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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먼즈를 위한 건축–2008년 이후 건축의 과제

 


  • 저자  : Jose Sanchez
  • 원문 :  “Introduction : A Call for a Post-2008 Architectur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호세 산체스의 Architecture for the Commons : Participatory Systems in the Age of Platforms(Routledge, 2021)의 “Introduc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저자 호세 산체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활동하는 건축가이자 게임디자이너이며 이론가이다. 그는 건축디자인 지식의 증식을 추구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Plethora Project(www.plethora-project.com)를 이끌고 있다. 그는 동네를 만드는 시뮬레이션 비디오 게임 Block’hood의 제작자이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경제를 관리하는 비디오게임 Common’hood의 제작자이고, 대중들이 참가하여 동일한 유닛들로 설치물을 짓는 Bloom의 공동제작자이다. 글의 뒤에 필요할 듯 해서 보충설명을 달았다. 

 

우리의 건축은 항상 패러메트릭 건축이었다

20세기 말 건축분야에서는 우리가 건물들을 이해하고 짓는 방식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제안하는 혁신들이 일었다. 소프트웨어, 재료과학(material science), 디지털 패브리케이션(digital fabrication)(([정리자]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제품을 제작하는 기술뿐만 아니라 형태를 만들고 재료 가공 및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일례로 3D 프린팅 기술이 여기에 속한다.)) 및 자동화 영역에서 일어난 기술혁신은 무한한 가변성과 주문제작이라는 비전을 제공했다. 인간의 인식과 맞물려있는 이 비전은 몰입환경으로서 주문제작되는 정동적 건축(affective architecture)을 나타낸다.(([정리자] ‘affective architecture’에 대해서는 가령 https://aalab.org/ 같은 사이트를 참조해보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새로운’ 건축—모든 디자인이 일회적인 건축—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오늘날 실행하고 있는 방식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들이 이것을 입증했다. CNC(computer numerical control, 컴퓨터 수치제어장치) 테크놀로지에 의해 작동하는 디지털 패브리케이션이 대량생산 제품을 생산하는 동일한 비용으로 맞춤제작 형태들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이 이 새로운 건축을 채택하는 것을 완벽하게 찬성할 논리를 제공했다. CNC 테크놀로지는 대량 생산이 여러 해 동안 여타 산업들을 규정해온 상황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줄 한 가지 대안을, 다시 말해 의뢰인들이 항상 색다른 새로운 디자인을 찾을 것이기에 수요가 계속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디자인이 번성하게 될 그러한 대안을 약속하고 있었다.

‘일회적인’ 건축이라는 패러다임—건물을 지을 때마다 스스로를 재창조해야 하는 패러다임—에는 지어지는 환경의 구조적 구성에서부터 사업모델과 관례상의 수수료 배분에까지 세분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이 패러다임은 무상으로 일하거나 또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착취적인 업무에 고용되는 것이 일상인 경쟁적인 시장에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준비시킴으로써 건축분야의 교육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의뢰인들의 투기적인 산업관행으로, 또는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거나 전무한 건축공모 참가로 낭비되는 큰 규모의 디자인 노동의 결과이다.

이 맥락에서 패러매트릭 패러다임의 등장은 건축분야에서의 핵심적인 비능률에 대한 반응으로 이해될 수 있다. 어떤 제안이 개발될 경우 그 과정 내내 디자인 베리에이션(([정리자] 베리에이션(variation)은 하나의 기본적인 형태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나 그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패러메트릭 패러다임은 한 건축가가 건물 하나를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데이터로 통제되는 다수의 가상의 건물들을 디자인하는 기술적인 작업흐름을 건축가에게 제공했다. 패러메트릭 소프트웨어는 건물을 물체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비율을 가지고 공존하면서 전반적인 일관성을 유지하는 요소들의 네크워크로 정의하며, 건축가들은 이것을 기반으로 예산이나 규정의 변화 및 의뢰인의 심경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수백 개의 가능한 디자인들을 설계할 수 있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으로 가능해진 다수의 가상 건물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성의 승리로 보일 수 있으며, 이 경우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어, 건물 하나하나가 유일할 수 있는 도시 전체를 설계할 수 있게 된다. 이 기술적이고 개념적인 기획은 건축협회와 인스부르크 대학 소속이자, <자하 하디드 아키텍쳐>(Zaha Hadid Architects) 소속 패트릭 슈마허(Patrik Schumacher)가 낸 ‘패러메트릭 어버니즘’(parametric urbanism)이라는 아이디어로 탐구되었다. 패러메트릭 어버니즘이라는 유토피아적 비전은 건물들을 지역 부지 조건에 조화시키면서 모든 건물과 도시 내지 지역의 세부 베리에이션을 제어할 수 있는 통합된 알고리즘적 스타일을 제안했다. 슈마허가 주장했듯이 이 제안 이면에 있는 유토피아주의는 건물들 사이의 시각적이거나 양식적인 유사성에 존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넓은 영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디자이너 한 명의 노동과 비전의 규모를 키우는 능력의 잠재적인 승리에도 존재한다.

패러메트릭 모델이 대량 주문제작을 가능하게 하고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건물들을 서로 다르게 짓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모델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끼치는 영향력을 키우지는 못했다. 패러메트릭 정의 안에 존재하는 가상의 다양성으로 인해 서로 상충하는 제안들이 생겨나는데 이 제안들 가운데 하나만이 실행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국 다양한 가상적인 것들 가운데 단 하나만 현실화된다.

의뢰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패러메트릭 방법론 때문에 자신들의 요구에 근본적으로 상이하게 접근하는 제안들을 받아 볼 수 있고, 잠재력이 있는 디자인 분야를 탐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하게 되었다. 어쨌든 건축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량의 자본이 요구된다는 점으로 인해, 민간부문이든 공공부문이든 둘 다 건축환경의 영구적인 부분이 될 것에 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많은 양의 디자인 제안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상식화되었다. 하지만 패러메트릭 모델은 그런 과제를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패러메트릭 방법론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제안들이 아니라 한 가지 제안의 변형들을 제공하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을 입증해왔기 때문이다. 결국 베리에이션은 본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도의 변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수년 동안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은 건축공모라는 형식을 통해 근본적으로 상이한 다수의 제안들—건물의 제약들을 제각각 주의 깊게 고려하는 제안들—을 즉각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건축가들과 협력했다. 건축공모는 궁극적인 패러메트릭 모델화 방법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디자인 참여자들에게는 큰 비용을 치르게 하면서 의뢰인에게는 상당한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거의 무료로 주어서 광범한 가상의 다양성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축공모는 디자인 베리에이션을 제공하는 패러메트릭 디자인 방법론의 모든 원칙을 따른다. 패러메트릭 디자인이 디지털적으로 창조되는 건물들 중 99%를 폐기하듯이 건축공모 역시 적합한 해결책에 도달하기 위해 경합하는 노동인력 풀로서 편성된 건축가들이 무보수 노동으로 만들어낸 디자인들 가운데 99%를 폐기한다. 이렇듯 건축공모들은 우리가 기꺼이 제공하는 노동이 보상을 받지 못하는 투기성 노동의 관행들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건축공모가 건축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오래된 관습이라는 사실은, 패러메트릭 건축이 실제로 출현하기 이전부터 항상 우리가 패러메트릭 패러다임 속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패러메트릭 어젠다가 획기적인 스타일이라고 한 패트릭 슈마허의 주장을 건축공모들이 입증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건축분야의 진보에 기여하고 보수를 받는 주문을 받으려는 수많은 건축가들의 열망 덕분에 그들에게서 공짜나 다름없는 가치를 뽑아낼 수 있는 조달 기술을 전지구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지 자유로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 새로 출현하는, 서로 연결 짓는 것의 미학이라는 슈마허의 주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건축분야의 오랜 관습인 건축공모와 달리 패러메트릭 디자인을 규정하는 시대는 ‘승자독식’ 이데올로기와 지식이 ‘낙수’ 형태로 증식된다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작동하는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시대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전위적 기획들을 위해 개발된 혁신이 점차 사회적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일회성’ 건물을 추구하는 것은 문화적 채택이 이루어질 여지를 거의 남기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유시대의 승자독식 모델이 권력, 자본 및 부의 대규모 불균형을 만들어냈다.

 

건축의 양극화

상업적 수단을 통한 건축술의 혁신 추구는 자본의 대규모 축적에 의존한다. 수 세기 동안 건축가들은 자신들의 건축 비전을 발전시킬 후원자로서 활약할 수 있는 의뢰인을 찾고자 했다. 한 가지 상징적 사례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피터 루이스(Peter Lewis) 및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와 맺은 관계이다.(([정리자] <루이스 레지던스>(Lewis Residence)는 실현되지는 않은 주택개발 기획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뢰인들 중 보험업에서 수십억을 번 피터 루이스로부터 8200만 달러 주택—루이스가 결국은 짓지 않기로 한 주택—의 다양한 버전들을 디자인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의뢰자인 루이스는 이 의뢰건에 대해 6년의 시간과 6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썼다. 게리는 루이스로부터 받은 돈이, 자신이 받은 ‘맥아서(MacArthur) 영재상’의 상금처럼, 아무런 제약 없이 자신의 가장 진보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돈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인정했다.

피터 루이스 같은 의뢰인들은 별로 없으며, 건축교육에서 그러한 기대감을 조장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양의 건축연구와 교육이 그러한 비현실적인 의뢰인에게서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뿐인 주문에 바쳐지고 있다. 건축분야는 이러한 불균형적인 과도함을 알게 되었고 이런 건축 관행들을 비판하는 시도들이 건축학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일례로 건축계는 생태적 재난 내지 금융재앙 이후 집을 박탈당한 사람들과 그 이후 살 곳을 잃을 버린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건축으로 시선을 돌려 인도주의적인 저소득 프로젝트들을 강조함으로써 건축의 윤리성을 재발견하고자 했다. 칠레 건축가 알레한드로 아라베나(Alejandro Aravena)가 조직한 2016년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는 차별적으로 격리되거나 대표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결방안을 만들어낸 건축가들을 부각시켰는데, 여기서 전 세계 부동산 투기, 집단지식 풀의 강탈 그리고 우버 및 에어엔비처럼 이른바 ‘공유경제’로 공통적인 공간들에서 수익을 추출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두 가지 태도들 즉 한편으로는 엘리트 의뢰인들을 위한 디자인의 낭비와,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낭비의 비윤리성에 필연적으로 반발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측면이다.

이 체제에서 승자독식이라는 사고방식은 종형곡선의 양끝에서 작동하며 곡선의 가운데 혹은 볼록한 부분—도시 건축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간계층이 이 부분에 위치한다—은 줄어들거나 사라졌으며 심지어 건축을 위한 기획으로서 관심을 끌지 않게 되었다. 전문가들은 자본의 비대칭성에 좌우되지 않는, 노동이 가진 가치를 분명히 할 권한을 긴급하게 되찾을 필요가 있다. 무임금 노동이나 충분한 임금을 받지 않는 노동을 통해 엘리트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 그 첫 걸음이다. 진보적인 건축은 퇴행적인 사회 관행들과 동의어가 되었다. 이것은 다른 분야들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는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건축물 건립에서 양극화가 드러난다. 한편으로는 무자비한 경쟁하에서 작동하는 연구와 실천으로 번성하는 분야가 있으며 여기서는 많은 관계자들이 성공해서 유명인 반열에 오르기 위해 기꺼이 공짜로 일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의 결과인 착취와 박탈을 바로잡으려고 건축의 엄격함과 건축의 핵심가치들로 전환하는 흐름이 있다.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기

1914년 헨리 포드(Henry Ford)는 노동자들의 하루 최저임금을 그 당시 자동차 회사들의 평균 임금의 두 배에 맞먹는 5달러까지 올리기로 결심했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소비력이 그가 키우고자 시도하고 있는 산업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드는 노동자들이 그들이 만들고 있는 자동차를 살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오늘날 미국 건축가들은 상당한 금액의 학자금 대출금이 쌓인 후인지라 디자인하도록 요청받는 유형의 건축물을 살 여유가 없다. ‘스타 건축가’ 시스템에 의해 육성되는 오늘날의 건축문화는 충분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인턴 노동과 착취적인 관행들로부터 나오는 상당한 양의 보조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어젠다에 맞물려있는 관행들조차도 무임금 인턴십의 보조에 의존하게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산층을 위한 건축은 상업적 명령에 의해 추진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형곡선의 가운데 부분은 건축가들의 수중에 없는 시장, 즉 렘 콜하스(Rem Koolhaas)가 ‘정크스페이스’(Junkspace)라 부른 것과 종종 관련되어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줄어들거나 사라진 이 종형 곡선의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운데 부분은 맞춤 제작한 것의 매력이나 인도주의적인 원조라는 영웅적 면모가 없기에 더 이상은 건축분야에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다. 건축분야는 근대 건축 운동을 연상시키는 큰 서사에 참여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어쩌면 시장 바깥 혹은 시장 주위에서 작동하지 않는 비판적 담론과 실천을 발전시키는 방안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어젠다의 추출 명령에 의해 생겨나는 경제적인 교착상태 때문에 자율이라는 기획이 자급에 기반을 두어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건축가들은 스스로를 그들이 생각하는 건축의 사용자이자 생산자로서 재설정할 수 있으며, 그들이 속하는 문화에 재접속하고 그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들의 디자인 기여를 재조정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가운데 부분을 다시 활용하는 것이 금욕이나 긴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긴축은, 정부가 애초에 문제를 발생시킨 금융기관들이 낼 세금을 인상하지 않고, 그 반대로 금융기관들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서 공공서비스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주택위기가 의미하는 바는 점점 더 많은 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서 살 만한 경제적 여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공부문과 커먼즈가 시장투기의 반대쪽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운동들의 출현은 전통적으로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이두체제였던 것에 세 번째 부분을 추가할 수 있게 한다.

 

2008년 이후 전망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유주의 정부와 보수주의 정부 공히 신자유주의 경제를 얼마나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시스템이 다수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모든 건축가들이 중간에서 꼭대기로 가치를 뽑아 올리는 경제모델을 받아들이는 쪽에 서있다는 것이 건축학계의 현실인 만큼 건축가들에게 2008년은 건축가들이 사용하는 도구가 사실상 어떻게 경제적 어젠다를 내포하고 있는 사회-기술적 시스템인지를 숙고하도록 경종을 울린 한 해였다. 건축물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자본 뒤에 있는 경제적인 충동들과 동기들에서 더 이상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사회-기술적 관점에서 보면 현 경제 관행이 선택한 최고의 무기는 디지털 플랫폼이다. 자본이 이것을 사용자들의 표준화와 자본 추출을 위한 도구로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 플랫폼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전지구적 조직체들이며 사용자들끼리 소통하는 규칙들을 부과하고 플랫폼에서의 거래를 모니터링해서 획득한 지식에서 이윤을 추출한다. 플랫폼들은 시장 규제를 우회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두드러진 형태의 경제 불평등을 수반한다.

건축분야에서 건축공모는 초기의 플랫폼이자 어쩌면 훨씬 더 원시적이고 악의적인 플랫폼일 것이며 또한 보수를 지불할 가치가 있는 노동과 그렇지 않은 노동을 결정한다. 공모에 지원하는 경쟁은 투기적인 노동형태로 되어 있으며, 이는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주장한대로 고용, 노동시간 및 최저임금과 관련된 시장규제를 우회하는 메커니즘이 되었다. 우버의 경우처럼, 공모에 지원하는 건축가들의 경쟁으로 인해 자기 자신이 결정권자이고 주어진 요청에 참여하기 위해 보상받지 못할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건축가 기업가’라는 상이 극찬을 받는다.

2008년 금융위기는 건축계 자체의 투기 시장 내부에서 활약하는 건축가들 세대에게 깨달음을 주는 경험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자신들이 디자인 작업에서 승자독식 경제 시스템을 받아들였고 공모나 다른 플랫폼 제공자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매우 자주 무료로 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적인 예로 부상하는 <노!스펙 운동>(No!Spec movement)은 우리 건축가들이 비윤리적인 사업 관행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과 대안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기치 못한 깨달음을 나타낸다. 금융위기는 저항운동의 급증을 촉진했으며 이는 시장이 규제받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알려준다. 규제받지 않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투기성 노동은 구조적인 분할을 낳고 불평등을 증가시키므로 권력 불균형을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는 대안들의 생산을 촉진하기도 했다. 우리가 참여하는 노동의 주권을 강조하는 공동체 번영의 모델들을 제작하려는 하부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연결시키는 사회-기술적 인식을 촉진한 것이다. 리차드 스톨먼(Richard Stallman)의 일반공중사용허가서(General Purpose License) 및 카피레프트 운동에서처럼 사용자들 간의 지식 증식을 보장하는 라이선스 계약 창출, 블록체인 기술의 출현에서처럼 분산된 방식으로 신뢰를 보증할 수 있는 분산원장들의 창출 그리고 알라스테어 파빈(Alastair Parvin)의 위키하우스 작업의 경우처럼 적정 가격으로 사용자들이 빌딩 솔루션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게 하는 건축의 오픈소스 형태 디자인이 이 모델들에 속한다.

 

건축 커먼즈의 틀 형성하기

이 책은 다섯 개의 장으로 나뉜다. 1장 「건축술의 발달」에서는 신자유주의의 명령 아래 작동하는 건축을 비판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다. 먼저 건축술의 진보라는 생각이 과연 시민들의 번영에 이바지했는지를 묻고 인풋 당 아웃풋 효율의 증가(ephemeralization)라는 약속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검토한다. 첫째 물음에 대해서는 건출술의 진보가 혁신을 일반대중에게로 ‘내려 보내지’ 못했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다음으로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어떻게 시장 인클로저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공적 도메인의 힘을 정의하는 규정들을 무너뜨리는 시스템으로서, 저자는 그러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가치는 커먼즈로부터 추출된다고 주장한다.(([여기서 저자는 커먼즈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인다―정리자] 커먼즈는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저술을 통해 정식화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와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의 관점—공동체적인 부의 창출에 참여하는 사회구조들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비물질적인 공유재 둘 다를 포함하는 정의를 모으고자 시도하는 관점—을 통해서도 정식화되었다.))

2장 「부분들의 융합」에서는 어떻게 추출적인 관행들이 건축에 분명히 나타났는지를 더 깊이 파고든다. 시장 다양성을 파괴하면서 수직적 통합을 이루는 대규모 제조활동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의해서 발생하게 되는 경향을 소개한다. 수직적 통합의 발생은 기술적인 어셈블리에 필요한 부분들의 수를 줄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제조에 명확한 혁신들을 제공했다. 3D 프린팅 같은 최근 과학기술들은 이전에 표준화된 구성요소들을 해체하는 식으로 수행적인 이점들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수직적 통합으로의 경향은 패러메트릭 디자인 패러다임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패러메트릭 모델이 적은 수의 인구에 복무하고 시장 다양성에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짚어보고자 한다.

3장 「부분들을 옹호하여」에서는 디자인과 제조 분야에서 부분들의 사회적 어포던스(([정리자] 어포던스란 주체가 특정의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객체가 ‘제공’하는 관계를 가리킨다.))를 이해함으로써 대안적인 디자인에 필요한 제안들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다수의 행위자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건축 디자인의 분야가 공급자들 간의 협동 및 연계의 효율적인 형태들을 찾을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한 노력이 1950년대의 <모듈협회>’(Modular Society) (([정리자] ‘Modular Society’는 책의 한 장으로서 크리스틴 월이 쓴 장 이름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 당시 영국의 협회 이름이다. 현재 희의록 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https://discovery.nationalarchives.gov.uk/details/r/C2327371))같은 기관들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시도들은 디지털 네트워크의 출현을 통해 동질화되지 않는 차원 연계의 구조들을 제공하고자 한다.(([정리자] 과거 <모됼협회>는 동질화와 표준화에 기반을 두었다.))

이와 관련해서 제시되는 틀은 연속적인 패러메트릭 모델에 의해 제시되는 ‘일회성의’ 모델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이산(離散) 건축’(Discrete Architecture)이라는 패러다임이다. 이는 재조합 능력의 측면에서 부분들이 디자인되고 연구되며 다양한 생산물을 산출할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디자인은 이산 건축을 통해 다원적이고 비독점적인 생산 접근법을 유지할 필요성을 받아들인다. ‘디자인 커먼즈’의 산출을 위해 부분들의 ‘조합에 의한 잉여’(combinatorial surplus)의 연구 및 이 부분들이 가진 어포던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산(적) 건축의 이점들이 검토되며, 재사용가능한 패턴들이 정보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될 수 있도록 하는 조합 디자인을 채택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4장 「비물질적 건축」에서는 네트워크 기반 시설이 감시 자본주의의 실행에 활용되었을지라도 사용자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디자인하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제시한다. 플랫폼이 추출 도구가 되는 것에서 협력 도구가 되는 것으로 이행하기 위해 플랫폼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들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한다. 트레버 숄츠(Trebor Scholz)가 옹호한 바의 ‘플랫폼 협동조합주의’(Platform Cooperativism) 같은 아이디어들을 여기서 살펴본다. 더 나아가 커먼즈에 복무하는 오픈소스 건축모델들의 저장소를 잠재적으로 생성시키면서 사용자들 간의 협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축용 플랫폼을 개발할 가능성을 이곳 4장에서 고찰한다. 비디오게임 기술이 플레이어들 사이의 협동 모델과 디지털 공동체에 참여하는 전통을 제공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에서는 커먼즈가 다양성이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유를 확립하리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감시 자본주의에 의해 발전되는 기반시설에서는 특정 형태의 지성, 즉 사용자들의 정보를 모아놓은 집적 데이터(aggregate data)에서 생성되지만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얻어지는 지성이 효율적으로 배치되어왔지만, 이와는 다르게 커먼즈는 위계로서 작동하지 않는, 서로 합의하는 형태의 공동의 기반시설을 재구축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5장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기울어지지 않은 운동장을 유지하고 진입장벽을 낮추어 설계하면서 민주주의와 관리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할 수 있는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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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uboff, Shoshana, The Age of Surveillance Capitalism:The Fight for a Human Future at the New Frontier of Power (PublicAffairs, New York, 2019)

 

[보충설명]

건축술은 모두가 배워야 할 것이다. 모두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존 러스킨

근대에 일어난 커먼즈의 대대적인 상실은 무엇보다도, 삶을 재생산하는 터인 ‘집’(home)의 상실이었다. 이 상실의 상황은 자본주의가 매우 발전한 탈근대에 들어와서도 호전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집의 상실이라는 상황이 거의 자연 상태에 해당하는 기본 설정이 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의 경우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인 주택(house)이란 것이 노동하는 사회생활을 매우 오랫동안 하고 나서야 간신히 확보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사실 주택을 안정되게 확보하는 일은 어떤 이들에게는 거의 평생이 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평생’으로도 부족하다. 노동력은 재생산되어야 쓰일 수 있는데, 그 재생산의 터가 노동력이 한참 동안 쓰인 후에야 확보될 수 있다니! 아니, 평생을 노동해도 불가능하다니! 자본은 이런 모순적 상황 위에서, 즉 삶의 재생산 터의 ‘기본적’ 결핍을 기반으로 해서 자신을 증식한다.

그래서 커먼즈 되찾기는 집 되찾기를 필수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고 집 되찾기에는 집을 구성하는 하드웨어를 박탈하는 메커니즘인 투기적 주택시장의 극복이 필수적으로 포함된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하자면 커먼즈 특유의 방식으로 주택을 확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5장 「자급을 통한 재구축」“Reconstruction through Self-provision”의 내용의 일부를 포함한다.)

우선 자급을 원칙으로 한다. “자급의 실천이 공통적인 것의 현실화이다.” 자신의 집을 자기가 짓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이 아무런 지식도 (아직은?) 없는 상태에서 DIY로 자신의 집을 짓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우선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서 출발하는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집의 디자인과 관련된 전문적인 지식이 생산되는데, 그 다음으로 이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것을 저자는 ‘해득력 사다리를 채우기’(to populate a literacy ladder)라고 부른다. 해득력 사다리는 전문가들이 생산한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시스템으로서, 전문가들의 수준에서 가장 초보자 대중의 수준에 이르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이 사다리는 지식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새로운 미경험 사용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 배치되는가에 의해 규정된다.”

이 해득력 사다리에서 지식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순환되는 데 그칠 경우에는 이것을 ‘약한 사다리’라고 부르고 초보적 수준에서 전문가 수준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로드맵이 잘 되어 있으면 이것을 ‘강한 사다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서 해득력 사다리의 핵심은 가장 높은 수준과 가장 낮은 수준을 원활히 연결하여 초보자도 이 사다리를 타고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허용하는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저자는 이것이 단순히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의 민주화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지식 생산)에 함입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내 식으로 풀자면, 테크놀로지의 민주화는 (대체로 사용자의 고정된 능력을 전제로 한) 테크놀로지 사용의 평등한 분배이고, 민주주의를 테크놀로지에 함입하는 것은 모두가 테크놀로지 사용자로서만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생산자로서의 능력을 자유롭게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강한 사다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턱을 낮추어 디자인하기’가 필요하다. 진입장벽이 낮아야 많은 사람들이 사다리 안에 들어올 수 있고 사다리 안이 더 열린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해득력 사다리를 만드는 것 자체가 자원의 집합소로서만이 아니라 ‘사회체계로서의 커먼즈’(마시모 데 안젤리스)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실제 집을 만드는 실천이 집짓기와 관련된 지식의 생산과 연결되므로, 저자가 제안하는 방안은 위키피디아, 리눅스 같은 비물질적 생산의 프로젝트를 물질적 생산으로 확대하는 방안이기도 하고, 단순한 참여―상부에서의 의사결정에 사용하기 위한 데이터 수집을 대중이 일시적으로 거드는 것―에서 자급으로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서 자급은 아직은 국가로부터의 조달을 대체한다기보다는 보완하여 국가 및 시장 양자와 협상할 수 있는 시민조직들을 생성하는 것이 주된 일이다.

건축 분야에서 참여에서 자급으로 움직인 대표적 사례로 파빈(Alastair Parvin) 등의 위키하우스(Whikihouse)가 있으며, 건축가들이 자신들의 집만 짓는 것을 넘어서서 이룩한, 자급의 한 형태로서의 커먼즈를 위한, 그리고 커먼즈에 의한 건축의 기획으로는 Open City(1971)가 있다.((이 기획에 대한 사례연구로 Rodrigo Pérez de Arce and Fernando Pérez Oyarzún, Valparaiso Schoo /Open City Group, ed. by Raul Rispa (Birkhauser, 2003) 참조.))

[정백수]




페미니즘과 커먼즈의 정치

 


  • 저자  :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 원문 :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나는 2023년 1월 26일 목요일에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에서 기획한 심화강의 제2강에서 커먼즈 운동을 대안근대로의 이행의 관점에서 소개했는데, 여기서 페미니즘과 커먼즈 운동의 연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런데 강의자료를 다 작성하고 나서 강의를 기다리는 하루 정도의 시간에 아래 소개된 페더리치의 글―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커먼즈의 정치를 살펴보는 글―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강의 후 토론시간에 이 글을 거론하기도 했다. 물론 미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번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세히 내용을 정리해서 이 블로그에 올리기로 마음 먹고 당장 실행에 옮겼다. 아래 글은 마치 번역처럼 보이는 어투를 사용했지만, 원주 혹은 본문의 어떤 디테일들을 생략하기도 했고 또 어떤 부분은 비교적 자유롭게 내용을 풀었기 때문에 완성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저 매우 상세한 내용정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문은 The Wealth of the Commons: A World Beyond Market and State (Levellers Press)의 9장이며 https://wealthofthecommons.org/essay/feminism-and-politics-commons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이트의 글들은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의 적용을 받는다. (※ 이 글은 원래 『더커머너』(The Commoner, 2011년 1월 4일)에 발표된 에쎄이를 조금 고친 것이다.) [정백수]


재생산이 사회적 생산보다 앞선다. 여성을 건드리는 것은 반석을 건드리는 것이다.
– 피터 라인보((Linebaugh, Peter. 2008. The Magna Carta Manifesto: Liberty and Commons for All. Berkeley, C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년 12월 31일 사파티스타들이 에히도(ejido)[공동체가 땅의 소유권이 아닌 용익물권을 갖는, 농업에 사용되는 공동 토지]를 해체하는 입법에 반대하는 투쟁을 한 이후 커먼즈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 고물처럼 보이는 생각이 현재의 사회운동에서 정치적 논의의 중심에 오게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음의 둘이 두드러진다. 첫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축하는 급진적 운동들의 노력을 수십 년 동안 흡수했던 국가주의 혁명모델이 종식되었다. 다른 한편, 종획에 맞서  커먼즈를 방어하려는 투쟁들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믿었거나 사유화로 위협받기 전에는 가치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던 공동체적 재산들 및 관계들의 세계가 가시화되었다. 커먼즈가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인터넷 같은 예전에는 없던 삶의 영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이 항상 산출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종획으로 인해서 드러났다. 커먼즈라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창출하려고 하는 협력적 사회를 예시하는 통일적 개념으로서 이념적 기능에 복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을 해석하는 데서는 애매함들과 의미심장한 차이들이 존재한다. 우리가 커먼즈의 원리를 일관성있는 정치적 기획으로 옮겨놓으려면 이것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령 무엇이 커먼즈를 구성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땅, 물, 공기 커먼즈(공통재), 디지털 커먼즈가 있다. 사회보장연금과 같이 우리가 획득한 권리도 종종 커먼즈로 지칭되며 언어, 도서관, 과거 문화의 집단적 산물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모든 커먼즈가 그 정치적 잠재력의 관점에서 볼 때 동등한가? 모두 호환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들이 구축되어야 할 통일성[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향하는 데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정리자]을 기획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commons’(커먼즈)라고 복수형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the common’(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해야 할까?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포스트포디즘 시대에 우세한 생산형태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적 관계들을 지칭한다.)

이 글에서 나는 이 물음들을 염두에 두면서 커먼즈의 정치를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페미니즘적 관점이란 성차별에 대항하고 재생산 노동을 둘러싼 투쟁에 의해 형성된 관점을 가리킨다. 재생산 노동은 라인보의 말처럼 사회의 반석이며 이것을 시금석으로 하여 모든 사회조직화 모델이 평가되어야 한다. 재생산 노동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커먼즈의 정치를 더 잘 규정하고 커먼즈 원칙이 반자본주의 프로그램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다. 두 가지 문제가 이 과제들을 특히 중요하게 만든다.

첫째, 적어도 1990년대 초부터 커먼즈 담론이 예를 들어 세계은행 같은 기관에 의해 전유되어 사유화를 위해 사용되었다. 세계은행은 생물다양성을 보호하고 전지구적 커먼즈를 보존한다는 핑계로 열대우림을 생태보호구역으로 바꾸어 수세기 동안 열대우림에서 생계를 유지해 온 주민들을 추방하는 한편, 예를 들어 생태관광(eco-tourism) 같은 것을 통해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접근을 보장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동기에 따른 커먼즈의 재가치화가 주류 경제학자와 자본주의 계획가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회적 자본, 선물 경제, 이타주의와 같은 주제들에 대한 학술 문헌이 증가하는 것을 보라.

사회적 공장[사회 전체가 공장이 된 것]의 구석구석까지 상품형태를 확장하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에게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장기적 재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실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은 기획이다. 자본주의적 축적은 시장에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엄청난 양의 노동(예를 들어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하며 여성들이 제공하는 무보수 가사노동)과 자원의 자유로운 전유에 구조적으로 의존한다. 따라서 월스트리트 붕괴 훨씬 이전에 다양한 경제학자 및 사회이론가들이 삶의 모든 영역의 시장화가 시장의 원활한 기능에 해롭다고 경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도 신뢰, 선물 제공처럼 화폐가 매개하지 않는 관계의 존재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본이 공통적 이익(공동선)의 미덕에 대해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자본가 계급이 지구 환경의 수호자인 척하면서 되살아나는 것을 돕는 방식으로 커먼즈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커먼즈가 어떻게 비(非)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될 수 있는가’라는, 아직은 답이 없는 물음이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저작, 특히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2008)에서 우리는 커먼즈가 계급투쟁의 역사를 우리 시대로 연결하는 끈이었으며 실제로 커먼즈를 위한 투쟁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배웠다. 메인 주(州)의 주민들은 기업 함대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어장에 대한 접근을 유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애팔래치아 주민들은 노천 채굴로 위협받는 산을 구하기 위해 조직화하고 있다. 오픈소스와 프리소프트웨어 운동은 지식의 상품화에 반대하고 소통과 협력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고 있다. 또한 칼슨(Chris Carlsson)이 그의 『나우토피아』(Nowtopia, 2007)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미에서 많은 보이지 않는 커머닝 활동과 공동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칼슨이 보여주듯, ‘버추얼 커먼즈’의 창출, 그리고 화폐/시장 경제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번창하는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의 창출에 많은 창조성이 담겨 있다.

아프리카, 카리브해 지역, 또는 미국 남부에서 이주해온 공동체들 덕분에 나라 전역에 퍼진 도시 텃밭 가꾸기 운동이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왔다. 이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시 텃밭은 우리가 식량 생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우리의 환경을 재생성하며 생계를 위해 자급하려면 없어서는 안 될 러바니제이션(rurbanization)((rurbanization : rural + urban +-ization)) 과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텃밭은 식량 안보의 원천일 뿐 아니라 그것을 훨씬 넘어서 사회성, 지식 생산, 문화 및 세대 간 교류의 센터들이다.

도시 텃밭은 그것이 상업적 목적보다는 동네에서의 소비를 위해 생산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점으로 인해서 도시 텃밭들은 다른 재생산 커먼즈들―메인 주의 ‘가재 해안’(Lobster Coast)((“Lobster Coast”는  지명이 아니라 가재를 잡는 해안을 말한다. 메인 주의 어업 공동체들의 역사를 다룬,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의 The Lobster Coast: Rebels, Rusticators, and the Struggle for a Forgotten Frontier 라는 책이 있다.))의 어장들처럼 시장을 위해 생산하거나 열린 공간을 보존하는 토지 신탁처럼 시장에서 구입되는 것들―과 구분된다. 그러나 문제는 도시 텃밭이 자생적인 풀뿌리 운동으로 남아 있으며 미국에서 벌어지는 운동에서 텃밭들의 존재를 확장하고 토지에 대한 접근을 투쟁의 핵심 영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여성과 커먼즈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방어되고 있고 발전되고 있으며 투쟁으로 지켜지고 있는 많은 번성하는 커먼즈들을 어떻게 한데 모아서 결집력 있는 총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의 토대를 제공할 것인가의 문제를 좌파는 제기한 적이 없다. 커먼즈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과거의 역사에서나 우리 시대에서나 여성들은 재생산 노동의 주요 주체로서 공동체의 자연자원에의 접근에 남성보다 의존해왔고 이 자원의 사유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불이익을 당했으며 이 자원의 방어에 가장 헌신적이었다는 깨달음과 함께 이 페미니즘적 관점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내가 『캘리번과 마녀』(Caliban and the Witch, 2004)에서 썼듯이,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국면에서 여성들은 영국과 남북아메리카에서 공히 토지 종획에 맞서는 투쟁의 최전선에 섰으며 유럽 식민화가 파괴하려고 했던 공동체적 문화의 가장 완강한 방어자들이었다. 페루에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마을을 장악했을 때 여성들이 높은 산으로 도망쳐 집단적 삶형태들을 다시 창출했고, 이는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여성에 대한 세계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여성을 마녀로 몰아 박해한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형태의 시초 축적 과정에 직면한 여성들은 자연의 완전한 상업화를 가로막고 비자본주의적 토지 사용과 생계자급 지향적인 농업을 지탱하는 주요한 사회적 힘이다. 여성들은 세계의 자급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세계은행 및 기타 기관들이 여성들의 활동을 환금경작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이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는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식량 가격 상승에 직면하여 공유지(公有地)의 땅뙈기들을 전유하였고 길가를 따라, 공원에, 철로를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으며,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관을 바꾸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농촌 사이의 분리를 허물었다. 인도, 필리핀에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여성들은 황폐해진 숲에 나무를 다시 심고, 힘을 합해 벌목꾼을 쫓아냈으며, 광산 작업과 댐 건설을 봉쇄하고, 물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을 이끌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여성들의 투쟁의 다른 유형은 캄보디아에서 세네갈에 이르기까지 제3세계 전역에서 화폐커먼즈로 기능하는 신용연합의 형성이다.(Podlashuc 2009)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톤틴’(the tontines)이라고 불리는 이 신용연합은 여성들이 만든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관리되는 뱅킹시스템으로, 은행에 접근할 수 없는 개인이나 집단에 현금을 제공하며 순전히 신뢰를 바탕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신용연합은 세계은행이 장려하는 소액융자 시스템과 완전히 다르다. 이 소액융자 시스템은 상호감시와 수치심을 바탕으로 작동되는데, 예를 들어 니제르에서 이러한 방식이 융자금을 상환하지 못한 여성들의 사진을 공공장소에 게시할 정도로 극에 달해서 몇몇 여성들을 자살로 몰아가기도 했다.

여성들은 또한 재생산 비용을 절약하고 서로를 가난·국가폭력·남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재생산노동을 집단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해왔다. 두드러진 사례는 1980년대에 칠레와 페루에서 여성들이 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더 이상 혼자서는 물건을 살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때 세운 ‘올라스 코무네스’(ollas communes, 공동밥솥)이다.(Fisher 1993; Andreas 1985) 토지 재전유나 톤틴의 형성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실천은 공동체적 유대가 아직 강한 세계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정치 이전의 것으로, ‘자연적인’ 것으로, 혹은 단순히 ‘전통’의 산물로 보면 잘못이다. 식민화 국면들이 거듭되고 난 지금, 자연과 관습은 민중이 투쟁하여 보존하고 재발명한 곳에서 말고는 그 어디에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레오 포들라슈크(Leo Podlashuc)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풀뿌리 여성들의 공동체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출하며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집과 공동체에서 대항권력을 구성하며 자기가치화와 자기결정의 과정을 연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많다.

이 투쟁들에서 우리가 얻는 첫 번째 가르침은,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커머닝이 집단적 이해와 상호유대가 창출되는 주된 메커니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노예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최전선이며 우리의 삶에 대한 자본의 장악력을 안으로부터 무너뜨리는 자율적 공간을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내가 설명한 경험은 이식할 수 없는 모델이다. 북미에 사는 우리에게 재생산 수단의 탈환과 공통화(commoning)는 필연적으로 다른 형태를 취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자원들을 한데 모으고 우리가 생산한 부를 재전유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상품의 흐름들―이 흐름들이 세계 시장을 통해 세계 전역을 흘러다니면서 수백만 명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게 하고 있다―로부터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살림을 세계시장으로부터만이 아니라 (현재 미국 경제가 의존하고 있는) 전쟁기계와 감옥시스템으로부터도 떼어내기 시작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운동에서 그토록 자주 보이는 특징인 추상적 연대―이는 우리의 헌신, 견딜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우리가 기꺼이 감수할 위험을 제한한다―를 넘어설 수 있다.

사유재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로 보호되고 3세기에 걸친 노예제도가 사회에 심오한 분열을 낳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커먼즈/공통적인 것을 재창출한다는 것이 장기적인 실험, 연대구축 및 피해회복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엄청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제가 지금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워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자율의 공간을 넓힐, 그리고 우리의 재생산이 세계의 다른 커머너들과 커먼즈들을 희생시키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유일한 가능성이다.

 

페미니즘적 재구축

마리아 미스(Maria Mies)가 이 과제를 강력하게 표현한 바 있다. 그녀는 공통적인 것의 창출이 첫째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분리한 것들을 재결합하기 위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심대한 변형이 일어나는 것을 필요로 함을 지적했다. 생산이 재생산 및 소비와 분리됨으로써 우리는 ① 먹는 것, 입는 것, 일하는 도구가 생산되는 조건들을, ② 그 사회적·환경적 비용을, 그리고 ③ 우리가 산출하는 폐기물을 떠안게되는 사람들의 운명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Mies 1999) 우리는 우리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무책임한 상태―이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분업이 조직되는 파괴적인 방식들의 결과이다―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의 삶의 생산은 불가피하게 다른 이들에게는 죽음의 생산이 될 것이다. 지구화는 이 위기를 악화시켜서 생산되는 것과 소비되는 것 사이의 거리를 벌렸으며 그럼으로써 (전지구적 연결성이 증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사용하는 석유, 우리가 입는 옷, 우리가 서로 소통하는 데 쓰이는 컴퓨터들이 피의 희생을 치르고 생산된 것임을 보지 못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은 우리에게 이러한 망각의 상태를 극복하는 데서 커먼즈를 재구축하는 일을 시작하라고 가르쳐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기초해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재생산을 이루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기를 거부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커머닝은 우리 자신을 공통적 주체로 산출하는 활동이 되어야 의미를 가진다. ‘공동체 없이 커먼즈 없다’라는 슬로건은 바로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동체는 종교나 민족을 기반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관계의 질, 협력의 원칙,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지구·숲·바다·동물에 대한 책임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의 달성은 우리의 일상적인 재생산 노동의 집단화와 마찬가지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이 더 광범한 반(反)사유화운동 및 공통의 부를 되찾기를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집단적 통치(자치)에 대한 우리의 교육과 역사를 집단적 기획으로 인식하는 일의 필수적 부분이다.

그래서 가사의 공동체화를 우리의 정치적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의 풍부한 페미니즘 전통을 다시 살려야 한다. 이 전통은 ①19세기 중반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실험들에서부터 ②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까지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이 보인, 집단적 살림을 통해 가사노동을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그럼으로써 집과 동네를 재조직하고 사회화하려는 시도들―이 시도들은 안타깝게도 1920년대에 ‘적색공포’로 종식되었다―까지에 걸쳐있다.(Hayden 1981 and 1986) 이러한 실천들에서 보이는, 재생산 노동을 인간 활동의 중요한 영역으로, 부정될 것이 아니라 혁명적으로 변혁되어야 할 영역으로 볼 수 있는 과거 페미니스트들의 능력이 다시 논의되고 다시 가치를 부여받아야 할 것이다.

집단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결정적 이유 하나는 인간의 재생산이 지구상에서 가장 노동 집약적인 일이며, 대체로 기계화로 환원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있다. 육아, 환자 돌보기 또는 신체적·정서적 균형을 재통합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작업은 기계화할 수 없다. 미래주의 산업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돌봄을 로봇화할 수 없다. 특히 어린이와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가운데 간호사봇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비스 제공자의 건강을 희생하지 않고 책임을 분담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절한 치료를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수세기 동안 인간의 재생산은 집단적 과정이었다. 그것은 확대된 가족과 신뢰할만한 공동체들의 일이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동네에서 그랬으며, 사람들이 혼자 살았을 때에도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오늘날의 노인들처럼 외롭거나 의존적이지 않았다. 재생산이 완전히 사유화된 것은 자본주의에 와서의 일이다. 이 사유화 과정은 지금 우리의 삶을 파괴할 정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추세는 역전되어야 하며 지금이 그러한 기획에 유리한 때이다.

자본주의 위기가 미국을 포함하여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재생산의 기본 요소들을 파괴함에 따라 우리의 일상 생활의 재건이 가능한 일이자 긴요한 일이 된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경제적 위기가 임금 노동의 규율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성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바로 이런 일이 대공황 중에 일어났는데, 그때 화물열차를 커먼즈로 전환하여 이동성과 유목 생활에서 자유를 추구한 호보들(hobos, 떠돌이 일꾼들)의 운동이 일었다.(Caffentzis 2006) 그들은 철로가 교차하는 곳들에서 자치 규칙과 연대에 기반을 둔 호보 정글들을 조직했는데, 이는 많은 호보들이 믿었던 공산주의 세계의 예시였다.(Anderson 1998, Depastino 2003 and Caffentzis 2006) 그러나 소수의 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들을 제외하면((<박스카 베르타>(Boxcar Bertha, 1972)는 마틴 스코세시(Martin Scorsese)가 벤 라이트먼(Ben Reitman)의 『도로의 누이―박스카 베르타의 자서전』(Sister of the Road: Sister of The Road: The Autobiography of Boxcar Bertha )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남성들의 형제애였으며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었다. 경제 위기와 전쟁이 끝나자 호보들은 노동자들을 고착시키는 두 개의 큰 엔진인 가족과 집에 길들여졌다. 대공황 동안 보여진 노동계급 재구성의 위협을 유념한 미국 자본은 ‘생산 지점에서의 협력, 재생산 지점에서의 분리 및 원자화’라는 원칙을 경제 생활을 조직하는 데 탁월하게 적용했다. 레비타운(Levittown)((‘Levittown’은 윌리엄 레빗(William J. Levitt)과 그의 회사(Levitt & Sons)가 만든 거대한 주택개발사업의 이름이다.))이 제공한 원자화되고 직렬화된 가족 주택은 탯줄로 연결된 부속물인 자동차와 결합하여 노동자를 정주하는 삶에 고착시켰을 뿐만 아니라 호보 정글들이 나타냈던 유형의 자율적 노동자 커먼즈를 종식시켰다.(Hayden 1986) 오늘날 수백만 명의 미국인의 집과 자동차가 회수되고 압류·철거·대량실직이 다시 자본주의 노동 규율의 기둥을 무너뜨리고 있음에 따라 해안에서 해안으로 뻗어 있는 천막 도시들 같은 새로운 공통 기반이 다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시적인 공간, 일시적인 자율지대들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재생산의 토대가 될 커먼즈들을 구축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다.

집이 경제의 기반이 되는 오이코스(oikos)라면, 역사적으로 가사노동자이며 가옥 수감자들인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집을 (다양한 사람들과 협력형태들이 가로지르는) 집단적 삶의 중심지로 되찾아야 한다. 그리하여 고립과 고착이 없는 안전함을 제공하고 공동체 소유물의 공동사용 및 순환을 가능하게 하며, 무엇보다도 재생산의 집단적 형태들의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19세기의 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의 프로그램으로부터 이 기획에 대한 영감을 끌어올 수 있다. 이들은 집(home)이 ‘여성 억압의 중요한 공간적 구성 요소’라고 확신하고 공동 부엌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이 재생산을 통제하기를 요구하는 협동적 가구들을 조직했던 것이다.(Hayden 1981)

이러한 목표는 현재 매우 중요하다. 삶이 가정에 고립되는 상태를 분쇄하는 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고용주 및 국가와의 관계에서 우리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생태적 재앙으로부터의 보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재생산 자산과 폐쇄된 거주지의 ‘비(非)경제적’ 증가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결과, 즉 겨울에는 온기를 대기로 발산하고 여름에는 가차 없는 더위에 우리를 노출시키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De Angelis 2007) 가장 중요한 것은, 재생산을 보다 협력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하지 않는 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및 정치적 행동주의와 일상적 삶의 재생산 사이의 분리를 끝내지 않는 한 대안 사회와 강력한 ‘스스로 재생산하기 운동(a self-reproducing movement)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성에게 재생산을 커머닝/집단화하는 임무를 이렇게 할당하는 것은 여성성을 자연주의적으로 보는 사고방식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당연히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러한 굴복을 죽음보다 더 나쁜 운명으로 본다. 자본가들에 의해 전유된 자연의 부처럼, 여성이 남성들이 공유하는 부로서, 남성들이 자유롭게 전유할 부와 서비스의 자연적 원천으로 지정되었다는 생각이 우리의 집단의식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돌로레스 헤이든(Dolores Hayden)의 말을 풀어보자면, 재생산 노동의 재조직, 따라서 주택과 공적 공간의 재조직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의 문제이며, (더 추가하자면) 권력과 안전의 문제이다(Hayden 1986). 여기서 브라질의 무토지 농민운동(MST)에 참여한 여성들의 경험이 떠오른다. 이들은, 공동체가 자신이 점유한 땅을 유지할 권리를 획득한 후, 새 주택들을 하나의 복합체를 형성하도록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쟁의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설거지와 요리를 함께 하는 등) 집안일을 공동으로 하고, 남자들에게 학대당할 때 서로를 도와주기 위해 달려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성이 재생산 노동과 주거의 집단화에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은 가사노동을 여성의 천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우리의 저항의 역사에서 본질적인 부분이었던 재생산 노동에 관해 여성들이 축적한 집단적 경험, 지식 및 투쟁을 지우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역사와 다시 연결되는 것은 오늘날 여성과 남성 모두가 우리 삶의 젠더화된 구조를 허물고 우리의 집과 삶을 커먼즈로 재건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단계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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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 돌봄’ 강의요목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Pirate Care, a Syllabus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루케아
  • 설명 : 

    아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2년 9월 14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다음의 글은 데이빗 볼리어의 저서인 『변화만들기를 위한 커머너의 목록 — 앞으로 나아가는 이행들을 위한 도구들』(The Commoner’s Catalog for Changemaking: Tools for the Transitions Ahead)에서 발췌한 일련의 특집들 중 하나이다. 다수의 선구적인 커먼즈 프로젝트들과 운동들의 개요서인 『커머너의 목록』은 서점에서 구할 수 있고 온라인(https://commonerscatalog.org)을 통해 무료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을 보살피는 돌봄의 특정 유형들이 불법화되었다는 것에 놀란 많은 유럽인들이 2019년 그들이 해적 돌봄”(Pirate Care)이라 부르는 것에 관한 교과목의 강의요목을 만들어냈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이 설명했듯이, “우리는 선장들이 바다에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체포되는 세상에 살고 있고, 과학논문을 다운로드한 사람이 35년을 감옥에서 지내는 세상에 살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는 피임약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임약을 가져다 준 사람들이 기소를 각오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아픈 사람들에게 약을, 목마른 사람들에게 물을, 집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것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성 영웅들은 돌보고 있고 불복종하고 있다. 그들은 해적이다.”

여기서 ‘해적 돌봄’이라는 생각이, 그리고 인도주의적인 돌봄 내지 인명을 구조하는 돌봄을 제공할 필요—국가가 이것을 범죄로 간주하기로 작정하더라도 말이다—가 있다는 생각이 나왔다. 발레리아 그라찌아노(Valeria Graziano), 마셀 마스(Marcell Mars) 그리고 토미슬라브 메닥(Tomislav Medak)에 의해 개발된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증가일로에 있는 행동주의의 오늘날의 형태들을 ‘돌봄’과 ‘해적행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지도그리기하는—초국적인 유럽 공간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는—하나의 연구과정으로” 작성되어 있다. 그 강의요목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 즉 그 모든 다각적이고 서로 연결된 측면들에서의 ‘돌봄의 위기’”에 개입하는 새롭고 흥미로운 방식들을 제안한다.

우리 시대의 돌봄의 결여는 극도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시장/국가의 다양한 제도들—건강의료보험, 주택, 식량, 사회적 지원—의 실패로서 보일 수 있다.

시장은 명백한 ‘소비자 수요’가 없다면 돌봄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경우가 잦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돌봄은 종종 가장 취약한 인적 서비스이다. 국가 관료들은 국민들에게 마치 기계인 양 규격화된 단위의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한다. 규칙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제도들은 결코 ‘돌봄’을 실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돌봄은 대체로 무급노동이거나 보수가 형편없는 유급노동으로 남아있다. 그것은 ‘여성들의 노동’ 또는 비(非)백인들을 위한 노동으로서 종종 젠더화되고 주변화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돌봄을 커머닝을 통해 발생하고 유지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고양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돌봄은 국가권력과 시장에 저항하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항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권력관계들이 어떻게 극심하게 불평등한지를 드러내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것은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왜 정치적 행위인지를, 이를테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적’을 도와주는 것과 같은 정치적 행위와 종종 유사한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이주자들과 난민들에게 인도주의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연대와 공감에 바탕을 둔 기본적인 인간행동을 나타내는지를 탐구한다. 강의요목은 ‘해적 돌봄’에 관한 읽기 자료들을 제공하고 ‘해적 돌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응들을 조직된 성찰, 직접행동, 그리고 ‘집단적 기억 글쓰기’를 통하여 제안한다. 후자는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마음의 상처들을, 특히 폭력적인 역사적 과거의 여파로 생겨난 상처들을 치료하는 한 방법으로서, 기억들을 회상하야 글로 쓰는 과정이다.

해적 돌봄의 실행자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자기조직화,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대안적 접근법들, 그리고 도구들•과학기술들•지식들의 커머닝을 실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시민불복종을 의미할 수 있으며, “가장 착취받고 차별받으며 소모품으로 격하된 사람들에게 무조건적인 유대”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을 위험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해적 돌봄 강의요목은 열려있으며 점차 발전하는 “도구”로 즉 “이 실천들로부터 배우는 집단적인 과정들을 지원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제시된다.

나는 이 강의요목이 돌봄의 정치적 동학과 힘의 동학을 설명하는 방식이 좋았다.

1. 돌봄은 본래적으로 ‘친절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권력관계를 함축한다. 기율•배제•위해의 과정들이 돌봄의 모태 안에서 작동할 수 있다.

2. 돌봄노동은 권력에 불복종하고 우리의 집단적 자유를 증가시키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것이 돌봄노동이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될 때에는 대다수의 살아있는 존재들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는 전지구적으로 돌봄의 위기에 처해있다.

3. ‘잘못된’ 사람들은 없다. 그런데 ‘잘못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 점점 더 사회적으로 좌절되고 있으며 어려워지고 범죄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돌봄의 위기는 아주 오랜 시간동안 있어왔다.

4. 돌봄은 노동이다. 그것은 필요한 노동이며 숙련노동이다.

5. 돌봄노동은 젠더•지역•인종•계급•능력•나이의 구분에 따라 대부분의 사회에서 불공평하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공유된다. 어떤 이들은 강제로 돌보고 또 어떤 이들은 서비스를 기대하는 자신들의 특권을 옹호한다. 이런 상황은 바뀌어야 한다.

6. 돌봄노동은 자원•지식•도구•기술에 대한 전면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것들을 빼앗겼다면 우리는 되돌려달라고 요구해야 한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시론(試論)

 


  • 저자  : 윤영광
  • 설명 : 2022 커먼즈네트워크 포럼(10.28) 발표문이다.

 

제기되는, 제기되어야 하는 물음들

‘커먼즈’ 네트워크 포럼이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이라는 제목하에 열리고 있다는 사실, 지금 이 세션의 제목이 “커먼즈와 공공성”이라는 사실은 즉각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왜 공공성이라는 익숙한 개념에 더해 커먼즈라는 새로운 개념을 필요로 하는가? 어째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이 이미 존재함에도 다시 커먼즈를 이야기하는가? 공공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면 커먼즈라는 별도의 개념을 사용함에 따르는 잠재적 혼란을 감내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공공성의 어떤 문제, 한계 혹은 결여가 커먼즈라는 개념을 소환하는가? 그리고 커먼즈 개념을 소환토록 한 공공성의 그 모든 문제, 한계, 결여에도 불구하고 왜 간단히 공공성을 커먼즈로 대체하지 않고 ‘공공성 회복을 위한 더 넓은 연대와 협력’을 다름 아닌 커먼즈의 이름으로 논의하려 하는가?

요컨대 공공성과 커먼즈의 병치 자체가 이미 우리가 오늘 다루어야 하는 문제상황을 대략적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지형의 정확한 파악에는 아직 미치지 못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가 외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 관계의 양면성

모두 아시다시피 공공성은 두 가지 ‘공’을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공(公)은 영어 ‘public’(공적인 것)에 해당하고 두 번째 공(共)은 ‘common’(공통적인 것)에 해당합니다. 공공성, 혹은 공공성과 커먼즈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연구자들이 이 두 가지 ‘공’에 대해 이미 많은 논의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만, 오늘 제 이야기도 역시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숙고함으로써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공통적인 것 혹은 공통성(commonness)은 커먼즈의 구성적 속성 혹은 본질입니다. 커먼즈는 공통적인 것입니다(‘commons is common’). 이렇게 보면, 커먼즈는 공공성과 별도로 그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성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한 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는 내적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커먼즈와 공공성의 관계라는 애초의 문제는 공공성을 구성하는 두 축, 즉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새롭게 제기됩니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적’, ‘공통적’,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습니다. 물론 지속적인 개념의 재규정을 요하는 이론적 작업에서 사전에 기대는 것은 일반적으로 부적절합니다. 사전의 본질이 한 단어의 침전된 의미, 그래서 가장 상투화된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때문에 사전적 의미는 개념을 둘러싼 ‘현실적인’ 사회·정치적 지형을 탐사하는 데 유용한 이정표가 되기도 합니다. 각 단어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공통적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
  • 공적 : 국가나 사회에 관계된 것
  • 공공성 :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에 두루 관련되는 성질((국립국어연구원, 『표준국어대사전』, 두산동아, 1999.))

두 가지 점이 흥미롭습니다.

첫째,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의미가 꽤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구분됩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는 ‘함께함’ 자체 ― 한국어 함께함은 being-together, living-together, doing-together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강점을 갖습니다 ― 의 내용을 말하되 그 형식은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고 있는 반면, 공적인 것의 정의는 현재 인류에게 함께함의 형식으로서 지배적인 ― 다른 정치적 상상이나 구상을 즉각 ‘비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지배적인 ― 것으로 주어져 있는 ‘국가’와 ‘사회’를 소환합니다.((19세기 사회학이라는 분과학문의 출현, 국가와 시민사회의 역사적 분리에 대한 헤겔과 맑스의 분석, ‘사회적인 것’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 등이 서로 다른 맥락과 각도에서 방증하듯, ‘사회’, 적어도 한편으로는 국가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맞짝을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사회’는 국민국가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역사적 발명품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국가와 사회가 공통적인 것과 관련하여 동일한 논점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는 국가보다 더 복잡하고 섬세한 논점들을 제기하며, 그래서 짧은 발표와 토론에서 다루기는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이후 논의는 국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닙니다만, 철학적으로 말해 이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은 질료에, 공적인 것은 형식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렇게 볼 때, 문제는 저 형식과 질료의 관계가 필연적인가, 즉 공통적인 것은 필연적으로 공적인 것이라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가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겁니다.

둘째, 공공성의 사전적 의미는 그것을 이루는 두 가지 ‘공’의 정의를 결합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의 정의에서 ‘(복수의 것에) 두루 관련됨’이라는 속성을 가져오고,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사회’라는 요소를 가져오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런 결합 자체라기보다, 공적인 것의 정의에서 맨 앞에 왔던 ‘국가’라는 요소가 이 정의에서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한때 이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표현을 쓰자면 이는 ‘징후적’입니다. 이것은 공적인 것의 정의 속에 등장했던 함께함의 두 형식, 즉 국가와 사회가 그 성격과 위상에 있어서 같지 않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국가’의 누락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이한, 어떤 의미에서는 반대되는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하나는 “한 개인이나 단체가 아닌 일반 사회 구성원 전체”가 당연히 국가를 함축한다는 사회적 무의식이 이런 누락을 초래했다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보면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에 대한 설명은 설령 그것이 ‘사회’라는 개념만을 동원하는 순간에도 잠재적으로는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국가로 수렴됩니다. 국가는 중요치 않거나 적절치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누락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공’이 공존 혹은 결합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삭제되거나 적어도 비가시적으로 되어야 함을 함축한다는 설명입니다. 아마도 사전편찬자의 본의, 나아가 사전편찬자가 기대고 있는 상식적인 언어/정치감각과는 거리가 있을 이 설명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즉각 어려운 문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공적인 것에서 국가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때 공적인 것이란 무엇이 될 것인가?

물론 이는 단지 사전적 정의가 함축하는 바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고 그 정의들 간의 관계를 따져본 것일 뿐입니다. 당연히도 이로부터 최종적인 이론적·실천적 입장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가장 상식적인 언어와 사고의 수준에서도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공존 내지 결합이 필연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 평화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그런 한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긴장과 갈등을 함축하는 문제적 개념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과 갈등의 핵심엔 역시 국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커먼즈 운동이 국가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단순한 결론을 손쉽게 도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이며, 그런 한에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 즉 공공성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국가라는 문제를 우회할 방법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조금 추상적이고 거친 논의가 되겠지만 공통적인 것의 관점에서 본 국가의 성격을 짧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국가는 원리적으로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전제하지만 그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근대 국가와 주권의 본질은 공통적인 것의 내재적 지평을 초월하는 운동을 하면서도 다시 저 내재적 지평에 개입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때 초월성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인간 존재들의 본성을 사적인 것으로 설정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 귀결입니다. 사적 개인, 즉 사적인 것을 본질로 하는 인간은 원리상 자신들에게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그들 자신 간의 내재적 관계에서 오는 힘을 통해 다룰 수 없는 존재로 상정됩니다. 공통적인 것을 다룰 별도의 층위, 별도의 장치가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는 공통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에 근거해야 하지만 결코 공통적인 것의 층위에 내재할 수는 없다는 역설을 본질로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하에 소외되고 왜곡된 방식으로 현상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커먼즈의 관점에서 공적인 것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한편으로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과 대립하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정확히는 바로 그 ‘대립’의 방식으로 사적인 것의 지배를 보완하는 한에서 공통적인 것과 갈등관계에 있습니다. 커먼즈가 공사 구분 혹은 대립을 넘어서며 또 마땅히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적인 것은, 비록 제한되고 훼손된 모습일지언정 ― “둘 또는 그 이상의 것에 두루 통하고 관계된 것”을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 결코 완전히 소거될 수는 없는 공통적인 것이 사적인 것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형태입니다. 그런 한에서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에 대해 단순히 거부나 외면의 태도로 일관할 수 없습니다. 공적인 것의 ‘합리적 핵심’인 공통적인 것을 만회하고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커먼즈 운동의 중요한 한 가지 벡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공적인 것 혹은 공공성을 재구성하는 계기로 보려는 활동가 및 연구자들의 노력은 이런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커먼즈가 공공성의 새로운 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의의 기저에는, 그 새로운 구성이 공공성의 양대 축인 두 가지 공 가운데 공통적인 것의 힘과 가치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커먼즈 운동은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함으로써 두 공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디어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는 사고뿐 아니라 반대로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한다는 사고 또한 작동하고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적어도 일정 규모 이상에서 현실성을 갖기 위해서는, 공적인 것의 수준으로 상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거나 공적인 것의 형태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인 것이지요. 다시 말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는 분명 커먼즈의 “구성적 힘”(홍덕화, 「커먼즈로 전환을 상상하기」, 2022)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 구성적 힘은 공적인 것에 의해 매개되지 않고는 제 발로 서서 확장할 수 없다는 진단이기도 한 것입니다. 커먼즈가 좁은 범위와 한계에서만 작동하는 ‘공동체 커먼즈(community commons)’를 넘어서 체제전환 ― 언젠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혁명’이라는 말의 부드러운 대용품 ― 이라는 목표를 향하기 위해서는 ‘공적 커먼즈(public commons)’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런 진단의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새삼 커먼즈와 공공성을 함께 논하는 것은, 커먼즈에 의한 공적인 것의 재구성이라는 아이디어에 분명 ‘현실적’ 설득력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성 자체가 곧바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는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적인 것을 공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과 공통적인 것을 공적인 것 쪽으로 견인하는 일. 이 두 방향의 운동 사이에는, 단순히 “둘 중 하나에 치우칠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식의 절충으로는 해결을 볼 수 없는 긴장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저 긴장이 공공성을 이루는 두 가지 공 사이의 본질적 긴장에서 비롯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꽤 긴 이야기를 거쳐 우리는 다시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관계라는 문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공적인 것과 공통적인 것의 긴장이 해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거나,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오랜 역사적 과정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논의해야 하는 것은 저 긴장을 당장 제거하기 위한 방안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고 다룰 것인가, 저 긴장을 적절히 ― 인식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실천적 관점에서도 적절하다는 의미에서 ― 사고할 수 있도록 해줄 양자의 관계에 대한 관점은 무엇인가일 것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아직 시론 단계에 있는, 그래서 성숙과 정교화를 위해서는 많은 이론적 커머닝이 필요한 개념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이 그것입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

앞서 언급했듯 여러 활동가·연구자들이 커먼즈에 의한 공공성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으며 홍덕화 선생님은 이를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라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 표현을 직접 고안하셨는지 다른 맥락에서 가져오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저에게 흥미로운 것은 ‘구성적 힘’이 헌법학, 법철학, 정치학에서 통상 제헌권력 혹은 헌법제정권력으로 번역되는 ‘Pouvoir Constituant/Constituent Power’의 번역어로 새겨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의미를 갖는데, 제헌권력이란 바로 국가와 헌법으로 표상되는 공적 질서를 창출하고 정초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재구성을 가능케 하는 커먼즈의 ‘구성적 힘’이 법학과 정치학에서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으로 논의되어 온 바와 내용상 본질적 연관을 보인다는 것, 바로 여기에 커먼즈의 제헌권력이라는 발상의 출발점이 있습니다.

커먼즈를 제헌 혹은 헌법의 문제와 연결한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커먼즈 운동가이자 이론가인 우고 마테이(Ugo Mattei)는 한 공저 논문에서, 자신이 직접 참여한 이탈리아 커먼즈 운동을 주요 분석사례로 삼아 ‘제헌권력으로서의 사회운동’이라는 테제를 제출한 바 있습니다.(“Social Movements as Constituent Power: The Italian Struggle for the Commons”, 2013) 국내에서는 정영신 선생님이 우고 마테이의 논문 등을 주요 참조점으로 해서 커먼즈 정치의 제헌적 성격을 언급하는 논문을 쓰신 바 있습니다.(「이탈리아의 민법개정운동과 커먼즈 규약 그리고 커먼즈의 정치」, 2022) 저의 제안에 이런 논의와 다른 점이 있다면, 비단 커먼즈 운동·정치만이 아니라 커먼즈 혹은 공통적인 것 자체의 제헌적 역능을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제헌권력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등장했으며 시에예스(E. J. Sieyès)가 처음 명시적인 형태로 사용한 이래 슈미트, 아렌트, 네그리 등의 재해석을 거치면서 그 성격과 본질을 두고 많은 논의와 논쟁이 있었던 헌법학·법철학·정치철학의 근본개념이자 한계개념입니다. 이 자리에서 세부적 논점과 맥락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또 우리의 관심사도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그것과 커먼즈-공통적인 것 사이에 그려질 수 있는 연결고리입니다.

제헌권력은 말 그대로 헌법을 만드는 권력이며 헌법적 규범의 원천입니다. 헌법은 모든 실정법의 기초이자 국가의 기본적 짜임새를 규정하므로 제헌권력은 또한 국가를 정초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국가가 공적인 것의 종합이자 최종심급인 한에서, 국가를 정초한다는 것은 곧 공적 영역, 공적 가치, 공적 체계 등 온갖 공적인 것의 질서를 조직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커먼즈의 제헌권력을 말한다는 것은 커먼즈가 공적 가치·질서·영역·공간·재화 등을 재정의하고 재구성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역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헌권력의 상대개념은 ‘헌법적으로 조직된 권력(Pouvoir Constitué/Constituted Power)’인바, 말하자면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공통적인 것이 제헌권력이라면 공적인 것은 그 제헌권력에 의해 조직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것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근거하며 그것의 표현형식입니다. 그러나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통적인 것의 제헌권력에 의한 재구성과 재정의에 열려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합니다.(헌법개정권력/개헌권력은 제헌권력의 제한적 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커먼즈의 제헌권력은 아직 더 다듬어야 하는 아이디어인데다 불가피하게 상당한 추상성을 동반합니다.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논의를 위해서라면, 이 문제를, 커먼즈를 헌법적 원리와 가치로 사고하고 주장하는 일의 (특히 오늘의 주제인 공공성과 관련한) 유효성과 의의라는 문제로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현재의 헌정질서를 가장 큰 틀에서 규정하는 것은 사적 소유의 논리입니다. 대한민국이 공화국(res publica=공적인 것)이라는 제1조 1항의 규정이 지금까지 저 사적 소유의 지배와 사유화의 진척을 막는 데 얼마나 무력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커먼즈를, 즉 공적인 것이 아닌 공통적인 것(res communis)을 헌법에 틈입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사화(私化, privatization)에 맞서는 보다 강한 힘과 논리를 헌법 자체에서 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공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개개의 투쟁에 개별적으로 커먼즈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을 넘어 공공성을 바라보는 일반적이고 헌법적인 틀로 커먼즈를 전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요컨대,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커먼즈 운동과 정치가 결국 계급투쟁의 성격일 띨 수밖에 없다면, 헌법 자체를 계급투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 이 투쟁을 수행하는 한 가지 유력한 길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바다 약탈을 막을 ‘블루커먼즈’ 어젠다

 



바다는 지표면의 70%를 덮고 있고 우리가 숨 쉬는 산소의 절반을 제공할지라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특히 육지로 둘러싸인 나라들이나 지역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시장/국가 시스템이 자연계의 이 영역을 파괴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형 트롤선들이 어장에서 과잉어획을 하여 많은 어장들을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가고 있으며, 광산기업들은 석유, 가스, 니켈, 코발트, 망간 및 희토류 광물들을 찾아서 해저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커먼즈의 관점에서 우리는 이 끔직한 시장 인클로저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인가?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8)에서 소아스런던대학교(SOAS University of London)에 재직하는 경제학자이자 커먼즈 연구자인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은 몇 가지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책들을 제안한다. 스탠딩은 『블루커먼즈—바다경제를 변형하기』(The Blue Commons: Transforming the Economy of the Sea)를 막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시장/국가가 바다를 무책임하고 생명을 파괴하는 식으로 취급하는 것을 커머닝이 어떻게 억제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방대한 양의 복잡한 해양역사들, 국제법 및 생태과학을 종합적으로 다룬다.

스탠딩은 바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을 ‘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자산소득자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972 참조.))의 예측 가능한 결과로 본다. 이것은 광범위한 재산권, 금융화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산업화된 자원의 착취에 특혜를 주는 경제시스템이다. 정부와 함께 하는 기업측은 이 시스템이 행하는 ‘빼내서 달아나는’ 관행을 ‘푸른성장’(blue growth)이라 부르길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시장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업들은 조직적으로 연안어업 공동체를 ‘탈커먼즈화’하려고 하고, 심해 생명체들에 대한 특허권을 주장하려고 하며, 해저 광상(鑛床)을 수탈하려고 시도한다. 일례로 남아프리카 기업인 드비어스 그룹(De Beers Group)은 다이아몬드를 찾아서 해저를 긁어내기 위하여 전문화된 선박들로 이루어진 선단을 이용하는데 이것은 해양생태계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해양생태계를 붕괴시킨다.

스탠딩은 불법적인 어업관행에서의 국가와 기업들 간의 결탁 그리고 유럽 연합의 파괴적인 공동어업정책 및 브렉시트에 관하여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장들을 제공한다. 그는 어떻게 양식기술이 건설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를, 그러나 기업들의 손에 맡겨지면 어떻게 양식어업이 블루커먼즈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보다 블루커먼즈를 상품화하고 사유화하는지를 설명한다.

이 책에서 스탠딩이 하고 있는 가장 큰 기여는 그가 커먼즈에 바탕을 둔 해결책들—어장과 연안 공동체에게 권한을 주기, 새로운 합법적인 원칙들을 제정하기 그리고 커머너들을 이롭게 할 신탁자금을 도입하기—을 제안한 것일 것이다.

스탠딩은 “협동주의와 페미니즘의 원칙에 바탕을 둔, 고무적인 특징을 지닌 몇몇 새로운 조직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은 “국가, 금융,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에 포섭될 위험들을 인식”하고 있고 따라서 비열하고 약탈을 일삼는 정책들에 씌운 진보적인 겉면에 속지 않을 것이다.

스탠딩은 연안 공동체 소속 어부들을 위한 ‘생계권’ 같은, 기업들의 어업권보다 우선해야 하며 널리 시행되어야 할 많은 법적인 원칙들을 거론한다. 또한 그러한 공동체들 사이에서 존중되어야 할 ‘서식지 권리,’ ‘사회적 기억에 대한 권리’ 그리고 ‘세대 간 동등 지분’ 원칙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스탠딩이 주장하는 블루커먼즈 어젠다는 또한 ‘커먼즈 자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기업이 항구를 사용하고, 가스를 추출하며, 어장에 들어오고, ‘혼획'(생태적 위해를 야기하는 해양 종들을 의도치 않게 잡는 것)을 하는 일련의 활동들에 세금을 부과하자는 발상이다.

과세로 거둬들인 돈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이해당사자 신탁으로 관리되는 커먼즈 펀드로 투입될 것이다. 펀드는 모든 사람에게 지불되는 정기적 배당금을 산출할 것인데, 이는 <알래스카 퍼머넌트 펀드>(Alaska Permanent Fund)가 주 소유의 땅에서 시추가 이루어지는 경우 거기서 발생하는 수입을 모두가 지분을 가지는 자금으로 사용하여 알래스카에 사는 모든 가구에게 돌아가는 배당금을 발생시키는 경우와 매우 유사하다.

스탠딩은 말한다. “회사가 커머너들로서 우리 모두에게 속하는 땅이나 해저를 사용하고 그 과정에서 수익을 낸다면 그때 커머너들로서 우리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이런 취지에서 스탠딩은 엄청나게 큰 유람선들은 정상운영만 해도 높은 세금을 부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유람선들은 항구에 정박할 때 바다로 엄청난 양의 오염물질과 디젤기관의 유해배출물질을 방출한다. 스탠딩은 거대한 연안 항구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커머너들에게 마찬가지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485개의 대규모 항구가 있고 우리의 항구들에서 놀랄 만큼의 돈을 버는 기업들과 기업체인들이 그 항구들을 모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우리의 공통의 부에 대한 이런 방식의 약탈이 바다에서는 통상적인 절차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 여왕은 해저의 상당부분을 이른바 재생 가능한 풍력발전 지역용으로 다국적 기업들에게 경매로 팔았다. 이는 앞으로 계속해서 왕실사람들에게 수십 억 파운드가 흘러들어오는 것을 보증해줄 것이다.” 하지만 여왕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해저는 왕실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커먼즈의 것이다. 나는 ‘멈춰’라고 말하고 보상을 요구하고자 한다.”

블루커먼즈에 관하여 가이 스탠딩과 한 전체 인터뷰를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전유될 수 없는 것을 제도화하기

 


  • 저자  :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Tran. Matthew MacLellan 
  • 원문 :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의 III부 마지막 장 “Post-Script on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대목을 비교적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의 핵심 특징들을 10개 단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common’의 형용사 형태(‘공통적인’)보다 명사 형태(‘공통적인 것’)의 중요성을 책 전체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주장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심지어 책의 제목―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ruy―에서 관사를 빼고 쓰기까지 했다. 우리의 목적은 공통적인 것을 사물이나 실체, 혹은 (사물에 속하는) 성질로 보지 않고 원리로 보는 우리의 관점을 아예 처음부터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원리란 출발 시에 존재해서 그 이후에 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처음 사용되고 나면 쇠잔해지다 사라지는 ‘시초’도 아니고,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단순한 ’출발점‘도 아니다. 원리란 진정한 시작,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작’, 즉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끄는 시작이다.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는 ‘시작’과 ‘명령’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아르케는 그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파생되는 원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후의 모든 정치활동을 명령하고 지휘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원리이다. 만일 이 용어의 논리적 의미를 더 좋아한다면, 원리란 합리적 명제나 입증의 전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에 부여했던 의미가 이에 부합한다. 9개의 정치적 명제― 본 블로그의 글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참조―는 미래의 합리성을 이끌도록 계획된 전제들이며 더 나아가 공통적인 것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도록 언표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원리들로서 제시되었다.

 

  1.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의 다른 원리들과는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정치적 원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정치적 원리이다. ‘정치’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시민들이 ‘정당한 것’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활동과 이 집단적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의사]결정 및 행동이다. 따라서 정치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활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전문직이나 경력도 아니다. 정치는 지위나 직업을 막론하고 공적 숙의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욕망하는 사람들 모두의 일이다. 정치는 공적 숙의와 ‘단어들과 아이디어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과학적 증명이나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의 꿈이 아직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 진실에 기반을 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기본적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숙의와 민중의 판단력의 발휘 없이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적 정치’는 정치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과학을 통한 정치의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활동에의 참여를 정치적 의무의 토대로 삼는다. 공동-의무로서의 공동-활동이다. 우리는 ‘common’이라는 용어의 뿌리에 놓여있는 ‘munus’라는 용어가 의무와 활동을 모두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소속―민족, 국민, 인류 등―도 그 자체로 정치적 의무의 기반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의무는 신성한 종교적 특징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 어떤 초월적 원천도, 활동 외부의 그 어떤 권위도 거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치적 의무는 전적으로 공동의 행동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신들의 활동을 다스리는 규칙들을 집단적으로 다듬어낸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실천적 헌신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이 활동에의 공동참여자들과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

 

  1. 그렇기에 공통적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욕망이나 의지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은 모든 형태의 대상화에 저항한다. 심지어 공통적인 것이 어떤 대상이 욕망함직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성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종종 ‘공동선’(common good)이라고 불리는 것과 혼동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정치철학 담론에서 공동선은 함께 추구하고 함께 규정하는 바의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공동선은 그것이 모든 형태의 집단적 숙의가 달성하려고 하는 공동의 편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종종 정당한 것과 혼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은 탁월하게 욕망함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공동선’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은 항상 공동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대상으로서의 ‘공동선’의 추구를 이끄는 원리이다. 공동선의 진정한 추구에는 공동의 숙의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이 항상 ‘공동선’에 선행한다.

 

  1. 공통적인 것이 대상이 아닌 한, 그것은 사물(res)도 아니고 사물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도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이러저런 자연적 혹은 내재적 속성 덕분에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빛이나 공기가 ‘커먼즈(공통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적인 것 되기’(being the common)와 같지 않다. 또한 공통적인 것은 법적 커먼즈(공통재)의 다양한 형태들―이는 물질적일 수도 있고(대양, 여러 국가에 걸쳐 흐르는 강,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지정된 곳들) 비물질적일 수도 있다(아이디어들, 과학적 정보, 발견, 공적 도메인에서의 지적 생산물 등)―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법적 범주인 ‘공통적 사물’(res communis)은 공통적 대상들을 활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리해내게 마련이다. 공통적 사물이 진정으로 공통적인 되는 것은 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은 내버려야 한다.

 

  1. 다른 한편, 우리는 ‘나눔’(sharing)이나 ‘한데 모으기’(pooling)를 통해 공통적이 된 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커먼즈를 말할 수도 있다. 본래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집단적 실천만이 어떤 사물 혹은 일단의 사물들의 공통적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그 커먼즈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활동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제도화하는 활동의 유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물론 공통적 대상/자원의 자연적 속성들이 그런 대상/자원을 공통적으로 만드는 활동의 유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바로 이 활동이 주어진 대상을 ‘공동화하고’ 그렇게 공동화된 상태의 유지에 관여되는 특수한 규칙들의 산출을 통해 그 대상을 제도적 공간에 각인한다.

 

  1.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거버넌스의 문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항상 제도적 행동으로부터 생성된다. 공통적인 것이 원리라는 사실만으로 이 원리가 현실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공통적인 것의 원리가 제도화될 필요가 없고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면, 모든 커먼즈는 이미 공통적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특정의 작동 규칙들을 정하는 실천들에 의해서만 제도화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제도화는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는 시초적 행동을 넘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애초에 제도의 규칙들을 수립한 바로 그 실천들이 그 규칙들을 변경하면서 장기적으로 제도화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도화하는 프락시스’(instituent praxis))라고 부른 것이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는 결정의 힘으로부터 분리된 행정력이라는 의미의 ‘관리’의 한 형태가 아니다. ‘관리’라는 환상은 사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만일 공통적인 것이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들의 함수라면, 그것이 가진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는 사회적 공간을 가로지르는 실제적인 사회적 갈등들로부터 분리된 관리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와 연결되어 있다. ‘거버넌스’는 ‘관리’와는 달리 사회적 갈등을 포용하며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는 규칙들에 대한 집단적 결정을 통해 그 갈등을 다룬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란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수립하는 집단들이 커먼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공적인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커먼즈는 생산과 교환의 영역 전체를 사적 이익집단들의 싸움이나 국가독점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시장과 국가 사이의 ‘제3의 길’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사적인 것 및 공적인 것과 함께 병존하는 경제의 ‘제3부문’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공통적인 것의 우선성은 사유재산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시장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시장의 공통적인 것에의 종속을 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소유권과 시장의 제한을 함축한다. 상업적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특정 대상들을 단순히 빼내어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보존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소유자의 이기적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남용권을 폐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 만일 공통적인 것이 정치 영역과 사회 영역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정치 원리라면, 그리고 커먼즈들이 특정의 대상들(그 유형이야 어떻든)과 연관된 특정의 실천들에 의해 열리는 제도적 공간들이라면, 사회적 커먼즈만이 아니라 정치적 커먼즈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정치적 커먼즈는 ‘공적 일들’에 모든 수준에서, 즉 지역에서 일국을 거쳐 전지구적 수준까지 관여한다. 사회경제적 영역은 사회적 활동이 연합의 논리에 따라 확대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 활동의 기준에 의해서만 조직된다. 정치적 영역은 마찬가지로 연합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는 여러 수준들을 통해 엄밀하게 영토적인 기반 위에서 조직된다. 지방자치는 정치 영역에서 기본적인 형태의 자치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에서의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이다. 일원적이고 중앙집중적이며 주권의 원리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국민국가 모델은 이 논리에 의해 엄밀하게 금지된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렇듯 이중의 연합에 기반을 둔다. ① 사회전문적인(socio-professional) 기반에 도태를 둔 사회경제적 커먼즈들의 연합과 ② 영토적 기반에 토대를 둔 정치적 커먼즈들의 연합이다. 이 두 영역이 함께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를 이룬다.

 

  1.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에는 전유될 수 없는 것의 규범이 소중하게 담겨 있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의 근본적 목적은 이 규범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변형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전유(Unappropriation)는 전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유되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공동의 사용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전유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전유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화하는 실천의 몫이다. 전유될 수 없는 것이란 제도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유불가능성 그 자체에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라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려는 의지는 이 전유불가능성이 정의상 전유 행동에 관여하는 하나 혹은 다수의 주체들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집단적 주체가 사실상 공통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행동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지 이 행동에 선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두 종류의 전유―어떤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귀속으로서의 전유’와 어떤 것이 특정의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특히 사회적 욕구의 충족)―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은 특정 형태의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를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전유로부터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목적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식량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전유하는 것) ‘전유’를 금지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재산을 창출하지 않고, 커먼즈의 임자인 양 커먼즈를 처분하는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사용을 규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공통의 재화’(common goods)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계속되는 투쟁을 위한 단합의 구호로서 전략적인 효용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말이다. ‘공통의 재화’란 없다. 오직 제도화해야 할 커먼즈, 혹은 공통적이 되어야 하는 커먼즈만 있다.(Th ere are no “common goods”: there are only commons to be institutionalized, or commons to be made common.)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앞서 올린 글(([옮긴이] 현재는 원문의 링크가 깨져있다.))에서 나는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도와 라발의 입장을 요약했다. 이제 나는 공통적인 것―그들의 사유가 그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인도한다―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9개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글을 압축하고 다수의 주요 참고문헌을 생략해야했으나 그들 제안의 골수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명제 1 :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19세기 사회주의적 연합주의, 20세기 노동자평의회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단순히 장인(匠人)의 맥락이나 산업현장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어떤 포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어떤 집단적 이탈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토지와 자본 및 지적 재산권과 연관된 소유권을 재고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 사회변형을 위한 법적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자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사회의 공통적 생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자치제도의 역할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상이한 사회경제적 영역들, 공적 또는 사적인 영역들, 혹은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구분이 철폐될 것이라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공적 숙의가 어떤 하나의 사회적·전문적 범주에 속하는 이해집단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으려면, 생산 교환의 영역이 커먼즈의 자치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직돼야 한다. 또한 각각의 커먼즈는 그 활동의 모든 ‘외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커먼즈의 거버넌스가 그 활동과 관련을 가지는 사용자들, 시민들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영역은 공통의 의사결정 능력을 단련하는 학교가 된다.

명제 2 : 소유권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권을 가동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절합은 로마법에서 연원하는 도미니움(배타적인 사적 소유)과 임페리움(주권의 포괄적 권력)의 이중원리로 구성되어왔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이러한 이중적 절대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전통적 재산권은 재산에 대한 완전히 자유로운 사용을 소유자들에게 허락하며 그리하여 소유자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용자는 공통적 사용을 관장하는 규칙을 공동생산하는 식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물질적 사물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 소유모델에서 벗어나 점점 더―재화의 판매가 아닌―써비스의 제공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써비스 사용자들은 점점 더 자산 대신 접근권을 구매하는데, 접근권은 새로운 공동사용 모델을, 권리유형의 다각화(사용권, 임대수익권, 상이한 권리들에 대한 구매권과 판매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로 향해가고 있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계속 사용하는 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를 계속해서 소유하며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사용권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는 상위기관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허한 권리이다. 진정으로 공통적이려면 사용에 대한 결정이 집단적 심의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래서 가령 한 뙈기의 땅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단순히 공유된 사물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공동활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함하기 위하여 재산권을 확장한 형태의 소유권을 개발하는 대신, 소유권에 반하여 가동될 수 있는 사용권이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리는 국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공동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위임될 수 있다.

명제 3 : 공통적인 것이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일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 언제나 일을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때로는 미학적 차원을 가지는, 공유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은 공동체나 동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가 노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단순히 소외나 자발적 굴종, 경제적 제약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일이 개인들이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사회화하는, 타인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활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모아놓음으로써 진정으로 협력적인 현장의 자연발생적 출현을 어떤 식으로든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강제된 협력을 실행한다. 노동자를 단순직공으로 축소시키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적극적 동원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등한시된 현장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우리 활동의 핵심에 다시 놓여야한다. 노동자의 과업의 질을 ‘고양하거나’ 현장의 조건에 대해 이따금씩 ‘조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칙과 결정을 다듬어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협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기업은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민주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

명제 4: 공통의 기업을 수립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노동의 해방은 기업이 경영독재, 주주독재가 지배하는 섬이기를 그치고 민주적 사회의 기관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마크 샹니예(Marc Sagnier)의 유명한 말처럼, “기업에 군주제가 존재하는 한 사회에 공화국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현장민주주의도 자본주의가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로 보는 것을 통제하는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통제가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국가통제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고꾸라뜨린 장애물이다. 소위 사회적 혹은 집단적 소유는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비효율적인 경영형태 말고는 실행할 수 없는 국가소유로 환원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경영자를 선택하고 회사가 취할 방향을 투표에 부치며―회사의 자본이 그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회사의 자본을 그들의 결정에 종속시키는 흥미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대안적 모델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음에도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영기업 사이에 줄곧 갇혀있던 사소한 대안이었다. 어떻든 현장에 공통적인 것을 자율의 섬으로서 제도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적인 것 안에 경제를 재통합하고 민주적인 현장거버넌스 내에 관점의 복수성(노동자, 소비자)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개별적 소비자의 결정의 자유를―특히 지역 수준에서의―집단적 결정의 틀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이로써 오늘날처럼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명제 5 : 경제영역 내의 연대가 공통적인 것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제3부문 또는 비수익경제가 때로 대안 경제로 혹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3부문은 그것을 정의하는 용어와 실제 모두 나라마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는 제도를 보통 포함한다. 제3부문은 특정 직업이나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지원을 제공하는 조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선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다양한 집합체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특히 이 집합체의 활동이 자본주의기업과 국가기관 양자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조합부문은 대안경제를 촉진하기는커녕,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저비용 하도급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고용주는 이 수가 정체 혹은 감소되어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총익의 정의를 국가가 독점하고 가치의 정의를 시장이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촌락·마을·이웃 수준에서의 새로운 연대를 포함하는,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설교한, 일종의 지역에 기반을 둔 공생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그 자체만으로 창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명제6 : 공통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옮긴이] 사회민주주의 :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그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를 수립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정치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재건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이제 국가가 다른 무엇보다 더 복지의 범위를 줄이고 복지를 경쟁력이라는 제약 아래 두려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사회(복지)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인 공통적인 것을 부정한다. 기업 안에서의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노동조직 형태의 가장 가혹한 규범에 복종하는 대가로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재분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호혜와 연대의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다.

명제 7 : 공공써비스가 공통적인 것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19세기 조합사회주의와 20세기 노동자평의회는 사회주의가 취해야하는 제도형태가 국가관료에 의한 경제경영과는 달라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공공써비스의 미래 규모를 예측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공공써비스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배에 복무하는 ‘국가장치’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에 완전히 복무하는 제도로 보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공공써비스를 공통적 사용권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더 이상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행정체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집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써비스 행정은 국가의, 노동자의 그리고 시민사용자의 대표가 포함된 기관에 위임돼야 한다. 써비스는 지역적으로 시행되어야 하지만 국가는 헌법이나 기타 기본법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결책은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도 지역주의·지방주의의 반동적 활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명제 8 : 전지구적 커먼즈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다양한 형태·크기를 가지는 ‘커먼즈’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보존한다는 조건하에서 공통적인 것을 지역 커먼즈부터 전지구적 커먼즈로 이어지는 전체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각의 커먼즈가 없으면 의미 있는 공통의무가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으로 공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커먼즈의 자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커먼즈들의 연계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유형의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몇몇 해결책은 ‘반인도적 범죄’나 ‘세계유산’이 ‘인류’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보고, 인권을 새로운 세계의 법적 질서의 기초로 긍정하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가 무력을 계속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체계의 발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협력의 원리나 사회정의의 원리가 아닌 경쟁, 약탈적 전략, 호전적 논리의 규범에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관행이 어떻게 세법·상법·고용법 영역에서 ‘법률쇼핑’(가장 유리한 조건을 위한 쇼핑)을 낳았는지를 주목한다. 이 관행은 법 자체를 자본주의적 경쟁의 영역이자 상업의 대상으로 만든다. 건강에 관한, 문화에 관한, 물에의 접근에 관한, 오염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강요된 논리는 자유교환의 논리이며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논리이다. 자본에 의하여 그리고 자본을 위하여 만들어진, 지구화되었으며 지구화를 행하고 있는 전체 법률장치가 ‘지구자본’(cosmocapital) 제도를 생산하고자 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국제법의 본격적인 사유화이다.

또 다른 담론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촉진하고자 고전경제학적 수단을 사용하려한다. 1990년대 초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마부브 울 하크(Mahbub ul Haq),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같은 인물에 영향받은 UN은 기대수명, 문해력 같은 기준이 포함되도록 발전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장했다. ‘좋은 전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od governance)’라는 생각이 등장하여 ‘전지구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의 생산과 연결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UN개발프로그램(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 경제학자들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분류했다. 전지구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과다사용된) 재화(오존증·기후), 인간이 만든 (과소사용된) 전지구적 공공재(과학지식·인터넷), 통합된 전지구적 정책이 낳은 재화(평화·건강·안정성). 이러한 재화의 정의가 가지는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의가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재화의 생산을 보장하는가이다. 전지구적 국가가 보장하는 것일까?

UNDP가 제시하는 한 가지 대답은 전지구적 CO2 배출거래 사례처럼 필요할 경우 시장메커니즘, 소유권 강화를 통해 사적 행위자들이 저 재화에 책임지도록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결과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모든 실질적 도전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자본주의는 사실 정부·자선단체·NGO가 자본주의에 처분을 맡기는 모든 ‘외부성’에서 이윤을 끌어내야 한다.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 정치적 안정, 도시기반시설, ‘잘 기능하는’ 대학체계, 심지어 저임금노동자를 위한 자선지원, 범죄자를 위한 감옥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지구적 공공재를 방어하라는 요구가 반드시 물화된 공통재 경제영역으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공통재에 대한 장악을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진보적 정치투쟁은 공통재를 기본권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재화만이 아닌 써비스와 제도에 대한 접근을 공통재에 포함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탈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해온 상황에서 지구화 반대론자 같은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시민에 기반을 둔 복지권이었던 것을 보편적 인권으로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옛 복지국가의 보편주의적 폭넓음을 전지구적 커먼즈의 문제틀에 접목하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허나 심히 인위적이라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움직임은 낡은 서구사회 모델을 발본적으로 변화한 맥락에 이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하는 현존국가들이 전지구적 커먼즈에 힘을 보탠다거나 공통재를 배분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 시민권은 쟁취할 가치가 있다. 시민권은 근대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핵심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만 들먹이는 사회적 시민, 써비스 소비자여서는 안 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시민으로서나 능동적인 시민, 공통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공동생산하게 해주는 제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시민이어야 한다.

어떤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가 질서 잡힌 다원주의의 그것일 것 같지는 않다. 미래는 알랭 수피오(Alain Supiot)가 거론한 일종의 재봉건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줄어들고 억압적 기능이 커지며 국민국가가 지역국가로 분열될지 모르는, 다면적 분열의 논리를 따라 지역권력과 초국가권력이 증식하는 재봉건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낡은 베스트팔렌 국민국가 체계가 어디서나 성장할 위험이 있는 광범위한 반동적·민족주의적·외국인혐오적 운동에 삼켜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중앙집권적인 국가조직 방식과 이와 연관된 종속화의 형태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일 것이다. 그 다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조직이 전지구적 커먼즈의 공동 생산에 제도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명제 9 : 커먼즈들의 연합(a federation of commons)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일한 정치적 원리는 연합원리이다. 연합은 하나의 꼬뮌이나 몇몇 꼬뮌 혹은 꼬뮌집단이 하나의 목적이나 몇몇 목적을 위해 상호 책임지는 관계를 맺는 계약이나 협약 혹은 협정이다. 그 본질적 특징은 국가가 행사하는 종류의 주권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어떤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일체의 종속을 배제하는 상호 책임이다. 

여러 상이한 연합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떤 특정 모델이 사회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유되는 사용 관행에 적합한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맑스주의 전통보다는 프루동 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제공한다. 맑스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프루동은 이중적인 연합모델―한편으로는 생산단위의 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꼬뮌 단위의 연합―을 설파했다.(([옮긴이] 생산단위는 헌재로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속하는 것이고 꼬뮌은 지역공동체 혹은 커먼즈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델은 꼬뮌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장의 산업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루동이 보기에 이 두 유형의 공통적인 것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유된 원리는 계약조항들에 간직된 상호성과 상호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상호성의 이러한 확장은 법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프루동의 기획과 조화를 이루더라도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정치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함축했다. 더 적합한 통합원리는 사회경제적 영역과 공적·정치적 영역의 거버넌스에 공히 적합한 정치원리인 공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여러 커먼즈들의 연계와 관련해서는, 심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피라미드적 위계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나 초국가기관도 그저 다른 기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특권이나 우선권이 없을 것이다. 

더 낮은 수준은 공유된 활동에 기초를 두고서 수평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높은 수준을 통해 작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커먼즈(생산·소비·종자은행 등)는 어떤 영토논리와도 무관하게 구성될 것이며, 그 구성목적에 해당하는 활동을 책임져야할 필요에 따라서만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컨대 강 커먼즈(a river common)는 몇몇 지역경계나 심지어는 국가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치적 커먼즈는 전지구적 수준까지 규모가 확장되는 영토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승논리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에 대한 이러한 제안에 조응할 수 있는 시민권의 유형은 무엇일까? 국민국가 모델을 따라 사고된 어떤 ‘전지구적 시민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복수적(複數的)이고 탈중심화된 시민권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시민권이 영토적 범위가 더 확대될수록 그 정치적 밀도를 더 소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일종의 공허한 세계시민주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일치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 ‘상업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시민권을 개발해야 한다. 비국가적·초국가적 시민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모든 소속관계로부터, 소속에 들러붙은 권리로부터 분리된 시민권은 형식적 권리의 승인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하여, 공유된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로 현장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단의 유사한 제안은 여기(([옮긴이] 현재는 원문 링크의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를 참조하라.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다도와 라발의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하라.




퍼더필드 — 예술과 게임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다

 



공상적이지만 거의 현실적인 시나리오가 여기 있다. 여러분의 지역사회 공원에 있는 꿀벌들, 다람쥐들, 거위들, 곤충들, 나무들 등등의 종(種)들이 인간의 침범과 학대를 충분히 겪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들고 일어나 인간이 가진 것과 동일한 권리를 요구할 작정이다. 종들 간의 일련의 회합을 통해 지역 생태계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번성을 보장하는 협정/협약이 타결된다.

이 시나리오는 <퍼더필드>(Furtherfield, 런던에 기반을 둔 예술공동체)가 빅토리아 시대 핀즈베리 파크의 일부 지역에 대한 파수의 일환으로서 고안한 ‘라이브 액션 롤플레잉’(live action role-playing, LARP)게임이다. 앞으로 3년에 걸쳐 <퍼더필드>는 프로젝트의 이름인 <핀즈베리 파크 2025 협정/협약>(The Treaty of Finsbury Park 2025)을 진행해나갈 때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각 일곱 가지 종들의 역할을 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풍뎅이와 다람쥐 종의 대표자들로서 <종(種)간 회의>에 참석하도록 함으로써 LARP게임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이 “놀이를 통해 인간이 아닌 생명체들에 공감하는 경로들”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것이다. 서로 다른 종들이 소통하도록 돕는 직감 다이얼(Sentience Dial)도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이 과정이 실제로 핀즈베리 파크를 더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진기한 애니미즘 경험은 <퍼더필드>가 지난 25년 동안 주최해온 프로젝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 이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예술, 디지털 기술 및 사회적 행동을 일정한 창조적인 방식으로 섞는다. 최근 『커머닝의 프런티어』(Frontiers of Commoning) 팟캐스트(에피소드 #24)에서 나는 세상에 대해 새로이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참여예술에 대한 <퍼더필드>의 독특한 접근법에 관하여 루스 캐틀로우(Ruth Catlow)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예술가, 큐레이터이자 <퍼더필드>의 공동대표인 캐틀로우는 1996년에 <퍼더필드>를 시작한 이래로 많은 예술 프로젝트들을 이끌어 온 비전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지역적, 일국적 및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파트너들과의, 특히나 평범한 사람들과의 협동작업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퍼더필드>의 많은 예술작업과 테크놀로지 기획들의 핵심은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하려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위해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경우 예술이 하는 역할을 존중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퍼더필드>의 프로젝트들 대부분은 런던 소재 핀즈베리 파크에 있는 녹지 공간 및 미술관에서 그리고 예술가들•기술자들•활동가들을 불러 모으는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열린다. 지역 공무원들이 <퍼더필드>의 예술 프로젝트들을 펼칠 참여적인 무대로서 공원을 사용하도록 <퍼더필드>측에 청했다. 전통주의자들은 이 단체를 예술의 센터라고 부르겠지만 <퍼더필드>측은 자신들의 활동이 외부 지향적이고 네트워크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재미있게도 ‘디-센터’(de-center, 탈-중심)라고 부른다.

<퍼더필드>는 흥미를 유발시키며 장난기가 다분한 기발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예술적 실험들의 주최자라고 자임한다. 이 탐구적 실험들은 오픈소스 테크놀로지와 철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퍼더필드> 자신들의 말로는) “현존하는 권력들을 파열시키고 민주화”하며 “지형을 새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일례로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시위들이 무수히 일어나 미국과 전 세계 도시를 흔들고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노예소유자 사업가들과 군장성들이 공원에 청동 조각상으로 세워지는 영광을 입은 이유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퍼더필드>는 공원에 있는 받침대 위에 지금 있는 것 대신에 누가 또는 무엇이 놓여서 기념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공개 토론을 열기로 결정했다.

예술가들은 ‘시민 공원 받침대’ 프로젝트(The People’s Park Plinth project)측으로부터 공원에서 기념하게 될 새로운 사람들이나 물건을 제안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의 매개체는 스마트폰이었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나무나 동상 받침대에 부착된 QR코드를 스캔하면 공원 내의 해당 장소에 관한 영상을 즉각 볼 수 있었다. 사실상, 이 프로젝트가 스스로를 설명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공원 전체를, 여러분이 여러분의 공원에 원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는, 디지털 예술작품을 위한 공공 플랫폼으로” 바꾸었다.

누구나 제안된 예술품 몇 개에 투표할 수 있었다. 1위를 차지한 작품—에이샤 탄 존스(Ayesha Tan Jones)가 제작한 <나무 이야기에 바탕을 두어>(Based on a Tree Story)—은 나무에 있는 QR코드를 사용하여 그곳에 사는 나무 요정의 영상을 호출하는 예술작품이었다. (“장소 특유의, 청각적 증강현실을 통해 나무의 과거•현재•미래의 이야기를 하는 디지털 나무 요정과 조우하기”)

예술작품을 선정하기 위한 공개적인 투표는 그 자체로 상당히 새로웠다. 각 참가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예술작품에 투표권을 한 번 행사하는 식이 아니었다. 그들이 원하는 만큼 많은 예술작품들 각각에 투표할 수 있는 다수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제곱 투표”(quadratic voting)라 불리는 이 방식은 어떤 프로젝트가 과반수를 얻는지를 그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떤 것에 가장 열광하는지를 보여주는 쪽이다. 이 시스템은 소수의 목소리를 무효화하는 “다수의 횡포”라는 문제점과 파당성이 강한 집단들이 방해물로 작용하는 상황을 극복할 목적으로 구상되었다.

<퍼더필드>의 더 흥미로운 역할들 중 하나는 어떻게 블록체인 소프트웨어가 네트워크 시대에 예술을 재발명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지에 관하여 실험실을 열고 예술가들과 기술전문가들 간 일련의 토론들을 주최한 것이었다. 핵심은 문화 부문이 어떻게 “피어 생산방식으로 생산된, 예술•문화•사회를 위한 탈중심화된 디지털 인프라에 이르는 길”을—특히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Decentralised Autonomous Organisations, DAOs)을 통해서—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었다.

<퍼더필드>는 “예술계에서 게이트키핑과 엘리트주의를 끝내”고 “규모에 제한이 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협력을 위한, 회복력 있고 변화도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 가지 길로서 이 깊고 근본적인 우애의 정신을 가져오기”를 원했다. <퍼더필드>는 또한 기술 부문에서 아주 많은 탈중심화된 자율조직들을 활기 띠게 하는 자유의지적인 개인주의를 넘어가기를 원했다.

<퍼더필드>의 회합들의 결과로 두 권의 책이 나왔다. 하나는 『블록체인을 다시 생각하는 예술가들』(Artists RE:thinking the Blockchain, 2017)—예술가들이 블록체인에 비판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에 관한 책—이고 다른 하나는 2022년 5월에 출간되는 『급진적인 친구들』(Radical Friends)—예술계에서의 디지털 자율조직들(DAOs)의 위험 및 이 조직들에 대안이 되는 커먼즈 기반 디지털 자율조직들에 관한 선집—이다. “<퍼더필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안적 조직들에 “DAOs with Others”를 나타내는 두문자어 ‘DAOW’라는 이름을 붙인다.”

루스 캐틀로우와 나눈 팟캐스트 대화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커먼즈 네트워크 작은 포럼 2022 상반기 프로그램 공통주의 연구모임 발표

*발표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며 구글미트 링크와 발표논문 링크는 아래와 같습니다.
구글미트 링크 : https://meet.google.com/sfn-dpxt-vtu
발표논문 링크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28918&fbclid=IwAR2en5yCqy5Gj13fPK07l2JH3PRw3Y4Ave-ARV73B0TUcIBbsM7ngFYtz3k
 



오늘날 이반 일리치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Why Ivan Illich Still Matters Toda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1년 1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내가 되풀이해서 참조하는, 보기 드물고 영향력이 큰 사상가들 중 한 명인데, 이는 그가 다른 경우라면 무시되는 핵심 주제들과 두려움 없이 씨름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근대 제도들이 가진 전체주의화하는 권력, 정신적 삶을 부패시키는 자본주의의 영향 및 더 건전하고 반란적인 문화를 구축하는 토착적인 실천의 힘을 다루었다.

가장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1)에서 나는 일리치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자 권위 있는 종합인 『이반 일리치: 지성 여행』(Ivan Illich: An Intellectual Journey, 2021)을 최근에 출판한 일리치의 절친이자 동료인 데이비드 케일리(David Cayley)를 인터뷰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케일리는 캐나다 CBC(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사의 전직 방송인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문학, 정치 및 생태 관련 주제에 관한 수많은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

일리치는 인습타파주의적인 사회 비평가, 급진적인 기독교인이자 문화 역사가로 서구 근대성, 기독교, 보건의료(헬스케어) 및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돌봄의 전문업화에 대한 혹독한 비판으로 197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로마 교황청과 자주 충돌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가톨릭 사제인 일리치는 마침내 사제직을 그만두고 떠돌이 강연자, 사회 참여 지식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생각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부정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깊고 더 의미 있는 정신적 삶을 추구할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Ivan Illich. Photo by ‘Adrift Animal,’ CC BY-SA 4.0

지금 보기에는 일리치의 몇몇 관점들이 당대에 즉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근대 경제학 및 정치학을 따르지 않는 풍부하고 상세한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의 삶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지난 40년 내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일반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으므로 그의 작업은 훨씬 더 유의미할 것이다.

일련의 저서들에서 일리치는 정규교육, 헬스케어, 교통기관, 법, 기타 시스템들이 이익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만들어내며 우리에게서 권리를 빼앗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1974)에서 어떻게 전문의료업이 사람을 과잉진료하고 평범한 삶을 병리화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0)에서는 어떻게 정규교육이 참된 호기심과 배움을 자극하기보다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위해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들』(Tools for Conviviality, 1973)에서는 공생을 위한 창조적이고 열려있는 도구를 인간에게 갖춰주는 문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리치의 생각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요소는 ‘누가 우리의 현실 감각을 정의하게 되는가’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기조직화하는 “토착적인 영역들”—주류 경제가 무시하는 활동들인 커머닝과 돌보기라는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비공식적인 공간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일리치는 또한 온갖 종류의 흔치 않은 역사적인 발굴―예를 들어 몸의 아픈 양태를 서술하는 것과 관련된 감각의 역사(([옮긴이] 일리치가 보기에 몸-감각(body-sense)은 문화 속에서 경험된다. 따라서 문화의 역사적 변천은 곧 몸-감각의 역사적 변천을 낳으며, 감각의 변화는 어휘의 변화를 낳는다.)), 커먼즈로서 침묵 그리고 도시 삶의 역사에서 ([]들의 매개체로서) 머리카락의 역할의 발굴―을 과감히 해냈다. (내가 일리치에 관하여 이전에 올린 게시글을 이곳이곳에서 참조하고, 또한 일리치가 현대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내가 2013년에 한 강연을 참조하라.)

일리치의 저서들과 강연들은 실질적인 사회적 관행과 정신적인 욕구를 통해 아래로부터 세상에 접근함으로써 지난 20년간에 걸쳐 부상한 커머닝 세계를 위한 지적 토대를 세우는 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일리치는 시장/국가 지배권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사회적이며 정신적인 삶—근대 의식의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공간—을 연구함으로써 현대의 커먼즈를 상상할 풍성한 공간을 긍정하고 분명히 했다. 케일리는 일리치를 “발전 이후 시대의 맑스”라고 불렀다.

케일리는 일리치가 슈마허(E.F. Schumacher)처럼 “규모 문제는 허식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핵심적인, 전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일의 규모가 너무 커질 때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 다루기 힘들어진다. 정의상, 즉 바로 그 특성상 통제될 수 없는 도구들이 있다. 그것들이 결국은 우리를 통제할 것이다.”

그래서 일리치는 인간의 힘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스타일로 폐쇄적이거나 독점적이지 않고 평범한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욕구와 관심에 기여하는 열려 있는 유연한 도구들이다.

일리치는 표준적인 경제학 및 ‘발전’이라는 관념을 일찍부터 비판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이런 사고틀에 내장된 전제에 도전했고 무한 성장의 위험들을 강조했다. 그는 표준적인 경제학은 ‘충분함’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생태적 문제들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자본주의적 시장은 상품과 시장거래에의 의존상태로 우리를 몰고 감으로써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주변화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분열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삶은 자급자족과의 500년 전쟁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삶에서는 우리가 사용가치와 욕구보다는 교환가치와 화폐를 위해 생산한다는 것이다. “경제는 오늘날 세상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뿐더러 그들의 생계추구를 눈에 안 보이고 위엄이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일리치는 썼다. 그는 “발전”의 근본적인 오류는 “인간의 자연 통제라는 생태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케일리의 책은 비록 길지만—450페이지가 넘는다—일리치의 삶과 작업을 사적인 회고록, 전기, 지성사 및 문화적 논평이 결합된 형식으로 생생하게 종합한다. 이 책은 현대 독자들이 일리치를 설득력 있는 독창적인 사상가, 창조적인 불굴의 학자이자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일리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그는 교사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적극적인 자극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한 부류의 신학자였다. 그는 매우 병약한 자신을 이 과제에 완전히 투여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었다. 케일리는 그를,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곧추세우는 깨어있는 새에 비유한 적도 있다.

내가 데이비드 케일리와 한 인터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