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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다중이 필요로 하는 무기는?


  • 저자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안또니오 네그리(Antonio Negri)와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의 새 책 Assembly(2017)의 15장 1절 “A Hephaestus to arm the multitude”의 내용을 상세히 정리한 것이다.(([정리자주] 헤파이스토스는 아킬레스를 무장시켜 주었다. 고유명사에 부정관사를 붙인 “a Hephaestus”는 여기서는 다중을 무장시켜줄 ‘우리 시대의 헤파이스토스’라는 의미이다.))

 

무장한 자기방어의 두 사례

① 1871년 파리 사람들은 프랑스 군대가 몽마르트르의 포대를 가져가지 못하게 한다. 그것을 꼬뮌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② 1967년 5월 26명의 흑표범당원들이 장전된 총을 들고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사당에 들어와서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흑인 공동체들을 방어할 권리와 의도를 선언한다.

 

다중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무기는 무엇인가? 오늘날 총알과 포탄이 당신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이런 무기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종종 패배를 불러오고 심지어는 자살행위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무기를 쓸 수 있는가?

 

만일 방어적 무기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서 시작하면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정치 투사들이 그 무기로 인해서 한갓 범죄자들로 변형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무기의 사용을 포기하는 것을 옹호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우리는 게르니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전을 원한다. 승리를 원한다. 우리는 무기 사용의 포기가 아니라 무기의 문제가 다른 식으로 제기되기를 바랄 뿐이다.

 

두 방향의 무기

① 외부를 향함. 적에 대한 방어

② 내부를 향함, 주체 자신의 변형

방어적으로는 전쟁의 거시적 폭력과 금융·가난·재산·젠더 억압의 미시적 폭력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기는 또한 내적으로 자율을 구축하고 새로운 삶형태를 발명하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창출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

 

이 두 기능의 순위를 전도시키는 것이 열쇠다.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권을 가지고, 방어에의 적용이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정치적 힘은 총열에서 나온다”(마오)라는 말은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적·정치적 힘,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나온다.

 

꼬뮌의 진정한 힘은 그 대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일상적인 활동, 그 민주적 거버넌스에 있었다. 로스(Kristen Ross)가 훌륭하게 기록했듯이, 정치적 혁신은 코뮌의 수립에 선행한 시기 동안 파리 인근 지역들의 친목모임들과 클럽모임들에서 준비되었다.(([원주] Kristen Ross, Communal Luxury, Verso, 2015, pp. 11–29.)) 마찬가지로 흑표범당의 힘도 총의 과시에 있지 않고 무료 아침식사나 무료 건강클리닉과 같은 사회적 프로그램들의 구축에 있었다. 사빠띠스따는 그들의 힘이 EZLN(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의 무기와 군사적 명령구조에 있지 않고 공동체 평의회들과 거기서 일어나는 정의와 민주주의의 실험들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선순위가 중요하다. 우선 우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전투를 해야 하고 일단 이렇게 평화와 안전을 수립한 다음 새로운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자유로운 공간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전쟁으로 시작하면 전쟁으로 끝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폐허에서, 현재의 혼돈과 폭력에서, 우리의 방어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속시키면서 구축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방어를 위한 무기의 효율성은 무엇보다도 구축하는 투쟁에 어떻게 복무하느냐를 놓고 판단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몽마르트르의 대포나 흑표범당의 총이나 심지어 EZLN의 방어적 무기들을 이 기준으로, 즉 무기가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복무했느냐 그것을 방해했느냐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관심사는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다중에게 적합한 무기를 찾을 때 무기의 주체성 측면의 능력에, 새로운 삶형태를 창출·유지(혹은 파괴)하는 데서 무기가 내는 효과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맥락에 따라서는 무기와 군사적 행동에 우선권이 주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이의제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부분적으로만 옳다. 영감을 고취하는 무장투쟁의 사례들은 민주적 형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동시에 해낸다. 예를 들어 쿠르드족 운동은 2014년에 IS 전투원들의 전진에 맞서서 로자바(Rojava, 시리아령 쿠르디스탄)의 코바니(Kobane)를 방어하기 위해 총과 폭탄을 필요로 했다. 쿠르드족은 미국으로부터 제한적으로 도움을 받고 터키의 빈번한 방해를 받으면서 전통적 군사적 무기로 전투에서 이겼다.

 

이 승리를 전장의 관점에서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로자바의 쿠르드 공동체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새로운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고 있었으며 ‘민주적 자율’의 한 형태를 발명하고 각 포스트마다 두 명(남성 한 사람, 여성 한 사람)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자치 평의회들을 수립했다. 이렇듯 극단적인 혼돈과 폭력의 조건에서도 진정한 힘이란 낡은 사회질서를 변형하고 새로운 민주적 삶형태를 창출하는 공동체의 능력에 있는 것이다. 이 경우들에 주체성의 생산은 단순히 의식고취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존재론적 침전으로서 사회적 존재를 지질학적인 침전의 양태로 층층이 구축한다. 이것이 삶정치적 변형이다.

 

해방된 지역에서 민주적 사회조직(종종은 직접 민주주의의 사회조직)의 구축을 무장투쟁과 병행했던 반파시즘 저항운동의 사례들이 있다.

 

시인 르네 샤르(René Char)가 말하는 사례

샤르는 프롤레타리아 집단을 이끌고 나치 군대와 프랑스의 파시즘 협력자들을 저지시킨 바 있다. 그는 어떻게 게릴라 잡색부대(a motley crew)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주적 동학을 창출했는지를 설명한다.

 

시인 프랑코 포르띠니(Franco Fortini)가 회상하는 사례

1943년 8월 이탈리아 게릴라들이 발도쏠라(Val d’Ossola)에서 공화국을 창립하여 그 지역을 무장투쟁의 기지로 활용하는 동시에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이들은 짧은 시간 동안만 성공했으며 곧바로 압도적인 적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발명의 환상적인 도가니였다.

 

저항투쟁의 끔찍하면서도 진실한 측면을 나타낼 말이 없다. 이 측면은 혼란스럽게 만들면서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를 나타낼 유일한 말은 시의 말이다. 시의 말은 단테부터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졌다. ··· 역사학은 저 투쟁의 저 가장 끔찍하지만 또한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측면들을 허용한다. 당신의 마음에 절절하게 다가간 유일한 진짜 게릴라 노래의 가사는 “중위도, 대위도, 대령도, 장군도 없었네”라는 것을 역사학은 누락한다. 이는 강렬한 아나키의 외침으로서 저 순간들에는 완전한 진실이었다.(([원주] Franco Fortini, Un dialogo ininterotto, Bollati Borighieri, 2009, pp. 63–64.))

 

이 노래가 공화국을 창립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사이 프랑스 알프스 저지대와 발도쏠라의 해방된 지역들에 게릴라들이 무기를 들고 민주주의의 구축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코바니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제리 독립전쟁 동안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 노동자들의 저항 사례

1961년 10월 항의하는 알제리 민간인들 수백 명이 파리에서 프랑스 국가에 의해 학살된 데 대한 저항으로 정치적 공동체들이 구축되었으며 이 공동체들이 한동안 해방된 알제리의 윤리적·정치적 심장부를 구성했다. 여기서도 무장전위들을 산출하는 다중의 저항과 다중을 고취하는 무장 전위들이라는 두 벡터들이 동등하게 교차하고 혼합된다. 그리하여 민주적 다중의 구성과 전투적 주체성들의 산출 사이의 견고하고 효과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그러나 반(反)파시즘 저항의 영웅주의에 너무 빠지지는 말자. 아무리 극심한 조건에서도 새로운 민주적 형태들을 발명해낼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오늘날 우리들 대부분은 파시즘 체제와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황에서 전통적인 무기에의 호소는 반(反)생산적이고 자살적이다. 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무력과 무기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기의 내적 효과와 주체성 산출의 측면에 초점을 두면 무기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정하게 된다. 무기를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예를 들어 기계와 공고하게 결합되는 지식, 정보와 같은 고정자본이 오랫동안 자본에 효과적 무기로서 복무해왔다. 맑스: “노동계급의 반란에 대응할 무기를 자본에 공급할 목적으로 1830년 이래 이루어진 발명의 온전한 역사를 쓰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원주] Karl Marx, Capital, trans. Ben Fowkes, Penguin, volume 1, p. 563.))

 

그 사례들

1970년대에 도입된 표준 컨테이너는 조직된 부두노동자들(전통적으로 가장 반란적인 노동부문)의 힘을 무너뜨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들이 채택하는 알고리즘들이 지성과 사회적 관계를 강탈함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구글의 PageRank 알고리즘. 이 알고리즘은 사용자들이 모르는 사이에 지성을 고정자본의 형태로 추출하고 축적한다.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정리자주] ‘기계적’(machinic)은 들뢰즈·가따리에서 온 개념이다. 여기서 ‘기계적(Machinic) 고정자본’은 지식, 정보, 이미지 형태의 고정자본을 가리킨다. 이것은 여기서는 부정적으로, 즉 ‘고정자본’을 수식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만, 긍정적으로 다중의 주체성을 수식하는 말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 “We, Machinic Subjects” 참조.))은 단지 중립적인 힘이 아니다. 산 노동을 통제하고 산 노동에 명령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재산소유자들이 행사하는 힘이다. 만일 우리가 고정자본을 재전유한다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되찾는다면, 우리는 지식과 지성을 축적한 기계를 산 노동의 손에 쥐어줘서 죽은 자본의 명령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무기들을 쥐어서 중립화시킬 수 있다. 더 좋은 것은 새로운 목표를 위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훨씬 더 좋은 것은 그것들을 공통적이고 모두의 사용에 열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디지털 알고리즘과 같은 삶정치적 무기들이 현대의 투쟁에서는 가장 중요한 급소들일 것이다.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스에게 만들어준 방패의 전면에는 공동체 전체와 그 세계의 구성이 동심원들의 모양으로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아킬레스는 사실 공동체 전체에 의해 보호된다. 다중의 방패의 동심원들은 새로운 문명, 새로운 삶형태, 인류의 새로운 형상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있는 생명체들, 지구, 우주 사이의 돌봄의 새로운 관계들을 표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