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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네그리와 함께 네 개의 손으로 쓰다

 


  • 저자 : Michael Hardt
  • 원문 : Vierhändig schreiben mit Toni Negri https://taz.de/80-Geburtstag-des-Theoretikers/!5062133/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네그리의 80세 생일을 맞아 마이클 하트가 둘의 공동작업에 대해 쓴 글이다. Genre, Volume 46, Nr 2, 2013에 처음 발표됐고 Thomas Atzert가 영어 텍스트를 독일어로 옮겼다. 아래의 정리에는 독일어본을 참고했다. 번역에 가까운 부분들이 있으나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니니 인용이 필요한 경우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원문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표현에서 하트의 1인칭 관점을 유지했다.

 

나는 항상 네그리의 넓은 마음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는 나를 지적으로 진지하다고 보았으며 나의 눈높이에서 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가 나를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그런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마침내 그것이 우리의 공동작업의 토대가 되었다.

나는 공동의 집필이라는 놀라운 경험은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그러한 특수한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확신한다. 우리의 만남과 공동작업에 관해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이 토니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나는 1986년 여름 파리에서 토니를 만났다. 그가 파리로 망명해있던 14년 가운데 세 번째 해였다. 일주일 동안의 방문은 스피노자를 다룬 그의 책 『야만적 별종』을 번역하던 중에 생긴 몇 가지 물음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는 나에게 나중에 오래 머물 생각으로 파리에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며 철학적 사유도 좀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던 시애틀로 돌아와서 논문자격시험을 접었다.

다음 해 여름 나는 아무런 재정수단 없이, 장학금이든 직업이든 숙소든 아무것도 없이 파리로 갔다. 다행히 나는 네그리의 뒷받침과 일부 이탈리아 정치 망명자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 있었다.

내가 파리로 간 지 얼마 안 돼서 새로운 잡지 『전미래』를 위한 계획들이 구체화되었다. 네그리와 장 마리 뱅상(Jean-Marie Vincent)이 주도했으며, 랏자라토(Maurizio Lazzarato)와 나도 편집진에 들어와서 같이 활동하자고 초청받았다. 잡지 편집 모임은 공동작업과 집단집필을 훈련하는 중요한 장이 되었다.

 

집단작업

네그리는 이미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내가 파리에 오기 전에 가타리와 함께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집필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집단작업 능력을 갈고 닦은 것은 무엇보다도 6-70년대 이탈리아의 여러 정치 잡지들과 관련된 활동에서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네그리와 나는 공동으로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후 지속된 공동작업의 시작이었으며 우정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전미래』 같은 정치 잡지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듯이, 공동집필의 방법은 집단실천이라는 형태에 기초한다.

과제들의 분배가 작업의 기초를 이룬다. 본질적인 지적 분석이 집단의 정치적 논의에서 이루어지고, 주장들이 논의되며, 모든 기고들이 상세하게 스케치되고 공동으로 배치된다. 잡지의 계획된 출간 전체가 이렇게 일정한 방향으로 구체화된다. 그때 비로소 개별 구성원들 사이에 과제가 분배된다. 누구는 이것에 대해 쓰고, 누구는 저것에 대해 쓰고, 또 다른 누구는 제3의 주제에 대해 쓰고 등등.

이렇듯 집필은 정확하게 윤곽지어진 활동이 된다. 토론을 통해 이미 전개된 생각들과 주장들이 집단의 일부로서 지면에 오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집필이 전적으로 의미가 있다. 많은 정치 잡지들과 팸플릿에서 기고문들이 익명으로 남더라도 말이다. 집단적 논의로부터 과제를 끌어내는 방법이 공동의 집필과정을 창출하는 것이다.

네그리와 내가 함께 책을 집필할 때, 우리는 생각들을 모아서 오랫동안 논의한다.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집필과정이―이 단계에서 책의 체제와 개요가 그려지며 이는 다시 더욱 다듬어지고 세밀하게 전개되게 된다―논의를 더 진전시킬 기회를 제공한다.

윤곽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논의의 진행이 모든 본질적인 논점들에서 명확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 비로소 우리는 분업을 시작하여 실제로 글을 쓰는 단계로 넘어간다. 각자 맡은 부분들은 짧은 토막들이며 많은 경우 단지 몇 쪽 정도이다.

그 후에 우리는 그렇게 해서 초고를 놓고 토론하고 편집하며, 보완할 것은 보완하고 퇴고 작업으로 넘어간다. 최초의 원고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여러 번, 그리고 여러 단계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공동의 논의 이후에 집필에 착수하는 방식은, 본질적인 지적 노동이 논의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나중의 집필은 기계적인 작업일 뿐이라는 느낌까지 준다. 마치 “당신은 무엇을 말할지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단순히 글로 적는다”는 모토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글 쓰는 이들은 말해야 할 것의 대부분이 집필과정에서야 생성된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주장을 글로 정식화해내려는 노력에 이르러서야만 예기치 못한 장애를 만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접근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테마가 미리 얼마나 뚜렷하게 설정되었는가와 무관하다. 글쓰기의 행복(과 고통)은 글쓰기가 늘 창조적 해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나온다.

 

해방으로서의 글쓰기

우리가 함께 하나의 주장을 글로 다듬을 때 일종의 연금술이 일어난다. 협동하면서 (맑스가 말했듯이) 개인적인 한계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 공동집필에서 개인적인 한계들의 제거는 해방으로서 일어나며, 개별적인 부분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의 발견에는 마법적인 무엇인가가 깃들어있다.

협동의 생산력은 내용과 관련하여 인식되는데, 그것은 집필 내용의 어조와 스타일을 모두 특징짓는다. 다른 많은 집단집필의 저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동 텍스트는 개인적으로 작성한 텍스트들과 미미한 정도로만 같은 울림을 가진다. 이는 단순한 어조의 변화가 아니며 융합도 아니다. 공동집필은 오히려 제3의 목소리를 발생시키며 이는 우리에게 속하는 만큼이나 그 자체로 자립적이다 .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많은 것과 결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단어나 특정 어구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가 사물을 정식화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지고 더 다듬어야 한다. 종종 상대의 단어를 받아들이고 그런 상태에서 새로 생성되는 텍스트의 일관성과 정확성을 주시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아마도 네그리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은 우리가 여러 언어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이탈리아어로 토론한다. 우리가 원고를 각자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로 쓰든 영어로 쓰든 말이다. 언어의 상이성은 어떤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 일정한 자율을 제공한다.

퇴고 과정에서 이탈리아어로 쓰인 것과 영어로 쓰인 것이 혼합된다. 물론 둘 모두 텍스트를 편집할 때에는 가능한 한 전체가 통일되도록 노력하지만 말이다. 최종 단계에서 비로소 원고는 통일된 언어를 얻는다. 이는 보통 영어인데, 이 경우 내가 책임을 지게 된다.

내용의 차원은 더한 노력을 요구한다. 우리가 특정의 주장을 공유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이 별로 없다. 현실적인 차이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물론 상대방의 생각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사유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볼 때 공동집필은 일종의 계속적인 상호표절 과정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는 맞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생각들이란 결코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동의 지적 작업은 무엇보다도 사이영역(Zwischenbereich)을, 즉 모두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생각들을 창출한다. 아마 이것이 때때로 그 영역에 마법적인 어떤 것이 깃드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들이 고유한 것이 되기를 멈추며 공통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상이한 사유방식의 상호작용

공동저술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고 할 때, 이는 각자의 몫이 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상이한 사유방식, 재능, 스타일, 기질이 공동의 과정에서 상호작용하는 바로 그 가운데에서 본질적으로 잉여가 산출된다.

각자가 집필한 부분들을 합하여 회계원처럼 면수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계산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필과정에서의 동등성이란 그러한 계산이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물론 함께 하는 작업이 성공하리란 보장은 없다. 성패의 시금석은 엄밀한 의미에서 스피노자적이다. 즉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을 하는 것이 자신의 고유한 사유능력을 촉진시키느냐 아니냐’이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심지어는 대부분의?) 만남들이 사유를 촉진하거나 세계를 더 잘 이해하게 하는 데, 또한 주장을 명확하게 정식화하고 개념을 창출하는 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켜 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놓치지 말아야 하고 소중히 해야 할 행운이요 선물이다. 공동집필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동등함이란 양자가 동등한 정도로 이 경험을 한다는 데 있다.

공동집필에 요구되는 특수한 상황과 노력을 고려하건대, 그러한 공동집필을 보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네그리와 함께 한 나의 경험은 모든 노력에 값하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나에게 주었다.

 

 




전 세계 LGBT들은 ‘백인 구원자’가 자신들을 구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다

 

  • 저자 : 루 페레이라(Lou Ferreira). 루는 ‘2020~2021 백래시 추적(2020-2021 Tracking the Backlash)’의 국제 조사 연구원이다.
  • 원문 : LGBT people globally are not waiting for ‘white saviours’ to rescue them (2021. 6. 8) https://www.opendemocracy.net/en/5050/lgbt-people-globally-are-not-waiting-for-white-saviours-to-rescue-them/(This article is published under a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 4.0 International licenc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채희숙
  • 설명 : 이 글은 넷플릭스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Hating Peter Tatchell>(크리스토퍼 에이모스Christopher Amos, 호주, 2021)에 관한 짧은 비평글을 번역한 것이다.

전 세계 LGBT들은 피터 태철 덕분에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니지만, 넷플릭스의 신규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엘튼 존(Elton John)의 후원으로 지난달에 개봉된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는 유명하고 논란이 많은 영국의 LGBT 인권 활동가와 그의 반세기 넘는 캠페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양한 목소리와 결정적인 맥락을 제외함으로써 이 시기의 더 넓은 이야기를 반영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태철을 모든 곳에서 퀴어를 구하는 ‘백인 구원자’와 같은 인물로 보여준다.

이것은 훨씬 더 풍부하고 힘있는 작품일 수 있었다. 그러나 도리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가지 주요한 이유로 나는 좌절했다.

1. 사라진 목소리들

유명한 게이 배우들인 스티븐 프라이(Stephen Fry)와 이안 맥켈런(Ian McKellen)을 포함에서 거의 전부 백인 남성 영국인인 인터뷰 출연자들은 영국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태철의 LGBT 권리를 위한 50년 넘는 캠페인과 시민불복종 활동을 돌아본다.

우리는 태철이 10개국 넘는 곳에서 벌인 시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가 2018년 축구 월드컵을 앞두고 푸틴의 반LGBT 정책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러시아 여행을 준비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옹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한다. 풀뿌리의 승리들은 당사자가 아닌 영국 유명인들의 이야기들에 가려진다.  

누가 푸틴의 러시아에서 성적 권리에 반대하는 백래시에 따르는 인적 희생을 설명하는가? 스티븐 프라이다. 러시아 LGBT는 체포와 동성애혐오 폭행을 담은 푸티지에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태철 이야기의 소품에 불과한 것처럼 배경에 있다. 우리에게 직접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러시아 활동가에게서 우리가 듣는 것은 태철의 도움에 감사하는 말뿐이다.

2. 사라진 맥락

태철은 영국의 LGBT에게 1980년대는 “악몽과도 같은 시기”[인용은 영화 자막을 따름-옮긴이]였다고 회상한다.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학교에서 동성애를 소위 ‘조장’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 28절을 내놓은 한편 에이즈바이러스(HIV,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의 확산은 반동성애 차별을 악화시켰다. 태철은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체포의 급증을 언급하면서 “경찰은 우릴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당시의 반인종주의 투쟁을 어떻게든 반영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경찰의 보호를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누리지는 못하는 특권이었다. 흑인 시민권 운동은 태철이 그 운동에서 자신이 영감을 받았고 “그들의 이상, 가치, 방법을 [배워서] 나의 인권 운동에 적용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잠시 거론된다. 

반LGBT 차별이 어떻게 인종 또는 젠더에 기반을 둔 억압과 교차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는 특히 흑인 트랜스 여성을 폭력의 위험에 처하도록 계속 내버려둔다. 또 스크린에서 밀려나있는 것은 바로, 장애인의 권리에서 광부들의 노동쟁의에 이르기까지 1980년대에 떠오른 영국의 다른 시민권 투쟁들이다.

3. 백인 구원주의?

2001년 태철은 호텔로비에 매복했다가 짐바브웨의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Robert Mugabe)에 대해 고문‘죄’를 근거로 한 시민체포를 극적으로 시도했다. 그는 영화에서 “짐바브웨의 인권 운동가는 제가 국제적으로 무가베 정권의 만행을 알릴 행동을 취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해왔습니다”라고 설명한다.

러시아에서 태철에 관해 보도된 바처럼 이 다큐멘터리는 짐바브웨 활동가들에게서 직접적으로 듣는 장면을 오직 하나만 제공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것은 지역 운동원들이 백인 영국인에게 감사하고 있는 클립이다. 그들이 수년 동안 자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워온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장면에서 우리는 태철이 런던의 이슬람사원 바깥에서 캠페인하는 것을 본다. “[우리는] 무슬림 공동체와의 결속력을 다지고자 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한다. 런던에는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그런 연대를 형성하고 있는, 유색인종이 이끄는 수많은 단체들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점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피터 태철: 세상이 미워한 남자>은 LGBT 권리운동의 전체 역사를 제시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이들의 목소리와 역할을 무시하고, 태철이 세계의 퀴어를 구하는 1인 시위 기계인 것처럼 그를 위치지은 것에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전 세계 LGBT는 백인 영국 남성이 나서서 자신들을 구해주는 것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LGBT가 그러한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그릇된 이해를 낳으며 모욕적이다.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커머닝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

 


  • 저자  :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 원문 :  Introduction to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
  • 분류 : 일부 내용 번역
  • 번역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커머닝’에 관한 여러 저자들의 글 모음집인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2017)의 “Introduction”(책 편집자인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집필) 가운데 한 절(‘Five autonomist principles for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작자표시비영리 4.0 국제(CC BY-NC 4.0)이 적용된다.

    키워드 : 커머닝(commoning), 커먼즈(commons), 커머니즘(commonism), 공통적인 것(the common), 자율주의(autonomism), 관점주의(perspectivism), 다중(multitude),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대중지성(mass intellectuality)


우리는, 이 책에 모아 놓은 글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행간에서 제기하는 공동의 관심사들로서 다섯 개의 이슈 혹은 테마들을 뽑아볼 수 있다. 이 다섯은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커먼즈(commons)에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다섯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목록은 커머닝(commoning)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를 짚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거시적 사회경제의 광범한 맥락을 부각시킨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인지자본주의와 비물질노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구체적으로 상응하는 이론들과 실천들에 주목한다(Boutang, 2002; Hardt & Negri, 2004: 109; Gorz, 2010). 각 저자들은 비록 상이한 이론적·실제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제들에 상이하게 접근하지만 모두 자본의 작동을 나름으로 일정하게 비판하며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거부한다. 저자들은 현 시대의 종획 현상들이 보이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태와 그에 수반되는 일반화된 상품화를 넘어서는 생각들과 기획들을 짚어내고 설명한다.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은 모두 내재적 접근법을 따르는데 이 접근법에서는 커머닝의 이론과 실천이 내부로부터 그리고 현 시기의 투쟁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탐구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저자들은 공유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피한다. 저자들은 오히려 커먼즈를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의 창출로 인식한다. 커먼즈를 살기·일하기·사유하기·느끼기·상상하기의 새로운 집단적 실천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실천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하게 종획하는) 형태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를 사적 혹은 공적 통치체제에 의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물(재화)로 간주하지 않으려 한다. 실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현재의 고전적인 대립이 가지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참조되지도 않는다. 커먼즈는 오히려 사회변형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변형의 지렛대로서, 인지자본주의의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생산형태들 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회들로서 인식 된다. 이것들은 다시 실제적 사회적 관계들의 파열을 (균열을)(Holloway, 2010) 통해 드러나거나 가능하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 및 소비의 관행들에 대한 대안들의 발전을 통해 실현된다.

셋째, 커머닝의 실천을 통한 사회변형을 이렇게 탐색하는 것은 커머닝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가 객관주의적 접근법이 아니라 관점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정식화되는 비전과 제시 방식을 함축한다. 관점주의적 접근법이란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인 것이 구축되는 사회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들과 기획들의 탐색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접근법이다. 실제적인 것을 넘어서 가능한 것을 찾기에 집중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관점주의적 지식의 탐색자들로 하여금 실제적 효력을 가진 진실들을 추구하도록 이끈다(Negri, 1991; Virno, 2004). 말하자면 가능한 사회변형을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들에 대한 통찰을 발전시키도록 이끈다. 따라서 경험적 서술은 추상적으로 분리된 것(객관적 추상으로 관념화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 의해 결정되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특히 다중의 주체적 관점에서 사회변형의 실천과 커머닝의 투쟁 및 실천을 본다. 다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행동능력을 발휘하는 개인들(특이성들)의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다중은 특히, 확장하는 인지자본주의가 행하는 종획과 강탈에 맞서며 실질적인 대안들을 구축할 기회를 추구하는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이 다중 개념이 자율주의적 관점주의의 준거로서 사용된다. 이 관점주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 발전된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 책에 제시된 여러 생각들이 우리의 일상적 생활 조건에서 커머니즘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로의 이행을 실현할 가능성들을 성찰하고 일궈내는 일을 촉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 커머니즘적인 미래를 위해 사회를 변형하는 다중의 힘을 이렇게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넷째 테마는 삶정치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대안적인 삶의 상황과 일하기의 상황을 창출하고 자율과 저항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려는, 저자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노력이다. 그러한 변형을 실현하는 다중의 구성적 힘에 관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을 짚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중간에 해당하는 많은 입장들이 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표명했고 이 책에 글을 실은 다양한 기고자들이 참조하는 더 낙관적인 첫째 비전에 따르면, 지식 생산의 증가된 공통성과 자율적 노동의 내재성으로 인하여 비물질노동과 다중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들이 출현한다. 우리가 자동화·정보·소통(이는 삶정치적 생산의 토대로서 점점 더 네트워크들 안에서 네트워크들을 통하여 협동적으로 발전하고 비물질노동에 의하여 형성되고 관리되며, 그 내에서 노동자 자신들이 생산수단의 담지자가 되었다)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시기에 진입함에 따라 이 네트워크들 및 그에 따른 생산 수단들은 더 이상 자본에 의해 제공되지 않고 노동 내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 비전에서는 이제 바로 산 노동과 그 속성들이 가장 중요한 발전의 힘이 된다. 이 힘은  일반지성이 아니라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자들의 대중지성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적으로 지식·아이디어·소통의 생산이 노동의 내부에 있고 자본의 외부에 있는 협동 형태들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종획을 조직화하고 노동이 생산한 부를 전유하려는 시도들을 내적으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커머니즘적 미래가 노동의 자율성과 협동성의 내재성을 통해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자본의 통제기술과 전략에 귀속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다중의 해방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비전은, 인지노동이 점점 더 자율적이 되어 더 이상 자본의 지배를 돕지도 않고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지도 않게 되는 해방의 궤적이 임박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생산이 점점 더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자율성이 점점 증가한다는 이런 생각 대신에 이 둘째 비전은 반대되는 궤적에 주목한다. 즉 특히 인지노동의 정신과 욕망을 통제하는, 그 영혼을 통제하는 새로운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 덕분에 자본측이 인지노동 시대의 삶, 일, 사회적 심리를 통제하는 힘이 증가한다고 보는 것이다(Berardi, 2009). 따라서 자본이 인지노동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은 포디즘적 생산에서처럼 특정의 착취 영역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으며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채우고 이끌고 식민화한다. 기술-사회적 지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인간자본으로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인간 전체라는 것이다. 포획된 것은 바로 이것, 즉 사회적 리비도 그 자체와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방식(지성·상상·사회성 등)이다. 이 비전에서 자본이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는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지노동에 발휘하는 힘은 불가역적으로 보이며, 제국의 권력망을 돌파하는 다중에 기반을 둔 낙관적 비전의 실현을 막는다(지금은 간헐적인 승리만이 가능하며 이 승리들은 안전밸브 메커니즘처럼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명백하게도 훨씬 더 황량하지만 이 둘째 비전이 모든 행동을 부정하거나 인간활동의 자율성과 창조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둘째 비전은 오히려, 욕망의 맥락을 더 잘 짚어내고 그럼으로써 정동·아이디어·상상의 영역들과 같은 다양한 심리 영역들을 지배하는 타율적인 기술 권역들(정보·소통·바이오테크놀로지의 영역들)이라는 실제적 맥락 속에서 이 자율성이 형성되는 방식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깊이를 가진 반응을 끌어내고자 하는, 힘이 좀 많이 들어간 호소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의 저항 및 자율성과 이에 대한 분석을 재혁신할 수 있는 의식을 최소한 가지자는 호소이다. 따라서 이 둘째 비전은 새로운 대중지성이 다시 발전하여 (현금의 지식 경제의 하이테크 영역들의 일반지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재창출 할 수 있는 길들을 찾아보자는 호소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전들과 해석들 그리고 적극적인 결과들을 낳을 잠재력을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몇몇 기본적인 문제들을 함축한다. 다중은 새로운 공통성들이 수립될 사회적 공간들을 생성할 수 있는가? 인지자본은 그러한 기획들을 어느 정도로 흡수할 수 있고 대중지성을 자신의 구조들 안에 어느 정도로 봉쇄해 놓을 수 있는가? 이 책에 실린 글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것은 비결정론적 테제일 것이다. (인지노동의 힘의 내재적인 강화와 함께, 그러나 또한 자본에 의한 그리고 자본을 위한 전복 및 조작과 함께) 자본에 기반을 두지 않은 대안적인 발전의 기회들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이 기회들을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자율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하는 것에 발맞추어 선택과 가능성 즉 미래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시기에 인지노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보는 두 입장인 유토피아론과 디스토피아론은 이렇듯 현재의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참조점들의 두 극단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커머닝을 위한 가능성들을 탐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섯째 테마로 이어진다. 자본(인지자본의 모순)과 (이후에는 변이될) 국가 내에서 혹은 상품의 세계 외부(커먼즈 내에 실현될 것)에서 혹은 양쪽 모두 다(안과 밖)에서 전개되는, 다중에 의한 다양한 커머닝 실천과 사회적 공간의 창출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다중의 커머닝 실천의 관점에서 이 세 위치들을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고찰할 때 그 전체적 효과는 공통적인 것의 결합된 비전의 출현(또한 개방된 다원성의 출현)이며 여기서 그 축적된 효과는 그저 전적인 파열이나 탈출이 아니라 파열을 포괄하면서 자유로운 공간들을 확대하는 지속적인 전개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는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면서도 혁명적 계기를 요구하는, 특정의 단기적 성공을 가치화하면서도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는 그러한 과정이다. 이는 과정으로서의 진보이며, 자본에 적대적이고 자본과 양립 불가능하지만 또한 자본 안에서 발전하고 그래서 자본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여기서 커머닝은, 특수한 맥락에서 설계되고 사람들이 커먼즈를 드나들고 자본주의/국가주의의 맥락들(환경, 회로)을 드나들면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실천이 이 책의 글들이 고찰하는 커머닝 활동과 분석들의 범위를 나타낸다.

 

References [위에 번역된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 발췌함—정리자]

Berardi, F. (Bifo) (2009). The Soul at Work: from Aleination to Autonomy. Los Angeles, CA: Semiotext(e).
Boutang, Y. M. (2002). L’eta del Capitalism Cognitive. Innovazione, proprieta e Cooperazione delle Moltitudine. Verona: Ombre Corte.
Gorz, A. (2010). The Immaterial. Knowledge, Value and Capital. Calcutta: Seagull Books.
Hardt, M. and Negri, A. (2004).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Holloway, J. (2010). Crack Capitalism. London: Pluto Press.
Negri, A. (1991).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e. Brooklyn, NY: Autonomedia/Pluto.
Virno, P. (2004). A Grammar of the Multitude. Los Angeles/New York: Semiotext(e).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Guido Ruivenkamp and Andy Hilton

1 The Prefigurative Power of the Common(s)
  Mathijs van de Sande
2 Realising the Common: The Assembly as an Organising Structure
  Elise Thorburn
3 Instituting the Common: The Perspective of the Multitude
  Sonja Lavaert
4 Insolvency/Autonomy: What is the Meaning of Autonomy in the Semiocapitalist Age?
  Franco Bifo Berardi
5 The Conditions of the Common: A Stieglerian Critique of Hardt and Negri’s Thesis on Cognitive Capitalism as a Prefiguration of Communism
  Pieter Lemmens
6 Grounding Social Revolution: Elements for a Systems Theory of Commoning
  Massimo De Angelis
7 Commodification and the Social Commons: Smallholder Autonomy and ‘Rurban’ Relations in Turkey
  Murat Ozturk, Joost Jongerden, Andy Hilton
8 The Square as the Place of the Commons
  Ruud Kaulingfreks and Femke Kaulingfreks
9 Transition towards a Food Commons Regime: Re-commoning Food to Crowd-feed the World
  Jose Luis Vivero-Pol
10 Seeds: From Commodities towards Commons
  Guido Ruivenkamp
11 Peer-commonist Produced Livelihoods
  Stefan Meretz




인간의 연대와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

 



코비드19 팬데믹은 인간의 조건의 가장 근본적 특징을 상기시킨다. 국경을 가로질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를 말이다. 맹한 민족주의와 경쟁논리가 서둘러 막으려 하는 이 상기는 진정한 전지구적 정치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커먼즈”라 부를 정치기구를 말이다.

팬데믹의 교훈은 일어나리라 예견되는 지구 온난화와 일련의 재앙을 비롯한 인류가 대면할 다른 주요 문제들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전지구적 바이러스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우리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결코 우리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대면하도록 무장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을 정치적으로 재고하는 일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다.

바이러스로 입증된 인간적 연대

바이러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연대의 증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설명을 제공한다. 경제적 교류,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도시화, 국경을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함께 사회들의 점증하는 상호침투가 전염병의 확산을 상당히 가속시켰다. 전염병의 확산은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재정이 부족한 보건 기구들만을 앞질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앞질렀다.

전염현상은 19세기 말 사회학자와 철학자가 ‘연대’라 부른 것을 가시화한다. 뒤르켐은 1893년 학위논문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개인들의 상호엮임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자, 사회들을 특징짓는 연대유형에 따라 사회들을 구분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학이었다고 말해지는 ‘연대주의’론이 연대를 정부의 사회정책을 고무해야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연대주의 사조의 주요 창시자인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1851~1955)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서 민중은 마치 모든 존재, 모든 물체가 전(全)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놓여 있듯,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서로 놓여 있다. 연대의 법칙(the law of solidarity)은 보편적이다.” 이처럼 연대는 삶·건강·일·사유·느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다윈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맞서 프랑스 연대주의자들은 인류의 협동에 대한 다윈의 저술에 특히 의존하여 연대의 법칙을 응집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공중보건론자들은 연대 개념을 차용하여 그것을 공중보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내무부의 공공지원·위생국장 앙리 모노(Henri Monod, 1843-1911)는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부유한 도시와 가난한 도시 사이의 재정적 연대를 장려하는 연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중보건은 우리의 상호의존, 인간의 연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일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각자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인간 존재들의 건강·삶에 예기치 않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존재들 혹은 사라진 지 오래된 존재들이 우리 건강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에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본질적 조건들에 매 순간 영향을 미칩니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시민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보건연대는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공중보건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모노의 명쾌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언젠가 유럽에서 희생자들을 낳을, 위생에 반하는 어떤 잘못이 이 글을 쓸 때 갠지스 강둑이나 인도의 항구 중 하나에서 저질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때 또 다른 활동이, 이번에는 현재의 재앙으로부터 수천, 수백만을 구할, 과학으로 분류될 행동이 어떤 멀리 떨어진 해외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 인류가 위생의 정복으로 이익을 볼 수 있듯이 위생 관련 범죄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보건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보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전염이 입증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바로 전염병 전문가 찰스 니콜(Charles Nicolle, 1866~1936)에게서 본다. 니콜은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염병에 관한 지식은 인간들이 연대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똑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인 것이며, 감염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동료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해 말하면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이 같이 하는 노력을 통해 단결한다면 얼마나 생산적 결과가 생길까요!”

과학계에서 이러한 인식이 커지는 것과 함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제회의가 페스트·콜레라―콜레라는 1830년에서 1847년 사이 대혼란을 낳았다―와의 싸움 중 1851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19세기 말부터 쭉 모노는 이러한 ‘고전적’ 전염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다루는 국제기구를 옹호했다. 바로 그러한 국제기구로서 <국제공공위생사무소>(the Office International d’ Hygiène Publique)가 1907년 로마에 설립됐다.

공중보건의 국제화는 1921년 <국제연맹보건위원회>(the Health Committee of 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운영이 시작된 1948년 이전인) 1946년 결성이 결정된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다.

국민국가의 봉쇄

연대 개념의 발전 및 공중보건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대응은 여러 면에서 재앙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긴축과 수익성이 인도한 수십 년간의 보건정책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무장해제됐는지가 드러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보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국민국가 논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국가는 전지구적 보건위기가 제기한 문제에 각각이 마치 섬나라인 양 대응했다. 각 국가가 다른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자기 식대로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금세 목격한 것은 국경 봉쇄, 준수해야 하는 엄격히 국가적으로 정의된 각각의 전략들, (때로는 타국에 해가 되는) 자원동원과 자원징발,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취해진 조치들에 대한 이따금씩 일어나는 폄하나 비난이었다.

보건전선에서 ‘다자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보여준 이 일반적인 정치적 불협화음과 함께 우리는 국가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최대의 과학적·행정적 혼란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각 국의 의약담당 부처들(the national drug agencies)은 방법론의 조정 없이 각 나라, 각 연구실, 각 산업이 다른 나라, 다른 연구실, 다른 산업을 앞서려 하면서 각자 그들만의 게임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연대운동의 위대한 교훈이 어떻게 그리 빨리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오래 완전히 부인할 정도로 우리 정부들이 빠져있던 경련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 중 두 가지 즉 국가적 수준의 요인 하나와 전지구적 수준의 요인 하나에 집중하기로 하자.

시민적 책임, 자기이익 그리고 국가강제

전염병 학자들에 따르면, 코비드19 같은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모든 인간 간 전염사슬을 끊는 것, 즉 각 개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들이 그저 자신들만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호적 관계에서 각 개인들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상호적 보호를 의미한다.

‘공중보건’(public health)을 말할 때 우리가 너무도 자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표현에서 ‘공’(public)이 ‘국가’(the state)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의 전(全) 시민들이 구성하는 전체적 집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부들은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대항하는 싸움에서의 주요자산이 시민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대체로 포착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공리주의적 독단, 신자유주의적 규범, 개인주의적 요구로 심히 오도돼온 정부담론 사회적 연대가 전염병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느낌과 인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 정부들에게는 가장 부적실한 단어들만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명백한 자기이익에 대해 말하는, 혹은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 각자가 지는 개별적 책임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 말이다. 정부들은 사회가 고립된 원자들의 뒤섞임인듯, 각인들이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것인듯 행동했다. 거리를 둬야하고,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씻어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정부들이 집단적 운명에서의 우리 각자의 공동책임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장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정부들이 경쟁·대결·이해대립 말고는 개인들 사이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국가들은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 접근법으로 대응했고 세계보건기구는 국가들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력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네바에 있는 <국제개발대학원>의 <글로벌보건센터>(the Global Health Centre at the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and Development Studies) 공동센터장인 전염병 전문가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국가주의적 주권의 원리가 세계적 문제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험을 완벽하게 예견하지 못했다고 세계보건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와 연계되어 있고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 특히 더 책임을 지는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the Global Preparedness Monitoring Board)는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몇 달 전 세계에 경고했다. “만약 ‘지나간 것이 서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5천만에서 8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경제의 거의 5%를 일소할, 빠르게 움직이며 대단히 치명적인 호흡기 병원균 팬데믹이라는 너무도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이런 규모의 전지구적 팬데믹은 광범위한 대혼란과 불안정, 불안전을 초래할 재앙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2019년 9월 배포했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를 위하여

이 위기의 결과가 ‘국민국가의 귀환’, ‘국가주권의 부활’이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오해들 중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건을 전지구적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통적인 것은 집단적 결정이 “공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만들기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승인에 입각하여, 공동체가 자원이나 써비스 혹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백신은, 건강에 대한 전 인류의 기본권과 백신 사이의 정치적으로 수립된 연관에 입각해 있는 ‘공통재’다.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 커먼즈를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 백신이 공통재라는 결정이 채택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창출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이외에 전지구적 보건을 위한 다른 유형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는 국가기금과 민간 기금에 이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는 협력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심의와 결정이 구속력 있는 세계적 기준을 구성할 세계보건기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간’ 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cal) 기관은 모든 국가·지방·지역의 비영리보건기관을 연합하고 모든 나라의 연구원을 동원할 것이다. 이 기관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에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정보·통지·협력의 임무를 맡지만, 세계보건기구와 달리 보건에 대한 인구의 기본권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을 일국의 수준에서 그리고 국지적 수준에서 동원할 권위를 가질 것이다.

지구화의 이러한 결과가 제기하는 물음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겨 놓을 위험과 대면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새로운 제도를 미래 인류가 수립할 수 있을까이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가 그 일환이다.

 

 




정치적 시험으로서의 팬데믹: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장하며

 



코비드19 팬데믹은 전례 없는 전지구적 건강·사회·경제의 위기이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에는 거의 없다. 이 비극은 모든 인류를 위한 시험/시련(épreuve)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어 ‘épreuve’의 두 의미 ―시련, 즉 거대하고 고통스런 일이자 시험·평가·판단이라는 두 의미― 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의 이중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은 이제 개인적 상호의존의 수준에 놓여 있는, 즉 바로 사회적 삶의 토대에 놓여 있는 전지구적 문제에 대처할 우리 정치경제씨스템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듯한 현재 상황은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전지구적 경제정치구조가 기후변화위기에 대처하고자 급속히 발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말이다.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국가주의적 대응?

첫 번째 관측. 세계 전역에서 이 전지구적 전염병에 다소 보완적인 두 방법으로 대응하고자 국민국가의 주권적 힘에 모두 기꺼이 의존하려한다.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에서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포했든 아니든) 대체로 ‘비상사태’를 내세움으로써 개인적 접촉을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실행하는 데 의존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바이러스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시민들을 보호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규율과 국가보호주의가 펜데믹과의 싸움에 사용되는 두 주요 무기이다. 여기서 국가주권의 두 얼굴 즉 내적 지배와 외적 독립을 보게 된다.

두 번째 관측. 모든 규모의 기업들이 이 시험/시련에 견디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는데, 이는 파산을 면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가능한 많이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재정지원과 보장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국가는 경제를 살리고자 한없이 지출하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과 몇 주 전에 공공부채 제한에 대한 그리고 예산제약에 대한 강박적 우려로 인해 병원직원, 병원침대 혹은 응급써비스를 늘리라는 모든 요청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이후 국가는 적어도 민간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씨스템을 강화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개입의 미덕을 재발견했다.

지금까지의 가장 야심찬 부양책 중 하나가 독일에 의해 시행됐다. 그 부양책은 독일연방공화국 시작 이래 규범이었던 질서자유주의(([옮긴이]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는 자유시장이 이론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한 국가개입을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독일식 버전이다.)) 도그마와 갑작스레 단절했다.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혼동하면 안 되는 이 갑작스런 전환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국가주권의 특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연대의 끈에 영향을 미친 팬데믹에 대한 내적·외적으로 모두 효과적인 대응일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경종을 울릴만한 일이다. 국가형태에 내장되어 있는 외국인 혐오는 바이러스가 모든 인류에 가할 치명적 위험에 대한 인식이 커져감에 따라서 특히 분명해지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확산에 서로 전혀 연계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특히 중앙유럽국가들이 ‘해외바이러스’로부터 인구를 지키고자 국가영토의 행정장벽을 매우 신속히 쳤으며, 유럽에서 국경을 봉쇄한 최초의 나라들은 가장 외국인 혐오적이기도 했다. 빅토르 오르반(([옮긴이]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그리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헝가리 총리로 재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이 불을 지폈다. “우리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 전선은 이주이고 다른 한 전선은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양자 모두 이동을 통해 퍼진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과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분위기 즉 ―유럽 및 그 밖의 다른 곳의 극우가 기뻐할 법하게도― 모든 국가가 그들 자신의 것을 돌봐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들과의 연대의 결여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방치한 것 ―이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 의료장비와 보호마스크를 보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기심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은 국가들 간의 전면적 경쟁에 토대를 둔 유럽에 조종을 울렸다.

국가주의 주권과 전략적 선택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bhanom Ghebreyesus)는 우리가 팬데믹을 상대하고 있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와 국가들 상호관계에서의 놀라운 수준의 무대책에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 무대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팬데믹 전문가인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 세계보건센터 공동소장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세계적 문제에 있어 국가주권 원리가 지속함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이는 놀랍지 않습니다. 국제협력은 항상 취약했지만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지구화에서 빠지기를 열망하는 정치치도자의 선출로 지난 5년 여 동안은 더욱 취약했습니다. … 세계보건기구가 제공하는 포괄적 관점이 부재한 채 우리는 재앙의 위험을 무릅써야합니다. ··· 따라서 전 세계 정치·보건 지도자들에게 권고하는 점은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접근과 연대가 시민들의 책임 있는 행동을 북돋는 본질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수에리 문의 언급이 적절하긴 해도 그녀는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수십 년간 재정적으로 약화되어왔고 현재는 민간 기부자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금의 80%가 민간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약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는 1월 초부터 수집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발본적 조기 통제 권고가 궁극적으로 옳았다는 점 때문에도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전지구적 협력을 위한 최초의 틀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에서 효과적이었던 체계적 검사, 접촉 추적을 포기하는 선택은 바이러스가 잠재적으로 모든 국가에 퍼지는 데 기여한 중대한 실수였다.

검사·추적의 이 걱정되는 지연은 궁극적으로는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이 이전에 그랬듯이 이탈리아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절대적 봉쇄 전략을 재빨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집단면역’이라는 숙명주의적이자 은밀한 다윈주의적 전략으로 대응이 너무 지체됐다.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의 영국은 초기 접근에서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두말할 필요가 없는 미국 이외에도 프랑스, 독일 같은 다른 나라들은 제한 조치를 얼버무렸고 지체했다. 이 나라들은 ‘완화’ 전략, 즉 ‘감염곡선 완만화’에 의한 전염병 지연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우한과 후베이성에서 행해진 대로 인구에 대한 체계적 검진과 일반적 격리를 사용하여 바이러스를 초기부터 통제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사실상 포기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예측에 따르면 집단면역 전략은 전 인구의 50-80%의 감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가장 취약하다”고 추정되는 수십만의 심지어 수백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는 매우 명확했다. 국가들은 바이러스 양성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 검사와 접촉 추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전염병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

왜 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를 그렇게 신뢰하지 못했으며, 왜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연계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세계보건기구에 부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전염병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나라를 실제로 마비시켰다. 경제적 생산과 무역의 동결이 그런 규모로 이뤄진 적은 없었으며 그 결과는 중국에서의 매우 심각한 경제·금융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독일·프랑스·미국이 그들의 경제를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상황이 ‘날마다’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경제와 공중보건의 긴급사항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저했다. 더 심각한 장기예측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말이다. 3월 12일에서 15일에 정부를 뒤흔들고 정부로 하여금 결국 총체적 격리전략을 택하도록 강제한 것은 그 이상의 주저가 수백만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임페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이후 너무도 명백해진 것은 행동경제학과 이른바 ‘넛지 이론’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파괴적 영향인데, 넛지 이론은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데 강제나 구속보다는 인센티브와 자극에 의존한다.(([옮긴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심리적·인지적·정서적·문화적·사회적 요인 등이 개인과 조직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이다. 넛지(Nudge)는 간접적 제안과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개인 또는 그룹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경제학의 개념이다.))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은 영국 정부에 조언하는 ‘넛지 유닛’ 혹은 ‘행동통찰팀’이 다음과 같이 국가에 그들의 이론을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는 점이다. 즉 너무 빨리 엄한 조치에 의해 제약을 받은 개인들이 전염병이 최고도일 때 즉 규율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때 규율에 지쳐 해이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2010년 이후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경제이론 ―『넛지』(Nudge, 2009)에 간추려져있다― 은 ‘효율적 국가 거버넌스’를 창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접근법은 강제 대신 ‘넛지’를 사용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고무하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에게 온화하고 간접적인, 편안하고 선택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말이다.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이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의 적용은 이중적이었다. (1) 강압적 조치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 (2) ‘전염예방행동―거리두기, 손 씻기, 옷소매에 기침하기, 열이 나면 자가 격리하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기―에 대한 선호가 그것이다.‘

말랑한 자발적 조치에 의존하는 이 도박은 위험한 것이었다. 전염병 상황에서 이 접근법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혹은 경험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이제 이 접근법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프랑스 관료들이 3월 14일까지 바로 이 접근법을 채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제한조치는 시간이 지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3월 6일 밝혔듯 마크롱은 엄격한 봉쇄조치의 채택을 처음에 거부했다. 그는 바로 그날 그의 아내와 함께 갔던 극장을 나서며 “삶은 계속된다. 취약인구를 제외하면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바꿀 이유는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전적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저 말 아래 숨어 있는 전술을 우리는 분명 감지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에 기반하여 경제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으로 알았던 엄격한 조치를 정부가 미루는 전술을 말이다. 

국가주권 혹은 공공써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의 궁극적 실패가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진로를 발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이러한 변화를 처음 엿볼 수 있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국민통합, 우리의 신성한 연합, 그리고 프랑스 국민의 ‘인격적 강인함’에 호소했다. 마크롱의 그 다음 3월 16일 연설은 호전적 포즈와 미사여구에 있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작금이 총동원의, ‘애국적 자기절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권국가의 형상이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 형태로 현시된다. “저기 있는, 안 보이는, 찾기 힘든, 그리고 전진하는” 적을 찌르는 칼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훨씬 더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마크롱은 복지국가와 공중보건의 확고한 옹호자로 갑작스레 거의 기적과도 같이 변모했다. 심지어 마크롱은 모든 것이 시장논리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을 단언했다! 몇몇은 좌파였던 많은 해설자들과 정치인들은 우리 공공써비스의 대체불가능한 중요성을 마크롱이 인정한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목격한 것은 마크롱이 2월 27일 삐띠살프뜨리레병원(the Piti Salp tri re Hospital)을 방문했을 때 한 의사와 벌인 공공연한 대립에 대한 뒤늦은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신경학 교수인 그 의사는 마크롱이 공립병원에 ‘투자충격’(([옮긴이] 여기서 투자충격(investment shock)은 긍정적 투자충격 즉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투자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한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크롱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의사의 요구에 동의했다. 물론 마크롱의 뒤따른 선언들은 완전히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 즉각 인지됐으며 마크롱 정부가 수년 간 체계적으로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코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마크롱은 “우리의 음식을, 보호를, 또는 생활환경을 돌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타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는 통제를 회복해야 합니다”고 선언했다.

국가주권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다수에게 특히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네오파시스트들에게 환영받았다. 따라서 공공써비스의 방어는 주권국가의 특권과 완벽히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건을 시장논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과거 프랑스가 유럽연합에 했던 많은 양보를 이제 되돌리는 과정에 있는 주권행위이다. 그러나 공공써비스 개념이 국가주권 개념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게 명백할까? 전자가 후자에 의존하는 것일까? 공공써비스가 국가주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국가주권 지지자들이 전개한 핵심 논의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신중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국가주권의 본성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어원적으로 주권은 (라틴어 superanus에서 유래한)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하는데, 무엇에 대한 우월성일까? 간단히 말해 국가권력을 제한한다고 위협하는 모든 법들이나 의무들에 대한 우월성, 다른 국가들과 자국 시민들 모두에 대한 우월성이다. 주권국가는 모든 책무나 의무보다 우위에 있으며 책무·의무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축소 혹은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형상인 국가는 특수한 통치기능의 일상적 행사 위에서 국가의 연속성을 체현한다고 상정되는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국가의 우월성은 대표자에 가해지는 법률이나 의무에 대한 대표자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주권주의자들에 의해 원칙의 지위로 고양된 우월성 개념이다. 허나 이 원칙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적용된다. 본질적인 것은 국가주권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신념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국가의 대표자들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국가의 대표자들이 유럽연합에 잇따라 인정한 모든 양보는 주권행위였다. 바로 유럽연합의 수립이 애초부터 국가주권 원리의 실행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사하게,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국가가 인권수호에 관한 국제적 의무를 지속적으로 회피해왔다는 사실 또한 주권논리의 일부이다. 인권수호자선언(the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 1998년)은 서명국에 인권수호자를 위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야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서명국의 법률과 관행 특히, 이탈리아와 공유하는, 국경에 관한 프랑스의 법률과 관행은 그 국제적 의무를 침해한다.

기후 변화의 책무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이 책무를 국가들은 언제나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준하여 기꺼이 무시한다. 그리고 국내 공법(公法)에 관해서도 국가주권은 가장 강력하다. 프랑스 사례를 계속 들어보면, 가이아나 원주민의 권리가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공화국’ ―이는 국가주권의 신성불가침 원리를 다시금 말해주는 표현이다― 의 원리라는 이름하에 일상적으로 거부된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으로 시민들에 의한 국가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국가의 대표자들이 면하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논점은 소위 ‘공공’써비스의 공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에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여기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공적’이라는 개념이 ‘국가’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이 인식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publicum’(푸블리쿰)이라는 용어는 그저 국가행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전체 공동체를 가리킨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원하는 대로 써비스를 나눠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국가써비스가 아닐뿐더러 국가의 확장인 것만도 아니다. 공공써비스는 “공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공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써비스는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 공공써비스는 국가와 그 통치자가 피통치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피통치자에 대해서 관대하게 확장한 호의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수년간의 자유주의적 논쟁이 ‘복지국가’라는 문구에 부과한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써비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인 레온 뒤기트(Léon Duguit)는 20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제기했다. ‘공공써비스’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피통치자와의 관계에 있어 권력자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뒤기트에게 공공써비스는 국가권력의 현현이 아니라 통치권력의 제한이다. 공공써비스는 통치자가 피통치자의 하인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부과되는 이러한 의무가 뒤기트가 ‘공적 책무’라 부르는 것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이 공공써비스가 주권의 원리가 아닌 사회적 연대의 원리, 모두에게 부과되는 원리인 이유다. 주권의 원리가 공적 책무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는 한에서 말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가주권이라는 허구에 의해 주로 억압되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써비스를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여전히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이 강하게 연결돼 있다고 시민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시민의 권리는 공공써비스를 제공해야하는 국가의 대표자들의 의무 혹은 책무의 분명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위기에 영향 받는 여러 유럽 국가 시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일상적 싸움에서 공공써비스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수많은 도시의 시민들은 중앙집권적 통합국가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태도와 무관하게 그들의 발코니에서 보건노동자들에게 갈채를 보내왔다.

따라서 여기서 두 관계를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 공공써비스와 특히 의료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권위나 공적 권력에 대한 집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본질적 기능을 하는 써비스에 대한 애착을 시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국가와의 근본적 동일시를 드러내는 것과는 무관한 이 애착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감각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우리의 ‘팬데믹 동료시민’이 견디는 시험/시련에 민감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이탈리아인이든 스페인인이든 유럽 국경 너머에 살든 말이다.

전지구적 커먼즈의 긴급성

우리는 위기 이후 ‘우리의 발전모델’을 문제 삼는 최초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마크롱의 약속에 극히 회의적이며, 또한 현재 시행 중인 과감한 경제조치들이 2008년 경제위기 때 시행된 조치들과 결국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볼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치된 노력을 볼 것이다. 즉, 점점 더 커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팬데믹이 없었더라면 중단 되지 않았을 지구의 파괴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말이다. 그리고 “경제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경기부양책이 최저임금 근로자와 납세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부담이 될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역전되기 더 어려운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국가주권은 안보 민감증, 외국인 혐오증과 함께 그것의 파산을 입증했다. 국가주권은 전지구적 자본을 제한하기는커녕 전지구적 경쟁을 가중시킴으로써 자본흐름을 관리한다.

두 개의 결론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다. 첫째, 공공써비스가 필수적인 인간적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공통적 제도로서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 인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전지구적 커먼즈의 제도화이다. 인류의 주된 위험이 이제 분명 전지구적 성격을 띠며 상호원조와 연대도 전지구적이어야하고 기반시설과 지식은 공유되어야하며 협동이 절대적 규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건강·기후·경제·교육·문화는 더 이상 사유재산 혹은 국가재산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전지구적 커먼즈로 개념화되어야하며 정치적으로 그렇게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 가지는 이제 무엇보다 더 확실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의 반란, 봉기, 그리고 초국가적 연합만이 국가와 자본에 공통적인 것을 부과할 수 있다.




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바이든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려 한다

 


  • 저자  : Jimmy Dore
  • 원문 :  “Biden Won’t Solve Your Problems, But Will ‘Understand Your Problems’(2020. 12. 1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Jimmy Dore Show>의 한 에피소드(유튜브 동영상)의 내용을 우리말로 정리한 것이다. 내용 정리이지만 읽기 좋도록 간략한 자막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미 도어는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자 정치평론가이다. 그는 현재 하원이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을 채택하는 투표를 하도록 밀어붙이는 ‘#Force the Vote’ 운동을 하고 있으며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정확하게는 ‘민중당 건설운동’(Movement for a People’s Party)―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조 바이든이 꼭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와 밥 돌(Bob Dole)처럼 말하며 다시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파이며 보수적인 공화당원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아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말입니다. 저는 전쟁장사꾼인 월가의 꼭두각시에게 투표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계속 그에게 표를 던지더라도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조 바이든이 이렇게 트윗을 했군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곤 했다. “아들아, 이 아버지는 정부가 내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단다. 아버지는 내 문제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한단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이해하든 못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가 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로 모입니다. 월가 사람들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수조 달러를 얻어내려고 정부에게 가잖아요.

당신이 만일 누군가의 사업을 봉쇄하고 그래서 아무도 돈을 벌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면 대통령의 정책 제안자가 되려고 출마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놀랍군요. 다음 문단을 보세요. 그가 이렇게 썼군요.
<사람들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 도움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곤경에 빠진 것이 아니며 우리는 그들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의 이해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경기부양지원금(stimulus check)이 필요하고 모두를 위한 의료보험이 필요하며 보편적인 기본소득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죽기 직전의 정신이 나간 노인네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기업화된 미디어에는 정신 나간 자를, 그리고 당신을 규탄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봐요, 조, 정부가 당신에게서 도둑질하리라 예상하라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팬데믹 시기동안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나니 말이죠. 재난지원금 말이에요. 이봐요, 월가에 돈을 주기위해 우리가 매년 세금을 낸다고 당신 아버지가 당신에게 말해줬나요? 오늘날 우리 세금이 그리로 가니 말이죠. 당신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해줬나요, 조?

우파가 이것에 ‘국민은 구호금(handout)을 기대하지 않는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이 보입니까. 당신이 바로 전 세계 최고 부자들에게 5조 달러를 건네주었죠, 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레이건의 용어인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군요.

[기사 헤드라인을 보여주며]
<취업난은 진정한 국가적 위기이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끔찍한 금융 절벽으로 밀어버리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인터셉트>지에 실린 내용입니다. 미국을 지배하는 무능한 범죄자들이 수백만 명의 미국인들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는군요.

[CNN 웹페이지의 한 사진을 보여주며]
“텍사스에서는 음식을 가지러 가는 수천대의 자동차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저런 헤드라인을 보면 저는 조 바이든의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신경을 끕니다.

[신문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계속 할 수는 없어요”―소상공인들이 포기하고 있다>
<의회는 코로나재난지원금 문제를 놓고 교착상태에 빠져 있지만 펜타곤에 7천4백억 달러의 자금을 대기 위해서는 한데 뭉쳤다>
이런 식이죠, 그리고 진보파는 그것에 반대투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민주당원 37명만 반대투표를 했죠. 결과적으로 찬성투표한 진보파 의원들이 63명인 셈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은 “도움이 곧 갈 것이다”에서 사흘 만에 “미국인들은 도움을 원치 않는다”로 바뀌었다.>
사흘 만이라···. 그래서 저는 1월까지 조 바이든이 바이든다운 짓을 다 한 후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고 사람들이 다시 트럼프에게 투표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라 추측하는 중입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짐 얼(Jim Earl)은 이렇게 트윗을 했네요.
<당신의 아버지는 멍청이었군요. 정부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의 노력 없이 이해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요? 그리고 ‘복지여왕’과 함께 모욕적인 상투어를 담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구호금이라는 단어를 당신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멋진 조지 칼린(George Carlin)의 말을 빌자면요, “아빠가 말씀하셨지, 아빠를 욕하라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사람들은 바이든의 취임에 찬성하고 소득공제를 받는 경우 말고는, 구호금을 바라지 않는다.>
누가 구호금을 바랄까요? 바로 조 바이든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조 바이든의 (인수위)팀은 취임식을 치르기 위해 개인들로부터는 50만 달러까지, 기업들로부터는 100만 달러까지 기부금을 받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항상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호금을 원하니? 정계에 들어가거라.” 그래서 그들이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조금씩 내달라고 말하는군요. 이것 말 그대로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조 바이든입니다.

[바이든의 트윗을 보여주며]
<이렇게 합시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 패배를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인수를 미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취임식에 자금을 대야 해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이든-해리스 인수위를 위해 돈을 기부해주시겠어요?”>
와우!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무엇을 나눠주고 싶어요?’라고 바이든의 아빠가 말하는 군요. 놀랍지 않나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한때 아돌프 리드 주니어(Adolf Reed Jr.)는 자유주의자들이 더 이상 정치를 진정으로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을 믿을 뿐이다. 나도 그 생각을 많이 한다.>
그들은 ‘고통받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샴페인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 좀 보세요.
<내 새 셔츠가 도착했어요!>[트윗에는 이 셔츠에 인쇄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아웃캐스트(Outkast)의 앨범 사진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바이든과 카말라의 사진이다.]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전쟁기업의 도구들인 이들이 악당처럼 굴려고 하네요. 그녀는 평범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고 그는 파산한 사람들을 쥐어짜면서 규칙적으로 수감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켰습니다. 이것이 이 사람들의 실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아십니까? 비밀경찰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 때문이죠.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대대적으로 상품을 팔아보려는 헛된 생각에 이들이 ‘바그다드 위로 폭탄을’이라는 노래가 실린 앨범 사진에 한 점의 아이러니도 없이 등장한 것은 대단히 재밌다.>
와우!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것은 트럼프 지지자들의 빨간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모자를 흉내 낸 파란색 ‘마가’ 모자군요. 사람들이 파란색 모자를 썼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여러분들은 단지 트럼프를 해고하고 백악관에서 그를 쫓아냄으로써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바이든의 파란색 모자를 쓰세요. 바이든이 트럼프를 감옥에 보낼 것이기 때문에 이미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모자는 아마존에서 판매중입니다.>
와우! 조 바이든에게 맞도록 정해진 훌륭한 기준입니다. 축하합니다, 승리하셨습니다. 이미 승리했으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군요.

[트윗 하나를 보여주며]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조 바이든이 자신의 행정부와 우리의 정치에 상호존중•존경•이해에 대한 그의 타고난 감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그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액슬로드(David Axelrod)의 트윗입니다. 맙소사, 그가 열정에 대해 말하고 있군요. 그가 그 동안 해온 나쁜 짓만큼이나 멋지게 트윗을 한다면, 또 한명의 백만장자인 놈으로부터 우리가 얻을 것은 겨우 그 트윗뿐일 것입니다.

[여기서 스탭이 끼어들어 한 마디 한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입에 발린 말이기 때문에 중요하죠.

[다시 지미 도어]
맞아요.
이봐요, 조 바이든에게 투표한, 잘 속는 여러분들, 축하합니다. 저는 바이든 안 찍었습니다.

 

[덧붙임 :  미국 역사 속의 ‘민중당’―정백수] 

미국에 이미 1890년대에 ‘민중당’이라는 이름을 가진 정당이 있었다. <농민연합>(Farmers’ Alliance)에 뿌리를 둔 민중당(People’s Party, 혹은 Populist Party)이 1892년에 창립되어 당시의 금융세력에 맞서 싸웠다. 이 민중당은 18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과 함께 민주당의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브라이언이 선거에서 패배한 이후 붕괴되었다. 다소 넓게 말하자면, 민중 자신의 힘보다도 대통령(및 그에 딸린 제도)의 힘을 더 믿었을 때, 아니 자신의 힘을 정당정치라는 제도에 맡겼을 때의 문제점, 활력이 권력으로 전환되었을 때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민중당이 이런 문제점을 얼마나 잘 극복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공화당과 민주당의 ‘민낯’이 다 드러난 시기이니만큼 우려만이 아니라 기대도 섞인 시선으로 이 운동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엘런 브라운(Ellen Brown)에 따르면 1차 대전 전 미국에는 두 경제 세력이 미국의 지배를 놓고 경합하고 있었다. 하나는 월가에 기반을 두는 세력이다. 당시 월가에서 중요한 주소가 ‘월가 23’번지였는데 이는 ‘House of Morgan’으로 알려져 있다. J. P. Morgan은 강력한 영국 은행업 세력의 에이전트였다. 다른 하나는 필라델피아에 기반을 둔 세력으로서 이들은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로 소급하며 산업화와 토목공사에 중점을 두었다. 필라델피아파는 국가가 화폐를 관장하는, 펜실베이니아 지역에 수립된 시스템을 선호했다. 남북 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은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시스템으로 되돌아갔는데, 그는 암살되었고 은행가들이 화폐기계의 통제를 다시 요구했다. 월가파의 “조용한 쿠데타”는 1913년에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의 통과에서 정점에 달했다. 이 법의 통과는 1896년 대선 후보였던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을 비롯한 여러 “부주의한”(unwary) 의원들로 하여금 민간기업인 ‘Federal Reserve’(연방 준비제도, 연방준비은행)를 ‘연방적’ 성격을 가진 기관으로 잘못 알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상 Ellen Brown, Web of Debt: The Shocking Truth About Our Money System and How We Can Break Free, Third Millennium Press, 2010)

민중당이 민주당과 함께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브라이언은 민중주의적 지향을 가진 민주당원이었다. 당시에는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이 한 패였고, 그 반대편에 민주당이 있었으며, 민중당은 민주당과의 통합 대선후보지명을 주장하는 통합파(fusionists)와 독자성을 주장하는 제3당파(mid-roaders)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12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구도를 보면 민주당이 월가의 금융세력과 ‘공화당보다 더’ 한패가 되었으니(이는 오바마 때 그 정점에 이르렀으며 바이든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결국 월가가 공화당, 민주당을 ‘다 먹은’ 최고의 패자(霸者)가 된 셈이다. (지금 미국 민주당 내에 ‘진보파’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미국 민중을 위해서 싸우기보다 민중의 에너지를 저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탄생하고 있는 민중당은 단순히 양당 체제에 새 당 하나(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지라도)를 추가시키는 식이 아니라, 민중들 자신들의 연합(coalition)이라는 형태로 미국 민중이 한데 모여 양당체제에 대한 실체적·삶정치적 대안으로서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 외에 1971년에도 여러 개인들과 소정당들이 모여서 만든 민중당(People’s Party)이 있었으나 1972년과 1976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낸 이후 느슨한 연합으로 변한 후 사라졌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