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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 다음은 데이빗 볼리어가 지난 1월 24일에 자신의 블로그에 약간의 설명과 함께 올린 존 레스타키스(John Restakis)의 글 “Civil Power and the Path Forward for Greece”를 세부에서의 완벽은 기하지 못하고 내용을 전달하는 수준에서 옮긴 것이다. 볼리어는 그리스 선거 하루 전날에 이 글을 소개했으나 이 글은 그보다 열흘 전인 1월 14일에 쓰였다. 이 글이 선거의 결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쓰였다는 것은 이 글의 효용에 아무런 흠집도 내지 못한다. 글을 읽어보면 알지만 레스타키스는 한국에서 많이 보는 ‘기술자’ 정치평론가들처럼 누가 선거에서 이기느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에서의 사회적 삶의 흐름에 관심이 있고 바로 그것이 글에 표현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를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볼리어가 이 글은 “그리스 위기의 평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커먼즈 기반의 수평네트워크 생산과 사회적 대안들을 주류로 만드는 거대한 과제를 위해서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볼리어가 자신의 게시글에서 밝혔지만 이 글은 원래 Commons Transition에 실렸다. 존 레스타키스는 (볼리어의 소개에 따르면) 밴쿠버의 <브리티시 콜롬비아 협동조합 연합>(BC Co-operative Association)의 전 이사장이며 여러 해 동안 공동체 조직화, 성인 및 대중교육, 협동조합의 발전에 힘 써왔고, 지구화, 지역발전, 대안경제에 대해서 강연활동을 널리 행해왔다.–전달자

 

시민의 힘과 그리스가 나아갈 길

 

 

존 레스타키스

 

시리자(Syriza)가 정권을 잡을 가능성이 생기면서, 그리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두 궁금해 하고 있다. 재난이든 구원이든 아니면 그냥 정상적인 혼란이든, 시리자 정부가 게임을 바꿀 반발을 할 잠재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거리에는 과거의 정부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체제를 바꾸지 못한 데 낙담하여 시리자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냉소주의와 숙명론의 분위기가 짙게 깔려있다. 시리자는 얼마나 다를 것인가?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만일 시리자가 말한 것을 행한다면 이는 유럽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용기 있는 길을 닦는 것이 된다.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있는 긴축정책에 대한 반대로서만이 아니라 이 정책들의 원천이자 자양분인 신자유주의적 사고, 제도들, 그리고 자본 세력에 대한 반대로서 그렇다. 그런 길이 성공하려면 경제발전, 시장의 역할, 그리고 국가와 시민의 관계에 대한 전적으로 다른 견해가 필요하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회적 경제가 ‘경제 다시 만들기’를 위한 시리자의 계획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다. 유럽의 모든 좌우를 포함하는 정당들처럼 시리자도 사회적 경제가 현재의 위기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알고 있다. 유럽 신자유주의의 진앙지인 영국의 캐머런 정부조차도 사회적 경제를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공서비스를 증진시키며 정부의 역할을 개혁하는 데서 전략적 역할을 할 부문으로서 장려해왔다. 지난 선거에서 상호주의(Mutualism)와 ‘큰 사회’가 그 슬로건들이었다.

 

이 슬로건들은 멋지게 들린다. 사회적 경제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우파 정부들이 거의 모르거나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캐머런 정부에게 협동조합들 혹은 더 일반적으로 사회적 경제는 공적 부분의 사유화, 직업안정성의 약화, 정부 역할의 축소를 실행하는 수단이요 위장막이 되었다. 수천 명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서 사이비 협동조합들에 가입하도록 강압되었다. 그리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새롭게 구성된 KOINSEP1들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이는 협동조합의 성격과 본성에 대한 희화(戱畵)이다. 협동조합의 조합원 가입은 항상 자발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 운영은 민주적이어야 하고 그 목적은―정부의 이데올로기적 목적들이 아니라―조합원과 공동체의 공통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 점을 거의 모든 정부들이 배우지 못하고 있다.

 

우파는 사회적 경제를 사회의 버려진 층과 자본주의 경제의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피난처로 종종 간주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파는 자선을 빈민에 대한 적적할 대응책으로서 옹호한다. 유대라거나 평등은 끼어들지 못한다. 더 최근에는 사회적 경제의 수사(修辭)와 원칙들이 자본이 시민적 공간으로 손을 뻗치는 데 사용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영국 및 기타 지역에서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경제 단체들이 사회적 경제의 원칙들이 지배세력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고 있음을 비난해왔다. 그런데 이 원칙들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경제는 공통의 이익에 복무하는 상호주의와 호혜주의 원칙들에 의해 추동되는 시민 조직들과 네트워크들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사회가 자본을 통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사회적 경제를 구성하는 것은 사회적 협동조합들, 비영리단체들, 재단들, 자원봉사그룹들 등으로서, 시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많은 성공적인 협동조합들과 공정무역 단체들이 여기 속한다) 재화와 서비스가 생산되는 비(非)시장 영역에서도 작동하는 제반 조직들이다. 여기에는 문화생산물, 건강 혹은 사회적 돌봄의 제공, 그리고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식량·주거 및 기타 필수품들을 제공하기가 포함된다. 사회적 경제란 그 본질상 사회가 경제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사회적 목적에 봉사하는 영역이요 실천이다.

 

 

오늘날 그리스가 그 사회적 경제의 규모나 다양성에서 전례 없는 성장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른 곳처럼 여기서도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이익 기업들(social benefit enterprises)이 경제 불황과 긴축에 대한 사회적 자기방어의 형태로 생겼다. 많은 젊은이들에게는 협동조합 혹은 사회적 기업의 설립이 일정한 자율성과 존엄을 지닌 직업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식당에서 관광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인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성장하고는 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그리스는 멀리 뒤쳐져 있다. 그 원인은 많다. 사회적 투자의 재원 마련과 같은 제도적 뒷받침의 미비, 전문가를 계발시키고 훈련시키지 못한 것, 대표 조직들이 단결하여 발전하고 해당 부문의 목소리를 내는 데 이르지 못한 것이 그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노후하고 단편적이며 부적절한 입법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더 복합적인 셋째 이유는 그리스에서 시민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와 관계가 있다. 근대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제도들의 싹을 심은 계몽 및 산업혁명의 과정들을 겪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그리스는 오스만 지배 동안 이러한 전개과정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아왔다. 오늘날 그리스는 오스만 시대 직후부터 지배해온 정치체제를 특징짓는 독재적 은고주의(clientelism)를 넘어서는 정치문화를 수립하기 위해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다.2 독재는 위계, 개인주의, 의존관계를 낳지 상호주의와 사회적 유대를 낳지 않는다. 건강한 시민사회, 민주적 제도들, 그리고 민주적 문화의 출현이 이로 인해서 장애를 만나게 된다.

 

은고주의의 유산은 그리스에서 치명적이었다. 협동조합의 경우에서 드러난 것처럼,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건강한 발전에 재난급의 악영향을 미쳐왔다. 우파가 사회적 경제를 자본과 시장의 증진을 위한 매개물로 삼듯이 좌파도 늘 사회적 경제를 국가의 목적을 진전시키는 도구로 본다. 여기에 은고주의 문화가 추가되면 대규모의 실패를 낳는 처방이 된다. 이것이 협동조합에 대한 국가지원이 부패를 낳았던 PASOK3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로 인해서 정당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쁜 결과로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이 훼손되었다.

 

오늘날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한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서 협동조합을 장려하는 일을 하려면 협동조합이 본래 부패한 것이라는 이 잘못되고 부정적인 대중적 이미지와 맞서야 한다. 그리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는 ‘좌파’ 정부들이 협동조합 모델을 정부의 목적을 추구하는 데 사용하려 한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다. 협동조합이 그 목적과 본성상 자율적인 시민 연합조직이며 그 주된 역할은 그 구성원들과 공동체들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점은 내팽개친 채 말이다. 그리스에서처럼 과거에 정부들이 협동조합을 그리고 더 넓게는 사회적 경제를 정부의 권력을 확장시키는 도구들로 보았던 나라들―이전에 소련에 속했던 모든 나라들,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전역― 에서는 협동조합 모델이 그 만신창이가 된 평판으로부터 복구되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협동조합의 이미지와 평판을 훼손하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은 협동조합 모델을 조작적으로 ‘지원한’ 좌파이다.

 

그 이유는, 좌파가 전통적으로 국가를 사회적·경제적 개혁의 유일하게 정당한 엔진으로 보아온 데 있다. 이런 점에서 좌파는 경제적·사회적 발전의 정당성을 시장에서만 보는 우파의 거울이미지이다. 양자 모두, 현재의 패러다임에 대한 어떤 대안이 성공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발본적인 변화를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바로 그 시민사회 제도들을 무시하거나 조작하는 비극적 실수를 똑같이 저지른다.

 

이것이 (만일 시리자가 권력을 잡는다면) 시리자의 성격이 어떤지를 가늠할 진정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경제적·정치적 체질을 재편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광범한 시민사회와 그리고 사회적 경제의 햇병아리 같은 조직들 및 제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좌파의 전통적 국가주의, 즉 명령과 통제에 기반을 둔 통치로 되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좌파의 변화프로그램을 확장하고 다시 상상하여 시민사회 제도들과 사회적 경제를 나라 건설의 의미심장한 파트너로 가동시킬 것인가? 더 나아가, 협동, 상호주의, 공통의 이익이라는 사회적·경제적 원칙들을 경제 및 사회 재건에 핵심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활용할 것인가? 요컨대, 시리자 당은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시민사회의 힘의 방대한 잠재력을 인정하고 가동시킬 것인가? 만일 그런다면 이는 유럽에서 최초로 그렇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시리자가 사회적 경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좋은 신호다. 사회적 경제는 그리스에서 매우 적은 밝은 지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수백의 새로운 집단들이 형성되어 전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는 것이다. 위계구조를 거부하고 포용성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증진하며 서비스를 이윤보다 중시하는 이 조직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경제적·정치적 질서를 위한 모델로 본다. 실제로 그렇다. 그러나 또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 집단들 가운데 다수가 정당이나 국가와는 거의 혹은 전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는 새로운 정치 경제를 향하는 비전과 방법을 구체화해 내려고 노력하는 좌파 정당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다. 만일 새로운 시대를 구축하는 좌파적 비전이 건설되려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정당과 국가통제라는 낡은 방식은 신뢰를 잃었고 거부당했다.

 

오늘날 정말로 효율적인 좌파 정당에게는 사회적 경제가 결정적인 자원이자 동맹군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는 공통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제적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실행된다. 가장 혁신적이고 기업가적이며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젊은 지도자들이 여기서 활동하고 있다. 또한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정부의 역기능을 개혁할 잠재력을 가진 조직화 형태들과 실천들 또한 여기서 개발되고 있다. 이곳에서 공동체들은 지난 세월 동안 상실했던 것의 일부를 회복하기 위해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공동체 진료소들, 식품 시장 및 농민들과 소비자들 사이의 상호부조, 이웃의 전기나 물이 차단되는 것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막기 등. 이는 이 위기의 와중에도 뜻하지 않은 인정이 존재함을 가리킨다. 이 어려운 시절이 공동체와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인간관계의 부활에 불을 댕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들은 사회적 경제에서 번성한다.

 

진보적인 정부라면 사회적 경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째, 좌파의 전통적인 국가주의를 넘어서서, 민주화하는 법, 시민들과 권력을 공유하는 법을 이해하는 정부의 역할을 발전시켜야 한다. 이는, 비(非)온정주의적이고 비(非)은고주의적인 패러다임에서 정부의 주된 역할이 사회적 가치의 생산―사적 이윤보다 사회적 필요를 우선시하여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을 위해 시민사회를 힘있게 만들고 지원하는 것임을 이해함을 의미한다.

 

둘째, 권력을 잡은 그 어떤 정당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경제의 발전과 성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법적·사회적 제도들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협동조합 및 사회적 경제와 관련된 입법을 개혁하는 것, 사회적 경제 조직들을 사회적·윤리적으로 재정지원하는 재정도구들의 창출, 새로운 정치경제의 근본을 이루는 협동·상호주의 및 공통의 이익에의 봉사와 관련된 이론과 실제를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기관들의 설립을 의미한다.

 

셋째, 이 원리들을 비영리 및 공동체 서비스 부문을 넘어서 더 넓은 경제로 특히 국민경제의 기반을 이루는 중소기업들로 확대·적용해야 한다. 사회적 경제를 활성화하는 원칙들은 경제 전체의 회복과 개혁을 위한 틀이다.

 

넷째, 통제권, 투명성, 책임성, 의사결정권을 공공서비스의 사용자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공공서비스를 개혁해야 한다. 관료층의 고립되고 독재적인 권력은 분쇄되어야 한다.

 

그리스는 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들을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거시적 수준에서 시리자 정부는 채무구조조정, 무역관계 및 수출정책, 자본을 표적으로 한 조세정책을 통한 세입증가, 농업 및 산업 생산의 부활,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위기와 같은 근본적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경제가 이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는 그 자체로는 회복의 엔진으로서 작동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하며, 자신의 강점과 한계를 동시에 이해하는 기민한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실패와 실망의 무대를 마련할 위험이 존재한다. 과거에 사회적 경제 조직들이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모르는 데서 나오는 비현실적인 기대들이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의 ‘비효율’과 ‘유토피아주의’를 비판하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엉뚱하게 탄약을 제공해준 일이 있다. (이 자들은 협동조합의 생존비율이 사적인 기업들의 생존비율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한다.)

 

사회적 경제가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패러다임이 구축될 수 있는 생각들, 방법들 및 모델들이다. 사회적 경제는 새로운 정치경제의 실험장이며, 그 조직들은 더 인간적인 미래를 탐지하는 사회적 안테나이다. 오늘날 다른 패러다임을 이렇게 미리 그려보는 것이 아마도 사회적 경제가 그리스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여일 것이다. 그리스에는 기본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여전히 결여되어있기 특히 그렇다.

 

이 제도들을 건설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이는, 새로운 정부가 채무와 유럽 정부들과의 관계를 재협상하는 데 성공하든 아니든 사실이며, 성공을 못하면 더욱 긴요해진다. 그리스가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경제를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취해야 하는 변화들이 현재의 유로존 내부에서 과연 전개될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들이 던져진다.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적·제도적 타성이 개혁의 전망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리스는 사회적 경제가― 특히 위기의 시기에―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촉진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축적된 풍요로운 경험에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는 이 분야에서는 후발주자이다. 그러나 그래도 장점이 없지 않다. 다른 나라들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Emilia Romagna) 지역에서는 바로 협동과 상호부조의 원칙들에 입각한 중소기업들이 전지구적 시장에서 번성하고 있다. 이 지역은 유럽에서 상위 10개의 우수한 경제지역에 속한다. 이탈리아의 4만 개의 사회적 협동조합들은 지방자치체들과의 긴밀한 파트너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사회적 돌봄을 재편하고 확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여기에 28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고용되어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리스가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2001년의 경제위기 이후에 300개 이상의 버려진 공장들이 그곳의 노동자들에 의해 인수되어 생산을 재개했다. 거의 모든 공장들이 아직 가동 중이다. 학교들, 어린이집들, 진료소들, 도서관들, 커뮤니티센터들 또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인수되어 운영되었다. 국가 사회주의의 원형인 쿠바에서도 정부가 자율적인 협동조합들의 성장을 지원하여 농업부문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기업과 새로운 서비스들의 성장을 자극하고 있다.

 

정부 개혁이 이 운동에서 중심적 테마이다. 브라질, 콜롬비아,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그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세계 전역에 걸친 나라들과 도시들에서 시민이 참여하는 예산작성, 공유된 정책입안, 시민에 의한 예산 및 공공프로그램 감시가 정부들의 작동방식을 개혁하는 데서 사회적 경제가 맡은 핵심적 역할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를 통해 정부들을 더 투명하고, 더 책임성 있고, 더 민주적이며, 시민들의 실질적 욕구에 더 잘 반응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다음이 핵심적 요점이다.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통해 자본을 사회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정치경제의 모델이다. 그리스 채무위기의 기원에 대해 많은 글들이 쓰였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가 유로존에 진입하면서 싼 돈을 쓸 수 있게 되고 비윤리적인 대여가 발생한 것을 지적한다. 다른 어떤 이들은 감시의 결여와 느슨한 규제를 지적한다. 또 다른 어떤 이들은 부패와 공적 기금의 엄청난 낭비를 지적한다. 물론 모두가 그리스를 절벽으로 몰아가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와 공적 책임성의 근본적 결여를 지적한 이는 거의 없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정치, 사회,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의 영역에서 민주적 문화를 건설하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를 생성하고 확장할 시민 제도들을 강화하는 것이다. 계몽된 국가가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해야 할 역할은 바로 이것이다. 특히 그리스와 같은 정치문화를 가진 곳에서는 무언가를 바로잡는 것은 미묘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일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는 과거에 보았던 범죄적 소홀함과 비행을 영속화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그리스의 지배자들, 그들에게 봉사하는 정치계급들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유럽 열강들의 정치와 처방이 그리스를 개혁하고 다시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바로 그 제도들을, 즉 그 공적·시민적 제도들을 파괴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저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공적 제도들과 시민의 힘이 파괴되는 것이 저들에게는 맞는 일이다. 사회적 가치들이나 민중의 복지를 자본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은 저들의 도식에 맞지 않는다. 저들의 도식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자들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인구의 방대한 대다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부 세력을 위해서 잘 작동하는 체계의 영속화이다.

 

2014년 1월 14일

*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됩니다.

 

  1. ‘The Social Enterprise’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Κοιν.Σ.Επ’을 영어알파벳으로 이라고 표기한 것이다(‘Koin.S.Ep’ → ‘KOINSEP’). [본문으로]
  2. 히로세 준(廣瀬純)은 그와 <꼴렉띠보 씨뚜아씨오네스>와 대화를 엮어 낸 책 『투쟁의 아쌈블레아』(闘争のアサンブレア)의 해설에서 은고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삐께떼로운동의 조직화 단위인 ‘바리오’와 관련하여, 대다수의 삐께떼로 조직은 이른바 은고주의(恩顧主義, clientelismo)를 거부한다는 점을 중요하게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 은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선거인에 대한 정당의 일상적인 매수공작입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은고주의의 오랜 역사가 있고, 특히 빈민지역은 항상 은고주의 공작의 주된 영역이었습니다. 은고주의는 공적 부조와 공공사업을 남발함으로써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고 한 여당뿐만 아니라, 좌파 정당들도 포함하여 모든 정당에게 매우 중요한 선거전술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은고주의에는 선거전술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능동적으로 되는 일을 저지하는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각 정당은 은고주의 공작을 통해서 자신들과 사람들 사이에 후원자(patron)-수혜자(client) 관계 혹은 배우/관객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사람들이 정치적 행위자로 될 가능성의 싹을 잘라내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은고주의는 사람들을 정치적 수혜자 또는 정치적 관객으로 환원하고 각 정당이 ‘정치 무대’을 독점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표를 모으기 위한 전술임과 동시에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수동적으로 만드는 장치이기도 한 이중적 기능을 통해서, 은고주의는 각 정당의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지탱해 왔습니다./ 이러한 ‘은고주의’에서 바리오를 해방시키는 것은, 각 정당이 가지는 ‘대표’로서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일임과 동시에 각각의 바리오를 ‘정치 무대’ 그 자체로 삼는 일이기도 합니다. 즉 각 정당의 은고주의적 기획에 저항하는 투쟁이란 각각의 바리오에서 자율적인 정치공간을 구축하는 투쟁 바로 그것입니다.” [본문으로]
  3. PASOK는 그리스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The Panhellenic Socialist Movement (Greek: Πανελλήνιο Σοσιαλιστικό Κίνημα에서 첫 알파벳을 따서 만든 말이다. [본문으로]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85?category=452913 [百手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