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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멸 3.0



 

국가의 사멸 3.0

 

며칠 전에 우리는 프랭크 파스콸레(Frank Paquale)의 주목할 만한 발표를 소개했다. 그는 구글, 페이스북, 우버 혹은 에어비앤비와 같은 새로 등장한 ‘넷지배’(netarchical) 기업들이 이전에 ‘국가’와 ‘정부’가 담당했던 기능들을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어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공적 권력—그 책임성이 때로는 매우 미미했을지라도—을 그가 ‘기능적 거버넌스’(Functional Governance)라고 부르는 것으로 대체함을 보여주었다. 이 효과는 토큰화된 경제(the tokenized economy)의 출현 및 성장에 의해 강화되는데, 이 경제는 앞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결과에 도달하려는 시도이다. 토큰 경제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개발자들과 창조계급이 시장 가치를 주식보유자들로부터 재포획하고 분산된 플랫폼들을 통해서 일종의 신(新)길드 체제를 창출하려는 시도로 보는 것이다. 토큰들은 실로 플랫폼들에서 디자인하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시장가치를 포획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대부분의 토큰 기반 기획들은 시장 경제의 추출적 기능에 결코 도전하지 않으며 그 분산된 다자인에도 불구하고 멱함수 법칙(power law)의 동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는 것은, 순전히 동등하기만 한 구조들은 희소한 자원을 위한 경쟁으로서 디자인된다면 실제로는 당연하게도 과두제를 향해 진화한다(멱함수 법칙에 의한 집중, 즉 반복될 때마다 더 강한 사람이 더 많은 이익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 점은 ‘모노폴리’라는 게임을 해본 사람이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중앙집중화된 넷지배 플랫폼들과 비트코인 및 기타 많은 (모두는 아니다!) 토큰 기반 블록체인 응용태들과 같은 이른바 ‘분산된’ 아나키즘적-자본주의적 구조들은 동일한 효과를 낳는다. 책임성 없고 비민주적인 사적 ‘화폐’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진보적 도시들과 쇠퇴하는 국민국가들의 힘을 축소시키는 초국적 권력을 가진 ‘기업 주권체들’(corporate sovereigns)이 되어가고 있다. 물론 새로 출현하는 국민 포퓰리즘[우익 포퓰리즘]의 권위적인 해결책들은 이에 대한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더 복지 지향적인 국민국가를 부활시키고자 할 뿐인 좌익 포퓰리즘의 시도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올바른 대응이 아니다. 특히 전지구적 환경위기의 맥락에서 그렇다.

 

어떤 역설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이 문제의 안쪽에는 밝은 희망이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현실이 국가의 ‘사멸’을 둘러싸고 좌파의 해방론적 전통들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논쟁에 새 빛을 비추어주기 때문이다.

 

이미 19세기에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가 곧바로 철폐되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을 대표하는 집단들의 ‘자유로운 연합’이 그것 대신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맑스주의자들은 불평등한 사회에서 체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국가의 역할을 철폐하는 것은 공적 권력을 사적으로 군사화된 지배계급의 거친 권력(준군사적 군대 등)으로 대체하자는 처방일 뿐이라고, 내 생각에는 옳게, 주장했다. 아나키스트들이 상상한 것이, 노숙자들이 경찰의 저지가 없이 빈 집을 점유하는 것이었다면, 실제 현실에서 그들은 소유자 계급이 고용한 준군사적 군대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래서 국가의 사멸이라는 생각이 나왔다. 이 시나리오에서는 노동계급 운동이 점진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거나(사회민주주의 버전) 더 강력하고 직접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지만, 국가기능을 점차적으로 대체한다는 명확한 목적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다. (이는 맑스가 그의 2단계론에서 표현한 바이다. 이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교환논리와 국가의 역할에 의해 공히 특징지어지면, 둘째 단계만이 별도의 국가기능의 완전한 소멸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역설은 이 더 근본적인 시나리오의 메아리가 기업 주권체들과 자유방임주의적 정신을 가진 토큰 경제의 전술에서 울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유화된 상호화’ 모델이 가진 우월한 효율(즉 공급과 수요를 효과적으로 서로 맞추는 사적인 플랫폼들), 사용자 데이터에 대한 통제력과 인간의 행위를 은근히 자극하는 능력, 그리고 이 플랫폼들에서 ‘잉여 가치’를 직접 빨아들이는 능력을 통해 이전에 공적 부문이 담당했던 기능들을 수행하고 있다. (라이드셰어링이 대중교통과 경쟁한다든지 아니면 규제를 받지 않는 주택공유가 규제를 받는 호텔 등을 대체하는 것을 생각해보라.) 세계 전체가 쇼핑몰이 되어가고 있으며 언론의 자유나 기타 권리들은 사유재산의 절대적 권리를 통해 부식되고 있다.

 

‘국가의 사멸’은 이제 더 이상 유토피아적 시나리오에만 속하지 않는다. 사실 넷지배 플랫폼들의 침탈적이고 규제 받지 않는 관행들은 국가의 디스토피아적 해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달리 P2P재단의 우리들은 더 나은 미래, 해방적 힘들이 환경 및 평등 문제를 풀어가면서 관료화된 국가 기능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미래를 향하도록 이 과정을 해킹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실로 도시 삶의 사회적·환경적 평형에 관심을 가진 시민들이 주도하는 기획들에서 이미 기능적 거버넌스가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거버넌스와 소유의 협력적 형태들은 잉여를 스스로의 발전에 할당할 수 있고 기여자들의 생계를 창출하는 데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 (특히 협력적 생태계들을 형성할 수 있다면) 넷지배 플랫폼들을 협력 능력에서 앞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시나리오를 우리의 최근의 보고서 『어번 커먼즈 이행을 통해 사회를 바꾸기』(Changing Societies through Urban Commons Transitions)에서 개괄한 바 있다.

 

우리의 지도그리기와 플랑드르의 헨트(Ghent) 시의 500개의 어번 커먼즈들에 대한 연구에서 발견했듯이, 거의 모든 자급체계들(이동성, 주택 등)이 현재 아직은 주변적이지만 점증하는 새로운 커먼즈 중심적 대안들에 의해 담당되고 있다.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지역들처럼 헨트와 플랑드르에서도 커먼즈 기반 기획들이 지난 10년 동안 10배 증가했다. 그러나 사유화된 플랫폼들과 달리 이 기획들은 자본이 충분하지 않으며 종종은 단편화되어 있다. 어떻게 이 단편화를 해결할 것인가? 다음은 이에 대한 우리의 제안이다.

 

 

 

· 모든 자급체계에 대해서 그런 자급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저장소가—무니라이드(MuniRide)와 페어비앤비(FairBnB) 유형의 해결책을 위한 일종의 깃허브(github)가—있다고 상상하자.

· 이 해결책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 우리는 도시들, 협동조합들, 심지어는 노동조합들이 연합을 이루어 P2P 혹은 커먼즈 기반의 해결책들을 전지구적 규모로 키우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기를 제안한다.

· 지역적으로, 가령 도시나 바이조이역의 수준에서 구성되는 이러한 연합들은 다중이해관계자들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플랫폼 협동조합들을 창출한다. 이 플랫폼들은 전지구적 소프트웨어 저장소들을 사용하지만 이 저장소들을 지역의 맥락과 필요에 맞추며 또한 시간이 가면서 더 많은 기능들을 추가함으로써 공통의 코드 베이스(code base)를 더 낫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 플랫폼의 모든 잉여는 원거리 소유자들의 배당금으로서가 아니라 기반시설의 공동개발과 모든 기여자들의 생활을 더 낫게 만드는 데 재투자될 수 있다.

· 그렇다면 넷째 층은 교환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 생산이다. 실로 이 단계에서 어번 커먼즈들은 재화를 다양하게 분배하지만 재화 자체를 생산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서술한 전지구적 커먼즈가 마이크로팩토리들(microfactories, 초소형 공장들)을 통해 재분포된 지역에서의 생산과 부합하는, 코스모-지역적(cosmo-local) 생산체계를 그려볼 수 있다. 여기서 마이크로팩토리들은 열린 협동조합들이기도 하다. 즉 자신들의 구성원들로부터 가치를 포획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공동체에 혜택을 주는 커먼즈를 창출하는 데 전념하는 협동조합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사유화된 플랫폼과 추출적 토큰 경제의 발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자연에 남기는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것을 의식하면서 토큰을 기여상의 정의를 위해 다시 디자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소식은, 협력적 상호화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 기반시설의 상호화가 인간의 발자국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며, 이는 지식의 완전한 공유를 보장하면서도 보상의 더 정당한 분배와 결합될 수 있다.

 

우리 생각에 성공의 열쇠는 초지역적으로 그리고 초국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의 공간적 혹은 지리적 논리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지역(local), 도시, 바이오지역의(bioregional) 기획들은 그 사용자 기층에 가까운 사회적 필요를 위해 생산하고 교환한다.

· 그러나 초-지역적, 초-국가적 지식 베이스들을 사용한다.

· 참여자들은 지역의 수준에서 생산하지만 초-국가적이고 평등한 지식-길드들과 전지구적 이고 초국적인 덕행적(entredonneurial)(([옮긴이] ‘entredonneurial’은 ‘중간으로부터 취하는’(‘taking from in between’)이라는 의미를 가진 ‘entrepreneur’에 대응시키기 위해서 만든 개념으로서 ‘중간에 주는’(‘giving to the in between’)이라는 의미이다. 좋은 번역어를 찾기 전까지 일단 ‘덕행적’이라고 옮긴다.))연합들을 조직할 수 있다.

 

국민국가 수준에서 진보적 다수의 역할은 이 지역적, 초-국가적 기반시설을 강화하고 사회적으로 정당하고 환경적으로 균형을 갖춘 지속적인 자급체계들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자급체계들은 그—이 경우에는 민주적이기도 한—기능적커먼즈 거버넌스 덕택에 사유화되고 추출적인 초국적 권력구조들을 수행의 측면에서 능가할 수 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영토의 수준에서 메타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파트너국가로 변형되어야 한다. ‘파트너국가’는 현재의 국가장치를 하루아침에 마법적으로 변형할 것을 필요로 하는 이행이 아니다. 이는 공적 영역과 커먼즈의 연계를 통해 관리되는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기능적 거버넌스 배치를 진보적 연합들이 승인하고 촉진하는 데 점점 더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띨 수 있다. 파트너국가는 또한 커먼즈 지향적 대안에 공감하고 그것을 지원할 공무원들과 정치가들이 발견될 수 있는 곳에서라면 행정 구조의 모든 틈새 영역에 모든 수준에서 적용될 수 있다. 파트너 타운들, 도시들, 바이오지역들, 혹은 더 광범한 초국적 구조들을 생각해보라. 공적 영역과 커먼즈가 연계한 협력적 형태의 자급이 개시되고 성장하는 정도로, 우리는 시민사회의 참여에 뿌리를 둔 더 민주적인 형태들에 의해 관료적이고 권위적인 국가 기능들을 사멸시키는 데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우리가 국민국가보다는 새로운 초-국가적 구조들의 역할과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을 주목하라.

 

실로

 

1. 고전적인 산업자본주의는 자본-국가-국민이 하나로 통합된 구조로 간주될 수 있으며, 여기에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발굴한 이중 운동의 논리가 적용된다.

2. 시장 기능이 국가와 시민의 규제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때면 언제나 사회가 불안정해졌고 이것이 시장을 다시 사회에 함입시키려는 민중의 움직임을 낳았다는 것이다.

3. 그러나 초-국가화된 자본의 경우에 국민국가의 규제는 미미해졌으며 우익의 국민 포퓰리즘과 좌익의 사회적 포퓰리즘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다.

4.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균형을 실질적으로 다시 잡으려면 초-국가적, 초-지역적 수준에서의 대항-헤게모니적 힘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좋은 소식은 이 힘이 실제로 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 P2P 동학과 커먼즈에 기반을 둔 전지구적 오픈소스 공동체들과 기타 전지구적 생산공동체들이 부상하고 있다.

· 전지구적 기업가 연합이 이 오픈소스 지식 베이스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이들 가운데 점점 더 많은 수가 의식적으로 생성적인 연합이 되어 커먼즈에 대한 그리고 커머너들의 생계에 대한 지원을 생성하고자 한다.

· 도시들의 (그리고 협동조합들, 노동조합들, 윤리적 자본의) 전지구적 연합은 이 초-국가적 수준에서 공통의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여 이 새로운 커먼즈 기반 전지구적 기반시설들을 떠맡는 전지구적 트러스트들을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이 국가의 사멸 3.0이다. 즉 국민국가 수준 너머에서 수립된 민주적으로 책임성 있는 기능적 거버넌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