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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 저자  :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 올리버 씰베스터-브래들리(Olive Sylvester-Bradley)
  • 원문 : “Representation is no longer enough (2017.1.13) /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
  • 분류 : 부분 정리
  • 정리자 : 정백수 
  • 설명 : opendemocracy.net에 실린 미셸 보웬스(Michel Bauwens)와의 일문일답 기사 “Representation is no longer enough”(2017년 1월 13일) 가운데 민주주의에 관한 부분을 정리한 것이다. 기사 작성자는 올리버 씰베스터-브래들리(Olive Sylvester-Bradley)이다.

 

민주주의는 무엇이고 현재의 비민주적 제도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

씰베스터-브래들리 : 당신은 나처럼 민주주의의 팬인 듯 합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경험했다는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보웬스 : 두 가지 종류의 민주주의가 서로 경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아테네에서처럼 민중이 직접 통치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남성 시민들에게 국한되었지만요.) 다른 하나는 민중의 힘을 제한하려는 목적으로 일단의 제도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통치입니다. 이것은 제니퍼 톨버트 로버츠(Jennifer Tolbert Roberts)의 책 『아테네의 시험―서구 사상의 반민주적 전통』(Athens on Trial : the Anti-Democratic tradition in Western Thought)에 잘 나와 있어요. 저는 첫 모델에 초점을 둡니다. 문제는, 둘째 모델이 시행된 지 200년이 지났는데 학교나 직장 같은 우리의 삶의 주된 영역들이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기본적으로 발휘한 적이 없는 사람들(시민들/ 주민들)로부터 민주적인 행위를 기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자치 공동체들에 기반을 두고 있는 커먼즈는 매우 특별한 민주주의의 훈련소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커먼즈 모델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씰베스터-브래들리: ‘커먼즈 모델’이라고 하셨는데, 그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가요? “매우 특별한 민주주의의 훈련소”로 기능하는 커먼즈 모델을 어디서 볼 수 있나요?

보웬스: 나는 공유하는 자원을 한 공동체가 자신의 고유한 규범에 따라 관리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커먼즈 정의를 따릅니다. 지구상의 후진 지역에는 많은 물리적 커먼즈(physical commons)[인터넷의 가상공간에 구축된 ‘디지털 커먼즈’와 달리 자연적 세계 안에 구축된 커먼즈를 가리킨다. 전통적인 커먼즈는 모두 물리적 커먼즈이다.―정리자]가 있습니다. 가령 아프리카인들의 85%가 아직 커먼즈에 의존합니다. 서구에서는 그 정도가 덜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습니다. 스페인의 갈리시아(Galicia)에서는 토지의 3분의 1이 여전히 커먼즈(공유지)이며 커먼즈 연합에 의해 운영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커먼즈―공유된 지식 자원이 미국 GDP의 6분의 1의 바탕을 이룹니다―와 어번 커먼즈(urban commons)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플랑드르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시민들의 자율적 기획이 10배 증가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이와 유사한 폭발적 증가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 기획들 가운데 다수가 커먼즈를 창출하는 일을 그 실천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프레카리아트에 대한 가이 스탠딩(Guy Standing)의 책은 불안정 노동자들이 커먼즈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네트워크들과 맺고 있는 깊은 연결관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랩겁(LabGov)과 랩수스(LabSus)에 의해 다듬어진 이탈리아 모델에서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자율적 수평 생산(peer production)의 혁신은 모두가 모든 것에 대해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우리는 개인적 차원에서 모든 것에 관여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회’ 전체를 포함한 다른 이해 당사자들에 의한 적절한 통제 메커니즘이 있는 조건에서는 이미 관여하고 있는 시민들에게 특권적 공간을 줄 수 있죠.

씰베스터-브래들리: 그러면 당신은 유동 민주주의(liquid democracy) 혹은 다른 종류의 위임 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를 선호하나요?

[‘delegative democracy’의 부분 집합인 ‘liquid democracy’는 중요한 문제에 관한 투표를 자신이 직접 할 수도 있고,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 즉 ‘delegate’에게 위임할 수도 있는 제도이다. 자신이 투표를 안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와 다르고, 자신이 하든 위임을 하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나 투표를 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일정한 주기로만 투표를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익숙한) 대의 민주주의(representative democracy)와 다르다. 더 자세한 것은 https://medium.com/organizer-sandbox/liquid-democracy-true-democracy-for-the-21st-century-7c66f5e53b6f#.srfabgkjk 참조. ― 정리자]

보웬스: 나는 혼합을 선호합니다. 혼합을 가지고 실험할 필요가 있죠. 나는 복잡한 사회가 직접 민주주의만을 바탕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모든 일에 관여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선된 대의 민주주의 위에 민주적 토론과 참여의 새로운 층을 추가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멜랑숑(Melenchon)이 제헌의회와 제6공화국을 제안할 때 제시한 것과 같은 새로운 추첨 제도가 여기에 포함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여러 이유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과거의 대의제 모델과 이 보다 더 직접적인 실험적인 민주주의 모델이 결합되는 변곡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가령 오스트리아의 포랄베르크(Voralberg)의 시의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이탈리아의 도시들에서 볼로냐 조례가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정책능력을 부여하여 커먼즈 거버넌스 기획들을 현실화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오스트리아의 포랄베르크 타운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형태를 부활시켰다고 한다. 무작위로 선별된 시민들이 시의회를 구성하여 지역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s://blog.p2pfoundation.net/democracy-series-vorarlberg-civic-councils/2016/12/02 참조.―정리자]

내 생각에 핵심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실험입니다. 여러 지역들/나라들/도시들은 각기 상이하게 혼합된 집단적 의사결정 방식을 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는 권위주의적인 자본주의가 트럼프 같은 우익 급진주의자들의 지도 아래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잠재적인 반대 경향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상유지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한편, 두 모델 사이의 혼합이 일어날 것입니다.

씰베스터-브래들리: 협동조합들 및 플랫폼 협동조합들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영향을 받는 모든 일에 대해서 투표를 하게 되므로, 많은 협동조합들이 존재하는 사회가 대안적인 거버넌스 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협동조합들의 협동조합(a co-op of co-ops)이 가장 아래 수준까지 포함하여 결정이 이루어지게 만듦으로써 민주적 거버넌스를 보장하는 한편 어떤 규모로든 조직적 의무들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존의 제도를 대신하는 완전히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보웬스: 내 생각에 우리는 획일적인 제도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런 제도들에서는 만일 어떤 것이 잘못되면 복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가 러시아에서 (러시아 혁명 중에) 의회의 폐지에 반대하여 했던 주장입니다. 그녀는 노동자평의회가 잘못되었을 경우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다른 힘이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녀의 주장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당신이 서술한 모델은 내 생각에 로자바[시리아 북부에 있는 쿠르드인의 사실상의 자치지역―정리자]에서 실험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 협동조합 모델은 사유재산 혹은 ‘노동자 자본주의’로 기능하기 쉽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린 협동조합 모델을 강조합니다. 이 모델에서는 협동조합들이 그들 나름의 법적 의무를 통해 ‘커먼즈’의 형태로 공통재의 생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협동적 민주주의가 다른 것들과 함께 공존하면서 제도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복수(複數)형 민주주의 모델을 선호합니다.

씰베스터-브래들리: 그러면 당신 생각에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가장 실천적인 방식은 시민들이 해결책을 제안하고 공유된 관심사를 중심으로 (물리적 커먼즈든 디지털 커먼즈든) 조직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대표자들이 더 나은 결정을 하리라는 희망에서 기존의 ‘대의 민주주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인가요?

보웬스: 아니요,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어떤 엘리트가 우리를 다스릴 것인가를 정하는 선거와 같은 것이 아니라 맨 먼저 우리의 삶에 통합된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선거를 의미하는 단어 ‘election’과 엘리트를 의미하는 단어 ‘elite’는 같은 어원[라틴어 ‘eligere’―정리자]에서 나왔으며, 그리스인들은 선거를 귀족적 원칙으로 보았고 추첨을 민주적 원칙으로 보았습니다.) 공동체들이 고유한 규칙과 규범에 따라서 공유된 자원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의된 커먼즈가 삶에 통합된 실천을 성취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배우고 일하면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것이죠.

대의 민주주의는 광범한 지형과 기능 단위들을 포괄하기 위해 존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의제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한계점에 와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기술로 대의제를 증대시키고 실험할 때이며, 여기에는 참여와 토의를 통한 유동적 피드백, 추첨 등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존 헤론(John Heron)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도덕적 통찰의 등급에 뿌리를 둔, 적어도 네 등급의 문화발전이 있는 듯하다.

(1) 권리를 제한되고 억압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며 정치적 참여의 권리는 없는 독재적 문화,

(2) 대의를 통해 정치적 참여를 실천하지만 모든 다른 영역―연구, 종교, 교육, 산업 등―에서의 의사결정에는 민중이 참여하지 않거나 매우 제한되게만 참여하는 협소한 민주적 문화,

(3) 정치적 참여를 실천하고 광범한 다른 영역들에 각기 다른 정도로 참여를 실천하는 광범한 민주적 문화,

(4) 모든 사람이 인간 활동의 모든 분야에 참여할 권리를 동등하게 가지는, 자유로운 풍요 지향의 전지구적 네트워크에서 보이는 커먼즈 p2p 문화.”

헤론은 다음과 같이 덧붙입니다.

“이 네 등급의 문화는 위계, 협동, 자율 사이의 관계로 제시할 수도 있다.

(1) 위계가 협동과 자율을 규정하고 통제하고 제한한다.

(2) 위계가 정치적 영역에서만 협동과 자율에 일정 정도 권한을 내준다.

(3) 위계가 정치적 영역에서 협동과 자율에 일정 정도 권한을 내주고 그리고 또한 다른 영역에서도 협동과 자율에 각기 다른 정도로 권한을 준다.

(4) 위계가 하는 역할이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협동하는 자율이 개시되고 계속적으로 개화하는 데서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는 것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