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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20년 후

 



20년 전 『제국』이 나왔을 때에 지구화가 중앙무대를 차지했다. 2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한 번 지구화가 중심적 이슈이지만, 지금은 여러 입장에 걸쳐있는 제도권 논평가들이 그 검시(檢屍)를 수행하고 있다. 우세해진 새로운 반동세력은 자국주권의 귀환을 요구하면서 무역조약을 깨고 무역전쟁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초국적 기관들과 전지구적 엘리트들(소수 지배세력)을 규탄하는 한편 인종주의의 불을, 이주자들에 대한 폭력의 불을 지핀다. 좌파에서도 혹자들은 신자유주의, 다국적 기업 및 전지구적 엘리트들의 강탈행위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자국주권의 부활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화는 죽었거나 쇠퇴한 것이 아니라 단지 덜 명료할 뿐이다. 전지구적 질서가 어디서나 위기에 처해 있지만, 오늘날의 여러 위기들이 전지구적 구조들의 계속적인 지배를 막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세계질서는 자본처럼 위기를 통해 기능한다. 말하자면, 위기를 먹고 산다. 이 질서는 여러 면에서 고장남으로써( by breaking down) 작동한다.[원주1: 들뢰즈와 가따리에게 자본주의적 기계의 분열적 성격의 일부는 그것이 ‘고장남으로써 작동한다’는 사실에 의해 드러난다. Anti-Oedipus,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elen Lane, Minneapolis 1983, p. 31 참조] 오늘날 전지구적 구조들이 덜 가시적이기에 지난 20년 동안의 트렌드들을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라는 면과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의 전지구적 구조들이라는 면에서 연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배와 착취의 주된 구조들을 전지구적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 반란과 해방의 잠재력을 인식하고 촉진하는 데서 핵심적이다. 제국이 아래로부터의 다중의 반란에 대한 대응으로 형성되었듯이, 다중이 자신들의 힘을 효율적인 대안적 힘으로 구성하고 대안적 사회의 조직을 향한 경로를 그릴 수 있는 한에서 제국은 다중 앞에서 몰락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회적·정치적 운동들은 여러 면에서 이미 이러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 서로 어긋나 있는 권역들

제국의 지속적인 위기가 하나가 다른 것을 둘러싸고 있는 두 개의 권역들(spheres) 안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해보자.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지구 규모의 네트워크들이 그 첫째 권역이며, 전지구적 거버넌스의 구성이 그 둘째 권역이다. 이 두 권역은 점점 더 서로 어긋나고 있다. 첫째 권역은 ① 점점 더 복잡해지고 연결성이 높아지는 상호연결된 소통 네트워크들, ② 물질적·비물질적 기반시설들, ③ 육·해·공 수송로들, ④ 대양을 횡단하는 케이블들 및 위성 시스템들, ⑤사회적·금융적 네트워크들, ⑥ 생태계들, 인간들 및 기타 종들 사이의 다양하게 중첩되는 상호작용들로 구성된다. 지역화된 경제적 생산이 이 영역 내에 존속하지만 이는 점점 더 이 대륙을 가로지는 회로들에 흡수되어 역동적으로 되며 또한 많은 경우 이 회로들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노동도 시장, 기반시설, 법, 국경체제[국민국가의 경계들로 지리적 구획이 지어진 체제]의 전지구적 웹에 흡수되고 제한을 받는다. 가치화 및 착취 과정들도 다양하지만 통합된 전지구적 어셈블리라인에 의해 지배된다. 사회적 재생산의 기관들과 생태 신진대사의 회로들은 여전히 지역적일 수 있지만, 이들 역시 큰 역동적 시스템들에 점점 더 의존하고 종종 그것들에게 위협을 받는다.

이 지구 규모의 시스템들은 상이한 공간들과 시간들을 가로질러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다양한 활동들을 실질적인 동시에 형식적으로 포섭한다. 이 권역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성 있는 총체이다. 단일하고 밀도 있는 지구 규모의 집합체이다. 이 상호연결성은 취약성을 공유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가장 분명해진다. 가령 핵에 의한 파멸이나 기후위기에 직면하면 살아있는 생물들과 테크놀로지들의 웹 전체가 위협을 받으며 그 가운데 무사할 것은 없다.

첫째 권역을 둘러싸고 있는 둘째 권역은 상이한 여러 수준들에서 상호교직된 정치적·법적 체계들―일국 정부들, 국제적인 법적 협약들, 초국적 기관들, 기업 네트워크들, 경제특구들 등―로 구성된다. 이는 전지구적 국가(a global state)는 아니다. 일국 주권의 주장이 퇴색하면서 출현한 것은 이행적 거버넌스 체제들이다. 이 중첩되는 구조들이 혼합된 정치구성(a mixed constitution)을 이룬다. 이 권역의 표면을 가로질러 지배의 고비를 쥐고 있는 자들은 아래 세계의 소유자들―기업의 장들, 금융 거물들, 정치적 엘리트들, 미디어 거물들―이다.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이 진전되면서 이 두 권역들은 점점 더 어긋하게 되었다. 이 두 권역들은 별도의 분리된 축 위에서 돌면서 때로 서로 충돌한다. 20세기의 개혁 기획이 두 권역들 간의 관계를 안정화하고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하며 전지구적 체제의 모든 수준들에서 위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embedded liberalism'[‘내장된 자유주의, ‘묻어들어 있는 자유주의’ 등 여러 번역어가 있다]를 추구했다면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은 사회적 생산 및 재생산의 영역과 안정된 구조적 관계를 맺지 않는 거버넌스 권역을 창출했다.

신자유주의의 제국적 거버넌스는 그 어떤 매개도 없이 안쪽 권역으로부터 가치를 포획하고자 한다. 안쪽 권역의 생산 및 재생산 회로들이 점점 더 자율적으로 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거버넌스 영역이 그 명령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화폐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생산된 가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금융 및 부채의 도구들을 통해서 자산소득(rent, 지대)의 형태로 가능한 많은 가치를 추출할 수 있다. 위기들이 번성하지만, 이 위기들은 임박한 붕괴의 표시들이 아니라 지배의 메커니즘들이다.

미국 헤게모니의 운수(運數)

두 권역들이 서로 어긋나 있다는 것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는 각 영역을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 걸음 물러나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들이 어떻게 변했나를 살펴보는 데서 시작한다. 다중의 저항과 도전을 위한 잠재적 가능성이 오늘날 어떻게 열렸는지에 시선을 두면서 말이다.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초, 미국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질서가 동터옴을 선언했다. 그 당시 비판자들이든 지지자들이든 모두, 미국이 유일한 초강국으로서 당연히 그 유례없는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를 행사할 것이며, 전지구적 사태에 대한 일방적 통제만큼이나 책임도 점점 더 많이 지게 되리라고 보았다. 10년 후 미국 군대가 바그다드로 진군할 때에는 아버지 부시가 고지한 새로운 세계 질서가 아들 부시에 의해 구현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점령은 중동을 다시 만들 듯이 보였으며, 그곳에 순수한 신자유주의적 경제들을 창출할 듯이 보였다. 네오콘들이 슬슬 몸을 풀 때 비판자들은 새로운 미국 제국주의를 규탄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의 일방주의적 힘은 이미 제한되어 있었으며 워싱턴의 제국주의적 야망은 헛된 것이었다. 미국 제국주의는 다른 게 아니라 단지 그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힘의 불충분성으로 인해서 무너졌다.

미국은 탈레반(Taliban)과 바티스트(Baathist) 정권들을 전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진정한 제국주의 국가에게 요구되는 안정적인 헤게모니를 획득할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수십 년 동안의 실패 이후인 지금, 미국이 주도하는 전지구적 체제가 혜택을 가져오리라고 믿거나 안정적 질서를 창출할 힘을 미국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트럼프의 당선 이후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잔존 여부에 대해 마음을 졸이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지만, 사실 미국의 일방주의적 세계지배는 트럼프가 무대에 돌연히 등장하기 오래 전에 이미 지난 일이 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은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그 어떤 국가도 전지구적 질서를 일방적으로 조직하고 통제할 수 없다. 아리기처럼 중국과 같은 다른 국가가 미국이 했던 헤게모니적 역할을 계승하리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 달리 미국의 쇠퇴가 과장되었다고 보는 자유주의적인 제도권 논평가들에게는 여전히 미국이 전지구적 패권국에 유일하게 걸맞은 국가이다. 이런 주장들에도 일리는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이나 중국의 역할이 일극적 패권국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mixed constitution)에서 벌어지는 국민국가들 사이의 격렬한 경합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국가도 헤게모니적 위치에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은 카오스와 무질서가 존재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주권의 출현을 나타낸다.

 

  1. 제국의 혼합된 정치구성

헤로도토스나 플라톤 같은 예전의 사상가들은 세 개의 기본적 통치 형태―군주제(1자의 지배), 귀족제(소수의 지배), 민주제(다수의 지배)―가 있다고 보았다. 이들은 각 정치구성의 상대적 장점을 분석했으며, 정치사를 하나의 정치구성에서 다른 하나의 정치구성으로의 이행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폴리비오스(Polybius)에 따르면 로마의 새로움은 그 혼합된 정치구성에 있었다. 통치형태들이 서로 교대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했다.

20년 전 우리는 오늘날 출현하는 질서를 (이 전지구적 통치의 혼합된 정치구성을 가리키기 위해서) ‘제국’이라고 명명했다. 제국은 전지구적 국가도 아니고 통일되고 중앙집중화된 지배구조를 창출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지구화는 단순한 동질화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질화인 동시에 마찬가지 정도로 이질화인 과정이다. 모든 지리적 규모에서 경계들 및 위계들이 번성한다.

이 글에서 우리는 지난 20년 간 제국적 정치구성에서 일어난 가장 극적인 이행들의 일부를 개략적으로만 살펴보겠다. ① 군주제의 수준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태전개는 중심의 공동(空洞)화였다. 1990년대에 미국은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 도메인들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폭탄(워싱턴), 달러(월가), 네트워크(헐리우드/실리콘밸리)는 군주적 힘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이 도메인들에서 ‘일자의 지배’와 같은 것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드파워와 소프트파워의 영역에서 미국의 우위는 오늘날에도 계속되지만, 그 토대는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그 범위는 더 좁아진다.

㉠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다른 나라들보다 두드러지게 우월하다. 그러나 월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서의 미군의 패배는 미국의 군주로서의 능력이 오늘날 미약해졌음을 분명히 한다. ㉡ 20년 전에는 견고하게 보였던 미국의 금융적·화폐적 헤게모니도 점점 더 약화되었다. 금융 헤게모니는 이미 불안했는데, 이는 1971년에 있었던, 달러화의 금표준으로부터의 분리로 소급한다.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에 따르면 1990년대에 미국의 금융 및 화폐체제는 ‘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위태로운 토대는 2008년의 금융위기에 의해 확인되었고 이는 다시 미국이 군주 역할을 하는 능력을 문제시 하게 되었다. ㉢ 마지막으로 미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는 문화산업과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영역에서도 축소되었다. 세계 시장을 지배하는 미국 기업들은 미국의 전지구적 헤게모니 발휘를 위한 소프트파워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업들은 점점 더 지구 규모로 작동하며 모호하게만 미국의 전지구적 이미지에 기여한다. 이렇듯 세 도메인 모두에서 미국의 군주적 힘은 균열을 보이고 있다. 다른 후보자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상대적 진공이 군주제의 수준에서 커지고 있다.

② 제국의 귀족제 수준에서는 흥하고 쇠하는 열강들의 열띤 경합이 일어나고 있다.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소수의 지배’는 주요 기업들, 선진국들, 초국적 기관들을 가로질러 행사되고 있다. 기업 대 국민국가, 국민국가 대 초국적 기관 등의 격렬한 경쟁이 그 특징이다. 지난 20년 동안 전지구적 위계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에 변화가 생겼다. 중국이 상승한 반면, BRICS의 다른 국가들은 적어도 일시적으로 멈칫했다. 애플과 알리바바가 제너럴모터스와 제너럴일렉트릭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들의 갈등에서 생기는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귀족세력은 실제로는 같은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 은유를 바꾸자면, 그들은 서로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기사도(騎士道) 및 그에 상응하는 사회질서에 복무하는 기사들과 같다.

귀족제 수준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일반적 윤곽이 겉보기와 다르게 상당히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많이들 말하는 국민국가의 귀환은 전지구적 체제의 균열이 아니라 귀족 열강들 사이의 경합에서 구사되는 전술적 작전들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America first!, Prima l’Italia! Brexit!는 전지구적 체제에서의 위치에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국가들의 애처로운 외침들이다. 사라진 나뽈레옹의 영광에 대한 기억에 의해 동원되는 것으로 맑스가 그린 바 있는 프랑스의 보수적 농민들처럼, 오늘날의 반동적 민족주의자들도 전지구적 질서로부터의 분리를 노리기보다는 전지구적 위계에서의 재상승을 노린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 사이의 갈등―가령 2018년 유엔총회에서의 트럼프의 ‘글로벌리즘’ 비판―도 전지구적 체제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책이다. 선진국들과 초국적 기관들을 주도하는 엘리트층 모두가 자본주의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축과 유지에 바쳐진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지시에 의해 추동된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불명료한 혼합된 정치구성(‘다수의 지배’)은 방대한 세력들로 구성된다. 국민국가들 및 자본주의적 기업들, 방송과 미디어, 국가와 기업들을 지원하고 종종 이들이 손상시킨 바를 수리하는 NGO들, 종교단체들, 국가에 맞서거나 스스로 국가를 수립했다고 주장하는 사병(私兵)들. 이들은 가장 저급한 의미에서만 ‘민주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반체제적 운동이나 세력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방대한 세력은 군주제적·귀족제적 힘들에 저항하고 도전할 때조차도 궁극적으로는 제국적 정치구성 전체를 지탱하는 데 복무한다. 푸꼬가 겉으로 보기에는 저항적인 형상들이 어떻게 궁극적으로는 지배적 힘을 강화하는지를 인식하는 데 탁월했다. 물론 모든 저항 노력이 헛된 것이며 불가피하게 제국에 의해 포섭되어 대안을 위한 희망이란 것은 없다는 말은 아니다(푸꼬도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곧 이 점을 다룰 것이다.

 

  1. 새로운 국제주의들

지구화를 위로부터 보면 왜곡을 낳는다. 지구화는 그 핵심에 있어서는 아래로부터의 지구화 세력에 대한 대응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국제주의가 근대 전체에 걸쳐서 자본주의적 지구화의 형태들과 과정들의 주된 추동자였다. 모든 근대 혁명은 깊은 의미에서 국제주의적이다. 아리기와 제임슨 같은 저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읽기 덕분에 1970년대의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의 전개가 실제로는 1960년대의 반란, 해방투쟁, 혁명운동의 합류나 축적에 대한 대응이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권력 구조들을 ‘대응’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분석적 기능만이 아니라 정치적 기능도 가진다. 제국의 지배를 넘어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은 필연적으로 더 나아간 국제주의의 형태를 띨 것이다. 그런 만큼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출현하는 새로운 국제주의들을 포착하고 양성하려는 노력이다.

행동하는 국제주의를 인식하는 한 방법은 투쟁의 국제적 순환의 전개를 추적하는 것이다. 각 투쟁이 지역에 집중될지라도, 투쟁의 불꽃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가면 운동이 전지구적 의의를 가지게 된다. 2010년 11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러한 순환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나라들에서 일어나서 다음에는 스페인, 그리스, 미국으로, 그 다음에는 터키, 브라질, 홍콩으로 옮겨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성폭력과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는, 아르헨티나의 페미니즘 투쟁인 NiUnaMenos[영어로는 ‘Not one (woman) less’라고 옮겨지며 여성이 한 명이라도(una, one) 더 희생되지(menos, less) 말아야 한다(nie, not)는 의미이다]는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둘러싼 폴란드의 투쟁과 공명하여 혁신적인 방식으로 남북 아메리카 전역으로 옮겨갔으며 대서양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와 스페인으로 옮겨갔다. 정치적 파업의 새로운 형태들에 기반을 두고 새로운 페미니스트 인터내셔널이 형성되고 있다.

훨씬 더 방대한 규모이지만 훨씬 덜 명료한 것으로, 이주(migration)가 국제주의의 주된 힘을 구성한다. 이주는 국민국가들의 국경체제들과 전지구적 체제의 공간적 위계들에 대한 지속적인 반란이 된다. 2015년 여름, 걸어서 혹은 모든 가능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유럽을 향하고 또 유럽을 가로질렀으며 이제는 지중해를 건너기에 이른 대대적인 행렬이 유럽의 국경체제들을 위협했다. 이와 유사하게 2018년 가을 멕시코를 지나 미국 국경을 향해 움직인 중앙아메리카의 어린이들과 가족들의 행렬은 미국의 국경체제의 지속적인 위기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미디어가 매우 자주 다룬 이 사건들은 남에서 북으로만이 아니라 모든 방향으로―나이지리아에서 남아프리카로, 볼리비아에서 아르헨티나로, 미얀마에서 방글라데시로, 중국의 농촌에서 도시지역으로―다양하게 펼쳐지는 전지구적 이주의 정점들일 뿐이다. 이는 정치적인 것으로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이례적인 종류의 국제주의적 반란이다. 이주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자신들의 탈주의 정치적 성격을 표현하지 못한다. 자신들의 행동을 국제주의적 투쟁의 일부로서 이해하지는 더욱 못한다. 실로 그들의 여정은 극히 개인화된 것이다. 마차행렬과 같은 명시적으로 조직적인 구조도 드물다. 중앙위원회도 없고 강령도 없으며 원칙의 진술도 없다. 그러면서도 이주자들의 탈주선들은 국제주의적 힘을 구성한다.

이주자들은 전쟁이나 박해로부터 도망치는 경우든 단순히 모험을 추구하는 경우든 이동성의 자유를 긍정한다. 이것이 모든 다른 자유들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전지구적 이주가 지속적인 반란으로서 가진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걸음 물러나서 보아야 한다. 이주자들의 반란의 힘은 이주자들의 통제에 발휘되는 잔인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역반란 전략에 의해 확인된다. 리비아의 강제수용소에서 미국 국경의 야만적 경찰들까지. 이주자들의 반란은 전지구적 체계를 분절하는 장벽들을 그저 가로질러 감으로써 그 장벽들에 균열을 내고 그 장벽들을 무너뜨린다.

 

  1. 전지구적 자본과 공통적인 것

앞에서 말한 두 권역은 서로 어긋나 있긴 하지만 서로의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일국의 자본이 그 이익을 위해 국민국가를 필요로 하듯이, 전지구적 자본도 복잡한 전지구적 거버넌스 구조를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적 관계들의 권역을 구성하는 것은, 서로 경쟁하는 개별 자본가 기업들, 종종 서로 갈등하는 국가 자본들, 다양한 형태의 임금∙비임금∙불안정 노동, 항상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였던 비자본주의적 요소들이다. 이러한 이질성에 가려 전반적 구도를 인식하지 못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출현한 학술적·전투적 비판들 일부를 따라가봄으로써 자본의 발전에서 보이는 일부 핵심 방향들을 개략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정치경제 비판에서 가장 절실한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재생산의 회로들에서 저항과 자유의 씨앗들을 찾는 것과 관련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의 훈육체제에 맞서는 운동들이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하는 동력으로서 기능해온 방식에 먼저 초점을 맞추겠다. 이는 (자본에 의한) 포섭과 포획의 이야기인 동시에 반란의 활력의 지표이다. 자본을 전진시킬 힘이 있는 곳에 자본을 전복할 잠재력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자본이 자본에 맞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들을 창출하는 방식을 검토할 것이다.[원주 21 내용의 일부: 맑스는 반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들은 자본주의적 발전 자체에 의해 제공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혁명은 과거의 사회적 형태들로의 회귀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기의 성과―즉 협동, 그리고 토지와 (노동 자체에 의해 생산된) 생산수단의 공동 점유―를 토대로 해서” 일어날 것이라고 맑스는 썼다. Capital, Volume I, trans. Ben Fowkes, London 1976, p. 929.] [이때 수립되는 소유를 맑스는 ‘개인적 소유’(das individuelle Eigentum, individual property)라고 불렀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은 여러 모습―자연자원, 문화생산물, 생체측정 데이터, 사회적 협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한다. 공통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점점 더 중심적이 되지만(자본이 축적하는 가치가 점점 더 공통적인 것 안에 있게 되지만), 또한 공통적인 것은 자본으로부터의 사회적 자율의 잠재력, 반란의 잠재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세 핵심 지형들―① 추출의 측면 ② 삶정치적 측면 ③ 생태계―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종류의 분석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및 재생산에 대한 최근의 광범한 분석들은 넓은 의미의 추출 개념을 중심으로 한다. 가치가 땅으로부터 직접 끌어내어지는 전통적인 추출주의적 관행의 확대만이 아니라 공적 부와 기반시설의 사유화에 의해 획득되는 축적방식들 및 인간적·사회적 가치들이 전유되고 축적되는 새로운 형태의 추출이 이루어진다.

데이터 마이닝의 비유가 전통적인 추출작업들이 사회적 도메인으로 옮겨온 방식을 보는 데 유용한 렌즈를 제공한다. 가령 소셜미디어 플랫폼들을 수단으로 한 축적은 사용자들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고 프로세싱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가져오는 지식 및 사회적 관계들을 자본화하는 알고리즘적 수단을 창출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버나 에어비앤비 같은 플랫폼들은 ‘공유’를 (공동의 사용을 위해 재화를 제공하는 데서) 가치를 추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켰다. 금융 또한 그 추출방식을 통해 기능한다. 물론 금융도구들의 일부는 투기의 수단이며 ‘허구적’ 가치들만을 창출한다. 그러나 금융과 채무관계는 그 주된 측면에서는 금융자본의 직접적 관리 외부에서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가치들을 추출하는 수단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 구도에서의 이러한 사태전개를 이윤에서 자산소득(지대)으로의 이행으로 파악한다. 산업자본이 대체로 생산과정을 관리하고 협력의 형태들을 운영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하는 반면에 금융은 자신의 관리 외부에 있는 생산적 협력의 형태들을 통해 생산된 부에서 자산소득을 추출한다.

추출에 대한 이러한 분석들은 하비가 말한 ‘강탈에 의한 축적’에 크게 상응한다. 그 과정은 주로 커먼즈의 새로운 종획을 통해, 그리고 땅과 공적 기반시설에 들어있는 부의 추출을 통해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모든 추출형태는 그 직접적 관리영역 외부에서 생산되는 가치들을 끌어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추출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공통적인 것―생태적, 사회적, 삶정치적 형태―을 포식한다. 이러한 포식과정은 공통적인 것 안에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둘째 종류의 분석은 삶정치적 관계들―인지적 생산형태들, 정동과 돌봄의 생성―에서 공통적인 것이 하는 역할을 부각시킨다. ㉠ 인지자본주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지식, 지성, 과학의 역할을 분석하며 축적된 지식이 직접적으로 가치를 생산하게 된 것을 강조한다. ㉡ 다른 분석들은 사용자들의 주목이 생성하는 가치에 의존하는, 디지털 네트워크들과 플랫폼들을 통한 가치생산에 초점을 둔다. ㉢ 지성 및 주목과 아울러 자본주의에서 정동이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동의 생산과 관련된 직업들―간호사들, 방문돌봄 서비스 노동자들, 관리-지원 직원들, 임금을 받는 가사노동자들, 교사들, 음식서빙 노동자들―은 보수가 낮고 극히 불안정하며 따라서 압도적으로 여성들로 채워진다. 정동의 생산은 또한 젠더 분업으로 정의되고 있는 가사노동을 포함하는 비보수 영역에서 중심적이다.

이 분석들에서 우리는 삶정치적 통제의 새로운 형태들과 인간 실존의 더 많은 영역들의 식민화 및 상품화와 함께, 착취와 지배의 새로운 심화된 형태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삶정치적 생산력들이 사적 소유의 관계 내에 종획되어 있어서 노동자들은 임금을 위해 노동하거나 종속되어 있고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상태에 있으며 그런 가운데에도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가치는 여전히 착취·축적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는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성격을 인식한다. 지성, 지식, 주목, 정동과 돌봄은 모두, 집단적 행동과 상호의존에 의해 규정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능력들이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의 거대한 삶정치적 저장고들은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

셋째 종류의 분석은 자본의 발전이 지구와 생태계를 파괴하는 방식들과 관련된다. 특히 기후변화 분석은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가 화석연료의 추출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저자들이 인간이 기후변화를 야기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에 진입했다고 말하는데, 이 인류세 담론은 인간 전부가 아니라 일부에 해당하는 자본가들이 기후변화의 책임자들임을 가린다. 지구의 장기적 건강을 보존하는 모든 기획에 필요한 선결조건은 자본주의의 지배의 우위에 도전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걸려있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다. 빈자들이 가장 많이 고통을 받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기후변화에 굴복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잃은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구축할 대안들에도 핵심적이다. 토착민들의 투쟁은 인간이 지구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할 필요를 제기한다.

이 모든 분석들에서 모든 형태의 공통적인 것의 힘이 드러난다. 자본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을 포식하는 포획장치가 되지만, 공통적인 것의 영역들이 기동되어 상호의존의 관계를 맺는다면 자율의 잠재력 즉 자본주의의의 지배 너머의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할 잠재력을 지니게 된다.

 

  1. 계급다중계급

다양체(성)(multiplicity)이 점점 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전적인 지평이 되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감동적인 운동들―코차밤바에서 스탠딩락(Standing Rock)까지, 퍼거슨(Ferguson)에서 케이프타운(Cape Town)까지, 카이로에서 마드리드까지―은 다중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투쟁들에 특히 미디어가 종종 지도자부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운동들이 전통적인 중앙집중화된 지도를 거부하는 것은 맞지만, 지도자부재라고 하기보다는 다중의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그러한 이해가 투쟁들의 미덕과 그들이 직면하는 도전을 공히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 운동들은 중요한 성과를 얻었고 종종 더 나은 대안적 세상을 암시하기도 했지만, 단명했고 때로 쟁취한 것이 잔혹하게 역전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무언가 더 필요했고 정치적 조직화에 대한 창조적이고 독창적인 사고가 요구되었다. 우리는 그 다양체성을 버리고 (선거로 뽑는 정당이든 ‘국민’이든) 통일된 정치적 주체를 구축할 필요를 설파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전통적인 조직형태들로 되돌아가는 것이 더 지속적이거나 효율적인 운동을 낳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일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어떻게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하면서 실질적인 사회변형을 낳을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이다.

오늘날의 운동이 가진 잠재력을 탐색하기 위해서 두 가지의 역사적·이론적 이행 즉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과 다중에서 계급으로의 이행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는 얼핏 보기에는 왕복운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론적·정치적 진전을 표시하려는 것이 우리의 의도이다. 출발점의 계급과 도착점의 계급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다중을 통과하는 과정이 계급의 의미를 변형시킨다. 그래서 우리가 제시하는 조직화의 일반적 공식은 <계급―다중―계급′>(C―M―C′, class―multitude―class prime)이다. 맑스의 공식[『자본론』1권 4장에 나오는 자본의 일반적 공식(M-C-M′)을 말한다. 물론 자본의 공식에서는 M이 Money(화폐)이고 C는 Commodity(상품)이다]에서처럼 과정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변형이 중요하다. 계급은 다중적 계급, 교차적 계급이어야 한다.

계급에서 다중으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이 이제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한 일반적 인정을 나타낸다. 이 이행은 전통적인 당들과 노동조합적 기관들이 노동계급을 대표한다는 주장이 가진 힘이 소진된 것에 상응한다. 노동계급이 경험적 형성체로서 없었던 적은 없지만, 이제 그 내적 구성이 변했기에 계급구성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힘들을 탐구해야 한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인구들 사이의 차이가 점점 더 획일화된 대의를 거부한다. 노동의 여러 부문들 사이―가령 임금을 받는 노동과 임금을 받지 않은 노동 사이, 안정 노동과 불안정 노동 사이, 합법적 노동과 비합법적 노동 사이―의 차이와 젠더, 인종, 민족 등의 차이들이 모두 표현을 요구한다. 이런 시점에서의 계급구성 연구는 교차적 분석(intersectional analysis) 안에 함입되어야 한다. 이는 내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의미의 계급이 아니라 다중, 환원될 수 없는 다양체이다.

이와 함께,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은 노동계급의 투쟁 및 반자본주의 투쟁 일반이 다른 지배의 축에 대한 투쟁들―페미니즘 투쟁, 반인종주의 투쟁, 탈식민 투쟁, 퀴어 투쟁 등―과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중 개념은 (미국 흑인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에서 출현한) 교차적 분석 및 실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다양체성을 정치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이는 인종, 계급, 성, 젠더, 국민 위계들이 서로 맞물려있는 특성을 인식함으로써 전통적인 단일축 분석틀들에 대항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이 첫째로 의미하는 것은, 지배의 그 어떤 구조도 다른 것보다 우선적이거나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동등한 중요성을 가지며 서로가 서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둘째, 지배구조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주체성들도 다양체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정체성의 거부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성을 다양체성으로 조바꿈을 하여 (즉 다양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사고할 필요를 말한다.[원주32: 정치적 논의에서만이 아니라 다양한 학술영역에서 교차성이 핵심 개념이 되면서 엄청난 양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탕을 마련한 글들로 Kimberle Crenshaw, “Mapping the Margins”, Stanford Law Review, vol. 43, no. 6, 1991, and “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University of Chicago Legal Forum, no. 140, 1989 참조.  현재 진행되는 논의에 대해서는 Jennifer Nash의 통찰력 있는 책인 Black Feminism Reimagined: After Intersectionality, Durham nc 2019 참조.] 교차적 다중을 요구하는 것은 단지 더 많이 포함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반(反)복종 기획’(‘an antisubordination project’)이다. 즉 여러 전선들에서 동시에 전투 및 혁명을 전개하는 전략이다.

이 지점에서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이행을 불안정성 개념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 고찰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 의미는 임금 및 노동관계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이런 의미의 불안정성은 포디즘 경제의 규제적 이상(regulative ideal)이었던 안정된 고용계약―이는 제한된 수의 선진국 산업노동자들(주로 남성)에게만 현실로서 존재했던 규제적 이상이다―과 대조된다. 보장된 노동계약과 법은 점점 부식되었으며 노동자들은 어쩔 수 없이 비공식적 단기노동계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러한 노동배치는 물론 항상 인종화, 젠더화되어 있지만, 노동력의 모든 부문들이 이 경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이런 의미의 노동 불안정화는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무기이다.

둘째 의미의 불안정성은 첫째에 대한 유용한 보완을 제공하며 훨씬 더 광범한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해석(과 도전)의 일부로서 기능한다. 주디스 버틀러: 불안정성은 인구의 일정 부분이 사회적·경제적 지원네트워크들의 부실로 다른 이들보다 더 고통을 받으며 피해, 폭력, 죽음에 더 차별적으로 노출되는, 정치적으로 야기된 상태를 가리킨다. 노동 불안정성은 분명 전체의 일부이지만, 불안정한 삶이라는 생각은 어떻게 법·경제·통치상의 변화들이 이미 종속된 인구들의 광범한 부분―여성들, 트랜스젠더들, 동성애자들, 유색인들, 이주자들, 장애자들 등―의 불안정성을 증가시켰는지를 파악하는 것으로 목표로 한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언어를 말하는 불안정성이 있고 교차적 비전을 증진하는 또 하나의 불안정성이 있다. 이것을 합치면 다중을 이론화하는 좋은 토대를 갖추게 된다.

우리는 계급에서 다중, 혹은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이동을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미 지난 20년 동안 달성된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계급에서 다중으로의 역사적 이행을 쇠퇴와 상실로 간주한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해서 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것은 아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과정에서 획득된 것 또한 인식해야 한다. 상호구성하는 지배구조들의 다양체는 사회현실을 파악하는 데 더 나은 렌즈를 제공한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에 대한 연구를 인종, 젠더, 성 위계의 제도적 구조들에 대한 동등한 분석으로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실천의 수준에서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계급정치 기획이라면 반드시 페미니즘적·반인종적·퀴어적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을 다시 사고하기

다양체를 이론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적으로 힘을 발하려면 조직이 필요하다. 그러나 처음 제기한 물음―다양체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가?―에 답하는 데 조직이 필요하다는 대답만으로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중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를 더 온전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전과는 다르게 파악되는 바의 계급 개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중에서 계급으로 나아간다면 이전 단계에서 획득한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의도는 노동계급하고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다양체인 계급, 다중의 성과를 이어나가는 정치적 형성체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우선 계급개념을 노동계급과의 관련을 넘어 인종, 젠더를 포괄하여 사용하는 이론가들을 주목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음벰베(Achille Mbembe) 같은 이는 유럽으로 이주하는 아프리카인들에 가해지는 현재의 통제방식들을 ‘인종적 계급’(racial class)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그가 보기에 유럽은 그 국경들을 군사화하기로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더 멀리 가져다 놓았다. 오늘날 유럽의 국경들을 구성하는 것은 모든 개별 아프리카인들, 인종적 계급으로서의 모든 아프리카인들이다. 이는 피부색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의 신체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유형의 인간 신체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와 ‘우리’가 아닌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그리는, 학대해도 처벌받지 않는 경계적 신체(border-body)이다.

새로운 이동성의 체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낙인찍힌 인종적 계급’으로 변형된다고 음벰베는 주장한다. 그에게 계급개념은 사회경제적 범주가 아니거나 그런 범주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피부색에만 기반을 두지 않는 집단적 인종적 차이를 사고하는 수단으로서 기능한다. 이 인종적 계급은 유럽의 인종주의적 구조들과 제도들에서 탄생한다.

음벰베와 유사한 것이 델피(Christine Delphy) 같은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성 계급’(sex class)이다. ‘성 계급’이라는 어구의 사용에 문제를 제기한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델피는, 계급개념이 사회적 주체들이 지배관계들에 의해 창출되는 방식을 다른 어느 것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고 답한다. 이런 관점에서 델피는 이렇게 쓴다. “집단들은 ··· 관계 속에 넣어지기 전에는 구성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가 바로 그들을 그들로 구성하는 것이다.” 델피에게는 지배관계가 사회적 주체들 이전에 존재하며 이 주체들을 구성한다. 또한 델피의 어법에서 계급은 전적으로 경제적 위치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그 어떤 지배의 축에도 배치될 수 있는 분석의 절차와 관련된다.

음벰베와 델피를 거론한 것은 ① 첫째, 계급개념이 자본만이 아니라 모든 지배관계에 의해 창출된 종속의 효과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② 둘째 계급개념은 서술적으로만이 아니라 종속된 사람들을 계급으로서 투쟁으로 불러내는 정치적 요청으로서 이용될 수 있다. ③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점인데), 병렬적으로 지배받고 투쟁하는 다수의 계급들을 인식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다중적 계급’(multitudinous class)’ 혹은 ‘교차적 계급’(intersectional class)은 더 나아간 단계를 필요로 한다. 즉 그 다양한 차이나는 주체성들의 투쟁에서의 내적 마디결합(internal articulation)이 필요하다. 교차적 분석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마디결합을 연합과 연대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이는 종종 추가의 논리에 기반을 둔 전략을 반복한다. 달리 말하자면, 교차적 분석이 정체성과 관련된 추가적 사고방식[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정체성으로, 가령 동일한 계급의식을 가진 집단으로 합류하는 것]을 거부할 때조차도 여전히 추가의 논리가 활동가들의 상상계를 지배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접근법의 한 약점은 유대의 관계가 외적이라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내적 유대이다.

내적 유대의 세 이론적 사례들.

①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905년 봉기의 실패 후 독일 노동자들이 러시아의 동지들에 대한 공감과 지원을 표현했을 때 로자는 그 유대가 단지 외적인 관계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독일 혁명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러시아의 사건들이 바로 자신들의 사건이며 자신들의 투쟁에 내적인 사건들이라는 점,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것이었다.

② 아이리스 영(Iris Young)
로자처럼 영도 페미니즘 투쟁과 연대하지만 그 투쟁을 자신들의 투쟁과는 분리된 것으로 보는 남성동지들을 비판했으며 그런 유대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녀는 남성사회주의자들에게 가부장제에 맞선 페미니즘 투쟁을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사의 한 장으로서 인식하기를 권고한다. 자본을 물리치는 것은 가부장제를 물리치는 것과 함께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반자본주의적일 수 없기 때문이다.

③ 키앙가-야마타 테일러(Keeanga-Yamahtta Taylor)
그녀는 계급지배에는 초점을 두지 않는 미국의 반인종주의 활동가들에게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녀는 반자본주의 투쟁이 백인의 과제로 간주되고 반인종주의적 투쟁은 유색인들의 과제로 간주되는 분리현상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 노동계급은 백인이고 남성이며 따라서 인종, 계급, 젠더 이슈들을 취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사실 미국의 노동계급은 여성이고 이주자이며 흑인이고 백인이며 라틴계이고 기타 등등이다. 이주자 이슈, 젠더 이슈 그리고 반인종주의는 곧 노동계급 이슈들이다.” 이는 우군의 참여를 받아들이거나 연대를 표하는 문제가 아니다. 백인우월주의에 맞서는 투쟁과 자본에 맞서는 투쟁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의제기가 이 시점에서 가능하다: 모두가 (앞에서 말한 두 가지 의미에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같이 투쟁할 필요가 있는 것은 맞지만, 불안정성 및 지배의 양태들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동일성의 투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체라는 생각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적 지배는 젠더나 인종 지배와 같지 않으며 그 어떤 것도 다른 것 아래 포섭되지 않는다. 동일성으로의 환원 대신에 투쟁하는 주체성들 사이의 마디결합이 필요하다. 바로 그렇기에 연합보다는 계급―다중적 계급(a multitudinous class)―이 적절한 개념인 듯하다. 그러나 이는 다양체로 구성되고 사회적 협동과 공통적인 것의 형태들에 기반을 둘 뿐만 아니라 투쟁들 사이의 내적 유대와 교차에 의해 마디결합되고 각자가 다른 것들이 ‘자신들의 사회경제사의 한 장’임을 인식하는 그러한 계급 개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변형된 개념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는 과정 전체는 <계급―다중―계급>이 아니라 <계급―다중―계급′, C―M―C’>이다. 이것이 ‘다양체가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적어도 초기 단계의 이론적 응답이 될 수 있다. 그렇다. 자본,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및 기타 지배에 동등하게 맞선 투쟁을 지향하는 내적으로 마디결합된 다양체로서의 계급′이 정치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형식적이고 개념적인 응답이긴 하지만, 예의 정치적 기획을 사고하고 추구하기 위한 틀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1. 대안지구화를 찬양하며

1994년 멕시코의 치아파스에서 일어난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반란, 1999년 11월의 시애틀에서의 WTO회의 봉쇄투쟁,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맞서 2001년 브라질의 뽀르뚜알레그레에서 시작된 <세계사회포럼>, 2001년 제노아에서의 G8 정상회담 반대투쟁. 이렇게 이어져 온 대안지구화 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은 여러 패배를 겪었다. 그 유목적 성격과 정상회담을 쫓아다니는 실천은 여러 경우 지역에서의 지속적 조직화에의 참여를 희석시켰다. 이 투쟁들은 종종 비판을 받았는데, 운동 내의 활동가들 자신들에 의해서 가장 크게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는 교차적 특징들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직적 취약성 때문에 투쟁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았다. 또한 9∙11 때문에 설치된 혹독한 보안체제들에 의해 봉쇄되었으며, 활동가들은 그 초점을 대안지구화에서 반전운동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 투쟁들의 이례적 미덕은 그 이론적 실천이다. 이 투쟁들은 전지구적인 비판적 비전을 구축했으며 전지구적 경제기구들이라는 상대적으로 불명료한 영역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명료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투쟁들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출현하는 전지구적 질서의 성격에 대한 방대한 집단적 공동연구로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활동가들은 현재의 지배 구조들이 바로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직감하고 있었다. 각 투쟁은 새로이 출현하는 전지구적 권력구조 네트워크의 마디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했다. WTO, World Bank, IMF, G8, 무역협정들 등등. 이렇듯 대안지구화 운동의 순환은 대대적인 교육프로젝트였다.

국민국가 주권의 이데올로그들이 나팔을 불어댐에도 불구하고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세력은 결코 약화되지 않았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덜 명료하게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지배적인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를 연구할 지성을 가진 투쟁의 국제적 순환을 필요로 한다. 때로 사회운동에서 이루어진 이론적 작업이 도서관에서 쓴 이론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전지구적 질서의 구조의 비가시성을 역전시키는 것이 제국의 구조들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데로 향하는 첫걸음이다.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 저자  : Peter Linebaugh, Sasha Liley
  • 원문 : Peter Linebaugh on the Long History of Pandemics (https://kpfa.org/episode/against-the-grain-april-8-2020/)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Pacifica radio>의 프로그램 ‘Against the Grain’에서 2020년 4월 8일에 있었던 싸샤 릴리(Sasha Liley)와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인터뷰 내용을 (약속한 대로^^) 정리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의 상황에서 라인보가 30년 전인 1989년에 쓴 팸플릿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메시지를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인터뷰 당사자들에 의해 읽기 좋게 편집된 텍스트는 정리자가 알기에 현재로서 없으며, 정리자가 직접 팟캐스트를 듣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리했다. 내용 정리이지만, 잘 읽힐 수 있도록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이미 정리해서 옮겼으니 서로 교차해서 참조할 수 있다.

라인보가 말하는 팬데믹의 긴 역사

싸샤 릴리(Sasha Liley)
인간의 역사 전체에 걸쳐서 바이러스들과 기생체들이 인간을 괴롭혀왔습니다. 계급사회의 출현 이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과 고통에서 이익을 취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기생체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역사가 피터 라인보(Perter Linebaugh)는 HIV 에이즈라는 유행병이 도는 와중에 이 역사를 추적한 바 있습니다. 라인보는 『마그나카르타 선언』(The Magna Carta Manifesto), 『메이데이의 완결되지 않은, 진실하고 진정하며 놀라운 역사』(The Incomplete, True, Authentic, and Wonderful History of May Day) 등의 저자입니다. 가장 최근의 저서로는 『뜨겁게 불타는 붉고 둥근 지구』(Red Round Globe Hot Burning)가 있습니다. 라인보, 당신은 1989년에 <ACT UP>(the Aids Coalition To Unleash Power, 민중의 힘을 촉발하기 위한 에이즈연합)에 관여하는 사람들에게 연대의 메시지를 전한 바 있는데요,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Lizard Talk”)라고 이름을 정한 팸플릿을 쓰게 된 맥락에 대해서 말씀 좀 해주시겠어요?

피터 라인보(Peter Linebaugh)
저는 보스턴에서 <ACT UP>이 한창 투쟁을 하는 가운데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저는 역병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 자체가 우리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전의 세계사에 일어났던 10개의 역병들을 간단히 알아보는 일이, [COVID-19 팬데믹을 겪고 있는] 지금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해온 싸움의 와중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줄 수 있으며, 그로써 이 질병을 인종주의적 방식으로, 동성애혐오증적 방식으로 그리고 타자에 대한 공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방식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에 맞서는 데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성되는 공포가 불안정과 공포의 조건에서 번성하는 신자유주의와의 연결고리입니다.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역병이 도는 때는 민중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때이지만 동시에 사회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고 썼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고대 그리스, 이집트로 가서 이 점에 대해 고찰합니다. 역사가의 눈으로 이러한 사회 질서의 전복 가능성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민중이 겪는 공포, 혼란 그리고 가난의 심화라는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또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측면에서요.

라인보
우선적으로 말해야 할 핵심은 전염병, 역병, 팬데믹이 치명적이라는 점, 즉 인간 개인들, 가족들, 공동체들을 파괴하며 때로는 인간의 생존 자체를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역병들은 사회적 삶의 재생산이라는 기획 일체와 필수적인 연관을 가집니다. 그래서 전염병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역사적인 힘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전염병들에 대한 여러 대응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가령 대략 2000년 전인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인간의 질병 유전자풀이 지중해 지역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최초로 혼합된 것이지요. 아마도 이는 대륙간 통상의 한 측면일 겁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종교들이 (일신론적 종교들입니다) 형성되었습니다. 칼 야스퍼스(Karl Jaspers)가 ‘기축시대’(axial age)를 말할 때 그는 이 종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Achsenzeit(Axial Age)’라는 말은 1949년 출간된 야스퍼스의 저서 『역사의 기원과 목표』(Vom Ursprung und Ziel der Geschichte, 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에 처음 등장하며, 기원전 800년에서 300년 사이에 페르시아, 인도, 중국, 그리스-로마의 종교와 철학에서 병렬적으로 새로운 사고방식들이 등장한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당시에는 도시국가라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도 형성되고 있었지요. 이때에는 사람들이 전염병들에 대해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이 질병들을 발생시킨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박테리아도 알지 못했고 바이러스도 알지 못했으며 세포생물학도 없었습니다. 수천 년을 지나 바로 우리 시대에 들어와서야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도시 전체가 지워져버릴 수도 있는 그러한 위기에서 그에 대한 여러 계급적 반응이 있었습니다. 저를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로 이끈 허스턴(Zola Neale Hurston)은 파라오와 맞선, 지팡이를 든 모세를 이야기합니다. 허스턴이 말하고 싶은 것은 역병·기근·기아를 마음대로 부리는 파라오를 물리치는 모세의 힘, 그의 대항마법(counter-magic)입니다. 이 대항마법은, 흑인 민속지식에 대한 허스턴의 지식에 따르면, 모세가 파라오의 마구간지기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이 마구간지기는 이 마법을 말들 사이에서 일하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을 모세에게 공짜로 준 것은 아닙니다. 모세는 멘투(Mentu)가 해주는 ‘도마뱀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자들에게 전염병들을 아래로부터 보기를 권하기 위해, 파라오나 벼락을 던져대는 야훼를 제시하는 위로부터의 역사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역사로서 보기를 권하기 위해 ‘lizard talk’라는 어구를 사용했습니다. [‘lizard talk’는 허스턴의 소설에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①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크게는 세상의 처음부터 지금까지의 역사, 작게는 인간의 여러 행동들에 대한 논평). ② 멘투가 도마뱀이 해주듯이 해주는 이야기(이야기의 내용은 ①과 같다). ③ 멘투가 해준, 도마뱀(및 기타 동물들)도 이러저러한 말을 한다는 이야기. 나중에 (멘투는 이미 죽고 없는 때이다) 모세는 ‘기억들의 보관자’(keeper of memories)인 ‘수염난 도마뱀’을 찾아간다. (이때 모세는 예전의 멘투처럼 도마뱀과 대화를 할 수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모세는 우연히 만난 늙은 도마뱀에게 ‘수염난 도마뱀’이 시나이 산에 있다는 말을 듣고 시나이 산을 찾아가는데 아마도 거기서 그가 ‘수염난 도마맴’에게 들을 ‘liard-talk’는 기독교의 정사에 나오는 야훼에게서 받은 십계명과 대조될 터이다. 전자는 아래로부터의(from below) 지식을 나타내고 후자는 위로부터의(from above) 지식을 나타낸다.]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 마구간지기의 이름인 ‘멘투’를 다시 언급하게 되니 반갑군요. 제 의도는 지상의 힘, 우리 인간의 힘, 우리의 공통적인 힘이 지배자들의 손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종종 우리도 잘 모르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말입니다. 이는 팬데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물론 팬데믹에 대한 지식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여러 모습의 멘투들에게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과학에서도, 경험에서도 오지요. 어떻든 저의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을 겪는 다중과 지배계급을 대조시키는 것, 힘의 두 형태를 대조시키는 것. 그것이 역사적인 역병들의 경우에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라오를 다룬 다음, 투키디데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의 역병들을 다루고, 로마 시대의 역병들을 다루며 물론 중세의 중앙 유럽을 강타한 큰 역병들을 다룹니다. 이런 식으로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라인보=도마뱀=멘투]

제가 <ACT UP>에 그런 메시지를 전한 것은 <ACT UP>이 우리에게 새로운 모델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ACT UP>의 현장 활동가들은 발견·조사를 하도록 촉구할 수 있었으며, 그 자신들이 깊이 고통을 겪은 사람들로서 치료를 낳을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결책이 질병을 겪는 사람들에게 남아있게 됩니다. 이것이 ‘공공보건의 커먼즈’(the commons of public health)의 주된 원리입니다.

릴리
우리가 사회적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으로 함께 모여야 하는데, 무심코 행한 사회적 상호작용조차도 바이러스를 퍼지게 할 수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팬데믹의 시기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모순입니다.

라인보
네, 정말 큰 모순입니다. 에이즈위기에서 우리가 배운 것, 그리고 이전의 전염병들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말했듯이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서 치료법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도시봉쇄(lock-down)는 아니지만―집에 있으면서 외출을 자제해야 하고 공동체적 관계들이 정지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간호, 배고픈 사람들을 돌보기, 죽은 사람들을 묻기와 같은 일들은 아무리 끔찍한 인간의 위기상황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애를 베푸는 인간의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픈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 죽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일하는 것은 대중모임의 금지나 기타 형태의 공동체적 활동들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애의 엄청난 재천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상업활동은 종종 가장 최소로, 혹은 가장 나중에 정지되지요.

릴리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팬데믹의 시기에 특징적인 것은, 당신이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고대 역사를 되돌아보며 말했듯이 상이한 이념들과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점입니다. 당신이 말했던 아래로부터의 지식과 같은 것도 있고 반대로 우리를 일종의 숙명론이나 현실수용적 태도로 몰고 가는 것도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제가 뜻하는 것은 가령 당신이 언급한, 옛날의 종교들이 팬데믹 시기에 한 복합적인 역할들 같은 것입니다.

라인보
네, 그러죠. 계급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두 방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억압계급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에도 적용되고 전염병들에도 적용됩니다. 제 생각에는 거의 모든 것에 적용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위로부터 사고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뉴스에서 들은 것,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지는 멘투를 다시 도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팸플릿은 종교의 사회학이 아니며 분명 포괄적이지도 않습니다. 저는 <ACT UP>의 활동에 고취되고 역병의 역사를 다룬 맥닐(William McNeill)의 책[Plagues and Peoples, 1976]에 촉발되어 이 팸플릿을 썼습니다.

아시겠지만, 최근 『네이션』(The Nation)지에서 『뉴요커』(The New Yorker)지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이 우리가 읽을 책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각자 집에 있는 동안 책을 읽으라는 거지요. 학자인 저도 책을 읽습니다만, 생각해보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Decameron)은 도시를 도망칠 여유가 있던 부유한 층을 위해서 그리고 그 부유한 층에 대해서 쓴 작품입니다. 『데카메론』에 담긴 이야기들은 모든 각본작가들의 책꽂이의 사전 옆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100개의 플롯들을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위해 다시 다듬기 위해서죠. 이 이야기들은 선페트스(bubonic plague)가 돌고 있던 1340년대에 동포 인간들을 놔두고 피렌체를 도망친 사람들이 스스로를 즐겁게 할 수단으로서 한 것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오락으로 의도된 형태의 작품이 지금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에요. 물론 이 이야기들 자체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당연히 대단한 이야기들이죠.

릴리
당신은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유행병의 문학은 도피의 문학이라고 썼습니다. 문학창작가들이 지배계급으로부터 보수를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대응은 그것이 존재할 경우에는 언제나 매우 위험합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이런 동학을 거론했습니다. 바로 지금 사람들이 생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상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현상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라인보
물론이죠, 저도 넷플릭스(Netflix) 앞에 딱 붙어 있습니다만, 이는 저에게 특별히 생산적이지 않습니다. 공공보건 전문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생산적입니다. 저는 가령 핫스팟이 되고 있는 여기 미시건주의 디트로이트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도 계속 알려줄 수 있는 공공보건 간호사에게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알싸이드 박사(Dr. Abdullah Al Said)가 COVID-19와 연관된 더 심층적인 하부구조 차원의 광범한 유행병에 대해서 하는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물 공급의 거부, 삶에서의 안전의 거부, 주택의 거부가 바로 이 하부구조 차원의 유행병입니다. 지구에서 가장 큰 담수저장소(fresh water reserve)가 있는 미시건 주인데 디트로이트에서는 물공급이 끊겼고 플린트에서는 물에 납이 섞여 들어갔습니다. [디트로이트 시 당국은 2014년부터 수도료를 내지 못하는 가구들에 수돗물의 공급을 끊었고 시민들은 이에 맞서 투쟁을 조직해왔다. 한 미시건 지역 뉴스잡지의 2020년 3월 26일자 기사에 따르면 2019년에만 23,000 가구에 수돗물 공급이 차단되었다. 시당국은 COVID-19 국면에서도 처음에는 이 물공급차단(water shutoffs) 정책을 유지하려 했는데, 손을 씻는 것이 COVID-19의 확산을 막는데 필수적이라는 여러 전문가들의 확정된 견해로 인해서 정책을 바꾸어 3월 9일에 수돗물 서비스를 재개했다. 월 25달러를 내면 수돗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데, 수도료 지불은 팬데믹 국면 이후로 연기된다. 디트로이트 시장은 팬데믹이 끝나면 다시 공급중지가 재개된다고 말했다. 한편 2014년 플린트 시는 수원을 디트로이트의 물(휴런Huron호)에서 플린트강물로 바꾸었는데, 물에 부식방지제를 넣지 못하여 오래된 관의 납이 침출되어 공급되는 물로 섞여 들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중금속 신경독을 발생시켰고 10만 명 이상이 주민들이 납에 노출되었다. 이와 관련된 본 블로그의 글로 http://commonstrans.net/?p=859 참조.]

이는 그저 악행이거나 사고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물에 대한 요구를 짓밟은 의도적 범죄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하는 것. 신선한 식품을 먹지 못하는 것, 지붕으로 비바람을 막지 못하는 것―이것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일으킨 COVID-19의 가속적인 확산의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알싸이드 박사는 (그는 디트로이트보건국의 국장을 지낸 바 있으며 존경받는 전염병학자입니다)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하며, 저도 과거의 역병들을 훑어보면서 각 역병이 그 당시에 인간이 창출한 사회·경제적 구조들과 특수한 연관을 가진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도시의 거주지이든 상업자본주의든 심지어는 미국과 같은 거대한 부르주아 공화국이든 말이죠.

아시다시피 미국은 인종주의 및 강도질[무엇보다 백인 정부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강탈한 것을 가리킨다]과 긴밀한 연관을 가진 곳입니다. 인종주의와 강도질은 흑인들이 당시 수도인 필라델피아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했던 1793년 황열병이 돌던 때에 생겨나서 매우 빠르게 퍼졌습니다. 이때 흑인들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았고 아픈 사람들을 간호했으며 시체들을 매장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면역력을 얻거나 황열병에서 살아남아서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이런 착한 사마리아인들이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로 악마화되었습니다. [‘아이티에서 온 사람들’은 1950년대에 오면 매카시즘의 ‘빨갱이’로 대체된다.] 이때 아이티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들 가운데 하나가 한창이었죠.

릴리
막 언급하신 시기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18세기 말에 그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황열병의 발발이 그 때의 정치를 아래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어떻게 형성했나요?

라인보
먼저 위로부터 일어난 일을 보면.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도시에서 도망쳤고요, 해밀턴(Alexander Hamilton)도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이 일신의 안전을 위해서 수도를 떠났어요. 이런 식으로 그들은 군사 공화국을 보존하여 오하이오강 계곡(the Ohio river valley)을 포위하고 애팔래치아산맥을 넘고 포타와토미족(Potawatomi)[미시시피강 상부와 오대호 서부에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쇼니족(Shawnee)[오하이오 계곡 지역에 살았던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및 기타 그곳에 사는 많은 부족들로부터 땅을 훔치는 데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황열병은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흑인들을 악마화했던 것입니다.

이때는 세계사에서 근본적인 중요성을 가진 두 일이 일어났던 때입니다. 그 하나는 황열병이 강타하기 몇 달 전인 1793년 2월,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특정 주에서 다른 주 또는 영토로 도망간 노예의 반환을 규정한 법]이 조지 워싱턴의 서명으로 통과된 일입니다. 이로써 백인우월주의(white supremacy), 미국 전체의 노예들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확대되었습니다. 둘째는, 1793년 봄에 일어난 일인데요, 조면기(the cotton gin)의 발명입니다.[발명가 휘트니Eli Whitney가 발명했으며 1794년에 특허를 획득했다.] 이 기술이 면화체제의 남부로의 확대, 인도의 면화생산의 파괴, 이집트와 오토만 제국의 면화생산의 파괴를 가능하게 하고 영국에서의 공장체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제 아래로부터 일어난 일을 봅시다. 우리 모두 1793년 황열병 발발 시 멘투가 누군지 알 것입니다. 한때 노예였던 압살롬 존스(Absalom Jones)와 리처드 앨런(Richard Allen)입니다. 앨런은 아프리카감리교감독교회(AME Church,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만들었고 이 교회는 그 이후 일종의 공동체가 유지되는 한 형태로서 존속했습니다. [존스와 앨런은 감리교에서 설교를 하도록 승인받은 흑인 목사 가운데 속했다. 존스와 앨런은 Free African Society (FAS)를 창립했으나, 1794년 이후 일의 방향이 달라서 각기 다른 길을 갔다. 둘은 평생 친구로서, 협력자로서 남아있었다.] 이는 백인우월주의가 가진 인종주의의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에서 [인종차별로 인해] 배격당한 바 있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분명 황열병의 결과로 아래로부터 일어난 다른 움직임들도 있을 것입니다.

릴리
남·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은 유럽인들이 남·북아메리카에 가져온 전염병이 끼친 엄청난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 점에 대해 말해주시겠습니까? 이른바 신세계의 발견과 남·북아메리카를 재형성하는 데서 질병과 정복이 교차하는 모습에 대해서요?

라인보
1420년과 1600년 사이에 14개의 유행병이 멕시코를 유린했고 17개가 페루를 강타했습니다. 대부분 천연두였습니다. 정복된 지 10년 만에 멕시코의 인구는 25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감소했으며 1620년쯤에는 200만 명으로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천연두 및 다른 두 전염병이 저지른 집단학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배운 것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광산에 가두고 과도하게 노동을 시킨 것이 이러한 거대한 말살을 거들었다는 점, 그래서 천연두의 확산과 착취의 형태들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매더(Cotton Mather)는 뉴잉글랜드에서 1616-1617년에 돈 전염병이 “저 해로운 자들을” 숲에서 몰아냈다고 했습니다. 집단학살에 전염병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죠. 이런 일은 한 세기 후인 1760년대에 앰허스트(Amherst) 장군에 의해서도 벌어졌는데, 그는 지금은 펜실베이니아인 곳의 원주민들을 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천연두 바이러스로 잔뜩 감염시킨 자선 담요들을 원주민들 사이에 배포했습니다.

이렇듯 이제 전염병은 전쟁의 도구, 지배계급의 도구, 집단학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의 이런 부분을 보면 끔찍하고 극악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계급파괴에 다시 한 번 굴복하지 않으려면 이것을 꼭 붙잡아 기억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제가 ‘계급파괴’라고 할 때 이는, 온갖 형태의 지배계급이 그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자의 일부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이 이른바 유럽과 아메리카의 최초의 조우 시기에 일어났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릴리
그것은 또한, 당신이 말한, 황열병에 의한 죽음과 노예상태와 광산에서의 과도한 노동으로 인한 죽음을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켜줍니다. 사회가 일종의 환경결정론[전염병은 자연적 환경에 의한 것이지 인재가 아니라는 생각]의 관점에서 전염병들을 받아들이도록 형성되어온 것으로 고대부터의 역사를 그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결정들)의 역할을, 사태의 사회적 맥락을 잊을 수 있고, 이른바 자연적 재해의 결과를 이해하는 데서 사회·정치적 맥락이 결정적임을 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라인보
물론입니다.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의 요점은 거시기생체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시기생체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사회·경제적 역사는 바이러스 같은 미생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릴리
「도마뱀이 해주는 이야기」에서 당신이 상기시켜주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유행병들이 지배층의 정치와 지배층의 대응들을 형성해온 역사를 기억해야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당신이 “우리 자신의 코뮤니즘의 상실된 역사”라고 부른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나요?

라인보
그것은 우리의 공통적 삶을 지속하고 유지하는 인간의 생존능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건커먼즈에의 접근, 공기·물·주택의 커먼즈(공통재)에의 접근을 유지하는 능력이지요. 이는 지배계급이 준 선물이 아닙니다. 지구에서의 우리의 삶을 위해 모두가 향유해온 커먼즈입니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지배체제 아래에서, 최근에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수 세기 동안, 더 최근에는 우리의 생애 동안 강탈된 것입니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이해하는 데 전적으로 필수적입니다. 자본주의가 물, 주택, 신선한 공기를 뺏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긴 공급사슬로부터 생기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이 공급사슬에서는 동력사슬톱에 굴복하고 자본주의적 농업에 굴복하는 숲으로부터 새로운 식품이 요구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생태지대들이 파괴되면서 가장 복잡한 생명체들의 일부가 파괴됩니다. 이와 함께 예전의 숙주를 잃은 미시기생체들이 생기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도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듯합니다. 저는 지금 최근에 『먼슬리리뷰』(Monthly Review)에 글을 실은 네 명의 과학자들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COVID-19 and Circuits of Capital” by Rob Wallace, Alex Liebman, Luis Fernando Chaves and Rodrick Wallace, https://monthlyreview.org/2020/04/01/covid-19-and-circuits-of-capital/ ] 이들은 “공공보건의 공유된 커먼즈”에 대해 말합니다. 이들은 또한 우리, 즉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질병 방어능력이 수십 년 동안의 신자유주의로 인해서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공립학교들, 공립병원들, 공공주택, 물에 대한 권리, 공기에 대한 권리가 갑자기, 혹은 단계적으로, 혹은 부채라는 교활한 형태로 강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미시기생체들에 취약해진 것입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지난주만 해도 공기가 좀 신선해진 틈을 타서 트럼프가 자동차에 대한, 내연기관에 대한 오염통제와 관련된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공기가, 우리의 폐가 깨끗해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을 틈타서 몰래 해치운 것이죠. 이는 정말로 사악하고 파괴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파괴를 심화시킬 뿐입니다. 폐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이 네 명의 저자들, 이 전염병학자들 썼듯이 삼림과 그 생태의 파괴가 코로나 바이러스의 출현과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폐만큼이나 삼림이라는 지구의 폐도 도움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아마존의 파괴와 볼쏘나로(Bolsonaro)[브라질의 현 대통령]의 무지한 권력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릴리
이 팬데믹이 전지구적 위기가 되면서 일시적으로든 어떻든 다른 전지구적 위기, 즉 기후위기를 우리의 관심에서 좀 멀어지게 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물론 사회적 거리두기나 재택근무 등의 조치들이 자동차의 사용을 크게 막고 탄소방출 수준을 낮추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당신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오신 것으로 압니다만.

라인보
현 국면은 아이러니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뉴욕에서는 정치가들이 많은 수의 홈리스들에 눈물을 흘리는 반면 많은 호텔들이 손님이 없어서 연방정부의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공기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고 폐와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으며 탄소방출과 관련해서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현 국면은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집으로부터 쫓아내는 일의 중지를 원하며 부채의 탕감을 원합니다. 우리는 단일건강보험자체제(single payer health system)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주자들을 억류 상태에서 풀어주기를 원합니다. 이미 일부 수감자들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학자금 대출금의 탕감을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이 전반적으로 속도를 늦추는 맥락에서의 일입니다. 바삐 서두르는 시간은 끝났습니다. 내 친구 중 하나는 하늘에 비행기가 없고 거리에 차가 없다고 썼습니다. 물론 이는 비상조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많은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이런 상태가 새로운 세계의 토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선한 공기의 세계, 더 차분한 세계, 바삐 서두르는 조급함이 없는 세계, 모든 시간이 사업의 시간이 되는 일이 없는 세계,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세계, 수감이 없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합니다. 이런 가능성들을 우리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가능성들은 바로 우리의 창문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릴리
팬데믹을 겪으면서야 이런 상태에 도달한 것이 좀 놀랍습니다. 세상의 종말,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기란 쉽다고 종종 (필시 너무 많이) 말해졌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의 종말이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자본주의는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상상력의 위기를 느끼면서) 우리는 공포와 불안의 와중에서 (이 측면을 과소평가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우리의 삶이 일상적인 측면에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기 시작했고 어떤 일이 중요하고 어떤 일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어떤 일이 사용가치들을 창출하는지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돌봄노동, 쓰레기처리, 식량을 재배하고 공급하기―이런 일들은 중요한 반면 다른 일들은 불필요했습니다. 상위 10%로의 부의 대대적인 집중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매력적인 가능성의 순간입니다. 몇 달 만에, 불안과 불평등의 상황에서 이런 순간이 온 것이죠.

라인보
물론입니다. 완전히 동의합니다. 아시다시피, 메이데이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달 말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저는 1886년 시카고에서 전염병이 했던 역할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는 8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의 때였지요. 참, 이제는 옛날 일이네요. 요즘 누가 8시간 이상 노동을 하나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갑자기 0시간 노동을 강제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0시간 노동을 하는 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앞에서 저는 독서에 대해서 말했는데요··· 우리는 정말로 속도를 늦추고 더 생각하기 시작할 수, 더 잘 생각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나 연방정부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과 우리 자신과 우리의 이웃들을 돌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 돌보는 일을 하려고 하며 저도 그런 쪽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우리의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이것을 요구하기 위해서 노동을 중단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개인을 보호하는 도구로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총기판매점이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바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항상적인 공포 속에서 사는 자들의 삶의 한 편린일 뿐입니다. 다른 가능성들이 있음을 보는 것이 이토록 쉬운 때에 공포 속에서 살 필요가 없습니다.

릴리
물론 지금과 같은 순간에 우리가 맞서 투쟁해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는 전염병을 인종화하는 경향, 질병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와서 우리에게 퍼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트럼프가 이런 경향에 부채질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라인보
18세기 말에 개발된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체제인 백인우월주의의 중심 개념인 인종 개념의 큰 부분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를 생물학적으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그 차이가 상이한 기생체들, 질병들과 연결되면 이것이 더 나아가 인종 개념을 구성할 요소들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언급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저의 저작이나 다른 이들의 저작이 보여준 바지만, 이런 과정들 가운데 ‘타자의 악마화’를 포함한 다수가 전통적으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리는 집단에 대하여 일어났습니다. 프롤레타리아는 항상 냄새와 연관되고 때(dirt)와 연관되고 불결함과 연관되었습니다. 이렇듯 지배계급의 차별적 순결 코드가 모든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바로 이로부터 인종과 백인우월주의라는 변종이 생겨나는 것이죠. 이제 이것이 그 추한 고개를 다시 쳐들려고 합니다. 제 생각에는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제가 알기로···[‘없는 듯합니다라는 말을 하려다 생략한 것으로 추정됨]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는 매우 겸손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을 얻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디트로이트에서 멘투들과 민중에 의해서 아래로부터 일어난, 신선한 물을 요구하는 엄청난 투쟁을 보세요. 디트로이트는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올리언스도 큰 흑인도시입니다. 뉴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도시들은 흑인 문명의 수도들이며, 이로부터 모두가 혜택을 받습니다. 그런데 현재로서는 간접적인 것 말고는 지배계급[백인들]의 반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흑인 친구들과 동지들은 매우 옳게도 다소 걱정하고 조심하며 지냅니다.

릴리
당신이 언급한, 그리고 책에서 많이 다룬 메이데이에 대한 물음으로 오늘 인터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몇 주 후면 메이데이가 오는데요, 우리가 억압받지 않는 세상, 지배자들이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전과 관련하여 메이데이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요?

라인보
메이데이는 위대한 재생산의 순간, 지구의 재생산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주위의 생명체들에서, 식물들이나 동물들에서 봅니다. 메이데이는 5월이고 봄이요 삶의 부활입니다. 또한 근대 세계의 역사에서, 끝없는 노동과 고역에 맞서 투쟁해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에서 놀이와 투쟁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의 메이데이는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시작되어 빠르게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군사주의나 전체주의의 행사로서 퍼진 것이 아니라 집단성의 행사로서 퍼졌습니다. 올해의 메이데이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전이 될 듯합니다. 확신컨대, 이 도전으로부터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메이데이를 축하하는 새로운 방식을 발견할 것입니다. 되풀이하건대, 메이데이는 지구상의 기쁨의 순간이요 재생산의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는 출산이 고통을 동반하듯이 투쟁과 함께 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고통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거시기생체들에 맞서는 것입니다.((메이데이에 대한 라인보의 상세한 설명을 보려면 도서출판 갈무리의 신간 『메이데이』(2020)를 참조하기 바란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2)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 1편 : http://commonstrans.net/?p=1817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커먼즈의 리더쉽이 다중의 전략과 리더의 전술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리더는 다중의 일반적 전략 내에서 자신의 전문성에 따라서 오직 일시적으로만 일정한 전술적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죠. 이러한 리더쉽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습니까? 또한 다중에게 전략을, 리더에게 전술을 할당하는 당신의 이러한 전도(顚倒), 마찬가지로 지도자들이 단지 일시적으로만 임명되는 대의민주주의와 얼마나 다른 것입니까?

답 : 나는 우리가 운동과 지도자 사이에서 작동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제거되거나 약화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결정 권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정당들의 공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당은 일정한 정치적 노선을 따라 다수의 사람들을 결집합니다. 이때 정치적 노선은 리더나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어 하향식으로 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부과되거나 교육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운동들은 기존의 제도들을 거부하고 있으며, 『어셈블리』에서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의 이러한 비판을 우리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리더쉽은 거부하되, 제도 그 자체를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재 우리는 제도의 문제를 마주하고 있고, 함께 연구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바꿔 말하자면, 리더쉽을 운동으로 다시 가져오되, 리더쉽의 헤게모니적 전략은 반드시 운동 내부에서 발전되어야 합니다. 리더로부터 결정 권한을 분리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리더로부터 결정의 추상성과 초월성을 제거해야 합니다.

 

: 하지만 리더는 어떻게 선택되는 것입니까? 커먼즈는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문제는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택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진짜 문제는 리더에게 주어지는 힘의 성격입니다. 오늘날 운동들에서 리더는 꽤 자주 다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의 힘은 전술적 차원에 국한되어야 하며, 이는 보통 제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근래의 운동에서 활동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군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리더가 되는 현상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은 운동이 직면한 현실적 필요 및 문제에 대해 리더로 나선 누군가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통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종 어떻게 한 리더의 힘이 일정한 시점에 인정되고, 개시되며, 잘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하나의 현실이 되는지를 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1917년 혁명 때 레닌은 당시 제기되었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답 ― 지금 당장 평화를, 그리고 농장노동자들에게 토지를 ― 을 즉각,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전술적 리더가 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군대와 농민을 대표하던 권력들은 병사들도, 농장노동자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때문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죠. 레닌은 리더로서 저 지배제도들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되는 전술의 사례입니다.

리더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전술적입니다. 그는 요구와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 주체들의 투쟁에 자신의 능력을 보태기 위해 나서는 사람입니다.

 

: 그렇다면 리더는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그가 사람들로부터, 그들 가운데서 나왔기 때문인가요?

바로 그렇습니다. 리더는 그 자신이 사람들이 제기하는 요구와 필요의 일부이고, 그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공식적인 역사에 따르면, 레닌은 민중과 게임을 벌인 정치선동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가 진실이라는 것을 압니다. 혁명이 성공했던 것은, 레닌이 평화와 토지가 민중의 진정한 요구이자 필요임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리고 의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온갖 타협들, 문제를 망가뜨릴 뿐인 우회로와 제도들 없이 직접적으로 분명하게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많은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독일과 맞서 싸우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수/공통적인 것의 욕구 및 필요와 즉각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리더, 바로 이것이 요점입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제도 혹은 리더가 반드시 중앙집중적인 지배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며, 다중에 의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다는 가설을 옹호합니다. 당신이 운동들의 미래로 제시하는 사례들 가령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은 이러한 가정의 연장선에 있지요. 하지만 이러한 관념과 사례들은 수평적 리더 부재’(horizontal leaderless)에 대한 당신의 비판에 잘 들어맞지 않거나 심지어 그것에 반대되지 않습니까?

답 : 많은 운동들이 리더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적인 것, 혹은 이 운동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제도입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운동들이 리더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도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들이 제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제도적 틀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마이클과 나는 운동들 내부에서 제도를 형성하고 그로써 수평적 헤게모니를 현실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작업은 주권적이지 않고 소유와 연결되지 않는 유형의 제도를 물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제도가 실천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가 바로 우리가 토론하고 고민하고 시험해야 하는 바일 겁니다.

 

: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연결되는군요. 당신은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 적대적 개혁주의(antagonistic reformism) 그리고 헤게모니라는 세 가지 정치전략들의 상호보완성을 이야기합니다. 기존 제도들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비()주권적 제도들이 만들어질 때, 기존 제도에서 폐기되어야 할 것은 정확히 무엇입니까?

답 : 우리는 현재 19세기와 20세기에 정치적 사유와 실천을 지배했던 개념들이 죽음을 앞두고 벌이는 마지막 싸움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 죽어가는 개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국가주권과 소유(공적 소유와 사적 소유 모두를 포함하는 소유)입니다. 민족국가주권은 지구화된 자본주의에 의해 약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적 자본주의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상호 지지하는, 저 근근히 생존을 유지하고 있는 두 개념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민족국가주권이 기초하는 개념 혹은 원리, 특히 ‘국경’은 현재 정말 부조리한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이 국경을 초월하고 넘나듭니다. 우리의 두뇌는 이미 지구화되어 있고 더 이상 국경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국경과 같이 빈사 상태의 원리와 개념들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론적 작업입니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모두 아우르는 소유의 문제 역시 마찬가집니다. 소유는 국경과 동일한 논리에 기초해 있으며, 그것만큼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개념입니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공유재(common goods, beni comuni)’와 ‘공통체(commonwealth)’에 있는 것으로서의 ‘공통적인 것(the common, il comune)’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전자는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의 생산, 내부로부터 공통적인 것 자체에 의해 늘 새롭게 형성되는 무언가이며 따라서 결코 소유될 수 없는 것입니다.

 

: 새로운 비주권적제도들이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무언가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 정치적 전략들, 즉 예시적 정치, 적대적 개혁주의, 제도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정확히 어떻게 함께 작동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 가지 전략들이 따라야 하는 순서가 있습니까, 아니면 나란히 진행되어야 합니까?

답 :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세 가지 정치적 전략은 정치적 실천에 관한 문제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건 불가능한 동시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나의 작업은 연구하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 일반적 틀들을 비판적 방식으로 제공하는 것, 담론의 토대를 탐사하는 것, 원칙과 개념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투쟁의 실천은 이것과 다른 문제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토론과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바로 그 투쟁 내부에서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며, 그렇게 하고자 하는 야심을 갖고 있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가 스스로를 알리고 발생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핵심적인 이슈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래는 실천 속에서 만들어질 것입니다. 반면 나는 나의 작업이 방향을 가리키고, 아이디어와 구조의 원칙들에 대한 비판을 정식화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어셈블리에서 당신은 다음과 같은 헤겔의 말을 인용합니다. “모든 것은 참()을 실체로서뿐만 아니라 동일하게 주체로서도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에 달려 있다.” 주체성이란 당신에게 정확히 무엇입니까? 오늘날 주체성은 다른 형태를 띨 수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입니까?

답 : 헤겔에게 주체성은 종합과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주인-노예 변증법에 대한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해석을 생각해보세요. 노예는, 주인을 섬기는 동시에 주인을 주인으로 구성하는 한에서 주인을 극복합니다. 젊은 시기 맑스의 작업에서 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프롤레타리아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 사회에 완전히 통합된 부분이 되는 한에서만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형성하고 자신의 기획을 실현합니다. 그러나 『자본』에는 더 이상 이런 해석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 노동자들의 현실에 대한 우리의 분석 또한 그러한 해석을 따르지 않습니다.

현 시기 노동자의 주체성은 특이성입니다.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이 구성되는 가운데 생산됩니다. 역으로 특이성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참여합니다. 오늘날 주체성은 혁신이자 초과라는 의미에서, ‘존재’의 생산입니다. 그것은 자유의 실천이며, 따라서 주체성의 생산은 어떠한 동일성-정체성도 넘어서는 무언가입니다. 주체는 동일성-정체성이 아니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주체는 협력 속에서, 사회적 존재 속에서 형성되며, 그러한 한에서 역사적인 것입니다.

 

: 어셈블리의 조직화에서 예술과 예술계의 역할을 어떻게 보십니까? 한편으로 우리는, 오늘날 예술계가 전시회와 비엔날레 등에서 주류 미디어가 제공하지 못하는 교류와 토론의 공간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계가 결코 한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전시회와 비엔날레들은 종종 홍보 수단으로 쓰이며 토론을 상품으로 바꿀 뿐이라고 결론 짓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정을 염두에 둘 때, 당신이 보기에 예술계 혹은 예술 그 자체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커먼즈를 형성하고 강화하는 데 그것이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이 있기는 한 걸까요?

답 : 『예술과 다중』(1989)에서 이야기한 바 있듯이, 예술은 언제나 그것이 생산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논의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생산입니다. 예술의 존엄성은 그것이 ‘존재’의 생산, 의미있는 이미지들의 생산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옵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존재’를 형성하는 이미지, 숨겨진 조건으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개방된 조건으로 변형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이런 일은 언제나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일정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화 일반이 생산되는 방식과 예술이 생산되는 방식 사이에 유비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예술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구축한다는 의미의 ‘만듦(making)’이 이루어집니다. 예술은 언제나 일정한 형태의 짓기, 조립하기, 생산적 제스처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일정한 구분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확합니다. 자신을 상품으로 마케팅하는 예술이 있는가 하면, 생산적인 예술적 만듦의 형태도 있는 것이지요.

언어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소통을 생산하고 연결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술은, 연결을 구성하고 사건이 된다는 점에서 언어의 실천과 유사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물질성을 제거하고 비물질적 생산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예술은 비물질적 생산과 동일한 흐름을 따르며, 유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새로운 이미지들과 예기치 못한 형태와 형상들 속에서 연결들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예술은 스스로를 현재의 생산양식과 결합하며, 이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사건 및 정념들과 관련된 행위들을 해석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술의 변신(metamorphosis)을 목격하는 국면에 있습니다. 노동이 스스로를 완전히 변형하는 생산양식의 국면에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예술과 관련하여 나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예술은 ‘만듦’의 한 형식이며, 따라서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의 생산양식과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째, 예술은 ‘존재’를 생산하는 능력을 갖습니다. 물론 모든 예술이 언제나 진정한 ‘존재’를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이 존재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에 복무하며 시장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예술과 ‘존재’를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생산으로서의 예술은 분명히 구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사람들은 맑스를 읽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열린 <documenta 14>에서는 매우 강한 의미의 정치적 예술이 선보여져서 네덜란드의 전국신문인 <NRC Handelsblad>혁명을 위한 무대라는 표현을 쓸 정도였죠. 그러나 동시에 이 혁명적 플랫폼들은 비엔날레와 도큐멘타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는 발터 벤야민이 정치의 미학화라고 칭했던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것은 파시즘의 징후이기도 하지요 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습니다. 예술이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파시즘 그 자체를 긍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분명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며 예술을 상품으로 전환하는 제도들로부터 예술이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 : 탈출의 길은 언제나 있습니다! 말씀하신 공간들은 명확히 전장(戰場)으로, 대결과 충돌, 갈등과 균열의 장소로 간주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엔날레와 도큐멘타가 대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국가 혹은 시장의 이 거대한 예술제도들은 통제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는데, 이러한 통제기능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가능하며 또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들과 정확히 같은 조건에 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제도들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것들은 경기장,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경기장, 이데올로기 비판과 생산의 경기장입니다. 권력의 담론이 드러나는 곳인 동시에 또한 언제나 시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와 시장에 의한 이 통제의 우리(cage)로부터 탈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탈출은 언제나 예술의 발전의 일부를 이루어 왔습니다. 예술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다수의 상이한 형태로 스스로를 드러내 왔습니다. 가령 한때는 오늘날 예술제도들과 동일한 역할을 담지했던 예술의 후원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도 문제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에 맞서 예술이 수행해온 끊임없는 저항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나는 예술이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편에 선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대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화가들과 조각가들이 그랬고, 네덜란드 ‘황금기’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술에는 그 예술적 생산에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단절의 지점들이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저 화가와 예술가들이 그들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의 분리불가능한 부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이 단절의 지점들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진리를 밝히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절의 지점들이 예술에 진리의 양식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죠.

나는 종종 예술가 친구들-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들은 점점 더 시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절 계급투쟁을 강하게 신뢰하거나 그것에 공감하는 동지들의 행위에는 시장에 대한 일반적인 저항이 존재합니다. 시장에 대한 거부는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와 항의는 타협 없는 근본적인 비판을 낳습니다.

물론 종종 ‘무(nothing)’의 강한 유혹, 행위하지 않고 만들지 않으려는 유혹, 혹은 ‘하지-않음(not-doing)’/‘만들지-않음(not-making)’을 표현하는 예술작품을 제시하려는 유혹 또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서 신중한 편이며, 모든 행위에는 ― 따라서 예술 행위에도 ― 물질적 구성이 요구되고, 그러므로 현실과 관련을 갖는 구성 역시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순수성을 추구하거나 힘을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지상(地上)의 소금: 공통주의에 대하여 ― 네그리 인터뷰 (1)


  • 저자  : Antonio Negri,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원문 : “The Salt of the Earth. On Commonism: An Interview with Antonio Negri,” in Commonism: A New Aesthetics of the Real, ed. Nico Dockx, Pascal Gielen, Valiz, 2018, pp. 91-116.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윤영광
  • 설명 : 『공통주의: 실재적인 것의 새로운 미학』(2018)의 저자들인 벨기에의 사회학자 Pascal Gielen과 철학자 Sonja Lavaert가 네그리를 상대로 2018년 8월 18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정리자의 판단에 따라 생략한 부분이 있으며 나머지도 엄밀한 의미의 번역은 아닌 내용 정리지만, 가독성을 위해 인터뷰의 형식과 어투는 유지했다. 분량을 고려해서 세 차례에 걸쳐 나누어 게재한다. 이미지는 인터뷰 중에 언급되는 이탈리아 나폴리 <Ex Asilo Filangieri>의 홈페이지(http://www.exasilofilangieri.it/)에서 가져온 것으로, 나폴리에 있는 ‘해방공간’들의 연결을 나타낸다.
  • 2편 : http://commonstrans.net/?p=1832
  • 3편 : http://commonstrans.net/?p=1853

 

마이틀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어셈블리』(Assembly, 2017)를 통해 『제국』(2000), 『다중』(2004>, 『공통체』(2009) 3부작을 다시 새로운 10년으로, 4부작으로 확장시켰다. 네 번째 책에서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이번에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소망을 표현하고 공통적인 것이 하나의 사실임을 보여주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왔는가이다. 『어셈블리』에서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쉽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성(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우리는 파리에 있는 네그리의 집에서 그를 만났으며, 역전을 위한 방법을 검토하고, 전략과 전술, 이데올로기와 미학, 예술과 언어에 대해 토론했다.

― Pascal Gielen, Sonja Lavaert

 

: 우리의 책 공통주의는 이데올로기, 미학, 커먼즈가 이루는 삼각형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잠정적인 생각은, 공통주의가 신자유주의 이후의 후속 메타이데올로기(meta-ideology)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뿐만 아니라, 픽션과 현실을 연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삶의 더 나은 형태를 갈망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할 수 있는 믿음의 논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셈블리에서 당신과 마이클은 기업가성’, ‘제도’, ‘리더쉽등과 같은 개념들로 우리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신은 그것이 긍정적인 내러티브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답 : 내 경험상 이데올로기는 대개 부정적인 함축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데올로기’를 주로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현실적인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구현하고 형성하며 구성하는 현실적인 무언가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구현에서 내가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은 비판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고 현실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 과 (사유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의 이행으로 이해되는) 장치(dispositive)입니다. 이데올로기들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맞지만, 나는 그 용어를 주로 그것의 부정적 측면을 이야기할 때 쓰는 쪽을 선호하며, 긍정적인 측면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이나 장치라는 용어를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현실에 대해 생각할 때 그리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할 때 이데올로기적 차원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이데올로기는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람시가 이데올로기를 이런 식으로 보았습니다. 한편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람시가 반대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우리가 지지하는)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날 코뮤니스트 이데올로기를 비판이나 장치 ― 비판은 지식과 지성의 영역에 관한 것이고, 장치는 지식에서 행위로의 이행이라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장치입니다 ― 로 부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메타-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메타’, ‘포스트’, ‘이후(after)’와 같은 말들을 쓰는 것을 매우 꺼립니다. 그 말들은 초재적인(transcendent) 무언가 혹은 초재성의 공간과 같은 무언가가 있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메타이데올로기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좌파와 우파 사이의 전통적인 정당정치적 차이들을 초월하는 경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공통적인 것이라는 테마가 취해지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통적인 것의 이니셔티브가 전개되고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경향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인들이 기본소득의 중요성에 대한 책을 쓰고, 신민족주의(neonationalism)가 스스로를 사회적 화합을 갈망하는 것으로 제시하며, 종교적 영감에 기반한 정당들이 공유와 공동체를 강조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답 : 공통적인 것은 좌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맑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보면, 자본주의가 이윤을 낳는 것으로 변형한 것이 다름 아닌 커먼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커먼즈에 대한 자본주의의 태도는 수탈, 개발, 잉여가치 창출, 그리고 이것들에 기반한 지배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 형태, 즉 자연적 커먼즈와 사회적 커먼즈로 존재합니다. 마이클과 내가 『어셈블리』에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1) 지구와 생태계, 2) 아이디어, 코드, 이미지, 문화적 생산물과 같은 비물질적 커먼즈, 3) 노동의 협력을 통해 생산되는 물질적 재화, 4) 소통, 문화적 상호작용, 협력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와 지방들, 5) 주거, 복지, 의료, 교육 등을 제공하는 사회적 제도와 서비스들. 오늘날 경제와 사회의 본질적 특징은, 자본이 커먼즈의 사회적 생산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커먼즈의 투쟁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자본에게 강탈당한 것을 재전유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빼앗긴 것을 재전유해서 그것이 공통적인 것에 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것이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는 또한 ‘포스트’ 혹은 ‘메타’와 같은 허구의 정체가 폭로되고 제거됨을 의미합니다. ‘메타’라는 것은 없습니다. 커먼즈의 투쟁은 ‘외부’(위[메타], 이후[포스트])를 제거할 가능성입니다. 이 투쟁은 전적으로 내재성의 지평, 즉 여기와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현실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외부’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일반적이고 일원적이며 정확히 정의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단지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에서 그것은 언제나 이중적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 혹은 커먼즈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며, 다양한 운동과 학파들이 커먼즈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출현했습니다. 가령 여기 프랑스에는 『공통적인 것들의 귀환』(Le retour des communs, 2015)의 편집자 Benjamin Coriat의 학파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Commun, 2014)에서 공통적인 것을 하나의 요구이자 대안으로 정립하는 Pierre Dardot와 Christian Laval도 있습니다. 공통적인 것을 존재론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무언가로 간주하며 투쟁을 공통적인 것을 재전유하는 문제로 이해하는 Carlo Vercellone를 비롯한 다른 동지들 ― 마이클과 나도 이에 속합니다 ― 도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입장은 또한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독해와도 연결됩니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매우 상세하게 그의 분석을 논의했고 또 대부분 그에 동의합니다. 다만, 하비가 끊임없는 원시적 축적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우리는 자본주의가 발전적 국면들을 갖는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형식적 포섭과 실질적 포섭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 다르긴 합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가 ‘메타’라는 용어를 선호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좌파와 우파 사이에 더 이상 차이나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좌파와 우파는 정확하지 않은 개념들이긴 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보죠. ‘메타’라는 말은 자본주의가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무언가 혹은 심지어 이미 우리가 승리한 전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선호하지 않는 것입니다.]

 

: 벨기에 플랑드르(Flandre)의 자유주의 정당인 <Open VLD>(Open Vlaamse Liberalen en Democraten)가 커먼즈에 관한 컨퍼런스를 조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반드시 커먼즈를 자본화하기를 원하지는 않으며, 커먼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주의 시스템에 결여되어 있는 무언가를 알아보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답 : 오늘날 우리가 엄청난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산 시스템의 일반적 변형을 보고 있습니다. 자동화되고 로봇화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40여년 전 <이탈리아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operaismo)> 운동에서 이러한 것들을 주제화하고 분석한 바 있습니다. 1969년 『노동자의 힘』(Potere Operaio) 창간호에서 우리는 ‘시민소득’(reddito di cittadinanza)을 요구했는데, 이는 그때 이미 노동이 생산에서 완전히 부차적인 요소로 축소되는 이러한 경향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과 현실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며, 나는 대안적 이니셔티브를 발전시키기 위한 자본주의 외부의 공간들을 만들어내야 할 매우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벨기에에는 많은 흥미로운 대안적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P2P 재단>의 창립자인 미셸 바우웬스와 많은 스타트업들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커먼즈는 ‘우파’의 구미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역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전적으로, 무엇이 대안일 수 있는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며, 사실 이것이야말로 다름 아닌 자율의 문제입니다.

 

: 우리는 연구와 책에서 미학(감성학, aesthetic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예술과 관련해서뿐만 아니라 사회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미학을, 물질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것들을, 사람들을 만들거나 디자인하는 일에 관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당신의 책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이디어를 봅니다. 어셈블리는 커먼즈의 미학적 스타일과 전략을 특징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통주의에서 우리는, 우리가 교환가치,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와 연결시키는 추상(abstraction)과 관련된 미학적 형상에 반대합니다. 당신에 보기에 이상적인 어셈블리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조건들은 무엇입니까? 인간들(사물, 자연)은 어떻게 어셈블리에 함께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도구 혹은 전략이 필요합니까? 요컨대 당신이 보기에 어셈블리가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실천적으로 어떻게 조직되어야 합니까?

답 : 우리는 어셈블리가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셈블리는 노동이 언어 속에서, 그리고 자율적인 협력 속에서 스스로를 변형하는 현재의 경제구조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미 어셈블리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주체성을 생산하는 이 노동력 혹은 주체/사람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정치적 주체화는 공통적인 것의 인식에 의해, 공통적인 것과 함께-함으로의 이행에 의해, 함께-함을 단순히 발견하는 것에서 명확히 이해하는 것으로의 이행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협력과 ‘공통적으로 존재함’(being-in-common)에서 공통적 주체성의 생산으로의 이행이 어셈블리의 중심적 요소입니다.

월스트리트점거운동에서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Idignados) 운동에까지 이르는 싸움에 참여했던 동지들과 활동가들은 바로 그러한 이행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특히, 자본주의적 통제하에서 생산하고 있으며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그저 우연히 그들에게 주어진 것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조건에서, 공통적인 것이 건설되고 형성되는 자유로운 조건으로의 이행을 위해서 말이죠. 이러한 이행은 근본적인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한데 모아지고 조직되었던 예전보다 오늘날 훨씬 더 공통주의가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합니다. 과거에, 노동자들은 자율적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불러 모아졌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달라졌으며, 바로 이것이 가능성들에 엄청난 힘을 부여합니다. 이처럼 함께-함이라는 하나의 존재론적 사실이 출발점으로 주어져있기 때문에, 오늘날 해방의 가능성은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넓습니다.

요는, 어셈블리는 정치적으로 되어야 하는 존재론적 사실이라는 것이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맑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말하기를, 노동계급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정치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정당, 외부조직, 이데올로기 등등을 통해 자신들의 상황을 인식하게 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노동과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에, 성숙과 독창적인 조직의 출현을 봅니다. 오늘날 노동은 더 이상 명령에 종속된 노동이 아닙니다. 명령은 주체적으로 함께 일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점점 더 소외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에 의해 형성되는 언어가 명령에 선행한다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의 중요성은, 이러한 자율적 언어 사용이 뒤집어질 수 있고 그리하여 자본에 의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날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작업은, 이러한 주체적이고 특별한 언어의 사용을 인식하고,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뒤집어놓은 것을 다시 뒤집어서 해방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 여전히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셈블리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죠. 사회학자로서 말해보자면, 우리는 나폴리의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어셈블리의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셈블리는 조직하고, 자율적인 결정들을 내리고, 자기통치를 달성하는 하나의 도구, 모임 방법, 보다 민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답 : 마이클과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Ex Asilo Filangieri>와 같은 유형의 현상입니다. 거기서 주권은 공통적인 것 쪽으로,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공유 재화들(공통선, beni communi)의 공간 쪽으로 뒤집어져 있습니다. 공통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일련의 주목할만한 이니셔티브들이 취해지는 것이지요.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생산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창안되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것입니다. 어셈블리는, (물질적이거나 비물질적인) 공유재화들을 잘 관리하고 그리하여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는 다중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어셈블리의 근본적인 측면은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다시 결합된다는 데 있으며, 오늘날 우리는 이 일을 해낼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러시아혁명 당시 레닌은 오직 기아와 전쟁, 파국만이 존재하며 새로운 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야 했던 예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레닌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어셈블리를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변형할 기회가 있습니다. 힘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정치입니다. 혹은, 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형태와 힘을 부여하는 것을 미학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힘 없이는 형태도 없습니다. 정치는 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폭력의 측면을 포함합니다. 정치에서 평화의 구축은 힘(때로는 폭력)에 관한 것입니다.

 




이란에서 대의정치의 위기


  • 저자  :  Rahman Bouzari
  • 원문 : An Iranian crisis of representation(2019. 11. 22)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 분류 : 번역
  • 정리자 : 에스페라
  • 설명 : [정백수]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바이지만, 주류 언론을 통해서는 세상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힘들다. 이 언론들은 거기에 봉사하는 개인들의 자질과 무관하게 구조적으로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다. 이 구조적인 눈멂의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이들은 기본적으로 국가를 중심으로 세상을 본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삶은 민중에게 있으며 국가는 이 삶을 돕거나 해치거나이다. 그래서 민중의 삶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 국가의 움직임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이글에서 우리는 이란 민중의 삶의 실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란과 미국의 군사적 충돌을, 국가들 사이의 이 ‘전쟁놀이’를 이란 민중의 삶에 중심을 두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라만 부자리(Rahman Bouzari)는 이란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개혁주의 신문 가운데 하나인 <샤그 데일리>(Shargh Daily)의 저널리스트이다. 그의 다른 글로 “How the Mass Media Misread the Iranian Protests”(2018. 1. 24)가 있다.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일어난 봉기들은 이란의 정치 지형을 영구히 바꿔놓았다. 그때 이후로 이란은 아주 훌륭한 ‘유기적 위기’로 진입해오고 있다. 한 세기 전에 이탈리아의 맑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가 처음 소개하고 설명한 이 위기는 지배 계급들이 더 이상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광범위한 경제·정치·사회 그리고 이념의 위기이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그의 『옥중수고』(Prison Notebooks)에서 “정치 공백기에는 온갖 종류의 병적 증상들이 나타난다”라고 썼다.

이란에서 나타나는 명백히 병적인 증상들에는 실업, 스태그플레이션, 통화문제, 부패, 그리고 환경악화가 있다. 그러나 인구의 많은 부분, 이주와 실업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젊은이들, 사회적 포부를 잃은 학생들, 방치된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해체 직전에 있는 사회 구조를 가로질러 퍼지고 있는 다른 잘 안 보이는 증상들도 있다.

전국의 수십 개의 작은 도시와 큰 도시에서 일어나는 현재의 일련의 시위들은 기본적으로 2017년부터 2018년까지의 봉기들에서 내세워졌던 것과 같은 사회·경제적 요구의 연속일 뿐이다. 최소 106명의 사람들이 21개 도시에서 살해되었고 시위가 시작된 지 3일 만에 수천 명이 다치거나 체포되었다. 살해된 시위자들이 그보다 훨씬 많아서 200명 이상에 이르리라는 확인되지 않은 추측들이 현장에 나돌고 있다. 이란 정부는 인터넷 연결을 차단했으며, 그 결과 이란에 대해서 국제 사회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로 인해 이를 지켜보는 서양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오해가 생기게 되었다. 이란의 시위에 대하여 우리는 몇 가지 사항들을 명심해야 한다.

 

단지 기름값 때문만이 아니다.

첫째, 이란 문제에 대한 영어권에서의 보도에 널리 퍼진 오해는 정부가 기름값을 리터당 50% 올렸다는 것이다. 이는 전체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배급된 휘발유의 가격을 50% 인상했지만, 이는 차량당 매월 60리터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60리터를 넘으면 가격이 200% 올랐다. 이는 40년간 부패한 지배 계급을 이미 참을 만큼 참아온 사람들의 일상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둘째, 많은 방송 해설자들이 이란 휘발유 가격과 국제 휘발유 가격을 비교하면서 ‘가격 인상’ 대신에 ‘보조금 철회’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이란의 휘발유 가격은 지금도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싼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성급하게 결론지었다. 여기서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란의 최저임금(한 달에 125달러)이 미국 달러로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수반되는 물가 상승과 다른 상품들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말할 것도 없다. 리알화로 (값싼 노동력, 값싼 기름 등을 사용해서) 휘발유를 생산해서 미국 달러로 파는 것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가격 체계에서는 항상 교환 비율이 문제다.

셋째, 휘발유 가격 인상은 정부의 예산 적자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110명의 사람들이 이란 은행으로부터 빌린 총 92억 달러에 상응하는 엄청난 미상환 대출금이 투자된 집단시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는가 하면 이란의 고위 공직자들이나 그들의 친척들이 횡령과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는 뉴스를 매일 들은 사람들은 누구라도 휘발유 가격 인상 결정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란 정부는 적자폭을 줄이기 위해 소수 세력의 채무변제를 요청하기보다, 공공 지출 요구에 맞추기 위해 겨우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환경을 박살내기로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휘발유 가격 인상은 사람들의 분노에 불을 지핀 마지막 방아쇠였으며 노동자들과 중산층 하부가 궁핍화에 저항하게 되는 계기의 역할을 해 왔을 뿐이다. 시위가 매우 빠르게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은 2017부터 2018년까지 일어났던 진압된 봉기들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이란의 유기적 위기는 기존 시스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연료 가격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인종적·민족적 차별을 여성·무신론자들·소외계층들에 대한 성적·종교적·계급적 차별과 40년 동안 융합해 온 아파르트헤이트(분리주의) 정권이다.

개혁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로 구성된, 지난 40년 동안 이란을 통치해 온 정치 세력은 전체 구조를 둘러싼 위기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는 이란의 현재 위기를 미국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는 이란과 그 밖의 나라에서 많이 안다고 떠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되풀이되는 새로운/낡은 수사(修辭)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기적 위기는 40년 동안의 이란의 정치경제에 그 구조적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제재는 자라나고 있던 위기에 촉매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삐걱거리는 부적절한 연합

위기의 본질은 1979년 혁명 직후 실권을 장악한 정치 엘리트 집단과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 가까스로 나라를 운영하게 된 소수 금권세력 사이의 부적절한 연합에 기인한다. 1979년 혁명 직후, 종교 세력은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고 대다수의 “외부자” 집단에 맞서는 소규모 집단인 “내부자(khodi)”를 만들어 냈다. ‘시아파-페르시아인-남성’ 소수자들로 구성된 이 내부자들은 약 2,300명의 정치적 인물들로서 약 40년 동안 모든 정치적 반체제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이란 정치를 주도해오다 1988년 정치범 학살에서 그 지배의 정점에 이르렀다.

마찬가지로 이란 경제도 소수 금권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1980-88년의 이라크와의 전쟁 이후 이란의 재건이 일단 실행에 옮겨지자, 정치 엘리트들과 강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장관이나 국회의원부터 성직, 법조, 군사 영역의 지도자들까지 대부분 지배 계층에 속하는 자리에 있는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이 등장했다. 서로 유착된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국가 자원 전체를 수십 년 동안 약탈했다. 사유화(민영화), 도시화, 개발계획, 탈산업화, 삼림파괴, 그리고 뱅킹시스템에 관해서는 정치인들이 소수의 경제 엘리트들과 긴밀히 내통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국회의원들은 친척들에게 재정 자원에의 접근권을 제공해주기 위해 법을 제정했다.

만약 혁명 이후의 정치경제의 구축 자체에 위기가 내장되어 있다면, 근본적인 해체가 필요할 것이다. 정말로 지금과 같은 낡은 사회·정치적 상황에서는 정권이 합의를 성취할 수도 없고 심지어 조작해낼 수도 없다. 2017-18년의 봉기들은 이념의 헤게모니 영역에 어떤 진공상태를 만들어놓았는데, 이 진공상태는 이란 정치의 그 어떤 기존 세력에 의해서도 긍정적인 방식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대의정치의 위기

이런 상황의 주된 이유는 대의정치의 위기이다. 이란 혁명 이후 정치는 민중의 움직임을 수용하지 못할 정도로 경직되었다. 사실 “외부자들”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개별화되고 주변화된 문화 활동을 제외하고는 대의될 여지가 거의 없다. 비록 나라가 온통 혼란 상태에 있고, 노동자들은 민영화, 규제 완화 그리고 금융화에 질려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불만이 제도권 정치영역으로 옮겨지는 일은 없다.

2017-18년의 봉기 이후로, (가장 중요한 셋만 꼽자면) 화물차 운전기사들, 교사들, 노동자들에 의해 수백 차례의 시위가 발생했다. 2018년 5월 말에는, 이란의 지방 수십 곳에서 수천 명의 화물차 운전기사들이 낮은 임금에 항의하여 파업을 벌였고 미국의 가장 큰 노조 가운데 하나[the Teamsters]가 이 파업을 지지하기도 했다.

2018년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교육민영화와 저임금에 항의하는 교사들의 첫 번째 전국적인 연좌 농성이 열렸다. 11월 13일에서 14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두 번째 연좌 농성이 이어졌고, 그 결과 많은 교사권리 운동가들의 체포와 수사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란의 남서쪽에 위치한 후제스탄(Khuzestan)주에 있는 하프트 타페 사탕수수 공장(Haft Tappeh Sugarcane Company) 노동자들의 연속적인 파업이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분명한 선언을 하고 노동자 자치평의회를 창출하고 설립하겠다고 결의한 마지막 파업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이후 곧바로, 노동자 대표인 에스마일 바크쉬(Esmail Bakhshi)는 노동운동가들 및 노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바크쉬에게 내려진 14년형과 74회의 채찍형벌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는 총 1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될 것을 선고받았다. 동시에, 이러한 항거를 보도한 기자들은 강압적으로 감금당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경우에, <샤그 데일리>(Shargh Daily) 신문의 경제부 기자인 마르지 아미리(Marzieh Amiri)가 2019년 5월 1일 테헤란에 있는 이란 의회 건물 앞에서 벌어진 노동의 날 시위를 보도하던 중 체포되었다. 그녀는 결국 10년 반 동안의 투옥과 148회의 채찍형벌을 선고받았다.

휘발유 가격 인상에 대한 대응으로 최근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시위들은 이란에서의 ‘장기간의 혁명 과정’을 암시하는 또 한 번의 조짐으로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강제적 은폐에 대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 횡령, 사유화(민영화), 규제완화, 그리고 하층민의 빈곤화에 대항하는 다면적인 투쟁인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정치단체, 시민사회, 자유 언론, 정당, (노동)조합, 그리고 지도자의 부재 속에서 일어났고 이제는 심지어 놀랍게도 인터넷 연결의 부재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들은 노동자들과 하층민들이 자신들의 연합조직 또는 자율적인 모임을 만들기 위해 생명까지 위태롭게 하면서 착수한 자발적인 기획들인 것이다.

 

잘못된 대의(代議)와 선전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궁지에서 탈출하기 위한 이란인들의 투쟁이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즉 국가에 의한 진압에 계속해서 도전하고 국가 공권력의 작용범위를 좁히는 위험한 활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병적인 증상들이 또한 대의의 수준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사를 늘 정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자칭 전문가들이 문제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는 이란의 현존하는 엘리트 파벌에 속하는 사람들에 속하거나 그들의 관점을 반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 논설, 기사 등이 점점 증가하는 것을 봐왔다. 이것들이 이란 정치와 서양 언론 모두에서 가시화되는 정도는 높다. 저널리즘의 핵심이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약 40년 동안 말하지 못했거나 억눌려 왔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이란에서 이러한 목소리들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이란 전역에 걸쳐 약 100개 도시에서 거리로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일반 대중들, 100개 이상의 마을과 도시의 거리에서 지금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 최근 며칠 동안 체포되거나 다친 사람들, 시위 3일 동안 죽임을 당한 순교자들, 뿐만 아니라 초강대국의 후견에서 벗어나 있기에 합법적으로 그들을 대의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

계속 진행되는 교착된 차단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개혁주의자들 또는 중도주의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 어떤 구조변경도 거부하는, 스스로 결정하는 대안 세력의 형성이다. 이 형성과정은 자발성에서 조직화로 이행하는, 이미 탄생한 과정이다. 만약 위기가 광범하고 유기적인 것이라면, 해결책도 이념적·민족적·젠더적 다양성이 있는 이란 사회의 건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란 여성의 해방을 포함하는 광범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널리 퍼져있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답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답을 찾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 ‘이슬람 공화국’(이란)을 넘어서 부와 힘의 근본적인 재분배를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라건대 지역 민중의 결속, 즉 레바논·이라크·시리아·이란 민중의 결속을 낳아, 그들을 평생 괴롭혀온 부패한 지도자들을 제거할 수 있었으면 한다.

 




예시적 정치는 좌파에게 나아갈 길을 제공할 수 있는가?

저자: Sofa Saio Gradin

원문: Could pre‐figurative politics provide a way forward for the left? (2020년 1월 19일) 이 글은 독립온라인잡지 www.opendemocracy.net에 최초로 실렸다. 

 분류 : 번역

 옮긴이 : 민서

 설명 : 그래딘(Saio Sofa Gradin)은 레이크스태드(Paul Raekstad)와 함께 『예시적 정치: 미래의 오늘을 구축하기』(Prefigurative Politics: Building Tomorrow Today)의 공동저자이다. 지금 페이퍼백으로 나와있다.


영화 <캣츠>(Cats), 드라마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시즌 8 그리고 2019년에 일어났던 많은 다른 일들처럼 좌파 측의 많은 사람들은 영국 총선이 형편없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훨씬 더 형편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보수당이 의회 의석 650석 중에 365석을 얻었다. 이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토리당 의원들이 간통으로 집행유예를 받거나 지도부와의 불화로 쫓겨난다고 할지라도, 의석수가 과반수를 훌쩍 넘겼기에 토리당은 제1당으로 남을 것이다.

2012년 이후로 영국에서만 1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미리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초래했고, 장애인들과 이주자들에게 아주 적대적이어서 그들 가운데 일부를 자살로 내 몰았으며, 그리고 자신들이 내건 위험할 정도로 한정된 환경 공약들을 이행하는 데도 실패한 정책들을 유지하고 있는 정당에게 이것은 완전한 승리였다. 한편, 노동당에게는 영국 국민들 대다수가 지지한 경제 정책들로 빼곡한 성명서가 있고, 엘리트주의적인 전통과 관계를 끊은 지도자가 있으며 노동당의 정직함이 돋보이는 선거 광고들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엘리트 권력을 위협할 때에 맞닥뜨릴 장애물들언론 편향에서부터 참정권 박탈 및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이르기까지―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 참담한 선거였다. 앞으로 나아갈 길은 이것으로부터 배우고 정부 밖에서 조직화를 계속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좌파에게 한 줄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정치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당신에게 제공하도록 할 서비스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그 일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증가한 것이다. 이 생각에서 가장 희망적인 조류는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옮긴이] 예시적 정치(prefigurative politics)—지배적 사회구조의 내부에 새로운 외부를 창출하는 정치—에 관해서는 http://commonstrans.net/?p=1097, http://commonstrans.net/?p=740,

http://commonstrans.net/?p=1061 를 참조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미래에 보고자 원하는 사회를 ‘지금 여기서’ 실현하는 방식으로 조직화하는 정치이다.

노동당이 승리를 거머쥐었더라도 영국이 더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보장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존 맥도널(John McDonnell)도 지적했듯이 가장 사회주의적인 정부들도 선거에서의 승리까지만 갈 수 있다. 진정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현장에서 조직화해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노동자들, 거주자들 및 공동체 일원들—이다. 사회적 위계와 사회적 억압들은 정부정책만으로 초래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위계와 억압들은 법과 같은 형식적인 제도들 그리고 일반 대중의 일상적인 행동들, 전제들 및 관계들 모두 다를 통해서 유지된다.

#미투운동을 예로 들어보자. 성희롱과 성폭행은 수십 년간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허용되었고 심지어 몇몇 영향력 있는 남성성의 형태들에서는 권장되기조차 했다. 이것이 이제 사회운동들 덕분에 바뀌기 시작하고 있다. 또 다른 사례는 국가권력을 획득하고 공식적인 정책입안을 거쳐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계급위계질서를 끝내고자 했지만 결국 극심한 분열•부패•편협성으로 끝나버린 역사 속의 많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에서 찾을 수 있다.

예시적 정치는 이 통찰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략들에 오늘날 우리가 붙이는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으로 우리의 공식적인 규칙과 정책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 규범 및 사회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의롭고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수학을 하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것과 더 비슷한 활동이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정치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예시적 정치는 우리가 순수한 사고나 이론적인 규칙설정만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단지 추진력과 관련된 수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회이론에 빠삭하기 때문에 집단적인 의사결정에서 저절로 사려 깊고 마음이 넉넉한 참가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가부장제에 대한 모든 이론적인 분석을 읽었다하더라도 그것이 당신이 태어난 그날 이후로 배우고 연루되었던 모든 가부장적인 행위들•규범들•가설들에서 갑자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시주의(prefigurativism) 이념은 우리가 미래의 주류로서 보고자 하는 행위들 및 관계들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며 새롭고 더 나은 행위들과 조직 구조들을 실험하고 배움으로써 우리를 재훈련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스트 슬로건은 이 용어가 현재의 의미로 처음 사용된 1970년대 이래로 예시적 정치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이 슬로건은 정치를 단지 정부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여성들이 가정에서 직면하고 있는 억압의 형태들—예를 들어 성폭력, 성희롱, 무보수 가사노동—을 은폐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가부장적인 태도에 반대했다. 우리 개인의 삶과 일상의 행위들이야말로 실제로 정치투쟁의 현장들이다.

예시적 정치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권력과 의사결정의 중요한 많은 측면들이 정당이나 공동체 집단의 공식적인 정책들과 구조들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차 마시는 시간 동안에 생기는 일, 잡담을 할 때 생기는 일, 혹은 모임이 끝나고 생긴 설거지거리에 일어나는 일은 결정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문서화된 어젠다나 규칙만큼이나 정치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평등주의적인 정당이나 집단이란 구성원들이 균등한 임금에 관한 정책을 작성하기 위해 만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귀가한 이후에 여성들에게 설거지와 청소를 하게 하면서 경쟁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인 의사결정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정당이나 집단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가부장적이거나 기타 위계적인 행위 유형들에 관하여 함께 공부하고 그 유형들을 폐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정당이나 집단이다.

내가 일원으로 활동해온 예시적 조직체들에서 이런 일은 일부는 훈련하기(가령 젠더 의식에 대해서는 역할놀이 연습이나 토론그룹활동)를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청소 당번 같은 조직적인 수단들, 프로그레시브 스택(progressive stacks) 같은 회의 진행 방법들, 및 다양한 과제들에 대해 역할과 책임을 교대로 바꾸어 맡기(여기에는 신입자들과 수다나누기 및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도와주기와 같은 비공식적인 역할들이 포함될 수 있다)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런 종류의 일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논의라고 불평하는 회의주의자들이 항상 있다. 몇몇 논평가들은 예시주의가 비공식적인 것에 주목할 경우에 활동가들이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집단들을 위해 ‘나서서’ 싸우는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하기 보다는, 모임에서의 그들 자신의 개인적인 행위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데 모든 시간을 쓰도록 몰아붙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월가를 점거하라’처럼 예시적 조직체들이 (적어도 몇몇 비판가들에 따르면) 자기 속에 휘말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들이 있으며, 이 경우에 활동가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주변화된 사람들을 위해서 조직하는 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내부절차들을 토론하고 실행하는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일단 예시적 정치를 좀더 깊이 있게 공부하면 이것이 이런 종류의 정치를 실천하는 대다수 조직체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시주의로 유명한 조직체들—사파티스타,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스페인전국노동자연합(The Spanish National Confederation of Labour, CNT), 시리아의 침범 이전의 로자바(Rojava) 등등—대부분은 내부적 관심과 외부로 향하는 관심 사이에서 균형을 완벽할 정도로 잘 잡았다.

이 조직체들은 주변화된 집단들을 다양하게 향상시키기—예를 들어, 적당한 지대와 토지, 임금인상, 그리고 주변화된 공동체를 겨냥하는 군사공격에 저항하기—위해 싸웠고 동시에 그들의 비공식적인 불평등을 다루었다. 집단들이 주변화된 사람들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은 예시적 정치에의 헌신보다는 기본적인 목표들 및 인구 구성과 더 관계가 있다. 사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없는 것이다.

노동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면 우리가 사회적 부당함들과 싸울 때 정부로부터 (바라건대) 더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내가 코빈이 속한 노동당에 확 끌렸던 것은 노동당의 정책들 대부분이 자원을 재분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협동조합, 노동자 주식보유제도(worker shareholding schemes) 및 지역의회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수단을 통해 노동자들, 지역주민들, 그리고 사회운동들에 권력 및 의사결정을 재분배하는 것 또한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노동당이 일단 정권을 잡았을 때 이 공약들을 고수할 수 있었는지 또는 고수했을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이지만, 현재로서는 선거를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에 이르는 길은 닫히고 있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그 길은 결코 열린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보수주의 토리당의 앞으로의 5년이 우리 앞에 놓여있고, 그러는 동안에 취약한 삶의 조건에 처한 사람들 사이에서 절망(체념)이 증대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아니더라도 최근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나서서 처음으로 동료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단체를 조직한 상황이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지난 몇 년간의 선거사회주의의 고조로 활력을 얻었으며 활성화되었고 고무되었다. 그런 끔찍한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에는, 변화를 위한 전반적인 움직임에서 정부는 단지 작은 부분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코빈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다. “지금 제가 하는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으세요. 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주 아주 중요합니다. … 그러나 변화가 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변화가 오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진보적인 노동당 후보자들에게 계속 열심히 투표를 하자. 하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공동체 조직들, 노동조합들, 지역 의회 및 협동조합들에 있다. 그곳에서 보기로 하자.




추상적 파업에 대한 단상


  • 저자  :  Antonio Negri
  • 원문 : “Notes on the Abstract Strike”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2018)의 16장 “Notes on the Abstract Strik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은 원래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에서 열린 AB-STRIKE 컨퍼런스에서 네그리가 발표한 것이다. 이 책에 번역되어 실리기 전에 이미 이 글의 영어번역이 두 군데(①http://supercommunity.e-flux.com/texts/notes-on-the-abstract-strike/ ②http://www.euronomade.info/?p=5624)에 같은 제목으로 실려있는데(모두 Phillip Stephen Twilley의 번역이다), 이 책의 영어번역(Ed Emery의 번역이다)과는 부분적으로 제법 달라서 정리에 다소 애를 먹었다. 이 글의 이탈리아어 원문은 구할 수 없었다. 

과거 파업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직접적 공격인 동시에, 명령자(boss)에게 손상을 주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파업에는 무언가 육신적인 것, 삶정치적인 것이 있었다. 경제적 행동을 정치적 재현으로 만들고 물러남의 행동을 자본으로부터의 탈주의 실천으로 만드는 폭력이었다.

이제 우리는 자본 관계의 성격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안다. 노동자들의 특징이 단계마다 다르며 명령도 맥락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업도 변한다. 가령 산업노동자의 파업과 농업노동자의 파업은 매우 다른 경험이며 매우 다른 모험이다. 산업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사보타주와 오랫동안 노동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상태의 연속이다. 농민 투쟁의 경우에는 육신적이고 집중적이며 매우 거친 폭력이 행사된다. 소에 먹이를 줘야 하고 추수를 하지 않으면 수확물이 썩어가는 등의 이유로 농업노동자들의 투쟁은 짧을 수밖에 없다. 산업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순간 필요임금의 한도에 의해서 제한되는 것 말고는 짧을 이유가 없었다. 명령자의 입장에서 파업은 어떤 것이든 하나의 단일한 실재(경제적으로는 가치화 관계의 단절이며 정치적으로는 종속의 단절)이며, 그 다양성은 억압의 행동에 의해 말소된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노동에서의, 생산에서의, 노동계급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서의 변형의 일반적 플랜으로서 시작되었을 때, 대중노동자의 투쟁에 대한 해답이 공장의 자동화를 통해 그리고 사회의 컴퓨터화를 통해 이미 주어졌다. 신자유주의의 이러한 성공을 위한 토대는 바로 사이버네틱 기업활동이었다. 그러나 통제의 이러한 변형은 노동자들이 공격에 대항하는 방법을 사장들이 이제는 알고 있음을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적·정치적 행동에 의해 도입되었다. 새처의 탄광노동자 파업 억압과 레이건의 관제사들에 대한 공격이 생산양식의 변형에 필요한 전제조건으로 발현되었다. 여기서 투쟁의 억압이 가지는 상징적 성격(이는 나중에 ‘삶정치적’이라고 불리게 된다)은 협상의 모든 가능한 여지를 몰아내는 그 극단적인 폭력에서 나타난다. 노동계급의 파업은 이제 ‘삶권력’과 대면하게 된 것이다.

분석을 전진시켜서 ‘추상적 파업’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제 누가 노동자이며 누가 노동과정에 대한 명령자(boss)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첫째, 누가 노동자인가? 노동자는 노동자들 자신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사장의 통제를 받는 비물질적 네트워크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이 네트워크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는 동시에 거기서 가치를 추출한다. 이 노동자들은 점점 더 심화되는 협력 내에서 성장하면서 점증하는 생산 능력을 발현하고 자신들의 노동력을 생산체계의 활력으로서 이해하는 노동자들이다. 협력 내에서 노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며 따라서 생산을 조직하는 노동의 능력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러나 동시에 가치추출의 메커니즘에 점점 더 종속된다. 노동자는 협력의 측면을 점점 더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생산적 에너지를 조직한다.

여기서 자율은 노동의 자본에 의한 형식적 혹은 실질적 포섭의 이전 단계들에서의 자율과 같은 의미의 것이 분명 아니다. 현 단계에서 자율은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자율적 일관성(consistency)―이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주의적 명령에 종속되어 있지만 말이다. 노동과정과 가치추출 과정이 분리되어 전자는 산 노동의 자율에 맡겨지고 후자는 순전한 명령에 맡겨지면, 이는 노동의 존엄과 힘이 착취의 형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따라서 아직 명령을 받고는 있지만 자신의 자율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알고리즘’의 지배에 대한 찬가를 점점 더 많이 듣는다. 그런데 IT 가치화를 통제한다고 하는 알고리즘이란 노동자의 협력의 산물인 것을 자본가들이 다시 협력에 부과하는 기계일 뿐이다. 오늘날 산 노동이 표현하는 바로 그 활력과 자율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이다. 맑스가 연구한 노동과정과 오늘날의 노동과정 사이의 큰 차이는 오늘날의 협력은 더 이상 자본가에 의해 부과되지 않으며 노동력 내부로부터 산출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진정으로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전유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로써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모든 방면에서 노동의 가치화를 향해져 있으며 노동이 부릴 언어들을 산출하는 과정(가령 인지 알고리즘의 구축)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자본주의적 명령은 오로지 노동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자신을 추상함으로써만 기능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적 협력의 ‘추출적 착취’에 대해 말하고 노동조직화의 산업적 형태와 결부된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후자 유형의 노동조직화와 가치화에서는 주체성의 생산의 두 측면(한편으로는 주체화를 통한 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를 명령받는 상태로 축소시키려는 계속적인 노력을 의미한다)이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 직렬적으로 펼쳐진다. 여기서 보이는 이중성은 탈산업적 구조화에서 산 노동의 모든 형상의 이중성과 동일하다.[주체화의 이중성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일반지성의 거처」를 참조하라―정리자]

둘째, 오늘날 명령자(boss)란 어떤 존재인가? 인지노동과의 관계에서 보면 명령자는 가치를 추출하는 금융자본의 형태를 띤다. 이 추출에서 오늘날 명령자의 기능이 기업가적 범주에서 순전히 정치적 범주로 점진적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 자본주의적 명령의 수직화는 점점 더 추상적인 방식으로 협력과의 관계를 가로지르고 생산적 주체화의 과정들을 가로질러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수직화에서는 일종의 명령의 통치화―산 노동이 협력을 구축하는 기계적·알고리즘적 메커니즘들을 통제하려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시도―같은 것이 표현될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금융자본은 ‘독재’로서 제시된다. 물론 파시즘적 독재가 아니라 (추상과정에 대한 권위의 수립을 시도하는, 요컨대 추출을 추상과 짝짓는) 명령의 추상화이며 그 통치의 획일화이다.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적 명령은 ① 추상적/추출적 명령으로 가치창출의 과정 전체를 장악하려는 측면(이는 정치적 명령의 준비이다)과 ② 신자유주의가 그 자체로 정치적으로 구성적이라는 측면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명령(기본적으로 금융적이지만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다)일 뿐인 통치활동을 발전시키는 것에 덧붙여 통치성의 다양한 형태들을 가진 네트워크들을 통해 스스로를 펼치며 욕구와 욕망을 포괄하는 광범한 미시정치적 네트워크에 대한 참여적 명령으로 행동한다. 신자유주의적 구성은 산 노동으로부터 가치를 추출할 뿐만 아니라 소비와 욕망을 조직하여 그것을 자본의 재생산에 복무하도록 만든다. 생산과 소비를, 욕구와 자본의 재생산을 매개하는 것, 따라서 노동(생산하는 노동과 소비하는 노동)을 단 하나의 추상으로 동질화하여 모으는 것은 화폐이다. 생산하는 노동을 재전유함으로써 그리고 소비를 자본주의적 관리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이 복잡한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것이 가능한가?

20년 전 우리가 ‘비물질 노동’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무시당했는데, 이는 사실 모든 노동이 물질적인데도 우리가 ‘비물질적’이라고 말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 ‘비물질성’이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했던 바가 단지 육체노동이 아니라 가치·지식·언어·욕망을 구성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다. 자본이 저 새롭고 매우 풍부한 맥락을 포착하여 자신이 명령 아래 둔 상황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다. 자본은 두 방향으로 행동했다. 한편으로 언어의 살아있는 생산에 명령을 맞추었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은 욕구와 욕망을 자본주의적 명령에 복무하도록 만들었다.

신자유주의에서 자본은 생산적 주체화의 힘이 주체로서 인정되기를 원한다. 말하자면 자발적 노역을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극대화되면, 산 노동 없이 생산이 없듯이 소비 없이는 가치화(혹은 재생산)가 있을 수 없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케인즈주의가 신자유주의적 구성에 명시적으로 내화되어 갱신된다. 정직하지만 비판적 판단을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산출하거나 받아들이는 무력한 신비화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제 자본이 지배받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노역의 부정이 진리로서 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자본 안에 사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본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오늘날 추상적 파업이란 무엇인가? 즉 산 노동의 새로운 성격과의 관계에서나 생산과 재생산의 신자유주의적 구성과의 관계에서나 파업으로서 가늠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체제에 손상을 입히고 다시 한 번 물질적·삶정치적인 실질적 활력으로 스스로를 발현할 능력을 가진 사회적 투쟁은 무엇인가?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다시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① 오늘날 산 노동은 가치화의 흐름을 파열시킬 수 있는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 전체(생산관계의 붕괴, 사보타주, 엑서더스 등)를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이 삶 전체에 삼투된 시기, 하루 종일 노동해야 하는 시기, 노동자의 생산 능력이 명령의 네트워크에 잡혀 있는 시기에는 협력의 공간적 연결의 지형에서나 시간적 연결의 지형에서 파업 행동이 요구하는 저 독립성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 지형이 흐름이 되어 버린 상황에서 말이다. 예를 들어 생산적이 된 메트로폴리스를 점령하고 봉쇄하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멈추지 않는 사회적 네트워크 생산성의 흐름을 파열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이에 대한 답을 하려면 다시. 오늘날 생산과 명령 사이의 알고리즘적 연관이 나타내는 특이한 구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노동자들이 의미 있고 생산적인 관계, 자본에 의해 그 가치가 추출되는 관계를 구축하는 장소로 돌아가야 한다. 이 경우에 파업은 가치화의 과정을 부술 때만이 아니라 또한 산 노동의 자립성, 일관성(consistency)을 회복할 때, 즉 생산적 행위가 될 때 성공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의미작용 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해서 알고리즘을 부수는 것이다. 산 노동은 이것을 할 수 있다. 산 노동에 의한 생산 없이는, 주체화가 없이는 알고리즘이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산 노동을 이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저항 없이는 임금도, 사회적 향상도, 복지도, 삶의 향유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이 명령에 종속된 비참한 상태와 단절하며 미래를 드러낸다. 노동계급 전통을 삶의 전 지형으로 확대하여 회복하는 파업, 사회적 파업이다. 이것이 사회 전체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자본주의적 기술에 대항하는 파업의 형상이다.

마찬가지로 혹은 더 중요한 두 번째 공격지점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이 금융자본(과정의 화폐화)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소비를 화폐 차원과 연결시키는 메커니즘을 새로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의 재생산의 필요에서 소비를 할 수 있을 때의 소비는 항상 좋은 것이다. 자연적, 일반적 인간 종의 욕구라기보다는 노동계급 종의 욕구. 생산적 종의 욕구, ‘포스트휴먼’ 종의 욕구이다. 이는 파열의 계기로 간주되어야 할 종류의 소비이다. 이제 이는 투쟁으로 가로질러야 할 복지의 지형(서비스와 소비에 대한 지배를 조직화하는 장소)이 된다. 저항을 행할 곳이며 대안적 전망들을 발전시킬 곳인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 파업은 물질적 파업이 된다. 핵심은 산 노동이 소비에 대한 장악력을 회복하는 것이며 이윤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인간의 생산’을 구축하거나 [사회에] 부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상적 파업에는 두 수준이 있다. ① 생산의 수준에서는 산 노동의 자립성을 다시 획득하여 가치화 과정을 부순다. ② 재생산의 수준에서는 욕구-욕망-소비의 새로운 연쇄를 구축하고 부과한다. 자본이 가치추출을 위해 가장 많이 침투하는 생산 네트워크들 내에서 작동하는 독립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데 바쳐진 연구가 풍부하다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이다. 상호주의의 부활과 디지털 네트워크들에서의 협력의 성장은 심화될 필요가 있는, 투쟁의 첫 단계들일 뿐이다. 욕망-소비 연쇄(와 그 강제된 화폐화)를 부수는 것과 관련해서는 비트화폐를 창출하고 자율적 소통네트워크들 및 자립적 소비네트워크들을 구축하기 위한 흥미로운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도들은 부분적이지만 중요하다. 그런데 그 효과는 그 기획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서는, 그리고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산적 주체화를 주체들의 독재적 생산으로 변형시키는 중대한 지점을 공격적으로 장악하지 않고서는 결정적인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 정치가 금융 자본의 독재와 양립 불가능함을 명백하다. 추상적 파업은 이런 전제 위에서 현재와는 다른 민주적인 세계를 제안하고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자립적 활력을 구축하기 위해서 개입해야 할 여러 지형들을 알려준다.

가치추출에 대항하는 파업과 사회적 착취의 자본주의적 추상이라는 수준에서 움직이는 파업은 동일하지 않다. 전자의 경우 투쟁은 이윤의 전유(혹은 이윤을 노동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를 목적으로 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사회 재생산 모델과 자본주의적 지배의 모델 및 기능적 화폐의 기존의 주조 모델을 전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이 두 수준의 투쟁은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매우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수평적이고 다른 하나는 수직적이다. 하나는 노동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그러나 투쟁의 관점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양자가 혼동될 수는 없다. 하나는 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별개로 실행되지만 함께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분석은 여기까지로 충분하고 이제는 실천할 단계이다.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의 독재를 부과하지만, 노동의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수평적 지형에서 추출적 착취에 맞서서 투쟁을 실행하고 자본주의적 관리에 대한 대안적 기획을 산출할 과제로 상승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연합들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재에 맞선다. 오늘의 씨리자(Syriza) 동지들, 내일의 뽀데모스(Podemos) 동지들이 투쟁을 이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사이의 교차로로 끌어왔다. 이탈리아는 이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노동자들의 연합을 구축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2015년 5월 8일 베네치아




일반지성의 거처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2015)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bitazione del general intellect. Dialogo con Antonio Negri sull’abitare nella metropoli contemporanea)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4장 “The Habitat of General Intellect: A Dialogue between Antonio Negri and Federico Tomasello on Living in the Contemporary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마지막 세 번째이다.

문[또마셀로]

1년 전에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 시작했고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로 계속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보자.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는 생각을 새롭게 분석해보자. 이 테마를 고정자본과 ‘노동의 장소’에 일어난 변형을 고려하여 논의해보자. 오늘날 일반지성을 발휘하는 노동의 일부가 재택노동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 되었다. 이는 메트로폴리스를 보는 당신의 관점에 어떻게 들어맞는가? 공장-메트로폴리스의 유비(가치창조 메커니즘이 전체 메트로폴리스로 확대되는 것)를 집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삶과 거주의 기술에서 출발하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가?

답[네그리]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항상 대략적인 근사치를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이 문제에 접근하게 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은 가장 구체적인 살아가기와 노동하기(vivere e lavorare)가 가치의 새로운 형태가 되는 곳이다.  사회의 디지털화와 도시의 컴퓨터화의 출현과 함께 건축술적 요소들과 소통네트워크들이 주택의 짜임새에 삽입되면 집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도시가 노동의 패턴과 관련된 수천 가닥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노동력의 불안정성과 이동성 때문만이 아니라 통신이 거주지로 물질적으로 침투하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특이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지성이 집을 발견하여 어디선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초라하다. 1973년의 위기 이래 도시의 리듬은 더 이상 포디즘의 리듬―8시간 노동, 여가, 휴식―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협동의 도시 규모로의 일반화와 노동자들 자신에 의한 노동의 관리와 연결되어 있다. 공장이 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렇게 일의 장소가 공장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분석하는 것은 현대적 삶형태를 조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생산이 이제 삶형태와 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면 말이다. 노동형태와 삶형태의 이러한 밀접한 연관은 엄청난 귀결을 가지는데 특히 일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집에서 독립적으로 일을 할 때에는 추상적 협동의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며, 이는 공장에서 우세했던 물리적 근접성과 크게 다르다. 상사는 물리적 근접성에 규율(훈육)을 행사할 수 있지만, 추상적 협동에는 기껏해야 통제를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세하게 지시를 받고 이미 이루어진 결정을 받아서 일하지 않고 자유의 환경에서, 삶과 노동의 체제(una costituenza di vita e di lavoro)에서, 자율적 기획의 장치(un dispositivo di progettualità autonoma)에서 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집에서 집의 보호를 받으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집을 보호처(un riparo, a shelter)로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들뢰즈가 말한 ‘훈육에서 통제로’라는 이행 패러다임은 우리가 논의한 공장-메트로폴리스와 집이 노동의 장소가 되는 현상을 서술하고 정의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가?

훈육과 통제를 병치하는 것은 줄곧 사태를 보는 데 유용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삶정치적 영역을 침범한 착취형태를 놓고 볼 때에는 좀 낡은 것이 되었다. 이른바 통제의 기능은 노동의 삶정치적 형상을 앞질러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삶’(bios)을 강조하는, 즉 순전한 통제의 규정들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일련의 규정들을 강조하는 삶정치적 통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뚜렷하고 확연한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삶을 둘러싸고 있는 기계적(macchinici, machinic) 도구들과 복지구조들 및 화폐와 관련된 조건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한데 엮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모든 것들을 산업적 훈육과 삶정치적 통제의 구분으로 매개 없이 환원하기가 어렵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이런 경향이 가사활동에서 하나의 패러다임으로서 드러나고 있는 한편, 포스트포디즘적 가치창조가 삶정치적 차원과 결합되는 곳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그리고 어디에나 있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점이다 우리는 노동자가 불안정 노동형태에 종속되는 동시에 매우 낮은 임금의 조건에 종속되는 위기의 국면들에서, 그 공포와 불안의 분위기에서 이러한 특수한 종류의 통제의 가장 명시적 형태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삶의 문제가 곧 생존의 문제가 된다. 집은 노동의 장소이자 도구에서 부채라는 끔찍하고 치명적인 금융적 착취의 장소가 될 수 있다. 삶정치적 영역은 욕망의 확장 공간이자 생산의 새로운 관행의 공간에서 감옥이 되고 삶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 여기서 한때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이라는 목표를 둘러싸고 모였던 페미니즘 투사들과 이론가들이 삶정치적인 영역의 이러한 모호성을 그리고 그것이 파괴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서술하는 데 있어서 훌쩍 앞서 나갔었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이 유용하다. 삶정치적 영역이 사회적 노동의 핵심적 열쇠가 되기 한참 전에 이 여성들은 노동계급 임금의 가부장적 구조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의 노예상태에서 삶정치적 영역이 행사하는 통제의 복잡성을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임금의 분배가 사회 전 영역을 가로질러 재조직화되어 여성들의 노동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그렇게 인정받아야 할 것을 투쟁을 통해서 요구했다. 이는 모든 것이 이윤에 맞추어진 사회에서 생존만이 아니라 해방 또한 보장하도록 의도된 임금이며 권리였다. 그 성공여부는 여기서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나는 포스트포디즘(신자유주의) 시기에 착취와 삶정치적 통제의 조건들이 얼마나 복잡하고 적대가 그 아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렸는지를 보여주려고 이 사례를 활용할 뿐이다.

 

①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이중성(양가성)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는 개별화·착취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특이화·자율일 수도 있는 ‘장치’(dispositif)를 인지노동이 집에서의 노동이 되는 과정에서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가? ② 메트로폴리스 노동자들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 문제는 집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노동자에 의한 고정자본의 재전유를 말할 수 있으려면 기술적 수단이 집에 있어야 하고 이 수단은 공장의 외부로 이동된 것이기에 일부든 전부든 노동자에 의해 전유된 것이어야 한다. 이는 건축물 구조가 기계가 된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집(거처)의 기계적 구조(una struttura macchinica dell’abitazione)의 문제이다. 여기에 일련의 귀결들이 따른다. ① 특수한 가사노동. ② 집의 기계화. 50년 전만 해도 집에 기계가 없었다.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조직되었다. 그런 집에서 애정이라는 외관 아래 여성들이 힘들고 반복적인 일상노동을 강제로 해야 했다. 이런 상황이 오늘날 완전히 변했다. 기계화의 확산을 통한 변형으로 여성들이 해방되는 과정이 있었다. 따라서 이는 그 긍정적, 진보적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이행이 공간과 가족관계의 실질적 변경을 낳았다. 이렇듯 여성해방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기계적 요소와의 관련에서이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담론이 되기 전까지는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해방의 일정한 물질적 가능성이 이 과정에서 주어지고 집에서의 고정자본의 (여성에 의한) 재전유를 거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해방적 공간을 여는 한편 그 공간을 소비에 종속시킨 자본관계의 모호성을 숨기거나 신비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 모호성은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 가는 과정 전체에서 작동하는 그러한 모호성이며 임금구조에 본질적인 것이고 노동과정에서의 집의 특수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은 탈본질화되었고(de-essenzializzato) 더 이상 단순히 젠더에 의해서, 여성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남편의 임금에만 종속되어 있다는 점에 의해서 결정되지만은 않는 관계의 잠재성(virtualità)에 열려 있다. 이는 자유의 영역은 아니며 단지 해방의 가능성일 뿐이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부채 메커니즘이 더 확연한 성격을 띠고 그 지형에서의 투쟁이 더 의미심장해지는 장소이다. 아다 꼴라우(Ada Colau)를 바로셀로나의 시장으로 만든 <‘주택담보대출 피해자를 위한 플랫폼>(la Plataforma d’Afectats per la Hipoteca) 같은 경험이 그 사례이다. 이런 투쟁에 대해서 논평을 해 달라.

이제 문제의 핵심에 이르렀다. 집이 노동장소가 되는 경우 (착취장소이지만 동시에 가능한 해방의 장소가 되는 경우) 그 집이 직접 관여되는 주체화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강한 이중성이 존재한다. 이는 자본이 가사노동을 착취에 종속시켰을 때의 그 이중성과 부합되는 이중성,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일반적인 이중성이다. 두 가지 방향의 착취가 있다. 하나는 이 기계화된 집에서 수행되는 노동의 착취이다. 다른 하나는 집을 주요 활동장소로 삼는 노동자들이 종종 부채상태에 빠질 때 이루어지는 가치추출 메커니즘이다. 첫째 경우에는 노동자가, 그리고 노동력의 가치가 소진(소비)된다. 둘째 경우에는 자본이 협동노동을 통해 생산된 가치를 금융수단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출한다. 그런데 자본의 상대로서 기능하는 노동의 자율성은 항상 증가한다. 이렇게 볼 때, 노동해방을 위한, 그리고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중적이다. (이전에도 늘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럴 수 있다.) ① 한편으로는 노동장소에서 착취에 맞서는 특수한 투쟁이 있으며 ②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추출주의에 맞서는 일반적 투쟁이 있다. 착취와 추출의 새로운 형상이 등장하면서 문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더 복잡해진다. 이 형상은 생산하는 공통적 생산 활동을 배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재화의 생산과 주체성의 생산이 맞물려 있다는 것, 집단적 가치와 생산적 특이성들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태가 이렇다면, 오늘날 추출적 착취란 공통적인 것의 착취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자들의 협동 네트워크들의 착취이다. 현재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적 투쟁은 이 새로운 지형에서 일어나는 듯하다. 현재 투쟁하는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는 이것을 즉각적으로 파악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노동(특히 집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들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직접세와 간접세에 맞서는 싸움들이 여기 해당하는 데 이는 임금에 영향을 미치고 일반화된 소득[기본소득]을 요구한다. (이는 사회적 노동, 특히 가사노동의 인정을 함축한다.) 다른 한편 부채에 대항하는 싸움(특히 그것이 주택구매와 연관되는 경우)이 있다. 모기지 시스템에 맞서서, 달리 말하자면 갚지 못하는 채무자들에 부과되는 불이익에 맞서서 아다 꼴라우가 이끈 투쟁 같은 것들이다. 이는 직접 행동을 통해 수행된 거대한 투쟁이었다. 새로운 메트로폴리스적 감성이다. 이는 더 이상 단지 철거에 맞서 사람들을 지켜내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제도적 착취자들을 폭로하는, 철거 작전에 동원된 판사, 집행리(執行吏), 경찰, 은행가들의 계급적 성격을 폭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일반적인 성격을 띤다. 즉 특수한 재화의 방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많고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연결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공통적인 것의 도전이 가늠된다.

 

메트로폴리스는 또한 ‘공간 산출’의 특수한 ‘형태’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최근에 널리 퍼진 도시 테크놀로지에 의한 식민화과정에 대한 논의와 교차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부각시키는 것 위에 이론을 세움으로써 문제들이 보통 잘못 제시된다. 문제가 개별적이면 이론도 개별적이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는 (그리고 건축가들 대다수의 머릿속에서는) 도시가 투기와 부동산 수입에 내맡겨진 대규모 서비스로서 제시된다. 메트로폴리스, 혹은 도시 일반은 식민화 혹은 공간성 산출의 지형이 된다. 공간은 계급적 척도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고 세분된다. 이런 움직임은 첫째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여러 측면들에서 발현된다. 이는 도시 공간의/에서의 장소들(topoi)의 탈영토화 및 위계화의 계속적인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공간에 확산되는 시초 축적 같은 것이 추출적 폭력의 결정적 행사를 통해 발생한다. 이 모든 것은 메트로폴리스에서의 금융의 투기적 성향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둘째로 이 새로운 도시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만 보지 말고 노동자의 관점에서도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 생각에는 르페브르가 1970년대에 노동자들의 도시 진출을 정확하게 감지한 듯하다. ‘도시에의 권리’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 포디즘 시기의 주장이기에 아마 오늘날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도시의 거시적 계획과 거주되는 공간의 미시사회학 사이에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존재했는지를, 그리고 도시의 향유로부터 집의 향유, 주택의 향유,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점을 가졌다. 그 관계를 전도시켜서 ‘삶의 향유’를 도시 전체를 (메트로폴리스를) 가로지르는 목표로서 긍정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이는 도시 공간 전체를 근본적으로 자본주의화하였다)의 이론들과의 관계에서 너무나도 자주 망각되는 개념을 르페브르는 극히 중요하게 내세운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집단성으로서의 도시, 조우·지식·즐거움의 장소로서의 도시라는 개념이다. 물론 항상 변하는 곳이며 또한 불완전한 곳이지만, 도시의 인간적 복잡성에 대한 이 인식은 집 난롯가의 기쁨으로부터 도시 전체로 투사되었다. 특히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프롤레타리아(유일하지는 않지만 특히 이주자들)의 거대한 층의 경우 그러했다. 이들은 근대적 스타일로 기계화되었고 어엿하게 설비가 갖추어진 공간을 누린 적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로스(Kristin Ross)의 훌륭한 책 『꼬뮌의 상상계』(L’imaginaire de la Commune)를 언급해야겠다. 이 책은 빠리 꼬뮌의 72일을 다음 세기에 새로운 지식과 예술·교육·문학의 창조를 낳는 데 봉사한 사건으로서 기록하는 데 덧붙여서, 그 행위자들의 삶형태에 혁명적 행동이 반영되고 계속해서 번성하는 이레적인 경험을 기록한다. 상상과 행복은 ‘감각적인 것의 재분배’(랑시에르)를 낳는다. 이는 도시에서의 그리고 도시의 ‘혁명적 풍요화’라고 할 수 있다. 종속된 민중의, 노동하는 민중 일반의 관점에서 도시공간의 산출을 생각할 때에는 ‘다중의 프로그램’(una programmazione moltitudinaria)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중의 욕구와 특이성의 기쁨을 한데 모아놓고 이것들의 종합에 봉사하도록 도시를 조직하는 능력(una capacità di tenere insieme bisogni della moltitudine e gioie della singolarità, ed organizzare la città al servizio di una loro sintesi)을 가리킨다. 나는 또한 이러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든 나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권력의 중심들은 도시의 문제에 행복한 집단적인 해결을 보고자 하는 민중의 압박 혹은 욕망에 밀려서 이데올로기적 신비화나 억압적 프로그램을 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삶과 노동이 겹쳐질 때, 도시-메트로폴리스의 문제는 생태와 생산의 겹침의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 도시 공간성의 중심적인 문제가 있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이로써 우리는 ‘스마트 시티’라는 개념에 이른다. ‘스마트 시티’ 개념은 유한계급의 도시 이미지를 서술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우리의 도시를 방대한 자본주의적 건설현장으로서 재형성하는 거대한 투자라는 물질적 벡터이기도 하다.

처음 ‘스마트 시티’에 대해서 말할 때 이는 처음에는 사이버네틱 시스템들, 그 다음에는 디지털 시스템들이 완전히 가로지르며 재조직화하는 도시를 의미했다. 이 ‘스마트한’, 지적인, 영리한 도시 공간이라는 정의 뒤에는 두 개의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내러티브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낡은 실증주의적 전제들, 19세기의 기계론적인 지배자들의 실증주의인데, 이는 ① 도시가 위로부터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될 수 있다는 생각과 ② 모든 도시적 관계들이 합리적이고 정보학-사이버네틱의 수단에 의해 조직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제한다. 이 내러티브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이다. 사실 이는 투기적이 아닐 때에는 상업적이다. 이는 좀 속임수이다. 생산물을 값보다 더 비싸게 팔려는 시도이다. 모든 것을 관통하고 가로지른다는 지성은 실은 통제일 뿐이다. 도시에서 펼쳐지는 노동에 대한 통제, 사회적 착취에 필요한 통제, 질서가 부여된 과정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폭력을 통한 통제이다. ‘스마트 시티’와 ‘스마트 사회’는 내 생각에는 순전한 신비화이지만, 이것들은 소통의 흐름들이 메트로폴리스의 구조에서 노동에 부여하는 새로운 중심성과 결부된 실재적 과정 속에 적대의 방식으로 융합되어 있다. 소통의 구조적 연관의 증가는 자본에 의해 직접 추출되는 잉여가치를 산출하는 동시에 저항을, 따라서 자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산출한다. 이것이 높은 정도로 신비화되는 것이다. 이 저항은 의식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의 부정적 측면들과 연관된 일상적 파열 요소들의 연속(continuità di elementi di rottura quotidiani)으로, 분자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어엿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본이 20세기 초기의 1만 명 인구의 작은 시들의 고요함으로 축소시키고 싶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삶을 흔들어야 한다. 정신적 인도의 기능에서 교구 목사를 대신하는 텔레비전이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고요함이다. 그래서 ‘스마트 시티’는 역설적으로 도시의 ‘해커들’을 필요로 한다. ‘해커들’이 없으면 메트로폴리스에서 사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저항과 조우의 가능성은 결코 탄생하지 않을 것이다.

 

‘스마트 시티’의 반대쪽에 도시 주변부, 파벨라, 슬럼, 방리유들이 있다. 지난 번 인터뷰에서 당신은 이 공통의 노동 및 저항의 장소들이 가진 생산적 성격과 거기서 일어나는 갈등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여기서 이에 대해 덧붙일 말은?

이러한 주변부들에 대해 말할 때 가령 마이크 데이비스 같은 작가들이 발전시킨 분석·연구·견해들을 인용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이 연구들은 주로 도시에서 빈자들의 소외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그들의 사회적 위험성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통제에 맞서는 도발로 간주하고 소외된 장소에서의 해방을 위한 ‘장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프롤레타리아적이고 가난한 장소들은 소외가 아니라 도시 삶과 메트로폴리스 노동의 공통적 질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따라서 삭제하기가 힘든 어떤 것이다. 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나 추방자들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현상학들이 있으며 이것들 모두 방리유를 총체적 배제의 장소들로 본다. 방리유 연구자로서의 나의 경험은 항상 총체화를 피하도록 나를 이끌었으며 노동 능력의 풍요로움과 공존 및 협동의 능력(둘 다 창조적이다)이 항상 나에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 방리유들은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에 의해 정기적으로 흡수되거나 정기적으로 거부된다. 기업들은 노동시장과 거기서 생산되는 재화(특히 문화적 재화, 음악, 삶형태 등) 둘 모두의 관점에서 이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과 추방이, 흡수와 배제가 계속적으로 교대되며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축적된 비참과 반란의 결단 사이에서 방리유가 띠는 적대적 중심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벌거벗은 삶’이 아니다. 오히려 삶정치적 리듬은 갈등에 차 있으며 때로는 이율배반적이다. 삶이란 그 내부에서도 갈등으로 차 있으며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당신이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논의의 중심에 놓은 추출주의는 맑스가 ‘시초축적’이라고 부른 것의 부단함과 연관이 있다. 이 시초축적을 맑스는 잔인한 유혈의 수탈 과정으로 묘사한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이와 유사한 폭력이 가치 추출 과정에 내재하고 있다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현대 메트로폴리스가 행사하는 고유한 폭력은 무엇인가?

신자유주의적 통제의 폭력을 강조하는 것이 현대 포스트포디즘 메트로폴리스의 일부 이미지들을 왜곡했다. 특히 종종 반복되는 시초축적과의 유비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편으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논의한 집의 특이화는 전적으로 추출 메커니즘들 내부에서의 일이며 금융자본의 순환에 메트로폴리스가 포섭된 상황 내부에서의 일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추출주의에 강하게 대립하는 다양한 반응들, 다양한 인식론들이 있다는 점이다. ‘대공장’ 체제에서 ‘실질적 포섭’이라고 불렸던 것―가치화 과정의 전일적이고 밀도 높은 부과―이 오늘날에는 해체되고 명백한 공간적 불연속성들과 다양한 시간적 리듬들로 다시 열리고 있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새로운 ‘시초축적’에 대해서, 그리고 심지어는 ‘형식적 포섭’의 새로운 에피소드에 대해서 말할 때 매우 조심해야 한다. 만일 이런 것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자본의 구조의/구조 내에서의 최근의 이행이 부과하는 조건들 내에서의 일이다. 즉 원래적 의미의 시초축적 단계, 단순협업 단계, 그리고 대공업 단계 이후의 일이다. 만일 ‘시초축적’과 ‘형식적 포섭’을 상기시키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맑스가 150년 전에 서술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그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경된 새로운 과정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결정적인 것은, 일반 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당연하게도 자본주의적 폭력이 행사되기는 하지만, 이 폭력은 지역 현실에 의해서, 생산적 협력을 구축해야 할 필요에 의해서 제한되고 상대화되고 조건지어진다. 이 생산적 협력은 영토 위에 분산된 노동력으로부터 도구들을 끌어온다. 자본주의적 폭력은 일반지성과 대면할 때, 일반지성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노동 조직화와 대면할 때 가공할 한계를 만난다. 생산도구들 및 금융도구들과 아울러 치안도구들과 문화적 도구들을 통합적으로 이용하는 폭력의 행사를 통해 자본의 통제가 재조직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공포의 산출이다. 띨 수 있는 모든 형태를 다양하게 띠며 미디어를 통해 주입되는 이 공포가 필시 현대 메트로폴리스에 행사되는 가장 큰 폭력일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 전염병에 대한 공포, 오염에 대한 공포 등등. 추출주의는 가장 최근의 폭력 형태일 뿐만 아니라 가장 고도의 폭력형태이며, 이전 단계의 발전에서 자본주의적 폭력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볼 때에는 불균형적인 결과를 낳는 폭력이다. 요컨대, 이 폭력은 예전의 내러티브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현재에 이르게 된 과정에서 다중의 힘 또한 자본이 명령을 발휘하기에 점점 더 위험스러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스에서는 특히 그렇다.

 

젊은 맑스는 『자본론』24장을 쓰기 전에 이미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때 공유지였던 땅에서 농민들이 나무를 훔쳐가는 것을 금지하는 법에 대해 쓰면서 맑스는 사용의 문제, 민중의 관습적 권리를 언급했다. 이 사용의 문제가 그것이 공통적인 것과 가지는 관계라는 시점에서 추출주의로 특징지어지는 현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어떤 시의성을 가질 수 있는가?

사회형성체는 생산과정을 생산하는 동시에 그 산물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에 동반된다. 공통적인 것이 추출적 착취를 생산하고 또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공통적인 것이 추출에 선행한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통적인 것 없이는 착취란 없다. 사회의 자본에의 실질적 포섭이 노동을 공통화하는(comunalizzare il lavoro) 효과를 낳는다. 여기서 노동은 삶정치적 노동이다. 즉 얼마나 공통적이고 사회화되어 있으며 협동적인지에 비례하여 가치를 획득하는 종류의 노동이다. 우리는 맑스가 시초 축적 및 ‘자연’ 공통재의 수탈과 관련하여 분석한 것과는 정반대의 과정 속에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착취의 모순은 사적 부문의 명령을 받는 공적 부문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을 수탈할 긴급한 필요 아래에서 조직된다는 데 있다. 공적 부문은 더 이상 사유화를 막아내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아니다. 지금 미국 대법원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를 위한 수탈을 정당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공적인 것(대법원)이 사적인 것(해당 다국적기업)이 발전하도록 허용하기 위해서 공통적인 것(공간, 활동)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한때 공적 부문은 보완적이었고 사적 부문의 보조자가 될 수 있었다. 사적 부문이 손을 뻗지 않은 곳―건물 인프라, 철도, 공항, 학교, 병원 등―에서는 공적 부문이 앞서 나갔다. 오늘날 이 거대한 서비스 구조들―자연 공통재를 통합한 공통적인 것―은 공적 부문에서 제거되어 다시 사유화되게 된다. 공통적인 것이 더 강한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성공할 것인가? 사유화를 지향하는 명령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의 투쟁의 지형이다. 이미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투쟁의 지형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제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이 세 번의 대화의 결론짓는 물음이다. ‘메트로폴리스적 정치’의 특수성을, 이 ‘공통의’ 총체 내에서의 정치적 행동의 특수한 형식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가?

오늘날 건축가들이 점점 더 ‘현장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다. 노동자주의적 선택들을 사회적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그들의 작업 속으로 옮겨넣으려고 하는 동지들이 건축 분야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아우렐리(Aureli)와 그의 그룹이다. 이들은 해방의 필요(다중의 욕구와 정치적 투쟁이 욕구)와 관련하여 보조적인 혹은 힘을 부여하는 위치에 스스로 자리하도록 건축을 밀어붙이는 경향을 가진다. 지금까지 건축의 보조적 성격은 항상 거대 부동산 자본주의의 특권으로서였다. 이제는 그것이 전문적 수준에서조차도 공통적인 것의 규범에 따라 지을 (순진하지도 않고 유토피아적이지도 않은) 필요를 의미한다.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협동과 자유, 평등과 유대를 장려할 가능성, 자본이 도시에 부과하려는 강제된 동질화로부터 도시를, 그 특이성들의 다수성을 구할 가능성이다. 이러한 공간과 이러한 매개변수 내에서 예를 들어 생태적 싸움은 자연의 방어로부터 ‘삼림헌장’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적인 것의 방어와 구축으로 돌아간다.[삼림헌장에 대해서는 이 블로글의 세 글 참조―정리자] 자본주의적 계획에 대안을 제안하는 방법은 여기서 적대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바로 이 지향 위에서 다중은 자신을 물리적이고 도시적인 캐릭터로서 조직한다. 훌륭한 옛 노동자주의의 관점을 따라서 나는 투쟁이 항상 자본주의적 구조화에 선행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 (더 이상 변증법적이지 않고 적대적인) 관계가 중심적이 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계급투쟁의, 그리고 또한 사회적 투쟁의 특권적 지형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는 실질적으로 공장인데, 다만 여기서 공장은 일반지성의 공장이다. 일반지성의 노동력은 노동계급의 노동력이 줄곧 그랬듯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이며 유연하고 힘차다. 필시 더욱 그러할 것이다.

마무리를 짓자. 나는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미시와 거시가 기능적 관계에서 서로 상응하며 동시에 거칠게 맞서고 있음을 부각하면서 시작했다. 그 다음에 나는 자본이 메트로폴리스에 부과하는 지배관계가 어떻게 저항을 받고 차단되고 대체적인 형태로 전환되는지를, 또한 고정자본에의 종속이 어떻게 전도되고 소외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슬픈 감정보다 우위에 서는지를 여러 수준에서 보려고 했다. 이러한 고찰들의 결과 나는 도시-메트로폴리스에서 추출적 착취가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적 재구성을 위한 가능한 공간 또한 보게 되었다. 기술적 변형에 의해 강화된 생산적 협동은 착취의 특별한 공간을 구성하면서도 다른 한편 그것이 강화되면 적대적 조직화와 근본적 대안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시간’의 분석이다. 지금 인류의 3분의 2 이상이 극히 밀집된 메트로폴리스 지역에서 산다. 마키아벨리가 도시에 대해 말하면서 서술했던 인류의 변형―‘짐승’에서 ‘시민’으로―이 이 지역에서 실현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실현되었다. 이제 시민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장소의 생산자는 바로 자신들임을 발견하는 것, 도시에서 해석하고 건설하고 행동하는 데 대한 열쇠를 자신들의 손에 쥐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착취받는 생산자의 상태에서 창조하는 생산자의 상태로의 유턴은 자동적이지도 않고 자생적이지도 않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하거나 쫓기에 너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 길은 공통적이 되기(essere-comune)의, 공통적으로 살기(vivere in comune)의 근본적 변형 위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길이다.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길 자체가 혁명적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상호주의적 삶형태(forme di vita mutualistiche), 사회적 연합들, 조우와 행동의 실험실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 어떻게? 메트로폴리스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도시자치주의(자치도시들에서 조직하고 투쟁하는 프로그램)가 ‘어디서’를 가리켜준다. 이는 일반적이지만 종종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 공장 투쟁과 옛 스타일의 사회주의 정치투쟁을 추출적 자본을 공격하는 양태로 옮겨놓기―이것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내일의 꼬뮌주의로 가는 길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맑스적 통찰을 기억한다면 그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노동시간이 노동의 척도가 되기를 그치고, 노동이 부의 척도가 되기를 그칠 때, 그때 부는 더 이상 교환가치의 관점에서 측정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사상가들 각자에게 진정한 개인주의는, 각 개인의 공통의 부에의 기여를 필요로 하고 인정하는 꼬뮌주의 아래에서만 가능하듯이, 마찬가지로 공통의 호화로움만이 진정한 호화로움일 것이다. [영역자 주석: Kristin Ross, Communal Luxury: The Political Imaginary of the Paris Commune, Verso, London, 2015, p. 142.]

 

2015년 6월 파리

 

 




메트로폴리스의 공통의 폐(肺)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 : Interview with Federico Tomasello”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Il polmone comune della metropoli. Intervista ad Antonio Negri in guisa di appendice a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3장 ““The Common Lung of the Metropolis”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일련의 대담 가운데 둘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의 대화를 계속하자. 로시(Ugo Rossi)는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 대해 세 가지 점을 비판한다. 첫째로, 인지노동 및 고급 3차 부문(the advanced tertiary sector)[IT, 마케팅, 연구개발, 법·기술·금융 콘설팅–정리자]에 대한 당신의 강조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생산형태의 다양한 성격을 놓치거나 과소평가하는 데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자본주의적 메트로폴리스에 공존하는, 혹은 추출적 자본에 의한 포획에 노출된 삶의 양태들(dei modi di vita)과 관련된 사회적 다양성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명백하게도 다양하고 다채롭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들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어떻게 경향적으로 발전하며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현재의 경향을 나타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맑스주의 방법은 항상 경향의 분석을 그 특징으로 했다. 현대 메트로폴리스에서 우리는 바로 고급 3차 부문을 경향의 요소로 추상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차원들이 이것과 관계를 맺고 종국에는 이것에 의해 포획된다. 가령 시장들이 메트로폴리스에서의 축적이라는 자본주의적 공간 내에 공존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한 것은, 이것들도 새로운 형태의 계산에, 가령 물류(logistics)의 새로운 체계와 연관된 새로운 은행업 및 시장 조건들에 더 단단히 연결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점에서 나는 로시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메트로폴리스 수준에서의 차이들은 반드시 ‘혼돈스러운’ 것들은 아니고 경향적으로 더 상위의 서비스들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그렇다면 자본의 가치화 메커니즘에서 착취의 많은 양태들에 공통적인 경향을 포착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로 그렇다. 우리는 인식론적으로 두 관점을 구분해야 한다. ① 하나는 현상학적이고 서술적인 관점으로서, 이는 관찰하고 기록한다. ② 다른 하나는 경향적 관점으로서 이는 귀납적·미래투사적이며, ‘지식에의 의지’를 주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서 핵심 요소로서 긍정한다. 나는 언제나 이 두 관점, 즉 서술적 관점과 재구성적·실천적·정치적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 어떤 현상에 직면했을 때, 나는 ‘사태가 어떻지’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것을 바꿀 수 있지’도 묻는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서는 현재의 조건을 열고 부수고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전제를 세워야 한다.

 

그러면 경향이라는 주제는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실천적 ‘장치’와 병행하는가?

그렇다. 이것이 푸꼬의 철학에서 ‘장치’라고 불리는 것이며, 칸트의 용어로는 ‘후험적 종합’이고, 맑스의 언어로는 ‘결정하는 추상’(astrazione determinata, determinate abstraction)이다.

 

가치추출방식으로서의 추출주의(estrattivismo)에 대해 좀더 말해 달라.

사회적 삶의 공간 전체로부터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추출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하비, 발리바르를 통해서, 그리고 자본주의적 착취의 이동적인 공간성에 대한 논의와 닐슨(Neilson)과 마짜드라(Mezzadra)의 시장 조직화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이것을 알게 되었다. 맑스에게서의 잉여노동과 잉여가치의 엄밀한 정의와 관련하여 초과로서의 협동의 생산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게 되는 만큼 이 이론적 요소들이 내게 중요하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금융현상의 연구는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가치를 참조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래서 생산적 사회의 특권적 형태가 메트로폴리스라면 금융을 통해 이루어지는 가치포획과 잉여가치축적은 추출적일 수밖에 없다. 가치포획은 장소(공장이 나타내는 것)보다는 공간(다중의 공간)에 준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물의 추출’과 같은 추출활동(l’estrattività)을, 즉 새로운 원료의 추출을, 더 정확하게는 공통재의 추출과 착취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로시가 제기한 비판의 둘째 논점은 당신이 부동산 부문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는 것이다.

부동산은 당연히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필시 경기순환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거나 작동해왔을 것이다. 특히 부동산 투자가 자본이 경기순환의 지난 주기에서 사용한 은행 파생상품들 및 기타 광적으로 투기적인 도구들을 통과할 때 그렇다. 그런데 조심해야 한다. 브라질이나 이스탄불 같은 곳에서는 부동산투자가 일종의 자본주의적 골드러시였던 것이 맞지만, 또한 극적인 한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나 리우에서는 시민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는 정도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 높다. 그리고 이스탄불은 도시에서 유럽에 속하는 부분이 수송의 관점에서 살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점점 더 많은 다리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동산 부문은 풀 팩터(pull factor)[사람들을 어느 지역에 살도록 끌어당기는 이유나 상황―정리자]인 것이 맞지만, 지금 그것은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매우 높은 ‘밀도’를 유발해서 도시를 때로는 여행하거나 거주할 수 없게 만들 정도이다. 따라서 나의 가설은, 도시 서비스들의 비용이 부동산의 가격을 곧 끌어내리리라는 것이다. 투쟁과 도시의 갈등이 무력으로 메트로폴리스를 ‘존중’하도록 만들거나 부동산의 가치와 독립적으로 도시의 자유롭고 즐거운 향유를 가능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래서 부동산의 비용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의 비용, 메트로폴리스 자체의 서비스들의 비용이다··· 더 나아가 부동산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의 문제 또한 메트로폴리스의 재생산 비용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런 말인가?

바로 그렇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 또한 부동산의 가치를 낮추고 파괴하는 ‘메트로폴리스의 비용’의 증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비용이 바로 사적인 것에 맞서서 표현된 공통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상파울로의 거주민들이 공공교통요금의 인하를 위해 싸울 때 그들은 명백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자본주의적 비용’을 증가시키고자 싸우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극히 열려진 과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말이다. 항상 투쟁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경향이란 항상 투쟁이 자본의 관계를 확대다고 심화시키는 경향이다. 이는 그 자체로 적대적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나는 ‘장치’(dispositifs)의 질서가 현상학적 질서에 맞세워지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항상 어렵다. 나는 리얼리즘이 실재적인 것의 반영(rispecchiamento)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에서 브라질 상황에 대해 말했던 것에 더 덧붙일 것이 있는가?

내가 보기에 브라질에서 근본적인 것은 빈자의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짜임새에 스며드는 투쟁들의 ‘견인력’, 즉 빈자들의 투쟁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발휘하는 견인력이다. 버스운전사들, 교사들의 투쟁이 폭발하는 데 기폭제가 된 것도 빈자의 투쟁이었다. 모든 옛 조합 범주들은 메트로폴리스에서 소수자가 되고 이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하고 있다. 이는 핵심적이고 질적인 요소이다. 공장노동자층을 추동요소로 보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적 전제가 여기서 붕괴된다. BRIC(Brazil, Russia, India and China) 나라들에서는 공장노동자들이 투쟁을 추동하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으며 일어나는 경우 종종 중산층 요구들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빈자들의 투쟁이 추동력이다. 가장 배제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메트로폴리스의 현실에 가장 깊이 포함된 사람들의 투쟁으로서이다.

 

이 ‘소수자들’의 문제에 대해 좀더 이야기해달라.

가령 보장소득이 메트로폴리스 생산성의 일반적이고 열려진 척도와 전제조건을 구성한다고 말할 때 이는 여성들의 권리, LGBTQ, 혹은 써발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도시에 사는 사람들로 보고 있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것은 소수자로서 도시 안에 있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소수자들이 소수자로서 공통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공통적인 것은 메트로폴리스의 다중의 생산물이며, 다중 자체는 소수자들의 배치(assemblaggio)이다.

 

로시가 제기하는 가장 흥미있는 비판점은, 공통적인 것과 도시에의 권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인데, 그는 우리가 도시를 ‘재구성’보다는 통일체로 환원되지 않는 투쟁들과 차이들의 ‘배치’로 보는 것을 제안한다.

답:

매우 흥미로운 논점이지만, 이 논점은 다중 개념이 일원적인 일자(unum)라는 전제 위에서 제시된 것이다. 다중 개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다중은 그 자체로 차이들의 기계이다. 나는 다중을 도시에서의 조우들과 협동의 순간들을 통해 생산에 참여하는 특이성들의 총체(un insieme di singolarità)라고 부른다. 이 협동의 순간들이 공통적인 것을 구성한다. 인지자본이 확고한 현실이 된 사회에서 메트로폴리스의 조건은 공통적인 것의 더 상위의 결합형태로의 단계적 이행을 전제한다. 자본은 공통적인 것에서 자양분을 취하며 사회적 협동의 공고화와 증가를 통해 전진한다.

‘도시에의 권리’는 훨씬 더 이전 단계의 메트로폴리스에서의 협동의 밀도에 상응한다. 메리필드(Merrifield)와 브레너(Brenner)가 도시화와 차이들 사이의 조우가 메트로폴리스에서 진정으로 생산적인 요소이며 ‘공통의 폐(肺)’를 구성한다고 주장할 때, 그들은 적확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몇몇 오해를 풀 논점을 제시해야 할 듯하다.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고 내가 말할 때, 나는 공장과 메트로폴리스에 관한 한은 유사성(둘 다 생산이 추출되는 무질서한 집합이다)을 말하는 것이지만, 다중에 관한 한은 은유이다.[이는 12장에서 말한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나누어 말한 것이다―정리자] 만일 다중의 경우에도 유사성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중이 과거 노동계급처럼 무언가 잠재적으로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중은 특이성들의 ‘장치’를 창출하기 위해서 발전된 개념이다. 특이성들은 주체성들의 실존-저항-조우-협동-생산의 순서로 작동한다. 우리가 모든 생산부문에서 가능한 보장된 최저임금이나 보장소득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차이들의 조우·협동·생산이 메트로폴리스에서 보장될 수 있는 토대가 될 출발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중처럼 메트로폴리스도 ‘도시학’(urbanistica)의 개념으로 이해되기보다 정치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인데···

‘도시 배치’(assetto urbano)의 기술은 상이한 여러 방식으로 읽힐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시에의 기술 개입이 수많은 관점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라고 말했을 때 속속들이 삶정치적인 개념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남는다. 여기에는 공간, 시간, 전통, 역사적 차원, 문화적 구현 등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 파리에서 창문 밖을 내다볼 때마다 나는 역사, 투쟁, 획득된 권리, 시민적 공고화의 겹들을 인식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인구가 메트로폴리스 지역에 산다. 메트로폴리스적 삶양태는 이제 완전히 독보적이다. 자본주의의 외부가 없듯이 메트로폴리스의 외부도 없다. 생산에서 연결 역할을 담당하는 메트로폴리스는 중심적인 경제적 요소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여전히 콜하스(Rem Koolhaas)가 제안한 메트로폴리스 구조―‘폐기물’의 축적을 수반하는 거대한 생산적 장치―를 읽는 데 애착을 가진다. (폐기물은 다시 도시 생산을 창출하는 데 쓰인다.) 그런데 우리가 경향의 방법을 따른다면 폐기물과 잔해의 무게를, 메트로폴리스의 연결 조직에서의 표류와 실패라는 점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생산적 기계들로, 역설적으로 메트로폴리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기계적 차이들로 보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더 이상 외부가 없다는 사실이 자본 내에 항상 저항이 있음을 (프랑크푸르트학파 사회학자들이 거의 반세기 동안 했던 것처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자본 개념 자체가 (특히 메트로폴리스적 자본이) 계급투쟁의 개념임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적인 사례가 브라질 파벨라의 높은 생산적 강렬도이다. 바로 이것이 현재의 투쟁의 충격을 창출했다. 모든 메트로폴리스 투쟁들을 집단적 실존, 특이성들의 삶양태들, 저항, 조우, 협동, 그리고 자본의 지배에 맞선 주체성의 생산에서의 차이들의 관계를 둘러싼 갈등 내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이 공통적인 것이라는 열려진 개념을 규정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로시가 공통적인 것이 차이들의 기계라고 말할 때 그에게 동의한다. 공통적인 것은 다중의 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협동의 꼬뮌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


  • 저자  :  Antonio Negri, Federico Tomasello
  • 원문 :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 (2014) in Antonio Negri.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이탈리아어 원본 “La Comune della cooperazione sociale. Intervista ad Antonio Negri sulla metropoli”)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네그리(Antonio Negri)의 책 From the Factory to the Metropolis: Essays Volume 2 의 12장 “The Commune of Social Cooperation”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는 네그리와 또마셀로(Federico Tomasello)의 세 번의 이어지는 대담들 가운데 첫째이다. 나머지 두 대담(13장, 14장)도 올릴 예정이다.

문 (또마셀로)

당신은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게는 노동자와 공장의 관계와 같다고 말했다.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를 읽는 구도를 시험하고 업데이트할 필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 (네그리)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와 관련하여 완전히 열린 상황에 있다. 그래서 시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장-메트로폴리스 관계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다만 직렬적인(lineare) 관계로 해석될 것은 아니다. 메트로폴리스는 공장과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지만, 공장처럼 탁월한 생산의 장소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그러면 메트로폴리스의 시민들은 모두 공장의 노동자들과 같은 존재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해서도 논의가 넓혀지고 불필요한 범주들을 솎아내어 단순화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메트로폴리스가 오늘날 다중에게 과거에 노동계급에게 공장이었던 것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것은 은유가 아니다. 그런 관계가 존재하고 있으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간성의 물신을 내세우면서 도시를 전적으로 차이와 분리의 관점에서 읽는 사회학들에 경각심을 가진다. 실상 이 다양성 뒤에는 전적으로 구체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는 착취의 메커니즘이 있다. 추출적 메커니즘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공장에서 메트로폴리스로, 계급에서 다중으로 가는 경로를 택하면 비유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상황, 다만 착취의 새로운 범주들을 통해 해석해야 하는 상황과 대면하게 된다. 추출적 착취, 더 정확하게는 추출적 지배의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추출주의(estrattivismo, extractivism)라는 테마를 강조해야 한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학적 짜임새는 공장의 그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① 분업이 직접적으로 기능적이지 않고 휸육적이지 않으며 통제의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② 우리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발전에서 전과는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까를로 베르첼로네( Carlo Vercellone)가 인지자본과 인지노동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미, 탈산업적이지 않고 결정적으로 정보적(informatica)이라고 부른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이제 평형을 찾기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 착취 관계는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고정자본과 산 노동 사이에 혼융과 혼종화(confusione ed ibridazione)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정자본이 주체들에 의해 재전유되고, 자율의 장치(un dispositivo di autonomia)로 보이는 사회적 협동의 형태가 출현한다.

 

공통적인 것의 구축이라는 관점에서 메트로폴리스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가?

메트로폴리스의 경제는 근본적으로 일원적(unitaria)이다. 물론 자율의 요소와 추출적 착취의 요소가 각자의 일관성 속에서 고찰되어야 하지만, 그 상호관계의 중심성(la centralità della loro relazione reciproca)을 보아야 한다. 그러면 다중과 메트로폴리스의 관계는 과거 노동계급과 공장의 관계와 같다는 테제를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자본은 이중적 개념이어서 착취자가 있으면 피착취자도 있으며 명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들의 내포적 정의를 이러한 관계의 차원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주체들 자신을 번갈아서 계속적으로 재정의하는 것이 된다. 나는 너를 정의하고, 너는 나를 정의하며 ··· 이런 식으로 무한히 나아간다. 이러한 상호작용 안에서 주체들의 질이 결정된다. (그리고 여기서 인간학적 발전이 도출된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유동적이지만 극히 강한 파도 혹은 조수(潮水)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치 거대한 두 덩어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듯이 말이다.

이러한 거시적 수준에서 미시적 수준으로 이동하여 분석하는 것은 분명 복잡한 과제이다. 이러한 이동은 사회학(맑스주의 사회학, 즉 객체의 물신성을 전제하지 않고 주체를 역동적으로 보는 사회학이다)에서 열정들의 작동적 물리학(fisica operativa delle passioni)으로서의 정치학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참여하는 연구가 핵심이 아니라 연구를 정의하고 그 연구가 집단적 열정들의 구축에서 작동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도록 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이는 우리가 마끼아벨리, 스피노자, 역사가로서의 맑스, 그리고 오늘날 푸꼬에게서 보는, 혹은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가따리가 시도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비록 후자에는 현실로부터의 과도한 추상이라는 한계와 계급현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인간학적 차원을 암시하는 새로운 조건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각도에서 이것이 고찰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인간학적 차원도 이중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탈산업적 인간학의 두뇌적 형태’(forma mentale dell’antropologia post-industriale)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 이는 인간이 고정자본을 재획득하는 것, 자본으로부터 기계 부분에 대한 전적인 명령권을 낚아채서 재전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찰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지금은 자본주의적 명령이 더 이상 단순히 기술적 요소들의 인간 신체에의 주입으로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재전유의 자율적 능력과 기계 요소들이 인간의 구조물로 변형되는 것을 다루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적 열정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수동적 소비와 연결된 열정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능동적 소비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후자가 먼저이다. 이러한 논의는 도덕주의나 순전한 인간 어쩌고 하는 인간학적 어리석음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인간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결코 발가벗은 상태가 아니다. 이런 인간 형상은 항상 옷을 입고 있고 무언가 묻어 있다. 인간의 유일한 실재는 옷을 입고 일을 하는 방식에 의해 부여된다. 이는 욕구와 가난의 지평을 정의하는 경우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가난은 1세기 전의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가난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소통의 도구들이나 협동 수준에서의 사회적 통합의 능력의 유무를 언급한다. 분명 우리는 가난을 음식이나 주택의 관점에서만 정의하지 않는다.

메트로폴리스에는 풍요로운 인간학적 직물이 주체들의 자율이 한껏 발전하는 수준에서, 공통적인 경향이나 행위와 연결된 수준에서 존재한다. 이 공통성의 요소는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메트로폴리스에서 근본적인 소여이며 연구가 예비적으로 포착해야 하는 것을 이룬다. 오늘날 메트로폴리스에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수천 개의 차이들, 특이성들의 수천 개의 수준, 극히 다양한 형상들이 존재하며 이것들이 내적 계획이나 프로그래밍만이 아니라 동일한 위상학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근본적인 인간학적 일관성이 불연속성들을 통해 재구축되어야 한다. 주체와 객체의 불연속성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발견법적 가치를 가진 방법(참여적 연구의 방법)에서의 불연속성과 파열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메트로폴리스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인간학적 접근법은 산업노동자들을 저항능력을 가지고 있고 이것을 일반화된 형태로 발현할 줄 아는 주체로 보았던 바로 그 방법을 이어가야 한다.

 

당신은 소비와 가난을 언급했다. 어떤 이들은 가령 매우 높은 청년 실업율로 특징지어지는 서구 도시 공간에 대해서 말할 때, 작동 중심을 근본적으로 재설정한 생산·축적·착취 과정과의 관계에서의 주변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가난의 형태로서의 잉여(superfluità)이라는 상태의 출현을 지적한다. 이 관점이 현대 도시에 대한 효과적인 서술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오늘날 자본은 생산적 수준에 위치한 주체들을 일의적으로 포착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통치하는 데는, 사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성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총체적 주변화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는 벌거벗은 인간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거대한 중심지에서는 그렇다. 우리는 ‘발전’이 도약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발전애서도 모든 점에서 주변적인 지역들이 존재하겠지만, 이는 더 이상 직렬로 연속되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계에서 단계로 나아가는 형태로 일어난다. (가령 오늘날 모바일폰의 확산 정도가 가장 높은 지역은 아프리카에 있다.)

요컨대, 총체적 포함의 영토 같은 것이 없듯이 총체적 주변화 같은 것도 없다. 소비를 통한 포함의 신화화만이 아니라 주변화의 신화화와도 싸워야 한다. 총체적 배제의 신화화는 특권화된 정치적 항목을 구성하는 것 같다. 이러한 집단적 행동의 부재증명들―동정, 연민, 종교적 미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부수어야 한다. 우리가 가난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착취받는 사람들에게, 즉 다시 말해서 어떤 식으로든 추출적 메커니즘에 종속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조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착취받는 사람들은 결코 총체적으로 가난하지 않다. 무언가를 추출하려면 생산하는 인간적 현실이 있어야 한다. 노예제 속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생산의 메커니즘에서 배제되어 있지 않다.

 

하비는 『반란의 도시』(Rebel Cities)에서 메트로폴리스라는 테마를 다룬다. 한편으로는 지대와 축적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을 다룬다. 그의 제안은 기본적으로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말하는 ‘도시에의 권리’를 재개하고 재발명하고 현실화할 가능성을 타진한다. 그것을 사회적 실천의 커머닝에 접목시키기 위해서이다. 이 전략이 적절하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게 이야기하겠다. ‘도시에의 권리’는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이는 예를 들면 꾸르뇌브(Courneuve)의 싸구려 아파트(barre)에 살면서 파리 중심지나 비양꾸르(Billancourt)[불로뉴 비양꾸르Boulogne-Billancourt는 프랑스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정리자]로 일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도시에 대해서 가지는 권리이다. 못사는 방리유에서 와서 번잡하고 아름다운 도시를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권리이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남쪽에서 와서 외곽 지대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토리노(Torino)를 차지할 노동자들의 권리이다. 요컨대 도시에의 권리는 포디즘 시기의 도시 재건설과 연결된 개념이다. 이것이 르페브르의 도시였다. 이는 오늘날에는 핵심적인 요소가 된,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라는 메커니즘을 아직 담고 있지 않았다. 하비 식의 테제는 메트로폴리스의 프롤레타리아 구획부분을 너무 강조한다. 그래서 연합, 내적 재조직화 그리고 반란의 능력에 대하여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이는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포스트포디즘 시대의 도시에서 보여주기 시작한 능력이다. 하비의 생각은 아직 자율적 운동들과 가령 인지노동자라는 새로운 주체에 반영된 새로운 정치를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하비는 거대한 자본주의적 위기들이 도시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부동산 시장의 발전이 행한 결정적 역할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분명 2008년의 붕괴는 이러했다. 당신은 이런 방향의 사고가 미래의 발전을 연구하는 데에서도 결정적일 수 있다고 보는가?

나는 도시 지대(rent)의 문제가 계속 중심적인 것으로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역에서 자본주의적 실질적 후퇴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도시 지대는 계속 일정한 중요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수준만큼은 아니다. 나는 발전이 독일 도시 모델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는 소유 범주들의 혼합이 매우 광범위하다. 물론 베네치아, 피렌체와 같은 관광도시들은 항상 큰 가치를 가질 것이다. ‘주요 사건들’이 일어나는 곳들에 가까운 장소들도 그렇다. 그러나 더 일반적으로 볼 때 메트로폴리스는 하이브리드 도시가 되어야 한다. 이는 메트로폴리스 자체를 유지하는 비용의 관점에서 볼 때 불가피하다. 점점 더 중요해지는 요소는 공통적인 것의 비용(il costo del comune)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시를 재생산하는 비용은 도시 지대의 생산 능력을 초과한다고 주장해왔다. 지대는 세금, 서비스 비용에 의해 직접 공격을 받는다. 이 비용들은 종국에는 부동산 소득보다 커지게 된다. 문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기보다는 도시 소비의 정상화이다. 이제 축적은 도시라는 기계의 생산적 사용을 통과한다. 이 기계는 포괄적으로, 일반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아이디어·언어·잠재력·삶양태·네트워크들·지식을 생산하고 무엇보다 협동을 생산한다. 이것은 거대한 ‘결합’이며, 자본에 큰 비용이 들게 하고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는 지대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의 구조와 관계되어 있다.

요컨대 내가 보기에 미래의 도시는 부동산 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들의 통합 위에 지어질 것이다. 이것이 도시를 규정하는 ‘장치’(dispositifs)이다. 도시를 공장으로서 규정하기 때문이다. 다중의 공장이다. 이 어구는 다중이 생산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늘 확대되고 있는 서비스들의 양과 관련되기도 한다. 만일 도시에 무료 광대역 인터넷망을 설치한다는 이야기가 돈다면 이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며 요구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를 더 낫게 기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며 그것을 전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도시 전역으로 확대되는 협동의 한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

 

이제 주체성과 불복종의 생산지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주제로 가보자. 당신은 최근에 터키와 브라질을 여행할 기회를 가졌는데, 여기서 메트로폴리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들이 일었다. 이 경험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운동들과 예를 들어 오큐파이나 인디그나도스 같은 운동들 사이의 연관과 불연속점은 무엇인가?

브라질에서는 도시에 대한 권리라는 전형적인 문제, 즉 교통요금 문제를 놓고 투쟁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하지만, 그 다음에는 곧장 도시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것처럼 보이고 거대한 건설프로젝트들과 연결된 개발정책들에 반대하는 봉기가 된다. 특히 리오에서 이 정책들은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거대한 행사에 대한 투자를 도시로부터의 배제와 파벨라(favelas, 빈민촌) 재개발 같은 관행과 연결시킨다. 파벨라는 비참이나 가난이 ‘총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살아있는 비판에 해당한다. 빈민촌들은 가난한 가운데에도 경제의, 생산적 행위의, 그리고 새로운 인간학적 형상들과 새로운 언어, 독특한 문화의 주된 구성부분을 이룬다. (토착 문화만이 아니라 높은 가치를 가진 메트로폴리스 고유의 문화이다.) 물론 거기에는 메트로폴리스 사회학자들이 (위기가 폭발할 때 말고는) 너무 조금 다루는 마약시장 같은 일탈적인 요소도 있는데, 이는 특히 윤리적-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동체들을 실질적으로 파괴한다.

브라질에서 투쟁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나 그 다음에 도시의 재구조화라는 문제를 위험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도시가 노예제로부터 해방될 때 형성된, 백인의 메트로폴리스 의식의 상징들과 요새들도 위험에 빠뜨렸다. 파벨라는 메트로폴리스 내부에 있는 ‘다른 도시’이다. ‘다른’ 도시이지만 항상 메트로폴리스의 생산체계 안에 있다. 도시 개발을 주도하는 정치가들은 이 점을 잊고 파벨라를 공격하는데, 그래봐야 벽에 머리부딪치기이다. 사회주의 정부의 계획자인 노동자당(Partido dos Trabalhadores)은 개발을 산업생산과 잘못 동일시했다. 이러한 ‘낡은 산업주의’(archeo-industrialismo)의 어리석음은 풍성하고도 활발한 저항의 출현에 의해 곧장 드러났다. 저항은 매우 거셌으며 생태론적일 뿐만 아니라 메트로폴리스 내에서 살아있는 공동체적 공간을 유지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 인간학적 변이가 놓여있다. 산업노동자들은 도시를 공장과 동일시하고 그로부터 탈출하려 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메트로폴리스로 되돌아가는데, 거기서 사회적 생산의 꼬뮌(una Comune della produzione sociale)을 발견한다. 메트로폴리스의 특징은 생태론적인 데 있지 않고 생산적인 데 있다. 이런 바탕에서 게지 파크(Gezi Park)와 리우(Rio) 및 상파울로(San Paolo)의 봉기가 일어난 것이다.

 

이 투쟁들은 당신이 보기에 개발 내에서 개발에 반대하는 투쟁인가?

이 투쟁들은 생산이 개발에 맞서는 투쟁이다. 생산을 개발과 근본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내가 최근에 논평을 한 적이 있는 「가속주의 정치 선언」(“‘Manifesto for an Accelerationist Politics’이 이에 대한 훌륭한 문서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발전의 개념에 맞서 생산 개념을 다시 찾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고 있는 것은 생산적 공동체를 인정하라는 요구인데, 이 공동체는 인지노동자들, 자본의 가치 추출의 원천인 사람들로 구성된다. 바로 이 애매하고 양가적이지만 매우 실재적인 지형에서 근본적 변형이 일어난 것이다.

오큐파이(Occupy)나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같은 경험들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이는 분명, 서구에서 일어난 위기(추출적 자본의 욕구에 맞추기 위해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재조직화하는 과정을 포함하는 위기)에 대항하는 투쟁이다. 그 과정은 메트로폴리스와 분업을 재조직화하는 과정이며, 복지제도의 파괴와 새로운 위계의 구축을 노리는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스페인에서 그리스까지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도 예를 들면 10월 19일의 시위의 경우) 복지를 둘러싼 투쟁은 모두 메트로폴리스의 지형에서는 일종의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연합주의’(sindacalismo sociale metropolitano, metropolitan social unionism)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면 오큐파이, 인디그나도스를 좀 이야기해보자. 이 운동들은 위기에서 태어나 위기에 대항하는 운동인데, 다른 한편 놀랍게도 이 운동들은 그들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관심사들보다는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중심으로 조직하여 이 요구를 그들의 가장 의미심장하고 파열적인 표징으로 만들었다.

동의한다. 그런데 이 운동들을 이런 식으로 언급하면서 특수하게 메트로폴리스적인 측면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이 투쟁들이 나타내는 정치적 이행의 어떤 부분들이 받아들여지고 어떤 부분들이 비판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면적 수평성은 구성의 시기에서나 미래의 상상된 정치체제에서나 완전히 추상적인 정치구조 모델이다. 이는 격동의 시기에는 잘 작동할지 모르지만, 정치체제의 변형과정을 실제로 구축·관리하려고 시도할 때에는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나는 대안권력(contropotere, counterpower),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확산된 대안권력들이라는 모델을 더 선호한다. 이는 더 열린 개념으로서 구성적 과정의 양태들과 난점들을 더 효율적으로 매개할 수 있다. 전면적 수평성은 영토적·공간적 다양성―이는 그 어떤 정치운동일지라도 취하여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 ―을 무시하기 때문에 무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인디그나도스는 지역 공동체들에 다시 위치를 잡았을 때 실질적인 도약을 산출했다. 게지 파크의 반란은 실제 동네마을들에 뿌리를 내릴 때, 즉 모든 동네마을이 효율적인 대안권력을 조직할 때, 그리고 이 대안권력들이 명령 구조를 수직으로 공격할 수 있게 될 때 중요해진다.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메트로폴리스 구성 자체가 지속적인 기획 구축에서의 전면적 수평성 모델의 적합성을 사실상 부정한다.

 

미국의 경험도 마찬가지인가?

부분적으로는 상황이 다르다. 오큐파이는 복잡한 운동이다. 사람들을 집에서 쫓아내는 문제에서 발생했으니, 부채 문제로 출발한 셈이다. 부채 담론을 통해 월가로 이동하게 된다. 그런데 이 수준에서는 투쟁의 큰 상징성 말고는 산출한 것이 거의 없다. 미국에서 발생한 것인 한, 전 세계가 보게 되는 것이다. 효율성의 관점에서 측정하면, 이 운동은 최근의 것들 가운데 상대적으로 약한 경험 가운데 하나이다. 사실 이 운동은 권력에 의해 가차 없이 해체되었다. 한편으로는 ‘쌍둥이 극단주의’―오큐파이 대 티파티(Tea Party)―를 비난하는 미디어 선전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급진적 정책 변화로 인해 오큐파이 운동이 선거운동으로 흡수되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남는다. 이 운동이 부동산 지대에 대항하여 출현했다는 점, 즉 메트로폴리스 연합주의의 그 어떤 어젠다에도 핵심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몇 년 동안의 중요한 도시 운동들과 투쟁에 대해 말해보았다. 이제 또 하나의 전형적으로 메트로폴리스적 현상이지만 정치적 관점에서는 다소 ‘허위적’으로 보이는 ‘봉기’에 대해 말해보기로 하자. 1992년 LA에서 2011년 런던, 2005년 프랑스 방리유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회적 행동들이 도시 지역에 뿌리를 내렸고 이것들은 거의 객관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 문제에 관하여 당신은 『공통체』(Commonwealth)에서 자크리에서 현대 동시 봉기에 이르는 긴 역사에 걸친 ‘반란의 계보’를 제시한 바 있다. “자크리, 재전유 투쟁, 메트로폴리스 봉기가 자본주의적 삶권력의 가장 주된 적이” 되는 한에서 봉기들은 불충분하지만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때로 근대 정치학이 우리에게 제공했고 우리가 사회 현실을 읽는 데 흔히 적용하는 전통적 관념들을 통해서는 파악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건들이 근본적으로 비정치적인 것으로 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이런 사건들은 권력이 저지른 부당한 살해에 맞서 일어난다. 근본적인 권리인 삶에의 권리(un diritto fondamentale, quello di vivere)에 가해진 모독에 반대하여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비정치적’인 것으로 정의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자크리는 세금에 대한 공격이라는 확연한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이 세금에 대해 말할 때는 정치이지만, 빈자가 세금에 대해서 말하면 비정치적이라고 한다.

물론 대의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이 봉기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결국 문제는 ‘정치’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 맑스주의자에게라면 정치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부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면 도시 불복종 현상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힘들다. 이는 사실 메트로폴리스의 사회적 지형에서 진정한 연합주의적이고 정치적인 투쟁들이다. 노동시장의 인종적 조직화나 노동력의 가변자본으로서의 훈육(inquadramento, disciplining)을 통해 일어나는 배제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투쟁의 자발성도 중요한 정치적 특징이다. 그러나 자발성은 출발점일 뿐이다. 나중에 발산, 표현, 반복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조직화가 관여된다. 나중에 안정된 구조로 발전될 수 있느냐 아니냐는 우리 대화의 범위를 넘어선다.

 

결국 당신은 공장으로서의 메트로폴리스라는 생각이 이러한 사회현상과 집단적 행동을 읽을 수 있는 틀이라고 보는가?

그렇다. 생산적인 포스트포디즘적 메트로폴리스가 이 현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유일한 틀이다.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자본의 삶권력과 주체들의 삶정치가 서로 혼합되고 맞선다. 이 상황이 이렇게 명백하게 주어지는 다른 곳은 없다. 반란은 기본권(살 권리)의 침해에서 일어나서 확대되는데, 보통 가장 강한 억압요소들에 집중함으로써 그렇게 된다. 이는 종종 인종주의적 차원 및 그로부터 결과하는 배제와 연관된다. 소비로부터의 배제가 그 요소들 중 하나이다. 그래서 재화를 전유하는 봉기의 형태를 띠며 인종적 배제에 맞서는 투쟁은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인종과 계급이 소비를 위한 전유의 충동에서 서로 엮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고통, 즉 가난, 착취의 측면을 드러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당신은 메트로폴리스 현상을 이해하는 데 주된 열쇠들 가운데 하나로 출현한 ‘인종’ 문제를 언급했다. 이는 매우 많은 관점들로부터 사용되어온 다면적이고 다의적인 열쇠이다. 반동적이고 안보론적인 담론에서 인종문제를 탈식민적 봉기 문제로 보는 담론들까지, 그리고 여러 이유로 ‘인정’ 범주를 참조해온 모든 해석들까지···

··물론, 인정은 중요한 범주이지만 조심해야 한다.  인정 문제는 부르주아지가 명민하게도 메트로폴리스의 다인종, 다문화 대중들에게 주입하려고 하는 요소, 즉 항의의 봉쇄 그리고/혹은 흡수(내화)라는 요소와 연관된 애매성을 항상 일정 정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는 논의를 인정이 아니라 강하게 인종적으로 특징지어지는 주체성과 연관시켜야 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최근의 런던까지 그리고 오늘날 브라질에서처럼 말이다. 브라질에서는 인지노동자들과 파벨라의 아이들(이 아이들은 수 세기에 걸친 인종적 지배 이후에 자기표현의 권리를 얻고 있다)이 투쟁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있다. 인종주의적 함축을 가진 자본주의적 지배의 경직성의 이러한 분쇄는 이례적인 사건이다. 요컨대, 도시 봉기들의 원인과 특징은 다양하지만, 그 변별적 특징은 누구에 맞서 봉기하는가에서 찾아야 한다. 바로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 봉기한다. 그래서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크게 중요한 것은 이 과정들 안에 들어가서 그것들이 순전히 인정(종종 정체성에 기반을 두거나, 고립된 자기재생산의 메커니즘들을 산출한다)의 관점에서만 주어질 때에는 종국에는 그 과정들을 부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개인의 다양성이나 착취 명령의 통일성이나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부과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도시는 ‘예외’의 공간인가?

예외상태는 자주 반복되지만 반복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것이 상수는 아님을 말해준다. 정치체제에서 발휘되는 독재라는 형태의 예외와 공공질서의 유지를 위해 시행되는 예외적 규범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제노아 2001년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종류의 예외성이 정치체제에서의 예외보다 가능성이 더 높다. 둘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예외라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이 고조되는 순간들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갈등의 강렬도에 좌우된다. 아감벤 등이 형이상학적으로 세련되게 혹은 순진하게 아나키즘적으로 말하는 바와는 다르다. 이들은 다른 모든 것이, 아니면 적어도 여러 가지 것들이 잘 되고 있는 때에 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예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지칭해야 하는지를 보지 않는다. 예외상태가 하나의 정책에서 독재상태로 언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이해하려면 전쟁관계로서의 계급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위대한 로마 역사가들, 키케로 같은 정치가들의 정치과학은 이 국면에서 매우 조심스럽다. 타키투스는 예외상태가 다른 수단으로는 풀 수 없는 갈등의 순간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애써 보여준다. 예외상태는 전쟁상태가 존재할 때 발생한다. 체계가 일상적으로 행사하는 음성적이고 훨씬 더 효과적인 폭력과는 다른 예외상태의 폭력은 권력이 그것이 긴급하게 필요하다고 볼 때 폭발적으로 행사된다.

 

비비오르카(Michel Wieviorka)는 ‘갈등 없는 폭력’에 대해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갈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위기란 극단화된 갈등이 아니고 무엇인가? 1973년 최초의 탈근대 위기부터 갈등이 심화되어왔다. 40년 동안의 위기는 새로운 축적형태의 근본적인 조직화와 함께 아마도 자본에게 유리하게 끝나가고 있지만, 이러한 ‘축적의 자본주의’(임금 및 가변자본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시초적 축적)의 장기적 재구성 국면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발전되고 해결 불가능한 위기라기보다는 굽힘 없고 사회적으로 확산된 저항이다. 인지노동자들의 생산적 ‘초과’(l’“eccedenza” produttiva)는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갈등은 영속적인 조건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볼 때 ‘갈등 없는 폭력’이란 말은 이상하게 들린다. 이는 폭력의 이름으로 갈등을 제거하는 저 표준적인 정식화들 가운데 하나이며 따라서 국가규범의 전적인 예외성이라는 생각처럼 들린다. 폭력이 없어도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그런 다음에 폭력이 온다. 왜냐고? ‘극단주의적’ 폭력을 보면, 그것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행사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힘이기는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정치체제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19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큰 공포의 원인은 자신들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충분하도록 항의의 ‘초과’(eccedenza[네그리에게서 ‘초과’는 기존의 척도에 종속되지 않는 새로운 질의 생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다―정리자])를 행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공장투쟁, 사회적 투쟁에서 엄청난 비등의 상황이 정치체제에서 들릴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회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강화하지 않고 군사주의로 달아난 것이었으며 그런 다음에 군사주의적으로 진압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갈등은 존재하며 우리는 그것을 바탕으로 작업을 해야 하고 ‘예외상태’를 봉쇄할 수 있는 ‘초과’를 펼쳐내야 한다.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폭력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제안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폭력-공포의 순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라.

폭력 그 자체를 위로부터 규정하지 말아야 한다. ① 경찰을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종류의 범죄(폭력)이든 주권에 거스르는 범죄로 간주되는데 이는 불합리하다. 모든 폭력행동을 살인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주권의 메커니즘에서는 모든 것이 대패질되고 사회적 갈등이 위로부터 규정된다. ② 폭력은 항상 존재한다. 이는 억압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조직되어야 할 요소이다. 폭력은 자연적인 소여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구조와 연결된 요소로서 존재한다. 체제가 정당하다고 인식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정당성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유형으로든 전복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정당성이란 명령의 행사와 명령 행사의 목적에의 동의 사이의 관계이다. 이 관계가 자본주의적 발전의 필요에 의해서만 지시될 때 정당성의 발휘가 작동하지 않거나 유실되거나 왜곡될 큰 여지가 생기게 된다. 이런 조건에서 부과되는 정당성은 사실 폭력에 해당한다. 국가의 이름으로 부과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의 대응은 폭력적이고 정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더러운 폭력―자본의 권력을 지키는 법적 질서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한 것인 만큼 그렇다. 그것은 폭력이 아니라 대항폭력이며 대항권력이다. 정당성의 대항적 표현이다. 부당한 질서에의 저항을 담은 모든 행동은 정당하다. 그런데 주어진 질서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한편으로는 각 주체의 양심이 결정한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의 발전에서 역사적으로 변화되어온 주체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령의 행위가 결정한다. 정당성의 결정은 이 관계에서 발생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폭력이 권력을 규정하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것인 주체들의 삶정치적 활력을 규정하기도 한다.

정당성은 항상 관계일 뿐이고 수단일 뿐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보장하는 객관적인 방식은 없다. 그래서 벤야민 같은 작가들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이들은 나치 정권의 폭력에 당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지를 몰라서 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보았으며, 종종은 1920년대 공산주의 정책들에 대한 자기비판을 회피했다.(이 회피는 벤야민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폭력의 비합리성이라는 생각이 부르주아 문화에 근본적인 것은 이 문화가 자본주의적 지배의 형테를 취하지 않은 민주적 명령을 실행하는 데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인권이 형식적으로 인정(이는 시장의 지배를 의미한다)되지 않고 물질적으로 인정(이는 공통의 제도를 의미한다)된다면 민주주의는 지배의 반대가 될 것이다. 그래서 폭력은 동의될 때에만 존재한다는 맥락에서 합의의 고양이 있을 수 있다. 대의메커니즘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참여를 통한 동의이다. 우리가 폭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자 하는가? 예를 들어 스피노자의 절대 민주주의 모델은 폭력의 최소화가 가능한 모델이다. 모두의 실질적 동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모든 사람이 착하지는 않기 때문에 이 과정을 보장하는 기능을 하는 실질적 대항권력들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공포는 체제의 폭력을 창출하는 데 핵심 요소이다. 주권의 우월함은 바로 이것을 중심으로 구축된다. 공포는 항상 한 사람의 다른 사람에 대한 공포이며, 이것을 토대로 개인주의적 사회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라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 주권이 구축된다. 이 모든 것이 거의 설득력이 없다는 것, 즉 개인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시민 질서에 대해서만 필수적 도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런데 홉스의 틀에서 공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의 힘을 양도하고 주권적 권력을 조직하는 건설적 요소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 다음에 질서가 온다. 그런데 지금은 공포가 질서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성을 조직하고 공포를 재생산한다. 공포는 우리 삶의 모든 장치들의 거대한 대륙이다. 욕망은 공포에서 안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서 공포로, 불안정성에서 불안정성으로 움직인다. 공포는 주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를 확대한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을 겁낸다. 사람들은 밤에 나갈 수 없고 여성들은 모든 거리의 구석에 있는 강간범들을 조심해야 하며 텔레비전에서는 범죄물만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공포는 자본주의적 사회형태들의 재조직화와 유지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요소이며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가장 어두운 지점들을 이룬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평온함이 쉽게 혁명적인 태도로 간주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