사기와 내부 뇌물수수로 재산을 훔쳤다. 미국에서 큰 재산이 형성되는 방식과 같은 방식이다. 마이어스(Gustavus Myers)가 쓴 『미국의 거대한 재산의 역사』(History of the Great American Fortunes)는 철도건설용으로 불하된 토지에서, 의회 의원에게 뇌물을 줌으로써 그리고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큰 재산이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큰 재산은 자연자원, 토지, 공적 도메인을 사유화함으로써 형성된다. 부와 소득의 집중이 실제로 일어나기 시작한 1980년 이후의 시기, 삐께띠가 보여주는 이 시기는 바로 새처, 레이건, 옐친이 대표하는 사유화의 시기이다.

삐께띠는 격심한 불평등의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토론을 출발시켰다. 이제 필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불평등이 생겼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나를 설명하는 것이다. 단지 재산 일반에 세금을 매기는 해결책은 (이것은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인데) 치는 면이 너무 넓은 해머와 같다. 특정 종류의 부, 특정 종류의 재산 형성이 약탈적인데, ‘경제적 렌트’(economic rent)―지대(land rent), 자연자원 렌트(natural resources rent), 독점 렌트(monopoly rent), 혹은 금융부문이 벌어들이는 종류의 돈―가 바로 그것이다.[J is for Junk Economics에서의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렌트’는 시장가격이 본래적 경비(가치)를 넘어서는 초과분이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얻는 불로소득은 모두 경제적 렌트이다.―정리자] 삐께띠의 책은 이것을 논의하지 않고 마지막에 부에 과세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맞지만, 어떻게 과세를 할 것인가, 무엇이 경제를 성장하게 만들기에 최고로 좋은 종류의 세금인가는 미래의 또 하나의 책의 주제로 남아 있다. 삐께띠가 논의하지 않은 것 가운데 하나는, 재산을 형성하는 데서 부채가 하는 역할이다. 1980년 이래 형성되기 시작된 부의 대부분은 1980년 이후 이자율이 낮아지면서 증가된 부채 레버리지 때문에 생겼다. 점점 더 많은 은행신용이 투입되어 부동산 가격, 주식 가격, 증권 가격, 모든 종류의 가격을 올렸다. (미술품 가격 상승도 이와 병행했다.) 소득에 대한 부의 비율의 증가와 함께 소득에 대한 부채의 비율의 증가가 일어났다. 이 부채상태와 순가치(net worth)는 매우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가구들이 가지고 있는 주된 자산은 집인데, 이 집 또한 큰 액수가 대출 담보로 잡혀 있으며, 기본적으로 99%가 1%에게 이자를 지불한다. 내가 보기에 금융 부문에서 가속화되어 온 것은 1%가 99%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빚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집을 사고, 교육을 받고, 기타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을 사는 데로 접근하는 지점을 우리가 통제한다. 우리가 빌려주지 않으면 당신들은 집을 사지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차도 사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들에게 충분한 이자를 매길 것이다. 당신들이 버는 돈을 사실상 다 우리에게 이자로 지불하게 될 것이다. 이와 동일한 논리로 기업사냥꾼들은 기업을 공격하여 더 많은 돈을 배당금으로 지불하라고 말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사실상 실질적 부가 해체되고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 혹은 가공적 부(fictitious wealth)라고 불리던 것―모두 기본적으로 부채 레버리지를 통한 부이다―이 증가한다.

도금시대(Gilded Age)[원래 미국의 1880년대와 1890년대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그 의미가 일반화되어 사업가들·은행가들(‘강도남작들’robber barons)이 경제를 망치면서 부를 축적하는 시대를 가리킨다.―정리자]가 막 시작되었다는 삐께띠의 결론은 맞지만 그의 논리는 내가 따르는 논리가 아니다. 그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말한 것의 정반대를 말하고 있다. 스미스는 가장 빨리 망해가는 나라에서 이자율이 가장 높은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즉 높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고 낮은 이자율로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삐께띠는 수익률(rate of return)을 말하는데,[삐께띠가 말하는 자본수익률(rate of return on capital)은 이윤, 배당금, 이자, 지대 및 기타 자본에서 나오는 소득을 말한다.―정리자] 미국 및 여러 나라들에서 가장 큰 부문은 부동산 부문이다. 1945년부터 지금까지를 보면 부동산 부문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다. 억만장자들이 부동산을 개인적 자선으로 운영한다는 식이다. 소득을 올린다면 소득세를 내야 할 것이고 신고를 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소득을 올리지 않는 것이다. 그들이 거두어들이는 렌트(임대료)가 거의 모두 이자로 지불되거나 감가상각 비용으로 책정된다. 그래서 삐께띠가 준거하는 것은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Earnings Before Interest, Tax, Depreciation, and Amortization)이 아니라 그 한 부분, 즉 세금 빼고 이자 빼고 감가상각비와 무형자산상각비를 빼고 신고된 수입이다. 부동산 다음으로 부를 많이 축적한 곳은 석유산업이다. 이들도 소득을 신고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세금을 면하게 해주는 감모공제(depletion allowance)가 있거나, 아니면 이들의 모든 소득은 해외에서, ‘편의치적선’(flags of convenience)[상선의 소유주가 자신의 나라와는 다른 나라에 선박을 등록하는 것―정리자] 나라들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본 이득을 포함한 실질적 총수입은 삐께띠가 보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둘째, 가령 미국의 국민소득계정(National Income and Product Account : NIPA)을 보면 1년 전 미국의 모든 기업이윤의 40%가 은행들, 즉 금융부문에서 거둔 것이다. 이 수익은 기본적으로 ‘이전 지불’(transfer payment)이다. 성장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 금융서비스는 서비스가 아니다. 노상강도가 현금자동인출기 앞에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서 ‘돈을 내놓거나 목숨을 내놓아라’라고 말하는 것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실제로 당신의 돈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금융 활동과 부동산 투기가, 월가에, 은행 경영자들 및 기업경영자들에게 지불되는 이 모든 돈이 정말로 성장인지 아니면 가공자본의 형성과 병행하는 일종의 가공적 성장인지의 문제가 있다. 지금 통계는 점점 더 허구적인 성격을 띠어가고 있는데, 자신들의 소득에 세금이 매겨지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는 기업 세금담당 회계사들에 의해 통계가 작성되고 있을 정도이다. 호주의 탄광 부문에서는 호주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이 1년에 수십억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자신이 소득을 한 푼도 벌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하게 만들기 의해 많은 돈을 지불한다.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자이다. ‘신고전주의’는 ‘반(反)고전주의’를 의미한다. 그는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또한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은행들이 하는 일은 저축을 대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은행들이 신용을 창출하거나 자산가격을 부풀리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고 한다. 그래서 크루그먼은 대체로 우파 쪽에 의해서 그들이 총애하는 자유주의 경제학자로 찬양된다. 그가 경제를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경제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했다면, 그는 노벨상을 타지 못했을 것이다. 노벨상은 경제적 렌트 같은 것이 없고 불로소득 같은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크루그먼은 회사의 경영자들이 훨씬 더 많이 받고 훨씬 더 많은 소득을 버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심지어 통계에 대해서도 틀렸다. 그가 전문적인 은행 로비스트임을 기억하라. 그는 은행에서 돈을 받는다. 그는 은행들을 규제하려는 정부에 대항하는 싸움에 은행들을 지원하기 위해서 아이슬란드로 갔다. 은행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은 물론 그가 은행의 로비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적하는 월가의 소득을 보자. 미국의 조세법 아래에서는 월가의 소득은 실질적으로 일을 해서 벌어들인 소득이 아니다. 그들은 스톡옵션과 증권투기로 대부분의 돈을 번다. 이는 자본 이득으로 간주되며 정상적인 소득처럼 과세되지 않고 훨씬 더 낮게 과세된다. 이는 가공적인 관점, 무엇이 소득이고 무엇이 소득이 아닌가를 회계사의 눈으로 보는 관점이다. 세금담당 회계사들은 정부에 엄청난 돈을 먹여 납세(소득세)신고서의 범주들을 왜곡하고 마치 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금융 형태의 부를 가시적인 부동산과 대조적으로 비가시적 부라고 부른다. 부유한 자들의 생각은 그들의 부를 비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만일 눈에 뜨인다면 세금이 매겨질 것이고 사람들의 원망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삐께띠가 한 것은 이 부를 가시화한 것이다. 적어도 그는 부 통계에 의해 ‘보라, 저기 부가 있고 우리는 그것을 측정할 수 있으며 우리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어떻게 이 부를 획득했는가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 부에 대응하는 몫이 소득에서 발견되는 정도를 반영하는 소득세 명세서뿐이다. 이는 마치, 열쇠를 떨어뜨렸는데 떨어뜨린 곳을 보지 않고 빛이 있는 곳을 보는 것과 같다. 그가 작업할 통계자료는 소득세 기록뿐이며 그는 기술적으로 엄청난 작업을 해놓았다. 출발점이 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그 통계를 다시 처리하여 풀어내고 무엇이 그 뒤의 실제 현실인지를 찾아내는 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 월가와 금융 경영자들로 하여금 소득을 거두는 것을 가능하게 한 자본 이득이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 그들의 계약은 매우 분명하다. 기업경영자의 소득은 주식 가격에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보너스를 받거나 아니면 스톡옵션을 받는다. 만일 그들이 주식가격에 기반을 둔 보너스를 받는다면 그들은 기업의 수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기업의 소득을 받고 새로운 장비와 설비에 투자하는 대신에,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는 대신에, 더 많이 생산하는 대신에, 자본 투자 대신에 단지 자기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는 데 돈을 사용할 것이다. 주식을 매입하면 주식 가격이 올라가고 그들은 ‘보라, 나의 회사 경영이 어떻게 주식가격을 올렸는지를, 그러니 나에게 더 높은 보수와 스톡옵션과 보너스를 달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자본 이득, 이 공짜 점심(불로소득)에 과세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의 왜곡을 낳고, 이것이 삐께띠가 다룬 통계를 산출한다.

▷ [삐께띠의 책이 맑스의 『자본론』을 계승한 것(“a retake of Marx’s Das Kapital”)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홍보상으로는 그렇게 부를 수 있으나 이 책은 맑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맑스의 『자본론』은 감가상각(depreciation)에 기반을 둔다. 사유화와 사기를 의미하는 ‘시초 축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사람이 맑스이다. 삐께띠의 분석은 (그의 부모가 트로츠끼주의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맑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① 감가상각은 자본 투자, 건무, 장비 기술에 들어가는 비용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신고되는, 소득에서 공제하는 회계항목이다. 이는 원래 투자된 자본의 양을 다시 회수하는 것으로서 투자된 자본에 추가되는 이윤과는 다르다. 허드슨의 책 J is for Junk Economics의 ‘감가상각’ 항목의 한 대목은 이렇다. “감가상각은 칼 맑스에 의해 처음 가치이론에 추가되었다. 맑스는 께네Quenay의 경제표를 비판하면서 께네가 곡물 가운데 종자로 따로 떼어 자본비축고를 유지하고 다음 해 파종에 쓸 몫을 무시했음을 지적했다.” ② 흥미롭게도 허드슨의 아버지도 트로츠끼주의자이며, 허드슨이 태어난 미니애폴리스는 당시 미국 유일의 트로츠끼주의 도시였다.― 정리자]

▷ [맑스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법칙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보다 더 오해된 것은 없다. 맑스가 말한 것은 자본이 생산을 기계화함으로써 노동에 비해 증가할수록 이윤보다는 감가상각의 형태로 회수되는 자본이 양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맑스는 비용회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중농주의자들과 께네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께네의 경제표는 경제에서 소득의 순환, 지주들이 받은 지대의 순환을 말한다. 지주들은 일부는 소비하고 일부는 지출하는데, 여기서 빠진 것은 지대소득에서 새 종자 곡물을 사는 데 지출되어야 하는 양이다. 맑스는, 공장제 생산을 하는 산업자본주의에서는 기계가 있는 공장을 짓는 데 백만 달러를 쓰고 그것으로 이윤을 창출할 것이라면 투자된 백만 달러에 대한 이윤(5%, 즉 1년에 5만이라고 치자)만 얻는 것이 아니라 백만 달러도 회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장과 장비가 마모되거나 노후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책정되는 가격에는 이윤분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투자된 자본의 회수분도 포함된다. 그래서 맑스가 이윤율 저하를 설명하는 대목을 직접 읽지 않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나의 책 『거품과 그 너머』(Bubble and Beyond, 2012)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에 대해서, 그리고 이윤율 저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냥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단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서 허드슨이 말하는 것은 경제학이라는 전문분야의 틀 내에서의 것이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이 있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4장 「법칙 그 자체」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 이윤율의 점진적인 저하경향은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점진적 발달의 표현―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특유한 표현―에 불과하다.” 이윤율 저하 경향이란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의 자본주의적 표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생산자의 생산능력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는 소외의 형태로 즉 자본의 힘으로 나타나고, 이것이 자본(화폐자본)의 물신화를 낳는다.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에서는 생산자의 생산능력이 높아지는 과정이 이와는 다른 식으로 표현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아직 자본을 넘어가는 과정이 현실적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데, 맑스가 늘 말한 대로 우리로 하여금 자본을 넘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조건도 생산자의 높아진 생산 능력 이외의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는 ‘사회적 개인’과 ‘일반지성’을 말하는데, 전자는 생산능력이 높아진 주체성(생산자)의 특성을 가리키고 후자는 그 능력이 기계(맑스의 시대에는 컴퓨터가 없었지만, 지금이라면 디지털 장비들이 여기서 말하는 ‘기계’의 주된 구성부분이 될 것이다)를 통해 구현되는 측면을 가리킨다. 이에 관해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다중』, 『공통체』등의 저작에서 이미 충분히 말해놓았다.―정리자]

[감가상각에는 과세가 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부동산의 경우에는 더 기괴하다. 미국에서는 부동산의 가치가 상승하는 동안에도 건물이 실제로 가치를 상실하는 척할 수 있다. 건물에 수명이 있어서 건물주가 자본을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부동산(이는 실제로 토지를 의미한다)이 기계처럼 마모되거나 컴퓨터처럼 노후화되는 양 말이다.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내가 사는 뉴욕시에는 건물이 오래될수록 더 가치가 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지관리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건물주들은 소득의 약 10%를 건물의 유지보수에 지출한다. 그런데 건물주들은 건물이 닳아 없어지는 양 감가상각을 적용하고 그 때문에 그들은 이윤을 버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회수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건물을 완전히 감가상각한 다음에 그것을 서로 팔거나 자신이 다시 사서 전체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 그래서 같은 건물이 계속해서 닳아 없어지는 양 계속해서 감각상각한다. 계속 교체되는 소유주들은 이에 대해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 [허드슨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 부의 격차에 대한 분석으로서 아직도 타당하다고 보는 것 같다는 말에 대해]

맑스는 캐시플로(cash flow) 일부의 구성에 대해서 말했다. (캐시플로는 ‘이자, 세금, 감가상각비, 무형자산상각비 차감 전 이익’이다.) 캐시플로 내에서는 자본이 기계를 사용하여 더 자본 집약적이 되는 정도로 감가상각의 역할이 이윤에 대비하여 상승한다고 맑스는 말했다. 따라서 핵심은 자본의 회수와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의 관계이다.[여기서 끊겨서 다소 불명확한데, “자본의 회수”라고 했을 때에는 불변자본의 회수로 이해하고, 노동고용 등에 지출된 것의 수익은 가변자본이 낳은 이익인 이윤을 포함한다고 이해하면 될 듯하다―정리자]

 

① return of capital  자본의 회수  투자한 자본양이 회수되는 것. 부채의 경우라면 원금이 회수되는 것에 해당한다.
② return to capital  자본 수익 투자한 자본양보다 증가한 양. 부채의 경우라면 이자에 해당한다.
③ capital gains 자본 이득 ‘자본’(capital)이라는 말이 들어갔으나 사실은 생산에 자본으로서 관여하지 않은 자산의 가격이 오름으로써 얻은 이득을 가리킨다.
* 여기서 ‘자본’의 두 유형/두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자본이고 다른 하나는 생산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증식되는 자본이다. 전자의 전형은 산업자본이고 후자의 전형은 대부자본이다. (산업자본도 화폐의 형태로 차입되므로 ‘화폐자본’이라는 말은 너무 넓다.) 흥미롭게도 위의 ‘자본 이득’의 경우처럼 ‘자본화’(capitalization)도 생산과는 무관한 과정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맑스의 『자본론』3권에 나온다. “가공자본의 형성은 자본화(capitalization)라고 불린다.(Die Bildung des fiktiven Kapitals nennt man kapitalisieren.) 모든 규칙적인 주기의 수입은, 평균이자율로 대출된 자본이 낳을 수입이라고 간주함으로써, 평균이자율을 기초로 자본화될 수 있다. (···) 이리하여 자본의 현실적인 가치증식 과정과의 모든 연관은 그 최후의 흔적까지 모두 없어지고, 자본은 자신의 힘에 의해 저절로 증식된다는 관념이 확고하게 된다.” 한 달에 2백만 원을 받는 노동자가 있고 당시 이자율이 5%라면 2백만 원을 이자로 계산했을 때 원금은 2백만 원에 20을 곱한 4천만 원이다. 이제 이 노동자는 4천만 원을 가진 자본가로 탈바꿈한다. 모든 개인을 기업가로 만드는 것은 오르도자유주의(독일에서 발생한 신자유주의적 경제사상)의 목표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 시대가 이런 ‘자본화’에 기반을 둔 사고가 만연되어 있고 ‘자본화’ 세력이 주된 정치적 권력을 가진 사회라면 이 점에 관한 한 우리 시대는 맑스가 본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가치증식(생산과정)으로부터 분리된 것―의 시대일 것이다. 허드슨이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이다.

## 이 세상에 현재 존재하는 화폐들의 양을 직관적으로 가시화한 사이트를 보려면 http://money.visualcapitalist.com/worlds-money-markets-one-visualization-2017/로 가보라.




쓰레기 경제학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7)에서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을 다룬 부분을 몇 개 발취하여 그 내용을 옮기거나 정리한 것이다.

[서언 : 갈림길에 선 경제와 경제이론]

우리는 2008년의 경제 위기 시에 미국과 유럽이 경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들과 증권소유자들을 구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정부들이 구제금융과 ‘양적 완화’에 수조 달러를 지출하여 거대 채권자들과 투기자들을 악성 대출과 도박으로 손해를 입을 처지에서 구해주었지만, 공공 및 민영 기반시설은 붕괴되도록 방치되었고 중위임금(median wage, 근로자 임금 중간값)은 하강하고 있다. 연금 저축은 거덜이 났고 사회보장을 삭감하는 압박이 일고 있다.

‘쓰레기 경제학’(Junk Economics)이 이 모든 것의 커버스토리이다. 이 쓰레기 경제학은 자신이 과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금융세력의 후원을 받아 소득과 부를 상층부에 몰아주는 식으로 재분배하며 19세기 고전경제학자들과 진보 시대(Progressive Era, 1890-1920)의 개혁가들이 주장한 정책들을 전도시키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는 진보적 과세는커녕 1%가 아니라 99%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옹호한다.

그 효과는 중산층을 부채에 빠뜨리면서 경제로부터 화폐가 빨려나가 1%에 흡수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생기는 긴축 상태가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을 사유화하는 데 구실로 사용된다. (고전경제학자들은 이 공공 자산과 자연자원이 정부의 제대로 된 기능들을 운영하기 위한 조세기반을 제공하기를 바랐다.) 부채에 묶인 지방 및 일국 정부들은 채권자들에게 공공 기반시설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이런 사유화의 핑계는 이것이 기본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팔아넘겨진 공공 기반시설은 새로운 소유주들이 독점 가격을 매길 기회를 제공했으며 이는 제공 가능한 기본 서비스의 감소를 낳았다. 미국에서 강제적으로 사유화된 오바마케어(Obamacare)는 가구들의 예산을 쥐어짜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 영국에서는 사유화된 철도와 물이 가장 심한 사례이다.

오늘날 사회는 봉건제의 유산과 귀족들·은행업자들·독점가들의 세습적 특권들로부터 해방되어 약속된 풍요로운 여가 경제로 나아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날의 금융 엘리트들은 사회를 희생시키면서 그들의 유서 깊은 ‘공짜 점심’(불로소득)을 증가시키기 위해 ‘쓰레기 경제학’을 장려하고 있다. 그들이 경제 일반에 창출하는 부채 간접비용은 한 세기 전에는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금융 계층은 빚을 지는 것이 마치 자산 가격을 부풀림으로써 경제를 풍요롭게 하는 양 미화했다. 임금, 이윤, 지대(임대료)는 기하학적으로 늘고 있는 이자를 지불하는 데로 들어간다. 한편 국가 통계는 사람들의 주의를, 부채 서비스가 어떻게 가구 및 사업 소득을 빨아들이고 있는지로부터 다른 데로 돌린다.

그 결과 나오는 금융 긴축 상태가 야기하는 고통은 결코 자연법칙의 결과가 아니며,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시장’이라는 고전적인 이상의 이러한 전도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이중어(Doublespeak)의 새로운 어휘를 통해 장려된다.[오웰의 『1984년』에서 ‘Newspeak’(신어)는 가상의 초국가 오세아니아Oceania의 공식 언어이다. ‘doublethink’(이중사고)와 합하여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이중사고’는 서로 모순되는 것을 동시에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이다. ―정리자] 예를 들어 ‘개혁’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용되는 바로는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중산층을 창출하는 것을 촉진했던 진보 시대의 개혁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이 진보적 과세, (기본적인 경제적 서비스 비용을 낮추기 위한) 공공 기반시설 지출, 뉴딜 및 기타 (화폐와 금융을 약탈적 독점이 아니라 공공 유틸리티로 만드는) 입법이라는 점은 잊혀졌다.

더 현실에 기반을 둔 분석과 정책입안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이 책은 경제학을 (그 어휘와 기본 개념에서부터 시작하여) 하나의 온전한 학문분야로서 재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언 끝]

============

[기타 발췌 정리1]

「사기로서의 경제학」(“Economics as Fraud”)을 쓴 이래 나[허드슨]는 현실을 다루는 경제학과 ‘쓰레기 경제학’ 사이의 차이가 훨씬 광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의 새로운 글 「경제학 방법론은 이데올로기이며, 정책을 좌우한다」(“Economic Methodology is Ideology, and Dictates Policy”)는 어떻게 방법론이 내용을 결정하는지를 설명한다. 방법론이 오늘날의 주류가 규정하는 범위, 수학, 그리고 심지어는 통계조차도 만들어낸다. 쓰레기 경제학의 본질은 ‘경제’를 ‘시장’의 관점에서만 협소하게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현상유지를 의미할 뿐이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경제모델들은 오늘날의 자산소득자(rentier) 경제에서 부채가 가져오는 정치적·환경적·법적 파급효과들을 배제한다.

[기타 발췌 정리2]

쓰레기 경제학과 이 경제학이 사용하는 완곡어법 어휘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원인으로부터 (따라서 필요한 치유책으로부터)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사고의 도구들을 제한하는 것이 목적이다. 가령 낙수 이론은 현실을 숨기는 어휘로 짠 외투로 자산소득자의 기생적 존재를 가린다. 많은 채무자들의 삶은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의 경제적 화신에 의해 장악되는 듯하다. 정치가들은 이주민들 또는 다른 소수민족들이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로비스트들은 임금노동자들과 중산층에게 그들이 빚에 구속된 상태에 있는 것은 높은 주택비용, 모기지에 의해 금융을 제공받는 교육 및 생활, 학자금 융자, 신용카드 빚 때문이 아니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1%에게 높은 세금을 징수하고 사업체들을 ‘과도하게 규제한다’(특히 맑은 공기, 건강한 식품, 정직한 회계를 증진하기 위한 규제)는 비난이 정부에게 가해진다.

[기타 발췌 정리3]

기만을 핵심으로 하는 ‘쓰레기 경제학’은 진보 시대의 실질적인 개혁을 전도시켜 신자유주의적 협정을 법, 과제, 무역규칙에 대한 ‘개혁’으로서 내세운다. 이른바 ‘전문가들’(기업의 로비스트들)은 경제를 민주적 정부의 손으로부터 빼내서 세계의 금융 중심들에 안겨주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고 그에 대한 합리적 대안은 없는 양 진보를 재정의한다. 이 이데올로기적인 신냉전(New Cold War)은 미국의 통제 아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orld Bank)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에 의해 집행된다. 월가와 그 위성(외곽) 금융기관들을 위하지 않는 정책들을 시행하는 나라들은 비(非)자유로 가는 길을, ‘타자’의 길을 좇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1세기 전에는 진보로 생각되었던 것을 전도시킨 것은 자유의 희화화이며 저열한 거짓말이다.

[기타 발췌 정리4 : ‘쓰레기 경제학항목의 설명]

‘쓰레기 경제학’이란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착취적인 제로섬 자산소득사냥 행위로서 서술하지 않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서술하기 위해서 증진시키는 홍보활동을 가리킨다. 쓰레기 경제학은 자산소득자들(rentiers)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유토피아적 평행우주에 적절한 전제들을 바탕으로 하는 일종의 공상과학소설이다. 좋은 소설이나 희곡에는 일관되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오지만, 이 유사과학의 기준은 단지 그 전제들의 내적 일관성이지 세계의 리얼리즘적 형상화가 아니다. 많은 가장 칭송받는 경제학자들은 가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에 관해 선험적인 공리들로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금융 포퓰리즘의 ‘낙수’ 전략은, 상위 1%에게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나머지 99%에게 가장 좋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려면 생산적 활동과 약탈 행동을 구분하는 자산소득(rent, 금리, 임대료, 지대)이라는 고전적 개념을 삭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카고학파의 ‘합리적 시장’ 이론이나 래퍼 곡선(Laffer Curve), 한계효용이론 같은 자유 시장 경제학은 단기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장기적인 것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 경제의 큰 그림을 무시한다. 부채는 나중보다는 지금 소비하고 싶어 하는 성급한 소비자들이, 또는 장기적인 자본투자를 위해 차입함으로서 이윤을 만들어내려는 사업가들이 맺는 계약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준거틀에는 하나의 경기 주기에서 다음 주기로 이전되는 부채의 상승하는 총액을 분석할 여지가 없다. 공공 기반시설 지출 또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한다. 그래서 정부 차입은 단지 경제적 이익 없는 조세로서, 경제에 짐이 될 뿐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정부 지출은 단지 소비자물가를 상승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 고용을 증가시키거나 사업체와 가구들에게 기반시설 서비스의 경비를 낮추어 주는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건전한 화폐’는 정부가 아니라 은행들에 의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전제들의 목표는 화폐 정책과 주류 경제사상을 장악하여 그것을 계급 전쟁(99%와의 싸움)의 무기로 삼는 것이다.

오류가 반복되는데도 성공이 널리 이루어진다면 그 뒤에는 항상 특수한 이해관계가 도사리고 있게 마련이다. 가장 넓게 보면 (맑스가 말했듯이) “과학적인 부르주아 경제학은 ··· 이제 더 이상 이런 혹은 저런 정리(theorem)가 참인가 아닌가를 묻지 않고, 자본에 유리한가 해로운가, 편한가 불편한가, 정치적으로 위험한가 아닌가만을 묻는다···. 사심 없는 탐구자 대신에 고용된 논객들이 들어섰다. 진정한 과학적 연구 대신에 현재의 상태를 옹호하려는 흑심과 사악한 의도가 들어섰다. ”[원주: Marx, “Afterword” to the 2nd German edition of Capital (Vol. I, [1873], London, 1954), p. 25.]




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


1990년대에 중부 오리건 주의 많은 지역 사회가 ‘삼림 전쟁’으로 인해 분열됐다. 환경운동가들은 미국 산림청을 관리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수십 년간 벌목 회사들에게는 공유림(公有林)을 모두 베어 내고, 나무 단일재배를 시작하고, 산간에 생태학적으로 해로운 길을 건설하도록 허용되었다.

연방법원 판사가 미국의 태평양 연안 북서부 지역에서 시행 중인 벌목 작업을 사실상 중지시킨 명령을 내린 1991년에 환경운동가들이 승소했다. 멸종 위기에 처한 점박이올빼미가 많은 논쟁의 초점이었던 동안, 알을 낳기 위해 상류로 헤엄치는 태평양의 연어를 포함한 전체 생태계가 위험에 처해있었다.

종종 소송과 정부의 명령 외엔 다른 방도가 없고 1991년 소송은 분명히 필요했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것은 그 여파다. 산림청은 숲을 단순히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 야생 보호 구역으로 지정하는 대신에 주목할 만한 협력적 거버넌스 실험을 착수시켰다.

이 지역의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은 의회 정치, 산업 로비 활동, 분열을 초래하는 공적 태도 등에 의해 움직이는 관료주의적 절차의 표준적인 체제에 의지하지 않고 싸이유슬로 국유림(Siuslaw National Forest)을 관리하는 ‘유역 협의회’(watershed council)를 만들었다. 20년 뒤, 이러한 열린 커머닝 과정은 숲 생태계를 주목할 만하게 복원했는데, 이는 정치와 형식적인 법률 제도에 의해 추진된 이전의 숲 관리 체제에 대한 암묵적인 고발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작가이자 감독인 앨런 호닉(Alan Honick)이 ‘환경윤리를 위하는 산림청 직원 모임’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제작한 30분짜리 훌륭한 다큐멘터리 <숲을 바라보기>(“Seeing the Forest”, Alan Honick, 2015)에 나온다. 호닉은 어떻게 보호구역 외부에 남아 있는 오래된 숲 대부분을 오리건 주의 공유지(公有地)가 포함했는지를 기록한다.

이 숲들은 복잡하고 아주 오래된 생태계였다. 특히 캐스케이즈(Cascades) 서쪽 지역이 그러한데, 그곳에서는 태평양 폭풍우가 가져다주는 습기가 풍부하고 다양한 온대성 우림을 만들어냈다. 수백 종의 동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이 서식지에 의존했다.

40년 동안 이 숲들은 산업체들이 사유지에 사용한 것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여 벌목되었다. 어마어마한 넓이의 자리가 싹 베어진 다음에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들의 단일재배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그 나무들이 충분한 크기가 되면 모두 베어지고 다시 다른 나무들이 심어질 예정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계속 반복된다.

1991년 소송의 여파로 들끓는 적대감과 소송이 다시 폭발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일자리 대 환경’이라는 낡고 친숙한 서사에 바탕하고 있는 것으로서, 정부가 중재하고 해결해야 할 분쟁이었다.

그러나 오리건 주는 새로운 공간과 공유된 서사를 개시하는 ‘북서부 숲 계획’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싸이유슬로 유역 협의회’(The Siuslaw Watershed Council)는 숲에 관심이 있는 누구라도 열린 원탁회의에 초청하여, 숲을 어떻게 관리하고, 벌목 회사, 환경운동가, 레저어획인, 지역공동체, 여행자 등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어떻게 해결하거나 완화할지 논의하도록 했다. 결과는 모두의 동의에 기반을 뒀다.

어떤 환경운동가는 벌목 산업의 대표와 결코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의 집단으로서 앉아서 이야기하는 과정은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행동 경험이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의심을 극복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과거의 차이는 차치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에 위험을 무릅쓰는 과정이었다. 협의회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산림청 직원이 설명했듯이) 어떻게 기금을 쓸지를 포함하여 싸이유슬로 숲과 관련하여 ‘법에 버금가는 구속력이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진다.

이 과정은 하천에서 연어를 복원하는 공유된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가자들 사이에 입장의 차이가 남아있지만 모든 이들은 형식적인 절차로 이루어진 정치나 법률 제도를 통해 ‘승리’하기보다는 실행가능한 해결책 찾기를 지향한다.

이 과정의 한 장점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관료적·법률적인 한계를 건너뛰기 위해서 비공식적인 합의를 해왔다는 것이다. 연어의 일생은 시내의 상류에서부터 바다에 이르는 전체 유역을 가로지르는데, 그 넓이는 산림청의 토지를 훨씬 넘어서 많은 사유지와 공동체 토지를 포함한다. 유역 협의회는 이런 관할 문제 중 일부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이 관료적으로 운영되는 과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계획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그 계획에는, 흔히 법적 폭력, 많은 돈, 문화 양극화가 만연한 규제적인 과정들에 들어있다고는 말하기 힘든 내장된 합의와 정당성이 있다.

유역 협의회는 산림청이 전형적인 관료체계로서 행동하지 않게 할 가능성이 높은 모든 종류의 해결책을 착수시킬 수 있었다. 협의회는 도로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오래된 벌목 도로를 사용중지시키는 한편 선택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책임감 있는 방법으로 숲의 간벌(間伐)(([역자 주] 한국 산림청 산림임업용어사전 참고 http://www.forest.go.kr/newkfsweb/kfi/kfs/mwd/selectMtstWordDictionary.do?&pageIndex=1&searchWord=&searchType=&wrdType=&searchWrd=&mn=KFS_02_08_06_05_01&wrdSn=93))을 감독했다. 협의회는 연어가 상류로 이동할 수 있도록 시내를 닮은 지하수로를 만드는 등 시내와 유역의 생태적 기능을 회복시켰다. 물고기들이 죽은 나무들이 있는 서식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죽은 나무들은 시내 바깥으로 끌어내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타 등등.

2012년에 큰 폭풍이 숲을 강타했을 때 시내와 도로에 미친 영향은 극히 적었다. 실제로 대단히 강력했던 1996년 폭풍의 충격보다 훨씬 적었다. 물론 이러한 효과적인 숲 관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뉴스’로서 자격을 얻을 만한, 파괴된 모습을 보여주는 종말론적 사진이 없기 때문에 더 어렵다.

호닉의 절제되고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열린 협력의 잠재성에 관해 강력히 주장한다. 열린 협력은 숲만큼 크고 생물물리학적인 것도 성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미국 문화의 시장 개인주의자들도 커머닝을 통해 근본적인 변형을 이룰 수 있다. ♣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공생관계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The Bubble and Beyond : Fictitious Capital, Debt Deflation and Global Crisis (201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정리자 설명]

아래는 마이클 허드슨의 책『거품과 그 너머 ― 가공자본, 부채 디플레이션 그리고 전지구적 위기』(The Bubble and Beyond : Fictitious Capital, Debt Deflation and Global Crisis) 3장의 한 절―“The Symbiosis between the Financial, Insurance and Real Estate (FIRE) Sectors”―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부채 :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을 쓴 인류학자 그레이버(David Graeber)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추천한다.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마이클 허드슨보다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책을 구성하는 예리하고 훌륭한 에세이들은 정말이지 경제학을 배우는 모든 1학년 학생들에게 과제로서 부여되어야 할 것들이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경제학이 자신의 고결한 전통―허드슨이 여기서 그토록 훌륭하게 구현하는 바의 전통―을 배반하고 권력의 한갓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의 궁극적 증거이다.

허드슨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검색을 해보니 그의 존재를 인지한 두 블로그(, )가 잡힌다. (더 있을 수 있지만 계속 검색할 여유가 없다.) 그의 책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고, 신문들에서 그를 다룬 기사도 거의 없는 듯하다. 이는 어쩌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한편으로 맑스에서 정점에 이르는 고전경제학에 비탕을 두어 현재의 경제상황을 분석하는 경제학자는 점차 사라지고 있으며(이는 내가 과문한 탓일 수도 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자 지망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면 『자본론』 같은 책은 읽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언론은 그 주요 광고주가 오늘 소개할 내용의 표적인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이니 허드슨을 소개하면 주요 광고주들의 ‘적’을 소개하는 셈이 된다. 사실 허드슨은 여러 경제 이론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방대함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① 맑스에서 정점에 이른 고전경제학의 문제의식(경제 영역에서 봉건적 특권의 완전한 제거를 통한 자유로운 생산의 실현)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② 그러한 관점에서 현대 자본 세력의 가장 주도적인 부분이 어떻게 경제의 핵심인 생산활동에 해로운 짐이 되고 있는가를 폭로하고 ③ 아울러 그 해결책의 주요한 부분으로서 부채의 탕감이 불가피함을 (부채탕감의 역사에 대한 서술과 함께) 역설한다는 점이다. 사실 나는 허드슨이 맑스의 자본 분석에 기반을 둔다는 점이 마음에 들고 이에 덧붙여 그가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현실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서 많이 배우려고 하지만, 내가 공통적인 것(the common)에 초점을 두는 것과 달리 그는 공적인 것(the public)에 초점을 두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여기에는 여러 중요한 논점들이 포함된다.) 물론 그의 책들을 막 읽기 시작한 상태이기에 이런 생각은 현재로서는 어설픈 가설 상태의 것이고 일정한 양의 독서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조금이라도 확연해질 것이다. 혹 이러한 차이가 있더라도 그에게서 배울 것이 매우 많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그래서 (이전 블로그의 글에서도 시사했듯이) 허드슨의 저서, 인터뷰 가운데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부 내용들을 틈틈이 소개할 생각이다.


금융·보험·부동산 부문의 공생관계

산업혁명이 동력을 얻자 경제학자들은 은행업과 보험이 산업 시스템에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경제 이론가들의 시선은 여전히 산업 테크놀로지와 혁신에 맞추어져 있고 인구는 농업에서 도시 산업으로 이동한다. 교과서들(과 로비스트들)은 은행가들이 산업자본가들에게 신용을 제공하여 새로운 공장을 짓고 노동자들을 고용하게 함으로써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한다. 대출은 자본 투자에 의해 생성되는 이윤에서 상환될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교과서의 이런 매력적인 이야기가 금융기관들에게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는 주장에 사용된다. 금융기관들의 신용창조가 경제적 복지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이자는 (기업사냥꾼이 약탈적인 신용을 사용할 때조차도) 세금이 감면되어야 할 지출로 간주된다.

그런데 지난 세기에 걸쳐서 주로 금융·보험·부동산 부문 사이에 공생관계가 출현했다. 현대 경제에서는 부동산이 자산의 큰 비중을 차지해왔다. (그래서 대출의 담보물이 된다.) 미국과 영국의 상업은행 대출의 약 70%는 모기지 신용의 형태를 띤다. 미국 전체에서 부동산의 추정되는 시장가치는 모든 공장 및 장비의 감가상각된 가치를 초과한다.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들은 그들이 일하는 은행의 대출 포트폴리오 증가치의 대부분이 모기지론으로 구성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런 신용이 급속히 창조되면 될수록 더 많은 기금이 새로운 모기지 금융으로 흘러들어가서 부동산의 가격을 올린다. 그리하여 적어도 단기나 중기적으로는 그러한 대출이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금융화되는 재산 가운데 토지(장소의 가치)가 일반적으로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하며 그 재산이 팔렸을 경우 발생하는 자본 이득의 전체를 차지한다. 산업 기계가 손모될 경우 보통 기술 발전에 보조를 맞추려면 철거되어야 하기 때문에 감가상각액(자본감모충당금, capital consumption allowances)의 대부분은 부동산 부문에서 신고된다. 그런데 건물들은 계속적으로 감가상각될 수 있고, 따라서 그 소유주에게 (특히 이자가 소득에서 공제될 수 있는 만큼) 소득세 부담을 덜어준다. 그 결과 조세제도는 (특히 미국에서) 산업보다 부동산에 훨씬 더 유리하다. 부동산을 담보로 돈을 빌리기가 쉬우며 총수익(세후 소득 + 자본 이득)이 더 높다. [자본이득 capital gains : 구매한 자산의 가격이 올라서 얻은 이득. 허드슨의 J is for Junk Economics에 따르면 미국은 정치가들에게 돈을 대어 자본이득에 부과하는 세율을 일반적인 소득세의 반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정리자]

금융업은 세금징수원에게서 해방된 돈이 이자를 지불하는 데 쓰일 수 있음을 알고는 부동산에 대한 특별한 세금우대조치를 지지했다. 부동산 소유주들에 의한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의 뒤를 금융 부문의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이 이었으며, 이에 비하면 제조업 부문의 정치후원금과 로비활동은 초라했다. 그런데 부동산 부문이나 금융 부문은 (보험 산업의 지원을 받아서) 자본 이득에 부과되는 세금의 감면을 위해 로비를 하면서 이 이득이 혁신의 결과로서 산업에 귀속되는 양, 그리고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인 양 제시한다. 현실은 이와 다르다. 대부분의 자본 이득은 부동산에 귀속된다. 미국의 국민대차대조표를 보면 대략 199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증권시장 수익이 처음으로 부동산 수익 증가분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마찬가지로 해로우며, 이러한 사태전개의 이유는 8장에서 설명된다.

왜 경제학자들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가? 부(富)가 제조업의 성장보다 토지가격 이득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부동산은 결코 산업처럼 낭만적이지 않다는 사실에서 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혁신가들과 창조자들을 찬양하고 지주들은 원망한다. 또한 은행가들과 보험회사들을 창조적이기보다 기생적이라는 이유로 원망한다. 모기지 대출의 성장으로 토지의 공급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며, 토지의 장소 가치는 공공 기반시설 투자와 번영의 일반적 수준에 의해 창출된다는 명백한 사실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어떻든 재산을 담보로 하는 대출의 대부분은 이미 존재하는 토지와 건물을 담보로 한다. 부동산 대출의 성장분은 이렇듯 대출받는 사람들에게 서로 경쟁하여 가능한 한 많은 재산을 구입할 신용을 제공하는 데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토지가격을 올린다. 그 결과는 산업의 붐이 아니라 거품인 것이다.

금융업의 대변인들은 이런 종류의 자산 기반 대출이 생산적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이 부동산 소유주들에게 이자를 지불할 수 있고 결국에는 자본 이득을 얻게 하는 재산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거대한 신용시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미국 금융업의 로비스트들은 부동산업의 로비스트들과 손을 맞잡고 부동산에 대한 세제상의 우대조치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은행들은 세금으로 납부되지 않은 돈은 모두 이자를 갚는 데 들어가리라는 것을 안다. 개발자들이 대출자에게 내놓을 모기지의 크기를 놓고, 따라서 그들이 임대료(rent)로부터 은행에 갚을 모기지 부채서비스액[일정 시기 동안 이자 및 원금의 상환에 들어가는 돈의 액수―정리자]의 크기를 놓고 서로 경쟁을 한다. 이 경쟁이 계속되어 크기가 상승하면 모든 순 임대소득이 이자로 지불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모기지 대출은 보통 재산 구매가격의 80%에서 100%를 (혹은 2008년 9월의 붕괴에 이르는 시기 동안의 거품경제에서 보듯이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제공한다. 이는 자기자본에 비한 부채의 비율로서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러한 식의 모기지 부채의 점차적 증가가 1980년대에 기업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정크본드 금융에 모델을 제공했으며, 영국, 유럽 대륙, 제3세계에서 공공 자산이 사유화되는 시류에 모델을 제공했다. 이미 존재하는 부동산·기업·공기업들을 그렇게 구매할 경우의 변별적 특징은 새로운 실질적인 투자를 창출하지 않고 새로운 대출이 추가된다는 것이다. 자본의 새로운 실질적 형성이 이루어지는 대신에 일반적으로 정리해고와 기업분할이 일어난다. 수입에서 이자와 분할상환금을 갚는 데 들어가는 액수가 최대일 경우 운영경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탈산업적’ 관행이 낙관론자들이 산업혁명이 시작할 때 그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이러한 동학을 낳은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의 은행시스템은 저축한 돈을 새로운 생산수단의 기금으로 사용하지 않고 경제의 자산에 부채라는 짐을 지우고 있을 뿐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산업화 이전의 대출방식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산업화 이전의 고리대금업이 개별 가문 대출자들에 의해 지배되었다면, 지금 새로운 산업화 이후의 부채 시스템은 대규모로, 기업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대출이 산업과 융합하여 금융 부문이 제조업체들을 지배하게 되었고 제조업체들을 마치 가능한 한 많은 임대소득을 짜내고 그 다음에는 자본 이득을 취하고 팔아버릴 부동산인 양 취급하게 된 것이다.




홀로체인―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넘어서


  • 저자  :  Hank Sohota
  • 원문 : Beyond Bitcoin and Ethereum — a fairer and more just post-monetary sociopolitical economy (2019. 1. 2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화폐는 사회적 구축물로서 사람들의 신뢰에 의존한다. 그 기능은 ① 가치저장 ② 교환수단 ③ 회계단위, 이 셋이다. 그런데 화폐가 큰 규모로 작동하려면 표준화가 필요하고, 이는 불가피하게 중앙집중화를 낳는다. 불행하게도 중앙집중화는 ‘화폐의 경화적 성격’(hardness of money)[가치의 안정성(‘uninflatability’)]과 사람들의 신뢰를 침식한다. 의사결정이 소수의 손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수는 그들의 책임을 오용해온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화폐의 경화적 성격과 신뢰의 수준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앙집중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 문제의식은,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 없이 어떻게 시공간을 가로질러 연계하고 협동하고 협력하는가?’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나키’라는 성배(聖杯)를 나타낼 수도 있다. (여기서 ‘아나키’는 단순한 무법, 혼란, 무질서와 동의어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코인의 한계]

비트코인은 ‘경화( 硬貨)의 중앙집중화’ 문제를 풀기 위한 시도이다. 이는 더 큰 그림에 넣고 보면 좋은 출발점이다. 비트코인은 이 일을 위해 해시체인(hashchain) 블록들의 분산된 원장을 사용해서 변경 불가능성을 부여하고, ‘하드 코딩’을 통해 가치의 안정성을 확보하며 탈중심화된, 그러나 온전히 분산되지는 않은 작업증명(Proof of Work, PoW)을 사용하여 단 하나의 네트워크 전체에 걸친 타임라인을 구축하고, 합의 메커니즘을 통해 검열 불가능성을 확보한다. 이렇듯 개별 주체나 행위자보다는 네트워크를 신뢰함으로써 ‘신뢰 부재’(trustlessness)의 한 형태가 형성된다.

그런데 실용상의 한계 및 철학적 한계로 인해서 이 접근법은 부분적이고 비실용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한다. 충분히 분산되어 있지 않다는 것, 충분히 빠르지 않다는 것, 비용 효율이 충분히 높지 않다는 것, 충분히 규모를 키우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한계이다. 더군다나 비트코인은 앞으로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생성에 재정적으로 큰 혜택을 주지 못하는 한, 아니 더 나아가 녹색에너지 기반시설의 구축에 재정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한, 코인 채굴에 들어간 전력 소비 때문에 기후변화를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많이 밀어붙였다는 비난을 들을 수밖에 없다. 비트코인의 모든 중기 개선책들이 의도된 효과를 발휘한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말한 결점들은 여전히 남는다. 그렇더라도 비트코인의 네 핵심 특성들―변경 불가능성, 가치 안정성, 검열 불가능성, 몰수 불가능성(unconfiscatability)―은 역사적 성취로 남아있다.

[이더리움의 한계]

이더리움은 반드시 비트코인이 해결하려는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비트코인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원장 기술을 바탕에 깔고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한계를 가진다. 여기에 더 추가할 것으로서, 권력의 중앙집중화 문제, 비트코인에 비한 암호화페로서의 단점들, 스마트계약의 문제점들, 지분증명(Proof of Stake, PoS)이라는 합의 메커니즘으로의 이동 시도 등이 있다.

이더리움이 한 일은 수 천 개의 대안코인들을 출시한 것인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말이 되는 것 같지 않다. 또한 이 코인들이 주장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도 주지 않는다. 이것이 새로운 자산계층과 규제되지 않는 시장에서 일어난 일임을 감안하다면, FOMO-FUD라는 ‘서부’가 출현하더라도 놀랄 것은 없다. [FOMO (Fear Of Missing Out) : 코인이 막 상승 중일 때 지금 사지 않으면 돈을 못 번다는 일종의 강박감에 추격매수하는 것을 이르는 말; FUD (fear, uncertainty and doubt) : 하락장에 막연한 두려움으로 팔아버리는 것을 이르는 말.― 정리자]

[상호적 자기주권(mutual self-sovereignty)―공정하고 정당한 사회정치적 경제의 토대가 되는 핵심 구축물]

경제는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번영 가능성(thrivability)에 강하게 집중해야 한다. 다소 단순화하자면, 번영 가능성의 핵심부에는 집단의 유대(solidarity)와 개인의 주권 사이의 변증법이 존재한다. 그런데 유대와 주권은 사실 동일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 둘은 서로를 구성하며 공생적으로 함께 진화한다. 이 둘은 ‘변증법적 특이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상호적 자기주권을 통하여 조화에 도달한다. (음양의 상호작용과 같다.) 이 동학에서는 사회적 결속과 개인의 주권이 둘 다 강한 동시에 유동적이다. 이는 도교 철학에서 종종 물의 은유를 사용하여 나타내는 개념이다. 저자의 생각에 이 영속적인 동학을 통하여 인간의 사회 시스템의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이 높아진다. 그리고 자아에 대한 인식과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영속적으로 출현/창발한다. [‘anti-fragility’ 개념을 만들어낸 탈렙(Nassim Nicholas Taleb)에 따르면 ‘resiliency’(복원력)는 실패로부터 회복하는 능력이고, ‘robustness’(튼실함)는 실패에 저항하는 능력이며, ‘안티프래질 특성’(anti-fragility)은 스트레스, 휘발성, 소음, 실수, 외부로부터의 공격, 실패의 결과로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이 증가하는 속성을 가리킨다.―정리자]

더 나아가, 그리고 더 중요한 점으로서, 그런 모든 게임에서 규칙들은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참여자들에 의해서 시행되고 운용된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거버넌스이다. 규칙들의 상대성이 존중되어야 하며, 전체적 합의는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런 합의가 필요하다면 우리는 다시 중앙집중화의 문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특히 이들을 지탱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주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들은 비판적이고 중요한 촉매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실제 작동에 있어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에 비트코인의 분산된 원장 테크놀로지가 근본적으로 새로운 P2P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과제를 담당할 수단이 되리라는 생각에 고무된 사람들조차 지금은 그 한계를 인식하고 또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더리움 관련 개발자들 가운데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들은 환멸감을 느끼고 있다.

[홀로체인]

이와 달리 홀로체인(Holochain)은 우리를 우리가 가야 할 곳에 데려다 줄 것이다. 홀로체인은 인류의 역사에서 상호적 자기주권의 문제와 진정으로 씨름한 최초의 테크놀로지이다. 홀로체인의 효율과 효능은 네트워크의 사이즈가 커질수록 향상된다. 사실 홀로체인은 이더리움과 비트코인 이전에 이미 메타커런시(MetaCurrency)와 쎕터(Ceptr) 프로젝트의 필수적 구성부분으로서 등장했다.

홀로체인은 아나키를 출현시킬 수 있는 사회적 기술―생체모방(bio-mimicry)에서 영감을 얻고 소프트웨어에 기반을 둔 기술―을 제공한다. (여기서 아나키란 대규모의 중개/매개intermediation를 필요로 하지 않은 삶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홀로체인은 우리가 자산에 기반을 둔 수많은 상호신용 (암호)화폐―이들은 홀로체인에서 상호 운용 가능하다―를 통해 기존의 화폐가 지배하는 시기를 넘어서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통화(通貨) 정의는 훨씬 더 광범한 것이다. 통화는 가치·약속·평판의 흐름들을 형성하고 가능하게 하며 측정하는 형식적인 상징체계로서 정의된다. 저자 생각에 이는 하이에크의 사유에 대한 해석으로서 신자유주의적 해석보다 훨씬 더 계몽된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가치 흐름이 더 나은 방향으로 관리되기 전에 먼저 인정되어야 한다. (GDP 관련 흐름만을 가시화한 것은 인류와 지구에 재앙이 되었다.) 그렇게 인정될 때에만 우리는 상호연관된 긍정적 흐름들은 강화시키거나 증폭시키고 상호연관된 부정적 흐름들은 완화시키거나 제거하는 작업을 창발적이고 자기조직적인 방식으로 시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다수를 위해, 심지어는 모두를 위해, 더 의미 있고 더 인간적인 부와 번영을 창출할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대규모 탈매개(Disintermediation)]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홀로체인이 가져올 경제적 및 사회정치적 혁명은 그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그것이 디지털화된 세계에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체인은 어떤 규모로든 빠른 속도로, 제로의 한계비용으로 이용될 수 있다. 그것은 라즈베리 파이(Raspberry Pi)에서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심지어는 서버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컴퓨팅 장치에도 설치될 수 있다.

제일 처음 만들어진 h앱(hApp, Holochain dApp)은 홀로(Holo)이다. 이는 h앱들을 호스팅하기 위한 h앱으로서 홀로퓨얼(Holo Fuel)이라고 불리는 최초의 상호신용 암호화폐를 포함하고 있다. 이 화폐는 h앱들에 여벌의 컴퓨터나 아니면 현재 쓰는 장치의 저장 공간을 제공해주는 홀로 호스트들에게 보상해주는 데 사용된다. 이로 인해 모질라(Mozilla)의 파이어폭스(Firefox) 같은 표준적인 브라우저를 사용하여 웹에서 h앱들에 접근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식의 호스팅을 피할 수도 있다. 홀로체인을 돌리는 장치는 모두 사용자인 동시에 호스트이기 때문이다. 홀로의 목적은 현재의 서버 기반 웹과 미래의 (P2P이기에) 서버 없는 대안적 홀로체인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메시 네트워킹(mesh networking)[각각의 노드가 직접, 수평적으로 네트워크에 데이터를 중개하는 네트워크 토폴로지. 모든 노드가 다른 모든 노드에 연결되는, 뿌리줄기적 연결방식이다―정리자]이 가능할 것이며, 이는 진정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분산된 인터넷과 웹을 의미할 것이다.

더 나아가 홀로체인의 데이터 무결성 모델은 데이터 중심적(data-centric)이기보다는 행위자 중심적((agent-centric))이기를 지향함으로써 상호적 자기주권을 지원한다. 홀로체인은 소스체인(행위자가 소유하는 해시체인hashchains을 생각해보라)과 디지털 서명을 사용하고 분산된 해시 테이블을 확증한다(비트토렌트BitTorrent와 깃허브GitHub를 생각해보라). 이렇게 해서 프라이버시와 기밀성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가치실현과 가치소유가 가치를 추출하여 화폐화하려는 중개자들·대표자들·경영자들·조직소유자들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제로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완전히 귀속된다.

[궁극적 물음]

상호적 자기주권은 일단 작동 가능하고 실용적이며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면 우리 삶의 모든 측면(사회적·정치적·경제적·예술적·문화적 측면)을 다시 규정하게 될 것이다. 가장 심층적 차원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향과 관련하여 스스로에게나 서로에게, 같은 세대 내에서나 서로 다른 세대 간에 하는 이야기들의 성격이 완전히 변할 것이다. 여기에 쎕터와 쎕터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은 말할 것도 없고 발전된 심층 및 강화 학습 인공지능이 가세하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21세기에 인간이 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파악하고 다시 정의하게 될 것이다.




폴 크래플(Paul Krafel)의 ‘표행’(飄行)과 ‘더 커먼즈’(The Commons) 01



0.

크래플은 유명한 학자나 이론가도 아니고 활동가도 아니다. 미국의 어느 시골의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설립자이자 교사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부른다. ‘삶의 황금서'(golden Book of Life)를 자연에서 읽어낸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는 어느 날 야간 하이킹 도중, 잠깐 잠이 들어 꾼 꿈에서 이 ‘삶의 황금서’를 건네받는다.

이 책에는 삶의 모든 실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나에게 건네졌을 때 그것은 이 실제성(realness)의 아우라로 황금빛 찬란하게 빛나는 책이었다. 나는 경이로워하며 이 무거운 책을 받아들었고 축복받았다는 느낌으로 책을 열었다. 거기에, 바로 거기에 우주의 모든 지혜가, <삶>(Life)의 모든 대답들이 쓰여 있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는 내가 읽을 수 없는 언어였다. 나는 책장들을 넘기며 책장에 표시된 것들을 보았지만, 아무 것도 계시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이 좌절감을 주리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실제로 존재해, 대답이 거기 있어서 읽으면 되지만 읽을 수 없을 뿐이야’라는 느낌이었다. 실제성이 중요한 것이었지 그것을 못 앍는 나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후 그의 삶은 이 책의 내용을 조금씩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가 자연을 정처 없이 돌아다니기[표행(飄行)]를 좋아하지만, 이는 인간 사회와는 다른 곳으로서,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으로서의 자연을 찬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삶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이, 아니 모든 생명체들이 협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들의 총체를 그는 <더 커먼즈>(The Commons)라고 부른다.

이 모든 일의 결과를 나는 <더 커먼즈>라고 부를 것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지구 시스템을 계속적으로 상승시켜서 더 많은 삶을 뒷받침할 수 있게 하는 <삶>의 구조들과 기능들 전부이다. 커먼즈는 나의 글레이셔베이 물음[“육지에 출현한 생명이 육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인용자]에 대한 대답의 핵심이다. <삶>의 출현이 지구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삶>은 흐름의 비율을 바꾸는 작업을 해서 산소가 들어있는 대기, 담수, 비옥한 토양, 숲이 축적되도록 했다. 우리 주위의 ‘사물들’―해수면, 대기화학, 표층토양, 지하수, 숲, 해변, 영구 동토층―은 모두 상위수준의 역동적 평형이며, 심층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유입과 유출의 상대적 균형들의 표현이다. 바로 이 상대적 균형을 생명이 수억 년에 걸쳐서 변화시켜온 것이다. <더 커먼즈>는 현재 ··· 화성의 대기와는 달리 열역학적 평형보다 상위에 있는, 생명에 의해 창출된 모든 것들이다.

이렇게 그의 지혜의 정점에 <더 커먼즈>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크래플이 자기 나름대로 깨달은 바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그는 문장의 맨 앞이 아닌데도 ‘The Commons’라고 ‘t’를 대문자로 쓰는 경향이 있다. ‘c’는 물론 항상 대문자이다.)

내가 크래플을 알게 된 것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주목의 맥락에서의 일이었다. 나는 블록체인이 가진 P2P 가능성에 주목을 하다가 홀로체인(Holochain)을 알게 되었고 홀로체인에 관한 슈티(Matthew Schutti, 홀로체인 홍보이사[Director of Communications])의 비디오 두 개(Holochain: Interview with Matthew Schutte, Director of Communications (HOT Cryptocurrency I부II부)를 보게 되었다. 이 비디오의 뒷부분에서 슈티는 크래플의 책 Seeing Nature와 기술적으로 결코 뛰어나게 구현되지 않은 비디오 Upward Spiral을 소개했는데 나는 이 비디오를 찾아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크래플의 홈페이지(http://krafel.info)로 가서 그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으며 당장 그의 책 Seeing Nature를 주문했고 거기 html파일로 올려져 있는 웹북 Roaming Upward를 즉시 읽기 시작했다. (백수의 좋은 점이 이러한 ‘즉시’가 매우 자주 가능하다는 데 있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공유의 여러 방식 가운데 즉시 가능한 것이 그 핵심 내용을 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었다.

크래플의 지혜가 소개에 값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비극적 상황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는 ‘희망’의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그는 비록 시스템 이론, 생태과학을 말하고 열역학법칙을 말하지만, 이는 이론적으로 심오한 차원에서가 아니라 매우 알기 쉽고 직관적인 전달방식으로서 기능한다. 실제로 그의 지혜는 10여 개의 요결로 압축할 수도 있는데(가령, ‘위치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삶은 표행이다’ 등), 이는 푸꼬가 말년에 주목했던 견유주의(Cynicism)가 모든 군더더기 교리들은 다 빼버리고 오직 삶의 실천에 직결되는 요결만으로 그 철학을 압축한 것과 비슷하다. (크래플에게 견유주의에 대한 인식이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따라서 트래플의 지혜를 소개한다면 이는 다중이 자신의 정치인 삶정치를 스스로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래플의 지혜는 말하자면 삶정치론과 협동 가능한 사유의 표현인 것이다.

(홀로체인에 대한 글이 이 블로그에 한, 두 개 올라 있기는 한데 블록체인과 제대로 비교한 것은 아직 없다. 사실 여기에 대해 준비한 꼭지가 두. 세 개 있는데, 바빠서 아직 완성하여 올리지 못했다.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홀로체인이 어떻게 블록체인과 같고 다르며, 왜 우리가 홀로체인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글―번역이든 정리든―을 올릴 것이다.)

1.

크래플은 남들 사는 대로 따라 살다가 보니 대학 졸업 전 몇 주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지에 대해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 장 “The Next Morning”에서 현재 자신이 60대 후반이라고 한다. 책의 1장을 보면 대학 졸업한 해 혹은 그 다음 해가 선거가 있던 1972년이라고 하니 아마 2019년 현재 거의 70이 다 되었을 듯하다.) 그는 당시 닉슨을 낙선시켜 월남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맥거번(George McGovern)을 도왔는데, 선거에서 닉슨이 당선하고 게다가 실연까지 겹쳐서 의기소침한 상황이었다. 이러던 그에게 전환의 계기를 가져다 준 것은 한 마리 새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업(혼합 사료 판매)을 도와서 트럭으로 사료를 여기저기 운반해주었다. 그는 운반하고 나서 오면서 자신이 트럭을 너무 빨리 몰아서 ‘내가 혹시 자살 충동이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놀란다. 딱 하나, 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나는 것은 어릴 때부터 생각하던, 왈룰라(Wallula) 절벽[워싱턴 주의 왈라왈라Walla Walla 카운티 소재]으로의 하이킹이었다. (그는 그 근처를 수백 번 지나다녔다고 한다.) 그는 얼마 후에 이 하이킹을 실행한다. 사소한 것일지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는 결심에서이다. 그리고 절벽의 암붕(ledge)에 배열해서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새들을 보게 된다.

나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서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서 고개를 가장자리 너머로 구부렸다. 곧 새들 각각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가깝게 왔다. 희한한 작은 새들―머리는 회색이고 깃털이 갈색인, 그러나 날개를 파닥거릴 때에는···분홍색? 나는 새들이 파닥거리며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되자 점점 더 작은 지역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때 새들 가운데 하나가 겨우 3피트 정도 아래에 착지했다. 몇 인치 안 되는 그 새의 길이와 그 암붕에 나의 의식이 집중되었다. 분홍색 속깃털의 가장자리들이 빠끔 보였다. 새는 머리를 한 쪽으로 기울이고 한 쪽 눈으로 아래를 훑어보며 바람에 날린 씨앗들을 찾고 있었고 다른 쪽 눈으로는 올려다 보고 있었는데, 아마 나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새는 날개를 완전히 접고는 암붕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려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에 응하여 내 뱃속에서도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그 새와 잠깐 동안 연결된 이 경험으로 인해 크래플은 우울증이 사라졌으며, Birds of North America란 책을 사서 자기가 본 새가 어떤 새인지 알아낸다. 그 새는 ‘rosy finch’였다. 한영사전에 보면 ‘갈색양진이’라고 되어있는데, 한국과는 환경이 다른 곳에서 서식하기 때문에 한국의 갈색양진이와 똑같지는 않을 수 있다.

이제 크래플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바로 ‘새 관찰’(이것을 영어로 ‘bird watching’이라고 하고 ‘birding’이라고도 한다)이다. (새 관찰에 대해서는 잭 블랙 주연의 영화 The Big Year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삶>의 황금서’도 새를 관찰하고 다니다가 꾼 꿈에서 건네받은 것이다.

새를 관찰하러 다니면서 삶에 대한 크래플의 믿음은 점점 확고해진다. 다음은 새를 관찰하러 다닌 던 중 크래플이 그 갈색양진이를 회상하는 대목이다.

정신없이 지나간 저 놀라운 몇 개월 동안에 나는 종종 왈룰라 협곡의 저 갈색양진이를 생각해보곤 했다. 저 새가 나의 삶을 바꾸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 저 새가 삶에 대한 믿음처럼 보이는 것을 순간적으로 계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애초에 아래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그 새는 그저 날개를 접고 그 암붕을 폴짝 뛰어내렸다.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나의 배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그 새의 몰두(its commitment)의 무심한 완벽함에 반응하여 내가 붙들고 매달려 있던 어떤 암붕을 놓아버리고 뒤따랐던 것이다. 진공으로 떨어질 때 내가 이전에는 펴보지 못했던 날개가 스쳐가는 대기에 의해 펴지고 나의 풋내기 정신이 비상했다.

이 설명에 동원된 단어들은 단어들과는 무관한 어떤 것을 설명하느라고 여러 달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새는 머리에 와닿은 새가 아니라 배에 와닿은 새였던 것이다. 작은 새 한 마리가 우리의 문화에서는 거론되지조차 않는 나의 핵심 내의 어떤 강력한 부분을 움직였고 나의 삶은 바뀌었다. 이것이 내가 살기 시작한 세상이다. 새 한 마리의 낙하로도 바뀔 수 있는 세상.

크래플은 ‘새 관찰’을 하는 동안 가령 새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부를 줄 아는 노인 같은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과의 점점 깊어지는 측면이다. 새들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된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연과의 기운의 교류 같은 것이 생기게 된다. 유콘 지역에 갔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거기서 북극 여름의 놀라운 햇빛에 일광욕을 하며 며칠 동안 죽치고 있었다. 햇빛. 햇빛, 햇빛은 정신과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화학물질에 무언가를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햇빛 속에서 나는 무언가 냐의 눈과 정신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 그저 계속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이전에는 그렇게 순수한 형태로 경험한 적이 없는 어떤 것, 내가 받은 교육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는 어떤 것이었다.

그는 그저 바라보면서 세상 안에 앉아있는데 이렇게 강렬하고, 이렇게 흡족할(this enough) 수 있다는 점에 놀라워한다. 이렇듯 크래플은 자연에서 직접 배우기 시작한다. 데날리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에 머물 때 삼림관리원(/레인저)이 나무에 난 표시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래플은 이 이야기는 책에서 읽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책은 우리에게 그것이 없으면 간과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인식하도록 돕는 ‘어휘’ 가운데 일부를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 이야기 자체는 그 장소에 거한다. 이는 세상으로 하여금 직접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것,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크래플은 이어서 세상이 그저 조각들이 아니라 그 조각들이 서로 어울려 논리적 이야기를 이루며 이는 패턴을 찾음으로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 대한 지혜의 일부와 그 언어를 배우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제이며, 예의 ‘<삶>의 황금서’는 바로 이렇게 직접적 조우를 통해 자연의 지혜를 배우는 것을 비유적으로 가리킨다.

이 경험으로 인해 크래플은 디날리국립공원(Denali National Park)의 “a seasonal naturalist”(시즌인 여름에는 일하고 오프시즌에는 자연을 표행하는 삼림관리원)가 되고 싶어 하게 되고 얼마 후에 실제로 채용되게 된다.

<계속>




힐러리 클린턴과 2016년 미국 대선


  • 저자  :  Michael Hudson, Ross Ashcroft
  • 원문 : (대담)  Prof. Michael Hudson on Hillary Clinton and the US Elections (2016. 10. 2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16년 미국 대선을 주제로 한, 미국 경제학자 허드슨(Michael Hudson)과 레니게이든(Renegades Inc.)의 애쉬크로프트(Ross Ashcroft)의 대담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대담은 선거 약 열흘 전에 있었다.

애쉬크로프트

두 명의 대선 후보 가운데 하나[힐러리 클린턴]는 월가, 특히 골드만삭스와 매우 친하고 다른 하나[트럼프]는 주요한 불로소득사냥꾼(rent-seeker)입니다. 둘 다 근본적으로 월가와 결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이것을 알죠?

허드슨

제 생각에 힐러리는 반대율이 79% 반대이고 트럼프는 81%입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가장 인기 없는 두 사람이 대선에서 붙은 것이죠. 미국인들은 ‘yes’, ‘yes, please’, ‘yes, thank you’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트럼프는 월가에 세금을 삭감해주겠다는 말을 하는 대신 자신이 몇 번 파산을 해봐서 은행을 다루는 법은 알므로 자기를 뽑아달라고 했다면 그것이 결정적인 한 수가 되었을 것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동의하면서] 선거전략가가 되셨어야 했네요.

허드슨

다만 트럼프를 위해서 일했다면 나에게 친구들이 별로 없을 것이고, 그가 오늘 나에게 동의해도 내일 어떨지는 알 수 없겠죠. 그것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그는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정당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애쉬크로프트

그래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가 더 낫다고 보시는 거죠? 그가 그런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요. 그가 똑똑하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형이 아니라서요. 대통령직이 워낙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요.

허드슨

힐러리도 트럼프도 선거의 관건은 ‘차악’(the lesser evil)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더 큰 악일까요? 힐러리의 뒤에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소련에 군사적으로 적대적인 네오콘들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누굴 임명해야 할지, 그와 함께 일할 사람들을 충분히 모을 수 있을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일 미국의 방향이 군사적 적대에 기반을 두고 일극적 세계를 고수하는 것이라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가장 덜한 후보를 뽑아야 할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트럼프가 그런 ‘덜 악한’ 후보입니다. 그는 나르시시스트이고 정말이지 백지상태 같은 후보입니다. 차라리 뭐를 할지 모르는 후보를 뽑는 게 낫지요. 힐러리가 무엇을 할지는 우리가 이미 알잖아요. 그녀는 남편이 한 일을 이어서 할 것인데, 이 부부는 민주당을 타락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가 그녀에게 맞선 지점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버니는 매우 잘 했죠?

허드슨

매우 잘 했죠. 그런데 그는 민주당이 월가와 루빈 패거리―이들은 정말로 마피아 같습니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는 한에서는 노동조합이나 소비자들 혹은 99%에 의한 진보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은행가 가운데 한 명도 감옥에 가는 일 없이 수십억 달러의 돈을 과징금으로 냈는데, 그것이 바로 범죄자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범죄자들이 사법체계를 장악하고 경찰력을 장악하여 판사들에게 뇌물을 먹이면 (1930년대에 헐리우드 영화들을 다 그랬죠), 그러면 범죄자들이 통제하는 것이 되고 금융 부문이 범죄화되는 것입니다. 나의 동료 빌 블랙(Bill Black, 캔자스시티 대학)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거대 은행들(시티뱅크,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의 사업계획은 사기(fraud)라는 것을요. 사람들은 사기가 은행업의 관건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합니다. 현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바로 증거가 명백한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죠.

애쉬크로프트

힐러리는 어떤 종류의 대통령이 될까요?

허드슨

독재자요. 네오콘들을 국무부장관에, 국방부에 임명하면서 적을 응징하는 원한에 찬 독재자가 될 겁니다. 월가 사람들을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 기용할 것이고, 아주 명시적인 계급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버핏(Warren Buffet)이 “계급 전쟁이 존재하며, 우리는 승리하고 있다”고 말한 바와 같아요.

애쉬크로프트

1%가 이기고 있다는 것이죠?

허드슨

그렇습니다. 그녀는 ‘국민 여러분, 여기는 볼 것이 없으니 계속 갑시다’라는 수사를 사용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경제는 계속 망가지고 그녀는 늘 그랬듯이 더욱 많은 이득을 올리고 더욱더 부유해지겠죠. 만일 그녀가 대통령이 된다면 클린턴재단의 범죄적 이해관계충돌(대가성 기부)에 대한 수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클린턴 부부에게 돈을 대준 기업들이 정책에 관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치가를 살 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정책을 통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미국에서 지금 선거와 정치는 사유화되고 시장경제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대 연방선거위원회(FEC) 건의 핵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애쉬크로프트

또 하나의 불로소득사냥 사례이군요?

허드슨

네, 정치 헌금, 그것이 가장 큰 불로소득사냥이지요. 기본적으로 1센트를 내면 1달러 가치를 가진 특권을 얻습니다. ‘rent’[불로소득>금리>지대]는 기본적으로 특권에 대한 지불입니다. 민간부문에서 창출된 특권에 대한 지불입니다. 발자끄(Balzac)가 말했듯이, 모든 거대한 재산은 거대한 절도에서 기원합니다.[발자끄의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1835)에 나오는 말로서, 정확하게는 “명백한 원인이 없는 모든 거대한 재산의 비밀은 잊혀진 범죄이다”(Le secret des grandes fortunes sans cause apparente est un crime oublié)이다.―정리자] 시장의 일부가 되었기에 더 이상 거대한 절도로 간주되지 않는, 그저 세상 돌아가는 방식인 양 받아들여지는 재산이죠. 그래서 절도가 일어나면 클린턴 부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가고, GDP는 성장하고 있어. 당신들 99%가 더 가난해지는 정도를 우리가 더 부자가 되어서 상쇄하고 있기 때문이지.”

애쉬크로프트

세계정치와 관련해서 힐러리가 사용한 몇몇 수사(修辭)에 대해서 말해보죠. 그리고 오랫동안 숙적이었던 미소관계에 대해 말해보죠. 오랫동안 곰을 자극했다는 명백한 사실, 그러한 적대관계,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5년 동안 어떻게 될지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무엇인가요?

허드슨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러시아는 실제로 신자유주의적이 되었으며 뿌띤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자입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보는 것과 같은 경제 체제의 충돌은 없습니다. 소련에 대해서 미국이 못 마땅해 하는 것은, 미국이 소련의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살 수 없는 점, 소련의 자연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살 수 없는 점, 소련의 공익서비스(전기·가스·수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서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economic rent’는 허드슨 자신의 설명에 의하면 가격에서 가치를 뺀 것(Price minus Value, P – V), 즉 시장가격에서 투입된 경비를 초과하는 부분이다. 땅과 관련된 ‘ground rent’는 ‘rent’의 한 형태일 뿐이므로 ‘rent’를 ‘지대’라고 옮기는 것은 맥락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로는 ‘불로소득’이라고 옮기기도 하고 또 맥락에 따라서는 ‘임대료’라고 옮기기도 하는데, 전체를 통괄할 수 있는 좋은 번역어가 필요하다.―정리자]를 부과할 수 없는 점, 그리하여 1994년에서 위기가 발생한 1998년까지처럼 계속적으로 러시아를 세계에서 가장 큰 증권시장 붐으로 만들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양국의 갈등은 경제적 체제 사이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저 미국이 다른 나라를 통제하고 싶은 것, 다른 나라를 달러의 영향권 내에 두고 싶은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만일 전 세계가 달러로 저축을 한다면, 이는 미국 재무부 채권을 구입함을 의미하고, 이는 다시 소련이나 중국 등이 경상수지 흑자를 미국 재무부에 빌려줌을 의미합니다. 미국은 이 돈을 사용하여 이 나라들을 군사적으로 포위하고 달러 시스템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하는 나라라면 어느 나라에게든 이라크나 리비아나 아프가니스탄에게 했던, 그리고 지금은 시리아에게 하는 행동을 하겠다고 위협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미국은 ‘우린 너희를 박살낼 수 있어’라고 말합니다. 군대가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폭탄을 떨어뜨리고 금융을 사용하여 위협합니다. 핵심은 자연자원, 즉 물, 부동산, 공익서비스에 대한 통제권이지 경제 체제가 아닙니다.

애쉬크로프트

그럼 최종단계는 어떻게 될까요?

허드슨

하나는 세계가 붕괴할 때까지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정도의 가치가 있는 일인가요? 오바마는 비록 월가의 도구이지만 적어도 근동에서 싸우는 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힐러리는 근동에서의 싸우는 것이 세상을 붕괴시킬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세상을 내 마음대로 못 하면 세상을 석기시대로 되돌릴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힐러리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해야 하고, 세계에 대한 통제를 위해 미국이 나아가는 방향을 끔찍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는 다른 경제 철학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토지, 자연자원, 정부, 화폐시스템에 대한 소유로써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주류 언론은 이 맥락을 설명하는 일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애쉬크로프트

선생님의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은 생각 있고 영민하며 국제주의적인 미국인들이 머리를 감싸 쥐고 이번 선거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이 세계에서 더 인기를 잃을 상황에 대비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허드슨

그 결과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voting with their backsides’[엉덩이로 투표하다→투표에 참가하지 않고 집에 있다―정리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선거마다 투표참가자수가 줄어왔습니다. 미국에는 제3의 당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할 것입니다.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 부동산과 독점에 이익을 둔 월가의 재정 지원을 받습니다. ‘yes’와 ‘yes, please’가 두 당의 이름입니다. 대안이 없는 것, 선택지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통제의 목적이며 ‘자유시장’의 핵심입니다. 정부가 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민중이 선택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1920년대에 비엔나의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사회주의자들에 대해서 전쟁을 하고 암살을 행한 오스트리아 학파의 핵심도 이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동운동 지도자들, 대학 교수들, 지식인들을 대량 학살한 칠레의 자유시장주의자들의 핵심입니다. 지금 미국은 기관총만 없을 뿐 상황은 똑같습니다. 실제적 대안은 없고 사실상 같은 두 차악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가상적 선택만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는 미국 민중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 저자  :  Michael Hudson
  • 원문 : Junk Economics :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 (2018)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옮긴이 : 정백수
  • 설명 :아래는 2015년 9월 21일 카운터펀치(CounterPunch) 라디오에서 방송된, 에릭 드레이처(Eric Draitser)와 경제학자 마이클 허드슨의 인터뷰 중에서 오바마(Barack Obama)를 다루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마이클 허드슨의 저서 J is for Junk Economics: A Guide to Reality in an Age of Deception에도 수록되어 있다. 마이클은 ‘맑스주의 경제학자이고 맑스(그리고 맑스가 완성시켰다고 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자본 이론에 기반을 두면서도―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국의 경제정책입안자들에게 맑스의 『자본론』2권과 3권을 읽을 것을 권유하기도 할 정도이다―신자유주의가 미국 경제를 지배하게 되는 과정의 한 가운데를 거쳐 온 경력(체이스맨해튼 은행, 아서앤더슨 회계법인 등)으로 인해서 금융세력(월가)이 지배하는 미국 신자유주의의 실상을 매우 잘 알고 있으며, 금융세력의 지배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가장 핵심적인 현실진단은, 빚이 불어나는 속도가 경제성장의 속도를 능가하는 현재의 상태로는 미국의 경제가 붕괴를 맞을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는 부채탕감이 필요하다고 본다. 앞으로 그의 핵심적인 생각들을 기회가 되는 대로 소개할 생각인데, 우선 오바마 부분을 소개하는 것은 한국의 많은 사람들에게 오바마는 그의 실제 정체와는 정반대로, 즉 ‘서민에게 잘 한’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언론에 의해 매개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환경에서 이러한 기만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다.) 허드슨은 오바마가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에게는 부채를 탕감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실제로는 이 약속을 어기고 자신에게 돈을 대준 월가를 위해 일한 자임을 폭로한다. 허드슨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유도 (물론 그 이유 가운데 일부겠지만) 이것과 연관짓는다. 힐러리가 ‘나는 오바마의 셋째 임기를 하겠다, 차악(the lesser evil, 덜 나쁜 후보자)인 나를 뽑아달라’라고 유권자들에게 말했는데, 유권자들은 실제 차악인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역사”(The History of Neoliberal Economics)라는 제목의 인터뷰의 말미에서 허드슨은 오바마를 이어받겠다는 힐러리가 차악이 아니라 “트럼프가 바로 차악이었음을 기억하세요”(Just remember that Trump was the lesser evil)라고 힘주어 반복한다. 힐러리와 트럼프가 맞붙은 대선에서 허드슨은 두 정당 모두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투표에 참가하지 않았다. 힐러리와 대선을 주제로 한 인터뷰에서 허드슨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 정치와 선거는 지금 사유화되어 시장경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트럼프가 힐러리보다는 차악이라지만, 두 당이 근본적으로 똑같이 신자유주의에, 금융세력에게 포섭당한 상황에서 미국 민중은 과연 어디서 새로운 정치를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의 상황은 과연 이것과 얼마나 다를까?

오바마가 루비노믹스 패거리를 위해 월가와 한통속으로서 한 선동가 역할

에릭 드레이처

2009년과 제너럴모터스의 붕괴를 돌이켜보면, 붕괴한 것은 제너럴모터스라는 자동차제조업이 아니었습니다. 그 금융 부문인 GMAC이 신용파산스왑(credit default swaps), 부채 담보부 증권(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 기타 이와 유사한 금융파생상품들로 빚을 내었다가 붕괴했던 것이죠. 그래서 오바마가 들어와서 자신이 “제너럴모터스를 구했다”고 주장했을 때,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그는 제너럴모터스의 월가 부문을 위했던 것이죠.

마이클 허드슨

맞습니다. 그는 월가를 위한 대통령 후보였고 클린턴의 재무부장관이었던 루빈(Robert Rubin)이 그를 밀어주었습니다. 미국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골드만삭스(Goldman Sachs)와 시티그룹(Citigroup)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드레이처

이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 첫 5일 동안에 입증되었습니다. 그는 골드만삭스와 제이피모건(JP Morgan), 뱅크오브아메리카(Bank of America), 시티(Citi)의 CEO 등속을 초청했습니다. 이 내용은 책들, 『뉴요커』(The New Yorker)지 및 기타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바마는 이들에게 ‘내가 있으니 걱정마시오’라는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허드슨

써스킨드(Ron Suskind)가 이 일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오바마가 “당신들과 쇠스랑들[일반 국민을 건초 등을 집어올리는 쇠스랑에 비유한 것―정리자] 사이에는 나밖에 없습니다. 내가 그들을 속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의 흔적은 백악관 웹싸이트에서 재빨리 지워졌지만, 써스킨드의 책에는 있습니다. 오바마가 세기의 대 선동가 가운데 하나로서 출현한 것입니다.

드레이처

그의 정책과 행동이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행동이 필요했던 위기의 순간에 대통령이 되었는데, 올바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월가가 원하는 바를 행했습니다. 그는 부실자산구제프로그램(TARP)과 구제금융 등을 옹호했습니다. 이는 민주당원들이 그들의 대화에서는 피하고자 하는 어떤 것입니다.

허드슨

바로 그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이중사고’(doublethink)에 기반을 둔 수사(修辭)입니다. 그는 ‘희망과 변화’의 후보로 출마했는데, 그가 실제로 한 역할을 희망을 부수고 변화를 막는 것이었습니다. 약속한 대로 부채를 탕감하지 않고 그대로 놔둠으로써 그는 미국 경제의 파탄을 주관했습니다. 경제를 희생한대가로 은행, 증권소유자들이 구제되었습니다.

오바마는 시카고에서 거대 부동산 세력을 위해 지역 조직가로 일할 때에도 이와 유사한 짓을 해서 가난한 흑인 동네들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역할은 그 지역에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을 이루는 것이었고 고소득 흑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재산가격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프리츠커(Pritzker) 가는 수십억 달러를 벌었습니다. 그래서 페니 프리츠커(Penny Pritzker)가 그를 루빈에게 소개했던 것입니다. 오바마는 민주당에서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미국의 31대 대통령)보다 왼쪽에 있는 민주당원들을 죄다 당에서 몰아내기 위해 루빈에게 자신의 내각을 임명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 분명합니다. 오바마의 내각은 첫 수석보좌관은 사악한 반(反)노동론자 이매뉴얼(Rahm Emanuel, 현재 시카고의 시장입니다)이었습니다. 오바마는 민주당을 오른쪽으로 밀어붙였고, 공화당은 오바마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서도 여전히 ‘차악’이 될 수 있는 큰 여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트럼프 같은 사람이 자기는 데니스 쿠시니치(Dennis Kucinich, 민주당에서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와 함께 가장 진보적으로 알려진 인물)가 찬성하는 것, 즉 단일보험자 건강보험(single payer healthcare program)을 찬성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바마는 이에 맹렬히 반대했고 제약 및 건강보험 부문의 로비스트들을 밀어주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유권자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의 편이라고 믿게 만드는 재주가 있습니다. 사실 그는 그의 선거운동에 돈을 댄 월가의 특정 세력을 옹호하고 있는데 말이죠.

드레이처

맞습니다. 말 그대로 오바마가 행동을 취한 모든 곳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소위 오바마케어(이는 정말이지 보험업에는 큰 혜택이죠)를 옹호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의 사유화, 부동산 등에 이르기까지요. 말 그대로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오바마는 금융자본의 하인이지 민중의 하인이 아닙니다. 이것이 유권자들을 월가에 가져다 바치는 민주당의 현재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