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그리와 하트의 새 책 Assembly 서문
- 저자 : Antonio Negri, Michael Hardt
- 원문 : Assembly: Heretical Thought (2017.08)
- 분류 : 내용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새로 나온 책 Antonio Negri, Michael Hardt, Assembly: Heretical Thought의 서문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종종 소개할 생각이다.
서문의 소개에 앞서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간단한 평해본다.. 총평 이전 저작 『공통체』(Commonwealth)에서의 문제의식을 이어간다 . 단순한 반복 즉 중복이 없이, 실천적인 방향으로 더 발전시키고 있다. 여기서 발전이란 ① 더 깊어진 구체화 혹은 더 자세한 분석 혹은 더 정밀하게 다듬기라고 할 수 있는 것 이외에 ② 새로운 제안도 포함된다. 굵직한 논점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십의 문제를 비판하지만, 이것이 모든 정치조직과 제도에 대한 포기(“수평주의의 물신화”)로 이어지지 않아야 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의 전도”(the inversion of the strategy and tactics)를 제안한다. 지도부가 전략을 담당하고 대중이 전술을 담당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다중이 전략을 담당하고 지도부가 전술을 담당하는 방향으로 전도된다는 것인데, 한국의 ‘촛불’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이미 일어나고 있음을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다. 2) “constituent power”에 대한 논의를 다시 다듬어서 그것이 주권(sovereignty)―‘하나’로의 통합에 기반을 둔 것―과는 다른 형태의 힘이어야 함을, 그래서 “constituent consistency”(들뢰즈·가따리 개념의 차용)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것이 “take power, but differently”라는 말이 나타내는 바이다. 3) 이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비판하며, 정치적 조직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사회적 협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 활동의 차원으로, 즉 아래로 내려가야 하고 문제를 아래에서 보아야(from below) 함을 강조한다. 4) 금융과 화폐의 문제를 더 상세하게 분석한다. 특히 상품의 생산에 투여되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르는 가치결정이 무너지고 그 대신 “파생상품들”(derivatives)의 거래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서서 자본의 가치의 척도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금융과 화폐를 자세히 분석하는 이유는 자본으로서의 측면 말고 화폐가 가진 다른 측면 즉 “사회적 관계를 제도화하는” 능력을 살려서 “공통적인 것의 화폐”를 발명하는 실천적인 목적에 있다. 5)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이 더 분명히, 따라서 더 간명하게 제시된다. 공적인 것이 사실은 사적인 것을 가리고 보호하는 도구로 등장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의 “주권적” 성격을 밝힌다. 따라서 공통적인 것과 공적인 것/사적인 것의 대립은 공통적인 것과 사유재산의 대립에 다름 아니다.(“공통적인 것은 재산이 아니다”) 책 전체에 걸쳐서 ‘공통적인 것’의 개념은 매우 확연하게, 어찌 보면 이전보다 더 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만큼 개념화의 성숙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6) 사회적 투쟁의 형태에 대해서는, 새로운 조직화의 유형으로 “사회적 연합주의”(social unionism)가 제시되고 그 무기로서 이전의 총파업의 새로운 형태―삶정치적 생산의 시대에 맞는 형태―인 “사회적 파업”(social strike)이 제시된다. 물론 이는 모두 출발점들이지 그 자체로 충분한 대안들이 아니다. 7) 자본가들이 예전에 하던 기능―그러나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금융의 형태로 생산과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본이 하지 않는 기능―인 생산 요소들의 결합을 이제는 생산자들 자신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음을 “다중의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8) 무기에 대한 생각을 더 정밀하게 : “무기의 생산적 사용이 우선적이며 방어에의 적용은 그 뒤를 따를 것이다. 진정한 방어는 무기의 효율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리고 주로 공동체의 힘에 의존한다. ‘정치적 힘은 총에서 생긴다’라는 유명한 말은 순서와 우선성을 잘못 말한 것이다. 진정한 무기는 사회·정치적 힘에서, 우리의 집단적 주체성의 힘에서 자라나올 것이다.”(270) 최종적으로 네그리·하트는 새로운 거버넌스로 향하는 세 경로를 ① 엑서더스―기존의 제도들로부터 빠져나와 작은 규모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수립 ② 적대적 개혁주의―기존의 제도 안에서 새로운 거버넌스의 방향으로 개혁을 변형시키려고 노력 ③ 헤게모니 전략―“constituent consistency”를 구성하여 새로운 사회를 제도화 로 제시한다. |
Assembly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Oxford University Press, 2017
서문
여기서 시는 봉기에 버금간다.
― 에메 쎄제르
사회운동이 불의와 지배에 맞서 치솟았다가 전(全)세계 언론의 헤드라인을 잠깐 장악하고는 시야에서 사라지기―이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이다. 사회운동들은 독재자 개인들을 쓰러뜨리는 경우에도 새로운 대안들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사회운동들은 몇몇 예외적 경우 말고는 그 급진적 포부를 버리고 기존 제도에 흡수되었거나 강력한 억압에 패배 당했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욕구와 욕망을 나타내는 운동들이 지속적인 변화를 성취하고 못했고, 새로운 더 민주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세계 전역에서 우익 정치세력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더 긴급해진다. 이 세력은 정상적 법절차를 정지키시고 사법부와 언론의 독립을 와해시키며 광범한 감시활동을 하고 공포 분위기를 창출하며 인종 혹은 종교적 순수성을 사회적 귀속성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이주민들에게 대대적인 추방의 위협을 가한다. 사람들은 이 우익 정부들의 행동에 항의한다. 이렇게 항의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항의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 운동은 지속적인 사회 변형을 실행해야 한다.
우리는 이행국면을 살고 있다.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정치적 전제들 일부에 물음을 던지는 것을 요구한다. ‘어떻게 권력을 잡는가’(how to take power)를 묻기보다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힘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하며,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를 물어야 한다. 현재 있는 그대로의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을 잡아야 하고, 근본적으로 새로운 민주적 사회를 성취해야 하며, 결정적으로는 새로운 주체성을 산출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들은 리더십을 더러운 단어로 취급한다. 그럴 이유가 많다. 50년 이상 동안 활동가들은 중앙집중화된 수직적 형태의 조직화가 민주주의의 발전에 족쇄가 된다고 옳게 비판해왔다. 전위가 대중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런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이 현실적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환상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리더십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 지속적인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화의 거부로 전환되는 것, 수직성을 추방한 결과로 수평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리더 없는 운동도 지속적인 사회적 관계들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주체성의 산출을 조직화해야 한다.
리더십의 핵심적 기능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성취할 새로운 메커니즘과 실천을 발명해야 한다. 리더십의 두 핵심적 기능은 의사결정과 ‘모이기’(assembly)이다. 근대의 민주주의관에는 리더들이 멀리서 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이 다중과 연결되어 다중의 의지와 욕망을 나타내야 한다는 모순이 존재한다. 이 모순이 근대 민주주의 사상의 일련의 변칙들을 낳는다. 다중을 모으는 리더들의 능력도 이런 모순을 보여준다. 그들은 사람들을 모으는 정치적 기업가가 되어야 하는데도 모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다. 리더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 민주적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형용모순으로 나타난다.
의사결정과 모이기는 중앙집중화된 지배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다중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함께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가설이다. 만일 리더들이 이런 맥락에서 아직 필요하고 가능하다면, 이는 오직 그들이 생산적 다중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이는 리더십의 제거가 아니라 수평적 운동과 수직적 리더십이라는 두 극의 관계의 전도이다.
자유와 평등의 조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함께 생산하는 것이 오늘날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로 가는 경로이다. [정치적 행복과 사회적 행복의 결합]
정치를 사회적 생산으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본다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쳇바퀴를 돌거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이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영역을 떠나서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숨겨진 거처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직화, 효율성, 모이기, 의사결정의 문제들이 사회적 지형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 거기서만 우리는 영속적인 해결책들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중심적 장들의 과제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협력의 조건을 정하고 함께 의사결정하는 다중의 잠재력을, 사람들이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이미 행하고 있는 것을 연구함으로써만, 그 재질과 능력을 연구함으로써만 입증할 수 있다.
오늘날 생산은 이중적 의미에서 점점 더 사회적이 되고 있다. ① 협동과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들에서 점점 더 많이 생산 ② 생산의 결과가 상품만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며 궁극적으로 사회 자체. 사회적 생산의 이 이중적 지형에서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스리는 사람들의 재질과 능력이 양성되고 드러난다. 또한 여기서 다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들과 가장 심한 형태의 지배(domination)가 작동한다.(금융, 화폐, 신자유주의적 행정)
사회적 생산의 지형에서의 핵심적 투쟁 하나는 공통적인 것, 즉 우리가 공유하고 함께 관리하는 지구의 부와 사회적 부를 놓고 벌어진다. 공통적인 것은 오늘날 사회적 생산의 토대이자 주된 결과가 되어가고 있다. 즉 우리는 공통적인 것에 의존하여 생산하고 우리가 생산한 것은 공통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법이 두개 있다.
①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전유할 권리를 긍정한다. 이는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원칙이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축적은 점점 더 공통적인 것의 추출(extraction)을 통해 기능한다. (석유 및 천연가스 추출, 거대한 채광, 단작 농업 + 공통적인 것의 사회적 형태에서 생산된 가치―지식, 협력, 문화생산물 등―의 추출.) 금융이 이 추출과정의 꼭대기에 존재한다. 이 추출과정은 지구를 파괴하는 동시에 사회적 생태계를 파괴한다.② 다른 접근법은 다중은 이미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며 더 자율적이 될 잠재력을 가진다는 점을 입증하면서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을 개방적인 채로 두려고 하고 부를 민주적으로 관리하려고 한다. 이 입장에 서면 우리는 공통적인 것을 사유재산으로 변형하고 접근을 봉쇄하며 그 사용과 개발에 대한 의사결정을 독점하는 것이 미래의 생산성에 족쇄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식에 더 많이 접근할수록, 더 많이 협력하고 소통할수록, 자원과 부를 더 공유할수록 더 생산적이다. 공통적인 것의 관리와 돌봄은 다중의 책임이며 이 사회적 능력은 자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해 직접적인 정치적 함축을 가진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게 상서롭지 못하다고 악마가 귀에 속삭인다. 신자유주의가 공통적인 것과 사회 자체를 자신의 지배 아래 흡수한 듯이 보이며, 화폐가 경제적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우리의 상호관계와 세계와의 관계의 배타적 척도로 제시된다고 한다. 금융이 거의 모든 생산관계들을 지배하며, 생산관계를 전지구적 시장이라는 얼음물로 내던졌다고 한다. 악마는 계속해서 속삭인다. 정치적 역할의 전도도 기업가들이 과거에 자본가들이 자랑하던 시절과 같았다면 말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기업가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벤처 자본가, 금융가, 펀드 매니저가 이제는 명령을 내리는 자들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폐가 명령을 내리며 이들은 단지 가신들이고 행정가들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기업가는 미지의 바다를 누비는 배의 선장이 아니라 금융축적의 끊이지 않는 잔치를 주재하는 엉덩이 무거운 사제일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지배 계급의 정치적 힘도 재조직했다. 이례적인 폭력이 권력의 행사 안에 구조적으로 포함되었다. 경찰력은 빈자, 유색인, 비참한 사람들, 피착취자들을 사냥하는 민병처럼 되었으며 이에 상응하여 전쟁은 일국의 주권이나 국제법과는 무관한 전지구적 경찰력의 행사가 되었다. 예외의 정치로부터 모든 카리스마의 광택―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이 벗겨졌으며, 예외상태는 권력의 정상적인 상태가 되었다. “불쌍한 기만당한 것들”이라고 우리의 악마는 결론짓는다. 힘있는 자가 반란자의 순진성에 대해 보내는 온갖 오만, 경멸, 생색의 태도를 지으면서.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다행히도 수많은 형태의 일상적 저항들이 있고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강력한 사회운동의 분출이 있다. 저들의 경멸 뒤에는 저항이 봉기(insurrection)로 발전하고 자기들이 통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권력은 결코 겉모습처럼 안전하거나 자기충족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들은 안다. 전능한 리바이어던의 이미지는 빈자와 종속민에게 겁을 주어 순종하게 하는 데 복무하는 우화일 뿐이다. 권력은 항상 힘의 관계이다. 더 정확하게는 많은 힘들의 관계이다. “종속은 지배와 함께 이원적 관계를 구성하는 항들의 하나로서밖에는 이해될 수 없다.”(라나짓 구하 Ranajit Guha)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이 관계에 항상 관여하여 협상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갈등이 오늘날 우리의 사회적 존재의 일부이다. 이런 의미에는 이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존재론이다―는 사회투쟁, 저항, 봉기와 자유와 평등을 위한 싸움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극소수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다수의 삶을 지배하면서 사회를 생산·재생산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사회적 가치를 강탈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세계는 사회적 협력에 의해 구축되지만 지배계급에 의해 분할된 세계이다.
이렇듯 사회적 존재는 전체주의적 명령의 형상으로 나타나거나 저항과 해방의 힘으로 나타난다. 권력의 ‘일자’는 ‘둘’로 나뉘며(The One of power divides into Two) 존재론은 각자 역동적이고 구축적인 상이한 관점들로 쪼개진다. 이러한 분리로부터 인식론적 분할 또한 나온다. 한편으로는 고정된 영속적 질서로 간주되어야 하는 진실의 추상적 긍정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에서 구축되는 아래로부터의 진실의 탐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는 종속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후자는 주체화, 즉 주체성의 자율적 생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 주체성의 생산은 진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축되는 것이라는 사실, 실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는 만들고 추구하는 힘이 진실의 표지(標識)이다. 주체화의 과정에서 진실과 윤리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발생한다.
리더층이 아직도 어떤 역할을 하려면 기업가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거나 그들의 이름으로 행동하거나 심지어는 그들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 말고 다중 내에서 ‘모이기’의 작동자가 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가정신/활동(entrepreneurship)은 행복의 작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에서 다중의 민주적 기업가정신/활동(a democratic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이라는 가설을 제안한다. 우리는 사회를, 공통적인 것을 다양한 형태로 생산하고 사용하는 광범한 이질적 주체성들 사이의 협력의 회로들로 볼 때에만, 공통적인 것의 생산에 상응하는 정치적 기업가정신의 강력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해방의 기획을 수립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기업가정신의 덕에 대하여 끊임없이 지껄여대고 기업가 사회의 창출을 옹호하며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삶의 기업가가 되라고 권유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기업가정신을 찬양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자본주의 기업가들의 영웅담이 공허한 소리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다른 곳을 보면 오늘날 주변에 기업가 활동이 풍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새로운 사회적 결합을 조직하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협력을 발명하며 공통적인 것에의 접근, 그 사용, 그것에 대한 의사결정에의 참여를 위한 민주주의적 메커니즘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업가정신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로 정치사상의 중심적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개념들을 둘러싸고 투쟁하며 그 의미를 밝히거나 변형하는 것이다. 기업가정신은 사회적 생산에서의 다중의 협력의 형태들과 다중의 정치세력으로서의 ‘모이기’ 사이를 연결하는 돌쩌귀로서 기능한다.
우리는 다른 저작에서 이미 이 프로젝트를 위한 경제적 주장 가운데 일부를 개진하였는데, 여기서 그것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다. 단순화한 일부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공통적인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점점 더 중심적이 되고 있다. (2) 이에 발맞추어 노동이 변형되고 있다. 일터에서나 사회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은 협력, 사회적·과학적 지식, 돌봄, 사회적 관계의 창출에 점점 토대를 두고 있다. 협력관계를 활성화하는 사회적 주체성들은 자본가의 명령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자율을 부여받는 경향이 있다. (3) 노동은 또한 새로운 내포적(intensive) 관계들 및 생산에 필수적인 다양한 종류의 물질적·비물질적 기계들―디지털 알고리즘, “일반지성” 등―에 의해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하나의 과제는 다중이 사회적 생산의 필수적 수단인 고정자본 형태들을 재전유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4)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게중심은 대규모 산업에서의 노동의 착취에서 공통적인 것(지구와 사회적 노동)으로부터의 (대체로 금융 도구들을 통한) 가치추출로 이동하고 있다. 여기서 양적인 측면이 주된 측면이 아니다. 전지구적으로 보면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가 감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공통적인 것으로부터의 추출이 가지는 질적 의미이다. 자본주의 발전에서 매뉴팩처와 대규모 산업 이후 새 단계, 즉 높은 수준의 자율, 협력, 산 노동의 ‘커머닝’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새 단계가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5) 이러한 생산양식과 노동력에서의 변형은 저항을 조직화하는 조건을 변화시킨다. 이제 상황이 전도되어 다중이 공통적인 것을 자본으로부터 재전유하여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직화의 문제(그리고 수평적 운동의 수직화)가 여기에 공통적인 것의 “제헌화”(constitutionalization)의 문제와 함께 놓여있다. 사회적 투쟁과 노동자 투쟁의 목표로서, 또한 자유롭고 민주적인 삶형태의 제도화로서.
이러한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다중이 힘의 관계를 유리한 쪽으로 기울여서 궁극적으로 권력을 잡는 것이, 그러나 전과는 다르게 잡는 것이 가능하고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운동이 사회를 변형하는 데 필요한 전략을 정식화할 수 있게 된다면, 운동은 또한 공통적인 것을 장악하여 자유, 평등, 민주주의, 그리고 부를 재편할 수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다르게”라는 말은, 자유를 (평등 없이) 우파의 개념으로 제시하고 평등을 (자유 없이) 좌파의 제안으로 제시하는 위선을 반복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공통적인 것과 행복을 분리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은 권력을 잡음으로써 차이와 다원성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다르게”는 또한 다중이 권력을 잡음으로써 정체성들을 그리고 권력의 중앙집중성을 탈신비화할 독립적이고 비주권적인(nonsovereign) 제도들을 산출해야 함을 의미한다. 주권을 물리치기 위해 권력에 맞서 전복적 투쟁을 행하는 것, 이것이 저 “다르게”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충분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물질적으로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다중이 부를 재전유하는 데로 이르는 길을 연다. 공통적인 것에 뿌리를 둔 길이다.
새 군주가 지평 위로 출현하고 있다. 다중의 열정에서 태어난 군주이다. 부패한 정책에 대한 분노,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의 끔찍한 수준에 대한 의분, 지구와 그 생태계의 파괴에 대한 분노와 걱정, 멈출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폭력과 전쟁에 대한 규탄.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지만,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고 느낀다. 분노와 의분은 결과를 낳지 못하고 질질 끌게 되면 절망이나 체념으로 바뀐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군주란 자유와 평등의 길, 모두에 의해 민주적으로 관리되는 공통적인 것을 모두의 손에 쥐어주는 과제를 제시하는 길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군주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개인이나 당 혹은 지도자들의 회의를 가리키지 않고, 오늘날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상이한 형태의 저항과 투쟁이 마디마디 이어져서 이루어진 정치적 결합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군주는 일관된 배열로 움직이며 암묵적으로 위협을 담지하는 떼(swarm), 다중으로서 나타난다.
‘Assembly’(모이기)라는 이 책의 제목은 함께 모이기와 정치적으로 함께 행동하기의 힘을 포착하려는 의도에서 붙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모이기에 대한 이론이라든가 모이기의 특수한 실천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개념에 횡단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 원칙들과 실천들의 광범한 그물망과 공명하는지를 보여준다. 현대의 사회운동에서 제도화된 평의회들에서 근대 정치의 입법의회들까지, 집회의 자유에서 노동조직에 핵심적인 연합의 자유까지, 종교 공동체들의 다양한 회중 형태들에서 새로운 주체성들을 구성하는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라는 철학적 개념까지. ‘모이기’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들을 인식하는 렌즈이다.
이 책의 여러 지점들에서 우리는 요구들(calls)과 응답들(responses)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물음과 답이 아니다. 응답이 요구를 만족시키는 식이 아니다. 요구들과 응답들은 서로 열려진 대화의 형태로 주고받는다. 고전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스타일의 설교가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이다. 이 스타일은 전체 회중의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맞지는 않다. 설교 방식에서는 요구하는/부르는 사람들과 응답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엄하게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진술을 하고 회중이 ‘아멘’하고 긍정하며 더 진행하기를 촉구한다. 우리는 역할이 평등하며 서로 교체될 수 있는 더 온전한 형태의 참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더 부합되는 것은 19세기에 상선들에서 흔했던 뱃노래들과 같은 부르고 화답하는 노동요들이다. 노래들은 시간을 보내고 노동을 동기화하는 데 유용했다. 그런데 이렇게 부지런하게 복종하는 노동요들도 딱 맞는 것은 아닌 듯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문화의 역사로 되돌아가서 볼 때 우리에게 더 영감을 주는 것은 농장의 밭에서 노예들이 부르는 <호, 에마, 호>(“Hoe, Emma, Hoe”) 같은 제목의 노래들이다. 서아프리카 음악 전통들에서 파생된 이 노예 노래들은 다른 노래들처럼 노동의 리듬을 유지했지만 또한 때로는 노예들이 서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사를 암호화해서 넣었다. 주인의 채찍질을 피하거나 작업과정을 전복시키거나 심지어는 탈출을 계획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는 메시지를 바로 옆에 서있는 주인도 모르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제 서로를 발견하고 모일 시간이다. 마키아벨리가 종종 말했듯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
서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