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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변화에 효과적인 12 지점


[설명]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원칙적으로 독립적인 그런 운동/활동이 무슨 힘이 있는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받는 경우가 있다. 아마 질문을 직접 하지는 않은 많은 사람들도 공유하는 의문일 것이다. 기업의 형태를 띠거나 국가의 권력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무언가 현실적인 것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머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에 자본과 국가가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만든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아무래도 낯설고 이질적일 것이며, 심지어는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자본과 국가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당연시될수록 자본과 국가의 존재는 더욱 강화되고 그 영향으로 다시 사람들의 머릿속에서의 존재도 더 강화된다. 이른바 ‘자기강화적’ ‘양성 피드백’이다.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양성 피드백’이다. 환경학자이자 시스템 이론가인 메도우즈(Donella Meadows)는 이 피드백이 우세한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는 기업에 의해 설계되고 기업에 의해 그리고 기업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규칙들을 가진 시스템이다. 이 규칙들은 사회의 다른 부문으로부터 오는 거의 모든 피드백을 배제한다. 그 회의들의 대부분은 심지어는 언론에게도 닫혀있다(정보의 흐름도 없고 피드백도 없다). 이 시스템은 국가들에게 ‘바닥으로 경주’하는 양성 피드백 고리들 강제하여 국가들이 기업투자의 유치를 위해 서로 앞 다투어 환경적·사회적 안전장치를 약화시키게 한다. 이는 ‘성공한 자에게 성공을’이라는 고리들을 풀어놓는 처방이며 그 결과로 권력의 엄청난 축적이 이루어지고 소련처럼 혹은 그와 유사한 시스템 상의 이유로 스스로를 파괴할 중앙집중화된 거대한 계획시스템들이 창출되었다.(“Leverage Points ―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

메도우즈는 1990년대 초 무조건적 성장을 목표로 하는 거대한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하는 한 회의에서 이 시스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음을 직감하고 그 즉석에서 9개의 지렛점들, 즉 거기 개입할 경우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지점들을 효과 순으로 정리하고, 그 후 다시 “Leverage Points: Places to Intervene in a System”(1999)에서 12개로 늘려 정리한다. (여전히 변경될 수 있을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최종 정리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근대라는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형태를 실현할 대안근대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은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는 자기강화적 양성 피드백으로부터 탈출하고 또 다른 이들이 탈출하는 것을 돕기 위해서 메도우즈의 정리를 전체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으며, 가장 효과적인 개입지점들 몇 개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내용 정리]

이 12개를 효과가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가는 순으로 살펴보자.

12. 상수들, 매개변수들, 숫자들 (지원금, 세금, 표준)

가장 효과가 낮은 것인데, 주목의 90%, 아니 95%, 아니 99%가 보통 여기로 향해진다. [이것들이 가장 ‘힘’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리라.] 국가부채의 증감, 임금의 증감. 가격의 증감, 최저임금. 직원의 해고, 정치인들의 교체 등이 그 사례이다. 가령 밥 돌 대신 클린턴을 뽑은 것은 다르긴 다르지만 그렇게 다르지는 않다. 모든 대통령은 동일한 시스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매개변수들이 행동을 바꾸는 경우는 드물다. 선거운동 후원금에 어떤 상한선을 설정하든, 정치를 깨끗하게 만들지 못한다. 매개변수들은 더 효과가 있는 항목들을 발동시키는 범위에 진입할 경우에만 효과적인 지렛점들이 된다. 대체로 숫자는 땀을 흘릴 가치가 없다.

11. 흐름에 비례한 버퍼( 및 기타 안정화하는 비축)의 크기

‘버퍼’란 안정화하는 효과를 가진 비축(stock)이다. 은행에 저금을 하는 것이 바로 비축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비축의 능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종종 시스템을 안정화할 수 있다. 그러나 비축은 물리적인 것이기에 바꾸기가 어렵다.

10. 물질적 비축 및 흐름의 구조(교통망, 인구연령구조 등)

어떤 시스템에서 물리적 구조는 결정적이지만 지렛점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을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지렛점은 그 구조의 원래의 설계에 들어있다. 즉 설계 단계에서 바꾸어야 한다. 일단 구조가 구축되면 그 한계 등을 이해하는 데 그친다. [이른바 ‘알박기’는 구조가 한 번 결정되면 바꾸기 어려운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일이라면 그 설계가 충분히 길어서 그 단계에서 많은 수정과 보완이 가능해야 한다.]

9. 시스템 변화 속도에 비례한 지체(delay)의 길이

온수가 지하에서 끓여지는 호텔에서 4층 욕조에 뜨거운 물이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층까지 올라오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길다. 지체가 더 길어지는 것이다. 장기적 지체를 가진 시스템은 단기적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소련이나 제너럴모터스 같은, 결정에서 실행까지 오래 걸리는 거대한 중앙계획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것을 넘어가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일어나는 위험지점인 ‘문턱’(threshold)을 가진 시스템에 지나치게 긴 지체가 일어나면 그 문턱을 넘어가서 붕괴를 낳을 수 있다. 지체는 종종 쉽게 바꾸지 못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데 걸리는 시간, 숲이 형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 등은 바꿀 수 없다. 그래서 경제성장을 늦추는 것이 기술발전을 빠르게 하는 것이나 시장가격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지렛점이다. 시스템의 성장을 늦추고 기술과 가격이 이를 따라잡도록 하는 것이 더 큰 지렛점이다.

8. 음성 피드백 고리가 어떤 영향력을 수정하는 힘

(여기서부터는 시스템의 물리적 부분에서 정보와 통제 부분으로 이동한다. 후자의 부분에서 더 많은 지렛점들이 발견된다.) 음성 피드백 고리는 시스템의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가령 에어컨의 온도조절. 기업들과 정부들은 가격이라는 지렛점에 치명적으로 끌려있다. 물론 잘못된 방향으로 이 지렛점을 밀고 있다. 이들은 정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비틂으로써 시장 신호들의 피드백 능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도 그 한 사례이다. 이 민주주의는 중앙집중화된 매스컴의 세뇌능력이 출현하기 전에 더 잘 작동했다. 어장은 레이더 탐지와 저인망으로 인해서 음성 피드백 능력이 사라지고 고갈되었다.

7. 양성 피드백 고리들이 가진 힘

음성 피드백 고리가 자기수정적이라면, 양성 피드백 고리는 자기강화적이다. 양성 피드백에서 오는 이득을 감소시키는 것(성장의 늦춤)이 보통 음성 고리들의 강화보다 더 강력한 지렛점이며[무절제로 난 탈을 고치는 것보다 절제로 탈을 줄이는 것이 좋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양성 피드백 고리가 폭주하도록 놔두는 것보다 더 좋다. 인구와 경제성장률이 지렛점인 것은, 그것을 늦추는 것이 많은 음성적 고리들(기술, 시장 등등)이 기능할 시간을 주기 때문이다. 급속하게 돌아가는 양성 피드백 고리들이 촉발하는 가장 흥미로운 작용은 혼란(chaos)[유기체로 따지자면 사망에 해당할 것이다]이다. 신자유주의의 ‘성공한 자에게 성공을’ 고리( “success to the successful” loop [부익부 빈익빈]).

6. 정보 흐름의 구조(정보에의 접근 가진 경우와 가지지 못한 경우)

전기계량기가 현관에 설치된 가구들과 지하에 설치된 가구들이 경우 다른 변화가 없어도 전자의 가구들의 전기 소비가 후자의 가구들이 선기소비보다 30% 낮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전에 정보가 안 가던 곳에 정보를 보낸 것만으로 사람들이 다르게 행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매개변수 조정도 아니고 기존의 고리의 강화나 약화도 아니라 ‘새로운 고리’이다. 실종

1986년 미국의 ‘Toxic Release Inventory’(유독물질 방출 목록)는 공장들이 방출하는 대기오염물질을 매년 보고하는 제도이다. 방출을 규제하는 법도 없고 벌금도 없고 안전수준을 정한 것도 아닌데 방출양이 1990년 경에 40% 감소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방출했는데 시민들이 분노해서가 아니라 기업들이 부끄러워서였다. 이 명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방출량을 90% 주인 회사도 있다.

실종 피드백 고리가 시스템 기능장애의 가장 흔한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정보를 추가하거나 복원하는 것이 이에 대한 강력한 개입이 될 수 있으며 보통 물리적 기반시설을 재구축하는 것보다 더 쉽고 저렴할 수 있다. 물고기 개체수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 잡을수록 개체수가 줄고 줄면 비싸지며 따라서 더 잡으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왜곡된 피드백이 계속되면 어장이 붕괴된다.

피드백을 강제할 수도 있다. 납세자가 세금이 쓰일 곳을 적어내기. 도시나 회사에 유입되는 상수관을 방출되는 하수관보다 하류에 두게 하기. 핵발전에 투자한 사람들의 마당에 폐기물을 저장하기. 선전포고하는 정치가들을 전선에서 복무하게 하기.

인간은 결정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시스템에서 오는 경향을 가진다. 이 때문에 실종된 피드백 고리들이 많은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런 종류의 피드백이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권력에게는 인기가 없다. 권력으로 하여금 이런 피드백이 일어나도록 허용하게 만들 수 있다면 효과가 있다.

5. 시스템의 규칙 (인센티브, 처벌, 제한 등)

시스템의 규칙은 그 범위, 경계, 자유의 정도를 규정한다. 헌법은 사회적 규칙 가운데 강력한 것이다. 열역학 제2법칙 같은 물리적 법칙은 절대적이다. 법률, 처벌, 인센티브, 비공식적인 사회적 동의는 나열된 순서대로 약한 규칙들이다.

규칙의 힘은 규칙을 바꾸는 것을 상상할 때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학생들이 선생을 평가하면 어떨까? 학위가 없으면 어떨까? 무언가 배우고 싶으면 대학에 오고 배웠으면 나가고. 교수들에게 학술논문보다도 실제 세계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능력에 따라 정년보장을 해주면 어떨까? 이렇게 가정해 볼 때 우리는 규칙의 힘을 이해하게 된다. 규칙은 높은 지렛점이다. 규칙을 장악하는 힘이 진짜 힘이다. 새로운 무역체제는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설계하고 운영하는 규칙들이 작동하는 체계이다. 그래서 위험하고 스스로 파괴될 수 있다.

4. 시스템 구조를 추가하거나 변화시키거나 진화시키거나 자기조직화하는 힘

이는 새로운 구조와 행동을 창출하는 것이다. 그 힘은 생물학에서는 진화라고 부르고 인간사회에서는 기술발전 혹은 사회혁명이라고 부른다. 시스템 이론의 용어로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이다. 자기조직화란 현재 목록의 더 하위에 있는 항목들(12-5)을 어느 것이든지 바꾸는 것(완전히 새로운 물리적 구조의 추가, 새로운 음성·양성 고리들의 추가, 새로운 규칙들의 작성)을 의미한다. 자기조직화의 능력은 가장 강한 형태의 시스템 복원력이다. 진화 능력을 갖춘 시스템은 스스로를 바꿈으로써 거의 모든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의 면역 체계는 이전에는 마주치지 못한 상해에 대한 새로운 대응을 개발해낼 힘이 있다. 인간의 두뇌는 생로운 정보를 받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내놓을 수 있다.

자기조직화의 힘은 매우 놀라워서 우리는 그것을 하늘이 준 신비로운 양식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경제학자들은 종종 테크놀로지를 말 그대로 하늘이 준 음식으로 간주한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자연의 놀라운 다양성을 한결같이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신적인 창조자만이 그러한 창조물을 산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더 연구한 결과 신이 진화의 기적을 산출할 필요가 없었음이 드러났다. 신은 그저 자기조직화를 위한 놀랍도록 현명한 규칙들을 작성하기만 하면 되었다.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무엇을 시스템이 추가하거나 제거할 수 있는지를 기본적으로 제어하는 규칙들이다. 단순한 알고리즘에서 복잡한 패턴들이 파생될 수 있다. (실제 현실의 알고리즘이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자기조직화는 기본적으로 진화의 원료(비축된 정보)와 실험수단(새 패턴의 선발 및 시험)의 결합이다.

진화의 원료 다양성의 한 원천 선택 메커니즘
생물학 DNA 자연발생적 변이 다윈적 선택
기술 축적된 이해 인간의 창조성 시장과 정부가 보상해주는 것/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모든 것

자기조직화의 힘을 이해하면 왜 생물학자들이 생물다양성을 숭배하는 것이 경제학자들이 기술을 숭배하는 것보다 훨씬 더한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종들이 멸종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시스템 차원의 범죄이다. 이는 마치 특정 과학 학술지 전부 혹은 특정 종류의 과학자들 전부를 제멋대로 제거하는 것과 같다.

문화는 사회적 진화가 일어날 수 있는 비축고이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다람쥐들의 모든 유전자 변이의 소중함을 이해하면서도 문화가 가진 소중한 진화적 잠재력은 훨씬 덜 알아본다. 이는 모든 문화가 자신의 문화가 가장 우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일한 문화에 대한 강조가 학습을 폐쇄한다. 실험을 경멸하고 혁신의 원료를 제거하는 시스템은 장기적으로 보면 몰락하게 되어 있다.

3. 시스템의 목적

유전자 조작은 그것이 어느 목적에 복무하는지를 모르면 좋은지 나쁜지를 말하기 힘들다. 모든 피드백 고리들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더 크고 덜 분명한 지렛점으로서의 목적이 있다. 전체 시스템의 목적이다. 전체 시스템의 목적은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의 목적이 아니다. 누군가가 말하는 데서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행하는 것에서 파생되는 목적이다. 생존, 복원, 차이화, 진화가 시스템 수준의 목적이다.

시스템 내의 사람들조차도 종종 그들이 복무하고 있는 시스템 수준의 목적을 모른다. ‘이윤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대부분의 기업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하나의 규칙, 게임에 남아있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조건일 뿐이다. 게임의 핵심은 무엇인가? 주주들의 부의 증가이다. 이것이 기업의 행동을 형성하는 강력한 목적이다. 그러나 훨씬 더 큰 것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누구도 지지하지 않지만, 체계의 실제적 행동을 보면 명확한 것이다. 성장하는 것, 시장 점유율을 증가시키는 것, 세상을 더욱더 기업의 지배 아래 놓는 것. 모든 것을 삼키는 기업의 목적. 이는 바로 암세포의 목적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는 모든 살아있는 개체군의 목적이지만, 나쁜 목적이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음성 피드백 고리들에 의해서 균형이 잡혀야 한다. 시장을 경쟁적인 상태로 두는 목적이 경쟁자들을 제거하려는, 그리고 소비자들을 세뇌하고 공급자들을 삼키려는 각 기업의 목적을 제압해야 한다. 이는 생태계에서 개체군들을 균형상태에서 진화하는 것으로 두는 목적이 각 개체군이 무한정 생식하고자 하는 목적을 제압해야 하는 것과 같다.

이 이후에 메도우즈는, 사람을 바꾸는 것은 낮은 수준의 개입이라고 말한 것에 예외가 있는데, 한 사람이 체계의 목적을 바꾸는 힘을 가지는 경우가 그렇다고 한다. 메도우즈는 미국과 나치 독일의 지도자들을 예로 드는데, 특히 레이건을 길게 설명한다. 레이건은 정부가 국민을 돕거나 국민이 정부를 돕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정부를 국민의 등에서 떨어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것이 먹혔다는 것이다. 거대한 시스템 변화와 기업권력이 정부보다 우월해진 상황으로 인해서 그가 그럴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도넬라 본인의 주장도 이쪽이다), 레이건 이후 미국의, 심지어는 세계의 담론이 철저하게 변한 점이 새로운 시스템의 목적을 표명하고 반복하고 지지하고 강조하는 높은 지렛점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한다.

2. 시스템(그 목적, 구조, 규칙, 지체, 매개변수 등)을 발생시킨 사고방식이나 패러다임

거대한 진술되지 않은 전제들이 한 사회의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가장 깊은 믿음들이다. 이런 믿음들을 사례들은 이렇다. ① 명사와 동사 사이에 차이가 있다. ② 화폐는 무언가 실질적인 것을 측정하며 실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따라서 보수를 덜 받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가치가 덜하다). ③ 성장은 좋은 것이다. ④ 자연은 인간의 목적으로 전환될 자원의 비축고이다. ⑤ 진화는 호모사피엔스의 등장과 함께 멈추었다. ⑥ 토지는 ‘소유’될 수 있다.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생각을 조금만 확장해도 외부 사물들의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님을 보여준 코페르니쿠스든 물질과 에너지가 변환 가능함을 가설화한 아인슈타인이든 시스템에 패러다임의 수준에서 개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시스템을 총체적으로 변형하는 지렛점을 건드린 것이다.

한 개인의 경우에는 이것이 1/1000초 만에 일어날 수 있다. 머릿속에서 한 번만 딸깍하면 눈에 씌운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고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그러니 낡은 패러다임의 이상(異常)과 실패를 지적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더 크고 확신 있게 말하라.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사람들을 공적이고 힘 있는 위치에 배치하라. 수구적인 자들에게는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활동적으로 변화를 낳는 행동가들, 그리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라.

1. 패러다임을 넘어서는 힘

이는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보다 상위의 지렛점이다. 아무런 패러다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 그 어떤 패러다임도 ‘진실’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모든 세계관은 방대한 우주에 대한 제한된 이해임을 깨닫는 것이다. 패러다임들이 있다는 패러다임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임을 보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몰라’(Not Knowing)의 상태[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그저 깨어만 있는 상태, 공적영지(空寂靈知)의 상태]에 드는 것이다. 패러다임보다 우월한 이 경지에서 사람들은 집착을 벗어던지고 상락(常樂) 속에 살며 제국을 무너뜨리고 갇히거나·화형당하거나·사살당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며, 수천 년을 지속하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도넬라는 마지막으로 주의를 준다. 마법적인 지렛점들에는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어떤 시스템을 엄밀하게 분석하는 일이 되었든 아니면 자신의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몰라’의 상태에 들어가는 일이 되었든. 그녀의 마지막으로 “지렛점들을 미는 것”보다는 “전략적으로, 깊숙이, 미친 듯이 내려놓는 것”(strategically, profoundly, madly letting go)을 더 우위에 놓으며 글을 맺는다.


[논평]

이러한 지렛점들의 효과에 따른 순위를 볼 때(물론 메도우즈는 이 순위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논의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두 가지 특성이 잡힌다. ① 현실적인 것(the actual)에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 (들뢰즈가 이미 실재의 변화는 잠재적 차원에서 잉태되어 현실적 차원에 현실화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철학적으로 명확히 한 바 있다.) ② 달리 말하자면, 객체적인 것에서 주체적인 것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③ 또 달리 말하자면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것에서 문화적인 것(삶정치적인 것)으로 갈수록 효과적이다.

이러한 특성은 1980년대에 청년들의 변혁운동을 지배했던 레닌주의의 이른바 ‘객관주의’―객관적 현실의 인식과 그에 따른 객관적 현실의 변형, 가장 핵심적으로는 국가권력의 장악―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푸꼬, 들뢰즈, 네그리의 철학에서 이러한 객관주의(자연과학으로 보자면 전통적 물리학에 상응하는 사고방식)는 시원하게 극복된다. 네그리·하트는 『공통체』에서는 주체의 강화를 현실변형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제시하고 있다. (레닌의 객관주의에 기반을 둔 전술이 이른바 상대의 ‘약한 고리’의 타격을 중점으로 삼는다면, 네그리·하트에게서는 주체의 ‘강한 고리’의 강화가 핵심이다.)

두 번째 기준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무기와 어떤 형태의 폭력이 다중 자신에게 가장 이로운 영향을 미치는가이다. 전쟁의 수행은 언제나 주체성의 생산을 수반한다. 그리고 종종 적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투쟁을 수행하는 이들 자신에게 가장 해로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 여하튼 혁명적 투쟁에서 무기와 폭력의 형태를 평가함에 있어서, 적에게 미치는 효과의 문제는 언제나 다중과 다중의 제도를 건설하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의 문제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공통체』 503-4)

나는 몇 년 전 커먼즈 운동을 주제로 하는 한 강연에서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유형의 질문을 받고 김수영의 시 한 구절,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꽃잎(一)」)의 도움을 받아 대답한 적이 있다. 이 시에서 ‘꽃잎’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할 수 없지만, 인간의 정신적 성취와 관련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 잎의 꽃잎”을 ‘한 편의 시’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어떻게 한 편의 시가 바위 같이 단단한 것―국가와 자본의 권력 등등―을 ‘뭉갤’ 수 있을까? 이 점을 생각해보자는 것이 내 대답의 (그 디테일은 다 기억이 안 나지만) 취지였다. 내가 그 당시 메도우즈의 ‘12개의 개입지점’을 알았더라면 더 잘 대답할 수 있었으리라는 하는 아쉬움이 든다. 당시 그 질문을 한 분은 내 대답에 설득이 되었다기보다 ‘당황’한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옳든 그르든, 적실하든 부적실하든, 자신이 만든 것이든 주입받은 것이든, 어떤 목적, 패러다임, 의도 등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이 목적, 패러다임, 의도 등의 변형이 세상의 변형에 가장 핵심적일 수밖에 없다. 현대의 자본과 국가가 자신들의 힘으로 위력을 떨친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다. 다른 많은 생각이 가능하다. 예컨대 나는 자본이 ‘자본주의적 주체성’(가따리의 말)을 구축함으로써 생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이 주체성을 강화시키는 동시에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목적과 욕망을 자신의 목적과 욕망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없다면 자본은 생존하지 못한다. 자본과 국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실질적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 어느 사이인지도 모르게 스며들어가 자리잡은 바로 이 생각이 자본과 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큰 힘이다.

자신의 활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외부에 있는 권위에 의존하는 것을 스피노자는 ‘노예상태’라고 불렀다. 예컨대 “주권을 한 사람에게 이전함으로써 증진되는 것은 노예상태이지 평화가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정신들의 연합과 조화이기 때문이다.”(『정치론』) 노예가 노예로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행동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일밖에 없다. 이미 해방된 자유인만이 새로운 삶형태를 생산한다.

메도우즈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내려놓음’(공적영지, 혹은 견성의 경지)은 신비화된 어떤 것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고 할 때의 그런 상태이다. 어떤 새로운 사유나 행동을 하기 이전에 이전의 사유방식과 행동방식을 털어내는 것에 해당한다. 공적영지의 상태 그 자체를 추구하는 소승적 태도에 그치지 않고 공적영지를 새로운 창조의 원천으로 삼는 대승적 태도로 나아가는 것이 관건이다. 니체가 수동적 허무주의(passive nihilism[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능동적 허무주의(active nihilism[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다])로 나아간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네그리도 ‘진공’이라는 말로 이러한 ‘내려놓음’을 포착한다.

그래서 사건의 문제로 즉 차이들과 특이성들의 다중이 어떻게 자신을 결정의 진공(眞空, vuoto) 앞에 제시하는가의 분석(인정)으로 관심을 돌려야 한다. 공통적인 결정의 진공은 존재의 진공이다. 그것은 절대적 결핍이다. 다중은 때때로 이 진공을 내화할 수 있다. 철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부정적 사상을 낳는다. 실존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를 슬픈 감정의 세계에 빠뜨린다. 그러나 이와 달리 아주 많은 인식들, 소감들, 경험들, 개념들이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 진공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라고, 채우라고, 심연 위로 약하나마 다리를 세우라고 권고한다는 것을. 요컨대 결정에 관하여 결정하라고 권고하는 것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활력을 허용해줄 사건을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타성을 수반할 때에는 참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기다림은 명백하다. 이 위기국면의 가장 중요한 표시이다. (네그리, 『도자기공방』, 「아홉째 공방 : 결정과 조직화」)

마지막으로 김수영의 산문 한 대목을 소개하면서 논평을 맺는다.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가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것을 계속해서 지껄이는 것이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수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 헛소리다 ! 헛소리다 !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251)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 역사에서 ‘세 번째 운동’인가?

 

4년 전 처음 게리 워스키(Gary Werskey)의 ‘세 운동’(three movements)을 다룬 2007년 논문을 읽었을 때 나는 회의적이었다. 게리는 1930-40년대와 1970-80년대에 과학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개의 영국 급진주의자들의 운동을 다루었고 환경적인 파급력을 가질 수 있을 세 번째 운동의 가능성을 예측했다.

나는 그것이 다른 두 운동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적 운동일 가능성에 대해 별로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8년인 지금 나는 진정 P2P 커먼즈 운동이 실로 세 번째 운동의 자리에 서있다고 본다. 적어도 그러리라고 전제하고 나아가는 건 가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에게는 부차적이더라도 과학기술연구(STS)((STS :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에선 중대한 함의를 가지니 말이다. 나는 P2P 커먼즈가 내 활동가 삶에서 봐온 가장 중요한 것임을, 그리고 지식과 기술의 정치를 지향하는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자로서 내가 지난 50년 간 공들여온 걸 가동시키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루시 가오(Lucy Gao)와 나는 막 STS 학문연구분야의 연차 모임인 <4S 시드니 2018>((4S : Society for Social Studies of Science))에서 이루어질 발표를 연구하고 짜는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다. 학회세션의 주제 ‘일련의 실패한 정치적 실험으로서의 STS 안에서의 삶’은 게리가 했던 언급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고 루시와 나는 그가 말하는 ‘세 운동’을 두 ‘STS 안에서의 삶’ -그녀의 10년의 삶과 나의 45년의 삶- 에서 이루어진 실험과 실패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틀로 삼았다. 학회발표는 유튜브에 게시되고 (훅튜브(hooktube)에는 사본이 게시된다) 급진과학 및 급진적 전문직주의(professionalism)와 관련된 일단의 자료가 이제 웹사이트 ‘STS 안에서의 삶’(Lives in STS)의 ‘4 역사’(4 History) 범주에 게시되어있다. 이 자료에는 두 가지 이야기에 관한 한 쪽짜리 요강과 몇 시간짜리 인터뷰 녹취가 포함되어 있다. 길이를 맞추기 위해 그 발표의 일부가 생략돼야 했다. 생략된 건 포디즘/포스트포디즘이라는 분석틀, 차세대 생산양식으로서의 P2P, STS 학계와 급진과학 액티비즘, 전문관리계층(PMC)((PMC : Professional-Managerial Class)) 안에 있는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유기적 지식인’ 액티비즘이었다. 나는 학회 이후에 ‘감독판’을 만드는 걸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의 이 블로그 게시물을 부재하는 긴 영상의 개요로 생각해 달라.

내게는 세 가지가 이 ‘STS 안에서의 삶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그리고 내가 루시와 함께 그 작업을 하면서 도달한 장소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루시는 중국 과학원의 STS 부교수이다. 그녀는 나보다 40년 후에 태어났고 1980년대 후반 중국문화계에서 만개한 학문분야에서 일하는데, 거기에는 분명히 정치적인 (두 운동의) 역사가 서구주의, 관리주의, 전문직화의 번쩍번쩍한 표면 아래 묻혀 부글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것은 내 생각엔 1970년대의 ‘급진과학’에서는 본질적으로 과학이 핵심이 아니었으며 내가 급진과학으로 도달한 것도 본질적으로 ‘과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급진적 전문연구가들의 넓고 깊은 여러 세대에 걸친 운동 속에서 여러 문화적 형성물을 보았으며 지금도 본다.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한때 (40년 전에!) ‘후기 자본주의’라 불린 틀 안에서 PMC의 역사로 이론화되었다. 지난 세대에 심오하고 역사적으로 새로운 정치가, 지식을 거대하며 전지구적으로 분산된 규모로 생산하고 동원하는 체제가 출현했는데, 나는 이를 자본과 자본에 대항하는 힘이 포스트포디즘적으로 재편성되는 과정의 한 측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1950년대에는 ‘거대과학’이, ‘군산복합체’를 뒷받침하는 일이 핵심 이슈였다. 1960년대에는 ‘과학정책’ 및 연구생산물의 공적 성격 혹은 사유화 가능성에 관한 논의들이 우세했다. 컴퓨터화가 진행된 1980년대에는 ‘지식경제’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지식집약사업서비스’, ‘혁신서비스’ 가 ’국가혁신시스템‘ 안에서의 연구주제였다. 1990년대에는 STS 연구자인 나도 그 일부였다. (적절한 시기에 더 많은 게시글을 올리겠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러는 내내 저류를 이루었던 건 ‘유기적 지식인’적 생산(1920년대와 1930년대 이탈리아 맑스주의자 그람시의 용어이다), 그리고 지식생산을 대규모로, 계급규모로 조직할 수 있는 점점 더 분명한 가능성과 그래야할 필요였는데, 이는 매우 상이한 생산양식, 삶형태 그리고 전문연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관계를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유기적 지식인’적 실천에 관한 이러한 지속되는 이야기는 여기 FopRop의 ‘4 역사’ 범주의 관심사이다. 그것은 또한 ‘2 커머닝’(2 Commoning) 범주의 패턴언어를 위한 분석틀이 왜 ‘앎의 춤’의 안무를 핵심으로 하는지 또 왜 역사적으로 변화된 노동력의 생산에 관한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지를 말해준다. FopRop에서 나는 이를 P2P 커먼즈 생산양식과 일상적 삶의 역사적 진화에 관한 그리고 그 생산양식과 삶의 계속적인 활동가적 생산에 관한 문화유물론적 ‘접근법’을 구성할 수 있는 리터러시(literacy)의 세 영역 중 하나로서 제안하고 있다. (여기를 보라)

내가 주목하는 두 번째 것문화유물론 안에서 나 자신이 40년간 탐구를 해왔다고 내가 생각함에도 다른 어떤 종류의 공인된 맑스주의보다 더 커먼즈 운동이 의미심장하게도 ‘문화적’이며 심오하게 ‘유물론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내가 FoP RoP에서 특히 ‘2 커머닝’ 범주에서 또렷이 말하려 하는 종류의 (탈맑스적인 아닌) 신맑스적인, 세심하게 혼종화된 틀에 의해 촉진될 수 있고 명확히 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러하다. P2P 커먼즈 운동의 유물론적 성격은 명백하게도 앱의 개방형 구조, 프리코드의 P2P 생산, 분산된 웹 인프라, 공개 데이터, 링크드 데이터/데이터 소유권/문서 소유권, 라이선싱 그리고 분산된 행위의 장을 조정하는 인프라 기술들에 주된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 존재하는데, 이 분산된 행위의 장에는 암호화폐, 신용회계 메커니즘, 해시체인, 공개가치 공급체인 회계시스템, 공개원장 알고리즘과 구조가 포함된다. 

문화적 역사적 지향성은 조금 덜 눈에 띈다. 하지만 그 지향성은 예컨대 미셸 바우엔스로 하여금 커먼즈의 역사-진화적, 탈/반(反)자본주의적 중요성을 알아보게끔 하고 P2P 재단을 발족시키는 데로 이끈 인간학적 관점 안에 명백히 존재한다. 또한 그 지향성은 바우엔스 및 그의 파트너들(데이빗 볼리어, 질케 헬프리히)로 구성된 커먼즈전략그룹의, 과거와 현재의 커머닝에 대한 문화적·역사적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한 학술적·활동가적 연구와 개발 활동의 저변을 이루는데, 이 이야기들은 그들의 에세이 모음집 『커먼즈의 부』와 『커머닝의 패턴들』에 제시되어 있고, 현재 진행 중인 『커머닝의 패턴언어』에서 분석되고 있다. 이 분석과 여기 FoPRoP에서의 나의 패턴언어 작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석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인식한 세 번째 것은 내 생각에 P2P 커먼즈 운동이 1970년대의 ‘두 번째 급진과학 운동’ 안에서 분명해지기 시작한 ‘유기적 지식인’적 동력을 추진시키고 확장시키는 방식이다. 이 둘째 운동의 주체는 베이비부머들이었다. 이들이 여전히 현장에 있기는 해도 지금은 다른 세대가 ‘유기적 지식인’적 양태를 다르게 발견하고 실행하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18개월 전에 그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기적 지식인’적, ‘자유의지론적 사회주의’적 액티비즘의 지속적 실천을 이론화하면서 나는 베이비부머와 20대 활동가들이 (그리고 그 중간의 사람들이)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산’에 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어떤 종류의 ‘대학’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다듬어오고 있었다. 나는 『겸손한 기원들 3 – 활동가들과 집으로 가는 행진』(Humble Origins 3– Activists and the long march home)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대학’을 위한 공간을 구성하는) 일종의 온라인 플랫폼을 요구하는 기획을 하기로 결심했고 이를 신중히 검토하기 위해 루미오 플랫폼(www.loomio.org)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내 귀가 쫑긋했던 건 여기서 루미오가 나라와 문화를 가로지르는 폭넓고 확장적인 자발적 부문을 활용하는 잘 짜인 소프트웨어였다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내가 그 설계의 기저에 놓인 그룹 프로세스의 촉진(facilitation)이 강조된다는 점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1970년대에 내 세대가 가진 공동체지향적인 액티비즘이 발견한 것들과 그 헌신성으로 거슬러가는 분명한 역사적 선이 존재했다. (4 역사’ 범주의 ‘급진적 문화적 연구개발’과 『로케이션』(Location)의 서언과 서문을 보라.)

플랫폼 앱 루미오로부터 개발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협동조합 루미오를 거쳐 나는 오큐파이 운동 이후 활동가이자 해커인 개발자들과 협동조합 기업가들의 연합(가족?)인 엔스피럴(Enspiral)에 도달했는데, 이 개발자들과 기업가들에게는 촉진은 활동가 문화의 당연한 측면이었다. 그 이후 나는 쎈소리카(Sensorica)(([옮긴이] 쎈소리카는 IT 장비들 및 특수한 거버넌스를 사용하여 그들의 작업들을 함께 조정하고 운영하는 프리랜서들의 개방형 네트워크이다.))에 그리고 팽창하는 아나키즘적-해커적 정치 세계에, 스커틀벗(Scuttlebutt)(([옮긴이] 탈중심화된 소셜 플랫폼인 스커틀벗은 유저들이 그들의 데이터들을 통제하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이다.)) 인프라에, 코드 페디버스(fediverse)(([옮긴이] 페디버스는 소셜 네트워킹, 블로깅, 웹사이트 같은 웹 출판 및 파일 호스팅에 사용되는 서버들의 집합이다.))에 (그리고 P2P 방식으로 코드와 프로토콜을 만들어내는 생산자들에) 도달했다. 또 나는 오큐파이 이후의 반(反)과두적·직접민주주의적 연구와 개발, ‘오픈 밸류’ 가치연쇄 회계, ‘신속한’ 포스트포디즘적 문화형태들로 이루어진 더 폭넓은 형성체에 도달했다. 이는 (일본과 이탈리아의 유연생산시스템이라는 포스트포디즘적 발견을 도둑질하는 것이 자본주의 공급체인 개혁에서 내 동료들의 양식이었던) 1990년대의 나의 경영대학원 경험과 그 모든 종류의 기묘하고 모순적인 공명을 이루었다. 분명 역사들은 너무도 뒤섞이고 혼합되고 파문을 일으키고 파두(波頭)들이 서로 간섭하고 있었다. 분명 기업가 정신과 공동체 사이, 연대와 효율 사이, 액티비즘과 테크놀로지 사이, 정치와 돌봄 사이에 동일한 종류의 선을 긋지 않은 소수의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는 더 기업적이기도 하고 전문성이 더 뚜렷이 구획되어 있기도 하며 경력을 중시하고 해결책을 ‘해킹’하기보다는 ‘설계’하는 데 더 경도돼 있는 환경에서 자란 이전 세대에게는 문제적이었을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처음 할 때 제대로’라는 기업적·경쟁적인 문화가 우세했고, 지금은 ‘일찍 실패하고 계속 고치고 계속 갈라지고 모인다’라는 문화가 우세하다.

P2P 커먼즈는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크다. (포스트포디즘이 급진과학보다 훨씬 더 나아가 있다.) 가장 직접적으로 P2P 커먼즈는 에너지 독립형의 아나키즘적인 도시-장인의 삶에 전념하는 대안에너지 공동체로부터 ‘인간중심적’·참여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기업적·산업적 환경에서의 디자인운동까지 이르는 저 모든 운동의 급진적 테크놀로지 무기의 계승자이다. 다른 것들―‘4 역사’ 범주의 ‘급진과학’사, ‘3 플랫포밍’(3 Platforming) 범주의 ‘플랫폼 협동주의적’ 액티비즘 세계에서의 조직화―에 관한 작업이 내가 ‘2 커머닝’ 범주에서 커머닝의 패턴언어를 파악하는 데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1970년대 『급진과학저널』(Radical Science Journal)에서의 신맑스적 노동과정 이론화가 1970년대 급진적 전문직주의와 밀접히 연관됐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론화하는 모험이 (동일한 문화유물론적 기초 위에서) 오늘날의 P2P 커먼즈 운동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는다. 다만 이제는 활동의 장이 더 크고 걸려있는 것이 더 커졌으며 다양한 문화적 도전이 더 분명하고 결정적으로 드러나 있다. 1970년대 말에 베이비부머들이 대면했던 ‘단편들을 넘어서’라는 과제가 많은 새로운 형태들을 출현시켰다. 상황은 변하고 있다. ‘세 번째 운동’이 중국에서 어떨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국에서 나의 STS 동료인 루시 가오는 40년 후에야 ‘두 번째 운동’ 없이 체제화된 무익한 첫째 운동만이 존재하며 1980년대 후반의 ‘위대한 계몽’의 여파로 모든 포디즘의 파도들이 역사와 경제의 쓰나미로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여하튼 그렇다, 게리. 맑스주의를 계승하는 세 번째 급진과학 운동이 있다! 그건 더 나은 것일 수밖에 없다.




위기에 맞서 일어서는 공동체

 



2017년 9월 20일 허리케인 마리아(Maria)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를 강타했을 때 주디스 로드리게스(Judith Rodriguez)는 자택에서 자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잠을 자려고 하였으나 무시무시한 폭풍이 섬을 덮치는 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는 제가 살면서 들어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어요. 그 소리는 결코 조용해지지 않았어요. 그건 끝이 없었죠. ··· 저는 제 집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새벽 2시 반에 일어났을 때 저는 덜컥 겁이 났어요. 가장 처음 겁이 난 건 뒷문이 날아가 버렸을 때에요. 부엌에 달린 금속으로 된 문이 말이에요.”

 

그 섬의 많은 부분처럼 로드리게스가 사는 카예이(Cayey) 읍도 시속 175마일로 불어오는 폭풍에 송전선이 망가졌고 지붕이 날아가 버려서 몇 달간 어둠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미 심한 부채 위기로 허덕이고 있고, 즉각적인 구호가 언제 이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카예이와 같은 지역 공동체들은 그들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자원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우리 집에는 접시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집구석에 널려 있는 접시들을 기부하면 어떨까요?”라고 로드리게스가 말했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카예이에서 카구아스(Caguas)와 우마카오(Humacao)를 거쳐 라스 마리아스(Las Marias)까지, 소도시나 대도시 할 것 없이 섬 전역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접시 기부는 ‘공동체 주방’(community kitchens)으로 성장했고 이것은 ‘공동체 센터’(community centers)로 성장했으며, 이 공동체 센터가 성장하여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맹렬한 소리를 내며 불어온 허리케인 마리아가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일깨웠다. 이 무언가는 폭풍우, 불, 지진 등 모든 종류의 재해와 참사가 전 세계의 지역 공동체들에게서 일깨웠던 바로 그것이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중국에 있든지, 푸에르토리코에 있든지, 또는 일본에 있든지 간에,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이곳 푸에르토리코에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배에 비유합니다. 만약 이 배가 가라앉는다면, 우리 모두가 가라앉습니다. 저 혼자 가라앉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가라앉는 거죠.”

 

2007년,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그녀의 획기적인 책 『쇼크 독트린』(The Shock Doctrine)에서 재해자본주의라는 명제를 세상에 밝혔다. 클라인의 생각은 전 지구에서 일어났던 일, 그리고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완벽하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재해자본주의의 기본 생각은 매우 간단하다. ‘재해로부터 시장 기회를 창조하라’는 것이다. 클라인은 강력한 기업들이 어떻게 정치적·경제적 위기를 이용하여 공공 영역을 약화시키고, 그리하여 민간 자본의 이익을 강화시키는지를 잘 보여준다. 재앙 이후 나타나는 ‘쇼크’는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이익을 얻기 위해 혼란에 빠진 공동체를 이용할 완벽한 기회를 제공한다.

 

클라인의 명제는, 허리케인 카트리나(Katrina) 이후 뉴올리언스(New Orleans)의 공립학교 시스템의 해체부터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 푸에르토리코의 기반시설 민영화까지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많은 부분을 서로 연관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해 자본가’(disaster capitalist)가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유일한 캐릭터는 아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재해자본주의가 전체 이야기의 일부일 뿐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바로 이타주의, 연대주의,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기초로 한 이야기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다른 이야기가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재해공동체주의‘라는 이야기다.

 

폭풍으로 인해 상호부조의 홍수도 밀려들어왔고 산불이 결속력의 씨앗을 뿌렸고 지진이 공동체적 가치를 강화하고 지역 공동체를 더 가까이 결속시킨 사례들은 셀 수가 없이 많다. 우리는 관대함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표현되는 모습을 매우 자주 본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친 이후,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케이준 해군(Cajun Navy)(([옮긴이] 루이지애나와 그 인근 지역의 구조·조사 활동을 돕기 위한 개인 보트 소유자들의 비공식적 임시 자원봉사 모임―『영어위키피디아』))의 여러 대의 보트들이 좌초된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침수된 동네들로 내려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2017년 11월 남부 맨해튼에서도 작은 규모지만 이런 모습을 다시 한 번 보았다. 비계 구조가 무너져 내렸을 때 그 속에 갇힌 생존자들을 파내기 위해 수십 명의 뉴욕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달려가서 도왔던 것이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하는 걸까? 왜 우리는 자기희생적이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르는 영웅적 행동들을 그렇게 자주 보는 걸까? 이것은 분명히 많은 주류 서사들을 지배하는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와 일치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 이야기는 인간을 이기심과 경쟁심으로 특징지어지는 종류인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묘사한다.

 

뉴욕시의 존제이대학(John Jay College)의 경제학과 부교수 크리스천 파렌티(Chritian Parenti)는 이렇게 말했다. “예를 들면, [허리케인 하비(Harvey) 이후] 휴스턴(Houston)에 홍수가 일어난 것처럼 재해가 닥쳤을 때, 당신은 사람들이 매일 이 모든 너그러움과 결속력을 쏟아 내는 것을 보았을 겁니다. 모든 것에는 가격이 붙어있다는 생각, 그리고 이기심과 경쟁심은 좋은 것이라는 생각, 이 모든 생각들이 갑자기 멈추게 됩니다. 갑자기, 모두가 협력·결속력·용기·희생·관대함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의 저명한 책에서 강화되었다. 『지옥에 지어진 낙원』(A Paradise Built in Hell)에서 그녀는 설명한다. “지진, 폭격, 또는 심각한 폭풍이 일어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타적이 되고 자신들과 주위의 사람들(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과 친구들뿐만 아니라 낯선 이들과 이웃들)을 돌보는 일에 즉시 관여하게 됩니다.”

 

우리는 최근 6월에 일어난 과테말라에서의 푸에고(Fuego) 화산 폭발 이후에 전개된 일에서 이것을 목격했다. 정부의 대응이 부적절한 가운데, 사람들은 매일 서로를 돕기 위해 모였다.

 

당시 위기 상황에 그 곳에 연구차 나와 있던 뉴욕주립대학 알바니 캠퍼스(University at Albany at 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의 인류학자 월터 리틀(Walter Little)은, 화산이 폭발한 저녁, 마을 근처의 한 교회가 “지역 사람들에게 교회로 오라고 알리는 종을 즉각 울리기 시작했고, 교회에서 그들은 물자, 음식, 의류 및 기타 다양한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이 울리는 것을 들었을 때 두 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일어난 홍수·토네이도·지진·폭풍우 등 재해가 일어날 때의 행동에 대한 수십 년 간의 꼼꼼한 사회학적 연구가 이것을 입증했습니다”라고 솔닛은 말했다.

 

 

폭풍이 지나간 후

 

그러나 어떻게 재해가 특별히 그러한 이타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걸까? 여기 이 질문을 둘러싸고 솔닛, 파렌티 등과 같은 작가들에 의해 제시된 명제가 있다. 명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는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사실로 인정하기에 이르렀고, 항상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꿈을, 그리고 상상을 따라 다닌다. 그것은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고 생태계와 지역 공동체를 여러 국민국가들로 분할하는 임의의 경계를 만들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듯이, 인공적인 경계들은 동물, 식물 그리고 인간의 관대함의 흐름을 봉쇄할 수 없다.’

 

2017년 산타로사(Santa Rosa)의 북부 캘리포니아 도시에 거센 불이 타올랐을 때, 공동체는 특히 불법체류자들을 위해 고안된 펀드를 조성하기 위해 모였다. ‘언도큐펀드’(Undocufund)는, 나중에 알려진 대로, 현대 정치 풍토의 주요 품목이었던 분할정복이라는 수사(修辭)와 정 반대 위치에 서 있다.

 

언도큐펀드의 이사 오마르 메디나(Omar Medin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 우리는 5만 달러 또는 10만 달러를 모을 수 있을지 몰랐어요. 지금까지 600만 달러를 모을 거라곤 정말로 예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재해가 일어나고 불이 계속 타오르자 사람들의 관대함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습니다. 최근 전국적으로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것에 기초하여 시민증이 없는 불법 주민들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죠.”

 

이런 종류의 인간의 친절은 주류 제도에 의해 영속화된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신화에 의해 종종 갇혀 있지만, 출현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틈이 생기면 그 틈으로 폭발한다. 재해 중 또는 그 후에 발생하는 정상적인 상태의 붕괴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무언가를 깨운다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순간들이 새로운 형태의 시민 참여와 공공의 삶을 위한 공간을 (그것이 아무리 짧게 지속되더라도) 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역으로 이루어진 일상생활에서는 그러한 기회들은 거의 없거나 아주 드물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연결하고자 하는 깊은 욕구가 있다. 학술지 『미국 사회학 평론』(American Sociological Review)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25퍼센트의 미국인들이 가까운 친구 또는 터놓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혼자 사는 개인의 수도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점점 더 고립되어지고 원자화되면서, 관계에 대한 갈망이 증가할 뿐이다. “인간은 집단 종(種)입니다. 우리 안에는 종(種)으로서 뭉치려고 하는 깊고 매우 본능적인 무언가가 있습니다”라고 파렌티는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연결을 향한 본능적인 욕구가 발생하는 것을, 2012년 10월 29일 뉴욕시를 강타하여 53명의 사상자를 내고 도시 전역에 320억 달러의 피해를 입힌 허리케인 샌디(Hurricane Sandy) 이후 복구과정에서 보았다. 롱아일랜드의 퀸스(Queens) 자치구에 돌출된 반도인 로커웨이스(Rockaways)와 같은 장소들은 특히 심한 타격을 받았다. 뉴욕은 종종 유독 사람들과 단절되고 이웃과 잘 지내지도 않을 것처럼 보이는 대도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해 공동체주의가 온전히 나타났다.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에 의해 발전된 네트워크와 전략에서 파생된 풀뿌리 구호 네트워크인 ‘샌디를 점령하라’(Occupy Sandy)가 발휘한 노력은 이러한 종류의 공동체적 접근을 보여주는 한 주요한 사례이다. 당국의 대응 이후 남겨진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샌디를 점령하라’ 자원봉사자들은 지역사회 단체들 및 활동가 네트워크와 협력했다. 그들의 노력은 지역의 가난한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는 것에 중점을 두었고 자선보다는 상호부조에 기초했다. 가장 많을 때에는 6만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과 아마존 구호 등록소, 법무팀, 의료팀, 처방약 배달, 일일 식사 배달을 통해, 재해가 일어난 후 몇 날, 몇 주 동안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뉴욕시에 오래 거주한 살 로피조(Sal Lopizzo)는 일군의 자원봉사자들이 그의 침수된 비영리 직업훈련원에 나타나 그 장소를 복구 허브로 전환할 수 있을지 물었을 때, ‘샌디를 점령하라’ 복구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로피조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그냥 나타나서, 사무실을 치우고, 모든 것을 거리로 가지고 나갔어요. 우리는 탁자를 설치하기 시작했고, 물품들을 실은 트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생각할 수 있는 물품들은 죄다요. 홈디포(Home Depot)나 타겟(Target)점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들 말이에요.”

 

로피조의 건물은 초강력폭풍(Superstorm)이 타격을 가한 이후 몇 날, 몇 주 동안 발생했던 많은 허브들 중 하나이다. 로피조의 건물은 심한 타격을 받지 않은 지역에 위치한 12개 남짓한 배급허브들에 의해 식량을 공급받았다.

 

로피조는 이렇게 말했다. “브루클린(Brooklyn)에 있는 교회들이 물품들을 모아 트럭과 밴에 실어서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떤 그리스 정교회의 신부님이 여러 명의 아이들을 태운 미니 밴으로 백 개 정도의 피자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 신부님은 그저 불쑥 등장하신 거예요. 저는 ‘어머나’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죠. 정말 대단했습니다.”

 

폭풍 샌디가 지나간 후 발생한 큰 규모의 풀뿌리 구호 활동에 참여한 로커웨이스 주민인 로레나 히론(Lorena Giron)도 그녀가 목격한 것에 비슷한 감동을 받았다.

 

히론은 이렇게 말했다. “이웃들이 옆집에 사는 이웃들을 걱정하는 것을 보는 즉시 저는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또한 교회가 신속히 움직여 기꺼이 사람들을 부르고 구호품들을 나누어 주는 모습도 감동적이었어요. 그 어떠한 종류의 도움도 다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느낀 것이죠.”

 

로피조의 개조된 직업훈련원이 위치한 곳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져있는 도시 곳곳에, 아번순례교회(Arverne Pilgrim Church)를 포함한 여러 복구 허브들이 생겨났다. 교회 소유자인 데니스 론크(Dennis Loncke) 목사는 어떻게 허리케인 샌디가 전례 없는 방식으로 지역 공동체가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지 설명했다.

 

론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말이지 폭풍이 장벽을 없애는 데 협력한 셈이죠. 우리 대부분은 개인의 의견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 떡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나의 도움이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닥쳤을 때 모든 사람들의 그러한 의견은 곧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폭풍이 지나간 후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재산적 손실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문제들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이 마을사람들에게 그들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바로 이웃으로서 우리가 가진 마음을 일깨워 준 것이죠.”

 

한 번 다른 세상으로의 문이 열리면, 그 문을 닫는 것은 종종 어렵다. 재해가 일어난 직후 형성된 유대감과 공동체적 비전이 일시적인 재해 구호를 넘어 더 광범위한 프로젝트로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많다.

 

예를 들어, ‘샌디를 점령하라’ 구호 활동에 의해 그리고 마찬가지로 뉴욕에 기반을 둔 ‘일하는 세상’(The Working World)과 같은 단체들에 의해 장려된, 공동체 강화에 중점을 둔 노력은 히론과 같은 사람들이 현재 ‘노동자 협동조합 육성 프로그램’을 편성하도록 고무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 시에 4개의 협동조합을 도왔다.

 

히론은 이렇게 말했다. “폭풍이 오기 전에도 로커웨이스와 파로커웨이스(Far Rockaways)는 매우 가난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일은 매우 중요하고 흥분되는 일이었습니다. 다른 식으로 일을 장려하고 고용을 촉진한다는 생각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제 삶이 바뀐 것 같습니다. 제게 중요한 건 제가 우리 공동체를 돕고,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풀뿌리 재해 구호가 더 큰 계획을 낳을 수 있는지를 분명히 설명해주는 또 다른 사례는 푸에르토리코의 허리케인 마리아 이후에서도 볼 수 있다. 카구아스 마을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는 ‘공동체 주방’으로 시작한 것이 곧 섬 전체 공동체 센터들의 네트워크인 ‘상호부조센터’(Mutual Aid Centers)로 바뀌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센터들은 간단한 식사뿐 아니라 예술, 교육, 치료와 관련한 여러 종류의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카구아스의 ‘상호부조센터’의 창립 회원 중 한 명인 히오반니 로베르토(Giovanni Roberto)는 지역 주민들을 위해 주말 침술 클리닉을 조직하는 것을 돕는다.

“클리닉은 매주 화요일마다 열립니다. 우리는 귀침술을 합니다. 스트레스와 외상 후 증후군, 중독 등 건강과 관련된 문제들을 다룹니다.” 로베르토는 이 모든 서비스가 무료로 제공된다고 덧붙였다.

 

허리케인 마리아에 의해 초래된 혼란은 사망, 부상, 재산 파괴를 훨씬 푸에르토리코 사람의 정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영향은 지속적이고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다. 섬에는 소리 없이 퍼지는 정신 건강 위기에 대한 보고들이 점점 많아졌다. 특히 푸에르토리코의 이미 망가진 보건관리 시스템이 폭풍 이후 더욱 약화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보건 관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재앙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부조센터’에서 일하는 로베르토의 일이 알려지자, 공동체는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 병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고 있다. 로베르토는 우울증과 재해 후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있던 센터의 정규 자원봉사자들 중 한 명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이곳에 처음 온 날, 그녀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거의 울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녀는 하루도 자원봉사 일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변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울지 않았습니다. 잠도 더 잘 자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이곳에 왔을 때 그녀는 낙원에 온 기분이었다고 오늘 제게 말하더군요.”

 

라스마리아스(Las Marias)에서 떨어진 마을에 있는 또 다른 상호부조센터의 창립자인 오마르 레예스(Omar Reyes)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센터를 공동체 주방으로 시작했습니다. 급박한 순간에 일이 그렇게 진행되더라고요. 사람들은 먹을 게 필요했죠. 그런데 문제가 바뀌니, 도구도 바뀌었습니다. 변형된 것이죠. 그리고 지금은 교육, 오락, 문화기술, 기회들의 발전을 위한 센터가 되었습니다.”

 

우투아도(Utuado) 마을에 있는 상호부조센터 창립자인 아스트리드 크루즈 네곤(Astrid Cruz Negón)도 같은 소감을 표현했다. “우리 상호부조센터는 허리케인 마리아에서 살아남는다는, 긴급상황에서 형성된 태도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새로운 세상,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원합니다.”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공동체가 빛을 유지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광범한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힘, 대체로 요구를 거절해 온 정부에 대해 진지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공동체에 있음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때까지 공동체들은 사태를 자신들의 손으로 장악해야 한다.

 

여기에서 나타난 재해 공동체주의의 사례들은 진공 상태에서 일어난 일들이 아니다. 이 사례들은 재해자본주의 세력과의 지속적인 긴장 속에서 종종 발생한다. 뉴욕시는 샌디가 몰아친 이후 수년간 지역 공동체들과 권력 대리인들이 서로 매우 다른 종류의 복구를 두고 싸운 전쟁터이었다. 즉, 서로 반대되는 힘들의 전투장이었던 것이다. 푸에르토리코의 상호부조센터들은 일단의 세력들(미국 정부, 푸에르토리코 정부 그리고 기업들)과 대립하고 있고, 그들의 힘은 상호부조센터 프로젝트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다.

 

재해 공동체주의가 구호와 복구 과정에 필수적인, 지역·주·전국 수준의 정부의 작고 큰 규모의 지원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을 추동하는 결정권이 점점 소수의 권력자들의 수중에 쥐어지게 되면서, 당국의 재해 대처는 사회·정치적 개입 없이는 인종과 계급에 따라 형성된 기존의 계층화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재난의 시기에 공동체 사람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종종 정치적 참여를 낳을 수도 있는 새로운 연대를 만들기도 한다고 기록한 역사의 방대한 저장소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복구 허브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다. 종교 단체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즉석 주방들이 출현하여 단지 식사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새로운 비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이 혼란스럽고 분열적인 시대에, 그리고 사회가 심각하고 만성적인 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우리는 가물거리는 희망의 빛을 본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내의 가장 상처 입기 쉬운 것을 돌보기 위해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언도큐펀드’ 창립자인 데빈 카드내스(Davin Cardenas)는 이렇게 말한다. “혼란 속에서도 유대를 창출하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목적과도 같은 것을 창출하려고 하는 것이죠.” 캘리포니아에 난 산불 이후,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어떻게 내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와 같은 느낌을 모든 사람들이 받았습니다. 우린 이런 말들을 수도 없이 계속 들었습니다. [‘언도큐펀드’가] 사람들에게 목적의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의식은 혼란 속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고 보살핌을 입증하려고 하고 연대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본능인 것이죠.”

 

깊어지는 분열과 기후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공동체 구호 및 복원 활동의 많은 사례들은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고 근본적인 복원력을 가지고 재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사례들은 또한 더 많은 연결, 목적의식, 의미로 채워진 힘을 가진 공동체를 특징으로 하는 ‘다른 세계’를 힐긋이나마 보여줄 수 있다.




팹아카데미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an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 (2017)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위 책의 1장의 일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책의 서설의 내용은 이 블로그의 게시글 http://commonstrans.net/?p=1233와 http://commonstrans.net/?p=1246에 정리되어 있다. 이번 정리글의 핵심은 팹랩의 확산과 연계되어 발전된 ‘팹아카데미’라는 이름의 학습모델이다. 한국에서의 일만은 아니겠지만 정리자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제도권 교육모델(대학 포함)이 형편없이 망가지고 시대에 뒤쳐졌음이 확실하며, 제도권이 스스로 이것을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와는 전혀 다른 학습모델의 탐색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정리자 자신은 개인블로그의 글 「‘십오 소년 표류기’ 7」에서 리눅스 같은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는 공동체들에서 파생된 학습모델인 ‘넷아카데미’를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이번 글에서 소개할 ‘팹아카데미’는 이 ‘넷아카데미’의 새로운 형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다만 대학과 무관한 ‘넷아카데미’와 달리 ‘팹아카데미’는 대학과 대학 외부(지구 전역)에 걸쳐서, 양자를 가로질러 존재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의 대학들―물론 정신을 차린 대학들―이 본받을 만한 사례일 듯하다.

[팹랩이란?]

팹랩(Fab lab)은 제작(fabrication)을 위한 실험실로서 MIT의 <비트와 원자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 CBA)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로 시작되었다. CBA는 컴퓨터과학(‘Bits’)과 물리과학(‘Atoms’) 사이의 경계를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CBA에는 낮게는 천 달러에서 높게는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여러 가지 도구들이 있다. 팹랩은 만일 CBA의 도구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것들이 외부로 널리 쓰일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보려고 했다. 2002년 칼박(S. S. Kalbag)이 학교에서 낙오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일부러 인도의 작은 마을 파발(Pabal)에 세웠다. CBA는 비싼 특수목적 랩 장비에 투자하기보다 농업테스트 같은 목적을 위한 랩 기구들을 이 학교에 만들어 주는 협동을 시작했다. 이것을 팹랩 제0호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 영감을 얻어서 보스턴의 공동체 활동가 킹(Mel KIng)의 <사우스엔드 테크놀로지 센터>(South End Technology Center, SETC)에 설치되어 2005년 온전한 공동체 팹랩으로 성장한 것이 제1호이다. 제2호는 보스턴의 가나인 공동체가 킹의 랩을 본 후 협동하여 가나의 해안에 있는 쎄스코디-타코라디(Sekondi-Takoradi)에 세운 팹랩이다. 새 팹랩을 열 때마다 또 필요한 누군가가 생겼으며, 이렇게 해서 팹랩은 10년 동안 매해 2.5배씩 늘어났다.

 

팹랩의 수가 두 배씩 몇 번에 걸쳐 증가한 2005년에 닐 거션펠드는 『랩』이라는 책을 썼다. 도어티(Dale Dougherty)는 ‘maker’(제작자)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새로이 출현하는, 팹랩에 있는 종류의 도구들을 사용하여 컴퓨팅을 제작과 연결시키는 덕후들의 공동체를 지칭했다. 그는 2006년에 ‘메이커 페어’(Maker Faire)라고 불리는 모임들을 후원하기 시작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큰 것인 2015년의 것에는 145,000명이 방문했다.

 

2006년에는 뉴턴(Jim Newton)이 대부분의 개인들이 구할 수 없는 디지털 제작 도구들에의 접근을 제공하는 텍샵(TechShop)을 창립했다. 텍샵들은 회원제로 운영되었으며 2016년 현재 10개가 있다. 좀 덜 본격적인 것으로서 메이커스페이스들(maker space)이나 해커스페이스들(hacker spaces)이 확대되기 시작하여 동호인들에게 장소를 제공했다. 이 공간들은 제공하는 것은 공간마다 매우 다르지만 현재 수천 개가 있다.

 

2007에는 버닝맨 모임으로 가져간 이동형 팹랩이 처음 선을 보였다. (버닝맨 모임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의 글 「커먼즈로서의 버닝맨」 참조.) 이동형 랩은 나중에 시골 지역들을 이리저리 다니며 네트워크 내에 네트워크를 심는 팹랩들이 되었다.

 

이 모든 팹랩들은 3차 디지털 혁명의 초기 발현형태들이다. 이러한 성장기의 생태계에서 팹랩들은 두 가지 변별적 특징을 가진다. ① 팹랩들은 각기 다르다기보다는 모두가 진화하는 일단의 핵심 능력들을 공유하여 팹랩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기획들이 공유될 수 있게 해준다. 멧 칼프의 법칙(Metcalfe’s Law):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의 가치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컴퓨터들의 제곱에 비례한다. 피트니스센터에서 운동하면 다른 사람들이 같이 운동한다고 해서 큰 차이가 없지만, 인터넷에 접속하면, 혹은 팹랩에서 작업하면, 다른 컴퓨터들이 접속할 때, 혹은 다른 사람들이 팹랩에서 같이 작업할 때 가치가 증가한다. 팹랩 네트워크에서는 사람도 기획도 모두 이동적이며, 개별적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집단적으로 성취할 수 있도록 한다.

 

② 다른 변별적 특징은 그 콘텐츠의 연계된 진화이다. 공동사용하는 기계들, 재료들, 부품들, 프로그램들로 시작했다가 지금은 팹랩들에 의해서 그리고 팹랩들을 위해서 개발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를 위한 오픈 디자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팹랩이 또 하나의 팹랩을 만들 수 있는 지점을 목표로 잡아서 가고 있다. 팹랩에서 사용하는 각 유형의 기계의 비용은 그동안 저렴해져왔지만, 팹랩에서 만들 수 있는 것에 대한 포부 또한 그에 비례해서 올라가서 전체적인 비용은 거의 비슷하게 공동체의 자원의 규모 정도에 머물러있다.

 

이 두 특징들로 인해서 팹랩들의 모음은 네트워크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각 사이트는 개별적으로는 별 것이 없지만, 이 사이트들을 모아놓으면 중요한 덩치가 된다. 아무도 팹랩을 시작하라고 밀어붙이지 않는데, 사이트들이 계속해서 네트워크에 합류한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됨으로써 혜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놀라움은 팹랩의 사용방식이 세계 전역에서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멜 킹이 이 점을 포착했다. 는 북극에 몇 시간 있더라도 거기서 도시의 랩에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희망과 두려움을 인식하리라는 것이었다.

 

팹랩들에 공통적인 것은 노소가 혼합되어 있고 응용분야가 교육, 오락, 사업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운데 팹랩들은 도서관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1900년 무렵 카네기가 투자하여 공동체 도서관들을 세웠는데, 사업이 완료되었을 때 전국에 걸쳐 약 2500개가 세워졌다. 도서관의 전반적인 사명은 리터러시, 즉 지식에의 접근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도서관들은 이 사명의 달성에서 여러 목적들(사설보육소, 학교 수업, 연구, 시정市政)을 위해 사용되었다. 도서관들은 처음에는 새로운 것이었으나 이제는 문명화된 공동체의 당연한 구성요소가 되었다. 팹랩들 또한 그와 같은 궤적을 그릴 것이다. 다만 이제 팹랩들은 비트에서 원자로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리터러시를 목적으로 한다.

 

 

[팹아카데미]

 

CBA가 디지털 제작 연구시설을 일단 갖추고 나자 생긴 문제가, 이 도구들이 여러 분야에 걸쳐있고 또 그 작동 규모로 인해서 학생들이 그 사용법을 모두 배우기 위해서는 평생 MIT 수업을 들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2001년에 편법으로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How to Make (almost) Anyth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강의를 개설했다. 디지털제작을 연구하는 소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강의에 뜻밖에 매해 수백 명의 학생들이 들으러 왔다. 그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지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말이다.

 

학생들은 개별적인 기술을 마스터함과 아울러 이 기술들을 통합하는 프로젝트들을 했다. 첫 해의 스타 가운데 하나는 켈리 돕슨(Kelly Dobson, 나중에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의 Digital+Media학과의 학과장이 된다)인데 그녀는 비명(screams)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내보내는 착용장치를 만들었다. 윤미진(Meejin Yoon, 나중에 MIT 건축학과장이 된다)은 센서들과 등뼈 모양의 구조물들로 가득하여 개인 공간을 방어할 수 있는 드레스를 만들었다. 이런 종류의 기획들이 계속 이어졌다. 저자는 여기서 자신이 묻지 않았던 질문, 즉 디지털 제작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학생들이 답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제작 방법을 묻고 있었지 이유를 묻고 있지는 않았는데, 학생들이 디지털 컴퓨팅의 킬러앱은 퍼스털 컴퓨팅이듯이, 디지털 제작의 킬러앱은 퍼스널 제작임을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핵심은 상점에서 살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었다.

 

CBA의 연구도구 사용법 수업이 필요했듯이 팹랩들의 확산도 전지구적으로 사용법을 훈련시키는 문제를 낳았다. 똑똑한 아이들은 지역 교육이 주는 기회를 훨씬 앞서는 기술을 팹랩들에서 배우고는 그 다음에 급격히 능력이 하강하곤 했다.

 

브루볼트(Hans-Kristian Bruvold)는 노르웨이 북쪽의 한 지역학군에서 일종의 문제아였다. 이미 선생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마스터해서 주의집중을 잘 안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한 팹랩에 나가기 시작했고 거기서 저자를 만났으며 저자는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의 몇 가지 데모 프로젝트를 보여주었다. 다시 만났을 때 저자는 그가 장난감 로봇 트럭에 여러 기술을 통합해 넣은 것을 보고 놀랐다. 몸체를 디자인했을 뿐만 아니라 모터와 제어장치를 통합해 넣고 방풍유리 디스플레이를 추가했다.

 

남아프리카에서도 인종차별시기의 한 흑인거주구인 쏘샹구베(Soshanguve)에 팹랩을 열었을 때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 한 지역 소녀인 모나헹(Tshepiso Monaheng)이 놀랍게도 랩을 이용하여 원격으로 MIT 수업 내용을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통상적인 관점에서라면 브루볼트나 모나헹 같은 똑똑한 아이들은 멀리 떠나서 더 나아간 곳에서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동은 유용한 사람들을 그들이 가장 필요로 되는 곳에서 떠나보낸다. 우리는 처음에 세계 전역의 지역 학교들과 짝이 되어 이 진공을 채우려고 했는데, 기술적 숙련보다 훨씬 더 큰 한계는 학교의 엄밀히 통제되는 교육 접근법이 창조성을 질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늘 발견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팹아카데미(Fab Academy)라고 불리는 것을 시작했다.

 

팹아카데미는 원래 팹랩들이 원격으로 MIT의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 법’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마련한 비디오 링크에서 자라나왔다. 직접 듣는 학생들보다 팹랩들이 더 많아지면, 원격 세션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분리했다. 원래 원격 학생들이었던 지역 멘토들의 존재가 필수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새 학생들은 지역 팹랩에 있는 작업그룹에 합류해서 멘토들, 동료들, 기계들과 함께 작업했다. 그 다음에 우리는 비디오를 사용한 대화식 강의와 협동적 내용공유를 통해 모두를 전지구적으로 연결했다.

 

MIT를 컴퓨터 메인프레임으로 보면 된다. 잘 작동하지만 소수에게만 유용하다. 대형공개온라인 강의(massive open online classes, MOOCs)는 사용자들이 중앙메인프레임에 연결된 터미널 앞에 앉아 있는 시분할 시스템(time-sharing, 각 사용자들에게 컴퓨터 자원을 시간적으로 분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시스템으로서 출력이 사용자에게 표시되고 입력을 키보드에서 읽어 들이는 대화식 인터페이스를 제공할 수 있다) 시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팹아카데미 모델은 학습네트워크상의 노드들을 연결하는 인터넷에 더 가까우며, 이 노드들은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확대된다.

 

처음에는 저자가 직접 모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팹아카데미 모델이 성장하면서 저자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멘토들을 지도했다. 모델이 더 성장하면서 저자는 지역 랩들을 지도하기 위해 출현한 상위노드들(supernodes)을 지도했다. 이런 식으로 이 모델은 인터넷과 유사해졌다. 나무처럼 줄기, 가지, 잎으로 정보가 전달되었다. 인터넷처럼 모든 노드는 다른 모든 노드와 대화할 수 있었다. 팹아카데미의 일주일 생활의 중심은 거대한 화상회의였다. 여기서 누구나 다른 모든 사람을 보고 다른 모든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다. 이 회의에는 이전 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포함되고 다음 주의 새로운 일감에 대한 대화식 소개가 포함된다. 이 모든 협동과정은 중앙사무실보다는 아씨나리(Luciana Asinari)가 이끄는 분산된 작업그룹에 의해서 뒷받침된다.

 

이 구조에서는 품질 통제를 위해 관계들의 망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edu’ 도메인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포트폴리오를 만들게 했다. 우리는 미래의 입학, 취업, 투자를 위해서는 미지의 단체로부터의 증명서보다는 포트폴리오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콘텐츠를 만들고 평가를 하는 하나의 주기가 도는 데 약 8개월 걸리지만, 학생들의 진전은 수업을 들은 시간보다는 기술의 숙달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학생들은 모든 것을 완료하는 데 몇 년 걸렸다. 학생들의 수준은 홈스쿨링한 천재들, 대학생들, 대학에 가는 대신 이것을 배우는 사람들, 중견 전문가들, 말년에 재훈련하는 사람들, 퇴직 후 취미로 하는 사람들 등 다양하다. 지역 학습 워크그룹들의 전지구적 연결은 팹랩들의 분산된 성격과 멘토링의 필요 사이의 균형을 맞추어 준다.

 

좋은 멘토링이 부재하면 형편없는 생각들이 번성한다. ‘maker’라는 이름은 ‘열정적’이라는 긍정적 의미와 ‘잘 모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를 모두 가진다. 메이커운동의 기본 요소는 아두이노(20달러짜리 작은 컴퓨터 보드로서 센서 해독, 출력장치 통제, 네트워크와의 소통이 가능하다)이다. 팹아카데미는 아두이노를 소개한 다음에, 팹랩에서 몇 달러로 부품들을 조립하여 그런 보드를 만드는 법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학생들은 쌀알만 한 크기에서 데스크탑을 돌릴 수 있는 사이즈의 다른 컴퓨터 칩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제작자운동의 또 다른 기본요소는 3D프린터이다. 팹랩은 학생들에게 3D프린터 사용법을 보여준 다음에 더 빨리 작동하고 더 크고 강한 것들 혹은 더 정밀한 것들을 만드는 모든 다른 디지털 제작도구들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런 다음 학생들은 3D프린터를 만드는 법을 배운다. 이런 사례들 각각이 쉬운 기술을 배우는 데서 어려운 기술을 마스터하는 데로 나아가는 경로를 제공한다.

 

‘스스로 하기’(Do-it-yourself)는 앞서 간 사람들의 어깨 위에 서기보다 자신의 발끝으로 서게 하는 방법이다. ‘같이 하기(do-it-together)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do-it-with-others)는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뜻밖에도 팹아카데미가 선순환의 심장부에 있음을 발견했다. 각 주기는 최고의 수행 사례들을 팹랩 네트워크 전체에 전파하면서 지역 멘토들로 이루어진 핵심 협동 공동체를 구축하고 나중에 새로운 랩들과 프로그램들을 돕게 될 훈련된 학생 무대를 제공했던 것이다.

 

팹아카데미는 디지털 제작을 가르치기 위해 개발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조합한 것의 많은 부분은 거기에만 맞추어진 것이 아니었다. 기반시설은 원거리학습(distance learning)이 아니라 어떤 종류든 분산된 학습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놓쳤지만 소통, 컴퓨팅, 제작, 학습 사이의 깊은 관계를 알게 되었다. 디지털 소통이 전지구적으로 상호작용하게 해주고 디지털 컴퓨팅이 지식을 공유하게 해주는 한편 여기에 추가되는 디지털 제작은 아이디어들만이 아니라 사물들을 교환할 수 있게 해준다. 팹랩의 핵심적 도구들이 있으면, 필요한 다른 모든 것을 만드는 것을 가능하게 해서 캠퍼스를 효과적으로 학생들에게 가져가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유력한 유전학자 가운데 하나인 조지 처치(George Church)는 하버드 너머의 학생들과 만나는 데 관심을 가져서 ‘(거의) 모든 것을 키우는 법’(How to Grow (almost) Anything)이라는 이름의 분산된 학급을 팹랩 네트워크에 추가했다. 디지털 제작과 생물학적 제작을 결합시킨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바이오랩에서 필요한 도구들을 만드는 데 팹랩을 사용할 수 있다. (생물학 장치들은 종종 가격이 센 편인 동시에 거추장스럽다.) 팹랩에서 기계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기술이 DNA 증폭을 위한 열순환기나 액체를 다루는 로봇 같은 것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왔다. 더 깊은 수준에서는 생물학 자체가 제작에 사용될 수 있다. 생물학적 과정들은 근본적으로 디지털 방식이며 우리는 팹랩들과 바이오랩들이 합류하면서 이 과정들을 프로그램하는 법을 점점 더 배우고 있다.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은 세계의 주요 예술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처치처럼 그도 그의 영향력을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직접 가르칠 수 있는 학생들 너머로 확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어떻게’ 물건을 만드는가에 있지 않고 ‘왜’ 만드는가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드는 과정에 미치는 영향력과 그 과정이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기 위해서 ‘왜 (거의) 모든 것을 만드는가’라는 이름의 다른 분산된 학급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저자의 학생 피크(Nadya Peek)가 이 점증하는 프로그램들을 ‘(거의) 모든 것의 아카데미’(the Academy of (almost) Anything)라고 불렀고 이 이름 혹은 그것을 줄인 ‘아카뎀애니’(Academany)라는 이름이 고정되었다. 현재 이 아카데미는 그레노블 팹랩(the Grenoble fab lab)을 시작한 몰레나르(Jean-Michel Molenaar)가 관리하고 있다. 제공하는 학습 각각은 지역 워크그룹의 모델을 따르고 멘토들은 대화식 강의를 위해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용을 협동적으로 공유한다.

 

팹랩들이 전 세계에 확산되고 있는 동안 저자는 MIT에 새 건물이 짓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시작에서 끝까지 10년 걸렸고 1억 달러가 들었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시설이 제공된다. 지난 10년에 걸쳐 출현한 수 천 개의 팹랩들 각각은 약 100명의 사용자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지고 있다. 이 숫자는 명백한 문제를 제기한다. 1억 달러 투자 대 10만 달러 투자의 차이를 정당화는 활동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기존의 MIT 조직은 희소성의 전제에 기반을 둔다. ① MIT는 랩에 있는 도구, 도서관의 책, 교수들의 시간에 대한 접근을 관리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지원자들을 거절하고 캠브리지의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다들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② 온라인 학습플랫폼에 연결된 컴퓨터 앞에 학생이 홀로이 앉아있는 것을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분법이다. ③ 팹아카데미에서 지속적으로 발견하는 것은, 학생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학습공동체들 속에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대안은 원격교육이 아니라 팹랩 아카데미가 보여주는 분산된 교육이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물음은, MIT 같은 곳에서 행해지는 활동의 어느 만큼이 이런 식으로 분산될 수 있으며 어느 정도의 욕구가 중앙집중화될 수 있느냐이다.

 

저자는 ‘반’이라고 말한다. 팹랩을 열 때마다 MIT에서 같이 작업을 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창의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동료들, 멘토들, 도구들을 다른 데서는 찾을 수가 없기 때문에 팹랩에 그렇게 꾸준하게 나온다. 그래서 MIT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반 정도는 팹랩 환경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반은 더 많은 비싼 도구들(가령 분자 규모의 분자어셈블러를 개발하는 데 사용하는 나노과학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비싼 도구들을 사용하는 기술과 지식은 너무나도 전문화되어 있어서 모두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활동이 이루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유형의 공간은 대립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만 달러 제작 공간, 십만 달러 팹랩, 백만 달러 수퍼 팹랩, 천만 달러 연구랩들을 가진 하나의 나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위로 키우기보다 바깥으로 키워야 지구 전체의 브레인파워를 가져다 쓸 정도로 규모를 키울 수 있다.

 

페이퍼트(Seymour Papert)는 컴퓨터와 교육의 아버지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선구적 아동심리학자 삐아제(Jean Piaget)와 함께 연구했는데, 삐아제는 어린아이들이 과학자처럼, 즉 실험을 하고 이론을 테스트하면서 배운다고 주장했다. 그후 페이퍼트는 MIT에 와서 초기의 리얼타임 디지털 컴퓨터들에 접근하여 어린아이들에게 가능한 실험의 범위를 확대하고 싶었다. 이는 그 당시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컴퓨터들이 너무 비싸고 너무 컸던 것이다. 그 대신에 페이퍼트는 컴퓨터에 연결된 로봇 거북이와 어린아이들이 그 거북이들에게 명령할 수 있게 하는 언어(로고, Logo) 개발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케이(Alan Kay)인데, 케이는 GUI와 랩탑의 컴퓨팅 패러다임들을 개발했다. 이 디자인 원칙들은 원래 사업가들로 하여금 스프레트시트를 작성하게 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었고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발견하게 하려고 의도된 것이었다. 페이퍼트와 함께 연구한 또 한 사람은 레스닉(Mitch Resnick)인데, 레스닉은 레고 마인드스톰(Lego Mindstorms, 로봇을 만들고 프로그래밍까지 할 수 있는 레고 모델)을 개발했다. 레스닉은 또한 아이들이 프로그램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소프트웨어 스크래치(Scratch, 아이들에게 그래픽 환경을 통해 컴퓨터 코딩에 관한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교육용 프로그래밍 언어 및 환경)의 창출을 이끌었다.

 

팹랩이 두 배씩 증가하기 시작하고 팹아카데미도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페이퍼트는 저자를 찾아와서 팹랩에 대해 대화했다. 저자는 팹랩 전체를 역사상의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페이퍼트는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는 제스처를 했다. 그는 아이들이 거북이의 움직임을 프로그램할 수는 있으나 막상 거북이 자체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 그에게 늘 골칫거리였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거북이를 만드는 것이 늘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팹랩에서의 학습은 그가 수십 년 전에 시작한 작업과 직선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앙컴퓨터를 가지고 놀러 MIT에 가는 것에서 컴퓨터를 탑재한 장난감을 상점에서 사서 노는 것으로, 거기서 다시 팹랩에 가서 컴퓨터를 만들며 노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진행과정이다.

 

[참고] 팹랩 및 팹아카데미 관련 동영상

fablab
https://youtu.be/aPKH60sW_CM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전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권력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과정에서 경제가 금융화되고 난 후 우리에게는 플랫폼 경제에서 출현하는 새로운 기업권력 층이 생겼다. 프랭크 패스콸레(Frank Pascuale)는 우리가 추천하는 아래 발췌한 글에서 이 과정을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 개념에 입각하여 아주 잘 설명하고 있다. 녹화된 발표뿐만 아니라 전문(全文)을 꼼꼼히 읽어보길 바란다. 패스콸레가 설명하듯이, 넷지배 플랫폼(netarchical platform)들 즉 P2P 교환에서 가치를 추출하는 개인 소유 플랫폼들은 우리의 데이터를 소유하고 우리의 행동을 부추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공공부문이 이전에 제공했던 여러 기능들을 제공할 수 있음으로 인하여 커먼즈에 기초한 공동생산•공동거버넌스•공동소유권의 민주적인 책무와 가능성들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무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며 다음 편에서 우리는 플랫폼 자본주의의 혁신에서 무언가를 배워서 수립되는 전략을 제안할 것이다. 아래 발췌는 Open Democracy에서 가져왔다.

(미셸 바우엔스)

디지털 기업들이 방 임대에서 수송(운송) 및 상거래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게 되면서 시민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점점 더 기업의 통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규제범위를 국가권력을 확장하거나 축소하는 단순한 문제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는 사회적 관계가 권력 공백을 싫어한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국가 권한이 축소될 경우 민간 주체들이 그 공백을 메웁니다. 이들의 권력도 행정기관에 의한 흔해 빠진 민법 집행만큼이나 억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곳곳에 스며드는 효과를 가집니다. 로버트 리 헤일(Robert Lee Hale)이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이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게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그들이 언제 복종하거나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할 때는 언제나 통치가 존재한다”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고용관계에서 그리고 대규모 회사가 공급자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낼 때 작동하는 이 권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이 분쟁의 당사자로서가 아니라 그 분쟁을 결정하는 당국으로서 감히 사법 권력을 행사할 경우는 어떤가요? 대규모 디지털 플랫폼들이 상거래와 관련된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게 되면서 이러한 시나리오들이 훨씬 더 일반화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주요 디지털 기업의 정체성과 야망에 대해 말해보죠. 그들은 더 이상 시장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시장을 만드는 주체들로서 다른 사람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팔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 규제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그 동안 정부가 하던 역할들을 더 많이 대체하길 열망하며 영토 주권의 논리를 기능적 주권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방 임대에서부터 운송(수송) 및 상거래에 이르는 기능적 장(場)들에서 사람들은 민주적인 통제보다는 기업의 통제를 점점 더 받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에어비앤비가 방 임대, 그 다음에 주택 임대, 최종적으로는 도시계획 일반을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 데이터에 기반을 둔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을 때, 누가 도시 주택 규제기관을 필요로 할까요? 아마존이 그 자체의 관할구역이나 차터시티(charter city, 특별자치도시)를 갖도록, 또는 폭스콘(Foxconn)을 위한 특별 사법 절차를 제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어떤가요? 기능적 주권의 선봉에 선 일부 사람들은 온라인 등급제 평가가 국가의 직업관련 면허제도를 대신할 수 있고, 가령 정부 위원회에서 노동자들에게 자격증을 주도록 하기 보다는 링크트인(LinkedIn) 같은 플랫폼이 그들에 대한 별점을 수집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영토 주권에서 기능적 주권으로의 바로 이 전환이 새로운 디지털 정치경제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법률 사상가들이 우리가 이 동학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리 밴 루(Rory van Loo)는 아마존 같은 플랫폼들이 구매자와 판매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해결절차를 실행할 때 그 지위를 ‘법원으로서 기업’(corporation as courthouse)이라고 불렀습니다. 밴 루는 아마존의 분쟁 해결 과정이 소액사건 법원에 비해서 얻을 수 있는 효율상의 이득과 소비자들이 놓일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들(예를 들어 불투명한 판결기준들 같은)을 모두 설명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와 같은 경제적인 고려사항들에 덧붙여 전자상거래 봉건주의의 정치경제학적 기원도 고려하고 싶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소비자 권리가 위축되면서 구매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역설하기 위해 (과도한 업무에 짓눌려있는 소액사건 법원보다는) 아마존에 맡기는 게 합리적입니다. 집단소송이 실질적 효력을 잃고, 중재(조정)와 표준문안계약(boilerplate contract)이 증가하는 등, 이 모든 것이 소비자 분쟁에서 사법제도를 점점 더 흔적기관으로 만듭니다. 자유의지론적인 법적 교리가 국가로부터 질서를 부과하는 힘을 박탈했기에 개인들로서는 온라인 거인들에게서 이 힘을 찾는 것이 합리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이 거인들은 애초에 국가의 쇠퇴를 낳았던 바로 그 동학을 강화합니다.

이 약점은 최근에 아마존이 제2본사의 입찰 경쟁을 조장하기로 결정한 데서 농담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시장들은 자신들의 시에 일자리가 생기도록 해달라고 비굴하게 간청했습니다. 리처드 세일러(Richard Thaler)의 『승자의 저주』(The Winner’s Curs)의 독자라면 예측했듯이 경쟁으로 결정되는 동학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인센티브로서 너무 많이 제안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저널리스트 대니 웨스트니트(Danny Westneat)가 최근에 다음과 같은 것을 입증했습니다.

∙시카고 시에서는 아마존에게 노동자들이 내는 소득세에서 13억 2천만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레즈노 시는 아마존에게 아마존이 내는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특별 권한을 줄 새로운 계획을 갖고 있다.

∙보스턴 시에서는 시 공무원들로 ‘아마존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아마존을 위해 일하도록 하겠다고 제안했다.

∙조지아주의 스톤크레스트(Stonecrest) 시에서는 심지어 땅의 일부를 떼 내어서 베조스에게 ‘조지아주 아마존’으로 알려지게 될 345에이커의 부지의 시장이 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아마존의 예

아마존이 부상한 것은 교훈적입니다. 리나 칸(Lina Khan)이 “아마존이 전자상거래 중심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아마존에 의존하는 다수의 다른 기업들에게 꼭 필요한 기반시설로서 역할을 한다”라고 설명했듯이 말이죠. ‘모든 것을 파는 상점’(everything store)은 경제에서 그저 또 하나의 서비스처럼 보일 것입니다. 즉 가상 쇼핑몰이죠. 하지만 한 회사가 수천만 명의 고객들과 ‘마케팅 플랫폼, 배달 및 물류 네트워크, 지불 서비스, 신용 대출 기관, 경매 회사…하드웨어 제조업자, 그리고 클라우드 서버 공간을 제공하는 선도적인 호스트’를 결합시킬 때 이것은 칸이 말하듯이 단지 또 하나의 쇼핑 선택권이 아닙니다.

디지털 정치경제학은 플랫폼들이 어떻게 권력을 축적하는지를 우리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온라인 플랫폼의 경우에는 ‘최상의 서비스가 이긴다’라는 단순한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는 20여 년 동안 사이버법(및 디지털 경제학)의 의제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아마존의 지배는 네트워크 효과가 어떻게 자기강화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죠. 상인들이 아마존에서 (또는 아마존에게) 팔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쇼핑객들은 가능한 모든 판매자들을 검색하고 있다고 그만큼 더 잘 확신할 수 있습니다. 쇼핑객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판매자들이 아마존을 ‘꼭 필요한’ 장소로 여깁니다. 플랫폼 양쪽에 사람이 늘게 되면 가운데 있는 중개자가 점점 더 필수 불가결해집니다. 물론 새 플랫폼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만, 그 플랫폼이 아마존처럼 4억 8천만 개 품목을 (종종 대폭할인으로) 판매하는 데 도달할 때까지는 일반 소비자가 새 플랫폼으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쓰레기봉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가 실제로 Target.com으로 옮겨가서 신용카드 정보를 다시 입력하여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쇼핑에 관한 세부 약관을 읽고 이 유통업체가 글래드(Glad)와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등, 이런 과정을 거치고 싶어 할까요? 또는 제가 썬스타인(Cass Sunstein) 식으로 제 과거 구매 습관을 상세하게 알아서 한번 클릭으로 만족하게 해주는 예측전문 조달업자를 원할까요?

인공지능이 향상되면서 아마존에서 습관화된 쇼핑 이력을 추적하는 것은 구매자들에게나 판매자들에게나 합리적으로 보이는 경향이 있을 것입니다. 밟아서 점점 뚜렷해지는 숲속의 오솔길처럼 그것은 자연스럽게 디폴트가 됩니다. 온라인 거대기업 속으로 돈, 데이터 및 상거래를 빨아들이는 여러 구심력들 가운데 하나를 살펴보려면 온라인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것이 어떻게 아마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게임이론의 방식으로 생각해보세요. 온라인에서 한 상인과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일회성 구매자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수십 또는 수백 번이 넘는 거래를 통해 평판이 선 누군가로서, 또한 아마존에게 매년 수백 또는 수천 달러의 수익을 주지 않겠다고 확실히 위협할 수 있는 누군가로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십니까? 상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그들이 아마존에게 바치는 것이 많을수록 분쟁이 발생할 때 검색결과와 주목(그리고 어쩌면 선호도)에서 가시성을 획득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브루스 슈나이어(Bruce Schneier)가 보안에 대해 말한 것이 온라인 상거래에도 점차적으로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은 무법의 영역에 질서를 가져오는 신봉건적인 한 거인들 가운데 하나에게 은총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디지털 영주들이 외관상으로는 보호하는 것으로 되어있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가진 데이터상의 이점들을 불리하게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금세 할 것입니다.




플랫폼 협동조합 설립을 위해 점검해야 할 다섯 가지 일들



공유경제 기업들이 착취적인 노동 관행들, 데이터 프라이버시 문제들 등으로 빈축을 사면서 이 플랫폼들의 몇몇 부정적인 영향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되고 있는 또 하나의 운동이 있다. ‘플랫폼 협동조합’(platform cooperatives)이라고 불리는 이 디지털 기업들은 전통적인 협동조합들이 사용한 토대에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에서 지속가능하고 민주적인 긱노동에 새로운 경로를 제공하고 있는 플랫폼 협동조합의 예로는 <그린 택시>(Green Taxi), <스톡시유나이티드>(Stocksy United)[셰어러블의 후원자] 및 <Up&Go>가 있다. 하지만 이것이 플랫폼 협동조합들이 빠질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적인 플랫폼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은 시장에서의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노력과 자원 투자를 필요로 한다. 다섯 가지 중요한 고려 사항들이 아래에 있다.

  1. 시장

플랫폼들은 네트워크 효과 때문에 성공한다.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플랫폼은 더 잘 기능한다. 대안적 플랫폼으로 전환하도록 모든 사람을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네트워크 효과를 깨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수요와 공급이 서로 물리적으로 밀접한 지역 사업들인 경우에 이 일은 약간 더 쉬운 과제이다. 플랫폼 협동조합을 창출하기 전에 제공할 서비스가 지역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플랫폼 협동조합이 국경을 가로질러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더 큰 시장과 연결되는 데는 시간, 노력 및 자원이 더 많이 든다.

 

  1. 테크놀로지

플랫폼 협동조합에는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1. 자체 테크놀로지를 개발하기

 

  1. 필요한 지원과 테크놀로지를 제공하는 협동조합에 가입하기

 

  1. 해당 산업에 있는 기존의 테크놀로지를 활용하기

 

어떤 방식을 당신의 플랫폼 협동조합이 선택하느냐는 당신이 그 방식에 할당할 수 있는 자원과 전문적 기술에 달려 있다. 다양한 플랫폼 협동조합들이 서로 기술 투자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이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주목해야 할 중요한 것은 플랫폼 협동조합에서 사용하는 테크놀로지도 그 혜택을 최대화하기 위해 협동조합 원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는 지역의 자전거 배달 부문에 세 개의 ‘메타’ 플랫폼 협동조합들—<쿱사이클>(CoopCycle), <아피꼴리스>(Applicolis), <블록푸드>(Blockfood)—이 있으며, 이 협동조합들은 정보통신기술•마케팅•판매를 촉진한다. 배달원으로 이루어진 노동자 협동조합을 모든 도시에 만들고, 모든 노동자 협동조합들이 다 같이 메타 협동조합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다. 이것이 그들의 안전과 미래의 연속성을 보장할 것이다. 연합함으로써 그들은 더 많은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공동 구매를 활용할 수 있다.

 

  1. 정부

지역 및 중앙 정부는 보다 민주적인 활동의 장을 제공하기 위하여 새로운 플랫폼 협동조합을 대상으로 진입 문턱을 낮추기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부들은 ‘좋은 기업 인증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거나 그런 플랫폼에 세금 혜택을 제공할 수 있다. 이것 말고도 정부는 거대 기업들의 데이터 독점을 방지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플랫폼 협동조합 창출을 지원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역법 및 국가법과 정책들을 주시하라.

 

  1. 지원

플랫폼의 힘은 플랫폼 사용자의 호의에 달려있다. 수요 집단이나 공급 집단이 연합할 경우 당장에 힘을 발할 수 있다. 기존 연합들, 부문 조직들 내지 노동조합들이 플랫폼 협동조합을 지원하거나 설립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플랫폼 협동조합은 그런 조직들과 파트너가 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원을 찾으라. 그리고 또한 당신의 기업이 그 보답으로 그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찾으라. 그 조직들은 금융, 로비활동 및 다른 지원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수 있다.

 

  1. 품질

지역 노동자 집단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운영할 때 앱, 서비스의 품질과 편리성을 낮추거나 심지어는 가격 수준에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 플랫폼 협동조합을 시작하기 전에 당신의 플랫폼 협동조합이 더 큰 벤처자본의 후원을 받는 플랫폼들에 대한 솔직한 대안을 실제로 제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깊이 숙고해서 판단하라.

 

플랫폼 협동조합을 만들 많은 기회가 있더라도 그 모형을 실현하는 것이 처음에 제시된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더 까다롭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렵채취인들은 어떻게 평등주의 문화를 유지했는가


  • 저자  :  Peter Gray PhD ((Peter Gray, Ph.D. : 보스턴 컬리지의 연구교수이며 『자유롭게 배우기』(Freed to Learn, Basic Books, 2013)와 『심리학』(Psychology, Worth Publishers)의 저자이다.))
  • 원문 : How Hunter-Gatherers Maintained Their Egalitarian Ways (2011. 5. 19)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그레이 박사는 이 글에서 수렵채취인들이 평등주의적 문화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세 가지 이론을 소개한다. 그는 이 셋 모두가 모두 옳다고 한다.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이 아니라 보완적인 이론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유전자가 핵심이 아니고 문화가 핵심이라고 한다.

[수렵채취사회의 특징들]

그레이 박사는 세 이론을 소개하기 전에 ‘수렵채취인들이 평화적인 평등주의자들이었는가?’하고 묻고는 ‘그렇다’라고 간결하게 답하고 그 근거를 설명한다.

20세기에 인류학자들이 근대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은, 멀리 떨어진 여러 지역에서 수렵채취사회들을 연구했는데, 이 사회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혹은 다른 어디든, 정글에서든 사막에서든 여러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20~50명(아이들 포함)의 작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상대적으로 제한된 지역에서 사냥감과 식용 식물을 쫓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동했다. 이웃 무리들에는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었고 무리들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가 유지되었다. 이들 사회의 대부분은 전쟁을 몰랐으며, 전쟁이 있는 경우 이는 수렵채취인들이 아닌 다른 호전적인 집단들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였다. 이들의 사회의 주된 문화는, 개인의 자율, 비지시적(non-directive) 육아법, 비폭력, 공유, 협동,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을 강조하는 문화였다. 그 핵심 가치는 개인들의 평등이었다.

근대인들의 평등관은 수렵채취인들의 평등관에 미치지 못한다. 수렵채취인들에게 평등은 각 개인이 식량을 발견하거나 포획하는 능력과 무관하게 식량에 대한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식량이 공유되었다. 모든 물질적 재화가 공유되었기에 개인들이 가진 부의 차이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무얼 할지를 말할 권리가 없었고 각자 자신의 결정을 했다. 이에 따라 부모도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비지시적으로 아이를 키운다. 집단의 결정도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따라서 상사, 윗사람, 우두머리가 없었다.

이러한 특징은 정치적 색깔이 서로 다른 많은 인류학자들에 의해 보고된 것이다. 물론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모든 문화가 똑같이 평화적이고 똑같이 평등주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적 측면들은 같다. 만일 당신이 ‘호전적인 원시부족들’에 대해서 읽거나 노예를 둔 토착민들에 대해서 읽거나 남녀 사이의 조악한 불평등이 존재하는 부족 문화에 대해서 읽게 된다면, 이는 수렵채취인들의 무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원시농경 사회와 수렵채취 사회를 혼동하여 수렵채취인들이 폭력적이고 호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샤농(Napoleon Chagnon)이 『사나운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가진 자신의 책에서 농경사회 이전의 선조들을 대표하는 것으로 제시하려고 해서 유명해지는 바람에 이런 잘못된 식으로 자주 거론되는 남아메리카의 야노마미(Yanomami) 족은 당시 수렵채취인들이 아니었고 또 그 이전 수 세기 동안 아니었다. (그레이 박사는 샤농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야노마미 족은 수렵과 채취를 좀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들이 심고 경작하고 수확하는 바나나와 플랜턴(plantain, 열대의 파초 속 식물)에서 칼로리를 섭취한다. 더욱이 이들은 근대 문명과 접촉이 없기는커녕 정말로 사악한 스페인들, 네덜란드인들,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계속적으로 침략당하고 학살당해서((Salamone, F. A. (1997). The Yanomami and their interpreters: Fierce people or fierce interpreters? Lanham, Marylan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좀 ‘사나워’ 진 것이 놀랄 일이 아니다.

수렵채취인들의 삶의 방식은 그 뒤를 이은 농경사회의 삶의 방식과 달리 강렬한 협동과 공유에 의존했으며 강한 평등주의적 정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따라서 수렵채취인들은 어디서나 강한 평등주의적 정신을 유지했다.

그럼 수렵채취인들은 어떻게 이런 삶의 방식을 유지했을까?

[첫째 이론]

이론 1: 수렵채취인들은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는 ‘거꾸로 된 지배’(reverse dominance) 제도를 실행했다.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취인들이 수동적으로 평등주의적인 것인 아니라 능동적으로 평등주의적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인류학자 리처드 리(Richard Lee)에 따르면 그들은 맹렬하게 평등주의적이었다.((Lee, R. B. (1988). “Reflections on primitive communism”. In T. Ingold, D. Riches, & J. Woodburn (Eds), Hunters and gatherers 1, 252-268 Oxford: Berg. )) 그들은 누가 허풍을 떨거나 잘난 체 하거나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참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첫 방어선은 조롱이었다. 누가 (특히 젊은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행동을 하려고 시도하거나 일상생활에서 적절한 겸손을 보이지 못하면, 집단의 나머지 사람들(특히 어른들)이 그 사람을 적절한 겸손을 보일 때까지 조롱했다.

리가 연구한, 수렵채취인 집단의 규칙적인 관행은 ‘사냥한 고기 모욕하기’이다. 사냥꾼은 자신이 잡아온 고기를 공유하면서, 살도 없고 변변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적절한 겸손을 표현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그렇게 말한 다음 사냥한 사람을 조롱한다. 리가 집단의 연장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젊은이가 사냥감을 많이 잡으면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을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랑을 하는 사람을 거부합니다. 언젠가 그의 오만이 그로 하여금 누군가를 죽이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의 고기가 변변치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의 심장을 식히고 그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크리스토퍼 보엄(Christopher Boehm)은 이런 관찰에 기반을 두고 수렵채취인들이 그가 ‘거꾸로 된 지배’라고 부른 관행을 통해 평등을 유지한다는 명제를 제시했다. 유인원의 모든 친척들에게서 보이는 표준적인 지배 위계에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지만, ‘거꾸로 된 지배’에서는 다수가 힘을 합하여 그들을 지배하려는 자의 에고를 수축시킨다.

보엄에 따르면 수렵채취인들은 평등주의적 정신을 어기는 행위들을 부단히 경계한다. 자랑을 하거나 공유하지 않거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은 공격적 행동을 멈출 때까지 성가심을 당하며, 성가심이 효과가 없으면 그 다음 단계로 따돌림을 당한다. 무리는 마치 평등 정신을 어긴 자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는 대부분 효과가 있다.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평등 정신을 어긴 자는 정상 상태로 돌아오거나 다른 무리를 찾아야 한다. 그는 새로 찾은 무리에서 정신을 차릴 수도 있고, 같은 일을 반복할 수도 있다. 보엄은 자신의 1999년 책 『숲 위계질서』(Hierarchy in the Forest)에서 이 ‘거꾸로 된 지배’ 이론에 대한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한다.

[둘째 이론]

이론 2: 수렵채취인들은 인간 본성에서 놀이를 좋아하는 측면을 양성함으로써 평등을 유지했으며, 놀이가 평등을 증진한다.

이는 이 글의 저자인 그레이 박사의 이론이다. 2년 전에 그가 American Journal of Play에 게재한 논문(( Gray, P. (2009). “Play as a foundation for hunter-gatherer social existence”. American Journal of Play, 1, 476-522.))에서 이 이론을 처음 소개했다고 한다.

사회적 놀이(두 명 이상이 참여하는 놀이)는 반드시 평등주의적이다. 공격과 지배의 정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한 참여자가 다른 참여자보다 더 잘 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이 인식으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상대방 위에 군림하게 되지는 않는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두 원숭이가 장난으로 싸움을 하는 경우에 강한 쪽이 일부러 접어주고 싸우며 상대를 다치게 할 공격을 피한다. 진짜 싸움과는다르다. 만일 강한 쪽이 이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약한 쪽은 도망갈 것이고 놀이는 끝난다. 따라서 놀이의 충동은 지배하려는 충동의 억제를 필요로 한다.

수렵채취인들은 그 사회적 활동의 모두에서 놀이의 태도를 일부러 양성함으로써 지배하려는 경향을 억제하고 평등주의적 공유와 협동을 촉진했다. 포유류 조상으로부터 인간이 물려받은 놀이 능력이 역시 포유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지배하는 능력을 가장 잘 상쇄하는 자연스러운 능력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레이 박사의 놀이 이론은 대체로 인류학 문헌들의 분석에서 거둔, 놀이가 수렵채취인들의 사회적 삶에 스며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에 대체로 기반을 둔다. 그들의 사냥과 채취는 놀이로서의 성격을 띠었으며 종교적 믿음과 관행들도 그랬고 무리 내부에서나 외부에서 고기를 나누고 재화를 공유하는 관행도 그랬다. 심지어는 집단 내에서 규칙을 어긴 자들을 해학과 조롱을 통해 처벌하는 가장 공통적인 방법에서도 그랬다.

[셋째 이론]

이론 3: 수렵채취인들은 새로운 세대에 신뢰와 수용의 감정을 생성하는 육아 관행을 통해 평등 정신을 유지했다.

수렵채취인들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육아 스타일을 택했다. 그들은 유아들/아동들의 본능을 신뢰했으며 그래서 언제 돌봐줘야 하는지를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고 스스로 놀고 탐구하면서 학습하도록 허용했다.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지 않았으며 꾸짖는 경우도 드물었다. 수렵채취인들의 도덕적 성격이 이 육아법에서 온다고 제안한 연구자는 엘리자베스 마샬 토머스(Elizabeth Marshall Thomas)이다. 그녀는 자신이 관찰한 육아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친절하게 다루어진 아이들은 응석받이가 된다는 말을 때때로 듣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런 방법이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는지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 좌절이나 염려로부터 자유롭고, 즐겁고 협동적인 아이들은 모든 부모들의 꿈이다. 그 어떤 문화도 이보다 더 나은, 더 똑똑하고 더 호감이 가며 더 자신 있는 아이들을 키운 적이 없다.”((Thomas, E. M. (2006). The old way. New York: Farrar, Straus & Giroux. p 198-199))

이 육아 이론을 경험적 증거를 가지고 입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이론은 직관적으로 말이 된다. 처음부터 부모들이 신뢰하고 잘 대해준 유아들과 아동들이 자라서 남을 신뢰하고 잘 대해줄 것이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필요가 하나도 혹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이다.

육아 이론은 나의 놀이 이론과 겹친다. 수렵채취인들은 아이들이 하루 종일 놀도록 허용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라서 삶이 놀이라고 믿게 되고 어른으로서 맡게 되는 과제들 모두를 놀이의 분위기에서 수행하게 된다. 이 분위기가 지배하려는 충동을 상쇄해주는 것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그레이 박사의 주장의 핵심은 유전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있다. 인류는 분명 한편으로는 평화롭고 평등주의적이 될 유전자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호전적이고 전제적이 될 유전자적 잠재력도 가지고 있다. (혹은 그 사이의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만일 위 세 이론이 옳다면 그리고 우리가 평등과 평화의 가치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세 이론이 제시하는 바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레이 박사의 생각이다. 즉 ① 에고의 바람을 빼는 방법을 찾을 것. ② 삶의 방식을 놀이에 더 가깝게 만들 것. ③ 아이들을 신뢰하는 방식으로 키울 것.




고조되는 협동조합 운동 – 슈나이더와의 인터뷰

 


  • 저자  :  Nathan Schneider, Amy Goodman, Juan Gonzalez
  • 원문 :  Interview: Nathan Schneider with Amy Goodman and Juan Gonzalez, Democracy Now (2018.09.18)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Noncommercial-No Derivative Works 3.0 United States License

  • 분류 : 번역

  • 옮긴이 : 민서
  • 설명 : 아래는 Democracy Now!의 2018년 9월 18일 자 뉴스에서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를 인터뷰한 것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번 주는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7주년이자 미국 투자 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여 세계 금융위기가 촉발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이 위기는 ‘월가를 점령하라’, 스페인의 M-15 운동 및 그리스의 긴축재정 반대운동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대대적으로 반자본주의 운동들을 촉발했다. 저자이자 활동가인 네이선 슈나이더(Nathan Schneider)는 “우리가 이 날들, 특히 경제가 붕괴된 날을 거의 추념하지 않는 ··· 이유는, 붕괴의 원인···을 다루기 위해 우리가 정말로 어떤 진지한 일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슈나이더는 자신의 신간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부활한 협동적 소유권에 기반을 둔 대안적 경제 모형의 윤곽을 그린다. 이 신간의 제목은 『모두를 위한 모든 것—앞으로의 경제를 형성하는 급진적인 전통』(Everything for Everyone: The Radical Tradition That Is Shaping the Next Economy)이다.

 

후안 곤살레스

이번 주는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7주년이자 미국 투자 은행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여 세계 금융위기가 촉발된 지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미국 정부가 월 스트리트의 최대 부실 은행 몇 곳에는 공적자금을 지원했지만, 미국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집과 평생 모은 재산을 날렸습니다. 유럽의 활동가들은 주말 내내 10주년을 추념하기 위해 프랑스와 독일 은행 밖에서 항의했습니다.

 

에이미 굿맨

금융위기는 이곳 미국에서의 점거운동과 스페인의 15-M 운동 및 그리스의 긴축재정 반대운동을 포함해서 전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들을 대대적으로 촉발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금융위기의 영향에 관해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네이선 슈나이더씨와 함께 합니다. 네이선 슈나이더씨는 협동적 소유권에 기반을 둔 대안적 경제 모형의 윤곽을 그리는 신간의 저자이시며, 협동조합 운동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다시 고조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슈나이더씨의 책이 막 발간되었습니다. 책 제목이 『모두를 위한 모든 것—앞으로의 경제를 형성하는 급진적인 전통』(Everything for Everyone: The Radical Tradition That Is Shaping the Next Economy)입니다. 최근에는 「부자들이 미국을 망가뜨리고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Rich People Broke America and Never Paid the Price”)라는 헤드라인이 달린 그의 이 <바이스>(Vice)지에 실렸습니다. 또한 『고마워, 아나키—오큐파이 아포칼립스로부터의 소식』(Thank You, Anarchy: Notes from the Occupy Apocalypse)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네이선 슈나이더 씨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며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의 미디어학 교수입니다.

<디마크러시 나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막 볼더에서 오셨군요. 자, 경제 붕괴라고 불리는 것의 10주년과 당신이 아주 큰 부분을 차지했던 오큐파이운동 7주년, 이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네이선 슈나이더

우리가 이 날들, 특히 경제가 붕괴된 날을 거의 추념하지 않는 게 놀랍습니다. 경제 붕괴가 지난 10년을 규정했고 제 세대를 규정했으며 아주 많은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그날을 추념하지 않는 이유는, 붕괴의 원인과 붕괴에 대한 끔찍한 반응을 다루기 위해 우리가 정말로 어떤 진지한 일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붕괴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집과 일자리를 잃어야 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상력이 바닥나 있는 동안에도, 풀뿌리 수준에서 그리고 점점 더 정책 수준에서 운동이 조용하게 성장하여 이런 협동조합 기업 전통을 통해 세상을 바꿀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곤살레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경제 위기 이전에도 수십 년 동안 미국에 협동조합 운동이 있었죠. 붕괴 이후에 일어난 변화를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해주세요.

 

슈나이더

물론, 오랜 전통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것은 농부들에게 힘을 실어준 전통이자 소기업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전통이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저의 조부가 소규모 철물점들이 살아남고 번창할 수 있도록 하는, 전국적인 철물점 구매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기여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요, 저는 그것이 협동조합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배운 어떤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붕괴 이후 몇 년 동안 예를 들어, 2011년 점거 운동을 하는 동안 ‘예금 옮기기’(Move Your Money) 날이 있었는데 이날 수십만 개의 계좌가 대형 은행에서 신용협동조합(은행에서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들이 소유한 은행)으로 이동했습니다. 전국적으로 특히 도시에서 노동자 소유권에 대한 관심, 즉 노동자들이 그들이 고용된 사업체의 소유주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점점 더 연방정부의 전략으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놀라울 정도로 초당파적인 기회입니다. 10년 전 있었던 우리 경제 시스템의 실패를 실질적으로 벌충할 조용한 기회죠.

 

곤살레스

하지만 일부 약탈적인 자본가들도 사업가들 간의 협동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거나 발전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소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에어비앤비, 우버 같은 공유 경제 전체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일종의 협동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고 이것으로 어떻게 돈을 벌 수 있을까 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슈나이더

맞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지만 협동조합 만들기가 사실상 원조 크라우드펀딩이었으며 원조 공유경제였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이제 우버와 에어비앤비의 경제가 진정한 공유경제가 아니라 추출경제라는 사실을 알 만큼 똑똑해졌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관심을 가지고 주로 추적해 온 것은 세계 전역에서 일군의 사람들이 진정한 공유경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입니다. 디지털 도구들을 사용해서 맨 아랫사람까지 소유권과 거버넌스를 모두 공유하고 최전방 노동자들—청소하는 사람들과 운전자들 등등—이 자신들의 노동 기준을 직접 결정하는 긱경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죠.

 

에이미 굿맨

이것은 당신이 ‘월가를 점거하라’에서 당신이 말하는 장면입니다. 일곱 번째 기념일이 어제 9월 17일 월요일이었는데요, 이것은 저기 주코티 공원에서 당신이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은 집회입니다. 제 생각에 현재의 핵심요구 사항은 조직할 권리, 공공장소에서 정치적인 대화를 나눌 권리, 말하자면 월 스트리트에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줄 권리인 것 같습니다.”

슈나이더씨, 저것은 7년 전 당신의 영상이에요. 이제 당신은 이 책을 쓰셨군요. 당신이 말하고 있는 이 급진적 전통과 전 세계에서 상승세를 타고 있는 협동조합, 구체적으로 이것들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이 기대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세요.

 

슈나이더

놀랍게도 저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일상적인 삶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생각은 우리가 잃어버린 일종의 희망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1930년대와 40년대에도 미국 정부가 촉진하고 있던 그런 것이었죠. 그것은 잊혀진 가능성,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개개의 기획들과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플랫폼을 소유하고 운영하는 방법을 습득하는 긱경제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지금껏 우리가 보아온 것과는 사뭇 다른 기회가 놓여있는데, 현재 실버 쓰나미(silver tsunami)(([옮긴이] 실버 쓰나미(Silver Tsunami)는 급격한 인구 고령화를 빗댄 말로 주로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시기를 나타낸다.))로 알려진 현상으로 기업 소유주들 전부가 은퇴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전국의 고용주들인 중소기업들이 사적 지분에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바로 이 상황이야말로 직원 소유권으로 전환할 기회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정책도구와 제대로 된 쓸모 있는 금융도구를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기회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회운동들과도 연결됩니다.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위한 강령은 그 정책제안들에서 ‘협동’과 유사한 단어들을 40번 이상 언급했습니다. 이것은 사회운동이 협동조합 기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곤살레스

그렇다면 정치권력 구조에 어떠한 종류의 변화도 없다면 입법자들이 협동조합 운동들을 억제할 방법과 사회에서 특혜 받는 위치에 있는 독점자본이나 대자본을 유지할 방법을 항상 내놓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슈나이더

이상한 것은 사실상 이것이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로지르며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이라는 것입니다.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긴 하지만요. 아시다시피 실제로 민주당과 공화당의 2016년 강령은 노동자 소유권이 늘어나는 것을 지지합니다. 지난 2년 동안 민주당은 이것이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기를 원하는 쟁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 왔죠. 불과 2주전에 기업의 노동자 소유권과 기업의 전환을 촉진하는 메인스트리트 고용인소유권 법안(Main Street Employee Ownership Act)이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양극화된 이 순간에 우리에게 흥미로운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미 형성되기 시작한 정치적 토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토대를 강화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10년 전 붕괴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시스템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요구사항을 훨씬 큰 소리로 키워서 저들이 경청하도록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굿맨

긱경제와 조작된 경제(rigged economy)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슈나이더

조작된 경제—맞습니까?—는 책임이 위로 향하는 경제로서, 이 경제에서 기업은 궁극적으로 소수의 주주들과 대규모 투자자들에게만 책임을 지게 됩니다. 기업이 모진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기업의 책임은 위로 향하고, 담보대출금 때문에 위태로운 사람들은 책임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긱경제는 어떤 의미에서 기회이자 위험입니다. 긱경제는 그것이 노동자들이 수십 년 동안, 수백 년 동안 쟁취해온 것을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는, 종종 그런 의미였다는 점에서는 위험입니다. 하지만 긱경제가 보다 유연한 노동의 기회를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노동자들이 실제로 통제권을 쥐고 있는 노동의 미래를 창출할 기회가 됩니다.

 

굿맨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에 대해 누가 책임을 졌는가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10년 전에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가 하는 사실이 있죠?

 

슈나이더

제 생각에 우리는 사실상 아무에게도 충분할 정도로 책임을 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가지 않은 사람 등에 대한 이야기도 한동안 많이, 혹은 상당히 있었습니다.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도구세트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준거할 수 있는, 입증된, 사실상 초당적인 전통도 있습니다.

 

굿맨

네이선 슈나이더씨는 콜로라도 대학교 볼더 캠퍼스의 미디어학 교수입니다. 그의 신간은 『모두를 위한 모든 것—앞으로의 경제를 형성하는 급진적인 전통』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저는 후안 곤살레스와 함께 하고 있는 에이미 굿맨입니다. 함께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3차 디지털 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2

  • 저자  : Neil Gershenfeld, Alan Gershenfeld, Joel Cutcher-Gershenfeld

  • 원문 : Designing Reality: How to Survive and Thrive in the Third Digital Revolution(2018)의 서설(Introduction) 
  • 분류 : 일부 내용정리
  • 정리자 : 민서

3차 디지털 혁명에서의 생존과 번영- 2

 

디지털 제작의 힘과 전망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3차 디지털 혁명에 동력을 공급하는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는 것과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해야 하는 사회체계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저자들 가운데 테크놀로지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길잡이는 닐 거션펠드이다. 닐은 20년 동안 디지털 제작의 선구자로 일해오고 있으며 코앞에 와있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에서 업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각하는 사물』(When Things Start to Think, 1999)에서 사물인터넷으로 알려지게 된 것을 미리 내다보고 그것을 실현하는 데 기여했으며 『팹』(Fab, 2005)에서는 팹랩들과 메이커 운동들(maker movements)의 출현을 설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디지털 제작의 힘과 전망을 소개했다.

 

『현실을 설계하기』에서 닐은 이 추세가 어떻게 3차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졌는지를, 이 추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진화하는 연구 로드맵의 미래에서 이 추세가 어떻게 보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사물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소재의 짜임새를 디지털화한다면, 『스타트렉』식의 복제기(물질재조합장치) 같은 것도 가능함을 보여준다.

 

닐은 팹랩 운동의 우연한 기원 이야기로 1장을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공동체 팹랩들이 전 지구적 네트워크 전역에서 사용되고 있는 방식을 살펴보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디지털 제작 과정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미 힘을 부여하고 있는지를 부각시킨다. 노르웨이 북쪽 끝에서 아프리카 남쪽 끝까지, 시골 마을에서 불규칙하게 확대되는 도시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 기반을 둔 팹랩들은 혁신을 분출시켰고 디지털 제작의 힘과 잠재력의 초기 징후들을 제시했다.

 

3장에서 닐은 3차 디지털 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과학적 토대의 역사를 현재의 시점에서 탐구한다. 그는 이 토대가 어떻게 생명이 분자 제작을 위한 기계를 발전시킨 40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설명하고, 그 바탕에 있는 신뢰성, 모듈방식, 지역성 및 가역성이라는 원칙이 어떻게 디지털 통신기술, 컴퓨팅 및 제작을 통합하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로 기여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테크놀로지가 그 최종 형태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그것이 함축하는 바를 포착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강조한다.

 

닐은 이 3장에서 라스의 법칙(Lass’ Law)을 소개하는 데 이것은 디지털 제작에 적용되는 무어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법칙의 이름은 셰리 라시터(Sherry Lassiter, 일명 ‘Lass’)에게서 온 것이다. 선도적인 <팹 재단>(팹랩 네트워크를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과 함께 라시터는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의 지역사회봉사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팹랩 요청서들의 더미가 커져가는 속도를 보고 팹랩의 수가 1년 반마다 대략 두 배가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팹』을 쓸 때 닐은 이런 급격한 성장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 당시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는 몇 개 안되는 최초의 팹랩들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닐에게 2003년은 팹랩의 시작점이고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팹랩들의 수는 두 배가 되었다. 이제 라스의 법칙을 적용하면 향후 10년 정도에 걸쳐 100만 개의 팹랩에 해당하는 능력이, 그리고 그 다음 10년에 걸쳐 10억 개의 팹랩에 해당하는 능력이 생성됨을 의미한다. 공간을 채우는 10억 개의 시설이 들어선다는 말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융합, 접근성 및 범위에서의 진전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규모가 커지면서 중요해진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바와 같은 팹랩이 아니라 물리적 형태를 제작하고 그 기능을 프로그램하는 능력이다.

 

닐은 팹랩에서 현재 사용하는 도구들의 목록과 그 도구들에 대한 설명으로 5장을 시작한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이 뚜렷이 구분되는 4단계를 개관한다. ① 공동체 제작(기계를 통제하는 컴퓨터가 추동함) ② 개인 제작(기계를 만들 수 있는 기계에 바탕을 둠) ③ 보편적 제작(디지털 재료로의 이행을 표시함) ④ 유비쿼터스 제작(재료가 프로그램 가능함).

 

그런데 3차 디지털 혁명의 핵심요소들이 랩에서 등장해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우리는 이 영향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사회 시스템이 3차 디지털 혁명을 가속화하는 기술과 함께 효과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도록 안내하는 길잡이는 조엘과 앨런이다. 조엘과 앨런은 첫 번째 랩을 시작한 이후 팹랩 운동에서 닐과 함께하고 있다. 조엘은 일리노이 주 섐페인 어배너에서 팹랩을 시작하는 것을 도왔고 팹 네트워크를 가로질러 새로운 이해관계자 연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주도했다. 앨런은 팹랩에 맞는 지속가능한 모형을 연구했고 그가 설립한 <이라인 미디어>는 <팹재단> 및 <비트와 원자를 위한 센터>와 협력해서 미국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의 자금지원을 받아 디지털 제작의 미래를 탐구하는 비디오 게임을 작업했다.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할 때 조엘과 앨런은 전 세계 팹랩들을 방문했고 수십 명의 팹 선구자들을 인터뷰했으며 수백 명의 이해관계자들을 조사했다.

 

닐은 테크놀로지 로드맵을 연구하고 테크놀로지를 활용할 만한 도구와 기술들을 제안한다. 조엘과 앨런은 사회적 로드맵을 연구하고 사회 시스템과 기술 시스템이 함께 진화할 수 있게 하는 방법과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2장에서 조엘과 앨런도 현재 구축된 전 지구적인 팹랩의 네트워크를 관찰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러나 닐과 다르게 그들은 힘을 북돋고 즐거움을 주는 측면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팹랩 네트워크에 스며드는 긴장과 문제들도 부각시킨다. 개별 제작의 전망과 자신이 소비하는 것을 제작하는 개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디지털 제작이 대부분 사람들에게 현실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팹에의 접근, 팹 리터러시 및 진정으로 민주화된 기술을 보장하는 생태계의 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 팹 생태계 도처에 있는 분리현상들을 관찰하는 것은 그 바탕에 함입되어 있는 전제를 그리고 상충하는 가치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현재의 작업흐름을 완전히 익히는 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오늘날 팹랩의 혜택들은 결과보다는 제작과정에서 나온다. 앞으로 디지털 제작이 우리가 소비하는 것을 만드는 데로 나아가려면 결과에 비중을 더 두는 방향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4장에서 앨런과 조엘은 어떻게 무어의 법칙이 기술적 구축물 못지않게 사회적 구축물인지를 강조한다. 무어의 법칙은 결코 물리학 법칙이 아니며 관찰의 기록인데, 이것이 회사를 위한 핵심 사업전략이 되고 산업의 벤치마크가 되며 마지막으로 더 좋고 더 빠르고 더 값싼 디지털 기술을 활성화하는 틀이 된 것이다. 4장은 사회적인 변화와 기술적인 변화의 상호교직이 새롭지 않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런데 사회과학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반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지배적인 관행은 테크놀로지의 공동창출보다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관찰이다. 보다 진취적인 입장 취하기는 개인들·조직들·제도들이 변화의 속도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속도 제한장치와 속도 가속장치가 핵심적인 역할들을 할 것이며, 기술적 체계와 사회적 체계를 효과적으로 함께 진화시키기 위해 디지털 플랫폼과 새로 출현하는 생태계가 가진 힘을 이용하는 데 있어서는 1, 2차 디지털 혁명에서 배운 교훈들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조엘과 앨런은 6장에서 디지털 제작의 미래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작업을 구체적으로 안내한다. 그들은 다섯 대륙의 팹 선구자들과 공동으로 만들어낸 야심적인 여덟 개의 시나리오를 설명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사회적 체계와 기술적 체계는 함께 진화한다.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미래를 위한 심상지도(mental maps, 인지지도)만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심상지도가 필요하다. 이 더 나은 미래를 현실로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조엘과 앨런은, 모든 사람이 3차 디지털 혁명에서 의미•목적•존엄성을 찾을 수 있도록 새로운 사고방식을 촉진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적용하는 틀을 제안하고 있다.

 

『현실을 설계하기』의 세 저자들은 3차 디지털 혁명에 과학•테크놀로지•사회과학•인문과학의 관점을 적용한다. 각 저자는 책에 상이한 렌즈를 갖다 댄다. 각 저자의 렌즈를 통해 어떤 것은 명확해지고 다른 어떤 것은 불분명해진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함께 모였을 때 일치한 의견들보다 일치하지 않은 의견들이 훨씬 더 중요했다. 서로 다른 분야들이나 영역들이 집단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복잡하고 급속히 바뀌는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협력할 필요가 있을 때면 언제나 그렇다.

 

지금 우리는 가능성 높은 궤적들을 예견할 수 있으며, 아직 시기가 일러서 우리가 후회할 방식으로 테크놀로지가 우리를 형성하기 전에 우리가 테크놀로지의 형성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적 순간에 서있다. 3차 디지털 혁명의 임팩트는 1, 2차 디지털 혁명의 임팩트보다 크지는 않더라도 그 만큼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방식의 심장부로 파고드는 수많은 새로운 기회 및 도전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애리조나 주립 대학의 리터러시 학자 제임스 폴 기(James Paul Gee)는 자신의 논문 「리터러시: 글쓰기에서 패빙으로」(“Literacy: From Writing to Fabbing”)에서 이 기회와 도전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팹은 우리가 현재 겪는 것보다 한층 더 심한 불평등의 세계, 다시 말해 몇 명만이 아이디어를 비트로 바꾸고 다시 비트를 원자로 바꾸거나 그 반대로 원자에서 비트를 거쳐 아이디어로 나아가는 과정을 행하는 연금술에 참여하는 세계를 창출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질료—물건들, 세포들, 재료들—를 단지 몇 명이 소유하고 사용하는 세계에 살게 될 것이다. 팹은 새로운 리터러시이고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되어 갈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특별하고 어떤 의미에서 결정적인 것이다.

 

우리 중 몇 명이 호모 파베르가 될 것인가? 인간은 항상 최고의 도구 제작자였다. 곧 모든 사람이 세계를 만드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도구의 가격은 저렴해 질 것이다. 우리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우리 중 몇 명 혹은 대부분 혹은 모두가 세상을 존재하게 하는 신과 같은 창조자가 될 때, 우리는 하나의 종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더 나쁜 세상을 만들 것인가? 팹과 리터러시의 관계는 불과 인간발전의 관계와 같다. 다시 말해 불은 길을 밝힐 수도 있고 태워 버릴 수 있는 도구이다.

 

불이 길을 밝히는 쪽으로 이용되도록 영향을 미칠 힘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디지털 제작이 민주화되면서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비트를 지렛대로 삼아 원자를 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비유적으로나 말 그대로나 현실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 저자  :  Tim Dunlop

  • 원문 :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 (책 Voting undermines the will of the people it’s time to replace it with sortition에서 저자 자신이 발췌한 대목들임) (2018.08.28) 
  • 분류 : 내용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가디언』지 편집자 설명] 자신의 새 책 『모든 것의 미래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크고 대담한 생각들』(The Future of Everything: Big audacious ideas for a better world)에서 저자 팀 던롭(Tim Dunlop)은 우리의 세계를 다시 새롭게 형태짓는 방대한 기술적 전환을 살펴보면서 모두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는 데 이 전환을 활용하는 방법을 고찰한다. 그는 미디어, 부의 창출, 노동, 교육, 그리고 통치방식이 어떻게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탐구한다.

선거는 민중의 의지를 침식한다

 

정부의 활동방식을 고치려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선거(투표에 의한 선출)를 임의선출(sortition)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법정의 배심원들을 뽑을 때 쓰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의회의 구성원을 선거로 뽑지 말고 적어도 그 일부는 임의적으로 뽑아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이 나랏일의 운영에 참여하는 방향으로 곧장 나아가는 가장 간단한 길이다. 그 효과로 정치와 통치가 변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선거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인권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도 선거권을 우리의 근본적 권리의 하나로 제시한다. 민중(국민)의 의지가 선거로 표현되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오히려 민중의 의지를 침식해버렸다. 이제 민중의 의지를 회복할 제도가 필요한데, 임의선출이 바로 그 제도이다.

 

선거의 기원은 미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시기인 18세기로 소급한다. 이 혁명들의 지도자들은 틀림없이 선거를 엘리트 세력이 정치적 과정에 통제력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보았을 것이다. 사실 비교적 최근까지도 땅을 소유하고 있는 백인 성인들만이 선거권을 가졌다. 이런 제한을 싸워서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대의제에 기반을 둔 통치는 엘리트들이 ‘민주적’ 과정에 통제력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퇴보해버렸다. 선거에서 뽑힐 시간과 자원을 가진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엘리트들이기 때문이다. 의심이 된다면 다음 선거에 한번 출마해 보라.

 

그런데 이런 과정을 일국의 수준으로 확대할 때 제기되는 첫 물음은 ‘우리 일반 시민들이 진짜 그 일을 할 수 있는가?’이다.

 

엘리트들은 일반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무식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데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국가(정체)』에서부터 엘리트들은 ‘군중의 지배’를 우려했다. 이런 우려와 비슷한 것이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대해 표현된다. 소셜 미디어는 민주적 군중의 무질서함의 증거라는 것이다.

 

‘너무 많은’ 민주주의는 문제라는 견해도 있다. ‘민중의 의지’가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적 저널리스트인 썰리번(Andrew Sullivan)은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이 민중의 의지와 권력의 행사 사이에 거대한 장벽을 설치해놓은 것을 찬양한다.

 

민중의 의지를 이렇게 얕보는 세력은 시민참여를 배제하는, 아니면 시민참여가 극히 어렵거나 불편한 제도를 만들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이런 참여결핍을 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증거로 제시할 것이다. 주류 제도에서 배제되고 통치과정에 대한 직접적 통제로부터 배제된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의 새 플랫폼들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좌절감을 표현한다. 이 상대적으로 덜 규제되는 형태의 공적 표현은 분명 내용 없는 교류로 퇴락할 수 있다. 이것이 다시 일반인들의 참여의 부적절함에 대한 결정적 증거로 제시된다. 이렇듯 엘리트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실제적 참여를 배제의 핑계로 삼는 것이다. 이는 운전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사람에게 운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부의 문제해결 능력이 신뢰를 잃게 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정치 체제가 ‘보통 사람들’을 배제하도록 설계된 데 있다. 물론 선거에는 참여하기 때문에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정당의 통제 아래 있고 정당은 고유의 관심사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시 다른 주체들, 특히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정치가들은 일단 당선되면 말로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국민이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은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앵무새처럼 반복된다. 이로 인해 과정 전체가 시민의 관점에서는 소극(笑劇)이 된다.

 

『더 컨버세이션』(The Conversation)에 실린 「제안된 상원 선거방식 변화가 호주의 민주주의를 해칠 것이다」(“The proposed Senate voting change will hurt Australian democracy”)라는 글에서 정치학자 드라이젝(John Dryzek)은 이렇게 말했다. “호주의 연방 의회는 오늘날 ··· 안건을 숙의하는 곳이 아니라 여러 당에 속하는 정치가들이 대부분 의례적으로 자신의 말만 해대는 극장이다. 당 정치가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성찰하지 않고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지 않는다.” 드라이젝이 보기에 훌륭한 숙의의 본질은 참여한 사람들이 견해를 바꿀 의지와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진정한 숙의는 민중이 동등한 주체로 모여서 어려운 결정을 하는 데 관여되는 모든 사실적·정서적 요소들을 터놓고 다룰 때에만 생긴다. 당 정치로 인해 정치가들은 이러한 숙의의 능력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나는 ‘시민의회’(People’s House, 민중의회)라 불리는 새로운 의회를 창출할 것을 제안한다. 이곳이 상원이나 하원과 다른 것은 그 의원들이 임의로 선출된다는 점이다. 성인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생애의 어떤 단계에서 배심원으로 봉사하도록 요청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시민의회에서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다. 배심원들이 범죄 재판의 결과를 결정하듯이, 시민의회의 의원들은 입법과 관련하여 숙의하고 투표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나라를 운영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 전 세계의 정치체들에서는 시민 배심단,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 혹은 기타 형태의 엘리트-대중 논의와 관련된 작업이 상당히 많이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임의로 선출된 평범한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잘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공론조사는 정보에 기반을 둔 대중의 견해를 얻기 위해서 선출된 참여자들끼리 광범한 논의를 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론조사 회사에서 임의로 선출한 참여자들을 이틀 동안 한 장소에 모아놓고 소집단을 이루어 서로 토론을 하거나 여러 견해들을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질문을 할 수 있게 한다.

 

1998년에 ‘호주가 공화국이 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주제에 대한 공론조사가 행해졌다. 이 조사를 행한 기관―Issues Deliberation Australia―에 따르면 “호주인들은 참여할 기회를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 원래의 목표보다 47명 많은 347명이 최종 선출되어 10월 22일 캔버라(Canberra)에 도착했다.”

 

이 숫자는 참여자들이 자신들이 다룰 문제가 중요하며 논의의 자리가 믿을 만하다고 인식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반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모인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가진 것에 기뻐했으며 확신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받는 정보에 기꺼이 도전하려고 했다.

 

이런 포럼들이 있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갑자기 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비전문가들 사이의 토론을 더 평등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포럼들은 대중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참여자들 사이에 신뢰와 존중의 생성을 촉진하는 협동과 숙의의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을 그저 무식하기만 한 존재로 보고, 시민들은 전문가들을 우월한 지식에서 나오는 힘을 주장하기만 하는 엘리트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포럼은 서로 적대적으로 보는 이런 경향을 무너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런 환경에서 전문가로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지 일반인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일반인 청중이 어떤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결론에 도달하는 데 쓰일 수 있도록 만든다.

 

우리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경험하면서 배우는 교훈은, 이것을 우리의 거버넌스 과정의 더 공식적이고 영속적인 부분으로 확대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유리되어 있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치 제도를 상향식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이렇게 일반인들을 권력의 중심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핵심적이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경제와 대의제는 우리를 분할하고 서로 싸우게 만들기 위해 온갖 짓을 하고 있다. 시민의회는 이런 분할을 넘어서 한데 모이기 위한 것이다. 임의선출은 기본 개념상 매우 직접적인 것이며, 그것을 가령 호주 상원에 다른 힘들을 그냥 둔 채로 도입하여 선거를 대체하는 것은 적어도 행정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변화만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수준에서는 그 잠재적 효과가 폭발적이다. 정당들과 그 많은 로비스트들의 힘이 일거에 삭감될 것이다. 미디어가 정치를 취재하는 방식도 변형될 것이다. 입법과정의 적어도 일부에 대한 통제력이 인구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에게 쥐어질 것이다. 현재의 체제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방식으로 민중에게 힘이 부여될 것이며 우리의 정치 제도가 공통적인 삶과 다시 연결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힘의 주된 원천이 사회 전체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전에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선거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머리에 못이 박히게 배웠지만 이는 완전히 틀렸다. 배운 것을 빨리 토해낼수록 더 좋다. 진정으로 대표적인,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인민의 정부’를 원하면 그 정부를 선거가 아니라 임의선출을 통해 구성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