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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트럼프 대 바이든’?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October 16,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GxSN4ip_F6M&list=TLPQMTcxMTIwMjDZLmYzc8ZbYQ&index=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올해 10월 16일(대선 18일 전)에 The Sanctuary for Independent Media (in Troy, NY)에서 한 강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미국의 현실이 강연 내용에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소개한다. 강연이 제법 길고 질의응답도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몇 번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 올리는 것은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대립구도의 허구성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강연의 원고는 https://scheerpost.com/2020/10/19/chris-hedges-the-politics-of-cultural-despair/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9:35 지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위험한가요? 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부정직한가요? 네. 트럼프가 열린 사회에 더 위협이 되는가요? 네. 그러면 바이든이 해결책인가요? 아닙니다!

바이든은 변화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동일한 상태를 좀더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냉담과 혐오로 투표를 하지 않는 최대의 유권자층인 1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3일 실시된 미국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가 1억 6천만 2천 명 정도라고 하니 전체 등록유권자 2억 3천 900만 명에서 이 수를 제하면 등록유권자 가운데 대략 7900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헤지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투표율이 높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사기저하는 의도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의 대상의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미디어들은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2분 증오’(the Two Minutes Hate)의 소비자 버전입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선호와 습성에 관한 상세한 디지털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의 견해들과 편견들의 구미에 능숙하게 맞추고 이것들을 강화하며, 다시 우리에게 되팝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맞춤 분노 패키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대중은 조작된 분열을 가로질러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는 조작된 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싸구려 리얼리티 쇼가 됩니다. 시민들의 담론은 악담과 거짓으로 물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은 문제 삼아지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어집니다.

정치관련 보도는 스포츠 보도를 모델로 합니다. 세트는 일요일 미식축구 경기의 세트처럼 해놓았습니다. 앵커는 어느 한쪽 편이고, 각 팀에서 두 명씩, 4명의 해설자들이 나옵니다. 모니터에서는 득점이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정치적 정체성들은 쉽게 소화될 수 있는 상투형들로 환원됩니다. 전술, 전략, 이미지, 선거기부금의 월별 누적기록, 여론조사가 끝없이 검토됩니다. 진정한 정치적 이슈들은 무시됩니다. 이는 전쟁의 언어, 전쟁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두 정당이 거의 모든 주된 이슈들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주요 이슈들은, 금융기업의 규제완화, 무역협상, 경찰의 군사화(1990년 이래 국방부는 74억 달러 이상을 8천 개에 달하는 연방 및 국가 법집행기관들에 이전하여 군사장비와 병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폭증, 탈산업화, 긴축, 프래킹(fracking) 및 화석연료 산업 지원, 중동에서의 중단 없는 전쟁, 부풀려진 군비예산, 기업들에 의한 선거 및 매스미디어 통제,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감시(정부가 하루 24시간 당신을 감시하면 당신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등입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구의 일부분을 다른 일부분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적대를 부추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널리즘 정신에 의해서 추동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기업의 후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추동되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뉴스가 구현하는 분할구도는 기업수입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뉴스에 사용되는 틀은 프로레슬링에서 사용되는 단순화된 도덕극입니다. 미국에는 트럼프를 좋아하느냐 증오하느냐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치적 입장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각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든과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더라도] 무언가를 지지하며 던지는 셈이 됩니다.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 자신을 학대한 자들에게 맞섰던 애니타 힐(Anita Hill) 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굴욕을 승인하는 셈이 됩니다.
  • 중동에서 중단 없는 전쟁을 기획한 자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인종분리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한 대중의 대대적 감시를 그리고 적정절차(due process) 및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복지의 파괴와 사회안전의 삭감을 포함한 긴축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나프타, 탈산업화, 임금의 실질적 감소,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 수십만 개의 상실, 멕시코, 중국, 월남 등 낮은 보수를 받으며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로의 일자리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사들 및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과 연방기금의 영리적인 기독교 차터스쿨들(charter schools)로의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도소 재소자의 수가 두 배로 늘고 형의 선고가 세배, 네 배로 증가하는 데, 그리고 사형에 처해질 범죄들이 크게 확대하는 데 표를 던지는 셈이 됩니다.
  • 유색인이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군대화된 경찰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그린뉴딜과 이민법개혁에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프래킹[수압파쇄법] 산업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부유층이 교육의 기회를 받고 가난한 유색인들은 기회를 거부당하는, 차별적인 공립학교시스템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기혹한 수준의 학자금대출금과 파산을 하더라도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은행업의 규제완화와 글래스-스티칼(Glass-Steagall)법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정리자―글래스-스티갈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 중에서 4개 항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영리적인 보험업과 제약기업들을 찬성하고 보편적 건강보장을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모든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정리자―행정부와 의회가 재량권을 가지고 예산을 편성․심사할 수 있는 지출]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국방예산을 찬성하는 셈이 됩니다.
  • 과두세력과 기업이 돈으로 우리의 선거를 사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신용카드회사이며 바이든의 아들 헌터(Hunter)를 고용한 MBNA의 이익에 비열하게 복무했던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은 중동에서의 전쟁들을 기획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7조 달러 이상을 낭비했으며 수백만 명의 삶의 파괴하거나 멸절시켰습니다. 바이든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트럼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법 및 입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바이든은 제국전쟁과 기업에 의한 나라의 약탈을 기획하고 미국 노동계급을 배반한 죄목으로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지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붕괴의 해결자로서 내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과 이 당을 옹호하는 지유주의자들은 인종, 종교, 이민, 여성의 권리,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것이 그들의 정치인 척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들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윤리적인 이슈들입니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가령 예전의 복지제도를 파괴했을 때 전지구적 투기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계급이 경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민주당이 응원하는 척하는 바로 그 집단들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그 복지제도의 수혜자의 70%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은 그 입장대로라면 유럽에서는 극우당의 되리라는 점입니다.) 문화전쟁이 현실을 가립니다. 두 당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파괴하는 데서 완전히 한패입니다. 두 당은 미국 사회를 마피아 국가로 재편성했습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민주당, 2019년부터 연방 하원의장), 척 슈머(Chuck Schumer, 2016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 2007년부터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정치가들의 힘은 기업의 돈을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 즉 기업의 돈이 퍼부어지지 않는 체제에서라면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공통체’(commonwealth), ‘공공적인 것’(res publica)라고 부른 것, 혹은 민중의 재산을 전지구적 기업 과두세력을 위한 약탈과 억압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를 약탈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며 사법부, 미디어, 입법부를 왜곡시킨, 그리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금융 사기와 절도에 가담할 자유를 확보한, 부유하고 전능한 주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들입니다.

팬데믹의 와중에서 우리의 도둑정치가들이 한 짓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주관한 2008년 구제금융 이래 유례없는 규모인 4조 달러를 약탈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희생시켜 실컷 먹고 배를 불리고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급아파트, 궁전 같은 저택의 창문 바깥으로 고통 받고 경멸 받는 대중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지원금이나 세금삭감의 형태로 석유회사들, 항공산업체들(이들만 500억 달러를 경기부양금으로 받았습니다), 유람선업체들에게 수조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부동산업체들에게 1700억 달러를 안겨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사모펀드, 로비그룹들(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가들에게 선거기부금으로 1억910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정육업체들 그리고 미국에서 세금을 나내지 않기 위해서 해외로 이전한 기업들에게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소기업들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는 데 쓰여야 할 돈을 가장 큰 기업들이 집어삼키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기부양 패키지 하에서 백만장자들에게 80%의 세금삭감 혜택을 주었으며 가장 부유한 자들이 평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경기부양금을 받도록 허용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또한 4540억 달러가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에 할당했는데, 이는 트럼프 패거리들이 기업들에게 나누어준 막대한 비자금으로서 10대 1의 비율로 차입을 한다면 4조5천억 달러의 자산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에 1조5천억 달러의 대출을 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 돈이 상환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팬데믹 이후 4340억 달러만큼 더 부유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제프 베조스(그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에 연방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팬데믹 이후 자신의 부에 거의 720억 달러를 추가했습니다. 동일한 기간에 55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리자―강연 원고가 실린 사이트에 가보면 이 단락의 주요 항목마다 해당 자료로 가는 링크가 걸려있다.]

[34:00]




미국은 이제 시체다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America Is Now a Corpse (2020년 11월 5일)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20/11/05/america-now-corps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Common Dreams에 실은 2020년 11월 5일자 글 “America Is Now a Corps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어조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첫 단락만 번역이다.) 여기서도 헤지스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주류 혹은 준주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미국 제국 몰락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제도화된 체제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Chris Hedges: Revolutions Only Happen Through Movements 참조) 다만 미국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점―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파고든 정도가 미국에서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 현실(제도화된 기성 체제)의 비판에 치중하게 만든 듯하다. 긍정적인 움직임이 왕성한 곳에서라면 부정적인 측면의 비판에 과도하게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을 기고 기어서 비로소 수많은 촛불들이 삶을 밝히는 곳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헤지스가 대변하는, 미국 민중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되고 또 그렇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를 짚어보느라고 바쁠 일반 미디어들로서는 도저히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않는 저 아래의 영역에서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미국 민중의 주체성 형성의 새로운 큰 흐름이, 그 큰 흐름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보는 것이 중요하며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시체다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가 끝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록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빈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이지만, 적어도 점진적이고 점증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는 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체가 되었다. 상징과 수사(修辭)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수의 과두세력이 자금을 지원하는 공들인, 그러나 공허한 ‘리얼리티 쇼’이다. (바이든은 선거운동에 15억1천만 달러를 들였고 트럼프는 15억7천만 달러를 들였다.) 그 목적은 미국인들에게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트럼프와 언어 능력에 손상을 입은 바이든 사이의 공허한 대결은 진실을 가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과두세력이 항상 이긴다. 민중은 항상 진다. 백악관에 누가 앉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는 실패한 국가이다.”

미국의 ‘열린사회’를 살해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선거과정, 법원, 미디어를 사들인 기업과두집단(corporate oligarchs). 이들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입법을 하여 미국 민중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얻고 있다.
② 쓸모없는 부단한 전쟁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군사주의자들과 전쟁산업체들. 이들은 약 7조 달러를 탕진했으며 미국인들을 국제적 천민으로 만들었다.
③ 상여금과 보상 패키지를 수억 달러씩 받으며 일자리들을 해외로 보내고 우리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소득과 희망이 없는)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빠뜨려 놓은 CEO들.
④ 과학과 전쟁을 벌이며 인류가 멸종하든 말든 이윤을 추구하는 화석연료 산업체들.
⑤ 뉴스를 생각 없는 오락과 우리 당 응원하기로 바꾼 언론.
⑥ 대학으로 물러나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의 도덕적 절대성을 설교하지만, 다른 한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제전쟁과 시민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는 등을 돌린 지식인들.
⑦ 아무 것도 안 하고 말, 말, 말만 해대는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계층(liberal class).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수호한다는 가치를 그것이 불편해지는 순간 저버린다. 또한 자유주의 계층은 유럽에서라면 극우로 간주될 후보자와 정당의 치어리더들이며 검열자 기능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든에 의해서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에 의해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바이든과 민주당을 비판한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소외시키느라고 바빴다. 『인터셉트』(The Intercept)든 『뉴욕타임즈』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을 해칠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그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민주당과 그 자유주의적 지지자들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법치의 복원, 보편적 건강보장, 프랙킹 금지, 그린뉴딜, 시민의 자유의 보호, 노조의 구축,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의 보존 및 확장, 철거와 가압류의 금지, 학자금대출금의 탕감, 엄격한 환경통제, 정부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및 기본소득, 금융규제, 부단한 전쟁과 군사적 모험주의에의 반대―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망각되었다. 이런 이슈들을 옹호했다면 민주당은 산사태를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키우고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키며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민주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바이든은 아이디어들과 정책 이슈들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마치 그와 민주당이 아메리카의 영혼을 구한다는 약속으로 선거를 휩쓸 수 있다는 듯이. 적어도 신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적 확신들을 표현하는 용기라도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계층은 점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과잉을 개선함으로써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공격견 역할도 한다. 자유주의 계층은 ‘파워 엘리트’의 강력한 구성요소이다. 변화의 희망과 가능성을 아니면 적어도 변화의 환상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독재에의 투항이 권력 공백을 창출했고 그 공백을 투기자들,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내는 자들, 갱스터들, 킬러들이 채웠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운동을 위한 문이 열렸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계층과 그들의 가치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면서 부각되었다. 파시스트들이 약속하는 바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이지만, 자유주의 계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진실에 근거를 둔다. 자유주의 계층이 일단 기능하기를 그치면 억제하기 어려운 악들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트럼프주의의 질병은 트럼프가 있든 없든 정치체 안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트럼프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조롱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진 소외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획책한 것인데 이들은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주의는 또한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실제로 감소하였다.

19세기 말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쓸모없는 자유주의 계층의 행위가 피와 테러의 시기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지한 이상들을 지키지 못하자 불가피하게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대가 왔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자유주의 이념들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는 열정과 도덕적 목적을 피한다. 그는 합리적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의 이름으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권력구조를 수용한다. 지하생활자의 위선이 러시아로 하여금 파멸을 맞게 했다면, 이제 그 위선이 미국을 멸망케 한다. 신념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 분리가 핵심이다.

자유주의 계층은 기업이 권력을 시민들의 손에서 탈취했음을, 헌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법의 명령에 의해 철회되었음을, 선거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연출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함을, 미국 민중이 계급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에 더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대중은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발휘하는 한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풍부한 사례로써 보여준 것은, 일단 권력자들이 잉여적이 되고 무능력한데도 권력의 치장물들과 특권들을 틀어쥐고 있다면 무자비하게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그랬다. 내[헤지스]가 『뉴욕타임스』에서 취재한,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에서도 그랬다.

독일 역사가 슈테른(Fritz Stern)은 그의 책 『문화적 절망의 정치』(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에서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상승은 자유주의의 붕괴의 결과라고 썼다.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폭력, 문화적 증오, 개인적 원한에 중심을 둔 정치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많은 부분은 정당하게도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근대 사회―부르주아적 삶, 맨체스터주의[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적·경제적 운동=자유방임주의], 물질주의, 의회, 당.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의 주요 전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그들의 모든 내적 고통의 원천을 본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들을 상상적인 과거로부터,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뿌리뽑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증오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건강관리제도는 국가적 보건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건강관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종합병원들을 합병하고 폐쇄했으며 지역 공동체들에서 건강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일선 노동자들의 거의 반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약 4천3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고용주 제공 건강보험을 잃었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확립할 의도가 전혀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없이는 팬데믹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12월까지 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며 1월까지는 4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팬데믹이 소진되거나 백신이 확보될 때쯤이면 어쩌면 수백만 명이 사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팬데믹의 경제적 낙진인, 만성적 불완전고용과 실업—현재 직업을 구하기를 멈춘 사람, 일시해고되었으나 재고용될 전망이 없는 사람, 시간제로 일하지만 빈곤선 아래인 사람이 공식적 통계에 포함되면 20%에 가깝다—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낳을 것이다. 기아자의 수는 지난 해 이후 이미 세 배로 증가했다.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는 지난해보다 14배 늘었다. 푸드뱅크들의 식사 제공 능력은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으며 압류와 철거의 일시적 정지가 취소되어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다.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한 사회적 소요로 인해 국가는 그 주된 사회적 통제도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① 대대적 감시 ② 감옥 ③ 군대화된 경찰이 그 도구들이며 이것을 법체계가 지탱하고 있다. 법체계는 비판세력을 잔인하게 짓밟기 위해 인신보호영장과 적정 절차를 취소하기 일쑤다. 유색인들, 이주자들, 무슬림들은 토박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민주당에 대항하여 기업국가(corporate state)와 제국의 범죄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민주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계층의 무기력함은 널리 퍼진 배반감―바로 이 배반감으로 인해 투표자들의 거의 반수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저속하고 인종주의적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다ㅡ 에 땔감을 공급할 것이다. 기독교화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치장하고 있는 미국식 전제정치가 한 시기의 획을 긋는 미국 제국의 쇠퇴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 후기]

‘시체’의 이미지는 이미 로런스(D. H. Lawrence)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에서 사용한 바 있다. 로런스는 『모비 딕』(Moby Dick, 1851)의 피쿼드호가 침몰한 이후의 미국을 가설적으로 ‘사후효과’(post-mortem effect)로 본다. 피쿼드는 미국의 영혼의 배이므로 피쿼드호의 침몰은 영혼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로런스에게서 사후효과란 사람들이 영혼이 없이도 에고(ego)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로런스는 ‘에고’를 ‘자아’(self)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획당한 자아, 즉 담이 둘러쳐진 자아라고 이해하면 된다. ‘종획된 자아’의 이미지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본국인 미국에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로런스는 미국의 부정적 측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령 휘트먼에게서 ‘열린 길’(open road)이 제시되고 있음을 짚어낸다. ‘열린 길’은 미지(未知)로 향해있다. 영혼들이 미지로 향하는 이 ‘열린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성취될 목적이 따로 없고 여정(旅程)만이 있다. ‘열린 길’에서는 남녀관계든 동료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오직 영혼의 인정에 기반을 둔다. 영혼들이 유일한 부(富)이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제도만을 보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도란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는 한 사후효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의 바깥을 보고 제도의 아래를 봐야 한다. ‘열린 길’이라는 형태의 커먼즈가 어렴풋게나마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면···.




몰락하고 있는 미국 제국과 대통령 선거

 


설명 : 

아래는 비영리 미디어인 Democracy At Work의 울프가 크리스 헤지스와 인터뷰한 것(유튜브에 올려져있다)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 목적은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시각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다. 크리스 헤지스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해외특파원으로 15년 동안(1995-2005) 활동했으며 2001년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기사로 200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으며 이 일로 <뉴욕 타임스>를 떠났다. 이후 뉴스 웹사이트인 <트루스딕>(Truthdig)의 칼럼니스트가 되었는데 14년 동안 활동한 후 2020년에 모든 편집진과 함께 해고되었다. 그는 이라크 전쟁 반대 이후 미국의 주류 미디어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주로 대안미디어에 나와서 자신의 견해를 펴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제국의 몰락이 주된 주제이다. 계속 저서를 집필해왔는데, 2010년 이후의 것만 꼽자면 Death of the Liberal Class (2010), Days of Destruction, Days of Revolt (2012), Wages of Rebellion: The Moral Imperative of Revolt (2015), America: The Farewell Tour (2018)이 있으며 지금도 새 책을 준비하고 있다.  America: The Farewell Tour 는 『미국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의 급진주의는 흥미롭게도 종교에 입각해 있는데(그는 장로교 목사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맑스를 자본주의의 주요한 비판자로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서는 2015년의 <좌파 포럼>(Left Forum) 발제문 「맑스가 옳았다」(“Karl Marx Was Right”)를 참조하면 되는데, 그 두 대목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맑스는 혁신하고 적응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본주의적 확장이 영속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대단원과 글로벌리즘의 해체를 목격하고 있기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의 가장 예지력 있고 중요한 비판자로서 옹호되어야 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부에 자신의 파괴의 씨앗을 심어놓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가령 신자유주의―이 창출되어 엘리트 층, 특히 경제적 엘리트 층의 이익에 복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맑스의 통찰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의 통찰들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 이렇게 긴요하고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The Declining Empire With Chris Hedges

[앞부분 생략]

WOLFF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이지만, 저 위의 정부는 올해 3월 팬데믹 위기의 늪에서 회복하여 상승하는 증권시장을 찬양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부의 더 나아간 축적에 취해서 주위의 현실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고전적인 ‘붕괴하는 제국의 지배계급’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인가요? 이들은 모두에게서 훔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느라고 바쁜 것인가요?

HEDGES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문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엘리트 층은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금융과 정치체제를 모두 통제하는 과두세력이 미국에서 살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창출한 거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이를 ‘Richistan’이라고 부릅니다.[Robert Frank, Richistan: A Journey Through the American Wealth Boom and the Lives of the New Rich] 이들은 일반 여객기를 타지 않고 노동계급과 접촉하지도 않으며 오직 적은 수의 엘리트들하고만 어울립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의 한 기사는 미국 직장에서의 생산성이 1973년 이래 77% 증가했지만, 시간당 임금은 겨우 12% 올랐다는 점을 짚은 바 있습니다. 연방 최저임금이 생산성과 연동된다면 시간당 20달러가 넘으리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노동인구의 3분의 1이 (팬데믹 이전의 일입니다) 시간당 12달러 이하를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용주가 후원하는 건강보험에 접근하지 못하며, 현재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줄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은 2천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건강보험도 잃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탐욕스러운 전지구적 엘리트층의 공격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왔습니다. 팬데믹은 증권시장을 부풀리고 억만장자 층의 은행계좌를 부풀렸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본 수치로는, 이들의 부가 5천억 달러 증가했습니다. 가령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가장 최근에 본 수치로는) 자신의 부를 3백억 달러 증가시켰습니다. 선거에 돈이 퍼부어지기 때문에, 로비스트들이 우리의 법을 작정하기 때문에, 법원이 기업들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시민들을 구제하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업들이 세금 거부에 참여하는 체제를 창출했습니다. 아마존은 지난 해애 그 어떤 연방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돈을 돌려받았습니다. 아마존만이 아닙니다. 뱅크 오프 아메리카도 그렇고 다른 여러 곳도 그렇습니다. 제지를 받지 않고 계속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를 궁극적으로 혁명적 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약탈과 탐욕에는 내적 제지도, 외적 제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매우 무서운 사회적·정치적 귀결을 낳고 있으며 그 귀결들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WOLFF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국 제국의 몰락이라는 시나리오에 이번 선거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HEDGES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선거의 문제는 중요한 사안들이 개별 인물들의 대결구도로 환원된다는 점에 있고 이번 선거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싫기 때문에 바이든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 개인은 우리를 이 지경에 빠뜨린 상황의 연속 말고는 다른 어떤 것을 창출할 수도 없고 제공할 수도 없습니다. 바이든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단한 전쟁’이라는 판을 구축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투표가 트럼프에 반대하는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트럼프에 반대하지만, 바이든을 뽑게 됩니다. 1994년의 Violent Crime Control and Law Enforcement Act(폭력범죄통제 및 단속법)를 바이든이 밀어붙였는데 이 법은 300억 달러 이상을 경찰과 감옥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이든은 모든 사형 이슈들을 밀어붙였고, 나프타(NAFTA)의 구축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쟁 지지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1991년]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힐(Anita Hill)에 불리하게 청문회를 진행한 데서 그의 여성혐오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분리주의자였으며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할 것을 여러 번 요구했습니다. 이런 미국의 정치체제에서는 골드만삭스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공손하고 호감이 가는 얼굴을 한 바이든을 뽑든 아니면 자기도취적이고 분열을 조장하며 인종주의적인 말을 해대는 트럼프를 뽑든 기업 권력의 체제는 실제로 하나도 건드려지지 않습니다.

WOLFF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구도 역시 몰락하는 제국의 징후라는 것이죠? 이런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가진 최선의 방책이 겨우 이 구도라는 점이요?

HEDGES
당연히 그렇습니다. 바이든은 민주당 과두세력 엘리트층이 선발한 사람임을 분명히 합시다. 골드만삭스의 전 CEO인 블래크파인(Lloyd Blankfein)과 같은 인물들은, 만일 샌더스가 (워런Warren도 해당되지만 특히 샌더스가) 후보로 지명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질 것임을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덜 악한 자’를 뽑는다는 것은 당신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조 바이든을 후보로 내세운 것은 바이든이 트럼프처럼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경제적 체계는 완전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선거가 해결책이 아닌 것은, 민주당이 (클린턴이 기업 세력에게 팔려 넘어간 이후로) 시행한 것과 같은 정책들이 계속된다면 두뇌를 가진 파시스트, 능력 있는 파시스트가 나올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이를 입증할 것입니다.)

WOLFF
그럼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공화당, 민주당 등등이 표시한 길들 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HEDGES
거리의 항의 시위들입니다. 유색인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한 살해에 의해 촉발된 이 시위들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성숙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시위들은 펠로시(Nancy Pelosi)가 가나의 켄테 천으로 짠 스카프를 매고 있다거나 경찰들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거나 브라우어(Muriel Brower, 워싱턴 시장)가 백악관 앞에 35피트의 큰 글자로 “Black Lives Matter”라고 썼다고 해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브라우어는 그러는 한편으로 경찰예산의 4천5백만 달러 증가와 5억 달러에 상당하는 새 감옥의 건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엘리트층, 특히 민주당의 그런 식의 조작이 시위자들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어떤 희망이든 지속적인 대중의 시민불복종에서, 세계 전역에서 (레바논, 칠레, 기타 모든 곳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은 봉기들에서 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해결할 문제들이 체제 차원의 문제들임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들은 트럼프나 바이든 같은 개별 정치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팬데믹의 교훈: 주목할 만한 세 편의 글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Lessons from the Pandemic: Three Notable Essays” (2020. 8. 30) / http://www.bollier.org/blog/lessons-pandemic-three-notable-essay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




흑인 커먼즈와 집단적 소유권

 



 

경찰의 잔인함에 격분하여 미 전역의 도시들에서 최근 발생한 소요의 근저에는 노예 제도의 종식 이래 흑인의 삶을 제한해 온 부·토지·권력에서의 근본적 불평등이 놓여 있다.

일찍이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이 약속받은 “40에이커와 노새”는 결코 주어진 바 없었다. 토지의 재분배도, 강탈된 노동으로 강탈된 토지에서 추출한 부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흑인들은 이전의 노예들이 그들의 자유를 고지받게 된, 노예해방선언 2년 후인 1865년 6월 19일을 준틴스(Juneteenth)로 기념한다.(([옮긴이] 1865년 6월 19일 고든 그랜저(Gordon Granger) 장군이 이끄는 북군이 텍사스주 갤버스톤에 상륙하여 남북전쟁과 노예제의 종식을 고지했다.))흑인에 대한 경찰의 계속되는 살인에 항의하던 시기에 찾아온 올 6월 19일은 흑인이 토지소유권과 이러한 소유권이 가져다주는 경제력을 어떻게 박탈당했는지 되돌아볼 기회를 준다. 토지뿐만 아니라 경제적·문화적·디지털 공유자원에도 기반하고 있는 확대된 “흑인 커먼즈”(black commons) 개념은 보상수단의 하나로 기능할 수 있다. 도시계획조경건축 분야의 교수인 우리의 연구가 제안하는 바는 흑인 커먼즈 개념이 경제발전을 장려하고 공동의 부를 창출함으로써 노예제도의 인종주의적 유산을 제거하는 작업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토지수탈

흑인 소유의 미국 토지 비율은 실제로 지난 100여 년간 감소해왔다.

정점이었던 1910년 미국 전체 농부의 약 14%였던 흑인농부1600만 에이커에서 1900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했다. 2012년쯤 농업 공동체의 1.6%에 불과한 흑인은 360만 에이커의 땅을 소유했다. 또 다른 연구는 1920년과 1997년 사이 흑인농부가 98% 감소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같은 기간 동안 백인농부 소유 에이커가 증가한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농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 USDA)의 1998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감소는 법·직위·대부 자원으로부터 흑인농부를 배제시킨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뉴딜과 농무부의 차별적 관행에서 비롯된 긴 차별의 역사 ―“기록이 잘 되어 있는” 역사― 때문이었다.

차별적 관행은 토지 유만이 아닌 자산소유에도 영향을 미쳤다. 흑인의 41.8%가 주택을 소유했던 반면 백인의 79.1%가 주택을 소유하고 있던 2017년 인종별 주택소유 격차는 50년 사이 최고로 높았다. 이 격차는 자산구매를 위한 모기지, 주택개량을 위한 대출을 흑인 거주자에게 허용하지 않은, 금융차별(([옮긴이] 금융차별(redlining)은 빈민에게 대부·모기지·보험 등을 거부하거나 높은 이자율을 매기는 관행을 말한다.))같은 인종차별적 주택공급 관행이 합법적이었을 때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큰 것이다.

소유권의 결핍은 흑인 중산층을 빈털터리로 만들었고 흑인을 계속해서 괴롭혀온 불구적인 경제적 격차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부를 늘리고 그것을 후세대에 물려주는 것을 더 어렵게 했으니 말이다.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보스턴 도시권(([옮긴이] 보스턴 도시권(Greater Boston)은 매사추세츠주의 수도인 보스턴과 그 주변 지역을 포괄하는 메트로폴리스 지역을 의미한다.))의 비이민 흑인가구 순자산의 중앙값은 8달러에 불과했지만 백인가구는 247,500달러였다. 이는 “제약을 포함하는 계약, 금융차별 및 기타 대출관행으로 인한 포괄적인 주택공급·대출차별” 때문이었다.

1983년부터 2013년 사이 전국적으로 흑인 부의 중앙값은 1,700달러로 75% 감소했으나 백인은 116,800달러로 14% 증가했다.

 

자유농장

오늘날의 토지소유권과는 매우 다르게 보일지 모르는 집단적 소유권이라는 이념은 미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다. 노예제 시절에도 노예주는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의 생계 농업을 위해 한 뙈기 땅을 내주었다. 자메이카의 사회이론가 씰비아 윈터(Sylvia Wynter)는 이 땅을 “플롯”(the plot)이라 불렀다.

윈터는 어떻게 이 땅 부지가 노예들이 그들만의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전통적인 아프리카 민속과 식습관을 유지할 수 있는 공동의 지역으로 변모했는지를 설명해왔다. 참마·카사바·고구마를 키우면서 말이다. 플롯은 종종 “참마밭”으로 불렸으며 이 주식(主食)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식량, 토지, 권력, 문화적 생존의 연결은 본질적으로 전복적이었다. 노예제의 잔혹한 제약 속에서 집단적으로 성장하는 실천들을 지원하는 물리적 공간을 전유함으로써 흑인들이 또한 보여줬던 것은 그들의 생존과 저항을 가능하게 할 공통적인 정신적 공유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역사가 샤를라 M. 펫(Sharla M. Fett)에 따르면, 본초학(本草學)과 의학, 조산학(助産學) 그리고 흑인의 기타 치료관행은 “종교 및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저항행위로 여겨졌다.

노예제의 종식과 함께 이 플롯들은 사라졌다.

집단적 토지소유권의 원칙은 노예제 이후의 흑인 사회에서 발전했다. 이는 남부에서 가장 가난한 흑인 농부들의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안된 협력모델인, 시민권 조직가 패니 루 해머(Fannie Lou Hamer)의 자유농장의 핵심이었다.

패니 루 해머(1964년)

해머가 보기에 억압에 직면하여 정의를 실현하려는 싸움이 필요로 했던 것은 공동체를 위한 토지소유와 자원제공을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일정정도의 자립이었다.

흑인 커먼즈를 경제적 역량강화의 수단으로 보는 이 생각이 W.E.B. 두보이스(W.E.B. DuBois)의 1907년 “흑인 사이의 경제적 협력“의 주안점을 형성했다. 두보이스가 믿었던 것은 짐 크로(([옮긴이] 짐 크로(Jim Crow)는 실존 인물이 아니라 흑인으로 분장하여 흑인 가곡 등을 부르는 쇼를 통해서 대중화된 가상의 흑인이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 시행된 짐 크로 법(Jim Crow Laws)은 미국 남부주에서의 인종적 분리를 강화한 지역법이었다. )) 시대의 극단적 분리가 흑인 간의 문화적 유대 속에서 경제적 역량강화를 확립할 필요를 낳았으며 이는 협력적 소유권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용조합 및 협동조합

부의 축적만이 흑인 커먼즈의 소망된 결과였던 것은 아니었다.

1967년 사회평론가 해럴드 크루즈(Harold Cruse)는 “정치·경제·문화의 새로운 역동적 종합”을 창출할 “신제도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경제 벤처사업들은 흑인 공동체의 더 큰 열망에 정치적·문화적·경제적으로 기반을 둘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흑인 커먼즈를 통해 달성될 수 있었다.

정치경제학자 제시카 고든 넴바드(Jessica Gordon Nembhard)는 흑인 신용조합과 상호부조펀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른 유색인종 및 저소득층과 마찬가지로 흑인들은 미국 역사 전반에 걸쳐 협력적 소유권과 민주적 경제참여로 큰 혜택을 보아왔다”고 말했다.

비영리단체인 슈마허 신경제센터(Schumacher Center for a New Economics)는 흑인 커먼즈 아이디어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 성명에서 센터는 “여태까지는 토지에 접근하지 못했던 흑인들이 저비용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구체적 목적을 가지고서, 흑인 커먼즈에서 매입·기증된 토지를 한데 모으기 위한 국가적 수단으로 기능하는” 공동체 토지신탁제도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다.

한편, 공유지분주택제도와 공동체토지신탁은 계속 증가하여 흑인가족이 재산을 소유하고 인종적·경제적 정의를 진전시키며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한 이주를 경감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디지털 커먼즈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이 미친 불균등한 영향과 경찰의 잔혹성이 낳은 소요가 부각시켜온 것은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구조적 인종차별주의였다.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흑인의 삶을 위한 운동>(Movement for Black Lives)과 같은 단체들은 집단행동을 중심으로 갱신된 활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디지털 시대에 이 집단행동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흑인들은 또한 매우 인기 있는 온라인 댄스파티인 디제이 디 나이스(D-Nice)의 클럽 쿼런틴(Club Quarantine)과 같은 행사를 통해 문화 커먼즈를 형성하고 있다. 이 행사의 성공은 공동체 구성을 촉진하기 위하여 미래의 경제적 협력을 가리키는 온라인 플랫폼을 사용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반패치>(Urban Patch)와 같은 단체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이 비영리 단체는 크라우드소싱한 기금을 사용하여 인디애나폴리스의 도심지역에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 과거의 흑인 커먼즈를 반영하는 집단적 경제개발을 장려한다.

미국의 오랜 인종차별주의 역사는 수 세대에 걸쳐 흑인을 억압해왔다. 그러나 지금 이 유산을 탐구해보는 것은 집단적 흑인행동, 흑인소유권 사상을 되돌아볼 수 있는 비할 바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를 활용하여 그저 부를 위한 토지소유권을 넘어서는, 공동체와 경제를 창조할 기회 말이다.

 




푸코에 대한 맑스주의적 경험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A Marxist Experience of Foucault”,  http://www.euronomade.info/?p=4146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성철
  • 설명 : 이 글은 안토니오 네그리가 2014년 12월 18일-19일, 프랑스 낭테르(Nanterre)에서 개최된 콜로키움 Colloque Marx-Foucault에서 발표한 글이다. 원래의 발표문은 이탈리어로 쓰여 불어와 영어로 번역되었고 위의 원문 링크에서 세 가지 버전의 글 모두를 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글의 다른 영어 버전은 맑스와 푸꼬에 관한 네그리의 에세이를 모은 책인 Marx and Foucualt (Polity Press, 2017)에 실려있다.(Ch.16 ‘Marx after Foucault: The Subject Refound’)

1.

여기서 네그리는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con e dopo Foucault)에 맑스를 읽은 경험을 제시한다. 이는 물론 “푸꼬와 함께 그리고 푸꼬 이후”에 맑스를 읽는 것은 푸꼬 이전에 맑스를 읽는 것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핵심을 말하자면 계급투쟁을 ‘역사적 주체화’의 과정으로서 존재론적 차원에서 읽음으로써 새롭게 활성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이전에는 어떻게 읽었나? [* 이 대목은 네그리의 것이 아니고 추정·보완해 넣은 것] 노동자계급을 고정적인 것(객관적인 것, 가변자본)으로 보고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자본(불변자본/고정자본)과 객관적인 자본의 논리에 따라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경우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일정한 한도(임금투쟁)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한도 내에서만 움직인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새로운 존재의 창출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삶형태의 변형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이익의 분배를 놓고 다투는 문제가 된다.)

  A) 역사적 주체화

푸꼬의 직관과 결론의 토대 위에서 맑스의 정치경제 비판의 고도로 역사화된 어조와 문체가 유물론적 접근법과 깔끔하게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맑스의 역사적 저작들을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읽는 것으론 충분하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서 그의 개념들을 현재에 열어놓음으로써 그 개념들에 대한 그의 분석을 계보학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푸꼬의 접근법은 계급투쟁의 주체화가 역사적 과정의 동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강조하게 해주었다. 이 주체화의 분석은 항상 갱신되고 역사적 과정에서 개념들에 영향을 미치는 변형의 규정들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변증법이나 목적론에서 벗어나서 푸꼬가 제안하는 틀을 택하면, 역사적 주체화는 인과론적이지도 창조적이지도 않지만 규정력을 가진 장치로 간주된다. 마끼아벨리의 경우처럼 우리를 위한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러나 맑스 내부에도 이런 고정성을 허물고 계급의 주체화를 드러내는 대목들이 있다.

① 절대적 잉여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

『자본』에서 맑스는 절대적 잉여 가치의 추출에서 상대적 잉여가치의 추출로의 이행을 노동일 축소를 향한 노동계급 투쟁과 관련짓는다. 이처럼 맑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적 차원, 계급의 특수한 주체화는, 노동자의 주체성의 변형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생산 구조의 존재론적 변형에 있어서 본질적이다. 요컨대, 투쟁이 존재론적 변형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②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

맑스가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이행에 대해 분석할 때 이것은 무엇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전개에 관한 가설이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맑스는 이 이행의 서술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가능한 다양한 형태를 뽑아낸다. 그리고 이렇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역사적 변형 속에 있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그는 착취의 범주들의 항상적인 재편을 분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 틀에서 우리는 가령 노동계급의 개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가능하다. ‘매뉴팩처’에서 ‘대규모 산업’으로 이행하고 이제 산업 자본주의와 다소 사회화된 포디즘에서 금융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노동계급이 다양하게 변형되고 공고화되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중’ 개념이 ‘산 노동’의 현재의 규정을 ‘인지적’ 의미에서, 즉 특이하고 다수적이며 협동적인 것으로서 적실하게 서술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노동계급의 개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B) 계급투쟁

푸꼬의 관점에서 읽으면 맑스의 자본 개념은 푸꼬가 ‘힘들의 관계’(un rapporto di forza, a relation of forces)의 산물(prodotto)로, 타인의 행동에 대한 작용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계급투쟁의 효과로 정의한 ‘potere’(power) 개념과 연결된다. 프롤레타리아 주체화의 새로운 특징들―생산적이고 특이화된 인지적 힘들로서 저항적이며/이거나 능동적임―이 계급투쟁을 다시 자본주의적 발전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의 중심에 놓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궁극적 종식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에 대해 역사적 목적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자. 오직 이 비유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Begriff des Politischen)으로서 계급투쟁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C)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

‘자기의 테크놀로지’(tecnologie di sé)라는 푸꼬의 관점에서 보면, 산 노동은 고정자본(capitale fisso)의 일정 몫을 전유할 때 그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력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단지 종속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 자본의 수준에서 스스로를 주체화하며 그리하여 산 노동의 새로운 형상들을 구성하면서 대응한다. 이 형상들은 고정자본의 일부를 전유하여 더 우월한 생산력을 발전시킨다. 인지노동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초과’(eccedenza, excess)가 이 수준에서 파악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따리의 신체성과 주체성의 기계적(macchinica, machinic) 변형이라는 통찰이 중요하다. 때로 들뢰즈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주체화의 적대의 요소이다. 그러나 이는 푸꼬의 직관적 통찰들을 강조함으로서 회복될 수 있다. 이 점점 더 핵심적이 되는 기계적 요소는 적대하는 노동력의 기술적 구성에 속한다. 맑스적 담론의 이러한 발전은 푸꼬 이후에 가능하다. 푸꼬 이후에는 존재론적 차원이 계급관계의 배경이 아니라 생산적 기계이다. 공통적인 것의 생산적 헤게모니는 노동이 인지기계로 전환된 데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인간학적 변형에서, 새로운 기술적 활력에서 나온다. 푸꼬의 자기의 테크놀로지는 비록 고전 고대 시기와 연관되어 있지만, 새로운 인간학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주의나 정체성의 흔적이 없고 ‘인간의 죽음’ 이후의 인간(l’uomo dopo la “morte dell’uomo)을 그려보는 인간학이다. 푸꼬의 작업은 자본의 시초 축적과 함께 시작된 ‘인간들의 축적’(accumulazione degli uomini)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제 노동의 기술적 구성에서는 생산적 신체들과 삶의 양태들(modi di vita)의 변형에 대해 생각하고 이 양태들이 생산수단이 된다는 점을 확연히 긍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D) 코뮤니즘

푸꼬의 주체화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코뮤니즘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과 민주적 주체화를 합치시키는 과정(il processo che compone la produzione del comune e la soggettivazione democratica)에 다름 아니다. 즉 다중의 특이화이다. 이런 식으로 생산적 존재론은 공통적인 것의 개념을 회복한다.

 

2.

한 걸음 물러나 덜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분석으로 되돌아가보자. 우선 둘 사이의 차이를 보자. 이 차이는 나중에 공통의 관점 속에 재배치될 것이다.

① 맑스의 경우 명령의 통일성이 주권적 권력의 형상에 담겨 있고, 통치(il goverbo)는 자본의 의지 안에 통일되어 있다. 반면에 푸꼬에게 권력의 통일성은 희석되어 있다. ‘통치성’(governamentalità)은 서로 다르고 분산된 권력들(potere)의 생산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이다.

② 맑스에게 사회적인 것의 (국가화는 아닐지라도) 자본화가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푸꼬에게 삶권력(il biopotere)은 탈중심화되어 있으며 그 확산이 다양한 발아에 의해 일어나고 권력의 구체적 형태들은 특이화된다. 여기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사회화’이다.

③ 맑스에게 코뮤니즘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 조직된다. 이것만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수행할 수 있다. 푸꼬에게서는 해방의 정치적 체제가 주체화에서 조직되고 자유로서 특이화된다. 그리고 생산에서 공통의 행복을 구축할 제한 없는 가능성을 본다.

그러나 이 차이를 덜 중요하게 만드는 점들이 있다.

① 맑스에게서 보이는 국가와 명령에 대한 유기적 관점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사회계급들의 역사적 분석에 의해 희석된다. 특히 정치경제 비판의 수준에서 이 유기적 관점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석에서 상품의 사회적 유통의 분석으로 나아가면서 극적으로 변한다. 여기서 맑스는 (재)생산과정을 가치창출과정으로 재연결시킨 후 다시 임금의 분석으로 내려가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계급들과 그 삶의 양태들의 서술로 내려간다. 그에 따라 권력 메커니즘의 다양화와 확산이 광범한 공간을 설계하며 (이때 사회는 공장이 된다) 권력의 과정들이 증식하고 다양한 차이로 갈라지며 이 차이들 위에서 그 과정들은 말 그대로 맥동하기 시작한다.

② 맑스는 시초 축적(accumulazione originaria)을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통치화’ 혹은 ‘국가의 사회화’로서도 제시한다.[↔ 자본화, 사회의 국가화] 로베르토 니그로(Roberto Nigro)는 포섭에 관해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혹은 삐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는 이러한 사회의 변형[즉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변형]에 대한 분석 속에서 항상 ‘생산된 주체’의 ‘생산하는 주체’로의 변형을 파악하려고 했는데, 이 변화는 푸코에게서 주체화라는 문제틀의 핵심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③ 맑스의 프롤레타리아독재와 푸꼬의 주체화이론에서의 존재론적 전복 사이의 차이와 관련해서는 『그룬트리세』의 코뮤니즘, 일반지성 및 사회적 개인에 대한 대목들을 가지고 양자의 유사성을 그려볼 수 있다. 이 유사성은 1978년 이후의 푸꼬의 강의들에서 더 분명해지며 필시 주위 사람들과의 토론의 결과요 E. P. 톰슨 같은 역사가들을 인정한 덕분일 것이다.

이 유사성들은 두 저자를 근대의 몇몇 주된 문제들(국가, 사회, 주체)을 중심으로 한데 모으지만, 또한 둘을 새로운 존재론의 발전이라는 노선보다는 근대의 황혼에 위치시키기도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두 저자의 차이와 유사성을 강조할 때 1977-78년과 1978-79년 강의의 삶정치적(biopolitical) 전회에 도달하기까지의 푸꼬의 작업이 준거로 되고 있다는 점이다.[캡처한 그림참조] 여기서 맑스와 푸꼬 사이의 유사성은 혼란스러운 채로 남아있고 개념들은 모호하게 취급된다. 맑스에게는 첫째와 둘째 사례에서 모든 담론적 강조가 특이화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도의 ‘추상’의 관점에서 주어지는 반면 푸꼬는 그 반대라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3.

1977-78년 이후의 그의 강의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1984년 이후에 가능해졌듯이 그의 저작들과 강의들을 철학자의 것으로만이 아니라 투사의 것으로도 볼 수 있게 되면, 우리는 통치성, 삶정치, 주체에 대한 맑스와 푸꼬의 사상 사이의 피상적 합류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는 둘 모두 현재의 존재론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푸꼬는 정치학과 윤리학의 절합에 있어서 진전을 보이는데 이것은 ‘자기와의 관계’를 정의하는 작업을 통해서였다. 이 작업은 개인화 및 데까르트식 주체로의 회귀에 반대하며 주체의 집단적 구성 및 이것의 역사적 과정에의 함입에 관한 것이다. 이는 ‘우리’(Noi, We)의 발굴(scavo, excavation)―나/우리 관계의 발굴―로서 제시되는, 생성으로서만이 아니라 다양성(multiplicity)의 실천으로서 제시되는, 주체의 ‘폐위’(destituzione, dethroning)로서 드러난다. ‘우리’는 다중이며 ‘나’(Io)는 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 ‘자기 돌봄’(la cura di sé, ‘care of the self’)은 개인적인 실천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주디트 레벨의 말을 빌면) 자신의 필요에 따라 개인의 형상을 형성하는 경향이 있는, 권력에 대한 개인적 반응은 더더욱 아니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의 ‘자기’(self)는 데까르트의 ‘나’가 아니다. 그렇기에 푸꼬가 그 탄생을 1978년에[『생명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서술한 경제적·정치적 자유주의에 의해 창출된 개인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들뢰즈가 정의한 특이성이다.

윤리학은 존재와 함(fare, doing)의 교차로에 위치한다. 주체화 과정 내에서의 탈중심화는 이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견유주의가 승리하고 파레시아가 단순히 (진실을 말할) 의지로서가 아니라 진실의 지형(terreno di verita)으로서 상세히 개진된다. 그러나 이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권력-저항이라는 짝(양자 사이는 비대칭적이다)만이 아니라 양자의 차이의 존재론적 성격을 무엇보다 강조해야 한다. 이는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intransitività della libertà, the intransitivity of freedom)에 의해 드러난다. 이 요소는 권력관계에 종속될 때조차도 무조건적이다. 산 노동이 자본과의 관계 내에서 자동사적인 활력이듯이 말이다.((정리자주—‘자동사적 성격’이라고 번역한 ‘intransitività(이)/intransitivity(영)’에 대해 사실 푸꼬 자신이 사용한 표현은 영어로 intransigence 즉 ‘비타협적 성격’이다. 이는 그가 영어로 쓴 글인 ‘The Subject and Power’에 등장한다. 여기서 푸꼬는 권력(관계)과 지배의 상태를 구별하면서 관계로서의 권력이란 타인의 행위에, 그 자신의 의지대로 그리고 타인의 의지에 반하여 영향을 가하려는 행위인 한에서 권력의 행사는 원리상 자유로운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즉 권력의 행사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복종하지 않으려 하는 주체에 대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자유는 권력의 행사의 전제 조건인바 자유는 존재론적으로 권력에 앞선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의 핵심에는 […] 의지의 반항(the recalcitrance of the will)과 자유의 비타협성(the intransigence of freedom)이 있다.” 한편 이 글이 후에 그의 글 모음집인 Dits et Ecrits 에 불어로 번역되어 실리면서 intransigence가 intransitivité로 옮겨졌고 종종 푸코의 자유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게 된 듯하다.))

진리는 새로운 존재를 산출하는 시적/창조적(poietic) 지형에서 구성된다. 가령 해방투쟁은 자유의 자동사적 실천을 펼쳐낸다. 진리를 창조하는 자유이다. 촘스키와의 토론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진리에의 욕망이라는 물음이 던져지자 푸꼬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당신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싸움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프롤레타리아는 역사상 처음으로 정치적 힘을 장악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권력의 전복을 원하기 때문에 그 싸움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체화과정의 발전은 권력의 문법(그리고 실천)의 계속적인 재정식화를 낳는다. 고고학이 어제와 오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계보학이 내일과 현재 사이의 가능한 차이를 실험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현재에 대한 정확한 분석―‘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un’ontologia critica di noi stessi)―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 ‘우리 자신의 비판적 존재론’을 통해서 우리는 근대의 범주들을 위기에 부칠 가능성을, 더 정확히는 그 필요성을 갖게 된다. 예를 많이 들 수 있지만, 무엇보다 근본적인 것들은 ‘산 노동’의 새로운 질과 그 생산적 능력의 새로운 차원들을 둘러싼 문제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차원들의 소진과 <나>와 <우리>의 관계, 즉 <우리>의 노동/활동 속에서의 <나>의 산출에 의해 결정되는 바의 ‘공통적인’ 지형의 출현이다.

역사, 윤리 그리고 정치적 행동이 하나로 이어지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열린 존재론의 장치(dispositif), 존재를 생산하는 장치이다. 싸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마지막 결과들이 혁명적 좌파 내에서조차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 푸꼬가 발전시킨 입장을 [지금] 상기하는 것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하다. 싸르트르와 대조적으로 푸꼬에게는 주체의 자유와 사실의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존재론적 맥락의 필연적 결정과 그 열림, 즉 윤리적인 존재 및 함의 자유(freedom of ethical being and doing)가 존재한다.

 

4.

하이데거 이후로, 즉 탈근대에 존재론은 더 이상 주체의 토대(fondamento)를 이루는 장소로 정의되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적·실천적·협동적 배치(agencement), 프락시스의 직물이다. 요컨대, 칸트 이래 확립된 초월적(transcendentale) 철학의 연속성을 가로막은 현재적 존재의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은 말 그대로 근대의 존재론과 그 데까르트적 뿌리(주체의 중심성)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며 ‘삶의 양태’라는 새로운 물질성 위에 자리를 잡는다. 현실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던 인식론적 막(schermo, screen)은 여기서 분쇄된다. 하이데거의 작업은 이러한 지형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는 또한 오늘날 세계를 구성하는 테크놀로지적 노동이 그것의 생산물[즉 삶의 양태 혹은 인간]과 충돌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역설적으로 이 지형에서의 실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인간에의 위협은 잠재적으로 치명적인 기계들 및 테크놀로지 장치들에서 비로소 오는 것이 아니다. 본래적인 위협은 이미 인간을 그 본질에서 갉아먹고 있다. 몰아세움/닦달(Gestell)의 지배는 인간이 어떤 더 근원적인 탈은폐에로 귀의하여 더 원초적 진리의 부름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위협해오고 있다.”[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하이데거에게서 존재는 생산적이지 않으며 테크놀로지는 생산을 비인간적 운명 속에 익사시키고 새로운 존재론의 발생에 왜곡의 징표를 남긴다.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황무지를 되돌려준다. 바로 여기서 주체의 유령들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에서 잘 나타나는 그 유령들이 다시 등장한다. 니체와 푸꼬는 이와 다른 길을 간다. 그들은 세계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취하며 그것이 무엇이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발굴한다. 과거의 파편들, 현재의 밀도, 장차 올 것의 모험을 그 물질적 실재와 열린 시간성 속에서 다룬다. 그들은 존재론을 역사로 채우고 언어적 관계들과 수행적 장치, 계보적 재구축과 진실에의 의지들을 수립한다. 이것들이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존재를 창출하도록 말이다. 그들은 모든 관계를 세계를 구성하는 기계로 향하게 한다. 초월적 인식론은 옆으로 제쳐놓는다. 이 인식론은 더 이상 현재의 존재론을 위한 지식을 보장해주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경우와는 달리 이 새로운 존재론에서는 삶의 공통적 맥동에 열려있는 결정적 분기가 발생한다. 존재의 산출은 심오함이나 초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현실성 속에서, 삶의 돌봄(cura della vita) 속에서 조직된다. 나는 ‘맥동’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 생기론은 들어있지 않다. 우리는 생물학화된 혹은 자연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삶을 산다.

푸꼬에게 이러한 ‘현재의 존재론에 몰입되어 존재하기’(essere immersi in una nuova ontologia del presente)가 가장 높은 정도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공통적으로 존재하기’(un essere comune)로서 특이성들의 상호적이고 다변적인 의존이 우리가 앎의 문제를 제기하고 진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지형을 구성한다. 마슈레가 상기시켜주듯이, 푸꼬의 저작 출간의 맥락은 “전쟁 직후 시기의 사고방식과 글쓰기 방식의 완전한 갱신을 나타낸 거대한 논쟁의 계절이 시작된 때”이며 “이때 문학의 리얼리즘, 주체철학, 변증법적 합리성에 기반을 둔 연속적인 역사적 진보라는 개념이 동시에 문제 삼아졌다.” 이 문화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는 것은 주권적 주체, 의식개념, 그리고 역사적 목적론을 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존재론을 집단적 실천의 직물이자 산물로서 파악함을 의미했다. 1970년대 중반, 푸꼬가 그 시점까지 쓴 것을 읽을 때, 나는 막다른 골목의 느낌을 받았으며, 이것이 (객체에 대한 구조주의적 열광과 주체에 대한 정신주의적 매료를 넘어서) 주체화를 향한 충동, 장차 올 것의 존재론적 구축(costruzione ontologica de l’a-venire)을 향한 충동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자문했다. 이러한 극복은 1970년대가 끝난 이후부터 일어나게 된다.

맑스에게서 우리는 동일한 형태의 존재론적 뿌리내리기와 대면한다. 역사적 현재에의/현재의 뿌리내리기(un radicamento nella/della presenza storica)이며 그 항상적인 재구성이다. 주체의 형이상학 같은 것은 없다. 그 존재론적 직물은 내가 지금까지 ‘새로운 존재론’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이러한 존재론적 직접성을 전제하는 것은 역사적 시기들의 차이를, 따라서 ‘삶형태들’(forme di vita)의 차이―예를 들어 맑스와 푸꼬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성찰이 존재한다―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들[역사적 차이들, 여러 삶형태들의 차이]을 동질적 토대에서 비교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관건은 이 글의 서두에서 정의된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즉 ① 정치경제학 비판의 발본적 역사화 ②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으로서의 계급투쟁의 인식 ③ 노동력, 즉 산 노동의 투쟁에서의 주체화 그리고 생산하는 신체들의 생산관계들의 변이와의 연동 ④ 공통적인 것에 열려있는 주체화를 정의하는 것.

 

5.

프랑스 맥락에서는 종종, 위에서 말한 것과 반대 방향에서, 존재론적 담론의 탈주체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이 지형에서 전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알뛰세르의 사유는 바로 이러한 시도에서 매개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이 노선을 제안했다. 이제 알뛰세르가 이 지형에서 그의 비판을 심화시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개인은 <주체>(Sujet)의 명령에 자유롭게 따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즉 자신의 종속의 몸짓들과 행동들을 ‘스스로 달성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주체로서 호명된다. 자신들의 종속에 의한 그리고 그 종속을 위한 주체 말고는 주체란 없다.” 우리는 이것을 매우 잘 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주체성을 그토록 해체시킴으로써, 그 어떤 가능한 정신주의의 나무도 베어넘김으로써, 알뛰세르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앉아있는 나뭇가지를 잘라버리기에 이르렀다.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알뛰세르를 교정한다. “‘주체의 구성’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역사적 과정으로서의 주체 없는 과정에서뿐이다.” 주체에 대한 맑스주의 비판은 반(反)휴머니즘의 무규정적이고 불확정적인 형상으로 옮겨놓아질 수 없다. 이 비판이 표현하는 역사성, 활력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의 죽음’[즉 주체의 해체] 이후에 요구된 [새로운] 휴머니즘이 소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 현재의 존재론 안에서일 것이다.




제국, 20년 후

 



20년 전 『제국』이 나왔을 때에 지구화가 중앙무대를 차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한 번 지구화가 중심적 이슈이지만, 지금은 여러 입장에 걸쳐있는 제도권 논평가들이 그 검시(檢屍)를 수행하고 있다. 우세해진 새로운 반동세력은 자국주권의 귀환을 요구하면서 무역조약을 깨고 무역전쟁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초국적 기관들과 전지구적 엘리트들(소수 지배세력)을 규탄하는 한편 인종주의의 불을, 이주자들에 대한 폭력의 불을 지핀다. 좌파에서도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 및 전지구적 엘리트들의 강탈행위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자국주권의 부활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는 죽었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덜 명료할 뿐이다. 전지구적 질서가 어디서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오늘날의 여러 위기들이 전지구적 구조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막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자본처럼 위기를 통해 기능한다. 말하자면, 위기를 먹고 산다. 이 질서는 여러 면에서 고장남으로써( by breaking down) 작동한다.[원주1: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자본주의적 기계의 분열적 성격의 일부는 그것이 ‘고장남으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Anti-Oedipus,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apolis 1983, p. 31 참조] 오늘날 전지구적 구조들이 덜 가시적이기에 지난 20년 동안의 트렌드들을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라는 면과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전지구적 구조들이라는 면에서 연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배와 착취의 주된 구조들을 전지구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반란과 해방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촉진하는 데서 핵심적이다. 제국이 아래로부터의 다중의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되었듯이, 다중이 자신들의 힘을 효율적인 대안적 힘으로 구성하고 대안적 사회의 조직을 향한 경로를 그릴 수 있는 한에서 제국은 다중 앞에서 몰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운동들은 여러 면에서 이미 이러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 서로 어긋나 있는 권역들

제국의 지속적인 위기가 하나가 다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권역들(spheres)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지구 규모의 네트워크들이 그 첫째 권역이며,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 그 둘째 권역이다. 이 두 권역은 점점 더 서로 어긋나고 있다. 첫째 권역은 ①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연결성이 높아지는 상호연결된 소통 네트워크들, ② 물질적·비물질적 기반시설들, ③ 육·해·공 수송로들, ④ 대양을 횡단하는 케이블들 및 위성 시스템들, ⑤사회적·금융적 네트워크들, ⑥ 생태계들, 인간들 및 기타 종들 사이의 다양하게 중첩되는 상호작용들로 구성된다. 지역화된 경제적 생산이 이 영역 내에 존속하지만 이는 점점 더 이 대륙을 가로지는 회로들에 흡수되어 역동적으로 되며 또한 많은 경우 이 회로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노동도 시장, 기반시설, 법, 국경체제[국민국가의 경계들로 지리적 구획이 지어진 체제]의 전지구적 웹에 흡수되고 제한을 받는다. 가치화 및 착취 과정들도 다양하지만 통합된 전지구적 어셈블리라인에 의해 지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기관들과 생태 신진대사의 회로들은 여전히 지역적일 수 있지만, 이들 역시 큰 역동적 시스템들에 점점 더 의존하고 종종 그것들에게 위협을 받는다.

이 지구 규모의 시스템들은 상이한 공간들과 시간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다양한 활동들을 실질적인 동시에 형식적으로 포섭한다. 이 권역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 있는 총체이다. 단일하고 밀도 있는 지구 규모의 집합체이다. 이 상호연결성은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가장 분명해진다. 가령 핵에 의한 파멸이나 기후위기에 직면하면 살아있는 생물들과 테크놀로지들의 웹 전체가 위협을 받으며 그 가운데 무사할 것은 없다.

첫째 권역을 둘러싸고 있는 둘째 권역은 상이한 여러 수준들에서 상호교직된 정치적·법적 체계들―일국 정부들, 국제적인 법적 협약들, 초국적 기관들, 기업 네트워크들, 경제특구들 등―로 구성된다. 이는 전지구적 국가(a global state)는 아니다. 일국 주권의 주장이 퇴색하면서 출현한 것은 이행적 거버넌스 체제들이다. 이 중첩되는 구조들이 혼합된 정치구성(a mixed constitution)을 이룬다. 이 권역의 표면을 가로질러 지배의 고비를 쥐고 있는 자들은 아래 세계의 소유자들―기업의 장들, 금융 거물들, 정치적 엘리트들, 미디어 거물들―이다.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이 진전되면서 이 두 권역들은 점점 더 어긋하게 되었다. 이 두 권역들은 별도의 분리된 축 위에서 돌면서 때로 서로 충돌한다. 20세기의 개혁 기획이 두 권역들 간의 관계를 안정화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하며 전지구적 체제의 모든 수준들에서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embedded liberalism'[‘내장된 자유주의, ‘묻어들어 있는 자유주의’ 등 여러 번역어가 있다]를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은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영역과 안정된 구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거버넌스 권역을 창출했다.

신자유주의의 제국적 거버넌스는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안쪽 권역으로부터 가치를 포획하고자 한다. 안쪽 권역의 생산 및 재생산 회로들이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영역이 그 명령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화폐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생산된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금융 및 부채의 도구들을 통해서 자산소득(rent, 지대)의 형태로 가능한 많은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위기들이 번성하지만, 이 위기들은 임박한 붕괴의 표시들이 아니라 지배의 메커니즘들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운수(運數)

두 권역들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각 영역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들이 어떻게 변했나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한다. 다중의 저항과 도전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오늘날 어떻게 열렸는지에 시선을 두면서 말이다.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동터옴을 선언했다. 그 당시 비판자들이든 지지자들이든 모두, 미국이 유일한 초강국으로서 당연히 그 유례없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행사할 것이며, 전지구적 사태에 대한 일방적 통제만큼이나 책임도 점점 더 많이 지게 되리라고 보았다. 10년 후 미국 군대가 바그다드로 진군할 때에는 아버지 부시가 고지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아들 부시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중동을 다시 만들 듯이 보였으며, 그곳에 순수한 신자유주의적 경제들을 창출할 듯이 보였다. 네오콘들이 슬슬 몸을 풀 때 비판자들은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를 규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일방주의적 힘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으며 워싱턴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헛된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다른 게 아니라 단지 그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의 불충분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미국은 탈레반(Taliban)과 바티스트(Baathist) 정권들을 전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요구되는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수십 년 동안의 실패 이후인 지금, 미국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체제가 혜택을 가져오리라고 믿거나 안정적 질서를 창출할 힘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잔존 여부에 대해 마음을 졸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만, 사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지배는 트럼프가 무대에 돌연히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지난 일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전지구적 질서를 일방적으로 조직하고 통제할 수 없다. 아리기처럼 중국과 같은 다른 국가가 미국이 했던 헤게모니적 역할을 계승하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쇠퇴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제도권 논평가들에게는 여전히 미국이 전지구적 패권국에 유일하게 걸맞은 국가이다. 이런 주장들에도 일리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나 중국의 역할이 일극적 패권국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mixed constitution)에서 벌어지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격렬한 경합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국가도 헤게모니적 위치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은 카오스와 무질서가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주권의 출현을 나타낸다.

 

  1.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

헤로도토스나 플라톤 같은 예전의 사상가들은 세 개의 기본적 통치 형태―군주제(1자의 지배), 귀족제(소수의 지배), 민주제(다수의 지배)―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각 정치구성의 상대적 장점을 분석했으며, 정치사를 하나의 정치구성에서 다른 하나의 정치구성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폴리비오스(Polybius)에 따르면 로마의 새로움은 그 혼합된 정치구성에 있었다. 통치형태들이 서로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했다.

20년 전 우리는 오늘날 출현하는 질서를 (이 전지구적 통치의 혼합된 정치구성을 가리키기 위해서) ‘제국’이라고 명명했다. 제국은 전지구적 국가도 아니고 통일되고 중앙집중화된 지배구조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지구화는 단순한 동질화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질화인 동시에 마찬가지 정도로 이질화인 과정이다. 모든 지리적 규모에서 경계들 및 위계들이 번성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난 20년 간 제국적 정치구성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이행들의 일부를 개략적으로만 살펴보겠다. ① 군주제의 수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태전개는 중심의 공동(空洞)화였다. 1990년대에 미국은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 도메인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폭탄(워싱턴), 달러(월가), 네트워크(헐리우드/실리콘밸리)는 군주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 도메인들에서 ‘일자의 지배’와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영역에서 미국의 우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지만, 그 토대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그 범위는 더 좁아진다.

㉠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다른 나라들보다 두드러지게 우월하다. 그러나 월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패배는 미국의 군주로서의 능력이 오늘날 미약해졌음을 분명히 한다. ㉡ 20년 전에는 견고하게 보였던 미국의 금융적·화폐적 헤게모니도 점점 더 약화되었다. 금융 헤게모니는 이미 불안했는데, 이는 1971년에 있었던, 달러화의 금표준으로부터의 분리로 소급한다.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에 따르면 1990년대에 미국의 금융 및 화폐체제는 ‘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토대는 2008년의 금융위기에 의해 확인되었고 이는 다시 미국이 군주 역할을 하는 능력을 문제시 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는 문화산업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도 축소되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 기업들은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 발휘를 위한 소프트파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점점 더 지구 규모로 작동하며 모호하게만 미국의 전지구적 이미지에 기여한다. 이렇듯 세 도메인 모두에서 미국의 군주적 힘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다른 후보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적 진공이 군주제의 수준에서 커지고 있다.

② 제국의 귀족제 수준에서는 흥하고 쇠하는 열강들의 열띤 경합이 일어나고 있다.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소수의 지배’는 주요 기업들, 선진국들, 초국적 기관들을 가로질러 행사되고 있다. 기업 대 국민국가, 국민국가 대 초국적 기관 등의 격렬한 경쟁이 그 특징이다.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위계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상승한 반면, BRICS의 다른 국가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애플과 알리바바가 제너럴모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갈등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은 실제로는 같은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은유를 바꾸자면,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기사도(騎士道)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질서에 복무하는 기사들과 같다.

귀족제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일반적 윤곽이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많이들 말하는 국민국가의 귀환은 전지구적 체제의 균열이 아니라 귀족 열강들 사이의 경합에서 구사되는 전술적 작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America first!, Prima l’Italia! Brexit!는 전지구적 체제에서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국가들의 애처로운 외침들이다. 사라진 나뽈레옹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해 동원되는 것으로 맑스가 그린 바 있는 프랑스의 보수적 농민들처럼, 오늘날의 반동적 민족주의자들도 전지구적 질서로부터의 분리를 노리기보다는 전지구적 위계에서의 재상승을 노린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 사이의 갈등―가령 2018년 유엔총회에서의 트럼프의 ‘글로벌리즘’ 비판―도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책이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을 주도하는 엘리트층 모두가 자본주의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바쳐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지시에 의해 추동된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명료한 혼합된 정치구성(‘다수의 지배’)은 방대한 세력들로 구성된다. 국민국가들 및 자본주의적 기업들, 방송과 미디어, 국가와 기업들을 지원하고 종종 이들이 손상시킨 바를 수리하는 NGO들, 종교단체들, 국가에 맞서거나 스스로 국가를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병(私兵)들. 이들은 가장 저급한 의미에서만 ‘민주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반체제적 운동이나 세력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세력은 군주제적·귀족제적 힘들에 저항하고 도전할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제국적 정치구성 전체를 지탱하는 데 복무한다. 푸꼬가 겉으로 보기에는 저항적인 형상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는 지배적 힘을 강화하는지를 인식하는 데 탁월했다. 물론 모든 저항 노력이 헛된 것이며 불가피하게 제국에 의해 포섭되어 대안을 위한 희망이란 것은 없다는 말은 아니다(푸꼬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곧 이 점을 다룰 것이다.

 

  1. 새로운 국제주의들

지구화를 위로부터 보면 왜곡을 낳는다. 지구화는 그 핵심에 있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세력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국제주의가 근대 전체에 걸쳐서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형태들과 과정들의 주된 추동자였다. 모든 근대 혁명은 깊은 의미에서 국제주의적이다. 아리기와 제임슨 같은 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읽기 덕분에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전개가 실제로는 1960년대의 반란, 해방투쟁, 혁명운동의 합류나 축적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권력 구조들을 ‘대응’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분석적 기능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가진다. 제국의 지배를 넘어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필연적으로 더 나아간 국제주의의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런 만큼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출현하는 새로운 국제주의들을 포착하고 양성하려는 노력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를 인식하는 한 방법은 투쟁의 국제적 순환의 전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각 투쟁이 지역에 집중될지라도, 투쟁의 불꽃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면 운동이 전지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2010년 11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러한 순환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나라들에서 일어나서 다음에는 스페인, 그리스, 미국으로, 그 다음에는 터키, 브라질, 홍콩으로 옮겨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폭력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미니즘 투쟁인 NiUnaMenos[영어로는 ‘Not one (woman) less’라고 옮겨지며 여성이 한 명이라도(una, one) 더 희생되지(menos, less) 말아야 한다(nie, not)는 의미이다]는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폴란드의 투쟁과 공명하여 혁신적인 방식으로 남북 아메리카 전역으로 옮겨갔으며 대서양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파업의 새로운 형태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이 형성되고 있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이지만 훨씬 덜 명료한 것으로, 이주(migration)가 국제주의의 주된 힘을 구성한다. 이주는 국민국가들의 국경체제들과 전지구적 체제의 공간적 위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반란이 된다. 2015년 여름, 걸어서 혹은 모든 가능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유럽을 향하고 또 유럽을 가로질렀으며 이제는 지중해를 건너기에 이른 대대적인 행렬이 유럽의 국경체제들을 위협했다. 이와 유사하게 2018년 가을 멕시코를 지나 미국 국경을 향해 움직인 중앙아메리카의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행렬은 미국의 국경체제의 지속적인 위기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디어가 매우 자주 다룬 이 사건들은 남에서 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나이지리아에서 남아프리카로,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중국의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다양하게 펼쳐지는 전지구적 이주의 정점들일 뿐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으로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이례적인 종류의 국제주의적 반란이다. 이주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자신들의 탈주의 정치적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국제주의적 투쟁의 일부로서 이해하지는 더욱 못한다. 실로 그들의 여정은 극히 개인화된 것이다. 마차행렬과 같은 명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도 드물다. 중앙위원회도 없고 강령도 없으며 원칙의 진술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주자들의 탈주선들은 국제주의적 힘을 구성한다.

이주자들은 전쟁이나 박해로부터 도망치는 경우든 단순히 모험을 추구하는 경우든 이동성의 자유를 긍정한다. 이것이 모든 다른 자유들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전지구적 이주가 지속적인 반란으로서 가진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걸음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이주자들의 반란의 힘은 이주자들의 통제에 발휘되는 잔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역반란 전략에 의해 확인된다. 리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미국 국경의 야만적 경찰들까지. 이주자들의 반란은 전지구적 체계를 분절하는 장벽들을 그저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 장벽들에 균열을 내고 그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1. 전지구적 자본과 공통적인 것

앞에서 말한 두 권역은 서로 어긋나 있긴 하지만 서로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일국의 자본이 그 이익을 위해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듯이, 전지구적 자본도 복잡한 전지구적 거버넌스 구조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권역을 구성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개별 자본가 기업들, 종종 서로 갈등하는 국가 자본들, 다양한 형태의 임금∙비임금∙불안정 노동, 항상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였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이다. 이러한 이질성에 가려 전반적 구도를 인식하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출현한 학술적·전투적 비판들 일부를 따라가봄으로써 자본의 발전에서 보이는 일부 핵심 방향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정치경제 비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회로들에서 저항과 자유의 씨앗들을 찾는 것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훈육체제에 맞서는 운동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으로서 기능해온 방식에 먼저 초점을 맞추겠다. 이는 (자본에 의한) 포섭과 포획의 이야기인 동시에 반란의 활력의 지표이다. 자본을 전진시킬 힘이 있는 곳에 자본을 전복할 잠재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자본이 자본에 맞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들을 창출하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원주 21 내용의 일부: 맑스는 반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은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혁명은 과거의 사회적 형태들로의 회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기의 성과―즉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토대로 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맑스는 썼다. Capital, Volume I, trans. Ben Fowkes, London 1976, p. 929.] [이때 수립되는 소유를 맑스는 ‘개인적 소유’(das individuelle Eigentum, individual property)라고 불렀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여러 모습―자연자원, 문화생산물, 생체측정 데이터, 사회적 협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한다.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중심적이 되지만(자본이 축적하는 가치가 점점 더 공통적인 것 안에 있게 되지만), 또한 공통적인 것은 자본으로부터의 사회적 자율의 잠재력, 반란의 잠재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 핵심 지형들―① 추출의 측면 ② 삶정치적 측면 ③ 생태계―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종류의 분석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대한 최근의 광범한 분석들은 넓은 의미의 추출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가치가 땅으로부터 직접 끌어내어지는 전통적인 추출주의적 관행의 확대만이 아니라 공적 부와 기반시설의 사유화에 의해 획득되는 축적방식들 및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전유되고 축적되는 새로운 형태의 추출이 이루어진다.

데이터 마이닝의 비유가 전통적인 추출작업들이 사회적 도메인으로 옮겨온 방식을 보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가령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을 수단으로 한 축적은 사용자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프로세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지식 및 사회적 관계들을 자본화하는 알고리즘적 수단을 창출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들은 ‘공유’를 (공동의 사용을 위해 재화를 제공하는 데서) 가치를 추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켰다. 금융 또한 그 추출방식을 통해 기능한다. 물론 금융도구들의 일부는 투기의 수단이며 ‘허구적’ 가치들만을 창출한다. 그러나 금융과 채무관계는 그 주된 측면에서는 금융자본의 직접적 관리 외부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들을 추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 구도에서의 이러한 사태전개를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한다. 산업자본이 대체로 생산과정을 관리하고 협력의 형태들을 운영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반면에 금융은 자신의 관리 외부에 있는 생산적 협력의 형태들을 통해 생산된 부에서 자산소득을 추출한다.

추출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하비가 말한 ‘강탈에 의한 축적’에 크게 상응한다. 그 과정은 주로 커먼즈의 새로운 종획을 통해, 그리고 땅과 공적 기반시설에 들어있는 부의 추출을 통해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추출형태는 그 직접적 관리영역 외부에서 생산되는 가치들을 끌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출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공통적인 것―생태적, 사회적, 삶정치적 형태―을 포식한다. 이러한 포식과정은 공통적인 것 안에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둘째 종류의 분석은 삶정치적 관계들―인지적 생산형태들, 정동과 돌봄의 생성―에서 공통적인 것이 하는 역할을 부각시킨다. ㉠ 인지자본주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지식, 지성, 과학의 역할을 분석하며 축적된 지식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게 된 것을 강조한다. ㉡ 다른 분석들은 사용자들의 주목이 생성하는 가치에 의존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들과 플랫폼들을 통한 가치생산에 초점을 둔다. ㉢ 지성 및 주목과 아울러 자본주의에서 정동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동의 생산과 관련된 직업들―간호사들, 방문돌봄 서비스 노동자들, 관리-지원 직원들, 임금을 받는 가사노동자들, 교사들, 음식서빙 노동자들―은 보수가 낮고 극히 불안정하며 따라서 압도적으로 여성들로 채워진다. 정동의 생산은 또한 젠더 분업으로 정의되고 있는 가사노동을 포함하는 비보수 영역에서 중심적이다.

이 분석들에서 우리는 삶정치적 통제의 새로운 형태들과 인간 실존의 더 많은 영역들의 식민화 및 상품화와 함께, 착취와 지배의 새로운 심화된 형태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력들이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 종획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해 노동하거나 종속되어 있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상태에 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는 여전히 착취·축적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성격을 인식한다. 지성, 지식, 주목, 정동과 돌봄은 모두, 집단적 행동과 상호의존에 의해 규정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능력들이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거대한 삶정치적 저장고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

셋째 종류의 분석은 자본의 발전이 지구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들과 관련된다. 특히 기후변화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화석연료의 추출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저자들이 인간이 기후변화를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에 진입했다고 말하는데, 이 인류세 담론은 인간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해당하는 자본가들이 기후변화의 책임자들임을 가린다. 지구의 장기적 건강을 보존하는 모든 기획에 필요한 선결조건은 자본주의의 지배의 우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빈자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받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기후변화에 굴복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잃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구축할 대안들에도 핵심적이다. 토착민들의 투쟁은 인간이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 모든 분석들에서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의 힘이 드러난다. 자본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을 포식하는 포획장치가 되지만, 공통적인 것의 영역들이 기동되어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는다면 자율의 잠재력 즉 자본주의의의 지배 너머의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1. 계급다중계급

다양체(성)(multiplicity)이 점점 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전적인 지평이 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운동들―코차밤바에서 스탠딩락(Standing Rock)까지, 퍼거슨(Ferguson)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까지, 카이로에서 마드리드까지―은 다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투쟁들에 특히 미디어가 종종 지도자부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운동들이 전통적인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하는 것은 맞지만, 지도자부재라고 하기보다는 다중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러한 이해가 투쟁들의 미덕과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을 공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운동들은 중요한 성과를 얻었고 종종 더 나은 대안적 세상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단명했고 때로 쟁취한 것이 잔혹하게 역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 더 필요했고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사고가 요구되었다. 우리는 그 다양체성을 버리고 (선거로 뽑는 정당이든 ‘국민’이든) 통일된 정치적 주체를 구축할 필요를 설파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전통적인 조직형태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지속적이거나 효율적인 운동을 낳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일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면서 실질적인 사회변형을 낳을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의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탐색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역사적·이론적 이행 즉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과 다중에서 계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얼핏 보기에는 왕복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정치적 진전을 표시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출발점의 계급과 도착점의 계급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중을 통과하는 과정이 계급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제시하는 조직화의 일반적 공식은 <계급―다중―계급′>(C―M―C′, class―multitude―class prime)이다. 맑스의 공식[『자본론』1권 4장에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M-C-M′)을 말한다. 물론 자본의 공식에서는 M이 Money(화폐)이고 C는 Commodity(상품)이다]에서처럼 과정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형이 중요하다. 계급은 다중적 계급, 교차적 계급이어야 한다.

계급에서 다중으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이 이제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일반적 인정을 나타낸다. 이 이행은 전통적인 당들과 노동조합적 기관들이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가진 힘이 소진된 것에 상응한다. 노동계급이 경험적 형성체로서 없었던 적은 없지만, 이제 그 내적 구성이 변했기에 계급구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힘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인구들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획일화된 대의를 거부한다. 노동의 여러 부문들 사이―가령 임금을 받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은 노동 사이, 안정 노동과 불안정 노동 사이, 합법적 노동과 비합법적 노동 사이―의 차이와 젠더, 인종, 민족 등의 차이들이 모두 표현을 요구한다. 이런 시점에서의 계급구성 연구는 교차적 분석(intersectional analysis) 안에 함입되어야 한다. 이는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의 계급이 아니라 다중,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이다.

이와 함께,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의 투쟁 및 반자본주의 투쟁 일반이 다른 지배의 축에 대한 투쟁들―페미니즘 투쟁, 반인종주의 투쟁, 탈식민 투쟁, 퀴어 투쟁 등―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 개념은 (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에서 출현한) 교차적 분석 및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다양체성을 정치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인종, 계급, 성, 젠더, 국민 위계들이 서로 맞물려있는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적인 단일축 분석틀들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첫째로 의미하는 것은, 지배의 그 어떤 구조도 다른 것보다 우선적이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구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성들도 다양체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정체성의 거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성을 다양체성으로 조바꿈을 하여 (즉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할 필요를 말한다.[원주32: 정치적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교차성이 핵심 개념이 되면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탕을 마련한 글들로 Kimberle Crenshaw, “Mapping the Margins”, Stanford Law Review, vol. 43, no. 6, 1991, and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no. 140, 1989 참조.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 대해서는 Jennifer Nash의 통찰력 있는 책인 Black Feminism Reimagined: After Intersectionality, Durham nc 2019 참조.] 교차적 다중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이 포함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反)복종 기획’(‘an antisubordination project’)이다. 즉 여러 전선들에서 동시에 전투 및 혁명을 전개하는 전략이다.

이 지점에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을 불안정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 고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 의미는 임금 및 노동관계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런 의미의 불안정성은 포디즘 경제의 규제적 이상(regulative ideal)이었던 안정된 고용계약―이는 제한된 수의 선진국 산업노동자들(주로 남성)에게만 현실로서 존재했던 규제적 이상이다―과 대조된다. 보장된 노동계약과 법은 점점 부식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적 단기노동계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노동배치는 물론 항상 인종화, 젠더화되어 있지만, 노동력의 모든 부문들이 이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의 노동 불안정화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이다.

둘째 의미의 불안정성은 첫째에 대한 유용한 보완을 제공하며 훨씬 더 광범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과 도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주디스 버틀러: 불안정성은 인구의 일정 부분이 사회적·경제적 지원네트워크들의 부실로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을 받으며 피해, 폭력, 죽음에 더 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정치적으로 야기된 상태를 가리킨다. 노동 불안정성은 분명 전체의 일부이지만, 불안정한 삶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법·경제·통치상의 변화들이 이미 종속된 인구들의 광범한 부분―여성들, 트랜스젠더들, 동성애자들, 유색인들, 이주자들, 장애자들 등―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목표로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언어를 말하는 불안정성이 있고 교차적 비전을 증진하는 또 하나의 불안정성이 있다. 이것을 합치면 다중을 이론화하는 좋은 토대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계급에서 다중, 혹은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이동을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미 지난 20년 동안 달성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쇠퇴와 상실로 간주한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획득된 것 또한 인식해야 한다. 상호구성하는 지배구조들의 다양체는 사회현실을 파악하는 데 더 나은 렌즈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에 대한 연구를 인종, 젠더, 성 위계의 제도적 구조들에 대한 동등한 분석으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실천의 수준에서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계급정치 기획이라면 반드시 페미니즘적·반인종적·퀴어적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을 다시 사고하기

다양체를 이론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하려면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 제기한 물음―다양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답하는 데 조직이 필요하다는 대답만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중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더 온전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바의 계급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서 계급으로 나아간다면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노동계급하고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양체인 계급, 다중의 성과를 이어나가는 정치적 형성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선 계급개념을 노동계급과의 관련을 넘어 인종, 젠더를 포괄하여 사용하는 이론가들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음벰베(Achille Mbembe) 같은 이는 유럽으로 이주하는 아프리카인들에 가해지는 현재의 통제방식들을 ‘인종적 계급’(racial clas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그 국경들을 군사화하기로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멀리 가져다 놓았다. 오늘날 유럽의 국경들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개별 아프리카인들, 인종적 계급으로서의 모든 아프리카인들이다. 이는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의 신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인간 신체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그리는, 학대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계적 신체(border-body)이다.

새로운 이동성의 체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낙인찍힌 인종적 계급’으로 변형된다고 음벰베는 주장한다. 그에게 계급개념은 사회경제적 범주가 아니거나 그런 범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에만 기반을 두지 않는 집단적 인종적 차이를 사고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이 인종적 계급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구조들과 제도들에서 탄생한다.

음벰베와 유사한 것이 델피(Christine Delphy) 같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성 계급’(sex class)이다. ‘성 계급’이라는 어구의 사용에 문제를 제기한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델피는, 계급개념이 사회적 주체들이 지배관계들에 의해 창출되는 방식을 다른 어느 것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런 관점에서 델피는 이렇게 쓴다. “집단들은 ··· 관계 속에 넣어지기 전에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가 바로 그들을 그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델피에게는 지배관계가 사회적 주체들 이전에 존재하며 이 주체들을 구성한다. 또한 델피의 어법에서 계급은 전적으로 경제적 위치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그 어떤 지배의 축에도 배치될 수 있는 분석의 절차와 관련된다.

음벰베와 델피를 거론한 것은 ① 첫째, 계급개념이 자본만이 아니라 모든 지배관계에 의해 창출된 종속의 효과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② 둘째 계급개념은 서술적으로만이 아니라 종속된 사람들을 계급으로서 투쟁으로 불러내는 정치적 요청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점인데), 병렬적으로 지배받고 투쟁하는 다수의 계급들을 인식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다중적 계급’(multitudinous class)’ 혹은 ‘교차적 계급’(intersectional class)은 더 나아간 단계를 필요로 한다. 즉 그 다양한 차이나는 주체성들의 투쟁에서의 내적 마디결합(internal articulation)이 필요하다. 교차적 분석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마디결합을 연합과 연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는 종종 추가의 논리에 기반을 둔 전략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교차적 분석이 정체성과 관련된 추가적 사고방식[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령 동일한 계급의식을 가진 집단으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할 때조차도 여전히 추가의 논리가 활동가들의 상상계를 지배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접근법의 한 약점은 유대의 관계가 외적이라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내적 유대이다.

내적 유대의 세 이론적 사례들.

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905년 봉기의 실패 후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동지들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표현했을 때 로자는 그 유대가 단지 외적인 관계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독일 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러시아의 사건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건이며 자신들의 투쟁에 내적인 사건들이라는 점,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② 아이리스 영(Iris Young)
로자처럼 영도 페미니즘 투쟁과 연대하지만 그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과는 분리된 것으로 보는 남성동지들을 비판했으며 그런 유대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남성사회주의자들에게 가부장제에 맞선 페미니즘 투쟁을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으로서 인식하기를 권고한다. 자본을 물리치는 것은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③ 키앙가-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
그녀는 계급지배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미국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들에게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녀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백인의 과제로 간주되고 반인종주의적 투쟁은 유색인들의 과제로 간주되는 분리현상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 노동계급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따라서 인종, 계급, 젠더 이슈들을 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사실 미국의 노동계급은 여성이고 이주자이며 흑인이고 백인이며 라틴계이고 기타 등등이다. 이주자 이슈, 젠더 이슈 그리고 반인종주의는 곧 노동계급 이슈들이다.” 이는 우군의 참여를 받아들이거나 연대를 표하는 문제가 아니다. 백인우월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의제기가 이 시점에서 가능하다: 모두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같이 투쟁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맞지만, 불안정성 및 지배의 양태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의 투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체라는 생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는 젠더나 인종 지배와 같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다른 것 아래 포섭되지 않는다. 동일성으로의 환원 대신에 투쟁하는 주체성들 사이의 마디결합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연합보다는 계급―다중적 계급(a multitudinous class)―이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다양체로 구성되고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에 기반을 둘 뿐만 아니라 투쟁들 사이의 내적 유대와 교차에 의해 마디결합되고 각자가 다른 것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그러한 계급 개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형된 개념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과정 전체는 <계급―다중―계급>이 아니라 <계급―다중―계급′, C―M―C’>이다. 이것이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어도 초기 단계의 이론적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자본,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및 기타 지배에 동등하게 맞선 투쟁을 지향하는 내적으로 마디결합된 다양체로서의 계급′이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응답이긴 하지만, 예의 정치적 기획을 사고하고 추구하기 위한 틀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대안지구화를 찬양하며

1994년 멕시코의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반란, 1999년 11월의 시애틀에서의 WTO회의 봉쇄투쟁,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2001년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2001년 제노아에서의 G8 정상회담 반대투쟁. 이렇게 이어져 온 대안지구화 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은 여러 패배를 겪었다. 그 유목적 성격과 정상회담을 쫓아다니는 실천은 여러 경우 지역에서의 지속적 조직화에의 참여를 희석시켰다. 이 투쟁들은 종종 비판을 받았는데, 운동 내의 활동가들 자신들에 의해서 가장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교차적 특징들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직적 취약성 때문에 투쟁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또한 9∙11 때문에 설치된 혹독한 보안체제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그 초점을 대안지구화에서 반전운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투쟁들의 이례적 미덕은 그 이론적 실천이다. 이 투쟁들은 전지구적인 비판적 비전을 구축했으며 전지구적 경제기구들이라는 상대적으로 불명료한 영역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명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투쟁들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출현하는 전지구적 질서의 성격에 대한 방대한 집단적 공동연구로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활동가들은 현재의 지배 구조들이 바로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각 투쟁은 새로이 출현하는 전지구적 권력구조 네트워크의 마디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했다. WTO, World Bank, IMF, G8, 무역협정들 등등. 이렇듯 대안지구화 운동의 순환은 대대적인 교육프로젝트였다.

국민국가 주권의 이데올로그들이 나팔을 불어댐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세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덜 명료하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배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를 연구할 지성을 가진 투쟁의 국제적 순환을 필요로 한다. 때로 사회운동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작업이 도서관에서 쓴 이론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의 비가시성을 역전시키는 것이 제국의 구조들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데로 향하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