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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머닝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

 


  • 저자  :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 원문 :  Introduction to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
  • 분류 : 일부 내용 번역
  • 번역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커머닝’에 관한 여러 저자들의 글 모음집인 Perspectives on Commoning : Autonomist Principles and Practices(2017)의 “Introduction”(책 편집자인 Guido Ruivenkamp, Andy Hilton 집필) 가운데 한 절(‘Five autonomist principles for commoning’)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작자표시비영리 4.0 국제(CC BY-NC 4.0)이 적용된다.

    키워드 : 커머닝(commoning), 커먼즈(commons), 커머니즘(commonism), 공통적인 것(the common), 자율주의(autonomism), 관점주의(perspectivism), 다중(multitude), 일반지성(general intellect), 대중지성(mass intellectuality)


우리는, 이 책에 모아 놓은 글들이 때로는 명시적으로 또 때로는 행간에서 제기하는 공동의 관심사들로서 다섯 개의 이슈 혹은 테마들을 뽑아볼 수 있다. 이 다섯은 자율주의적 관점에서 커먼즈(commons)에 접근하는 데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다섯으로 충분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목록은 커머닝(commoning)을 위한 다섯 가지 자율주의 원리를 짚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거시적 사회경제의 광범한 맥락을 부각시킨다. 이들 가운데 몇 명은 인지자본주의와 비물질노동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구체적으로 상응하는 이론들과 실천들에 주목한다(Boutang, 2002; Hardt & Negri, 2004: 109; Gorz, 2010). 각 저자들은 비록 상이한 이론적·실제적 수준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주제들에 상이하게 접근하지만 모두 자본의 작동을 나름으로 일정하게 비판하며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패러다임을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거부한다. 저자들은 현 시대의 종획 현상들이 보이는 개인주의적인 삶의 양태와 그에 수반되는 일반화된 상품화를 넘어서는 생각들과 기획들을 짚어내고 설명한다. 아주 포괄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다양한 글들은 모두 내재적 접근법을 따르는데 이 접근법에서는 커머닝의 이론과 실천이 내부로부터 그리고 현 시기의 투쟁과 사회적 관계를 통해서 탐구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저자들은 공유된 자원으로서의 커먼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피한다. 저자들은 오히려 커먼즈를 사회성의 새로운 형태의 창출로 인식한다. 커먼즈를 살기·일하기·사유하기·느끼기·상상하기의 새로운 집단적 실천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실천은 현재의 자본주의가 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다양하게 종획하는) 형태를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커먼즈를 사적 혹은 공적 통치체제에 의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물(재화)로 간주하지 않으려 한다. 실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현재의 고전적인 대립이 가지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분법은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심지어 참조되지도 않는다. 커먼즈는 오히려 사회변형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사회변형의 지렛대로서, 인지자본주의의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생산형태들 내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 기회들로서 인식 된다. 이것들은 다시 실제적 사회적 관계들의 파열을 (균열을)(Holloway, 2010) 통해 드러나거나 가능하게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 및 소비의 관행들에 대한 대안들의 발전을 통해 실현된다.

셋째, 커머닝의 실천을 통한 사회변형을 이렇게 탐색하는 것은 커머닝에 대한 이론적 개념화가 객관주의적 접근법이 아니라 관점주의적 접근법을 통해 정식화되는 비전과 제시 방식을 함축한다. 관점주의적 접근법이란 지식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정치적인 것이 구축되는 사회적 맥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킬 가능성들과 기획들의 탐색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접근법이다. 실제적인 것을 넘어서 가능한 것을 찾기에 집중한다는 이러한 생각은 관점주의적 지식의 탐색자들로 하여금 실제적 효력을 가진 진실들을 추구하도록 이끈다(Negri, 1991; Virno, 2004). 말하자면 가능한 사회변형을 위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천들에 대한 통찰을 발전시키도록 이끈다. 따라서 경험적 서술은 추상적으로 분리된 것(객관적 추상으로 관념화된 것)으로 상상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관점에 의해 결정되는 의도와 직결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특히 다중의 주체적 관점에서 사회변형의 실천과 커머닝의 투쟁 및 실천을 본다. 다중은 서로 상호작용하며 행동능력을 발휘하는 개인들(특이성들)의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다중은 특히, 확장하는 인지자본주의가 행하는 종획과 강탈에 맞서며 실질적인 대안들을 구축할 기회를 추구하는 집단적 주체성으로서 인식된다. 이 다중 개념이 자율주의적 관점주의의 준거로서 사용된다. 이 관점주의에서 공통적인 것은 자본에 대한 대안으로서 발전된다. 정말이지 우리는 이 책에 제시된 여러 생각들이 우리의 일상적 생활 조건에서 커머니즘적 실천이 이루어지는 사회로의 이행을 실현할 가능성들을 성찰하고 일궈내는 일을 촉발할 수 있었으면 한다.

더 커머니즘적인 미래를 위해 사회를 변형하는 다중의 힘을 이렇게 추구하는 것과 연관되어 이 책에 실린 글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넷째 테마는 삶정치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현 시기에 대안적인 삶의 상황과 일하기의 상황을 창출하고 자율과 저항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하려는, 저자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노력이다. 그러한 변형을 실현하는 다중의 구성적 힘에 관하여 두 가지 대립되는 입장을 짚어낼 수 있다. 물론 그 중간에 해당하는 많은 입장들이 출현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트와 네그리가 표명했고 이 책에 글을 실은 다양한 기고자들이 참조하는 더 낙관적인 첫째 비전에 따르면, 지식 생산의 증가된 공통성과 자율적 노동의 내재성으로 인하여 비물질노동과 다중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조건들이 출현한다. 우리가 자동화·정보·소통(이는 삶정치적 생산의 토대로서 점점 더 네트워크들 안에서 네트워크들을 통하여 협동적으로 발전하고 비물질노동에 의하여 형성되고 관리되며, 그 내에서 노동자 자신들이 생산수단의 담지자가 되었다)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시기에 진입함에 따라 이 네트워크들 및 그에 따른 생산 수단들은 더 이상 자본에 의해 제공되지 않고 노동 내에 머물러 있게 된다. 이 비전에서는 이제 바로 산 노동과 그 속성들이 가장 중요한 발전의 힘이 된다. 이 힘은  일반지성이 아니라 포스트포디즘 시기 노동자들의 대중지성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적으로 지식·아이디어·소통의 생산이 노동의 내부에 있고 자본의 외부에 있는 협동 형태들을 통해 일어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종획을 조직화하고 노동이 생산한 부를 전유하려는 시도들을 내적으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커머니즘적 미래가 노동의 자율성과 협동성의 내재성을 통해서 천천히 실현되고 있다는 결론을 낼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자본의 통제기술과 전략에 귀속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다중의 해방을 위한 조건을 제공하기도 하는 것이다.

둘째 비전은, 인지노동이 점점 더 자율적이 되어 더 이상 자본의 지배를 돕지도 않고 자본의 지배 아래 놓이지도 않게 되는 해방의 궤적이 임박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거부한다. 생산이 점점 더 협동적이고 소통적인 형태를 띠기 때문에 인지노동의 자율성이 점점 증가한다는 이런 생각 대신에 이 둘째 비전은 반대되는 궤적에 주목한다. 즉 특히 인지노동의 정신과 욕망을 통제하는, 그 영혼을 통제하는 새로운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 덕분에 자본측이 인지노동 시대의 삶, 일, 사회적 심리를 통제하는 힘이 증가한다고 보는 것이다(Berardi, 2009). 따라서 자본이 인지노동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것은 포디즘적 생산에서처럼 특정의 착취 영역에 더 이상 국한되지 않으며 천천히 우리의 삶 전체를 포괄하고 채우고 이끌고 식민화한다. 기술-사회적 지배의 대상이 된 것은 인간자본으로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욕망으로서의 인간 전체라는 것이다. 포획된 것은 바로 이것, 즉 사회적 리비도 그 자체와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방식(지성·상상·사회성 등)이다. 이 비전에서 자본이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는 정보 및 소통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지노동에 발휘하는 힘은 불가역적으로 보이며, 제국의 권력망을 돌파하는 다중에 기반을 둔 낙관적 비전의 실현을 막는다(지금은 간헐적인 승리만이 가능하며 이 승리들은 안전밸브 메커니즘처럼 작동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명백하게도 훨씬 더 황량하지만 이 둘째 비전이 모든 행동을 부정하거나 인간활동의 자율성과 창조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해석되어서도 안 된다. 이 둘째 비전은 오히려, 욕망의 맥락을 더 잘 짚어내고 그럼으로써 정동·아이디어·상상의 영역들과 같은 다양한 심리 영역들을 지배하는 타율적인 기술 권역들(정보·소통·바이오테크놀로지의 영역들)이라는 실제적 맥락 속에서 이 자율성이 형성되는 방식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도록 적절한 깊이를 가진 반응을 끌어내고자 하는, 힘이 좀 많이 들어간 호소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중의 저항 및 자율성과 이에 대한 분석을 재혁신할 수 있는 의식을 최소한 가지자는 호소이다. 따라서 이 둘째 비전은 새로운 대중지성이 다시 발전하여 (현금의 지식 경제의 하이테크 영역들의 일반지성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재창출 할 수 있는 길들을 찾아보자는 호소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비전들과 해석들 그리고 적극적인 결과들을 낳을 잠재력을 이렇게 선택하는 것은 몇몇 기본적인 문제들을 함축한다. 다중은 새로운 공통성들이 수립될 사회적 공간들을 생성할 수 있는가? 인지자본은 그러한 기획들을 어느 정도로 흡수할 수 있고 대중지성을 자신의 구조들 안에 어느 정도로 봉쇄해 놓을 수 있는가? 이 책에 실린 글들 전체에 걸쳐서 보이는 것은 비결정론적 테제일 것이다. (인지노동의 힘의 내재적인 강화와 함께, 그러나 또한 자본에 의한 그리고 자본을 위한 전복 및 조작과 함께) 자본에 기반을 두지 않은 대안적인 발전의 기회들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이 기회들을 잡을 수도 있고 놓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자율을 정치적 힘으로 구현하는 것에 발맞추어 선택과 가능성 즉 미래의 다수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후기 자본주의 시기에 인지노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보는 두 입장인 유토피아론과 디스토피아론은 이렇듯 현재의 그리고 앞을 내다보는 참조점들의 두 극단을 제공할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우리는 커머닝을 위한 가능성들을 탐색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섯째 테마로 이어진다. 자본(인지자본의 모순)과 (이후에는 변이될) 국가 내에서 혹은 상품의 세계 외부(커먼즈 내에 실현될 것)에서 혹은 양쪽 모두 다(안과 밖)에서 전개되는, 다중에 의한 다양한 커머닝 실천과 사회적 공간의 창출에 대한 관심이 그것이다. 다중의 커머닝 실천의 관점에서 이 세 위치들을 주목하고 전략적으로 고찰할 때 그 전체적 효과는 공통적인 것의 결합된 비전의 출현(또한 개방된 다원성의 출현)이며 여기서 그 축적된 효과는 그저 전적인 파열이나 탈출이 아니라 파열을 포괄하면서 자유로운 공간들을 확대하는 지속적인 전개과정으로 나타난다.

이는 점진적으로 세상을 바꿔나가면서도 혁명적 계기를 요구하는, 특정의 단기적 성공을 가치화하면서도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는 그러한 과정이다. 이는 과정으로서의 진보이며, 자본에 적대적이고 자본과 양립 불가능하지만 또한 자본 안에서 발전하고 그래서 자본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여기서 커머닝은, 특수한 맥락에서 설계되고 사람들이 커먼즈를 드나들고 자본주의/국가주의의 맥락들(환경, 회로)을 드나들면서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새로운 실천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실천이 이 책의 글들이 고찰하는 커머닝 활동과 분석들의 범위를 나타낸다.

 

References [위에 번역된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 발췌함—정리자]

Berardi, F. (Bifo) (2009). The Soul at Work: from Aleination to Autonomy. Los Angeles, CA: Semiotext(e).
Boutang, Y. M. (2002). L’eta del Capitalism Cognitive. Innovazione, proprieta e Cooperazione delle Moltitudine. Verona: Ombre Corte.
Gorz, A. (2010). The Immaterial. Knowledge, Value and Capital. Calcutta: Seagull Books.
Hardt, M. and Negri, A. (2004). Multitude. War and Democracy in the Age of Empire. New York: Penguin Press.
Holloway, J. (2010). Crack Capitalism. London: Pluto Press.
Negri, A. (1991). Marx beyond Marx. Lessons on the Grundrisse. Brooklyn, NY: Autonomedia/Pluto.
Virno, P. (2004). A Grammar of the Multitude. Los Angeles/New York: Semiotext(e).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Guido Ruivenkamp and Andy Hilton

1 The Prefigurative Power of the Common(s)
  Mathijs van de Sande
2 Realising the Common: The Assembly as an Organising Structure
  Elise Thorburn
3 Instituting the Common: The Perspective of the Multitude
  Sonja Lavaert
4 Insolvency/Autonomy: What is the Meaning of Autonomy in the Semiocapitalist Age?
  Franco Bifo Berardi
5 The Conditions of the Common: A Stieglerian Critique of Hardt and Negri’s Thesis on Cognitive Capitalism as a Prefiguration of Communism
  Pieter Lemmens
6 Grounding Social Revolution: Elements for a Systems Theory of Commoning
  Massimo De Angelis
7 Commodification and the Social Commons: Smallholder Autonomy and ‘Rurban’ Relations in Turkey
  Murat Ozturk, Joost Jongerden, Andy Hilton
8 The Square as the Place of the Commons
  Ruud Kaulingfreks and Femke Kaulingfreks
9 Transition towards a Food Commons Regime: Re-commoning Food to Crowd-feed the World
  Jose Luis Vivero-Pol
10 Seeds: From Commodities towards Commons
  Guido Ruivenkamp
11 Peer-commonist Produced Livelihoods
  Stefan Meretz




인간의 연대와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

 



코비드19 팬데믹은 인간의 조건의 가장 근본적 특징을 상기시킨다. 국경을 가로질러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명체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와 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연대를 말이다. 맹한 민족주의와 경쟁논리가 서둘러 막으려 하는 이 상기는 진정한 전지구적 정치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재고하게 만든다. 이 글에서 “인류의 전지구적 커먼즈”라 부를 정치기구를 말이다.

팬데믹의 교훈은 일어나리라 예견되는 지구 온난화와 일련의 재앙을 비롯한 인류가 대면할 다른 주요 문제들에도 적용되는데, 우리가 이 문제들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것은 오늘날 전지구적 바이러스와 대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과 같다. 우리의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는 결코 우리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과 대면하도록 무장시키지 않는다. 때문에 지구에서의 인류의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을 정치적으로 재고하는 일이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시급하다.

바이러스로 입증된 인간적 연대

바이러스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비인간을 묶는 연대의 증거를 원하는 이들에게 완벽한 설명을 제공한다. 경제적 교류,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도시화, 국경을 가로지르는 흐름들과 함께 사회들의 점증하는 상호침투가 전염병의 확산을 상당히 가속시켰다. 전염병의 확산은 상황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재정이 부족한 보건 기구들만을 앞질렀던 것이 아니라 국가도 앞질렀다.

전염현상은 19세기 말 사회학자와 철학자가 ‘연대’라 부른 것을 가시화한다. 뒤르켐은 1893년 학위논문 『사회적 분업에 대하여』에서 연대를 개인들의 상호엮임을 기술할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자, 사회들을 특징짓는 연대유형에 따라 사회들을 구분시켜줄 수 있는 개념으로 보았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철학이었다고 말해지는 ‘연대주의’론이 연대를 정부의 사회정책을 고무해야하는 ‘보편적 법칙’으로 만들었다.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연대주의 사조의 주요 창시자인 프랑스 정치가 레옹 부르주아(Léon Bourgeois, 1851~1955)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래서 민중은 마치 모든 존재, 모든 물체가 전(全)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놓여 있듯, 상호의존적 결속 안에 서로 놓여 있다. 연대의 법칙(the law of solidarity)은 보편적이다.” 이처럼 연대는 삶·건강·일·사유·느낌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다윈에 대한 자유주의적 독해에 맞서 프랑스 연대주의자들은 인류의 협동에 대한 다윈의 저술에 특히 의존하여 연대의 법칙을 응집과 진화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공중보건론자들은 연대 개념을 차용하여 그것을 공중보건정책 운영의 핵심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내무부의 공공지원·위생국장 앙리 모노(Henri Monod, 1843-1911)는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 부유한 도시와 가난한 도시 사이의 재정적 연대를 장려하는 연대주의적 주장을 펼쳤다.

공중보건은 우리의 상호의존, 인간의 연대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마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일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 각자는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인간 존재들의 건강·삶에 예기치 않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존재들 혹은 사라진 지 오래된 존재들이 우리 건강에,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건강에 그리고 우리의 행복을 위한 본질적 조건들에 매 순간 영향을 미칩니다.

전염병은 국경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대는 전 세계로 확대돼야 한다. “이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시민에 대한 책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보건연대는 국경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공중보건의 국제적 성격에 대한 모노의 명쾌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언젠가 유럽에서 희생자들을 낳을, 위생에 반하는 어떤 잘못이 이 글을 쓸 때 갠지스 강둑이나 인도의 항구 중 하나에서 저질러지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쓸 때 또 다른 활동이, 이번에는 현재의 재앙으로부터 수천, 수백만을 구할, 과학으로 분류될 행동이 어떤 멀리 떨어진 해외 실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전 인류가 위생의 정복으로 이익을 볼 수 있듯이 위생 관련 범죄로 고통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공중보건을 보호하는 데 따르는 의무들을 수행하는 것을 포함한, 공중보건에 대한 관심은 모든 정직한 사람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전염이 입증한 상호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생각을 바로 전염병 전문가 찰스 니콜(Charles Nicolle, 1866~1936)에게서 본다. 니콜은 193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전염병에 관한 지식은 인간들이 연대하는 형제이자 자매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똑같은 위험이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인 것이며, 감염이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동료 인간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우리는 연대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연구에 대해 말하면서 니콜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사람들이 같이 하는 노력을 통해 단결한다면 얼마나 생산적 결과가 생길까요!”

과학계에서 이러한 인식이 커지는 것과 함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제회의가 페스트·콜레라―콜레라는 1830년에서 1847년 사이 대혼란을 낳았다―와의 싸움 중 1851년 파리에서 개최됐다. 19세기 말부터 쭉 모노는 이러한 ‘고전적’ 전염병만이 아니라 모든 질병을 다루는 국제기구를 옹호했다. 바로 그러한 국제기구로서 <국제공공위생사무소>(the Office International d’ Hygiène Publique)가 1907년 로마에 설립됐다.

공중보건의 국제화는 1921년 <국제연맹보건위원회>(the Health Committee of the League of Nations)의 창설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운영이 시작된 1948년 이전인) 1946년 결성이 결정된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로 새로운 추동력을 받았다.

국민국가의 봉쇄

연대 개념의 발전 및 공중보건의 전지구적 제도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고려한다면 2020년 코비드19 팬데믹에 여러 나라들이 각기 어떻게 대응했는지 궁금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정치적·과학적 대응은 여러 면에서 재앙적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긴축과 수익성이 인도한 수십 년간의 보건정책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무장해제됐는지가 드러남으로써 말이다. 그러나 또한 보건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국민국가 논리가 거의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 국가는 전지구적 보건위기가 제기한 문제에 각각이 마치 섬나라인 양 대응했다. 각 국가가 다른 국가와는 독립적으로, 자기 식대로 위기를 다룰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가 금세 목격한 것은 국경 봉쇄, 준수해야 하는 엄격히 국가적으로 정의된 각각의 전략들, (때로는 타국에 해가 되는) 자원동원과 자원징발, 그리고 심지어 다른 곳에서 취해진 조치들에 대한 이따금씩 일어나는 폄하나 비난이었다.

보건전선에서 ‘다자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보여준 이 일반적인 정치적 불협화음과 함께 우리는 국가적·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최대의 과학적·행정적 혼란을 목격하고 있다. 유럽연합에서도 각 국의 의약담당 부처들(the national drug agencies)은 방법론의 조정 없이 각 나라, 각 연구실, 각 산업이 다른 나라, 다른 연구실, 다른 산업을 앞서려 하면서 각자 그들만의 게임을 해왔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연대운동의 위대한 교훈이 어떻게 그리 빨리 잊혀질 수 있었던 것일까? 상황의 심각성을 너무 오래 완전히 부인할 정도로 우리 정부들이 빠져있던 경련상태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그것들 중 두 가지 즉 국가적 수준의 요인 하나와 전지구적 수준의 요인 하나에 집중하기로 하자.

시민적 책임, 자기이익 그리고 국가강제

전염병 학자들에 따르면, 코비드19 같은 전염성 높은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에 직면할 경우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모든 인간 간 전염사슬을 끊는 것, 즉 각 개인들의 집단적 책임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는 각 개인들이 그저 자신들만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호적 관계에서 각 개인들이 타인에게 제공하는 상호적 보호를 의미한다.

‘공중보건’(public health)을 말할 때 우리가 너무도 자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 표현에서 ‘공’(public)이 ‘국가’(the state)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공’은 국가만이 아니라 국가의 전(全) 시민들이 구성하는 전체적 집단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부들은 이러한 전염성 질병에 대항하는 싸움에서의 주요자산이 시민적 책임 혹은 집단적 책임이라 불릴 수 있는 무엇이라는 점을 대체로 포착할 수 없었다.

수십 년간 공리주의적 독단, 신자유주의적 규범, 개인주의적 요구로 심히 오도돼온 정부담론 사회적 연대가 전염병에 대한 첫 번째 방어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을 찾지 못하기 일쑤였다. 우리 모두의 운명이 우리 각자의 손에 달려있다는 느낌과 인식이 현재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백신이라고 말하는 데 필요한 단어들 말이다.

이와 반대로 이 정부들에게는 가장 부적실한 단어들만 있었다. 우리 각자의 명백한 자기이익에 대해 말하는, 혹은 위험에 직면하여 우리 각자가 지는 개별적 책임에 대해 말하는 단어들 말이다. 정부들은 사회가 고립된 원자들의 뒤섞임인듯, 각인들이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하는 것인듯 행동했다. 거리를 둬야하고,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씻어야하는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공동체 전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 정부들이 집단적 운명에서의 우리 각자의 공동책임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장려할 수 없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정부들이 경쟁·대결·이해대립 말고는 개인들 사이의 다른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국가들은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 접근법으로 대응했고 세계보건기구는 국가들의 노력을 효율적으로 조정할 수 없었다. 이 무력함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제네바에 있는 <국제개발대학원>의 <글로벌보건센터>(the Global Health Centre at the Graduate Institute of International and Development Studies) 공동센터장인 전염병 전문가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국가주의적 주권의 원리가 세계적 문제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지속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위험을 완벽하게 예견하지 못했다고 세계보건기구를 비난할 수는 없다. 세계보건기구와 연계되어 있고 팬데믹에 대한 대응에 특히 더 책임을 지는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the Global Preparedness Monitoring Board)는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몇 달 전 세계에 경고했다. “만약 ‘지나간 것이 서막’이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5천만에서 8천만의 사상자를 내고 세계경제의 거의 5%를 일소할, 빠르게 움직이며 대단히 치명적인 호흡기 병원균 팬데믹이라는 너무도 실질적인 위협이 존재한다. 이런 규모의 전지구적 팬데믹은 광범위한 대혼란과 불안정, 불안전을 초래할 재앙일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지 않았다.”

<글로벌감염병대비모니터링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2019년 9월 배포했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를 위하여

이 위기의 결과가 ‘국민국가의 귀환’, ‘국가주권의 부활’이라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심각한 오해들 중 하나를 상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건을 전지구적 커먼즈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통적인 것은 집단적 결정이 “공통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공통적으로 만들기란 개인의 권리에 대한 승인에 입각하여, 공동체가 자원이나 써비스 혹은 공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백신은, 건강에 대한 전 인류의 기본권과 백신 사이의 정치적으로 수립된 연관에 입각해 있는 ‘공통재’다.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 커먼즈를 정의하기에 충분치 않다. 백신이 공통재라는 결정이 채택되고 시행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조건이 창출될 필요가 여전히 있다는 점이 즉각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이외에 전지구적 보건을 위한 다른 유형의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세계보건기구는 국가기금과 민간 기금에 이중적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세계보건기구에는 협력적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권위와 수단이 없다. 따라서 그 심의와 결정이 구속력 있는 세계적 기준을 구성할 세계보건기관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이 ‘국가간’ 기관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세계정치적인(cosmopolitical) 기관은 모든 국가·지방·지역의 비영리보건기관을 연합하고 모든 나라의 연구원을 동원할 것이다. 이 기관은 오늘날 세계보건기구에 공식적으로 귀속되는 정보·통지·협력의 임무를 맡지만, 세계보건기구와 달리 보건에 대한 인구의 기본권을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을 일국의 수준에서 그리고 국지적 수준에서 동원할 권위를 가질 것이다.

지구화의 이러한 결과가 제기하는 물음은 약탈적 자본주의가 남겨 놓을 위험과 대면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새로운 제도를 미래 인류가 수립할 수 있을까이다. 전지구적 보건 커먼즈가 그 일환이다.

 

 




정치적 시험으로서의 팬데믹: 전지구적 커먼즈를 주장하며

 



코비드19 팬데믹은 전례 없는 전지구적 건강·사회·경제의 위기이다. 역사적으로 비교할 만한 것이 특히 최근 수십 년 사이에는 거의 없다. 이 비극은 모든 인류를 위한 시험/시련(épreuve)에 다름 아니다. 프랑스어 ‘épreuve’의 두 의미 ―시련, 즉 거대하고 고통스런 일이자 시험·평가·판단이라는 두 의미― 가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의 이중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달리 말해 팬데믹은 이제 개인적 상호의존의 수준에 놓여 있는, 즉 바로 사회적 삶의 토대에 놓여 있는 전지구적 문제에 대처할 우리 정치경제씨스템의 역량을 시험하고 있다.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 듯한 현재 상황은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전지구적 경제정치구조가 기후변화위기에 대처하고자 급속히 발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경우 무엇이 인류를 기다리는지를 말이다.

전지구적 위기에 대한 국가주의적 대응?

첫 번째 관측. 세계 전역에서 이 전지구적 전염병에 다소 보완적인 두 방법으로 대응하고자 국민국가의 주권적 힘에 모두 기꺼이 의존하려한다.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등에서처럼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포했든 아니든) 대체로 ‘비상사태’를 내세움으로써 개인적 접촉을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조치를 실행하는 데 의존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가 바이러스가 해외에서 ‘유입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시민들을 보호할 것을 기대한다. 따라서 사회규율과 국가보호주의가 펜데믹과의 싸움에 사용되는 두 주요 무기이다. 여기서 국가주권의 두 얼굴 즉 내적 지배와 외적 독립을 보게 된다.

두 번째 관측. 모든 규모의 기업들이 이 시험/시련에 견디기 위해 국가에 의존하는데, 이는 파산을 면하고 그들의 노동력을 가능한 많이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이 요구하는 재정지원과 보장대출을 해주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국가는 경제를 살리고자 한없이 지출하는 데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필요하면 얼마든지!” 불과 몇 주 전에 공공부채 제한에 대한 그리고 예산제약에 대한 강박적 우려로 인해 병원직원, 병원침대 혹은 응급써비스를 늘리라는 모든 요청에 반대했는데도 말이다. 이후 국가는 적어도 민간기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금융씨스템을 강화하는 데 대해서는 국가개입의 미덕을 재발견했다.

지금까지의 가장 야심찬 부양책 중 하나가 독일에 의해 시행됐다. 그 부양책은 독일연방공화국 시작 이래 규범이었던 질서자유주의(([옮긴이]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는 자유시장이 이론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한 국가개입을 강조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의 독일식 버전이다.)) 도그마와 갑작스레 단절했다.

신자유주의의 종식과 혼동하면 안 되는 이 갑작스런 전환은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국가주권의 특권에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연대의 끈에 영향을 미친 팬데믹에 대한 내적·외적으로 모두 효과적인 대응일까?

우리가 지금껏 목격한 것은 경종을 울릴만한 일이다. 국가형태에 내장되어 있는 외국인 혐오는 바이러스가 모든 인류에 가할 치명적 위험에 대한 인식이 커져감에 따라서 특히 분명해지고 있다. 유럽국가들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초기 확산에 서로 전혀 연계되지 않은 방식으로 대응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특히 중앙유럽국가들이 ‘해외바이러스’로부터 인구를 지키고자 국가영토의 행정장벽을 매우 신속히 쳤으며, 유럽에서 국경을 봉쇄한 최초의 나라들은 가장 외국인 혐오적이기도 했다. 빅토르 오르반(([옮긴이]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그리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 헝가리 총리로 재임하고 있는 정치인이다.))이 불을 지폈다. “우리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 전선은 이주이고 다른 한 전선은 코로나바이러스입니다. 양자 모두 이동을 통해 퍼진다는 점에서 둘 사이에는 논리적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과 세계 나머지 국가들의 분위기 즉 ―유럽 및 그 밖의 다른 곳의 극우가 기뻐할 법하게도― 모든 국가가 그들 자신의 것을 돌봐야 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나라들과의 연대의 결여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다. 프랑스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방치한 것 ―이 두 나라는 이탈리아에 의료장비와 보호마스크를 보내기를 거부함으로써 이기심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렸다― 은 국가들 간의 전면적 경쟁에 토대를 둔 유럽에 조종을 울렸다.

국가주의 주권과 전략적 선택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Tedros Abhanom Ghebreyesus)는 우리가 팬데믹을 상대하고 있다고 선언했을 뿐 아니라 바이러스가 퍼지는 속도와 국가들 상호관계에서의 놀라운 수준의 무대책에도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 무대책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가장 설득력 있는 분석을 팬데믹 전문가인 제네바 국제개발대학원 세계보건센터 공동소장 수에리 문(Suerie Moon)이 제공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세계적 문제에 있어 국가주권 원리가 지속함을 보여줍니다. … 그러나 이는 놀랍지 않습니다. 국제협력은 항상 취약했지만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지구화에서 빠지기를 열망하는 정치치도자의 선출로 지난 5년 여 동안은 더욱 취약했습니다. … 세계보건기구가 제공하는 포괄적 관점이 부재한 채 우리는 재앙의 위험을 무릅써야합니다. ··· 따라서 전 세계 정치·보건 지도자들에게 권고하는 점은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접근과 연대가 시민들의 책임 있는 행동을 북돋는 본질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수에리 문의 언급이 적절하긴 해도 그녀는 세계보건기구가 지난 수십 년간 재정적으로 약화되어왔고 현재는 민간 기부자들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자금의 80%가 민간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하지만 약화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계보건기구는 1월 초부터 수집한 신뢰할 수 있는 정보 때문만이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발본적 조기 통제 권고가 궁극적으로 옳았다는 점 때문에도 팬데믹과의 싸움에서 전지구적 협력을 위한 최초의 틀을 제공할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에 따르면 한국과 대만에서 효과적이었던 체계적 검사, 접촉 추적을 포기하는 선택은 바이러스가 잠재적으로 모든 국가에 퍼지는 데 기여한 중대한 실수였다.

검사·추적의 이 걱정되는 지연은 궁극적으로는 전략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이 이전에 그랬듯이 이탈리아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절대적 봉쇄 전략을 재빨리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나라들은 대체로 ‘집단면역’이라는 숙명주의적이자 은밀한 다윈주의적 전략으로 대응이 너무 지체됐다.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의 영국은 초기 접근에서 너무도 소극적이었고 두말할 필요가 없는 미국 이외에도 프랑스, 독일 같은 다른 나라들은 제한 조치를 얼버무렸고 지체했다. 이 나라들은 ‘완화’ 전략, 즉 ‘감염곡선 완만화’에 의한 전염병 지연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우한과 후베이성에서 행해진 대로 인구에 대한 체계적 검진과 일반적 격리를 사용하여 바이러스를 초기부터 통제하려는 진지한 시도를 사실상 포기했다.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예측에 따르면 집단면역 전략은 전 인구의 50-80%의 감염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가장 취약하다”고 추정되는 수십만의 심지어 수백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세계보건기구의 권고는 매우 명확했다. 국가들은 바이러스 양성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체계적 검사와 접촉 추적을 포기하면 안 된다.

전염병 시대의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

왜 국가들은 세계보건기구를 그렇게 신뢰하지 못했으며, 왜 팬데믹에 대한 전지구적 대응을 연계시키는 중심적 역할을 세계보건기구에 부여하지 않았던 것일까? 중국에서는 전염병이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나라를 실제로 마비시켰다. 경제적 생산과 무역의 동결이 그런 규모로 이뤄진 적은 없었으며 그 결과는 중국에서의 매우 심각한 경제·금융위기였다.

무엇보다도 독일·프랑스·미국이 그들의 경제를 가능한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상황이 ‘날마다’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경제와 공중보건의 긴급사항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주저했다. 더 심각한 장기예측에 주의를 기울이기보다 말이다. 3월 12일에서 15일에 정부를 뒤흔들고 정부로 하여금 결국 총체적 격리전략을 택하도록 강제한 것은 그 이상의 주저가 수백만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본 임페리얼칼리지런던(Imperial College London)의 보고서였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다.

이후 너무도 명백해진 것은 행동경제학과 이른바 ‘넛지 이론’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파괴적 영향인데, 넛지 이론은 개인의 행동을 조종하는 데 강제나 구속보다는 인센티브와 자극에 의존한다.(([옮긴이] 행동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은 심리적·인지적·정서적·문화적·사회적 요인 등이 개인과 조직의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경제학의 한 분야이다. 넛지(Nudge)는 간접적 제안과 같은 유연한 방식으로 개인 또는 그룹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경제학의 개념이다.)) 우리가 이제 아는 것은 영국 정부에 조언하는 ‘넛지 유닛’ 혹은 ‘행동통찰팀’이 다음과 같이 국가에 그들의 이론을 성공적으로 확신시켰다는 점이다. 즉 너무 빨리 엄한 조치에 의해 제약을 받은 개인들이 전염병이 최고도일 때 즉 규율이 가장 필요한 바로 그때 규율에 지쳐 해이해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2010년 이후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경제이론 ―『넛지』(Nudge, 2009)에 간추려져있다― 은 ‘효율적 국가 거버넌스’를 창출하기 위한 최고의 수단으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 접근법은 강제 대신 ‘넛지’를 사용하여 최선의 결정을 내리도록 사람들을 고무하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여전히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개인에게 온화하고 간접적인, 편안하고 선택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말이다.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이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의 적용은 이중적이었다. (1) 강압적 조치로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는 것에 대한 거부 (2) ‘전염예방행동―거리두기, 손 씻기, 옷소매에 기침하기, 열이 나면 자가 격리하기,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기―에 대한 선호가 그것이다.‘

말랑한 자발적 조치에 의존하는 이 도박은 위험한 것이었다. 전염병 상황에서 이 접근법의 효율성을 입증하는 과학적 혹은 경험적 증거는 없다. 그리고 이제 이 접근법이 완전히 실패했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프랑스 관료들이 3월 14일까지 바로 이 접근법을 채택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제한조치는 시간이 지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3월 6일 밝혔듯 마크롱은 엄격한 봉쇄조치의 채택을 처음에 거부했다. 그는 바로 그날 그의 아내와 함께 갔던 극장을 나서며 “삶은 계속된다. 취약인구를 제외하면 우리의 사회적 행동을 바꿀 이유는 없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전적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저 말 아래 숨어 있는 전술을 우리는 분명 감지할 수 있다. 자유지상주의적 온정주의에 기반하여 경제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으로 알았던 엄격한 조치를 정부가 미루는 전술을 말이다. 

국가주권 혹은 공공써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러스를 억제하지 못한 자유주의적 온정주의의 궁극적 실패가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진로를 발본적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프랑스에서는 마크롱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이러한 변화를 처음 엿볼 수 있는데 이 연설에서 그는 국민통합, 우리의 신성한 연합, 그리고 프랑스 국민의 ‘인격적 강인함’에 호소했다. 마크롱의 그 다음 3월 16일 연설은 호전적 포즈와 미사여구에 있어 훨씬 더 노골적이었다. “우리가 지금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작금이 총동원의, ‘애국적 자기절제’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주권국가의 형상이 가장 극단적이면서도 가장 고전적 형태로 현시된다. “저기 있는, 안 보이는, 찾기 힘든, 그리고 전진하는” 적을 찌르는 칼의 형태로 말이다. 

그러나 3월 12일 대통령 연설에서 훨씬 더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마크롱은 복지국가와 공중보건의 확고한 옹호자로 갑작스레 거의 기적과도 같이 변모했다. 심지어 마크롱은 모든 것이 시장논리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을 단언했다! 몇몇은 좌파였던 많은 해설자들과 정치인들은 우리 공공써비스의 대체불가능한 중요성을 마크롱이 인정한 것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목격한 것은 마크롱이 2월 27일 삐띠살프뜨리레병원(the Piti Salp tri re Hospital)을 방문했을 때 한 의사와 벌인 공공연한 대립에 대한 뒤늦은 반응에 지나지 않았다.

신경학 교수인 그 의사는 마크롱이 공립병원에 ‘투자충격’(([옮긴이] 여기서 투자충격(investment shock)은 긍정적 투자충격 즉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투자의 급격한 증가를 의미한다.))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마크롱은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의사의 요구에 동의했다. 물론 마크롱의 뒤따른 선언들은 완전히 공허한 것이라는 점이 즉각 인지됐으며 마크롱 정부가 수년 간 체계적으로 추구해온 신자유주의 정책은 결코 의문에 붙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기자회견에서 마크롱은 “우리의 음식을, 보호를, 또는 생활환경을 돌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타인들에게 위임하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는 통제를 회복해야 합니다”고 선언했다.

국가주권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다수에게 특히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의 네오파시스트들에게 환영받았다. 따라서 공공써비스의 방어는 주권국가의 특권과 완벽히 나란히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건을 시장논리로부터 분리하는 것은 과거 프랑스가 유럽연합에 했던 많은 양보를 이제 되돌리는 과정에 있는 주권행위이다. 그러나 공공써비스 개념이 국가주권 개념과 실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그렇게 명백할까? 전자가 후자에 의존하는 것일까? 공공써비스가 국가주권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국가주권 지지자들이 전개한 핵심 논의들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특히 신중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국가주권의 본성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하자. 어원적으로 주권은 (라틴어 superanus에서 유래한)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하는데, 무엇에 대한 우월성일까? 간단히 말해 국가권력을 제한한다고 위협하는 모든 법들이나 의무들에 대한 우월성, 다른 국가들과 자국 시민들 모두에 대한 우월성이다. 주권국가는 모든 책무나 의무보다 우위에 있으며 책무·의무를 그것이 원하는 대로 축소 혹은 취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 형상인 국가는 특수한 통치기능의 일상적 행사 위에서 국가의 연속성을 체현한다고 상정되는 대표자들을 통해서만 행동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상 국가의 우월성은 대표자에 가해지는 법률이나 의무에 대한 대표자의 우월성을 의미한다. 이는 모든 주권주의자들에 의해 원칙의 지위로 고양된 우월성 개념이다. 허나 이 원칙은, 불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적용된다. 본질적인 것은 국가주권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신념과는 무관하게 누군가는 국가의 대표자들로 행동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국가의 대표자들이 유럽연합에 잇따라 인정한 모든 양보는 주권행위였다. 바로 유럽연합의 수립이 애초부터 국가주권 원리의 실행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사하게, 다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국가가 인권수호에 관한 국제적 의무를 지속적으로 회피해왔다는 사실 또한 주권논리의 일부이다. 인권수호자선언(the Declaration on Human Rights Defenders, 1998년)은 서명국에 인권수호자를 위하여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어야하는 의무를 부과한다. 그러나 서명국의 법률과 관행 특히, 이탈리아와 공유하는, 국경에 관한 프랑스의 법률과 관행은 그 국제적 의무를 침해한다.

기후 변화의 책무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이 책무를 국가들은 언제나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준하여 기꺼이 무시한다. 그리고 국내 공법(公法)에 관해서도 국가주권은 가장 강력하다. 프랑스 사례를 계속 들어보면, 가이아나 원주민의 권리가 ‘분할불가능한 하나의 공화국’ ―이는 국가주권의 신성불가침 원리를 다시금 말해주는 표현이다― 의 원리라는 이름하에 일상적으로 거부된다. 이런 표현은 궁극적으로 시민들에 의한 국가통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의무를 국가의 대표자들이 면하려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마지막 논점은 소위 ‘공공’써비스의 공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하기 때문에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여기서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공적’이라는 개념이 ‘국가’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이 인식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publicum’(푸블리쿰)이라는 용어는 그저 국가행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으로 구성된 전체 공동체를 가리킨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원하는 대로 써비스를 나눠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국가써비스가 아닐뿐더러 국가의 확장인 것만도 아니다. 공공써비스는 “공중을 위해”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공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써비스는 시민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구성한다. 

달리 말해 공공써비스는 국가와 그 통치자가 피통치자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공공써비스는 국가가 피통치자에 대해서 관대하게 확장한 호의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수년간의 자유주의적 논쟁이 ‘복지국가’라는 문구에 부과한 부정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공공써비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가 중 한 명인 레온 뒤기트(Léon Duguit)는 20세기 초에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제기했다. ‘공공써비스’라고 불리는 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피통치자와의 관계에 있어 권력자의 의무가 우선한다는 것이다. 뒤기트에게 공공써비스는 국가권력의 현현이 아니라 통치권력의 제한이다. 공공써비스는 통치자가 피통치자의 하인이 되는 메커니즘이다.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통치자에게도 부과되는 이러한 의무가 뒤기트가 ‘공적 책무’라 부르는 것의 기초를 형성한다. 이것이 공공써비스가 주권의 원리가 아닌 사회적 연대의 원리, 모두에게 부과되는 원리인 이유다. 주권의 원리가 공적 책무의 이념과 양립할 수 없는 한에서 말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국가주권이라는 허구에 의해 주로 억압되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써비스를 계속해서 느끼게 되는 것은 여전히 기본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이 강하게 연결돼 있다고 시민들이 느끼기 때문이다. 공공써비스에 대한 시민의 권리는 공공써비스를 제공해야하는 국가의 대표자들의 의무 혹은 책무의 분명한 귀결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위기에 영향 받는 여러 유럽 국가 시민들이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일상적 싸움에서 공공써비스에 대한 그들의 애착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유다. 예를 들어 스페인의 수많은 도시의 시민들은 중앙집권적 통합국가에 대한 그들의 정치적 태도와 무관하게 그들의 발코니에서 보건노동자들에게 갈채를 보내왔다.

따라서 여기서 두 관계를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 공공써비스와 특히 의료에 대한 시민들의 애착은 다양한 형태의 공적 권위나 공적 권력에 대한 집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본질적 기능을 하는 써비스에 대한 애착을 시사한다는 것을 말이다. 국가와의 근본적 동일시를 드러내는 것과는 무관한 이 애착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보편적 감각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우리의 ‘팬데믹 동료시민’이 견디는 시험/시련에 민감하도록 만든다. 그들이 이탈리아인이든 스페인인이든 유럽 국경 너머에 살든 말이다.

전지구적 커먼즈의 긴급성

우리는 위기 이후 ‘우리의 발전모델’을 문제 삼는 최초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마크롱의 약속에 극히 회의적이며, 또한 현재 시행 중인 과감한 경제조치들이 2008년 경제위기 때 시행된 조치들과 결국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고 볼 많은 이유들이 있다. 우리는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일치된 노력을 볼 것이다. 즉, 점점 더 커지는 사회적 불평등의 조건 속에서 팬데믹이 없었더라면 중단 되지 않았을 지구의 파괴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말이다. 그리고 “경제를 구하기” 위해 고안된 거대한 경기부양책이 최저임금 근로자와 납세자들에게 다시 한 번 더 부담이 될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역전되기 더 어려운 한 가지 중대한 변화가 진행 중이다. 국가주권은 안보 민감증, 외국인 혐오증과 함께 그것의 파산을 입증했다. 국가주권은 전지구적 자본을 제한하기는커녕 전지구적 경쟁을 가중시킴으로써 자본흐름을 관리한다.

두 개의 결론이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빠르게 이해되고 있다. 첫째, 공공써비스가 필수적인 인간적 연대를 촉진할 수 있는 공통적 제도로서 중요하다. 그리고 둘째, 인류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는 전지구적 커먼즈의 제도화이다. 인류의 주된 위험이 이제 분명 전지구적 성격을 띠며 상호원조와 연대도 전지구적이어야하고 기반시설과 지식은 공유되어야하며 협동이 절대적 규칙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건강·기후·경제·교육·문화는 더 이상 사유재산 혹은 국가재산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전지구적 커먼즈로 개념화되어야하며 정치적으로 그렇게 제도화되어야 한다. 한 가지는 이제 무엇보다 더 확실하다. 구원은 위로부터 오지 않을 것이다. 시민들의 반란, 봉기, 그리고 초국가적 연합만이 국가와 자본에 공통적인 것을 부과할 수 있다.




네이선 슈나이더와 협동조합 운동의 미래

 



어떻게 하면 협동조합이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특히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떠한 실질적 개입이 IT 대기업들의 반사회적 행동을 저지할 수 있을까? 이 두 질문은 내가 콜로라도 볼더 대학교(the University of Colorado Boulder)의 미디어학 교수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와 함께 나의 팟캐스트 「커머닝의 새로운 영역들」(“Frontiers of Commoning”)의 에피소드 8편에서 최근 탐구한 것들이다.

네이선은 저항운동·비폭력운동·체제변화운동에 초점을 맞춰 오랫동안 활동해 온 언론인 겸 학자이다. 그의 연구 중 많은 부분은 협동조합과 디지털 기술이 오늘날의 세상에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특히 플랫폼 협동조합을 우버, 에어비엔비 그리고 태스크래빗과 같은 착취적인 사업 모델을 뛰어넘는 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해 왔다.

슈나이더에게 협동조합의 역사는 큰 영감과 실질적인 가르침의 원천이다. 그는 영국인으로부터 인도인들을 해방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협동조합을 수용한 간디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을 형성해왔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는 한 형태입니다. 가령, 사람들은 협동조합이 시민권 운동의 큰 요소였다는 것을 종종 잘 알지 못하죠.”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신용조합을 시작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열심히 도왔는데, 이는 부분적으로는 협동적인 은행업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로 하여금 억압적인 지역 상황으로부터 더 독립적이 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네이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시시피 지역의 한 원로 시민+권+운동가를 인터뷰했고 그에게 협동조합이 1960년대에 있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죠. ‘당신은 누가 사람들에게 유권자 등록을 하라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소작인들은 감히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하면 언제든지 땅에서 쫓겨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협동조합의 구성원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운동에 참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안전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세상의 지형(地形)이다.”

슈나이더는 이 지형을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이윤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것, 지역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 그리고 공동체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협동조합은 당연한 대응인 것이다.

네이선은 협동조합을 미국의 대세에 진입시키기 위해 두 가지 주요한 전략을 본다. 하나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정치체제의 기반을 흔들기 위해 협동조합을 이용했던 민중주의자들의 방식으로 알려진 솔직하게 정치적인 접근이다. 다른 하나는 소유권과 같은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신화를 바탕으로 하는, 덜 적대적이며 합의에 의해 추동되는 접근이다. 그는 루이스 켈소(Louis Kelso)의 ‘우리사주신탁제도(ESOP:Employee Stock Ownership Plan)’의 창안을 사례로 인용했다. 우리사주신탁제도는 직원들이 직장에서 개인의 지분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합법적이고 구조적인 혁신이었으며 동시에 전반적인 노동 문화를 개선하기도 했다.

슈나이더는 협동조합이 자본의 힘을 위협할 수 있을 경우에만 궁극적으로 강력한 운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은행들에게 경쟁 도전장을 내민 신용협동조합들과 공익사업으로부터 사업을 인수한 지방전기협동조합은 고전적 사례들이다. 네이선에게 다른 협동 기획들보다 플랫폼 협동조합의 미래 힘에 대한 낙관론을 심어준 것은 견고한 대항을 극복한 바로 이러한 풍부한 협동조합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한 목표를 밀고 나가기 위해 슈나이더는 여러 핵심적인 운용기획을 만들어 오고 있으며, 그 기획 중 일부는 미디어 조직에서의 공동체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위한 실천 지향적인 연구 센터인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Media Enterprise Design Lab)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미디어 기업 디자인 랩>은 새로운 금융 제도, 소프트웨어 도구, 교육 전술을 찾아내기 위해 기업가들, 스타트업 프로젝트 그리고 활동가들과 협동한다.

슈나이더는 온라인 프로젝트에서 민주적인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확장시키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는 데 개인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한 노력 중 한 가지는 그렉(Greg)과 하워드 브로드스키(Howard Brodsky)를 포함하는 여러 협동조합 리더들에 의해 만들어진, 협동조합 ‘가속장치’인 <스타트.코업>(Start.Coop)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타트업 회사들이 투자자들을 찾고 프로젝트 개발에 관한 도움을 얻으며 협동조합 관행과 문화를 더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젝트이다.

네이선은 ‘공동체로 가는 출구’(Exit to Community)라고 알려진 새로운 금융 전략을 개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보통 전통적인 스타트업의 성공한 창립자들은 회사를 월가(Wall Street)나 IT 대기업에 매도하지 않을 수 없다. ‘공동체로 가는 출구’는 실질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더 나아가길 원하거나 더 많은 돈을 마련하기를 원하는 기업가들이 그들의 회사를 지역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매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사업을 더욱 목적 지향적이고 사회 지향적이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으로 유지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슈나이더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 내의 거버넌스 상태를 보고 실망한 바 있는데, 그는 그 상태를 참여 거버넌스가 형식적인 형태로라도 거의 없는, ‘봉건제를 내포한’ 체제라고 부른다. 그는 이런 상황의 개선을 돕기 위해 디지털 커뮤니티들에 기본적인 ‘거버넌스 도구모음’을 제공하는 <커뮤니티룰>(CommunityRule)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통제가 중앙에 집중되고 설립자들이 ‘영원한 독재자들’처럼 행동하는 함정을 피하는 한편 자치를 위한 더 공정하고, 더욱 계몽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그 취지이다.

 




커먼즈의 비가시성

 


  • 저자  : Peter Linebaugh
  • 원문 : “The Invisibility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피터 라인보의 저서 『섯거라, 도둑아!』(Stop, Thief!, 2014)의 15장 「커먼즈의 비가시성」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라인보는 세 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하나는 1930년대의 것이고, 또 하나는 1790년대의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1940년대의 것이다.

첫째 사례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에쎄이 「마라케시」(“Marrakech”, 1939)이다. (마라케시는 모로코 중앙부의 도시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 ‘천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그리고 여성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글의 주요한 논지이다. 가령 장작단을 지고 앞을 지나가는 나이든 여성들의 대열을 보면 오웰 자신의 눈에는 장작단만 지나가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생산물만을 보는 제국주의자의 눈이라고 라인보가 정리해준다. (이렇게 정리해주기 이전에 라인보는 이 글에서 오웰이 인종주의와 비가시성을 주제로 다룬다고 말해놓은 바 있고, 여기에 여성혐오도 추가해야 한다고 덧붙인 바 있다.) 그렇다면 오웰은 제국주의 국가에 속하고 백인에 속하며 남성에 속한 자신의 ‘보지 못하는’ 눈을 스스로 고발한 셈이니 라인보는 오웰의 솔직함을 칭찬하고 말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다. 그에게 빠져있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 장작은 어디서 오는가? 오웰은 묻지 않는다. 무슨 권리로, 어떤 관습에 의해서 장작을 해오는가? 어떤 투쟁들이 이 관행을 보존했는가?

이어서 라인보는 마그나 카르타의 7장에 나오는 ‘상부한 여성의 에스토버스’(왕이 상부한 여성들에게 부여한, 나무에 대한 권리)((‘에스토버스’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478 참조.))를 언급하고 이는 수 세기에 걸친 투쟁으로 지켜낸 관습임을 지적한다. 오웰은 아마도 비가시성이 가장 높을, 갈색 피부에 육체노동을 하며 나이든 노파를 만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느 날 키가 120센티가 넘지 않을 여성이 짐을 잔뜩 지고 내 앞을 기다시피해서 지나갔다. 나는 그녀를 세우고는 5수짜리 동전(1 파딩을 조금 넘는다)을 손에 쥐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새된 울부짖음으로 대답했다. 고마움의 표현도 들어있었지만 주로 놀라움이었다. 내 생각에 그녀의 관점에서는 내가 그녀의 눈길을 끎으로써 거의 자연법칙을 위반하는 것 같았으리라. 그녀는 노파로서의, 다시 말해서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서의 그녀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라인보는 오웰이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지적한다. ‘고마움’도 들어있었다는 말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가도 지적한다. 라인보가 보기에 오웰은 인종주의, 여성혐오를 자신의 서술에 투사하지만, 커머너들과 대화할 기회를 갖지는 않는다. 나무는 어디서 해오냐고, 그 나무로 어떤 불을 피우냐고, 그 불이 어떤 어린아이나 나이든 부모를 따뜻하게 하냐고 묻지 않는다. 왜 오웰은 그녀와 대화하지 않은 것일까?라고 라인보는 묻는다.

라인보는 이 에피소드가 보여주는 것이 “제국주의 체제에서 써발턴 역할을 하는 다수에게 특징적인 태도, 자신은 원래 기본적으로 짐승인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민중과 대화하기를 거부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고 덧붙이고,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는 눈을 통해서가 아니라 눈을 가지고 볼 때에는(when we see with, not through, the eye) 거짓을 믿게 마련이다.”

둘째 사례는 워즈워스의 자서전적 장시 『서곡』(Prelude) 9권의 한 대목이다. (이 시는 시인의 정신이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이 대목은 1792년 워즈워스가 프랑스의 보쀠(Michel de Beaupuy)라는 공화주의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제시한다. 보쀠는 당시 블롸(Blois) 지역의 정치논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논의의 핵심은 제한된 제헌군주제에서 급진적인 공화주의 및 왕정의 몰락으로의 이행과 관련된 것이었다. (보쀠는 공화주의를 지지했으며 나중에 혁명을 방어하는 전투에서 죽어 영웅이 된다.)

라인보는 이 대목을 직접 인용한다. 여기 원문 그대로 소개하지만 옮기지는 않고 내용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And when we chanced
One day to meet a hunger-bitten girl,
Who crept along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by a cord
Tied to her arm, and picking thus from the lane
Its sustenance, while the girl with her two hands
Was busy knitting in a heartless mood
Of solitude—and at the sight my friend
In agitation said, ‘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 I with him believed
Devoutly that a spirit was abroad
Which could not be withstood; that poverty,
At least like this, would in a little time
Be found no more; that we should see the earth
Unthwarted in her wish to recompense
The industrious and the lowly child of toil
(All institutes for ever blotted out
That legalized exclusion, empty pomp
Abolished, sensual state and cruel power,
Whether by edict of the one or few);
And finally, as sum and crown of all,
Should see the people having a strong hand
In making their own laws. whence better days
To all mankind.

[단어 및 어구 설명]

    • chance + to부정사 : 우연히 ~하다 (= happen + to부정사)
    • hunger-bitten : bitten by hunger
    • languid : (움직임이) 힘없고 느릿느릿한
    • fitting her languid self Unto a heifer’s motion : fit A (un)to B
    • heifer : 어린 암소
    • its sustenance : ‘자기(어린 암소)가 먹을 것’
    • heartless : 낙담한, 풀이 죽은
    • in a little time : ‘시간이 조금 지나면’
    • withstand A : A의 끌림, 영향력, 설득력 등을 뿌리치다 [이 의미로는 주로 부정문으로 쓰인다.]
    • sensual : 세속적인, 물질적인
    • edict : 칙령, 포고령
    • as sum and crown of all, : 여기서 ‘sum’은 ‘최종결과’라는 의미고 ‘crown’은 어떤 과정의 정점을 의미한다.
    • whence : 그 원인으로 → 그 결과(as a result)

 

워즈워스를 포함한 젊은이들은 너도밤나무 숲을 말을 타고 지나던 중 어떤 굶주린 소녀를 만난다. 이 소녀는, 소녀의 팔에 줄로 묶인 상태에서 길에서 먹을 것을 집어먹고 있는 어린 암소의 몸짓에 맞추어 느릿느릿 지나가면서,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바쁘게 뜨개질을 하고 있다. 이 모습을 보고 격동한 보쀠는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Tis against that/ Which we are fighting!)라고 말하며, 이에 워즈워스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어떤 [혁명의] 기운이 퍼져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가난은 이제 곧 볼 수 없게 될 것이며 대지가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든 억압적인 제도가 폐지될 것으로 믿으며 심지어 민중이 자신들의 법을 만드는 데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류에게 더 나은 날들이 오리라고 믿는다.

이렇듯 암소지기 소녀의 굶은 모습에서 시작한 워즈워스는 가난의 폐지와 민중의 자치정부의 달성에 대한 이상주의적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오웰의 경우처럼 이 젊은 혁명가들도 그 소녀에게 말을 걸지 않음을 라인보는 지적한다. 동정심에 들떠서 거창한 결론들에 이를 뿐인 것이다. 라인보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모두 땅에 대한 관습적인 권리를 공격했으며 이는 커머너들이라는 하나의 계급의 자원을 다른 계급, 즉 사유자들이 대대적으로 훔쳤음을 나타낸다. 워즈워스는 그 소녀를 가난하다고만 생각하지 커머너로 보지는 않는다. 그는 의존상태를 보는 것이다. 그 소녀와 대화를 했더라면 워즈워스는 그녀의 자립성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왜 그러지 않았을까?

라인보가 지적하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이 왕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긍정적 측면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토지와 커머닝 관습의 대대적인 강탈이라는 부정적인 측면도 가진다는 점이다. 당시에 퍼진 ‘정신’에는 바로 이런 맹점이 들어있다. 그래서 라인보는 묻는다. 보쀠가 워즈워스한테 ‘바로 저런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싸우는 것이야’라고 말했을 때 ‘저런 일’은 무엇인가? 굶주림? 기계와 경쟁하기 위해서 맹렬히 뜨개질하는 것? 토지와 오래된 관계를 맺고 있는 커머너? 할스베리(Halsbury)의 『영국의 법』(Laws of England)에 따르면 “커머너가 공유지에서 가지고 있는 몫은 법적 표현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축의 입으로 풀을 먹는 것이다.” 워즈워스는 바로 이 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제임스(C.L.R. James)의 사례이다. 그의 『변증법에 관한 단상』(Notes on Dialectics)은 1948년 디트로이트의 동지들에게 큰 의미를 가졌었다. 『단상』은 레닌과 트로츠끼가 시작한 것, 즉 헤겔의 변증법(특히 대립물의 통일)의 노동운동에의 적용을 완성하고자 한 저작이다. 노동운동은 역사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극복할 대립물을 만난다는 것이 그 핵심 취지이다. 『단상』은 유럽, 미국 등지에서 2차 대전 후에 발전한 맑스주의 혁명가들의 소그룹들에게 큰 중요성을 가졌으며, 1955년-68년 시기에 제3세계 해방운동과 제1세계 노동운동의 반란을 환영하는 저서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1981년에 『단상』을 공부한 라이보가 보기에 이 책에서 해방적인 것은 1640년대에서 1940년대까지의 노동운동의 개념의 통일성이었다. 제임스는 이 통일성을 부르주아 실증주의의 단계론적 범주들(봉건주의-자본주의-사회주의)에 대립시켜 파악했다. 이러한 강력한 사고에도 불구하고 커먼즈는 제임스에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네바다의 레노에 주거지를 확립하기 위해 가 있을 때(주거지 확립의 목적은 이혼을 위한 것이었다) 레노 근처의 목장에서 지냈다. 이 목장은 원주민 부족에게 속해 있었으며 상업화되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잡역부로 일했는데, 그의 동료 노동자들은 선원들, 카우보이들, 필리핀인들, 멕시코인들, 중국인들, 중서부에서 온 유럽 출신의 백인들이었다. 그는 토착민들보다는 이들에게 끌렸다. 그가 본 중에 가장 잘 생긴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달리 이곳의 토착민들은 땅딸막했다. 그는 이 모든 사람들과 많이 사귀지는 않았다. 1948년 8월에서 11월까지 게링(Guerin)의 『프랑스 대혁명』을 번역했고 『단상』을 집필했다. 목장은 피라미드 호수(Pyramid Lake) 옆에 있었다.

그가 집필하고 있을 때 그의 주변에서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전쟁, 파이우트족(the Paiutes)이 자신들의 공유지를 되찾기 위해 벌이는 게릴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바 다대학교의 사회역사가인 둬킨(Denis Dworkin)은 이렇게 썼다.

맑스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백성으로서 제임스가 파이우트족을 그 자신이 속한 것과 같은 자본주의적 제국주의라는 세계사적 과정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확실히 타당했다. 그러나 목장이 원주민보호구역에 있었다는 점을 그가 인정한다는 점은 제쳐놓고, 제임스가 토지분쟁은 말할 것도 없고 그곳의 주민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한 조각도 없다.

이어서 라인보는 파이우트족의 삶을 그린 책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곳의 토지가 종획된 역사(보호구역은 그 결과이다)를 이런저런 책들을 들며 말해준다. 그러는 가운데 일자리를 찾는 백인노동자와 먹을 것을 찾는 원주민의 차이를 짚어주기도 한다. “일자리를 찾는 사람은 사장에게서만 임금을 발견하지만, 파이우트족은 보존되는 한에서만 자원을 발견한다.”

제임스가 네바다를 떠난 후 1년 뒤에 뉴욕시민 작가인 리블링(A.J. Liebling)이 같은 목적으로 피라미드 호수 목장에 오는데, 음식 및 스포츠 담당 작가인 리블링은 제임스와 달리 파이우트족의 분쟁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여러 요구들의 합법성과 파이우트족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에 관심을 갖고 뉴욕으로 돌아온다. 그는 파이우트족과 “미국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되는 원주민 전쟁”에 대한 일련의 글들을 써서 1955년에 출판한다.

파이우트족의 주된 적(敵)인 맥캐런(Pat McCarran) 상원의원은 조 매카시(Joe McCarthy)의 측근이었으며 1952년의 맥캐런법―코뮤니스트들, 체제전복자들, 동반자들[코뮤니즘에 공감하는 비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법―의 후원자였다.

1985년에 미국대법원은 자신들이 천년 동안 살아온 토지에 대한 파이우트족의 모든 권리주장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린다.

제임스는 1950년의 국가안보법(Internal Security Act)으로 엘리스 아일랜드에 투옥되었다. 그의 항소는 그가 코뮤니스트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라인보는 제임스는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정중하게 바로잡는다. 그가 맑스주의 혁명가이기는 하지만, 코뮤니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양자의 차이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사람들도 모르고 판사도 몰랐다고 하면서.

맥캐런 상원의원은 원주민 커먼즈를 파괴하고자 했으며 코뮤니스트들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공산당의 당원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코뮤니스트가 아니라고 불만을 표할지 모르지만, 그는 분명 자본주의의 반대자였으며 노동자혁명의 옹호자였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파이우트족의 삶의 방식에 내재한 커머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 투쟁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라인보는 이 세 사례를 한데 모아 정리한다. 그는 다른 면에서는 날카로운 이 세 사람의 눈을 방해한 것이 무엇인가 하고 묻는다. 라인보는, 자신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진정한 변증법인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만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 [라인보 자신은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정리자가 보기에는 여기서 헤겔의 변증법이 바흐친의 ‘대화적 상상력’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그러면 또한 물어야 할 것은 그들이 못 본 커먼즈를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는가이다. 많은 연구가 숲의 나무를 땔감으로 취할 권리를 발굴해냈고 이것이 우리를 이른바 커머닝의 한 형태로서의 ‘나무 절도’에 민감하게 만든다. 토착민 커먼즈는 이제 국제법의 주제가 되었다.

[땔감 채취, 먹을 것 채취, 땅]을 커머닝으로 보는 것이 무슨 이득을 가져오는가? 강탈의 보편화(universality of expropriation)에서 그 답이 나오며, 이 범죄들을 바로잡는 방법은, 상실되고 박탈된 것에 대한 배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정리자 논평]

라인보는 여기서 글을 맺지만, 우리는 “강탈의 보편화에서 그 답이 나”온다는 말을 (그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숙고해야 할 듯하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관계는 지구 전역에서 일어나는 커먼즈의 강탈(사유화)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이른바 자본의 시초축적 단계나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시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포섭’의 시기에도, 즉 지금도 계속된다. 자본은 끊임없이 공통적인 것을 (예전에는 주로 이윤의 형태로, 얼만 전부터는 주로 자산소득의 형태로) 사유화하여 자신을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익숙한 현실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세상의 법칙인 양 당연히 여기며 더 나아가 선망하고 욕망한다.

자본주의적 관계가 그 자체에 공통적인 것의 사유화를 포함한다는 점을 정밀하게 분석한 사람은 역시 맑스이다. 맑스는 『자본론』 3권 15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세 개의 주요한 사실”을 제시한다. 그 첫째와 둘째는 다음과 같다.

(1) 소수인의 수중에 생산수단이 집중된다. 이를 통하여 생산수단은 직접적 노동자의 소유로서 나타나지 않게 되며, 그 반대로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비록 생산수단은 처음에는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본가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
(2) 노동 자체가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다. 협력, 분업, 노동과 자연과학의 결합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비록 대립적인 형태로이긴 하지만―지양한다.

(1)은 비록 자본가의 사유재산이 되었기는 하지만 생산수단이 사회적 생산능력으로 전환된 측면을 지칭하며, (2)는 노동이 비록 자본가의 처분에 맡겨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회적 노동으로 조직된 것을 지칭한다. “자본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수탁자인데도 불구하고 이 수탁의 모든 과실을 혼자 취득한다”―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생산이 사회적이므로 그 과실은 잠재적으로는(virtually) 사회 전체의 것, 즉 공통적인 것인데 실제적으로는(actually) 자본가가 (이윤의 형태로) 사유화한다는 말이다. (‘과실’은 생산된 총 가치에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과 투자된 자본의 재생산 비용은 뺀 것이다.) “사적 소유와 사적 노동 모두를”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과실은 잠재적으로는 자본가의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노동자의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것이다. 이 잠재적인 측면에 바로 커먼즈가 숨어 있다. 그런데 자본가는 언제나, 혹은 상황이 안 좋아지면 과실(이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임금을 삭감하여 그 일부를 자신의 이윤으로 취하려고 하고, 노동자들은 당연히 노조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방어하려고 한다. 고정된 양의 과실을 놓고 이윤과 임금이 자신이 몫을 더 크게 하려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기서 커먼즈는 보이지 않는다.  자본가의 사유재산 증식 욕심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침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약자인 노동자의 입장에서 방어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커먼즈가 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자본이 판을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공장을 떠나 생산과정 바깥에서 공통적인 것을 착취하는 금융자본(월가가 대표하는 유형의 자본)이 자본의 주된 세력이 되었을 때 그 변증법적 대립의 상대를 잃은 노동자는 더욱더 힘이 약화된다. 노동자의 힘의 약화는 그 자체로 공통적인 것의 약화이다. 인간의 생산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부의 핵심적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침탈하고 훼손한 결과가 어떤 것인지는 지금 인류를 강타하고 있는 팬데믹이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가 높은 만큼이나 공통적인 것의 침탈 정도가 높은 미국의 경우에) 잘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기후위기는 이를 더욱더 높은 정도로 보여줄 것이다. 이제는 삶의 번성을 위해서는 물론이요 다가오는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도 커먼즈(공통적인 것)의 가시화와 번성이 몹시 필요하다. [정백수]

 




돌봄과 번성: 커머닝으로 생겨나는 사회보장

 


  • 저자  : Silke Helfrich, David Bollier, Thomas de Groot
  • 원문 :  Caring and Thriving: The Social Security Engendered by Commoning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0년 10월 16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흔히 네덜란드인명의 성에 붙는 ‘de’―영어 정관사 ‘the’에 해당―를 ‘데’로 표기하지만, 실제 발음은 ‘더’에 더 가깝기 때문에 ‘Thomas de Groot’를 ‘토마스 더흐로트’라고 표기했다.)

     


암스테르담 소재 <커먼즈 네트워크> 프로그램 책임자인 토마스 더흐로트(Thomas de Groot)는 최근에 사회보장제도의 미래와 어떻게 커먼즈가 대안적인 이행경로들을 제시할 수 있을지에 관하여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터뷰는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줄인 것이다. 이 인터뷰의 본래 게시글은 <커먼즈 네트워크> 웹싸이트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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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흐로트
우리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대한 다른 비전이 필요하다는 것과 관련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헬프리히
좋습니다. 커먼즈 사유에 사회보장이라는 쟁점을 연결시키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해보죠. 우리는 시장기반 경제에 구조적으로 의존함으로써 부담을 떠안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회보장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Covid-19 팬데믹 국면에서 보고 있는 것도 이것입니다. 국가는 기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수십억을 쓰고 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기업들을 활성화하는 것이 더 많은 돈을 산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국가도 자본 유입과 세수에 의존적입니다.

그래서 경제위기와 사회보장제도의 위기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에 지레 겁을 집어먹습니다. 또 다른 위기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장기반의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보다 독립적이도록 만드는 그런 방식으로 경제의 미래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저는 ‘재분배에서 선분배로’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이 표현에는 국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부를 재분배하는 현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선 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상황으로 갈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지분소유권(equity ownership)과 같지 않습니다. 투자금에 대한 이윤이나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 자산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시장과 국가 밖에서 자급활동과 서비스들을 창출하기 위한 공유된 부와 사회기반시설을 갖추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관련된 다른 주제로 넘어가기에 딱 좋은 말씀이군요. 사회보장의 원천을 문제화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이는 사회보장이 단지 화폐가치의 안전만을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는 사회보장을 화폐가치의 안전으로 생각합니다. 이 생각에는 부의 모든 재분배가 설계상 시장변동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매우 불안정한 접근법입니다. (특히 부자들이 재분배의 불공평한 조건들을 정치적으로 지시할 때는 말이죠.)

그것은 또한, 사회보장을 구상하고 제공하기 전에 우선 메가머신(megamachine)이 계속해서 굴러가게 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이것이 설계 결함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자본주의 경제의 (따라서 복지국가의) 또 하나의 기둥인 소유관계(시장을 통해 화폐가치를 발생시키기 위한 전제조건)에 이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유권 모델들을 언급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재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선분배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습니다. 실질적인 선분배는 모든 사람이 어엿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공유된 부의 기본 요소들(토지, 주택 등)에 법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하는 것을 보장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농업용 토지, 주택과 아파트가 지어지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은 사회보장을 보다 커먼즈 친화적으로 해석하는데 최대한 기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일에는 1%의 축적된 부의 일부를 되찾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팬데믹 시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임대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가 지금 수십억을 써야 하는 일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견디기 힘든 상황입니다. 탈상품화된 주택에 대한 권리는 마땅히 사회보장제도의 일부가 되어야합니다. 그 권리는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의 일부분인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전환이 생겨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소유(재산)를 다시 사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어
우리 사회에서 소유권 모델은 항상 개인 소유와 기업 소유 그리고 국가 소유로 구성됩니다. 이는 다시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사이의 단순화된 논쟁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커먼즈에 기반한 생각들은 결코 고려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 생각들은 항상 주변화되고 간과되며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헬프리히
그것은 국가 기관들이 시장경제 및 추출적인 기업모델들을 재분배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원천으로서 생각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접근법은 정말로 나쁜 설계상의 선택사항임이 드러납니다. 위기가 닥쳐도 재분배할 충분한 돈이 없을 것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죠.

 

볼리어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국가는 추출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그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명성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그들의 일은 그 경제가 낳는 추출과 성장을 촉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일에는 이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을 상상할 동기가 정말로 진짜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이해하고 있지만 기꺼이 나서지 않거나 직업상 근본적인 해결책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헬프리히
그래서 우리가 사회보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리고 현 시스템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 있는지를 분석할 때 제대로 된 출발점은 국민국가들의 설계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국가들은 실제로 시장국가들인데, 모든 재분배 행위를 완전히 시장에 즉 투자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적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미래의 사회보장을 위한 모든 중대한 시나리오는 이 틀의 바깥에서 비롯되어야 할 것입니다.

 

볼리어
사람들은 시장이 사실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는 없다는 현실을 항상 회피해왔습니다. 불평등이 시스템으로 구축되고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실이 분명해진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들을 찾을 때 사람들은 시장과 사회적 연대 사이에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선의를 가진, 사회에 관심이 있는 정치가들을 곤경에 빠뜨리는데 그들이 탈성장이나 탈자본주의적 선택사항들을 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헬프리히
바로 그렇습니다. 미국처럼 유럽에도 존재하는 (아마도 진보적인) 노동조합의 전통이 떠오르는군요. 조직화된 연대에 관한 사유의 전통이죠. 하지만 그 전통조차도 우리가 결정하고자 하는 것에는 부적절합니다. 이는 그것이 노동시장에서의 일자리 창출은 복지국가에 의해 구상되는 모든 사회정책의 선결조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훨씬 더 강하게 이것을 제시해보자면 대부분의 경우, 사회보장 정책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을 분명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이 되는 안 되든 상관없이 말이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경제가 계속해서 굴러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막 확인한 것처럼 그것이 재분배를 하기 위한 수단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완벽한 원이나 동어반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하여 시장 참여자들(기업들, 투자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자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사회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돈을 벌게 할 것이며 이것이 다시 경제가 계속해서 돌아가게끔 할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바라듯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보장이 완전히 화폐화되었다는 결론만 내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없앨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함이 있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베네수엘라 소재 <쎄꼬쎄쏠라>(Cecosesola)라 불리는 협동조합들의 연합을 조사한 바 있습니다. 이것은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사회보장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연구에 도움이 됩니다. 요즈음 베네수엘라 경제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시장에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충분한 에너지가 제공되지 않고 자본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쎄꼬쎄쏠라>로부터 지급받는 물자들로 말이죠.

이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쎄꼬쎄쏠라>가 어떤 의미인지를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에게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느낌, 즉 안도감이죠.”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속(유대)의 안정감에서, 살아있는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관리(파수)하는 시장, 자기조직화, 절대화된 평균가격에 기반을 둔 거래,(([옮긴이] 쎄꼬쎼솔라의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채소들의 경우에는 더 쉽습니다. 우리는 채소들의 가격을 우리가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투여한 시간과 노력으로부터 분리합니다. 우리는 킬로그램당 평균 가격을 사용합니다.” (http://patternsofcommoning.org/we-are-one-big-conversation-commoning-in-venezuela/))) 의식(儀式)화된 활동과 상호지원에 대한 사실상의 소유권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의사결정 과정들을 통제합니다. 모두가 지위가 동등한 동료(peer)로서 조직한 그들의 사회보장 제도는—그들은 심지어 원장도 없이 모든 장비를 갖춘 병원을 운영합니다—큰 규모의 경제를 가지고 있는 국가의 주변부에서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을 창출해줍니다. 그런데 소속감을 가진다는 이 기본적인 요소가 이곳 유럽에서는 사회보장에 관한 논의에 끼지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볼리어
<쎄꼬쎄쏠라> 같은 것이 미국에서 작동할 수 없는 이유들 중 하나는 두서없이 말해서 정치문화에 그것을 허용할 공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헬프리히
이것으로 우리가 우리 시스템에 있는 다음 결함으로 넘어가는군요. 우리의 사회보장 및 경제와 관련된 새로운 통찰과 실험을 소개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회보장 및 경제를 둘러싼 우리의 담론의 범위가 매우 좁습니다.

 

볼리어
그 범위의 많은 부분이 국가권력의 본질적인 부분인 관료체제와 관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두루 적용되는 표준적인 모델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관료체제는 정치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하는 정책을 능력중시적이고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이바지합니다. 하지만 보편성과 관료체제를 고수함으로써 시스템은 지역의 독특함과 아래로부터의 창조성이 어떻게 가치를, 즉 오픈소스 스타일을 발생시키는지를 고려하지 못합니다. 커먼즈 접근법은 분명하게 이 요소를 참작합니다. 커먼즈가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고 열려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커머닝과 로컬리즘을 더 지원하도록 만들기 위해 국가의 관료체제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가 또한 우리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 가지 사례는 <도시 커먼즈의 돌봄과 회생을 위한 볼로냐 조례’>(([옮긴이] http://www.comune.bologna.it/media/files/bolognaregulation.pdf))입니다. 그리고 범위를 더 넓혀서 이아이오네(Christian Iaione)와 포스터(Sheila Foster)같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도시들> 운동(“Co-Cities” movement)이 해당이 됩니다. 이 접근법은 도시 관료체제와 (동네그룹들, 시민연합들 등등으로서 활동하는) 커머너들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개선을 이루어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선의의 실험은 선거정치, 정치정당, 입법대표자들의 권력놀음에 취약하죠. 게다가 국가권력과 커머닝 사이에 철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세계관의 충돌이 있습니다.

질케와 저는 이 과제, 즉 우리가 어떻게 커먼즈와 국가의 파트너십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어떻게 관료체제(국가)와 선거정치가 체질개선을 하고 스스로 문을 열어서 커머닝의 다원세계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과제와 씨름을 해왔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헬프리히
맞습니다. ‘국가’를 비난하는 것은 너무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국가주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는 것은 이 맥락에서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우리 정부시스템이 오늘날 그렇듯이 위계적으로 수립되어 있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상황과 욕구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국가권력은 화폐 안전(monetary security)을 명백하게 선호하는 행정상의 단일문화들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은 커다란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스트롬(Elinor Ostrom)으로부터 배운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만병통치약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죠.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다루어져야 하는 비화폐적인 안전욕구가 있습니다.

 

더흐로트
우리가 하는 연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이행 진로를 모색합니다. 그 중 하나의 핵심이 케어소득과 대안통화입니다. 케어소득은 우리가 탈성장 운동에서 페미니스트 사상가들로부터 배운 개념입니다. 이것은 시장에서는 아예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사회적 재생산노동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동네통화(neighbourhood currency, 지역통화)로 이 케어소득 방식을 조직한다는 아이디어를 추가했습니다.

 

헬프리히
우리는 항상 경제 영역에서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즉 사람들이 자급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재 시스템은 경제에서 돈이 유통되는 부분만 볼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지적하듯이 그 시스템은 많은 일들을 배제합니다. 많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답은 우리가 돌보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재생산노동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무조건 지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가 이전에 이야기했던 화폐화의 함정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케어소득을 대안통화에 연결시키려는 충동을 이해합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면 연대경제의 일부를 수용하고 시장경제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커머닝과 상업활동은 따로따로여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식이 있습니다. 조금 뒤로 돌아가 보죠. 모든 국민국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규칙을 마련하는 관료체제에 의존합니다. 그것을 두루 적용되도록 만든 만병통치약인 ‘추상적인 평등’이라고 부릅시다. 국가는 항상 위에서부터 통치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많은 다양한 상황들을 무시할 것입니다. 그럴 경우 이들 정부는 계속해서 도전을 받을 것인데 이는 법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보편적인 기본소득, 케어소득이나 또는 그러한 어떤 계획의 다양한 형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을 즉 ‘누가 그것을 운영(주관)합니까?’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동체에 기반을 두는 기본소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시나리오에서 누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만큼 얻고 무슨 이유로 받는지를 결정하는 주체가 국가는 아닐 것입니다.

기본소득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속감•책임감•사명감을 높이는 데 이바지합니다. 달랑 서류와 법조항들만 줄줄이 붙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국가화폐기금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살아있는 사회적 구조 없이, 소속감 없이 사회보장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볼리어
그것에 덧붙여서 저는 커먼즈에 기반을 두는 자금조달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중입니다. 이 보고서는 어떻게 돈과 공동체가 양도 불가능한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즉 돈과 공동체가 어떻게 시장의 힘에 의해 상품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을 수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돈(그리고 가치)이 공동체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시스템을, 공동체들과 사람들이 자본에 의해 신식민주의적인 추출 장소들(프랙킹, 식수, 광물들, 데이터 마이닝 등등을 생각보세요)로 취급되지 않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수 있을까를 묻고 있습니다.

저는 대안통화가 해결책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안통화는 당연히 장소에 기반하고 있고 그래서 가령 동네통화는 전지구적 금융의 회로 속으로 휩쓸려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커먼즈 내부에서 발생된 가치가 더 큰 경제에서 화폐를 통한 단순한 거래와 투기에 종속되지 않도록 막는 완충장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대안통화 사용자들이 자본주의적인 관계로 빠져드는 것을 막는 완충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안통화를 설계하고 사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지역 공동체들 스스로가 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헬프리히
핵심은 우리가 사회보장을 탈상품화하는 방법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보와 토지를 탈상품화하고,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교환의 수단으로서 복무할 수 있는 무수한 대안통화들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심지어는 돈 자체를 탈상품화하면서 시작해봅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행의 작은 지대들을 획득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 지대들에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볼 수 있으며 그 지대들을 죄다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욕구에 토대를 두는, ‘동료’가 관리하는 사회보장을 개념화하기 위한 조건들이 그렇게 마련됩니다. 사람들의 욕구에서 시작하는 것이 항상 중요합니다. 주거지를 일례로 들어보죠. 국가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든 사람을 위한 주거지 소유권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동체 토지 트러스트>(Community Land Trusts)(([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924http://commonstrans.net/?p=1574 참조.))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재산 모델들을 마련하는 것이며 공동체들이 주택 뿐 아니라 주택이 서 있는 토지를 탈상품화하는 것을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부터의 구조적인 독립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현재 위기를 놓고 볼 때 우리는 스스로 조직화한, 공동체를 지원하는 기획들이 재난이 닥치면 더 복원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기획들은 자본과 상품의 국제적인 흐름에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볼리어
시민권 운동 출신의 유명한 선거투표권 활동가인 헤이머(Fannie Lou Hamer)는 정치적인 활동으로 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협동조합 운동의 선구자로서도 유명합니다. 지역경제를 지배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흑인공동체의 경제적 독립을 구축하기 위한 <자유농장 협동조합>(Freedom Farm Co-operative)을 시작했습니다.

식량독립을 하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그 지역에 사는 흑인들이 더 이상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종속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그들을 정치적으로 독립시켰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땅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그들의 것이었고 그것이 그들에게는 그들을 위한 안전한 장소, 즉 그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구축할 수 있는 장소이자 다른 사람들에게 정치적•사회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존엄을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도와서 국가가 할 수 있는 어떤 일입니다. <자유농장 협동조합>은 새로이 시작하기에 훌륭한 장소일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공동사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애쓰는 것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이행도시 윤리’(Transition Towns Ethic)입니다. 이것은 보통 정치적으로 추동되고 국가에 관련된 쟁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이데올로기들로는 시작되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 윤리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어떤 것을 의미하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것들—음식•거주지•공적인 삶—이 핵심입니다.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것을 ‘소속의 정치’라고 부릅니다. 상호간의 지원과 실질적인 욕구에 기반을 두는, 양육되는 정체성이죠.

 

더흐로트
사회보장의 미래가 탈중심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방자치체들이 사회보장을 지역별 계획들로 조직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헬프리히
어떻게 중앙집중주의자들이 항상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말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예를 들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이든이 선출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자유민주주의는 최고의 시스템이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의 제도가 강하다는 것을 입증할 것입니다.” 글쎄요, 아닙니다. 미국의 제도는 강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작동한다면 양쪽 다 문제가 있는 두 정당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제시해보자면, 우리의 도시들, 지방들, 나라들이 50.1%에 기반을 두고 있는 권한을 가진 정치 정당들의 경쟁논리에 따라서 통치되는 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볼리어
맞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탈중심화가 한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주요 도시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정치문화가 동일합니다. 실질적인 대안권력구조가 생겨나기 위해 우선적으로 이 정당들을 없애거나 대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장소에 기반을 두는 정치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헬프리히
사회보장이라는 아이디어를 다시 사유하는 것은 토지와 주거지의 선분배를 시작하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고 나면 대안적인 정치문화들이 뒤따를 것입니다.

 

볼리어
하지만 그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장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으며 또한 참여•소속•기여•커머닝의 긍정적인 사회적 비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

 



만약 이 글이 소나타라면 그것의 단조(短調)가 보여주는 것은, 모티프의 분리와 고립은 불협화음을 만들지만 모티프의 분리 연결은 아름다운 한편의 음악을 낳는다는 점일 것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내내 ‘사회적 거리두기’에 관한 모든 얘기가 이 생각을 분명하게 만들었다. 이 용어가 애매한 것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질 것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팬데믹 동안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실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거리 사회적 친밀 둘 다이다. 거리 두기에만 초점을 맞추고 친밀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즉 우리를 지탱하는 많은 관계들을 돌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면 중요한 활동과정도 이를 떠맡아야 하는 사람도 못 볼 것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분리·고립의 렌즈를 통해 세계를 관찰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근본적 논점을 놓쳐왔다는 점이 드러난다. 실제 세계의 사회적 과정에서는 모든 것이 관계 때문에, 관계를 통해, 특히 상호의존적 관계를 통해 일어난다는 점을 말이다. 물론 나와 당신을 구별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과 내가 완전히 분리된 실체인 것처럼 당신 없는 나를 생각하는 것은 오해를 낳는다. 우리가 실상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그렇다. 펼쳐나가고 성장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우리는 서로 함께, 서로를 통해서 우리가 로서 경험하고 이해하는 어떤 무엇이 된다. 우리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우리 주변의 생물계·무생물계와 관계하는 방식에서도, 그 어느 쪽에서도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발달의 측면에서도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시장/국가 구도

구별은 중요하나 분리가 정말로 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시장과 국가를 서로 대립시키는 만연한 사유 패러다임도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가 서로 다투고 기껏해야 서로 ‘균형’을 찾으려는 분리된 두 개의 실체라고 우리는 가정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씨스템에 따라, 경제모델에 따라 혹은 당면 상황에 따라 ‘시장’이 상승하는 동안 ‘국가’는 하강하거나 그 반대거나 하는 식으로 둘은 오르락내리락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에 지구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국가가 갑자기 시소에서 더 무거운 쪽이 됐다. 케인즈주의 경제학자이자 전 <유엔무역개발회의>(the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UNCTAD) 수석 경제학자 하이너 플래스벡(Heiner Flassbeck)이 말했듯 위기가 보여주는 것은 “모든 사회는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유능한 국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Heiner Flassbeck, Vollbremsung: die Wirtschaft in den Zeiten des Coronavirus, 2020년 3월 15일.)) 팬데믹 대응을 위한 정치경제적 조치 이후에는 실로 국가권력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판단조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력, 정당성을 갖춘 기관이 시장과 국가 두 개뿐이라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2020년 봄 독일정부는 어떤 면에서는 시소의 높은 쪽 끝에 ‘시장’을 남겨둔 셈인데 높은 쪽 끝에서는 낮은 쪽 끝에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이렇게 높이 치솟은 취약함에 곧장 조바심내게 된다. 이는 단명했음에도 국가의 지지·보호가 없는 경제를 신뢰하는 데 관한, 광범위한 걱정을 낳았다. 봉쇄 이후 채 일주도 안 된 2020년 3월 24일 연방 경제장관 페테르 알트마이어(Peter Altmaier)는 독일경제를 살리기 위한 15억 유로 상당의 전례 없는 구호 패키지를 발표했다. 그가 설명하길 이 일이 이토록 빨리 일어난 한 가지 이유는 “많은 기업들이 직원들의 내주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 시간이 본질적이”기 때문이었다.((Tagesschau, 2020년 3월 24일.)) 내 고향에 있는 한 상점주는 책임을 지는 모든 회사는 수중에 적어도 두 달은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그렇지 않다면 이들의 재정 문제는 위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자초한 것일 수 있다는 이견을 제기했다.

알트마이어가 서두른 한 가지 이유는 시장과 국가의 친밀한 관계와 분명 관련돼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가 있든 없든 이 점이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현상을 이해하는 실마리다. 우리의 정치씨스템·국가권력은 시장경제의 운명에 깊이 의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들은 시장경제의 지배하에 있다. 정치적·경제적 토론이 시장 혹은 국가 중 한편을 선호하는 식으로 정책적 선택을 ―어떤 이들은 더 큰 시장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더 많은 국가를 추구하듯― 짜더라도 진실은 우리가 시장국가 구도와 상대한다는 점이다. 국가가 시장에 의존할 뿐 아니라 시장도 국가의 법률씨스템, 시장규제, 보조금 그리고 그 밖의 지원 없이 기능할 수 없었다.((지면 관계상 이 추상적 개념을 추가적 설명 없이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팬데믹은 정치적·경제적 씨스템 양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과 국가의 영역 바깥을 생각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인데도 말이다.

물론 시장과 국가를 한데 뭉뚱그리면 안 된다. 양자가 똑같지는 않으며 동일한 논리를 언제나 따르는 것도 아니다. 국가제도가 기업들 사이의 경쟁, 이윤 극대화의 원리를 무시할 때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위기 동안 이런 일이 일어났듯 말이다. 그러므로 시장을 국가와 개념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양자가 정말로 분리된다고 순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 시에는 위에서 설명한 국가와 시장의 실존적 상호의존이 직접적으로 분명해진다. 독일이 2020년 4월 중순 최초의 조심스러운 규제 완화에 대하여 단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외 ―자동차 영업소 개점― 를 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독일산업의 가장 중요한 상징에 대한 이러한 호의는 자동차 산업 로비스트들의 정치적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지구적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계산된 조치였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시장-국가의 틀 안에 갇혀서 탈자본주적 질서를 상상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성장을 추동하지 않는 비시장적 해결책을 그려보지도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 광범위한 개념적 맹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이런 해결책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다. 시장-국가는 이 상호의존을 잠식할 팬데믹과 그 경제적 충격에 대한 비시장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 않다. 세계의 거의 모든 곳에서 국민국가적 조치의 기본 유형은 시장 이데올로기와 시장 기반 정책에 장악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자발적 상호원조 프로젝트의 놀라운 효과에도 불구하고 시장-국가는 이런 종류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일자리와 성장에 의존하는 시장-국가 씨스템의 수호자인 정치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딜레마를 삽시간에 보여줬다. 정치인들은 직업 창출, 성장 재점화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는 것으로 본다는 점을 말이다.

하지만 실은 팬데믹이 촉발한 경제적 셧다운은 좀더 깊이 성찰할 필요를 제기한다. 팬데믹은 자연에게 잠시 숨을 쉬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시장경제에 의존해 있음에도 총액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이에 대한 의미 있는 공적 담론은 없으나― 돈이 덜 필요하며 가스를 덜 사용하고 비행기를 덜 타며 덜 쇼핑한다. 그리고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맞서 싸워야 하고 극복돼야 하는 재앙으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다는 점, 비행기를 더 이상 타지 않는다는 점, 평소처럼 많이 쇼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여전히 완벽하게 기능하는) 현 자동차를 처분하고 새 차를 구입하는 인센티브조차 다시 한 번 더 고려되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를 그리하여 경제를 자극하기 위해 기획되고 있다. 셧다운 상황에서는 “내게 이것이 진정 필요한가?”라는 자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이 물음은 경제가 우리의 필요를 본질적으로 충족시켜야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양식과 실제적 필요에 관한 그러한 성찰은 그야말로 “씨스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독일 녹색당조차 모든 이를 위한 250유로 쇼핑 쿠폰을 요구했다. 주간지 『차이트』(Zeit)의 3인의 작가로 구성된 팀이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소비하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으로 발전된 국가에서 증가한 가치에 의존하는 모든 것 즉 임금·재정수입·사회보장혜택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Elisabeth Raether, Mark Schieritz and Bernd Ulrich, Konsum: Brauch ich das?, in Zeit online, 2020년 5월 1일.)) 5월 중순 독일대중이 처음 접한 예측은 2020년에 거의 1,000억 유로의 재정수입 감소를 경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이중적이다. 한편에서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잠시라도 돌봉노동자가 멈춰서 쉴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돌봄은 모든 경제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점에서만 “씨스템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돌봄노동은 어떤 형태의 시장이든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이는 최근의 결함은 아니다. 또 다른 팬데믹이 올 것이 확실하고 이산화탄소 배출감소가 장기적으로는 필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이 설계결함은 보다 더 분명해졌고 불길해졌다. 끊임없는 소비와 성장이라는 이러한 설계결함은 이러한 틀 밖에서, 시장과 국가를 넘어서, 고전파 및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의 뿌리 깊은 생각을 넘어서, 그리고 제국적 삶의 방식을 넘어서 사고할 때에만 극복될 수 있다.((Cf. Brand, Ulrich und Markus Wissen (2017) Imperiale Lebensweise. Zur Ausbeutung von Mensch und Natur in Zeiten des globalen Kapitalismus. Munich: Oekom.))

바로 여기가 커먼즈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인류사의 많은 부분이 확인시켜주듯이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상업적 이익이 없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결정한 방식, 스스로 조직한 방식, 필요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서로 함께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커먼즈는 많은 목적들을 위해 봉사하지만 ―우리는 이를 확인할 것이다― 세수(稅收)의 유망한 원천은 결코 아니다. 분명 이것이 커먼즈가 시장-국가 씨스템에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 이유다.

팬데믹 시대 커머닝

커먼즈를 순수한 이타주의, 이웃의 산발적 도움, 무조건적 베풂으로 환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뒤섞는 이들은 이러한 실천들이 가지는 변형하는 힘을 간과한다. 커먼즈를 주로 혹은 전적으로 역사적 유물이나 법적 주체 또는 ‘자원관리’ 프로젝트로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커먼즈 개념이 우리의 현재 위기를 그리고 시장-국가 사고의 설계결함에 대처하기 위한 핵심이라는 점을 거의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역사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는 “커머닝 없이 커먼즈 없다”고 말한 것으로 흔히 인용된다. 그의 논점은 커먼즈는 명사 ―사물 또는 자원― 이기보다는 동사 ―커머닝의 활동― 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시장-국가에서 함께함을, 즉 보통 만연한 것들과는 다른 행동패턴을 창출하는 실천에 관한 것이다. 문화사학자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지옥에 세워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 2009; 국역 『이 폐허를 응시하라』, 정혜영 옮김, 펜타그램, 2012)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계 전역에서 그러한 실천들은 (특히 위기의 시기에) 삶과 생존의 중요한 부분이다. 커먼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개념보다 분명 더 오래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연대의 실천은 언론보도로 다뤄지지 않으며 다뤄질 때에는 자선이라는 렌즈를 통해서 이웃정신의 표현 혹은 가십거리로 다뤄진다. 매우 다양한 상호부조가 시장국가의 뿌리 깊은 한계를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의 씨앗 형태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조직화의 힘과 창조성을 무시한 채 커먼즈와 그 주역을 주변부로 몰아넣는 일종의 정신적 구속 안에 우리는 머물러 있다.

이 동학은 군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주요한 공간이 없는, 인구밀도가 높은 700만 명의 물리적 공간인 홍콩에서 팬데믹 초기에 분명히 작용했다. 정부의 무조치를 염려한 이들이 감염 통제를 스스로 떠맡았다. 홍콩에서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결과는 인상적이었다. 이 글을 완성하는 동안 새로운 감염은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2020년 6월 8일 확인된 사례는 (상당수가 유학을 마침 다음 홍콩으로 되돌아가야했던) 총 1107명 중 회복 1048명, 사망 4명, 입원 55명이었다.)) 조건이 좋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는데, 중요한 의사소통 플랫폼이 캐리 램(Carrie Lam) 정부에 대한 항의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2019년에 구축되어 있었고 2002-2003년의 사스 발생 경험으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감염 자체가 확산될 조건도 좋았다. 높은 인구밀도, 우한으로 운행하는 고속열차와 매일 수차례 운항하는 직항편, 2020년 1월에만 중국 본토에서 250만 명 이상이 홍콩으로 입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바로 그 시민들이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출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던 것이다.((https://wars.vote4.hk/en, 2020년 6월 8일 접속.))

시장-국가 구조를 넘어서는 것은 브라질에서도 타당한 접근법임이 입증되었다. 우익 극단주의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정부는 다가오는 건강위기를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최소화했으며 이를 “그저 미미한 독감”이라고 칭했다. 보호 마스크를 충분히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의사가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favelas)(([옮긴이] 파벨라(favela)는 정부가 역사적으로 무시해왔던 브라질의 저임금 거주지다.)) 중 하나에 있는 파드레 미구엘(Padre Miguel) 삼바학교에 연락을 취했다. 그때부터 학교 재봉틀은 카니발 의상 대신 보호복을 만들면서 돌아갔다.

학교 폐쇄에 직면한 미국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홈스쿨링과 보육을 지원하기 위하여 150명 이상의 사람들과 80개 이상의 단체들이 교육과 사회사업에 대한 그들의 전문지식을 모으는 네트워크를 만들었다.((https://schoolclosures.org, 2020년 5월 15일 접속.)) 또한 과학공동체 <크라우드파이트코비드10>(CrowdfightCovid10)의 전지구적 기획이 코비드19와의 싸움에 사용할 지식·도구를 곧 공유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종류의 일을 하는 것일까? 필요하고 이치에 맞기 때문이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위기는 시장 기반 사고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정부들은 나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정상적인 일로 보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실천은 모든 문화·시대에 걸쳐 있는 당연한 것이다.

이탈리아에 설립된 협동조합 <바리카마>(Barikama)는 이동의 자유가 제한되던 동안 로마 사람들에게 꾸준히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는 선구적 작업을 인정받았다.((https://elpais.com/elpais/2020/05/03/planeta_futuro/1588493778_756377.html, 2020년 5월 17일 접속.)) 바리카마라는 단어는 밤바라어(([옮긴이] 밤바라어(Bambara language)는 약 1,500만 명이 제1언어(약 500만) 혹은 제2언어(약 1,000만)로 사용하는 언어로서 말리 인구의 대략 80%가 사용하고 있다.))에서 유래하며 ‘힘’ 또는 ‘저항’을 의미한다. 이 협동조합은 이주 일용직노동자와 계절노동자를 과일야채농업의 악화된 조건에서 해방시켰다.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들에서 온 이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조건에 따라서 야채와 요구르트를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지구적 수준에서 <마스크스포올>(Masks4All)의 접근법은 시장이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방식이라는 거짓된 지혜를 따랐었다. 2020년 3월 다수가 체코 출신이었던 과학자·연구원·기업가들((https://masks4all.org/founders, 2020년 5월 17일 접속.))이 마스크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근본적이라는 점을 대중과 정치세계에 납득시키려는 협업을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더 높은 가격은 더 적은 상품을 의미한다는) 시장 기반 논리가 마스크의 불안정한 공급을 낳을 것이고 그럼으로써 실제 생산 비용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가격이 매겨지리라는 점이 이미 명백해지고 있었다. 보호의류에 대한 의료부문과 일반대중의 요구가 충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지자 일부 마스크 생산자들은 즉각적 이익을 봤다.((Report by Lena Kampf, Markus Grill, Arnd Henze, Georg Wellmann, Florian Flade and Christian Baars, Tagesschau, 2020329.)) 메트만복음주의병원(the Mettman Evangelical Hospital)은 독일에 있는 병원들에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내보였다. 몇 주 만에 수술용 마스크 가격은 1667%, FFP2 마스크는 2500%, FFP3는 3043%, 보호복은 638% 급등했다.

대중에게 일상용 마스크를 제공할 수 있는 능력도 전반적으로 부재했다. 이러한 이유로 <마스크포올>은 재봉틀이 있든 없든 마스크를 만드는 방법을 온라인에 게시했다.((https://masks4all.co/how-to-make-a-homemade-mask/, 2020년 6월 7일 접속.)) 이 기획은 다음과 같이 매우 간결한 논점을 제시한 메릴랜드 주 공화당 주지사 래리 호건(Larry Hogan)의 말을 인용했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 이는 이웃을 보호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 이 병을 퍼뜨리는 것은 이웃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마스크포올>의 모토 즉 ‘내 마스크는 당신을 지켜주며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한다’가 훨씬 더 적절하다. 아마도 이것이 위기의 가장 설득력 있는 측면 즉 마스크가 서로에 대한 우리의 상호의존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의 건강이 나의 건강에 달려 있다. 당신이 얼마나 조심하느냐에 나의 안전이 달려 있다. 개인의 건강이 모두의 건강과 주의에 달려 있다.

비슷한 교훈이 삶 일반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관계로부터, 관계를 통해서 개인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 이는 경제의 기본 이념일 뿐만 아니라 커머닝의 기본 가정이다. “나는 당신이 존재하기에 존재한다” ―이것 없이 커머닝은 이해될 수 없다― 라는 이 기본적 생각은 근래 공통적으로 공유된 경험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미래에는 더 이상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마스크는 착용하는 사람을 주로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착용자가 감염되었지만 무증상일 경우에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개인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보는 이들은 아마도 고립된 개인의 자유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일 것이다. 사회적 시각을 잃은 것이다. 문화비평가 게오르크 제에즐렌(Georg Seesslen)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나는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런 경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에 매우 가깝다”((Georg Seeßlen, Freiheit in Zeiten von Covid_19))고 말한다.

지식은 강력하며 자유로운 지식은 더욱 그렇다.

위의 사례들은 몇 가지 모티프를 공유한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는 지식이 상품화된 지식보다 공동선을 증진하는 데 훨씬 더 강력하다는 점이다. 지식이 아낌없이 공유될 때에만 가능한 최선의 조건에서 모두에게 가장 풍부하고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커머너들은 의자나 자전거를 다루듯 지식을 다룬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물론 의자나 자전거도 공유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들은 교대로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자전거나 의자를 ‘공유’한다면 개인이 그것들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이 차이는 신고전파 경제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데 이는 공유를 통해 배가될 수 있는 것과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보여준다. 결국 반복되는 커먼즈의 동기 중 하나는 공통재로서의 지식을 보호할 수 있는 지식의 공유, 사용권의 고안이다. 무료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와 위키피디아에 적용되어 잘 알려진 이 접근법은 이러한 공유지식체계들이 왜 그렇게 인기 있고 확장되는지를 설명해준다.

오픈소스 하드웨어도 시장적 사고가 만들어내는 물리적 생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the University of Sussex)이 조직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국제 연구팀에 따르면 오픈소스 하드웨어는 세계 전역 의료씨스템의 코비드19 팬데믹에 대한 부담까지 덜어줄 수 있다.((Leveraging open hardware to alleviate the burden of COVID-19 on global health systems)) 다른 장비들 중에서도 현미경과 인공호흡기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은 3D 프린터와 결합하면 세계 전역의 의료써비스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량생산 대신 협업생산이 오늘날의 대세라고 연구팀의 일원인 신경학교수 톰 바덴(Tom Baden)은 말한다.((https://www.pressetext.com/news/20200429007?, 2020년 5월 22일 접속.)) 그러나 이는 전지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디자인 이외에도 대량생산보다 “경비가 훨씬 낮고” “지역자원에 손쉽게 적용할 수 있는 데서 오는” 혜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써섹스대학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온라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보호장비를 위한 오픈소스 청사진에 익숙할 뿐 아니라 이러한 해결책 중 어떤 것이 공식적 기능성 테스트를 통과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오픈소스 하드웨어 디자인이 당국의 승인을 받는 것은 오래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며 그 때문에 바덴은 정부가 시험·승인 과정을 신속히 진행할 수 있는 합리적 방법을 찾는 것이 꽤나 유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더 관련이 있는 것은 약과 백신의 생산에 관한 지식을 다루는 방식이다.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는 이와 관련하여 전환점이 될 수 있다. 보통 다소 심한 제약 하에 운영되는 많은 과학 출판사들이 코로나바이러스 연구결과를 무료로 신속히 이용할 수 있게 하였다. 미래의 백신을 누가 소유할지에 대한 논의도 급속히 이뤄졌다. 역사가 알려주는 것은 아이디어·지식·연구결과가 상품화되는 대신 공공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코비드19 백신의 미래를 위한 논의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1955년 조나스 솔크(Jonas Salk)가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후 기자들은 그에게 누가 특허를 소유하는지 물었다. 솔크는 자주 인용되는 다음의 말로 답했다. “글쎄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 대해 특허를 낼 수 있나요?” 미국의 국민적 영웅이 된 솔크 박사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분배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게 되는 이윤 극대화를 염두에 둔 채 생명을 구하는 백신이 생산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역겹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1950년대 말 소아마비 백신에 대한 책임을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위임했다. 그러나 이후 수십 년 간, 이와는 상이한 생각이 우세했다. 국민국가는 제약회사들에게 특허의 범위와 기간을 넓혀주기 시작했고 경우에 따라 제약회사들 각각의 자국시장에 대해서는 복제약(([옮긴이] 복제약(generic drug)은 특허에 의해 보호되는 약과 동일한 화학 성분을 가진 약으로서 특허 만료 이후 판매가 허가된다. 복제약은 특정 제약회사와 연관성을 가지지만 보통 약이 배포되는 국가의 정부에 의해 관리된다.)) 생산에서 예외를 허용하기도 했다. 코비드19에 대응하여 이제 다른 곡조가 연주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 글로벌 대응 재원 약정 회의>(the Coronavirus Global Response Pledging Conference)((https://ec.europa.eu/international-partnerships/events/coronavirus-global-reponse-pledging-conference_en, 2020년 5월 5일 접속.))에서 EU의회 의장 우슐라 폰 데어 레옌(Ursula von der Leyen)과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을 비롯한 여러 국가 정상들은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을 “전 세계를 위해 전 세계가” 생산해야 하는 “유일한 전 지구적 공공재”로 이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https://www.faz.net/aktuell/politik/ausland/eu-initiative-fuer-impfstoff-nur-die-globale-antwort-wirkt-gegen-das-virus-16750330.html, 2020년 5월 5일 접속.)) 제약업계는 이 접근법을 즉시 거부하면서 “기업은 자신의 개발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해야 한다”고 밝혔다.((Pharmaindustrie will Corona-Impfstoff nicht als öffentliches Gut freigeben)) 이들의 입장은 수십 년 간 들어와서 익숙해진 모든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분명 많은 이들에 의해 채택되거나 긍정적으로 이해될 것이다. 반면 협력과 연대에 기반한 약물 연구개발 과정과 혁신적 소유권 구조가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거의 관심이 두어지지 않는다. 공적 의식에 기반한 혁신은 가능할 뿐 아니라 이하에서 논의될 <방치된 질병을 위한 의약품 이니셔티브>(the Drugs for Neglected Diseases Initiative, DNDI)와 같은 단체들에 의해 실천되고 있다. 이는 두 번째 모티프와 연관된다.

국가에 기대기보다 자기조직화를 장려하기

회의론자들은 누가 “공통재 혹은 공공재”((이 두 용어의 차이에 대한 보다 더 상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Silke Helfrich, Gemeingüter sind nicht, sie werden gemacht.))로 백신을 제공하고 장기적으로 그 가용성을 보장할 것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국민국가가 공적인 모든 것에 책임져야 하며 유일한 의사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은 응당 국가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적이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과 국가의 관계는 보다 더 복잡하다. 공적인 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재’라는 용어는 국가적 의무의 범위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국가권력의 한계를 나타내는 표지, 모든 의사결정과정에서 현시돼야하는 통찰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다른 한편에서 “공적인 것과 국가”의 직접적 연관은 시장과 국가가 실로 상이하나 별개는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잔혹한 국가주의가 미국 의료분야((Geberkonferenz für Impfstoff, Zeichen gegen ‘brutalen Nationalismus’))에서 출현할 수 있다는 EU 정치인이 표현한 우려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없지 않은데 덜 잔혹한 국가주권 개념이 이미 난점이기 때문이다.((커먼즈 연구자 삐에르 다도(Pierre Dardot)와 끄리스띠앙 라발(Christian Laval)은 이를 다음에서 탐구한다. The pandemic as political trial: the case for a global commons.)) 시장경제 원리와 결합된 이러한 국민국가 주권 이념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전지구적 연대라는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조만간 단념하게 만들 것이다.((코로나바이러스 위기상황인 2020년 3월 31일 독일 TV에 방영된 이탈리아 총리 주세페 콘테(Giuseppe Conte)의 기억에 남을 모습은 이 진단이 국민국가 연합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시장과 국가의 체계적 연계는 국민국가 시장의 이익을 위하는 국가에서 백신을 누가 소유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부채질할 뿐만 아니라 1.5도 기후 목표도 훼손하도록 추동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기후위기·대량이주·팬데믹 시기에 분명해진 독립된 세계의 도전에 응대해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고 국적과 무관하게 모두의 필요를 고려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실질적 기회를 제공하는 조직·생산·소유의 방법이다. 예외가 아닌 기획에 의한 커먼즈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국가주권 하에서 기능하는 시장-국가와 달리((여기에 묘사된 긴장은 예컨대 위기 시 정부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는 예외상황에도 반영된다. 예컨대 포르투갈 정부는 코로나 위기 때 포르투갈의 모든 사람들에게 거주 지위에 관계없이 건강 및 사회 보장 씨스템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내무장관 에두아르도 카브리타(Eduardo Cabrita)에 따르면 이런 조치는 “위기의 시기에, 연대에 기초한 사회”의 ‘의무’다. Cf. Portugal regulariza imigrantes para dar acesso ao sistema de saude, https://oglobo.globo.com/mundo/portugal-regulariza-imigrantes-para-dar-acesso-ao-sistema-de-saude-durante-pandemia-de-coronavirus-24335450, 2020년 5월 20일 접속.)) 이러한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우리의 상호의존의 중요성을 알아볼 것이다. 고립된 경우에서만이 아니라 원칙의 문제이자 장기 전략의 문제로서 말이다. 커먼즈 기반 접근법은 자기조직화와 연대를 장려하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조건들을 제공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더 쉽게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위해 뉴스를 뒤지는 이들은 유감스럽지만 꽤 샅샅이 살펴봐야 할 것이다.((쿠자누스대학(Cusanus Hochschule) 학생들과 함께 필자는 팬데믹의 경제적 결과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관한 공적 토론에 초점을 맞추어 2020년 3월 1일부터 5월 5일까지의 타케스샤우(Tagesschau) 오후 8시 뉴스를 분석했다. 이 토론에서 ‘공동체’라는 용어는 주로 ‘채무’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고 자기조직화라는 용어는 완전히 배제됐다.)) 독일 정부는 #WirVsVirus(우리 대 바이러스) 해커톤(hackathon)((https://wirvsvirushackathon.org/, 2020년 5월 17일 접속.))으로 올바른 방향의 한 걸음을 내디뎠고 이스탄불 시 정부는 모르는 사람들의 음식 값을 내주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터키식당의 사회적 관습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위기에 직면하여 시 정부는 친구나 낯선 이들이 여유 없는 사람들의 수도요금과 가스요금을 내줄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을 만들었다. 시 정부는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이후 가스요금이나 수도요금을 더 이상 납부할 수 없는 재정난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2020년 4월 이를 실행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된 가족들의 청구서들이 웹싸이트에 게시될 수 있었고 낯선 이들이 익명으로 이를 지불해줄 수 있었다. 이스탄불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약 1000만 리라(약 250만 유로)에 달하는 10만 건의 청구서가 결제됐고 또 다른 12만 건의 청구서는 기부자가 나타나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https://ansteckendsolidarisch.de/de/blog/rechnungen과 시 정부 웹싸이트 https://askidafatura.ibb.gov.tr/, 2020년 5월 17일 접속.)) 순수한 자선 행위 대신 이 경우에는 수입이 갑작스레 감소함에도 공공요금을 대규모로 충당하기 위한 더 나은 자기조직화의 조건들이 만들어졌다. 이는 민관협력(a public-private partnership)을 회고적으로 선택하는 대신 국가와 커먼즈의 협력(a public-commons partnership)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본적 사례다.

이것이 어떻게 백신을 제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백신은 전적으로 시민들이 사용하기 위해 국가가 만들어낸 공공재일 수도 있고 비국가적 커머너들이 창안하고 모두와 관대하게 공유하는 공통재일 수도 있다.((정치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동일한 것처럼 쓰인다.)) 조나스 솔크가 제안한 경로는 큰 호소력을 가진다. WHO 혹은 공공협력으로 구성된 또 다른 전지구적 협력조직이 백신에 대한 수탁책임을 질 수 있다. 시민사회단체와 민간기업이 협력할 수 있는 혁신적 연구·금융 모델을 개척할 수 있다. 자유로운 지식의 동기에 충실하게 의약품과 백신에 대한 특허가 위기의 시기에는 유예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폐기될 수도 있다. 이는 그저 어떤 이상한 이념적 주장이 아니다. DNDI가 수십 년 간 입증해온 성공적 관행이 바로 이것이다. DNDI는 특히 기업에 ‘가치 없는’, 그리하여 높은 사망률과 수백만의 감염자에도 불구하고 연구되지 않는 질병에 사용될 약물을 ―국가와 다국적 파트너, 민간 파트너와 함께― 연구하고 개발하며 시험하고 공유한다. 신약으로 수익을 기대할 수 없다면 시장논리를 따를 경우 연구투자도 기대할 수 없다.((DNDI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 Helfrich/Bollier 2019: S. 312–314. DNDI는 단일 자금원에 의존하지 않으며 단일 국민국가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이 단체는 현재 <WHO 코비드19 기술 연합>(WHO COVID-19 Technology Pool)에 속해있다 https://www.dndi.org/2020/media-centre/events/online-webinar-who-covid-19-technology-pool/, 2020년 5월 21일 접속.)) 확실히 커먼즈의 핵심 덕목은 아무것도 투자되지 않는 곳에서는 이윤의 폭락과 그로 인한 혼란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셧다운할 생산도 없고 갑작스런 실업의 위협도 없다.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분야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통받든, 무엇이 실제로 필요하든 적합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와의 차이점이다. 커먼즈는 사람들의 필요를 작업의 중심에 놓고 생산·분배의 책임을 집단적으로 배분한다. 이 접근법은 광고, 마케팅, 경쟁적 소송, 특허 비용, 인재 채용 등의 시장 기반 비용을 제거하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여하튼 팬데믹에 직면하여 붕괴될 가능성이 높은, 다량의 간접비로부터 벤처를 보호하면서 말이다.

집단적 생산과 사용

재화를 판매용 상품으로 전환해야 하는 강제가 없다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이전과 같이 계속될 수 있다. 예컨대 위기 내내 활동해온 대략 280개의 CSA 농장((https://www.solidarische-landwirtschaft.org/solawis-finden/auflistung/solawis/ [옮긴이] CSA(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공동체 기반 농업)는 농장의 수확물을 소비자에게 정기적으로 배달하는 식으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계된 농업으로서 생산자와 소비자가 농작물의 재배·수확·유통의 위기를 공유하는 대안적 농업이다.))에서는 코로나바이러스 이전처럼 농작물이 재배·수확·유통된다. 물론 적절한 위생 예방조치를 준수하면서 말이다. 음식으로 가득 찬 상자들이 위기상황에서 CSA를 계속 지원하고 있는, 고객들이 아닌 회원들에게 매주 배달된다. 이는 2018년 매우 건조한 여름에도 그랬고 코로나바이러스가 만연한 2020년 봄에도 다르지 않다. 이런 기업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가가 개입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종류의 농업에서는 위기가 많은 회원들 사이에 분산되기 때문에 경제적 ‘셧다운’은 CSA에게 근본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의 씨스템은 계절노동과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며 돈은 자발적 기여와 수익 재분배에 기초하여 처리된다.

시장경제가 붕괴될 때 역으로 반사회적 효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굶주릴 때조차도 우유 생산자들이 하수구에 우유를 쏟아 붓고((https://www.independent.co.uk/news/health/coronavirus-dairy-milk-farmer…)) 꽃 재배업자들이 꽃들을 모두가 즐기도록 공공장소에 두는 대신 처분하는 것처럼 말이다. 커먼즈는 필요를 더 일관되게 충족시키고 낭비를 피하면서 변동에 더 쉽게 적응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빌라흐(Villach)에 있는 <페어안트보어퉁 에어데>(Verantwortung Erde,지구에 대한 책임)((https://www.verantwortung-erde.org/, 2020년 5월 20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물질·능력은 [위기 시에도] 여전히 동일하다. 우리는 그저 계속 할 뿐이다.”

이스탄불 시 정부가 플랫폼을 만들어 낯선 이들의 공과금을 사람들이 더 쉽게 내줄 수 있게 한 것과 유사하게, 말마따나 너무도 필요한 재조직화의 기반을 마련한 농업단체도 있다. 이들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중 하나인 토지를 시장으로부터, 그리하여 투기로부터 빼내왔다. 이를 통해 그들은 토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독립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기반시설 비용도 절감시켰다. 팬데믹 시기 커먼즈의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2020년 4월 4일 이루어진 온라인 대담)) 토지를 적극적으로 탈상품화하는 독일 협동조합 <쿨투어란트>(Kulturland, 경작지)((https://www.kulturland.de/, 2020년 5월 23일 접속.))의 한 회원은 이 모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확언하고 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는 미래를 예견했고 이제 미래를 미리 살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훌륭한 프로젝트들 기다리고 있는 토지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길로서의 커먼즈?

나는 지금이 커먼즈의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커먼즈는 지배적 경제모델 하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 즉 충돌 없는 ‘셧다운’을 가능하게 한다. 지금 필요치 않기에 사물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생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그저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을 위해서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점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세계는 아직 커먼즈를 위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19세기의 낡고 질긴 사고방식, 구시대적 경제정치사상이 여전히 길을 막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위기가 우리가 커머너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더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고 본다. 결국, 우리는 집단적 경험을 공유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이 얼마나 빨리 변할 수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는 다음과 같은 전제에 기반한 경제로의 변화가 필요한 이유를 정당화할 필요가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그 전제는 “더 적은 생산 그리고 (동네공방, 재사용·보수·재활용 센터와 같은) 더 지역적이고 시너지적인 생산방식이 생태적으로 필수적이며 팬데믹 대처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Hans Widmer, Die Coronakrise hat viele Fehlfunktionen unseres Systems offen gelegt. 2020년 3월 28일, telepolis.)) “씨스템과 관련된” 직업과 “삶과 관련된” 활동을 구분해야하는 이유와 후자의 활동을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경제모델의 우선적·현실적 기초로 인식해야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이다. (‘씨스템과 관련된’(Systemrelevant)은 코로나 위기 동안 ‘평상시’에는 별 관련이 없다고 간주되는 의사·간호사·간병인·출납원 등의 사람들이 하는 일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독일어 용어다.) 커머닝의 배후에 있는 모티프가 ‘작은 공동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에 의존하는 자기조직된 협업의 창조적 과정을 말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법적 소유권, 통제의 문제에 대한 새롭고 더 창의적인 답을 찾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모든 이가 상호의존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체화했다. 기억하는가? 당신의 마스크는 나를 보호하고 내 마스크는 당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커먼즈의 확장일 수밖에 없다. 바로 지금!((이는 <네쯔베어크 외코노미셔 반델>(Netzwerk Ökonomischer Wandel, 경제변화를 위한 네트워크)에 의해 식별된 세 가지 수렴 전략에 상응한다. (NOW) https://www.netzwerk-oekonomischer-wandel.org/, 2020년 5월 13일 접속. [옮긴이] 이 구절의 독일어 원본은 다음과 같다. Die Konsequenz kann nur sein: Commons ausweiten. NOW! 마지막 단어 NOW는 독일어 원본에서 대문자로 쓰였다. NOW는 ‘Netzwerk Ökonomischer Wandel’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진 말이기도 하다. 이 네트워크는 대안적 변화의 길로 세 가지를 꼽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커먼즈를 확장하기‘(Commons ausweiten)이다. 나머지 둘은 ’시장을 공통재로 인도하기’(Markte am Gemeinwohl orientieren)과 ‘국가를 완전히 민주화하기’(Den Staat umfassend demokratisieren)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를 양육하기

 


  • 저자  : Andreas Weber
  • 원문 :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 (2020. 4. 22) /https://in.boell.org/en/nourishing-community-pandemic-time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하인리히 뵐 재단>의 싸이트에 올라있는 베버의 글 “Nourishing community in pandemic time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게 베버를 1인칭 화자로서 유지했다.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가 애니미즘의 핵심이다.”(([원주] Tim Ingold, in Graham Harvey, ed., The Handbook of Contemporary Animism, London & New York, Routledge, 2013, p. 224))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지구가 커먼즈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생각은 합리적인 개념에서보다는 정서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접촉을 제한함으로써 고생스러움을 받아들인다. 인류는 상호성을 우선하기로 했다. 상호성, 즉 상호간의 돌봄은 추상적인 개념도 경제정책도 아니며, 공유관계의 경험이자 궁극적으로 삶의 공동체를 온전하게 지키는 경험이다. 이 삶의 공동체는 인류만이 아니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포함한다. 생명활동에 관여되는 물질대사 과정이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과정임을 이해해야만 우리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human and non-human beings)—을 효율적인 취급이 필요한 대상들(객체들)로 다루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정치는 공동체 내부에 풍성한 삶을 창출하는 경험을,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친족으로 생각하는 경험을, 그리고 타자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경험을 포함할 것이다. 수천 년 동안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들이 이 입장을 받아들인 바 있다. 우리는 삶의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이 애니미즘 사회들이 주는 교훈들이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의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 교훈들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1. 코로나와 공동선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돌고 있는 2020년 4월, 세계가 이동을 멈추었고 분주한 세계 경제도 멈춰 섰다. 멈춘 것은 전형적으로 서구적인 방식의 활동들 가운데 일부—세계 여행, 항공 교통,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교역과 소비 그리고 다수의 개인적인 활동들—이다. 비행기들과 자동차들이 거의 없어져 조용하고 평소와는 다르게 대기가 깨끗하며, 이 속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오랜만에 처음으로 자신들과 함께 사는 야생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새와 벌레들이 내는 소리들을 듣는다.

인류는 ‘공동체’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활동을 멈춰달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락다운 조치는 개별 경쟁을 통해서 경제를 밀어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내려졌다. 락다운이 가져온 고요 속에서 더 광범한 공동체가 느껴진다. 밤에 빛나는 별들의 고요, 윙윙거리는 호박벌들 그리고 인도 구관조의 울음소리가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은 낭만적인 순간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자가격리 명령은 빈곤이자 심지어 굶주림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머물 집조차 없으며, 폐쇄된 공간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우울증과 ‘수용소 유행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가족들 내의 폭력이 급증했다.

락다운 상황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 갈수 있음을—드러냈다. 이 사회적 본성은 신자유주의가 계속해서 감추는 사실이다. 바이러스는 인류가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하는 데, 다시 말해 자리에 앉아 조용히 하고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이 보호받도록 행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는 사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노동을 통한 생계확보조차 멈출 각오가 되어 있지만, 이런 상황이 전체주의 체제에 의해 이용될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전 세계 많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 락다운에 의한 자유의 축소가 유럽 나라들을 포함해서 몇몇 나라들의 영구적인 규칙으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자유가 축소되더라도 지금 인류가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인류는 연결의 경험에 기반을 두고, 각자가 공동체적인 것을 대표한다는 경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고 있다.

바이러스가 일시적으로 인간 생태계를 바꾸었다. 우리는 속도를 줄였고 타자들에게 공간을 내주며 앉아서 귀를 기울인다.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더 약한 사람들, 더 취약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그리고 생태론적 관점에서는 심지어 인간이 아닌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식물들, 동물들, 개울들, 숲들, 바위들, 산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반응하고 있다. 잠깐 사이에 신자유주의 세계의 핵심 기둥이 무너져 버렸다. 실존적인 위협 하에서는 삶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할지에 관한 일종의 합의—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함입되어 있는 살아있는 관계의 망을 보호하자는 합의—가 등장한다. 이것은 취약한 타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딜레마에 대한 답이기도 한데, 우리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는 찾을 수 없는 답이다.

그런데 이제 Covid-19 하에서 많은 숙고를 하지 않고도 그 답이 나온 것이다. 기술과 관련된 계획이나 긴 토론을 이어가지 않고도 그 답은 이미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그런 계획이나 토론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더 많은 기회를 갖지 않고도 우리는 취약하고 전염되는 우리 자신의 몸을 가지고 그 답을 제시한다. 이 몸들이 호흡하면서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입자들을 풀어놓거나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락다운 조치는 정치적인 답이 아니라 오히려 생태학적인 답이며 생태학 개념들이 정치학 개념들을 대체한 것이다. 락다운 조치로 우리가 살아있는 공동체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우리의 공동체는 인류 집단보다 더 크며 지구 전제를 포함한다.

 

  1. 생태학적 스트레스 테스트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인류의 전지구적 대응이 전적으로 생태학적 사건이라는 점은 아직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지만, 코로나바이러스의 발생은 그 자체로 생태학적인 사건이자 그 발생의 원인도 생태학적이므로 팬데믹은 생태학적인 재앙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질병은 단지 공중위생에만 관련되는 인간만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가령 SARS-CoV2는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에게 전파된 동물 바이러스로, 이런 종류의 교차 유전자형들은 인간이 주로 식용고기로 사냥되고 팔리는 희귀한 야생동물들과 너무 가까이 접촉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또한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도 발생한다. 따라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생은 서식지를 파괴하고, 희귀종 동물들을 대량 소비한 결과이며, 인간이 인간적이지 않은 것에 침입한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팬데믹은 인간 생태계에,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이상의 살아있는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에도 즉각적인 변화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적어도 당장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에게 공간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볼 때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은 타자들(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상호성과 공간 허용하기를 거부한 결과로 간주될 수 있다. 이것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사고방식에 내장된, 대상화하는 그들의 태도를 나타낸다. 지구화주의자들은 저 타자들은 단지 사물들이므로 그 사물들에게 공간을 허용할 필요가 없으며, 시장의 힘으로 사물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은 지구화주의자들의 이 생각이 틀렸음을 ‘상호성’으로 입증한다. 팬데믹은 상호성—우리 자신이 살 공간을 지키기 위하여 타자들에게 살 공간을 허용하는 것—이 핵심적인 생태학적인 특질이자 우리가 생태학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핵심으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바의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팬데믹은 상호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우리는 생태학적 상호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생태권(biosphere)의 일부로 생태권에 의해 영양분을 공급받고 생태권의 바이러스들을 통해서 사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있기 전까지 우리는 이것을 간과했고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집단적인 삶의 일부이고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의 순환에 참여하고 결국에는 우리도 삶에 풍성함을 제공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 미생물이 서양 인지 제국을 파괴하다

타자들에게 삶—자신의 존재를 조직하고 사회를 만들어내라는 핵심 명령—을 허용하는 것은 결코 시장주의적 사고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시장주의적 사고는 이것을 장애물로 여겼다. 시장주의적 사고에서 현실은 (홉스가 자신의 책 『레비아탄』Leviathan에서 묘사한 ‘자연 상태’에서는)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세상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사고에서는 살아있는 세상과의 상호성이 순진한 꿈으로 비난받는다.

홉스를 추종하는 사회경제적 사고의 지배적인 전통에서 ‘사회계약’은 개별 인간들이 국가의 힘에 굴복함으로써 안정적인 생계를 확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안정성은 삶에 필요한 공간을 타자들에게 허용하는 인간의 능력을 통해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사회계약은 권력을 쥔 소집단의 사람들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순전한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교환을 감독하고 허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홉스의 구도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가 서로 적대적이다. 자연은 죽은 것들로 구성되는 세계이며, 인간사회는 자연과 싸우기 위한 협약을 기초로 해서 세워진다. 이 구도의 특징은 서구식 사고방식을 여전히 깊게 형성하고 있는 고전적인 ‘이원론적 분할’에, 즉 문화를 자연과 분리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물들’로 보는 데 있다. 포르투갈의 사회학자 싼또스(Boaventura de Sousa Santos)는 이런 분할이 이루어지는 서양을 ‘서양 인지 제국’(Western Cognitive Empire)이라 칭했고, 프랑스 사회학자 라투르(Bruno Latour)는 서양 인지 제국의 관행을 ‘괴물들’의 창조라고 부른다. 괴물은 우리가 살아있는 세계(상호성을 제공받음으로써 삶을 창조하는 세계)를 자연과 사회로 분할할 때 생겨난다. 그러나 이 분할을 달성하겠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자연과 사회는 결코 실질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팬데믹이 발생하자 그 물질적 과정(바이러스 확산, 인체의 감염)이 문화와 사회를 바꾸고, 사회적 조치들을 바꾼다. 자연 즉 야생동물에서 비롯한 바이러스가 사회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고 바이러스가 활동할 공간을 어떻게 제공할지를 결정한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저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사회가 바라는 대로 다룰 수 있다는 근대주의적 주장을 무너뜨린다. 심지어 코로나바이러스는, 더 높은 효율성에 도달한 사회가 지속가능한 행동들을 실행함으로써, 그리고 사회와 ‘자연’ 사이에 더 큰 보존영역들과 완충지대들을 창조함으로써 근대주의의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도 무너뜨린다.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여전히 현실의 비인간적 부분들—비인간 존재들과 자연력들—을 행위자들로서가 아니라 사물들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팬데믹 하에서 우리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은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합당한 만큼의 상호성으로 대할 필요가 있는 타자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서양 인지 제국은 (모든 비인간 존재들과 종종은 일부 사람들을 포함하는) ‘대상들’과 상호간에 사회적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던 사회 구성원들 사이를 가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따라서 세워졌다. 이러한 인지 제국은 계약으로 사회에 진입하지 못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대상들로 구성된 죽은 자연의 일부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식민주의를 낳을 수밖에 없는데, 식민주의는 사회 바깥의 타자들(사회적 규범들을 고수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민족들, 다른 존재들, 다른 자연력들)을 폭력적으로 대하게 마련이다.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이 이런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임을 우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Covid-19의 출현은 인류세 사건의 전형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의 현 시대인 인류세가 Covid-19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비인간 존재가 뒤섞여 있는 혼합구성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방사능 흔적들이 3야드 깊이의 북극얼음 안에 있다는 데서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한 기술문명을 중지시킨 바이러스에서 (이 상황은 역병이 창궐한 중세시대의 도시들의 격리체제를 닮았다) 그리고 우리가 삼림을 파괴하고 거의 멸종에 이른 동물들을 고기 소비를 위해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 만들어낸 바이러스(다른 것이 아닌 바이러스!)에서도 이 혼합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류세의 출현은 서구의 인지 지배권의 최후를 나타낸다. 인류세는 사회가 ‘자연’ 위에 설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는 시대이며, 훨씬 더 중요하게는 ‘자연’ 내부에 (삶의 한 부분으로서) 위치하는 데 수반되는 일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로 이 삶에 참여할 수 없게 됨을 경험하는 시대이다. 그리고 코로나바이러스는 RNA에 기반을 둔 행위자이면서 인류세의 전형적인 행위자이다.

점점 더 많이 발생하는 자연 재해로도 우리가 하나로 상호 연결된 전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산불이나 전 세계 많은 곳에서 일어나는 교란된 강우 패턴들, 사이클론들, 가뭄을 생각해보라) 그 재해들은 Covid-19만큼 그렇게 위협적이지는 않다. 바이러스의 이러한 위협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 윤리를 얻게 되고 올바른 방식으로, 즉 타자에게 삶의 공간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게 된다. 이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단어인 ‘우분투’(Ubuntu, ‘당신이 존재하고 따라서 나도 존재한다’의 의미)로 요약된다. 우분투는 상호성이라는 생각 즉 우리가 집단적으로 창조하는 삶에 참여한다는 생각, 우리가 우리들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타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풍성한 삶 그 자체를 위해서 집단적으로 삶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나타낸다.

이 우분투의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 애니미즘이다. 애미니즘의 관점에서는 세계가 대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관심과 욕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들인 개인들(persons)로 이루어져 있다. 애니미즘적 접근법이란 우리가 이 개인들과의 상호적 관계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부여받기 위해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하게는 삶을 계속적으로 생산할 자리를 부여하기 위해 이 개인들과 함께할 필요가 있다. 팬데믹 상태에서 우리 눈앞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이 세상을 구성하는 다른 모든 개인들(인간 개인들 및 비인간 개인들)과 이 세상의 살아있음을 함께할 필요성이다.

 

  1. 존재(자들)의 가족

토착부족들의 우주론인 애니미즘은 인간 개인들과 비인간 개인들 사이에서 상호성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이다. 애니미즘이 갖고 있는 이 급진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애니미즘이 무엇인지를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애니미즘은 서양 인지 제국 내부에서 오랫동안 잘못 재현되었다. 순진한 ‘토착’ 인간들이 나무들, 강들, 산들에 깃든 영과 악마들을 추종하며 홉스적인 자연 상태에 살고 있다는 생각은 거짓 신화이다. 이 거짓 신화는 가령 소위 ‘원시인들’이 제사의식을 통해 나무-존재에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서구적 사고방식을 투영한 데서 비롯한 것이자 애니미즘이 관여되어 있는 급진적인 상호성을 포착하지 못한 데서 생겨난 것이다.

식민주의적 지식을 최고로 간주하는 바람에 배우지 못한 생태학적인 지식의 중심 원리에서는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핵심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하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끊임없이 삶을 산출하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이 우주적 풍요로움이 계속 유지되도록 할 책임이 있는 세상을 모든 존재가 함께 창조한다는 점을 받아들인다. 애니미즘은 우주를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행위자들 모두는 우리처럼 삶을 갈망하고 자신들의 욕구를 표현하며 서로 상호작용하도록 요청받는다는 사실에서 인간을 닮아 있다. 종교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하비(Graham Harvey)는 토착적이고 애니미즘적인 우주론들에 대한 가장 훌륭한 최신의 정의로서 “애니미스트들은 세상은 개인들로 가득 차 있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이며, 삶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

하비가 정의한 관계들의 우주에서는 번성하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상호성이 요구된다. 관계들의 세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적대적인 원자적인 개인들이 아니며 하나의 일관성 있는 삶의 과정을 집단적으로 창조한다. 개인만큼 중요한 집단은 인간들로 구성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적 힘으로 구성된다. 생태학적으로 보자면 삶을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태도를 사회성에 기반을 두어 규정하는 것이 정확하다. 형태의 관점에서 본다면 생태계는 상호성의 구현태이다. 생태계는 무한한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는 많은 존재들로 이루어지며 이기적인 행위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에 의해 공유되고 생산되는 커먼즈이다. 생태학적인 삶이란 항상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사는 삶을 의미한다.

서양 인지 제국을 대체하는 것이 상호성의 에티켓이다. 상호성의 에티켓은 생태계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실행되고 있고 (오랜 시간동안 저 생태계들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삶을 영위했던) 사회들에서는 문화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 하지만 이 견해를 탐구하기 위해서 우선 전제되어야 할 것은, ‘서구의 합리성’이 결국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그밖에 모든 것은 약하거나 강력한 미신들이라는 서구 고유의 전제 밖으로 발을 내디딜 필요성이다. 과학적 인류학이 ‘토착민들이 숲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 대신에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과 함께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으면서 이 겸손한 입장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 이를 실천에 옮긴 한 사례에 해당한다.

애니미즘적인 태도는 서양 인지 모델의 기본 원칙들과 대립된다(표를 참조하라). 애니미즘의 핵심은 상호성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를 구성하는 것, 그리고 풍성한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그 우주론에 통합하는 것이다.

서구 문화의 핵심 신념들 토착적인 사유의 핵심 신념들

1. 당신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

1. 나는 당신 때문에 존재한다

2. 우리 존재의 핵심에 에고이즘이 있다.

2. 상호성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

3. 실재는 궁극적으로 죽은 물질로 구성된다.

3. 모든 것은 살아있다.

4. 우리 개인의 죽음을 피할 필요가 있다.

4. 세상을 풍성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이 서로 대립되는 원칙들은 인류세에서 결정적인 갈등 영역들인 다양한 핵심 분야들에서 작동한다. 인류세의 대부분의 갈등의 밑바탕에는 우주를 공유함으로써 좋은 관계들을 유지하려는 데서 맞닥뜨리는 어려움들이 깔려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1. 친족을 위한 커머닝

어떻게 좋은 관계를, 즉 타자들과 우리 스스로를 번성하게 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하는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애니미즘의 답은, 살아있는 우주에 우리가 속해있음을 존재자들로 구성되는 방대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서 여기는 것이다. 이를 더 근본적으로 표현하자면, 애니미즘에 따르면 비인간 개인들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이 친족을 구성한다.

다른 개인들(인간과 비인간 개인들)과의 상호성은 두 가지 형태로 발생한다. 이 상호성은 물자의 분배를 생물권의 생산성을 공유하는 것으로 여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이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공유를 감정적인 참여로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과 다시 이어지고 이 살아있음을 성공적인 관계들에 대한 최고의 직관적 앎으로서 향유하게 된다. 아 새로운 이중적인 입장은 ‘살림’(enlivenment)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살림으로부터 ‘인류세를 위한 시학’(poetics for the Anthropocene)을, 다시 말해 우주적 생산성을 지탱하는 상호간의 풍성한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예술을 구축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을 이 생산성의 수용자들로서만이 아니라 그 원천으로서 경험할 수 있다.

개별 행동은 이 공동의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는 만큼 결실을 맺는다. 물질적인 재화의 분배는 우리가 ‘커먼즈 경제’라고 부르는 것을 따른다. 커먼즈 경제에서 교환과 분배는 자본주의에서처럼 희소성에 대한 대응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커먼즈는 자원이 아니라 일단의 관계들이다. 커먼즈는 모든 참여자들을 양성하고 모든 사람에 의해 지탱되며 결국 우주의 생산성에 다시 반영되는 집단적인 협동과정이다.

커먼즈 철학자이자 활동가인 볼리어가 설명한 커먼즈(([옮긴이]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http://commonstrans.net/?p=2095 참조.))가 팬데믹 시대에 꽃을 피우고 있다. 팬데믹이 닥치자 고령자들을 위해 장을 보는 마을네트워크 자원봉사활동에서부터 재봉사들이 마스크 생산으로 전환하고 자신들이 생산한 마스크를 공동체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자발적인 커머닝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볼리어가 말하듯이 이 이타주의적인 행동들은 한바탕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마는 행동들을 넘어선다. 이 행동들은 공동체를 위한 배려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것인데,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자면 이것은 다소 당혹스러운 일이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재난 상황 하에서는, 홉스가 자연 상태에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듯이, 무정한 이기주의가 만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 재난 시기에 발휘되는 상호 신뢰에 관한 그녀의 고전적 저서(([옮긴이] http://commonstrans.net/?p=1397 참조.))에서 말했듯이, 힘든 시기에 생겨나는 증가되는 상호성은 관여된 사람들에게 심층적이고 의미 있는 방식으로 안도감을 준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는 상호성이 규범이지만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말 놀라워 보일 수 있다. 이 상호성은 사람들이 비인간 친족—정원에 있는 식물들, 가정에 있는 애완동물들, 위험에 처한 종들—을 돌볼 때 경험하는 감정에도 해당되는데 이 감정들을 서구식 용어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애니미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감정들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주의 풍요로움을 키우는 것은 심층적으로 애니미즘적인 경험이다. 기술적인 태도가 그 핵심이 아니라 타자를 환영하는 것을 통해 느끼는 환영받는 느낌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두 차원—모든 존재와의 상호성을 통해 세상을 커먼즈로 실행하는 차원 그리고 함께 어울리는 이 관계를 내 자신의 살아있음과 타자들의 살아있음으로서 따라서 우주의 진정한 특징으로서 느끼는 차원—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물질대사 과정이 지속적인 삶에 참여하는 수단이 되지만 이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정서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이해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대상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진정으로 친족과의 교류에 참여하려는 시도로 나아갈 수 있다. 오직 그때에만 우리는 하나의 가족에 속할 수 있다.

자신의 나라와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은 한 원주민이 “이 돌이 나입니다”라고 답하듯이 정체성은 서로 속해있음에서 나온다. 이러한 속해있음 때문에,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경험은 가족의 일원으로 사랑받는 존재자의 경험으로서, 그 가족이나 가족의 개별 구성원에 대한 자기 나름의 사랑의 경험으로서 그리고 가족을 부양하고 (사랑을) 돌려주려는 욕구의 경험으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애니미즘적인 지속가능성은 수행적이다. 이 지속가능성은 항상 실질적인 타자, 나무 개인, 재규어 개인, 강 개인과의 대화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행동들은 관계의 에티켓 없이는 그리고 상호성의 단순한 의식절차들을 실행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자리를 구하기 전에 호의로 우리를 받아달라고, 우리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고마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종(種)들 사이의 상호성의 실행이자 문화인 애니미즘은 ‘자연 대상들’을 더 잘 다루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는 없지만 우주에 속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생명을 주는 우주를 어떻게 지속시키는지를 보여줄 수는 있다. 애니미즘은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전통적인 관행들을 재고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것이다. 미국의 식물학자이며 작가이자 아메리카원주민인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는 애니미즘이 요구하는 것을 ‘명예로운 수확'(The Honorable Harvest)을 구성하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로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제시한다. “당신을 지속시키는 것들을 지속시킨다면 지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팬데믹의 교훈: 주목할 만한 세 편의 글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Lessons from the Pandemic: Three Notable Essays” (2020. 8. 30) / http://www.bollier.org/blog/lessons-pandemic-three-notable-essay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최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코비드19의 생물물리학적 위협 자체와는 별도로 이 팬데믹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 중 하나는 의미의 소실이다. 친숙한 제도·규범이 역기능적인 혹은 반사회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우릴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 ‘자유시장’과 (겉보기엔) 무해한 국가에 관한 오래된 친숙한 이야기가 직면한 위험에 대응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합리적 사람들은 합리적 의심을 가지고 있다.

의미를 찾는 활동에 정진했던 지난 5개월 사이 나는 현재의 곤경을 더 분명히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을 준 세 편의 글을 접했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 나의 오랜 커먼즈 연구 동료 질케 헬프리히(Silke Helfrich), 그리고 씨스템 변화 활동가 노라 베잇슨(Nora Bateson), 맘펠라 램펠레(Mamphela Rampherle)의 글이 그것이다.

팬데믹 시대에 공동체 양육하기에서 안드레아스 베버가 지적하는 것은 지난 몇 달 간의 봉쇄가 신자유주의가 일반적으로 피해온 논점 즉 “개인은 자신이 모든 타자들과 함께 구성하는 집단이 번성할 수 있을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점을 매우 두드러지게 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장경제학과 기업은 사회의 번영 가능성에는 직접적 관심을 거의 두지 않는다. 그것들은 부의 추출과 사유화, 시장교환을 위한 부의 상품화를 추구하도록 짜여있다. 이것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 문화가 강화한, 그것들의 공인된 사명이다. 투자자들이 이 사명을 사회에서 최우선적 고려대상으로 삼도록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으므로 세계의 많은 정부들은 시민들을 힘껏 섬기는 체할 뿐이다. 실로 시장의 성장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안드레아스 베버는, 팬데믹의 현실과 기후변화를 포함한 일련의 생태적 위기를 고려할 때, 생태계와 관련하여 긴요한 것들이 최우선적 고려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물질대사 과정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참여한다― 이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공동체를 양육하는 행위라는 걸 이해할 때에만 우리는 타자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 를 효율적으로 다루어야하는 객체로 취급하는 데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성의 정치가 포함해야 하는 것은, 인간 존재 및 비인간 존재를 친족으로 간주하면서, 타자의 복지를 우선시하면서 공동체 안에 풍요로운 삶을 창출하는 경험이다. 수천 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런 입장은 ‘애니미즘적’이라고 불리는 사회에서 취해져왔다. 삶 공동체의 관점에선 이러한 애니미즘의 교훈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존재의 거대한 사회에서 우리의 행동을 상호성이란 에티켓에 입각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의 구조적 문제를 살펴보는 데 도움을 주는 또 다른 멋진 글은 질케 헬프리히의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떻게 시장과 국가를 넘어 생각하게 하는가」이다. 질케는 시장과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사유가 어떤 점에서 인식되고 극복돼야 하는 문제의 일부인지를 해명한다.

 …  우리의 경제씨스템이 재화의 생산과 가차 없는 소비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가 충분함에도 공적 논의는 모두 임박한 파국, 일어날 붕괴에 대한 것뿐이다. 그저 2-3개월 에너지 수준을 낮추고 긴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고 숨을 고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비축분으로 살아가며 공유하고 규모를 축소하더라도 그리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재분배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의 필요가 충족되는 혹은 빠르게 충족될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부유한 산업국가들 중 하나에서 이러한 선택지는 트라우마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 재화의 생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씨스템도 누구 하나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고 아무 것도 안 하게 되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팬데믹의 통제와 환경의 치유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유일한 업무는 경제의 재활성화를 위한 소비의 자극 혹은 소비의 재활성화를 위한 경제의 자극이다. 바퀴가 굴러가길 그친다면 씨스템이 붕괴할 위험이 있으니 말이다. 단기적 ‘셧다운’ 이상의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이 여기에 있다.

헬프리히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분명한 대응책은 커먼즈 기반 사유이다. 이 사유는 시장교환 없이 자기결정되고 자기조직된 필요지향적 방식으로 사람들이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 예컨대 팬데믹 초기의 홍콩시위는 헬프리히가 말하듯 감염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

홍콩에 첫 감염 신고가 이루어진 바로 그날 정치시위에 참여했던 일단의 시민들이 코비드19의 감염사례를 추적하고 전염 다발지역을 확인해내며 여러 정보처의 뉴스기사를 교차점검하기 위한 웹싸이트를 만들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정부 도움 없이 홍콩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다. 정부가 공공장소에서 얼굴 가리기를 금지 ―이는 시위 이후 부과된 규칙이었다― 했음에도 말이다. 마스크 사용은 의무가 아니라 전적으로 자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광범하게 헬프리히는 커먼즈가 우리 경제의 설계결함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고 말한다. 커먼즈는 “회복력을 창출하고 의존성을 줄이며 권력 불균형을 감소시킨다. … 모든 것이 자본에 수익을 제공하기 위한 부채 과잉 상태에 이미 빠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이 충분한 한에서 ‘절전모드’에서 완화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의 직업유지와 생존보장만을 위해서 쓸데없는 걸 생산하지 않아도 된다. 커먼즈를 통해서 이익주도형 비즈니스 모델과는 무관한 의미 있는 많은 활동들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씨스템 사상가 노라 베잇슨과 로마클럽의 공동의장 맘펠라 램펠레의 또 다른 훌륭한 글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환경적·사회적 변화에 대한 접근방식에서 변곡점에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길 찾기」에서 “견인이 아니라 관계가 필요함이 드러났다”고 말한다.

50년 전, 이름(악명)이 난 ‘공유지의 비극’ 우화를 알려준 생태학자 개럿 하딘(Garrett Hardin)은 그가 ‘구명정 윤리학’이라고 부른 것도 고취시켰다. 이 비유가 제안하는 것은 환경문제로 위태롭게 된 인류의 상황은 수중(水中)에 100인 이상이 있는데도 추가로 10여명만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정에 탄 50인의 무리의 상황과 닮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음은 누구를 ‘우리’가 살릴 것인가, 그러한 선택을 위해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가이다. 이것이 그 자신들의 엄격한 정언적 추론만을 문제에 접근하기 위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보는 전문가들의 냉담한 논리이다.

그러나 베잇슨과 램펠레는 그들의 글에서, 사람은 그저 숫자·역할이 아니며 삶은 일단의 단순한 서사·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에 주목한다. 사람은 역동적·우발적 맥락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살아있는 창조적 유기체다. 사람의 마음씀과 상상력 그리고 상호관계는 그 자체 생성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새로운 경로를 열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길 찾기」는 특정한 날, 특정수역에 존재하는, 특정한 사람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발생하는 독특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여기엔 공식도 없고 방법도 없다···.

글의 요점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관계와 현실적 상황을 통해서 새로운 접근법을 즉흥적으로 구성하고 발견한다는 것이다. 가차 없는 구명정 씨나리오 대신 함께 살아남기 위해 교대로 수영하거나 옷으로 사람들을 한데 묶거나 아니면 어떤 다른 새로운 수단을 찾기로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했듯이 우리가 곧 알게 되는 것은 “역량은 미리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구명정 윤리학’을 감안한다면 하딘이 많은 우생학적·민족주의적·백인우월주의적 아이디어를 내놨던 게 전혀 놀랍지 않다. 즉, 공포를 활용하는 단순하고 정형화된 접근법을 말이다.

반면 커머너들은 새로운 해답을 함께 발명·발견하는 사람들이다. 베잇슨과 램펠레가 말하듯이 “공동체를 정의하려는, 공동체의 필요에 응답하는 공식을 규정하려는 열망은 불가피한 복잡성에 대한 무지를 낳고, 맥락 제거를 영구화하며, 공동체들이 살아있으며 서로 얼기설기 얽혀 있는 독특한 방식들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전체 글을 읽을 수 있다.)




새로운 애니미즘과 커머닝

 



내가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사회생활에 대해서 그리고 토착민들이 다양한 생물형태들 및 강들과 맺고 있는 밀접한 유대에 대해서—서양인들에게 살아있음(aliveness)을 설명하는 최근의 생태철학을 꼼꼼하게 살피면서—배우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말로 애니미즘과 커머닝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적 합리주의와 경제주의적 사고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힘들이지만 사회적 목적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하는 일에는 별로 능하지 못하다. 이는 세상을 다시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식으로서 새로운 애니미즘의 흔적이 (종종은 커머닝을 통해 그 목소리를 찾으며) 계속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태철학자 안드레아스 베버(Andreas Weber)는 생명의 생물학이 현실 그 자체가 커먼즈임을 짚어주기 때문에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주장한다.

커먼즈는 유기적 통합성과 관계성으로 규정되는 삶의 영역들이다. 커먼즈는 전형적으로 분리—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분리, 개인들의 서로로부터의 분리 및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세계와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물론 애니미즘의 역사는 문제적이다. 초기 인류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세계관을 부족들에게 투영하여 그 부족들이 낙후되어 있다고 폄하했다. 확고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이자 근대인들로서 그들은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들•산들•자연력에 살아있는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다만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구인의 눈으로 본 오늘날의 애니미즘은 이와는 다르다. 이 애니미즘은 생명(삶)의 경험을 지구상의 생물들과 자연체계들 간의 역동적인 대화로 여긴다. 종교학자 그레이엄 하비(Graham Harvey)가 말하듯이, 이것은 인간중심의 비전을 버리고 세상을 “개별 존재들로 가득하고 그들 중 일부만이 인간”이며 그 속에서 “삶이란 항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핵심이다. 애니미즘은 “다른 개별 존재들과의 존중에 기반을 둔 관계에서 훌륭한 개별 존재가 되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제안한, 존중하는 현존에 기반을 둔 ‘나-너’의 관계와도 유사하다.

내 경우에는 최근에 읽은 두 개의 글 때문에 애니미즘에 더 분명하게 관심이 쏠렸다.

하나는 영국의 자연 작가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acfarlane)이 <가디언>지에 기고한 글(2019112일자)로 이 글에서 그는 상승세를 타고 있는 ‘새로운 애니미즘’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제정된 많은 ‘자연 권리’ 관련 법들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가장 유명한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市)가 위험에 처한 호수에 ‘법 인격(legal personhood)’을 부여하는 투표를 2019년에 승인한 것을 알고 있었는가? 이리 호(糊)는 이제 인도의 갠지스 강과 야무나(Yamuna) 강 그리고 뉴질랜드의 황가누이 강(Whanganui River)과 함께 해당 국가에서 법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맥팔레인은 <이리 호 생태계 권리장전>(Lake Erie Ecosystem Bill of Rights)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리 호는 일단의 생태계서비스(ecosystem services)(([옮긴이] 생태계서비스는 인간 사회와 생태계가 연결되어 있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과 인간이 자연환경에 끼치는 영향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라는 당찬 존재론적인 주장이 권리장전에 삽입되었다. 이 권리장전은 사실상 ‘새로운 애니미즘’—애니미즘은 영(spirit), 기운(breath), 활기(life)를 의미하는 라틴어 ‘anima’에서 유래한다—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이다. 이 권리장전은 이 호수에 살아있음(liveliness)과 취약성(vulnerability) 둘 다를 다시 부여함으로써 오수지(汚水地)와 수원(水原) 같은 도구화된 역할에서 이리 호를 빼낸다. 그렇기에 이 권리장전은 전 세계 사법계에서 (‘자연권’ 내지 ‘자연의 권리’ 운동으로 더불어 알려지게 된) 일련의 더 광범위한 최근의 유사한 법적조치들—모두 살아있는 세계에서 상호의존성과 살아있음/활동성(animacy)을 인식하고자 하며 종종 토착집단들에 의해 주창되는 것들—의 일부분을 형성한다.

맥팔레인은 이어서 “‘급진적으로 다시 이야기하기’는 “법뿐만 아니라 문화•이론•정치•문학을 가로질러 현재 진행 중”이며, 이는 “<멸종반란>의 창조적인 항의들에서, 이저벨 스텐저스(Isabelle Stengers), 데이빗 애브럼(David Abram) 그리고 에두아르두 콘(Eduardo Kohn)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연구” 그리고 로빈 월 키머러(Robin Wall Kimmerer)의 작업에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베버—『경이의 생물학』(Biology of Wonder, 2016), 『물질과 욕망』(Matter and Desire, 2018)—와 하딩(Stephan Harding)—『살아있는 지구』(Animate Earth, 2006)—의 생태철학을 여기에 추가하고 싶다.

맥팔레인은, 이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외면했던 무언가를,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대화 상대들의 존재와 그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아미타브 고쉬(Amitav Ghosh)의 말을 빌려 말한다.

나는 또한 콘의 2013년 저서 『숲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인간 너머의 인류학을 향하여』(How Forests Think: Toward an Anthropology beyond the Human, 2013)(([옮긴이] 『숲은 생각한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본이 나와 있다.))에 상당히 매료되었다. 콘은 대담하게도 근대인들에게 이 책이 ‘자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및 ‘자연’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겸손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 책은 우리가 인간 이상의 세계를 “바이오기호학”(biosemiotics)(( [옮긴이]바이오기호학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5참조.))의 살아있는 거대한 체계—서로 상호작용하면서 끊임없이 의미를 창출하고 있는, 신체를 가지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체계—로 보려고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콘은 우리 근대인들이 “관계성에 관하여 생각하는 특정의 방식들에 의해 식민화되어 있다”고 경고한다.

우리는 별 의식이 없이 우리 고유의 속성들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부여하며, 이에 더하여 자기도취에 빠져서 우리 자신을 바로잡는 생각들을 제공해 줄 것을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요구한다.

그 결과 분리된 근대세계에서 우리는 모든 생물학적인 삶의 주요 부분인 심층적 공생과 협력을 무시한 채, ‘자연’이란 개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시장경쟁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곳이라고 전제한다. 우리는 또한 자연세계란 불활성이고 감정이 없으며 의미가 없다고, 인류 드라마를 위한 무언의 배경막이라고 전제한다.

콘은 에콰도르에 있는 아마존 상류의 루나(Runa) 지역에서 4년간 민족지학적 현장연구를 했는데, 이는 그가 “실재”의 의미를 재고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경험이었다. 그는 우리 지구가 말 그대로 살아있고 따라서 우리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들로서 그가 ‘자아들의 생태학’이라 부르는 “복잡한 관계망”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멋지게 주장한다.

유기체가 다른 것들에게 위협으로서 나타나든 한때의 협력자로 나타나든 또는 풍경 속 저 멀리 있는 지원자로 나타나든, 살아있는 생물들은 항상 ‘자아’를 창조할 것이다. 살아있는 자아들을 발생시키고 유지시키는 과정 전체는 유기체의 형태•행동•표현에 구현되는 ‘의미’를 창출한다. 또는 콘이 주장하듯이, “모든 생명은 기호적이며 모든 기호작용은 살아있다.” 삶(생명)과 의미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콘의 책 제목이 설명될 수 있다. 콘의 주장에 따르면, 숲은 숲을 구성하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깊숙이 침투하여 식물들이든 동물들이든 미생물들이든 자아들의 생태계를 발생시킬 때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근대인들이 지구에 널리 퍼져있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을 이해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점이다! 살아있으며 생각을 하고 있는 존재가 단지 인간만은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들은 인간의 관찰 및 활동과는 별개로 자아와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열대우림은 서로를 구성하며 살아있고 자라나는 생각들이 창발적으로 팽창하는 다층적이고 시끌벅적한 망이다”라고 콘은 쓰고 있다.

문제는 이렇다. 우리는 그 주파수에, 근대 인식론과 앎의 방식들로서는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아들의 거대한 생태환경’에 맞출 수 있는가? 우리 근대인들은 숲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논리에 스스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가령 식물들과 토양 사이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재규어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재현과 의미의 형태들로서 (설령 이 형태들이 언어가 닿지 않는 곳에 있더라도) 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원하는 대로 ‘자연’을 재형성할 수 있는 정점의 포식자로서) 우리 자신을 자연과 분리되고 자연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데 익숙해서 살아있는 지구의 흐름들 및 제약들 내부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키는 데 문제를 안고 있다. 주제넘게도 우리는 스스로를 ‘자연’의 지배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언어 자체에 의해 인가되는 생각이다. 서구 문화들이 총칭적이고 추상적인 명사를 사용하는 것을 강하게 선호하지만, 토착문화들은 살아있는 체계들과의 관계 및 상호작용을 지칭하는 정확한 동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토착어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다른 종류의 사고하는 자아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나는 새로운 애니미즘에 공명하며 이는 이 애니미즘이 커먼즈처럼 관계성을 삶의 핵심적인 현실로서 존중하기 때문이다. 질케(Silke)와 내가 우리의 신작인 『자유로운, 공정한 그리고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에서 부각시키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커먼즈를 단지 ‘자원을 관리하기’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관계들의 살아있는 사회적 체계로서 재개념화하기를 원했다.

커머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다수의 생태계들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여러 관계들의 P2P적 구축을 핵심으로 한다. 다행히도 자연 관련 법들이 보장하는 새로운 권리들, 애니미즘에 대한 학문적 연구들 그리고 무수한 커먼즈의 확산이 필요한 거대한 ‘OntoShift’(존재전환)에 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로 하는 살아있음과 관계성이 마땅한 인정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