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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과 번성: 커머닝으로 생겨나는 사회보장

 


  • 저자  : Silke Helfrich, David Bollier, Thomas de Groot
  • 원문 :  Caring and Thriving: The Social Security Engendered by Commoning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0년 10월 16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흔히 네덜란드인명의 성에 붙는 ‘de’―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를 ‘데’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더’에 더 가깝기 때문에 ‘Thomas de Groot’를 ‘토마스 더흐로트’라고 표기했다.)

     


암스테르담 소재 <커먼즈 네트워크>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더흐로트(Thomas de Groot)는 최근에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와 어떻게 커먼즈가 대안적인 이행경로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이 인터뷰의 본래 게시글은 <커먼즈 네트워크> 웹싸이트에 올라 있다.

* * *

더흐로트
우리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프리히
좋습니다. 커먼즈 사유에 사회보장이라는 쟁점을 연결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우리는 시장기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부담을 떠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Covid-19 팬데믹 국면에서 보고 있는 것도 이것입니다. 국가는 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기업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국가도 자본 유입과 세수에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경제위기와 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기반의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보다 독립적이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의 미래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저는 ‘재분배에서 선분배로’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에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를 재분배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 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지분소유권(equity ownership)과 같지 않습니다. 투자금에 대한 이윤이나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자산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밖에서 자급활동과 서비스들을 창출하기 위한 공유된 부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관련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에 딱 좋은 말씀이군요. 사회보장의 원천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는 사회보장이 단지 화폐가치의 안전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사회보장을 화폐가치의 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부의 모든 재분배가 설계상 시장변동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접근법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재분배의 불공평한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지시할 때는 말이죠.)

그것은 또한, 사회보장을 구상하고 제공하기 전에 우선 메가머신(megamachine)이 계속해서 굴러가게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설계 결함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자본주의 경제의 (따라서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소유관계(시장을 통해 화폐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유권 모델들을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재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선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실질적인 선분배는 모든 사람이 어엿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공유된 부의 기본 요소들(토지, 주택 등)에 법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용 토지, 주택과 아파트가 지어지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사회보장을 보다 커먼즈 친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최대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1%의 축적된 부의 일부를 되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지금 수십억을 써야 하는 일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탈상품화된 주택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사회보장제도의 일부가 되어야합니다. 그 권리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의 일부분인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이 생겨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유(재산)를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우리 사회에서 소유권 모델은 항상 개인 소유와 기업 소유 그리고 국가 소유로 구성됩니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사이의 단순화된 논쟁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커먼즈에 기반한 생각들은 결코 고려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은 항상 주변화되고 간과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헬프리히
그것은 국가 기관들이 시장경제 및 추출적인 기업모델들을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접근법은 정말로 나쁜 설계상의 선택사항임이 드러납니다. 위기가 닥쳐도 재분배할 충분한 돈이 없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볼리어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추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그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명성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의 일은 그 경제가 낳는 추출과 성장을 촉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일에는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을 상상할 동기가 정말로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만 기꺼이 나서지 않거나 직업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프리히
그래서 우리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현 시스템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제대로 된 출발점은 국민국가들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시장국가들인데, 모든 재분배 행위를 완전히 시장에 즉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회보장을 위한 모든 중대한 시나리오는 이 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볼리어
사람들은 시장이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항상 회피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시스템으로 구축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이 분명해진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들을 찾을 때 사람들은 시장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의를 가진,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그들이 탈성장이나 탈자본주의적 선택사항들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처럼 유럽에도 존재하는 (아마도 진보적인) 노동조합의 전통이 떠오르는군요. 조직화된 연대에 관한 사유의 전통이죠. 하지만 그 전통조차도 우리가 결정하고자 하는 것에는 부적절합니다. 이는 그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국가에 의해 구상되는 모든 사회정책의 선결조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강하게 이것을 제시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보장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재분배를 하기 위한 수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원이나 동어반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장 참여자들(기업들,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게 할 것이며 이것이 다시 경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게끔 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완전히 화폐화되었다는 결론만 내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소재 <쎄꼬쎄쏠라>(Cecosesola)라 불리는 협동조합들의 연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사회보장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베네수엘라 경제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장에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충분한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고 자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로부터 지급받는 물자들로 말이죠.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쎄꼬쎄쏠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느낌, 즉 안도감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유대)의 안정감에서,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관리(파수)하는 시장, 자기조직화, 절대화된 평균가격에 기반을 둔 거래,(([옮긴이] 쎄꼬쎼솔라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채소들의 경우에는 더 쉽습니다. 우리는 채소들의 가격을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시간과 노력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우리는 킬로그램당 평균 가격을 사용합니다.” (http://patternsofcommoning.org/we-are-one-big-conversation-commoning-in-venezuela/))) 의식(儀式)화된 활동과 상호지원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들을 통제합니다. 모두가 지위가 동등한 동료(peer)로서 조직한 그들의 사회보장 제도는—그들은 심지어 원장도 없이 모든 장비를 갖춘 병원을 운영합니다—큰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주변부에서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창출해줍니다. 그런데 소속감을 가진다는 이 기본적인 요소가 이곳 유럽에서는 사회보장에 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볼리어
<쎄꼬쎄쏠라> 같은 것이 미국에서 작동할 수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두서없이 말해서 정치문화에 그것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헬프리히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시스템에 있는 다음 결함으로 넘어가는군요. 우리의 사회보장 및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통찰과 실험을 소개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회보장 및 경제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의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볼리어
그 범위의 많은 부분이 국가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인 관료체제와 관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 적용되는 표준적인 모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관료체제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정책을 능력중시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관료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시스템은 지역의 독특함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 어떻게 가치를, 즉 오픈소스 스타일을 발생시키는지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분명하게 이 요소를 참작합니다. 커먼즈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열려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커머닝과 로컬리즘을 더 지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국가의 관료체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또한 우리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가지 사례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옮긴이] http://www.comune.bologna.it/media/files/bolognaregulation.pdf))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포스터(Sheila Foster)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도시들> 운동(“Co-Cities” movement)이 해당이 됩니다. 이 접근법은 도시 관료체제와 (동네그룹들, 시민연합들 등등으로서 활동하는) 커머너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의 실험은 선거정치, 정치정당, 입법대표자들의 권력놀음에 취약하죠. 게다가 국가권력과 커머닝 사이에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질케와 저는 이 과제, 즉 우리가 어떻게 커먼즈와 국가의 파트너십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어떻게 관료체제(국가)와 선거정치가 체질개선을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서 커머닝의 다원세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과제와 씨름을 해왔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헬프리히
맞습니다.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국가주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시스템이 오늘날 그렇듯이 위계적으로 수립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상황과 욕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국가권력은 화폐 안전(monetary security)을 명백하게 선호하는 행정상의 단일문화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부터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 비화폐적인 안전욕구가 있습니다.

 

더흐로트
우리가 하는 연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행 진로를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핵심이 케어소득과 대안통화입니다. 케어소득은 우리가 탈성장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장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네통화(neighbourhood currency, 지역통화)로 이 케어소득 방식을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헬프리히
우리는 항상 경제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즉 사람들이 자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스템은 경제에서 돈이 유통되는 부분만 볼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적하듯이 그 시스템은 많은 일들을 배제합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우리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무조건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화폐화의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케어소득을 대안통화에 연결시키려는 충동을 이해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연대경제의 일부를 수용하고 시장경제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커머닝과 상업활동은 따로따로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금 뒤로 돌아가 보죠. 모든 국민국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관료체제에 의존합니다. 그것을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만병통치약인 ‘추상적인 평등’이라고 부릅시다. 국가는 항상 위에서부터 통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들 정부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편적인 기본소득, 케어소득이나 또는 그러한 어떤 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즉 ‘누가 그것을 운영(주관)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기본소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시나리오에서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 얻고 무슨 이유로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감•책임감•사명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달랑 서류와 법조항들만 줄줄이 붙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국가화폐기금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사회적 구조 없이, 소속감 없이 사회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볼리어
그것에 덧붙여서 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자금조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중입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돈과 공동체가 양도 불가능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즉 돈과 공동체가 어떻게 시장의 힘에 의해 상품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그리고 가치)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을,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신식민주의적인 추출 장소들(프랙킹, 식수, 광물들, 데이터 마이닝 등등을 생각보세요)로 취급되지 않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통화가 해결책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안통화는 당연히 장소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가령 동네통화는 전지구적 금융의 회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커먼즈 내부에서 발생된 가치가 더 큰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단순한 거래와 투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막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대안통화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안통화를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역 공동체들 스스로가 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헬프리히
핵심은 우리가 사회보장을 탈상품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토지를 탈상품화하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교환의 수단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무수한 대안통화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심지어는 돈 자체를 탈상품화하면서 시작해봅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행의 작은 지대들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 지대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지대들을 죄다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욕구에 토대를 두는, ‘동료’가 관리하는 사회보장을 개념화하기 위한 조건들이 그렇게 마련됩니다. 사람들의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주거지를 일례로 들어보죠.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주거지 소유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Community Land Trusts)(([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924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재산 모델들을 마련하는 것이며 공동체들이 주택 뿐 아니라 주택이 서 있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부터의 구조적인 독립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현재 위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조직화한,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획들이 재난이 닥치면 더 복원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기획들은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인 흐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볼리어
시민권 운동 출신의 유명한 선거투표권 활동가인 헤이머(Fannie Lou Hamer)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유명합니다. 지역경제를 지배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흑인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구축하기 위한 <자유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 Co-operative)을 시작했습니다.

식량독립을 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즉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이자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도와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새로이 시작하기에 훌륭한 장소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이행도시 윤리’(Transition Towns Ethic)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치적으로 추동되고 국가에 관련된 쟁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데올로기들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음식•거주지•공적인 삶—이 핵심입니다.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것을 ‘소속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상호간의 지원과 실질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는, 양육되는 정체성이죠.

 

더흐로트
사회보장의 미래가 탈중심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이 사회보장을 지역별 계획들로 조직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헬프리히
어떻게 중앙집중주의자들이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든이 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제도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입니다.” 글쎄요, 아닙니다. 미국의 제도는 강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두 정당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제시해보자면, 우리의 도시들, 지방들, 나라들이 50.1%에 기반을 두고 있는 권한을 가진 정치 정당들의 경쟁논리에 따라서 통치되는 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볼리어
맞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중심화가 한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도시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동일합니다. 실질적인 대안권력구조가 생겨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 정당들을 없애거나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장소에 기반을 두는 정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프리히
사회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사유하는 것은 토지와 주거지의 선분배를 시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면 대안적인 정치문화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볼리어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참여•소속•기여•커머닝의 긍정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

 



만약 이 글이 소나타라면 그것의 단조(短調)가 보여주는 것은, 모티프의 분리와 고립은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모티프의 분리 연결은 아름다운 한편의 음악을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내내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모든 얘기가 이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용어가 애매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 사회적 친밀 둘 다이다. 거리 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친밀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즉 우리를 지탱하는 많은 관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중요한 활동과정도 이를 떠맡아야 하는 사람도 못 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분리·고립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놓쳐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 세계의 사회적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 때문에, 관계를 통해, 특히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나와 당신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당신 없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가 실상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 펼쳐나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는 서로 함께,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로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어떤 무엇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주변의 생물계·무생물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발달의 측면에서도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시장/국가 구도

구별은 중요하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시장과 국가를 서로 대립시키는 만연한 사유 패러다임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가 서로 다투고 기껏해야 서로 ‘균형’을 찾으려는 분리된 두 개의 실체라고 우리는 가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씨스템에 따라, 경제모델에 따라 혹은 당면 상황에 따라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국가’는 하강하거나 그 반대거나 하는 식으로 둘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지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갑자기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이 됐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이자 전 <유엔무역개발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수석 경제학자 하이너 플래스벡(Heiner Flassbeck)이 말했듯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회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Heiner Flassbeck, Vollbremsung: die Wirtschaft in den Zeiten des Coronavirus, 2020년 3월 15일.))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정치경제적 조치 이후에는 실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조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력, 정당성을 갖춘 기관이 시장과 국가 두 개뿐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2020년 봄 독일정부는 어떤 면에서는 시소의 높은 쪽 끝에 ‘시장’을 남겨둔 셈인데 높은 쪽 끝에서는 낮은 쪽 끝에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이렇게 높이 치솟은 취약함에 곧장 조바심내게 된다. 이는 단명했음에도 국가의 지지·보호가 없는 경제를 신뢰하는 데 관한, 광범위한 걱정을 낳았다. 봉쇄 이후 채 일주도 안 된 2020년 3월 24일 연방 경제장관 페테르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는 독일경제를 살리기 위한 15억 유로 상당의 전례 없는 구호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가 설명하길 이 일이 이토록 빨리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내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 시간이 본질적이”기 때문이었다.((Tagesschau, 2020년 3월 24일.)) 내 고향에 있는 한 상점주는 책임을 지는 모든 회사는 수중에 적어도 두 달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재정 문제는 위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초한 것일 수 있다는 이견을 제기했다.

알트마이어가 서두른 한 가지 이유는 시장과 국가의 친밀한 관계와 분명 관련돼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있든 없든 이 점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우리의 정치씨스템·국가권력은 시장경제의 운명에 깊이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지배하에 있다. 정치적·경제적 토론이 시장 혹은 국가 중 한편을 선호하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을 ―어떤 이들은 더 큰 시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국가를 추구하듯― 짜더라도 진실은 우리가 시장국가 구도와 상대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에 의존할 뿐 아니라 시장도 국가의 법률씨스템, 시장규제, 보조금 그리고 그 밖의 지원 없이 기능할 수 없었다.((지면 관계상 이 추상적 개념을 추가적 설명 없이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팬데믹은 정치적·경제적 씨스템 양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과 국가의 영역 바깥을 생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를 한데 뭉뚱그리면 안 된다. 양자가 똑같지는 않으며 동일한 논리를 언제나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제도가 기업들 사이의 경쟁, 이윤 극대화의 원리를 무시할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듯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국가와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양자가 정말로 분리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국가와 시장의 실존적 상호의존이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독일이 2020년 4월 중순 최초의 조심스러운 규제 완화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외 ―자동차 영업소 개점― 를 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산업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자동차 산업 로비스트들의 정치적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계산된 조치였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국가의 틀 안에 갇혀서 탈자본주적 질서를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성장을 추동하지 않는 비시장적 해결책을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광범위한 개념적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해결책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시장-국가는 이 상호의존을 잠식할 팬데믹과 그 경제적 충격에 대한 비시장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국민국가적 조치의 기본 유형은 시장 이데올로기와 시장 기반 정책에 장악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자발적 상호원조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에도 불구하고 시장-국가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일자리와 성장에 의존하는 시장-국가 씨스템의 수호자인 정치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삽시간에 보여줬다. 정치인들은 직업 창출, 성장 재점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실은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적 셧다운은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를 제기한다. 팬데믹은 자연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의존해 있음에도 총액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은 없으나― 돈이 덜 필요하며 가스를 덜 사용하고 비행기를 덜 타며 덜 쇼핑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고 극복돼야 하는 재앙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점, 비행기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점, 평소처럼 많이 쇼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는) 현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구입하는 인센티브조차 다시 한 번 더 고려되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를 그리하여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기획되고 있다. 셧다운 상황에서는 “내게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물음은 경제가 우리의 필요를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실제적 필요에 관한 그러한 성찰은 그야말로 “씨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독일 녹색당조차 모든 이를 위한 250유로 쇼핑 쿠폰을 요구했다. 주간지 『차이트』(Zeit)의 3인의 작가로 구성된 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증가한 가치에 의존하는 모든 것 즉 임금·재정수입·사회보장혜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Elisabeth Raether, Mark Schieritz and Bernd Ulrich, Konsum: Brauch ich das?, in Zeit online, 2020년 5월 1일.)) 5월 중순 독일대중이 처음 접한 예측은 2020년에 거의 1,000억 유로의 재정수입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잠시라도 돌봉노동자가 멈춰서 쉴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돌봄은 모든 경제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점에서만 “씨스템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돌봄노동은 어떤 형태의 시장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이는 최근의 결함은 아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올 것이 확실하고 이산화탄소 배출감소가 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설계결함은 보다 더 분명해졌고 불길해졌다. 끊임없는 소비와 성장이라는 이러한 설계결함은 이러한 틀 밖에서,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넘어서, 그리고 제국적 삶의 방식을 넘어서 사고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Cf. Brand, Ulrich und Markus Wissen (2017) Imperiale Lebensweise. Zur Ausbeutung von Mensch und Natur in Zeiten des globalen Kapitalismus. Munich: Oekom.))

바로 여기가 커먼즈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인류사의 많은 부분이 확인시켜주듯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업적 이익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방식, 스스로 조직한 방식, 필요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서로 함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커먼즈는 많은 목적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우리는 이를 확인할 것이다― 세수(稅收)의 유망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것이 커먼즈가 시장-국가 씨스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다.

팬데믹 시대 커머닝

커먼즈를 순수한 이타주의, 이웃의 산발적 도움, 무조건적 베풂으로 환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뒤섞는 이들은 이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변형하는 힘을 간과한다. 커먼즈를 주로 혹은 전적으로 역사적 유물이나 법적 주체 또는 ‘자원관리’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커먼즈 개념이 우리의 현재 위기를 그리고 시장-국가 사고의 설계결함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 것으로 흔히 인용된다. 그의 논점은 커먼즈는 명사 ―사물 또는 자원― 이기보다는 동사 ―커머닝의 활동―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시장-국가에서 함께함을, 즉 보통 만연한 것들과는 다른 행동패턴을 창출하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 전역에서 그러한 실천들은 (특히 위기의 시기에) 삶과 생존의 중요한 부분이다. 커먼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개념보다 분명 더 오래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은 언론보도로 다뤄지지 않으며 다뤄질 때에는 자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정신의 표현 혹은 가십거리로 다뤄진다. 매우 다양한 상호부조가 시장국가의 뿌리 깊은 한계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의 씨앗 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조직화의 힘과 창조성을 무시한 채 커먼즈와 그 주역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일종의 정신적 구속 안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이 동학은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 없는, 인구밀도가 높은 700만 명의 물리적 공간인 홍콩에서 팬데믹 초기에 분명히 작용했다. 정부의 무조치를 염려한 이들이 감염 통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홍콩에서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동안 새로운 감염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2020년 6월 8일 확인된 사례는 (상당수가 유학을 마침 다음 홍콩으로 되돌아가야했던) 총 1107명 중 회복 1048명, 사망 4명, 입원 55명이었다.)) 조건이 좋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플랫폼이 캐리 램(Carrie Lam) 정부에 대한 항의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2019년에 구축되어 있었고 2002-2003년의 사스 발생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감염 자체가 확산될 조건도 좋았다. 높은 인구밀도, 우한으로 운행하는 고속열차와 매일 수차례 운항하는 직항편, 2020년 1월에만 중국 본토에서 250만 명 이상이 홍콩으로 입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던 것이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시장-국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브라질에서도 타당한 접근법임이 입증되었다. 우익 극단주의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정부는 다가오는 건강위기를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최소화했으며 이를 “그저 미미한 독감”이라고 칭했다. 보호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의사가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favelas)(([옮긴이] 파벨라(favela)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무시해왔던 브라질의 저임금 거주지다.)) 중 하나에 있는 파드레 미구엘(Padre Miguel) 삼바학교에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학교 재봉틀은 카니발 의상 대신 보호복을 만들면서 돌아갔다.

학교 폐쇄에 직면한 미국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홈스쿨링과 보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에 대한 그들의 전문지식을 모으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https://schoolclosures.org, 2020년 5월 15일 접속.)) 또한 과학공동체 <크라우드파이트코비드10>(CrowdfightCovid10)의 전지구적 기획이 코비드19와의 싸움에 사용할 지식·도구를 곧 공유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일까? 필요하고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시장 기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은 나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정상적인 일로 보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실천은 모든 문화·시대에 걸쳐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탈리아에 설립된 협동조합 <바리카마>(Barikama)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동안 로마 사람들에게 꾸준히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는 선구적 작업을 인정받았다.((https://elpais.com/elpais/2020/05/03/planeta_futuro/1588493778_756377.html, 2020년 5월 17일 접속.)) 바리카마라는 단어는 밤바라어(([옮긴이] 밤바라어(Bambara language)는 약 1,500만 명이 제1언어(약 500만) 혹은 제2언어(약 1,000만)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말리 인구의 대략 80%가 사용하고 있다.))에서 유래하며 ‘힘’ 또는 ‘저항’을 의미한다. 이 협동조합은 이주 일용직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과일야채농업의 악화된 조건에서 해방시켰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에 따라서 야채와 요구르트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마스크스포올>(Masks4All)의 접근법은 시장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이라는 거짓된 지혜를 따랐었다. 2020년 3월 다수가 체코 출신이었던 과학자·연구원·기업가들((https://masks4all.org/founders, 2020년 5월 17일 접속.))이 마스크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근본적이라는 점을 대중과 정치세계에 납득시키려는 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더 높은 가격은 더 적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시장 기반 논리가 마스크의 불안정한 공급을 낳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실제 생산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지리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지고 있었다. 보호의류에 대한 의료부문과 일반대중의 요구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일부 마스크 생산자들은 즉각적 이익을 봤다.((Report by Lena Kampf, Markus Grill, Arnd Henze, Georg Wellmann, Florian Flade and Christian Baars, Tagesschau, 2020329.)) 메트만복음주의병원(the Mettman Evangelical Hospital)은 독일에 있는 병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 몇 주 만에 수술용 마스크 가격은 1667%, FFP2 마스크는 2500%, FFP3는 3043%, 보호복은 638% 급등했다.

대중에게 일상용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부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스크포올>은 재봉틀이 있든 없든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온라인에 게시했다.((https://masks4all.co/how-to-make-a-homemade-mask/, 2020년 6월 7일 접속.))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한 논점을 제시한 메릴랜드 주 공화당 주지사 래리 호건(Larry Hogan)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이는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병을 퍼뜨리는 것은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마스크포올>의 모토 즉 ‘내 마스크는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한다’가 훨씬 더 적절하다. 아마도 이것이 위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측면 즉 마스크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상호의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달려 있다. 당신이 얼마나 조심하느냐에 나의 안전이 달려 있다. 개인의 건강이 모두의 건강과 주의에 달려 있다.

비슷한 교훈이 삶 일반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관계로부터, 관계를 통해서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는 경제의 기본 이념일 뿐만 아니라 커머닝의 기본 가정이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존재한다” ―이것 없이 커머닝은 이해될 수 없다― 라는 이 기본적 생각은 근래 공통적으로 공유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스크는 착용하는 사람을 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가 감염되었지만 무증상일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립된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적 시각을 잃은 것이다. 문화비평가 게오르크 제에즐렌(Georg Seesslen)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런 경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에 매우 가깝다”((Georg Seeßlen, Freiheit in Zeiten von Covid_19))고 말한다.

지식은 강력하며 자유로운 지식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례들은 몇 가지 모티프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상품화된 지식보다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아낌없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한 최선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커머너들은 의자나 자전거를 다루듯 지식을 다룬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물론 의자나 자전거도 공유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교대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의자를 ‘공유’한다면 개인이 그것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 차이는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데 이는 공유를 통해 배가될 수 있는 것과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반복되는 커먼즈의 동기 중 하나는 공통재로서의 지식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의 공유, 사용권의 고안이다. 무료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위키피디아에 적용되어 잘 알려진 이 접근법은 이러한 공유지식체계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고 확장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도 시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the University of Sussex)이 조직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제 연구팀에 따르면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세계 전역 의료씨스템의 코비드19 팬데믹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줄 수 있다.((Leveraging open hardware to alleviate the burden of COVID-19 on global health systems)) 다른 장비들 중에서도 현미경과 인공호흡기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3D 프린터와 결합하면 세계 전역의 의료써비스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신 협업생산이 오늘날의 대세라고 연구팀의 일원인 신경학교수 톰 바덴(Tom Baden)은 말한다.((https://www.pressetext.com/news/20200429007?, 2020년 5월 22일 접속.))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외에도 대량생산보다 “경비가 훨씬 낮고” “지역자원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데서 오는” 혜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보호장비를 위한 오픈소스 청사진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해결책 중 어떤 것이 공식적 기능성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오픈소스 하드웨어 디자인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때문에 바덴은 정부가 시험·승인 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이 꽤나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약과 백신의 생산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방식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이와 관련하여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보통 다소 심한 제약 하에 운영되는 많은 과학 출판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연구결과를 무료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미래의 백신을 누가 소유할지에 대한 논의도 급속히 이뤄졌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은 아이디어·지식·연구결과가 상품화되는 대신 공공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코비드19 백신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5년 조나스 솔크(Jonas Salk)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기자들은 그에게 누가 특허를 소유하는지 물었다. 솔크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말로 답했다. “글쎄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 있나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 솔크 박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윤 극대화를 염두에 둔 채 생명을 구하는 백신이 생산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50년대 말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책임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위임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간, 이와는 상이한 생각이 우세했다. 국민국가는 제약회사들에게 특허의 범위와 기간을 넓혀주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 제약회사들 각각의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복제약(([옮긴이] 복제약(generic drug)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약과 동일한 화학 성분을 가진 약으로서 특허 만료 이후 판매가 허가된다. 복제약은 특정 제약회사와 연관성을 가지지만 보통 약이 배포되는 국가의 정부에 의해 관리된다.)) 생산에서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코비드19에 대응하여 이제 다른 곡조가 연주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글로벌 대응 재원 약정 회의>(the Coronavirus Global Response Pledging Conference)((https://ec.europa.eu/international-partnerships/events/coronavirus-global-reponse-pledging-conference_en, 2020년 5월 5일 접속.))에서 EU의회 의장 우슐라 폰 데어 레옌(Ursula von der Leyen)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상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전 세계를 위해 전 세계가” 생산해야 하는 “유일한 전 지구적 공공재”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eu-initiative-fuer-impfstoff-nur-die-globale-antwort-wirkt-gegen-das-virus-16750330.html, 2020년 5월 5일 접속.)) 제약업계는 이 접근법을 즉시 거부하면서 “기업은 자신의 개발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Pharmaindustrie will Corona-Impfstoff nicht als öffentliches Gut freigeben)) 이들의 입장은 수십 년 간 들어와서 익숙해진 모든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분명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반면 협력과 연대에 기반한 약물 연구개발 과정과 혁신적 소유권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공적 의식에 기반한 혁신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하에서 논의될 <방치된 질병을 위한 의약품 이니셔티브>(the Drugs for Neglected Diseases Initiative, DNDI)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이는 두 번째 모티프와 연관된다.

국가에 기대기보다 자기조직화를 장려하기

회의론자들은 누가 “공통재 혹은 공공재”((이 두 용어의 차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Silke Helfrich, Gemeingüter sind nicht, sie werden gemacht.))로 백신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그 가용성을 보장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국민국가가 공적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하며 유일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응당 국가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공적인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용어는 국가적 의무의 범위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국가권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시돼야하는 통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에서 “공적인 것과 국가”의 직접적 연관은 시장과 국가가 실로 상이하나 별개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잔혹한 국가주의가 미국 의료분야((Geberkonferenz für Impfstoff, Zeichen gegen ‘brutalen Nationalismus’))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EU 정치인이 표현한 우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데 덜 잔혹한 국가주권 개념이 이미 난점이기 때문이다.((커먼즈 연구자 삐에르 다도(Pierre Dardot)와 끄리스띠앙 라발(Christian Laval)은 이를 다음에서 탐구한다. The pandemic as political trial: the case for a global commons.)) 시장경제 원리와 결합된 이러한 국민국가 주권 이념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전지구적 연대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만간 단념하게 만들 것이다.((코로나바이러스 위기상황인 2020년 3월 31일 독일 TV에 방영된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의 기억에 남을 모습은 이 진단이 국민국가 연합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의 체계적 연계는 국민국가 시장의 이익을 위하는 국가에서 백신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1.5도 기후 목표도 훼손하도록 추동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후위기·대량이주·팬데믹 시기에 분명해진 독립된 세계의 도전에 응대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의 필요를 고려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조직·생산·소유의 방법이다. 예외가 아닌 기획에 의한 커먼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국가주권 하에서 기능하는 시장-국가와 달리((여기에 묘사된 긴장은 예컨대 위기 시 정부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예외상황에도 반영된다. 예컨대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 위기 때 포르투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 지위에 관계없이 건강 및 사회 보장 씨스템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장관 에두아르도 카브리타(Eduardo Cabrita)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위기의 시기에,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의무’다. Cf. Portugal regulariza imigrantes para dar acesso ao sistema de saude, https://oglobo.globo.com/mundo/portugal-regulariza-imigrantes-para-dar-acesso-ao-sistema-de-saude-durante-pandemia-de-coronavirus-24335450, 2020년 5월 20일 접속.)) 이러한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우리의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알아볼 것이다. 고립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자 장기 전략의 문제로서 말이다.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자기조직화와 연대를 장려하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더 쉽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위해 뉴스를 뒤지는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꽤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쿠자누스대학(Cusanus Hochschule) 학생들과 함께 필자는 팬데믹의 경제적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공적 토론에 초점을 맞추어 2020년 3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의 타케스샤우(Tagesschau) 오후 8시 뉴스를 분석했다. 이 토론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는 주로 ‘채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자기조직화라는 용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독일 정부는 #WirVsVirus(우리 대 바이러스) 해커톤(hackathon)((https://wirvsvirushackathon.org/, 2020년 5월 17일 접속.))으로 올바른 방향의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스탄불 시 정부는 모르는 사람들의 음식 값을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터키식당의 사회적 관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위기에 직면하여 시 정부는 친구나 낯선 이들이 여유 없는 사람들의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내줄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었다. 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 가스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더 이상 납부할 수 없는 재정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4월 이를 실행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족들의 청구서들이 웹싸이트에 게시될 수 있었고 낯선 이들이 익명으로 이를 지불해줄 수 있었다. 이스탄불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약 1000만 리라(약 250만 유로)에 달하는 10만 건의 청구서가 결제됐고 또 다른 12만 건의 청구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https://ansteckendsolidarisch.de/de/blog/rechnungen과 시 정부 웹싸이트 https://askidafatura.ibb.gov.tr/, 2020년 5월 17일 접속.)) 순수한 자선 행위 대신 이 경우에는 수입이 갑작스레 감소함에도 공공요금을 대규모로 충당하기 위한 더 나은 자기조직화의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민관협력(a public-private partnership)을 회고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국가와 커먼즈의 협력(a public-commons partnership)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다.

이것이 어떻게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백신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공공재일 수도 있고 비국가적 커머너들이 창안하고 모두와 관대하게 공유하는 공통재일 수도 있다.((정치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것처럼 쓰인다.)) 조나스 솔크가 제안한 경로는 큰 호소력을 가진다. WHO 혹은 공공협력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지구적 협력조직이 백신에 대한 수탁책임을 질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혁신적 연구·금융 모델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식의 동기에 충실하게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특허가 위기의 시기에는 유예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이상한 이념적 주장이 아니다. DNDI가 수십 년 간 입증해온 성공적 관행이 바로 이것이다. DNDI는 특히 기업에 ‘가치 없는’, 그리하여 높은 사망률과 수백만의 감염자에도 불구하고 연구되지 않는 질병에 사용될 약물을 ―국가와 다국적 파트너, 민간 파트너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며 시험하고 공유한다. 신약으로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장논리를 따를 경우 연구투자도 기대할 수 없다.((DNDI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lfrich/Bollier 2019: S. 312–314. DNDI는 단일 자금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단일 국민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 단체는 현재 <WHO 코비드19 기술 연합>(WHO COVID-19 Technology Pool)에 속해있다 https://www.dndi.org/2020/media-centre/events/online-webinar-who-covid-19-technology-pool/, 2020년 5월 21일 접속.)) 확실히 커먼즈의 핵심 덕목은 아무것도 투자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윤의 폭락과 그로 인한 혼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셧다운할 생산도 없고 갑작스런 실업의 위협도 없다.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무엇이 실제로 필요하든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와의 차이점이다. 커먼즈는 사람들의 필요를 작업의 중심에 놓고 생산·분배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배분한다. 이 접근법은 광고, 마케팅, 경쟁적 소송, 특허 비용, 인재 채용 등의 시장 기반 비용을 제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팬데믹에 직면하여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다량의 간접비로부터 벤처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집단적 생산과 사용

재화를 판매용 상품으로 전환해야 하는 강제가 없다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같이 계속될 수 있다. 예컨대 위기 내내 활동해온 대략 280개의 CSA 농장((https://www.solidarische-landwirtschaft.org/solawis-finden/auflistung/solawis/ [옮긴이] 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기반 농업)는 농장의 수확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된 농업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작물의 재배·수확·유통의 위기를 공유하는 대안적 농업이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처럼 농작물이 재배·수확·유통된다. 물론 적절한 위생 예방조치를 준수하면서 말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CSA를 계속 지원하고 있는, 고객들이 아닌 회원들에게 매주 배달된다. 이는 2018년 매우 건조한 여름에도 그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한 2020년 봄에도 다르지 않다. 이런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농업에서는 위기가 많은 회원들 사이에 분산되기 때문에 경제적 ‘셧다운’은 CSA에게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씨스템은 계절노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돈은 자발적 기여와 수익 재분배에 기초하여 처리된다.

시장경제가 붕괴될 때 역으로 반사회적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굶주릴 때조차도 우유 생산자들이 하수구에 우유를 쏟아 붓고((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oronavirus-dairy-milk-farmer…)) 꽃 재배업자들이 꽃들을 모두가 즐기도록 공공장소에 두는 대신 처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먼즈는 필요를 더 일관되게 충족시키고 낭비를 피하면서 변동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라흐(Villach)에 있는 <페어안트보어퉁 에어데>(Verantwortung Erde,지구에 대한 책임)((https://www.verantwortung-erde.org/, 2020년 5월 20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물질·능력은 [위기 시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할 뿐이다.”

이스탄불 시 정부가 플랫폼을 만들어 낯선 이들의 공과금을 사람들이 더 쉽게 내줄 수 있게 한 것과 유사하게, 말마따나 너무도 필요한 재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 농업단체도 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인 토지를 시장으로부터, 그리하여 투기로부터 빼내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반시설 비용도 절감시켰다. 팬데믹 시기 커먼즈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2020년 4월 4일 이루어진 온라인 대담)) 토지를 적극적으로 탈상품화하는 독일 협동조합 <쿨투어란트>(Kulturland, 경작지)((https://www.kulturland.de/, 2020년 5월 23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견했고 이제 미래를 미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들 기다리고 있는 토지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로서의 커먼즈?

나는 지금이 커먼즈의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커먼즈는 지배적 경제모델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충돌 없는 ‘셧다운’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필요치 않기에 사물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계는 아직 커먼즈를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19세기의 낡고 질긴 사고방식, 구시대적 경제정치사상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가 우리가 커머너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 경제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정당화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 전제는 “더 적은 생산 그리고 (동네공방, 재사용·보수·재활용 센터와 같은) 더 지역적이고 시너지적인 생산방식이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며 팬데믹 대처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Hans Widmer, Die Coronakrise hat viele Fehlfunktionen unseres Systems offen gelegt. 2020년 3월 28일, telepolis.)) “씨스템과 관련된” 직업과 “삶과 관련된” 활동을 구분해야하는 이유와 후자의 활동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경제모델의 우선적·현실적 기초로 인식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씨스템과 관련된’(Systemrelevant)은 코로나 위기 동안 ‘평상시’에는 별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의사·간호사·간병인·출납원 등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독일어 용어다.) 커머닝의 배후에 있는 모티프가 ‘작은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의존하는 자기조직된 협업의 창조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법적 소유권, 통제의 문제에 대한 새롭고 더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상호의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화했다. 기억하는가?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고 내 마스크는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커먼즈의 확장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는 <네쯔베어크 외코노미셔 반델>(Netzwerk Ökonomischer Wandel, 경제변화를 위한 네트워크)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수렴 전략에 상응한다. (NOW) https://www.netzwerk-oekonomischer-wandel.org/, 2020년 5월 13일 접속. [옮긴이] 이 구절의 독일어 원본은 다음과 같다. Die Konsequenz kann nur sein: Commons ausweiten. NOW! 마지막 단어 NOW는 독일어 원본에서 대문자로 쓰였다. NOW는 ‘Netzwerk Ökonomischer Wandel’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진 말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는 대안적 변화의 길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커먼즈를 확장하기‘(Commons ausweiten)이다. 나머지 둘은 ’시장을 공통재로 인도하기’(Markte am Gemeinwohl orientieren)과 ‘국가를 완전히 민주화하기’(Den Staat umfassend demokratisieren)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열어젖힌 새로운 전망

 



지난주 있었던 운동가 겸 인류학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사망은 이미 힘든 시기에 몹시 괴로운 일이었다. 그레이버는 겨우 59살이었고··· 그는 분명히 그의 앞에 더 많은 눈부신 책들을 내놓을 것이었고··· 다수의 위기들이 합류하는 때에 전체 체계의 변화를 추구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그의 사유로부터 큰 영감을 얻었다.

인간 사회를 공부한 학생으로서, 그는 인간 조건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역할을 해 왔던 사회 조직의 구조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지식을 적용해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병적 측면들을 대담하게 비판했으며 그 다음에는 진지한 대안들을 제안하고 널리 알리기도 했다.

이는 통상적으로 대학의 학자가 경력 향상을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자신의 급진적인 활동 때문에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와 충돌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한 일이다. 그의 지적 탁월함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교수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예일대학교의 통보가 있었을 때 4,500명 이상의 학생들이 그를 지지하는 탄원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는 싸움에서 패배했고 어쩔 수 없이 영국의 더 푸른 들판으로 이동해야 했다. 그는 결국 런던정경대학원(London School of Economics)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금융을 현저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로 재구성한 그레이버의 2011년 역작인 『부채 그 첫 5000년』(Debt: The First 5000 Years)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또한 관료체제에 대한 포괄적인 비판인 『규칙의 유토피아』(The Utopia of Rules), 자본주의적 위계가 만드는 무의미한 직업들에 대해 논한 『쓸데없는 직업』(Bullshit Jobs)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Toward an Anthropological Theory of Value: The False Coin of Our Own Dreams)은 그의 덜 알려진 초기 연구서 중 하나인데, 나는 ‘시장가격 = 가치’라는, 가치를 간단한 문제로 간주하는 방대한 경제 문헌들 사이에서 이 책이 보기 드문 특별한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에 대한 연구로 인해 마침내 그 나와 나의 동료들인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의 활동과 조우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레이버와 함께 2016년에 가치의 의미를 주제로 워크숍을 공동조직했다. 워크숍에서 나온 보고서의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가치를 다시 상상하기: 돌봄 경제, 커먼즈, 사이버공간, 자연으로부터의 통찰.”

그레이버는 진보주의자들과 정치적 변화를 위해 행동하겠다는 그 밖의 사람들이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있어서 특히 불리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가격에 기반을 둔 통상적인 가치론을 넘어서는 진지하고 공유된 가치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워크숍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많은 이론적 문제들을 분명히 밝혔고 일련의 전도유망한 연구 방향들을 나열했다. 새로운 가치이론은 새로운 경제운동이 힘을 들여 다루어야 할 주제로 남아있다.

이것이 나와 그레이버의 유일한 개인적인 만남이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내가 많은 출처로부터 지금껏 들어온 것을 확인해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별난 박식가였고 정말이지 진국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그의 과감한 아이디어들이 학문적 가식이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굳어지게 하지 않았다. 데이비드는 지적 탁월함, 개인적 용기, 그리고 부조리를 포착하는 독특한 감각을 가지고 진심으로 말했다.

그는 훌륭한 친구들과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움직이는 진앙(震央)이었다. 그들은 각각 그레이버의 광범위한 상상력을 키워 주었고, 그레이버는 주위에 불꽃을 튀기며 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들을 지원함으로써 아낌없이 보답했다. 오큐파이운동(Occupy movement)의 구호인 “우리는 99%다”가 그레이버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증인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단지 “99%”라는 문구를 생각해냈을 뿐이라고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오큐파이운동 조직 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이)다”를 생각해냈으며, 이는 위원회들이 곧잘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명성이 커졌을 때 그레이버는 자신이 “무정부주의 인류학자”라는 고정된 정체성에 국한되는 데 반대했다. 그는 무정부주의를 정체성이 아니라 당신이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겼다. 이는 그가 틀에 박힌 역할과 평판의 폭정을 거부하는 것과 통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살아있고, 호기심 있고, 탐구하고, 모험적인 인간보다 과연 무엇이 더 만족스럽고 생산적이겠는가?

나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생각들이 그로 하여금 그의 책에서 이토록 기민한 판단과 신랄한 논평을 하도록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도 부채(負債)에 대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억한다. “나에게는 다음이 바로 부채가 가진 도덕적으로 사악한 측면이다. 즉 금융의 명령이 계속해서 우리 모두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을 단순히 돈으로 변환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약탈자와 같게 만드는 방식이다.”

또는 “세상의 궁극적인 숨겨진 진실은 세상이 우리가 만드는 무언가라는 점, 그리고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무언가라는 점이다.”

또는 “누군가가 ‘자유시장’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할 때마다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주위에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좋은 생각이다. 그는 절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트위터를 비롯하여 그레이버에 대한 논평이 있는 여러 곳에 쓰여있는 것의 많은 부분을 반복하는 것은 불필요하게 느껴진다. 그레이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뉴욕타임즈 부고 기사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가디언지에 쓴 논평을 읽어 보길 바란다.

나는 그레이버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은 위안을 얻었는지 이제야 깨닫는다. 나는 그가 우리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 그의 깊고 정묘한 학식을 적용했고 우리 자신들로부터 시작하는, 앞으로 나아가는 독창적인 경로들을 제안한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별난 상상력과 진지한 목적을 섞어 항상 새로운 운동 전략을 세웠다. 진정성, 진지한 사고, 개인적인 아량 그리고 해학을 가지고 인간의 곤경에 대응하는 것보다 결국 무엇이 더 가치 있을 수 있겠는가?




미국 대통령의 전쟁범죄들

 


  • 저자  : Noam Chomsky
  • 원문 : Noam Chomsky – The Crimes of U.S. Presidents https://www.youtube.com/watch?v=5BXtgq0Nhsc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2003년 미국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촘스키가 한 대담에서 2차 대전 후 미국 대통령들의 저지른,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행위들을 죽 열거하는 부분(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질문자가 누군지는 동영상의 정보에 들어있지 않다. 처음에 ‘뉘른베르크 원칙’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뉘른베르크 원칙은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하는 일단의 가이드라인들이다. 이 원칙들은 2차 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정의궁에서 진행된 나치당원들의 재판의 기저에 깔려있는 법적 원칙들을 법제화하기 위해 유엔의 국제법위원회에 의해 작성되었다. ‘뉘른베르크 원칙’의 제6원칙은 다음과 같다. 

    제6원칙 : 아래의 범죄는 국제법상의 범죄로 처벌된다.

    (a) 평화에 반한 범죄
    (1) 침략전쟁(a war of aggression) 또는 국제조약, 합의 또는 확약에 위반되는 전쟁을 계획, 준비, 개시, 수해하는 행위
    (2) 앞의 (1)에 언급된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공동의 계획 또는 음모에 가담하는 행위
    (b) 전쟁 범죄
    목적을 불문하고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살인, 학대 또는 노예노동을 위한 강제이주, 전쟁포로의 살인 또는 학대, 공해상에서의 민간인의 살인 또는 학대, 인질의 살해, 공공 재산 또는 사유재산의 약탈, 도시 또는 촌락의 무분별한 파괴 또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한 초토화 행위를 포함하여 전쟁법과 전쟁 관습을 위반하는 여타 행위
    (c) 인도에 반한 범죄
    평화에 반한 범죄 또는 여타 전쟁범죄의 일환으로 또는 그와 연결되어 민간인에게 저질러진 살인, 절멸, 노예화, 강제이주 및 여타 비인도적 행위 또는 정치적,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기인한 박해
    이상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udfks7&logNo=220136045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참조.

 


문: 진행자) 
뉘른베르크 원칙에 따르면 2차 대전 후의 대통령들이 범죄자일 수 있다고 말하셨는데요?
답: 촘스키)
십중팔구 맞습니다.

문)
어떤 죄를 지었는지 빨리 살펴볼까요?
답)
아이젠하워는 이란의 보수적인 민족주의 정부를 군사쿠데타로 전복시켰습니다. 그는 과테말라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정부를 군사쿠테타와 침공으로 전복시켰습니다. 이란에서는 그 결과로 25년 동안의 잔인한 독재가 들어섰고 79년에 결국 전복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는 그 결과로 대대적인 악행이 저질러졌으며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와서야 알려진 일입니다만, 인도네시아에서 그는 쿠바와 니카라과 때까지 전후 시기의 주요 비밀테러공작을 실행했습니다. 이는 인도네시아를 분열시키고 대부분의 자원이 몰려있는 외곽의 섬들을 탈취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 당시에 위협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던,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될 가능성을 붕괴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매우 자유롭고 개방되어 있어서 빈자의 정당이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입지를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아이젠하워는 외곽의 섬들에서 군사반란을 지원하고 부추겼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케네디는 어떤가요?
답)
케네디는 최악의 대통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거론할 것은 월남 침공입니다. 그 이전에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1954년에 정치적 화해를 봉쇄하고 라틴아메리카 스타일의 테러 국가를 수립한 바 있는데, 이 테러 국가가 아이젠하워 임기 말에 6만 혹은 7만 명쯤 되는 사람들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일었는데 케네디가 이해하기로 이 반응은 내적으로 통제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침공했던 것입니다. 1962년에 남부에서 수행된 폭격의 3분의 1이 미공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정리자―공식 역사에서는 미군이 1964년 8월부터 개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월남 휘장을 단 미국 비행기들이고, 미국 조종사들이죠. 케네디는 네이팜탄을 승인했습니다. 그는 농작물을 파괴하는 데 화학무기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나 다름없는 곳에 몰아넣는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정당한 이유 없는 침략이죠. 쿠바의 경우 그것은 대대적인 국제테러리즘 작전이었습니다. 이는 세계의 파멸을 가져올 뻔했고, 미사일 위기를 낳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기소되어야 할 범법들입니다.

문) 
존슨은요?
답)
존슨은 인도차이나에서의 전쟁을 확대하여 결국 3백만 혹은 4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침략하여 그곳에서 잠재적인 민주적 혁명으로 보였던 것을 봉쇄했으며 초기 단계에 있던 이스라엘의 중동지역 점령을 지지했습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전 세계를 돌며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카터를 보세요.

문)
닉슨이 다음 순서입니다.
답)
닉슨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조차 없네요. 건너뛰어도 되겠어요.

문)
좋습니다. 그러면 포드는요?
답) 
포드는 대통령 자리에 얼마 안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침략을 승인할 만큼 오래 머물러 있기는 했습니다. 동티모르는 현대 시기에 그 어떤 것 못지않게 대량학살에 근접한 것이 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동티모르 침략에 반대하는 척하면서도 비밀리에 지원했으며, 사실 그렇게 비밀스럽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침략 직후에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유엔 안보리에서 이 침략을 규탄하는 대열에 끼었지만, 모이니핸(Moynihan) 주 유엔 미국대사가 친절하게도 우리에게 설명해주기로는, 그가 받은 지시는 유엔이 침략에 반대하여 취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일을 상당히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으며 그 다음 문장에서는 “그 다음 몇 달 동안 약 6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고 말하고는 그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그가 말한 “몇 달”이란 처음 몇 달을 말합니다. 살해당한 사람은 나중에 필시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겁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무기의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비밀리에 무기공급을 증가시켰으며 여기에는 대(對)반란용 장비가 포함됩니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의 침략이 정점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으로 재직한 짧은 시기에 이런 일이 있어났으며 이는 사실 중대하게 기소되어야 할 큰 전쟁범죄입니다.

문)
카터는요?
답)
인도네시아의 악행들이 증가하면서(1978년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카터는 인도네시아로 흘러들어가는 무기의 양을 증가시켰습니다. 의회에서 인권 관련 제한을 부과하여―그 당시 의회에 인권운동이 있었습니다― 고급 무기가 인도네시아로 유입되는 것을 봉쇄했을 때 카터는 부통령 먼데일을 통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국의 스카이호크를 인도네시아에 보내서 대량학살에 가까운 사건으로 드러난 것(대략 인구의 4분의 1이 살해되었을 겁니다)을 완성하도록 했습니다.

중동에서 카터는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의 최고의 성과는 캠프데이비드 협정(Camp David agreements)[1978년 9월 17일]입니다. 이 협정은 미국의 외교적 승리로서 제시됩니다만 사실 이 협정은 외교적 재난입니다.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1년에 이집트가 한 제안을 마침내 받아들입니다. 이 제안은 1971년 당시에는 미국이 거부했는데 이제 이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포함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점에서는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큰 전쟁들, 악행들 등이 벌어진 후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1971년의 이집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카터는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 및 기타 원조를 세계 전체에 대한 원조의 50% 이상으로 올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즉시 그 원조를 정신이 제대로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을 바로 그 방식으로, 즉 북쪽의 이웃을 공격하고(처음에는 1978년, 그 다음에는 1982년) 점령 지역의 통합성을 증가시키는 데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며, 우리는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문)
레이건은요?
답)
이 사람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레이건은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에 의해서 무력의 불법적 사용(니카라과와의 전쟁에서 보인 국제테러리즘을 말합니다)으로 규탄을 받은 최초의 대통령입니다. 이것도 시작일 뿐입니다. 유엔 안보리도 두 개의 결의안에서 국제범죄의 규탄을 승인했는데, 둘 다에 대해 미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문)
부시 1세는요?
답)
파나마 침공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파마나인들에 따르면 파나마 침공으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이 수치가 맞는지 아닌지 누가 알까요. 미국이 파나마를 침공한 것은 그 최악의 악행들에 걸쳐서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바 있는, 말 안 듣는 폭력배 노리에가를 납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리에가는 플로리다로 데려와져서 대부분 CIA의 돈을 받고 저지른 범죄들에 대해 재판을 받았습니다.) 이 일은 이유 없는 침략에 해당됩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 상세하게 말할 수도 있는데, 현실화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외교적 타결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외교적 타결을 고려하기를 거부했으며 언론도 단 하나의 예외인 롱 아일랜드의 <뉴스데이>(Newsday) 말고는 보도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뉴스데이>는 전체를 속속들이 정확하게 보도했으며 미국에서 그렇게 한 유일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부시 행정부는 공격했으며 이 공격은 전시법 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습니다. 그들은 기반시설을 공격했습니다. 가령 누가 뉴욕시를 공격하면서 전력시스템, 하수시스템 등을 파괴한다면, 이는 생물학전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로 이런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경제제재 체제가 옵니다. 이는 대부분 클린턴 때의 일이지만, 부시 때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적게 잡아도 수십만 명을 살해했습니다. 한편으로 사담 후세인을 강화시키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클린턴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시작이지 결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죽 열거할 수 있는데, 그 한 사례로 충분합니다. 다른 사례들이 많습니다만.

문)
부시 2세는요?
답)
클린턴 이야기를 더 합시다. 클린턴의 사소한, 아주 사소한 탈선 가운데 하나는 크루즈 미사일 두세 개를 수단에 보내서 의약공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것을 파괴한 일입니다. 첩보상의 실패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접한 유일한 것인, 독일 대사와 수단에서 현장연구를 하는 근동재단(Near East Foundation)의 지역 책임자의 추산에 따르면, 한 방의 미사일 공격으로 수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심각합니다. 만일 누군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나쁜 짓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열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클린턴은 지난 유엔 결의안들이 (그의 행정부의 말로는) “낡고 시대착오적인”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시작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국제법은 없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 평화프로세스라고 불리는 시기가 옵니다만 이 평화프로세스 동안 이스라엘인들의 정착―이는 미국의 납세자들이 돈을 지불하고 미국의 군사적 원조와 외교가 돕는 정착입니다―이 계속 증가했습니다. 극에 달한 때는 클린턴의 임기 마지막 해였습니다. 정착이 1992년 이래 최고 수준에 이르죠. 그러는 동안 점령 지역은 기반시설 프로젝트와 새로운 정착민을 갖춘 작은 지역들로 구획되었습니다. 이것을 뭐라고 부르는지를 모르겠는데, 여하튼 군사점령 아래 놓여있죠. 만일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쟁범죄라고 부를 겁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싶은데··· [정리자―맨 마지막 말이 거의 들리지 않는데 자막 파일에는 ‘I don’t think we have to discuss.’(논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부록>

[가장 극적으로 미국 민중의 뒤통수를 오바마가 빠진 것이 아쉬웠던 차에(2003년의 대담이라서 2009년에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빠질 수밖에 없다), 비록 국제범죄의 맥락은 아니고 다른 맥락에서지만 촘스키가 오바마를 거론한 짧은 동영상 Noam Chomsky on Why ‘Obama Sold Out Working People Within Two Years’을 발견했기에 여기 그 내용을 정리해서 부록으로 달아본다.]

===

[촘스키]
시기마다 다릅니다. 많이들 언급하는 60년대를 예로 들어봅시다. 시민권 운동 이후 이슈들은 많지만 당시 큰 이슈는 인도차이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 인도차이나 전쟁에 항의하는 대중운동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0년대 말 2-3년 동안에는 있었습니다. 내가 살던 (자유주의적 언론이 존재하는, 필시 미국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도시일) 보스턴에서는 1966년에도 공개적 시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도 학생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굉장하죠. 뭐라도 움직임을 일으키는 것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7에 돌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엄청 커졌습니다. 불행히도 이 움직임은 70년대 초에 너무 일찍 사그라졌습니다. 물러나자마자 곧 반동이 잔뜩 몰려듭니다.

오바마의 경우에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좌파에 속해있다는 것을 잊고는 ‘좋아, 여기 언변이 뛰어나고 놀라운 마케팅 기술을 가진 멋진 친구가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필시 기억하겠지만, 첫 선거에서 그는 ‘베스트 마케팅 캠프’ 상을 받았습니다. 어떻든 좌파는 자신들이 그의 멋진 말에 귀를 기울이고는 ’좋아, 우리는 그를 믿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2년 내에 오바마가 노동자들을 너무나도 완전하게 배반하여 좌파는 오바마를 포기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 2년 동안에 일이 잘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의회는 오바마 편이었는데, 빠진 것 하나가 좌파의 행동이었습니다. 만일 좌파가 행동했더라면 오바마와 민주당으로 하여금 멋진 말들의 일부라도 실현하도록 압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압박을 거둬들이는 순간, 끝입니다. 이전의 상태로 바로 돌아갑니다. 이는 결코 해서는 안될 실수입니다.




‘트럼프 대 바이든’?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October 16, 2020)

    https://www.youtube.com/watch?v=GxSN4ip_F6M&list=TLPQMTcxMTIwMjDZLmYzc8ZbYQ&index=2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올해 10월 16일(대선 18일 전)에 The Sanctuary for Independent Media (in Troy, NY)에서 한 강연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주류미디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미국의 현실이 강연 내용에 많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소개한다. 강연이 제법 길고 질의응답도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몇 번으로 나누어서 소개하기로 한다. 오늘 올리는 것은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대립구도의 허구성이 제시되는 부분이다. 강연의 원고는 https://scheerpost.com/2020/10/19/chris-hedges-the-politics-of-cultural-despair/에서 볼 수 있다.

[유튜브 동영상 19:35 지점]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위험한가요? 네.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무능하고 더 부정직한가요? 네. 트럼프가 열린 사회에 더 위협이 되는가요? 네. 그러면 바이든이 해결책인가요? 아닙니다!

바이든은 변화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는 현재와 동일한 상태를 좀더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냉담과 혐오로 투표를 하지 않는 최대의 유권자층인 1억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한 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3일 실시된 미국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가 1억 6천만 2천 명 정도라고 하니 전체 등록유권자 2억 3천 900만 명에서 이 수를 제하면 등록유권자 가운데 대략 7900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헤지스가 예상한 것보다는 투표율이 높다.)) 이러한 유권자들의 사기저하는 의도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증오의 대상의 반대쪽에 투표하는 것만이 허용됩니다. 지지하는 정당이 있는 미디어들은 한 집단을 다른 집단에 대립시키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2분 증오’(the Two Minutes Hate)의 소비자 버전입니다. 미디어들은 우리의 선호와 습성에 관한 상세한 디지털 분석의 도움으로 우리의 견해들과 편견들의 구미에 능숙하게 맞추고 이것들을 강화하며, 다시 우리에게 되팝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맞춤 분노 패키지’가 주어지게 됩니다. 대중은 조작된 분열을 가로질러 말할 수 없게 됩니다. 정치는 조작된 정치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싸구려 리얼리티 쇼가 됩니다. 시민들의 담론은 악담과 거짓으로 물듭니다. 그러는 사이에 권력은 문제 삼아지지 않고 도전받지 않은 채 그대로 놔두어집니다.

정치관련 보도는 스포츠 보도를 모델로 합니다. 세트는 일요일 미식축구 경기의 세트처럼 해놓았습니다. 앵커는 어느 한쪽 편이고, 각 팀에서 두 명씩, 4명의 해설자들이 나옵니다. 모니터에서는 득점이 계속 업데이트됩니다. 정치적 정체성들은 쉽게 소화될 수 있는 상투형들로 환원됩니다. 전술, 전략, 이미지, 선거기부금의 월별 누적기록, 여론조사가 끝없이 검토됩니다. 진정한 정치적 이슈들은 무시됩니다. 이는 전쟁의 언어, 전쟁의 이미지입니다.

이런 종류의 보도는 두 정당이 거의 모든 주된 이슈들에 대해서 완전히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립니다. 주요 이슈들은, 금융기업의 규제완화, 무역협상, 경찰의 군사화(1990년 이래 국방부는 74억 달러 이상을 8천 개에 달하는 연방 및 국가 법집행기관들에 이전하여 군사장비와 병기를 갖추도록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폭증, 탈산업화, 긴축, 프래킹(fracking) 및 화석연료 산업 지원, 중동에서의 중단 없는 전쟁, 부풀려진 군비예산, 기업들에 의한 선거 및 매스미디어 통제, 정부에 의한 대대적인 국민감시(정부가 하루 24시간 당신을 감시하면 당신은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주인과 노예의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등입니다. 이 이슈들은 모두 양당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거의 논의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인구의 일부분을 다른 일부분과 대립시키는 것입니다. 적대를 부추기는 것이 뉴스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널리즘 정신에 의해서 추동되지 않고) 시청률을 높이고 기업의 후원을 증가시키기 위한 마케팅 전략에 의해서 추동되는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뉴스가 구현하는 분할구도는 기업수입의 흐름들이 서로 경쟁하는 구도입니다. 뉴스에 사용되는 틀은 프로레슬링에서 사용되는 단순화된 도덕극입니다. 미국에는 트럼프를 좋아하느냐 증오하느냐라는 두 개의 실질적 정치적 입장만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프로레슬링의 각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이든과 민주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트럼프가 싫어서 바이든에게 표를 던졌더라도] 무언가를 지지하며 던지는 셈이 됩니다. 바이든에게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 자신을 학대한 자들에게 맞섰던 애니타 힐(Anita Hill) 같은 용기 있는 여성들의 굴욕을 승인하는 셈이 됩니다.
  • 중동에서 중단 없는 전쟁을 기획한 자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인종분리적인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정부의 정보기관에 의한 대중의 대대적 감시를 그리고 적정절차(due process) 및 인신보호영장(habeas corpus)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복지의 파괴와 사회안전의 삭감을 포함한 긴축 프로그램들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나프타, 탈산업화, 임금의 실질적 감소, 제조업 분야 일자리들 수십만 개의 상실, 멕시코, 중국, 월남 등 낮은 보수를 받으며 착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로의 일자리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사들 및 공공교육에 대한 공격과 연방기금의 영리적인 기독교 차터스쿨들(charter schools)로의 이전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교도소 재소자의 수가 두 배로 늘고 형의 선고가 세배, 네 배로 증가하는 데, 그리고 사형에 처해질 범죄들이 크게 확대하는 데 표를 던지는 셈이 됩니다.
  • 유색인이 대부분인 가난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군대화된 경찰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그린뉴딜과 이민법개혁에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프래킹[수압파쇄법] 산업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부유층이 교육의 기회를 받고 가난한 유색인들은 기회를 거부당하는, 차별적인 공립학교시스템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기혹한 수준의 학자금대출금과 파산을 하더라도 그 부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은행업의 규제완화와 글래스-스티칼(Glass-Steagall)법의 폐지를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정리자―글래스-스티갈 법은 1933년 제정된 미국의 은행법 중에서 4개 항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은행업과 증권업의 분리)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영리적인 보험업과 제약기업들을 찬성하고 보편적 건강보장을 반대하는 셈이 됩니다.
  • 모든 재량지출(discretionary spending)[정리자―행정부와 의회가 재량권을 가지고 예산을 편성․심사할 수 있는 지출]의 반 이상을 잡아먹는 국방예산을 찬성하는 셈이 됩니다.
  • 과두세력과 기업이 돈으로 우리의 선거를 사는 것을 지지하는 셈이 됩니다.
  •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 신용카드회사이며 바이든의 아들 헌터(Hunter)를 고용한 MBNA의 이익에 비열하게 복무했던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은 중동에서의 전쟁들을 기획한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7조 달러 이상을 낭비했으며 수백만 명의 삶의 파괴하거나 멸절시켰습니다. 바이든은 국내에서든 해외에서든 트럼프의 경우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과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제대로 기능하는 사법 및 입법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면 바이든은 제국전쟁과 기업에 의한 나라의 약탈을 기획하고 미국 노동계급을 배반한 죄목으로 (다른 공범자들과 함께) 법정에 세워졌을 것이지 이렇게 정치적·경제적 붕괴의 해결자로서 내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민주당과 이 당을 옹호하는 지유주의자들은 인종, 종교, 이민, 여성의 권리, 성정체성과 관련된 이슈들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을 취하며, 이것이 그들의 정치인 척합니다. 그런데 이 이슈들은 집단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윤리적인 이슈들입니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사회 전체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슈들이 아닙니다. 빌 클린턴과 민주당이 가령 예전의 복지제도를 파괴했을 때 전지구적 투기자들과 기업들로 구성된 계급이 경제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민주당이 응원하는 척하는 바로 그 집단들의 삶을 파멸시켰습니다. 그 복지제도의 수혜자의 70%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사회의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을 악마화하여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민주당은 그 입장대로라면 유럽에서는 극우당의 되리라는 점입니다.) 문화전쟁이 현실을 가립니다. 두 당은 우리의 민주적 제도들을 파괴하는 데서 완전히 한패입니다. 두 당은 미국 사회를 마피아 국가로 재편성했습니다.

낸시 펠로시(Nancy Pelosi, 민주당, 2019년부터 연방 하원의장), 척 슈머(Chuck Schumer, 2016년부터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널(Mitch McConnell, 2007년부터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같은 정치가들의 힘은 기업의 돈을 선발된 후보자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데서 나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정치체제, 즉 기업의 돈이 퍼부어지지 않는 체제에서라면 이들은 권력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공통체’(commonwealth), ‘공공적인 것’(res publica)라고 부른 것, 혹은 민중의 재산을 전지구적 기업 과두세력을 위한 약탈과 억압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부를 약탈하고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으며 사법부, 미디어, 입법부를 왜곡시킨, 그리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금융 사기와 절도에 가담할 자유를 확보한, 부유하고 전능한 주인들에 의해 지배되는 노예들입니다.

팬데믹의 와중에서 우리의 도둑정치가들이 한 짓은 무엇일까요?

이들은 오바마와 바이든이 주관한 2008년 구제금융 이래 유례없는 규모인 4조 달러를 약탈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희생시켜 실컷 먹고 배를 불리고는, 남은 부스러기들을 개인용 제트기, 요트, 고급아파트, 궁전 같은 저택의 창문 바깥으로 고통 받고 경멸 받는 대중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지원금이나 세금삭감의 형태로 석유회사들, 항공산업체들(이들만 500억 달러를 경기부양금으로 받았습니다), 유람선업체들에게 수조 달러를 건네주었으며, 부동산업체들에게 1700억 달러를 안겨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사모펀드, 로비그룹들(이들은 지난 20년 동안 정치가들에게 선거기부금으로 1억9100만 달러를 주었습니다), 정육업체들 그리고 미국에서 세금을 나내지 않기 위해서 해외로 이전한 기업들에게도 지원금을 주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소기업들을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불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는 데 쓰여야 할 돈을 가장 큰 기업들이 집어삼키도록 허용했습니다. 이 법안은 경기부양 패키지 하에서 백만장자들에게 80%의 세금삭감 혜택을 주었으며 가장 부유한 자들이 평균 17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경기부양금을 받도록 허용했습니다. 경기부양법안은 또한 4540억 달러가 재무부의 환율안정기금에 할당했는데, 이는 트럼프 패거리들이 기업들에게 나누어준 막대한 비자금으로서 10대 1의 비율로 차입을 한다면 4조5천억 달러의 자산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이 법안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월가에 1조5천억 달러의 대출을 하는 것을 승인했습니다. 이 돈이 상환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억만장자들은 팬데믹 이후 4340억 달러만큼 더 부유해졌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부자인 제프 베조스(그의 기업인 아마존은 지난해에 연방소득세를 하나도 내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팬데믹 이후 자신의 부에 거의 720억 달러를 추가했습니다. 동일한 기간에 55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정리자―강연 원고가 실린 사이트에 가보면 이 단락의 주요 항목마다 해당 자료로 가는 링크가 걸려있다.]

[34:00]




미국은 이제 시체다

 


  • 저자  : Chris Hedges
  • 원문 : America Is Now a Corpse (2020년 11월 5일)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20/11/05/america-now-corps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크리스 헤지스가 Common Dreams에 실은 2020년 11월 5일자 글 “America Is Now a Corps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어조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 첫 단락만 번역이다.) 여기서도 헤지스는 미국이든 한국이든 주류 혹은 준주류 미디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그는 ‘미국 제국 몰락의 예언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미국 현실의 어두운 측면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그 이유는 미국의 제도화된 체제 그 어디에도 희망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희망이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사회운동에 희망이 있다고 본다. (Chris Hedges: Revolutions Only Happen Through Movements 참조) 다만 미국이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하는 시민들의 운동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라는 점―달리 말하자면 그 동안 신자유주의가 사회에 파고든 정도가 미국에서 매우 높았다는 점―이 그로 하여금 부정적 현실(제도화된 기성 체제)의 비판에 치중하게 만든 듯하다. 긍정적인 움직임이 왕성한 곳에서라면 부정적인 측면의 비판에 과도하게 집중할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분단 상황에서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을 기고 기어서 비로소 수많은 촛불들이 삶을 밝히는 곳에 도달한 우리로서는 헤지스가 대변하는, 미국 민중이 처한 상황이 잘 이해되고 또 그렇기에 안타깝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이번 선거를 통해 제도 영역에서 일어날 변화를 짚어보느라고 바쁠 일반 미디어들로서는 도저히 보지 못하고 보려고도 않는 저 아래의 영역에서 이번 선거 기간 동안 미국 민중의 주체성 형성의 새로운 큰 흐름이, 그 큰 흐름의 맹아가 형성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항상 그렇듯이 아래로부터 보는 것이 중요하며 길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미국은 이제 시체다

 

“끝났다.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capitalist democracy)가 끝났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비록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고 빈자와 소수자에게 적대적이지만, 적어도 점진적이고 점증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제공하기는 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시체가 되었다. 상징과 수사(修辭)는 동일하다. 그러나 그 실체는 소수의 과두세력이 자금을 지원하는 공들인, 그러나 공허한 ‘리얼리티 쇼’이다. (바이든은 선거운동에 15억1천만 달러를 들였고 트럼프는 15억7천만 달러를 들였다.) 그 목적은 미국인들에게 마치 선택지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다. 장광설을 늘어놓는 트럼프와 언어 능력에 손상을 입은 바이든 사이의 공허한 대결은 진실을 가리도록 계획된 것이다. 과두세력이 항상 이긴다. 민중은 항상 진다. 백악관에 누가 앉아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메리카는 실패한 국가이다.”

미국의 ‘열린사회’를 살해한 세력들은 다음과 같다.
① 선거과정, 법원, 미디어를 사들인 기업과두집단(corporate oligarchs). 이들은 로비스트들을 통해 입법을 하여 미국 민중을 빈곤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부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을 얻고 있다.
② 쓸모없는 부단한 전쟁을 위해 국고를 탕진한 군사주의자들과 전쟁산업체들. 이들은 약 7조 달러를 탕진했으며 미국인들을 국제적 천민으로 만들었다.
③ 상여금과 보상 패키지를 수억 달러씩 받으며 일자리들을 해외로 보내고 우리의 도시를 폐허로 만들며 노동자들을 (지속적인 소득과 희망이 없는) 비참과 절망의 상태에 빠뜨려 놓은 CEO들.
④ 과학과 전쟁을 벌이며 인류가 멸종하든 말든 이윤을 추구하는 화석연료 산업체들.
⑤ 뉴스를 생각 없는 오락과 우리 당 응원하기로 바꾼 언론.
⑥ 대학으로 물러나서 정체성 정치와 다문화주의의 도덕적 절대성을 설교하지만, 다른 한편 노동계급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제전쟁과 시민들의 자유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공격에는 등을 돌린 지식인들.
⑦ 아무 것도 안 하고 말, 말, 말만 해대는 무기력하고 위선적인 자유주의 계층(liberal class).

가장 큰 경멸의 대상은 자유주의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중재자를 자처하지만 자신들이 수호한다는 가치를 그것이 불편해지는 순간 저버린다. 또한 자유주의 계층은 유럽에서라면 극우로 간주될 후보자와 정당의 치어리더들이며 검열자 기능을 한다. 자유주의자들은 바이든에 의해서 그리고 민주당 고위층에 의해서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면서도, 바이든과 민주당을 비판한 글렌 그린월드(Glenn Greenwald) 같은 저널리스트들을 소외시키느라고 바빴다. 『인터셉트』(The Intercept)든 『뉴욕타임즈』든 자유주의자들은 민주당을 해칠 수 있는 정보를 무시하거나 그 신빙성을 떨어뜨렸다.

민주당과 그 자유주의적 지지자들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절망을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이들은 아무 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 어느 것을 위해서도 싸우지 않는다. 법치의 복원, 보편적 건강보장, 프랙킹 금지, 그린뉴딜, 시민의 자유의 보호, 노조의 구축, 사회적 복지 프로그램의 보존 및 확장, 철거와 가압류의 금지, 학자금대출금의 탕감, 엄격한 환경통제, 정부일자리창출 프로그램 및 기본소득, 금융규제, 부단한 전쟁과 군사적 모험주의에의 반대―이 모든 것들이 다시 한 번 망각되었다. 이런 이슈들을 옹호했다면 민주당은 산사태를 겪었을 것이다. 민주당은 정치자금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선을 키우고 기업의 이윤을 감소시키며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은 민주당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바이든은 아이디어들과 정책 이슈들을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다. 마치 그와 민주당이 아메리카의 영혼을 구한다는 약속으로 선거를 휩쓸 수 있다는 듯이. 적어도 신파시스트들은 자신들의 정신착란적 확신들을 표현하는 용기라도 있다.

전통적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계층은 점진적 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자본주의의 최악의 과잉을 개선함으로써 안전밸브 역할을 한다. 그러나 또한 급진적 사회운동을 불신의 대상으로 만드는 공격견 역할도 한다. 자유주의 계층은 ‘파워 엘리트’의 강력한 구성요소이다. 변화의 희망과 가능성을 아니면 적어도 변화의 환상을 제공한다.

자유주의 엘리트들의 독재에의 투항이 권력 공백을 창출했고 그 공백을 투기자들, 전쟁으로 이익을 얻어내는 자들, 갱스터들, 킬러들이 채웠다. 이로 인해 파시스트 운동을 위한 문이 열렸고 이 운동은 자유주의 계층과 그들의 가치들의 불합리함을 조롱하면서 부각되었다. 파시스트들이 약속하는 바는 허황되고 비현실적이지만, 자유주의 계층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진실에 근거를 둔다. 자유주의 계층이 일단 기능하기를 그치면 억제하기 어려운 악들이 들어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다.

트럼프주의의 질병은 트럼프가 있든 없든 정치체 안에 깊이 함입되어 있다. 트럼프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이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조롱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진 소외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이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획책한 것인데 이들은 이제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있다. 트럼프주의는 또한 백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백인들의 트럼프 지지는 실제로 감소하였다.

19세기 말 도스또옙스끼는 러시아의 쓸모없는 자유주의 계층의 행위가 피와 테러의 시기를 예고한다고 보았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지지한 이상들을 지키지 못하자 불가피하게 도덕적 허무주의의 시대가 왔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주인공은 파산한 자유주의 이념들을 그 논리적 극단까지 몰고 간다. 그는 열정과 도덕적 목적을 피한다. 그는 합리적이다. 그는 자유주의적 이념들의 이름으로 부패하고 죽어가는 권력구조를 수용한다. 지하생활자의 위선이 러시아로 하여금 파멸을 맞게 했다면, 이제 그 위선이 미국을 멸망케 한다. 신념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 분리가 핵심이다.

자유주의 계층은 기업이 권력을 시민들의 손에서 탈취했음을, 헌법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이 법의 명령에 의해 철회되었음을, 선거는 엘리트 지배집단이 연출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불과함을, 미국 민중이 계급전쟁에서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기에 더는 현실에 상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대중은 지배자가 효과적으로 권력을 관리하고 발휘하는 한에서는 정치적 억압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풍부한 사례로써 보여준 것은, 일단 권력자들이 잉여적이 되고 무능력한데도 권력의 치장물들과 특권들을 틀어쥐고 있다면 무자비하게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그랬다. 내[헤지스]가 『뉴욕타임스』에서 취재한, 이전의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에서도 그랬다.

독일 역사가 슈테른(Fritz Stern)은 그의 책 『문화적 절망의 정치』(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에서 독일에서의 파시즘의 상승은 자유주의의 붕괴의 결과라고 썼다. 사회에서 주변화된 사람들이 폭력, 문화적 증오, 개인적 원한에 중심을 둔 정치에 동원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노의 많은 부분은 정당하게도 자유주의적 엘리트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근대 사회―부르주아적 삶, 맨체스터주의[맨체스터에서 일어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회정치적·경제적 운동=자유방임주의], 물질주의, 의회, 당. 정치적 지도력의 부재—의 주요 전제라고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공격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유주의에서 그들의 모든 내적 고통의 원천을 본다. 그들은 자유주의가 그들을 상상적인 과거로부터, 그들의 신앙으로부터 뿌리뽑았기 때문에 자유주의를 증오했다.

미국이 지금 그런 상태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건강관리제도는 국가적 보건위기를 다룰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건강관리 기업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종합병원들을 합병하고 폐쇄했으며 지역 공동체들에서 건강관리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 일선 노동자들의 거의 반이 병가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고 약 4천3백만 명의 미국인들이 고용주 제공 건강보험을 잃었다. 바이든과 민주당이 확립할 의도가 전혀 없는 ‘보편적 건강보장’이 없이는 팬데믹이 극성을 부릴 것이다. 12월까지 30만 명이 사망할 것이며 1월까지는 40만 명이 사망할 것이다. 팬데믹이 소진되거나 백신이 확보될 때쯤이면 어쩌면 수백만 명이 사망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팬데믹의 경제적 낙진인, 만성적 불완전고용과 실업—현재 직업을 구하기를 멈춘 사람, 일시해고되었으나 재고용될 전망이 없는 사람, 시간제로 일하지만 빈곤선 아래인 사람이 공식적 통계에 포함되면 20%에 가깝다—은 1930년대 이래 최악의 불황을 낳을 것이다. 기아자의 수는 지난 해 이후 이미 세 배로 증가했다. 충분히 먹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는 지난해보다 14배 늘었다. 푸드뱅크들의 식사 제공 능력은 수요를 쫓아가지 못했으며 압류와 철거의 일시적 정지가 취소되어 3천만 명의 미국인들이 거리에 쫓겨나게 생겼다.

기업권력을 견제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불가피한 사회적 소요로 인해 국가는 그 주된 사회적 통제도구들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① 대대적 감시 ② 감옥 ③ 군대화된 경찰이 그 도구들이며 이것을 법체계가 지탱하고 있다. 법체계는 비판세력을 잔인하게 짓밟기 위해 인신보호영장과 적정 절차를 취소하기 일쑤다. 유색인들, 이주자들, 무슬림들은 토박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공격의 표적이 될 것이다. 민주당에 대항하여 기업국가(corporate state)와 제국의 범죄들을 비판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받을 것이다. 자신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민주당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유주의 계층의 무기력함은 널리 퍼진 배반감―바로 이 배반감으로 인해 투표자들의 거의 반수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저속하고 인종주의적이며 무능하고 부패한 대통령 가운데 하나를 지지하는 것이다ㅡ 에 땔감을 공급할 것이다. 기독교화된 파시즘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치장하고 있는 미국식 전제정치가 한 시기의 획을 긋는 미국 제국의 쇠퇴를 규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리 후기]

‘시체’의 이미지는 이미 로런스(D. H. Lawrence)가 『미국 고전문학 연구』(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 1923)에서 사용한 바 있다. 로런스는 『모비 딕』(Moby Dick, 1851)의 피쿼드호가 침몰한 이후의 미국을 가설적으로 ‘사후효과’(post-mortem effect)로 본다. 피쿼드는 미국의 영혼의 배이므로 피쿼드호의 침몰은 영혼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로런스에게서 사후효과란 사람들이 영혼이 없이도 에고(ego)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로런스는 ‘에고’를 ‘자아’(self)와는 달리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종획당한 자아, 즉 담이 둘러쳐진 자아라고 이해하면 된다. ‘종획된 자아’의 이미지는 소유적 개인주의의 본국인 미국에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로런스는 미국의 부정적 측면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령 휘트먼에게서 ‘열린 길’(open road)이 제시되고 있음을 짚어낸다. ‘열린 길’은 미지(未知)로 향해있다. 영혼들이 미지로 향하는 이 ‘열린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삶이다. 삶에는 미리 정해진 성취될 목적이 따로 없고 여정(旅程)만이 있다. ‘열린 길’에서는 남녀관계든 동료관계든 사회적 관계든 오직 영혼의 인정에 기반을 둔다. 영혼들이 유일한 부(富)이다. 이러한 측면이 앞으로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구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제도만을 보면 아니다. 일반적으로 제도란 끊임없이 개선되지 않는 한 사후효과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도의 바깥을 보고 제도의 아래를 봐야 한다. ‘열린 길’이라는 형태의 커먼즈가 어렴풋게나마 미국에서 형성되고 있는지를 포착하려면···.




몰락하고 있는 미국 제국과 대통령 선거

 


설명 : 

아래는 비영리 미디어인 Democracy At Work의 울프가 크리스 헤지스와 인터뷰한 것(유튜브에 올려져있다)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 목적은 11월의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아래로부터 바라보는 시각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다. 크리스 헤지스는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해외특파원으로 15년 동안(1995-2005) 활동했으며 2001년에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기사로 2002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반대했으며 이 일로 <뉴욕 타임스>를 떠났다. 이후 뉴스 웹사이트인 <트루스딕>(Truthdig)의 칼럼니스트가 되었는데 14년 동안 활동한 후 2020년에 모든 편집진과 함께 해고되었다. 그는 이라크 전쟁 반대 이후 미국의 주류 미디어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으로 보이며 주로 대안미디어에 나와서 자신의 견해를 펴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 제국의 몰락이 주된 주제이다. 계속 저서를 집필해왔는데, 2010년 이후의 것만 꼽자면 Death of the Liberal Class (2010), Days of Destruction, Days of Revolt (2012), Wages of Rebellion: The Moral Imperative of Revolt (2015), America: The Farewell Tour (2018)이 있으며 지금도 새 책을 준비하고 있다.  America: The Farewell Tour 는 『미국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의 급진주의는 흥미롭게도 종교에 입각해 있는데(그는 장로교 목사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맑스를 자본주의의 주요한 비판자로서 받아들인다. 이에 대해서는 2015년의 <좌파 포럼>(Left Forum) 발제문 「맑스가 옳았다」(“Karl Marx Was Right”)를 참조하면 되는데, 그 두 대목만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맑스는 혁신하고 적응하는 자본주의의 능력을 예리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자본주의적 확장이 영속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자본주의의 대단원과 글로벌리즘의 해체를 목격하고 있기에, 칼 맑스는 자본주의의 가장 예지력 있고 중요한 비판자로서 옹호되어야 한다.

그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부에 자신의 파괴의 씨앗을 심어놓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들―가령 신자유주의―이 창출되어 엘리트 층, 특히 경제적 엘리트 층의 이익에 복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맑스의 통찰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특기할 만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맑스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맑스의 통찰들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현실을 분석하는 데 이렇게 긴요하고 실질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The Declining Empire With Chris Hedges

[앞부분 생략]

WOLFF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현실이지만, 저 위의 정부는 올해 3월 팬데믹 위기의 늪에서 회복하여 상승하는 증권시장을 찬양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부의 더 나아간 축적에 취해서 주위의 현실에 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고전적인 ‘붕괴하는 제국의 지배계급’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인가요? 이들은 모두에게서 훔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느라고 바쁜 것인가요?

HEDGES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문명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엘리트 층은 현실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금융과 정치체제를 모두 통제하는 과두세력이 미국에서 살지는 않는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창출한 거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는 이를 ‘Richistan’이라고 부릅니다.[Robert Frank, Richistan: A Journey Through the American Wealth Boom and the Lives of the New Rich] 이들은 일반 여객기를 타지 않고 노동계급과 접촉하지도 않으며 오직 적은 수의 엘리트들하고만 어울립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스>의 한 기사는 미국 직장에서의 생산성이 1973년 이래 77% 증가했지만, 시간당 임금은 겨우 12% 올랐다는 점을 짚은 바 있습니다. 연방 최저임금이 생산성과 연동된다면 시간당 20달러가 넘으리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노동인구의 3분의 1이 (팬데믹 이전의 일입니다) 시간당 12달러 이하를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고용주가 후원하는 건강보험에 접근하지 못하며, 현재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줄고 있습니다. 직장을 잃은 2천7백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람들이 건강보험도 잃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탐욕스러운 전지구적 엘리트층의 공격이 상황을 이 지경까지 몰고 왔습니다. 팬데믹은 증권시장을 부풀리고 억만장자 층의 은행계좌를 부풀렸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본 수치로는, 이들의 부가 5천억 달러 증가했습니다. 가령 제프 베조스(Jeff Bezos)는 (가장 최근에 본 수치로는) 자신의 부를 3백억 달러 증가시켰습니다. 선거에 돈이 퍼부어지기 때문에, 로비스트들이 우리의 법을 작정하기 때문에, 법원이 기업들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시민들을 구제하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기업들이 세금 거부에 참여하는 체제를 창출했습니다. 아마존은 지난 해애 그 어떤 연방 세금도 내지 않았습니다. 사실 돈을 돌려받았습니다. 아마존만이 아닙니다. 뱅크 오프 아메리카도 그렇고 다른 여러 곳도 그렇습니다. 제지를 받지 않고 계속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맑스는 자본주의를 궁극적으로 혁명적 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약탈과 탐욕에는 내적 제지도, 외적 제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매우, 매우 무서운 사회적·정치적 귀결을 낳고 있으며 그 귀결들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WOLFF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미국 제국의 몰락이라는 시나리오에 이번 선거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요?

HEDGES
아무런 변화도 가져오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선거의 문제는 중요한 사안들이 개별 인물들의 대결구도로 환원된다는 점에 있고 이번 선거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트럼프가 싫기 때문에 바이든에게 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바이든 개인은 우리를 이 지경에 빠뜨린 상황의 연속 말고는 다른 어떤 것을 창출할 수도 없고 제공할 수도 없습니다. 바이든은 ‘신자유주의 정책과 부단한 전쟁’이라는 판을 구축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투표가 트럼프에 반대하는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당신은 트럼프에 반대하지만, 바이든을 뽑게 됩니다. 1994년의 Violent Crime Control and Law Enforcement Act(폭력범죄통제 및 단속법)를 바이든이 밀어붙였는데 이 법은 300억 달러 이상을 경찰과 감옥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바이든은 모든 사형 이슈들을 밀어붙였고, 나프타(NAFTA)의 구축자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전쟁 지지자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우리는 과거[1991년]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힐(Anita Hill)에 불리하게 청문회를 진행한 데서 그의 여성혐오를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분리주의자였으며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할 것을 여러 번 요구했습니다. 이런 미국의 정치체제에서는 골드만삭스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공손하고 호감이 가는 얼굴을 한 바이든을 뽑든 아니면 자기도취적이고 분열을 조장하며 인종주의적인 말을 해대는 트럼프를 뽑든 기업 권력의 체제는 실제로 하나도 건드려지지 않습니다.

WOLFF
트럼프 대 바이든이라는 구도 역시 몰락하는 제국의 징후라는 것이죠? 이런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가진 최선의 방책이 겨우 이 구도라는 점이요?

HEDGES
당연히 그렇습니다. 바이든은 민주당 과두세력 엘리트층이 선발한 사람임을 분명히 합시다. 골드만삭스의 전 CEO인 블래크파인(Lloyd Blankfein)과 같은 인물들은, 만일 샌더스가 (워런Warren도 해당되지만 특히 샌더스가) 후보로 지명되면 트럼프에게 표를 던질 것임을 공표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덜 악한 자’를 뽑는다는 것은 당신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조 바이든을 후보로 내세운 것은 바이든이 트럼프처럼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경제적 체계는 완전히 고정되어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선거가 해결책이 아닌 것은, 민주당이 (클린턴이 기업 세력에게 팔려 넘어간 이후로) 시행한 것과 같은 정책들이 계속된다면 두뇌를 가진 파시스트, 능력 있는 파시스트가 나올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역사가 이를 입증할 것입니다.)

WOLFF
그럼 진행되고 있는 긍정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공화당, 민주당 등등이 표시한 길들 말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HEDGES
거리의 항의 시위들입니다. 유색인 특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한 살해에 의해 촉발된 이 시위들에서 내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성숙함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시위들은 펠로시(Nancy Pelosi)가 가나의 켄테 천으로 짠 스카프를 매고 있다거나 경찰들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거나 브라우어(Muriel Brower, 워싱턴 시장)가 백악관 앞에 35피트의 큰 글자로 “Black Lives Matter”라고 썼다고 해서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브라우어는 그러는 한편으로 경찰예산의 4천5백만 달러 증가와 5억 달러에 상당하는 새 감옥의 건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엘리트층, 특히 민주당의 그런 식의 조작이 시위자들에게는 효과가 없습니다. 어떤 희망이든 지속적인 대중의 시민불복종에서, 세계 전역에서 (레바논, 칠레, 기타 모든 곳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은 봉기들에서 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운동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해결할 문제들이 체제 차원의 문제들임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들은 트럼프나 바이든 같은 개별 정치인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팬데믹의 교훈: 주목할 만한 세 편의 글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Lessons from the Pandemic: Three Notable Essays” (2020. 8. 30) / http://www.bollier.org/blog/lessons-pandemic-three-notable-essay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