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먼즈 사상이 유럽의 주류에 진입할 수 있을까?



 

커먼즈 사상이 유럽의 주류에 진입할 수 있을까?

 

유럽인들이 다양한 경제적·정치적인 위기에 대처하느라 버둥거리는―그리고 이에 덧붙여 미국의 지원을 신뢰할 수 없는―이때가 통상적인 ‘좌우’ 구도를 뛰어넘고 새로운 대화의 문을 여는 몇몇 중요한 생각들을 고려해볼 시간일지도 모른다. 베를린에 위치한 <커먼즈 네트워크>(Commons Network)가 발표한 최근 보고서, 「커먼즈 지원하기: 유럽연합 정책동향에 들어있는 기회들」(“Supporting the Commons: Opportunities in the EU Policy Landscape”)의 목표가 바로 이것이다. 보고서는 유럽의 심층적인 구조적 문제와 사회적 소외에 대한 참신한 접근법으로 커먼즈 패러다임을 받아들여 줄 것을 유럽연합 정치가들과 정책입안자들에게 요청하고 있다. (핵심 요약은 이곳에서)

유럽연합의 신자유주의적인 경제적·사회적 정책들은 정부지출, 사회적 보호와 사회적 서비스를 줄여가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장을 확대하고 규제를 풀고 민영화하는 것을 우리에게 익숙한 퇴행적 방식으로 부각한다. 이 접근법은, 특히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그리스에서, 비참하게 실패하고 있고 인기가 크게 떨어져있다. 하지만 정치가들은 유럽을 가둔 이 상자를 피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리스의 시리자(Syriza)와 마찬가지로 좌파 개혁가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곳에서조차 (신자유주의 정치가들을 매개로 해서) 국제자본이 그들을 제압한다. 국가 주권조차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커먼즈는 새로운 정치적 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커먼즈 네트워크> 보고서는 과제의 핵심이 단순한 정책 변경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고, 전체를 보는 체계론적 관점이 필요하다.

보고서는 훌륭한 환경 과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스(Donella Meadows)가 쓴 글을 맞춤하게 인용하며 시작한다. 

무언가를 수량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모델들을 낳는다.… 인간은 계산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질을 평가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 누구도 정의, 민주주의, 안전, 자유, 진리나 사랑을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어떤 가치를 규정하거나 측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한 것들에 대해 옹호하지 않는다면, 만일 그런 것들을 생산할 체계들이 설계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관해 말하지 않고 그러한 것들의 존재나 부재를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러한 것들은 오래지 않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무수히 많은 모든 힘들을 누가 옹호할 것인가? 현 체제는 예산 스프레트시트에서 표로 작성할 수 없거나 국내총생산(GDP)에 합산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고려하기 시작할 수 있는가?

저자들인 데이비드 해머스타인(David Hammerstein)과 소피 블로멘(Sophie Bloemen)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럽연합이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는 새롭고 통일적이며 건설적인 서사를 요구한다. 커먼즈는 유럽에서 부상하고 있는 패러다임—상호성, 파수, 사회적•생태학적 지속가능성을 포괄하는 패러다임—이다. 커먼즈는 또한 진보적인 정치에 활기를 불어넣고 사회적•생태학적으로 더 지속가능한 유럽에 기여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그들은 “커먼즈의 관점은 현재 유럽에서 우세한 정책 우선사항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덧붙이며 그 사항들로서 “개인주의, 사적 소유 및 열광적인 자유 시장 사고방식”을 들고 추가적으로 “그런 지배적인 세계관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주요한 단층선(fault lines)”을 거론한다.

지금 거의 모든 유럽연합 경제 정책은 순전히 상업적인 행위의 촉진과 사람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를 팔거나 소유하거나 구입하는 오로지 개인적인 목적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일차원적인 견해에 집중되어 있다. 지배적인 패러다임에서는 경제적인 노력의 성공을 판단하는 데 사회적•생태학적인 안녕을 명확하게 나타내는 지표를 적용하는 방식의 평가가 드물다.

정치가들이 커먼즈라는 구도를 탐구하고 발전시키는 것 혹은 정치를 다시 생각하는 것을 원할 것인지의 여부는 지켜봐야 안다. 우파는 이주자들과 엘리트들을 상대로 반동적이고, 화난 자세를 취하는 게 일반적으로 더 유리하다고 보게 되었다. 반면에 좌파는 일반적으로 구식의 관료체계와 정부 자금을 더 많이 사용해서 신자유주의의 아젠다를 인간화하려고 시도하는 것 말고는 거의 대안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무엇보다 <디엠25>(DiEM25) 프로젝트와 유럽 커먼즈 의회(European Commons Assembly)에서 보았듯이 민주주의의 부활에 대한 범유럽 차원의 접근법을 발전시키려는 몇 가지 매력적인 새로운 시도들이 있다. <커먼즈 네트워크>의 보고서는 디지털 환경에서의 참여 민주주의, 도시 환경 및 지식 같은 몇몇 유망한 정책영역에 초점을 맞춰서, 새로운 정치의 논리, 윤리 및 사회적 실천들을 개괄하려는 시도이다.

해머스타인과 블로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커먼즈는…파수, 상호성 및 사회적∙생태학적 지속가능성에 유리한 세계관과 윤리적인 관점을 구현한다. 이 관점은 국민총생산이나 기업들의 성공처럼 협소한 경제적인 기준에 따라 행복과 사회적 부를 정의하지 않는다. 이 관점은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합의와 참여, 공평, 복원력, 사회적 결속과 사회 정의를 포함하는, 쉽게 측정되지 않는 더 풍요롭고 더 질적인 기준들을 고려한다.

커먼즈 담론은 사회를 단지 주로 소비자나 기업가로서 살아가는 원자화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사회적 관계, 공동체와 지역 생태계에 깊이 함입된 행위자로 생각한다. 인간의 동기는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이며 인간 협력과 상호성도 우리의 행동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적어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 전체를 보는 체계론적 관점은 또한 예를 들어, 인간과 자연 간에 지배적인 주체-객체 이원론을 극복하고 인간 활동을 광범위한 생물물리학적 세계(biophysical world)의 일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주요한 사회적∙환경적 딜레마에 대한 상향식의 분산되고 참여적인 이 접근법들은 사람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영역을 인정하면서 유럽대륙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에 기능적인 해결 방안을 제공한다.

(…)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실천들은 시장과 국가 외부에서 공동체들이 추출적이 되지 않고 생성적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이것이 시민권과 참여에 대한 관습적인 관념과 단절하고 있는 새로운 시민윤리 및 문화윤리를 창조하고 있다. 커머너들의 재생성 활동들은 무엇보다도 새로운 방식의 일상생활의 문화적 발현들을 보여준다. 공동체의 지원을 받는 농업(CSA, community-supported agriculture), 비싸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낮은 집세를 보장하는 협동주택 기획들, 지역 에너지 협동조합들, 자체 제작 기획들, 분산된 인터넷 기반시설들, 과학적 커먼즈, 공동체에 기반을 둔 예술∙음악 및 연극 기획들과 그 밖에 수많은 다른 활동들이 모두 현장에서 실질적인 문화적 변화를 끌어낸다.

대부분 전통적인 선거정치의 장에서 벗어나 있는 삶의 각 현장에서 문화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새롭고 생소한 토론에 말려드는 것에는 부정적이므로—오, 위험해!—문화적인 불평의 소리들이 오큐파이(Occupy), 인디그나도스(Indignados)나 아랍의 봄(Arab Spring)의 방식으로, 즉 갑작스러운 뜻밖의 사건으로 먼저 터져 나올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문화적 격동이 일어야 정치 지도자들이 크게 생각하고 대담하게 행동하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역겨운 것은, 이런 심층적인 전환을 다른 사람도 아닌 트럼프가 실제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그는 널리 퍼져 있는 원한과 좌절을 선동적이고 이기적인 온갖 방식으로 이용한 것뿐이었다. 언제쯤 좌파와 중도파에 속한 실용적인 현실주의자들이 다가오는 패러다임 전환을 받아들이는 미덕을 알아보고 인간적인 사회 건설을 주창하게 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