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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될 수 없는 것을 제도화하기

 


  • 저자  :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Tran. Matthew MacLellan 
  • 원문 :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아래는 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ury의 III부 마지막 장 “Post-Script on Revolution in the Twenty-First Century”의  맨 마지막 부분으로서 “Instituting the Unappropriable”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대목을 비교적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저자들은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의 핵심 특징들을 10개 단락으로 압축하여 제시하고 있다.

  1. 우리는 ‘common’의 형용사 형태(‘공통적인’)보다 명사 형태(‘공통적인 것’)의 중요성을 책 전체에 걸쳐서 체계적으로 주장했다. 이런 생각에서 우리는 심지어 책의 제목―Common : On Revolution in the 21st Centruy―에서 관사를 빼고 쓰기까지 했다. 우리의 목적은 공통적인 것을 사물이나 실체, 혹은 (사물에 속하는) 성질로 보지 않고 원리로 보는 우리의 관점을 아예 처음부터 나타내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하는 원리란 출발 시에 존재해서 그 이후에 오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또한 처음 사용되고 나면 쇠잔해지다 사라지는 ‘시초’도 아니고, 일단 떠나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단순한 ’출발점‘도 아니다. 원리란 진정한 시작, ‘항상 다시 시작하는 시작’, 즉 이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스리고 이끄는 시작이다. 그리스어 ‘아르케’(ἀρχή)는 ‘시작’과 ‘명령’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아르케는 그로부터 모든 다른 것이 파생되는 원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이후의 모든 정치활동을 명령하고 지휘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정치적 원리이다. 만일 이 용어의 논리적 의미를 더 좋아한다면, 원리란 합리적 명제나 입증의 전제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 용어에 부여했던 의미가 이에 부합한다. 9개의 정치적 명제― 본 블로그의 글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참조―는 미래의 합리성을 이끌도록 계획된 전제들이며 더 나아가 공통적인 것 자체가 어떻게 하나의 정치적 원리로서 간주되어야 하는지를 가리키도록 언표된다는 의미에서 논리적 원리들로서 제시되었다.

 

  1. 공통적인 것은 대부분의 다른 원리들과는 다르다. 공통적인 것은 정치적 원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진정한 정치적 원리이다. ‘정치’라는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시민들이 ‘정당한 것’을 집단적으로 규정하는 활동과 이 집단적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의사]결정 및 행동이다. 따라서 정치는 소수의 전문가들에게 할당된 활동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의 능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전문직이나 경력도 아니다. 정치는 지위나 직업을 막론하고 공적 숙의에 참여하기를 바라고 욕망하는 사람들 모두의 일이다. 정치는 공적 숙의와 ‘단어들과 아이디어들을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과학적 증명이나 증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정치의 꿈이 아직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과학적 진실에 기반을 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는 기본적 진실을 기억하는 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숙의와 민중의 판단력의 발휘 없이는 정치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과학적 정치’는 정치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껏해야 과학을 통한 정치의 (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정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동일한 활동에의 참여를 정치적 의무의 토대로 삼는다. 공동-의무로서의 공동-활동이다. 우리는 ‘common’이라는 용어의 뿌리에 놓여있는 ‘munus’라는 용어가 의무와 활동을 모두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그 어떤 형태의 소속―민족, 국민, 인류 등―도 그 자체로 정치적 의무의 기반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의무는 신성한 종교적 특징을 가질 수 없다. 이는 그 어떤 초월적 원천도, 활동 외부의 그 어떤 권위도 거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정치적 의무는 전적으로 공동의 행동에서 나온다. 그것은 자신들의 활동을 다스리는 규칙들을 집단적으로 다듬어낸 모든 사람을 구속하는 실천적 헌신으로부터 그 모든 힘을 끌어낸다. 그것은 바로 이 활동에의 공동참여자들과의 관계에서만 타당하다.

 

  1. 그렇기에 공통적인 것은 대상이 될 수 없다. 적어도 욕망이나 의지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의 대상은 될 수 없다. 공통적인 것은 모든 형태의 대상화에 저항한다. 심지어 공통적인 것이 어떤 대상이 욕망함직한 것으로 인식되게 만드는 성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공통적인 것은 우리가 획득하고자 하는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종종 ‘공동선’(common good)이라고 불리는 것과 혼동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정치철학 담론에서 공동선은 함께 추구하고 함께 규정하는 바의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공동선은 그것이 모든 형태의 집단적 숙의가 달성하려고 하는 공동의 편익과 일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종종 정당한 것과 혼동된다. 이런 의미에서 공동선은 탁월하게 욕망함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공동선’의 내용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선’은 항상 공동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이 대상으로서의 ‘공동선’의 추구를 이끄는 원리이다. 공동선의 진정한 추구에는 공동의 숙의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통적인 것이 항상 ‘공동선’에 선행한다.

 

  1. 공통적인 것이 대상이 아닌 한, 그것은 사물(res)도 아니고 사물의 본질적 속성이나 특징도 아니다.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이러저런 자연적 혹은 내재적 속성 덕분에 공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빛이나 공기가 ‘커먼즈(공통재)’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통적인 것 되기’(being the common)와 같지 않다. 또한 공통적인 것은 법적 커먼즈(공통재)의 다양한 형태들―이는 물질적일 수도 있고(대양, 여러 국가에 걸쳐 흐르는 강, 인류의 공동유산으로 지정된 곳들) 비물질적일 수도 있다(아이디어들, 과학적 정보, 발견, 공적 도메인에서의 지적 생산물 등)―과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법적 범주인 ‘공통적 사물’(res communis)은 공통적 대상들을 활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분리해내게 마련이다. 공통적 사물이 진정으로 공통적인 되는 것은 활동을 통해서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것을 대상으로 보는 접근법은 내버려야 한다.

 

  1. 다른 한편, 우리는 ‘나눔’(sharing)이나 ‘한데 모으기’(pooling)를 통해 공통적이 된 대상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커먼즈를 말할 수도 있다. 본래적으로 공통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집단적 실천만이 어떤 사물 혹은 일단의 사물들의 공통적 성격을 결정한다. 따라서 커먼즈는 그 커먼즈를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을 활동적으로 담당하는 사람들이 제도화하는 활동의 유형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다. 물론 공통적 대상/자원의 자연적 속성들이 그런 대상/자원을 공통적으로 만드는 활동의 유형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바로 이 활동이 주어진 대상을 ‘공동화하고’ 그렇게 공동화된 상태의 유지에 관여되는 특수한 규칙들의 산출을 통해 그 대상을 제도적 공간에 각인한다.

 

  1. 공통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제도와 거버넌스의 문제이다. 공통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항상 제도적 행동으로부터 생성된다. 공통적인 것이 원리라는 사실만으로 이 원리가 현실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일 공통적인 것의 원리가 제도화될 필요가 없고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면, 모든 커먼즈는 이미 공통적인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공통적인 것은 특정의 작동 규칙들을 정하는 실천들에 의해서만 제도화되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제도화는 공통적인 것을 창조하는 시초적 행동을 넘어서 진행되어야 한다. 애초에 제도의 규칙들을 수립한 바로 그 실천들이 그 규칙들을 변경하면서 장기적으로 제도화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제도화하는 프락시스’(instituent praxis))라고 부른 것이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는 결정의 힘으로부터 분리된 행정력이라는 의미의 ‘관리’의 한 형태가 아니다. ‘관리’라는 환상은 사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자연주의적 견해―만일 공통적인 것이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들의 함수라면, 그것이 가진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지위는 사회적 공간을 가로지르는 실제적인 사회적 갈등들로부터 분리된 관리적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는 견해―와 연결되어 있다. ‘거버넌스’는 ‘관리’와는 달리 사회적 갈등을 포용하며 공통적인 것을 다스리는 규칙들에 대한 집단적 결정을 통해 그 갈등을 다룬다. ‘제도화하는 프락시스’란 이렇듯 공통적인 것을 수립하는 집단들이 커먼즈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1. 정치적 원리로서 공통적인 것은 공적인 정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커먼즈는 생산과 교환의 영역 전체를 사적 이익집단들의 싸움이나 국가독점에 내맡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시장과 국가 사이의 ‘제3의 길’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사적인 것 및 공적인 것과 함께 병존하는 경제의 ‘제3부문’으로 간주되어서도 안 된다. 공통적인 것의 우선성은 사유재산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고 더 나아가 시장의 폐지를 함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시장의 공통적인 것에의 종속을 요구하며 이런 의미에서 소유권과 시장의 제한을 함축한다. 상업적 교환의 영역으로부터 특정 대상들을 단순히 빼내어 공동의 사용을 위해 보존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떤 사물이 소유자의 이기적 의지에 전적으로 맡겨지는 것을 허용하는 남용권을 폐지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다.

 

  1. 만일 공통적인 것이 정치 영역과 사회 영역을 가로지르는 횡단적인 정치 원리라면, 그리고 커먼즈들이 특정의 대상들(그 유형이야 어떻든)과 연관된 특정의 실천들에 의해 열리는 제도적 공간들이라면, 사회적 커먼즈만이 아니라 정치적 커먼즈도 있다는 말이 된다. 정치적 커먼즈는 ‘공적 일들’에 모든 수준에서, 즉 지역에서 일국을 거쳐 전지구적 수준까지 관여한다. 사회경제적 영역은 사회적 활동이 연합의 논리에 따라 확대되는 어느 곳에서든 그 활동의 기준에 의해서만 조직된다. 정치적 영역은 마찬가지로 연합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는 여러 수준들을 통해 엄밀하게 영토적인 기반 위에서 조직된다. 지방자치는 정치 영역에서 기본적인 형태의 자치를 구성한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에서의 공통적인 것의 세포적 형태이다. 일원적이고 중앙집중적이며 주권의 원리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국민국가 모델은 이 논리에 의해 엄밀하게 금지된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적 원리는 이렇듯 이중의 연합에 기반을 둔다. ① 사회전문적인(socio-professional) 기반에 도태를 둔 사회경제적 커먼즈들의 연합과 ② 영토적 기반에 토대를 둔 정치적 커먼즈들의 연합이다. 이 두 영역이 함께 공통적인 것의 민주주의를 이룬다.

 

  1. 원리로서의 공통적인 것에는 전유될 수 없는 것의 규범이 소중하게 담겨 있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의 근본적 목적은 이 규범에 따라 사회적 관계를 변형하는 것이다. 여기서 비전유(Unappropriation)는 전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유되어서는 안 되는 것, 즉 공동의 사용에 의해 보호되기 때문에 전유가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이 전유될 수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제도화하는 실천의 몫이다. 전유될 수 없는 것이란 제도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전유불가능성 그 자체에 기반을 둘 수 있을 뿐이라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이 의견에 따르면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려는 의지는 이 전유불가능성이 정의상 전유 행동에 관여하는 하나 혹은 다수의 주체들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는 집단적 주체가 사실상 공통적인 것을 제도화하는 행동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지 이 행동에 선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두 종류의 전유―어떤 것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귀속으로서의 전유’와 어떤 것이 특정의 목적을 향하도록 하는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특히 사회적 욕구의 충족)―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것이다. 전유불가능성을 제도화하는 것은 특정 형태의 ‘목적지향으로서의 전유’를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전유로부터 무언가를 빼내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어떤 사회적 목적을 위해 더 효과적으로 ‘전유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식량의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해 땅을 전유하는 것) ‘전유’를 금지하는 것이다. 공통적인 것의 원리는 재산을 창출하지 않고, 커먼즈의 임자인 양 커먼즈를 처분하는 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지 않으면서 사용을 규제한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공통의 재화’(common goods)에 대해 말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용어가 계속되는 투쟁을 위한 단합의 구호로서 전략적인 효용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만 말이다. ‘공통의 재화’란 없다. 오직 제도화해야 할 커먼즈, 혹은 공통적이 되어야 하는 커먼즈만 있다.(Th ere are no “common goods”: there are only commons to be institutionalized, or commons to be made common.)




커먼즈의 구성을 위한 9개의 정치적 명제

 



앞서 올린 글(([옮긴이] 현재는 원문의 링크가 깨져있다.))에서 나는 우리가 공통적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다도와 라발의 입장을 요약했다. 이제 나는 공통적인 것―그들의 사유가 그들을 공통적인 것으로 인도한다―을 구축하는 방법에 관한 9개의 핵심적인 정치적 명제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불가피하게 나는 그들의 글을 압축하고 다수의 주요 참고문헌을 생략해야했으나 그들 제안의 골수를 충실히 전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명제 1 :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19세기 사회주의적 연합주의, 20세기 노동자평의회 전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더 이상 단순히 장인(匠人)의 맥락이나 산업현장의 맥락에서 사유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어떤 포위로부터, 또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어떤 집단적 이탈로부터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출현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토지와 자본 및 지적 재산권과 연관된 소유권을 재고하지 않는다면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존재할 수 없다. 소유권이 아닌 사용권이 사회변형을 위한 법적 핵심이 되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자치제도를 창안함으로써 사회의 공통적 생산에 적합한 형태를 찾아야 한다. (자치제도의 역할은 공통적인 것의 생산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공통적 원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상이한 사회경제적 영역들, 공적 또는 사적인 영역들, 혹은 정치적 영역들 사이의 구분이 철폐될 것이라 생각하면 결코 안 된다. 공적 숙의가 어떤 하나의 사회적·전문적 범주에 속하는 이해집단들에 의해 포획되는 것을 막으려면, 생산 교환의 영역이 커먼즈의 자치를 중심으로 완전히 재조직돼야 한다. 또한 각각의 커먼즈는 그 활동의 모든 ‘외부성’을 고려해야 하는데, 이는 커먼즈의 거버넌스가 그 활동과 관련을 가지는 사용자들, 시민들을 포함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영역은 공통의 의사결정 능력을 단련하는 학교가 된다.

명제 2 : 소유권에 도전하기 위해 사용권을 가동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사회경제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절합은 로마법에서 연원하는 도미니움(배타적인 사적 소유)과 임페리움(주권의 포괄적 권력)의 이중원리로 구성되어왔다. 공통적인 것의 정치는 이러한 이중적 절대주의에 도전해야 한다. 전통적 재산권은 재산에 대한 완전히 자유로운 사용을 소유자들에게 허락하며 그리하여 소유자가 타인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통적인 것의 사용자는 공통적 사용을 관장하는 규칙을 공동생산하는 식으로 다른 사용자들과 결부되어 있다.

자본주의 자체가 물질적 사물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 소유모델에서 벗어나 점점 더―재화의 판매가 아닌―써비스의 제공으로 변해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써비스 사용자들은 점점 더 자산 대신 접근권을 구매하는데, 접근권은 새로운 공동사용 모델을, 권리유형의 다각화(사용권, 임대수익권, 상이한 권리들에 대한 구매권과 판매권)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공간보다는 시간과 관련되는 새로운 형태의 인클로저로 향해가고 있다. 사용자가 무언가를 계속 사용하는 한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동시에 기업은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를 계속해서 소유하며 통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사용권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는 상위기관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허한 권리이다. 진정으로 공통적이려면 사용에 대한 결정이 집단적 심의로 이뤄져야 한다. 이는 공통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과 동등한 것이며 그래서 가령 한 뙈기의 땅을 모두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단순히 공유된 사물이 아니라 공통적인 것이 존재하려면, 공동활동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를 포함하기 위하여 재산권을 확장한 형태의 소유권을 개발하는 대신, 소유권에 반하여 가동될 수 있는 사용권이 있어야 한다. 공통적인 것에 대한 관리는 국가가 아니라, 공통적인 것을 공동 사용하는 이들에게만 위임될 수 있다.

명제 3 : 공통적인 것이 노동해방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 함께 일을 한다. 또한 우리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 언제나 일을 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문화적이며 때로는 미학적 차원을 가지는, 공유된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은 공동체나 동료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긍정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노동자가 노동에 계속해서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는 단순히 소외나 자발적 굴종, 경제적 제약 때문이 아니다. 이는 일이 개인들이 자신들을 집단적으로 사회화하는, 타인과의 유대를 유지하는 활동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모아놓음으로써 진정으로 협력적인 현장의 자연발생적 출현을 어떤 식으로든 허용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기업은 강제된 협력을 실행한다. 노동자를 단순직공으로 축소시키면서 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노동자의 적극적 동원이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등한시된 현장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우리 활동의 핵심에 다시 놓여야한다. 노동자의 과업의 질을 ‘고양하거나’ 현장의 조건에 대해 이따금씩 ‘조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규칙과 결정을 다듬어내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진정으로 협력적인 공간이 되기 위해 기업은 자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민주적 기관이 되어야 한다.

명제 4: 공통의 기업을 수립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통제로부터의 노동의 해방은 기업이 경영독재, 주주독재가 지배하는 섬이기를 그치고 민주적 사회의 기관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마크 샹니예(Marc Sagnier)의 유명한 말처럼, “기업에 군주제가 존재하는 한 사회에 공화국은 있을 수 없다.” 어떤 현장민주주의도 자본주의가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로 보는 것을 통제하는 체제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통제가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국가통제는 역사적으로 사회주의를 고꾸라뜨린 장애물이다. 소위 사회적 혹은 집단적 소유는 중앙집권화되고 관료적이며 비효율적인 경영형태 말고는 실행할 수 없는 국가소유로 환원되어왔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노동자 협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그들의 경영자를 선택하고 회사가 취할 방향을 투표에 부치며―회사의 자본이 그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회사의 자본을 그들의 결정에 종속시키는 흥미로운 대안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모델은 대안적 모델을 위한 중요한 시험대였음에도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쟁과 국영기업 사이에 줄곧 갇혀있던 사소한 대안이었다. 어떻든 현장에 공통적인 것을 자율의 섬으로서 제도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회적인 것 안에 경제를 재통합하고 민주적인 현장거버넌스 내에 관점의 복수성(노동자, 소비자)을 도입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장 자체에 대한 이해가 재고될 필요가 있는데 이는 개별적 소비자의 결정의 자유를―특히 지역 수준에서의―집단적 결정의 틀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함이다. 이로써 오늘날처럼 소비자와 노동자가 서로 맞서는 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명제 5 : 경제영역 내의 연대가 공통적인 것의 사회로 가는 길을 닦아야 한다. 

제3부문 또는 비수익경제가 때로 대안 경제로 혹은 심지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제3부문은 그것을 정의하는 용어와 실제 모두 나라마다 다양하고, 서로 다른 논리를 가지는 제도를 보통 포함한다. 제3부문은 특정 직업이나 사회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지원을 제공하는 조합적인 것일 수도 있고, 종교적 전통을 바탕으로 하는 자선단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이러한 다양한 집합체를 제시하기는 어려운데 이는 특히 이 집합체의 활동이 자본주의기업과 국가기관 양자로부터의 상당한 압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현재 조합부문은 대안경제를 촉진하기는커녕,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저임금노동자 수가 증가하면서 복지국가를 위한 저비용 하도급 역할을 맡는 경향이 있는 반면 국가고용주는 이 수가 정체 혹은 감소되어왔다고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상황에서 사회적 경제는 총익의 정의를 국가가 독점하고 가치의 정의를 시장이 독점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촌락·마을·이웃 수준에서의 새로운 연대를 포함하는, 앙드레 고르(André Gorz)와 이반 일리치(Ivan Illich)가 설교한, 일종의 지역에 기반을 둔 공생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하면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공통적인 것의 정치를 그 자체만으로 창출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명제6 : 공통적인 것은 사회민주주의(([옮긴이] 사회민주주의 : 우리에게 이미 알려진 그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사용된 용어이다.))를 수립해야 한다. 

어떤 이들에게는 진보정치의 목표가 근본적으로 복지국가의 재건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이 국가에 의해 왜곡되고, 이제 국가가 다른 무엇보다 더 복지의 범위를 줄이고 복지를 경쟁력이라는 제약 아래 두려한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사회(복지)국가는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인 공통적인 것을 부정한다. 기업 안에서의 모든 실질적인 경제적 시민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노동조직 형태의 가장 가혹한 규범에 복종하는 대가로 복지국가의 사회적 보호와 경제적 재분배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의 정치가 먼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호혜와 연대의 제도에 대한 통제권을 사회로 되돌리는 것이다.

명제 7 : 공공써비스가 공통적인 것의 제도가 되어야 한다. 

19세기 조합사회주의와 20세기 노동자평의회는 사회주의가 취해야하는 제도형태가 국가관료에 의한 경제경영과는 달라야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운동은 공공써비스의 미래 규모를 예측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했다. 공공써비스는 갈등과 투쟁의 장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배에 복무하는 ‘국가장치’로 보아서도 안 되고 사회에 완전히 복무하는 제도로 보아서도 안 된다. 따라서 제기되는 물음은 어떻게 공공써비스를 공통적 사용권을 중심으로 조직되며 민주적으로 통치되는 공통적인 것의 제도로 만들 것인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가 더 이상 중앙집권화된 거대한 행정체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집단적으로 필수적이라고 판단되는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써비스 행정은 국가의, 노동자의 그리고 시민사용자의 대표가 포함된 기관에 위임돼야 한다. 써비스는 지역적으로 시행되어야 하지만 국가는 헌법이나 기타 기본법을 통해서 공통적인 것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만들어야한다. 이러한 종류의 해결책은 국가중심주의의 위험에 맞서기 위해서도 지역주의·지방주의의 반동적 활용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명제 8 : 전지구적 커먼즈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매우 다양한 형태·크기를 가지는 ‘커먼즈’의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을 보존한다는 조건하에서 공통적인 것을 지역 커먼즈부터 전지구적 커먼즈로 이어지는 전체 사회의 재조직을 위한 정치적 원리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각각의 커먼즈가 없으면 의미 있는 공통의무가 없으며 그리하여 진정으로 공통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각각의 커먼즈의 자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커먼즈들의 연계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유형의 해결책이 제안되어왔다. 몇몇 해결책은 ‘반인도적 범죄’나 ‘세계유산’이 ‘인류’가 권리를 가진 주체로 점진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보고, 인권을 새로운 세계의 법적 질서의 기초로 긍정하는 데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가 무력을 계속해서 독점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러한 권리체계의 발전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협력의 원리나 사회정의의 원리가 아닌 경쟁, 약탈적 전략, 호전적 논리의 규범에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조직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관행이 어떻게 세법·상법·고용법 영역에서 ‘법률쇼핑’(가장 유리한 조건을 위한 쇼핑)을 낳았는지를 주목한다. 이 관행은 법 자체를 자본주의적 경쟁의 영역이자 상업의 대상으로 만든다. 건강에 관한, 문화에 관한, 물에의 접근에 관한, 오염에 관한 문제에 있어 강요된 논리는 자유교환의 논리이며 (사적) 소유권에 대한 절대적 존중의 논리이다. 자본에 의하여 그리고 자본을 위하여 만들어진, 지구화되었으며 지구화를 행하고 있는 전체 법률장치가 ‘지구자본’(cosmocapital) 제도를 생산하고자 가동되고 있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국제법의 본격적인 사유화이다.

또 다른 담론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촉진하고자 고전경제학적 수단을 사용하려한다. 1990년대 초에 지배적인 신자유주의적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였던, 마부브 울 하크(Mahbub ul Haq), 아마티아 센(Amartya Sen) 같은 인물에 영향받은 UN은 기대수명, 문해력 같은 기준이 포함되도록 발전에 대한 정의(定義)를 확장했다. ‘좋은 전지구적 거버넌스(global good governance)’라는 생각이 등장하여 ‘전지구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의 생산과 연결됐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UN개발프로그램(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UNDP) 경제학자들은 전지구적 공공재를 다음과 같이 세 범주로 분류했다. 전지구적으로 분리불가능한 (과다사용된) 재화(오존증·기후), 인간이 만든 (과소사용된) 전지구적 공공재(과학지식·인터넷), 통합된 전지구적 정책이 낳은 재화(평화·건강·안정성). 이러한 재화의 정의가 가지는 한 가지 문제는 그 정의가 시장이 ‘자생적으로’ 생산할 수 없는 것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누가 혹은 무엇이 이 재화의 생산을 보장하는가이다. 전지구적 국가가 보장하는 것일까?

UNDP가 제시하는 한 가지 대답은 전지구적 CO2 배출거래 사례처럼 필요할 경우 시장메커니즘, 소유권 강화를 통해 사적 행위자들이 저 재화에 책임지도록 동기부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결과는 주요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현존하는 전지구적 질서에 대한 모든 실질적 도전을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한편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진보적 색채를 띠는 자본주의는 사실 정부·자선단체·NGO가 자본주의에 처분을 맡기는 모든 ‘외부성’에서 이윤을 끌어내야 한다. 기업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환경을 누리기 위해 정치적 안정, 도시기반시설, ‘잘 기능하는’ 대학체계, 심지어 저임금노동자를 위한 자선지원, 범죄자를 위한 감옥을 필요로 한다.

분명한 것은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지구적 공공재를 방어하라는 요구가 반드시 물화된 공통재 경제영역으로 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공통재에 대한 장악을 제한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달리 진보적 정치투쟁은 공통재를 기본권에 결합시킴으로써 그 범위를 확장하려 하는데 이는 단순히 재화만이 아닌 써비스와 제도에 대한 접근을 공통재에 포함하기 위함이다.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탈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유발해온 상황에서 지구화 반대론자 같은 정치적 진보주의자가 시민에 기반을 둔 복지권이었던 것을 보편적 인권으로 변형하고 그럼으로써 옛 복지국가의 보편주의적 폭넓음을 전지구적 커먼즈의 문제틀에 접목하려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허나 심히 인위적이라는 점과는 별도로 이런 움직임은 낡은 서구사회 모델을 발본적으로 변화한 맥락에 이식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논리가 지배하는 현존국가들이 전지구적 커먼즈에 힘을 보탠다거나 공통재를 배분하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반면 시민권은 쟁취할 가치가 있다. 시민권은 근대적인 정치적 주체성의 핵심 요소를 형성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의미가 있으려면 시민이 복지에 대한 권리만 들먹이는 사회적 시민, 써비스 소비자여서는 안 된다. 시민은 정치적으로나 시민으로서나 능동적인 시민, 공통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공동생산하게 해주는 제도를 발명할 수 있는 그런 시민이어야 한다.

어떤 큰 변화가 없는 한 미래가 질서 잡힌 다원주의의 그것일 것 같지는 않다. 미래는 알랭 수피오(Alain Supiot)가 거론한 일종의 재봉건화일 가능성이 더 높다. 국가의 사회적 기능이 줄어들고 억압적 기능이 커지며 국민국가가 지역국가로 분열될지 모르는, 다면적 분열의 논리를 따라 지역권력과 초국가권력이 증식하는 재봉건화 말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여 낡은 베스트팔렌 국민국가 체계가 어디서나 성장할 위험이 있는 광범위한 반동적·민족주의적·외국인혐오적 운동에 삼켜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쳐 쓸 수 있는 것일 수 있을까? 물어야 하는 것은 아마도 중앙집권적인 국가조직 방식과 이와 연관된 종속화의 형태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닌가일 것이다. 그 다음 자문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의 정치적 조직이 전지구적 커먼즈의 공동 생산에 제도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이다.  

명제 9 : 커먼즈들의 연합(a federation of commons)을 수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방정부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유일한 정치적 원리는 연합원리이다. 연합은 하나의 꼬뮌이나 몇몇 꼬뮌 혹은 꼬뮌집단이 하나의 목적이나 몇몇 목적을 위해 상호 책임지는 관계를 맺는 계약이나 협약 혹은 협정이다. 그 본질적 특징은 국가가 행사하는 종류의 주권과는 직접적으로 대조되는 방식으로, 어떤 집단에 대한 다른 집단의 일체의 종속을 배제하는 상호 책임이다. 

여러 상이한 연합주의 모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어떤 특정 모델이 사회적 삶의 모든 수준에서 공유되는 사용 관행에 적합한지를 식별해내는 것이다. 여기서는 맑스주의 전통보다는 프루동 사상이 앞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안을 제공한다. 맑스가 국가권력을 정복해야 하는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프루동은 이중적인 연합모델―한편으로는 생산단위의 연합, 다른 한편으로는 꼬뮌 단위의 연합―을 설파했다.(([옮긴이] 생산단위는 헌재로서는 주로 자본주의적 기업에 속하는 것이고 꼬뮌은 지역공동체 혹은 커먼즈에 해당할 것이다.)) 이 모델은 꼬뮌의 정치적 민주주의가 어떻게 현장의 산업민주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프루동이 보기에 이 두 유형의 공통적인 것을 연계시킬 수 있는 공유된 원리는 계약조항들에 간직된 상호성과 상호적 책임이었다. 하지만 상호성의 이러한 확장은 법을 계약으로 대체하려는 프루동의 기획과 조화를 이루더라도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을 정치영역에 적용하는 것을 함축했다. 더 적합한 통합원리는 사회경제적 영역과 공적·정치적 영역의 거버넌스에 공히 적합한 정치원리인 공통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이 여러 커먼즈들의 연계와 관련해서는, 심급이 높아질수록 더 큰 권력을 행사하는 피라미드적 위계가 없을 것이다. 특히 국가나 초국가기관도 그저 다른 기관들과 같은 지위를 차지하며 특권이나 우선권이 없을 것이다. 

더 낮은 수준은 공유된 활동에 기초를 두고서 수평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높은 수준을 통해 작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커먼즈(생산·소비·종자은행 등)는 어떤 영토논리와도 무관하게 구성될 것이며, 그 구성목적에 해당하는 활동을 책임져야할 필요에 따라서만 구성될 것이다. 가령 예컨대 강 커먼즈(a river common)는 몇몇 지역경계나 심지어는 국가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달리 정치적 커먼즈는 전지구적 수준까지 규모가 확장되는 영토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승논리에 따라 구성될 것이다. 

전지구적 커먼즈 연합에 대한 이러한 제안에 조응할 수 있는 시민권의 유형은 무엇일까? 국민국가 모델을 따라 사고된 어떤 ‘전지구적 시민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복수적(複數的)이고 탈중심화된 시민권이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시민권이 영토적 범위가 더 확대될수록 그 정치적 밀도를 더 소실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리하여 결국 일종의 공허한 세계시민주의적인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일치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순히 ‘도덕적’인 것, ‘상업적’인 것 혹은 ‘문화적’인 것으로 후퇴하지 않으면서 국가적이지도 민족적이지도 않은 시민권을 개발해야 한다. 비국가적·초국가적 시민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모든 소속관계로부터, 소속에 들러붙은 권리로부터 분리된 시민권은 형식적 권리의 승인이 아니라 실천과 관련하여, 공유된 활동과 관련하여 사유되어야만 할 것이다.

주로 현장민주주의와 관련된 일단의 유사한 제안은 여기(([옮긴이] 현재는 원문 링크의 자료가 삭제되어 있다.))를 참조하라. 공통적인 것에 관한 다도와 라발의 인터뷰는 여기를 참조하라.




오늘날 이반 일리치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Why Ivan Illich Still Matters Today
  • 분류 :  번역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볼리어(David Bollier)의 홈페이지(http://www.bollier.org)의 2021년 12월 1일 게시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블로그의 글들에는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내가 되풀이해서 참조하는, 보기 드물고 영향력이 큰 사상가들 중 한 명인데, 이는 그가 다른 경우라면 무시되는 핵심 주제들과 두려움 없이 씨름을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근대 제도들이 가진 전체주의화하는 권력, 정신적 삶을 부패시키는 자본주의의 영향 및 더 건전하고 반란적인 문화를 구축하는 토착적인 실천의 힘을 다루었다.

가장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1)에서 나는 일리치의 사상에 대한 해석이자 권위 있는 종합인 『이반 일리치: 지성 여행』(Ivan Illich: An Intellectual Journey, 2021)을 최근에 출판한 일리치의 절친이자 동료인 데이비드 케일리(David Cayley)를 인터뷰하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케일리는 캐나다 CBC(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사의 전직 방송인이자 독립연구자이며 문학, 정치 및 생태 관련 주제에 관한 수많은 책을 집필한 작가이다.

일리치는 인습타파주의적인 사회 비평가, 급진적인 기독교인이자 문화 역사가로 서구 근대성, 기독교, 보건의료(헬스케어) 및 사회 서비스 분야에서 돌봄의 전문업화에 대한 혹독한 비판으로 1970년대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로마 교황청과 자주 충돌한 오스트리아 태생의 가톨릭 사제인 일리치는 마침내 사제직을 그만두고 떠돌이 강연자, 사회 참여 지식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생각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다방면에 걸쳐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부정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이는 현대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더 깊고 더 의미 있는 정신적 삶을 추구할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Ivan Illich. Photo by ‘Adrift Animal,’ CC BY-SA 4.0

지금 보기에는 일리치의 몇몇 관점들이 당대에 즉 주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생각은 근대 경제학 및 정치학을 따르지 않는 풍부하고 상세한 관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현대의 삶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지난 40년 내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일반 민중의 고통을 가중시켰으므로 그의 작업은 훨씬 더 유의미할 것이다.

일련의 저서들에서 일리치는 정규교육, 헬스케어, 교통기관, 법, 기타 시스템들이 이익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만들어내며 우리에게서 권리를 빼앗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Medical Nemesis, 1974)에서 어떻게 전문의료업이 사람을 과잉진료하고 평범한 삶을 병리화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 1970)에서는 어떻게 정규교육이 참된 호기심과 배움을 자극하기보다 자본주의적인 질서를 위해 사람들에게 자격증을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공생공락을 위한 도구들』(Tools for Conviviality, 1973)에서는 공생을 위한 창조적이고 열려있는 도구를 인간에게 갖춰주는 문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리치의 생각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요소는 ‘누가 우리의 현실 감각을 정의하게 되는가’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기조직화하는 “토착적인 영역들”—주류 경제가 무시하는 활동들인 커머닝과 돌보기라는 “그림자 노동”을 수행하는 비공식적인 공간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일리치는 또한 온갖 종류의 흔치 않은 역사적인 발굴―예를 들어 몸의 아픈 양태를 서술하는 것과 관련된 감각의 역사(([옮긴이] 일리치가 보기에 몸-감각(body-sense)은 문화 속에서 경험된다. 따라서 문화의 역사적 변천은 곧 몸-감각의 역사적 변천을 낳으며, 감각의 변화는 어휘의 변화를 낳는다.)), 커먼즈로서 침묵 그리고 도시 삶의 역사에서 ([]들의 매개체로서) 머리카락의 역할의 발굴―을 과감히 해냈다. (내가 일리치에 관하여 이전에 올린 게시글을 이곳이곳에서 참조하고, 또한 일리치가 현대에 끼친 영향에 관하여 내가 2013년에 한 강연을 참조하라.)

일리치의 저서들과 강연들은 실질적인 사회적 관행과 정신적인 욕구를 통해 아래로부터 세상에 접근함으로써 지난 20년간에 걸쳐 부상한 커머닝 세계를 위한 지적 토대를 세우는 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일리치는 시장/국가 지배권의 범위 밖에 존재하는 사회적이며 정신적인 삶—근대 의식의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공간—을 연구함으로써 현대의 커먼즈를 상상할 풍성한 공간을 긍정하고 분명히 했다. 케일리는 일리치를 “발전 이후 시대의 맑스”라고 불렀다.

케일리는 일리치가 슈마허(E.F. Schumacher)처럼 “규모 문제는 허식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사상가였다고 말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핵심적인, 전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일의 규모가 너무 커질 때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고 무조건 다루기 힘들어진다. 정의상, 즉 바로 그 특성상 통제될 수 없는 도구들이 있다. 그것들이 결국은 우리를 통제할 것이다.”

그래서 일리치는 인간의 힘과 독창성을 존중하는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공생공락적인 도구들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 스타일로 폐쇄적이거나 독점적이지 않고 평범한 개인들과 공동체들의 욕구와 관심에 기여하는 열려 있는 유연한 도구들이다.

일리치는 표준적인 경제학 및 ‘발전’이라는 관념을 일찍부터 비판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이런 사고틀에 내장된 전제에 도전했고 무한 성장의 위험들을 강조했다. 그는 표준적인 경제학은 ‘충분함’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언급했다. 이것이 생태적 문제들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혼란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는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는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자본주의적 시장은 상품과 시장거래에의 의존상태로 우리를 몰고 감으로써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주변화하고 서로 간의 관계를 분열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삶은 자급자족과의 500년 전쟁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근대적 삶에서는 우리가 사용가치와 욕구보다는 교환가치와 화폐를 위해 생산한다는 것이다. “경제는 오늘날 세상에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뿐더러 그들의 생계추구를 눈에 안 보이고 위엄이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일리치는 썼다. 그는 “발전”의 근본적인 오류는 “인간의 자연 통제라는 생태적으로 실행할 수 없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케일리의 책은 비록 길지만—450페이지가 넘는다—일리치의 삶과 작업을 사적인 회고록, 전기, 지성사 및 문화적 논평이 결합된 형식으로 생생하게 종합한다. 이 책은 현대 독자들이 일리치를 설득력 있는 독창적인 사상가, 창조적인 불굴의 학자이자 매력적인 사람으로 인식하도록 돕는다. 일리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지라도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그는 교사였을 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적극적인 자극을 통해 사람들을 깨우치고자 한 부류의 신학자였다. 그는 매우 병약한 자신을 이 과제에 완전히 투여했기 때문에 설득력을 얻었다. 케일리는 그를,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머리를 곧추세우는 깨어있는 새에 비유한 적도 있다.

내가 데이비드 케일리와 한 인터뷰는 여기서 들을 수 있다.




상품이 아니라 커먼즈로서의 식량

 



오늘날 극심한 기아와 넘쳐나는 식량이 공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글로벌 식량시스템이 정말 많이 생산하고 정말 많이 낭비할지라도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들 중 하나인 식량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부족한 것인가? 이 질문들은 반(反)기아 활동가, 농업 지도자이자 식량을 커먼즈로 여길 것을 주창하는 호세 루이스 비베로 폴(Jose Luis Vivero Pol)을 오랫동안 괴롭혔다.

식량이 넉넉한 가운데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아의 이유를 연구하면서 비베로는 실질적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식량을 상품 즉 시장 가격으로 가치를 평가받고 전세계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으로 취급하는 데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식량이 상품이라는 생각은 사회들이 식량을 공유하는 방법을 그리고 먹을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방법을 찾은 수천 년의 인간역사를 벗어난다. 식량을 상품으로 여기는 것은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식량을 가질 여유가 없게 됨을 따라서 굶주리거나 영양학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어야함을 필연적으로 의미한다.

나는 비베로 폴과의 인터뷰—커머닝의 한계(Frontiers of Commoning)에 관한 나의 최근 팟캐스트(에피소드 22)—에서 이 주제들을 살펴보았다.

비베로 폴은 벨기에에 있는 루뱅 가톨릭 대학교에서 식량이행 학술연구교수로 일한다. 그는 식량을 탈상품화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식량 시스템을 구조적으로 다시 생각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장기간에 걸친 기획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상품으로서의 식량은 생명체의 자연스런 질서가 아니라 인위적인 사회적 구성물이라고 강조한다.

실로 식량 커먼즈는 인간 역사 내내 규범이었고 오늘날 과도하게 시장화된 세계에서조차 널리 퍼져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식량을 재배하기 위한 커먼즈로 여전히 관리되는 땅(토지)의 양은 20~30% 가량이다. 아이슬란드에서는 땅의 40%가 아직도 커먼즈로 관리되고 있다.

비베로 폴이 커먼즈로서의 식량이라는 바로 그 아이디어를 농업, 기아 및 생태지역의 생태학적 이슈들에 관여하는 활동 지향적인 많은 활동가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특히 학자들 사이에서 부각시킨 것은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대규모 농업기업(Big Ag)에 대한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기능을 하는 대안으로서 많은 다양한 식량커먼즈를 가시화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획기적인 성과는 이 주제를 다루는 29명의 저자들과 39장으로 이루어진 2020년에 출판된 주요한 선집인 『커먼즈로서의 식량에 관한 루틀리지 안내서』(Routledge Handbook of Food as a Commons)이다. 비베로 폴, 토마소 페란도(Tomaso Ferrando), 올리비에 드 슈떼(Olivier De Schutter) 우고 마떼이(Ugo Mattei)가 이 책을 공동 편집했다.

비베로 폴이 공동 조직한 최근 웨비나에서 버몬트 대학의 건드 연구소(Gund Institute) 소속 쌤 블리스(Sam Bliss) 교수는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시장 외부의 활동들”이 비록 크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을지라도 널리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사에 의하면 정원가꾸기, 물고기 잡기, 식량모으기, 사냥하기, 물물교환하기, 공유하기, 선물하기, 쓰레기통 버려진 음식 수거하기가 버몬트 주에서 널리 실천되고 있다.

블리스는 시장에 포함되지 않는 식량원이 추출적인 상품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식량 커먼즈를 통해 사람들은 (종종 값비싼) 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줄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한계를 고려할 수 있다. 이는 예를 들어 식량모으기나 사냥하기로부터 거둬들인 수확물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시장판매는 금지된다.

반대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대규모 농업의 집중 시스템은 대기업들에 대한 대규모 정부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미국,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러시아, 중국, 인도는 모두 자유시장이 식량을 재배하고 분배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이라는 이론에 따라 식량을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서사는 사회적 신화이다. 위에서 언급된 나라들의 농업은 아주 많은 보조금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이 보조금은 공적 부를 기존의 부자들에게 거저 주는 현실을, 토양•서식지•물에 생태학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그리고 돈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생기는 굶주림을 고려하지 않는다.

대규모 농업기업들은 동등하지 않은 경쟁조건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베로 폴은 지적한다. 그들은 자유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식량시장은 화석연료 다음으로 가장 많이 보조금을 지원받는 시장이다. 기본적으로 이 기업들은 공적자금을 통해 보조금을 아주 많이 지원받기 때문에 이익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치가들이 “항상 시장, 시장, 시장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비밀리에 농업 시장들은 보조금을 받아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시장들은 완전한 재앙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비베로 폴은 공적자금이 영세농가 농부들, 농업 커먼즈, 푸드뱅크, 학교 점심 프로그램 및 생태지역 프로젝트들을 돕는 데 더 유익하게 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단 우리가 식량에 관한 서사를 바꾸면 국가 정책과 법적인 틀들은 긴밀히 협력하여 다른 방식으로 식량과 관련된 법규화를 실행할 것이다. 물론 식량을 분배하는 시장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지만 건강한 식량이 모든 사람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장 규제와 공적 개입 그리고 커머닝의 새로운 공간도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친구 질케 헬프리히(1967-2021)를 추모하며

 


  • 저자 : David Bollier
  • 원문 : In Remembrance of My Dear Friend Silke Helfrich, 1967-2021
  • 분류 : 번역
  • 옮긴이 : 카오모
  • 설명 : 아래는 2021년 11월 10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커머너 질케 헬프리히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녀의 동료 데이비드 볼리어가 작성한 글이다. 

질케 헬프리히와의 우정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협력 작업이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힘들다. 질케와의 우정 및 협력 작업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oell Foundation)의 멕시코와 카리브해 지부의 책임자로서 2006년 멕시코시티에서 조직한 최초의 커먼즈 활동가 대회에서 시작했다. 질케는 나를 연사로 초대했다. 우리가 매우 다른 세계에서 살았음에도 둘 다 커먼즈가 자본주의적 인클로저에 맞서 소프트웨어에서 시작하여 종자와 토지 그리고 그 이상의 것에 이르는 우리의 공유된 부를 방어하기 위한 효과적 체계임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느슨한 파트너십은 2년 후인 2008년까지는 실제로는 구체화되지 못했는데 2008년에 우리 둘은 활동가 커머너들의 드물었던 또 다른 초기 회합인 엘리베이트(Elevate) 축제에 참석했다. 이 인디음악과 정치문화를 위한 축제는 오스트리아 그라츠(Graz)에서 4일간 열렸다. 높이 170미터인 슐로스베르크언덕(Schlossberg Hill)의 단단한 바위를 실제로 깎아 만든 행사장에서 나는 막 피어나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프로젝트(Creative Commons Project)에 대한, 과학 커먼즈와 역사 커먼즈 기획들(the Science Commons and History Commons initiatives)에 대한 열정적 발표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근대성의 스펙터클’(The Spectacle of Modernity)에 대한 해석인, 리믹스(remix) 예술가 D.J.스푸키(D.J.Spooky)의 혼을 일깨우는 공연을 접했다.

 

이 싹트고 있는 커머너들의 국제적 하위문화가 덜 탐구된 약속의 옥지(玉地)임이, 탐색해볼 가치가 충분히 있는 미스터리임이 내게는 분명해졌다. 나는 실제로 탐색했다. 다음날 채식식당 긴코(Ginko)에서 점심을 하면서 질케와 나는 다음 하려는 일에 대한 열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시작했다.

그 후 13년 간 놀랍게도 우리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함께 작업하게 됐다. 공식적 직업이나 제도적 관여가 없는 상황으로 우리는 때로는 불안정했지만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것을 하는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해야만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은연중에 우리는 커먼즈에 관련된 모든 것에 참여하는 사람이자 인류학자이며 활동가이자 전략가이며 협력자이자 네트워크를 만드는 사람이고 또 그것을 대중화하는 사람이 되는 법을 배웠다. 

질케와 나는 커먼즈를 전통적인 학적 방식으로, 즉 그저 경제적 자원이나 재산으로 연구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커먼즈를 자본주의적 시장/국가 체계를 변형할 수 있는 새로우면서도 오래된 세계관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가 배우고 싶었던 것은 다름 아닌 정치·문화·법·윤리의 성격을 그리고 삶 자체에 대한 근대적 이해를 커머닝이 얼마나 재구성할 수 있는가였다. 수십 년간 주류정치로부터 효과 없는 미적지근한 성과를 경험한 다음 우리가 생각한 것은 질러버려!였다.

그래서 열린 의제와 원초적인 호기심―진정한 창의성에는 낙관주의적 순진함이 필수적이다―으로 우리는 커먼즈를 재발명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고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괴테의 유명한 발언이 우리의 세찬 작업 신념을 보여준다.

모든 주도적 행위(및 창조)에 관한 어떤 근본적 진리가 하나 있다. 우리가 확고하게 헌신하는 순간에 섭리 또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진리에 대한 무지로 셀 수 없이 많은 발상과 멋진 계획들이 죽었다. 우리가 헌신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온갖 종류의 일이 일어나 우리를 돕는다. 그 결정으로부터 사건들이 콸콸 흘러나와서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치리라고 꿈꿀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예기치 않은 일들, 만남들, 물질적 도움들이 우리에게 유리하게 일어나게 된다.

괴테는 기억하기 좋은 말로 조언했다. “할 수 있는 일이나 꿀 수 있는 꿈이라면 무엇이든 시작해라. 대담함에는 천재성과 힘, 마력이 있다. 지금 시작해라.”

당시 우리는 위 인용문을 몰랐지만 우리는 실로 저 인용문대로 했다. 우리의 작업은 해방적이었고 새로운 활동 영역을 열어젖혔다. 나의 작업 파트너이자 조력자, 공동 조사자, 검증자인 질케를 못 만났다면 내 삶이 어떻게 전개됐을지 정말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서로를 창조했다. 혹은 적어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다.

독일민주공화국(구 동독)의 농장에서 자랐고 라이프치히에서 사회과학과 로망스어 교육을 받은 질케는 1960년대 평범한 중산층 미국인으로 양육된 나와 관점이 꽤 달랐다. 그녀는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의 통일 그리고 유럽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끔찍한 확대를 체험했다.

반면 나는 소비자 옹호자 랠프 네이더(Ralph Nader), 할리우드의 제작자이자 활동가 노먼 리어(Norman Lear)와 함께 일하며 일류 정치 교육을 받았다. 워싱턴의 정치와 공익 운동에 몰두하면서 말이다. 문화적·지적·정치적으로 너무도 상이한 세계에서 왔지만 우리는 커먼즈에 대한 강고한 열정과 그 잠재력에 대한 기묘한 감각을 공유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차이가 내가 폭발적 창의성으로서 경험했던 것에 기여했다.

참으로 충격적이게도 우리의 길고도 기묘한 여행은 질케의 연인인 자크가 가슴 아픈 소식을 전한 지난주 충격적 종말을 고했다. 질케는 리히텐슈타인(Liechtenstein)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 중 11월 10일 아침 알프스에서의 일일 하이킹을 위해 떠났는데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에 수색팀은 그녀가 ‘통행불가지역’에서 치명적 사고를 당했다고 고지했다.

그 소식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말도 할 수 없었고 멍해졌다. 너무도 지적이고 유능한 활동가이자 끝없는 에너지를 가진 생기 있고 관대한 여성인 이 소중한 친구를 내가 더 이상 줌(Zoom)으로 부를 수 없다니. 펼쳐지고 있는 ‘커먼즈 세상’을 그녀의 기민한 판단과 경험 없이 내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질케의 돌연한 떠남이 아주 분명히 보여준 것은 그녀가 오늘날의 커머닝의 세계에서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를 믿을 만하게 그려보는 탐색작업에 나서는 데 있어 실로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친애하는 동료에게 경의를 표하며 나는 그녀의 특별한 인격, 혼융된 재능에 관해 숙고하고 싶다. 15년 동안의 우정과 조언, 지지가 내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죽음으로 상심이 클 클라라(Clara), 폴(Paul), 자크(Jacques), 지나(Gina), 닉(Nick), 카이(Kai)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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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믿지 못할 일은 질케와 내가 4,000마일 떨어져 살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독일 예나에서 (더 최근에는 노이데나우Neudenau 마을에서) 살았고 나는 매사추세츠주 엠허스트(Amherst)의 시골 대학 마을에서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다. 몇 년 간 우리 둘 다 평범한 직장이나 안정적인 제도적 지원이 없었다. (2017년부터 나는 슈마허신경제센터Schumacher Center for New Economics에서 일하고 있다. 질게는 뵐 재단을 떠난 후 소속된 곳이 없는 ‘자기 고용’(self-employed) 상태를 유지했다.)

2008년 그라츠(Graz)에서의 모험 이후 우리는 커먼즈를 조사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시모 데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 슈테판 메레츠(Stefan Meretz)와 함께 작업하면서 우리는 3일간의 휴양을 위해 커먼즈 연구자와 활동가로 이루어진 드림팀을 소집하기로 했다. 우리는 피터 라인보우(Peter Linebaugh),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조지 카펜치스(George Caffentzis), 미셸 바우웬스(Michel Bauwens), 볼프강 작스(Wolfgang Sachs) 등 많은 이들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일단 저지르니 섭리가 웃으면서 우리 방향대로 사태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독일 백작인 지속가능산림감독관 헤르만 하츠펠트(Hermann Hatzfeldt)를 찾았는데, 하츠펠트는 1550년에 지어진 그의 교외 거주지 크로토프성(Crottorf Castle)을 다종다양한 국제 커머너의 회합에 기꺼이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커머너들이 다른 종류의 미래를 숙고하기 위해서 성의 대형홀에 모인다는 기발한 생각이 좋았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드는 즉흥적 액티비즘과 문화변화에 대한 우리의 실험이 시작됐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이 말했듯 우리는 행복을 쫓을 때 구현되는 ‘보이지 않는 도움’에 의존했다. 동시에 독립적 활동가로서 우리는 다루기 힘든 이데올로기적·제도적 뒤얽힘에서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P2P재단(Peer to Peer Foundation)의 설립자이자 태국 치앙마이에 기반을 둔 벨기에 활동가 미셸 바우엔스(Michel Bauwens)가 질케 및 나와 함께 커먼스전략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 CSG) 결성에 참여했다. (미셸은 2018년 CSG를 떠났다.) CSG는 실제 조직이라기보다는 이름이자 대담한 열망의 표현에 가까웠는데 그것은 사실 CSG가 단지 세 개인의 느슨한 연합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전한 재정 지원이나 법적 지위가 없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커먼즈 패러다임 및 담론의 잠재력을 날카롭게 알아보았다. 통찰·직관·저술을 교환하며 우리는 서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커먼즈 프로젝트의 진전을 추적했다. 우리는 파리·베를린·암스테르담에서 혹은 우리의 발표 일정이 겹치는 곳이면 어디서든 만나 소식을 교환하고 전개되고 있는 발전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우리의 특이한 협력을 묘사하는 것은 이 협력이 질케의 주목할 만한 강건함 즉, 탐색하고 종합하는 그녀의 지적 능력, 친구를 사귀는 그녀의 재능, 실천적 활동에 대한 그녀의 열정을 부각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발표 초청, 자문 초청을 받았고 컨퍼런스, 워크숍, 공개 담화를 다니며 수개월을 보냈다. 커머너 친구들과 지인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서 질케는 어느 누구보다도 먼저 ‘커먼즈 세상’에서의 선구적 사태전개에 대해 직접 체험으로 배웠고 이 겉보기에는 주변적인, 기묘한 세계에 대한 그녀의 그리고 우리의 웅대한 이해를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파리, 몬트리올, 아프리카의 불어를 사용하는 커머너들,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연계된 커머너들,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의 활동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능성이 집중된 지점들을 대체로 잘 알았다. 그녀는 유럽의 주요 커머너들을 알았고 아프리카·동남아시아·세계사회포럼의 활동가들·학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이후의 많은 활동은 우리가 조직한, 향후 중대한 영향을 미친 두 국제 커먼즈 컨퍼런스를 통해 가능해졌다. 2010년과 2013년에 각각 열린 컨퍼런스는 모두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과의 협력과 재단의 국제정치부 수장 하이케 뢰슈만(Heike Loeschmann) 및 이사장 바바라 운뮈시흐(Barbara Unmüßig)의 지원 하에 조직된 것이었다.

두 컨퍼런스는 스스로를 커머너라고 생각하거나 커머너이고자 하는 전 세계 수백 명의 사람들을 결집시켜서 엄청난 에너지를 분출시켰다. 사람들은 커먼즈에 대한 자신들의 직관을 입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가 확산되었다. 커먼즈가 담론으로 성장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한편 CSG는 2012년과 2021년 사이에 12번 이상의 소규모 ‘딥다이브’ 모임들을 별도로 주최했다. 이 모임들은 미리 마련된 답이 없는 난해한 전략적 물음들을 적절한 시기에 검토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예컨대 우리는 커머닝이 어떻게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 건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2016년), 디지털 플랫폼이 협동주의를 촉진하는 데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2014년), 다양한 사회운동들이 어떻게 연계되고 합류될 수 있는지(2014년), 존재론적 믿음이 현대 정치의 숨겨진 동인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2019년) 등을 다룰 수 있는 주요 전문가를 초청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함께 우리는 대안적 가치이론이 가치와 가격을 동일시하는 표준적 경제이론에 도전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2016년 딥다이브 모임을 주선했다. 불과 몇 달 전인 2021년 9월 우리는 주류 정책이 어떻게 커머닝을 지원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기 위해 유럽의 커머너 정치인과 정치권의 온라인 모임을 주선했다.

지금까지 질케와 나의 가장 담대한 협력은 우리의 세 권의 책, 즉 두 권의 선집『커먼즈의 부』(The Wealth of the Commons , 2012)와 『커머닝의 패턴들』(Patterns of Commoning, 2015), 그리고 커먼즈를 야심차게 사회체계로 재개념화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 있는커먼즈의 전복적 힘』(Free, Fair and Alive: The Insurgent Power of the Commons , 2019)이었다. 뵐 재단과 하이케 뢰슈만으로부터 세 권의 책 전체에 대한 중요한 지원이 이루어졌다.

두 선집은 동시대 커먼즈의 풍부한 다양성을 알리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우리는 커먼즈가 중세적 삶의 유물이나 이상하리만치 글로벌 싸우스에 잔존하는 후진적 형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커먼즈가 시장/국가 체계에 대한 전적으로 동시대적인 견고한 일단의 대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기서도 질케의 예리한 판단력과 훌륭한 가르침 그리고 개인적 우정이 엮어낸 전지구적 그물망이 우리가 실타래를 함께 푸는 데 기여했다.

2016년 질케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대중에게 온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커머닝을 목격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우리는 두  공편 선집의 통찰을 바탕으로 하여 세 번째 책을 함께 쓰려했다. 우리가 원했던 것은 우리가 목격했던 커먼즈의 실증적 다양성을 더 정확히 기술하기 위한 웅장한 이론적 종합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표준적 경제학마냥 커먼즈를 단순히 소유되지 않은 자원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커먼즈가 역동적이고 생성적인 사회적 형태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 (‘공유지의 비극’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와 그의 패턴 언어(pattern language) 방법론에서 영감을 얻어 우리는 커먼즈를, 근대적인 시장 개인주의, 시장 경제학을 통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사회적 형태로 설명하려했다. 커먼즈는 ‘존재변화’(OntoShift)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커머닝의 농밀한 관계성을 인지하고 개인적/집단적, 합리적/비합리적, 이기적/이타적이라는, 사람들을 호도하는 이원적 관계들을 배제하는 존재변화를 통해서만 말이다. 

이는 우리가 커먼즈를 사유하는 데서 중요한 돌파구였다. 여기서도 질케는 미지의 영역으로 우리를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책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Free, Fair and Alive)은 유쾌하면서도 진을 뺀, 미친 3년간의 전력 질주의 결과였다. 

일전에 우리는 베를린 교외의 친구 집에 모여 한 주를 보내면서 매일 같이 열다섯 시간을 얘기하고 논쟁하며 글을 썼다. 반복되는 “커머닝의 패턴”은 무엇일까? 그것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가 본 것과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이 쓴 것이 어떻게 아귀가 맞을 수 있을까? 종내 ‘삼중적 커머닝'(Triad of Commoning)이라 불리게 된 것이 바로 우리 숙고의 결과였다.

다른 사례로 나는 네덜란드 아른헴(Arnhem)에서 열린 컨퍼런스 이후 며칠을 쥐어짜 다수의 커먼즈의 특징으로 본, ‘관계성 자산’(relationalized property)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따져볼 수 있었다. 우리가 깨달았던 것은 커머닝의 현실이 재산권 인식론을 통해서는 혹은 시장 ‘합리성’과 개인주의를 전제해서는 표현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경제학 용어가 허용하는 논리·기풍과는 다른 논리·기풍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를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질케의 단호한 투지와 결단, 창조적인 즉흥적 활동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지적·실천적으로 많은 장애를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휴양지에서 딥다이브 모임을 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으지 못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모임을 열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빈 방에서 잤고 함께 요리했고 설거지했다. 

한번은 한동안 서로 만나지 않은 미셸과 나, 그녀가 커먼즈전략그룹으로 다시 연결되도록 그녀가 『오야』지(Oya magazine) 친구들을 설득해 북해의 외딴 독일 마을로 우리를 초대했다. 또 다른 경우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친구를 설득해 토스카나 교외의 한 장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엇갈린 여정 이후 만나 서로의 논의를 뒤따라갈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이는 커머너들과의 예기치 않은 만남으로 이어졌는데 이번에는 피렌체 중심부의 니디아치 정원(the Nidiaci Garden)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렇게 우리의 모험은 계속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사태전개와 새로운 친구들이 무슨 일인지 언제나 나타나 우리의 일을 진척시켰다.

질케와 나는 우리의 책을 쓰느라 서로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일전에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영화 제작진이 깊이 토론하는 우리를 촬영했는데, 이는 나중에 우리 책의 짧은 홍보 영상이 되었다. 이를 통해 질케와 내가 “함께 생각한” 방식을 알 수 있다. 

혹은 베를린 커먼즈 컨퍼런스 직후 촬영된, 리믹스더커먼즈(Remix the Commons)가 제작한  2010년의 이 짧은 비디오를 보면 그 순간의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질케의 설명을 확인할 수 있따. 

커먼즈가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세요.  일단 그리 되면 그 생각은 바이러스처럼 성장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그들이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 운동을 하는 사람이 프리 하드웨어 운동을 하는 사람과 자리에 앉아 함께 얘기를 나누면, 그리고 커먼즈가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진정 친밀한 어떤 것임을 깨달으면, 그 생각이 씨앗처럼 심어지며 사람들이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그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삶을 우리가 직접 맡는 방법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종종 공동작업을 하면서 우리 각자는 우리 자신의 운명이 조종하는 우리 자신의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그녀의 말도 안되는 여행 일정과 색다른 만남을 뒤따라가고자 고군분투하면서 나는 여행이나 독서를 하는 중에 그녀에게 보고하고는 했다. 나는 그녀가 스위스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있는 은행가들을 막 만났다거나, 커먼즈 커리큘럼 개발에 관심이 있는 대학원과 협의하고 있다거나, 가장 재미있는 박사과정생을 만났다거나, 『자유롭고 공정하며 살아있는』을 번역하기 위해 커머너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스어, 포르투갈어) 번역가 팀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이메일을 받고는 했다.

이것이 또 하나 주목할 점이었다. 그녀는 다양한 언어에 유창해서 그녀는 전 세계의 매우 광범위하고 다방면의 커머너 그룹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많은 열정·재능·신념·활력을 가진 질케가 만성적으로 과로하고 빈번히 지쳐했던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의 시간을 쓰는 데 너무도 관대했고 유망한 프로젝트를 몹시도 돕고 싶어했다. 그녀는 꽉 찬 스케줄에 초조해 하고는 했지만 실제로 그것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조치를 결코 취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었다. 독일이 자정일 때 (미국 동부 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내게 전화하면서 그녀는 종종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나는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는 것이 근대 커먼즈를 탐험하는 것과는 다른 문제임을 안다. 하지만 질케가 ‘통행불가지역’을 탐색하는 문제로 당황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하겠다. 그녀는 항상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는 문제를 우회하거나 뛰어넘거나 밑으로 파고들거나 변형시키고자 했다. 그녀의 헌신의 깊이는 놀라웠다. 그녀의 대담하고 생기 있는 마음은 너무나도 전율을 느끼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솔직한 우정은 선물이었다. 나는 그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는 그녀를 몹시 그리워할 것이다.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

 


  • 저자  :  Daniel Christian Wahl
  • 원문 :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KOSMOS에 실린 크리스천 월의 글 “Indigenous to Life: Being as Expression of Place”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주제는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기’(Realignment with Earth Wisdom)이다. 저자 대니얼 크리스천 월(Daniel Christian Wahl)은 서구의 분리 서사가 파괴와 불평등을 초래했지만 이에 대응하여 재생성적인 개발과 재생성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으며 이 시점에서 재생성(regeneration)이 생명 자체의 고유 패턴이라는 것과 우리의 공통의 먼 조상들 모두는 생명을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구성원으로 있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로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생명을 영위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리가 집이라고 부르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 안에서 서로 돌보며 살았다. 콜롬비아와 페루의 숲에서부터 태평양 연안 북서부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기까지 인간 거주자들이 수천 년에 걸쳐서 더 높은 다양성, 풍요로움, 생물‐생산성에 이르는 최고치의 생태계들을 함께 창조했고 양성했다는 증거가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모두 행성 차원의 과정으로서의 생명()에 토착하고 있다. 지구의 지혜 전통들 다수의 핵심적인 교훈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생명의 재생성적 패턴들이 우리를 통해 흐르도록 하는 과정으로서의 생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런 식으로 존재할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장소의 소유자가 아니라 표현자로서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땅에 속해 있는 것이며 땅과 바다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돌아간 후에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첫째, 지구의 지혜와 함께 하기란 무엇인가? 크리스천 월은 올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관계적인 존재들로 우리 각자는 특이하며 생명의 재생성적인 공동체 내부에 있는 친밀한 상호관계의 결합체이다. 따라서 지구의 지혜와 함께하기 위해 우리는 자연에서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자연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예를 들어 재닌 베니어스(Janine Benyus)가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생태모방)의 핵심적인 교훈으로 제시한 “생명은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인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해서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기 위해 나서는 경우 생명체로서 우리는 지구의 지혜가 어떻게 우리를 통해 흐르게 하는가?

크리스천 월은 인류가 한 종으로서 살아온 최근의 기록을 살펴보면 우리가 이 물음의 핵심적인 중요성을 망각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우리가 한 행동들—더 정직하게 말해서 인간의 비교적 작은 부분에 속하는 행동들—이 모든 인류에게 종 차원의 ‘통과의례’를 강요했고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대량 멸종 사건의 일환으로서 우리 종의 이른 종말이라는 실질적이고 당면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크리스천 월은 다시 물음을 제기한다. 우리는 생명의 공동체에서 성숙한 회원이 되어, 그리고 퇴행적이기보다 재생성적인 존재가 되어 적시에 지금과는 다른 미래를 발현하게 될 것인가?

인간이 사는 장소들에는 생명‐문화적 고유성이 있고 이 고유성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것이 다양한 재생성적인 문화들이다. 그는 우리가 이 문화들을 기초로 한 재생성적인 미래를 함께 창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기, 존재하기 그리고 사고하기에서의 변화는 물론이고 새롭고도 매우 오래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을 조직하는 데 투여되는 기존의 생각들과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내러티브들은 생명의 과정을 개체들, 종들로 잘라놓았고 이런 식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 결핍, 죽을 운명에 초점을 맞추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가 내리는 판단이다. 크리스천 월은 이를 극복하고 생명을 다른 식으로 이해하기 위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는 고대의 토착적인 지혜뿐만 아니라 최첨단 과학에 의지해서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動向的) 힘—협동적 풍요를 통해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하는 힘—으로 이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생명이 행성 차원의 과정임을 크게 강조하는 그는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1970년 논문 「형태, 물질 및 차이」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자신의 환경을 파괴하는 유기체는 그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생존의 단위는 환경 속에 있는 유동적인 유기체이다.”

그는 우리가 생명을 우주에 존재하는 동향적 힘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진화과정에 의식적으로 참여하는 경우, 존재는 부분인 동시에 전체라는 표면상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관계적인 참여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독립적 존재’와 ‘전체의 상호적 표현으로서의 존재’사이의 양극성에서 발생하지만 우리는 둘 다이며 틱낫한(Thích Nhất Hạnh)이 소개한 사이존재(interbeing)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나바호족(Navajo)이 가진 지구의 지혜인 ‘아름답게 걷기’(‘Hózhóogo Naasháa Doo’)도 바로 이 점을 가리킨다. 그들은 이렇게 조언한다. ‘미래로 걷는다면 아름답게 걸어라.’ 아름답게 걷는 방법은 ‘전부 속의 하나와 하나 속의 전부(the One-in-All and the All-in-One)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크리스천 월은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이를 설명한다. 재생성적으로 사는 것은 지역과 나라와 전 세계가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중첩된 복잡성의 의식적인 표현자로서 그리고 이 복잡성에의 참여자로서 사는 것이다. 이 중첩된 규모들(그림참조)은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구조들 및 패턴들의 빠르거나 느린 붕괴 주기, 변형적인 혁신 그리고 새로운 패턴들을 일시적으로 공고히 하여 역동적이고 지속적으로 변형하는 온전체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통합된다. 그는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재생성이 생명 자체의 진화적이고 발전적인 충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재생성적으로 행동하기의 핵심은 환경적 변화나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고 변형할 수 있는 체계 차원의 치유와 복원력있는 공동체의 구축이다. 하지만 이를 위한 전제조건은 건강(성)과 복원력을 ‘되돌아갈’ 정적인 상태로서가 아니라 변화하는 맥락에도 불구하고 변형하고 활력을 표현하는 역동적인 능력으로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재생성의 핵심은 ‘순(順)긍정적 영향’(net positive impact)이나 ‘좋은 일하기’ 그 이상이며 모든 개인, 공동체 및 장소의 특유하고 대체 불가능한 본래적 역능을 발현하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이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가?

크리스천 월의 정의에 따르면 생명은 여러 규모들이 중첩된 재생성적인 공동체이다. 생명은 모든 유핵 세포들을 형성하는 세포기관들의 공동체에서부터 당신과 내가 ‘우리의 몸’이라고 부르는 재생성적인 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박테리아•균류세포들의 생태계를 거쳐, 그리고 풍부하고 대단히 바이오 생성적인 생태계들의 기능적 다양성을 창출하는 종들의 공동체를 거쳐 바다 및 육지 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생명지원 시스템—이것이 지구의 기후패턴과 대기 구성성분을 조절하여 생명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다—에 기여하는 살아있는 지구의 생리학까지 걸쳐 있다.

따라서 크리스천 월이 이 글의 주제로 삼은 지구의 지혜와 다시 함께하는 것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재생성적인 공동체에 더 의식적으로 다시 거주하는 것이며, 중첩된 재생성적인 생명 공동체 내부에서의 우리의 역할로 즉 치유자로서의 역할로 겸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미래는 우리 각자가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는 어떻게 이 공동체에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는 시인인 스나이더(Gary Snyder)가 1976년에 제기한 발언을 인용해서 그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가 삶을 이어갈 수 있고 [···] 우리가 풀과 태양에 기대 살 수 있는 미래 행성을 상상하는 사람들은 거주하는 사람들(전 세계 토착민들과 농부들)을 지원하기 위해 과학이든, 상상력이든, 힘이든, 정치적 수완이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져오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공동의 대의를 만들 때 우리는 ‘다시 거주하게’ 된다.”

크리스천 월이 주장하는 재거주(Re‐inhabitation)는 우리가 거주하는 장소들과 바이오지역들의 맥락에서는 행하기에서의 변화를 그리고 바이오지역들과 맺는 관계방식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장소장소마다 건강한 생태계 기능들을, 번성하는 공동체들 및 활기찬 경제들을 재생성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재거주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성의 과정들—우리를 산출하는 장소들, 공동체들 및 생태계들의 그 자체로 역동적인 표현들인 과정들—로서 다시 인식하는 법을 배울 때 의식의 지형에서 재거주가 활발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순간에 담겨 있는 미래를 향한 잠재력은 (긴 ‘이행’이나 어떤 ‘거대한 전환’ 이후의 어떤 때가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몸, 우리의 공동체, 우리의 장소와 바이오지역들을 집으로 삼아 거기에 거주하는 데 있다.

그러나 크리스천 월이 보기에 변화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론은 추상 쪽으로 그리고 문제들을 서로 분리하고 ‘해결책’을 실행할 장소로부터 분리하여 ‘해결하는’ 습관 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며 우리는 이런 사고방식 안에서 전략을 논의하는 것에 고착되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며 글을 맺는다.

우리가 바로 지금 다르게 존재하기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떨까? 우리가 누구인지 재인식하고 사이존재의 행성적 과정으로서의 삶과 좀더 동일시한다면 어떨까? 우리가 자신, 공동체 및 생명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어떨까? 우리가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장소를 치유하고 육성하는 표현자들로서 존재할 또는 그런 표현자들이 될 잠재력에 초점을 맞추면 어떨까? 우리가 추상적인 전지구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고 해결책들의 규모를 키우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습관을 떨쳐버린다면 어떨까? 우리의 존재의 터전인 장소들과 공동체들과의 (함께 진화하는) 상호성 속에서 생명에 도움이 되는 조건들을 창출할 잠재력에 초점을 둔다면 어떨까?




자본을 넘어선 미래와 크립토 커먼즈

 


  • 저자  : Sarah Manski
  • 원문 :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 crypto commons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아래는 https://www.shareable.net/에 실린 글 “A post-capitalist guide to the future: crypto-commoners only want the earth”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Sarah Manski)는 정치경제학자, 윤리학자, 세계적인 테크놀로지스트이자 조지메이슨 대학교 교수이다. 맨스키는 또한 <VERSES.io>와 씨바나 재단(Civana Foundation)의 고문이며, P2P재단과 조지메이슨 대학교의 사회과학연구 센터의 연구자이고,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SBIR 프로그램의 전문 검토위원이다. 그녀는 지난 25년 동안 활동가, 노동조직가, 저널리스트, 연구자 및 ‘비즈니스/글로벌 어페어즈’ 교수로서 노동자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이 2021년 8월 28일부터 9월 3일까지의 일정으로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에서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Crypto Commons Gathering 2021, CCG21)을 개최하고 여기서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한 테크놀로지 설계 및 개발 방향을 논의했다. 이 글은 저자가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발표자로 참여하여 행사의 개최 취지와 크립토 커먼즈의 확대를 위해 일하고 있는 몇몇 참석자들의 아이디어 및 그들의 활동을 소개하는 일종의 기행일기이다.

저자는 암호화가 본격적으로 미국인의 삶속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고 도처에 만연될 날이 머지않은 것으로 진단한다.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를 주류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응용프로그램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지만 암호화폐의 일종인 비트코인을 매입하고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운 과정이다. 하지만 처음으로 수백 개의 미국은행의 지점들이 곧 기존 계좌를 통해 암호화폐를 구입하고 보유하며 팔 수 있을 것이므로 변화가 생길 것으로 보고 있다. 비트코인이란 다음의 것을 포함하는 다양한 테크놀로지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전지구적인 움직임을 응용한 것들 가운데 가장 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 분산원장들
  • 열린 혁신 생태계들
  • 사회적 기업들
  • 플랫폼 협동조합들
  • 탈중심화된 데이터 관리 인프라들
  • 지역 혁신가들과 P2P 네트워크들
  • 마켓스페이스와 지방 연구소들
  • 바이오핵랩들(bio-hacklabs)
  • 커먼즈 기반의 글로벌 정치경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토큰 경제와 새로운 가치 시스템들

생산•관계•소유권의 대안적인 형태를 창출하기 위하여 다채로운 창발적인 커뮤니티들이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실험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적인 추출•착취•시장경쟁 및 사적 소유를 넘어서는 근본적으로 새롭고 다른 논리―공통의 선, 글로벌 커먼즈에 기반을 둔 공유, 탈중심화 및 협력―를 실험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의 장소는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작은 시골 호텔이다. 이곳에 모인, 스스로를 크립토커머너들(CryptoCommoners)이라 부르는 테크놀로지스트들의 임무는 크립토 커먼즈(Crypto Commons)의 확대를 위해 일하는 실무자들과 교수들을 모아서 전지구적인 운동을 하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은 탐구적인 활동과 학문적인 연구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상호적으로 유익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글의 저자인 맨스키를 포함해서 대략 30여 명의 남녀 테크놀로지스트들이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참석했다. 맨스키는 이 글에서 5명의 테크놀로지스트들 소개하고 있으며 아울러 바우엔스의 기조발제(“Commoning as a mode of production”)의 내용을 전해준다.

맨스키 자신의 연구는 인류에게 미치는 테크놀로지의 영향력과 결부되어 새로이 등장하는 윤리적 문제들 그리고 가치•소유•생산•공평함•노동과정•사회적 역동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가진 커먼즈 기반 경제 모델이 구축될 수 있는 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맨스키는 “시장에서 긍정적인 행동을 촉진하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자율권을 주는 경제 모델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새롭고 지속가능한 커먼즈 기반 경제를 창출하는데 블록체인이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연구한다.

조쉬(Josh, ‘블록체인 사회주의자’로도 알려져 있다)는 블랙체인 세계의 커먼즈 운동 부문에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주간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고 <브레드체인 프로젝트>(BreadChain Project)에서 일한다. <브레드체인>은 탈중심화된 협력기획들을 위한 공동의 소유권 분야에서 자원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이 열린 회의장소와 숙소를 제공한 펠릭스(Felix)는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의 주요 조직자이다.

스콧 모리스(Scott Morris, ‘토큰 제디’라고도 알려져 있다)는 <QOIN> 재단의 공동 설립자로 지역화폐 분야에서 협력적인 토큰 생태계를 설계하는 데 힘쓰고 있다. 그는 또한 뱅코르 백서(Bancor whitepaper)의 공인되지 않은 저자이다. 뱅코르는 스마트 토큰이라 불리는 새로운 종류의 디지털 자산을 확립하기 위한 첫 기획이었다. 스마트 계약은 디지털 자산을 운영하는 한 방법으로 하나 이상의 기존의 토큰이 준비금으로 유지되는 것을 요구한다. 스마트 계약에 교환 가능한 토큰을 준비금으로 보유함으로써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아무 때나 스마트 토큰을 매입하거나 현금화할 수 있다.

자감(Michael Zargham)은 <블록싸이언스>(BlockScience)―복잡계를 전문으로 다루는 엔지니어링, R&D 및 분석회사이다―의 설립자이자 CEO이며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테크놀로지의 힘을 활용하는 모델링 프레임워크와 강력한 시뮬레이션 도구인 소프트웨어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Complex Adaptive Dynamics Computer-Aided Design, cadCAD)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또한 그는 <메타거버넌스 프로젝트>(Metagovernance Project)에서 일하고 있다. ‘복잡적응역동계 컴퓨터지원설계’는 시스템의 복잡성을 인지하면서도 시스템 디자인을 단순하고 통찰력 있는 어떤 것으로 전환시킬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자감의 설명에 따르면 인터넷 상에서 자치는 자연권이 아니다. 인터넷 상에서의 자치는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는 플랫폼의 아키텍처에 의해 가능해지거나 제한되며, 같은 아키텍처는 사용자들이 생성하는 별개의 기관들의 상호작용을 제어한다. 메타거버넌스가 이 자치의 두 가지 관련 역할들—사용자들이 자신의 기관을 창출하는 그들의 능력을 가능하게 하기/제약하기, 개별 기관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치하기—을 의미한다.

에멧(Jeff Emmett)은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즈>(Augmented Bonding Curves)에서 활동 중이다. 그는 <블록싸이언스>에서 자감을 위해 커뮤니케이션 관련 일을 하며 <더 커먼즈 스택>(The Commons Stack) 소속 핵심 조직자이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는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지속적인 조직체들을 위한 새로운 펀딩 모델을 창출할 경우, 내재 가치를 가진 암호화된 토큰을 보유한 초기 사용자들을 보상하도록 설계된다.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에는 자금 풀(funding pool), 토큰 잠금/수령권 메커니즘 및 시스템간 피드백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

<더 커먼즈 스택>의 임무는 오픈소스 도서관, 상호운영적인 웹3 부품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인센티브 일치, 지속적인 자금지원, 지역사회 거버넌스를 통해 공공재를 지속시키는 커먼즈 기반 미시 경제를 구축하는 것이다. <더 커먼즈 스택>은 효과적인 새로운 도구들을 지역사회에 맡기게 될 것인데 이 도구들 때문에 지역사회는 공유자금을 늘리고 분배할 수 있으며 투명한 결정을 하고 커먼즈 지원사업의 진행사항을 추적•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최소한의 자립 커먼즈’(Minimum Viable Commons)를 창출할 구성요소로서 다음 네 가지를 구축했다.

  •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지속가능한 자금을 지역사회에 제공한다.
  • ‘기베스 댑’(Giveth Dapp)은 제안과 에스크로 서버스를 제공한다.
  • 연속적인 의사결정 거버넌스 과정인 ‘확신 투표’(Conviction Voting)((확신투표는 특정 시점에서 구성원 전체의 다수결로 어떤 제안의 채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를 일정 기간 축적하여 가장 선호도가 큰 제안을 확인하는 결정방식이다.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토큰을 자신이 선호하는 제안에 걸며, 이런 식으로 각 제안에 걸린 토큰의 양과 이 토큰들이 걸려있는 시간의 양을 토대로 제안에 대한 구성원들의 선호도가 계산된다.)) 플랫폼
  • 커먼즈 분석 대시보드 (이것은 cadCAD로 움직인다)

바우엔스는 커먼즈의 내부 경제와 외부 세계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작동할 무언가의 필요성을 오랫동안 강조해왔는데 바로 ‘오그먼티드 본딩 커브’가 이 역할을 한다. 바우엔스는 <커먼즈 트랜지션>(Commons Transition, 커먼즈 사회로 향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개발 플랫폼)의 연구 책임자이자 헬프리히(Silke Helfrich)와 볼리어(David Bollier)와 함께 <커먼즈 전략 그룹>(Commons Strategies Group)의 창립 멤버로, 동료 생산, 거버넌스, 재산권을 탐구하는 분야에서 전 세계 연구자 집단과 공동연구를 한다. 바우엔스는 영어, 네덜란드어, 프랑스어로 된 몇 권의 책과 보고서들을 공동 출간했는데 주요 작품들에 속하는 것으로 『협력 경제를 위한 네트워크 사회와 미래 시나리오』(Network Society and Future Scenarios for a Collaborative Economy)가 있으며, 보다 최근에 나온 『P2P: 커먼즈 선언』 (P2P: A Commons Manifesto)이 있다.

늘 그렇듯이 바우엔스는 커먼즈 경제가 인간 상호작용의 첫 형태였고 자본주의의 종획이 소수의 이익을 위해 공통의 부를 해체한다고 언급하며 발표를 시작한다. 바우엔스의 주장에 따르면 1993년, 인터넷이 커먼즈 역사에서 새로운 국면의 도래를 알렸다. 인터넷을 사용하여 국가의 외부에서 조직화를 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비트코인 프로토콜이 세상에 등장한 2008년 이후로 전지구적인 규모의 커먼즈가 발전하고 엄청나게 성장했으며 그것은 모든 개인들이 다른 어떤 개인에게 연결될 수 있는 P2P방식의 관계 역학, 즉 새로운 유형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자유를 탄생시켰다.

허가가 필요 없는 블록체인들(신뢰와 무관한 블록체인 또는 퍼블릭 블록체인으로도 알려져 있다)은 합의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이용 가능한 열린 네트워크이다. 블록체인은 이 과정을 거래와 데이터를 인증하기 위해 사용한다. 이 블록체인들은 알려지지 않은 거래당사자들 전체를 가로질러 완전히 탈중심화된 형태로 존재한다. 바우엔스는 이러한 블록체인들의 특징이 커먼즈 실천에 참여한 전통적인 인간 소그룹들의 특징이라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즉 글로벌 오프소스 시민네트워크들의 가능성 그리고 국가 위계구조 및 자본주의 시장의 동학 둘 다의 역량을 능가하는 생성적인 경제 연합체들의 가능성을 창출한다.

물론 이 상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몇 가지 경고 사항들이 있다. 바우엔스는 모든 서버가 자율적이라는 P2P개념은 지속적인 커머닝(자원들을 공동 출자하고 상호화하며 공유하는 자유로운 연합) 능력과 갈등관계에 놓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기존의 권력 불균형과 불평등을 강화할 수도 있다(사회를 개별 기업가들의 집합으로 보는 무정부주의적자본주의적, 자유방임적소유주의적 비전). 커먼즈 관점과 하이퍼마켓 관점 사이의 차이가 심대하다. 이것을 크립토커머너들과 비트코인브로들(BitcoinBros)이 서로 공존하며 경쟁하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라고 생각해보자. 누구든지 이기는 쪽이 미래를 차지할 것이다.

<크립토 커먼즈 개더링 2021>에 모인 참석자들은 미래를 위한 장기적인 시스템 설계는 다음의 공유된 원칙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 이해관계자 인센티브 일치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오픈소스여야 하며, 강력한 공학적인 실천들을 통합하는 반복적인 개발을 보장하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고 의미론적으로 호환이 되는 프로토콜을 가능케 해야 할 것이다.
  • 다중심적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 시스템은 ‘지구 위험 한계선’(planetary boundary) 개념에 기반을 둔 생태경제학을 포함해야 한다.
  • 그것은 설계상으로 생체 모방이어야 한다.

맨스키는 다음 단락으로 글을 맺는다.

우리의 목표는 크립토 커먼즈와 전 세계 협동조합 운동을 연결하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관건은 자본주의에 투여되던 자금 가운데 수조 달러를 더 순환적인 경제로 돌리는 데 어떤 종류의 도구와 생태계가 가장 잘 활용될 것인가였다. 우리가 공유한 합의는 다음과 같다. 정확한 계획과 절차가 정해지는 데 수년이 걸릴지라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은 이 새롭고 재생성적인 시스템 하에서 모든 인류를 연합시키는 데에는 함께 나눌 이야기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공들여 만드는데 전념하고 있다. 함께 말이다.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강좌 안내

생태적 전환의 길

– 생태사상과 전환운동

여기저기서 ‘생태적 전환’을 이야기합니다. 지구적으로, 지역적으로 다양한 ‘전환의 실천 사례’도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환의 철학, 비전, 전략에 대하여 깊이 이해하고, 자기 자리에서 그것들을 구체화해야 할 때입니다. 대전환의 길을 내고 있는 생태주의운동, 커먼즈운동, 탈성장운동 등을 깊이 이해하고, 실천적 함의를 찾는 배움의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함께 전환의 길을 내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11월 11일 : 세계관의 전환 – 유기쁨(서울대학교 강사)

11월 18일 : 대안근대로의 이행과 커먼즈운동 – 정남영(독립연구자)

11월 25일 : 정의로운 전환과 기후정의 운동 – 김현우(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12월 2일 : 삶의 지향으로서의 탈성장 – 남미자(경기도교육연구원 연구위원)

12월 9일 : 돌봄과 살림의 정치 경제 – 이현재(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12월 16일 : 전환의 기지로서의 마을 – 박복선(전환교육연구소)

 

일시

11월 11일 ~ 12월 16일 매주 목요일 오후 8시~10시

 

참여 방법

줌(신청자에게 참여 주소를 보내드립니다) 

 

참가비

50,000원

국민 543001-01-341365(교육공동체 벗)으로 입금

 

문의

010-6231-3681 전환교육연구소

 




커먼즈와 미래

 


  • 저자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
  • 원문 :  Introduction : The Promise of the Commons
  • 분류 :  일부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Leila Dawney, Samuel Kirwan, Julian Brigstocke가 편집한 책  Space, Power and the Commons : The Struggle for Alternative Future (Routledge 2016)의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에서 책 전체의 내용을 대략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부분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의 일은 태양에 의해 신성화된다. 가령 겨울날이나 땅 파는 날에 비하면 이날[추수하는 날]은 만족스러운 날이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날이면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모든 얼굴들이 (내가 알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들도 함께)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의 도랑과 집단적 희망에 의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사슴이 덫에 걸려 탕으로 만들어 달라고 울어대는 소리를 듣거나 딱따구리가 파이로 장사를 지내 달라고 졸라대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숲을 쳐다본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라도 하면 우리는 일제히 몸을 곧추세우고 꾸짖는 듯이 태양을 쳐다본다. 우리의 낫과 손 연장은 합창하듯 소리를 낸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누구나 듣는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모두가 듣는다. 우리에게는 개방성과 즐거움이 있다.

Jim Crace, Harvest (2013)

1968년에 봉기에 참여하고 있던 활동가가 시간 여행을 하게 되어 2015년 급진적인 좌파의 집회 현장에 뚝 떨어지게 되었다면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 그녀는 아마도 계급·노동·저항의 언어가 강화되었으리라고 기대할 것이지만, 이런 기대와는 달리 그녀가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제사(題詞)에 나온 목가적 장면과 유사한 토론 즉 토지에의 공통의 접근과 사유(思惟)의 개방성 및 그것에 수반되는 삶의 양태를 놓고 벌어지는 토론일 것이다. 그녀는 이전에는 신맬서스주의자들(neo-Malthusians), 토지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운동들 그리고 사회사가들 및 법역사가들의 도메인이었던 것, 즉 커먼즈의 언어를 발견할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커먼즈에 관한 관심은 주로 제한된 자원, 늘어나는 인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물질적 가난 등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커먼즈는 경제학, 인류학, 환경과학에서 중요한 관심 영역이 되었다. 인구 과잉에 대한 맬서스의 저작과 함께 자원과 토지의 사적 소유에 대한 조지(Henry George)의 비판, 경쟁하는 행위자들이 제한된 자연자원에 접근할 때 생성되는 긴장들에 관한 하딘(Garret Hardin)의 저작들이 그 준거점들이 된다. 커먼즈 관련 문헌들이 다루는 문제들은, 왜 이러한 위기들이 출현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은 언제 위기점에 도달할 것인가, 개별 국민 국가들이 어떻게 이것을 막기 위해 대응해야 하는가이다. 이 문제들은 커먼즈에서 실제로 행해지는 일, 커먼즈를 구축하는 일, 커먼즈가 의미하는 바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정책 변화와 거시경제적 자원관리를 지향하는 추상적 논의들이었다.

이 텍스트에서 (그리고 커먼즈 연구분야를 발전시키고 있는 정치학자들·지리학자들·사회학자들 사이에서) 말하는 커먼즈는 이 문제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을 다르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 책의 글들은 일반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식민화나 불로소득자들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규제와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원의 관점에서 정의되기를 거부하는 커먼즈를 표현한다. 이 글들이 말하는 커먼즈는 공간일 수도 있고 경험일 수도 있고 자원일 수도 있으며 기억이거나 혹은 ‘희소성의 관리’ 외부에 있는 공유하기와 살아가기의 형태들일 수도 있다. 저자들의 전문분야는 도시계획학, 지리학, 정치학, 사회학, 문화이론 등을 포함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 전반에 걸쳐 있다. 이는 새로이 일기 시작한 커먼즈 연구가 여러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으며, 학계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학계를 넘어서는 논의들에 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커먼즈를 신자유주의적 시장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삶의 사유화와 개인주의화에 저항하는 함께 살기의 방식들을 핵심으로 하는 시공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체로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커먼즈의 언어·이념·상상계의 출현을 고찰할 때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신자유주의적 힘들과 연관되어 있고 그 힘들을 통해 작동되는 방식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힘들은 공통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동시에 산출한다. 급진적으로 사유를 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적 확장의 논리 및 과정과 이 확장에 대한 저항을 점점 더 종획과 커머닝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축적의 논리를 통해 커머닝이라는 특수한 저항 형태의 가능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자본이 세계의 더 많은 지역을 상품화 과정으로 끌어들이면서 새로운 종획이 일어난다. 자본은 신자유주의적 소유와 가족 관계를 통해 삶을 사유화하는 동시에 인구에 기반을 둔 통치[푸꼬가 분석한 바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의 특성이다―정리자]를 구사한다. 이것이 대안권력인 커머닝으로 향할 가능성의 조건들을 생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비(David Harvey)의 작업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후기 자본주의가 계속적인 종획 과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중요하다. 자본은 이전에는 상호책임이라는 사회적 관계에서 관리되고 조직되고 산출되었던 자원·인구·활동·토지를 통합하면서 확장한다. 하비는 이를 ‘강탈(dispossession)에 의한 축적’이라고 정의한다. 여러 분야를 가로지르는 연구들은 종획의 여러 형태들을 통해서 자원의 사유화가 일어나고 있는 많은 공간들을 보여주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서의 토지강탈, 금융자본의 자산거품, 유전자·물·토착지식 등의 사유화―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종획들은 그것들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폐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커먼즈가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의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전통적인 대의민주주의의 방식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들은 감소하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주요 정당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은 유럽연합의 트로이카가 장악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가들은 집회·조합·투표소의 공간들을 넘어서 정치를 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탐구하고 있다. 아나키스트들의 DIY 전통에서 나온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행동은 거주와 점령이라는 형태를 집회와 시위라는 형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며, 저항의 예시적 공간들의 출현을 향하는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그 주목할 만한 사례는 오큐파이 운동, 15M 그리고 인디그나도스이다. 이렇게 커먼즈의 정치는 종획에 대한 공간적 대응으로서 일어난다. 커먼즈 이념은 개념적·물리적 공간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주장하기를 촉발하는 정치적 어법을 제공한다. 저항과 항의의 새로운 형태들―관리와 의사결정에서의 플랫시스템들[누구에게나 접근이 허용된 시스템을 말한다―정리자], 요구 없는 정치[원주 : 낭씨Jean-Luc Nancy가 정치의 이러한 재구상에 대한 더 나아간  논의를 제공하고 그것을 더 정교화한다(James, 2006; Nancy, 1991, 2000)],((James I, 2006, The fragmentary demand: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ean-Luc Nancy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Nancy J-L, 1991, The inoperative community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Minneapolis, MN and London / Nancy J-L, 2000, Being singular plural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 ).)) 대안적 세계의 구축에 초점두기―이 출현함으로써 공통적으로 살기, 공통적으로 만들기, 공통적으로 존재하기라는 새로운 활동들이 종획과 강탈에 대한 직접적 대응으로서 일어나고 있다.

커먼즈의 언어는 무엇보다, 투쟁과 무력함 너머 희망과 약속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언어와 성향을 제공한다. 이 언어는 능동적인 정치를 환경에 대한 관심과 결합시키고 도시 운동을 시골에서의 저항과 결합시키며 지역에서의 투쟁을 전지구적 정치와 결합시킨다. 그 역사적 문화적 반향들이 때로 문제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할 자원을 제공해 준다. 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미래들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커먼즈의 이념은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며 이 서사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길(실망스런 정치적 내러티브들, 생태계 파괴, 양극화와 강탈―이것들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길)을 제공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내러티브에 대안이 되는 대항내러티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도 커먼즈 이념은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수 있으며 조그만 행동들도 중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제공한다.

그러나 이 책의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이 낭만적 서사를 넘어서 사유할 필요, 커먼즈가 출현하는 곳, 커먼즈에 담겨 있는 긴장들, 커먼즈가 행할 수도 있는 새로운 사물화들을 평가할 필요 또한 존재한다. 특히 블렌코우(Claire Blencowe)의 글은 공통적 삶의 유혹적인 상태들이 해방적 충동들을 덫에 가두고 그런 움직임들을 자본축적의 관계들로 재영토화시킬 위험을 일깨워준다. 커먼즈 이념의 매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우리가 ‘종획 이야기들’라고 부르는 우울한 장르를 고려에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들은 영국 의회의 종획 역사들과 이 역사들을 문학이나 구비 전통에서 다시 이야기하는 민속 관행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리어 같은 커먼즈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커먼즈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상실감, 그리고 비록 파열되었으나 폐쇄되지는 않았던 그리고 어느정도는 가난했던, 종획 이전의 삶의 환기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특정 지역에 속하면서도 이리저리 퍼져서 운동들과 지역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데, 흩어진 사건들과 행동들을 한데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 커먼즈의 이러한 다양한 갈래들에 대한 주목이 이 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 사회의 낭만적 상상태들과 테크놀로지·소통·사회성의 가없는 가능성들을 결합하는 ‘커먼즈’라는 용어의 가능성들만이 아니라 문제점도 또한 주목하는 것이다.

이 책의 3부에 실린 글들이 분명히 하듯이, 커먼즈 이념이 정치적·학술적 담론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면 이는 커먼즈를 구성하는 것이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책은 도시 커먼즈,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디지털 커먼즈가 일상 언어에 진입한 상황에서 커먼즈의 더욱 새로운 유형들을 탐구한다. 어떤 저자는 비인간 존재의 참여를 다루고 또 어떤 저자는 공유된 기억의 전지구적 커먼즈를 다루며 다른 어떤 저자는 공통적인 것의 법 공간을 다루고 또 다른 저자는 시간의 측면에서 커먼즈를 다룬다. 3부에서 서술된 집단들과 행동들의 공통적 특징은 (박탈에 대한 저항 말고도) 물리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커먼즈를 다루기보다 공통적인 것을 실천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다루는 태도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적 커머닝의 새로운 실천들은 신자유주의적 풍경 내부에 ‘다른 세계’를 실행하고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주체성들·관계들·공간들을 바꾸고 있다.

실로 2000년대 초에 심대한 전환이 일어났다 커먼즈를 어떤 장소나 자원으로 생각하는 데서 실천의 한 형태로서의 커머닝을 생각하는 데로 전환한 것이다. 집단화를 지역적 규모로 생각하는 수단으로서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형태의 사회조직과 경제조직을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커머닝 이념이 번성했다. 라인보(Peter Linebaugh)의 작업이 이 전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커머닝과 종획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들은 이 책에서 논의되는 바의 커먼즈 이념을 우리의 관심사로 만드는 데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커먼즈의 이념과 커머닝의 정치를 이해하고 활성화하는 몇 가지 방식들로 하여금 서로 대화하게 하려고 한다. 이것들은 개념적 작업과 경험적 사례들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법, 역사, 그리고 일상적 활동에서 이 개념을 고찰함으로써 이 개념이 정치적·이론적 설득력을 획득하는 여러 가지 방식들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주고자 한다. 이 책의 글들은 특히 실제로 존재하는 바의 커먼스와 커머닝에 초점을 둔다. 여기서 커먼즈는 법, 정치적 행동주의, 그리고 일상적 활동의 테크놀로지들을 통해 엄연한 객체들로서 출현한다. 이런 서술들은 자본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방해하거나 그것들을 우연한 것으로서 폭로하는 능력을 공유한다. 그리하여 커먼즈는 대안들이 직접 탐색되고 실험되며 희망의 정치에 되먹여지는 개념적 공간이 된다. 희망의 정치는 이미 실제로 존재하는 비자본주의적 삶을 찾아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종식’(이는 자본주의 이후의 미래를 개념화하는 데 있어서 막다른 골목에 해당한다)을 돌파할 가능한 미래들을 제안한다. 안젤리스(Massimo de Angelis)는 이러한 움직임을 ‘역사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논의했다. 이렇듯 커먼즈의 이념은 현재의 경제적 구조의 우연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성장과 사적 소유의 필연성이라는 담론을 무너뜨린다. 에스떼바(Esteva)가 지적하듯이 커머닝과 커먼즈 운동은 ‘대안적 경제’가 아니라 ‘경제에 대한 대안’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커먼즈에 대해서 쓰고 사유하고 커먼즈를 실행하는 것은 이러한 ‘세계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며, 우리는 커먼즈를 중심으로 하는 문헌들에서 커먼즈 고유의 수행성―경험과 주체성을 사적 소유와 자본의 불가피성에 맞세워 재구조화하는 데서의 수행성―을 감지한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커먼즈 연구의 다섯 분야를 살펴본다. 첫째로 우리는 커먼즈가 환경자원의 한계에 대하여 사유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는 방식을 고찰한다. 둘째로 우리는 도시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도시에서의 공간적 커머닝과 전유의 실천들에 대한 더 최근의 연구들을 살펴본다. 셋째로 우리는 비판적 법연구 분야에서의 작업에 기대어 커먼즈와 법과의 관계를 이해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는 신맑스주의의 성취에 시선을 돌려 커먼즈 이념이 현재의 급진적인 정치사상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를 개괄하고, 마지막으로 커먼즈 논의의 틀을 커머닝 개념을 중심으로 다시 짜고자하는 저자들에 주목한다.

[참고]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Introduction: the promise of the commons
     LEILA DAWNEY, SAMUEL KIRWAN AND JULIAN BRIGSTOCKE

PART I
Materialising the commons
1 Building the commons in eco-communities
     JENNY PICKERILL
2 A politics of the common: revisiting the late nineteenth-century Open Spaces movement through Rancière’s aesthetic lens
     NAOMI MILLNER
3 A spirit of the common: reimagining ‘the common law’ with Jean-Luc Nancy
     DANIEL MATTHEWS

PART II
Commoning
4 The more-than-human commons: from commons to commoning
     PATRICK BRESNIHAN
5 ‘Where’s the trick?’: practices of commoning across a reclaimed shop front
     MARA FERRERI

PART III
An expanded commons
6 Expanding the subject of planning: enacting the relational complexities of more-than-human urban common(er)s
     JONATHAN METZGER
7 Occupy the future
     JULIAN BRIGSTOCKE
8 Imaginaries of a global commons: memories of violence and social justice
     TRACEY SKILLINGTON

PART IV
The capture of the commons
9 The matter of spirituality and the commons
     CLAIRE BLENCOWE
10 Controlled natures: disorder and dissensus in the urban park
     SAMUEL KIRWAN




지역화폐, 사회적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 저자  : Valentin Seehausen, Julio Linares, Inte Gloerich
  • 원문 :  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 https://networkcultures.org/moneylab/2021/04/16/moneylab-11-discussion-on-community-currencies-social-capital-basic-income/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루케아
  • 설명 :  대선의 열기가 서서히 오르는 모양이다. 대의민주주의가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흡수하는 시즌이 오고 있는 것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삶의 문제가 아닌 권력의 문제로서, 삶의 외부에서 삶을 제한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배어들도록 만드는 무대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 ‘할 일’은 시야가 이 무대 안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는 민주주의가 다시 삶 전체로 돌아온 세상을 향해있다. 우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지 좁은 의미의 정치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 전체와 관련된다. 화폐의 영역도 여기에 포함된다. 화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표현일 뿐인데, 이것이 사회적 삶에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적 삶을 제한하는 것이 됨으로써 곧 권력이 되었고 더 나아가 물신(物神)이 되었다. 대안근대를 지향하는 우리로서는 화폐를 권력이 아니라 다시 삶의 힘으로 되돌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화폐의 민주화의 핵심이다. 이번 글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화폐의 민주화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기본소득이나 지역화폐는 이미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것이기에 내용이 새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노력의 사례들을 들어보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소개하려는 텍스트는 2021년 3월 27일 있었던, 머니랩(MoneyLab)의 11차 워크숍 ‘지역화폐, 사회 자본 및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Discussion on Community Currencies, Social Capital & Basic Income)을 녹취한 것이다. 실제 토론의 동영상은 이곳에 가면 볼 수 있다. 토론자인 훌리오는 <써클즈> 소속이고 발렌틴은 <쏘셜코인> 소속이며 진행을 본 인테는 <머니랩> 소속이다. 내용정리이지만 대화체를 유지했으며, 녹취록에서 발견한 몇 개의 오류는 동영상을 보고 수정했다. [정백수]

인테
우리가 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까요? 지역화폐(공동체화폐)와 기본소득은 초창기부터 <머니랩>(Moneylab)의 주제였습니다. 지금 시기(팬데믹 기간)에 적절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 둘 다의 프로젝트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에의 헌신입니다.

홀리오
저는 과테말라 출신 경제인류학자이며 사회활동으로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을 어떻게 실현할지, 그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를 인류학으로 이끌었습니다. 화폐를 다시 생각하는 방식으로서 화폐의 인류학, 가치의 인류학으로 말이죠.

<써클즈>가 가지고 있는 주요 아이디어들 중 하나가, 국가가 기본소득을 제공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기본소득의 창출과 관련된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적 화폐 이론’(DMT)이라 부릅니다. 이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에 대한 약속의 징표를 발행하여 은행 또는 국가와의 관계와 무관하게 상호적으로 빚을 지고 빚에서 벗어납니다.

제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힘의 느낌, 돈을 창출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느낌을 갖게 해주는 것이고, 돈을 창출하는 힘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화폐 취득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화폐발행자로서 느끼게 만들고 경제가 어떻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통제력과 발언권을 갖도록 만드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발렌틴
당신의 말이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는 지역화폐(공동체화폐)가 사회/경제 이론에서 실천성을 얻는 한 가지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화폐시스템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시작했고 정치에 입문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나름의 소규모 대안적인 금융시스템을 시작하는 것은 어떤가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종종 지역화폐를 추동하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요인입니다. 우리, 즉 민중을 위한 세상이죠. 물론 이것은 제 주관적인 견해이지만요.

우리는 지역화폐를 아래로부터 창출할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지역화폐들이 있고 그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화폐시스템(monetary system)을 아래로부터 창출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주는 본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써클즈>(Circles)와 <쏘셜코인>(Social Coin)은 블록체인 테크놀로지로 실험을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화폐들이 화폐를 실험하는 작은 실험실인지도 모르죠.

인테
우리는 야심찬 생각들에서 출발하지만 지역화폐가 그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는 한 가지 방식입니다. 그런데 또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쏘셜 코인’을 사용하기 위해 <써클즈> 커뮤니티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면 그 동기는 무엇일까요? 제가 무엇을 살 수 있을까요?

발렌틴
이것이 지역화폐가 답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이론(집안 살림의 효용을 극대화하기)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 이론은 전적으로 결함이 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진실이 좀 들어있습니다. 공동체에 기여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이익이 공동체에 기여한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 공정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근(Siegen)에서 경제적 이익은 전기차나 전기자전거를 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홀리오
저는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논의, 화폐, 테크놀로지는 다 하나라고 항상 말합니다. 화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사회기반시설, 즉 다른 모든 생산자들, 다른 모든 물류 제공자들, 서비스 제공자들, 돌봄 노동 제공자들, 경제의 일부인 모든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사회구조입니다. 경제는 집안 살림, 즉 오이코스(Oikos)입니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집만이 아니라 지역입니다. 그래서 이곳 베를린에서 우리는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맥주 제조업자와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농부와 함께할 수도 있고 자전거 공유 협동조합과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그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잉여를, 그리고 코로나/위기시기에 충분히 이용되지 않은 자원을 추가적인 유동성(liquidity)으로 변형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술집들이 문을 닫았기에 팔 수 없는 50리터 맥주통을 가지고 있는 맥주회사 소유주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써클즈>에 그것을 팔아서 행복한 상태이며, 맥주를 더 많이 팔기 위해 지역 라디오에 홍보를 하는 데 그 돈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발렌틴이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을 연결시키는 방식을 생각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더 큰 어떤 것을 실제로 부양하고 있는 셈입니다. 잉여가 더 큰 지역사회로 갈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자원들의 흐름을 창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테
지역공동체 건설이 핵심 작업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지역공동체의 신뢰와 네트워크가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공상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의 맥락에서 법정화폐 시스템 및 세금 시스템과 함께 존재합니다. 당신의 프로젝트는 더 광범위한 시스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합니까? 이 프로젝트는 고립된 지역들로서 존재하나요? 아니면 전체시스템이 바뀌는 것을 보고 싶은 건가요?

홀리오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화폐란 사회에 대한 일정한 요구의 표현이라는 점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에서 사용하는 화폐의 유형들이 다양한 차원들―상상력, 무급노동, 유급노동―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화폐형태로 반영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중요한 것은, 화폐를 다루고 정치적인 싸움에 뛰어듦으로써 우리는 바로 화폐시스템 전체의 헤게모니에 도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발렌틴과 함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장(市長)들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창출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는 일군의 다양한 시스템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써클즈>는 그것들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지역의 조건과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고 사용될 수 있는 일단의 도구들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일국의 국가시스템과 함께 공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미국의 사례가 항상 적절한데, 미국에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시스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광범위한 수준에서 공존하는, 국가보다 하위의 시스템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지자체들이 폭넓은 스펙트럼의 이익을 보완하고 조율하는 방식으로서 지역의 기본소득을 지역화폐로 발행하여 잠재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지급할 수 있습니다.

저로 말하자면, 저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국민국가를 믿지 않고 자본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폐지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순간 어떤 상황에 있는지에 대하여 실질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이 구조들이 몰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제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들이 더 잘 몰락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좌중의 웃음]

발렌틴
토론이 시작된지 20분이 지나서 당신이 스스로 아나키스트임을 이렇게 폭로하는 것이 정말 좋군요. 저는 동조하는 편입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방식이고 힘을 지방자치제 수준으로 되돌려주는 방식이니까요. 국가들이 있고 국제적인 기구들이 있습니다. 아나키스트가 아닌 저는 그것들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또한 저는 금융시스템이 사회의 소수에게 복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0%나 1%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만, 50%의 사람들은  실질적인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전 세계에서 극빈 상태에 있는 사람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 50%일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한 식량이 없고 그것이 제 관점에서는 재앙입니다.

신자유주의자로 유명한 하이에크는 탈국가화된 화폐라는 생각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화폐가 탈국가화되어 모든 사람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봐요, 이것이 발렌틴-코인입니다, 사용해보세요’라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요? 무슨 일로 그러시죠?’라고 말할 거구요. 그러나 예를 들어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코인을 발행한다면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베를린 시에 힘이 있음을 의미할 것이고 화폐 주조로 얻는 이익은 실제로 베를린으로, 지방자치단체로, 작은 마을들과 가난한 시골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역의 화폐로 실험하기 시작할 경우 이것은 그 지역사회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멋진 프로젝트가 더 광범위한 맥락에 가져올 수 있는 전환과 관련하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입니다. 지역화폐들이 수백 년 동안은 아니더라도 수십 년 동안 존재했지만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부분 불법이었는데, 그러다가 블록체인이 등장했습니다. 블록체인은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한 화폐를 발행했는데, 이는 블록체인이 매우 탈중심화되어 있어서 어떤 정부나 권력도 거기에 실제로 개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국가들이 바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암호화폐를 합법화하고 규제하는 것입니다. 국가들은 이것이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그것을 시험하고 통제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암호화폐는 합법적이 되고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이 올해 들어와서 제가 흥미롭다고 느낀 점입니다. 규제자들과 국가들이 지역화폐가 실제로 존재하기 위한 법적 틀을 만들고 있다니 말입니다. 저는 지역화폐를 관철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로비스트입니다. 지역화폐의 관철이 제가 이곳에 있는 이유이고, 제가 보고 싶은 정책 변화입니다.

인테
하지만 지근에서 <쏘셜코인>은 블록체인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당신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특수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발렌틴
공동체는 그때그때 사용가능한 테크놀로지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가령 뵈어글(Wörgl)—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유명한 사례죠—의 기술은 ‘우리가 지폐를 발행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스탬프를 찍는다’였습니다.[정리자―1932년 오스트리아의 도시 뵈어글에서 대공황에 대응하여 지역화폐(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는 화폐소지자들이 빨리 사용하도록 자극하기 위해 매달 1%의 가치가 상실되도록 고안되었다. 이 지역화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도 유사한 실험들을 계획했다. 이 지역화폐는 1933년 말 행정법원에 의해 금지되었다. 텍스트에서 “스탬프”는 지폐에 찍는 도장을 가리킨다. (첨부한 사진 참조) 첨부한 사진은 자유이용저작물이며 그 출처는 https://en.wikipedia.org/wiki/W%C3%B6rgl#/media/File:Freigeld1.jpg이다.] 그때 서비스 제공은 중앙집권화되어 있었고 그 핵심은 당신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가서 지폐를 원장에서 삭제하면 화폐의 효력이 정지된다는 것입니다. 블록체인은 추적하기가 불가능하고 효력을 정지시키기 불가능하게 만든 테크놀로지일 뿐입니다. 탈중심화된 화폐가 이렇듯 기술로 작동하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저는 블록체인 자체의 힘을 믿지 않습니다. 많은 지역화폐들과 다양한 토큰들이 있는 세상이 오면 우리는 열광하겠지만, 여기에 블록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역화폐를 금지해온 규칙을 깨기 위해서는 블록체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우리를 신뢰하고 우리의 파트너들을 신뢰하며 얼굴을 아는 사람들을 신뢰하고 인간을 신뢰한다면, 블록체인이 필요 없습니다.

인테
그러면 당신은 블록체인의 유무와 무관하게 열린 공간이 창출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군요.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혜택을, 사회적인 맥락을 다루었는데요, 이제는 당신들의 가장 유토피아적인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워크숍에서 당신들은 당신들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무엇이 당신들을 걱정스럽게 만드는지에 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미래에 무엇이 가능할지,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원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미래의 지평 위에 있는 이 지점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겠죠.

발렌틴
유토피아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아주 많은 측면들이 담겨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좋아합니다. 일국적 수준에서 저는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의 광팬입니다. 국제적인 수준에서 세계정부가 있다면,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으로서 재분배되는 전지구적인 부유세가 생긴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이 될 것입니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금융 시스템의 추세가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 덕분에 평등 쪽으로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역화폐 로비스트의 관점에서 저는 안전한 법적 환경을 갖고 싶습니다. 저는 법 문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만,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복잡하군요. 우리는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제 생각에 법적 문제가 지역화폐와 관련해서는 여전히 크게 미흡한 사안입니다. ‘당신에게 지역화폐가 있고 그것이 백만 파운드 미만이면 우리는 그것을 규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넘으면 우리가 규제할 것이다’와 같은 구조가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정치로부터 요구하는 어떤 것입니다.

인테
홀리오는 미래 정부에 관해 이와는 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겠죠?

홀리오
어려운 문제죠. 이것은 정치경제와 많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블록체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법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테크놀로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의 실제적인 핵심은 힘, 즉 경제적 힘과 정치적 힘(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입니다.  법 문제는 매우 재미있는데, 이는 오늘날 법적으로는 국가들 말고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체가 민간은행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은행 면허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신이 그들의 자산을 처리할 권리가, 그들의 노동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럼으로써 이 불평등한 권력구조들을 창출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부유세와 보편적 기본소득은 놀라운 것이라는 발렌틴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제가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적인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생각할 때 그곳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화폐를 민주화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화폐를 영토로 본다면, 우리가 화폐를 민주화한다고 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지역적으로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산자들 사이에서 경제적 관계, 정치적 관계, 생태적 관계를 재(再)지역화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당신은 권력의 실제적인 탈중심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 즉 권력의 탈중심화가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써클즈>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원칙에 관해 이야기 합니다. 로컬리즘(전지구적 문제의 지역적 해결), 권력의 탈중심화, 지속가능성(관계들을 더 지역적으로 묶고 더 상호의존적인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 방법들을 찾는 것) 그리고 민주적인 연합주의가 그것입니다. 민주적인 의회들이 서로 연합할 수 있지만 정치적 힘은 항상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그 규모를 확대해야 할 매우 실천적인 메커니즘이며, 이렇게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장 실천적인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화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관련됩니다. 화폐를 넘어서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삶의 민주화입니다. 이것은 권력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권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가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은 재앙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은 권력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조직화된 대중들을 통해서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인테
제가 채팅을 읽어봤는데 여기에 사회적 재생산에 관한 질문이 있습니다. 지역화폐와 보편적 기본소득이 어떻게 우리가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나요? 어떤 가치들이 시스템에서 작동하는 토큰 형태로 재현됩니까? 그 기획은 어떻게 공동체와 공존합니까? 그것이 어때야 할지에 관한 생각들이 달라서 서로 경쟁한다면 어떻게 되죠? 그 과정은 어떻게 진행됩니까? 그리고 토큰 같은 아주 실질적이고 코드에 기반을 둔 어떤 것과 창출하고자 하는 사회와 같은 추상적인 문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지요?

홀리오
사회적 재생산의 측면에서 우리는 가족, 특히 여성들에게 많은 돌봄의 부담이 부과됨으로써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폭력이 또한 증가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기본소득은 많은 착취적인 관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길입니다.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돌보며 그들을 둘러싼 사회의 환경을 돌볼 수 있는 소득 기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온전한’ 기본소득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시간을 팔지 않고, 임금을 위해 자신을 임대하지 않고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어떤 것입니다.

오늘날 화폐 시스템은 생산영역에서 비롯합니다. 고용주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은 일하러 갑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임금을 가정으로 가져갑니다. 커먼즈에는 화폐가 없습니다. 사회적 재생산이 번성할 수 있게 해주는 화폐-커먼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구축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커먼즈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적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우리의 돌봄 실천들, 사회적 재생산의 실천들이 번성할 수 있는 가치체계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마존>과 대규모 식품기업들 같은 거대 기업들에의 의존을 통해 더욱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에서부터 우리의 땅까지,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약속까지 우리가 지켜야 할 영토를 창출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인테
발렌틴 씨, <쏘셜코인>은 어떻습니까?

발렌틴
사회가 어떻게 실제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화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핵심인, 홀리오가 내 마음에 그려준 큰 그림에 대해 생각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가치들의 문제로 한정하자면··· 저는 우리가 지근에서 사용하는 이 화폐—‘쏘셜 코인’—에 붙일 명칭을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공통 화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는 전기차(앞으로 세 대를 구비할 예정입니다)와 전기자전거라는 공통재(커먼즈)가 있습니다. 제가 일하는 단체는 이 공통재를, 이 전기 차량들을 지역민들에게 보급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급할 도구로서 화폐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실험중입니다. 첫 번째 아이디어는 자원봉사를 한 사람들에게 전기차에 사용할 수 있는 코인을 나눠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시행할 계획인데 이는 모든 인간이 이 공유자원을 소비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커먼즈와 연관된 가치들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재산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유재산과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커먼즈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것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인테
커먼즈로서의 화폐라는 생각, 저는 이것을 좀 더 설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홀리오, 몇 분이면 설명할 수 있겠죠? 돈은 보통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인데···

홀리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노동•토지•화폐라는 세 가지 가짜 상품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가짜 상품들로 생각하는 점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이 세 가지가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노동시간, 노동, 몸이 항상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가 항상 개인소유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텃밭이 언제나 상품으로 존재한 것은 아닙니다. 화폐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폐는 부채이며 신용관계이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서로에게 하는 약속과 같은 유형의 사회적 관계입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상품화되었고 개인 소유의 상품이 되었습니다. 맑스의 정의를 따른다면, 자본주의를 M-C-M′으로 정의할 것입니다. 화폐가 더 많은 화폐를 만드는 것, 화폐를 팔아 상품을 사서 그것으로 화폐를 더 많이 버는 것이죠.

가치를 나타내는 징표(토큰)의 사물화 또는 물신화가 발생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것을 화폐라고 부르는데, 화폐는 이자를 낳는 부채 등의 과정을 통해서 확장하고 우리는 이것을 성장 등등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지구를 망치는 것입니다. 커먼즈를 희생하면서, 토지를 희생하면서, 우리의 몸을 희생하면서, 지구의 가치를 희생하면서 일어나는 이 물신의 증가, 화폐라는 신의 증가가 지구를 망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화폐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통화(commonification)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의 문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부 공동소유자인 곳에서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사유재산이 없는 곳에서, 화폐가 민간은행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국가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곳에서, 화폐가 우리가 발행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실제로 공유자원인 곳에서, 자원의 유형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화폐를 창출할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리면서 우리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지대(자산소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현재로서는 이것을 어떻게 할 힘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화폐의 공통화가 기본소득으로 주어질 때 우리 몸은 임금노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고 상품으로서의 화폐 또한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토지를 탈상품화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개인소유의 상품으로부터 공통재로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현 자본주의적인 위기에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오고 있는 주된 이론적 핵심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가야 합니다. 화폐는 수메르의 지구라트[정리자―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전] 이후로 줄곧 지난 5천년 이상 동안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채무자로 만들어서 속박상태에 묶어두었던 것입니다. 그 기나긴 역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군산복합체로 죽 이어집니다. 미국 군대는 세계에서 오염을 제일 많이 발생시키며 미국 달러로 자금을 마련합니다. 민중이 화폐를 창출하는 힘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는 문제의 근원으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인테
마무리할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만 사람들이 녹화된 토론을 보고자 할 경우에 대비해서 앞으로 워크숍에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발언할 시간을 각각 드리고 싶습니다.

발렌틴
워크숍의 제목은 ‘비정부기구(NGO)로서 지역화폐를 시작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NGO로서 이 화폐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직접해보는 워크숍이 될 것입니다. 워크숍에서 저는 제가 지역화폐를 시작하면서 겪었던 모든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 알려드리는 바이지만 우리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멉니다. ‘이 발걸음을 뒤따르시면 지역화폐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가 아닙니다. 저는 다만 제 경험을 공유할 것입니다. 저는 실천적 경험을 가지고 있는 워크숍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과 실제로 토론을 하고 싶고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이 어떤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들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 토론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홀리오
우선 저는 정치적 힘(권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고 <써클즈>가 교환과 상호의무의 측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감을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화폐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최근에 출판된 안내서를 죽 훑어볼 것입니다. 이 안내서는 <써클즈>가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또한 오늘 제가 말한 몇 가지 원칙들을 설명하며 기본적으로 지역에서의 조직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직화는 생산자들과 상인들의 회로에서 시작해서 그들이 고용하는 노동자들로, 거기서 다시 공동체 전체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매우 실천적인 작업이며 우리가 매달 마지막 일요일에 가지는 회의에서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든 이 토론을 듣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함께하는 것을 환영합니다. 시작하는 법에 대한 감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