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 저자  :  정남영
  • 분류 : 발표문
  • 설명 : 아래는 2018년 5월 2일 경의선공유지에서 열렸던 <2018 커먼즈네트워크 워크숍>의 기조발제문에 조금 더 손을 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출처 표시가 잘못된 주석 하나를 바로잡았고 본문과 주석에 몇 대목을 추가적으로 삽입했다. 추가된 부분은 전체 글의 흐름과 다소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일종의 방주로 간주되면 된다.

    말이 기조발제지 사실은 그 자리에 손님으로 가면서 맡은 것이라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특정의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들이 초청한 것이라서 커먼즈 운동에 관해서 기초적인 사항은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글을 작성했으나 상당히 오판인 것으로 드러났다. 커먼즈 운동이 무언지 잘 모르는 청중이 당연히 있었고 이 분들은 기조발제를 듣고 ‘뭔 구름 잡는 소리인가’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글의 내용을 전부 다 소화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해서 많은 내용을 주석으로 내려서 나중에 텍스트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본문도 다 소화 못할까봐 읽을 부분과 생략할 부분을 미리 생각해서 갔는데 그나마 그렇게 준비한 부분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좀더 늘리더라도 여기에 올리면 누구라도 이 발제문을 찬찬히 생각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먼즈 운동을 잘 모르는 분들은 우선 이 블로그에 최근에 올려진 커먼즈 활동가 바우엔스의 가장 최근의 대담을 참조하고 이에 덧붙여 이 블로그의 글 http://commonstrans.net/?p=1049을 참조하기 바란다.)

    ‘대안근대로의 이행’— 바로 이것이 커먼즈 운동을 포함한 여러 운동들을 통해 구현되기를 바라는 것인데—이란 ‘역근세수’와 ‘환골탈태’의 과정이 몸과 정신에서 공히 일어나지 않으면 이루어지기 힘들다. 우리의 몸과 정신의 저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온갖 근대적 물신들(굳어진 사고·감정·행동의 습관들)을 씻어내야 하고 근본적으로 다시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 때 비록 조그만 것일지라도 습관을 고치는 것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자기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유형의 습관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대안근대로의 이행에 대해서,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삶에 대해서 고민하는 일이 쉬운 말로 쉽게 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사람은 가장 익숙한 것을 가장 쉽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바로 근대적 물신들이기 때문이다. 이 물신들을 싹 씻어낸 후에 그 자리에서 우리는 들뢰즈·가따리가 『천 개의 고원』 11장에서 말한 대로 ‘어린 아이 되기’의 소박함으로, 혹은 “풀과 순수한 물 조금”의 단순함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글파일에서 html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표 안의 주석 두 개가 누락되었다. 한글파일을 그대로 전환한 pdf 파일을 아래 첨부한다.

    Download (커먼즈-운동과-삶정치-발제문수정확대판.pdf, PDF)


 

커먼즈 운동과 삶정치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일은 커먼즈 운동의 의미와 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해보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커먼즈 운동을 조금 소개해왔을 뿐 이 운동의 핵심에 있다고 할 수는 없는 저로서는 커먼즈 운동의 과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을 듯하지만, 의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 ’의미’를 이 자리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하트가 제시한 ‘삶정치’(biopolitics)의 이론에 비추어 보는 것일 듯합니다. 제가 삶정치론을 나름대로 공부하며 다듬다가 커먼즈 운동을 알게 되었고((네그리·하트의 저작에서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를 알게 되었고 그의 저작을 번역하게 되었으며, 둘째 번역서인 『마그나카르타 선언』을 번역하면서 오스트롬(Elinor Ostrom)을 알게 되었고 이어서 데이빗 볼리어(David Bolier)를, 그리고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던 공부와의 연관성 때문에 커먼즈 운동을 소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커먼즈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커먼즈 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삶정치론은 탈근대(여기서는 시기를 가리키며 서구의 경우에는 대략 1968년 혁명 이후, 혹은 정보화 혁명이 일어난 이후를 말합니다)의 양면성에 대한 인식 즉 한편으로는 소외의 극단적 심화를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항의 일반화 가능성을 낳고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둡니다. 소외의 극단적 심화란 삶권력(biopower)의 등장—가령 자본이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포섭하는 데서 더 나아가서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고 거기서 또 더 나아가 지구의 삶 전체를 포섭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저항의 일반화란 이렇게 대립구도가 ‘권력 대 권력’의 구도((이는 전형적인 근대적 구도로서 홉스 이후 거의 모든 정치학은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 또한 지금 거의 모든 선진국들의 공식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이 구도에 입각해 있습니다.))가 아니라 ‘삶 대 삶권력’이 된 상황에서는 삶이 있는 모든 곳에 저항의 가능성이 생겼음을 말합니다.

소외의 문제를 가장 먼저 명시적으로 제기한 것은 맑스였습니다. 그러나 맑스주의자들이 근대주의자들(국가자본주의자들)로 전환되면서((‘소외’를 제시할 때의 맑스를 초기의 맑스, 즉 아직 미숙한 맑스로 보는 태도가 맑스주의 학자들 사이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미숙하지 않다고 평가받을 여러 맑스주의 경제이론가들이 한 일 가운데에는 자본의 논리와 관점을 더욱 널리 퍼뜨린 것도 속합니다. 가령 해리 클리버(Harry Cleaver)는 레닌과 스위지(Paul Sweezy)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자본주의 발전론은 노동자들의 투쟁과는 무관하게 자본가들 사이의 내적 동학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국내와 국외에서의 노동자들의 불가피한 봉기로서 예측하는 것은 그저 이 동학의 설명되지 않은 부산물로서만 나타난다.”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p.191. 이 저작에는 이런 취지의 대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이 문제는 묻혀 버립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들과 근대화 경쟁을 하는 구도(‘냉전’)는 바로 이러한 전환에 의해서 가능해집니다. 실제로 성숙기의 맑스가 소외의 문제를 잊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소외’라는 제목이 딸린 짧은 단상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대목도 내용상으로는 소외에 관한 것입니다. “생산의 원래적 조건들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이성들 사이의 자연적 과정을 통한 인간의 수의 점증하는 수의 재생산은― 이 재생산은 일면으로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전유로 나타나지만 다른 면에서는 형성으로서, 객체들의 주체적 목적에의 종속으로 나타난다. 주체적 활동의 결과들과 저장고들로 변형되는 것이다) 원래 그 자체가 생산물이 될 수는 없다. 즉 생산의 결과물이 될 수는 없다. 설명이 필요한 것 혹은 역사적 과정의 결과인 것은, 살아있는 활동적인 인간이 자연과의 신진대사의 자연적·비유기적 조건들 사이의 통일이 아니라, 따라서 자연의 전유가 아니라, 이 인간실존의 비유기적 조건들과 이 활동적 실존 사이의 분리이다. 이 분리는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만 완전히 정립되는 바의 것이다.”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489. 이 외에 『자본론』 3권의 이곳저곳에서도 소외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오히려 소외에 대한 인식이 더 성숙해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성숙기의 맑스는 자본주의적 삶의 정점—이는 곧 소외의 정점입니다—에서 자본주의를 즉 소외를 넘어서는 조건이 생성된다고 보았습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자본의 한계를 말하는 여러 대목이 있는데 한 대목만 들어봅니다. “어느 지점을 넘으면 생산력의 발전은 자본에 장벽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노동의 생산력의 발전에 장벽이 된다. 자본은, 즉 임금노동은 이 지점에 도달하면 사회적 부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길드제도, 농노제, 노예제가 과거에 그랬던 것과 동일한 관계에 들어서게 되며, 필연적으로 족쇄가 되어 벗겨내어진다. 인간의 활동이 취하는 마지막 형태의 노예상태―한편으로는 임금노동,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는 따라서 이렇게 피부처럼 벗겨지며 이러한 탈피는 자본에 상응하는 생산양식의 결과이다.” Grundrisse, p. 749.))

맑스의 진의가 완전히 묻혀버린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소외’의 문제를 파묻어버린 것과는 달리, 20세기 중반부터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문제를 ‘삶’의 관점에서 새롭게 풀어온 일련의 노력들이 있습니다. 푸꼬의 삶권력/삶정치론((푸꼬는 무엇보다도 권력을 실제 혹은 본질로 보는 사고방식, 달리 말하자면 권력을 사물화시키는 사고방식을 파훼했습니다. “권력은 본질이 없다. 단지 작동할 뿐이다. 권력은 속성이 아니라 관계이다.”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 Sean Hand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p.27.)), 들뢰즈·가따리의 삶의 철학((들뢰즈·가따리의 철학은 일반적으로 ‘삶의 철학’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생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은 따로 있으니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발제의 편의상 이렇게 부른 것입니다. 들뢰즈·가따리가 ‘삶’(vie, life)라는 말을 자주 쓰지는 않지만 일단 쓰는 경우에는 그들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재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은 ‘삶의 평면’(a plane of life)과 동의어입니다. 이와 연관되는 대목은 그들의 가장 대표적 저작인 『천 개의 고원』에도 몇 군데 나오지만짧지만 들뢰즈가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몇 페이지로 압축한 글 「내재성 : 하나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으로 이어지는 계보입니다.((이 계보가 푸꼬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앞에는 스피노자, 맑스, 니체가 있습니다. ‘삶권력’, ‘삶정치’라는 말은 푸꼬가 만든 말인데, 푸꼬는 양자를 동의어로 사용했습니다. 이와 달리 네그리·하트에게서 ‘삶정치’는 ‘삶권력’에 대립되는 ‘삶의 정치’라는 의미로 긍정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발제문에서 ‘삶정치’는 기본적으로 네그리·하트의 사용에 따릅니다.)) 이 계보는 자본주의를 ‘삶권력’—삶을 장악한 권력—으로서 정의함으로써 소외의 문제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삶의 힘(삶의 활력)을 저항의 힘으로서 새로이 부각시킵니다. 전통적인 좌파의 경우 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비합법의 경로를 택하든 권력(자본가가 권력)에 권력(노동자 권력)을 맞세우는 것이 추구되었는데, 이제 삶정치에서는 ‘삶 대 권력’이 기본적인 적대관계를 구성합니다.((“그러나 이런 식으로 권력이 삶을 목표나 대상으로 삼을 때, 그때 권력에의 저항은 이미 삶의 편에 서며 삶을 권력에 대립시킨다. ‘정치적 대상으로서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통제하는 데 몰두하는 체제에 대립시켜지게 된다. / (···) 외부로부터 오는 힘은 푸꼬의 사유의 정점을 이루는, 삶에 대한 어떤 생각, 어떤 활력주의(vitalism)가 아니던가? 삶은 권력에 대항하는 이 능력이 아니던가? ��병원의 탄생��부터 줄곧 푸꼬는, 삶을 죽음에 대항하는 기능들의 집합으로서 정의하는 새로운 활력주의를 창안한 비샤(Bichat)를 좋아했다. 그리고 니체에게만이 아니라 푸꼬에게도 인간의 죽음에 대항하는 힘들과 기능들의 집합을 찾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서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신체가 일단 인간적 훈육으로부터 해방되면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푸꼬는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저항하는 힘들의 집합으로서 무엇을 성취할지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다.”Gilles Deleuze, Foucault, p.92. (인용자의 강조)))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삶’이란 무엇인가요?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충분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삶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놓겠습니다.((영어로든 대부분의 유럽어로든 양자는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네그리는 양자를 ‘bios’(삶)와 ‘zoe’(생명)라는 희랍어로 구분합니다.)) 삶은 존재론적 원리이자 힘(활력)입니다.((이기묘합(理氣妙合)입니다.)) 생명은 에고로서의 개체가 활력을 받아서 자신의 생물학적 실존을 유지하는 힘으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삶의 힘은 개체들을 가로질러 연결되어 주체성을 구성하고 그로써 하나의 온전하고 뚜렷한 삶의 형태를 개화시키는 힘입니다. 개체의 관점에서는 생명은 출발점이고 삶은 개화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가령 D. H. 로렌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의의가 아니다.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이것이 최고의,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운명이다. 즉 미지의 것의 가장자리로 가서 그 가장자리를 넘어서는 것이.((Lawrence. D. H.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London: William Heinenmann Ltd., 1936) p.441. 들뢰즈·가따리는 생명의 차원에서의 개체화인 ‘개별 주체로의 개체화’와 ‘삶의 개체화’를 맞세운 바 있습니다. “··· 삶의 개체화는 주체(이는 삶의 개체화를 이끌거나 지탱해준다)의 개체화와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평면’이 아니다. 전자의 경우 공재의 평면 혹은 각개성(haecceities)들이 모여서 이루는 평면이다. 이는 오직 속도와 정동만을 안다. 후자의 경우는 형식들, 질료들, 주체들로 구성되는 전혀 다른 평면이다.” Gilles Deleuze and Félix Guattari, A Thousand Platea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Brian Massumi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7), p.261.))

“여성이 아이를 낳는 것”은 생명의 차원에서의 일이며 “여성이 자신을 낳는 것”은 삶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생명은 유한하지만, 삶은 스피노자적 의미의 ‘영원’의 차원에 속합니다. 스피노자의 용어를 사용하여 더 설명하자면, 생명은 ‘코나투스’(conatus)에 해당하며, 삶은 ‘코나투스’에서 출발하여 ‘욕구’(appetitus), ‘욕망’(cupiditas)을 거쳐 ‘사랑’(amore,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코나투스(conatus)는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이고, ‘욕구’(appetitus)는 코나투스를 정신과 몸 양자와 연관시킨 것이며 ‘욕망’(cupiditas)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욕구’입니다. ‘사랑’(amore)은 외적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무엇이 자신에게 기쁨을 주었는지를 알면서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기쁨은 사유능력(행동능력)의 증가가 가져오는 정동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슬픔’입니다.))))으로 나아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활동에 해당합니다. ‘코나투스’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사랑’은 아니듯이, 생명은 출발점이지만 아직 삶은 아닙니다.((사실 자본주의 체제란 이 출발점의 확보(생계수단의 획득)를 위해서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 생애 동안 노동력을 팔아도 출발점에서 떠나보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곳이 또한 자본주의 체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자기유지 말고는 다른 목적을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에 반해 삶은 개화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새로운 삶형태의 개화—가 목적입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① 기존의 삶형태에서 벗어나야 하고 ② 새로운 삶형태를 만개((저는 ‘만개’의 한자어 ‘滿開’에 ‘萬開’를 중첩시키고 싶습니다. ‘만물이 만 가지 형태로 만개하다’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시켜야 합니다. 삶정치론은 이 두 가지를 해내는 힘, 이 삶의 힘을 ‘활력’이라고 부르며 권력에 대립시킵니다. 영어를 제외하고 활력과 권력을 따로 부르는 단어들이 여러 언어에 있습니다.

 

권력

활력

라틴어

potestas

potentia

불어

pouvoir

puissance

독일어

Macht

Vermögen

스페인어

poder

potencia

이탈리아어

potere

potenza

영어

power

power

활력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이해는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힘은 존재론적으로 본원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그 다음에 옵니다. 권력은 이 달라지는 힘이 발휘되지 않도록, 즉 달라지지 못하도록 막는 힘입니다.(( “권력은 자유로운 주체들에게만, 그리고 그들이 자유로운 한에서만 행사된다”라는 푸꼬의 말을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Michel Foucault, “The Subject and Power,” Critical Inquiry, Vol. 8, NO. 4 (Summer, 1982), P.790.)) 그런데 어떻게 막는 것일까요? 죽임으로써? 죽이는 권력이 존재했고 또 여전히 존재합니다.((단순히 죽이는 것만으로는 권력의 존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세계에는 일반적으로 권력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가까운 영장류의 경우에는 혹시 모르기에 “일반적으로”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들뢰즈는 『스피노자— 실천철학』이라는 책에서 생명을 잃는 ‘외적 죽음’과는 다른 ‘내적 죽음’을 말하는데, 이는 권력에 의해 노예화된 삶을 가리킵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이것이 바로 ‘내적 죽음’입니다. 현대의 삶권력은 바로 이 ‘내적 죽음’을 세련된 방식으로 양산합니다.)) 그러나 ‘죽임’은 삶권력의 발휘 양태가 아닙니다.((죽이는 것은 개체(에고)의 생명을 취함으로써 그 개체가 하나의 삶형태를 만개할 가능성을 아예 자르는 것인데, 해당 개체에게는 엄청난 사건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본원적인 삶의 활력 자체를 소진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재를 두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활력이 본원적으로 존재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이 활력이 현실화(육화)되는 차원입니다. 이 두 차원을 각각 ‘삶의 장’과 ‘현실화의 장’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삶의 장은 오직 변화와 흐름만이 존재하는 무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은 활력이 형태를 부여받아 육화되는 형질의 차원입니다. ‘현실화의 장’에서 ‘지층화’라고 부르는 것이 일어납니다. 지층화한 위계(수직적), 인과(수평적), 틀(3차원적)을 이루는 관계들이 사라지지 않고 고정적으로 존속하면서 활력이 새로운 형태를 띠지 못하고 이미 존재하는 형태로 반복되게 하는 것입니다.((A Thousand Plateaus, p.335.)) 이 지층화의 고도화된 형태가 바로 삶권력입니다.

삶권력으로서의 자본은 삶의 활력이 산출하는 차이소(Δ, ‘삶의 잉여가치’ 혹은 ‘초과’((‘삶의 잉여가치’는 들뢰즈·가따리의 용어이고 ‘초과’는 네그리의 용어입니다.)))를 수량화하여 ‘가격’(교환가치)의 형태로 ‘경제’ 체계로 끌어들입니다. 수량화는 척도에의 종속을 전제하며 척도에의 종속은 지층화의 한 양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적 차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자본의 수량화가 필연적으로 (사용가치)의 동질화를 동반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동질화를 동반하는 수량화는 활력의 늘 달라지는 힘을 덮고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늘 달라지는 힘은 현실성의 층에서는 질적인 차이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획이 계속되는 사이에 자본주의적 관계가 공고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주체성(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주체성)이 번성하게 됩니다(([추가] 실질적 포섭의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그 욕망과 사고방식이 자본이 지향하는 방향에 부합하는 주체성 이른바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를 생산·재생산합니다.(증식/축적) 여기서 완전히 벗어난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규칙—예컨대 가게에 들어가면 특정 액수의 돈을 물건과 바꾸는 것—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본주의의 규칙이 서서히 몸에 배고 정신에 뱁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됩니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동반하는 가치의 수량화(가격화)와 함께 개인들을 사적 소유자이자 교환자(노동자+소비자)로 정착시킵니다. 이는 개인들에 잠재하는 특이한 활력들을 (하이데거의 용어를 끌어다 쓰자면) ‘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자본주의적 주체성으로 환원된 개인들은 협동과 공감의 능력을 점차 상실하고 경쟁과 배제의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게 됩니다. 이는 의외로 악영향이 큽니다. 자본을 타도하는 것이 목적인 많은 좌파조직들이 서로 협동하기보다 (자신들의 이론과 방향이 더 옳다면서) 경쟁해온 것을 보세요. 자본주의적 주체성에서는 이렇듯 ‘배제적 이접’(들뢰즈·가따리)의 논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활력들을 가둔 울타리들은 서로 중첩될 수 없으니까요.[/추가])). 이로써 삶권력으로서 자본이 삶을 포섭하는 작업이 일정하게 완료되는 것입니다.((『천 개의 고원』의 영역자로 유명한 마쑤미(Brian Massumi)도 최근에 나온 『가치의 재가치화에 대한 99개의 테제』(99 Theses on the Revaluation of Value)에서 권력으로서의 자본이 하는 일이 이 Δ를 측정 가능한 이윤/가격의 형태로 포획하는 것으로 봅니다. https://manifold.umn.edu/read/a9a025ba-dd4f-46ac-a149-f6bdd7b07399/section/5a143d0f-7f69-4b07-8a20-44e5eac69f0f#toc))

삶정치론의 목표는 삶권력으로부터 삶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일단 ‘삶권력으로부터’라는 점에서 삶정치론은 커먼즈 운동과 명시적으로 상통합니다. 커먼즈 운동 또한 (오스트롬의 전통적인 공유지 연구에서부터) ‘국가와 시장(자본) 외부 혹은 너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전통적인 공유지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와 시장은 역사적으로 철천지원수입니다.)) 그런데 삶의 해방의 차원에서도 양자가 상통하는지는 삶정치론이 어떤 구체적 기획을 가지는지를 더 알아보고 커먼즈 운동의 구체적 기획과 비교해야 판단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삶의 해방’이란 말이 아직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삶정치론은 이론이기에 자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행동하지는 못하며 반대로 커먼즈 운동은 실천적 운동이기에 그 운동이 함축하는 모든 것을 말하지는 못한다는 점도 충분히 감안해야 할 듯합니다.)

삶정치론의 기획에서 삶이 만개에 이르는 과정은 둘로 나뉩니다. ① 우선 삶권력의 포획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삶권력이 워낙 삶 깊숙이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탈근대에 일어난 자본의 변형은 생산하는 다중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만드는 경향을 가지기 때문에 상황은 유리해집니다. 그러나 삶권력의 포획에서 자유롭다고 해서 일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② 삶권력이 장악했던 그 자리(현실화의 장)에 새로운 삶형태를 구현하는 일이 남아있습니다.

이 두 단계 혹은 측면에 상응하여 네그리는 활력을 ‘가난’의 힘과 ‘사랑’의 힘으로 나눕니다. 가난은 권력을 텅 비운 상태(제로 지층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활력의

씨알이 잠재된 상태입니다. 사랑은 이 씨알이 활력으로 전개되어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힘입니다.

이것이 삶정치론의 기본 구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추상적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 무엇을 어떻게’의 형태로 더 구체화한 것이 ‘특이성들의 다중’, ‘공통적인 것’(the common) 그리고 ‘민주주의’ 3자의 관계입니다.

삶정치론의 주체는 ‘다중’입니다.((사실 주체라는 말보다 주체성 혹은 주체화라는 말을 쓰는 것이 푸꼬에서 네그리에 이르는 삶정치론자들의 취지에 더 부합합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양자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이는 자본의 생산방식에 일어난 변형(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혹은 삶정치적 생산)에 상응하는 새로운 주체입니다.((네그리는 그 이전에는 ‘전문 노동자’, ‘대중노동자’, ‘사회적 노동자’의 순서로 이러한 주체 형상의 변화를 계속 추적해왔습니다.)) 다중 이전의 대표적 변혁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자본과의 관계에서의 위치의 동일함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라면, 다중은 자본에 고용되든 아니든 사회적 생산에 참여하는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서로 차이나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로서 이루어집니다. 다중은 경계가 확정된 어떤 고정된 집단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다중 만들기’입니다. 그리고 크기나 숫자와 무관합니다. 누구라도, 몇 명이라도 다중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번 만들고 나면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하게 다시 만들어야 할 주체성입니다.((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다중 만들기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촛불’다중의 형성인데, 누구나 알다시피 ‘촛불’다중은 한번 이루어졌다고 해서 고정된 형태로 남는 식의 집단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개인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하지 않고 ‘특이성들의 다중’ 즉 특이성들이 모여서 이루는 다중이라고 할까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정하게 자리를 잡은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따르면 개인이 바로 자유의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도, ‘개인’도 근대의 산물—커먼즈를 파괴한 그 근대의 산물—입니다. 커먼즈를 상실한 개별 인간들이 바로 ‘개인’들입니다. 자본의 시초 축적 단계에서 민중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산산이 흩어져 이른바 ‘원자화된 개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역사에 비해 발전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개인’은 “권력의 최초의 효과들 중 하나”입니다.((Michel Foucault, “Society Must Be Defended”: Lectures at the. College de France, 1975-1976, Translated by David Macey (New York: Picador, 2003) pp.29-30. 이 앞에서 푸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권력은 유통되는 어떤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연쇄의 일부로서만 기능하는 어떤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권력은 이곳저곳에 장소를 잡지 않으며 소수의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나 상품이 전유되듯이 전유되지도 않는다. 권력은 기능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들을 통해 행사되며 이 네트워크들에서 개인들이 유통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은 권력에의 굴복과 권력의 행사를 동시에 행한다. 개인들은 결코 타성적이거나 동의하는 권력의 표적들이 아니다. 개인들이 권력의 중개점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권력은 개인들을 통과한다. 권력이 개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책, p.29.)) 이 근대적 ‘개인’은 울타리쳐진(종획된) 정신과 몸의 구현물이며((이런 의미에서 소외의 한 양태입니다.)) 사적 소유의 주체입니다. 이제 ‘개인’은 ‘일자’가 되며 ‘정체성’에 정착합니다.((이렇게 개인을 이해하는 사고방식은 집단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에 기반을 둔 집단관입니다. ‘자연의 정복자로서의 인간’을 상정하는 것도 동일한 사고방식입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 울타리를 쳐서 인간/자연으로 나눈 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나누면 반드시 양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형성됩니다. 남/녀, 어른/아이, 중심/주변 등등의 나눔 짝들을 보세요.))

삶정치론은 여러 특이한 힘들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공재하며 서로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자리로서의 개인을 지향합니다. 이러한 개인은, 특이한 힘이란 스스로 달라지는(차이를 발생시키는) 힘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다 다릅니다.((이 그때그때 다른 것을 각개성(haecceity)이라고 합니다.)) 한 개인의 활력의 크기는 이 공재하는 힘들이 얼마나 협동적이냐에 따릅니다. 각 힘들의 Δ들은 사실 서로 상쇄될 수도 있는데 협동의 방식으로 네트워킹되는 경우에는 활력의 상호증가를 낳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사람에게 공재하는 특이한 힘들은 각각 외부의 다른 힘들과 별도의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형태의 다중 만들기에 참여할 수도 있습니다.((이는 어떤 커머너가 여러 커먼즈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렇듯 핵심은 개인보다는 특이한 힘들 그것들의 협동적 관계입니다. 즉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특이한 힘이 그를 거쳐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이성들의 다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개인들의 다중’을 말하면 근대적 개인관에 젖어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중을 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고정된 집단처럼 이해하게 될 것이며, 그러면 다중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특이성, 특이한 활력에 대한 강조는 우리의 시선의 일부가 늘 예의 ‘삶의 장’에 두어져 있고 거기서 활력을 받아오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다른 운동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커먼즈 운동의 경우에도 일시적인 필요상 한 커먼즈 내의 커머너들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어야 합니다. 특이성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삶의 장’에 접속하지 못하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것이 무엇이든)에 그치는 운동이 되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커먼즈 운동과 연관된 이론가나 학자들 가운데 이 문제를 궁구하는 이가 없지 않습니다. 데이빗 볼리어의 Think Like a Commoner(한국어판 배수현 옮김『공유인으로 사고하라』갈무리 2015) 10장 「전과는 다르게 보고 다르게 존재하는 방식으로서의 커먼즈」에 소개되는 베버(Andreas Weber)의 연구 —이는 ‘Enlivenment’ 같은 개념을 중심으로 합니다— 가 이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방면의 연구가 앞으로 더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이와 병행하여 커머너들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정신으로 ‘삶의 장’에 접속하는 훈련을 하는 것, 즉 사물을 포함한 주위세계와의 동지의식을 양성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추가] 특이성(singularity)은 스피노자에게서 와서 푸꼬((푸꼬의 경우에는 가령 ‘다양체론’(‘모든 사물은 다양체이다’)이 특이성에 대한 인식에 속합니다. 믈론 더 파고 들어가면 이뿐만이 아니지만요.)), 들뢰즈·가따리를 통해 발전되었으며 네그리·하트에게 이어집니다.((개념은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개념으로서의 특이성도 그것을 표현하는 단어인 ‘singularitas’, ‘singularity’, ‘singularité’, ‘특이성’ 등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는, 이런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특이성 개념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발제문에 거론한 철학자들 이전에 영문학 전통에서 ‘특이성’에 대해서 처음 배웠습니다. 들뢰즈 사유의 한 원천인 (소설가) 로렌스가 말하는 ‘individuality’는 그 내용은 특이성에 해당합니다. 낭만주의 시인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identity’와 ‘selfhood’— 저는 각각 ‘열린 자아’, ‘닫힌 자아’라고 옮깁니다—가운데 전자는 특이성들에 열린 자아이고 후자는 하나로 단일하게 종획되어 닫힌 자아입니다. 이 이외에 다른 문화전통에도 특이성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존재할 것입니다.)) 특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은 ‘정체성’이며 이는 인간의 경우 ‘인격’으로 구현됩니다. 개체를 특이성들의 ‘공재’인 다양체로 보지 않고 단일하게 통일된 상태로 보는 것이 ‘정체성’, ‘인격’입니다.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당연히 어떤 관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모든 것이 다양체이니까요.((‘인격’에 대한 로렌스의 비판을 보려면 http://minamjah.tistory.com/181?category=572143를 참조하세요. 『99개의 테제』에서 마쑤미는 ‘인격화’(personalization)을 개인의 활력이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양상의 하나로 봅니다.)) [/추가]

그런데 특이성들이 아무리 네트워크를 이루어 모여 있더라도 무언가를 같이 하지 않고서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무엇’에 해당하는 것이 공통적인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중은 공통적인 것을 조건으로 해서 공통적인 활동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그 생산된 것이 다시 갱신된 다중의 새로운 활동 조건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공통적인 것이 갱신되고 이와 함께 다중도 갱신됩니다.((네그리·하트가 공통적인 것을 설명할 때 그 대표적인 예로 드는 것이 언어입니다. “예를 들어 언어는 정동이나 제스처처럼 대부분 공통적이며, 만일 사적이거나 공적인 것이 된다면—즉 단어·어구·품사의 많은 부분이 사적 소유나 공적 권위에 종속된다면—표현·창조·소통의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네그리·하트 지음, 정남영·윤영광 옮김,『공통체』(사월의책 2014) 17-18면.))

공통적인 것을 실행하는 방식이 바로 민주주의입니다. 삶정치론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네그리·하트가 보기에 대의민주주의는 귀족제입니다. 선출된 소수의 ‘대표자들’이 통치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처럼 통치의 한 방식이 아닙니다.((만일 그것이 통치라면 ‘자기통치’입니다.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입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일반의지’(루소)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다중의 민주주의는 ‘공통의 의지’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다중의 민주주의는 스피노자의 용어를 빌려 ‘절대 민주주의’라고도 부릅니다.)

과연 다중을 구성하는 모두가 자치의 주체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네그리와 하트는 “러시아 민중은 작업장에서 종속과 감독 그리고 관리자들을 필요로 하도록 훈련받았으며, 직장에 상사가 있기에 정치에서도 상사를 필요로 한다”는 레닌의 견해((『공통체』 256면.))를 소개한 후에 ① 자본주의의 기술적 변형에 따른 새로운 생산의 방식— 삶정치적 생산—이 다중을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 만들고 있으며 ② 혹시 아직 훈련이 덜 되었더라도 민주주의의 훈련은 민주주의를 통해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실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지도자가 없는 곳이며 민주주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으로서 커먼즈만한 곳이 없을 것입니다. 삶정치론의 민주주의론은 그 복잡한 디테일을 덜고 나면 커먼즈의 민주주의와 바로 통하는 것입니다.((물론 사회 전체에는 아직 ‘지도층’이 건재합니다. 따라서 삶정치론이 비록 지도자의 부재를 지향할지라도 실제 현실에 지도자가 부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도자의 부재를 향한 경향을 현실에도 존재하는데 『집회』에서 네그리와 하트는 이 경향을 ‘전략과 전술의 전도’에서 읽어냅니다. 과거에는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했는데,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지난 촛불에서 일정한 만큼 목격했던 바입니다. 전체적인 방향 즉 전략을 결정한 것은 촛불다중이지 지도부들이 아닙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강한 친화성은 무엇보다 ‘공통적인 것’(the common)과 커먼즈(commons)의 어휘상의 유사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표면상의 유사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다.(( [옮긴이] 이는 커먼즈 역사가인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말이다.)) 커먼즈는 자원도 아니고 자원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도 아니며 자원을 파수하기 위한 프로토콜도 아니다. 커먼즈는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 p.5.))

여기서 “이 모든 요소들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이란 삶정치론의 용어로 말하자면 다중이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부단히 공통적인 것을 산출하는 활동에 다름 아닙니다. 여기서 “공동체”는 원칙적으로 국가와 시장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다중과 통하고, “프로토콜”은 참여자 모두에 의한 거버넌스의 규칙이라는 점에서 다중의 민주주의와 통하며, “자원”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부이기 때문입니다. 커먼즈나 공통적인 것이나 사유재산이 아닌 부,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것인 공통재(common goods)를 포함하면서도 거기에 국한되지는 않고 주체적 활동의 측면도 포함합니다. 이렇게 보면 ‘커머너’(commoner)는 다중에 속한 한 개인을 지칭하는 말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네그리·하트도 『선언』(Declaration, 2012)에서 ‘커머너’와 ‘커머닝’을 온전히 자신들의 삶정치론에 들어와있는 용어처럼 설명합니다. 커머너의 커머닝이 “공통적인 것을 만드는” 활동으로서 제시되는 것입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New York: Argo Navis Author Services, 2012). Declaration, p. 105. 이 대목은 조금 길지만 읽을 가치가 있기에 뒤에 부록으로 첨부합니다. 여기에는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에 바라는 바가 담겨있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는 초기의 태도에서 진전된 것입니다. 2004년에 네그리·하트는 ‘커먼즈’(the commons)라는 용어를 피하고 ‘공통적인 것’을 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커먼즈라고 부르기를 꺼리는데, 커먼즈가 사유재산의 출현으로 파괴된 전자본주의적인 공유된 공간들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비록 더 어색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그 철학적 내용을 더 부각시키며 이것이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발전임을 강조한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2004) p.xv.))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 2009년이고 P2P재단은 2005년에 창립되었으며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의 블로그는 2008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따라서 2004년의 네그리·하트로서는 커먼즈를 전자본주의적인 공유지 이외의 것으로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커먼즈가 전통적인 공유지의 협소함—이것을 이유로 오스트롬의 커먼즈 연구의 한계를 지적하는 일이 많았습니다—에서 시원하게 벗어난 것은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을 계기로 해서입니다. 이로써 커먼즈 운동에 전지구적 차원이 부여되고, 이는 DG-ML(Design globally, manufacture locally)이라는 새로운 생산양식(P2P 생산양식의 더 구체화인 형태)을 다듬어내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점도 삶정치론과 묘하게 통합니다. 네그리·하트가 다듬어낸 새로운 주체성인 다중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나중에는 ‘삶정치적 생산’이라는 말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의 기술적 변형에 상응하는 것인데, 이 변형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즉 커먼즈 운동이 운동으로 확대되는 계기는 다중이라는 정치적 주체성이 개념으로서 다듬어지는 계기와 동일합니다.

흥미롭게도 네그리·하트는 가장 최근의 책 『집회』(Assembly, 2017)에서 ‘공유지의 비극’론과 함께 그것을 반박하는 오스트롬을 명확하게 거론합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이 민주적 참여의 제도들을 통해 관리되어야 한다는 오스트롬의 주장에 진심으로 찬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접근과 의사결정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작아야 하고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과는 생각을 달리한다. 우리는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이들에게 열린 더 확장적인 민주적 경험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New York :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p 96. 이 앞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형태의 것이든 공통적인 것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부의 사용과 부에의 접근이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통적인 것의 현대적 적합성을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데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저작을 쓴 엘리너 오스트롬은 올바르게도 거버넌스와 제도의 필요에 초점을 둔다. 오스트롬은 모든 부는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황폐해지지 않게 보존되려면 공적 재산이 되거나 사유재산이 되어야 한다는 ‘공유지의 비극’류의 주장들 모두의 허위성을 설득력 있게 드러낸다. 그녀는 ‘공유재’(common-pool resources)는 관리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국가와 자본주의적 기업이 관리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데에는 반대한다. 집단적인 형태의 자주관리가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참여자들 자신에 의해서 규칙이 고안되고 수정되며, 또한 그들에 의해서 감시되고 시행되는,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공통의 재산 배치.’”))

둘째 문장의 경우 그 취지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대로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 이후 커먼즈 운동이 규모의 한계를 부수고 발전하고 있는 지금 그 초석을 놓았을 뿐인 오스트롬(과 그녀의 연구의 대상인 전통적인 형태의 커먼즈)을 놓고 저렇게 비판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큰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지금 커먼즈는 다중처럼 언제라도 만들 수 있습니다. 볼리어가 말했듯이 “커먼즈는 일군의 사람들이 어떤 자원을 집단적인 방식으로, 공정한 접근, 이용, 장기적 돌봄을 특별히 염두에 두면서 관리하기로 결정할 때 발생할 수 있”습니다.((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2014), p. 128.)) 그리고 그 규모는 지역 너머, 일국 너머, 대륙 너머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바우엔스 등의 커먼즈 활동가들 또한 네그리·하트처럼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의 포부가 네그리·하트의 포부와 어느 정도 유사한지는 『집회』에서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말하는 대목((Assembly, 15장 2절))과 「커먼즈 이행과 P2P 입문」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나중에 더 확장되어 http://commonstransition.org/commons-transition-p2p-primer/에 올려져 있습니다.)), 2017년 3월)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커먼즈의 (정치적) 확대를 말하는 대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움직임을 말한 것이므로 일단 정치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표에는 여기에 경제 영역의 유사성도 추가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표로 만들어보았습니다.)

 

삶정치

커먼즈 운동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작은 규모로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하는 운동단체들, 엑서더스

커먼즈의 생산공동체 자체

국가와의 관계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가령, 민중의 ‘하인’이 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기)

파트너 국가론 : 생산공동체를 국가의 법의 틀에서 합법화하는 비영리 지원단체들의 확장1)주석누락

(참고) 자본과의 관계

다중의 기업가

커먼즈 지향적 기업가 연합들

헤게모니 전략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2)주석누락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경제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회의소’(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커먼즈 의회’(Assembly of the Commons)가 구상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일국 사회의 범위 너머로 확대될 수 있다.

이 표를 보면 양자 사이에 차이가 없지 않지만, 친화성이 그 차이를 압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저 표에서 ‘예시적 정치’라는 항목과 관련해서일 것입니다. 표에서 보듯이 네그리·하트는 운동단체들이 자체 내에서 수립하는 민주주의에 ‘예시적 정치’라는 이름을 붙입니다.((한국에서는 특히 전통적인 운동단체들의 경우에는 자체 내에서 민주주의를 수립하는 경우가 드문 것 같습니다. 촛불 다중의 수평성은 다중 자체가 이룬 것입니다. 2008년 촛불 다중이 막 형성되던 초기에 특정 운동단체가 지도하려 했지만 거부당한 사례가 있습니다. 해외의 경우 1999년 씨애틀 이후에는 특히 소문자 ‘a’의 아나키스트들(anarchists)이 절차를 민주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https://newleftreview.org/II/13/david-graeber-the-new-anarchists 참조.))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 정치’는 필요하지만 예의 ‘세 얼굴’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런데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의 정치를 ‘예시적’이라고 부를 때 이는 단지 필요한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미래의 예시적 현존, 따라서 확대되어야 할 씨알로 보는 것입니다.

커먼즈가 그리고 새로운 가치 체제의 예시적 형태들이 이미 존재한다. 커머너들이 이미 이곳에 존재하며 이미 커머닝을 행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커먼즈 이행이 시작된 것이다.((Michel Bauwens, Vasilis Kostakis, Stacco Troncoso, Ann Marie Utratel, “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p.47.))

우리는 네그리·하트의 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듯합니다. 고정된 조직화 형태를 모델로서 말하지 않고 미지의 상태로 두는 삶정치론이 새로운 조직이나 제도의 발명에 더 강조점을 둔다면, 커먼즈 운동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 존재했던 조직 혹은 공동체 형태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추어 새롭게 발전시키는 데 더 초점을 둔다고 말입니다.

[추가]

커먼즈 운동은 원리상으로 자본 너머를 지향하지만, 현재 자본에 ‘연루’된 현실을 무시하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쑤미가 「99개의 테제」에서 ‘창조적 이중성’(creative duplicity)이라고 부른 것이 중요해집니다. 우리가 ‘자본 너머’의 원리를 깨우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깨우친다고 해서 바로 자본 너머로 나가는 것은 아니며 아마도 상당한 시간 동안 자본주의에 몸을 둔 채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굳이 회피하지 않으면서 자본 너머로 나아가는 욕망과 활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더 상승시키는 것이 바로 ‘창조적 이중성’입니다.((마쑤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루를 한탄하지 말고 즐기라. 교리상의 용감함으로 남을 비판하며 지배하지 말라. 창조적으로 유희의 장에 내려가 몸을 더럽히라.”(테제60, 주석c))) (깨우침과 그 이후의 실천을 합해서 ‘돈오점수’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점수’를 자본주의와의 타협이라고 생각하고 ‘돈오’의 비타협성을 고수하다가 활력을 탕진하고 좌절하거나 아니면 반대로 깨우침이고 뭐고 없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섭되고 맙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을 넘어설 만큼의 활력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이고 협동하여 오랫동안 양성해야 합니다. 따라서 ‘점수’의 과정을 전략적으로 슬기롭게 운용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커먼즈 운동에서는 이러한 ‘점수’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성적 자본’ 혹은 ‘친구로서의 자본’은 시장 혹은 자본주의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돈을 벌지만, 그 돈을 커먼즈의 축적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파트너국가’론은 국가와의 관계에 해당합니다. 국가를 가능하다면 커먼즈 운동을 돕는 곳이 되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스페인에서 선보인 도시자치주의는 정당정치와의 창조적 관계를 실행합니다. 정당정치를 정당을 넘어선 연합의 정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 이외에도 수많은 ‘점수’의 아이디어들이 있을 것이고 또 계속 창출될 것입니다.((스페인의 도시 커먼즈 운동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의 대담으로 http://minamjah.tistory.com/233 참조.))

[/추가]

그런데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커먼즈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면 낡아도 한참 낡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대안근대의 근본적으로 새로운 삶형태로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커먼즈 운동가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맑스가 이미 한 말이 있습니다. 맑스는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 557.))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 혹은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출처 수정함]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이것이 맑스가 보는 커먼즈입니다. 사실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그 발전의 정점에서 자본을 넘어서는 사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시들 것이라고 추론해냄으로써 네그리에게 큰 영감을 준 바 있습니다.((네그리는 한때 감옥에서 엄청난 좌절에 빠졌는데, 이때 그를 구해준 것이 맑스와 스피노자의 저작들입니다. 네그리는 양자 모두 근대 속의 탈근대(나중에는 ‘대안근대’)로 꼽습니다.)) 이렇게 볼 때 맑스가—그에게 두 측면이 공존함으로 인해서—삶정치론과 커먼즈 운동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측면은 네그리·하트가 자본의 탈근대적 변형에 상응하여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을 다듬어낸 것과 연관되며, 다른 한 측면은 커먼즈 운동의 새로운 부활과 연관됩니다.)

지금은 맑스를 제대로 읽는 사람들이 줄어들어서 매우 안타까운데요, 사실 (삶권력이라는 말은 20세기 후반에 와서야 생긴 것이지만) 맑스가 가장 먼저 자본과 국가를 삶권력으로서 포착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맑스를 잘 읽으면, 자본주의는 (아무리 그것이 일정한 역사적 사명((맑스는 자본의 이러한 역사적 사명을 인정합니다. [추가]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역사적 사명은 ··· 사물이 스스로 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을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하는 것이 종식된 단계에 이르게 되자마자 완수”됩니다. Grundrisse, p.325.[/추가]))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소외된 삶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따라서 극복되어야 할 체제라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맑스의 자본 연구는 바로 이 ‘극복’을 위한 준비에 다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삶은 만개라는 자기목적 이외에는 없습니다. 자유로운 조건이라면 각 개인이나 집단이 이 출발조건에서 만개를 향해 나아가는 만큼이 그 성취입니다. 자유로운 조건에서라도 모두가 만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아무리 억압적인 조건에서도 삶을 만개시키는 데 모두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족한 소수나 특출한 소수의 관점에서 사회를 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모두에게 자유로운 조건을 주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사회 구성의 원칙입니다. 민주주의가 바로 그 조건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의 협소함에서 벗어나서 민주주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출발조건을 저 뒤로 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대의민주주의와 언론으로 스스로를 민주주의인 양 위장했습니다. 문명을 가장한 야만이었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출발조건은 끊임없이 돌아가는 워킹머신과 같습니다. 열심히 걷고 뛰어야 그 위에 간신히 서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뒤로 쳐지고 맙니다. 출발조건을 이미 획득한 사람들의 행태도 출발조건에 갇혀 있습니다. 만개를 향해 나아가기보다 내일의 출발조건, 내년의 출발조건, 후손의 출발조건을 확보하려 합니다. 심지어는 내생의 출발조건을 미리 확보하려는 듯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류가 이런 식으로 어리석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조건이 삶의 감옥이 된 상태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로 상황이 유리합니다. 한편으로는 희소성의 원칙에 갇히지 않는 부를 생산하는 기술도 발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설적입니다만) 이 상태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다 죽는다는 환경의 실제적 경고도 존재합니다. 커먼즈 운동은 자급운동(출발점의 확보)을 넘어서 바로 이러한 삶의 만개를 향한 운동, 진정한 삶의 가치를 향한 운동으로 나아가야 하고, 또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삶정치론은 좋은 동지요 길벗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록1] 네그리·하트가 말하는 ‘커머너’와 ‘커머닝’

중세 잉글랜드에서 커머너(commoner)는 사회 질서를 구성하는 세 신분―싸우는 계층(귀족), 기도하는 계층(성직자), 일하는 계층(커머너)―의 하나였다. 영국 등지에서 근대 영어의 용법에 보존된 ‘커머너’라는 용어의 의미[우리말로 ‘평민’]는 작위(爵位) 등의 사회적인 지위가 없는 사람, 즉 보통사람을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택하는 ‘커머너’라는 용어는 중세 잉글랜드로 소급되는 생산적 성격을 보존하면서도 그것보다 더 나아가야 한다. 커머너들은 그저 그들이 일하기 때문에 ‘커먼’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공통적인 것에 입각하여 일하기 때문에 ‘커먼’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빵 굽는 사람, 옷감 짜는 사람, 방아 돌리는 사람 같이 직업을 가리키는 말을 이해하듯이 ‘커머너’라는 용어를 이해해야 한다. 빵 굽는 사람이 빵을 굽고, 옷감 짜는 사람이 옷감을 짜고, 방아 돌리는 사람이 방아를 돌리듯이, 커머너는 커머닝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을 만든다.

따라서 커머너는 비범한 과제―사유 재산을 모든 이의 접근과 향유가 가능하도록 개방하는 일, 국가의 권위에 의하여 통제되는 공적 재산을 공통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일, 그리고 모든 경우마다 공통의 부를 민주적 참여를 통하여 관리하고, 발전시키고 지속시키는 메커니즘들을 발견하는 일―를 성취하는 보통사람이다. 그렇다면 커머너의 과제는 빈자들이 자급할 수 있도록 들판과 강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이미지, 코드, 음악,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을 위한 수단을 창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이 과제를 성취할 선결 조건들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사회적 유대를 창출할 능력, 특이성들이 차이를 통해 소통할 능력, 공포가 없는 상태가 가져다는 주는 진정한 안전, 그리고 민주적인 정치 행동을 할 능력이 그것이다. 커머너는 구성적 참여자이다. 즉 공통적인 것의 개방적 공유에 기반을 둔 민주적 사회를 구성하는 데 토대가 되고 필요한 주체성이다.

‘커머닝’의 행동은 공유된 부에의 접근과 자기관리만을 향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의 형태들을 구축하는 것을 향하기도 해야 한다. 커머너는 투쟁하는 광범하고 다양한 사회적 집단들―학생들, 노동자들, 고용되지 않는 사람들, 빈민, 젠더 및 인종과 관련된 종속과 싸우는 사람들 등―사이의 ‘연합’(alliances)를 창출할 수단을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열거를 할 때 사람들은 때때로 정치적 현실화의 실천으로서 형성되는 ‘연대’(coalition)를 염두에 둔다. 그러나 ‘연대’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기에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연대’는 다양한 집단들이 전략·전술상 함께하면서도 그 뚜렷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심지어 분리된 조직구조를 유지하는 것을 함축한다. 공통적인 것의 ‘연합’은 전적으로 이와 다르다. 물론 커머닝은 정체성들((여기서는 ‘서로 다른 정체성들’이라고 읽으면 됩니다.))이 부정되어 모두가 자신들이 밑바탕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공통적인 것은 동일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투쟁과정에서는 상이한 사회적 집단들이 특이성들로서 상호작용하며 상호교류에 의하여 계몽되고 고취되고 변형된다. 그들은 투쟁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듣거나 이해할 수 없는 저주파로 서로 말한다.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Declaration, pp. 105-107 (밑줄은 인용자의 것)

[부록2]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물질대사의 단절’(맑스)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복지국가

선(先)분배(pre-distribution)—커먼즈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

계몽주의적 이성/기능적 합리성

삶정치적 이성/공통적 감각

노동시간

삶의 시간

측정/척도

탈측정/척도 너머

이윤으로서의 잉여가치(경제적 잉여가치)

삻의 잉여가치

자본주의적 주체성

자유로운 주체성: 커머너, 다중

삶의 시간은 생계수단을 버는 시간

삶의 시간은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하는 시간

인격, 합리적 개인

특이성

추출 대상으로서의 자연

동지로서의 자연

* 알림 : 몇 사람이 모여서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론에 대한 글들을 우리말로 옮겨서 소개하는 블로그를 만들고 있습니다. 제 개인 블로그(minamjah.tistory.com/)의 커먼즈 운동 및 삶정치 섹션의 글들을 가져오고 그 뒤를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현재 제 블로그에도 저 말고도 다른 역자들이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블로그는 아직 구축 중입니다. 시간을 많이 못 내서(아니면 게을러서?) 아직 글들을 다 가져오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듯합니다. URL은 http://commonstrans.net/입니다.

 




대담 : 정치의 새로운 중심으로서의 도시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유럽 전역의 도시들에서 시민들이 (플랫폼들, 운동들, 국제적 네트워크들을 통해) 정치에 직접 참여하여 영향을 미치는 경로들을 창출하고 있다. 바르셀로나의 자치도시 플랫폼인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의 창립자인 쑤비라츠(Joan Subirats)는 도시들이 어떻게 불확실성을 다루고 새로운 유형의 보호를 제공하며 첨단 거대기업들이 우리의 모든 데이터를 소유하는 추세를 역전시키고 심지어는 난민 같은 문제에 대하여 국민국가들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논의한다.

이 글은 ‘어번 커먼즈’에 대한 일련의 글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린유러피안저널』(Green European Journal) 16호 「장안의 화제 : 유럽 도시 탐구」(“Talk of the Town: Exploring the City in Europe”)가 그 출처이다. 이 글에서 DIEM25의 마르씰리(Lorenzo Marsili)가 바르셀로나 자율대학의 통치 및 공공정책 연구원의 창립자이자 원장인 쑤비라츠를 인터뷰한다.

— 트론코소(Stacco Troncoso)

마르씰리: 유령이 유럽에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라는 유령이지요. 당신은 당신이 바르셀로나에서 하는 일이 왜 그토록 상징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쑤비라츠: 분명 다양한 요인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하나의 요인은 플랫폼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독점적인 디지털 자본주의로의 변형인데요, 국가는 여기에 대응할 능력을 잃었습니다. 빅 플레이어들(big players)이 투자펀드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이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부채와 긴축정책의 논리에 갇혀 있습니다. 동시에 인구는 점증하는 어려움에 처하며, 불확실성,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미래에 무슨 일어날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감정입니다. 나의 생활수준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여러 해 전에 철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상품화를 향한 운동과 그에 맞서는 보호의 운동에 대해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 보호를 받으려면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요?

마르씰리: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호소합니다.

쑤비라츠: 네, 국가가 보호를 요청할 고전적인 장소입니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외국인혐오적인 논리를 따르는 국가가 여전히 보호를 요청할 공간이며, 국가는 많은 경우 국경을 폐쇄하고 사회를 폐쇄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본래 다릅니다. 도시는 개방될 목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우리는 도시의 공기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원주] ‘도시의 공기가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Stadtluft macht frei)는 ‘일 년 하고도 하루’ 이상 도시 주거지에서 산 정착자들에게 자유와 땅을 제공한다는 법의 원리를 설명하는 독일 중세 속담이다.)) 도시는 기회와 가능성들이 모이는 공간이죠. 도시 당국이 국민국가보다 정책권한과 권력을 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도시 당국과 정치적 당사자들 사이의 근접성으로 인해 시민들에게 훨씬 더 밀착되고 구체적인 종류의 보호가 제공됩니다. 몇몇 일들—모든 일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이 달라지고 호전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도시라는 말입니다.

마르씰리: 폴라니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철학 교수 프레이저(Nancy Fraser)는 두 번째 운동인 보호 운동은 주로 여성, 소수자,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 반해서 서구의 남성, 백인 생계가장들을 역사적으로 보호했던 운동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세 번째 운동, 즉 자율과 해방의 운동의 필요성을 도입합니다. 도시의 ‘보호’는 전통적인 국가의 보호와 어느 정도까지 다를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이 아다 꼴라우(Ada Colau) 요인, 바르셀로나 요인, PHA[주택담보 대출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의 플랫폼] 요인 및 반(反)퇴거 운동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PHA와 관련하여 특별한 유형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변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PHA로 가서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어서 주택담보 대출금을 갚을 수 없으며 그래서 쫓겨날 것이라고 말할 때 그들은 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는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거예요, 활동가가 되셔야 해요, 그래야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이것은 당신이 PAH의 고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상황을 함께 바꿀 수 있기 위하여 당신이 PAH의 활동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것은 서비스 제공의 과정이 아니라 해방의 과정입니다. PHA는 노동조합이나 정당의 아웃소싱 논리—“와서 당신의 쟁점을 우리에게 위임하라, 그러면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당신의 생각을 옹호해줄 것이다”—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런 위임하는 접근법은 PAH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PAH는 사람들을 보다 활동적으로 만듭니다.

마르씰리: 어떻게 이것이 제도화됩니까? 이런 정치화 과정들, 활성화 과정들—이 과정은 공동 소유권 및 공동 관리와 더불어 결국 커먼즈 담론의 바탕을 이루죠—은 어느 정도까지 시의 정책들이 됩니까?

쑤비라츠: 이것[PHA]은 2015년 5월에 시작한 중요한 기획입니다. 선거 당시 <바르셀로나 엔 꼬무> 성명서에는 4가지 기본 사항들이 있었습니다.(([옮긴이] <바르셀로나 엔 꼬무>에 대해서는 <커먼즈로서의 도시>, <괴물 시대의 커먼즈(2)>, <커먼즈 이행과 P2P(5)>, <장벽에 맞선 도시들> 등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스페인의 다른 곳에서 다른 유사한 플랫폼들이 이 사항들을 채택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제도의 지배권을 시민들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회제도는 포획되어서 우리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이 경제적•사회적으로 점차 불확실한 상황에 놓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등이 증가 추세이고 기본적인 사회적 보호메커니즘들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보호제공 능력을 회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대응을 요구하는 사회적 긴급사태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는 위임하지 않는, 보다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쉽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더 많이 참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식으로 정책의 공동생산, 결정의 공동창조 등등이 논의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사항은 우리가 정치부패와 정실인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급여는 삭감될 필요가 있고, 업무는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권한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요컨대 정치가 한층 더 윤리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씰리: 그러면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쑤비라츠: 첫째로 가장 중요한 발전은 두 번째 사항과 관련하여 확실히 이루어졌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사회적 긴급사태에 응답하기 위한 보다 면밀한 정책들을 만드는 것이죠. 어떤 점에서 이것은 첫 번째 사항—다른 유형의 정치에 필요한 사회제도를 회복하는 것—과 관련한 정당성을 복원해 주었습니다. 둘째로는, ‘혁신의 도시들’ 어느 곳에서도 부패 스캔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전히 어려운 점은 사회제도를 보다 참여적으로 만들고 정책의 공동생산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이것은 기존 제도들의 전통, 일상 업무, 작업방식들이 우리의 접근법과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매우 19세기적이고 20세기적인 접근법이 기존 제도에 존재합니다. 그 제도는 디지털 방식 이전의 것인데, 여기서 집단지성을 포함하는 방법이 관여되는 ‘공동생산’에 대해서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씰리: 실리콘 밸리의 거인들이 모든 데이터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을 화폐화하는 시스템 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기술 주권을 거론하는 국제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논쟁이 있습니다. 당신은 디지털 커먼즈와 관련하여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쑤비라츠: 우리는 자치도시 의회가 사용하는 사유화된 소프트웨어 기반을 바꾸는 일과 그 의회와 소프트웨어 공급자들 간에 이루어진 계약을 통해 이런 서비스에 사용된 데이터가 기업에 이전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스마트 시티>(Smart Cities)와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obile World Congress)의 중심지인 도시에서 기술혁신이 도시의 접근법을 반드시 바꾸도록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이 포럼에 못 미치는 사고방식을 바꾸면서 진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혁신과 기술주권을 담당하는 위원을 임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기차•버스•지하철 모두에 사용될 수 있는 교통카드에 대한 새로운 계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 카드는 공급자가 제조할 것입니다. 계약서에는 공공 당국이 바르셀로나 전 주민들의 지역 대중교통 데이터를 관리할 것이라고 명시됩니다. 여기서 주권은 국가주권 같은 것이 아니라 에너지•물•식량•디지털 주권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공적인 우선사항들이자 필요한 것들입니다.

마르씰리: 주권이 너무 자주 국가주권과 동일시되어서 저는 ‘근접성의 주권’(sovereignty of proximity) 내지 ‘주권(체)들’(sovereignties)이라는 개념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헌법처럼 많은 헌법들이 “주권은 국민에게 속한다”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국민국가가 아니라 말이죠! 그런데 헌법에서도 도시의 역할은 여전히 매우 한정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실제적 법적 권한은 그 범위가 좁습니다. 새로워진 거버넌스의 중심에 도시를 두고자 하는 시도라면 권한의 배분을 바꾸기 위한, 일국 수준의 정치적 싸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까?

쑤비라츠: 저는 자치도시들의 ‘책임 수준’의 문제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치도시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매우 폭넓은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책임 수준이 높습니다. 하지만 자치도시들의 ‘권한의 수준’—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더 낮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지역 내에서 해결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바로 이 이유로 <바르셀로나 엔 꼬무>가 카탈로니아를 가로지르는 운동을 조직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카탈로니아 엔 꼬무>라고 부르는데 <카탈로니아 엔 꼬무>는 뽀데모스와의 연합이라는 논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카탈로니아 수준—여기서 교육과 의료 정책들이 결정됩니다—에서나 국가 수준에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행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역 수준에서는 우리의 권한이 나타내는 것 이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의 정치적 동원력이 우리의 권한보다 한층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대립은 법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카탈로니아에서 주택과 관련하여 권한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이런 권한은 자율적인 카탈로니아 자치주 정부(Generalitat) 내지 국가의 수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정치적 동원을 통해 주택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고 그곳에서 베를린•암스테르담•뉴욕과 함께 <에어비앤비>에 반대하는 동맹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정치적 동학 때문에 <에어비앤비>는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비록 스페인•미국•네덜란드 국가는 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을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법적인 권한이 없다는 생각에 구속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르씰리: 도시와 국가의 대립이 흥미롭군요. 아시겠지만 우리는 유럽 전역의 많은 도시들—바르셀로나는 그중 한 도시죠—이 난민들을 맞아들이기를 바라지만 그 도시가 속한 국가들은 종종 이것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스페인 정부도 예외가 아닙니다. 도시가 단독으로 일정수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그런 불복종 행동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흥미롭게도, 당신은 국가정부에 불복종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신은 ‘난민재배치에 관한 유럽 시책’을 따르고 있고 정작 국가정부가 그것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쑤비라츠네, 좋은 실례군요. 저도 그 일은 실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이 난민이라는 큰 문제는 풀지 못하겠지만, 확실히 실질적인 영향력보다 정치적인 영향력은 더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도시 수준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사람들이 그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 일이 말 뿐인 것은 아닐 것이라는 매우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경우에도 유사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민간투자기금이 건물을 구입하는 능력에 대해 조치가 취해진 바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시의회는 합법적으로 법을 어길 수 없지만 여러 방식으로 투자 펀드가 이런 거래를 하는 것을 한층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몇몇 경우에 자치시의회는 건물이 투기대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물 자체를 구입함으로써 이러한 매입을 좌절시키기도 했습니다.

마르씰리: 독일 정치가 슈반(Gesine Schwan)은 본질적으로 국민국가를 우회함으로써 유럽수준의 난민 재배치와 자치도시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한 가지 제안을 내 놓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연합을 지배하는 여러 수준의 기관들은 ‘국민국가에서 유럽연합으로’ 구조에 따라서 대부분 조직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와 달리 ‘자치도시에서 유럽연합으로’라는 구조를 생각하면서 이 기관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네, 저는 이 영역에서 우리의 경험들을 연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들 사이에서 서로 벤치마킹하고 서로 배우려고 만든 <유로시티>(EuroCities) 같은 조직들이 있습니다. 이동성/유동성, 사회정책 등등을 다루는 워킹그룹들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우리는 지역수준에서 조직화하는 이런 접근법을 더 추진해야 하며, 국가를 제치고 유럽연합과 직접 대화할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국가들이 유럽의 의사결정 구조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 일은 전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시들이 유럽연합에서 동맹을 맺더라도 그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이루어질 수는 있습니다. 저는 유럽연합이 그런 조치를 취하기를 꺼려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 하나의 방법은 지역 당국들이 모여서 유럽 포럼을 창출하여 힘을 키우고 이 영역에서 도약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씰리: 당신은 국민국가들에게나 유럽연합에게나 약간은 대항권력으로 작용하는, 혁신 도시들의 유럽 네트워크를 상상할 수 있으십니까?

쑤비라츠: 저는 그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르셀로나 자치도시 당국이 이미 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바르셀로나는 사라예보를 11번째 행정지구로 삼았죠. 팔레스타인 가자지구(Gaza Strip)에서 일하는 자치도시의 기술 담당자들과의 매우 밀접한 관계를 포함해서 바르셀로나와 가자지구 사이에 강한 협동관계도 있습니다. 바르셀로나 자치도시의 국제협력 전통이 자리를 확실히 잡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기반으로 한 작업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는 특성이 있는 같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연히 거주하는 공간들을 지배하는 초국가적인 정치구조가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 이론가인 바버(Benjamin Barber)는 시장(市長)들로 구성된 전지구적 의회를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전지구적 수준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인 제안입니다. 전지구적 정부가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유럽에는 적어도 유럽 정부의 시뮬라크럼인 유럽의회가 있습니다. 당신은 도시들이 모여서 유럽의회 같이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쑤비라츠: 그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구성적이고 강력한 힘을 갖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애초에 기존의 기관들, 관료들, 조직들에 의해 형성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공간은 오히려 아래에서의 마주침(상호작용)을 기반으로 그리고 (나폴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영향을 끼쳤던 시장들의 합법성을 바탕으로 해서 작동해야 합니다. 그 공간은 위로부터 정치적 자산을 빨리 만들려는 어떠한 욕망도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위로 작용하는 과정으로서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복원력이 있을 것이고 결국 강력해질 것입니다.

마르씰리: 유럽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도시들이 할 역할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품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제가 다니면서 도시행정과 관련한 이런 아이디어의 옹호자 역할을 할 때 종종 제가 깨닫는 것은 자치도시에 보다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이런 사안을 다룰 직원과 사무실이 부족한 경우가 매우 잦다는 것입니다. 도시들이 전지구적으로 그리고 유럽에서 새로운 역할을 맡는다면 도시들은 관련 업무를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인 기구에 투자할 필요가 있습니다.

쑤비라츠: 분명히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메트로폴리스 접근법을 더 강화한다면, 당신이 단점으로 언급한 것들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자치도시라는 용어가 항상 같은 것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드리드는 넓이가 600제곱킬로미터이고, 바르셀로나는 100제곱킬로입니다. 파리는 파리 시(the City of Paris)와 교외를 포함한 파리(Greater Paris)로 나뉩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시보다 ‘교외를 포함한 바르셀로나’라는 개념을 구축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150만 명의 거주자에서 350만 명의 거주자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메트로폴리스권을 형성하는 25개 타운위원회는 국제적 과정을 육성하는 데 자원을 투자하기로 틀림없이 동의할 것입니다. 파리는 이미 이 일을 시작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파리에는 메트로폴리스적 차원이 있어서 그것을 더 강화할 수 있거든요. 직원과 선례가 부족한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도시가 국제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항상 국가를 거쳐야 한다고 기계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상황은 메트로폴리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르씰리: 본격적으로 전지구적인 차원을 거론하며 마무리를 해보겠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 지역에 살고 있으며, 상위 100대 도시들이 전 세계 GDP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양을 생산합니다. 2017년 6월에 바르셀로나는, 국가지도자는 점점 더 다룰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전지구적 과제들을 다룰 공동기획을 수립하기 위해 전 세계 시장들을 한데 모아 전지구적 정상회담인 <대담한 도시들>(Fearless Cities)을 주최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요? 어떤 구체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수 있을까요?

쑤비라츠: 제 생각에는, 가장 좋은 방법은 구체적인 어젠다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고, 도시들을 아주 쉽게 끌어들여 연결시킬 수 있는 이슈들을 찾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분배 문제, (런던•시애틀•뉴욕에서 논쟁을 촉발시켰던) 최저임금 문제 및 주택•초등교육•에너지•물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들은 분명히 경계들을 가로질러 세계 어디에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이슈들로 시작할 수 있으며 유럽 전역에서 과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치권과 기관들에게 자극을 줄 것이고 우리는 좀 더 빨리 도약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정책 분야의 결점들을 보지만, 이것은 정치체의 결점들을 부각시킬 것입니다.

 




미셸 바우엔스와의 대담 – 문명 이후와 P2P



 

[이름표기에 대하여]

커먼즈 운동의 대표적 이론가이자 활동가인 Michel Bauwens는 벨기에 사람이다. 벨기에는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가 공용어이다. 지금까지는 이름인 ‘Michel’ 때문에 성을 프랑스어 식으로 ‘보웬스’라고 표기해왔는데, 최근에 유튜브에 있는 한 대담을 들어보니 본인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 발음이 ‘바우엔스’이거나 ‘바우웬스’였다. 네덜란드어 식 발음이다. ‘w’에 대해서 궁금증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어에서는 ‘w’가 대부분 발음이 되지만 (입 뒤쪽에서 형성되는 약한 ‘ㅂ’이다) 이렇게 ‘u’ 다음에 오는 경우에는 드물게도 묵음이 된다는 것(본인들은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묵음으로 들린다는 것)도 알았다.(http://www.heardutchhere.net/silentW.html) 이러한 확인에 따라 앞으로는 ‘미셸 바우엔스’라고 표기하기로 한다. 이 블로그의 이전의 다른 글들을 미처 다 손볼 수 없으니 (언제 다 손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독자들께서는 ‘보웬스’라고 되어 있어도 양해하고 ‘바우엔스’로 읽기 바란다.

 

라자니 칸스

P2P란 간단히 말해서 뭔가요?

미셀 바우엔스

피어2피어(Peer to Peer)란 모든 개인이 다른 모든 개인과 연결되는 것을 ‘특별한 허가 없이’ 허용하는 관계 동학입니다.((바우엔스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는 들뢰즈·가따리가 ‘뿌리줄기’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이에 대해서는 『천 개의 고원󰡕 1장 참조.)) 원한다면 ‘네트워킹의 자유’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줄곧 소집단들의 특징이었지만 최근에는 테크놀로지에 의해서 큰 규모에서도 가능하게 되어 (위계를 특징으로 하는 국가와 자본주의적 시장 동학의 능력을 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과 맞먹는) 전지구적인 ‘오픈소스’ 시민네트워크들과 생성적((‘생성적’(generative)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속성인 ‘추출적’(extractive)에 대응되는 속성이다.)) 경제조건의 가능성을 창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서버가 자율적인 새로운 컴퓨터 구조에서 도출된 이 P2P 개념이 지금 두 가지 경합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제가 사용하는 의미인데요, 커머닝의 능력, 즉 자원을 한데 모으고 상호화하고((‘상호화하다’(mutualize)는 자원을 공유하여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효율을 높이고 낭비를 줄이는 것을 가리킨다. ‘상호화’는 다소 어색한 번역어이지만 동사와 명사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이렇게 고정하였다. ‘상호화’는 사실상 ‘사적 소유’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의 능력으로서의 피어2피어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나키-자본주의적이고 자유의지론적-사유재산적 비전으로서 사회를 개인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것입니다.((이는 원래 독일 오르도자유주의(신자유주의적 선구적 형태)의 비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푸꼬,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참조.)) 전자의 커먼즈 견해와 후자의 극단적 시장론 사이는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칸스

이와 관련된 개인사를 설명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제가 거부한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집단적 투쟁을 떠나게 된, 전형적인 향수에 찬 좌파입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에 저는 모든 지구상의 생태적·사회적 지표들이 우리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쪽으로 수렴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 자신의 활동에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문제의 일부인가 해결의 일부인가?’라고요.

큰 기업에서 일하면서 여러 경우에 비윤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던 저는 변해야한다고 느꼈습니다. 수평적으로 추동되는 집단지성의 능력을, 즉 위치와 무관하게 실시간으로 (혹은 비동기화된 시간으로) 협동하는 능력을 거대하게 증가시킨 1993년의 월드와이드웹 발명은 신의 출현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15세기에 있었던 인쇄의 발명처럼 이것도 변화의 추동력이 되리라는 생각이 즉각적으로 들었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논리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회변화를 위한 새 받침점, 즉 규모 있게 수평적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네트워킹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죠.

따라서 저는 보수가 좋은 회사의 중역 자리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태국에서 휴식하는 2년 동안 역사적 상전이(phase transitions, 이행)를 연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살펴보며 지냈습니다. 이 새로운 피어2피어 구조라는 받침점이 지구상의 긴급한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세상을 창출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친연성과 공유된 목표에 기반을 두며 지역을 넘고 국가를 넘어 움직여 전지구적 변형에 복무하는, 신뢰에 기반을 둔 새로운 유형의 ‘부족들’을 어떻게 창출할 수 있는가? 제가 태국으로 이사한 것, 그리고 제 아내의 대가족에 편입된 것이 저로 하여금 따스한 가족생활과 친연성에 기반을 둔, 지역을 가로지르는 공동체들에서의 활동가로서의 활동을 결합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칸스

어떤 영감을 받아 그렇게 정리한 것인지요?

바우엔스

여러 상이한 것들의 결합입니다. 제가 이사하기 전에, 90년대 중반 이래 사회적 삶의 상이한 도메인들에 피어2피어 논리가 보급되는 것이 명백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사례들을 발견하는 대로 특별히 마련한 위키에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방법론은 다소 단순합니다. 늘 경험적일 것, 늘 일관될 것, 사회적 변화와 관련하여 이치에 닿는 가장 통합적인 내러티브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저는 역사적 이행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이전의 사라져가는 문명모델들의 위기 시에 공존한 씨앗형태들의 중요성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 씨앗형태들이 새로운 사회적 논리를 담지하는지를 (이 씨앗형태들이 이전 체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래야만 합니다) 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다음 저는 오늘날 씨앗형태들의 거버넌스 메커니즘들과 소유 메커니즘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커먼즈를 가진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그 공동체들을 둘러싼 기업연합들을 보기 시작했고 나중에 도시 커먼즈와 물리적 생산을 담당하는 커먼즈의 출현으로 관심을 확대했습니다. 이것이 이 새로 출현하는 미시적 네트워크들이 어떻게 전체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지에 더 면밀하게 주목하는 쪽으로 진화했습니다.

이는 커먼즈와 공적 영역이 서로 연관되는 제도적 과정과 커먼즈와 시장이 서로 연관되는 동학 모두에 주목함을 의미했습니다. 핵심을 말하자면, 저는 국가와 시장이 커먼즈를 포획한 상황을 어떻게 역전시킬 수 있을까를, 즉 커먼즈와 커머너들이 어떻게 시장과 영토 거버넌스를 커먼즈를 확대하는 쪽으로 작동하도록 변형할 수 있을까를, 그리고 지구가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커머너들의 생계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왔습니다. 더 최근에 저는 재분배(redistributive) 경제—이는 인간 및 자연의 가치를 우선 추출하고 나중에 재분배하는 것입니다—에서 선분배(pre-distributive) 경제로의 이동, 생태에 끼치는 피해의 제한에서 재생성적(regenerative, 다시 살리는) 실천으로의 이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작업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변화에 대한 실용적 이론으로서, 저는 이 이론이 커머너들과 그들의 경험에 기반을 둔 이행을 가속화하는 데 유용하기를 바랍니다. 저는 P2P재단이 오늘날 사회변화의 강력한 주체인 자율적인 불안정 노동자들의 집단지성이 되었으면 하고 그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의 집단학습의 속도를 증가시킨다는 의미에서 촉매가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날 커먼즈는 변화의 중심 범주입니다. 즉 시민들이 커먼즈에의 기여자들로서 사회적 가치를 직접 생산하게 되었으며, 피어2피어는 커먼즈가 규모나 능력에서 시장과 국가를 능가하게 만들 수 있는 핵심적인 사회적 관계입니다. 인류의 본래 상태가 긴밀한 유대로 묶인 부족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공유된 가치의 공동구축에 기반을 둔, 긴밀하고도 공감적인 새로운 부족으로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칸스

‘커먼즈’ 경제란 어떤 것인지요?

바우엔스

커먼즈 경제는 공유된 자원을 중심으로 핵심적인 가치창출이 일어나며 기타 교환도 욕구에 따라 일어나는 경제입니다. 커먼즈 경제는 통째로 새로운 대안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전까지 진행된 이행의 논리에 맞추어 재편성한 것입니다. 오늘날 가치는 시장에서만 창출되고 그 다음에 재분배된다고 생각됩니다. 커먼즈 경제에서는 커먼즈 수준에서든 사회 수준에서든 모든 기여가 인정되며 기타 교환과 분배도 공동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생산공동체들에 복무하도록 재설계됩니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 상호화된 기반시설을 사용하여 기도를 최대화하는 사업들의 성공사례를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그와 동등한 것으로, 그러나 삶을 부정하는 복종과 금욕은 없는,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모든 자원조달 체계들을 상호화하여 인류가 지구에 남기는 열역학적 발자국을 근본적으로 감소시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커먼즈 경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전지구적으로 공유된 비물질적 공통재(커먼즈)와 지역적으로 재상호화된 물리적 기반시설들이 교차하는 열린 생산공동체들입니다. 이 생산공동체들은 뚜렷한 목적과 사명을 갖추고 있고—‘중간에서 취하기’보다는 ‘중간에 주는’((우드(J. Wood)가 “COMMENT: The Socially Responsible Designer”(1990)라는 글에서 ‘기업가’를 의미하는 단어인 ‘entrepreneur’가 (원래 프랑스어이므로 프랑스어로) ‘가운데로부터 취하는’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에 대응시켜 ‘가운데에 주는’이라는 의미의 ‘entredonneur’가 만들어졌고 이를 여기서 ‘덕행가’로 옮겼다. 바우엔스의 이 대담에서는 둘 다 형용사형으로 쓰이고 있다.))—비자본주의적인 덕행가(entredonneurial) 연합들과 상호작용하며, 협력의 기반시설을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이고 비영리적인 기반시설 조직들의 지원을 받습니다. 이는 거시적 수준에서 생산적 시민집단, 윤리적 경제, 파트너 국가를 구성하는 데로 작용합니다.

 

칸스

이 비전에 장애물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바우엔스

상호화 자체는 문명이 과도한 상황에서는 매우 불가피하며 역사적으로 여러 번 일어난 바 있습니다. 문제는 상호화 자체가 내부적·외부적 추출 세력에 의해서 포획되는가 아닌가, 민주적인 커먼즈가 주류 모델이 될 수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지금까지 기록상으로는 (문명을 계급에 기반을 둔 사회라고 정의했을 때) 문명 이전에 상호화의 긴 시기들이 있었습니다. 수렵 및 채취에 기반을 둔 평등 사회들에서는 수만 년을 갔고 문명사회들에서는 성공이 더 제한되었습니다. 중세의 민주적 코뮌들은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3세기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성공적인 경우 이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챈들러(Keith Chandler)가 그의 책 『문명을 넘어서』(Beyond Civilization)에서 시사한 대로 우리가 계급 사회를 완전히 넘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최선은 시나리오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장 선호하는 시나리오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두 축을 상상해봅시다. 풍요 대 희소성, 그리고 평등 대 위계. 제1시나리오는 우리가 원하는 시나리오, 즉 성공적인 상호화에 기반을 둔 풍요 속의 평등이라는 시나리오입니다. 제2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평등입니다. 쿠바가 이런 유형의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풍요 속의 위계라는 제3시나리오를 상상해봅시다. 이는 지금 인지자본주의의 새로 출현하는 모델들과 함께 정보와 서비스에서의 새로운 봉건주의(돈을 가진 사람만 정보와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체제)로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마지막 제4시나리오는 희소성 속의 위계로서 라투르(Latour)가 지난번 책에서 ‘엘리트 생존주의’로서 서술한 바 있습니다.((라투르의 2017년 책 Où atterrir ? Comment s’orienter en politique를 가리키는 듯하다. 아직 영어로도 옮겨지지 않은 책인데, 라투르의 프랑스 사이트에 보면 영어로 Down to Earth: Politics in the New Climatic Regime라고 옮겨놓았다. 이 사이트에서 이 책을 영어로 소개한 한 대목(http://www.bruno-latour.fr/node/754)은 이렇다. “이 세 현상[① 폭발적인 불평등 ② 대대적인 규제완화 ③ 지구화의 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악몽으로 전환되는 것—옮긴이]을 한데 묶어주는 것은, 생태위협은 실질적이며 자신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나머지 세상과 공통의 미래를 공유하는 척 하기를 그치는 것이라는, 소수 강력한 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확신이다. 그래서 이들은 해외로 달아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데 대대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다.” 지금의 라투르는 ANT(actor-network theory)의 라투르에서 달라진 듯하다.)) 인구가 대대적으로 삭감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난으로 내몰려서 생계가 막연해지며 새 엘리트가 첨단 생존지역에서 살아가는 것이죠. 엘리트층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일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이 멸절주의 기획은 매우 위험합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또 하나의 유토피아적 기획인가요?

바우엔스

제가 유토피아에 반대할 마음이 없고 가능한 것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사람들에게 고취하는 데 유토피아가 필요할 듯도 하지만, 제 작업은 분명 유토피아적이지 않습니다. 저의 방법은 실제 삶의 실천들과 사례들을 보는 것이며, 약한 신호들이 충분히 잡힐 때 그것이 실질적 경향임을 증명하는 것, 그리고 이 씨앗형태들의 심층 논리를 분석하는 것입니다. 저는 비로소 그 지점에서부터 한 사회가 거시적 수준에서 그와 동일한 논리를 보여줄 때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 비전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현상들이 주변부에서 출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우세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장기적으로 존속하게 되는 것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당한 방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유토피아주의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데 대해서 두 가지 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것은 종종 매우 리얼합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사회를 꿈꾸었던 맑스주의자들과 달리 실제로 공동체들을 일구었고 실험을 했습니다. 둘째, 우리가 보통 유토피아 탓으로 돌리는 끔찍한 일들—가령 종교재판이나 스딸린주의— 은 권력이 자신의 공고화를 위해서 유토피아적 비전을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방식으로 선전과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한 사례들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자본주의적 현실주의를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해온 30년 동안의 반(反)유토피아 이후에 유토피아적 사고가 적어도 조금은 부활하는 것이 실제로 나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칸스

사회주의 같은 고전적인 대안경제들과는 어떻게 비교되나요?

바우엔스

피어2피어와 커먼즈 접근법은 19세기의 시민사회의 전통에 매우 가까우며, 시민사회가 사회의 중심이 되고 시장과 국가가 시민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교리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주류 사회주의 전통은 스탈린주의적·전체주의적 형태에서든 사회민주주의적 형태에서든 국가중심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전통은 시민사회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시민들(이는 주어진 시기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이 생산적이라고 봅니다. 즉 사회를 위한 가치를 생산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단순한 집단적 이기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리적 영토 수준에서든 ‘버추얼’ 수준에서든 공동선을 중심으로 삼는 기관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커먼즈 공동체들조차도 우선은 자신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생태계 전체에 대해 먼저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개인들 사이에서든 공동체들 사이에서든 상호계약의 표현일 뿐인 사회에 대해서는 (좌파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믿지 않습니다. 메타거버넌스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특히 구조적으로 불평등한 사회에서 그럴 것 같습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 없이도 우리가 안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이 사설군대의 용병들에게 더 자유를 주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커먼즈의 기능적 거버넌스가 그 복잡성이 높아져서 국가를 노후하게 만들 정도의 수준에 이르면서 여러 사회와 경제의 상호연계 능력이 증가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일을 돕는 메커니즘들과 기반시설 조직들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저는 ‘파트너 국가’라고 부릅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그 의사결정이 단지 사적인 이익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생태적·윤리적 관심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만큼, 바로 그 만큼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칸스

당신의 비전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같은 것이 있나요?

바우엔스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생산자들을 생계수단으로부터 분리하고 인간성에 대한 일면적 비전을 장려하며 사회적·생태적 외부성을 무시합니다. 이는 위험한 수준의 불평등을 낳고, 따라서 사회적 불안을 낳으며, 지구와 지구상의 생명체들의 항상적인 파괴를, 지금은 극적이고 삶을 위협하는 데 이른 파괴를 낳습니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해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입니다. 총체적 불안과 모두의 모두에 대한 투쟁을 낳기 때문입니다. 400년 동안의 실험은 이제 거의 끝났지만 자본주의는 좀비 체계처럼 존속하고 있으며 자신보다 훨씬 더 나쁠 수 있는 어떤 것을 세워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중의 투쟁들이 모든 종류의 대항적 경향들을 창출하였음을, 민중이 계속해서 비자본주의적 형태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복잡한 사회를 창출해놓았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접근법은 ‘교육, 건강, 주택, 이동성을 계속 진전시키자, 그러나 이것들을 상호화하여 그 기능이 지구의 존속과 양립될 수 있도록 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탈자본주의적이라고 규정합니다.((‘반자본주의적’이기보다는 ‘탈자본주의적’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저항, 즉 ‘맞서는’ 투쟁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새로운 모델들의 창출에 초점을 두기 때문입니다.

 

칸스

어떻게 우리는 현재 우리가 있는 곳에서 당신의 이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요?

바우엔스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 전략은 기획들과 사람들을 가열차게 상호교직하고 이해와 상호조직화의 수준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주류가 단계적으로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대안들이 사회적·정치적 힘을 강화하고 강력한 끌개가 되자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커머너(commoner)를 새로운 주체로 봅니다. 커머너란 공통적인 사회적 목표들에 기여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며 사회 제도들의 변형을 위해 싸워서 커먼즈에 복무하는 사람이죠. 우리는 일단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본에 의존하는 노동자로 보기를 멈추고 자신의 생계를 구축하는 커머너로 보게 된다면 많은 수의 커머너들이 존재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은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용하고 싸워야 할 곳에서는 맞서 싸우고요.

지금 국민국가는 더 이상 변화의 핵심적 도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지성의 초국적 오픈소스 공동체들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즉 정신권(noosphere)에 부합하는 정신정치(noopolitik)를 해야지요.((‘정신권’과 ‘정신정치’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49 참조.)) 우리는 또한 초국적 덕행가 연합 즉 커먼즈를 중심으로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생계조직들과 선분배적이며 생태적으로 재생성적인 코스모-지역적인 생산단위들을 구축해야 합니다. 최종적인 발표를 위한 청사진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직 아니지만, 이것이 우리의 접근법을 충분히 잘 설명하리라고 봅니다.

 

칸스

현재 당신의 비전을 뒷받침하는 운동으로 뭐가 있나요?

바우엔스

제 생각에는 여러 상이한 운동들과 기획들로 구성된 세 강력한 ‘흐름’이 합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과 사물을 공유하려는 운동입니다. 즉 오픈소스 운동들과 진정한 ‘공유’ 운동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둘째는 환경과 지구를 돌보려 하고 이를 위해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공정함, 평등, 유대, 협동주의를 위한 운동들입니다.

모두 뭉치는 것이 과제입니다. 평등과 생태는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사회가 더 불평등할수록 지배자들이 경쟁자들과 경합하면서 지구의 한계를 더 강력하게 넘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평등이 더 부드러운 하강을 보장할 것이고 앞으로 수십 년이면 닥칠 불가피한 재난 이후에 지구의 더 빠른 치유를 보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이슈를 지식과 자원의 강력한 상호화 없이 해결할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만일 해결책이 사유화되어 이윤에 종속된다면 우리는 우리를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작업은 가능한 통합적 내러티브를 제공하여 더 많은 상호연계가 일어날 수 있도록 하고 이 내러티브가 산업사회의 ‘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자본 대 노동’ 내러티브란 자본 대 노동의 변증법적 관계로 이루어진 내러티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이 변증법의 항상적인 결말은 자본의 영원한 지배이다. 이미 레닌의 라이벌인 보그다노프가 노동의 관점에서 진정한 대립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대립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보그다노프가 말하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은 인간의 자연 정복을 말하기보다는 맑스가 『1844년 경제철학수고』에서 말한 ‘자연의 인간화’이자 ‘인간의 자연화’인 과정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자연을 인간의 ‘비유기적 몸’으로 즉 ‘몸 외부의 몸’으로 보는 사고,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큰 몸으로 보는 사고가 들어있다. 이런 사고가 자본 축적과 경제 성장의 탐욕에 가려진 결과 지구의 삶 전체가 위기에 처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재 일어나야 할 일이 모두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만 작은 규모로 너무 느리게 그리고 노력이 심하게 파편화되면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공통의 이야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면 볼수록, 우리 사회의 DNA 자체를 바꾸려는 구조적 노력에 합류하면 할수록, 서로 연계를 더 잘할 수 있고 전지구적 비상상황에 대응하는 데 필요한 규모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칸스

세계의 현재의 위기를, 그 원인 등을 어떻게 규정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시사한 세 가지 사회적 폐해의 합류입니다. 1) 현 체제는 자연자원과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풍성하게 존재하며 단기적인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현 체제는 본성상 풍요롭고 공유될 수 있는 것인 인간 문화나 지식이 인공적으로 희소하게 만들어져야 하며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범죄적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자본주의는 희소성을 할당하는 체제가 아니라 희소성을 조작해내는 체제죠. 3) 이 모든 것이 증가하는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생계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불안을 빚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우리의 문제들이 정말로 체제 차원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가장 최근의 계급사회로서 그 폐해를 보인 자본주의만 거부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계급 사회 자체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 균형과 집단지성을 위한 대대적인 상호학습에 기반을 둔 더 상위의, 더 복잡하고 더 평등한 사회형태를 재창출해야 합니다.

 

칸스

관심이 있을 사람들을 위해 주 저서들을 말해주시죠.

바우엔스

저는 지금까지 세 언어로 책을 냈습니다. 네덜란드어 책 De Wereld Redden과 프랑스어 책 Sauvez le Monde를 냈는데((두 책 모두 그 제목이 ‘세상을 구하라’라는 의미이다.)) 이 두 책 모두 ‘P2P 및 커먼즈와 함께 탈자본주의 사회로’라는 부제가 달려있습니다. 이 책들은 사회변화에 관한 역사적·철학적·경제적·정치적인, 심지어는 정신적인 이념들과 제안들을 설명하는, 읽기 쉬운 대화들로 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된 책은 학술적인 성격의 것이며 경제적 측면에 집중합니다. 커머너들 및 그들의 생계를 위해 작동할 수 있게 변형된 시장형태와 커먼즈의 상호작용을 다룹니다. 이는 이른바 ‘공유경제’라는 이름이 붙어있긴 하지만 추출적인 지배적 모델들과는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이 책은 열린 협동조합들과 플랫폼 협동조합들과 같은 대안적 행태들을 설명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세요.

내년 봄에는 웨스트민스터프레스에서 우리 생각을 더 자세히 제시하는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우리는 P2P랩과의 집단연구에 기반을 두어 소규모 책자들을 냈습니다. 우리 서재를 보세요. ‘가치 주권’, ‘열린 기여기반 회계,’ 커먼즈와 공적 영역의 협동 등과 같은 주제들에 대해서 아시려면 이 서재에 가보시면 됩니다. P2P랩은 우리의 가설들을 실제 공동체들과 함께 하는 실제 삶에서의 행동탐구를 통해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동료평가되는 학술논문들도 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가보세요.

 

칸스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웹사이트가 있나요?

바우엔스

네. 주된 참조 사이트는 우리의 위키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블로그로 연결됩니다. 커먼즈 이행에 관한 더 읽기 쉬운 글을 보시려면 우리가 특별히 개발한 사이트로 가시면 됩니다.

 

칸스

관심 있는 사람이 당신의 기획을 어떻게 지원할 수 있나요?

바우엔스

우리를 돕기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불평합니다. 이는 우리가 네트워크이거나 아니면 조직이거나 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조직된 네트워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손을 잡아주는 능력을 그다지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지식 커먼즈의 공동구축을 통해 기여하는 데 동의하고 우리의 자원 베이스에 기꺼이 기여하고 싶으시면 먼저 연결 방법을 찾아야 하실 것이고 그 다음에 이 열정적인 일을 중심으로 생계를 창출하는 방법을 찾으셔야 할 것입니다.

 

칸스

지금까지 P2P의 성취는 무엇인가요?

바우엔스

우리는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직접 하기보다는 지식공유의 촉진자로서 뒤에서 움직인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성취를 돕습니다. 우리는 잘 사용되는 점증하는 지식 베이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찾은 사람이 연인원 6천만 명에 달하고 하루에 적어도 2만 명이 이용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죠. 우리는 국가지식커먼즈 구축과 관련하여 에콰도르 정부에게 컨설팅을 해주었고 ‘커먼즈 이행 계획’과 관련하여 헨트 시에 컨설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바티칸, 중국 같은 몇몇 영향력 있는 곳들 및 여러 정치운동들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몇 년 전에는 바르셀로나의 공동작업 공간들에 대해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거론되었습니다. 우리는 협동조합들, 커먼즈들 등 많은 합류하는 사회운동들에서 작업했고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실질적인 진전을 보았습니다. 멜버른에 있는 <커먼즈이행연합> 그리고 프랑스에 있는 다양한 ‘커먼즈 의회들’ 같은 구체적인 지역 기획들이 우리의 생각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합니다. 에콰도르에서의 작업이 그 사례인데요, 여기서는 정부가 우리가 추천하는 바를 문서화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훨씬 더 추출적인 정책으로 나아갔습니다. 트로이카((IMF, 유럽중앙은행(ECB) 그리고 유럽연합(EU)으로 구성된 삼두체제.))에게 고개를 숙인 시리자도 실패 사례입니다.

지금 저는 협동조합주의적/상호주의적 운동인 SMart와의 연합에 큰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자율적인 노동자들(프리랜서들)을 위한 유대를 조직하는 데 집중합니다. 또한 토착민 운동들과의 연합에도 공을 들이고 있는데요,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이 운동의 스터디그룹들이 우리 생각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연합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해당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에서는 생산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물질적’ 영향력의 관점에서는 하나의 조그만 점에 불과하지만, 사회주의 이후의 사상이라는 관점에서는 사회변화운동에서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중요한 목소리입니다.

 

칸스

가장 가까운 미래에 세상이 가장 잘 될 시나리오가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추측하시나요?

바우엔스

앞에서 몇 개의 시나리오를 개괄했을 때 이 점을 논의했습니다. 바라건대 최선의 것은 우리의 문명이 큰 재난들에 대비하는 짧은 막간(幕間) 시기에 P2P 및 커먼즈와 함께하는 사회세력을 강화하는 것, 그리고 복원력 있는 경제와 대안적인 사회형태들에 활발하게 관심을 가질 사람들을 끌어모을 씨앗형태들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태는 많이 악화된 다음에야 좋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커먼즈의 ‘잠재적 성충세포들’((‘잠재적 성충세포’(imaginal cell)는 유충 안에서 잠자고 있다가 나중에 새로운 형태와 구조를 창출하게 되는 세포를 가리킨다.))이 이행기에 피해의 양을 감소시킬 두드러진 요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에서 인종, 계급, 젠더 그리고 문화는 어떻게 배치되나요?

바우엔스

오늘날 서로 다른 종류의 커먼즈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전통적인 커먼즈는 수는 많지만 자본주의의 맹공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습니다. 한편 선진국의 디지털 커먼즈와 도시 커먼즈는 강화되고 있습니다. 양자 사이의 연결을 찾는 것이 지구상의 후진지역에서의 노력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입니다. 서구 나라들에서는 피케티(Thomas Piketty)가 ‘브라만 좌파’(Brahmin left, 지식좌파)라고 부른 층((‘브라만 좌파’는 인도 브라만 계층 가운데 맑스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던 모양인데, 지금 바우엔스가 쓰는 말은 이와는 무관하다. 여기서 ‘브라만 좌파’는 피케티의 용어로서 이에 대립되는 말은 ‘상인 우파'(Merchanr rifht’이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http://piketty.pse.ens.fr/files/Piketty2018PoliticalConflict.pdf 참조.)) —높은 교육자본을 가지고 있지만 금융자본이 별로 없는 시민들로서 많은 도시 커먼즈들을 개척하고 있습니다—과 민족적·종교적 공동체들에 국한된 훨씬 더 수가 많은 이주민 커먼즈들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이 사이에도 강력한 연결이 창출되어야 합니다.

문화가 결정적입니다. 현재의 커먼즈들이 정의상 열려있고 자치적이지만, 친연성에 기반을 둔 결집(커먼즈판 필터 버블((‘필터버블’(filter bubble)은 구글의 경우처럼 개인에게 맞춘 검색의 결과로 지적으로 협소해지고 고립된 상태를 가리킨다. 일반화하자면, 서로 다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 부족한 상태를 가리킨다.))인 셈입니다)이 항상 공동체를 통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커먼즈의 강점은 공유되도록 의도된 목표들을 중심으로 공동의 노력을 창출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정체성 사이의 갈등을 현저하게 극복하게 해줍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커먼즈가 지역의 가치흐름을 대대적으로 재창출하고 그럼으로써 배제된 사람들을 위한 의미있는 활동을 창출하는 중요한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트럼프의 광분에 대해 가지고 있는 대답은 보호주의와 민족주의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 수준에서는 초민족(국가)적이고 초지역적인 협동에, 그리고 바이오지역적(bioregional) 수준에서는 재지역화된 생산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이 모든 변화들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원자화 이후에 협동을 재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문화적 진화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우리는 강한 정신적·생태적 측면을 지니고 있는 ‘인간 이상의 커먼즈’(웹진 『애로우』의 잭 월시Zack Walsh의 생각입니다((https://arrow-journal.org/contemplating-the-more-than-human-commons/ 참조.)))를 위한 협동의 문화를 다듬어내서 계몽주의가 도입한 주객 분리를 (인간의 평등을 위한 열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극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능장애를 일으킨 자본주의 세계질서를 훨씬 더 나쁜 계급착취로 대체하는 것은 결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저는 커먼즈 이행을 지역 정서로 되돌아가는 과정의 일환인, 전지구적 친연성 부족들의 창출과정으로 봅니다. 즉 고도의 솜씨를 첨단기술에 의해 가능해지는 ‘공생공락적인’ 집단지성과 결합하는 ‘고풍 혁명’(archaic revolution)— 맥케너(Terence McKenna)가 말한 바의 것((이런 생각이 담긴 맥케너의 책 제목은 The Archaic Revival: Speculations on Psychedelic Mushrooms, the Amazon, Virtual Reality, UFOs, Evolution, Shamanism, the Rebirth of the Goddess, and the End of History이다. 흥미롭게도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요컨대 농촌공동체와 공존하는 사회체제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오래된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며 혁명적 성향이 있다는 의심을 결코 받을 수 없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한층 더 상위의 차원]는 ‘오래된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래된’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Letter to Vera Zasulich, The ‘First’ Draft, 1881,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입니다. P2P는 상실된 황금시대나 이전에 존재했던 계급착취의 형태들을 지향하는 반동적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문명 이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주기에 부합하는, 브라만[지식]과 노동자의 종합입니다.

 

칸스

당신의 기획은 유럽중심적인가요?

바우엔스

우리 기획은 세계중심적이며, 여러 문화적·영토적·초지역적 맥락에서 채택되는 가능한 공통체들의 다수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서구의 역사에서 발전되었으며 다른 문화적·역사적 맥락에서 발전된 유사한 전통과 연결될 수 있는 해방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저는 때로 ‘신전통적’(neotraditional)이라고 부릅니다.

챈들러가 『문명을 넘어서』에서 시사한 대로, 이는 모두 계급 문명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는 심대한 경향의 표시들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행성을 보존하려면 이 문명의 주기가 끝나야 합니다. 인종화·젠더착취를 극복하고자 하고 인간을 균등한 잠재성을 가지고 기여하는 동료들로 보고자 하는 현재의 경향들은 환경 및 모든 생명체들과 균형을 맞추는 따스한 사랑의 공동체를, 모두가 공동선에의 기여를 인정받는 그런 공동체를 갖고자 하는 인간의 심층적 열망에 상응합니다. 이는 현재의 불평등한 문화에서도 인간의 깊은 곳에 살아있는 열망입니다. 저는 제 생각에 대한 가장 열렬한 반응을 에콰도르의 토착민 공동체들에서 보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

 




정신권, 전지구적 커먼즈, 그리고 커먼즈 운동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베르나츠키(Vladimir Ivanovich Vernadsky ), 그리고 르 로이(Édouard Le Roy)가 선구적으로 기여하여 형성된 정신권(精神圈, noosphere)이라는 개념이 있다. 정신권은 지질권(geosphere), 생물권(biosphere) 다음으로 출현한 것으로서 인간의 정신이 지구 규모로 상호작용하는 새로운 현상과 연관된다. (인터넷이 그 확연한 물적 증거이다.) 정신권 개념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론펠드(David Ronfeldt)와 아퀼라(John Arquilla)가 있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이 정신권에 상응하는 정치로서 ‘정신정치’(noopolitik)를 제시한다. 정신정치는 국가 단위로 작동하는 ‘현실정치’(realpolitik)와 달리 국가와 비국가 주체들 사이의 긴밀한 협동에 의존한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이 정신정치에 중요한 개념으로 ‘전지구적 커먼즈’를 꼽는다. ‘전지구적 커먼즈’는 지구에서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부분들을 가리킨다. 즉 ① 대양 ② 대기 ③ 우주공간을 가리키며 나중에는 여기에 ④ 사이버 공간이 추가된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전지구적 커먼즈에 주목하는 세 집단—① 과학자 집단 ② 커먼즈 활동가 및 이론가들 ③ (특히 미국의) 군부—을 거론한다. 이 셋의 정치적 입장은 각각 다르다. 론펠드와 아퀼라에 따르면 과학자 집단은 자유주의적 국제주의 경향이고 커먼즈 활동가들은 “새로운 종류의 좌파”이다. 커먼즈 운동이 커먼즈 기반 피어생산 및 커머닝에 기반을 두어 사회 전체를 변형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 군부의 전지구적 커먼즈에 대한 주목은 미국의 패권주의와 연관된 것이므로 여기서 그 입장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론펠드와 아퀼라는 그들이 집필 진행 중인 논문에서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는 부분을 웹에 올려놓았는데 (여기 클릭!) 여기에 전지구적 커먼즈에 대한 커먼즈 운동의 관점을 정리한 부분이 있다. 이 정리에서 우리는 커먼즈 운동이 현재 어느 정도로 발전했는가를 읽어낼 수 있다. 이 정리 부분을 아래에 우리말로 옮겨본다.

 

============

 

사회활동가 집단

군부에게는 바다가 글로벌 커먼즈의 첫째 항목이다. 이에 반해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커먼즈’ 개념은 수 세기 전에 영국에서 발생했으며 ‘공동으로’(in common) 소유·운영되는 땅을 지칭했다. 그런데 커먼즈 지향적 시민사회 이론가들 및 활동가들에 따르면 지금은 이 개념이 자연의 물리적 공통재(commons)—‘자연의 선물’로서의 땅, 공기, 물— 만이 아니라 디지털 공통재(온라인 영역과 지식)까지 포함하도록 확대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부 활동가들은 사회적 공통재—가령 창조적 작업이 공유된 자산에 해당하는 협동조합들—도 여기에 포함시킨다. 문화도 때로는 공통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시민사회에서 커먼즈 주창자들은 커먼즈를 공유된 자원이 공동체(사용자들과 이해관계자들)에 의해 그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공동으로 운영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자원, 공동체, 규칙이라는 세 구성요소들(달리 말하자면 ‘무엇을 누가 어떻게’)이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 셋이 합쳐서 의미하는 것은, ‘커먼즈’가 자원이나 땅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커머닝’(commoning, 공동으로 하기)이라고 불리는 삶의 방식을 핵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커머너들’의 궁극적 목적은 기존의 공적인 부문과 사적인 부문과 병행하여 그 부문들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커먼즈 부문’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발전한다면/발전함에 따라, 혁명적인 사회변형이 일어날 것이다. 실로 일부 커먼즈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의 목표는 “모든 수준에서의 지속적인 연결작업 통해서 ‘대항헤게모니적’ 힘을 구축”하여 “전지구적 자본의 파괴적인 힘과 자본에 의한 지구 및 지구민 약탈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것이다.

50년 전에 커먼즈 개념은 선진 사회에서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하딘(Garrett Hardin)이 저 유명한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 1968)을 쓴 이후 특히 그렇다. 그러나 오늘날 커먼즈를 지향하는 사회운동이 세계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다. 이 운동은 정신권의 선구자 격인 인터넷과 웹을 일종의 커먼즈로서 경험하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고무되었다. 그런 다음에 오스트롬의 책 『공유의 비극을 넘어』(Governing the Commons: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 for Collective Action, 1990)와 노벨경제학상 수상(2009)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유재가 (하딘을 비롯한 비판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실로 생산적으로 관리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했다. 지금 커먼즈 운동은 북미, 서유럽, 스캔디나비아 전역에서 많은 새로운 시민사회 NGO들—대표적으로 미셸 바우엔스의 P2P재단—과 데이빗 볼리어(David Bollier)나 요하이 벤클러(Yochai Benkler) 같은 개별 이론가들로부터 영감과 이론적 도움을 얻으면서 느릿하고도 조용하게 확대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녹색 정당들로부터 추가적인 추진력이 오기도 한다. 거대한 환경과학 집단에 비하면 커먼즈 운동은 거대한 영향력을 가진 세력은 (아직) 아니지만, 전지구적 커먼즈와 정신권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키는 것을 돕는 사회운동을 생성하고 있다.

이러한 혁신의 많은 부분이 좌파에서 일어나고 있다. 독일의 커먼즈 옹호자 헬프리히(Silke Helfrich)는 “커먼즈는 모든 정치 이데올로기들 가운데 최고의 것만을 가져온다”고 말한 바 있고 이는 정확한 말이다. 예를 들어 보수주의자들로부터는 책임이라는 가치를, 자유주의자들(liberals)로부터는 사회적 평등과 정의라는 가치를, 자유의지론자들(libertarians)로부터는 개인의 이니셔티브라는 가치를, 좌파로부터는 자본주의의 힘을 제한하기라는 가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아직은 아무래도 좌파로 기울어진 운동이다. 지금까지 보수주의자들 가운데 커먼즈 부문의 출현이 가져올 잠재적 혜택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실로 우파에는—‘미국 제일주의’[트럼프—옮긴이], 브렉시트, ‘독일을 위한 대안’(Alternative for Germany) 등등—커먼즈로부터의 분리가 중심 주제이다.

처음에는, 예컨대 2~30년 전에는 커먼즈 활동가들이 주로 지역과 일국의 문제들에 초점을 두었다. 그런데 비전이 더 발전하면서 점점 더 많은 활동가들이 관심의 초점을 지역적이고 일국적인 커먼즈를 넘어서 광대한 ‘글로벌 커먼즈’로 돌리게 되었다. 이 전환은 한참 진행 중이다. 가령 독일 경제학자 셰어호른(Gerhard Scherhorn)은 전지구적 커먼즈에 자연자원만이 아니라 “고용기회, 공공보건 체계들, 교육기회, 사회적 통합, 소득과 부의 분배, 그리고 인터넷 같은 소통체계들”도 넣고자 한다. 더 명확한 사례는 국제개발 전문가이자 커먼즈 옹호자인 제임스 퀼리건(James Quilligan)의 다음과 같은 분석이다.

시장과 국가가 일국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세계의 문제들을 관리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많은 개인들, 공동체들 그리고 시민사회조직들에게 우리가 추구하는 특수한 목표들—음식, 물, 깨끗한 공기, 환경보호, 에너지,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 인권, 토착민의 권리, 기타 여러 사회적 관심들—이 본질적으로 전지구적 커먼즈 이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많은 좌파 커먼즈 주창자들은 과학계나 군부의 것을 닮은 조직변화를 추구했다. 예를 들어, 퀼리건은 “우리는 이 문제에 대응함에 있어서 전지구적 커먼즈 조직들로서 함께 결합함으로써 상당히 더 많은 권위와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2008) 그의 견해로는 “모든 지역들과 부문들로부터 국제적으로 대표자들을 모아서 전지구적 커먼즈 이슈를—진화의 이 세 흐름[지질권, 생물권, 정신권]을 통합하는—협상의 형태로 토론하는 것이 과제이다.”(2010) 다른 이들처럼 그도, 커먼즈 재산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새로운 종류의 ‘사회 헌장들’과 ‘커먼즈 트러스트들’에 동의할 것을 사용자들과 생산자들로 구성된 지역 공동체들에게 권유한 바 있다. 만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커먼즈 관리가 지역적, 일국적, 다국적, 지역적, 전지구적 이해관계자 토론을 통해 숙의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커먼즈에 유리한 “전지구적 입헌 거버넌스” 체계를 낳으리라는 것이다.(2013) 그러나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 Coalition for the Global Commons)을 창출하려는 초기 2008-2009 ··· [원문에 일부 단어들이 빠져있다— 옮긴이] 명백하게 실패했고 아직 새로운 대형 계획은 출현하지 않고 있다.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창하는 거대한 과학계와는 달리 커먼즈 활동가들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정부, 은행, 재계와 협동하는 것을 기꺼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일반적으로 네트워크 형태의 전지구적 거버넌스—네트워크 기반의 거버넌스 체계—로의 이동을 원한다.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불확실성은 글로벌 커먼즈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일이 어려워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기 때문이다.




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P2P 경제가 가능하다면, P2P 영성이 불가능할 이유가 있는가?

 

컴퓨터에 사용되는 지식·소프트웨어·코드가 자기조직적인 개인들의 공동체에 의해 피어생산(peer produce)되는 것처럼 영적 경험과 통찰이 공동생산될 수 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영성(spirituality)은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는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세계관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새로이 출현하는 영적 관점과 영적 실천은 새로운 사회문화적 복잡성을 다룰 수 있게 해주는 필수적인 ‘의식의 진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함의는 심대하다.

영성과 종교는 항상 그것들이 태어나고 뿌리내린 사회구조의 특징을 담지한다. 새로 출현하는 종교들이 의식의 새로운 형태를 재현한다는 점에서 종종 사회구조의 부분적 변형을 재현하더라도, 주류 사회논리에 뿌리내리고 그 논리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결코 헤게모니적이 될 수 없다.

예컨대 우리는 가톨릭과 불교교단의 조직구조와 이념에 강한 봉건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개신교가 출현하고 있던 자본주의적 그리고/혹은 민주주의적 형태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혹은 종종 “뉴에이지 영성”(New Age Spirituality)이라 불렸던 것이 상품화된 영적 경험이 판매될 수 있는 시장에 맞춰 고안된 것이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가톨릭과 불교교단이 각각 로마의 정치질서와 노예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가치창조와 가치분배의 새 모델로 나타난 피어생산 역시 영적 조직과 영적 경험의 새로운 형태를 낳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분명 타당하다.

피어생산 혹은 ‘P2P’는 개방적 투입과 참여적 절차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과정으로 정의되는데, 여기서는 산출물을 누구나 커먼즈(공통재)로 이용할 수 있다. 이 정의는 P2P 영성에도 적용될 수 있는 다수의 요소들을 포함한다.

첫째 영적 공동체는 그 기본적 규칙과 지침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적이어야 한다. 둘째 중앙의 기획과 신념을 부과할 수 있는 미리 수립된 위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셋째 영적 지식은 저작권이 부여되거나 사유화될 수 없다.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났지만 말이다.

다른 모든 낡은 형태들과 구분되는 P2P 영성의 핵심적인 긍정적 윤리적 가치는 “잠재력 균등성”(equipotentiality)이라 불려온 것에 뿌리내리고 있다. 잠재력 균등성은 모든 인간 존재가 가진 자신의 자질을 개발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서, 이 자질들은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하는 데 모두 필요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보완이 되는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다.

잠재력 균등성은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영적 형태를 오염시킨 순위매기기 방법론에 대한 필수적 해독제이다. 스페인의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자인 호르헤 페레르(Jorge Ferrer)에 따르면 “비교하는 마음”은 언제나 서로 간에 더 높거나 더 낮게 순위를 매기게 되는 위계의 필수불가결한 기반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통합적인 체화된 영성은 쉽사리 경쟁·대립·시기·질투·대결·증오를 낳는, 비교에 기반한 현재의 인간관계 모델을 효과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개인들이 그들의 가장 순수한 활력으로 조화롭게 발전할 때 상호교류와 상호증진으로 특징지어지는 인간관계가 자연스레 출현할 것인데 이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들 자신의 욕구와 결핍을 투사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분명히 말하면 비교하는 마음을 중지하는 것이 영적 집단들에 역설적으로 그토록 퍼져 있는 광범위한 위계적 상호작용 양식을 해체할 것인데, 이 집단들에서는 사람들이 기계적으로 다른 이들을 전체적으로 혹은 몇몇 특권적 측면들에서 우등하거나 열등하다고 본다.”

이와 달리 모든 각각의 개인들은 다양한 속성·강함·약함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이것들 각각에서 다른 이들보다 못할 수도 있고 나을 수 있다. 핵심은 모든 개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최고의 기술과 자질이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할 수 있고 그러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사회적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피어생산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이와 같은 것이 P2P 영적 프로젝트에도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 성취를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하는, 한 사람에게 무소불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초월적 자질인 ‘깨달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위대한 음악가나 예술가에게 어떤 특별한 힘을 부여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존경하는 것처럼 영적 성취를 존중받을 만한 특별한 기술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더 이상 사조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의 일을 맡는 솜씨 좋은 선생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선생들은 기술적 조력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특수한 기능을 담당하는 재능있는 동료들이다.

필연적으로, 이러한 접근법에서는 영적 탐구의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존 헤런(John Heron)이 발전시킨 “협동적인 영적 탐구 집단들”이 이러한 방법론의 실제적인 좋은 사례이다. 이 집단들에서 영적 탐색은 영적 경험이 쉽게 출현하도록 하는 특정한 실험들과 명령들을 집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여기에 미리 정해진 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경험 많은 선(禪) 선생을 초청하여 명상 수행을 이끌도록 할 수는 있지만, 참여하는 모든 개인들은 그들의 상호 이해와 배움을 키우고자 집단 내 다른 이들과 그들의 경험을 공유할 것이다. 위계적 집단의 영적 실천과 달리 특정 경험의 선험적 타당성이란 없으며 다른 경험들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험이 존중되며 집단적으로 의미를 만드는 경험의 일부가 된다.

과거에는 영적 탐구자들이 다음의 두 가지 사이에서 즉 수평적·공통적 측면이 대체로 위계 속에 통합되어 있던 전통적인 종교적 구조들과 종종 꽤나 자기도취적이었던 더 개인주의적인 뉴에이지 버전들 사이에서 선택해야 됐는데, 후자의 버전들은 (종종 돈과 교환되는) 영적 경험의 획득에 기초하지 수평적 관계에는 미약하게만 근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P2P 영성은 무엇보다도 공동체와 공동생산을 존중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는 내가 ‘기여적’(contributory)이라 부르는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각 영적 전통을 가부장제, 배타적 진리론 같은 특정 시대와 연관된 가치들에 영향받는 특정한 사회틀 내의 일단의 명령들로 이해한다. 동시에 각 전통은 우리와 우주의 관계에 관한 특정 진리를 표현하는 심적·영적 실천의 중요 부분 또한 포함한다. 이러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최소한 이러한 실천들에 부분적으로나마 노출되는 것을, 아울러 다른 이들로부터의 ‘상호주관적인’(inter-subjective) 피드백을 받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이는 홀로 착수할 수 없는 탐색이며, 같은 길 위에 있는 다른 이들과의 공유를 필요로 한다.

이런 접근법에서는 전통이 거부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이 비판적으로 경험되고 평가된다. 기여적인 영적 실천가는 스스로를 특수한 전통에 빚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지만 그가 그 전통에 구속되어야 한다고 느낄 필요는 없다.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다른 전통들에 다가가며 그것들을 개별적·집단적으로 경험하고 다른 이들과 경험을 교환하는 영적 탐구 집단들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집단들을 통해서 영적 경험의 새로운 집단적 신체가 탐구하는 영적 공동체 및 개인들에 의해서 계속해서 공동으로 창조될 수 있다. 영성의 공동생산에 P2P 거버넌스와 P2P 소유관계를 더함으로써 우리는 다른 미래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는 예시적 실천들을 발명할 수도 있다. 새로이 출현하던 기독교 문명의 뿌리가 된, 새로운 기독교 주체성을 발명했던 가톨릭 수도승처럼 P2P 영적 실천자들은 출현하고 있는 P2P에 기반하고 커먼즈로 향해있는 사회를 공동으로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의 귀결은 공동으로 만들어낸 실재일 것이다. 이 실재는 예측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모든 인류가 이용할 수 있는 영적 지식의 커먼즈에로 이끄는,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접근일 것이라는 점이다.




당신이 마그나카르타만큼 중요한 삼림헌장에 대하여 결코 들어보지 못한 이유



 

지탄을 받던  존 왕이 사망하고 링컨 전투에서 프랑스의 침략을 물리친 이후인 800년 전 11월, 영국 정체(政體)의 주춧돌 중 하나가 마련되었다. 바로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인데, 이는 2년 전에 비해 짧아진 (나중에 ‘마그나카르타’라고 불리게 되는) 자유헌장(the Charter of Liberties)과 나란히 1217년 11월 6일에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조인되었다.

삼림헌장은 통치권에 강제된 최초의 환경 헌장이었다. 삼림헌장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권리, 커머너의 권리 및 커먼즈의 권리를 가장 먼저 강력하게 천명했다. 삼림헌장은 또한, 생계자급 수단에 접근하고 재혼하는 것을 거부할 상부(孀婦)의 권리를 인정하는 페미니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얼마간의 진보를 이룩했다.

삼림헌장은 다른 어느 법안보다도 오랫동안 법령집에 올라 있던 영예를 갖고 있다. 삼림헌장은 754년 후인 1971년에 토리당 정부에 의해 폐지되었다.

2015년, 마그나카르타 기념일을 축하하는 데 돈을 아낌없이 쓰고 있던 정부는 상원이 제출한 서면 질의에서 올해 삼림헌장을 기념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법무부 장관인 폭스 경(Lord Faulks)은 삼림헌장이 중요하지 않다고, 세계적인 의의가 없다고 말하며 그 의견을 가볍게 일축했다. 

그러나 올해 초 <미국 법조협회>(American Bar Association)는 삼림헌장이 미국헌법의 토대였었고 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옳았다.

우파가 삼림헌장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삼림헌장의 핵심은, 재산 없는 사람들의 경제적 권리를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하고 토지 종획을 철회하여 커먼즈에 광활한 땅을 돌려주는 것이다. 삼림헌장은 놀랍게도 전복적이었다. 슬프게도 모든 어린 학생들이 마그나카르타에 관해 배우는 데도 삼림헌장에 대하여 들은 학생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삼림헌장이 마그나카르타를 주도했다. 삼림헌장은 일 년에 네 번 영국에 있는 모든 교회에서 낭독되었다. 삼림헌장은 왕, 귀족계급 및 신흥 자본가 계급에 의한 커먼즈의 종획과 약탈에 대항하는 투쟁을 고취했다. 잘 알려진 대로 17세기에 디거파와 수평파들의 투쟁에,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에 종획에 항의하는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쓰임이 사라져 버린 단어들이 해석되지 않는 한 이해하기 힘든 삼림헌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커먼즈이다. 즉 커먼즈를 보호하고 커머너의 손실을 배상할 필요성이다. 남아 있는 커먼즈를 민영화하고 상업화하고 있는 정부가 커먼즈를 모르는 체하고 싶어 하는 것이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1066년에 정복자 윌리엄은 자신이 몰고 온 패거리들에게 공유지(커먼즈)의 일부를 분배했을 뿐만 아니라 드넓은 커먼즈 지대를 ‘왕의 삼림’ 즉 자신의 사냥터로 만들어 버렸다. 토지 대장(the Domesday Book)이 작성된 1086년에 그러한 삼림이 25개였다. 윌리엄의 계승자들은 왕의 삼림을 확장했고 전쟁자금을 조성할 수익 지역으로 전환시켰다. 1217년에 왕의 삼림은 143개였다.

삼림헌장은 역전을 이루어냈고 자유민들이 숲에서 생계를 추구할 권리를 군주가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삼림의 개념(([옮긴이] ‘삼림’(forest)은 ‘숲’(woods)의 의미 차이는 http://minamjah.tistory.com/search/마그나카르타 참조))은 오늘날보다 훨씬 더 넓었으며 다트무어(Dartmoor)와 엑스무어(Exmoor) 같이 나무가 거의 없는 마을과 지역을 포함했다. 삼림은 커머너들이 협력해서 살며 일하는 곳이었다.

삼림헌장에는 17개의 조항들이 있다. 그 조항들은 자유민들이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위한 모든 요소들을 산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일할 영원한 권리를 천명한다. 이 권리에는 과일을 딸 권리, 건물을 짓는 등의 목적을 위해 나무를 할 권리, 도구와 집에 필요한 땅을 파고 흙을 사용할 권리, 방목할 권리, 낚시할 권리, 연료용 토탄을 가져갈 권리, 물을 관리할 권리, 심지어 꿀을 딸 권리와 같은 기초적인 것들이 포함된다.

삼림헌장은 원료와 생산수단을 획득하는 커머너들의 권리를 천명하고 노동할 권리에 구체적인 의미를 부여했으므로 우리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삼림헌장은 특히 삼림사법관(Verderer) 제도를 통해 지방 의회 및 사법제도의 발전을 준비했는데, 이 삼림사법관 제도가 치안판사 재판소로 가는 길을 다졌다.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삼림헌장은 종획을 반대함으로써 제도상의 자유를 확대했을 뿐만 아니라 커먼즈의 관리와 관련하여 커머너들에게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써 행위상의 자유도 확대했다.

삼림헌장은 공동 출자된 자산과 자원의 공동체적 파수라고 현재 불리고 있는 것의 토대를 마련했다.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자연 커먼즈를 자본화하고 거기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정부의 과시적인 <자연자본위원회>(Natural Capital Committee)와 대조를 이룬다. 커먼즈는 이윤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위해서 존재한다.

수 세기에 걸쳐서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 천만 에이커의 땅을 몰수해서 총신들에게 분배한 헨리 8세가 속해 있던 튜더 왕가가 가장 지독했는데, 이 총신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1845년의 종획법은 사유재산권의 주장을 모방하는 또 다른 대규모 토지수탈이었다. 1760년과 1870년 사이에 토지를 소유한 엘리트층이 도입한 4천 개가 넘는 의회의 법령에 의해 700만 에이커의 커먼즈가 몰수되었다. 오늘날 영국의 토지소유권 구조는 조직화된 절도의 결과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수백 년에 걸친 박해를 견뎌왔음에도 불구하고 삼림헌장의 에토스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최근 정부들의 바탕이 된 신자유주의적 경제패러다임의 한 가지 특징이 커먼즈를 무시하는 태도인데현 영국 정부는 긴축정책이라는 용어를 핑계 삼아 이제는 무시의 태도에서 약탈의 태도로 전환했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수만 에이커의 연방 커먼즈를 석유가스 산업 관련 기업들에게 거저 나누어 주기 위한 준비를 조용히 해오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커먼즈는 가격이 없고 따라서 가치도 없다. 그래서 커먼즈는 뜬재물처럼 팔리거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지지자들에게 넘어갈 수 있다. 삼림헌장은 커먼즈에서 생계자급을 할 권리를 천명함으로써 기성 체제에 대안이 되는 원칙을 인정했는데, 우리의 조상들이 바로 이 원칙을 용감하게 지켰던 것이다. 우리도 이제 그렇게 해야 한다. 커먼즈의 약탈에 저항하고 커먼즈를 부활시켜야 한다.

한 단체가 그런 일을 하는 일련의 행사들을 조직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전국 수준과 지역 수준의 <커먼즈 헌장>들을 만들어내는 일이 기념일에 발표될 훌륭한 <나무•숲•인민 헌장>과 함께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우리 나름의 노력들은 삼림헌장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환경원칙들을 강조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늘날 기본소득 운동을 뒷받침하는 생계자급권리가 이 전복적인 헌장의 핵심에 놓여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캠페인은 상징성을 담은 한 행사, 즉 9월 17일에 윈저에서 러니미드까지 가는 템스 강 바지선 왕복여행으로 시작되었다. 러미니드에서는 <커먼즈 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공식 행사가 2500년 수령의 어마어마한 앵커위크 주목나무(Ankerwycke yew) 밑에서 개최되었다. 러니미드 목초지는 커먼즈를 상징한다. 이전에 토리당 정부가 그곳을 사유화하려고 했으나 영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조직한 점거운동이 성공적으로 경매를 막아냈다.

바지선 여행의 상징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마가렛 새처는 1989년에 식수를 민영화했다. 그녀는 아홉 개의 기업들에게 지역 독점권을 주었고 커먼즈에 속한 40만 에이커 이상의 땅을 그들에게 양도했다. 오늘날 대부분 소유주가 외국인인 이 기업들은 영국의 상위 50대 토지 소유자들에 속한다. 그들은 삼림헌장의 원칙들을 조롱한다. <템스 워터>(Thames Water)는 외국인 주주들에게 16억 파운드를 배당금으로 지불하면서도, 하수 14억 톤을 처리하지 않고 템스 강에 흘려보낸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혼이 좀 났고 또한 새는 곳을 수리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에게 물에 대한 권리가 있음을 천명했다. 물은 공공재가 되어야 하며, 가장 우선적으로 재(再)국유화되어야 한다.

프래킹[수압균열법]((Fracking에 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01?category=452913 참조.))을 규탄하는 셔우드 숲에서의 행사뿐만 아니라 두 개의 헌장 초안 중 하나가 보관되어 있는 더럼(Durham)에서도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11월 7일에 영국 하원의 한 회의에서 <커먼즈 헌장> 초안을 논의할 것이다. 다른 원본 헌장이 보관되어 있는 링컨 시에서는 노동당(the Labour Party)이 11월 11일에 열릴 행사를 조직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www.charteroftheforest800.org에서 얻을 수 있다. 아직 접촉하지 않은 조직으로서 자신들의 어젠다가 이러한 행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는 모든 목소리가 들리기를 바라며, 모든 커머너들이 일어나길 바라며, 커먼즈를 부활시키는 것이 미래를 회복하는 데 핵심임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기를 바란다.




가이 스탠딩의 『자본주의의 부패』



나는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이전 저작을 읽은 바도 있고 또 그는 노동조직가이자 경제 분야에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역할에 대한 이론가로 알려져 있으므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실망스럽지 않았다.

서두에서 스탠딩은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가 무슨 뜻인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 대한 믿음을 천명하며 경제정책들이 자유시장을 확장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기를 원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지금껏 창출된 가장 자유가 없는 시장체계를 갖고 있다. (···)

경쟁을 차단하는 특허권이 20년간 독점수입을 보장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TV카메라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자유시장 체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저작권 규정에 따라 저작자 사후 70년 동안 저작자에게 보장된 소득을 지급하는데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들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보조금을 받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고 받지 못하는 개인이나 회사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커먼즈를 특전을 누리는 개인이나 회사에 헐값에 팔아넘기는 상황에서, 그리고 우버•태스크래빗 같은 기업들이 규제받지 않는 노동 브로커들로서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서 이윤을 취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치가들은 자유 시장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정부들은 자유 시장을 부정하는 이런 것들을 막고자 노력하기는커녕 그것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규정들을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지대(rent)는 현대 사회에서 중세 지주제도의 소멸과 함께 감소하기보다 오히려 이전보다 금권주의적 소득에서 더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들과 기업들은 주택과 토지뿐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천연과 인공의 자산들로부터 생겨나는 자산소득에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있다. 모든 종류의 ‘자산소득자들’이 전대미문의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국가는 그들의 탐욕을 채워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자산소득자들은 실제로 희소하거나 인위적으로 희소해진 자산의 소유, 점유나 통제로부터 소득을 끌어낸다. 토지, 부동산, 광물 채굴이나 금융 투자로부터 발생하는 자산소득이 가장 흔하지만 다른 원천들 또한 증가했다. ① 대출자(기관)들이 부채 이자에서 얻는 소득, ② ‘지적 재산’(예를 들어, 특허권, 저작권, 브랜드와 상표)의 소유권에서 발생하는 소득, ③ 투자에 대한 자본 이득, ④ ‘평균 이상의’ 회사 수익 (회사가 높은 가격을 부과하거나 조건을 좌우할 수 있는 우세한 시장지위를 지닐 경우), ⑤ 정부 보조금으로 나오는 소득 그리고 ⑥제3자 거래에서 파생하는 금융 및 다른 중개기관들의 소득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책통(通)들이 ‘자유무역’이라고 높이 평가한 전지구적 신자유주의 경제는 ‘자유시장’이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엘리트들이 그들의 자산소득을 최대화할 수 있는 제도 및 규제의 전지구적 틀”이다. 오늘날 서구 기업 이윤의 31%는, 90년대에 확립된 신자유주의 협정체제하에서 시행되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같은 인위적인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자산소득이 이윤이 되는 산업들에서 추출된 것인데, 이 비율이 1999년에는 17%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애플사는 (특허권•저작권•등록상표 덕택에) 아이폰과 관련된 총수익이 40%에 달한다. 신약 연구의 2/3가 납세자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지는데도 특허권은 미국의 연간 약품 가격을 1400억 달러 증가시킨다.

그리고 스탠딩은 이른바 ‘지적 재산’을 정당화하는 선전 신화를 간단하게 처리한다. 특허권의 실제 주된 목적은 혁신에 대한 보상보다 다른 사람들이 혁신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특허권에 영향을 받는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제품들 대부분이 세금에서 나온 거액의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개발되고 나서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종획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특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아이디어의 인위적 희소성에 바탕을 둔 자산소득과 함께 국가는 토지와 자연자원 커먼즈의 종획을 통하여 유산계급에게 막대한 지대(자산소득)를 제공한다. 이러한 커먼즈 종획은 초기 근대 유럽에서의 소작농 토지의 종획, 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이주민 사회에서의 (주인이 없거나 토착민들이 차지하고 있는) 토지의 독점, 라틴아메리카의 대농장 시스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 권력에 의한 소작농 토지권의 무효화 그리고 석유와 광물 자원의 약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모든 형태의 약탈당한 토지와 자원들에 대한 재산권이 신자유주의하에서는 줄곧 서구 자본의 수중에 있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하에서 국가의 한 가지 주요한 기능은 정당한 소유자들이 반환요구를 시도할 경우 그에 맞서서—‘사유재산권을 방어한다’는 명목으로—그러한 재산권을 집행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희소성을 통한 자산소득의 원천들 이외에 세금에서 나온 보조금도 자산소득자 계층에게 또 다른 소득 원천이다. 스탠딩은 통상적인 것들, 이를 테면 구제금융, 특정 산업에 대한 기업지원정책 및 복지국가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사회화함으로써 축소된 임금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을 거론한다. 하지만 그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국가가 자본 전체의 주요 운영비를 사회화하는 방식을 간과한다. (제임스 오코너는 이 방식을 『국가의 재정 위기』The Fiscal Crisis of the State에서 논의한 바 있다.)

1980년대 이래 기업 이윤이 실질 달러로 세 배 증가했고 임금은 정체되었으며 탈산업화로 인해 노동인구에서 프레카리아트의 비율이 급상승했다. 프레카리아트화 추세는 긱(gig) 경제의 부상과 함께 지난 단 몇 년 사이에 더욱 가속화되었다.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대략 1980년대부터 임금과 생산성 사이의 연동관계가 사라졌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붕괴의 원인이며 높은 공공 부채가 성장을 저해한다고 허위로 주장을 하며 2008년 이후로 긴축재정이라는 선전노선을 밀어붙였다고 스탠딩은 말한다.

이 내러티브를 공격할 때 그의 의견은 꽤 정확하다. 사실 신자유주의 자체가 붕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분수에 넘치게 살았”던 것은, 자신들의 자산이 80년대부터 정체되었고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비자 부채나 주택담보로 돈을 빌리는 것에 점점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고등교육 분야에서는 학력 인플레이션과 등록금 비용의—대체로 행정직에 들어가는 임금에 의해 유발되는—폭발적 증가가 병행됨으로써 엄청난 학자금 부채가 발생한다.

자산소득자 엘리트들의 소득이 급등하는 데 반해 노동계급의 구매력이 부진하다는 사실은, 과잉 축적과 과도한 투자라는 자본주의의 만성적인 위기가 수익성이 있는 배출구 없이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유산계급이 파이어 경제(FIRE economy)(([옮긴이] 금융(Finance), 보험(Insurance), 부동산(Real Estate) 부문에 주로 기반을 둔 경제를 말한다.))에서 버블에 점점 더 의존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29년에 붕괴를 유발했던 바로 그것과 거의 동일하다.

공공 부채는 실제로 경제를 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과잉 자본과 과소 소비로부터 생겨날 붕괴를 지연시킨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임금이 정체된 대중의 지출 부족분의 일부를 정부의 재정으로 메꾼 데서 온다. 그리고 정부 부채는 수익률을 보장하는 정부채권 형태로 몇 조 달러의 투자 자본을 흡수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달러는 과잉 공급된 자본의 일부가 되어 민간경제에서 투자에 대한 수익률을 낮출 것이다. 정부 부채는 농산물 가격 지원 제도(a farm price support system)(([옮긴이] 1933년 대공황으로 농부들이 손해를 보자 미국정부는 농산물가격의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농산물의 생산을 제한하고 이에 대한 정부의 보상을 결정한 AAA(Agricultural Adjustment Act 농사조정법)를 제정했다.))를 자본에 적용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긴축재정 선전기계는 금융 엘리트들이 투기했다가 날려버린 자산의 액면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더 낮은 임금과 대폭 줄인 사회적인 안전망을 활용하는 것이 붕괴를 다루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대중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스탠딩은 뉴딜이나 사회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다른 책들에서 보여준 비판, 즉 사회민주주의에 수반되는 ‘노동자주의’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한다. 노동자주의는 룸펜프롤레타리아를 희생시켜서 전일제 임금을 받는 산업프롤레타리아에게 특권을 주고, 사회적 경제를 훼손시키면서 산업을 치켜세운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옮긴이] 칼 폴라니(Karl Polanyi)의 저서. 폴라니는 시장이 교환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즉 경제를 사회의 일부분으로 본다. 데이빗 볼리어는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에서 이 책의 내용을 짧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search/폴라니 참조))을 뒷받침했던 모델은 모든 형태의 일(work)이 아니라 ‘노동’(labour)을 중추적으로 만들었다. 사회주의자들∙코뮤니스트들∙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두 ‘노동자주의’를 지지했다. 정규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실질 임금이 상승했고, 일련의 ‘분담식’ 비임금 혜택들이 증가했으며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사회보장을 받을 자격을 획득했다. 이 모델에 맞지 않은 사람들은 버려졌다. 후자가 소수이면서 자산 조사에 기초한 사회안전망 서비스의 지원을 받는 한, 시스템은 그런대로 작동했다. 그 소수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하자 속담 속의 지렁이가 꿈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주의의 핵심은 노동권—더 정확하게는 자격(entitlements)—이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대개는 남자들)과 그들의 배우자 및 자녀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들이 이전에 사회보장을 거의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은 진보적인 한 걸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이었으며, 노동시장 외부에서 보수를 받지 않고 다른 형태의 노동(예를 들어 육아노동과 공동체에서의 노동)을 하는 사람들을 제치고 정규 유급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특권을 주는 것이었다.

노동자주의는 노동자들이 노동을 많이 할수록 특권을 많이 가지고 노동을 적게 할수록 특권을 적게 가져야 한다는 견해를 확산시켰다···. 노동자주의는 또한 복지국가의 역기능적 측면을 초래했다. 정규직에게 노동에 기반을 둔 보장을 해주기 위하여 임금에서 비임금 혜택(회사연금•유급휴가•출산휴가•질병수당 등)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것이 안정적인 정규직에 고용된 사람들과 안정성이 없는 임시적인 직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거나 유급노동보다 무보수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들 사이의 구조적인 불평등의 형태를 강화했다.

스탠딩은 이른바 ‘공유 경제’는 이런 종류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버 및 그와 유사한 플랫폼들은 운전자들이 소유한 물리적 자본에 대한 임대료를 징수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온디맨드(on-demand) 경제는 자본의 진언(眞言, mantra)을 역전시킨다. 자본가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대신에 작업자들(tasker) 즉 프레카리아트들이 주요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플랫폼들은 특허권 및 기타 형태의 지적 재산권의 보호를 받는 기술적인 장치의 소유와 통제를 통해서 그리고 태스킹(tasking)과 무보수 노동을 통한 노동 착취로 이윤을 최대화한다.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소유한 ‘독립 계약자들’을 소개하는 테크놀로지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라는 노동 브로커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더라도, 그들은 일을 거의 하지 않고 돈을 많이 버는 자산소득자들이다.

예상대로 ‘프레카리아트’의 최초 이론가인 스탠딩은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를 창조하는 ’혁명적 주체’라고 부른 바로 그 계층으로 프레카리아트를 제시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전통적인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스탠딩이 이전 책들에서 주장한 것처럼 급진적인 정치에 대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프레카리아트들만이 그 규모, 성장과 구조화된 불리한 조건의 측면에서 자산소득자 자본주의와 그 부패에 대한 진보적인 대응을 구체적으로 현실화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최하층 계급인 룸펜-프레카리아트는 (2011년에 그랬듯이 그 일부가 항의운동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행동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말 그대로 구걸하는 존재로서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반란은 프레카리아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승산이 있으려면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져야 한다. ①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신념을 중심으로 한 일체감, ② 기존의 사회구조의 결점•불평등•지속불가능성에 대한 지속가능한 이해, ③ 실행할 수 있는 목표에 대한 합리적으로 분명한 비전이 그것이다.

자산소득자 경제의 부정적인 분배효과를 제한하기 위해서 임금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 전체가 지대와 이윤에 누적되는 소득의 일부를 받는 새로운 분배 체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임금 자체만으로는 생활수준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20세기에는 임금협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투쟁은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어야 한다. 임금이 계속해서 정체되어 있을 동안에 자산소득을 제한하고 공유하며 이윤을 공유할 혁신적인 방식들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등은 추한 사회적•정치적 결과를 낳으면서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스탠딩은 한 가지 중요한 저항 수단으로서 오큐파이와 M15 운동을 모델로 한 ‘사회적 파업’—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장기간 동안 거리에 나서는 것—을 제의한다.

그는 해야 할 과제들의 상세한 리스트를 아래와 같이 일일이 열거한다.

· 공적 지출로 개발된 테크놀로지에 대한 특허 시스템 폐지, 그리고 다른 특허권의 경우 의무적인 라이선싱과 아울러 시행되는 기간을 철저하게 축소하기

· 모든 기업 보조금의 폐지

· 정치 자금 없애기

· 의무적인 고용주 보험으로 긱 경제 규제

· 공공안전이 논거가 되는 직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전문 직종의 경우 법적 라이선싱 체제를 집단의 자율적 거버넌스로 교체하기

· 합리적인 온콜페이(on-call pay)(([옮긴이] 온콜페이(on-call pay)는 정규 근무 시간 이후에 호출이 있을 경우 고용인이 언제든 바로 호출에 응할 수 있도록 대기하면서 보낸 시간에 대해 받는 보수를 말한다.))

· 사회적 배당금이나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국부펀드를 창출하기 위하여 자산소득과 천연 자원 추출에 세금을 부과해서 발생하는 세입을 활용하기

그의 방침들 가운데 긱 경제를 규제하자는 제안은 내가 볼 때 가장 완고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과거에 나는 국가의 주요한 개입에서 비롯되는 특권 남용에 규제가 이차적인 제약을 가한다면 (예를 들면 망중립성(([옮긴이] 망중립성이란 인터넷망 사업자와 정부가 모든 콘텐츠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어떠한 차별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지칭한다. 즉 망중립성이 성립하려면 비차별, 상호접속, 접근성이라는 3가지 원칙이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이라는 특수한 경우에) 규제를 자유를 위한 순이익으로 보는 개방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우버나 에어앤비 같은 가짜 ‘공유 경제’ 플랫폼을 가능케 하는—즉 사유(私有)에 기반을 둔, 월드가든형 앱들(walled garden apps)(([옮긴이] walled garden은 공개적인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 사적으로 통제된 환경에서 존재하는 콘텐츠나 서비스를 말한다. walled garden에 대한 설명은 http://minamjah.tistory.com/117 참조))을 규제하는 법을 시행하는 것을 중단하는—주된 국가 개입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긱 경제 노동자로 이루어진 급진적인 노동조합의 설립을 유도하고 해당 앱들을 탈옥하여 기존의 자본주의적 긱 경제를 진정으로 협력적인/P2P 방식의 대안 생태계들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가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다른 중요한 혁신은 프리랜서와 긱 경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부활된 길드 시스템을 통해서 조직되는 협력적인/P2P 방식의 사회 안전망들이다.

나는 과도기적인 방안들로서 지대나 부정적인 외부효과들(탄소세)에 부과되는 세금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사회적 신용/시민배당금/기본소득 제안에 일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다시 말해 국가가 계속해서 존재하면서 독점과 인위적인 희소성을 강제하고 세금으로 재정을 마련하는 한 인위적인 희소성에서 파생된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착취의 순전한 감소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무조건적인 생존소득(subsistence income)으로써 (프랜시스 피번Frances Piven과 리차드 클로워드Richard Cloward의 말대로) 노동을 규제하는(“regulating the poor”, “regulating the labor”) 실제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복지 국가로 전환하는 것 또한 적절한 방향으로의 조치이다.

기본소득이 실현되려면—적어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소득에 매기는 세금으로 재원을 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자산소득자 계급의 재산과 관련하여 사회적 형평성을 창출해야 한다.

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사유유형의 한 사례로서 (스탠딩의 나머지 저작과 더불어) 이 책을 추천한다. 좌파가 새로운 경제에 적합하게 되려면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공룡이 된 구좌파 조직과 정책 모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유형의 사유이다.

 




커먼즈의 렌즈를 통해 정치를 다시 상상하기



 

여러 우파 민족주의 운동들의 출현—브렉시트, 도널드 트럼프, 버지니아 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의 신나치주의자들, 유럽 전역의 반(反)이민 시위들—은 제 나름의 뚜렷하게 구분되는 기원과 맥락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전체로 보아 그 운동들은 믿을 수 있는 변화를 위해 기꺼이 생각해 볼 선택지들이 자본주의적인 정치문화에서 줄어들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보다 건강한 대안적 비전들은 왜 그토록 드물고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발생시킨다.

정치 엘리트들과 그들의 동지인 기업가들은 현재 존재하는 바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심충적인 모순들을 어떻게 화해시킬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가고 있다. 자유 시장 원칙의 고전적인 적들인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조차 낡은 세계관과 일단의 정치 전략들 안에 갇혀 있어서 그들을 옹호하는 것은 실속이 없는 일처럼 들린다. 잘 알려진 그들의 진보서사—즉 정부 개입과 재분배로 증대되는 경제적 성장이 실제로 작동하여 사회를 한층 안정적이고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도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아래에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커먼즈 패러다임이 정치•거버넌스•법을 다시 상상하기 위한 새롭고 실천적인 렌즈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커먼즈는 공유된 부를 관리하기 위한 자기조직화된 사회 체제가 그 핵심이다. 커먼즈는 “비극”이기는커녕 책임과 혜택을 상호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시스템으로서 매우 생성적이다. 커먼즈는 숲, 농지, 물의 성공적인 자기관리에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공동체들과 오픈 액세스 학술 저널에서, 그리고 “세계-지역적” 디자인과 제조 시스템에서 볼 수 있다.

2008년 경제 위기가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인 담론을 유포시켰던 많은 합의 신화들에 드리워져 있던 커튼을 열어 젖혔다. 성장은 널리 혹은 공평하게 공유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빈민, 노동계급, 심지어 중산층도 부자들이 누리는 생산성 향상분, 세금 우대 조치나 주식 가치 상승분을 그다지 나눠 갖지 못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이 모든 경제활동 참여자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심해지는 부의 편중은 새로운 전지구적 금권지배체제를 창출하고 있으며, 지배세력은 모든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폐단들에 무관심한 동시에 민주적인 과정을 지배하고 타락시키기 위해 그들의 재산을 이용하고 있다. 시장/국가 체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 정당성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일반적인 비판의 맥락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긴급한 과제가 좌파나 우파로부터 현재 제공되는 것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정치적인 상상계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약탈을 일삼는 시장과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거나 길들이거나 혹은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거버넌스와 자급(自給) 계획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지난 50년간 자본주의가 무자비하게 발생시킨 반(反)생태론적, 소비자 적대적, 반(反)사회적인 ‘외부효과들’(externalities)의 홍수를 국가의 규제로 완화하는 데 실패한 것은 주로 자본가의 힘이 국민국가와 시민 주권의 힘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통적인 좌파는 다시 데운 케인스주의, 부의 재분배 및 사회적 프로그램들이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효과가 있을 것 같다고 계속해서 착각하고 있다.

문화 비평가인 더글라스 러시코프(Douglas Rushkoff)는 “저는 경제를 고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경제는 고장 나있지 않습니다. 불공평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경제는 감독관인 자본가들이 의도한 대로 대체로 작동하고 있다. 시민들은 민주적 절차들이 부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전통적인 민주정치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자주 무산되기 때문에 종종 절망한다. 국가 관료 체제들과 심지어 경쟁력 있는 시장들도 많은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다룰 능력이 없다. 기후변화•불평등•기반시설 및 민주적인 책임감에 관하여 ‘시스템’이 줄 수 있는 것의 한계는 매일매일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짐에 따라 정치적 주권과 정당성이 앞으로 어디로 이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매우 타당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비전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는, 오래된 이데올로기 논쟁들이 계속해서 공적 담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심층적인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늘 존재하던 다수의 의견 차이들을 끝없이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프로젝트가 구체화되고 성장할 조건이 정말로 거의 없다. 새로운 비전이 사회 개선론적 개혁주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려면 그 비전이 숨을 쉴 여지, 그 자체의 자주적인 논리와 윤리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어야 한다.

『더네이션』(The Nation)지에 실린 최근 글에서 내가 설명한 것처럼 반란 서사와 프로젝트들은 실제로 상당히 풍부하다. 무엇보다도 기후 정의, 협동조합, 이행도시들, 지역 식품 시스템, 대안적 금융, 디지털 통화, 수평적 네트워크 생산, 오픈디자인과 오픈매뉴팩처링(Open Manufacturing)에 초점을 맞춘 운동들이 자율적인 거버넌스와 자급이라는 새로운 탈자본주의 모델들을 개척하고 있다. 단편적이며 다양할지라도 이 운동들은 공통의 테마—이윤이 아니라 가정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생산과 소비, 상향식 의사 결정 그리고 장기적으로 공유된 부의 파수(把守)—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 가치들 전부 커먼즈의 핵심에 해당한다.

현재로서는 이 운동들이 주류 매체와 정당들에게 거의 무시당한 채 문화 비주류로 활동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운동들이 온전함과 실질을 갖추고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오로지 이곳, 주변부에서 이 운동들은 정당들, 정부 기관들, 상업적 매체, 자선 단체, 학계, 산업과 비영리 단체가 결탁한 복합체의 따분한 편견들과 자기중심적인 제도상의 우선순위를 피할 수 있었다.

사회를 변형시키는 변화를 위한 공적인 상상력은 왜 이토록 위축되어 있는가? 부분적으로는 대부분의 기성 기관들이 그들의 브랜드 평판과 기관의 특권을 관리하는 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기관들은 일반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면서 대담하고 새로운 기획과 아이디어를 개발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한편,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들은 규모가 너무 작고 사소하거나 비정치적이어서 중요성을 띨 수가 없는 것으로 보통 무시된다.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들은 또한 주류 행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힘, 어포던스(affordance, 개별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구조적인 능력) 그리고 도덕성을 구축하기 위해 인터넷 기반 네트워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 뒷전으로 밀려난다. 소작농 그룹 <라비아깜뻬시나>(La Via Campesina)의 등장, 토착민들 사이의 초국적 협력, 우버와 에어앤비에 대한 공유 대안을 촉진하는 플랫폼 협동조합 및 ‘벼증산시스템’(System for Rice Intensification, 농부들 스스로 개발한 일종의 오픈소스 농업)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활동가들은 자신들을 특권•평판•간접비용을 유지해야 하는 위계적인 조직들에 속해서 활동하는 존재로 보기보다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개방되어 유동적인 환경에서 유연한 행위자로서 활동하는 존재로 본다. 네트워크에 의해 추동되는 행동주의는 그들에게 활동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자기조직화하고 연계시키며, 재능을 가진 자발적인 참가자들을 끌어들이고, 창조적인 반복을 빠른 주기로 실행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 준다.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관례적인 정책과 정치과정을 삼가고 자기조직화된 창발을 통해 변화를 추구한다. 생태학적으로 말하자면, 체계를 변화시키는 운동은 오픈 디지털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이용권”(利用圈, catchment areas)을 창출하려고 노력한다. 즉 (물, 식물, 토양, 유기체 등등) 수많은 흐름들이 합류하여 활기찬 에너지가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상호의존적인 지대를 발생시키는 지형을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복잡성 이론과 사회운동을 연구하는 학자인 마가렛 위틀리(Margaret Wheatley)와 데보라 프리즈(Deborah Frieze)는 다음과 같이 쓴다.

지역의 개별적인 노력들이 네트워크로서 서로서로 연결되고 실천 공동체로서 강화될 때, 갑작스럽고 놀랍게도 새로운 체계가 대규모 수준에서 나타난다. 영향력을 가진 이 체계는 개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다. 자질과 능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체계가 출현할 때까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개인의 속성이 아니라 체계의 속성이다. 하지만 일단 체계가 존재하면 개인들도 그 속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발생하는 체계는 계획된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가능한 것보다 더 큰 힘과 영향력을 항상 갖고 있다. 창발은 삶이 급진적인 변화를 창출하고 사물들을 적절한 규모에 이르게 하는 방식이다.

선거 정치와 전통적인 경제학을 신봉하는 보수집단은 창발의 역동적인 힘을 강화하고 집중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정책 구조의 필요성을 인식하기는커녕 창발 원리를 이해하는 것조차도 힘들어한다. 보수집단은 ①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② 위키피디아식 협력과 지식 집성체의 속도와 신뢰성, 그리고 ③ (오큐파이 운동,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와 뽀데모스,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그리고 그리스의 시리자 등등) 바이러스처럼 퍼지는 자기조직화에 촉매가 된 소셜 미디어의 힘으로 가능해진 상향식 혁신을 한결같이 과소평가했다. 전통적인 경제•정치•권력의 보수적인 신봉자들은 탈중심화되고 자기조직화된 네트워크의 생성적인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들은 제도적 통제와 정치적 분석이라는 시대에 뒤진 범주들을 적용한다. 마치 “말이 끌지 않는 마차들”이라는 말을 통해 자동차의 악영향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의 낡은 좌우 스펙트럼—이는 사회를 조직하는 데서 “시장”과 “국가”가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반영한다—을 고수하는 대신에, 거버넌스•생산•문화의 새로운 추진기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서사를 맞아들일 필요가 있다. 내 개인적인 작업의 경우, 나는 농부들, 어부들, 대도시 시민들과 인터넷 사용자들이 자본주의 기계의 먹이가 되어버린 공유 자원을 되찾고자 그리고 나름의 거버넌스 대안을 마련하고자 시도할 때 거기서 커먼즈의 엄청난 잠재력을 본다. 이런 식으로 커먼즈는 패러다임이자 담론이며 일단의 사회적 실천이자 윤리이다.

지난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커먼즈는 모든 것의 시장화와 상품화, 자원의 약탈과 사유화 그리고 민주주의의 부패에 도전하는 다양한 운동들을 위한 일종의 포괄적인 메타담론 역할을 해왔다. 커먼즈는 커머너처럼—협동적이며 사회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에 함입되어 있으며 장기적인 환경파수에 관심이 있고 우리의 지구를 구성하는 다원 세계를 존중하는 커머너처럼—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한 언어와 윤리도 제공해왔다.

진정으로 체계 변화를 현실화하려면 우리는 일부 과거 회고적인 개념들과 어휘에서 해방되는 것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부상하고 있는 자급 모델과 자율적인 거버넌스에 관하여 새롭게 탈자본주의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독려할 필요가 있다. 펼쳐지는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데 있어서 관건이 되는 것은 여러 지도자들과 정책을 선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꿀지를, 새롭게 공유된 지향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조직할지를 그리고 커먼즈에 관한 새로운 담론을 어떻게 고양시킬지를 배우는 것이다.

 




800살 된 삼림헌장



 

2년 전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옮긴이] 마그나카르타는 1215년에 작성되었다.))에 왕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고 법치를 확립하는 쪽으로의 전진을 나타내는 이정표로서 마그나카르타를 요란스럽게 찬양해대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이 대헌장과 짝을 이루는 삼림헌장(the Charter of the Forest)에는 주의가 훨씬 덜 기울여졌다. 삼림헌장은 커머너들의 생계에 매우 중요한 삼림에 접근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를 커머너들에게 보장하는 문서였다.(([옮긴이] 봉건 시대의 맥락에서 ‘삼림’(forest)은 ‘숲’(woods)의 단순한 유사어가 아니라 보통 왕의 관할 아래 둔 사냥터로서의 숲이라는 법적 의미를 가진다.))

이 권리는 왕과의 오랜 내전 끝에 확보되었다. 왕은 그 이전에는 삼림에 대한 배타적 통제력에 대한 주장을 무자비하게 확대하여 삼림 침범자들에게 벌금이나 투옥으로, 때로는 사형으로 처벌했다. 그래서 우리는 잠깐 하던 일을 멈추고, 800년 전인 1217년 11월 6일에 헨리 3세가 삼림헌장을 작성하여 커머너들의 일상생활에 필수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는 관습적 권리를 문서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커머너들은 거의 모든 것을 삼림에 의존했다. 삼림은 불을 때고 집을 지을 나무를 공급했으며 양을 비롯한 가축을 키울 방목지를 제공했고 식량으로 삼을 사냥감을 제공했다. 삼림에는 버섯, 개암, 딸기류, 민들레 잎, 기타 수많은 초본이 있었다. 또한 삼림은 돼지를 먹이기 위한 도토리와 너도밤나무의 열매의 공급원이었고 빗자루를 만드는 나무를 공급했으며 온갖 종류의 병에 약초를 제공했다.

영국의 박물학자 리처드 메이비(Richard Mabey)는 “그 어떤 다른 종류의 풍경보다도 [13세기 영국 삼림]이 공동체적 장소인데, 그 구조에 여러 세대에 걸쳐 공유된 자연 및 인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

어떻게 이 삼림헌장이 거의 잊혀질 지경이 되었는가?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그의 놀라운 책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에서 이 두 자유의 헌장이 종종 공적으로 연결되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마그나카르타’라는 이름 자체가 1215년의 ‘대헌장’(Great Charter)을 2년 뒤에 선포된 ‘소’헌장인 삼림헌장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1297년이 되어서야 에드워드 1세가 두 헌장을 나라의 단일한 법으로 취급할 것을 명령했다. 1369년에 에드워드 3세는 둘을 하나의 성문법으로 통합하는 법을 발포했으며 여기서 삼림헌장은 마그나카르타의 7장이 되었다. 수세기에 걸쳐 삼림헌장은 대헌장의 사소한 부분 집합으로 간주되었으며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대영도서관이 관리하는 중세문서원본 블로그(Medieval manuscripts blog)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어떻게 우리를 과거에 연결해주는가」(“how our ancient trees connect us to the past”)라는 훌륭한 글이 올라있는데, 이 글은 삼림헌장을 언급하면서 좀처럼 보기 힘든 이 헌장의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을 나에게 알려준 후안 카를로스 데 마르틴Juan Carlos de Martin과 우고 마테이Ugo Mattei에게 감사한다.) 이 글에 따르면 영국삼림트러스트(British Woodland Trust)의 <고령高齡 수목 목록>(Ancient Tree Inventory)에는 12만 그루 이상의 나무들이 올라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1000살 이상이 되었는데, 이는 이 헌장이 발포될 때에 있었던 나무들이다.

이 글은 또한 어떻게 삼림헌장이 “삼림 영역을 땅이 불법으로 취해졌음을 입증할 수 있는 곳에서는 1152년 헨리 2세의 통치가 시작될 때의 경계로 되돌렸”는지를 말하고 있다. (“헨리 2세는 삼림의 경계를 압제를 발생시킬 정도까지 맹렬하게 확대했”던 왕이다.) 이는 커먼즈(공유지) 되찾기의 이른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커머너들에게 이 헌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2년 전에 마그나카르타 8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나는 베를린에 있는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 시대에 마그나카르타가 가지는 의미커먼즈 그리고 법」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나의 초점은 민중의 일상적 생존 욕구를 충족시키고 인간의 권리를 충족시키는 데서 마그나카르타(즉 삼림헌장)가 법으로서 중요하게 기능하는 점에 두어졌다.

이 헌장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물려받은 공통의 부에 모두가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누가 왕의 삼림을 사용할 수 있는가?’ 1200년대 초의 커머너들은 이 물음에 대한 즉답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말이야, ‘왕의 삼림’이라니. 그건 우리 것이야. 수세기 동안 우리 것이었어!”

커머너들이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들에 대한 권리—삼림을 사용할 권리, 나름의 통치 규칙을 자기조직화할 권리, 왕의 자의적인 권력남용을 막아줄 시민 자유권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이것이 마그나카르타의 잊혀진 유산이다. 이 모든 것들이 문서로 쓰인 법이라는 생각보다 앞섰다. 그 권리들은 근본적인 욕구와 오랫동안의 전통에 기반을 둔 인간의 권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권리들이 근대 국민국가 및 자본주의의 발생과 함께 계속 삭감되었고 많은 경우에 제거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들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광범하게 시행될 수 있는 권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이탈리아의 법학자 스떼파노 로도따(Stefano Rodota)는 이 원칙을 되살리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말이다.

근대에 커먼즈를 위한 법을 되살리려는 노력은 거의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커머너들이 무자비한 시장/국가로부터 지구의 생태계의 파수꾼들로서 행동할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지고 있다. 삼림헌장에 축배를 들고 그것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기억하자. 우리는 앞으로 그것을 위한 영감과 학습을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업데이트 : 펠리시티 로런스(Felicity Lawrence)는 『가디언』지에 삼림헌장에 관한 글 「부의 공정한 공유를 위해서는 13세기로 돌아가자」(“For a fairer share of wealth, turn to the 13th century”)라는 글을 막 게재했다.((로런스의 글은 이 글보다 하루 늦은 2017년 11월 8일에 게재되었다.)) 또한 웹진 openDemocracyUK에 실린 <영국사회과학원>(UK Academy of Social Sciences)의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훌륭한 글도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 운동


  • 저자  :  정남영
  • 설명 : 2017년 5월 20일에 있었던 한국비평이론학회 학술대회에서의 발표문입니다. 이 발표 원고는 완결된 글이 아니라, 시간 절약을 위해 그대로 죽 읽으려고 작성된 스크립트 같은 글입니다. (물론 즉흥적인 생략·변경·보완은 가능하겠지요.) 각주에 넣은 긴 인용들은 발제 시간에 다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읽는 이가 참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삶형태를 위한 노력들 가운데 하나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일단 이 새로운 삶형태를 ‘대안근대’라는 이름과 연관시킨다면 (다른 여러 이름들이 가능합니다) ‘근대’가 어떤 형태의 삶형태를 나타내는지를 먼저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근대는 가장 간결하게는 자본(시장)과 국가의 이두체제가 지배하는 삶형태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안근대로의 이행이란 자본과 국가가 부과하는 삶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는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현하기에는 매우 힘든 엄청난 과제입니다. 근대가 인류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극히 작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사이에도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자본과 국가가 마치 우리가 숨쉬는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예의 과제는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의 한 대목을 보겠습니다.

물론 옛 토대 위에서의 발전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토대 자체의 발전 또한 있었다. 이 토대 자체의 최고의 발전(그 자기변형의 정점에서 피는 꽃, 그러나 항상 이 토대, 이 식물의 꽃이며, 따라서 꽃이 핀 후에는 그 결과로 시든다)은 그 토대 자체가 생산력의 최고의 발전과, 따라서 개인들의 가장 풍부한 발전과 결합될 수 있는 형태로 완결되는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이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더 이상의 발전은 쇠퇴로서 나타나며 새 토대에서 새 발전이 시작되는 것이다.((Marx, Karl, Grundrisse: Foundations of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Rough Draught), trans. Martin Nicolaus, Harmondsworth: Penguin Books, 1993, p.540-41. 앞으로 이 책의 제목은 GR로 줄입니다.))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역사적으로 여러 단계의 변형을 거친 것이 사실이지만,((맑스도 이 저작의 여러 곳에서 장벽을 계속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의 능력을 지적합니다.)) 이 이름을 더는 붙일 수 없는 새로운 생산양식으로의 변형이 이루어지는 시점이 존재하며 이 변형의 조건을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가 만들어놓는다는 것이 맑스의 요점입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이런 취지의 대목은 이 저작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맑스는 “새 토대”를 이루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말했습니다.

생산력과 사회적 관계들―사회적 개인의 발전의 두 상이한 측면들―은 자본에게 단순한 수단으로 나타난다. 단순히 그 제한된 토대 위에서 생산을 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실상 이 힘들은 그 토대를 날려버릴 물질적 조건들이다.((GR, p. 706. 이 저작에서 ‘사회적 개인’이 등장하는 다른 대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들을 지배하는 자립적인 권력이 된 개인들의 사회적 상호관계는 자연력이나 우연으로,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 이해되든 그 출발점이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의 필연적 결과이다.”(197) “일단 이러한 전환이 일어나면 생산과 부의 초석이 되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직접적 노동이나 지출되는 노동시간이 아니라 노동자 자신에 의한 일반적 생산력의 전유, 자연을 이해하는 능력과 사회적 존재인 덕분에 자연을 지배하게 되는 능력 즉 사회적 개인의 발전이다.”(GR, 706) “일단 그렇게 되면, 그리하여 처분 가능한 시간이 대립적 실존으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한편으로  필요노동 시간은 사회적 개인의 욕구를 척도로 삼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매우 급속히 이루어져서 (비록 이제 생산이 모두의 부를 목적으로 마련되지만) 모두의 처분 가능한 시간이 증가할 것이다. 실질적 부는 모든 개인들의 발전된 생산력이기 때문이다.”(GR,708)))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노동자 형상의 변화를 줄곧 추적해 온 사람 가운데 하나가 네그리입니다.(나중에는 하트와 함께) 네그리는 러시아 혁명기의 ‘전문적 노동자’에서 뉴딜 시기의 ‘대중적 노동자’―이 당시를 그는 ‘계획자 국가’의 시대라고 불렀습니다―를 거쳐 ‘사회적 노동자’(자본이 공장을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된 시기) 형상을 포착해 냈으며, 정보혁명 이후 이른바 탈근대에서는 (개별적으로는 새로이 발생한 ‘인지 노동자’에 시선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가 생산의 네트워크들에서 생산을 하고 모두가 생산에 참여하는 ‘사회적 생산’과 그 생산자들인 다중(아직은 잠재적인 다중)의 형상을 포착합니다. 이 생산자로서의 다중은 맑스가 말한 ‘사회적 개인’에 매우 근접합니다.

네그리와 하트는 (맑스의 추론과의 관계를 보면 당연하게도((네그리의 『맑스를 넘어선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을 분석한 책입니다.))) ‘사회적 생산’의 현존과 함께 대안근대로 나아갈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 상응하는 거버넌스의 수립을 통한 대안근대로의 이행을 사유합니다. 네그리·하트는 새 책 Assembly에서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이를 “three-faced Dionysus”라고 부릅니다.)

① 엑서더스 : 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민주적인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 : 기존의 제도를 그 내부로부터 변형.

③ 헤게모니 전략 : 사회 전체에 대한 통제력을 획득하여(“taking power, but differently”((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Assembly, Oxford University Press, forthcoming, pp. 274-280.))) 새로운 사회의 제도들을 창출하는 것.  전체를 직접 변형시키는 것.

오늘 소개할 것은 네그리와 하트의 대안근대 이행론이 아닙니다. 이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를 언급한 것은 이제부터 소개할 커먼즈 운동(commons movement)이 말하는 ‘커먼즈 이행’(commons transition)을 설명할 틀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새 책에서 네그리·하트가 커먼즈 운동을 언급했다면, 그들이 이 가운데 어디에 이 운동을 배치하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새 책에서는 ‘커머닝’(commoning)에 대한 언급은 몇 군데 있어도 커먼즈 운동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물론 ‘커머너’(commoner)에 대한 언급은 Declaration(20)의 마지막 장 “Next : Event of the Commoner”에서 이미 한 바 있습니다.)) 단순히 커먼즈의 창출 혹은 보존이라는 것만 놓고 보자면 ①에 위치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즉 기존의 제도들―의 외부에 구축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네그리·하트가 ①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로 사회운동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축소판으로 수립하는 것(예를 들어 학생들이 학생운동을 하면서 창출하는 소규모의 공동체)이긴 하지만요.((커먼즈 활동가인 볼리어도 “저항과 커머닝의 본질적 유사성이 항상 명백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면서 이런 애매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반대하고 이 이데올로기가 가진 ‘자수성가’형 개인주의, 확장적인 사유재산권, 항상적인 경제성장, 정부의 규제완화(탈규제), 자본에 의해 추동되는 기술혁신, 소비주의에 대한 거의 신학적인 믿음에 반대한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체제 차원의 변화에 구조적으로 막혀있는 경향을 보이는 기존의 정치적 장소들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자신들의 고유한 대안적 제도들을 시장과 국가의 외부에서 창출하는 데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커먼즈 운동이 사회운동과 다르다고 합니다. David Bollier, “Commoning as a Transformative Social Paradigm”, http://minamjah.tistory.com/122))

그런데 사실 현재의 커먼즈 운동은 커머닝이나 커먼즈의 구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나온 Commons Transition and P2P : a Primer를 보면 위의 ‘세 경로’에 담긴 네그리·하트의 것에 못지않은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나는) 포부와 계획을 커먼즈 활동가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P2P 재단의 지난 10년 동안의 노력의 결실로 작성된 이 책자(혹은 팸플릿?)는 커먼즈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의 견해 모두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가장 유력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소개하는 것이 이 발표의 주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주된 부분으로 넘어가기 전에, 커먼즈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커먼즈와 관련된 기본적인 사항―정의 등―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의보다 역사가 먼저 오는 것이 커먼즈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커먼즈가 근대의 출발과 함께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우리의 뇌리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으며 이후 그 우세함은 잃었지만 전(前)자본주의 시대까지 중요한 기능을 잃지 않았던 커먼즈는 산업자본주의에 들어와서 실질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납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P2P기반의 테크놀로지 덕분에 다시 태어났고 전지구적 수준으로 그 규모가 확대될 수 있게 됩니다.((“Commons Transition and P2P: a Primer,” https://www.tni.org/files/publication-downloads/commons_transition_and_p2p_primer_v9.pdf , p.12 참조. 이 책자는 이후 ’Primer’로 줄임.))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커먼즈 운동의 초석을 놓은 사람은 2009년 여성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입니다.((분야가 다르지만 비교적 초기의 기여자 한 사람을 더 들자면 ‘커먼즈의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naugh)일 것입니다.)) 오스트롬은 전통적 커먼즈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전통적 커먼즈는 규모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커먼즈 패러다임이 일반화되기는 힘들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디지털 커먼즈의 등장(커먼즈의 재탄생)이 이 비판을 시원하게 날려버립니다. 이후로 커먼즈 운동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로지르면서 일어나는, 가장 오래된 것이 가장 새로운 것과 결합한 운동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비록 커먼즈는 인류의 역사에 깊이 새겨진 제도로서, 얼핏 보기에는 사회운동과는 구분되지만, 지난 몇 년 동안에 우리는 사회운동이 커먼즈와 하나로 이어지는 몇몇 경우들을 목격했다. 이는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하는 ‘커먼즈 전회’(a commons turn)이다. 우리는 몇몇 사회운동들이 커먼즈의 방어(예를 들어 2013년 5월 이스탄불의 게지 파크Gezi Park 시위), 그리스 위기와 대면할 새로운 커먼즈의 창출(위기는 2010년에 시작되었으며 연대solidarity는 그리스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커먼즈를 투쟁의 조직모델로 사용하기(2011년 5월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 2011년 9월에 시작된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와 직접 연결되는 것을 목격했다. 이는 몇 개의 사례들만 예로 든 것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 Principles for the Transition to Postcapitalism, Zed Books Kindle Edition, 2017, Kindle Locations 334-336.)))

이로써 커먼즈 개념은 예전의 공유지와 같은 것이 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운동이 발전하면서 개념도 따라 발전하게 됩니다. 이는 단일한 커먼즈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현재 가장 많이 채택되는 정의는 커먼즈를 ① 공유된 자원 ② 공동체 ③ 자원을 관리하고 공동체를 운영하기(커머닝) 위한 일단의 규칙들을 모두 합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커먼즈는 물론 모든 종류의 물리적·무형적 자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커먼즈는 더 정확하게는 뚜렷한 공동체를, 자원을 관리하는 데 사용되는 일단의 사회적 관행들·가치들·규범들과 결합시키는 패러다임으로서 정의된다. 다르게 말하자면, 커먼즈는 ‘자원 + 공동체 + 일단의 사회적 프로토콜들’이다. 이 셋은 통합된, 상호 연관된 전체를 이룬다.” (David Bollier, Think Like a Commoner: A Short Introduction to the Life of the Commons, New Society Publishers. p. 15. [한국어본] 배수현 옮김, ��공유인으로 사고하라��, 갈무리, 2015.) “커먼즈는 단지 공동으로 유지하는 자원이나 공통의 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부, 커머너들의 공동체, 커머닝―이는 지속적인 상호작용들, 의사결정의 국면들, 그리고 공통적인 노동과정들을 합쳐서 부른 것이다―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되는 사회 체계이다.” (Massimo De Angelis, Omnia Sunt Communia, Kindle Location 351.))) (발표자도 이 유력한 정의를 따르기 때문에  ‘공유지’라든가 ‘공유재/공통재/공통의 부’라고 옮기지 않고 ‘커먼즈’로 음역합니다.) 커먼즈의 생산양식을 따로 부각시켜 ‘P2P 생산’(혹은  ‘피어peer 생산’)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커먼즈’를 추가하여 더 길게 쓰면 ‘commons-based peer production, CBPP’가 됩니다.((CBPP는 요하이 벤클러(Yohai Benkler)의 용어입니다.))

커먼즈는 노동조합처럼 어디서나 유사한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닙니다. 관리하는 자원에 따라, 관리 규칙에 따라, 위치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뉠 수 있으며 그 결과 극히 다양한 커먼즈가 가능합니다. 볼리어는 “커먼즈들의 은하계”(“a galaxy of commons”)라고 말합니다.

자, 이제 다시 커먼즈 이행이 제시하는 ‘세 얼굴의 디오니소스’로 돌아갑시다.

 

① 엑서더스

커먼즈와 P2P의 세계는 자본 및 국가의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따라서 자본 및 국가를 기준으로 하면 커먼즈를 구축하는 것은 그것들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으로, 탈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커먼즈 활동가들은 커먼즈를 기준으로 봅니다. 그래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출발점에 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전이(phase transition)[대안근대로의 이행을 말합니다―인용자]의 전선에서 역사적 주체의 근간을 형성할 점증하는 수의 커머너들이 예시적인((예시적인(prefigurative): 미래를 미리 구현하는)) 방식으로 실존함을 뒷받침하는 풍부한 데이터가 있다. 이는 매우 강력한 출발이다.”((Primer, P. 47)) 다시 발견된 혹은 더욱 강력하게 복원된 출발점입니다. 커먼즈는 자본과 국가에 의해 주변화되었을 뿐 사라졌던 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안근대의 출발점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 본 맑스의 견해에 오히려 더 가깝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맑스는 현재와 같은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상상하지 못했으면서도 커먼즈의 현재성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습니다. 186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맑스는, “가장 오래된 것에서 가장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일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동네인 훈스뤼크 지역(the Hunsrück)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게르만 유형의 커먼즈(“the old Germanic system”)가 잔존했다고 말합니다.((Marx To Engels In Manchester, MECW, Volume 42, p.557.)) 커먼즈를 가장 오래된 것이면서 가장 새로운 것으로 본 것이죠. 또 있습니다. 러시아의 농업 공동체에 대한 논쟁에서 맑스는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있으며 이 위기는 오직 이 사회체제가 제거되는 것으로, 근대 사회가 고대적 유형의 공동소유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것이다. 혁명적 경향이 있다는 의혹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워싱턴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 작업을 하는 한 미국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식으로 근대 사회가 향하고 있는 ‘새로운 체제’는 ‘고대적 유형의 사회가 더 우월한 형태로 부활한 것이리라.’ 따라서 우리는 ‘고대적’(archaisch)이라는 말에 놀라서는 안 된다.” (1881년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내는 편지 초안,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zasulich/draft-1.htm))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엑서더스의 참된 의미는 출발점에 새로 서기일지도 모릅니다.

 

② 개혁

P2P 생산을 생산양식으로 하는 커먼즈가 주변이 아니라 진정한 중심의 새로운 출발점이더라도 현재와 같이 아직은 자본(시장) 및 국가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이 둘과 관계를 끊고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커먼즈 활동가들이 구상하고 실천하는, 자본 및 국가와 관계를 맺는 방식 자체가 ‘혁명적으로 개혁적’입니다. 커먼즈는 사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를 주변에서 돕는 제도들과 공존합니다. 그런데 이 제도들이 국가와 자본의 해로운 측면은 걸러내고 유용한 측면은 남깁니다. 국가로부터 관료제를 제거하고 한때 복지국가가 담지했던 민중과의 ‘유대’(solidarity)를 보존합니다. 그래서 이 ‘유대’의 역할을 하는 ‘for benefit association’(지원 단체)을 커먼즈 주변에 제도화합니다. (주로 재단의 형태를 띱니다.) 이 제도의 연장선상에서 커먼즈 이행 운동은 기존의 국가―“시장 국가”―를 커먼즈와 유대를 맺은 ‘파트너 국가’로 바꾸려 합니다.((실제 사례가 이미 존재합니다. 파트너 국가의 초기 사례 가운데 하나는 ‘어번 커먼즈의 돌봄과 재활성화를 위한 볼로냐 조례’(Bologna Regulation for the Care and Regeneration of the Urban Commons)입니다. 그 핵심은 시민이 기안을 해서 제안하면, 시는 이를 가능하게 해주고 뒷받침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는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다른 사례로 스코틀랜드 정부가 최근에 공유지들을 되사서 커머너들에게 돌려주는 정책을 수립한 바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장점을 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커먼즈 이행은 복지국가의 ‘재분배’를 모델로 삼지 않습니다. 커먼즈는 선분배(pre-distribution)를 통한 능력양성(empowerment)을 중심 원리로 합니다.((이 ‘능력양성’의 측면이 복지국가의 틀로서는 풀 수 없는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는 희한하게도 맑스가 대안근대의 분배방식에 대해서 말한 것과 통합니다.

“둘째 경우[자본주의 다음의 생산방식을 말합니다―인용자]에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 즉 공동체적 생산―생산의 토대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개인의 노동은 처음부터 사회적 노동으로서 정립된다. 그래서 그가 창조하거나 그 창조작업을 돕는 생산물의 특수한 물질적 형상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의 노동으로 산 것은 특정의 특수한 생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적 생산에의 특정의 참여이다. 따라서 그는 교환해야 할 특수한 생산물이 없다. 자신의 생산물은 교환가치가 아니다. 생산물은 각자에게 일반적 성격을 가지기 이전에 먼저 특수한 형태[즉 화폐―인용자]로 옮겨져야 할 필요가 없다. 교환가치의 교환에서 필연적으로 창출되는 분업 대신에 각자가 공동체적 소비에 참여하게 되는 노동의 조직화가 발생한다.”((GR, 172.))

이렇게 선분배가 이루어지는 국가는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가 점점 약화되는” 그러한 국가일 것이라는 말((Primer, p.35))에서도  국가에 대한 커먼즈 활동가들의 인식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시민사회로부터의 분리는 맑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세세히 분석하고 비판했던 근대의 조건 가운데 하나인데,((“The real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civil classes took place under the absolute monarchy. The bureaucracy asserted the idea of unity over against the various states within the state. Nevertheless, even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the social difference of the classes remained a political difference, political within and alongside the bureaucracy of the absolute executive. Only the French Revolution completed the transformation of the political classes into social classes, in other words, made the class distinctions of civil society into merely social distinctions, pertaining to private life but meaningless in political life. With that, the separation of political life and civil society was completed.” (Karl Marx,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43/critique-hpr/ch05.htm) 이러한 분리를 잇는 기능을 하는 것이 대의(代議)정치입니다. 그런데 분리된 머리를 몸에 잇는다고 시신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온전한 몸이 탄생해야 합니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 분리의 극복을 명확하게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자본에 대한 태도를 알아봅시다. 커먼즈 활동가들은 생산성과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현 자본주의 체제의 폐해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 체제는 유한한 자원―석유, 물, 광물, 땅 속의 영양소 등―을 마치 그것이 무한한 양 추출해서 시장 가치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무한한 자원―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비물질적 재화―에는 인공적으로 희소성((희소성(scarcity)은 자본의 가치화의 바탕이 되는 전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무형적인 디지털 재화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 자본의 존립에 대한 위협이 됩니다.))을 전제하여 접근을 제한함으로써 혁신에 법적·기술적 족쇄를 채우고 있습니다. 양자의 경우 모두 자본의 착취 방식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extraction)이라는 방식입니다.((네그리·하트도 새 책에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축적의 주된 방식으로서 ‘공통적인 것의 추출’에 대하여 두 절 정도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서문의 관련 대목입니다. 옮기지 않고 그대로 소개합니다. “Capitalist accumulation today functions increasingly through the extraction of the common, through enormous oil and gas operations, huge mining enterprises, and monocultural agriculture but also by extracting the value produced in social forms of the common, such as the generation of knowledges, social cooperation, cultural products, and the like. Finance stands at the head of these processes of extraction, which are equally destructive of the earth and the social ecosystems that they capture.” p.xv.)) 커먼즈 이행 운동은 자본으로부터 그 추출적 성격을 제거하고 커먼즈의 삶에 복무하는 ‘친구로서의 자본’(capital as a friend)으로 변형시키려 합니다.((‘친구로서의 자본’ 혹은 ‘생성적  형태의 자본’(generative forms of capital)과 비슷한 취지로 네그리·하트는 Assembly에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말한 바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화폐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데 투여되는 화폐입니다. “In chapter 15 we will argue that this critique should lead us not to oppose money as such but instead to invent an alternative to capitalist money, that is, an alternative social technology for institutionalizing new social relations—a money of the common.” p.224)) 이런 경제를 ‘생성적’(generative)이라고 부릅니다.((생성 경제를 특징짓는 것은 ‘열린 협동조합주의’(open cooperativism)입니다. 이 경제를 양성하는 여섯 개의 전략이 다음과 같이 제시됩니다. ① 풍요(↔희소성)에 기반을 둔 지식의 공유. ② 기여의 다양성 인정(↔ 분업, 전문화). ‘open value accounting’ 사용. ③ 공정하고 호혜적인 분배 : Copyleft licensing →CopyFair licensing으로. ④ 지속 가능성을 위한 오픈 디자인. 자동차의 사례: https://www.osvehicle.com/editselfdrivingcar/ ⑤ 폐기물의 감소. 자본의 요구가 아니라 실질적 욕구에 맞추어진 네트워크화된 생산. ⑥ 물리적 기반시설을 상호화하기(공동이용).)) 커먼즈 주변에 이런 기능을 하도록 설치된 것이 ‘commons-oriented entrepreneurial coalition’(커먼즈에 복무하는 기업가들의 연합)입니다. 이 기업가들은 커먼즈에서 생산된 가치들을 가지고 상업적 활동을 하지만 ‘커먼즈의 축적’에 우선적으로 복무해야 합니다. 시장에 물건을 팔 때에도 사람과 환경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윤리를 지켜야 합니다. 커먼즈와 그 주변에 이렇게 설치된 제도들을 합해서 ‘커먼즈 생태계’(commons eco-system)라고 부릅니다.((Primer, pp. 19-22에서 이 생태계의 사례들인 Enspiral, Sensorica, Farm Hack에 대한 케이스스터디를 볼 수 있습니다.))

 

③ 헤게모니

커먼즈 생태계가 핵심적 요소이지만, 커먼즈 활동가들은 이것의 구축에만 시야나 활동을 국한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자본이 현실적으로 가하는 제한과 맞서기 위해선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 운동은 정치적 장에 관여해야 합니다. 복지국가 모델의 최선의 질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창조와 공동체에 의해 조직된 실천들을 촉진하는, 근본적으로 다시 상상된 정치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정치’란 대의정치만이 아니라((스페인의 ‘도시자치연합’(municipal coalitions)의 경우 당의 입장을 취하지 않으며, 기존의 정당들을 포용하지만 그것들을 수직적인 당 구조보다는 다중이해관계자적(multi-stakeholder) 구조들로 전환시킵니다. 더 많은 참여를 위해서 담론을 여성화한 것도 특징적입니다. Primer, pp.28-29 참조.)) 정치적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 즉 시민들이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여러 권리들도 가리킵니다.) 이는 대안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기존의 정치적 채널들을 해킹함으로써 변화를 가능하게 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 사이의 잘못된 이분법을 분쇄합니다. 균형 잡힌 정치체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예시적 행동노선과 제도적 행동노선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어지는 절에서 보겠지만, 다행히도 이러한 정치적 접근법은 이미 진행 중입니다.((Primer, p.24))

정치 관여에의 궁극적 목표는 ‘체제의 변화’(systemic change)입니다. “정책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환경 및 사람들의 욕구를 시장이나 관료제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체제로 이행하는 것입니다.((Primer, p.45)) 이를 위해 모든 수준―도시, 일국, 지역, 지구 전체―에서 대안적인 거버넌스를, ‘대항 권력’(counter-power)을 구축해야 한다고 합니다. 경제의 영역에서는 ‘Chambers of the Commons’가, 정치의 영역에서는 ‘Assembly of the Commons’가 그 계획에 속합니다. (실제로 2016년 11월에 첫 ‘European Assembly of the Commons’가 열린 바 있습니다.)((커먼즈들로 이루어진 정치체제를 ‘federation of the commons’라고 부른 사례도 있습니다. “A more fundamental question, however, is normative: what are our values, and how does this influence what futures we consider desirable? From the author’s vantage point, with respect to the value of the fullest expression of human empowerment, scenario four is clearly the most desirable. In this fourth scenario, a federation of the commons, citizens and communities are actively engaged in shaping the fabric of their lives and societies through a process of ‘deep democracy’ (Ramos, 2012). But others may find greater affinity with a different scenario. Paraphrasing Ashis Nandy (1992), one person’s utopia may be another’s tyranny.” Jose M. Ramos, The Futures of Power in the Network Era, http://eprints.qut.edu.au/62967/1/A05.pdf))

이렇듯 커먼즈 이행론은 디오니소스의 세 얼굴을 나름대로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오늘 소개한 것은 주로 Primer를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주석에서 소개한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견해는 이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커먼즈들이 이미 사회에 잠재해있다는 판단이나 커먼즈 고유의 정치를 발명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대안근대로의 변형에서 커먼즈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생각 등은 오늘 소개한 이행론과 근본적으로 통합니다. 자기 나름의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제시하는 (발표자도 접하지 못한) 이론가들이 더 있을 것이며 앞으로 더욱 많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함께 커먼즈 운동은 그 실천과 이론이 더욱 더 풍성하게 발전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커먼즈 기반 이행론을 소개하는 것은 이러한 이행만이 대안근대로 가는 유일한 경로라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많은 길들이 있습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커먼즈 중심이든 아니든) 자본과 국가의 이두체제를 벗어나서 자유로움, 공정함, 지속 가능성이 실현되는 삶, 정치·경제·사회가 분리되지 않은 삶, 인간과 만물이 서로 동지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이 노력은 근대를 의식·무의식적으로 영속화하려는 세력과 권력이나 재산을 놓고 투쟁하지 않습니다. 권력과 재산은 근대적 삶형태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것을 아무리 잘 나누어도 근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안근대로 나아가는 노력은 근대적 삶형태에 다른 삶형태를 맞세우는 운동입니다. 이 두 삶형태의 대립은 전체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가지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두 개의 상이한 전체―근대적 삶형태와 대안근대적 삶형태―의 대립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안근대로의 이행 혹은 전환에 성공하지 못하면 생존을 위협받을 상황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인류세’(anthropocene)를 말하는 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이 이런 상태를 만든 것이지 인간이 만든 것은 아니기에 ‘인류세’가 아니라 ‘자본세’(capitalocene)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경제학자도 있습니다.((데 안젤리스가 Omnia Sunt Communia,에서 원용한 것으로서 Moore, J. W. (2014). The Capitalocene, Part I: On the Nature and Origins of Our Ecological Crisis. Fernand Braudel Center, Binghamton University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주도해온 ‘원흉’이 미국과 영국이므로 인류세는 사실 ‘영미세’(anglocene)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역사가도 있습니다.((Peter Linebaugh, “Omnia Sunt Communia: May Day 2017”, http://www.counterpunch.org/2017/04/28/omnia-sunt-communia-may-day-2017/ 참조.))

이제 현재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넘어 이 ‘-세’(-cene)를 새롭게 바꿀 때입니다. 물에 들어가야 수영을 (잘 하든 못 하든) 하듯이, 이 일에 착수해야 이 일을 (잘 하든 못하든) 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한 노력들이 바로 이러한 착수에의 자극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생각에는 성공이나 실패의 여부보다는 ‘무슨 일’에서 성공/실패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일은 생존하는 일인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사는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일인 동시에, 가장 새로운 일입니다. ♣

근대

대안근대

경쟁, 분업

협동, 커머닝

추출적(extractive)

생성적(generative)

대의(代議)

참여

선형(linear)

순환형(circular)

사적인 것 + 공적인 것

커먼즈/공통적인 것(the common)

주인으로서의 자본

친구로서의 자본

관료제로서의 국가, 혹은 시장 국가

파트너로서의 국가

중앙집중적

탈중심적, 분산적

종획(사유화)

공통화(commonification)

재분배(redistribution)

선(先)분배(pre-distribution)

닫음

자본의 축적

커먼즈의 축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