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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연대와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

 



코비드19 팬데믹은 인간의 조건의 가장 근본적 특징을 상기시킨다. 국경을 가로질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를 말이다. 맹한 민족주의와 경쟁논리가 서둘러 막으려 하는 이 상기는 진정한 전지구적 정치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커먼즈”라 부를 정치기구를 말이다.

팬데믹의 교훈은 일어나리라 예견되는 지구 온난화와 일련의 재앙을 비롯한 인류가 대면할 다른 주요 문제들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전지구적 바이러스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우리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결코 우리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대면하도록 무장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을 정치적으로 재고하는 일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다.

바이러스로 입증된 인간적 연대

바이러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연대의 증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설명을 제공한다. 경제적 교류,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도시화, 국경을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함께 사회들의 점증하는 상호침투가 전염병의 확산을 상당히 가속시켰다. 전염병의 확산은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재정이 부족한 보건 기구들만을 앞질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앞질렀다.

전염현상은 19세기 말 사회학자와 철학자가 ‘연대’라 부른 것을 가시화한다. 뒤르켐은 1893년 학위논문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개인들의 상호엮임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자, 사회들을 특징짓는 연대유형에 따라 사회들을 구분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학이었다고 말해지는 ‘연대주의’론이 연대를 정부의 사회정책을 고무해야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연대주의 사조의 주요 창시자인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1851~1955)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서 민중은 마치 모든 존재, 모든 물체가 전(全)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놓여 있듯,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서로 놓여 있다. 연대의 법칙(the law of solidarity)은 보편적이다.” 이처럼 연대는 삶·건강·일·사유·느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다윈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맞서 프랑스 연대주의자들은 인류의 협동에 대한 다윈의 저술에 특히 의존하여 연대의 법칙을 응집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공중보건론자들은 연대 개념을 차용하여 그것을 공중보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내무부의 공공지원·위생국장 앙리 모노(Henri Monod, 1843-1911)는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부유한 도시와 가난한 도시 사이의 재정적 연대를 장려하는 연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중보건은 우리의 상호의존, 인간의 연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일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각자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인간 존재들의 건강·삶에 예기치 않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존재들 혹은 사라진 지 오래된 존재들이 우리 건강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에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본질적 조건들에 매 순간 영향을 미칩니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시민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보건연대는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공중보건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모노의 명쾌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언젠가 유럽에서 희생자들을 낳을, 위생에 반하는 어떤 잘못이 이 글을 쓸 때 갠지스 강둑이나 인도의 항구 중 하나에서 저질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때 또 다른 활동이, 이번에는 현재의 재앙으로부터 수천, 수백만을 구할, 과학으로 분류될 행동이 어떤 멀리 떨어진 해외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 인류가 위생의 정복으로 이익을 볼 수 있듯이 위생 관련 범죄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보건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보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전염이 입증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바로 전염병 전문가 찰스 니콜(Charles Nicolle, 1866~1936)에게서 본다. 니콜은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염병에 관한 지식은 인간들이 연대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똑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인 것이며, 감염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동료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해 말하면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이 같이 하는 노력을 통해 단결한다면 얼마나 생산적 결과가 생길까요!”

과학계에서 이러한 인식이 커지는 것과 함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제회의가 페스트·콜레라―콜레라는 1830년에서 1847년 사이 대혼란을 낳았다―와의 싸움 중 1851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19세기 말부터 쭉 모노는 이러한 ‘고전적’ 전염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다루는 국제기구를 옹호했다. 바로 그러한 국제기구로서 <국제공공위생사무소>(the Office International d’ Hygiène Publique)가 1907년 로마에 설립됐다.

공중보건의 국제화는 1921년 <국제연맹보건위원회>(the Health Committee of 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운영이 시작된 1948년 이전인) 1946년 결성이 결정된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다.

국민국가의 봉쇄

연대 개념의 발전 및 공중보건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대응은 여러 면에서 재앙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긴축과 수익성이 인도한 수십 년간의 보건정책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무장해제됐는지가 드러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보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국민국가 논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국가는 전지구적 보건위기가 제기한 문제에 각각이 마치 섬나라인 양 대응했다. 각 국가가 다른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자기 식대로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금세 목격한 것은 국경 봉쇄, 준수해야 하는 엄격히 국가적으로 정의된 각각의 전략들, (때로는 타국에 해가 되는) 자원동원과 자원징발,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취해진 조치들에 대한 이따금씩 일어나는 폄하나 비난이었다.

보건전선에서 ‘다자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보여준 이 일반적인 정치적 불협화음과 함께 우리는 국가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최대의 과학적·행정적 혼란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각 국의 의약담당 부처들(the national drug agencies)은 방법론의 조정 없이 각 나라, 각 연구실, 각 산업이 다른 나라, 다른 연구실, 다른 산업을 앞서려 하면서 각자 그들만의 게임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연대운동의 위대한 교훈이 어떻게 그리 빨리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오래 완전히 부인할 정도로 우리 정부들이 빠져있던 경련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 중 두 가지 즉 국가적 수준의 요인 하나와 전지구적 수준의 요인 하나에 집중하기로 하자.

시민적 책임, 자기이익 그리고 국가강제

전염병 학자들에 따르면, 코비드19 같은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모든 인간 간 전염사슬을 끊는 것, 즉 각 개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들이 그저 자신들만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호적 관계에서 각 개인들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상호적 보호를 의미한다.

‘공중보건’(public health)을 말할 때 우리가 너무도 자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표현에서 ‘공’(public)이 ‘국가’(the state)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의 전(全) 시민들이 구성하는 전체적 집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부들은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대항하는 싸움에서의 주요자산이 시민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대체로 포착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공리주의적 독단, 신자유주의적 규범, 개인주의적 요구로 심히 오도돼온 정부담론 사회적 연대가 전염병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느낌과 인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 정부들에게는 가장 부적실한 단어들만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명백한 자기이익에 대해 말하는, 혹은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 각자가 지는 개별적 책임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 말이다. 정부들은 사회가 고립된 원자들의 뒤섞임인듯, 각인들이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것인듯 행동했다. 거리를 둬야하고,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씻어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정부들이 집단적 운명에서의 우리 각자의 공동책임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장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정부들이 경쟁·대결·이해대립 말고는 개인들 사이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국가들은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 접근법으로 대응했고 세계보건기구는 국가들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력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네바에 있는 <국제개발대학원>의 <글로벌보건센터>(the Global Health Centre at the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and Development Studies) 공동센터장인 전염병 전문가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국가주의적 주권의 원리가 세계적 문제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험을 완벽하게 예견하지 못했다고 세계보건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와 연계되어 있고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 특히 더 책임을 지는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the Global Preparedness Monitoring Board)는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몇 달 전 세계에 경고했다. “만약 ‘지나간 것이 서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5천만에서 8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경제의 거의 5%를 일소할, 빠르게 움직이며 대단히 치명적인 호흡기 병원균 팬데믹이라는 너무도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이런 규모의 전지구적 팬데믹은 광범위한 대혼란과 불안정, 불안전을 초래할 재앙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2019년 9월 배포했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를 위하여

이 위기의 결과가 ‘국민국가의 귀환’, ‘국가주권의 부활’이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오해들 중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건을 전지구적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통적인 것은 집단적 결정이 “공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만들기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승인에 입각하여, 공동체가 자원이나 써비스 혹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백신은, 건강에 대한 전 인류의 기본권과 백신 사이의 정치적으로 수립된 연관에 입각해 있는 ‘공통재’다.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 커먼즈를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 백신이 공통재라는 결정이 채택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창출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이외에 전지구적 보건을 위한 다른 유형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는 국가기금과 민간 기금에 이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는 협력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심의와 결정이 구속력 있는 세계적 기준을 구성할 세계보건기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간’ 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cal) 기관은 모든 국가·지방·지역의 비영리보건기관을 연합하고 모든 나라의 연구원을 동원할 것이다. 이 기관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에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정보·통지·협력의 임무를 맡지만, 세계보건기구와 달리 보건에 대한 인구의 기본권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을 일국의 수준에서 그리고 국지적 수준에서 동원할 권위를 가질 것이다.

지구화의 이러한 결과가 제기하는 물음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겨 놓을 위험과 대면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새로운 제도를 미래 인류가 수립할 수 있을까이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가 그 일환이다.

 

 




정치적 시험으로서의 팬데믹: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장하며

 



코비드19 팬데믹은 전례 없는 전지구적 건강·사회·경제의 위기이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에는 거의 없다. 이 비극은 모든 인류를 위한 시험/시련(épreuve)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어 ‘épreuve’의 두 의미 ―시련, 즉 거대하고 고통스런 일이자 시험·평가·판단이라는 두 의미― 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의 이중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은 이제 개인적 상호의존의 수준에 놓여 있는, 즉 바로 사회적 삶의 토대에 놓여 있는 전지구적 문제에 대처할 우리 정치경제씨스템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듯한 현재 상황은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전지구적 경제정치구조가 기후변화위기에 대처하고자 급속히 발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말이다.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국가주의적 대응?

첫 번째 관측. 세계 전역에서 이 전지구적 전염병에 다소 보완적인 두 방법으로 대응하고자 국민국가의 주권적 힘에 모두 기꺼이 의존하려한다.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에서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포했든 아니든) 대체로 ‘비상사태’를 내세움으로써 개인적 접촉을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실행하는 데 의존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바이러스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시민들을 보호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규율과 국가보호주의가 펜데믹과의 싸움에 사용되는 두 주요 무기이다. 여기서 국가주권의 두 얼굴 즉 내적 지배와 외적 독립을 보게 된다.

두 번째 관측. 모든 규모의 기업들이 이 시험/시련에 견디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는데, 이는 파산을 면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가능한 많이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재정지원과 보장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국가는 경제를 살리고자 한없이 지출하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과 몇 주 전에 공공부채 제한에 대한 그리고 예산제약에 대한 강박적 우려로 인해 병원직원, 병원침대 혹은 응급써비스를 늘리라는 모든 요청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이후 국가는 적어도 민간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씨스템을 강화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개입의 미덕을 재발견했다.

지금까지의 가장 야심찬 부양책 중 하나가 독일에 의해 시행됐다. 그 부양책은 독일연방공화국 시작 이래 규범이었던 질서자유주의(([옮긴이]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는 자유시장이 이론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한 국가개입을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독일식 버전이다.)) 도그마와 갑작스레 단절했다.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혼동하면 안 되는 이 갑작스런 전환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국가주권의 특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연대의 끈에 영향을 미친 팬데믹에 대한 내적·외적으로 모두 효과적인 대응일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경종을 울릴만한 일이다. 국가형태에 내장되어 있는 외국인 혐오는 바이러스가 모든 인류에 가할 치명적 위험에 대한 인식이 커져감에 따라서 특히 분명해지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확산에 서로 전혀 연계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특히 중앙유럽국가들이 ‘해외바이러스’로부터 인구를 지키고자 국가영토의 행정장벽을 매우 신속히 쳤으며, 유럽에서 국경을 봉쇄한 최초의 나라들은 가장 외국인 혐오적이기도 했다. 빅토르 오르반(([옮긴이]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그리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헝가리 총리로 재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이 불을 지폈다. “우리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 전선은 이주이고 다른 한 전선은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양자 모두 이동을 통해 퍼진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과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분위기 즉 ―유럽 및 그 밖의 다른 곳의 극우가 기뻐할 법하게도― 모든 국가가 그들 자신의 것을 돌봐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들과의 연대의 결여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방치한 것 ―이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 의료장비와 보호마스크를 보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기심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은 국가들 간의 전면적 경쟁에 토대를 둔 유럽에 조종을 울렸다.

국가주의 주권과 전략적 선택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bhanom Ghebreyesus)는 우리가 팬데믹을 상대하고 있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와 국가들 상호관계에서의 놀라운 수준의 무대책에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 무대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팬데믹 전문가인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 세계보건센터 공동소장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세계적 문제에 있어 국가주권 원리가 지속함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이는 놀랍지 않습니다. 국제협력은 항상 취약했지만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지구화에서 빠지기를 열망하는 정치치도자의 선출로 지난 5년 여 동안은 더욱 취약했습니다. … 세계보건기구가 제공하는 포괄적 관점이 부재한 채 우리는 재앙의 위험을 무릅써야합니다. ··· 따라서 전 세계 정치·보건 지도자들에게 권고하는 점은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접근과 연대가 시민들의 책임 있는 행동을 북돋는 본질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수에리 문의 언급이 적절하긴 해도 그녀는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수십 년간 재정적으로 약화되어왔고 현재는 민간 기부자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금의 80%가 민간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약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는 1월 초부터 수집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발본적 조기 통제 권고가 궁극적으로 옳았다는 점 때문에도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전지구적 협력을 위한 최초의 틀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에서 효과적이었던 체계적 검사, 접촉 추적을 포기하는 선택은 바이러스가 잠재적으로 모든 국가에 퍼지는 데 기여한 중대한 실수였다.

검사·추적의 이 걱정되는 지연은 궁극적으로는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이 이전에 그랬듯이 이탈리아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절대적 봉쇄 전략을 재빨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집단면역’이라는 숙명주의적이자 은밀한 다윈주의적 전략으로 대응이 너무 지체됐다.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의 영국은 초기 접근에서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두말할 필요가 없는 미국 이외에도 프랑스, 독일 같은 다른 나라들은 제한 조치를 얼버무렸고 지체했다. 이 나라들은 ‘완화’ 전략, 즉 ‘감염곡선 완만화’에 의한 전염병 지연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우한과 후베이성에서 행해진 대로 인구에 대한 체계적 검진과 일반적 격리를 사용하여 바이러스를 초기부터 통제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사실상 포기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예측에 따르면 집단면역 전략은 전 인구의 50-80%의 감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가장 취약하다”고 추정되는 수십만의 심지어 수백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는 매우 명확했다. 국가들은 바이러스 양성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 검사와 접촉 추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전염병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

왜 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를 그렇게 신뢰하지 못했으며, 왜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연계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세계보건기구에 부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전염병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나라를 실제로 마비시켰다. 경제적 생산과 무역의 동결이 그런 규모로 이뤄진 적은 없었으며 그 결과는 중국에서의 매우 심각한 경제·금융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독일·프랑스·미국이 그들의 경제를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상황이 ‘날마다’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경제와 공중보건의 긴급사항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저했다. 더 심각한 장기예측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말이다. 3월 12일에서 15일에 정부를 뒤흔들고 정부로 하여금 결국 총체적 격리전략을 택하도록 강제한 것은 그 이상의 주저가 수백만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임페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이후 너무도 명백해진 것은 행동경제학과 이른바 ‘넛지 이론’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파괴적 영향인데, 넛지 이론은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데 강제나 구속보다는 인센티브와 자극에 의존한다.(([옮긴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심리적·인지적·정서적·문화적·사회적 요인 등이 개인과 조직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이다. 넛지(Nudge)는 간접적 제안과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개인 또는 그룹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경제학의 개념이다.))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은 영국 정부에 조언하는 ‘넛지 유닛’ 혹은 ‘행동통찰팀’이 다음과 같이 국가에 그들의 이론을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는 점이다. 즉 너무 빨리 엄한 조치에 의해 제약을 받은 개인들이 전염병이 최고도일 때 즉 규율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때 규율에 지쳐 해이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2010년 이후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경제이론 ―『넛지』(Nudge, 2009)에 간추려져있다― 은 ‘효율적 국가 거버넌스’를 창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접근법은 강제 대신 ‘넛지’를 사용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고무하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에게 온화하고 간접적인, 편안하고 선택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말이다.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이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의 적용은 이중적이었다. (1) 강압적 조치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 (2) ‘전염예방행동―거리두기, 손 씻기, 옷소매에 기침하기, 열이 나면 자가 격리하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기―에 대한 선호가 그것이다.‘

말랑한 자발적 조치에 의존하는 이 도박은 위험한 것이었다. 전염병 상황에서 이 접근법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혹은 경험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이제 이 접근법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프랑스 관료들이 3월 14일까지 바로 이 접근법을 채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제한조치는 시간이 지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3월 6일 밝혔듯 마크롱은 엄격한 봉쇄조치의 채택을 처음에 거부했다. 그는 바로 그날 그의 아내와 함께 갔던 극장을 나서며 “삶은 계속된다. 취약인구를 제외하면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바꿀 이유는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전적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저 말 아래 숨어 있는 전술을 우리는 분명 감지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에 기반하여 경제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으로 알았던 엄격한 조치를 정부가 미루는 전술을 말이다. 

국가주권 혹은 공공써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의 궁극적 실패가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진로를 발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이러한 변화를 처음 엿볼 수 있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국민통합, 우리의 신성한 연합, 그리고 프랑스 국민의 ‘인격적 강인함’에 호소했다. 마크롱의 그 다음 3월 16일 연설은 호전적 포즈와 미사여구에 있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작금이 총동원의, ‘애국적 자기절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권국가의 형상이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 형태로 현시된다. “저기 있는, 안 보이는, 찾기 힘든, 그리고 전진하는” 적을 찌르는 칼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훨씬 더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마크롱은 복지국가와 공중보건의 확고한 옹호자로 갑작스레 거의 기적과도 같이 변모했다. 심지어 마크롱은 모든 것이 시장논리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을 단언했다! 몇몇은 좌파였던 많은 해설자들과 정치인들은 우리 공공써비스의 대체불가능한 중요성을 마크롱이 인정한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목격한 것은 마크롱이 2월 27일 삐띠살프뜨리레병원(the Piti Salp tri re Hospital)을 방문했을 때 한 의사와 벌인 공공연한 대립에 대한 뒤늦은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신경학 교수인 그 의사는 마크롱이 공립병원에 ‘투자충격’(([옮긴이] 여기서 투자충격(investment shock)은 긍정적 투자충격 즉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투자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한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크롱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의사의 요구에 동의했다. 물론 마크롱의 뒤따른 선언들은 완전히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 즉각 인지됐으며 마크롱 정부가 수년 간 체계적으로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코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마크롱은 “우리의 음식을, 보호를, 또는 생활환경을 돌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타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는 통제를 회복해야 합니다”고 선언했다.

국가주권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다수에게 특히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네오파시스트들에게 환영받았다. 따라서 공공써비스의 방어는 주권국가의 특권과 완벽히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건을 시장논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과거 프랑스가 유럽연합에 했던 많은 양보를 이제 되돌리는 과정에 있는 주권행위이다. 그러나 공공써비스 개념이 국가주권 개념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게 명백할까? 전자가 후자에 의존하는 것일까? 공공써비스가 국가주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국가주권 지지자들이 전개한 핵심 논의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신중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국가주권의 본성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어원적으로 주권은 (라틴어 superanus에서 유래한)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하는데, 무엇에 대한 우월성일까? 간단히 말해 국가권력을 제한한다고 위협하는 모든 법들이나 의무들에 대한 우월성, 다른 국가들과 자국 시민들 모두에 대한 우월성이다. 주권국가는 모든 책무나 의무보다 우위에 있으며 책무·의무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축소 혹은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형상인 국가는 특수한 통치기능의 일상적 행사 위에서 국가의 연속성을 체현한다고 상정되는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국가의 우월성은 대표자에 가해지는 법률이나 의무에 대한 대표자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주권주의자들에 의해 원칙의 지위로 고양된 우월성 개념이다. 허나 이 원칙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적용된다. 본질적인 것은 국가주권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신념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국가의 대표자들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국가의 대표자들이 유럽연합에 잇따라 인정한 모든 양보는 주권행위였다. 바로 유럽연합의 수립이 애초부터 국가주권 원리의 실행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사하게,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국가가 인권수호에 관한 국제적 의무를 지속적으로 회피해왔다는 사실 또한 주권논리의 일부이다. 인권수호자선언(the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 1998년)은 서명국에 인권수호자를 위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야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서명국의 법률과 관행 특히, 이탈리아와 공유하는, 국경에 관한 프랑스의 법률과 관행은 그 국제적 의무를 침해한다.

기후 변화의 책무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이 책무를 국가들은 언제나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준하여 기꺼이 무시한다. 그리고 국내 공법(公法)에 관해서도 국가주권은 가장 강력하다. 프랑스 사례를 계속 들어보면, 가이아나 원주민의 권리가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공화국’ ―이는 국가주권의 신성불가침 원리를 다시금 말해주는 표현이다― 의 원리라는 이름하에 일상적으로 거부된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으로 시민들에 의한 국가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국가의 대표자들이 면하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논점은 소위 ‘공공’써비스의 공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에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여기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공적’이라는 개념이 ‘국가’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이 인식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publicum’(푸블리쿰)이라는 용어는 그저 국가행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전체 공동체를 가리킨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원하는 대로 써비스를 나눠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국가써비스가 아닐뿐더러 국가의 확장인 것만도 아니다. 공공써비스는 “공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공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써비스는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 공공써비스는 국가와 그 통치자가 피통치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피통치자에 대해서 관대하게 확장한 호의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수년간의 자유주의적 논쟁이 ‘복지국가’라는 문구에 부과한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써비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인 레온 뒤기트(Léon Duguit)는 20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제기했다. ‘공공써비스’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피통치자와의 관계에 있어 권력자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뒤기트에게 공공써비스는 국가권력의 현현이 아니라 통치권력의 제한이다. 공공써비스는 통치자가 피통치자의 하인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부과되는 이러한 의무가 뒤기트가 ‘공적 책무’라 부르는 것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이 공공써비스가 주권의 원리가 아닌 사회적 연대의 원리, 모두에게 부과되는 원리인 이유다. 주권의 원리가 공적 책무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는 한에서 말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가주권이라는 허구에 의해 주로 억압되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써비스를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여전히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이 강하게 연결돼 있다고 시민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시민의 권리는 공공써비스를 제공해야하는 국가의 대표자들의 의무 혹은 책무의 분명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위기에 영향 받는 여러 유럽 국가 시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일상적 싸움에서 공공써비스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수많은 도시의 시민들은 중앙집권적 통합국가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태도와 무관하게 그들의 발코니에서 보건노동자들에게 갈채를 보내왔다.

따라서 여기서 두 관계를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 공공써비스와 특히 의료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권위나 공적 권력에 대한 집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본질적 기능을 하는 써비스에 대한 애착을 시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국가와의 근본적 동일시를 드러내는 것과는 무관한 이 애착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감각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우리의 ‘팬데믹 동료시민’이 견디는 시험/시련에 민감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이탈리아인이든 스페인인이든 유럽 국경 너머에 살든 말이다.

전지구적 커먼즈의 긴급성

우리는 위기 이후 ‘우리의 발전모델’을 문제 삼는 최초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마크롱의 약속에 극히 회의적이며, 또한 현재 시행 중인 과감한 경제조치들이 2008년 경제위기 때 시행된 조치들과 결국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볼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치된 노력을 볼 것이다. 즉, 점점 더 커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팬데믹이 없었더라면 중단 되지 않았을 지구의 파괴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말이다. 그리고 “경제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경기부양책이 최저임금 근로자와 납세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부담이 될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역전되기 더 어려운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국가주권은 안보 민감증, 외국인 혐오증과 함께 그것의 파산을 입증했다. 국가주권은 전지구적 자본을 제한하기는커녕 전지구적 경쟁을 가중시킴으로써 자본흐름을 관리한다.

두 개의 결론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다. 첫째, 공공써비스가 필수적인 인간적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공통적 제도로서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 인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전지구적 커먼즈의 제도화이다. 인류의 주된 위험이 이제 분명 전지구적 성격을 띠며 상호원조와 연대도 전지구적이어야하고 기반시설과 지식은 공유되어야하며 협동이 절대적 규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건강·기후·경제·교육·문화는 더 이상 사유재산 혹은 국가재산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전지구적 커먼즈로 개념화되어야하며 정치적으로 그렇게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 가지는 이제 무엇보다 더 확실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의 반란, 봉기, 그리고 초국가적 연합만이 국가와 자본에 공통적인 것을 부과할 수 있다.




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바이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

 


  • 저자  : Jimmy Dore
  • 원문 :  “Biden Won’t Solve Your Problems, But Will ‘Understand Your Problems’(2020. 12. 1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Jimmy Dore Show>의 한 에피소드(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 좋도록 간략한 자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미 도어는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정치평론가이다. 그는 현재 하원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을 채택하는 투표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Force the Vote’ 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정확하게는 ‘민중당 건설운동’(Movement for a People’s Party)―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 바이든이 꼭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와 밥 돌(Bob Dole)처럼 말하며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파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장사꾼인 월가의 꼭두각시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그에게 표를 던지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조 바이든이 이렇게 트윗을 했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들아, 이 아버지는 정부가 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는 내 문제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단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이해하든 못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로 모입니다. 월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수조 달러를 얻어내려고 정부에게 가잖아요.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사업을 봉쇄하고 그래서 아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정책 제안자가 되려고 출마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놀랍군요. 다음 문단을 보세요. 그가 이렇게 썼군요.
<사람들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움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경기부양지원금(stimulus check)이 필요하고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 필요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죽기 직전의 정신이 나간 노인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미디어에는 정신 나간 자를, 그리고 당신을 규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봐요, 조, 정부가 당신에게서 도둑질하리라 예상하라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팬데믹 시기동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죠. 재난지원금 말이에요. 이봐요, 월가에 돈을 주기위해 우리가 매년 세금을 낸다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오늘날 우리 세금이 그리로 가니 말이죠. 당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줬나요, 조?

우파가 이것에 ‘국민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이 바로 전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5조 달러를 건네주었죠, 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레이건의 용어인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군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며]
<취업난은 진정한 국가적 위기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끔찍한 금융 절벽으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셉트>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는군요.

[CNN 웹페이지의 한 사진을 보여주며]
“텍사스에서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수천대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저런 헤드라인을 보면 저는 조 바이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끕니다.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계속 할 수는 없어요”―소상공인들이 포기하고 있다>
<의회는 코로나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펜타곤에 7천4백억 달러의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한데 뭉쳤다>
이런 식이죠, 그리고 진보파는 그것에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원 37명만 반대투표를 했죠. 결과적으로 찬성투표한 진보파 의원들이 63명인 셈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은 “도움이 곧 갈 것이다”에서 사흘 만에 “미국인들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로 바뀌었다.>
사흘 만이라···. 그래서 저는 1월까지 조 바이든이 바이든다운 짓을 다 한 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다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라 추측하는 중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짐 얼(Jim Earl)은 이렇게 트윗을 했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멍청이었군요. 정부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의 노력 없이 이해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복지여왕’과 함께 모욕적인 상투어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멋진 조지 칼린(George Carlin)의 말을 빌자면요, “아빠가 말씀하셨지, 아빠를 욕하라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이든의 취임에 찬성하고 소득공제를 받는 경우 말고는, 구호금을 바라지 않는다.>
누가 구호금을 바랄까요? 바로 조 바이든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의 (인수위)팀은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개인들로부터는 50만 달러까지, 기업들로부터는 100만 달러까지 기부금을 받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호금을 원하니? 정계에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이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내달라고 말하는군요. 이것 말 그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 바이든입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이렇게 합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수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임식에 자금을 대야 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이든-해리스 인수위를 위해 돈을 기부해주시겠어요?”>
와우!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엇을 나눠주고 싶어요?’라고 바이든의 아빠가 말하는 군요. 놀랍지 않나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한때 아돌프 리드 주니어(Adolf Reed Jr.)는 자유주의자들이 더 이상 정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 좀 보세요.
<내 새 셔츠가 도착했어요!>[트윗에는 이 셔츠에 인쇄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아웃캐스트(Outkast)의 앨범 사진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바이든과 카말라의 사진이다.]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기업의 도구들인 이들이 악당처럼 굴려고 하네요.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고 그는 파산한 사람들을 쥐어짜면서 규칙적으로 수감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비밀경찰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대대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는 헛된 생각에 이들이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앨범 사진에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등장한 것은 대단히 재밌다.>
와우!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빨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흉내 낸 파란색 ‘마가’ 모자군요. 사람들이 파란색 모자를 썼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여러분들은 단지 트럼프를 해고하고 백악관에서 그를 쫓아냄으로써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이든의 파란색 모자를 쓰세요. 바이든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자는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와우! 조 바이든에게 맞도록 정해진 훌륭한 기준입니다. 축하합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조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와 우리의 정치에 상호존중•존경•이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액슬로드(David Axelrod)의 트윗입니다. 맙소사, 그가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 그가 그 동안 해온 나쁜 짓만큼이나 멋지게 트윗을 한다면, 또 한명의 백만장자인 놈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겨우 그 트윗뿐일 것입니다.

[여기서 스탭이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다시 지미 도어]
맞아요.
이봐요, 조 바이든에게 투표한, 잘 속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저는 바이든 안 찍었습니다.

 

[덧붙임 :  미국 역사 속의 ‘민중당’―정백수] 

미국에 이미 1890년대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있었다. <농민연합>(Farmers’ Alliance)에 뿌리를 둔 민중당(People’s Party, 혹은 Populist Party)이 1892년에 창립되어 당시의 금융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 민중당은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민주당의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붕괴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중 자신의 힘보다도 대통령(및 그에 딸린 제도)의 힘을 더 믿었을 때, 아니 자신의 힘을 정당정치라는 제도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 활력이 권력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민중당이 이런 문제점을 얼마나 잘 극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의 ‘민낯’이 다 드러난 시기이니만큼 우려만이 아니라 기대도 섞인 시선으로 이 운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엘런 브라운(Ellen Brown)에 따르면 1차 대전 전 미국에는 두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배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월가에 기반을 두는 세력이다. 당시 월가에서 중요한 주소가 ‘월가 23’번지였는데 이는 ‘House of Morgan’으로 알려져 있다. J. P. Morgan은 강력한 영국 은행업 세력의 에이전트였다. 다른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로 소급하며 산업화와 토목공사에 중점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파는 국가가 화폐를 관장하는,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수립된 시스템을 선호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는 암살되었고 은행가들이 화폐기계의 통제를 다시 요구했다. 월가파의 “조용한 쿠데타”는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의 통과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법의 통과는 1896년 대선 후보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비롯한 여러 “부주의한”(unwary) 의원들로 하여금 민간기업인 ‘Federal Reserve’(연방 준비제도, 연방준비은행)를 ‘연방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 Ellen Brown,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 Third Millennium Press, 2010)

민중당이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브라이언은 민중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당원이었다. 당시에는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이 한 패였고, 그 반대편에 민주당이 있었으며, 민중당은 민주당과의 통합 대선후보지명을 주장하는 통합파(fusionists)와 독자성을 주장하는 제3당파(mid-roaders)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구도를 보면 민주당이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보다 더’ 한패가 되었으니(이는 오바마 때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바이든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결국 월가가 공화당, 민주당을 ‘다 먹은’ 최고의 패자(霸者)가 된 셈이다. (지금 미국 민주당 내에 ‘진보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 민중을 위해서 싸우기보다 민중의 에너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민중당은 단순히 양당 체제에 새 당 하나(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를 추가시키는 식이 아니라, 민중들 자신들의 연합(coalition)이라는 형태로 미국 민중이 한데 모여 양당체제에 대한 실체적·삶정치적 대안으로서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 외에 1971년에도 여러 개인들과 소정당들이 모여서 만든 민중당(People’s Party)이 있었으나 1972년과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 이후 느슨한 연합으로 변한 후 사라졌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돌봄과 번성: 커머닝으로 생겨나는 사회보장

 


  • 저자  : Silke Helfrich, David Bollier, Thomas de Groot
  • 원문 :  Caring and Thriving: The Social Security Engendered by Commoning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0년 10월 16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흔히 네덜란드인명의 성에 붙는 ‘de’―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를 ‘데’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더’에 더 가깝기 때문에 ‘Thomas de Groot’를 ‘토마스 더흐로트’라고 표기했다.)

     


암스테르담 소재 <커먼즈 네트워크>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더흐로트(Thomas de Groot)는 최근에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와 어떻게 커먼즈가 대안적인 이행경로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이 인터뷰의 본래 게시글은 <커먼즈 네트워크> 웹싸이트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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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흐로트
우리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프리히
좋습니다. 커먼즈 사유에 사회보장이라는 쟁점을 연결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우리는 시장기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부담을 떠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Covid-19 팬데믹 국면에서 보고 있는 것도 이것입니다. 국가는 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기업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국가도 자본 유입과 세수에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경제위기와 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기반의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보다 독립적이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의 미래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저는 ‘재분배에서 선분배로’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에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를 재분배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 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지분소유권(equity ownership)과 같지 않습니다. 투자금에 대한 이윤이나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자산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밖에서 자급활동과 서비스들을 창출하기 위한 공유된 부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관련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에 딱 좋은 말씀이군요. 사회보장의 원천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는 사회보장이 단지 화폐가치의 안전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사회보장을 화폐가치의 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부의 모든 재분배가 설계상 시장변동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접근법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재분배의 불공평한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지시할 때는 말이죠.)

그것은 또한, 사회보장을 구상하고 제공하기 전에 우선 메가머신(megamachine)이 계속해서 굴러가게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설계 결함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자본주의 경제의 (따라서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소유관계(시장을 통해 화폐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유권 모델들을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재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선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실질적인 선분배는 모든 사람이 어엿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공유된 부의 기본 요소들(토지, 주택 등)에 법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용 토지, 주택과 아파트가 지어지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사회보장을 보다 커먼즈 친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최대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1%의 축적된 부의 일부를 되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지금 수십억을 써야 하는 일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탈상품화된 주택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사회보장제도의 일부가 되어야합니다. 그 권리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의 일부분인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이 생겨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유(재산)를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우리 사회에서 소유권 모델은 항상 개인 소유와 기업 소유 그리고 국가 소유로 구성됩니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사이의 단순화된 논쟁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커먼즈에 기반한 생각들은 결코 고려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은 항상 주변화되고 간과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헬프리히
그것은 국가 기관들이 시장경제 및 추출적인 기업모델들을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접근법은 정말로 나쁜 설계상의 선택사항임이 드러납니다. 위기가 닥쳐도 재분배할 충분한 돈이 없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볼리어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추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그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명성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의 일은 그 경제가 낳는 추출과 성장을 촉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일에는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을 상상할 동기가 정말로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만 기꺼이 나서지 않거나 직업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프리히
그래서 우리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현 시스템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제대로 된 출발점은 국민국가들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시장국가들인데, 모든 재분배 행위를 완전히 시장에 즉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회보장을 위한 모든 중대한 시나리오는 이 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볼리어
사람들은 시장이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항상 회피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시스템으로 구축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이 분명해진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들을 찾을 때 사람들은 시장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의를 가진,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그들이 탈성장이나 탈자본주의적 선택사항들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처럼 유럽에도 존재하는 (아마도 진보적인) 노동조합의 전통이 떠오르는군요. 조직화된 연대에 관한 사유의 전통이죠. 하지만 그 전통조차도 우리가 결정하고자 하는 것에는 부적절합니다. 이는 그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국가에 의해 구상되는 모든 사회정책의 선결조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강하게 이것을 제시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보장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재분배를 하기 위한 수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원이나 동어반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장 참여자들(기업들,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게 할 것이며 이것이 다시 경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게끔 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완전히 화폐화되었다는 결론만 내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소재 <쎄꼬쎄쏠라>(Cecosesola)라 불리는 협동조합들의 연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사회보장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베네수엘라 경제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장에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충분한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고 자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로부터 지급받는 물자들로 말이죠.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쎄꼬쎄쏠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느낌, 즉 안도감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유대)의 안정감에서,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관리(파수)하는 시장, 자기조직화, 절대화된 평균가격에 기반을 둔 거래,(([옮긴이] 쎄꼬쎼솔라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채소들의 경우에는 더 쉽습니다. 우리는 채소들의 가격을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시간과 노력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우리는 킬로그램당 평균 가격을 사용합니다.” (http://patternsofcommoning.org/we-are-one-big-conversation-commoning-in-venezuela/))) 의식(儀式)화된 활동과 상호지원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들을 통제합니다. 모두가 지위가 동등한 동료(peer)로서 조직한 그들의 사회보장 제도는—그들은 심지어 원장도 없이 모든 장비를 갖춘 병원을 운영합니다—큰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주변부에서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창출해줍니다. 그런데 소속감을 가진다는 이 기본적인 요소가 이곳 유럽에서는 사회보장에 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볼리어
<쎄꼬쎄쏠라> 같은 것이 미국에서 작동할 수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두서없이 말해서 정치문화에 그것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헬프리히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시스템에 있는 다음 결함으로 넘어가는군요. 우리의 사회보장 및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통찰과 실험을 소개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회보장 및 경제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의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볼리어
그 범위의 많은 부분이 국가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인 관료체제와 관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 적용되는 표준적인 모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관료체제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정책을 능력중시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관료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시스템은 지역의 독특함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 어떻게 가치를, 즉 오픈소스 스타일을 발생시키는지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분명하게 이 요소를 참작합니다. 커먼즈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열려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커머닝과 로컬리즘을 더 지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국가의 관료체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또한 우리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가지 사례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옮긴이] http://www.comune.bologna.it/media/files/bolognaregulation.pdf))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포스터(Sheila Foster)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도시들> 운동(“Co-Cities” movement)이 해당이 됩니다. 이 접근법은 도시 관료체제와 (동네그룹들, 시민연합들 등등으로서 활동하는) 커머너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의 실험은 선거정치, 정치정당, 입법대표자들의 권력놀음에 취약하죠. 게다가 국가권력과 커머닝 사이에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질케와 저는 이 과제, 즉 우리가 어떻게 커먼즈와 국가의 파트너십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어떻게 관료체제(국가)와 선거정치가 체질개선을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서 커머닝의 다원세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과제와 씨름을 해왔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헬프리히
맞습니다.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국가주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시스템이 오늘날 그렇듯이 위계적으로 수립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상황과 욕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국가권력은 화폐 안전(monetary security)을 명백하게 선호하는 행정상의 단일문화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부터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 비화폐적인 안전욕구가 있습니다.

 

더흐로트
우리가 하는 연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행 진로를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핵심이 케어소득과 대안통화입니다. 케어소득은 우리가 탈성장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장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네통화(neighbourhood currency, 지역통화)로 이 케어소득 방식을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헬프리히
우리는 항상 경제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즉 사람들이 자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스템은 경제에서 돈이 유통되는 부분만 볼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적하듯이 그 시스템은 많은 일들을 배제합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우리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무조건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화폐화의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케어소득을 대안통화에 연결시키려는 충동을 이해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연대경제의 일부를 수용하고 시장경제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커머닝과 상업활동은 따로따로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금 뒤로 돌아가 보죠. 모든 국민국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관료체제에 의존합니다. 그것을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만병통치약인 ‘추상적인 평등’이라고 부릅시다. 국가는 항상 위에서부터 통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들 정부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편적인 기본소득, 케어소득이나 또는 그러한 어떤 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즉 ‘누가 그것을 운영(주관)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기본소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시나리오에서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 얻고 무슨 이유로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감•책임감•사명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달랑 서류와 법조항들만 줄줄이 붙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국가화폐기금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사회적 구조 없이, 소속감 없이 사회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볼리어
그것에 덧붙여서 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자금조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중입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돈과 공동체가 양도 불가능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즉 돈과 공동체가 어떻게 시장의 힘에 의해 상품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그리고 가치)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을,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신식민주의적인 추출 장소들(프랙킹, 식수, 광물들, 데이터 마이닝 등등을 생각보세요)로 취급되지 않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통화가 해결책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안통화는 당연히 장소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가령 동네통화는 전지구적 금융의 회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커먼즈 내부에서 발생된 가치가 더 큰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단순한 거래와 투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막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대안통화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안통화를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역 공동체들 스스로가 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헬프리히
핵심은 우리가 사회보장을 탈상품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토지를 탈상품화하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교환의 수단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무수한 대안통화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심지어는 돈 자체를 탈상품화하면서 시작해봅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행의 작은 지대들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 지대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지대들을 죄다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욕구에 토대를 두는, ‘동료’가 관리하는 사회보장을 개념화하기 위한 조건들이 그렇게 마련됩니다. 사람들의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주거지를 일례로 들어보죠.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주거지 소유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Community Land Trusts)(([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924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재산 모델들을 마련하는 것이며 공동체들이 주택 뿐 아니라 주택이 서 있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부터의 구조적인 독립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현재 위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조직화한,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획들이 재난이 닥치면 더 복원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기획들은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인 흐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볼리어
시민권 운동 출신의 유명한 선거투표권 활동가인 헤이머(Fannie Lou Hamer)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유명합니다. 지역경제를 지배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흑인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구축하기 위한 <자유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 Co-operative)을 시작했습니다.

식량독립을 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즉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이자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도와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새로이 시작하기에 훌륭한 장소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이행도시 윤리’(Transition Towns Ethic)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치적으로 추동되고 국가에 관련된 쟁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데올로기들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음식•거주지•공적인 삶—이 핵심입니다.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것을 ‘소속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상호간의 지원과 실질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는, 양육되는 정체성이죠.

 

더흐로트
사회보장의 미래가 탈중심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이 사회보장을 지역별 계획들로 조직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헬프리히
어떻게 중앙집중주의자들이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든이 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제도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입니다.” 글쎄요, 아닙니다. 미국의 제도는 강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두 정당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제시해보자면, 우리의 도시들, 지방들, 나라들이 50.1%에 기반을 두고 있는 권한을 가진 정치 정당들의 경쟁논리에 따라서 통치되는 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볼리어
맞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중심화가 한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도시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동일합니다. 실질적인 대안권력구조가 생겨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 정당들을 없애거나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장소에 기반을 두는 정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프리히
사회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사유하는 것은 토지와 주거지의 선분배를 시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면 대안적인 정치문화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볼리어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참여•소속•기여•커머닝의 긍정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

 



만약 이 글이 소나타라면 그것의 단조(短調)가 보여주는 것은, 모티프의 분리와 고립은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모티프의 분리 연결은 아름다운 한편의 음악을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내내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모든 얘기가 이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용어가 애매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 사회적 친밀 둘 다이다. 거리 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친밀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즉 우리를 지탱하는 많은 관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중요한 활동과정도 이를 떠맡아야 하는 사람도 못 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분리·고립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놓쳐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 세계의 사회적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 때문에, 관계를 통해, 특히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나와 당신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당신 없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가 실상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 펼쳐나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는 서로 함께,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로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어떤 무엇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주변의 생물계·무생물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발달의 측면에서도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시장/국가 구도

구별은 중요하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시장과 국가를 서로 대립시키는 만연한 사유 패러다임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가 서로 다투고 기껏해야 서로 ‘균형’을 찾으려는 분리된 두 개의 실체라고 우리는 가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씨스템에 따라, 경제모델에 따라 혹은 당면 상황에 따라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국가’는 하강하거나 그 반대거나 하는 식으로 둘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지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갑자기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이 됐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이자 전 <유엔무역개발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수석 경제학자 하이너 플래스벡(Heiner Flassbeck)이 말했듯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회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Heiner Flassbeck, Vollbremsung: die Wirtschaft in den Zeiten des Coronavirus, 2020년 3월 15일.))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정치경제적 조치 이후에는 실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조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력, 정당성을 갖춘 기관이 시장과 국가 두 개뿐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2020년 봄 독일정부는 어떤 면에서는 시소의 높은 쪽 끝에 ‘시장’을 남겨둔 셈인데 높은 쪽 끝에서는 낮은 쪽 끝에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이렇게 높이 치솟은 취약함에 곧장 조바심내게 된다. 이는 단명했음에도 국가의 지지·보호가 없는 경제를 신뢰하는 데 관한, 광범위한 걱정을 낳았다. 봉쇄 이후 채 일주도 안 된 2020년 3월 24일 연방 경제장관 페테르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는 독일경제를 살리기 위한 15억 유로 상당의 전례 없는 구호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가 설명하길 이 일이 이토록 빨리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내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 시간이 본질적이”기 때문이었다.((Tagesschau, 2020년 3월 24일.)) 내 고향에 있는 한 상점주는 책임을 지는 모든 회사는 수중에 적어도 두 달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재정 문제는 위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초한 것일 수 있다는 이견을 제기했다.

알트마이어가 서두른 한 가지 이유는 시장과 국가의 친밀한 관계와 분명 관련돼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있든 없든 이 점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우리의 정치씨스템·국가권력은 시장경제의 운명에 깊이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지배하에 있다. 정치적·경제적 토론이 시장 혹은 국가 중 한편을 선호하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을 ―어떤 이들은 더 큰 시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국가를 추구하듯― 짜더라도 진실은 우리가 시장국가 구도와 상대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에 의존할 뿐 아니라 시장도 국가의 법률씨스템, 시장규제, 보조금 그리고 그 밖의 지원 없이 기능할 수 없었다.((지면 관계상 이 추상적 개념을 추가적 설명 없이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팬데믹은 정치적·경제적 씨스템 양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과 국가의 영역 바깥을 생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를 한데 뭉뚱그리면 안 된다. 양자가 똑같지는 않으며 동일한 논리를 언제나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제도가 기업들 사이의 경쟁, 이윤 극대화의 원리를 무시할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듯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국가와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양자가 정말로 분리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국가와 시장의 실존적 상호의존이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독일이 2020년 4월 중순 최초의 조심스러운 규제 완화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외 ―자동차 영업소 개점― 를 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산업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자동차 산업 로비스트들의 정치적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계산된 조치였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국가의 틀 안에 갇혀서 탈자본주적 질서를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성장을 추동하지 않는 비시장적 해결책을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광범위한 개념적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해결책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시장-국가는 이 상호의존을 잠식할 팬데믹과 그 경제적 충격에 대한 비시장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국민국가적 조치의 기본 유형은 시장 이데올로기와 시장 기반 정책에 장악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자발적 상호원조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에도 불구하고 시장-국가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일자리와 성장에 의존하는 시장-국가 씨스템의 수호자인 정치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삽시간에 보여줬다. 정치인들은 직업 창출, 성장 재점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실은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적 셧다운은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를 제기한다. 팬데믹은 자연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의존해 있음에도 총액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은 없으나― 돈이 덜 필요하며 가스를 덜 사용하고 비행기를 덜 타며 덜 쇼핑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고 극복돼야 하는 재앙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점, 비행기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점, 평소처럼 많이 쇼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는) 현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구입하는 인센티브조차 다시 한 번 더 고려되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를 그리하여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기획되고 있다. 셧다운 상황에서는 “내게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물음은 경제가 우리의 필요를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실제적 필요에 관한 그러한 성찰은 그야말로 “씨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독일 녹색당조차 모든 이를 위한 250유로 쇼핑 쿠폰을 요구했다. 주간지 『차이트』(Zeit)의 3인의 작가로 구성된 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증가한 가치에 의존하는 모든 것 즉 임금·재정수입·사회보장혜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Elisabeth Raether, Mark Schieritz and Bernd Ulrich, Konsum: Brauch ich das?, in Zeit online, 2020년 5월 1일.)) 5월 중순 독일대중이 처음 접한 예측은 2020년에 거의 1,000억 유로의 재정수입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잠시라도 돌봉노동자가 멈춰서 쉴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돌봄은 모든 경제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점에서만 “씨스템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돌봄노동은 어떤 형태의 시장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이는 최근의 결함은 아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올 것이 확실하고 이산화탄소 배출감소가 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설계결함은 보다 더 분명해졌고 불길해졌다. 끊임없는 소비와 성장이라는 이러한 설계결함은 이러한 틀 밖에서,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넘어서, 그리고 제국적 삶의 방식을 넘어서 사고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Cf. Brand, Ulrich und Markus Wissen (2017) Imperiale Lebensweise. Zur Ausbeutung von Mensch und Natur in Zeiten des globalen Kapitalismus. Munich: Oekom.))

바로 여기가 커먼즈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인류사의 많은 부분이 확인시켜주듯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업적 이익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방식, 스스로 조직한 방식, 필요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서로 함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커먼즈는 많은 목적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우리는 이를 확인할 것이다― 세수(稅收)의 유망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것이 커먼즈가 시장-국가 씨스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다.

팬데믹 시대 커머닝

커먼즈를 순수한 이타주의, 이웃의 산발적 도움, 무조건적 베풂으로 환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뒤섞는 이들은 이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변형하는 힘을 간과한다. 커먼즈를 주로 혹은 전적으로 역사적 유물이나 법적 주체 또는 ‘자원관리’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커먼즈 개념이 우리의 현재 위기를 그리고 시장-국가 사고의 설계결함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 것으로 흔히 인용된다. 그의 논점은 커먼즈는 명사 ―사물 또는 자원― 이기보다는 동사 ―커머닝의 활동―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시장-국가에서 함께함을, 즉 보통 만연한 것들과는 다른 행동패턴을 창출하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 전역에서 그러한 실천들은 (특히 위기의 시기에) 삶과 생존의 중요한 부분이다. 커먼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개념보다 분명 더 오래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은 언론보도로 다뤄지지 않으며 다뤄질 때에는 자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정신의 표현 혹은 가십거리로 다뤄진다. 매우 다양한 상호부조가 시장국가의 뿌리 깊은 한계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의 씨앗 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조직화의 힘과 창조성을 무시한 채 커먼즈와 그 주역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일종의 정신적 구속 안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이 동학은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 없는, 인구밀도가 높은 700만 명의 물리적 공간인 홍콩에서 팬데믹 초기에 분명히 작용했다. 정부의 무조치를 염려한 이들이 감염 통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홍콩에서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동안 새로운 감염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2020년 6월 8일 확인된 사례는 (상당수가 유학을 마침 다음 홍콩으로 되돌아가야했던) 총 1107명 중 회복 1048명, 사망 4명, 입원 55명이었다.)) 조건이 좋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플랫폼이 캐리 램(Carrie Lam) 정부에 대한 항의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2019년에 구축되어 있었고 2002-2003년의 사스 발생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감염 자체가 확산될 조건도 좋았다. 높은 인구밀도, 우한으로 운행하는 고속열차와 매일 수차례 운항하는 직항편, 2020년 1월에만 중국 본토에서 250만 명 이상이 홍콩으로 입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던 것이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시장-국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브라질에서도 타당한 접근법임이 입증되었다. 우익 극단주의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정부는 다가오는 건강위기를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최소화했으며 이를 “그저 미미한 독감”이라고 칭했다. 보호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의사가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favelas)(([옮긴이] 파벨라(favela)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무시해왔던 브라질의 저임금 거주지다.)) 중 하나에 있는 파드레 미구엘(Padre Miguel) 삼바학교에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학교 재봉틀은 카니발 의상 대신 보호복을 만들면서 돌아갔다.

학교 폐쇄에 직면한 미국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홈스쿨링과 보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에 대한 그들의 전문지식을 모으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https://schoolclosures.org, 2020년 5월 15일 접속.)) 또한 과학공동체 <크라우드파이트코비드10>(CrowdfightCovid10)의 전지구적 기획이 코비드19와의 싸움에 사용할 지식·도구를 곧 공유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일까? 필요하고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시장 기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은 나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정상적인 일로 보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실천은 모든 문화·시대에 걸쳐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탈리아에 설립된 협동조합 <바리카마>(Barikama)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동안 로마 사람들에게 꾸준히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는 선구적 작업을 인정받았다.((https://elpais.com/elpais/2020/05/03/planeta_futuro/1588493778_756377.html, 2020년 5월 17일 접속.)) 바리카마라는 단어는 밤바라어(([옮긴이] 밤바라어(Bambara language)는 약 1,500만 명이 제1언어(약 500만) 혹은 제2언어(약 1,000만)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말리 인구의 대략 80%가 사용하고 있다.))에서 유래하며 ‘힘’ 또는 ‘저항’을 의미한다. 이 협동조합은 이주 일용직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과일야채농업의 악화된 조건에서 해방시켰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에 따라서 야채와 요구르트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마스크스포올>(Masks4All)의 접근법은 시장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이라는 거짓된 지혜를 따랐었다. 2020년 3월 다수가 체코 출신이었던 과학자·연구원·기업가들((https://masks4all.org/founders, 2020년 5월 17일 접속.))이 마스크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근본적이라는 점을 대중과 정치세계에 납득시키려는 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더 높은 가격은 더 적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시장 기반 논리가 마스크의 불안정한 공급을 낳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실제 생산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지리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지고 있었다. 보호의류에 대한 의료부문과 일반대중의 요구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일부 마스크 생산자들은 즉각적 이익을 봤다.((Report by Lena Kampf, Markus Grill, Arnd Henze, Georg Wellmann, Florian Flade and Christian Baars, Tagesschau, 2020329.)) 메트만복음주의병원(the Mettman Evangelical Hospital)은 독일에 있는 병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 몇 주 만에 수술용 마스크 가격은 1667%, FFP2 마스크는 2500%, FFP3는 3043%, 보호복은 638% 급등했다.

대중에게 일상용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부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스크포올>은 재봉틀이 있든 없든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온라인에 게시했다.((https://masks4all.co/how-to-make-a-homemade-mask/, 2020년 6월 7일 접속.))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한 논점을 제시한 메릴랜드 주 공화당 주지사 래리 호건(Larry Hogan)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이는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병을 퍼뜨리는 것은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마스크포올>의 모토 즉 ‘내 마스크는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한다’가 훨씬 더 적절하다. 아마도 이것이 위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측면 즉 마스크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상호의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달려 있다. 당신이 얼마나 조심하느냐에 나의 안전이 달려 있다. 개인의 건강이 모두의 건강과 주의에 달려 있다.

비슷한 교훈이 삶 일반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관계로부터, 관계를 통해서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는 경제의 기본 이념일 뿐만 아니라 커머닝의 기본 가정이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존재한다” ―이것 없이 커머닝은 이해될 수 없다― 라는 이 기본적 생각은 근래 공통적으로 공유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스크는 착용하는 사람을 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가 감염되었지만 무증상일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립된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적 시각을 잃은 것이다. 문화비평가 게오르크 제에즐렌(Georg Seesslen)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런 경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에 매우 가깝다”((Georg Seeßlen, Freiheit in Zeiten von Covid_19))고 말한다.

지식은 강력하며 자유로운 지식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례들은 몇 가지 모티프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상품화된 지식보다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아낌없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한 최선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커머너들은 의자나 자전거를 다루듯 지식을 다룬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물론 의자나 자전거도 공유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교대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의자를 ‘공유’한다면 개인이 그것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 차이는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데 이는 공유를 통해 배가될 수 있는 것과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반복되는 커먼즈의 동기 중 하나는 공통재로서의 지식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의 공유, 사용권의 고안이다. 무료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위키피디아에 적용되어 잘 알려진 이 접근법은 이러한 공유지식체계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고 확장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도 시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the University of Sussex)이 조직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제 연구팀에 따르면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세계 전역 의료씨스템의 코비드19 팬데믹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줄 수 있다.((Leveraging open hardware to alleviate the burden of COVID-19 on global health systems)) 다른 장비들 중에서도 현미경과 인공호흡기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3D 프린터와 결합하면 세계 전역의 의료써비스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신 협업생산이 오늘날의 대세라고 연구팀의 일원인 신경학교수 톰 바덴(Tom Baden)은 말한다.((https://www.pressetext.com/news/20200429007?, 2020년 5월 22일 접속.))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외에도 대량생산보다 “경비가 훨씬 낮고” “지역자원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데서 오는” 혜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보호장비를 위한 오픈소스 청사진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해결책 중 어떤 것이 공식적 기능성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오픈소스 하드웨어 디자인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때문에 바덴은 정부가 시험·승인 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이 꽤나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약과 백신의 생산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방식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이와 관련하여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보통 다소 심한 제약 하에 운영되는 많은 과학 출판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연구결과를 무료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미래의 백신을 누가 소유할지에 대한 논의도 급속히 이뤄졌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은 아이디어·지식·연구결과가 상품화되는 대신 공공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코비드19 백신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5년 조나스 솔크(Jonas Salk)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기자들은 그에게 누가 특허를 소유하는지 물었다. 솔크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말로 답했다. “글쎄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 있나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 솔크 박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윤 극대화를 염두에 둔 채 생명을 구하는 백신이 생산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50년대 말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책임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위임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간, 이와는 상이한 생각이 우세했다. 국민국가는 제약회사들에게 특허의 범위와 기간을 넓혀주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 제약회사들 각각의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복제약(([옮긴이] 복제약(generic drug)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약과 동일한 화학 성분을 가진 약으로서 특허 만료 이후 판매가 허가된다. 복제약은 특정 제약회사와 연관성을 가지지만 보통 약이 배포되는 국가의 정부에 의해 관리된다.)) 생산에서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코비드19에 대응하여 이제 다른 곡조가 연주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글로벌 대응 재원 약정 회의>(the Coronavirus Global Response Pledging Conference)((https://ec.europa.eu/international-partnerships/events/coronavirus-global-reponse-pledging-conference_en, 2020년 5월 5일 접속.))에서 EU의회 의장 우슐라 폰 데어 레옌(Ursula von der Leyen)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상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전 세계를 위해 전 세계가” 생산해야 하는 “유일한 전 지구적 공공재”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eu-initiative-fuer-impfstoff-nur-die-globale-antwort-wirkt-gegen-das-virus-16750330.html, 2020년 5월 5일 접속.)) 제약업계는 이 접근법을 즉시 거부하면서 “기업은 자신의 개발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Pharmaindustrie will Corona-Impfstoff nicht als öffentliches Gut freigeben)) 이들의 입장은 수십 년 간 들어와서 익숙해진 모든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분명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반면 협력과 연대에 기반한 약물 연구개발 과정과 혁신적 소유권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공적 의식에 기반한 혁신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하에서 논의될 <방치된 질병을 위한 의약품 이니셔티브>(the Drugs for Neglected Diseases Initiative, DNDI)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이는 두 번째 모티프와 연관된다.

국가에 기대기보다 자기조직화를 장려하기

회의론자들은 누가 “공통재 혹은 공공재”((이 두 용어의 차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Silke Helfrich, Gemeingüter sind nicht, sie werden gemacht.))로 백신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그 가용성을 보장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국민국가가 공적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하며 유일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응당 국가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공적인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용어는 국가적 의무의 범위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국가권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시돼야하는 통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에서 “공적인 것과 국가”의 직접적 연관은 시장과 국가가 실로 상이하나 별개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잔혹한 국가주의가 미국 의료분야((Geberkonferenz für Impfstoff, Zeichen gegen ‘brutalen Nationalismus’))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EU 정치인이 표현한 우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데 덜 잔혹한 국가주권 개념이 이미 난점이기 때문이다.((커먼즈 연구자 삐에르 다도(Pierre Dardot)와 끄리스띠앙 라발(Christian Laval)은 이를 다음에서 탐구한다. The pandemic as political trial: the case for a global commons.)) 시장경제 원리와 결합된 이러한 국민국가 주권 이념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전지구적 연대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만간 단념하게 만들 것이다.((코로나바이러스 위기상황인 2020년 3월 31일 독일 TV에 방영된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의 기억에 남을 모습은 이 진단이 국민국가 연합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의 체계적 연계는 국민국가 시장의 이익을 위하는 국가에서 백신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1.5도 기후 목표도 훼손하도록 추동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후위기·대량이주·팬데믹 시기에 분명해진 독립된 세계의 도전에 응대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의 필요를 고려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조직·생산·소유의 방법이다. 예외가 아닌 기획에 의한 커먼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국가주권 하에서 기능하는 시장-국가와 달리((여기에 묘사된 긴장은 예컨대 위기 시 정부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예외상황에도 반영된다. 예컨대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 위기 때 포르투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 지위에 관계없이 건강 및 사회 보장 씨스템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장관 에두아르도 카브리타(Eduardo Cabrita)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위기의 시기에,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의무’다. Cf. Portugal regulariza imigrantes para dar acesso ao sistema de saude, https://oglobo.globo.com/mundo/portugal-regulariza-imigrantes-para-dar-acesso-ao-sistema-de-saude-durante-pandemia-de-coronavirus-24335450, 2020년 5월 20일 접속.)) 이러한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우리의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알아볼 것이다. 고립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자 장기 전략의 문제로서 말이다.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자기조직화와 연대를 장려하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더 쉽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위해 뉴스를 뒤지는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꽤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쿠자누스대학(Cusanus Hochschule) 학생들과 함께 필자는 팬데믹의 경제적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공적 토론에 초점을 맞추어 2020년 3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의 타케스샤우(Tagesschau) 오후 8시 뉴스를 분석했다. 이 토론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는 주로 ‘채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자기조직화라는 용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독일 정부는 #WirVsVirus(우리 대 바이러스) 해커톤(hackathon)((https://wirvsvirushackathon.org/, 2020년 5월 17일 접속.))으로 올바른 방향의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스탄불 시 정부는 모르는 사람들의 음식 값을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터키식당의 사회적 관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위기에 직면하여 시 정부는 친구나 낯선 이들이 여유 없는 사람들의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내줄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었다. 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 가스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더 이상 납부할 수 없는 재정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4월 이를 실행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족들의 청구서들이 웹싸이트에 게시될 수 있었고 낯선 이들이 익명으로 이를 지불해줄 수 있었다. 이스탄불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약 1000만 리라(약 250만 유로)에 달하는 10만 건의 청구서가 결제됐고 또 다른 12만 건의 청구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https://ansteckendsolidarisch.de/de/blog/rechnungen과 시 정부 웹싸이트 https://askidafatura.ibb.gov.tr/, 2020년 5월 17일 접속.)) 순수한 자선 행위 대신 이 경우에는 수입이 갑작스레 감소함에도 공공요금을 대규모로 충당하기 위한 더 나은 자기조직화의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민관협력(a public-private partnership)을 회고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국가와 커먼즈의 협력(a public-commons partnership)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다.

이것이 어떻게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백신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공공재일 수도 있고 비국가적 커머너들이 창안하고 모두와 관대하게 공유하는 공통재일 수도 있다.((정치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것처럼 쓰인다.)) 조나스 솔크가 제안한 경로는 큰 호소력을 가진다. WHO 혹은 공공협력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지구적 협력조직이 백신에 대한 수탁책임을 질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혁신적 연구·금융 모델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식의 동기에 충실하게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특허가 위기의 시기에는 유예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이상한 이념적 주장이 아니다. DNDI가 수십 년 간 입증해온 성공적 관행이 바로 이것이다. DNDI는 특히 기업에 ‘가치 없는’, 그리하여 높은 사망률과 수백만의 감염자에도 불구하고 연구되지 않는 질병에 사용될 약물을 ―국가와 다국적 파트너, 민간 파트너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며 시험하고 공유한다. 신약으로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장논리를 따를 경우 연구투자도 기대할 수 없다.((DNDI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lfrich/Bollier 2019: S. 312–314. DNDI는 단일 자금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단일 국민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 단체는 현재 <WHO 코비드19 기술 연합>(WHO COVID-19 Technology Pool)에 속해있다 https://www.dndi.org/2020/media-centre/events/online-webinar-who-covid-19-technology-pool/, 2020년 5월 21일 접속.)) 확실히 커먼즈의 핵심 덕목은 아무것도 투자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윤의 폭락과 그로 인한 혼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셧다운할 생산도 없고 갑작스런 실업의 위협도 없다.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무엇이 실제로 필요하든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와의 차이점이다. 커먼즈는 사람들의 필요를 작업의 중심에 놓고 생산·분배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배분한다. 이 접근법은 광고, 마케팅, 경쟁적 소송, 특허 비용, 인재 채용 등의 시장 기반 비용을 제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팬데믹에 직면하여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다량의 간접비로부터 벤처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집단적 생산과 사용

재화를 판매용 상품으로 전환해야 하는 강제가 없다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같이 계속될 수 있다. 예컨대 위기 내내 활동해온 대략 280개의 CSA 농장((https://www.solidarische-landwirtschaft.org/solawis-finden/auflistung/solawis/ [옮긴이] 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기반 농업)는 농장의 수확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된 농업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작물의 재배·수확·유통의 위기를 공유하는 대안적 농업이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처럼 농작물이 재배·수확·유통된다. 물론 적절한 위생 예방조치를 준수하면서 말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CSA를 계속 지원하고 있는, 고객들이 아닌 회원들에게 매주 배달된다. 이는 2018년 매우 건조한 여름에도 그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한 2020년 봄에도 다르지 않다. 이런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농업에서는 위기가 많은 회원들 사이에 분산되기 때문에 경제적 ‘셧다운’은 CSA에게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씨스템은 계절노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돈은 자발적 기여와 수익 재분배에 기초하여 처리된다.

시장경제가 붕괴될 때 역으로 반사회적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굶주릴 때조차도 우유 생산자들이 하수구에 우유를 쏟아 붓고((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oronavirus-dairy-milk-farmer…)) 꽃 재배업자들이 꽃들을 모두가 즐기도록 공공장소에 두는 대신 처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먼즈는 필요를 더 일관되게 충족시키고 낭비를 피하면서 변동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라흐(Villach)에 있는 <페어안트보어퉁 에어데>(Verantwortung Erde,지구에 대한 책임)((https://www.verantwortung-erde.org/, 2020년 5월 20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물질·능력은 [위기 시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할 뿐이다.”

이스탄불 시 정부가 플랫폼을 만들어 낯선 이들의 공과금을 사람들이 더 쉽게 내줄 수 있게 한 것과 유사하게, 말마따나 너무도 필요한 재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 농업단체도 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인 토지를 시장으로부터, 그리하여 투기로부터 빼내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반시설 비용도 절감시켰다. 팬데믹 시기 커먼즈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2020년 4월 4일 이루어진 온라인 대담)) 토지를 적극적으로 탈상품화하는 독일 협동조합 <쿨투어란트>(Kulturland, 경작지)((https://www.kulturland.de/, 2020년 5월 23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견했고 이제 미래를 미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들 기다리고 있는 토지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로서의 커먼즈?

나는 지금이 커먼즈의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커먼즈는 지배적 경제모델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충돌 없는 ‘셧다운’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필요치 않기에 사물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계는 아직 커먼즈를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19세기의 낡고 질긴 사고방식, 구시대적 경제정치사상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가 우리가 커머너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 경제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정당화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 전제는 “더 적은 생산 그리고 (동네공방, 재사용·보수·재활용 센터와 같은) 더 지역적이고 시너지적인 생산방식이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며 팬데믹 대처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Hans Widmer, Die Coronakrise hat viele Fehlfunktionen unseres Systems offen gelegt. 2020년 3월 28일, telepolis.)) “씨스템과 관련된” 직업과 “삶과 관련된” 활동을 구분해야하는 이유와 후자의 활동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경제모델의 우선적·현실적 기초로 인식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씨스템과 관련된’(Systemrelevant)은 코로나 위기 동안 ‘평상시’에는 별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의사·간호사·간병인·출납원 등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독일어 용어다.) 커머닝의 배후에 있는 모티프가 ‘작은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의존하는 자기조직된 협업의 창조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법적 소유권, 통제의 문제에 대한 새롭고 더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상호의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화했다. 기억하는가?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고 내 마스크는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커먼즈의 확장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는 <네쯔베어크 외코노미셔 반델>(Netzwerk Ökonomischer Wandel, 경제변화를 위한 네트워크)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수렴 전략에 상응한다. (NOW) https://www.netzwerk-oekonomischer-wandel.org/, 2020년 5월 13일 접속. [옮긴이] 이 구절의 독일어 원본은 다음과 같다. Die Konsequenz kann nur sein: Commons ausweiten. NOW! 마지막 단어 NOW는 독일어 원본에서 대문자로 쓰였다. NOW는 ‘Netzwerk Ökonomischer Wandel’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진 말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는 대안적 변화의 길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커먼즈를 확장하기‘(Commons ausweiten)이다. 나머지 둘은 ’시장을 공통재로 인도하기’(Markte am Gemeinwohl orientieren)과 ‘국가를 완전히 민주화하기’(Den Staat umfassend demokratisieren)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열어젖힌 새로운 전망

 



지난주 있었던 운동가 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사망은 이미 힘든 시기에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레이버는 겨우 59살이었고··· 그는 분명히 그의 앞에 더 많은 눈부신 책들을 내놓을 것이었고··· 다수의 위기들이 합류하는 때에 전체 체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의 사유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인간 사회를 공부한 학생으로서, 그는 인간 조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역할을 해 왔던 사회 조직의 구조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지식을 적용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병적 측면들을 대담하게 비판했으며 그 다음에는 진지한 대안들을 제안하고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는 통상적으로 대학의 학자가 경력 향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급진적인 활동 때문에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충돌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한 일이다. 그의 지적 탁월함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예일대학교의 통보가 있었을 때 4,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그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는 싸움에서 패배했고 어쩔 수 없이 영국의 더 푸른 들판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결국 런던정경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금융을 현저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재구성한 그레이버의 2011년 역작인 『부채 그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관료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인 『규칙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 자본주의적 위계가 만드는 무의미한 직업들에 대해 논한 『쓸데없는 직업』(Bullshit Jobs)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Toward an Anthropological Theory of Value: The False Coin of Our Own Dreams)은 그의 덜 알려진 초기 연구서 중 하나인데, 나는 ‘시장가격 = 가치’라는, 가치를 간단한 문제로 간주하는 방대한 경제 문헌들 사이에서 이 책이 보기 드문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연구로 인해 마침내 그 나와 나의 동료들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의 활동과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레이버와 함께 2016년에 가치의 의미를 주제로 워크숍을 공동조직했다. 워크숍에서 나온 보고서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가치를 다시 상상하기: 돌봄 경제, 커먼즈, 사이버공간, 자연으로부터의 통찰.”

그레이버는 진보주의자들과 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그 밖의 사람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있어서 특히 불리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가격에 기반을 둔 통상적인 가치론을 넘어서는 진지하고 공유된 가치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워크숍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분명히 밝혔고 일련의 전도유망한 연구 방향들을 나열했다. 새로운 가치이론은 새로운 경제운동이 힘을 들여 다루어야 할 주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나와 그레이버의 유일한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내가 많은 출처로부터 지금껏 들어온 것을 확인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별난 박식가였고 정말이지 진국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과감한 아이디어들이 학문적 가식이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굳어지게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지적 탁월함, 개인적 용기, 그리고 부조리를 포착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친구들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움직이는 진앙(震央)이었다. 그들은 각각 그레이버의 광범위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그레이버는 주위에 불꽃을 튀기며 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아낌없이 보답했다. 오큐파이운동(Occupy movement)의 구호인 “우리는 99%다”가 그레이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증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단지 “99%”라는 문구를 생각해냈을 뿐이라고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큐파이운동 조직 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이)다”를 생각해냈으며, 이는 위원회들이 곧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이 커졌을 때 그레이버는 자신이 “무정부주의 인류학자”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국한되는 데 반대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정체성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가 틀에 박힌 역할과 평판의 폭정을 거부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살아있고, 호기심 있고, 탐구하고, 모험적인 인간보다 과연 무엇이 더 만족스럽고 생산적이겠는가?

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책에서 이토록 기민한 판단과 신랄한 논평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부채(負債)에 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억한다. “나에게는 다음이 바로 부채가 가진 도덕적으로 사악한 측면이다. 즉 금융의 명령이 계속해서 우리 모두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순히 돈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약탈자와 같게 만드는 방식이다.”

또는 “세상의 궁극적인 숨겨진 진실은 세상이 우리가 만드는 무언가라는 점, 그리고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라는 점이다.”

또는 “누군가가 ‘자유시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때마다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좋은 생각이다. 그는 절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그레이버에 대한 논평이 있는 여러 곳에 쓰여있는 것의 많은 부분을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레이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뉴욕타임즈 부고 기사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가디언지에 쓴 논평을 읽어 보길 바란다.

나는 그레이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그의 깊고 정묘한 학식을 적용했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독창적인 경로들을 제안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별난 상상력과 진지한 목적을 섞어 항상 새로운 운동 전략을 세웠다. 진정성, 진지한 사고, 개인적인 아량 그리고 해학을 가지고 인간의 곤경에 대응하는 것보다 결국 무엇이 더 가치 있을 수 있겠는가?




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트럼프 대 바이든’?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October 16,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GxSN4ip_F6M&list=TLPQMTcxMTIwMjDZLmYzc8ZbYQ&index=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올해 10월 16일(대선 18일 전)에 The Sanctuary for Independent Media (in Troy, NY)에서 한 강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미국의 현실이 강연 내용에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소개한다. 강연이 제법 길고 질의응답도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몇 번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 올리는 것은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대립구도의 허구성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강연의 원고는 https://scheerpost.com/2020/10/19/chris-hedges-the-politics-of-cultural-despair/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9:35 지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위험한가요? 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부정직한가요? 네. 트럼프가 열린 사회에 더 위협이 되는가요? 네. 그러면 바이든이 해결책인가요? 아닙니다!

바이든은 변화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동일한 상태를 좀더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냉담과 혐오로 투표를 하지 않는 최대의 유권자층인 1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3일 실시된 미국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가 1억 6천만 2천 명 정도라고 하니 전체 등록유권자 2억 3천 900만 명에서 이 수를 제하면 등록유권자 가운데 대략 7900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헤지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투표율이 높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사기저하는 의도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의 대상의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미디어들은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2분 증오’(the Two Minutes Hate)의 소비자 버전입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선호와 습성에 관한 상세한 디지털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의 견해들과 편견들의 구미에 능숙하게 맞추고 이것들을 강화하며, 다시 우리에게 되팝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맞춤 분노 패키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대중은 조작된 분열을 가로질러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는 조작된 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싸구려 리얼리티 쇼가 됩니다. 시민들의 담론은 악담과 거짓으로 물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은 문제 삼아지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어집니다.

정치관련 보도는 스포츠 보도를 모델로 합니다. 세트는 일요일 미식축구 경기의 세트처럼 해놓았습니다. 앵커는 어느 한쪽 편이고, 각 팀에서 두 명씩, 4명의 해설자들이 나옵니다. 모니터에서는 득점이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정치적 정체성들은 쉽게 소화될 수 있는 상투형들로 환원됩니다. 전술, 전략, 이미지, 선거기부금의 월별 누적기록, 여론조사가 끝없이 검토됩니다. 진정한 정치적 이슈들은 무시됩니다. 이는 전쟁의 언어, 전쟁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두 정당이 거의 모든 주된 이슈들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주요 이슈들은, 금융기업의 규제완화, 무역협상, 경찰의 군사화(1990년 이래 국방부는 74억 달러 이상을 8천 개에 달하는 연방 및 국가 법집행기관들에 이전하여 군사장비와 병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폭증, 탈산업화, 긴축, 프래킹(fracking) 및 화석연료 산업 지원, 중동에서의 중단 없는 전쟁, 부풀려진 군비예산, 기업들에 의한 선거 및 매스미디어 통제,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감시(정부가 하루 24시간 당신을 감시하면 당신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등입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구의 일부분을 다른 일부분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적대를 부추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널리즘 정신에 의해서 추동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기업의 후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추동되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뉴스가 구현하는 분할구도는 기업수입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뉴스에 사용되는 틀은 프로레슬링에서 사용되는 단순화된 도덕극입니다. 미국에는 트럼프를 좋아하느냐 증오하느냐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치적 입장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각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든과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더라도] 무언가를 지지하며 던지는 셈이 됩니다.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 자신을 학대한 자들에게 맞섰던 애니타 힐(Anita Hill) 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굴욕을 승인하는 셈이 됩니다.
  • 중동에서 중단 없는 전쟁을 기획한 자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인종분리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한 대중의 대대적 감시를 그리고 적정절차(due process) 및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복지의 파괴와 사회안전의 삭감을 포함한 긴축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나프타, 탈산업화, 임금의 실질적 감소,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 수십만 개의 상실, 멕시코, 중국, 월남 등 낮은 보수를 받으며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로의 일자리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사들 및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과 연방기금의 영리적인 기독교 차터스쿨들(charter schools)로의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도소 재소자의 수가 두 배로 늘고 형의 선고가 세배, 네 배로 증가하는 데, 그리고 사형에 처해질 범죄들이 크게 확대하는 데 표를 던지는 셈이 됩니다.
  • 유색인이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군대화된 경찰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그린뉴딜과 이민법개혁에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프래킹[수압파쇄법] 산업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부유층이 교육의 기회를 받고 가난한 유색인들은 기회를 거부당하는, 차별적인 공립학교시스템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기혹한 수준의 학자금대출금과 파산을 하더라도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은행업의 규제완화와 글래스-스티칼(Glass-Steagall)법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정리자―글래스-스티갈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 중에서 4개 항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영리적인 보험업과 제약기업들을 찬성하고 보편적 건강보장을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모든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정리자―행정부와 의회가 재량권을 가지고 예산을 편성․심사할 수 있는 지출]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국방예산을 찬성하는 셈이 됩니다.
  • 과두세력과 기업이 돈으로 우리의 선거를 사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신용카드회사이며 바이든의 아들 헌터(Hunter)를 고용한 MBNA의 이익에 비열하게 복무했던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은 중동에서의 전쟁들을 기획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7조 달러 이상을 낭비했으며 수백만 명의 삶의 파괴하거나 멸절시켰습니다. 바이든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트럼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법 및 입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바이든은 제국전쟁과 기업에 의한 나라의 약탈을 기획하고 미국 노동계급을 배반한 죄목으로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지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붕괴의 해결자로서 내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과 이 당을 옹호하는 지유주의자들은 인종, 종교, 이민, 여성의 권리,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것이 그들의 정치인 척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들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윤리적인 이슈들입니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가령 예전의 복지제도를 파괴했을 때 전지구적 투기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계급이 경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민주당이 응원하는 척하는 바로 그 집단들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그 복지제도의 수혜자의 70%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은 그 입장대로라면 유럽에서는 극우당의 되리라는 점입니다.) 문화전쟁이 현실을 가립니다. 두 당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파괴하는 데서 완전히 한패입니다. 두 당은 미국 사회를 마피아 국가로 재편성했습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민주당, 2019년부터 연방 하원의장), 척 슈머(Chuck Schumer, 2016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 2007년부터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정치가들의 힘은 기업의 돈을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 즉 기업의 돈이 퍼부어지지 않는 체제에서라면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공통체’(commonwealth), ‘공공적인 것’(res publica)라고 부른 것, 혹은 민중의 재산을 전지구적 기업 과두세력을 위한 약탈과 억압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를 약탈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며 사법부, 미디어, 입법부를 왜곡시킨, 그리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금융 사기와 절도에 가담할 자유를 확보한, 부유하고 전능한 주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들입니다.

팬데믹의 와중에서 우리의 도둑정치가들이 한 짓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주관한 2008년 구제금융 이래 유례없는 규모인 4조 달러를 약탈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희생시켜 실컷 먹고 배를 불리고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급아파트, 궁전 같은 저택의 창문 바깥으로 고통 받고 경멸 받는 대중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지원금이나 세금삭감의 형태로 석유회사들, 항공산업체들(이들만 500억 달러를 경기부양금으로 받았습니다), 유람선업체들에게 수조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부동산업체들에게 1700억 달러를 안겨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사모펀드, 로비그룹들(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가들에게 선거기부금으로 1억910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정육업체들 그리고 미국에서 세금을 나내지 않기 위해서 해외로 이전한 기업들에게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소기업들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는 데 쓰여야 할 돈을 가장 큰 기업들이 집어삼키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기부양 패키지 하에서 백만장자들에게 80%의 세금삭감 혜택을 주었으며 가장 부유한 자들이 평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경기부양금을 받도록 허용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또한 4540억 달러가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에 할당했는데, 이는 트럼프 패거리들이 기업들에게 나누어준 막대한 비자금으로서 10대 1의 비율로 차입을 한다면 4조5천억 달러의 자산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에 1조5천억 달러의 대출을 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 돈이 상환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팬데믹 이후 4340억 달러만큼 더 부유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제프 베조스(그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에 연방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팬데믹 이후 자신의 부에 거의 720억 달러를 추가했습니다. 동일한 기간에 55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리자―강연 원고가 실린 사이트에 가보면 이 단락의 주요 항목마다 해당 자료로 가는 링크가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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