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 아래는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2016년 2월 25일 게시글 “Andreas Weber’s “Biology of Wonder”: Aliveness as a Force of Evolution and the Common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데이빗 볼리어의 블로그의 글들은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3.0 License가 적용된다.

 

안드레아스 베버의 “경이의 생물학” ― 진화와 커먼스의 힘으로서의 생동성

 

사오년 전에 안드레아스 베버를 만났을 때, 나는 다윈주의의 정통 견해들에 도전하는 그의 대담함에 놀랐다. 그는 매우 근본적이지만 아직 설명되지 않고 있는 현상인 ‘살아있음’(aliveness)을 과학이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삶(생명)이 세련된 진화하는 기계들의 집합이며 각자의 기계들은 자연이라는 자유방임적 시장에서 우위를 획득하기 위해 최대의 효율성을 가지고 무정하게 경쟁하고 있다는 신다윈주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 더 알고 싶으면 ‘살림’Enlivenment에 대한 베버의 환상적인 에세이를 참고하라.)[각주:1]

 

베버는 풍성한 과학적 연구 자료를 활용하여 진화에 대한 기존의 것과는 다른 이야기를 개략적으로 제시하는데, 이 이야기에서는 살아있는 유기체들이 (경쟁과 협동을 공히 행하는 투쟁의 과정에서) 본래적으로 표현적이고 창조적이다.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의 드라마의 핵심은 모든 살아있는 체계들이 자신들의 개별성을 펼쳐가면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표현하고 세계에 적응하려는, 그리고 세계를 바꾸려는 탐구적 노력이다.

 

몇 개의 에세이들과 대중강연들을 제외하면, 베버의 글들의 대부분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만 접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핵심적 아이디어들의 일부가 이제 영어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짜릿한 기쁨을 준다. 뉴쏘싸이어티 출판사에서 막 출판된, 그의 서정적이면서도 과학적으로 엄밀한 책인 『경이(驚異)의 생물학―생동성, 의식, 그리고 과학의 변신』(Biology of Wonder: Aliveness, Consciousness and the Metamorophosis of Science)을 읽어보기 바란다. (사실을 말하자면,[각주:2] 원래의 독일어 글을 베버가 직접 번역한 ‘원산 영어’를 개선하도록 베버를 돕는 데서 나도 좀 역할을 했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나중에 이 책을 생물과학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이론과 연구를 공고히 하고 설명하는 획기적 성취로서 돌아볼 것이다. 『경이의 생물학』은 로크, 홉스, 아담 스미스 같은 정치사상가들이 제공한 문화적 틀이 어떻게 생물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표준적인 다윈주의 생물학 서사가 어떻게 자연선택 및 기계로서의 유기체에 대한 생각들을 인간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투사했는지를 설명한다. 다윈주의와 ‘자유 시장’은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베버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이제는 바뀌고 있다.

 

19세기 이래 자연에서 정서를 축출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을 했던 생물학은 이제 감정을 삶의 토대로서 재발견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유기체들의 구조와 행동을 발견하고 싶은 열의로 인해 유기체의 내적 실재라는 문제를 얼버무려왔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유기체가 어떻게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산출하며 발달경로들을 해부하려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상상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수많은 새로운 세부적 사실들을 배우고 있다. 생물학자들은, 테크놀로지가 미시적 수준에서 삶을 연구할 수 있게 하면 할수록 삶의 복잡성과 지성의 증거가 더 강해진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기체들은 여기저기서 기계적 조각들을 모아 조립한 시계들이 아니다. 유기체들은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있으며 무엇이 자신들에게 좋고 나쁜지를 느끼는 통합체들이다.

 

진화의 거대 서사에서 감정, 정서, 도덕성, 심지어는 영성(靈性)(spirituality, 정신성)도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내버려져 있었다. 그런 경험들은 일반적으로 우주에서 벌어지는 주된 행위―진화를 진전시키는 냉혹한 수단인 추잡하고 무자비한 경쟁―에 비해 사소한 여흥 정도로 치부되어져 왔다. 실로 근대에 들어와서 ‘적자생존’이라는 생각은 ‘자유 시장 경제’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사고와 실질적으로 결합되었다.

 

베버의 과학자로서의 놀라운 주장은, 생물학이 살아있는 체계들을 마치 그것들이 유전적 청사진에 의해 (이러저러한 정도로) 추동되는 ‘작은 기계들’인 양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물학은 감정 자체의 연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베버는 말한다. 그러나 이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생물학이 먼저 계몽적 사고의 핵심적 전제들을 벗어던지고 살아있는 체계들을 다른 렌즈를 통해 보기 시작해야 한다.

 

현재 생물학은 분석의 주된 단위로서 개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명확한 인과관계 패턴을 찾는다. 생물학은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하는 우리의 소용돌이치는 내적 감정들, 의식, 의미 감각을 망각되어도 좋은 현상으로 본다. 비합리적이고 비가시적이며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감정들은 측정될 수 없고 합리성과 무관하기 때문에, 우주의 거대한 지리-물리학적이고 생-물리학적인 힘들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 책에서 베버는 “세포 수준에서 복잡한 인간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에서 주관적 감정이 근본적인 동력”임을 균형 잡힌 확신을 가지고 논증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인간을, 다소 설명 불가능하게 정신, 영혼 등으로 알려진 어떤 주체적 ‘x 인자’를 동반하는 생물학적 기계로서 이해해왔다. 그러나 이제 생물학은 주체성을 자연 전체에 걸친 근본적인 원리로서 발견하고 있다. 생물학은 박테리아 세포, 수정란, 저습지의 선충류(線蟲類)와 같은 가장 단순한 생명체들도 가치에 따라 행동함을 발견한다. 유기체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그것이 그들의 육화된 자아의 더 나아간 정합성에 대해 가지는 의미에 따라 평가한다. 고도로 구조화된 질서를 연속적으로 유지하는 세포의 자기생식조차도 우리가 세포를 목표를 지속적으로 좇는 행위자로서 인식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시점(視點)을 ‘시적 생태론’(poetic ecology)이라고 부른다. 감정과 표현을 유기체들의 실존적 실재의 필연적 차원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즉 단순한 부수 현상이라거나 인간 관찰자의 편견이라거나 아니면 기계 안의 유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들의 실재에서 우리에게 필수적인 측면들로 보기 때문에, ‘시적’이라고 부른 것이다.

 

삶에 접근하는 방식을―과학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다시 짜면서 이 책은 계시의 힘을 얻기 시작한다. 그는 접근 가능한 생물학 연구 보고들을 그 자신이 일인칭으로 풀어내는 통쾌한 이야기들과 결합시킨다. 늑대들, 깊은 숲 및 기타 자연현상들과 마주치는 이야기들이다. 독자는 깨닫기 시작한다. 당연하게도 근대정신의 이원론은 환원적이고 방향이 잘못 되었음을. 당연하게도 우리는 모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서로 그리고 인간 외부의 세계와도 또한 경험적이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소통한다는 것을.

 

베버는 자연 세계가 생물학적 기계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과학적 사실로서―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우리에게 청한다. 자연 세계는 살아있는 창조적 행위자들의 감각적이고 맥동치는 망(網)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떼어놓고 자연을 타자로서 따로 분리하는 정신적 경계들을 우리가 일단 녹여버릴 수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그리고 살아있는 지구와 항상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시작할 수 있다.

 

철학자 토머스 베리(Thomas Berry)는 이 점을 “우주는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주체들의 친교로 이루어져 있다”라고 잘 표현했다. 환경 윤리를 발전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책들을 입안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 핵심은 세상에 살고 있는 인류 자체를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 감정과 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 그것들이 생태론적으로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은 몇 가지 놀라운 결론들에 이르게 한다. 베버는 이렇게 쓴다.

 

만일 감정이 물리적 힘이고, 이 감정의 표현이 물리적 실재이며 이 실재의 의미가 유기체에게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이오영역(biosphere)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떤 점에서는 예술적 표현을 닮은 것으로 상상할 때 살아있는 존재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귀결이 나온다. 예술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며, 오히려 예술은 우리 안에 가득한 삶의 목소리인 것이다. 아름다움이 아무런 기능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메시지가 아니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실재의 본질이다······ 감정은 결코 비가시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의 모습을 띠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로서 발현한다. 따라서 자연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감정으로서,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 사이에 있는 살아있는 실재로서 간주될 수 있다.

 

이 논리는 우리를, 합리적 개인을 지고의 존재로 간주하는 계몽주의 윤리의 한계를 보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가진 신체들이 다른 마찬가지로 감정을 가진 신체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 그리고 살아있는 유기체들의 주관적 감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새로운 생태론적 윤리의 토대이다. “느끼는 신체가 모든 도덕성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모든 좋고 나쁜 것의 기원이다”라고 베버는 말한다.

 

『경이의 생물학』은 커먼즈에 대한 이해와 깊은 함축된 연관을 가진다. 만일 감정이 결코 비가시적인 것이 아니며, 자연 어디에서나 형태를 띠고 발현된다면, 그렇다면 커먼즈가 우리의 생동성(살아있음)을 재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길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상호관계를 더 해독 가능하게 만드는 길이며 전체(the whole)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길이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다.

 

생태론적 커먼즈에서는 상이한 개인들과 다양한 종들로 이루어진 다중이 서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경쟁과 협동, 동업관계와 약탈, 생산과 파괴. 그런데 이 모든 관계들은 하나의 상위법을 따른다. 길게 보면 전체 생태계의 생산성을 허용하며 그 자기생산을 차단하지 않는 행위만이 증폭된다는 법이다. 개체는 전체가 스스로를 실현하는 조건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다. 생태적 자유는 이런 형태의 필연성을 따른다. 체계 안의 연관들이 깊어질수록, 그 체계는 거기 속한 개체들에게 더 많은 창조적인 생태적 지위들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윤리는 이미 다양한 커먼즈들 내에서 작동하고 있다. 오픈소스 프로그램 GNU/리눅스의 한 버전인 우분투(Ubuntu)의 이름은 말 그대로 보면 ‘인간-됨’(human-ness)을 의미하는 반투(Bantu)어 단어에서 왔다. 그 정신은 또한 ‘우리가 있기에 내가 있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짧은 블로그 글로는 이 중요한 책의 풍요롭고 자극적인 통찰들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경이의 생물학』에는 매력적인 과학적 발견들과 베버 자신의 ‘바이오시적인’(biopoetic) 감성들이 가득하지만, 그는 자신의 학식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축축한 감상성으로 빠지지도 않는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과학의 옹호자이다. 일인칭 주체성의 중요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과학이다.[각주:3] 진지한 경험주의는 적어도 이만큼을 요구하는 것이다.

 

삶의 본성 자체에 대한 이 지극히 창의적인 명상은 시적인 동시에 과학적이다.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앞으로『경이의 생물학』이 우리의 육화된 자아들 내에 세워진 오해의 벽들을 허무는 일을 돕기를 바란다. ♣

  1. 이 블로그에 번역되어 있다. http://minamjah.tistory.com/86 그런데 베버의 에세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볼리어의 소개글이다. 베버의 에세이는 다음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http://www.boell.de/en/2013/02/01/enlivenment-towards-fundamental-shift-concepts-nature-culture-and-politics
  2. 볼리어는 사실 “full disclosure”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는 소프트웨어의 취약점 분석을 가능한 한 빨리 발표하는 것을 가리키는 컴퓨터 용어인데, 왠지 이런 맥락에서는 ‘깔때기를 대자면’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볼리어가 자신의 기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3. 볼리어나 베버가 어느 정도 이것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푸꼬가 말년에 한 철학 작업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가 ‘주체성의 일인칭 형태의 진실 말하기’이다